칭기즈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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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 선정 13세기의 인물
Time Person of the Century

칭기즈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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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태조(太祖)[1]

시호

법천계운성무황제(法天啓運聖武皇帝)

성씨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
(孛兒只斤 / 패아지근)

테무진(ᠲᠡᠮᠦᠵᠢᠨ)
(鐵木眞 / 철목진)

칸호

칭기즈 칸(ᠴᠢᠩᠭᠢᠰ ᠬᠠᠭᠠᠨ)
(成吉思汗 / 성길사한)

생몰 기간

1162년?[2] ~ 1227년 8월

재위 기간

1206년 ~ 1227년 8월


1. 개요2. 칭호3. 일대기
3.1. 어린 시절3.2. 고난의 세월3.3. 세력 확장3.4. 통일 전쟁3.5. 통일 전쟁 이후3.6. 대외 정복
3.6.1. 서하 원정3.6.2. 금나라 원정3.6.3. 서요, 호라즘 원정
3.7. 최후
4. 평가
4.1. 인재 중시4.2. 역사상 최강의 정복자4.3. 성격4.4. 세계 각국의 평가
4.4.1. 동양4.4.2. 서양
4.5. 총평
5. 가족 관계6. 이야기거리7. 이름 표기8. 어록?
8.1. 인터넷발 칭기즈 칸 어록
9. 여러 매체의 칭기즈 칸
9.1. 역사서, 소설, 만화9.2. 영화, TV9.3. 게임9.4. 그 외 매체

1. 개요[편집]

당신의 이 아들은 눈에는 불이 있고, 얼굴에는 빛이 있는 소년이군요.


― 데이 세첸 (칭기즈칸의 장인)


위대한 칸[3]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제국을 건설한 정복자

몽골 제국의 건국자.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진. 성이 보르지긴이고 이름이 테무진이다. 현대 몽골어로는 Боржигин Тэмүжин(Borjigin Temüjin), 한자로는 孛兒只斤 鐵木眞(패아지근 철목진)이라고 적는다. 몽골어로 철인(鐵人)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아버지 예수게이가 전투에서 쓰러뜨린 적 부족장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생전에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손자 쿠빌라이 칸원나라를 건국한 이후 태조라는 묘호를 받았다.

고려 충렬왕제국대장공주의 증조 할아버지이며, 충선왕계국대장공주의 5대조 할아버지이다.

여러 가지로 볼 때 현대 국가인 몽골의 시조. 칭기즈 칸의 통일 이후 '대(大) 야삭(ᠶᠡᠬᠡ ᠵᠠᠰᠠᠭ / Их Засаг)[4]' 이라는 사실상의 법률이 만들어지고 지배를 하면서 법전도 만들고 문자도 만들었다. 또한 세계가 놀랄 만한 군사적 업적을 통해 인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잔인한 정복자' 에서부터 '동서 문명의 교류를 촉진시킨 영웅'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평가를 받는 인물. 살기 위해 숱하게 전쟁하고 살아남고 전쟁하고 보니 거물이 된 양반이라 할 수 있다. 서양에선 자존심 때문인지 칭기즈 칸의 유럽 영토를 축소했지만 최근엔 다시 재평가 받는 듯. 특히 대항해시대를 열어서 서구가 지금 세계의 주류가 됐다고 보는 학자들은 "칭기즈 칸과 몽골의 등장은 세계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그래도 부정적인 사람들에겐 여전히 갈아 죽일 악당 취급을 받고 있다. 정확히는 러시아처럼 제대로 털린 나라는 싫어하는 편이고[5] 헝가리, 불가리아, 베트남 등 칸국들이나 원나라와 엎치락뒤치락 싸웠던 나라들은 내심 몽골을 막은 일에 프라이드를 느끼고 서유럽 같은 곳은 몽골인을 직접 대면하진 않았기 때문에 싫어한다기보단 군사에나 통달한 유목민 이미지가 박혀 있다. 영국인리처드 도킨스는 칭기즈 칸을 사이코패스의 대표적인 예시로 들었다. 가장 싫어하는 곳은 역시 직접 제대로 털린 서아시아다. 이쪽에서는 이름도 함부로 못 꺼낼 정도. 다만 아이러니하게 테무진 같은 몽골식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터키에서도 칭기즈, 아틸라 등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역사 관련 팟캐스트 진행자인 Dan Carlin은 몽골 제국 관련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나폴레옹이나 카이사르나 알렉산드로스나 대단한 업적을 남긴 위인으로 칭송받지만, 결국엔 자신의 권력을 위해 학살하고 약탈을 한 인간들이며, 그들이 남긴 '업적'들은 죄다 그 권력 다툼의 부산물"이라며 "칭기즈 칸이라고 그들보다 더 사악하다고 볼순 없다"는 식으로 얘기했다.[6] 실제 이렇게 칭기즈 칸이 나쁘다고 해도 그래봐야 다른 독재자/정복자와 본질적으로 같을 뿐 더한 인간이라고 볼 순 없다는 역사가들도 많다. 단지 너무 학살과 파괴를 잘 해서 문제였지.

여담으로 이상하게도 지배층과 다수의 유전자가 꼭 같을 것이라 생각하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유전자를 지닌 인물 중 하나이다.[7] 사실 지배적인 혈통이 수를 늘린 사례도 있지만 늘리지 않은 사례도 많다.[8]

2. 칭호[편집]

당시의 몽골어로는 '칭기스 칸'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 발음에 가장 가깝다고 하며,[9][10] 오고타이 칸 이후로는 '칭기스 카간', 13세기 후반 이후로는 '칭기스 카안' 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 현대 몽골어로는 발음이 '칭기스 하안'에 가깝다.

3. 일대기[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칭기즈 칸은 오늘날 몽골 동부 헨티 아이막(Хэнтий аймаг)[11]에 흐르는 오논 강 유역에서 몽골족의 한 갈래인 키야트 보르지긴[12] 씨족의 씨족장 예수게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호에룬은 올쿠누트 족[13]으로 원래 메르키트 족의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나 남편과 떠나는 도중에 예수게이에게 납치되어서 예수게이와 또 한 번 결혼하게 되었다.[14] 그가 태어난 날에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인 타타르족[15] 장수 테무진 우게의 이름을 따와서 이름을 테무진이라 하였다.(출처 : 몽골비사 1권 59절)

그러나 아버지 예수게이가 테무진을 데릴사위로 보낸 뒤 홀로 돌아오는 길에 적대적인 타타르 부족장들에게 독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16] 테무진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 친척들과 씨족 사람들 모두 떠나버렸다. 어찌나 차갑게 버림을 받았는지, 예수게이의 부하인 콩코탄의 차카라 노인이 떠나가는 부족 사람들을 붙잡으며 가지 말라고 하자 그대로 투두엔 기르테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테무진과 그 가족들을 저버리고 주르킨, 타이치우드로 가서 가문이 완전히 망해버려 남은 부족 인원이라곤 자신과 어머니, 형제들을 포함해서 성인 남성이 하나도 없이 고작 9명이 돼버렸다. 훗날 테무진이 자라서 부족을 버린 것을 보복할까봐 두려웠던 다른 부족장들은 테무진을 죽이기 위해 추격꾼을 풀었고, 때문에 테무진과 가족들은 초원을 떠나 숲 속과 산 속에서 숨어 살며 매우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지금의 남시베리아에서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9명이 추적자를 피하고 늑대 쫓아내고 고기 잡으며 살아야 했으니 그 고생은 엄청났을 것이다.(출처 : 몽골 비사 67절 ~ 75절)

이걸로 테무진이 예수게이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매정히 버렸다고 하는 견해도 있는데 그럼 테무진의 형제는 왜 버렸을까? 혈통 때문에 테무진의 가족을 버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몽골 비사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호에룬은 예수게이에게 보쌈당한 후 몇 년 동안 자식을 못 가졌다. 즉 나중의 주치의 사례와 달리 테무진이 메르키트 족의 아이일 수는 없다. 게다가 유전자 감식 같은 기법이 없는 고대 사회에서는 산달이나 다른 남자와의 접촉 등을 엄청나게 깐깐하게 따지기 때문에 조그마한 의심점이라도 생기면 계승권은 고사하고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다. 일례로 칭기즈 칸의 맏아들인 주치 역시 칭기즈 칸이 편의를 봐 줘서 일단 아들 취급은 받았지만 결국 모호한 출생 문제 때문에 계승권 다툼은 고사하고 먼 변방에서 병사했다.

이 아버지의 일로 인해 칭기즈 칸은 평생 타타르에 대한 원한을 가졌다. 물론 아버지를 살해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지만, 다른 측면도 작용했다. 몽골 초원에서는 '접대의 관습'처럼 아무리 적대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일단 손님으로 방문한 사람은 해치지 않고 후하게 대접하는 관습이 있었다. 예수게이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타타르 족을 만났을 때도 '설마 손님 자격인 나를 해칠까'라고 생각하고 잠깐 방심했는데, 타타르 족은 되려 이를 악용해서 손님으로 대접하는 척 하고 독살한 것. 차라리 대놓고 칼싸움을 벌여서 죽였다면 모를까, 이런 식의 뒤통수 치기는 당시 몽골의 풍습에서도 대단히 질이 낮은 행위였다. 그래서 칭기즈 칸은 타타르 족에 대한 원한이 유독 컸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예수게이의 서자이자 테무진의 이복 형였던 벡테르가 힘과 나이를 앞세워 테무진으로부터 가장의 지위를 빼앗으려 하였다.[17] 때문에 형제 간의 불화가 깊어졌고, 결국 테무진은 자신을 막대하려는 벡테르를 활로 쏴서 죽이고 말았다.[18] 가장의 지위를 지키려고 형제를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테무진은 다른 부족 사람들로부터 '자기 혈육을 죽인 살인자' 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더욱 경계를 받고 마는 처지가 되었다.[19] 이 일로 테무진은 타이치우드의 부족장 타르고타이 키릴투크[20]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갖은 학대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훗날 사준사구의 일원이 되는 티라운과 그의 형, 아버지 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였다.(출처 : 몽골 비사 2권 76절 ~ 88절)

3.2. 고난의 세월[편집]

천신만고 끝에 사지에서 도망쳐 나온 테무진은 얼마 후에 가족들의 말을 훔쳐 달아난 말도둑을 잡으러 갔다가 훗날 사준사구의 일원이 되는 보오르추를 만나서 인연을 맺었으며 그의 도움으로 말을 되찾아 오기도 하였다. 또한 어릴 적에 약혼한 보르테라는 여인와 재회하여 결혼하기도 하였다.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의 서약' 을 맺어 의형제[21]를 맺은 적이 있었던 케레이드 부족의 족장인 토오릴 칸[22]을 찾아가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선물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예를 맺음으로써 부족을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로써 세력을 키울 기회가 생긴 것 같으나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출처 : 몽골 비사 2권 96절)

옹 칸을 만나 세력을 회복한 듯 싶으나 테무진의 세력은 여전히 초원에서는 약자에 불과했다. 어느 날 메르키트 부족이 테무진의 부족을 습격하여 아내 보르테를 납치해가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때 테무진 가족들은 가지고 있는 말이 9마리여서 메르키트 족이 오는 걸 처음 발견한 노파와 벨구테이의 어머니, 그리고 보르테를 버려야 할 만큼 미약한 세력을 가졌었다. 당연히 테무진은 스스로 아내를 되찾아오는 일도 불가능했다.[23]

테무진은 옹 칸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자무카[24] 등의 도움을 받아 메르키트를 쳐서 복수하여 간신히 아내를 되찾을 수 있었다.[25] 문제는 아내인 보르테가 메르키트 족에게 붙잡혀있는 동안 메르키트 족의 장수였던 칠게르에게 겁탈당했으며[26] 칭기즈 칸이 구하러 왔을 때에는 이미 임신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때 태어난 장남 주치는 두고두고 '남의 씨앗' 이란 의혹을 받아 은근히 천대를 받았다. 다만 칭기스 칸 스스로는 주치를 자신의 장남으로 대우했고 후계자를 뽑으려 할 때도 제국을 주치에게 물려주려 했다. 오 대인배~ 그럼에도 주치의 출신 문제는 두고두고 후계자 문제에서 갈등을 빚었다.

아내를 되찾은 후에도 조금씩 부족 세력을 불려갔으나 여전히 테무진의 힘은 약했다. 일단 그 시작부터가 자무카의 부장 정도에 불과했으며 가문빨이 끝내주던 자무카와 달리 테무진 가문은 아버지가 독살당하던 시절에 부족민들이 배신하고 흩어져 버렸기 때문에 가문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의지할 데라고는 자기 자신과 부하들뿐이었던 것이다.

3.3. 세력 확장[편집]

메르키트 족의 습격은 테무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이때부터 그의 전사로서의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타타르, 타이치우드, 메르키트 같은 강한 부족과 만나면 죽는 비정상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테무진은 힘을 합쳐 메르키트를 무찌른 후에 잠시동안 자무카의 자다란 족에 몸을 의탁했다. 자무카는 성공적인 메르키트 토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자로 의형제 칭기스 칸이 아내를 뺏기고 군사가 한 줌도 없었던 시절에 2만의 군사를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르킨과 같은 왕족들도 있는 마당에 검은 뼈인 자신이 이들을 모두 다스리기엔 부담이 되었는지 테무진을 공동의 우두머리로 두는 과두정치를 행했다. 이 시절에 테무진은 부하라고는 혈통상 아무 관련 없는 보르추와 노예 출신 젤메였던 만큼 부하들을 혈통, 출신에 상관 없이 능력과 충성에 따라 대하였다. 이런 태도 때문에 테무진의 인기가 부족 내에서 날이 갈수록 올라갔고 자무카는 이를 경계해 테무진과 결별을 선고했다.[27] 결별할 때 자무카를 따르던 사람들이 테무진을 따라서 같이 갔는데 자무카를 떠나는 와중에 원수인 타이치우드 씨족을 만났다. 이때 타이치우드 씨족은 테무진이 자신들을 알아보고 해코지할까봐 황급히 떠났다. 자무카에서 갈라나온 테무진 세력이 (부족이 아닌) 씨족 중에 매우 강했던 타이치우드보다 강했다는 것은 자무카의 세력이 그만큼 강했으며(타이치우드를 제외한 몽골족을 거의 통일했을 가능성이 높다.) 테무진이 세력의 틀을 형성한 때가 자무카의 부장 시절이고 여기에 옹 칸의 공은 적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 자신을 지지하는 부족들에게 몽골 칸으로 추대되었다.[28] 그리고 그동안 자신을 따라준 장수들과 부하들, 형제들에게 관직을 나누어 주는 등 논공 행상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테무진 칸의 말을 지키던 말지기들이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는 말 도둑을 활로 쏘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문제는 그 말 도둑[29]이 자무카의 사촌 아우 다이차르였다. 이 때문에 자무카와 테무진 칸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테무진과 자무카는 각각의 세력을 13 쿠리엔[30][31]으로 구성해 13익의 전투를 벌인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테무진 칸은 참패를 당하고 살던 곳에서 밀려나 제레네 협곡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이 패배로 본인 직계 가족으로 이루어진 1익, 본인과 친위병으로 이루어진 2익을 제외, 친족으로 이루어진 11진영 중 8익을 제외한 나머지 진영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 이 후 기록에 10년의 공백이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후 금나라가 자카 감부와 테무진에게 옹 칸을 도와 타타르 족을 공격할 것을 명한것으로 보아 이 시기 칭기즈 칸이 금나라의 노예로 있었거나 금나라에 정치적 망명을 떠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후에 오로오드 족과 망고드 족[32]이 테무진 칸의 세력에 합류하게 되어 이를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테무진 칸의 키야트 보르지긴과는 같은 혈통에 속하는 주르킨 부족[33]이 행패를 부리자 테무진 칸이 화가 나서 술을 먹다 말고 이들과 패싸움을 하는 진풍경이 일어나기도 하였다(...)[34] 결국 싸움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테무진 칸이 주르킨 씨족 족장의 어머니(선대 칸의 부인들)를 인질로 잡고 협박한 끝에(...) 끝이 났다.[35] 이래저래 세력이 약해서 밀리는 형국에다가 같은 부족에 속하는 부족들마저 말을 들어먹지를 않으니 단단히 짜증이 난 모양이다. 나중에 술이 조금씩 깨자 어느 정도 적당한 선에서 화해를 하고 물러나지만 이후 앙금이...

이렇게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금나라 승상 왕경[36]의 요청을 받아 옹 칸과 함께 금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타타르 족을 정벌하게 되었다. 타타르 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테무진 칸은 오랜 숙적이었던 타타르를 무찌르고 타타르 족의 장수인 메구진 세울투를 잡아 죽이는 등 크게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다.

이 일로 공로를 인정받아 금나라로부터 백부장의 별 볼 일 없는 직위를 하사받았지만 이로써 테무진 칸의 세력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때 말을 듣지 않아서 술판에서 싸움이 났던 주르킨 족도 쳐들어가서 완전히 밀어버렸고 주르킨 족장 사차 베키도 잡아 죽여버렸다. 또한 이복동생 벨구테이의 어깨를 칼로 베었던 원수인 부리를 잡아 벨구테이의 손에 죽게 하였다.[37]

이후 테무진은 1197년 메르키트족을 공격하여 승리르 거둔 뒤 노획물 전부를 옹칸에게 보내며 옹칸의 세력을 회복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38] 세력이 회복된 옹칸은 1198년 테무진에게 알리지도 않고 메르키트족을 급습하고 그 노획물을 혼자서 독차지하였다. 이러한 옹칸의 욕심과 그로 인한 전리품 분배 과정의 인색함은 둘 사이의 불화를 싹트게 만들었다.

이후 양의 해(1199년) 테무진 칸은 옹 칸과 함께 나이만 부족을 정벌, 당시 내전중이던 타이 부카[39] 부이룩 칸 형제[40]를 동시에 공격한다. 먼저 테무진 연합군은 부이룩 칸이 다스리던 '키질 바시'를 공격한다. '케 켐치우트' 지역[41]으로 피신한 부이룩 칸은 부하인 '이디 투클룩'[42]을 파견하지만 테무진의 전초군대에 패배하고 투크룩 본인도 낙마해 사로잡힌다. [43]

그 뒤 같은 해 겨울 테무친과 옹 칸 연합군은 '바이타락 벨치레'라는 지역에서 '부이룩 칸'의 부하 '쿡세우 사브락'[44]과 대치하는데 전투를 계획한 바로 전날 밤 갑자기 '옹 칸'은 주둔지의 불을 피워둬 '테무친'을 속인뒤 밤중에 군대를 철수, '웁치리타이 쿠린 바하두르' 등이 '옹 칸'의 철수를 만류햇지만 '옹 칸'은 결국 '타탈 토쿨라' 지역으로 도주한다. [45] 다음날 '옹 칸'의 도주를 안 테무친은 "옹 칸이 나를 재난과 화염 속에 던지고 혼자 도망치려 했다"고 분노했고, 전황이 나빴기 때문에 테무친도 '사리 케헤르' 지역으로 철수한다. 테무친 연합군이 철수한 것을 안 '쿡세우 사브락'은 반격을 시작, 먼저 옹 칸을 뒤쫒아 가던 옹 칸의 두 동생 '닐카 셍쿤'과 '자아 감보'의 군대를 '이데루 알타이' 지역에서 급습하고 그 뒤 옹 칸의 울루스(의미 추가바람)가 있는 '달라두 아마사라'를 공격 '옹 칸'의 백성들과 재산 가축등을 노획한 뒤 '옹 칸'의 본진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정벌했던 메르키트 족이 쿠두와 칠라운을 중심으로 옹 칸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나라가 안밖으로 쑥대밭이 되고 자기 목숨까지 위험해지자 결국 '옹 칸'은 얼마전에 배신했던 '테무친'에게 사자를 보내 "내 자식(양아들로 삼은 테무친)에게 4마리 준마[46]를 청하노라"라는 내용의 구원요청을 보내고 '테무친'도 이에 응해 4명의 장수를 구원군을 보낸다. '옹 칸'은 부하 '티킨 쿠리'와 '이투르겐 얀다쿠'가 전사하고 아들인 '셍군'마저도 부상당해 몰살당할 상황에서 테무친의 구원군이 도착해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옹 칸'은 테무진 칸에게 잘못을 빌면서 자신의 아들인 셍굼과 테무진 칸을 서로 의형제를 맺게 함으로써 상황을 간신히 무마시켰다. 그러나 이때부터 테무진 칸과 옹 칸의 사이는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옹 칸은 이때부터 테무진 칸을 두려워하며 이를 제거할 마음을 품었던 것 같다.

원숭이해(1200년) '테무친'은 '옹 칸'과 '사리 케헤르' 지역에서 '쿠릴타이' 회의를 개최한다. 라시드의 기록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옹 칸'은 테무친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우수 노얀'이 견재해서 실패했다고 한다. 그 뒤 '테무친'은 '우수 누얀'을 자신의 부족인 '바아린 부족'의 만호 직위를 주었다고 한다. '쿠릴타이' 회의 직후 '테무친'과 '옹 칸'은 '타이치우드' 부족을 공격한다. 테무친 연합군은 타이치우트 군대와 '오난' 초원에서 전투해 승리한다. '타이치우트'의 패배 이후 이들과 친하고 반대로 테무친을 적대하던 '카타킨'과 '살지우트' 종족은 다른 '타타르', '두르벤', '쿵크라트' 족을 모아 '테무친', '옹 칸'과 전쟁을 하기로 서약하고 연합군을 만든다. '테무친'은 '세첸'의 밀서로 이 연합을 파악하고 다시 군대를 모아 부이르 나우르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이후 1201년 구르 칸으로 추대된 자무카가 자다란, 타타르, 타이치우드, 메르키트 연합군을 구성하여 공격해오자 함께 타타르를 정벌했던 케레이트의 옹 칸과 몽골 - 케레이트 연합군을 결성하여 쿠이텐[47]에서 맞서 싸워서 이겼다. 그러나 회전 승리 이후 타이치우드[48]를 추격하던 테무진이 적의 화살에 목을 맞아 피를 많이 흘려서 사경을 헤메게 된다. 다행히 사준사구 중 하나인 젤메가 밤새도록 테무진 칸의 피를 입으로 빨고 뱉으며 지혈해주고[49] 적진으로 들어가 말 젖을 훔쳐와 마시게 함으로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테무진은 이후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는 제베를 거두어 들이게 된다. 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이 자신이 아끼는 말의 목을 쏜 녀석이 누구냐며 포로들을 심문하는데 이때 제베가 나서서 자신이 산 위에서 쐈다고 이야기 하였다. 솔직담백한 걸 좋아하는 테무진 칸은 '날(화살촉, 칼날 등을 총칭)' 이라는 뜻의 새 이름 제베를 하사하고 크게 기용했다.[50] 제베는 이후 몽골 제국의 원정에서 크게 활약하는데 유럽에서는 화살 백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집사에선 내용이 약간 다른데 타이치우트족이 패배한 후 도망친 제베를 포위한 후 보르추가 테무진에게 받은 말을 타고 제베와 일전을 겨뤘으나 제베는 말을 쏴 명중시키고 도망쳤다. 그러나 얼마 후 곤경에 빠진 제베가 투항하자 테무진이 그를 받아들였다.

3.4. 통일 전쟁[편집]

옹 칸과 함께 자무카를 꺾으며 초원의 강자로 거듭난 테무진 칸은 과거에 자신을 사로잡아 노예처럼 부리며 굴욕을 주었던 타이치우드 족을 섬멸하여 복수하고 타타르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여 전멸[51]시키는 등 강력한 세력을 떨쳤다. 이 때 테무진은 완전히 승리를 거둔 후에 자신이 전리품을 나누어 줄 것을 이야기했다.[그] 이는 수령들이 자신들이 전리품을 약탈하고 일부를 칸에게 바쳤던 유목민의 오랜 관습과 어긋나는 것이었기에[위] 불만을 품은 알탄과 쿠차르라는 귀족과 테무진의 숙부 다이타르가 이후 자무카에게 귀순하게 된다.

한편 테무진은 옹칸과 결혼동맹을 맺기 위해 주치와 옹칸의 딸, 자신의 딸과 옹칸의 손자를 결혼시키려 했으나 옹칸의 아들 셍굼이 이 제안을 거부하게 되면서 옹칸과 테무진 사이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자무카, 알탄, 쿠차르 등은 셍굼과 연합을 했고 셍굼은 아버지를 설득, 결국 옹칸과 테무진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옹칸은 혼인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거짓말을 한 후 갑작스럽게 배신을 하고 몽골족을 급습하였다.[54] 옹칸 연합은 칼라카지트에서 테무진의 군대를 격파하였고[55] 테무진 칸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였다. 쿠일다르와 주르체데이의 분전과 셍굼의 부상 덕에 완전한 궤멸은 면했지만 그 피해는 심각하여 이후 점검을 한 결과 병사의 숫자가 2600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발주나 호수에서 19명의 지휘관들과 함께 서로의 충성과 신의가 계속 될 것이라는 맹약을 하고 호수의 흙탕물을 들이킨다.

이후 테무진은 발주나에서 자신의 세력을 회복하며 옹칸, 셍굼, 알탄, 쿠차르, 자무카 등에게 서신을 보내 이들을 이간질시키고 약화시키려 하였다. 효과가 있었는 지는 모르지만 자무카는 옹칸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나이만으로 도망치게 되었고 자무카에게 속해있던 다이타르를 비롯한 일부 몽골 부족민, 그리고 이 때 옹칸의 처신에 실망한 케레이트 부족민들이 테무진과 연합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던 중 테무진의 동생인 카사르가 발주나에 도착하자 테무진은 이를 이용하여 카사르의 이름으로 옹칸에게 항복한다는 서신을 보내었다. 옹칸은 이에 속아넘어가고 테무진은 무방비 상태로 연회를 하던 중인 옹칸을 밤중에 급습하였다. 케레이트족은 끈질기게 사흘동안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옹 칸과 그 아들인 셍굼은 그야말로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다.[56]

이렇게 중앙 몽골 고원의 최강 세력이었던 케레이트를 꺾은 테무진 칸은 서부 몽골 고원의 최강 세력이었던 나이만 족 또한 공격하여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크게 이겼으며 자신의 아내를 납치한 원수 메르키트 족[57]도 재차 공격하여 복수함으로써 몽골 초원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나이만에 가서 붙어있던 자신의 친구이자 숙적이었던 자무카의 세력을 완전히 꺾어서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자무카는 대여섯 명 정도의 부하들만을 데리고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 도적 생활을 하던 중에 부하들에게 배신 당하여 테무진 칸 앞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테무진 칸은 자무카를 끌고 온 자무카의 부하들을 비겁하다고 모조리 처형시켰다. 그리고 자무카에게 자신과 함께 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자무카가 명예로운 죽음을 원하자 피를 보지 않고 죽도록 해주었다.[58]

이렇게 케레이트, 나이만, 자무카 등을 비롯한 모든 숙적들과 싸워 이긴 테무진 칸은 몽골 초원의 명실상부한 독자 세력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통일 전쟁을 마친 1206년 소집한 쿠릴타이(몽골 지역의 대족장 회의)에서 몽골 제국을 세우고 칭기즈 칸의 자리에 오른다.[59]

3.5. 통일 전쟁 이후[편집]

몽골을 완전히 통일한 이후 칭기즈 칸은 부족 내부 문제를 해결하고 법과 질서를 바로잡으며 무엇보다도 칸의 귄위와 권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그동안 입은 피해를 회복하고 힘을 보충하는 데 주력하였다.

칭기즈 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칸 못지 않은 권력을 지녔던 무당[60]을 처형한 것이다. 칭기즈 칸은 몽골 고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무당의 신탁을 선전용으로써 곧잘 써먹었다. 그런데 샤먼 텝 텡그리가 자신의 동생 카사르를 구타해 카사르가 칭기즈 칸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카사르에게 '평소에 잘난 척 하더니 뭔 소리냐'하는 식으로 냉대하자, 토라지고 만다. 이에 텝 텡게리는 카사르가 위험하다며 제거를 종용하였고, 칭기즈칸은 카사르를 문책한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 호에룬이 '같은 젖 먹고 자란 놈이 쌈박질이냐?' 라는 식으로 상반신 노출 시위를 하며 다그치자, 칭기즈칸은 부끄러워하며 카사르 문책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어머니 몰래 카사르의 백성을 빼앗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제 테무게 옷치긴 역시 텝 텡게리에게 모욕을 당하고, 하소연하였다. 그러자 부르테가 "당신이 살아있는데도 횡포가 이러한데 당신이 죽으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어요?" 라고 말하니, 그제서야 동생들의 말을 들어준다. 결국 칭기즈 칸은 무당을 체포해서 등뼈를 끊어버리는 형벌을 내려 죽여버렸다. 이때 무당을 죽이고 길을 나서던 칭기즈 칸은, 텝 텡게리의 여섯 형제들에게 위협적으로 둘러싸였으나, "비켜라, 나가야겠다!" 라고 말한 뒤 그들을 뿌리치고 나왔다. 이후 몽골에서 칭기즈 칸에 대적하는 자는 없었다.[61][62]

이 갈등은 정치적 지도자인 칭기즈 칸과 종교적 지도자인 무당 간의 권력 싸움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료를 살펴보면 애초에 이 당시 샤먼들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간섭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샤머니즘 신앙은 당시 몽골 고원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고 있었고 샤먼은 이 환경에서 특수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담당한 직능 즉 치병, 예언 등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힐책당하거나 살해당하기까지 하였다. 텝 텡게리가 통상적인 샤먼들 가운데서 왜 유독 튀는 존재였는지 생각해보면 다른 정치적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가 살해된 것 역시 정치적인 힘 싸움의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몽골 통일 이후 글도 없었던 상태에서 나이만 족의 재상이였던 타타통아에게 몽골 문자를 만들도록 지시함으로써 오늘날 몽골 문자의 기틀을 잡았다. 이 몽골 문자로 몽골 역사서를 기록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원조비사다. 현재는 몽골 문자(위구르친 몽골문)로 기록된 것은 전해지지 않고, 한자로 음사한 것이 전해진다.

또한 몽골 초원의 모든 부족들이 지켜야 할 하나의 공통된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이는 곧 '야샤' 라는 법전으로 성문화하였다.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고려를 포함해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특징으로는 처벌이 강한 편으로 금지 행위의 대부분이 사형으로 끝난다(...). 그 내용은 대개 몽골의 낡은 풍습이나 악습 등을 폐지, 개혁하며 오래 전부터 초원에서 생겨났던 크고 작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 야사는 관습법적 측면도 강했는데 불에 칼을 대는 행위, 문지방을 밟는 행위, 물에 손을 담그는 행위, 동성애 등을 엄격히 금지하고 어길시 처형했다. 또 초원 사람들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신부나 신랑을 NTR 강탈해가지 못하도록 법률로 금지한 반면 지참금 제도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었다고 한다. [63] 유목민으로서의 전통을 잃지 않기 위해 이슬람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도축 방법을 고수할 것을 명시했고 유목민답게 수간을 금하거나 말을 훔친 자는 9마리로 배상하고 배상할 수 없으면 자식을, 자식들도 없으면 자기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반대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등 선진적인 조항도 있었다고 한다. 칭기스 칸 자신도 이 야사를 어기지 않았으며 공통 문자와 법률의 제정은 몽골 내부의 통치를 튼튼히 하고 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초석이 되어주었다.

경제 체제도 개혁하여 유목과 수렵에 의존하는 대신 상업을 발달시키려고 했다. 그에 따라 교역로를 개발하고 주위에 존재한 나라들과 교역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하서요, 호라즘 왕국 등의 외국들과 접촉하지만 곧 여러 가지 이유로 충돌이 발생하여 교역로가 침략로로 변하였다(...) 결국 원할한 교역로를 닦으려는 노력이 전쟁으로 변하게 되어버렸다는 것.

3.6. 대외 정복[편집]

본격적인 정복왕 일대기의 시작.

위에서 설명했듯이 칭기즈 칸은 본래부터 세계 정복이 아닌 교역을 원활히 하려고 노력했다. 호라즘 왕국이 거부해서 밀어붙이다보니 서쪽까지 마구 가버리게 된 것이다. 다른 가설로 몽골족은 원래 서로 싸우다가 막 통일된 상태라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밖으로 원정을 나갔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는지 생각해보면 쉬울 듯. 원래는 북중국과 서요[64] 정도로 만족하려고 했지만 호라즘 왕국 때문에 일이 더 커지게 되었다고도 보기도 한다. 실제로 칭기즈 칸의 경우 연경을 포위한 후에도 정치적인 복속과 조공품의 상납만 받고 초원으로 돌아가는 등의 행태를 보아 본인이 '정복'에 큰 욕심을 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의 원정은 정복이 아니라 대부분 응징과 복수를 명분으로 하면서 동시에 재정적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우구데이 카안부터 사용하게 된 '카안'이라는 칭호와 구육 카안의 서한 등을 보면 아무리 빨리 잡아도 칭기스 칸 말년, 일반적으론 우구데이 카안 시절이 되어야 정복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한편으론 칭기즈 칸이 본격적으로 "칭기즈 칸"의 호칭을 얻으면서부터 자신들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상에 빠져 있어 그것이 외교에 영향을 줘서 침략을 하게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칭기즈 칸이 정복한 대외 영토가 워낙 넓은지라 평생을 대외 정복에 힘 써온 것으로 착각하는 이가 많은데 실제 칭기즈 칸은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몽골 통일에 썼고[65] 대외 정복에 힘을 기울인 시기는 채 20년도 되지 않는다.[66] 고작 20년의 세월 만에 이러한 엄청난 성과를 얻은 것. 만일 부족이 일찍 통일되어 젊었을 때부터 정복 활동을 시작했었더라면 어떤 식의 세계 정복을 역사에 남겼을지는 상상만 해도 대단하다.

3.6.1. 서하 원정[편집]

몽골 통일을 마치고 제도를 정비하며 힘을 키운 칭기즈 칸은 가장 먼저 탕구트족[67]이 세운 서하를 침략하면서 대외 정복을 시작하였다. 교역로를 닦으려는 목적도 있지만 서하에 칭기즈 칸과 싸워서 패한 나이만족의 세력들이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3차례에 걸친 전쟁 동안 서하군은 우수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산개 전술을 펼치는 몽골군에게 참패를 면치 못하였다.[68][69] 몽골 군대는 쳐들어올 때마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약탈을 일삼아 서하인들에게는 죽음의 사자와도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결국 몽골군은 서하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서하 수도 영하(현 인촨)를 포위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공성전 경험이 부족해서 이래저래 난항을 겪었다. 둑을 지어서 황하 물줄기를 돌려 영하를 물에 잠기게 하려는 작전도 펼쳤지만 몽골인들이 물줄기를 다루는 법에 무지해서 되려 수해를 겪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수도가 포위당한 상황에서 급한 쪽은 서하였고 국왕 양종은 금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결국 오랜 대치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1207년, 칭기즈 칸에게 딸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3.6.2. 금나라 원정[편집]

몇 년 후인 1211년, 칭기즈 칸은 금나라 침공을 감행하였다.

북중국을 지배하며 남송과 대치하고 있었던 금나라는 과거에 칭기즈 칸의 증조부 안바가이 칸을 사로잡아서 목마에 못박아 죽인 일이 있었다. 따라서 칭기즈 칸에게 금나라는 조상의 복수를 위해 반드시 꺾어야 할 원수였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금나라가 대대로 북방의 유목 민족들에게 서로 싸움을 붙여 견제해왔는데[70]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하자 이를 경계하고 나섰으므로 불가피하게 이들과 싸워야 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몽골군이 금나라를 침략하자 거란족들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이 과거에 거란족에게 쌓인 원한이 있어 이들을 박해하였기 때문이었다. 몽골족과 거란족 연합군은 거용관 부근의 야호령에서 금나라 총사령관 완안승유의 40만 대군과 맞붙어 이들을 크게 격파하고 만리 장성 부근으로 밀고나갔으나 역시 공성전에는 익숙하지 못하여 관문을 돌파하고 화북으로 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71]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기즈 칸은 후주(도시 이름)를 점령하고 이어서 거용관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72] 들어가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오늘날의 북경)까지 공격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금나라의 동경 유수(요양 태수) 포선만노가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동진국을 건국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 결과 금나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금나라 선종은 칭기즈 칸에게 화의를 청하여 마침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칭기즈 칸이 받아들여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챙겨 철수하였다. 그러나 선종이 수도를 중도에서 개봉(오늘날의 카이펑)으로 옮기자 칭기즈 칸은 금나라 황제가 변심을 했다고 여겨 다시 한 번 중도를 포위 공격하였다. 그동안 중국의 단단한 성벽들을 공격하면서 단련된 몽골군은 능숙하게 공성전을 수행해나갔고 오랜 포위에 지친[73] 중도는 방어 사령관 완안복흥이 자살함으로써 끝내 무너졌다. 성을 함락한 몽골군은 중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엄청난 약탈을 하고 돌아갔다.

이 무렵에 칭기즈 칸은 당시 요나라 왕족 출신의 금나라 관리였던 야율초재를 등용하였다. 실무와 정치에 능한 야율초재는 이후로 몽골 제국 내정을 다듬는 데 일조하였다. 본래 칭기즈 칸은 금나라 땅을 점령한 후에 그곳에 살던 농민들을 모두 죽이고 모든 땅을 가축을 키우기 위한 방목지로 개간할 생각이었으나(...) 야율초재의 조언에 따라 점령지의 농민들을 죽이지 않는 대신 조세를 거둬들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3.6.3. 서요, 호라즘 원정[74][편집]

이후 칭기즈칸은 서요로 도망간 나이만의 왕자[75] 쿠출루크를 사로잡기 위해 서요로 진격한다. 당시 서요의 상황은 안습 그 자체였는데[76] 서요의 말제[77] 야율직로고는 쿠출루크를 크게 신뢰해서 자신의 부마로 삼는 등 환대했다. 그러나 쿠출루크는 야율직로고가 호라즘을 응징하려[78][79] 군을 일으켜 원정을 간 사이 모반을 일으켜 서요 본국을 장악한 후 야율직로고를 폐위시킨 후[80] 오히려 자기가 왕위에 오르는 은혜도 모르는 행동을 저지르고 만다. 그런데 쿠출루크는 왕위에 오른 뒤 선정을 베풀기는커녕 오히려 이슬람교를 탄압하는 등의 학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서요 백성들의 원성이 드높았다.[81] 당시 칭기즈 칸은 쿠출루크를 처리하기 위해 서요로 들어갈 방법을 고심하고 있었는데 이는 침략의 좋은 구실이었다. 칭기즈 칸은 대군을 동원해 서요를 침공하였는데 쿠출루크의 학정에 지친 서요 백성들은 오히려 침략자인 칭기즈 칸을 반갑게 맞았다. 결국 쿠출루크는 칭기즈 칸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칭기즈 칸은 쿠출루크를 잡아죽였다.[82] 거란족의 마지막 왕국 서요는 끝내 멸망한다.

칭기즈칸은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중동의 새로운 강자로 군림하던 호라즘 왕국과 교역을 하기 시작하였다.[83]

그러나 칭기즈 칸이 호라즘에 보낸 사절단이 오트라르 성의 성주인 이날축에게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호라즘과의 관계는 차츰 험악해졌다. 이후에 칭기즈 칸이 사과를 요구하는 전령을 보냈으나 사절단을 해친 이날축은 국왕 호라즘 샤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았다. 사과를 받으러 갔던 전령들은 되려 수염이 깎인 채로 돌아오는 수모를 겪었다.[84]

이에 격노한 칭기즈 칸은 친히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 원정을 떠났다. 당시 쇠퇴한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짧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호라즘 왕국은 40만에 달하는 대군을 거느린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러나 몽골군 역시 그동안 많은 실전을 통해 발달한 전략과 전술을 터득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의 성곽을 공략하면서 공성전 경험을 충분히 쌓은 상태였다. 몽골군은 뛰어난 기동력을 앞세워 순식간에 오트라르 성을 무너뜨리고 내지로 진입하여 호라즘 전 국토가 몽골인들의 말발굽에 탈탈 털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오트라르 성이 함락된 후에 몽골 사절단을 죽였던 이날축은 양쪽 눈에 쇳물[85]을 붓는 형벌을 받아 죽었다.[86]

크게 참패한 호라즘 샤는 모든 것을 잃고 카스피 해의 작은 섬으로 들어가 숨어있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으며 수도인 부라하가 함락당하면서 그의 아들들은 몰살당하였다. 또한 이날축의 처벌을 반대했던 호라즘 샤의 어머니 테르켄 카툰은 수도가 함락된 후에 몽골군에게 끌려가서 몽골인들의 하녀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은 호라즘 샤의 첫째 왕자 잘랄 웃 딘은 끝내 생포하지 못하였다. 칭기즈 칸은 달아난 잘랄 웃 딘을 추격하여 그가 숨어있던 사마르칸트까지 박살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랄 웃 딘은 기여코 몽골군의 추격을 따돌려 인도 인접 지역까지 달아나서 끝까지 대항하였다. 호라즘에 치를 떨던 칭기즈 칸도 잘랄 웃 딘만큼은 높이사고 인정해줬다 한다.

그리고 몽골은 끝까지 인도를 정복하지 못하고 서아시아로 전력을 집중했다. 심지어 인도는 후에 차가타이 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3.7. 최후[편집]

호라즘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칭기즈 칸은 얼마 후에 서하를 완전히 정벌하기 위해 직접 출정을 감행하였다. 몽골군이 오랫동안 원정을 위해 몽골을 떠나있는 동안에 서하가 칭기즈 칸의 물자 지원 요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몽골 영토를 침입해왔기 때문이다.[87] [88]

그러나 서하 원정 도중에 칭기즈 칸은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사고를 당했을 당시의 칭기즈 칸은 이미 나이가 60세가 넘은 노인이었기 때문에 낙마 사고는 굉장히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원조비사에 따르면 이후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칭기즈 칸은 점차 병이 깊어져서 죽음을 눈 앞에 둔 와중에도 끊임없이 서하 정벌을 지시하였다. 당시 서하의 왕은 말제 이현이었고, 재상은 야사감푸였다. 그들은 수도가 함락되어 칭기즈 칸의 앞에 끌려오자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야사감부는 칭기즈 칸에 대한 욕을 한 뒷담화를 깐 적이 있기에 용서받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참수되었고[89] 이현의 왕비는 겁탈당했다. 결국 칭기즈 칸은 기어코 서하의 탕구트족을 개발살내었고[90], 1227년에 삼남 오고타이를 제국의 후계자로 임명하고 몽골로 귀환 중 서하 부근의 육반산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그리고 같은 해에 서하도 완전히 멸망한다. 죽어가면서도 서하인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해 현재까지도 서하인들의 후손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91]

칭기즈 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금나라의 성들이 단단하니 남송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해서 남쪽에서 공략하라" 라는 말을 유언으로 한다. 칭기즈 칸이 죽은 후에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받들어 황하 이남의 개봉(현재 카이펑)에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금나라를 남송과 함께 공격하였다.[92] 결국 금나라는 마지막 황제인 말제 완안승린이 금나라 애종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은 지 하루 만에(...)[93] 몽골군에 잡혀죽음으로써 1234년에 완벽히 멸망하였다.

칭기즈 칸의 최후는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낙마설이 대표적이다.

4. 평가[편집]


이후에 나오겠지만 평이 아주 많이 엇갈린다. 위의 영상은 TED에서 이에 대해 다룬 강의.

몽골인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문명들인 이슬람, 중국, 유럽 문명과 달리 자신들은 기록을 남기는 데 관심이 없던 유목민이었으니, 남들 입장으로만 역사가 기록되어 나쁜 놈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당시 몽골 민족들은 심리전의 일환으로 자신들을 나쁜 놈으로 표현하는 데 능숙했다고 하며 이것이 그대로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는 계급 폐지[94], 종교의 자유 보장[95], 약탈혼 금지, 인종차별 금지[96] 등등 지금 관점에서 보기에는 상당히 훌륭한 정치를 펴기도 했다.

다만 위에 언급한 제도적 개선이 다른 민족, 다른 지역에는 기존 지배층을 다 잡아 죽이고, 종교 질서도 다 뭉개놓고, 우리 모두 평등이란 식이어서 토착민들의 입장에서 몽골인 정복자들에 대해 증오심과 혐오감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유목민족인 그들은 기록을 거의 하지 않으니, 아무래도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입장에 근거한 기록들로만 추정하였으니 좋은 소리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협박같은 것도 많이 했으니... 하여튼 이 통에 네스토리우스교가 덕을 많이 봤고 이는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퍼져나가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4.1. 인재 중시[편집]

통일 전쟁 과정에서 자무카와 다른 적들은 칭기즈 칸 가문을 얼마나 조롱했던지[98] 칭기즈 칸은 정복한 땅의 귀족에게 혹독한 편이었다.

사실 칭기즈 칸이 일생에 걸쳐 가문이나 부족보다는 스스로 얻은 '인재'를 믿은 편이었다. 친척이라는 사람들은 그를 자주 배신했지만[99] 혈연 없이 맺어진 관계는 끈끈했고[100][101] 이 때문에 가족보단 다른 사람을 더 믿는 때도 있었다. 타타르족 학살 후 테무르의 휘하에 있던 남은 타타르 부족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칭기즈 칸은 혈통으로 이어진 관계보다 자신과 부하들의 능력을 활용해 성공했기 때문에 핏줄빨로 먹고 사는 귀족을 낮게 본 것. 호라즘 왕국만 해도 왕인 무함마드 2세의 어머니 테르켄 하툰을 하녀로 만들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와 아내를 존중하며 잘 대접해준 것과는 차이가 난다. 물론 무함마드 2세의 어머니는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만했지만(호라즘 왕국 항목 참고). 이런 가차 없는 점이 서양에서 안 좋게 보는 이유 중 하나다.

4.2. 역사상 최강의 정복자[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enghis_khan_empire_at_his_death.png

칭기즈 칸 사망 당시 몽골 제국의 영토.

20세기 초까지 등장했던 어떤 정복자들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정복했다. 그야말로 인생이 정복. 많이 비교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경우에는 사실상 정복했던 영토 대부분이 거대한 대제국 하나를 흡수해서 얻은 영역이였고 죽자마자 제국이 4개로 갈라져 아들도 죽은 데 비해 어쨌건 칭기즈 칸의 후손들은 짧지 않은 백여 년간 나름대로 질서 있는 체계를 유지하며 세계제국을 경영할 수 있었다. 카이두의 난 이후로는 이런 질서도 무너져 가긴 했지만... 물론 알렉산드로스는 단순한 정복자를 넘어서 헬레니즘이라는 엄청난 문화적 업적을 잉태했기 때문에 평가가 훨씬 부드럽고 긍정적이다.

그리고 정복 영토의 경우 과거 카라한 왕조 등이 있던 서요 등의 지역은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는 영역에 비해 영토가 워낙 큰 편이라 지도를 그리면 엄청나게 커지는 점은 고려하는 편이 좋다. 칭기즈 칸이 직접 친정하여 물리친 호라즘의 경우는 확실히 그 위세는 절정기였지만 워낙 빠르게 복속이 된 탓에 '제국' 이라고 부를 만한 기반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를테면 아프가니스탄이 호라즘에 속한 건 몽골군이 쳐들어오기 4년 전이었고 서부 페르시아가 호라즘의 영역이 된 것 역시 칭기즈 칸이 진군하기 불과 3년 전이었다. 부하라사마르칸트는 호라즘에 속한 지 10년도 아직 되지 않았으며 사마르칸트는 수많은 기습과 학살이 벌어졌던 곳이었다. 호라즘의 영역이 확정된 것은 가장 빠르게 봐도 1217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부 기반을 다져야 할 상황에서 어그로를 끌어 몽골군이 쳐들어오게 했다는 게...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칭기즈 칸 시대에 중국 끝까지 다 밀어버린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있긴 있다. 칭기즈 칸은 금세종의 절정기 이후로 쇠퇴기에 접어들던[102] 금나라를 손봐주는 데 그쳤다. 다만 금나라의 경우는 호라즘과는 달리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되고 생산력 역시 강대한 나라라 꽤나 여러 번 공격을 해야 했고 결국 칭기즈 칸 시대에는 완전히 멸망을 시키지 못했다.[103] 이건 칭기즈 칸이 금나라를 공격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서쪽으로의 진군에 집중한 탓도 크지만.

여하간 다른 전선에 신경을 쏟았기 때문에 의외로 칭기즈 칸은 생전에 중국 땅에 그리 오래 있지 않았다. 칭기즈 칸 생전에 대 중국 전선을 주로 담당한 사람은 무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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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의 진격로.

칭기즈 칸 본인은 유럽 땅을 직접 밟은 적이 없지만 그의 명령하에 호라즘의 칸을 추격하던 수부타이제베가 카프카스로 빠졌다가 칼가강 전투에서 키예프 공국을 중심으로 뭉친 연합군을 발라버린 적은 있다. 이 전투로 러시아 공국들의 야전 역량이 뿌리채 뽑혀 이후 몽골의 서방 진군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각개격파당한다. 당시 러시아는 흔히 알려진 제국이 아니라 공국들의 연합체였다. 게다가 내부의 도시들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면 목책에 둘러싸인 마을이었고 나무를 많이 쓰다보니 몽골군 화공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이후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황금 부대에게 현 우크라이나 지역은 완전히 초토화되었으며 북쪽 도시 몇 개만이 살아남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몽골군이 발길을 돌렸던 당시 공화정이었던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세금 징수하던 모스크바다.

4.3. 성격[편집]

간단히 말해서 적에게는 무자비했으나 자신의 백성들에겐 대단히 자비로웠다. 지도자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베푸는 것이라고 하며 베푸는 걸 즐겼다. 인간적으로는 털털하고 때로는 소심하며 소박한 인물이었을지언정 한 번 폭발하거나 필요하다고 여기면 갈아버릴 땐 한 번에 갈아버리는 인물이었고[104] 그가 두 번 이상 직접 침공한 나라는 금나라 정도였다. 반란이 있을 것 같으면 아예 도시를 갈아버렸기 때문에 반란 가능성도 최대한 줄였다.[105] 항복해서 한 번 용서해주었더라도 반란을 일으키면 다 갈아버렸다. 그의 후손을 자처한 티무르가 같은 땅을 몇 번이고 침략해야 했던 데 비하면 칭기즈 칸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참고로 저런 말살 명령을 보면 은근히 비유적인 문구가 많다. 수레 바퀴보다 큰 남성은 다 죽이라거나 두 발로 걷는 것들은 다 죽이라거나...[106]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은 뛰어난 편으로 13익 전투,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 외에는 그는 패배를 당한 적이 없었다.[107] 기후 변화가 승리의 주요 요인으로 꼽히는 쿠이텐 전투에서조차 신속한 기동력을 이용해 유리한 지형을 점거하는 노련함을 보이고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는 횃불을 이용해 나이만을 속이는 등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고 특히 몽골 통일 이후에 그의 군사적 능력은 빛을 발휘하면서 금나라 정벌, 호라즘 정벌, 서하 정벌 등 자기가 지휘한 전투에서는 모두 승리를 거둔다.[108] 문맹인데도 불구하고 슬로-슬로-퀵-퀵 같은 몽골의 전략 전술을 짜낼 정도다. 비록 병법을 말로 듣고 어느 정도 모방하기는 했어도 성격도 잔혹해서 권력에 도전한 자는 벡테르든 아니면 자신의 성공을 예언했던 집단이든 가차없이 죽였다. 몽골의 전통적인 교육마저 제대로 받지 못해서 은근히 무시를 당하기는 했지만 자무카 같은 경우는 그를 진짜 괴물처럼 묘사했다. 이러한 군사적 재능과 괴로운 경험이나 고난을 겪으며 이를 이기는 인내, 긍정적인 성향, 이로 인해 당시 초원의 여타 지도자들이 제시한 바 없던 공평한 사회[109]의 비전을 지녔고 그것이 그를 승리하게 했다.

하지만 테무진 자신은 인간적으로는 강인한 전사 내지는 마초로만은 해석될 수 없는 부분이 주를 차지하는 남자였다. 인간적으로도 상당히 털털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세계 정복 프로젝트가 이뤄지던 말년의 죽기 며칠 전에 한 말이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게르(Ger, 몽골식 천막)에서 살다 평범하게 늙어 죽고 싶다" 라는 부분은 그의 안습한 전반기 인생 여정을 아는 이들을 슬프게 한다(...) 물론 자신의 악행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유언도 있다(...)[110] 이러한 테무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및 분석은 딴지일보에서 연재한 기획물 '테무진 to the 칸' 에 잘 녹아있다. 현재까지 나온 인터넷 연재물 중 칭기즈 칸과 몽골사 전반에 대한 가장 치밀한 분석이 담긴 연재물이다.[111][112]

몽골족 풍습을 죽을 때까지 따랐고 사치를 싫어했다. 자신을 높이는 형용사마저도 싫어하여 황족은 그를 테무진이라 불렀으며 공문서에도 그의 이름 앞에 다른 명칭이 붙는 것을 싫어했다. 각종 종교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 때문에 몽골의 풍습이 침식되는 것은 절대 바라지 않았다.[113] 이러한 태도는 현대 몽골인들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이며 그의 후손으로 몽골 제국의 중국화를 몇 단계나 가속시켰다고 평가되는 쿠빌라이 칸과 자주 비교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가 죽을 무렵 도교의 사제 장춘 진인(구처기)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때 그 자신에 대한 상세한 얘기를 했다. 칭기즈 칸 본인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적들이 사치스럽고 불경하여 승리한 것이라고 얘기했고[114] 본인은 사치를 싫어한다고 얘기했다. 그의 백성은 자식처럼, 능력 있는 자는 출신을 불문하고 형제처럼 대했다고 얘기했으며 그의 장군들과는 끈끈한 우애로 이어져 있다고 얘기했다.[115]

장춘 진인은 처음 칭기즈 칸을 만났을 때 칭기즈 칸이 살육을 멈추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은 그와 긴 시간 얘기한 뒤 그를 마음에 들어해서 그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편안히 가도록 조치를 취해주었으며 그로 하여금 중국의 도사들을 통제하도록 해주었다. 장춘진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자신을 따라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 카리스테네스가 아시아식으로 자신을 숭상하는 것을 거부하자 나중에 죽인 데 비해 칭기즈 칸은 장춘 진인이 칭기즈 칸의 저녁 초대를 거부하고 도사로서 술을 거부해도 그를 공경하며 대했다.

칭기즈 칸의 주전술은 심리전이었다. 대표적으로 일부러 마을들을 공격한 뒤 마을 사람들을 성 안에 몰아넣어 성 안의 식량이 떨어지게 만들어 스스로 공격하게 하는 것. 또한 몽골군에 대한 악명을 부풀려서 적들이 스스로 기게 만들었다. 이런 소문이 과장되어 중동 역사서에서는 나쁜 부분만 적히게 되었고 칭기즈 칸을 사이코패스로 보는 서양인도 존재. 타임지에서는 13세기의 인물로, 워싱턴 포스트도 칭기즈 칸을 지난 1000년간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으로 골랐지만 깡패라고 썼다. 반대로 19세기 유럽이 아시아를 야금야금 정복하는 일에 반발한 아시아인들 사이에선 칭기즈 칸을 영웅으로 보기도 했다(예로 인도 공화국의 네루). 물론 같은 아시아지만 고려 시대 때 누가 색목인이랑 우리랑 같이 봤겠어. 서아시아는 직접 갈렸기 때문에 유럽 이상으로, 아니 끔찍하게 싫어한다. 처음에야 살육만 했지만 원정을 하면서 도시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칭기즈 칸 본인은 고문을 법적으로 금지하고[116] 죽일 거면 그냥 죽이고 살릴 거라면 그냥 살렸다. 후일 구육 칸 때 구육 칸이 정치에 간섭한 여인 파티마를 죽이며 이 법을 깼다. 또한 살육으로 유명하지만 원조비사에서 호라즘 왕국 정벌시의 이야기에선 자신의 허락 없이 근접 국가를 공격한 부하에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죽일 땐 엄청 죽이지만 이유 없이 죽이지는 않은 것. 자무카를 잡았을 때도 자무카가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자 이유 없이 그를 죽일 수 없다고 해서 먼 과거에 있었던 일을 죄명으로 하고 죽였다.

참고로 선전포고 없이 쳐들어간 적은 없다. 선전 포고는 언제나 "내가 참작할 기간 줄 테니까 그때까지 항복해. 항복 안하면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니 기대해라" 라고 했고 이 말을 어긴 적이 없다. 물론 당연하게도 자신이 죽은 적도 없다.

몽골 통일 과정에서 점령한 부족과의 사이를 호전시키기 위해 그들의 여자들과 결혼하고 각 부족에서 찾은 아이들을 자신의 어머니로 하여금 입양하게 하여 자신의 형제의 위치를 주었다. 초창기(보르테를 되찾은 첫 전투부터 자무카와 결별하기 이전까지쯤)엔 아버지가 죽은 후 고생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에 따른 행동이었지만 나중엔 몽골 통합에 큰 도움이 되는 정치적 행동이 되었다. 또한 '우리는 모두 (의)형제' 라는 의식에서 반란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형이 애정으로 때리기 전에 얌전히 말 들어라, 동생아? 야율초재를 처음 만났을 때도 야율초재가 금나라에 멸망당한 요나라의 황족 출신임을 감안해 그를 대신해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얘기했다. (야율초재가 거부하긴 했지만).

야만스럽고 잔인하면서도 자신의 사람, 믿는 사람에겐 관대하며 친절한 사람이었다. 일단 장수를 채용할 때 제1조건이 바로 능력과 충성이었다. 자신에게 반항했던 첫 아들 주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며칠 동안 자신의 게르에 틀어박혀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자신의 친아들이 아닐지도 모르는 주치를 큰아들로서 사랑한 것만 봐도 인간적인 부분이 있는 사람인데 동양권에선 이 부분에 신경 쓰지만 당연히 서양권에서는 신경 안 쓴다...

적을 용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유일한 예외가 의형제였던 자무카. 자무카와 몇 번이고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무카가 자신에게 잡혀오자 그를 자신의 2인자로 회유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무카가 죽여달라고 간청해서 결국 피를 보지 않는 방식으로[117] 자루에 넣은 뒤 말발굽에 밟히게 해 죽이게 된다. 다만 자무카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전승이 있다. 자무카 항목 참고.

반면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치 않았다. 아들들이 자신의 말을 안 듣고 싸웠을 땐 엄청 화가 나있다가 볼츠의 중재로 설교로 끝났지만 항복한 도시는 약탈하지 말라는 그의 명령을 어긴 칭기즈 칸의 사위는 즉시 일반병으로 강등되어 싸우다 죽었다. 이 덕분인지 페르시아의 역사서에서도 '칭기즈 칸 그 자식 재수 없긴 한데 나름대로 공평한 면은 있었다' 라고 기록한다.

어릴적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자마자 아버지 부하들에게 배신받아 일가족 전체가 고생한 덕분에 배신자들을 매우 싫어했다. 물론 전쟁전에 자신에게 항복한 자들은 환대 하였지만 자신들 주군이 강성할 때는 온갖 꿀을 빨다가 자신들 주군이 전쟁에 져서 불리할 때 자신들 주군을 배신하거나 죽여서 항복한 자들은 신뢰가 없는 자라 하여 모두 사형에 처했다. 그중에 자무카를 배신하여 자무카를 포박하여 투항한 자무카 옛부하 5명을 사형에 쳐하였고 자신이 어랄 적의 태무친과 태무친 가족을 버린 것도 모자라 죽이고자 했던 키릴투크의 목을 잘라서 온 키릴투크의 옛 부하들도 모두 처형하였다.

4.4. 세계 각국의 평가[편집]

간단히 말하면 고향인 몽골에서는 추앙하며, 직접 피해를 받은 적이 없는 지역에서는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만들었으니 멋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동양에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서양에서는 그냥 야만인 취급. 다만 직접 피해를 받은 서아시아러시아 등의 지역에서는 당연하지만 그야말로 악마 취급이다.

4.4.1. 동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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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 있는 40m 기마 동상. 일단 현존 기마 동상에서 가장 높다.

당연한 얘기지만 몽골에선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다. 비록 죽은 지 800년이 다 되어가는 사람이지만 몽골인들의 국부와도 같은 존재이다. 허나 공산주의 시절에는 칭기즈 칸에 대한 찬사가 금지되었던 역사가 있으며 지금처럼 공개적으로 칭기즈 칸을 국부 취급하게 된 것은 몽골이 민주화가 된 이후의 일이다.[118]

몽골 사람들은 칭기즈 칸이 없었다면 외국인들은 몽골이란 나라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을 거라고 말한다고 한다. 아니 애초에 몽골 족은 칭기즈칸이 부족을 하나로 모아 통일하지 못했더라면 초원의 격렬한 물살에 휩쓸려 여타 부족들이 그러하듯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몽골인들의 칭기즈 칸 사랑은 한도 끝도 없을 정도.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칭기즈 칸이 바로 몽골의 문자를 만들고[119] 법전도 만들고 이름값도 높인 사람이다. 거기다가 본인도 자신의 고향을 매우 사랑했으니 국부로 모시기엔 이만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몽골에서는 좋은 것이나 랜드마크에는 죄다 칭기즈 칸을 붙이고 있다. 칭기즈 칸 국제공항, 칭기즈 칸 광장[120], 이런저런 상표에도 쓴다.

2010년에는 기마 동상을 세웠는데 높이 40미터로 현존하는 기마 동상 중 가장 크다.(참고로 저 동상의 말 머리에 올라갈 수 있는데 칭기스 칸 동상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위치가 심상치 않다.)사진.

한국에서는 고려 시대에 몽골에 전 국토가 짓밟히고 치욕을 당한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오래 전 일인 데다 일본과 비슷한 이유로 칭기즈 칸에 대한 이미지가 꽤 좋은 편이다.[121] 솔직히 일제 강점기를 전후로 대두된 한국이나 일본의 몽골-칭기즈칸 숭배는 서양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는 대리 만족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몽골군에게 초토화 당한 유라시아 여러 나라들 중 유럽은 그나마 덜한거고(서유럽은 아예 가지도 않았다) 가장 크게 짓밟힌게 서아시아와 동아시아란게 함정...일본은 자국과 상관없는 역사라도 칭기즈 칸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던 편이라 일제 강점기에 영향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가 이웃에 있던 금나라, 남송, 서하가 완전히 갈려나가고 원나라 통일 후에도 개 취급 받았다는 문제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대우를 받았다는 점도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원의 약화와 사대주의등의 영향으로 초기부터 고려는 오랑캐에 굴복했다는걸 강조했기에 굉장히 이미지가 악화되었었다.

중국에서는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좋아하는 편이다. 중국인 논리에 따르면 일단 칭기즈 칸 자체가 몽골족이고 몽골족은 중국의 소수민족, 즉 몽골인⊂중국인이니, 칭기즈 칸도 중화 영웅이다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대체로 내몽골족 출신 중국인들은 칭기즈 칸을 중국인이라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자신들 동북공정을 넘어서 중화 우월주의에 써먹는 모델로서, 내몽골 자치구에서 가짜 무덤까지 만들고, 몽골이 지배한 곳은 죄다 중국 땅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몽골족에게 당한 다른 출신 중국인들은 원나라 황제들이라면 몰라도 칭기즈 칸에 대해서까지는 그렇게 생각을 안한다. 하긴 당한 게 어느 정도인데...물론 이런 주장에 몽골은 피꺼솟한다.

참고로 중화민국 시대에는 몽골중국 땅이였으며 중국 국민당타이완으로 정착한 뒤 요즘도 타이완에서 판매되는 중국 지도를 사서 보면 몽골중국 영토로 되어있다. 중화민국/미수복지구 참고.

일본에서도 세계정복의 로망 때문인지, 자기들이 밟지못한 서양을 군사적으로 짓밟은 동양인이라고 대리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나쁘게 보는 시각은 별로 없다. 일본에서의 칭기즈 칸과 원나라의 호의적인 시각은 비록 자연 재해 때문이라지만 원나라의 침공을 저지했기에 오히려 원나라와 칭기즈 칸을 띄울수록 그걸 막았다는 자신들의 자부심이 더 높아지기 때문인데 실제로 카미카제만 봐도 일본의 부심이 대단하다는걸 알수있다. 특히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쉬웠던 일제 시대에는 군국주의 사상하고 결합해 역사 연구가 활발했는데 자국의 역사하고 별 상관없는 몽골에 조사단을 파견할 정도로 칭기스 칸과 원나라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 잘 알려졌던 코에이의 게임 징기스칸 시리즈에서도 제목부터가 몽골이 주인공이며, 몽골계 세력은 매우 강력하며 부정적인 묘사는 전혀 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일본의 일부 재야 사학계에서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칭기즈 칸의 동일인설을 우기기도 한다. 다행히도 현재 일본의 주류 사학계에서는 당연히 무시하고 있고 지금이야 대중 문화물에서 흥미 위주로 다루고 있지만 일본 제국 시절에는 사학적으로 연구도 된 설. 이쪽의 대표자는 오야베 젠이치로로 오슈, 만주, 몽골을 돌며 자료를 수집해 '칭기즈 칸은 요시츠네' 라는 책을 써내기도 했다. 읽어보면 말도 안 되는 논리 전개다. 심지어 이건 정식 학문으로 연구까지 되었으니 훨씬 질이 나쁘다. 하는 말을 들어보면 억지 위증 자료까지 증거랍시고 내놓고 그걸 빌미로 학살과 침략을 실현화한 것들일 뿐. 다나카 요시키창룡전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일본인 선생에게 몽골에 보란듯이 조상 기록까지 남은 사람을 억지로 일본계라고 왜곡하고 그걸 믿는 건 전 세계에서도 당신같은 극히 일부 멍청이나 그런다고 주인공 입으로 신랄하게 깠다.

반면 아시아 대륙 안에서도 서쪽으로 가면 평가가 크게 갈리는데, 페르시아의 역사서에서 칭기즈 칸은 아예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기록되기도 하고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에드워드 기번은 칭기즈 칸과 그의 후손들 때문에 전 세계가 떨었다고 쓸 정도였다. 거기다가 기독교 연대기 중에도(Chronicle of Novgorod) 몽골군은 신이 내린 징벌이라 불릴 정도의 포스[122]를 보여주었으니 서구 쪽에서 좋게 보긴 힘들겠다. 거기다가 살아 생전에 초상화도 못 그리게 하고 그에 대한 역사도 못 쓰게 했던지라 그에게 당했던 국가들은 온갖 나쁜 이미지를 그에게 덮어씌웠고 나중엔 '자신들의 나라가 못 사는 건 몽골족이 다 수탈해가서' 란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예로 중동 정치인들이 칭기즈 칸이 중동을 발라버리지 않았다면 미국보다 핵폭탄을 먼저 만들었을 거라고 할 정도. 뭐, 실제로 몽골 침입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관개 설비가 완전히 파괴되어 농업이 괴멸하고, 이란 지역 역시 아케메네스 왕조 이래 천여 년간 축적해 온 국력과 문화적 저력의 상당 부분을 몽골의 수탈로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핵폭탄을 누가 먼저 만들었을지야 따져봤자 별 의미 없는 뻘짓거리지만, 중동권에 비해 문화적, 기술적, 경제적으로 명백히 열세였던 서유럽권이 중동을 따라잡고, 추월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몽골 제국의 공격으로 인해 중동 지방이 받은 타격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이라크 같은 나라들에선 알렉산더 대왕살라흐 앗 딘 뭣이라?[123], 티무르와 함께 가장 최악의 침략자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론리플래닛 지은이인 토니 휠러가 이 세 나라 가서 칭기즈 칸 이야기를 했다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멱살까지 잡히고 "그 XX 이야기는 왜 하는데? 이름만으로도 기분 더러워. 또 그 말 하면 당신 가만 안 둬" 이런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야기하니까 정말이지 기분 좋게, 긍정적으로 대꾸하는 사람을 도통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하긴 국토가 뿌리째 갈려나갔으니 그곳 사람들이 학을 뗄 만도 하다. 이쯤 되면 오히려 동유럽이 온건해 보일 정도이다.

4.4.2. 서양[편집]

몽골군이 유라시아와 아랍 지역에서 이슬람 교도들을 박살낼 때 유럽 기독교 나라들은 전설 속의 기독교 왕인 프레스터 존이 구원하러 왔다고 멋대로 착각(...)을 했다. 이슬람 측에서 구원을 요청하러 보낸 사신이 "아니다... 저들은 기독교도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적이던 우리가 갑자기 구원을 요청하다니 이가 갈리겠지만 저들은 우리보다 더하다. 우리가 당한다고 기뻐하지 마라. 곧 당신들 차례가 올 것이다".라고 급하게 말할 때, 유럽 기독교인들은 사신을 비웃으며 내쫓았다.

근데 정작 동유럽 일부가 잠깐 갈린 거 빼곤 딱히 접촉이 없었고[124] 오히려 십자군 왕국들은 일 칸국의 유력한 동맹 후보국으로 몇 차례씩 동맹 요청 사신이 오갔다는 걸 감안하면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딱히 틀린 것만도 아니었을 듯. 다만 캅카스에 있던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 같은 경우에는 몽골과 많이 엮여서 고생하긴 했다. 다만 조지아는 몽골군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존중을 얻고 몽골의 속국으로 편입되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후진 약소국이었던 러시아는 노브고로드를 제외하면 말할 것도 없이 갈렸다. 후손인 몽케 칸이 본격적인 유럽 정벌(로마까지..)을 준비하다가 병들어 죽는 통에 몽골의 전통에 따라 이미 떠난 원정군들도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반쯤 갈아놨던 중부 유럽을 그냥 포기하고 돌아오다보니 때를 놓치고 무산되어버렸다. 만일 몽케 칸이 이때 안 죽고 좀 더 살았더라면 정말로 이슬람 사신이 말한 대로 유럽 여러 나라가 몽골 말발굽에 밟혔으리라는 주장을 펼치는 이도 있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으니.

아마 서양에 가장 잘 알려진 동양인 중 하나일 것이다. 지옥에서 만나게 될 사람 목록에 올라가 있다거나(히틀러와 함께), 훈족의 수령 아틸라와 더불어 완전 무식한 야만인으로 묘사된다. 닥터후에서만 봐도 닥터가 "칭기즈 칸의 군대가 다 몰려와도 타디스는 안전했다" 라고 말하면서 완전 야만인 취급.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을 다룬 영화 몽골의 리뷰 중엔 칭기즈 칸의 인간적인 모습이 나오자 헛소리하지 말라고 야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안 좋거나 희화화된 이미지와는 반대로 몽골과 칭기즈 칸을 역사상 최고의 Badass 취급하면서 숭배에 가깝게 좋아하는 서유럽인도 많다. 아무래도 몽골에게 직접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이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125]

해롤드 램은 몽골인을 이란과 튀르크계의 혼혈로 보았다만 이 사람은 몽골인의 이야기 몇 개를 듣고 그걸 야사의 법문이라고 써놨다고 하니 믿음이 갈 리가 없다. 원래 유목 민족들이야 서로 같은 유목 생활권을 공유했고 거기다 동돌궐이나 위구르는 원래부터 내, 외몽골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 위구르 수도 카라발가순은 현재 울란바토르 인근이다. 두 민족이 얽히는 거 자체는 당연하다. 그리고 이곳에 잔류하던 튀르크인들은 서아시아의 연계성은 거의 없었고 중국과의 접촉이 가장 많고 돌궐이야 당에게 시시때때로 괴롭히고 정복하러 다닐 정도로 밀접한 관계였다.

이전 작성자가 튀르크를 무조건 현재 터키와 결부시키고 있는데 튀르크인의 분포는 시베리아에서 동유럽까지를 커버하는 유라시아 전역이다. 칭기즈 칸의 모계에는 적어도 키르기즈나 카자흐인 혈통이 섞였다는 주장들도 제기되고 있으며 현재 야쿠트 공화국의 야쿠트인은 몽골 고원에 살다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로 인해 축출당하여 북쪽으로 간 사람들이다. 그렇다곤 해도 이란과 튀르크계의 혼혈이라는 말은 중국 사서에도 안 나오고 당사자인 튀르크나 페르시아 사서에도 안 나오는 주장이다.

오래전부터 평이 엇갈려서 중동 쪽에선 아예 갈아먹을 악당으로 묘사되지만, 초서켄터베리 이야기에서도 이름이 언급되는데 여기선 킹왕짱이란 식으로 묘사된다. 이름이 라틴어식인 Camius Khan의 변형이라 설명이 없으면 이게 누군지 알기 힘들지만... 연회를 여니까 아랍의 왕들이 알아서 선물을 보내올 정도로 묘사되지만 켄터베리 이야기가 원래 역사적 고증 같은 건 잘 안 따지는지라 칭기즈 칸이 우크라이나 남쪽에 살고 러시아와 싸운 걸로 유명한 걸로 나온다.[126] 거기다가 태어날 때부터 이슬람 교도였다고 나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선인이라는 것 같은 소리다. 참고로 이 이야기가 나오는 건 수습 기사(Squire)의 이야기인데 아쉽게도 미완이다. 여하간 칭기즈 칸이 좋은 이미지로 나오는 드문 중세 유럽의 이야기일 것 같지만... 위에 나온 대로 중세 유럽에서 몽골을 기독교 나라로 멋대로 좋게 쓴 편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외외로 더 많을지도 모른다.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을 봐도 원나라에서 기독교에 흥미가 있다고 쓴 걸 봐도.

러시아에서도 악랄한 적이었다. 물론 그때의 러시아 지방은 작은 소공국으로 나뉘어 있던 지역이긴 했지만 이런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240년이나 지배한 몽골의 지배를 치욕으로 여기며 '타타르의 멍에' 라고 부르며 칭기즈 칸도 증오했다.[127]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타타르가 지배한 것은 파괴밖에 남긴 게 없다고 글을 남길 정도였다. 실제로 몽골 이후 러시아는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서 굉장히 낙후된 상태로 사실상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128]

이 과정에서 본래 루시 제공국의 중심지였던 키예프와 그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상당히 상실하였으며, 이는 현대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별개의 정체성을 주장하며 친 서방 행보를 보이는 경우가 많은 데까지 이르고 있다. 즉,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키예프 공국 성립 이후 350년간 개발이 진행되었던 알토란 같은 영토를 몽골의 침입으로 인하여 상실하고, 춥고 척박한 동북쪽에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250년 가까이 몽골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러시아는 심각한 문화적 퇴보를 겪었고, 그 사이 과거 대등한 상대였던 서유럽 국가들은 러시아를 아득히 추월하며 발전하였으며, 러시아는 18세기 ~ 19세기가 되어서야 이를 다시 어느정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애초에 러시아가 열강으로써 유럽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 18세기 초중반, 표트르 1세의 개혁 이후임을 생각해 보면...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피폐해진 국력을 수습하는 데 2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몽골의 침략과 정복, 지배가 열강 러시아의 탄생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굳이 찾아보자면 기존의 루시 공국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모스크바 공국에 의한 재통합을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정도인데, 그 철저한 파괴를 수습하고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이 수백년에 이르는 상황에서 이것을 몽골의 을 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사실 몽골의 침략 이전 교통과 통신, 통치 기술의 미비로 인하여 루시 공국들은 도시 국가 연합체 비슷한 형태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종주국 격인 키예프 공국에 의한 재통합이 몇 차례 이루어졌음을 생각한다면 몽골의 파괴가 없었다고 한들 루시 공국들의 통합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 자체가 섵부른 면이 있다. 이를 두고 몽골 제국 덕분에 러시아가 통일되어 대제국이 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일제와 김일성 덕분에 한국이 신분제의 잔재를 털어내고 현대국가로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한국의 근현대사를 보면 일제의 식민 지배와 6.25 전쟁으로 인하여 기존의 사회 구조가 완전히 파괴되면서 신분제적 잔재 역시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우리가 일제와 김일성의 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소련은 몽골에서 칭기즈 칸에 대한 흔적을 없애고자 악랄하게 노력했으나 몽골의 친소파 정치인 같은 허수아비들조차도 칭기즈 칸만은 위대하다고 여겨 목숨 바쳐가며[130] 칭기즈 칸의 흔적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소련이 무너지기 전에 민주화된 몽골은 아주 열심히 찬양하며 기리며 소련의 이런 뻘짓을 소심하게 복수했다고 비난한다. 다만 이런 소련의 행태를 꼭 몽골 제국의 지배에 대한 복수라고 봐야 할지는 의심스럽다. 꼭 몽골이 아니더라도 원래 소련은 특유의 세계 인민주의(?)로 자국이나 위성국에서 민족주의적 성향이 발호하는 것을 싫어했다. 몽골 이외의 위성 국가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던 것. 그예로 스탈린만 해도 고향인 조지아에서 민족주의를 똑같이 처절하게 박살냈고 이전이나 이후에도 소련은 각 위성 국가 민족주의자 및 독립주의자는 학살로 싸그리 대했다.

터키에선 조금 다르다. 굴욕이라고 부르며 싫어하는 이도 있지만 튀르크인과 같은 유목민으로서 그 위치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싸우긴 했어도 이슬람이라고 탄압한 게 아니고 종교적으로 관용을 베푼 점이라든지 다른 유럽 기독교 나라보단 낫다는 평이다. 물론 터키에서도 기왕이면 같은 이슬람인 티무르 쪽을 좀 더 보기 좋게 여기기도 하고 여기에는 튀르크계 민족과 몽골계 민족이 유목하던 시절에 얽힐 대로 얽혀있어서 그렇긴 하지만. 일부 범투란주의자들은 칭기즈칸을 터키 민족의 영웅이라고 보기도 한다. 애초에 터키인 남성 이름 중에서 상당히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이름 중 하나가 바로 젱기즈(Cengiz) 혹은 티무친(Timuçin)이다. 둘 다 당연히 칭기즈 칸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튀르크인과 몽골인은 원래 같은 생활 공간을 공유했고 오랜 유목 생활로 제법 많이 섞이기도 했다. 그리고 튀르크계인 러시아의 투바 공화국은 몽골의 영향을 걸쭉하게 받았다.

미국에서는 몽골 제국의 치세를 좋게 얘기해서 팍스 몽골리카를 팍스 아메리카나와 비교해서 자신들을 띄운다고 한다.

여하간 죽은 뒤에 이곳 저곳에서 정치적이나 쫀심 싸움에 쓰이는 신세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도 비슷한 꼴을 당했으니 저 세상에서 동병상련하려나

기독교를 특별히 싫어하지 않은 데다가 중립적으로 대하고 손자인 쿠빌라이 칸바티칸에 요청하여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한 사례 등 때문에 의외로 서방계 그리스도교에서는 큰 감정은 없는 편이다. 훈족의 아틸라마냥 유럽을 '하느님의 징벌' 급의 포스를 뽐내었지만, 정작 서유럽은 점령 당하지 않은 것도 있고. 물론 동방 교회 쪽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몽골에게 분명 타격을 크게 입었다.

4.5. 총평[편집]

칭기즈칸이 고결한 지도자이자 훌륭한 통치자인지, 반대로 피에 굶주린 살인자인지는 당신이 누구에게 묻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날 몽골에서, 그는 그들이 좋아하는 나라의 아버지이고, 그의 많은 정치개혁은 선구적이었다고 지지받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 점령지였던 이라크나 이란에서는 그를 학살적이고, 견디기 힘든 파괴와 피해를 일으킨 광적인 폭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의 스토리가 위대함인지 잔인함인지에 대한 논쟁과 온갖 과장과 관계없이,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대 세계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영향을 많이 끼친 지도자이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강하고 뚜렷하게 남아 있다.


- 문명 5 백과사전


칭기즈 칸의 등장과 몽골의 부흥은 세계사의 시각에서도 그야말로 혜성과 같았는데, 이를 좋게 말하자면 그만큼 몽골이란 나라가 큰 족적을 남겼다는 것을 뜻하며, 부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서양에서 재앙의 징조로 여겨졌던 혜성에 빗댈 수도 있다.

누군가는 동양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포스트 폴 포트라고 할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칭기즈 칸이지만, 적어도 개인으로서는 세계 역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거인이라는 것 하나만큼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5. 가족 관계[편집]

본처 보르테 우진 사이에서 아들만 4명(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툴루이)으로 자식을 많이 얻었다. 그리고 이 4명의 자식들에게 몽골 풍습에 따라 유산을 갈라주다보니 몽골 제국 내에는 필연적인 대립과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뭐 이걸 칭기즈 칸 본인 탓으로 돌리긴 그렇지만. 후궁도 많이 거느렸고 후궁 소생 아들, 딸들도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알려진 딸들은 이키레스 족의 보투 쿠레겐과 결혼한 코친 베키, 오이라트 족의 투랄치 쿠레겐과 결혼한 체체겐(치체겐이라고도 한다.), 칭기즈 칸의 딸 중 가장 지략적인 공주로 부친을 대신해 내정을 관리하고, 전장을 나간 적도 있다고 전해지며 웅쿠트 족의 셴구이와 결혼한 알라가이 베키, 옹기라트 부족의 싱쿠 쿠레겐과 결혼한 투말룬, 역시 옹기라트 부족의 차우르 세겐과 결혼한 알탈룬이 있다.

정복 활동이 잦다보니 정복지에서 얻은 여자들이 3명 있는데 창작물 등에서는 2황후인 쿨란을 가장 총애했다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근데 이 쿨란은 칭기즈 칸이 가장 싫어했던 메르키트 부족 출신이었다(...) [131] 아마 이렇게 싫어하는 부족 출신임에도 2황후까지 올랐기에 칭기즈 칸이 총애한 것이라 해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으로 간 한국 여배우가 이 역할을 맡아서 뉴스에 오른 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 기록 등을 볼 때 칭기즈 칸이 가장 총애했던 것은 조강지처 보르테였다. 처음 그녀가 메르키트 족에 납치당했을 때도 어머니 호에룬의 전 남편처럼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찾으러 나섰던 것도 그렇고 그가 대칸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보르테는 많은 조언과 뒷바라지를 하며 도왔다. 기록에서도 그녀의 현명함을 찬양하는 표현이 많이 보인다. 또한 결국 몽골 제국을 물려받은 건 보르테의 자식들이었다. 그녀는 4남 5녀를 낳아서 가장 많은 자식을 두었으며 그녀가 낳은 아들들만이 후계자로 간주되었고 다른 어머니를 둔 아들들은 애시당초 논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총애했다는 쿨란의 아들도 좋은 대우는 받았지만 후계자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 보르테가 지닌 정처 겸 제1황후로서의 지위는 부동이었으며 후손들에게 대황후로서 극진한 존경을 받았다.

메르키트 족 출신인 제2황후 쿨란이 낳은 아들은 보르테가 낳은 아들들 다음으로 대우받았고 왕의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

여담으로 칭기즈 칸의 후궁들 중에서 한 명은 본래 원해서 그리 된것이 아니라 여러 부족들 중에서 한 부족이 바치다시피한 여자인데 칭기즈 칸 앞에서 "내가 왜 당신과 함께 해야 하냐?" 라며 떽떽거렸고 때문에 칭기즈 칸이 맘에 들어했다는 얘기도 있다.

고려 충렬왕제국대장공주가 칭기즈 칸의 증손녀이며, 충선왕계국대장공주는 칭기즈 칸의 5대손이다.

6. 이야기거리[편집]

그의 최후에 대해선 전염병이나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거나 벼락 맞아 죽었다, 말에 떨어져 죽었다든지 심지어 복상사[132]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설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일단은 원조비사에서 기록된 대로 말에서 떨어진 이후 쇠약해졌고 이로인해 병을 얻어 죽었다는 설이 정설로 취급된다.

그의 무덤은 아직도 어디 있는지 미스터리. 여기에 대해 좀 으시시한 전설이 하나 있다. 칭기즈 칸의 무덤을 옮기는 과정에서 마주친 살아있는 모든 것을 몰살시켰다는 것이다. 이걸로도 모자라 칭기즈 칸의 무덤은 묻은 후 파헤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병대가 수없이 짓밟아 평지로 만들어버린 상태라고... 당연히 그 밟은 말들과 기수들도 모두 몰살되었다 카더라. 부르한 산 참고. 물론 전설일 뿐 확실한 건 아니다.

또다른 이야기로는 '그냥 평범하게 몽골식 장례를 치렀다' 고 한다. 칭기스 칸이 생전에 사치를 싫어하고 유목민의 전통을 지킨 것을 상기하면 이쪽도 신빙성이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칭기즈 칸의 유해를 그의 충복이 매장한 것으로 되어있다.[133]

일본이 중일전쟁 때 찾으려고 무진 애[134]를 썼지만 실패하고 대신 몽골의 고고학 기술만 어마어마하게 발전했다고 한다.

그의 친위대인 케식(한자로는 겁설, 怯薛)은 몽골 기병의 스테레오타입으로 유명하며, 몽골을 주제로 한 게임이나 매체에서는 심심치 않게 들어간다. 이 친위대는 원래 1203년 칭기즈 칸이 다른 부족의 자객을 막으려고 창설한 부대인데 원래 100명에서 시작했던 게 전성기까지 만 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자식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은 편이었는데 다른 것보다 주치가 문제였다.[135] 주치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냐는 문제로 2남인 차가타이와 갈등이 있었고 이런 와중에 오고타이가 칸이 되었다.

아시아의 약 8%(전 세계의 0.5%)의 남성 인구는 같은 Y염색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이들의 조상이 칭기즈 칸이라는 학설도 존재한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초반부에 영국인이면서 이 아저씨 후손인 사람이 나오는데 선량한 사람이지만 현관에 도끼를 장식하고 싶어한다든지, 가끔씩 피와 연기와 말울음 소리의 환상에 시달린다든지, 털모자에 대한 깊은 애착을 보인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등지에는 없다고. 있을 리가 없는 게 칭기즈 칸 생전에는 고려에 대한 침공은 없었고 수부타이만 고려 근처에 가서 종이를 받아왔을 뿐이며 당연히 일본은 구경도 못했다.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오고타이 칸 때 발발하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꼽은 가장 중요한 정치인 50명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의 예를 볼 때 좋은 얘기는 별로 안 썼을 듯하다.

다만 워낙 효과적으로 정복하고 부하들 관리도 잘한지라 비즈니스 계에선 꽤나 호의적으로 보는 듯하다. 칭기즈 칸의 경영을 배우자는 얘기는 동양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간간이 나오는 얘기다.

여담으로, 칭기즈 칸의 후손을 황금씨족이라 부르기도 한다.

7. 이름 표기[편집]

표기

언어

발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30px-Cinggis_qagan.svg.png

몽골어(전통표기)

칭기스 카간

Чингис хаан

몽골어(현대표기)

칭기스 항

جنكيز خان

아랍어

진키즈 한

چنگیز خان

페르시아어

창기즈 한

Genghis Khan

영어

겡기스 칸 혹은 젱기스 칸

Чингисхан

러시아어

친기스한

Dschinghis Khan

독일어

징기스 칸

Cengiz Han

터키어

젱기즈 한

Çingiz xan

아제르바이잔어

친기즈 한

Чыңгызхан

타타르어

층그즈한

Шыңғыс хан

카자흐어

셩그스 한

成吉思汗(Chéngjísī Hán)

중국어

청지쓰 한

チンギス・カン[136]

일본어

친기스 칸

Thành Cát Tư Hãn

베트남어

타인 깟 뜨 한

8. 어록?[편집]

"가장 좋은 삶이란 너의 적들을 쳐부수고 그들이 네 발 앞에 쓰러지는 걸 보며 그들의 말과 재산을 빼앗고 그들의 여자들의 울음 소리를 듣는 것이다.[137]"


페르시안 사서 중


이 말은 대중 사이에서 코난영화화 버전에도 쓰일 정도로 Bad Ass하다고 여겨졌다.[138] 전문은 "사람의 쾌락은 배신자를 복종시키고 적을 모두 멸망시켜 그 소유물을 약탈하고 그들의 종복들에게 소리 높여 울게 하여 그 얼굴이 콧물과 눈물로 얼룩지게 하고 우스꽝스럽고 우둔한 그들의 말에 걸터앉으며 그들 처첩의 배와 배꼽을 침대나 이부자리로 삼고 그 장밋빛 뺨을 즐기며 입 맞추고 그 붉은 입술을 빠는 데 있다"로, 페르시아의 사료에서 나온 말이며 잭 웨더포드 같은 칭기스 칸 옹호파와 일각에선 페르시아의 기준에서 나온 자료이니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으며,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정복당한 나라들이 그를 얼마나 무자비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는지 잘 알려주는 말이다.

"모두가 내 발 밑에 쓰러지기 전까진 승리했다고 말하지 마라."(#)

"하늘의 도움으로 너희를 위해 커다란 나라를 정복했다. 하지만 세계를 정복하기에 내 삶은 너무 짧았다. 그 일은 너희에게 달린 일이다."


이 말은 죽기전 아들에게 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서에서는 죽기 전에 금나라 정복을 완수할 작전을 얘기하고 죽었다고 한다. Bad Ass도 보통 Bad Ass가 아니다

"나는 수많은 잔혹한 행위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내가 한 일이 옳은지도 모르고 행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게르(Ger, 몽골식 천막)에서 살다 평범하게 늙어 죽고 싶다."

"나의 자손들은 훌륭한 옷을 입을 테지, 맛있는 것을 먹고 준마를 몰고 아름다운 계집을 안을 테지, 그 모든 것이 누구의 덕분인지도 모르는 채."[139]


죽기 전에 말했다는 이 말 역시 위에서 나온 페르시아 사서(일 칸국의 재상이었던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서 나온 말로 전문은 "우리가 죽은 뒤 내 부족의 자손이 비단 바탕에 호화찬란하게 금실로 짠 옷을 몸에 걸치고 맛있는 안주와 좋은 술을 제멋대로 마시며 좋은 말을 타고 미녀를 품에 안고도 그것을 가져다준 것이 그 아버지와 제 형임을 말하지 않거나 우리와 그 위대한 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 외에 부하라 점령 후 지배 계층에게 설교를 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건 주와이니의 사서에서만 나오는 말이다. 내용은 신이 그들에게 자신과 같은 재앙을 내린 것은 그들의 왕이 너무나도 부도덕하고 음란했기 때문에 벌을 내리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칭기즈 칸 이야기는 이런저런 설이 막 엇갈리며 모든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진위 여부의 논란이 있다.

8.1. 인터넷발 칭기즈 칸 어록[편집]

참고로 "집안이 못났다고 실망하지 마라" 식으로 전개되는 칭기즈 칸이 했다는 말은 사실 '김종래' 라는 기자가 그의 일생을 토대로 독자를 격려하는 내용의 가상의 글을 만들어서 "칭기스칸의 리더십 혁명"라는 책에 쓴 것인데 어느샌가 그 얘기가 쏙 빠지고 칭기즈 칸의 어록이 되어버렸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출처

“한국의 젊은이들아!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푸른 군대의 병사들아.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어려서는 이복형제와 자랐고, 커서는 사촌들의 시기에 두려워했다. 가난하다고 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내가 살던 마을에서는 시든 나무마다 시린내, 누린 나무마다 누린내가 났다. 나는 먹을 것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벌였다. 목숨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유일한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하지 마라.

나는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는 곳, 꼬리 말고는 채찍도 없는 곳에서 자랐다. 내가 세계를 정복하는데 동원한 몽골인은 병사로는 10만, 백성으로는 200만도 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볐고, 그들을 위해 의리를 지켰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땡볕이 내리쬐는 더운 여름날 양털 속에 하루 종일 숨어 땀을 비오듯 흘렸다.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고, 가슴에 화살을 맞고 꼬리가 빠져라 도망친 적도 있었다. 나는 전쟁을 할 때는 언제나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이겼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극도의 절망감과 공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아는가? 나는 사랑하는 아내가 납치되었을 때도, 아내가 남의 자식을 낳았을 때도 눈을 감지 않았다. 숨죽이는 분노가 더 무섭다는 것을 적들은 알지 못했다.

군사 100명으로 적군 10000명을 마주칠 때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죽기 전에 먼저 죽는 사람을 경멸했다. 숨을 쉴 수 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적은, 밖이 아닌 내 안에 존재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깡그리 쓸어 버렸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스칸이 되었다.”


『칭기스칸의 리더십 혁명』. 도입부.


작가는 자기가 쓴 글을 감동적인 역사 인물의 실제 어록이라면서 인쇄해 들고 온 지인을 보고 멘붕했다고(...). 거기다 덤으로 나중에 불멸의 이순신 붐이 일어나면서 또 이걸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순신 어록' 이란 게 유포되어 이순신이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다는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사실 이 어록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적혀있다.

9. 여러 매체의 칭기즈 칸[편집]

9.1. 역사서, 소설, 만화[편집]

역사 기록인 원조비사당연히 등장.

원조 비사에서의 모습은 화도 잘 내지만 주변 사람의 조언을 듣고 진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기할 만한 점은 칭기즈 칸 본인이 특별한 무력[140]이나 대활약을 벌이는 부분은 많지 않다는 것. 오히려 사준사구의 재치나 용맹을 보여주는 일화가 많다.

미국의 밀리터리 잡지인 암체어에서 역사상 최고의 명장들 순위를 정한 적이 있는데,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여담으로 부하 장수인 수부타이제베가 각각 6위와 37위다. 이들을 상대한 적들에게 명복을 빌 뿐이다.

더글러스 애덤스가 쓴 단편 'The Private Life of Genghis Khan' 에선 서구적 스테레오 타입에 맞춰 잔인한 정복자로 나오는데 정복 사업에 지쳐 의욕을 잃었다가 갑툭튀외계인이 그를 욕하자 열 받아서 아시아를 불태우는 걸 까먹고 유럽으로 쳐들어 가버렸다고 나온다.

사조영웅전에도 등장한다. 대체적인 행보는 역사 그대로지만, 가상의 주인공 곽정과 얽히는 관계로 어느 정도 픽션이 가미되어서 등장한다. 막내딸 화정을 곽정에게 내려 부마로 삼는다거나, 곽정을 회유해서 송나라 공격의 선봉으로 삼고자 하는 등. 사실 매를 쏜 영웅의 이야기라는 작품의 타이틀이 상징하는 또 다른 인물로, 만년에 곽정과 나누는 영웅에 대한 짤막한 담론이 이 작품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등장 비중보다 훨씬 높은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다. 곽정이 '영웅이란 타의 모범이 되는 의로운 행위를 하고 백성을 아껴야 한다'고 말하자 칭기즈 칸은 '내가 무수히 많은 적수를 꺾어놓고 영토를 확장했는데도 영웅이 되지 못한단 말이냐?' 라고 반문하지만, 임종 시에는 '영웅, 영웅....'을 유언처럼 읊조리고 죽어가는 것으로 보아 곽정의 용기 있는 발언에 평생을 돌아보며 영웅의 의미를 고심한 듯하다.

악비를 주인공으로 하는 청나라 때의 중국 소설인 설악전전에서도 뜬금없이 등장한다. 금나라가 북송을 침공하는 전쟁에 참가했으며 한세충의 아들을 몰아붙이다 한세충이 난입하면서 머리에 칼을 맞고 죽는...가 싶더니 투구에서 자동으로 쉴드가 쳐지면서 막아내고 테무진은 깜짝 놀라서 도망간다. 그런데 그 원인이 가관인데 훗날 태어날 그의 아들인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 황제가 될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화 등의 매체에서는 권왕이나 한마 유지로 같은 괴수 같은 이미지로 등장하는 경우가 다수.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에서는 칭기즈 칸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답게 당연히 주인공.

슈토헬 속에서는 최종보스로 등장한다.

마블 코믹스 시리즈에선 아이언맨의 숙적인 만다린의 조상인 걸로 설정되어 있으며 아틀라스란 조직은 칭기즈 칸의 후예를 리더로 하여 세계를 정복하려는 조직이다.

만화책 스타크래프트 에쒸비의 주인공 이름이 태무진이다. 거기서는 고딩 주제에 세계 대회 우승한다. 정복왕의 피를 이어받아 세계 대회를 정복.

이 만화에서 볼 수 있듯이 서양인 대부분은 칭기즈 칸이 사람을 많이 죽인 야만인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리고 유능한 군주였단 걸 알면 학살은 뒷전이 된다는 것도 꼬집고 있다.

김은정(만화가)만화 아스피린(만화)에서는 사방신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 아스피린에서는 사방신 중 하나인 주작으로 묘사되며 작중에서는 본명인 테무진으로만 불린다. 생김새는 붉은 머리를 한 미청년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름만 실존 인물에서 따왔지 실상은 그저 찌질이로 사방신 중에서도 가장 약하다고 언급된다. 그러면서도 성격은 무척 더럽고 잔혹하며 거기다 바보다.[141] 인간과 관계를 맺어 낳은 아들 주치가 있으나 그 아들 역시 아버지의 성격을 물려받아 잔인하기 짝이 없는데 자기 입으로 말하길 자신을 낳아준 인간 어머니까지 자기 손으로 없애버렸다. 온달을 죽이려 할 때 엄마를 죽였을 때는 금방 죽어버려서 재미가 없었는데 넌 좀 즐겁게 해주려나? 하는 막장 패륜아. 다른 사방신들과 함게 하백에 의해 봉인구에 봉인되어 있었으나 봉인구가 깨져 간신히 세상 밖으로 탈출하서는 동굴에 은신하여 힘을 보충하면서도 같은 사방신 중 한 명인 초류향과 무언가 음모를 짜고 있는 것 같다. 온달이 자신을 가두었던 하백의 아들임을 눈치채고는 죽여버리려고 하였고 아돌프가 이를 저지하자 강력한 마력으로 기절시켜서 초류향에게 보내버렸다. 그러나 곧 해모수가 들이닥치자 혈투 끝에 밀리기 시작하다 주치와 함께 후퇴를 한다.[142] 해모수가 하백과의 계약으로 인해 본래 마력과 전투 능력의 상당 부분을 봉인한 상태로 쓰지 않는다는 걸 감안해보면 최약체가 확실하다. 당장에 해모수의 반응부터 보면 알 수 있는 게 메타트론이 뜨면 위험하다고 튈 준비부터 하는 해모수가 테무진의 경우에는 그냥 허접이라면서 바로 맞짱 떴다.

딴지일보의 기획특집 테무진to the칸에 등장. 딴지 일보에 2년여간 연재된 24편 분량의 징기스칸 일대기. 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상당히 실감나고 딴지 일보 특유의 찰진 묘사로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젊은 시절에 징기스칸이 목숨을 부지하며 살다가 칸으로 오르기까지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가며 상황을 분석한 작품으로 꽤 상세하고 날카롭다.
2017년 5월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제목은 '테무진 to the 칸-테무진, 실패를 딛고 초원을 평정하다'. 딴지일보 특유의 적나라한 표현은 부드럽게 다듬어졌지만 상세함과 날카로움은 그대로다.

미스터 피바디와 셔먼쇼에서 악역 3인방 중 한 명으로 등장 은행[143]을 털려고 하다 피바디에게 잡힌다. 성격이 순진하고 온순하고 무식하다 고인 능욕.

9.2. 영화, TV[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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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아누 리브스가 이름 없던 시절 나온 1989년 영화 엑설런트 어드벤쳐에도 나온다. 101마리 달마시안 영화를 감독한 스테판 헤렉이 감독하여 1000만 달러로 만들어 4천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했다. 국내에서도 개봉하고 KBS-2 일요 특선 외화로 더빙 방영한 이 영화는 타임머신을 타고 잔 다르크, 루트비히 판 베토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역사적 위인을 현대로 데리고 오면서 벌어지는 코미디 영화인데, 다른 위인들도 모두 희화화되었다지만 칭기즈 칸은 인종차별주의적 시각 때문에 가장 무식하게 나온다. 대사조차 없이 괴성만 질러대고 괴력으로 나오는게 영락없는 대중매체에 묘사되는 원시인 수준이다. 칭기스 칸은 항우나 리처드 1세와는 달리 직접 전선에서 용력을 떨치는 유형의 지휘관이 아니고 정치적인 재능까지 갖춘 전형적인 제왕의 모습을 지닌 인물이었음에도 서양인의 몽골인에 대한 그릇된 관념이 여과없이 반영된 결과라 볼 수 있다. 한번 리처드 1세가 이따위로 표현될 경우 반응이 어떠할지 생각해보라... 사용무기도 당시 몽골군이 사용한 곡도나 철퇴도 아니고 원시인이 쓸만한 몽둥이일 정도다. 빌과 테드가 과거로 가서 보니 야만인처럼 여자랑 헤롱거리고 있었고 빌과 테드가 고기를 보여주자 처럼 따라온다(...) 게다가 현대에 와서 화장실 청소시키는데 변기물을 마시기까지 한다. 그렇긴 해도 칭기즈 칸만 망가뜨린 게 아니라 다른 위인들도 현대로 와서 망가진다. 나폴레옹은 아이스크림만 신나라 먹고, 수영장에서 미끄럼틀에 환장하여 계속 그것만 타며, 주인공 둘의 사촌 꼬마에게 저런 멍청이가 나폴레옹이라고? 말도 안돼 소리를 대놓고 듣는다. 잔 다르크는 에어로빅 강사, 빌리 더 키드는 백화점 안에서 총질이나 하고, 프로이트는 현대인들에게 정신 분리학 연설을 하지만 지나가던 사람들이 미친 놈 쳐다보듯 하며.... 미국에서 존경받는 링컨조차도 연설하는데 사람들이 당연히 왠놈이 링컨 코스프레 하네라는 투로 웃는다. 그나마 베토벤 홀로 전자 키보드 연주를 신나게 하여 사람들에게 박수 갈채를 받으며 망가지지 않을뿐. 여기서 칭기즈 칸 배역을 맡은 배우인 알 리옹(Al Leong)은 중국계 미국 배우로 다이 하드에서 초콜릿을 먹던 테러범으로 나왔고 리썰 웨폰, 래피드 파이어, 전격 Z 작전, 환상특급 등 꽤 많은 영화에서 조역 및 악역을 연기하던 배우이다. 참고로 이 영화에서 테드 역으로 나오는 키아누 리브스와 같이 빌로 나오는 또다른 주인공 알렉스 윈터는 나중에 프릭스 대모험을 감독, 주연하게 된다. 1991년에 두 주연이 그대로 나온 속편이 나왔으나 기대 이하 흥행으로 사라졌다. 속편은 타임머신을 타긴 하지만 700년 뒤 미래에서 온 가짜 두 주인공(로봇이다.)이 두 주인공을 죽이려들고 뭐하고 코미디판 터미네이터 같이 기획되었지만 문제는 그리 웃기지 않고 전편보다 훨씬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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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복자(The Conqueror) : 1956년 존 웨인 주연의 미국 영화. 국내에서도 1982년 11월 27일 주말의 명화 시간에 더빙 방영했고 여러번 공중파 방영 및 2000년대에도 케이블 영화 방송으로 자막판이 방영했다. 화이트워싱의 전형적인 예이다. 게다가 비평도 엄청난 혹평을 받았는데, 어찌나 혹평이 자자한지 요즘 개봉했으면 닦이 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다. 일단 포스터부터 고증은 개나 줘 버리는 복장과 배경에, 주연 배우가 남 녀 모두 미국인이고, 여주인공을 맡은 수잔 헤이워드는 그냥 서양인 캐릭터이니 우리 나라 사람이 보기엔 감정 이입이 될 리가 없다. http://www.telegraph.co.uk/film/the-conqueror/making-of-movie-that-killed-john-wayne/ 이 영화를 핵실험 했던 데서 찍어서 존 웨인이 암에 걸리게 되었다는 설이 나온다. 관객을 암걸리게 하는 정도를 넘어서 연기자, 촬영 스태프까지 암걸리게 한 영화.여담인데 리 밴클리프가 조역으로 나온 바 있다. 600만 달러로 만들어져 9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도 실패.

  • 2005년 중국 CCTV와 내몽골 자치구가 협력해 칭기즈 칸의 일대기를 그린 중국 드라마 '칭기즈 칸' 을 제작해 방영한 적이 있었다.[145] 대체적으로 원조 비사 등의 기록의 칭기즈 칸의 일대기를 잘 표현했지만 아무래도 중국에서 만들어졌다보니 호엘룬을 납치한 게 예수게이가 아니라 타타르 족이라고 하고[146] 칭기즈 칸을 중국을 통일시킬 중화 영웅인 것처럼 미화하거나 칭기즈 칸이 저지른 베이징 학살극을 없었던 일처럼 묘사하는 등[147] 역사 왜곡을 한 경우가 있었다. 한국에서도 더빙되어 방영했으나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하고 사라졌는데[148] 극중에서 중국 관영 방송 답게 칭기즈 칸을 중화 민족의 영웅 드립을 치자 국내 시청자 뿐만 아니라 주한 몽골인까지 어이를 탈출시켜버린다. 당시 국내에 있던 몽골인들은 조상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비난하고 아예 외면했다.[149] [150] 인물 이름이나 지명도 중국어로 번역된 이름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 자무카가 챠무하(扎木合)로, 타타르가 타타얼(塔塔尔)로 번역되었다. 또한, 놓치기 쉬운 점이지만, 전투 장면의 배경음(몽골스러운 음악 말고 함성, 비명, 칼 부딪치는 소리 등등)으로 브레이브 하트의 스털링 전투 사운드를 그대로 갖다썼다. 잘 들어보면 멜 깁슨이 적장의 목을 치며 지르는 기합 소리가 자주 들린다.
    이후 2012년에 방영된 중국 본토와 홍콩의 합작 드라마 '건원 풍운'에서는 진시황, 영락제, 청태종, 옹정제, 마오쩌둥 역할로 유명한 배우 탕궈창(唐國強, 당국강)이 담당하여 주인공 쿠빌라이 칸의 어린 시절이 나오는 초반에 등장했다.

  • 미국 Spike TV의 가상 대결 프로그램인 <Deadliest warrior> 시즌 3에 등장한다.영상 대결 상대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과학적인 실험을 통한 가상 대결에서 승리했다. 몽골군과 카르타고군의 전투 이후 벌어진 1:1 결투에서 한니발이 찌른 칼이 갑옷에 막힌걸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칭기즈 칸이 압도적으로 밀어 붙였다.

9.3. 게임[편집]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도 종종 추가 무장으로 등장하곤 한다. 근데 어떻게 된 게 능력치가 관우보다 낮게 나오지만, 코에이의 능력 선정 기준을 의심하게 한다(비슷한 예로는 공자가 있다).[151]

삼국지 9 PS2에서는 "성길사한"으로 쳐야 나온다. 통무 지정 순으로 100 / 92 / 86 / 73이라는 관우보다 무력이 낮지만 나머지 능력치는 관우뿐만 아니라 장료, 등애보다 높다. 병법 중에서 비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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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4 일러스트[152]


코에이의 푸른 늑대와 하얀 암사슴 시리즈에서는 부동의 주인공. 원조비사에서도 물론이고 징기스칸 4에서도 주인공이다. 원조 비사에서는 몽골 통일기의 얼굴과 몽골 통일 후 대칸이 된 이후의 얼굴까지 준비해 두었는데[153] 징기스칸 4에서는 그냥 젊은 얼굴로만 등장한다. 그래야 게임이 잘 팔리지. 칭기스 칸은 40대가 되어서야 두각을 나타낸 인물임에도 이렇다. 육손은? 아케치 미츠히데는? 주인공답게 두 작품에서 모두 톱 클래스의 인재. 원조 비사 때는 정치만 C고 다른 능력은 전부 A, 징기스칸 4에서는 정치, 전투, 지모순으로 81/97/92이고 기병, 궁병이 높고 연사도 있다. 본래 원조 비사에서 최영과 이성계는 한국 정발판에서 만든 인물인 만큼 원판에서 전투력과 통솔력을 모두 A로 받은 인물은 칭기스 칸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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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에도 온라인 카드로 등장. 능력치는 9 시절이나, 전 카드 무장 중에서 제일 높다(278). [154]

대만의 신성 엔터테이먼트에서 유통한 동명의 게임이 존재한다. RTS 방식에 영웅 및 유닛들이 스킬을 사용하는 방식이나 게임의 한글화가 무척이나 이상하게 되어있다.

어새신 크리드알테어는 칭기즈 칸을 암살하러 가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갔고 결국 그의 부하와 아들이 칭기즈 칸을 암살했다. 칭기즈 칸도 성전기사단의 일원으로 설정되어 있다.[155]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 에이지 오브 킹에서는 플레이어가 그의 부장으로 행동한다. 1탄에선 오프닝 때 잠깐 등장하고 만다. 영웅 중에선 이순신(거북선)이나 윌리엄 월레스(챔피언)처럼 매우 강한데 유닛이 만구다이고 연사력이 좀 빠르고 체력이 티무르에 낮지만 250에 공방은 티무르보다 더 좋다.

메트로 2033에서는 자신을 칭기스칸의 환생으로 자처하는 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선 전통적으로 몽골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나 미디블2: 토탈 워 등 중세 유럽을 다룬 역사 게임에서도 항상 개근한다. 나중으로 갈수록 플레이어 세력이 커져서 루즈해지기 쉬운 게임이니만큼 항상 끝판왕 기믹을 가지고 쳐들어오는 편.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11만이 넘는 정신 나간 둠스택을 만들어서 쳐들어오며[156] 병과까지 게임상 최고 사기 병과인 궁기병이라 막기가 상당히 어렵다. 게임상 최고 수준인 25의 무력[157]도 덤. 미디블 토탈워에서도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지만 이쪽은 오히려 티무르가 끝판왕이라 조금 취급이 안 좋긴 하다.

미디블2: 토탈 워에서 직접 등장하는 것 같진 않지만 일단 게임에서 몽골군이 쳐들어올 때면 칭기즈 칸이 한창 활약할 때라 간혹 몽골군의 힘에 치를 떠는 사람들은 "칭기즈 칸은 존재가 사기" 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모든 몽골 유닛들에겐 "적을 겁에 질리게 한다" 라는 특성이 붙어있다. 따라서 공성전 말고 어지간한 부대 끌고 간 야전은 압도적 수로 밀어붙여도 모랄빵 맞고 끔찍한 사상자를 내게 된다. # 더불어 몽골은 자연 재해라는 말도. 몽골 때문에 나오는 인명 피해와 자금 피해가 흑사병보다 더할 정도이니 틀린 말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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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J. 칸

국적

몽골

생년월일

1162년 2월 19일

신장

170cm

체중

120kg

혈액형

O형

특기

좋아하는 것

몽골식 씨름, 레슬링

싫어하는 것

힘 센 여자

직업

정복자

격투 스타일

몽골식 격투기


월드 히어로즈에 등장하는 칭기즈 칸. 여러 가지로 유쾌한 아저씨. 왠지 이름이 바뀌어서 J.Carn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공략본에는 Julius Carn으로 나오기도 한다(...)[158]

사실 칭기즈 칸의 일본어 표기는 당시 기준으로 チンギス・ハーン(칭기스 하안)[159]이지만 본작품에서는 ジンギスカン(징기스칸)으로 표기된다. 원본과 차이를 주기 위해서 이름을 변형시켰는데, 한국 입장에서는 원본 이름과 더 가까워져버린 아이러이한 케이스.

검은색 갑주와 투구를 쓰고 덥수룩한 회색 수염을 기른 거한으로 묘사되는데 전체적인 이미지는 우리가 상상하는 칭기즈 칸과는 큰 괴리가 있다. 근데 키가 170cm밖에 안 되는데 거한? 거기에 체중은 120kg? 수치대로 보면 그냥 돼지다.

캐릭터 자체는 전형적인 파워형 캐릭터로 큰 덩치에 강하게 밀어붙이는 기술이 발달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그냥 쓸 만한 성능.

월드 히어로즈 퍼펙트 엔딩에선 하렘 엔딩. 근데 여자들이 있으니까 왠지 쑥스럽다고 한다. 역사상의 칭기즈 칸을 생각하면 개그 같지만 사실 부하들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여자를 취하지 않은 편이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정략성이라 의외로 들어맞는다. 그 외에 다른 편에서 엔딩을 보면 강한 남자와 결혼하길 원하는(...) 잔 다르크가 최종 승자인 칭기즈 칸의 강함에 반해서 청혼하며 달라붙자 식겁하며 달아나기도 했다.

기술을 찾아보면 패극도라는 돌진기가 주요 기술인데 카드 파이터즈에서도 랜덤으로 상대 캐릭터 1인에게 데미지를 주는 나름 쓸모 있는 카드로 되어 있다. 다이나마이트는 헤비 D!가 쓰는 솔 플라워와 비슷한 형태의 기술이며 JET 버전에서는 다운 포즈가 달라지는 속성이 붙어있다. 의외로 삼각점프가 가능하다.

9.4. 그 외 매체[편집]



여기서는 칭기즈 칸은 북미권에서 알려져있는 그의 성격인 무자비, 이기적인 이라는 뜻의 단어로 사용된다.


해당 항목 참조.

[1] 사망한 직후에는 쓰지 않았고, 손자 쿠빌라이 칸이 중국식 명칭을 도입하면서 추존된 것이다.[2]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현대 몽골에서 '칭기즈 칸 탄신일'로 기념하는 날은 1162년 11월 12일. 관련 기사[3] '칭기스(Чингис)'는 현대 몽골어로 '위대하다'를 뜻한다. 이에 대해 다양한 어원이 존재하는데 라시드 앗 딘은 칭의 의미는 '단단하고 강하다' 는 뜻이며 칭기즈는 칭의 복수형이라고 기술하였다. 또한 학자 펠리오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칭의 복수형이 칭기스가 될 수 없고, 호수, 바다를 의미하는 투르크어인 tangiz에서 온 것으로 추정했다. 이 견해를 받아들이면 칭기즈 칸은 사해의 군주, 세계의 군주라는 의미가 된다. 이 외에도 중국어 천자나 새가 우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에서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4] 현재 영어로는 'Yasa'나 'Yasaq' 등으로 칭해지지만, 현대 몽골어 발음은 '이흐 자슥'에 가깝다. 고전 몽골어 표기는 Yehe Zasag (예헤 자삭).[5] 단 러시아의 경우는 현대 러시아에는 몽골계 소수 민족이 많기 때문인지 서아시아처럼 무작정 부정되지는 않는 분위기다. 바이칼 호의 알혼 섬처럼 칭기즈 칸의 이름 값을 이용하기도 하고 차 브랜드로 칭기즈 칸이 있기도 하고..[6] 다만 그렇다고 해서 칭기즈칸의 모든 것을 옹호하는 건 아니고, "더 나쁜 놈이라고 볼 순 없지만 동시에 더 좋은 놈이라고도 볼 수 없다"고 얘기하며 팟캐스트 내내 칭기즈칸의 파괴와 학살을 옹호하는 수정주의자 역사가들을 대차게 비판한다. 아예 "몽골이 동서의 교류를 활성화시켜서 중국에겐 더 큰 도움이 되었다"는 학자의 말에 "당신이 당시 중국인이면 가족들의 목숨이랑 경제적인 부랑 비교를 할 수 있겠냐"라는 식으로 반박했다.[7] https://www.bioin.or.kr/board.do?cmd=view&bid=research&num=264400 [8] 금나라 여진족은 알 수 없지만 청나라 시대의 만주족 황실 역시 다수가 아닌 소수 유전자 그룹으로 많은 학자들이 결론 짓고 있다. http://www.nature.com/jhg/journal/v60/n6/full/jhg201528a.html,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1285168/ [9] Lister, R. P. (2000 c1969). Genghis Khan. Lanham, Maryland: Cooper Square Press. ISBN 0-8154-1052-2[10] 모토무라 료지, <말이 바꾼 세계사>.[11] 아이막(аймаг)은 한국으로 치면 도(道)에 해당하는 몽골의 행정 단위. 실제 발음은 '애맥' 에 가깝다.[12] 몽골의 시초 보돈차르의 직계손으로 불리는 씨족으로 훗날 테무진에게 갈리는 타이치우드, 주르킨과 함께 몽골의 칸을 배출한 하얀 뼈 씨족으로 분류되는 가문이었다. 서열로 따지면 위 두 부족보다는 낮지만... 모계도 명문인 올크누트 씨족이다. 예수게이금나라에 잡혀가 나무 당나귀(목마)에 못박혀 죽은 암바가이 칸의 손자였다고 한다. 암바가이 칸의 복수는 후에 몽골이 금을 공격할 때 대의 명분 중 하나였다.[13] 본래 올쿠누트 족은 몽골의 왕족들에게 딸을 시집 보내는 부족이었다. 예수게이의 보쌈은 자신들 몽골에게 시집 와야 할 여자를 다른 부족에 시집 보내는 올쿠누트 족에 대한 분풀이의 일환이었다는 말이 있다.[14] 이에 대한 보복으로 호에룬의 원래 신랑인 칠레두의 동생 칠게르는 훗날 테무진의 아내 보르테를 보쌈한다. 보르테는 무사히 구출되긴 하지만 그 직후 태어난 장남 주치는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되어버렸고, 아버지 칭기즈 칸은 주치를 아들로 인정했지만 그 부분은 평생 약점으로 남는다.[15] 당시 타타르는 금나라의 이이제이 정책의 파트너로서 초원의 제 부족들을 억압하던 강자였고 예수게이는 이에 대항하는 포지션에 있었다. 이후 금의 마름으로서의 타타르의 역할은 테무진이 토오릴 칸과 함께 금나라의 명령으로 타타르를 제압하면서 토오릴에게 넘어간다.[16] 세계적으로 유목민은 손님을 잘 맞아주는 전통이 있고, 지금도 중동 투아레그족부터 현대 몽골족까지 거의 보편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손님을 해치는 것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는데 예수게이를 손님으로 맞아들이고 독살한 것.[17] 당시 풍습상 어머니 호에룬과 벡테르가 결혼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18] 원조비사에는 테무진이 잡은 새와 물고기를 이복 형 벡테르가 빼앗았기 때문에 테무진이 그를 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어머니 호에룬에게 "친구라고는 그림자밖에 없는 처지에 자기 형제마저 죽인 놈" 이라며 욕을 들어먹었다(...).[19] 벡테르의 친동생이자 테무친의 이복 동생도 있었는데, 벡테르가 죽어가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핏줄이 이어가게 동생만큼은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이렇게 살아남은 테무진의 이복 동생이 바로 벨구테이였다. 그는 이후 이복 형인 테무진에게 충성을 다바쳐 수많은 전공을 세워서 몽골 제국 건국의 주역 중 하나가 된다.[20] "타르고타이"는 별명이며 키릴투크가 본명이다. 타르고타이는 뚱뚱한 사람을 뜻하는 몽골어로 실제로 키릴투크는 몽골 비사에 따르면 고도의 비만이라 말도 제대로 타질 못했다고 한다.[21] 이는 예수게이가 토오릴이 케레이트의 후계자 전쟁에서 밀리던 시절 그를 지지하여 역전승을 이끌어냄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다. 왕좌를 차지한 토오릴은 자기 형제들을 숙청하여 초원과 부족에서 평판을 잃는다.[22] 이때에는 토오릴 칸이라 불렸으나 후에 금나라에게 왕의 칭호를 하사받고 '옹 칸' 이라 불리게 되었다. 옹은 왕이란 뜻, 즉 왕 왕...[23] 메르키트 부족은 본래 테무진의 어머니 호에룬이 시집 가려던 부족이다. 아버지 예수게이가 메르키트 사람의 아내인 호에룬를 납치했으니 그 복수로 테무진의 아내를 빼앗아간 것으로 해석된다.[24] 몽골 족 중에서도 테무진이 속한 보르지긴 씨족과 같이 칸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명문으로 분류되는 검은 뼈 씨족인 자다란 족 출신이다.[25] 이는 『몽골비사』의 기록이다. 『집사』에는 메르키트 족이 보르테를 옹 칸에게 선물하고 옹 칸이 자신의 며느리뻘인 그녀를 테무진에게 돌려주었다고 적혀있다. 이 기록의 진위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어떤 학자들은 칭기즈 왕조의 후원을 받아 쓰여진 『집사』가 칭기즈 왕조의 명예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여 기록했고 메르키트를 약탈한 정당한 명분을 주어 자무카와 옹칸이 도와주었다고 보는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테무진의 미약한 세력을 고려하면 옹 칸이나 자무카 등이 그와 같이 움직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집사』의 기록이 더 설득력 있다고 본다.[26] 아내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게 그거 같긴 하지만.[27] 원조 비사에 따르면 자무카는 테무진에게 2인자 자리를 제안했지만 보르테의 반대로 테무진이 떠났다고 묘사하고 있다.[28] 이전 버전에서는 이때부터 칭기즈 칸으로 불렸다고 적혀있었으나 몽골 일부 종족의 칸이 되었을 뿐이고 그래서 단순히 테무진 칸으로 불렸다. 칭기즈 칸이란 호칭은 초원을 통일하고 나서 1206년 몽골 제국을 완전히 성립한 다음에 받은 칭호다.[29] 말을 중요시하는 유목 민족에게는 말 도둑은 무조건 사살이라는 불문율이 존재한다.[30] 몽골 초원의 전투 단위로 하나의 거대한 움직이는 유목민 진영이라고 거칠게 설명할 수 있겠다.[31] 집사에 따르면 쿠리엔(혹은 구리옌)이란 '고리'를 뜻한다. 한 종족이 어떤 지점에 진영을 칠 때 고리 같은 모양을 이루고 그들의 지도자는 그 원 안의 점처럼 위치했다. 블라디미르초프에 따르면, 이 쿠리엔은 유목 생활의 한 형태이기도 한데, 쿠리엔 외에도 아일 유목 방식이란 것도 있었다. 쿠리엔이 大牧群의 방식으로 유목을 하는 것이라면, 아일 유목 방식은 가축, 특히 말이 많은 부자가 단독 혹은 소집단으로 유목하던 것이었다. 따라서 아일 유목은 사회 질서가 안정된 조건 하에서 가능했다.[32] 이들은 13익 전투에서 자무카의 편에서 테무진에 대항했으나 자무카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테무진의 편에 서기로 하여 훗날 테무진의 듬직한 우군이 된다. 이들이 자무카를 떠난 계기는 치노스 족의 귀족들을 삶아 죽인 자무카의 잔혹성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원거리 기동전을 위주로 하는 몽골 전사들 중에서도 특이하게 근접 돌격전에 특화된 전사들로 후일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나 차키르마우트 전투 등의 대회전에서 몽골군의 전위대로 대활약한다.[33] 혈통 면에서는 보르지긴보다 우위에 있는 말하자면 하얀 뼈였다.[34] 원조비사에 따르면 이때 주르킨 사람들이 테무진 칸의 집사장인 시키우르를 술 따르는 순서를 틀렸다 해서 구타하는 등 무례를 범했으며 주르킨 씨족의 씨름꾼이었던 부리가 테무진 칸의 이복 아우였던 벨구테이와 말다툼을 하다가 칼로 베어 부상을 입혔다고 한다. 즉 테무진 칸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할 일이었다는 사실. 후일 토오릴과 함께 타타르를 제압하고 온 테무진 칸이 여세를 몰아 주르킨을 갈아버리면서 피지배층이 된 주르킨의 부리는 벨구테이와 씨름을 하고 각본에 따라 벨구테이는 부리의 허리를 부러뜨려 죽인다.[35] 근데 웃긴 건 몽골에서는 축제장에 무기를 들고 가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럼 연회장에서 무얼 들고 싸웠냐면 국자와 나무 판대기(...).[36] 본명이 아닌 왕경의 승상이란 금의 직책명이다. 조선으로 치면 좌의정. 몽골 발음으로는 옹깅칭상.[37] 주르킨 족의 족장이었던 사차 베키는 타타르 정벌 당시 자신의 주군이었던 칭기즈 칸에게 협조도 안하면서 오히려 빈집 털이를 시도하는 등 온갖 못된 짓을 골라했기 때문에 테무진 칸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물론 이는 사차 베키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목민들한테서 흔하게 일어났던 일이다. 물론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38] 비사와 집사의 기록이 상충되어 있어서 여러모로 헷갈리는 부분이 많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 옹칸의 세력이 매우 약화된 상태였음은 분명하다[39] 라시드 앗 딘의 기록에 따르면 타이 부카는 별칭으로 타양칸이라 불렸는데 칸의 아들인 타이는 "왕"이라는 호칭을 받아 타이 왕이라 불렸는데 이게 잘못 알려져 타이왕->타양이라 불렸고 여기에 "칸" 호칭을 붙여 타양 칸으로 잘못알려졌다고 한다[40] 둘의 아버지는 '빌게 부쿠 칸'이라고 라시드는 기록한다.[41] 러시아 투바공화국 예니세이 강 상류지역[42] 7깃발을 가진자라는 뜻[43] 비사에는 부이룩칸에 대한 원정이 자무카의 구르칸 선출 이후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원정 당시 자무카가 옹칸의 진영이 있다는 사실 등과 모순된다. 구르칸 즉위 시기는 1201년이다[44] 사브락 지역의 목쉰사람이라는 뜻으로 천식환자로 추정된다[45] 원조 비사에서는 이를 자무카가 부추겼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46] 훗날 사준사구로 불리는 4명의 장수[47] 비사에 이 전투에 대해 서술되어 있는데 자무카 연합이 주술을 일으키는 자다라는 돌을 가지고 승리하려했지만 오히려 비바람이 본인들에게 휘몰아쳐서 흩어져버렸다고 되어있다.[48] 당시 타이치우드의 지도자 '뚱보 칸' 타르쿠타이는 예수게이가 죽자 테무진을 버리고 몽골 족들을 끌고 갔으며 테무진이 벡테르를 죽이자 버릇을 고쳐준다는 명목하에 그를 납치해 조리돌림한 바 있다. 테무진 입장에서는 철천지 원수다.[49] 그런데 현대 의학 관점으론 이 행동은 하등 좋을 게 없는 헛짓이란다(...) 오히려 그 가공할 충성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고.[50] 아무리 인재라고는 하나 칸을 죽일 뻔한 자를 그냥 등용하기엔 면목이 안 서기에 한 거란 해석이 주류다. 칸을 죽일 뻔한 지르고가타이는 소멸하고 새로이 칸의 부하인 제베가 생겼다는 일종의 사회적 의식인 셈.[51] 한때 초원의 절대 강자였던 타타르는 이때 수레 바퀴 크기보다 키가 큰 성인 남자가 모두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테무진은 잔여 세력인 여자와 아이들을 모두 몽골의 집안에 편입시킴으로써 이후의 타타르 세대를 자기 세력 안에 편입시킨다. 그리하여 이후 세대의 타타르는 테무진의 몽골 울루스의 일원으로 충성을 다했고 바투의 서방 원정의 주력으로 활약함으로써 서방 세계에 몽골의 이름이 타타르로 알려지는 데에 일조한다.[그] 외에도 적에 의해 퇴각하면 처음 공격한 곳으로 돌아오라는 명령도 내렸다. 이러한 명령은 규율 잡힌 군대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것이기도 했다.[위]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모든 전리품은 테무진 자신의 것이며, 자신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 규율로써 자신의 아들들이 이를 어겼을 때도 엄청난 분노를 표했다[54] 이때 옹 칸 측에 아들 주치의 혼인 면담을 하러 수행원 몇 명만을 데리고 길을 떠나던 테무진은 케레이트 측의 두 평민이 위기를 알려주어 이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테무진의 평판이 부족을 막론하고 초원의 피지배층 전반에 호의적이었다는 증거. 이때 테무진 측은 수행원 몇 명으로 시작하여 하룻밤 사이에 한반도 크기에 달하는 영지 전체의 유목민들에게 총동원령을 전달하여 군대를 소집하는 괴물 같은 능력을 보인다. 세계 정복 이전부터 그 포텐이 비범한 유목민들(...) 참고로 사조 영웅전에서 곽정이 테무진 칸과 처음 만나는 장면이 바로 이때이다. 즉, 테무진 칸에게 배신을 알린 두 평민이 바로 곽정과 이평(곽정의 어머니)인 셈.[55] 비사에 따르면 이때 자무카가 테무진에게 케레이트족 군대의 배치와 전열에 관해 알려주었다고 한다.[56] 후에 옹 칸은 나이만 족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보초병들이 옹 칸의 꾀죄죄한 행색을 보고는 당신이 어떻게 옹 칸일 수 있냐면서 내쫓았지만 옹 칸이 자꾸 우기자 화가 난 보초병이 냅다 죽여버렸다(...). 셍굼은 황무지로 도망쳐 마적이 됬다가 자기 부하에게 배신당해 죽었다. 그리고 이 부하도 테무진 칸에게 사형당해 죽는다. 테무진 칸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을 좋아했다 카더라. 군신간 관계도 약속으로 봤다.[57] 그 유명한 수부타이에게 철제 마차를 하사해 메르키트를 섬멸할 것을 명한다. 그리고 수부타이는 명령대로 조지아까지 쫓아가 임무를 수행한다.[58] 몽골 초원의 전통 신앙에 따르면 몸에서 피가 나며 죽은 영혼은 하늘 신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몸에서 피가 안 나게 죽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죽음이었다고. 자무카가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는 이야기마다 전부 다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59] 라시드 앗 딘이 저술한 집사에 따르면 뭉릭의 아들 쿠쿠추가 이 칭호를 정했다고 한다. 칸이라도 이름 외에 다른 칭호를 쓰는 건 드문 일이고 세력이 강대한 경우나 옹 칸의 경우처럼 금에 의해 왕으로 봉해진 경우에 제한적으로 쓰인 일종의 정치적, 군사적 의도가 내포된 것이다.[60] 아버지 예수게이의 충실한 부하였던 콩코탄 씨족 뭉릭 에치게의 아들 쿠쿠추 텝 텡그리(Kököču Teb-Tenggeri). 쿠쿠추는 이름이고, 텝 텡게리는 칭호. 이 칭호의 의미는 간략히 말하면 '天巫', '드높은 천신' 정도가 된다. 텝 텡게리는 테무진이 초원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면서 초원의 여론을 테무진 측으로 이끌어온 공신이었다.[61] 잭 웨더포트를 포함한 연구자들은 칭기즈 칸이 무당의 영적인 힘을 두려워해서 그랬다고 생각했지만 칭기스 칸은 자신을 배신하려는 무당의 허리를 꺾어 죽인 뒤 시체를 치우고 그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영적인 것을 두려워해서 벌인 행위로 보긴 어렵다.[62] 여기서 설명되는 텝 텡게리의 일화는 몽골 비사의 내용을 근거로 하는 것인데, 집사에서는 이와 다르다. 집사에서는 처음부터 카사르와 칭기즈칸이 쿵짝이 맞아서 둘에 의한 텝 텡게리 살해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는 집사가 일 칸국에서 권력 투쟁이 심각했던 시기를 딛고 작성되었기 때문에, 몽골 황금 씨족들의 화합을 호소하는 목적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어, 황금 씨족 간의 분란을 최대한 숨기려는 의도로도 보인다.[63] 자신의 아내가 메르키트 족에게 납치 당했었던 칭기즈 칸의 괴로운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 같다.[64] 당시 서요는 몽골 통일 이후 칭기즈 칸에게 쫓겨난 나이만 세력이 장악한 상황이었다.[65] 일가가 완전히 망해버린 후 거의 맨땅에서부터 일어났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다른 부족들에게 많은 굴욕도 당했고 단순히 전쟁능력만으로 따지면 대등했던 자무카가 버티고 있었다. 실제로 자무카를 넘고부터는 몽골 통일 과정 또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66] 몽골 통일이 1209년이고 칭기즈 칸 사망년도가 1227년이다.[67] 삼국지에 자주 나오는 티베트계 강족의 후손이다.[68] 사실 서하군이 몽골군보다 약해서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몽골군은 서하의 '흑장군'이라 불리는 장수가 지키는 카라호토라는 성을 공격하다 크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서하는 대대로 중개 무역으로 국가의 부를 쌓아오던 나라였는데 전쟁 상황에서는 성에 들어가 농성을 해야되기 때문에(특히 적이 위에서 언급했듯이 기동력을 이용한 산개 전술을 펼칠시) 제대로된 무역이 어렵다. 결국 계속된 몽골 침략은 국가 경제를 붕괴시켰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서하에는 지진이 잦았다.[69] 당시 동아시아의 주요 강국들이 몽골군과의 회전에서 맥을 못추는 이유를 군대의 편제 차이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동아시아의 주요 강국들의 군대의 주축이 되는 병종은 중갑을 입은 중기병이었는데 이러한 중기병은 보병을 상대로는 매우 유리하지만 기병끼리의 전투에서는 매우 불리하다. 당시 몽골군은 경기병 위주로 편제되어있었고 이는 적과의 대규모 회전에서 몽골군을 최강으로 만들어주어 어떤 적도 몽골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게 했다... 는 것인데 실상 중기병은 기병간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나타난 병종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많이 부정되는 가설이다. 물론 그 우위라는게 당시로서 이미 2천 년 전 일인 데다가 중기병은 전술적, 근접전에서나 강하지 전략적으로는 불리한 점이 많은 병종인 건 사실이다.[70] 이것이 반간계라는 기미책의 한 전략으로서 분할하여 지배하라는 전략이다. 큰나라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힘을 못 키우게 견제하는 방법이다. 물론 원정을 통해 조져버릴 수도 있으나 예나 지금이나 원정은 돈이 엄청 많이 든다. 이럴 때 싸고 효과도 좋은 것이 바로 반간계이다. 그러나 반간계를 이겨내고 힘을 키워 오히려 자신들에게 반간계를 사용한 커다란 나라를 작은 나라가 역관광해주는 경우도 역사에 비일비재했다. 금나라도 마찬가지로 요나라가 여진 부족들에 행한 반간계를 극복하고 요나라를 정복하였고, 자신들이 반간계를 행한 몽골에게 정복당했으며, 그 후예인 만주족들 역시 반간계를 극복하고 청나라를 건국한다.[71] 사실 거용관은 대대로 난공불락의 요새로 심지어 중일 전쟁 때도 교전이 벌어진 적이 있다. 복원이 잘 되어 있으니 사진을 검색해보기를 추천한다.[72] 이때 만리 장성 부근에 거주하던 옹구트족의 도움을 크게 받았는데 이후 옹구트 족은 칭기즈칸의 신임을 받으며 몽골 제국에 대대로 중용된다.[73] 이때 포위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중도성 내부에 식량이 다 떨어져 사람들이 인육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74] 나무 위키의 서요 항목이 부실한 관계로 당시 상황을 본문과 주석을 통해 간략하게 설명한다.[75] 나이만의 타양칸의 아들이다.[76] 서요는 요나라의 황족 야율대석이 그 지방의 모든 이민족을 누르고 중앙 아시아에 나라를 세운 후 대대로 그 곳에서 대빵 노릇을 하고있었는데 서요 내부의 정치 다툼으로 제국이 분열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여러 속국들이 자립한다.[77] 비참하게 죽은 마지막 황제를 부르는 비공식 호칭이다. 왜 비공식 호칭이냐면 나라가 통째로 망해서 시호를 올려줄 신하조차 없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비슷한 처지의 인물로는 서하의 말제 이현기네스북에도 오른 금나라의 말제 완안승린이 있다.[78] 당시 호라즘은 서요에게 틈만나면 압박을 받는 일종의 속국의 처지에 있었는데 무함마드(밑에도 언급되겠지만 칭기즈 칸의 침공을 받고 쫒겨다니는 호라즘의 샤(왕))에 의해 서요에게서 자립하고 전성기를 막 열려는 상태였다.[79] 호라즘 왕국 항목에도 있듯이 호라즘은 서요에게서 완전 자립한 이후 전성기를 맞으려던 와중에 칭기즈 칸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전성기를 제대로 맞지도 못한채 멸망한다. 안습[80] 이전 문서에는 야율직로고가 폐위 직후 바로 살해당했다는 듯이 서술되어 있었는데 야율직로고는 그 이후에도 명목상으로는 상황 대접을 받으며 2년을 더 살았다. 그의 죽음이 살해인지 병사 혹은 자연사(...)인지는 추가 바람.[81] 당시 서요의 피지배층이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 이민족이기 때문에 불만은 더 심했을 것이다. 서요는 소수의 거란족이 다수의 이민족을 지배하는 전형적인 불안정한 정복 왕조로 나라가 혼란에 휩싸이자마자 붕괴했다.[82] 쿠출루크는 칭기즈칸에게 대패하고 살해됐기 때문에 서요의 '결제'라고도 불린다.[83] 처음으로 호라즘 왕국에서 상인이 왔을 때 상인들 중 한 명이 몽골인들을 자신들이 가진 보물 같은 건 못 본 촌놈들이라고 우습게 보고 바가지를 씌우려 하자 몽골인들은 되려 금나라에서 약탈해온 금은보화를 보여주며 "이것을 봐라!" 하며 그의 물건을 빼앗았다. 그 후 다른 상인들이 더 이상 바가지를 씌우지 않게 되자 몽골인들은 처음에 물건을 뺏은 상인을 포함해 모든 상인들에게 물건 원값 이상의 돈을 주면서 화해를 청했다고 한다.[84] 당시에 수염은 남자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를 깎여버린 것은 곧 거세와 비슷한 굴욕이었다. 물론 수염은 다시 자라지만 거세당한(...) 거시기는 다시 자라지 않는다.[85] 녹인 은, 녹인 금, 끓는 수은... 언급하는 곳마다 말이 다 다르다. 2005년에 공중파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칭기즈 칸에서는 '녹인 금' 설을 채택했다. 확실한 것은 그의 탐욕을 조롱할 겸 이런 방식으로 죽였다는 것.[86] 이때에 칭기즈 칸의 아들들인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 등이 우룽게치 성을 빼앗고 서로의 몫을 챙기면서 아버지의 몫은 쏙 빼놓는 일이 일어났다. 칭기즈 칸이 이를 알고는 아들들을 크게 꾸짖었는데 곁에 있던 부하들이 "천하가 칸의 것인데 쪼잔하게 굴지 마세요. 그러다 애들 기 다 죽입니다"(...) 라고 말리자 그제서야 화를 풀었다고 한다.[87] 당시 서하가 한 행동들을 보면 이해가 되지않는 부분이 있다. 무슨 말이냐하면 서하는 당시 지속적인 몽골의 침공과 자연 재해(지진)로 나라가 크게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어려운 때에 오히려 금나라를 공격하는(금나라에게 몽골을 함께 막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행동을 한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그렇게 쥐어짜서 간 금나라 공격은 대실패였고 많은 군사만 잃었다.[88] 여담으로 이런 병크는 금나라도 터트렸는데(...) 몽골의 끊임없는 습격으로 제국이 황폐화되가는 와중에도 집요하게 남송을 공격했다. 공격은 당연히 모두 막혔고 서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많은 군사만 잃었다.아무래도 몽골의 공격은 별로 의식되지는 않지만 매우 치명적인 어둠의 공격인가 보다. 다크 템플러?[89] 이때 야사감푸는 죽는 순간까지 칭기즈 칸에게 소인배라고 욕했으나 칭기즈 칸은 대인배답게(...) 웃으면서 무시했다.[90] 이때 얼마나 파괴가 극심했는지 현재도 제대로된 서하의 유적은 찾기가 어려워 서하 문명의 실체를 밝히는데 애를 먹고 있다(...).[91] 몽골군이 서하인들을 대부분 죽여서 현재 서하인의 후손이 별로 없는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그것보다 더 정확한 이유는 바로 서하가 멸망한 후 서하인들이 몽골 제국의 일부가 되어 몽골 제국에 완전히 융화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나라 건국 후 적지 않은 서하인이 원나라 조정에 등용되었다.[92] 당시 금나라는 남송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우리가 망하고 나면 다음은 너희야!' 하고 울부짖었지만 남송에게 있어서 금나라는 몽골보다 더 혐오스러운 나라였고 결국 금나라 사신은 쫒겨난다. 그런데 사실 금나라 입장에서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데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금나라는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남송을 공격하고 통수를 쳤다. 하루 빨리 남송을 정복하여 남송의 자원을 바탕으로 몽골에 저항할 생각이었는데 남쪽으로 수도를 옮길 정도로 몽골에게 처절하게 털려 목숨이 간당간당한 나라가 자신들의 전성기에도 정복하지 못했고 훗날 40여 년간 세계 최강국과 치고박고 싸우는 당시 세계 제1의 경제 대국을 친다는 것 자체가...[93] 정확히는 12시간. 즉 한 나절.[94] 모든 15세 ~ 70세 사이의 남자는 전사로 명시했다. 당시 몽골에서는 전사의 위상이 높고 대장장이, 양치기 등은 하층 계급으로 이해되었는데, 이 제도를 통해 사실상 신분제를 철폐하고 인구의 군사화를 추진한 것. 여성은 이 룰에서 예외라 한계가 있긴 하지만, 당시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비교적 여성의 위상이 높은 편이었다. 그리고 유목민 사회 여성이 당하기 쉬운 약탈혼을 법으로 금지한 점도 나름대로 평가할 만하다.[95] 몽골의 신앙은 하늘(Tengri) 숭배 수준이었지 별다르게 조직화된 것이 없었다. 유입된 종교도 별로 높은 수준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해서 '하늘 숭배' 를 직접적으로 배격하지만 않는다면 종교들은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개중에 기독교도 있었다고 한다.[96] 단, 후대 몽골 제국 원나라에서는 1위 몽골인, 2위 색목인, 3위 화북인, 4위 강남인 순으로 등급을 나눠 관직 진출이 가능한 한계나 직업의 자유, 거주지 이전의 자유 등을 제한하며 철저한 인종 차별 정책을 펼쳤다. 참고로 고려인은 3순위였다. 다만 원나라가 워낙 방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어서 인종 차별을 할 행정력이 부족하고 또 이주 정책 등으로 동화하려는 정책을 펼치지 않아서 체감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97] 물론 후대 원의 경우 행정력이 미치는 중심부에서는 구분이 철저하게 이루어졌고 계급마다 부르는 명칭도 달랐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이 인종 차별 정책이 아니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몽골 제국이 복속민들의 고유한 풍속(예를 들어 법규 적용에서 몽골인에게는 자삭을, 중국인에게는 중국 법규를, 색목인들에게는 각자 귀속된 집단의 법규를 적용.)을 인정해주기 위해 이런 정책을 행했다는 것이다.(출처 :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김호동)[97] 같은 지역 내에 다른 민족이 없다면 차별이 있어도 의미 없기 때문이다.[98] 처음부터 격이 낮았다면 실력을 입증한 것이니 조롱은커녕 칭송을 받았겠지만 잘 나가던 명가에서 몰락했다가 고생 끝에 겨우 숨 좀 돌린 처지가 된 주제에 의도했든 아니든 자신들보다 윗줄이라 나서는 모양새였으니 다른 명문 귀족들 입장에선 조롱할 만도 했다. 그리하여 망했어요[99] 당장 자무카와의 대결인 13익의 전투 때 본인 직계가 아닌 친족들로 이루어진 익들은 대다수 항복하였다. 또한 함께 고생했던 친동생 카사르조차 반란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서 견제했던 적이 있을 정도. 반면 테무친에게 친형 벨테르가 살해되었던 이복동생 벨구테이는 단 한 번도 불온하게 움직인 적이 없었기에 신뢰받았다.[100] 밑바닥까지 떨어져 고생했던 경험에서 나온 건진 몰라도 칭기즈 칸은 Give & Take 이상의 충성을 부하들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 "전황이 불리하면 도망쳐라" 가 몽골 제국의 정식 군율 중 하나였을 정도.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부하들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받았으며(오늘날엔 별것 아닌 것 같아보여도 그 당시까지 초원은 우두머리가 모든 걸 갖는 독식 체제로 군주들 중 칭기즈 칸처럼 Give & Take의 원칙을 따른 사람은 없었다) 그 부하들 중에서 배신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칭기즈 칸의 부하 중 한 사람이 남긴 기록 曰 "그가 물을 가리키면 물에 뛰어들고 불을 가리키면 불에 뛰어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배신에 대한 뼈아픈 경험 때문에 나온 Give & Take 정책이 부하들에게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주군' 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이끌어냈다는 얘기다. 참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101] 또한 이런 Give & Take 정신은 스스로도 철저히 지켜 먼저 요구하지 않은 신하의 단독행동이더라도 충성을 보였다면 충성에는 반드시 상응하는 보상을 수여했다. 신하들의 의욕이 높았던 것은 당연지사.[102] 엄밀히 말하자면 몽골이 통합될 수 있었던 것도 금나라의 쇠퇴기가 영향이 있을 것이다. 금나라의 영향력이 몽골에 닿는 시대라면 통합하기 어려우니까.[103] 칭기즈 칸은 금나라 장군 흘석렬구근(紇石烈九斤)/완안구근(完顔九斤)의 부대를 격퇴했는데 다퉁에서는 빗나간 화살을 맞아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104] 이는 그가 12살 때 나이로는 형이었던 이복 형제 벡테르를 죽이는 데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105] 이게 악명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몽골족은 유목 민족이라 도시의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갈아버렸지만 정복 당한 사람들은 도시민들(고려부터 유럽에 이르기까지)이니 당연히 악마처럼 보일 수밖에.[106] 이는 원조 비사 자체가 문자가 없던 시절 구전에 의존해 역사를 전한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운문으로 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무사의 경우 이 원어를 그대로 작중 말풍선에 복붙하여 읽다보면 몽골 사람들이 래퍼로 느껴질 정도다.[107] 패배는 패배지만 그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에서도 케레이트의 군기를 빼앗고 주요 지휘관 중 한명인 옹 칸의 아들 셍굼을 부상입히는 전과를 올린다. 물론 이건 칭기즈 칸의 종친인 주르체데이와 쿠일다르의 활약이 컸지만 케레이트의 기습에서 벗어나서 얼마 안되는 생존 병력을 모아서 케레이트와 혈전을 벌일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기는 했다.[108] 대표적인 사례로 통일 몽골 제국 군대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잘랄 웃 딘도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휘해서 격파했다.[109] 이 공동체는 사실 현대인의 입장에서도 단순히 공평할 뿐 아니라 전쟁 시스템적인 측면에서 매우 효율적이다. 타타르 학살을 위시한 몽골의 세계 정복 과정에서의 학살 과정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공장작업 공정과도 유사하게 진행되는 측면이 있다. ㄷㄷㄷ.[110] 한 이맘과의 대담에서 이맘이 칭기즈 칸이 지나치게 학살을 하여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것이라 하자 이 세상엔 수많은 왕들이 있고 그들이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111] 다만, 테무진 to the 칸 시리즈의 경우 엄밀한 역사 서술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 형태로 풀어 들려주는 내러티브 히스토리의 특성을 가지고 있고, 이런 서술 방식은 필연적으로 저자의 감상이나 관점이 강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읽을 때 다소 주의할 필요는 있다. 예를 들어, 해당 기사의 경우 징기스 칸의 인간적 측면에 무게를 싣고 서술했지만... 사실 징기스 칸은 인간적이고 공정한 면모와는 별개로 죽이기 시작하면 정말 미친듯한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사람이었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112] 더불어 자무카의 전술적 능력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 거진 항우 수준으로 보고 이후 몽골의 전술, 전략 및 병기가 자무카에게서 나왔다는 식의 서술이 되어 있는데 물론 근거가 없는 소리다. 애시당초 둘의 전술적 능력은 엇비슷한 정도였으며, 초원 전투 때 전술에 대해 상세히 언급한 것은 나이만 전투 때 칭기즈 칸의 지시 말고는 거의 없다. 그리고 자무카가 만들었다는 갑옷 양식들은 당연히 이전부터 있는 갑옷. 어디까지나 해당 기획물은 인터넷 연재물인 것을 기억하자. 다시 말해 저 칼럼을 근거로 해서 몽골 관련 문서들을 수정하지 말자[113] 대표적인 예로 몽골은 씻을 때 그 기운이 빠진다고 여겨 세정 의식을 거부했지만 이슬람교는 세정 의식을 중시한다. 또한 이슬람에서 가축을 도축하는 풍습은 피를 신성시한 탓에 가축을 잡을 때도 가슴 부위만 약간 절개한 뒤 손을 집어넣어 심장 동맥을 따서 즉사시키는 도축 방법을 쓰던 몽골인들과 큰 차이를 보였다. 이 때문에 이슬람교와 몽골 정복자들의 갈등은 컸다.[114] 그의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도 비슷한 말을 했다. 대충 "걔네들이 개기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을..." 로 요약할 수 있겠다.[115] 일례로 몽골 통일 때 오로오드 족의 수장으로 자무카의 부하였다가 13익 전투에서 패배한 자신을 따라온 주르체데이(Jurchedei)의 경우 천호장으로 만들고 자신의 아내 중 한 명을 주기까지 했다. 자신을 진심으로 따른 부하들에겐 더 없이 너그러운 사람이었다.[116] 당연히 몽골의 기록만 봐도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긴 했다. 금지 이후에도 고문했다는 출처 추가 바람.[117] 당시 몽골인들은 피를 영혼과 연결된 것으로 생각해 피를 흘리지 않는 죽음을 명예로운 것으로 여겼다.[118] 이는 러시아의 공국들이 몽골한테 240년이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소련의 영향권에 휘둘리던 공산주의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정작 칭기스 칸 시절에는 몽골군이 유럽 근처에도 안갔었고, 오고타이 칸때 동유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119] 다만 몽골 문자는 본국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고 오히려 중국 내몽골에서 자주 쓰이는 희한한 상횡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처이발상 시절에 문자 개혁을 한답시고 표기 문자를 키릴 문자로 갈아엎었고, 공산 체제가 붕괴 된 히우에 다시 한 번 문자를 되돌리려고 했지만 키릴 문자 표기가 확고히 정착된데다가 이미 가로 쓰기에 익숙해있던 몽골인들에게 세로 쓰기로 표기하기 때문에 가독성에서 문제가 있어서 되돌리려는 노력이 실패했기 때문. 반면에 내몽골 지역에서는 표기 문자를 갈아치우지는 않았고 덕택에 현재까지도 내몽골 지역의 몽골어는 몽골 문자로 표기된다.[120] 울란바토르 중심지의 광장. 원래 수흐바타르 광장이었는데 이름을 바꿨다. 공산 혁명의 영웅 수흐바타르도 과거엔 거의 국부, 공산주의에서 벗어난 지금도 존경받고 있지만 칭기즈 칸에 비하면 밀리고 있다. 다만 광장 이름을 바꾼 지 얼마 안 되어 여전히 시민들은 수흐바타르 광장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121] 사실 몽골의 고려 침략은 오고타이 칸쿠빌라이 칸이 주도했고 칭기즈 칸은 별 관련이 없기는 하다. 몽골이 고려를 침공할 당시에 칭기스칸은 이미 사망한 뒤였으니..[122] 이건 아틸라의 훈족이 동유럽에서 깽판 치던 시절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나왔던 소리이기도 하다.[123] 당시 이슬람 세력은 여러 분파로 나뉘어 있어 같은 무슬림끼리도 분쟁이 잦은 환경이었다.[124] 그리고 원정이 대체로 순탄하게 진행된 러시아와는 달리 동유럽 지역에서는 몽골군이 남송에서처럼 고전한 일도 많다.[125] 다만 러시아에서의 이미지는 당연히 좋지 못하다.[126] 칭기즈 칸 본인은 러시아로 간 적이 없다.[127] 근데 정작 타타르는 칭기즈 칸의 부족과는 전혀 상관 없는 유목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거기다가 투르크계이기도 하다. 다만, 타타르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근대 이전의 유럽인들이 말하는 타타르란 그냥 유라시아 북부 스텝 벨트의 유목 민족을 싸잡아 말하는 표현이다. 꼭 칭기스 칸의 철천지 원수 타타르 부족이나 명이 책봉한 달단부를 지칭하는게 아니다.[128] 실제로 러시아/역사 항목이나 모스크바 대공국 문서에 일괄적으로 이런 식으로 '몽골 덕분에 러시아가 통일되어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 이라는 서술이 현재 전부 수정되었다. 방금 언급된 항목들에서 반박된 바와 같이 몽골의 러시아 지배 중 부작용으로 발생한 일부 긍정적 측면에만 집중하고, 몽골로 인해 러시아가 입은 막대한 피해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편파적이고 왜곡된 주장도 섞여있다고 봐야 한다. 당장 몇줄 위의 서술처럼 '러시아 지방은 춥기만 하고 아무 쓰잘데기 없는 땅' 이라는 인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 키예프-루시의 중심지인 키예프 일대는 유럽 전체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곡창 지대 중 하나인 흑토 지대(체르노젬)으로, 농업 생산력이 곧 인구 부양력과 국력의 척도이던 당시 기준으로는 꿀땅도 이만한 꿀땅이 드물었다. 그리고 몽고 침략 이전까지 동로마 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직접 받았던 러시아의 문화적 수준 역시 당시의 서유럽보다 높으면 높았지 절대로 낮지는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라고 하면 춥고 척박한 땅이라는 이미지야말로 몽골 제국의 정복 이후 형성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몽골의 침략 이후 현재의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에 해당하는 키예프 - 루시의 중심 지역이 약탈과 학살로 철저하게 파괴되면서[129] 러시아의 중심지가 춥고 척박한 동북쪽으로 이동한 것. 결국 키예프 루시의 공국 중에서는 후발주자로써 세력이 작은 편이었던 모스크바 공국이 킵차크 칸국의 세금 수취를 대리하는 과정에서 세력을 축적하여 러시아를 통합하게 되지만... [129] 당시 키예프 루시와 동부 슬라브 문화권의 중심도시였던 키예프의 경우, 인구 수만의 대도시에서 살아남은 자는 높게 잡아 수천, 낮게 잡으면 수백에 불과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철저한 파괴를 겪었다.[130] 실제로 1960년대에 교육부 장관이 칭기즈 칸 관련 유적을 발굴하다가 (소련의 외압으로)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얼마 후 살해되었다. 구 소련의 소인배 인증[131] 메르키트는 칭기즈 칸의 어머니 호에룬과 혼인이 예정되었던 칠레두의 부족이고, 칭기즈 칸의 아내인 보르테를 납치한 부족이기도 하다.[132] 칭기즈 칸에게 원한을 품은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두명이었겠냐마는 여인이 자신의 중요 부위에 날카로운 비수를 넣어두고, 검열 삭제 시 칭기즈 칸의 그곳이 잘려 죽었다는 야사도 전해진다.[133] 당시 몽골식 장례는 시신을 말에 실은 후 달려나가서 말이 지쳐서 멈춰선 곳을 파서 돌로 시신 주변을 두르고 묻는 것이었다고 한다. 칭기즈 칸의 경우 그의 충복이 서너 명의 종자만 거느리고 한밤중에 말을 달려서 멈춰선 곳에 매장했다고 한다. 천하를 제패한 대칸의 장례로는 너무 소박한 것 같지만 그야말로 몽골인이었던 칭기즈 칸의 장례로 어떤 의미로는 적절하다고도.[134] 그리도 열심인 것이 중국 및 몽골 지배에 칭기즈 칸이 일본인이라고 어거지를 부려 정당화하고자 하려고 했다. 참고로 북경 원인 같은 뼈까지도 일본은 당시 손에 넣으려고 했었다. 북경 원인이 일본인의 조상이며 그러니 당연히 중국은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는 억지였지만.[135] 반대로 호라즘 왕조의 잘랄 웃 딘의 경우 할머니에게 암살 당할 뻔한 것을 정작 그가 제거된 후 후계자로 옹립될 예정이었던 동생이 이를 거부하고 형에게 달려가 알린 덕분에 목숨을 건졌을 정도로 형제 간 사이가 좋았다. 잘랄 웃 딘의 활약을 칭기즈 칸이 보고 "저런 아들을 둔 아버지는 행복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전승이 있는데 형제간의 우애를 알았다면 더더욱 부러워했을지도?[136] チンギス・ハーン(친기스 한)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137] '그들의 여자를 취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버전이 많이 알려져 있다.[138] 칭기즈 칸을 Bad Ass로 보는 사람 중엔 그를 Bad Ass 중에도 최상급으로 치는 사람이 많다. Urban Dictionary에서 Genghis Khan 항목 참조.[139] 이 말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칭기즈 칸 캠페인에서 칭기즈 칸이 죽을 때 한 말로 나오기도 한다.[140] 반대로 어렸을 적부터 무예가 뛰어나지 않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벡테르를 죽일 때 동생 카사르가 벡테르를 쏘기 위해 시선을 끄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카사르가 성인이 되고 나서 칭기즈 칸의 수하 중 손에 꼽는 명궁임을 감안해도 몽골 풍습상 사냥 실력이 서툰 미끼 역할을 했다는 게 평가를 알 수 있는 부분.[141] 백호 메타트론이 NO.1 바보라면 테무진은 NO.2 바보라고 한다.[142] 더 싸우겠다고 발악하는 걸 주치가 뒷치기로 기절시키고 끌고갔다.[143] 풍선을 이용해 건물 자체를 날게 한다(...)풍선도 깨알같이 록키와 불윙클(...)[144] 이건 단순히 화력 부족일 가능성이 높은 게 시즌 4 크리스마스 스페셜인 저주받은 자들의 항해에선 우주 여객선 타이타닉(...)의 함수에 부딪쳤을 때 타디스 벽이 뚫렸다.[145] 주연은 내몽골 출신 배우인 빠썬(Батдоржын Баасанжав, 중국명 巴森扎布)으로 영화 '적벽 대전' 에서 관우 역을 맡았다. 2001년에 방영된 사극 '호조 도키무네'에서는 쿠빌라이 칸 역을 맡았다[146] 타타르 족이 몽골 족과 메르키트 족을 싸움붙이기 위해 자신들을 예수게이의 몽골 족이라고 속인 것으로 나오고 진짜 예수게이가 호엘룬을 구해주고 아내로 삼는 것으로 나온다.[147] 다만 베이징 학살극을 생략한 것의 경우 해당 드라마가 중국령 내몽골 자치구가 아닌 몽골국에서 제작되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듯 싶다. 아니, 칭기즈 칸 치세 몽골 제국의 만행이, 중국에서 만드는 경우보다도 더더욱 심하게 생략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몽골인들의 역사적 영웅이 악당 보스처럼 묘사되면 몽골인들의 입장에선 기분이 안 좋을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148] 다만 사극 마니아들에겐 반응이 좋았던 편이다.[149] 몽골은 반중 감정이 심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몽골을 소재로 만든 영화나 드라마를 광장히 싫어한다.[150] 참고로 주인공 테무진의 한국판 더빙 성우는 어린 시절은 강미형이, 청년기는 강수진이, 장년기는 이정구가 맡았었다.[151] 기본적으로 삼국지 시리즈에 출연하는 고대 무장은 삼국지의 등장 인물들보다 미묘하게 능력치가 낮게 나온다. 텃세라고 봐도 될 듯.[152] 심할 정도로 삼국지 시리즈손견을 닮았다. 다만 이 얼굴은 징기스칸 3의 젊은 시절 테무진 얼굴을 리터칭한 것이다.[153] 그런데 자세히 보면 장년기 칭기스 칸의 얼굴은 자무카의 얼굴에 복장과 수염만 바꾼 형태이다. 사실은 자무카가 테무진을 해치운 후 칭기스 칸이 되었다 카더라...[154] 카드 무장 중에서 총능이 높은 무장은 삼국지 무장 기준으로 관우(273), 고대무장사나다 유키무라, 악비(276)만 있다.[155] 정확히는 알테어의 추측일 뿐 칭기즈 칸이 성전 기사단이란 직접적인 표현은 작중에는 없다. 뭐 성전 기사단이든 아니든 인류의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이니 암살단 입장에서는 적이긴 하다.[156] 서유럽 최대 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의 병력을 봉신에다 상비군까지 전부 징집해야 3만을 넘는 정도다.[157] 정복왕 윌리엄이 21이다. 랜덤 생성이 아니라 기본으로 주어지는 역사 인물 중에서는 27의 엘 시드 다음이다. 물론 이벤트로 뜨는 잔다르크는 33[158] 오피셜은 아니다.[159] 2016년 현재는 チンギス・カン(칭기스 칸)이 표준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