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젠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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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중국의 남자 농구 선수
- 장먼시 출신 인물
- 1984년 출생
- 2002년 데뷔
- 2023년 은퇴
- 센터(농구)
- 밀워키 벅스/은퇴, 이적
- 브루클린 네츠/은퇴, 이적
- 워싱턴 위저즈/은퇴, 이적
- 댈러스 매버릭스/은퇴, 이적
- 광둥 서던 타이거즈/은퇴, 이적
- 2006 FIBA 월드 챔피언십 일본 참가 선수
- 2010 FIBA 월드 챔피언십 튀르키예 참가 선수
- 2019 FIBA 농구 월드컵 중국 참가 선수
- 중국의 올림픽 농구 참가 선수
- 2004 아테네 올림픽 농구 참가 선수
- 2008 베이징 올림픽 농구 참가 선수
- 2012 런던 올림픽 농구 참가 선수
-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농구 참가 선수
- FIBA 아시아컵 MVP
- 중국의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이젠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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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롄 易建聯 | Yi Jianlian | |
출생 | |
국적 | |
신장 | 216cm (7' 1")[4] |
체중 | 117kg (258 lbs) |
윙 스팬 | 222cm (7' 3.25") |
포지션 | |
드래프트 | |
소속 구단 | 광둥 서던 타이거즈 (2002~2007) 밀워키 벅스 (2007~2008) 뉴저지 네츠 (2008~2010) 워싱턴 위저즈 (2010~2011) 광둥 서던 타이거즈 (2011) 댈러스 매버릭스 (2012) 광둥 서던 타이거즈 (2012~2023) |
링크 | |
광둥성 장먼시 허산시에서 프로 핸드볼 선수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중국 대표 후보로 선정된 적도 있었다 . 12살 때 농구를 시작해 13세의 나이에 193cm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이젠롄의 부모는 엘리트 스포츠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롄이 길거리 농구를 하는 모습을 본 농구 코치는 이젠롄의 부모님을 설득해 전문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아디다스는 후원 계약을 맺기 위해 2002년 뉴저지에서 열린 자사의 ABCD 캠프에 초청했고, 이젠롄은 이곳에서 미국의 고교 유망주들과 경쟁했다.
2002년에 뉴저지에서 열린 아디다스의 ABCD 캠프에 참가했다. 그의 이름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타임지의 2003년 8월 24일호에서 제목은"The Next Yao Ming"이었다.
2002년에 15살의 이젠롄은 CBA에 들어와 광둥 서던 타이거즈 팀에서 뛰었다 . 첫 시즌에 경기당 평균 3.5득점과 1.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는 플레이오프 4경기에서는 경기당 평균 7.3득점과 7.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신인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 중국 농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2005년에는 CBA 역사상 가장 어린 정규시즌 MVP가 되었다.
이후 이젠롄은 3시즌 연속으로 광둥을 CBA 챔피언으로 이끌었으며, 2006년에는 CBA 파이널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2007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 전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6-07시즌에는 경기당 평균 24.9득점과 11.5리바운드라는 커리어 하이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팀은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바이 로키츠에 패하고 말았다.
당시 중국농구협회는 선수들이 만 22세가 되기 전까지 해외 리그 진출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젠롄은 원래 2009년까지 NBA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2006년 초, 그는 2006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결국 “NBA에서 경쟁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하고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며 참가를 철회했다. 그해 말, 광둥 서던 타이거스는 이젠롄이 2007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이젠롄은 NBA 드래프트에서 자신을 대표할 에이전트로 댄 피건을 선택했고, 드래프트 전 캠프에 참가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드래프트를 앞두고 그는 3번에서 12번 사이에 지명될 것이라는 예측을 받았다. 2007년 6월 28일, 피건이 밀워키 벅스에게 이젠롄을 지명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이젠롄의 개인 워크아웃 팀 명단에서 밀워키를 제외했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 NBA 드래프트에서 밀워키 벅스에게 무려 1라운드 6순위로 지명되었다.
이는 아시아 농구선수 중 지금까지도 야오밍 다음가는 순위로. 참고로 2025년 기준 양한센이 1라운드 16순위 지명으로 3위다. 물론 NBA 드래프트 지명 순위가 높다고 무조건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니고 반대 사례도 많지만, 당시 야오밍의 후계자로 불리던 이젠롄의 어마어마한 기대치를 알 수 있다. 이로써 왕즈즈, 야오밍, 멍크 바터에 이어 중국 선수로는 NBA에 네 번째로 데뷔했다. 이젠롄은 뛰어난 골밑 활약에 득점력까지 갖춰 그는 중국에서 무려 야오밍에 버금갈 정도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앞서 말했던 피건이 밀워키의 선택을 원하지 않은 이유는 해당 도시에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워키 단장인 래리 해리스는 “우리는 가용한 선수 중 최고의 선수를 선택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젠롄과 쑨웨는 NBA 드래프트 역사상 처음으로 한 드래프트에서 두 명의 중국 선수가 동시에 지명된 사례로 기록되었고, 이는 2016년까지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다.
드래프트 이후 밀워키는 이젠롄을 설득해 계약을 체결하려 했다. 2007년 7월 2일, 벅스 구단주 허브 콜은 이젠롄과 그의 에이전트에게 편지를 보내 직접 설득하려 했다. 3일 뒤, 감독 래리 크리스코비악과 단장 해리스는 이젠롄을 만나 밀워키에서 뛰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그의 에이전트는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다른 도시의 팀으로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중국 당국도 이젠롄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출전 시간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콜 구단주는 직접 홍콩을 방문해 이젠롄을 설득하고, 중국 당국에게도 충분한 출전 시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2007년 8월 29일, 이젠롄은 밀워키 벅스와 표준적인 다년 신인 계약을 체결했다.
이젠롄은 2007-08 시즌 개막을 앞두고 수석 코치 래리 크리스코비악에 의해 찰리 빌라누에바를 대신해 밀워키의 선발 라인업에 포함되었다. 올랜도 매직과의 데뷔전에서 그는 9득점과 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3일 뒤 열린 시카고 불스와의 홈 개막전에서는 16득점과 8리바운드를 기록하며 78-72 승리에 기여했다. 이 경기는 중국 전역에 생중계되었으며, 약 1억 명의 시청자가 지켜본 것으로 추산되었다. 야오밍은 이젠롄의 첫 경기들을 본 뒤 “나의 세 번째 NBA 경기 기록과 비교해 보면, 이젠롄의 성적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칭찬했다.[7]
2007년 11월 9일, 이젠롄은 밀워키가 휴스턴 로켓츠를 홈으로 초청해 104-88로 패한 경기에서 야오밍과 처음으로 맞대결을 펼쳤다. 이젠롄은 3점슛 2개를 포함해 19득점 9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야오밍은 28득점 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두 선수의 맞대결은 중국에서 무려 수억 명이 넘는 시청자가 지켜보며 NBA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청자가 본 경기 중 하나가 되었다. 경기 후 야오밍은 이젠롄의 재능을 “믿을 수 없다”고 평가했고,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는 “이 리그에서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선수”라고 말했다. 중국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의 전 감독 델 해리스도 이젠롄을 “NBA에서 가장 운동 능력이 뛰어난 7피트 선수”라고 묘사했다.
이젠롄은 2007년 12월 한 달 동안 경기당 평균 12.1득점과 6.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NBA 이달의 신인 선수(Rookie of the Month)로 선정되었다. 12월 22일에는 샬럿 밥캐츠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17개의 슛 중 14개를 성공시키며 개인 최고 득점인 29점을 기록했다. 2008년 1월 30일, 그는 2008년 NBA 올스타전의 루키 챌린지(Rookie Challenge)에 신인 팀 선수로 선발되었다.
2008년 2월 2일, 밀워키가 홈에서 휴스턴과 맞붙은 경기에서 이젠롄은 야오밍과 두 번째로 맞대결을 펼쳤다. 당시 감독 래리 크리스코비악은 이 경기를 “중국의 슈퍼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두 선수 모두 부진했고, 휴스턴이 91-83으로 승리하는 동안 야오밍은 12득점, 이젠롄은 경기 중 어깨 부상으로 인해 6득점에 그쳤다.
2008년 4월 2일, 이젠롄은 하지만 왼 무릎을 다친 뒤 잔여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채 첫 NBA 시즌을 마감했고 결국 66경기에서 49차례 선발로 나와 평균 8.6득점에 5.2개 리바운드를 기록하는 성적표를 받았다.
밀워키의 수석 코치 중 한 명인 브라이언 제임스는 나중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부상이 심각했고, 그로 인해 출전이 불가능했다”고 밝혔다.
그 이후 밀워키 벅스와 뉴저지 네츠의 트레이드가 성사되면서 이적하게 된다.
뉴저지 팀 사장인 로드 손은 “우리는 그가 정말 훌륭한 선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고, 팀 최고경영자(CEO)인 브렛 요마크는 “이번 영입은 우리에게 새로운 팬층을 여는 기회가 된다”고 말했다. 이젠롄은 트레이드를 예상하지 못했지만 “넷츠에 합류하게 되어 영광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뉴저지에서 첫 37경기 동안 이젠롄은 평균 10.4득점, 6.2리바운드 3점슛 성공률은 39%로 이전 시즌보다 크게 향상되었다. 나름 괜찮은 스탯을 기록 중이었지만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게 됐다. 로드 손은 “잘해주고 있었는데 타이밍이 아쉽다”고 했고, 이젠롄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9년 NBA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이젠롄은 동부 콘퍼런스 포워드 부문에서 폴 피어스와 크리스 보쉬 등을 제치고 3위를 차지했다. 그는 2009년 2월 17일, 휴스턴 로켓츠전 이후 부상에서 복귀했다. 그러나 복귀 후 평균 36%의 슈팅 성공률과 6득점에 그치며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었다. 시즌 최종 기록은 평균 8.6득점, 5.3리바운드였으며, 필드골 성공률은 38%, 3점슛 성공률은 34%였다.
뉴저지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뒤, 이젠롄의 에이전트인 댄 피건은 “그가 더 많은 시간과 기회를 받았을 때 팀이 더 좋은 경기를 했다는 점을 기억하라”며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로렌스 프랭크 감독은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는 아직 21살이다”라고 말했고, 이젠롄은 “아직 기복이 심하다”고 시즌을 평가했다.
2009-10 시즌, 이젠롄은 뉴저지의 선발 라인업으로 복귀했다. 그는 단 한 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에 선발로 출전했지만, 시즌 중 여러 부상으로 인해 30경기를 결장했다. 그는 2009년 11월 4일 내측 측부 인대 부상을 입었고, 12월 8일에는 윗입술이 찢어졌으며, 2010년 3월 8일에는 왼쪽 발목을 접질렸다. 시즌 최종 기록은 경기당 평균 12득점, 7.2리바운드였고, 필드골 성공률은 40%, 3점슛 성공률은 37%였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부상을 입게 되어 점차 주전에서 제외되게 된다.
2010년 6월 29일, 이젠롄은 퀸튼 로스를 상대로 300만 달러의 현금과 함께 워싱턴 위저즈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는 2010-11 시즌 동안 경기당 평균 5.6득점, 3.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워싱턴은 2011년 6월 30일까지 그의 계약을 연장할 수 있었지만, 연장을 선택하지 않았다. 사실상의 가비지멤버가 되었고 결국 방출되었다.
2011년 NBA 파업 기간 동안, 이젠롄은 광둥 서던 타이거즈와 1년 계약을 맺고 복귀했다. 당시 대부분의 NBA 선수들과 달리, 그는 파업이 종료되면 NBA로 복귀할 수 있는 옵션을 계약에 포함시켰다.
2012년 1월 6일, 이젠롄은 광둥에서 시즌을 시작한 뒤 댈러스 매버릭스와 1년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곧바로 D-리그 산하 팀인 텍사스 레전드로 배정되었다. 이는 새로운 단체협약에 따라, 2년 이상의 NBA 경력을 가진 선수가 본인의 동의하에 D-리그로 배정될 수 있도록 허용한 규정 덕분이었다.
2012년 1월 9일, 이젠롄은 텍사스 레전드에서 2경기에 출전해 평균 23득점, 12리바운드를 기록한 후 댈러스로 다시 콜업되었다. 댈러스는 플레이오프에서 오클라호마시티 선더와 맞붙었고, 시리즈 3차전에서 이젠롄은 생애 첫 NBA 플레이오프 경기에 출전해 5분 동안 2득점을 기록했다.
이젠롄은 NBA 통산 272경기 출전 평균 7.9점 3.5리바운드라는 기록을 남기고 NBA 무대를 떠났다. 이젠롄의 272경기 출전은 야오밍(486경기), 제레미 린(480경기)에 이어 NBA에서 많이 출전한 아시아 선수로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젠롄은 2012-13 CBA 시즌을 위해 다시 광둥 서던 타이거스에 합류해 네 번째 챔피언에 올랐다.
2016년 8월 22일, 그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1년 80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하며 2012년 이후 처음으로 NBA에 복귀했다. 레이커스의 감독 루크 월튼은 프리시즌 기간 동안 그를 팀 최고의 슈팅 능력을 가진 빅맨으로 평가했지만, 정작 그에게 많은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젠롄은 프리시즌 6경기에서 평균 10.7분을 소화하며 3.0득점, 2.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는 더 나은 기회를 원해 정규 시즌 개막 전에 스스로 방출을 요청했고, 레이커스는 2016년 10월 24일 그를 공식 방출했다.
2016년 10월, 레이커스 훈련캠프 참가 후 광둥으로 복귀했다.
2020년 8월 15일, 그는 CBA 파이널 3차전에서 랴오닝 플라잉 레오파즈를 123-115로 꺾고 광둥 서던 타이거즈의 통산 10번째 CBA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 경기에서 아킬레스건 파열 부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2020-21 시즌 상당 기간을 재활로 보내게 되었다.
2022-23 CBA 시즌은 이젠롄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그는 2023년 8월 30일 은퇴를 발표했다. 시나 웨이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린 시절, 이젠롄의 부모는 엘리트 스포츠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롄이 길거리 농구를 하는 모습을 본 농구 코치는 이젠롄의 부모님을 설득해 전문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아디다스는 후원 계약을 맺기 위해 2002년 뉴저지에서 열린 자사의 ABCD 캠프에 초청했고, 이젠롄은 이곳에서 미국의 고교 유망주들과 경쟁했다.
2002년에 뉴저지에서 열린 아디다스의 ABCD 캠프에 참가했다. 그의 이름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타임지의 2003년 8월 24일호에서 제목은"The Next Yao Ming"이었다.
2002년에 15살의 이젠롄은 CBA에 들어와 광둥 서던 타이거즈 팀에서 뛰었다 . 첫 시즌에 경기당 평균 3.5득점과 1.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는 플레이오프 4경기에서는 경기당 평균 7.3득점과 7.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신인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 중국 농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2005년에는 CBA 역사상 가장 어린 정규시즌 MVP가 되었다.
이후 이젠롄은 3시즌 연속으로 광둥을 CBA 챔피언으로 이끌었으며, 2006년에는 CBA 파이널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2007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 전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6-07시즌에는 경기당 평균 24.9득점과 11.5리바운드라는 커리어 하이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팀은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바이 로키츠에 패하고 말았다.
당시 중국농구협회는 선수들이 만 22세가 되기 전까지 해외 리그 진출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젠롄은 원래 2009년까지 NBA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2006년 초, 그는 2006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결국 “NBA에서 경쟁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하고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며 참가를 철회했다. 그해 말, 광둥 서던 타이거스는 이젠롄이 2007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이젠롄은 NBA 드래프트에서 자신을 대표할 에이전트로 댄 피건을 선택했고, 드래프트 전 캠프에 참가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드래프트를 앞두고 그는 3번에서 12번 사이에 지명될 것이라는 예측을 받았다. 2007년 6월 28일, 피건이 밀워키 벅스에게 이젠롄을 지명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이젠롄의 개인 워크아웃 팀 명단에서 밀워키를 제외했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 NBA 드래프트에서 밀워키 벅스에게 무려 1라운드 6순위로 지명되었다.
이는 아시아 농구선수 중 지금까지도 야오밍 다음가는 순위로. 참고로 2025년 기준 양한센이 1라운드 16순위 지명으로 3위다. 물론 NBA 드래프트 지명 순위가 높다고 무조건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니고 반대 사례도 많지만, 당시 야오밍의 후계자로 불리던 이젠롄의 어마어마한 기대치를 알 수 있다. 이로써 왕즈즈, 야오밍, 멍크 바터에 이어 중국 선수로는 NBA에 네 번째로 데뷔했다. 이젠롄은 뛰어난 골밑 활약에 득점력까지 갖춰 그는 중국에서 무려 야오밍에 버금갈 정도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앞서 말했던 피건이 밀워키의 선택을 원하지 않은 이유는 해당 도시에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워키 단장인 래리 해리스는 “우리는 가용한 선수 중 최고의 선수를 선택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젠롄과 쑨웨는 NBA 드래프트 역사상 처음으로 한 드래프트에서 두 명의 중국 선수가 동시에 지명된 사례로 기록되었고, 이는 2016년까지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다.
드래프트 이후 밀워키는 이젠롄을 설득해 계약을 체결하려 했다. 2007년 7월 2일, 벅스 구단주 허브 콜은 이젠롄과 그의 에이전트에게 편지를 보내 직접 설득하려 했다. 3일 뒤, 감독 래리 크리스코비악과 단장 해리스는 이젠롄을 만나 밀워키에서 뛰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그의 에이전트는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다른 도시의 팀으로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중국 당국도 이젠롄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출전 시간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콜 구단주는 직접 홍콩을 방문해 이젠롄을 설득하고, 중국 당국에게도 충분한 출전 시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2007년 8월 29일, 이젠롄은 밀워키 벅스와 표준적인 다년 신인 계약을 체결했다.
이젠롄은 2007-08 시즌 개막을 앞두고 수석 코치 래리 크리스코비악에 의해 찰리 빌라누에바를 대신해 밀워키의 선발 라인업에 포함되었다. 올랜도 매직과의 데뷔전에서 그는 9득점과 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3일 뒤 열린 시카고 불스와의 홈 개막전에서는 16득점과 8리바운드를 기록하며 78-72 승리에 기여했다. 이 경기는 중국 전역에 생중계되었으며, 약 1억 명의 시청자가 지켜본 것으로 추산되었다. 야오밍은 이젠롄의 첫 경기들을 본 뒤 “나의 세 번째 NBA 경기 기록과 비교해 보면, 이젠롄의 성적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칭찬했다.[7]
2007년 11월 9일, 이젠롄은 밀워키가 휴스턴 로켓츠를 홈으로 초청해 104-88로 패한 경기에서 야오밍과 처음으로 맞대결을 펼쳤다. 이젠롄은 3점슛 2개를 포함해 19득점 9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야오밍은 28득점 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두 선수의 맞대결은 중국에서 무려 수억 명이 넘는 시청자가 지켜보며 NBA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청자가 본 경기 중 하나가 되었다. 경기 후 야오밍은 이젠롄의 재능을 “믿을 수 없다”고 평가했고,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는 “이 리그에서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선수”라고 말했다. 중국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의 전 감독 델 해리스도 이젠롄을 “NBA에서 가장 운동 능력이 뛰어난 7피트 선수”라고 묘사했다.
이젠롄은 2007년 12월 한 달 동안 경기당 평균 12.1득점과 6.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NBA 이달의 신인 선수(Rookie of the Month)로 선정되었다. 12월 22일에는 샬럿 밥캐츠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17개의 슛 중 14개를 성공시키며 개인 최고 득점인 29점을 기록했다. 2008년 1월 30일, 그는 2008년 NBA 올스타전의 루키 챌린지(Rookie Challenge)에 신인 팀 선수로 선발되었다.
2008년 2월 2일, 밀워키가 홈에서 휴스턴과 맞붙은 경기에서 이젠롄은 야오밍과 두 번째로 맞대결을 펼쳤다. 당시 감독 래리 크리스코비악은 이 경기를 “중국의 슈퍼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두 선수 모두 부진했고, 휴스턴이 91-83으로 승리하는 동안 야오밍은 12득점, 이젠롄은 경기 중 어깨 부상으로 인해 6득점에 그쳤다.
2008년 4월 2일, 이젠롄은 하지만 왼 무릎을 다친 뒤 잔여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채 첫 NBA 시즌을 마감했고 결국 66경기에서 49차례 선발로 나와 평균 8.6득점에 5.2개 리바운드를 기록하는 성적표를 받았다.
밀워키의 수석 코치 중 한 명인 브라이언 제임스는 나중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부상이 심각했고, 그로 인해 출전이 불가능했다”고 밝혔다.
그 이후 밀워키 벅스와 뉴저지 네츠의 트레이드가 성사되면서 이적하게 된다.
뉴저지 팀 사장인 로드 손은 “우리는 그가 정말 훌륭한 선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고, 팀 최고경영자(CEO)인 브렛 요마크는 “이번 영입은 우리에게 새로운 팬층을 여는 기회가 된다”고 말했다. 이젠롄은 트레이드를 예상하지 못했지만 “넷츠에 합류하게 되어 영광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뉴저지에서 첫 37경기 동안 이젠롄은 평균 10.4득점, 6.2리바운드 3점슛 성공률은 39%로 이전 시즌보다 크게 향상되었다. 나름 괜찮은 스탯을 기록 중이었지만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게 됐다. 로드 손은 “잘해주고 있었는데 타이밍이 아쉽다”고 했고, 이젠롄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9년 NBA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이젠롄은 동부 콘퍼런스 포워드 부문에서 폴 피어스와 크리스 보쉬 등을 제치고 3위를 차지했다. 그는 2009년 2월 17일, 휴스턴 로켓츠전 이후 부상에서 복귀했다. 그러나 복귀 후 평균 36%의 슈팅 성공률과 6득점에 그치며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었다. 시즌 최종 기록은 평균 8.6득점, 5.3리바운드였으며, 필드골 성공률은 38%, 3점슛 성공률은 34%였다.
뉴저지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뒤, 이젠롄의 에이전트인 댄 피건은 “그가 더 많은 시간과 기회를 받았을 때 팀이 더 좋은 경기를 했다는 점을 기억하라”며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로렌스 프랭크 감독은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는 아직 21살이다”라고 말했고, 이젠롄은 “아직 기복이 심하다”고 시즌을 평가했다.
2009-10 시즌, 이젠롄은 뉴저지의 선발 라인업으로 복귀했다. 그는 단 한 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에 선발로 출전했지만, 시즌 중 여러 부상으로 인해 30경기를 결장했다. 그는 2009년 11월 4일 내측 측부 인대 부상을 입었고, 12월 8일에는 윗입술이 찢어졌으며, 2010년 3월 8일에는 왼쪽 발목을 접질렸다. 시즌 최종 기록은 경기당 평균 12득점, 7.2리바운드였고, 필드골 성공률은 40%, 3점슛 성공률은 37%였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부상을 입게 되어 점차 주전에서 제외되게 된다.
2010년 6월 29일, 이젠롄은 퀸튼 로스를 상대로 300만 달러의 현금과 함께 워싱턴 위저즈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는 2010-11 시즌 동안 경기당 평균 5.6득점, 3.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워싱턴은 2011년 6월 30일까지 그의 계약을 연장할 수 있었지만, 연장을 선택하지 않았다. 사실상의 가비지멤버가 되었고 결국 방출되었다.
2011년 NBA 파업 기간 동안, 이젠롄은 광둥 서던 타이거즈와 1년 계약을 맺고 복귀했다. 당시 대부분의 NBA 선수들과 달리, 그는 파업이 종료되면 NBA로 복귀할 수 있는 옵션을 계약에 포함시켰다.
2012년 1월 6일, 이젠롄은 광둥에서 시즌을 시작한 뒤 댈러스 매버릭스와 1년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곧바로 D-리그 산하 팀인 텍사스 레전드로 배정되었다. 이는 새로운 단체협약에 따라, 2년 이상의 NBA 경력을 가진 선수가 본인의 동의하에 D-리그로 배정될 수 있도록 허용한 규정 덕분이었다.
2012년 1월 9일, 이젠롄은 텍사스 레전드에서 2경기에 출전해 평균 23득점, 12리바운드를 기록한 후 댈러스로 다시 콜업되었다. 댈러스는 플레이오프에서 오클라호마시티 선더와 맞붙었고, 시리즈 3차전에서 이젠롄은 생애 첫 NBA 플레이오프 경기에 출전해 5분 동안 2득점을 기록했다.
이젠롄은 NBA 통산 272경기 출전 평균 7.9점 3.5리바운드라는 기록을 남기고 NBA 무대를 떠났다. 이젠롄의 272경기 출전은 야오밍(486경기), 제레미 린(480경기)에 이어 NBA에서 많이 출전한 아시아 선수로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젠롄은 2012-13 CBA 시즌을 위해 다시 광둥 서던 타이거스에 합류해 네 번째 챔피언에 올랐다.
2016년 8월 22일, 그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1년 80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하며 2012년 이후 처음으로 NBA에 복귀했다. 레이커스의 감독 루크 월튼은 프리시즌 기간 동안 그를 팀 최고의 슈팅 능력을 가진 빅맨으로 평가했지만, 정작 그에게 많은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젠롄은 프리시즌 6경기에서 평균 10.7분을 소화하며 3.0득점, 2.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는 더 나은 기회를 원해 정규 시즌 개막 전에 스스로 방출을 요청했고, 레이커스는 2016년 10월 24일 그를 공식 방출했다.
2016년 10월, 레이커스 훈련캠프 참가 후 광둥으로 복귀했다.
2020년 8월 15일, 그는 CBA 파이널 3차전에서 랴오닝 플라잉 레오파즈를 123-115로 꺾고 광둥 서던 타이거즈의 통산 10번째 CBA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 경기에서 아킬레스건 파열 부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2020-21 시즌 상당 기간을 재활로 보내게 되었다.
2022-23 CBA 시즌은 이젠롄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그는 2023년 8월 30일 은퇴를 발표했다. 시나 웨이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시간은 참 빠르다. 어느새 농구는 21년 동안 내 곁에 있었다. 긴 고민 끝에 나는 농구 인생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앞으로도 계속 나아가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열고자 한다. 안녕, 사랑하는 농구여.”
이젠롄은 2003년 FIBA U-19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했으며, 당시 경기당 평균 18.9점과 11.5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성인 중국 농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했고, 2006년 FIBA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경기당 평균 6점과 6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이러한 활약은 중국 국가대표팀의 코치들과 다른 국가의 코치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중국 국가대표팀에 다시 선발되었다. 중국은 조별 리그 첫 두 경기에서 미국과 스페인에게 모두 패했고, 이젠롄은 각각 9점과 4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앙골라와의 경기에서 이젠롄은 더블더블을 기록했고, 독일과의 경기에서는 9점과 11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경기 종료 28초를 남기고 결정적인 슛을 성공시켜 중국의 8강 진출에 기여했다.
중국은 8강전에서 리투아니아에 94-68로 패했고, 이 경기에서 11점을 득점했다. 이젠롄은 전 NBA 선수인 쑨웨와 함께 2009년과 2011년 FIBA 아시아 챔피언십에 출전했다. 2011년 FIBA 아시아 챔피언십에서 경기당 평균 16.6점과 10.8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MVP로 선정되었다.
이젠롄은 2012 런던 올림픽에서도 중국 국가대표팀으로 활약했으며, 경기당 평균 10.2개의 리바운드로 전체 1위, 2.2개의 블록으로 2위를 차지했다. 2016년 하계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이젠롄은 2019년 FIBA 농구 월드컵에서도 중국 대표팀의 1옵션으로 활약하며 평균 17.8점, 7.8개의 리바운드, 1.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는 27점을 기록하며 최근 몇 년 사이 국가대표팀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2023년 국가대표 은퇴를 발표했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성인 중국 농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했고, 2006년 FIBA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경기당 평균 6점과 6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이러한 활약은 중국 국가대표팀의 코치들과 다른 국가의 코치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중국 국가대표팀에 다시 선발되었다. 중국은 조별 리그 첫 두 경기에서 미국과 스페인에게 모두 패했고, 이젠롄은 각각 9점과 4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앙골라와의 경기에서 이젠롄은 더블더블을 기록했고, 독일과의 경기에서는 9점과 11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경기 종료 28초를 남기고 결정적인 슛을 성공시켜 중국의 8강 진출에 기여했다.
중국은 8강전에서 리투아니아에 94-68로 패했고, 이 경기에서 11점을 득점했다. 이젠롄은 전 NBA 선수인 쑨웨와 함께 2009년과 2011년 FIBA 아시아 챔피언십에 출전했다. 2011년 FIBA 아시아 챔피언십에서 경기당 평균 16.6점과 10.8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MVP로 선정되었다.
이젠롄은 2012 런던 올림픽에서도 중국 국가대표팀으로 활약했으며, 경기당 평균 10.2개의 리바운드로 전체 1위, 2.2개의 블록으로 2위를 차지했다. 2016년 하계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이젠롄은 2019년 FIBA 농구 월드컵에서도 중국 대표팀의 1옵션으로 활약하며 평균 17.8점, 7.8개의 리바운드, 1.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는 27점을 기록하며 최근 몇 년 사이 국가대표팀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2023년 국가대표 은퇴를 발표했다.
탈 아시안급의 엄청난 운동 능력을 자랑하는 빅맨이었다. 216cm의 거대한 신장에 훌륭한 윙스팬[8], 평균적인 NBA 7푸터들을 가볍게 상회하는 사이즈 대비 엄청난 운동 능력까지 있었기에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그야말로 탈 아시안 급이었다.[9] 거기에 포지션 대비 준수한 점퍼와 넓은 슛거리, 좋은 리바운드와 협동 수비력이 장점.
단점은 빅맨으로서 파워가 다소 부족하여 NBA 레벨에선 대인수비에 약점을 보였고, 야투의 기복이 심한 편임에도 골밑에서 몸비비기를 싫어해 점퍼로 일관하는 성향이 강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NBA에선 커리어 통틀어 단 한 시즌도 ts%가 0.5를 넘어본 적이 없는데, 빅맨이 야투율도 아니고 ts%가 0.4 후반대에 그친다는 건 득점 효율이 상당히 저조하다는 말이 된다. 뉴저지 네츠에서 경기당 30분 이상을 뛰며 평균 12득점 7.2리바운드라는 준수한 볼륨을 뽑아낸 3년차 시절에도 이 낮은 효율만큼은 그대로였을 정도.
야오밍 이후 아시아권에선 최고의 재능으로 통했고 실제로 NBA에서도 어느 정도는 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더딘 발전과 잦은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도 센터치고 기동성과 슈팅 레인지가 준수해서 10~20년대 NBA 트렌드라면 좀 더 수요가 있었을 만한 선수이며, 사실 트렌드를 떠나서 가진 재능 자체는 NBA에서 자리잡는데 모자람이 없었다고 평하는 팬들도 적지 않다. 일단 파워는 좀 딸려도 사이즈와 운동 능력은 케빈 가넷에 버금갈 정도인 데다[10], 팔도 길고 슈팅터치도 매우 부드러운 7푸터라면 어디가 됐던 자리는 잡을 수 있다. 때문에 부상으로 퇴출될 당시만 해도 마음 독하게 먹고 재활했다면 충분히 부활 가능성이 있었고, 그의 나이와 중국에 돌아가 보인 활약을 보면 전망이 어두운 것도 아니었다.
즉, NBA에서 유의미한 출전시간을 받지 못한 쑨웨나 멍크 바터, 저우치, 왕즈즈 등에 비하면, 이젠롄은 적어도 건강하다는 전제 하에는 NBA 팀들이 로스터에 두고 써 볼 만한 실력 자체는 분명히 갖추고 있는 선수였다. 그러나 이젠롄은 NBA에서 커리어를 끝까지 이어가는 데에 큰 미련은 없었던 걸로 보인다. 일단 그는 야오밍을 제외한 다른 중국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영어를 배우는데 적극적이지 않았고,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으며 개인적으로 친한 동료도 딱히 없었다. 사실상 2020년대 들어서는 이젠롄이 NBA를 일찍 떠난 건 부상보다도 바로 이 언어를 비롯한 현지 적응 능력 문제가 더 컸다고 분석된다.[11] 게다가 안 그래도 타국생활 자체가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NBA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건 더더욱 힘겨운 일이다. 그러니 이렇게 고생하면서 그저그런 NBA 롤플레이어 중 하나로 남느니 차라리 중국에서 CBA의 황제로 살아가는 것도 합리적이지 못 한 선택은 아니다. 때문에 이젠롄이 NBA 적응에 실패한 이유는 재능 부족이 아닌 내구성 부족, 그리고 본인에게 NBA에서 악착같이 버틸 의사가 없었다는 점에 있다고 평가하는 팬들이 많다.
6회 CBA 챔피언 ( 2004 ~ 2006 , 2013 , 2019 , 2020)
5회 CBA MVP ( 2013 ~ 2016 , 2020)
CBA 파이널 MVP 3회 수상 ( 2006 , 2013 , 2019 )
12회 CBA 올스타 ( 2004년 ~ 2007년 , 2013년 ~ 2020년 )
2× CBA 최우수 수비수 (2007, 2019)
FIBA 아시아컵 우승 3회 (2005, 2011, 2015)
FIBA 아시아컵 MVP 2회 수상 ( 2011 , 2015 )
2회 CBA 슬램덩크 리더( 2015 , 2016 )
5회 CBA MVP ( 2013 ~ 2016 , 2020)
CBA 파이널 MVP 3회 수상 ( 2006 , 2013 , 2019 )
12회 CBA 올스타 ( 2004년 ~ 2007년 , 2013년 ~ 2020년 )
2× CBA 최우수 수비수 (2007, 2019)
FIBA 아시아컵 우승 3회 (2005, 2011, 2015)
FIBA 아시아컵 MVP 2회 수상 ( 2011 , 2015 )
2회 CBA 슬램덩크 리더( 2015 , 2016 )
정리하자면 원래 84년생으로 등록되었다가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때부터 87년생으로 등록, NBA에 드래프트될 때도 이렇게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84년생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
이젠롄이 NBA 진출을 모색할 당시 87년생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4년부터 사실은 84년생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어왔다. 실제로 중국 측에서 최초의 이젠롄의 나이를 밝힐 때는 88년생이라고 했으나 이후 87년생으로 정정되기도 했다.
최초의 논란에 불을 지핀 것은 그가 드래프트 유망주로 이름을 널리 알리던 2006년, 2004년 중국 국가대표팀 명단에 그의 생일이 1984년 10월 27일인 것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부터였다. 중국 측에서는 '오타인 것 같다'라고 부인했으나, 2006년에 이젠롄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국 대표팀이었던 셰인 베티에에게 자신이 24세(최소 82년생)이라고 밝혔다는 보도가 휴스턴 크로니클에 나면서 논란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이젠롄과 베티에 둘 다 이를 부인하면서 이 보도는 묻혔다.
결정적으로 2007년에 중국판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가 이젠롄이 97년도에 중학생이었음을 보여주는 서류가 있다고 보도했다. 97년 10월 20일 작성된 이 서류에는 이젠롄이 1984년 10월 27일생이라고 나와있다. 당연하지만 만약 그가 87년 10월생이 맞다면 10세였을 97년 10월에 중학생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6년/중학교 3년/고등학교 3년이며 한국과 달리 9월에 새학기를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젠롄이 84년 10월생이라면 저 서류가 작성된 97-98학년도에 13세였을 것이고 이는 딱 중학생 나이이다.
이 점 때문에 대체적으로 해외에서는 이젠롄이 84년생이 맞다고 보고 있다. 중국 측에서 공식 입장을 내놓지는 않았는데, 이는 당연히 자신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인정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앞선 보도를 부인했던 중국과 이젠롄 측은 이 보도에 대해선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에선 유망주들의 나이를 깎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2006년 당시 CBA(Chinese Basketball Association)은 '나이 속이기에 대한 전쟁(war against the age fraud)'을 선포하고 유망주들의 상세한 서류 제출을 요구하고, 골격을 검사해 자세한 나이를 밝혀내는 장비까지 도입한 바 있다.
이젠롄이 NBA 진출을 모색할 당시 87년생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4년부터 사실은 84년생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어왔다. 실제로 중국 측에서 최초의 이젠롄의 나이를 밝힐 때는 88년생이라고 했으나 이후 87년생으로 정정되기도 했다.
최초의 논란에 불을 지핀 것은 그가 드래프트 유망주로 이름을 널리 알리던 2006년, 2004년 중국 국가대표팀 명단에 그의 생일이 1984년 10월 27일인 것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부터였다. 중국 측에서는 '오타인 것 같다'라고 부인했으나, 2006년에 이젠롄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국 대표팀이었던 셰인 베티에에게 자신이 24세(최소 82년생)이라고 밝혔다는 보도가 휴스턴 크로니클에 나면서 논란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이젠롄과 베티에 둘 다 이를 부인하면서 이 보도는 묻혔다.
결정적으로 2007년에 중국판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가 이젠롄이 97년도에 중학생이었음을 보여주는 서류가 있다고 보도했다. 97년 10월 20일 작성된 이 서류에는 이젠롄이 1984년 10월 27일생이라고 나와있다. 당연하지만 만약 그가 87년 10월생이 맞다면 10세였을 97년 10월에 중학생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6년/중학교 3년/고등학교 3년이며 한국과 달리 9월에 새학기를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젠롄이 84년 10월생이라면 저 서류가 작성된 97-98학년도에 13세였을 것이고 이는 딱 중학생 나이이다.
이 점 때문에 대체적으로 해외에서는 이젠롄이 84년생이 맞다고 보고 있다. 중국 측에서 공식 입장을 내놓지는 않았는데, 이는 당연히 자신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인정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앞선 보도를 부인했던 중국과 이젠롄 측은 이 보도에 대해선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에선 유망주들의 나이를 깎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2006년 당시 CBA(Chinese Basketball Association)은 '나이 속이기에 대한 전쟁(war against the age fraud)'을 선포하고 유망주들의 상세한 서류 제출을 요구하고, 골격을 검사해 자세한 나이를 밝혀내는 장비까지 도입한 바 있다.
2024년 10월, 이젠롄은 트랜스젠더 여성에게 1,500달러를 지불했다는 성매매 스캔들에 연루되었다. 둥관시 정협 관계자는 이 스캔들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전에 이젠롄과 협업했던 여러 브랜드는 관련 홍보 자료를 즉시 삭제했으며, 이젠롄은 이와 관련된 비난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이전에 이젠롄과 협업했던 여러 브랜드는 관련 홍보 자료를 즉시 삭제했으며, 이젠롄은 이와 관련된 비난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 만다린어와 모국어인 광둥어에 능통하다.
- 2008년 포브스 ‘중국 유명인 100인’ 순위에서 수입과 인기 부문 4위에 올랐다.
- 2008년, 쓰촨성 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10만 위안을 기부했고, 같은 해 하계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에서 하이난 구간의 성화를 들고 참여했다.
[1] FIBA 아시아 컵 MVP[2] FIBA 아시아 컵 MVP[3] 원래 87년생이라고 알려졌으나 84년생이라고 봐야 한다. 자세한 사항은 후술.[4] 착화 신장.[5] 국제 무대나 아시아에서는 센터로도 많이 뛰었지만 NBA에선 파워포워드로 주로 뛰었다. Play by play 데이터를 보면 루키 시즌엔 97%, 그 이후부터는 90, 81, 45, 88%의 출장 시간을 파워포워드로 출장했으며 4년차에 (당시 미숙한 플레이를 일삼았던 자베일 맥기가 주전 센터였을 정도로) 골밑이 빈약한 워싱턴에서 뛸 때만 센터로 조금 더 많이(55%) 뛰었다. NBA 기준으론 파워포워드, 아시아 무대 기준으로 센터라고 볼 수 있다.[6] 2020년대 들어서는 후술되어 있듯 이젠롄이 생각보다 NBA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 건 부상 문제보다도 영어를 잘 배우려고 하지 않는 태도가 더 문제였을 것이다라는 평가도 많아졌다.[7] 야오밍은 데뷔 초반에 정말 처참한 수준으로 헤맸다. 야오와 이 둘 다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들과 매치업 경험은 많지 않았지만 해외 진출에 대해 더 폐쇄적이던 90년대에 국제무대를 위한 준비를 거의 못한 야오와 달리 이는 아디다스의 초청으로 2002년 ABCD캠프에 참가하기도 해 수년간 체계적으로 준비했기에 미국선수들에 대해 좀 더 지식이 있었다. 야오는 아시아와 달리 피지컬만으로 압도하기 힘들었던 NBA선수들을 상대로 데뷔전에서 무득점 2리바운드 3파울 2턴오버에 그쳤고 레이커스전에서 20점을 기록하기 전까지 평균 4.3점에 그치며 헤맸지만, 이는 헤멘 경기도 있었지만 비교적 빨리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감을 잡은 이후 신인왕급의 성적을 낸 야오밍과 달리 이젠롄의 기량은 NBA에서 스타급으로 성장하기 한계가 있었다.[8] 신체 비율 자체도 흑인 선수들과 유사했다. 리우 올림픽 당시 나이키 광고에 미국 대표팀 케빈 듀란트와 나란히 출연한 사진을 보면 신체비율이 케빈 듀란트와 비슷하다.[9] 드래프트 당시 신체검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드래프트 당시 공식 수치를 찾기는 힘들지만, 윙스팬이 7피트 3.5인치에 최대 점프력 38인치, 체지방률이 4% 미만이라고 알려져 있다. 비유하면 케빈 가넷과 비슷한 키에 윙스팬은 0.5인치 짧고, 블레이크 그리핀보다 점프력이 높다는 얘기. 공식적으로 발표된 수치가 아니니 다소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특히 점프력) 육안으로 봐도 그의 운동능력은 엄청났다.[10] 물론 가넷은 이젠롄과 달리 힘도 매우 강한 선수였지만 이건 가넷이 타고나길 장사였기 때문이고, 원래 가넷이나 이젠롄 같은 탄력과 어질리티를 가진 선수라면 그만큼 매끈한 체형인 경우가 많아 파워는 약한 게 일반적이다.[11] 프로는 기본적으로 실력이 가장 중요하다지만 다른 동료들과 전혀 교류가 없고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면 팀 케미스트리에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야오밍과 이젠롄의 차이 중 하나가 이것인데, 야오밍은 영어를 적극적으로 배워 꽤나 유창하게 구사한 데다 성격이 유머러스하고 입담도 상당해서 의사소통이 원활했다. 그리고 언어 능력은 다른 프로 스포츠 종목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축구쪽만 봐도 첼시 FC에서 기대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한 에르난 크레스포, 아예 먹튀가 된 안드리 셰브첸코도 영어를 못한 것이 프리미어 리그 적응 실패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심지어 잉글랜드에서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쌓았다고 평가받는 카를로스 테베스도 잉글랜드에 온 지 수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간단한 영어조차 못한다는 점에서 선수 본인이 전혀 적응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비판을 받았었다. 그만큼 프로 스포츠 선수가 해외 클럽에 소속되어 있으면 그 나라의 모국어를 해야 대부분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젠롄의 영어를 배우는데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은 다른 팀원들이나 코칭 스태프들, 그리고 팬들이 보기에는 적응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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