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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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증 병조판서 충장공(忠壯公) 이중로 李重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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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1624년 (향년 47세) |
황해도 예성강 마탄 | |
자 | 진지(鎭之) |
호 | 송계거사(松溪居士) |
시호 | 충장(忠壯) |
본관 | |
가족 관계 | 조부 - 부 - 이인기(李麟奇) 모 - 부인 - 전주 이씨[1] |
이지란의 후손으로 7세때 어머니를 여의고 임진왜란 당시 산에 피신해있었다. 1605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 훈련도감 낭청을 지냈고 1621년 이천 목사로 부임했다. 인조반정에 훈련대장 이흥립, 장단 부사 이서와 함께 반정에 참가했다. 750명의 병력이 창의문을 통과해 광해군을 폐위시키는데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고 정흥군에 봉해졌다.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이괄의 난이 발발해 급히 이성부와 함께 황해도 방어사로 임명되어 남하하는 이괄의 병력을 맞아 예성강 상류 마탄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괄군의 여울물을 활용한 기습에 급하게 소집된 병력으로 분전을 했고 이중로도 자신의 장기인 조총으로 군관 7명을 사살했으나 북방의 정예병인 이괄의 병력에 속수무책으로 밀렸고 결국 전멸하고 우방어사 이성부와 함께 전사했다. 참모인 풍천 부사 박영신은 활로 분전했으나 포로로 잡혀 반란군에게 훈계하고 처형당했으며, 이렇게 전사한 관군 장수 7명은 이괄군의 장수인 이수백의 제안으로 효수되어 정충신에게 전해졌다.[2]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이괄의 난이 발발해 급히 이성부와 함께 황해도 방어사로 임명되어 남하하는 이괄의 병력을 맞아 예성강 상류 마탄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괄군의 여울물을 활용한 기습에 급하게 소집된 병력으로 분전을 했고 이중로도 자신의 장기인 조총으로 군관 7명을 사살했으나 북방의 정예병인 이괄의 병력에 속수무책으로 밀렸고 결국 전멸하고 우방어사 이성부와 함께 전사했다. 참모인 풍천 부사 박영신은 활로 분전했으나 포로로 잡혀 반란군에게 훈계하고 처형당했으며, 이렇게 전사한 관군 장수 7명은 이괄군의 장수인 이수백의 제안으로 효수되어 정충신에게 전해졌다.[2]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민충사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에 안장되었다.
이중로를 비롯한 관군 장수 7명을 효수할 것을 제안한 이수백은 이후 이괄군이 무악재 전투에서 대패하고 와해되자 도망치던 와중 이괄을 배신하여 이괄과 한명련 등의 목을 잘라 인조에게 바쳤고, 그 공로로 7년의 유배 끝에 사면되었다. 하지만 이수백의 제안으로 효수된 장수의 후손들은 이수백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으며, 결국 1634년 3월, 이중로와 박영신의 아들 5인이 합심하여 백주대낮에 이수백의 목을 베어 조정에 자수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중로를 비롯한 관군 장수 7명을 효수할 것을 제안한 이수백은 이후 이괄군이 무악재 전투에서 대패하고 와해되자 도망치던 와중 이괄을 배신하여 이괄과 한명련 등의 목을 잘라 인조에게 바쳤고, 그 공로로 7년의 유배 끝에 사면되었다. 하지만 이수백의 제안으로 효수된 장수의 후손들은 이수백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으며, 결국 1634년 3월, 이중로와 박영신의 아들 5인이 합심하여 백주대낮에 이수백의 목을 베어 조정에 자수하는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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