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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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경징(金慶徵)

출생

1589년

사망

1637년 9월 21일

출생지

조선 평안도 강계
(현 자강도 강계시)

국적

조선

선응(善應)

본관

순천(順天)

1. 소개2. 병자호란 이전까지의 경력3. 병자호란 시기의 행적
3.1.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3.2. 과연 위의 이야기가 사실인가?
4. 최후5. 평가6. 기타7. 사극에서

1. 소개[편집]

본관은 순천, 자는 선응(善應)으로, 할아버지는 임진왜란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김여물이고 아버지는 승평부원군 김류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유근의 딸이다. 태종 시기에 왜구와 여진족과 맞서 공을 여러 차례 세운 무신 김승주의 후손이며 김승주의 아들 김유온의 7대손이기도 하다.

2. 병자호란 이전까지의 경력[편집]

김경징은 광해군 때 음서를 통해 관직에 올라 찰방(察訪)[1]을 맡았다. 1623년 3월 인조반정 때 아버지 김류와 함께 반정에 참가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즉위시킨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어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다. 또한 같은 해에 개시 문과에 응시해 병과로 급제, 형조좌랑이 되었으며 사간원 정언을 거쳐 도승지를 지냈다가 나중에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그리고 김경징은 1623년 5월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의 종 이말질수(李末叱水)의 행적이 수상하다는 보고를 받자 포도청으로 하여금 체포하여 국문하게 한 끝에 광해군의 폐태자 이질이 땅굴을 파서 도주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이를 저지하는 공적을 세웠다.

1624년, 김경징은 비변사 당상에 임명되었으나 인조가 "비변사가 일을 제때에 처리하지 않는 것은 당상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라며 당상의 수를 줄이는 바람에 해임되었다. 그후 그는 공조 참판이 되었는데 군관에게 곤장을 때리던 중 군관이 죽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헀다. 이에 김경징이 대죄(待罪)하자, 인조는 "이 뒤로는 이 사람을 경계삼아 삼가 형장(刑杖)을 남용하지 말라."며 너그러이 용서하려 했다. 이에 사헌부가 김경징을 엄히 처벌하라고 요구하자, 인조는 분노하며 판서 이시발(李時發)을 옥에 가두고 김경징에 대한 형량을 다시 고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사헌부는 형량을 낮춰 김경징의 벼슬을 삭직하는 선에서 끝냈다.

김경징은 1626년 예장 도감 제조, 예조 참판을 지냈고 1630년엔 승정원 승지 겸 경연 참찬관을 맡았다. 경연 참찬관 시절, 그는 황실의 세금 면제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인조의 태도를 비판했다.

"구언(求言)하신 것은 단지 겉치레였을 뿐입니다. 지난번에 대관(臺官)이 궁가(宮家)에 대해 면세(免稅)해 주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논열(論列)한 것이 한달 가까이 되는데도 전하의 윤허는 더욱 아득하기만 하고 그 밖에 쓸 만한 말들도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고 계십니다. 이로써 본다면 겉치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김경징은 1632년에 국장도감(國葬都監)의 총어사를 맡았다. 또한 이 시기에 경기도 관찰사를 맡았는데, 이때 그는 자신의 종이 자신을 저주했다고 고발했다.

"불행하게도 사패(賜牌)한 계집종이 남몰래 옛 주인의 사주를 받고서 감히 신의 집을 모조리 없앨 꾀를 내어 부엌·굴뚝·기둥·지붕에다 흉측한 물건을 묻어두었는데, 음험하고 사특한 짓이 빌미가 되어 어미의 병이 위독해졌습니다. 자식된 자의 망극한 정으로는 그의 살점을 저며도 분함을 씻기에 부족합니다만, 신은 일단 법조(法曹)에 고발하였습니다."


인조는 즉시 김경징의 계집종 칠향(七香)을 공신 모해죄로 잡아서 국문하라고 명령했고, 칠향은 곧 잡혀와서 박자흥(朴自興)의 처와 박승황(朴承黃)의 처가 사주했음을 실토했다. 박자흥의 아내는 이이첨의 딸로, 금부도사가 자신을 잡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자살했다. 그리고 박승황의 처 말질정(末叱貞)은 형신을 몇차례 받았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이에 위관 김상용이 일개 죄인을 국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비판했지만 인조는 듣지 않고 말질정을 참수했다. 이 사건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사신은 논한다. 박승황(朴承黃)이 자기의 형인 박승종(朴承宗)과 평생 동안 서로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말질정이 박승종의 부자(父子)에게 무슨 연연한 생각이 있기에 몰래 앙갚음할 꾀를 품어 스스로 헤아리지 못할 처지에 빠졌겠는가. 다만 이 일이 김류(金瑬)의 집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위관 이하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곧장 형추(刑推)를 청하여 삼성에서 국문하다가 결국 장사(杖死)하기에 이르렀으므로 물의가 이를 그르게 여겼다.


이후 김경징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는데, 1634년 4월 인목왕후의 '폐모론'에 참여했음에도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자들을 엄히 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요즈음 자신이 직접 폐모할 것을 정청하는 데 참여하였던 자가 대각에 출입하면서도 일찍이 한마디도 스스로를 비판하는 말이 없이 의기양양한 채 거리끼는 바가 없었으니, 공론이 격발되는 것을 어찌 멈출 수 있겠습니까. 신이 어제 성상소(城上所)의 홍주일(洪柱一)과 상의하여 계초(啓草)를 작성하였는데, 바로 일찍이 정청에 참여하였던 자 몇 사람을 죄주기를 청하는 일과, 정청한 문서 몇 건을 베껴 내어 양사와 전조에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동료들에게 간통한 결과, 죄 주기를 청하는 한 조항에 대해서는 동료들의 의논이 결정되었으나 유독 문서를 베껴 보내는 한 조항에 대해서만은 사간 이경증과 헌납 이시해가 끝까지 고집하였는데, 한 사람은 ‘정청한 문서를 베껴오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하고, 한 사람은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제기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일을 논하는 체모는 옳으냐 그르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늦고 빠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잘못된 견해는 시비를 밝히고 공론을 수립하자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료에게 무시당하여 믿음을 받지 못하였으니, 결단코 그대로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인조는 비록 그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직책을 계속 맡게 했다. 이후 김경징은 1635년 도승지에 발탁되었는데 1636년 2월 말 영의정 윤방이 청나라 사신이 분노하며 돌아갔으니 곧 침략이 있을 거라며 "도성은 결코 지키지 못할 것이니 미리 강화도로 파천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자 "오늘 강구할 것은 방어할 방법이지 피난에 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라고 반박했다. 이에 윤방은 한달 뒤에 인조에게 자신을 체직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정에서 강화도를 언급하는 것은 나라의 계책이 마땅히 군부(君父)를 안전한 지역에 둔 뒤에야 전쟁 시 위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은 본디 말을 조리있게 하지 못해 뜻을 다 말하지 못한 채 갑자기 곁에 있던 신료에게 논박당해 감히 앞서 하지 못했던 말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후 이 말을 들은 자들이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공격했습니다. 신은 마땅히 사퇴해야 했는데 감히 떠나지 못하고 뻔뻔스레 얼굴을 들고 오늘까지 있었습니다. 신의 직을 체직해주소서."

이에 인조는 그들의 상식에 벗어난 말은 마음속에 품어 둘 필요가 없다며 윤방이 계속 직책을 수행하게 했다. 그러자 김경징이 사직을 청했고 인조는 이를 허락했다. 이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사신은 논한다. 경징은 경박하고 교만하여 대사간에 적합하지 않은데, 대관들도 감히 탄핵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양하여 체직될 수 있게 하였다. 명기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3. 병자호란 시기의 행적[편집]

3.1.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편집]

김경징은 병자호란이 시작되자 강화도 수비를 맡은 강도 검찰사가 되었지만 매일 술이나 퍼마시고 띵가띵가 놀았다. 또한 김포와 통진에 보관되어 있던 곡식을 피란민들을 구제한다는 연유를 들어 배로 실어 왔으나, 정작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 말고는 아무에게도 나눠 주지 않아 모든 사람들에게 원성을 샀다. 심지어 강화도로 건너갈 때 세자빈조차 배에 태우지 않았고 세자빈이 원망에 찬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마지못해 세자빈만 태우고 건너갔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은 후에 청군에게 대량 희생되었다. 첫 문단인데 벌써부터 제정신이 아닌거 같다.

심지어 강화도의 해안선인 갑곶과 연미정 이북 사이에 보초 하나 세워두지 않고, 청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바다가 있는데, 청군이 어떻게 건너오겠느냐?"면서 방심까지 했다. 하지만 여진족 시절 요하, 송화강, 압록강, 목단강 같은 큰 강은 물론이고 동해, 서해 바다에서 배 타고 어부질해적질도 하고[2] 바다를 낀 지역인 대만하이난도 배 타고 건너가 군대 상륙하여 정복하고,[3] 비록 패전했지만 아편 전쟁, 청일 전쟁 때 함대 끌고 남중국해, 서해에서 영국군, 일본군과 해전도 치렀던 만주청나라는, 물에 대한 금기로 말미암아 해전이 약했던 여몽전쟁 당시 몽골의 원나라[4]가 아니었다.[5][6]

보다 못한 대신 김상용[7]이 "네 나이가 몇인데 어찌 이리도 철없이 구느냐? 네 아비인 김류도 임금을 따라 남한 산성에 갔는데, 걱정이 되지도 않느냐?"라고 꾸짖자 화가 잔뜩 나서 군사 업무를 처리하는 도장을 땅에 내팽개치고는 "내가 알 게 뭐냐! 어떻게 되건 나는 모른다!"라고 씩씩거렸다고 한다.

이렇게 술판이나 벌이다가 심지어는 청군이 도해하려는 움직임이 조선군에게 관찰되어 김경징 본인에게 보고까지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8] 김경징은 여전히 개무시하고 술판만 벌이고 앉아 있었다. 급기야 청군이 쏜 포탄이 앞에 떨어지자 한 방에 데꿀멍해 버렸고, 민가를 헐어 만든 뗏목을 타고 청나라군이 기습하여 강화도가 함락되자 병사들을 동원해 막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겁에 질려 자기 혼자 살겠다고 배를 타고 충청도로 째 버렸다. 유수 장신과 함께 강화도 함락의 가장 큰 원인. 김상용이 강화도 함락에 책임이 전혀 없음에도 스스로 자폭하는 최후를 맞았다는 점을 기억하면[9] 이놈의 찌질함은 정말 정말 답이 안 나온다. 그런데 골때리게도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얼마나 한심했는지, 나중에 청군이 쳐들어오자 아예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마저 내팽개치고 혼자만 살겠다고 토꼈다[10]. 이 때문에 수많은 연약하고 아름다운 조선 여자들은 청군에게 손쉽게 잡혀 강간과 윤간을 당했고, 청군의 씨받이로 전락하여 아비도 없는 혼혈 사생아들을 수없이 임신당해 양산하고 청국에 끌려가 화냥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11]

이렇게 이 자의 어처구니없는 무능과 태만으로 인해 강화도는 끝끝내 함락당했고,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을 비롯한 왕실과 대신들의 가족들은 모두 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 와 조정의 대표 인사들은 항전할 의사를 잃었고, 결국 청군에 항복했다.

만약 최소한의 저항을 하고 왕실 가족만이라도 대피시켰다면 강화가 함락당했더라도 덜 까였을 것이다. 실제로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간신히 대피해서 충청도로 피난하는 데 성공했고, 충청도의 병력과 영남, 호남의 근왕군도 올라오고 있었던 데다가 명나라[12]도 이 당시 산둥 반도에서 강화도 방어를 도울 수병을 보내려고 했었기 때문에[13] 조금이라도 버티며 시간이라도 벌었다면 그나마 어느 정도 승산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김경징이란 모자란 작자 하나 때문에 이 기회마저도 몽땅 사라져 버린 거다.

3.2. 과연 위의 이야기가 사실인가?[편집]

위의 이야기는 '병자록(丙子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 야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정사와 당시 강화도에서 봉림대군과 세자비 및 세손을 모셨던 문관들이 남긴 문헌엔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전혀 없어 신빙성이 의심된다. 특히 병자록의 경우, 저자 나만갑(羅萬甲)이 '불손한 의도'로 김경징을 깍아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나만갑은 1625년 김류가 북인 출신의 남이홍을 대사헌으로 천거하자 이를 반대했다가 김류로부터 "나만갑은 본시 기가 성한 사람이어서 일 벌이기를 좋아하니 조정이 장차 안정되지 못할 겁니다."라는 비판을 받고 강동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이에 이귀가 나만갑의 재주를 칭찬하며 김류가 그를 잘못 모함했다며 비난하자, 김류는 격노해 이귀에게 서신을 보냈다.

"양사의 논박이 이미 극심하여 두렵기 그지없는데 또 상신(相臣)의 큰 힘이 가세하니, 외로운 이 사람은 아, 어디로 가야 합니까. 원컨대 대감(台監)은 살 수 있는 길을 가리켜 주십시오."


이후 나만갑은 1629년 7월에 이조 낭관의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김류는 "나만갑은 위인이 부박하여 걸핏하면 많은 말을 하고 나서는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전랑에 적합하겠습니까."라고 비판해 이를 막았고 인조는 그의 의견을 수용해 "사론을 주도하고 조정의 의견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 했다며 해주로 유배시켰다. 이렇듯 나만갑은 김류 때문에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했고 급기야 유배까지 보내지기도 했으니 김류에게 안좋은 감정을 품을 소지가 충분했다.

또한 나만갑은 '병자록'에서 주화파들의 행적을 편파적으로 비난하고 척화론자들의 언행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러한 그의 시선은 김류의 가족에 대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김류의 아내, 즉 김졍징의 어머니와 김경징의 아내가 강화도에서 함락될 때 자결한 사실에 대해 김류의 손자이자 김경징의 아들인 김진표가 자살을 강요했다고 기술했다. 즉, 김진표가 자신의 부인에게 자결을 강압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이 광경을 본 김류의 부인과 김경징의 처도 자결하였다는 것이다. '연려실기술'에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실려 있지만 당시 민심이 김류에게 극히 부정적이어서 김류 집안 부녀자들의 절개를 깍아버리기 위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 또한 같이 기재되어 있다.

대개 인심이 경징에 대한 분노가 쌓여서 그 어머니와 아내의 절개까지 아울러 깎아 없애려고 한 것일 뿐이다. 정씨는 백창의 딸이니, 그 친정의 혈통을 증험해 보더라도 남에게 닥달을 받아 죽을 사람은 더욱이 아니다. - 연려실기술


또한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뒤늦게 들어갔던 예조 판서 조익의 문집 '포저집(浦渚集)'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졸장' 김경징과는 완전히 다른 면모가 드러난다. '포저집'에 따르면, 조익은 김경징에게 "나라 꼴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죽고 싶다. 만약 내가 수백명의 병력을 얻어서 한 방면을 담당하며 육박전을 벌일 수만 있다면, 뒤로 물러나지 않고 싸우는 자로는 내가 응당 첫째가 될 것이다."라고 한탄하자, 김경징은 조익 앞에서 슬피 울면서 손을 잡고 위로했다고 한다.

이때 관군 이외의 장정과 피난 온 사람들은 모두 의병으로 차출되어서 더이상 남아있는 자가 없어 병력을 얻기가 참 힘들었기에 김경징 등이 병력을 뽑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즉, 김경징이 강화도 방어를 위해 별다른 군사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건 그의 비겁하고 안일한 자세 때문이 아니라 병력 자원이 부족해서 새로 군대를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조익의 기록은 그가 강화도에서 실제로 벌어진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기에 신빙성이 높다. 반면 '병자록'을 지은 나만갑은 당시 남한 산성에서 임금을 호종하고 있어서 강화도에서 벌어진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으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물론 병자록 외에도 김경징을 비난하는 기록이 많고 인조실록에 기재된 사관들의 논조 역시 김경징에게 지극히 부정적이다. 그러나 민간에 전해지는 기록들은 대부분 나만갑의 병자록이 출판된 후 작성된 것이며, 나만갑처럼 강화도에 체류하지 않은 지은이가 서술한 것이다. 인조실록을 집필한 사관들도 병자록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척화론을 주장한 선비들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던 반면 왕에게 영합해 주화론을 주장한 김류 등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심지어 그들은 김류의 손자 김진표가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자살을 강요했다는 병자록의 근거없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쓰기까지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경징은 강화도 수비를 맡은 적이 없다!

김경징은 1636년 11월 26일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가 12월 14일에 다시 강화도 검찰사로 임명되어 세자빈과 세손, 그리고 봉림대군을 호위해 강화도로 모시게 했다. 검찰사(檢察使)는 국가에 관계되는 대사나 군사상의 중대한 일을 검찰(검사하고 살핌)하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된 임시 관직이다. 이후 인조는 김경징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적병이 남한 산성을 포위한 지 벌써 엿새째 되었다. 군신 상하가 고립된 성에 의지하며 위태롭기가 한 가닥 머리카락과 같은데, 외부의 원병은 이르지 않고 통유(通諭)할 길도 끊어졌다. 경들은 이런 뜻으로 도원수·부원수 및 제도(諸道)의 감사와 병사에게 전유(傳諭)하여 빨리 달려와 구원하여 군부(君父)의 위급함을 구하게 하라. 그리고 본부(本府)의 방비도 마땅히 검칙해야 할 것이니, 나루를 건너는 자를 엄히 조사하여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결사대를 모집하여 기어코 회보(回報)하게 하라."


그후 인조는 다시 김경징 등에게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을 징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까지만 보면 김경징이 강화도 수비를 도맡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강화도 함락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뜻밖의 기록이 포착된다.

김경징은 비록 그의 검찰(檢察)하는 임무가 적을 방어하는 일과 관계는 없다 하더라도, 종묘 사직의 신주와 빈궁(嬪宮)·원손(元孫)이 모두 병화(兵禍) 중에 빠져 있는데도 일찍이 털끝만큼도 돌보며 염려하는 뜻이 없이 배를 타고 도망하느라 겨를이 없었으니, 원손이 다행스럽게 모면한 것은 하늘이 실로 도운 것입니다. (중략) 장신(張紳)의 경우는 강도 유수로서 자신이 주사(舟師)를 총괄하고 있으면서도 천연의 요새를 잘 수비하지 못하였습니다. 적의 보병 수십 명이 두 개의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도 방어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배를 타고 도망하면서 남보다 뒤떨어질까만 염려하였습니다. (중략) 왕이 답했다.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는 매우 적었고 장신은 조수(潮水)가 물러감으로 인하여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율대로 처치하는 것은 혹 과할 듯싶다." - 인조 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1일 신묘 1번째 기사


이로 볼때 강화도 수비를 맡은 이는 김경징이 아니라 강화도 유수 장신이다. 김경징이 맡은 임무는 세자빈과 세손, 그리고 봉림대군 일행을 경호하는 것이다. 여기에 검찰사의 신분으로 수군을 모아 강화도로 집결시키는 임무도 별도로 수행했지만, 강화도 수비는 어디까지나 강화도 유수 장신과 휘하 장군들이 맡았고 김경징이 따로 부릴 수 있는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김경징을 왜 이리도 미워했으며 김경징은 왜 처형을 면치 못했을까? 그 이유는 실록에 기재된 기평군 유백증의 상소에서 확인할 수 있다. 1637년 6월 21일자 기사에 기재된 상소에서, 유백증은 김경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당초 강도(江都)로 들어갔을 때에 먼저 제 집안 일행을 건너게 하고 묘사와 빈궁(嬪宮)은 나루에 사흘 동안 머물러 두어 건너지 못하였으므로, 내관(內官) 김인(金仁)이 분을 못이겨 목메어 통곡하고 빈궁도 통곡하였으니, 이 사람은 전하의 죄인일 뿐더러 실로 종사의 죄인입니다. 또 영기(令旗)로 제 친한 사람만 건너게 하고는 사민(士民)들은 물에 빠지거나 사로 잡히게 하였으니, 통분하여 견딜 수 있겠습니까. (중략) 합계(合啓)에 대한 답에 ‘원훈(元勳)의 외아들을 차마 처형할 수 없다.’ 하셨으니, 이것도 김경징이 죄가 없다고 여기시지 않은 것입니다. 연계(連啓)하여 마지않으면 윤허받을지도 모르므로 곧 정계하자는 논의를 일으켰으니, 김류의 권세가 무겁습니까, 가볍습니까.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김경징은 당초 세자빈과 세손, 봉림대군 일행을 강화도로 모실 때 큰 불경을 저질렀다. 그는 왕실 일행을 사흘동안 나루터에 머물러서 건너지 못하게 해 빈궁이 통곡하게 만들었고 자신과 친한 사람만 먼저 건너게 했다. 또한 그는 사흘 뒤 왕실 일행을 건너게 했지만 백성들이 따라 건너는 걸 허용하지 않아 그를 따라 피난온 백성들이 청군에게 헛되이 죽거나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그를 원망했고 사족들 역시 김경징이 왕실에 불경을 저질렀다며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게다가 김경징은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시켰을 때 세자빈, 원손 등을 피신시키지 못하고 제 한몸만 건져 육지로 달아나버렸다. 이로 인해 세자빈과 원손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청군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결국 김경징은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며 이는 당시 죽어 마땅한 범죄였다. 김류로서는 아들을 구하려 했다가는 왕실을 지키지 못한 죄로 집안이 파멸할 가능성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아들이 죽게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다.

4. 최후[편집]

인조는 반정 공신의 아들이라 웬만해서는 용서해 주고자 강계로 귀양 보내면서 덮으려고 했지만, 그가 보여준 추태를 기억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탄핵을 받았고 아버지인 김류마저도 죽어 마땅할 짓을 저질렀다고 인정[14]하면서 1637년 9월 21일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았다. 사약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대단히 명예롭게 죽여준 특혜를 내려준 셈이다.

그나마도 함께 강화도 방위를 맡았으며 김경징과 장신(1595년 ~ 1637년) 등 고위 지휘관들이 모두 달아난 상황에서 열세인 병력으로 끝까지 항전했던 충청 수사 강진흔이 참수형을 당한(?!) 것에 비하면 굉장히 큰 특혜를 입은 셈이다. 참고로 장신도 참수형을 받을 뻔했으나 그 동안의 공로를 감안하여 알아서 죽으라고 명을 받고 자결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35권, 15년(1637년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9월 21일(병술) 2번째 기사를 찾아보면 어떻게 김경징을 처벌했는지 볼 수 있다.#[15]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김경징은 애비인 김류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끝까지 비굴한 꼴이나[16] 보였다고 한다. 이러니 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으니 차라리 명예롭게 아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죽겠다면 그래도 위안이라도 받았을텐데 끝까지 이런 찌질한 짓이나 하니 오죽 열받은 아버지 김류는 아들한테 싸닥션을 날리면서 "죽은 어미와 아낼 생각해서라도 네놈 역시 알아서 죽어야 했다"고 꾸짖었다고 한다.[17] 결국 끝까지 살려달라고 발버둥을 치면서 최후의 발악을 해대다가 강제로 사약을 마시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18]

... 그러나 실록에는 김경징이 이랬다는 기록은 없고 단지 사사했다고만 나와 있다.

5. 평가[편집]

조선왕조실록의 인조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그가 죽던 날에 작성한 기록에서 "김경징은 주변 사람들에게 무지하고 돌아이(광동, 狂童)이며 손가락질 받았다"고 썼다. 죽을 때도 끝까지 추태를 부리다 죽었으니, 당시에도 김경징이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알만 하다.

사신은 논한다. 아아, 강도[19]는 천연으로 이루어진 요새이다. 정묘년 이후로 시설하여 보장(保障)으로 삼았다. 그 성곽을 수리하고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저축하여 사변이 있을 때에 임금이 머무를 곳으로 삼았으니, 묘당이 참으로 마땅한 사람을 가려서 맡겨 방어할 방도를 다해야 할 것인데, 김경징은 한낱 광동(狂童)일 뿐이었다. 글을 배우지 않아 아는 것이 없고 탐욕과 교만을 일삼으므로 길에 나가면 거리의 사람들이 비웃고 손가락질하는데, 김류(金瑬)는 사랑에 가리워 그 나쁜점을 몰랐으나 사람들은 집안 망칠 자식이라 하였다. 이 때에 청나라 군사가 대거 우리 나라로 들어와 신보를 들은 지 며칠 만에 이미 경기 고을에 이르렀으므로, 김류가 검찰사(檢察使) 두 사람을 내어 먼저 강도에 보내어 주사(舟師)를 정리하게 할 것을 의논하고 그 아들 김경징을 우의정 이홍주에게 힘써 천거하여 입계하게 하였는데, 이홍주의 마음은 그가 반드시 패하리라는 것을 알았으나 권세에 겁이 나 애써 따랐다.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삼았는데, 이민구는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의 아우이다. 평생에 시와 술로 자부하고 본디 실용(實用)의 재주가 없었다.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으로 삼았는데, 홍명일은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의 아들이다. 데면데면하고 느려서 일할 줄 몰랐다. 세 사람이 명을 받고 나갈 때에 세 집의 짐이 10리에 잇달고 그 집 사람의 행색이 매우 화사하므로 서울에서 피란하는 자가 모두 분하여 욕하였다. 강도에 이르러서는 적병이 날아서 건널 형세가 아니라 하여 날마다 술에 취하는 것을 일삼으므로 피란한 사자(士子)들이 분통 터져 두어 줄의 글을 지어 검찰사의 막하에 보냈다. 그 글에 “옥지(玉趾)가 성을 순찰하고 유신(儒臣)이 성을 지키니 와신상담해야지 술마실 때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이민구 등은 오히려 부끄러운 줄 몰랐다. 어느 날 적병이 갑곶진(甲串津)을 건너자 김경징은 늙은 어미를 버리고 배를 타고 달아나고, 이민구와 홍명일도 뒤따르고,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金震標)는 제 할미와 어미를 협박하여 스스로 죽게 하였다. 윤방(尹昉)은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성안에 있다가 미처 피해 나가지 못하고 열성(列聖)의 신주를 묻었는데, 청나라 군사에게 도굴되어 조종(祖宗)의 신주가 드디어 다 더럽혀졌다. 아,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 누구의 죄인가.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류는 부귀 때문에 이미 나라를 망치고 또 제 아들을 죽였다”고 하였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

그러나 이 평가는 '청서파'를 자처한 사족들의 편파적인 시각이 지극히 반영된 것에 불과하다. 실록상의 김경징은 사관들의 논평을 제껴놓고 보면 무능력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와 함께 인조 반정을 주도해 정권을 뒤엎는 데 큰 공을 세웠고 광해군의 폐세자가 도주를 꾀하는 걸 조기에 간파해 이를 막아냈다. 또한 나랏일에 대해 여러 차례 간언했고 폐모론을 주장해놓고도 왕의 비호를 받으며 떵떵거리는 이들을 비판했으며 청나라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 파천을 먼저 논의하는 대신을 향해 정면에서 반박하기도 했다. 인조 실록의 사관은 그가 탐욕과 교만을 일삼았다고 하지만, 그가 뇌물을 받았다던가, 백성을 해쳤다든가 같은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로 볼때 그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병자호란 이전까지 큰 문제없이(공조 참판 시절 군관에게 곤장을 쳤다가 그만 죽여버린 것 빼고) 관직 생활을 순탄하게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병자호란 때 세자빈과 세손 등 왕실 일행을 호종하는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사형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야사의 기록처럼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지 않았다. 그와 함께 강화도에 있던 조익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나랏일을 걱정하며 강화도의 허술한 수비를 걱정했다고 한다. 당시 강화도에 집결한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다들 도망쳐 버려서 성을 수비하는 군사는 수백에 불과했다고 한다. 게다가 장신은 강화도 방위와 관련해 김경징과 여러번 마찰을 빚은 끝에 아예 김경징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경징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런 그가 강화도 함락의 원흉으로 지목당해 지금까지 손가락질 당한 것은 청서파를 자처한 사족들의 일방적인 비난이 후세까지 전해져 세간의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와 김류 등 공신 세력은 척화론을 주창한 사족들 때문에 패전을 겪게 되었다며 그들을 징벌하려 했다. 이에 사족들의 여론을 주도하는 척화파는 격렬하게 맞섰고 주화파야말로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할 원흉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양 세력의 충돌은 강화도 문제에서 특히 첨예하게 대립했다. 인조는 자신에게 영합한 김류의 아들을 지켜주고 싶어했는데, 이는 김류가 입지를 온전히 누려야 자신의 지지 기반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척화를 주창한 사족들은 김경징이 왕실을 지키지 못했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주장했고 결국 김류는 아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후 척화파를 옹호한 사족들은 강화도 함락의 모든 책임이 김류의 아들 김경징에 있다고 몰아붙였고 이 여론이 후대까지 이어지며 이야기에 살이 뭍으면서 오늘날 희대의 졸장 김경징의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김경징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도망간 것은 맞으며, 그러니 그가 받은 벌이 억울한 것은 아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반정 공신 김류의 아들이 이런 죽음을 맞이하는데 아버지조차 어쩔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삽질이 엄청났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김경징이 강화도 함락의 원흉이라는 세간의 시각은 사실과 거리가 멀며 김경징은 지은 죄 이상의 비난을 지금까지 받고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후에 복권이 논의조차 되지 않았으니 평가를 달리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은 효종 대부터 척사를 주장한 사족들이 대대로 집권해서 복권을 논의할 분위기가 아니었고 왕실을 보존하지 못한 죄의 무게가 커서 감히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기 때문이지 김경징이 다르게 평가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6. 기타[편집]

  • 조선 시대 고전소설 강도몽유록(작자는 불명)에선 병자호란 당시 죽어나간 부녀자들이 원혼으로 나와 밤길에 한 정자에서 모여 한탄하면서 당시 조선 위정자들을 적나라하게 깔때 김경징, 김류를 이런 이들을 오냐오냐 봐준 인조까지도 찌질이로 미치도록 깐다.

  • 여담으로 민담에는 김경징이 '육갑병신(六甲兵神)'이라는 신장(神將 : 신들의 장군)을 부리는 술법을 알아 업무에 태만했다고 한다. 그리고 청군이 강화도로 쳐들어오자 신장을 불렀는데, 신장이 오지 않았다. 강화도가 거의 함락될 쯤에 신장이 나타났는데. 김경징이 "뭐하다 늦었냐!"며 항의하자 이 신장 왈, "홍타지가 불러서 그쪽에서 싸우느라 늦었다"고 했다. 바리에이션으로 나는 명나라 신장이라서 청나라 앞에선 힘을 못 쓴다고 하며 사라졌다는 버전도 있다. 결국 김경징은 패배했고, 이후에 '육갑 병신'은 욕설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민담에서도 이리 대놓고 깔 정도. [20]

7. 사극에서[편집]

[1] 조선 시대 각 도의 역참(驛站)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이다.[2] 삼국지 읍루전에도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큰 사건으로는 고려 시대인 1018년에 울릉도를 탈탈 털어서 우산국에게 멸망 크리를 먹여버렸고, 그 이듬해에는 도이(島夷)가 고려일본에 침입한 바 있는데, 이것도 얘네들로 강력히 추정된다.[3] 하이난과 대만은 바다 한 가운데에 고립되어 있는 섬 지역이지만 거리상 중국 본토와 상당히 가깝다.[4] 내륙 중에서도 가장 고립되어 있는 내륙 지역이고, 몽골국의 홉스골 호와 케룰렌 강, 오논 강, 중국 내몽골 자치구의 시라무렌 강, 러시아 부랴티야 자치 공화국의 바이칼 호 등을 제외하면 큰 물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다. 홉스골은 큰 호수는 아니지만 몽골 공화국 영내에서는 가장 큰 물로 배도 다니며 시라무렌 강은 내몽골 자치구 내에서 유일하게 큰 하천이다. 에 몸을 씻는 것을 기운이 빠져나간다고 여겨 금기시하고, 칭기즈칸 때 제정된 법에 물에 배설물을 싸면 사형이었다. 게다가 물에서 나는 물고기새우 등의 수산물은 먹지도 않을 정도로 물에 대한 금기가 상당히 강했다.[5] 그러나 해전에 약한 것은 고비 사막과 몽골 초원 지대에서 놀던 몽골 부족 시절 이야기이고, 남송을 멸하고 중국통일하여 원나라를 세운 뒤로는 바다 사정에 밝은 광둥, 푸젠, 저장성 출신의 중국 한족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몽골도 해전에 몹시 능해졌다. 범문호, 유복형 등 옛 남송의 수군 항장들과 한족 출신 선박 기술자들의 가세를 바탕으로 원나라 시기 배를 타고 베트남이나 일본을 쳐들어가거나 여몽 전쟁 종전 후 고려에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삼별초 세력들의 거점지인 제주도와 진도를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일본 침공하다가 해상 기후도 고려하지 않다가 태풍에 개박살 난 것은 공공연한 이야기.[6] 그런데 금나라청나라 등을 세운 만주족, 여진족들이 실제로 해전에 강했는지는 의문이다. 내륙국몽골과 달리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동해와 황해 등 해안선을 맞대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해적질도 수차례 하는 등 해상 경험이 약하진 않았으나 조직적인 해전력은 몽골의 원나라보다 더 형편없었고 대만도 정성공의 난을 일으켜 청나라에 대항하던 정성공이 죽고 정성공 사후 대만을 장악한 정씨 세력들이 자기네들끼리 세력 내 주도권을 놓고 죽고 죽이는 내분이 일어나 약화되는 틈을 타 겨우 합병했다. 게다가 청나라 해군의 실제 지휘권도 만주족이 아닌 한족 출신들이 잡은 상태였다. 그러니깐 요점은 말하자면 청군이 수전의 스페셜리스트는 결코 못 되도, 초기의 몽골군처럼 물을 두려워하는 생초짜 유목민들은 아니었으며, 더더욱 얄랑한 해협 하나 믿고 강화도에 박혀 안이하게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의 바보들은 아니었다는 거다.[7] 1561년 ~ 1637년 / 주전파의 대표 인물이었던 김상헌(1570년 ~ 1652년)의 친형이다.[8] 강화도 현지를 가 보면 알겠지만, 강화도 동안은 육지와 정말 가깝다. 육지 쪽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수비군이 못 볼 수가 없는 지형.[9] 성문에 화약을 뿌려놓고 을 던지려고 하는데, 손자가 같이 죽겠다고 하여 이를 말렸지만, 손자가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함께 자폭했다고 한다. 더불어 이때 김상용과 같이 마지막을 다한 다른 인물이 김익겸(1614년 ~ 1637년)으로, 김만중의 아버지로서 김만중이 태어나는 것도 못 보고 먼저 갔다.[10] 그의 아들인 김진표(1614년 ~ 1671년)는 더욱 가관인데, 자신에게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되는 여자들에게 자살하라고 협박해서 살해했는데, 이유오랑캐인 청군에게 사로잡혀 유린당해 치욕을 당하느니 죽는 게 낫다나 뭐라나...... 레알 부전자전.[11] 단, 화냥녀병자호란 당시 유래된 것이 아니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문서 참조.[12] 참고로 이 당시까지만 해도 명나라는 어느 정도는 건재했다.[13] 첫 시도는 풍랑 때문에 중단되었고, 다시 보내려 했을 때는 이미 지나간 버스였다.[14] 사실은 김류도 자식인만큼 되도록이면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워낙에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고 왕족마저 버린 행위로 대역죄라는 주장도 나와 자칫하면 자신과 손자 김진표는 물론 3대까지도 죄다 목이 날아가게 되었기 때문에 뜻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15] 충청 수사 강진흔은 강도 방위를 맡은 강화 유수 장신이 청 해군의 배후를 치다가 역습을 받아 달아나자 '네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를 베어 죽이겠다' 라고 소리치며 분전했다. 그런데도 달아난 김경징보다도 더 한 참형을 받았으며 봉림대군마저도 '싸우지도 못하였거니와 달아나지도 못하였다.'라는 악평을 했다.[16] 그 당시 양반들은 가죽으로 만든 갓신을 신고 다녔는데 김류는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짚신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김경징은 아버지의 다리를 부여잡고 짚신에 얼굴을 부벼대며 목숨 구걸을 했는데 어찌나 비볐던지 짚신 앞이 다 헤졌다고 한다.[17] 사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고 김류도 비난을 많이 받던 인물이다. 그나마 눈치껏 처신을 잘해서 78살 천수를 누리며 최고 벼슬인 영의정까지 오르며 잘 살다가 갔지만. 그런데 사실 김류에게 가는 비난의 절반 이상은 바로 김류 때문에 김경징이 높은 자리에서 나라를 말아먹을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긴 하다. 자세한 건 김류 참조.[18] 아들인 김진표 역시 못난 놈인데 용케도 살아남아서 조부 김류 덕에 공조 참의까지 하고 57세까지 살았다.[19] 江都, 강화도를 뜻한다. 네이버 사전[20] 북송을 멸망으로 이끈 주범 중 하나인 곽경이 송을 지킨답시고 모은 병사들의 이름이 육갑 신병이었고 여기서 따온 민담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