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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邯郸市 한단시 | Handan City | |||||||||||||||||||||||||||||||||||||||||||||
시정부 소재지 | |||||||||||||||||||||||||||||||||||||||||||||
지역 | |||||||||||||||||||||||||||||||||||||||||||||
면적 | 12,068km² | ||||||||||||||||||||||||||||||||||||||||||||
하위 행정구역 | 7구 1현급시 11현 | ||||||||||||||||||||||||||||||||||||||||||||
시간대 | UTC+8 | ||||||||||||||||||||||||||||||||||||||||||||
인문 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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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부 허베이성의 지급시. 스자좡(석가장)에서 남쪽으로 150km, 정저우에서 북쪽으로 200km 떨어진 평야에 위치해 있다. 허베이성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산시성(산서성), 동쪽으로는 산둥성 지난시, 바로 남쪽에는 안양시가 있다.
인구는 945만 명이지만 중국의 지급시는 하나의 도시권 개념이라, 도시 자체의 인구는 290만 명가량이다. 허베이 성의 남쪽 끝에 위치한 도시이고, 상나라(은나라)의 고도인 안양은 남쪽으로 40km 떨어져 있는 이웃 도시이다. 서쪽으로 타이항 산맥을 넘어 조금만 가면 창즈(長治)가 나오고, 남쪽으로는 정주, 낙양 등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관동과 관서를 잇는 요충지에 위치하여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중심지이다. 시내 서남쪽 10km에 한단 공항이 있고 동북쪽 15km에는 최근 중국 정부에서 AAA급 관광지로 선정한 광푸진(广府镇)이 위치해 있다. 옛 조나라의 수도이고 지금은 조그만 마을이지만 조조 관광지로 개발 중인 업성도 현재는 한단의 일부이다.
인구는 945만 명이지만 중국의 지급시는 하나의 도시권 개념이라, 도시 자체의 인구는 290만 명가량이다. 허베이 성의 남쪽 끝에 위치한 도시이고, 상나라(은나라)의 고도인 안양은 남쪽으로 40km 떨어져 있는 이웃 도시이다. 서쪽으로 타이항 산맥을 넘어 조금만 가면 창즈(長治)가 나오고, 남쪽으로는 정주, 낙양 등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관동과 관서를 잇는 요충지에 위치하여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중심지이다. 시내 서남쪽 10km에 한단 공항이 있고 동북쪽 15km에는 최근 중국 정부에서 AAA급 관광지로 선정한 광푸진(广府镇)이 위치해 있다. 옛 조나라의 수도이고 지금은 조그만 마을이지만 조조 관광지로 개발 중인 업성도 현재는 한단의 일부이다.
신화시대에 여와가 한단의 고중황산(古中皇山)에서 최초로 사람을 빚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역사에는 죽서기년에 처음 등장한다. 죽서기년에서는 제신이 한단에 별궁별관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위(衛)나라의 수도로 시작하여 조나라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시내 남서쪽 4km에 위치한 조왕성(趙王城)과 한나라 때의 번국인 조나라의 궁궐 유적이 남아있어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끈다. 시내에 가면 조나라의 중흥을 만든 조무령왕의 커다란 석상과 호복 도입을 기념하기 위한 호복을 착용한 기마무사상이 서 있다.
기원전 260년 진나라가 조나라군을 장평대전에서 박살내고 한단성을 포위했으나, 한단성은 매우 견고했기 때문에 진나라도 결국 함락하지 못했다. 이렇게 한단성은 전국시절 당시 여러 나라들의 침략을 저지한 난공불락의 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기원전 228년 왕전이 지휘한 진나라군에 함락되었고 조나라는 멸망한다.
한나라 건국 직후, 공신 진희가 흉노와 연합해 모반한 난을 진압하기 위해 한고조가 이곳에 교두보를 건설했다. 이것이 고대에서 한단이 유의미한 역할을 한 거의 마지막 사건이며, 이후 전한~신 동안에는 전국 N대 도시 정도의 위치를 지켰다[1]
춘추전국시대에는 위(衛)나라의 수도로 시작하여 조나라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시내 남서쪽 4km에 위치한 조왕성(趙王城)과 한나라 때의 번국인 조나라의 궁궐 유적이 남아있어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끈다. 시내에 가면 조나라의 중흥을 만든 조무령왕의 커다란 석상과 호복 도입을 기념하기 위한 호복을 착용한 기마무사상이 서 있다.
기원전 260년 진나라가 조나라군을 장평대전에서 박살내고 한단성을 포위했으나, 한단성은 매우 견고했기 때문에 진나라도 결국 함락하지 못했다. 이렇게 한단성은 전국시절 당시 여러 나라들의 침략을 저지한 난공불락의 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기원전 228년 왕전이 지휘한 진나라군에 함락되었고 조나라는 멸망한다.
한나라 건국 직후, 공신 진희가 흉노와 연합해 모반한 난을 진압하기 위해 한고조가 이곳에 교두보를 건설했다. 이것이 고대에서 한단이 유의미한 역할을 한 거의 마지막 사건이며, 이후 전한~신 동안에는 전국 N대 도시 정도의 위치를 지켰다[1]
西漢時期的邯鄲憑藉地理位置和原有的城市基礎優勢社會經濟得到迅速的恢復與發展,到西漢後期便躋身當時全國「五大都城」之列,僅次於長安、洛陽的中國第三位經濟中心。漢代邯鄲城,主城區面積13.6平方公里,人口有四五十萬人,比戰國時期還多
서한시기 한단은 지리적 위치와 기존에 있던 도시기반 시설 덕분에 사회경제적으로 급속도로 회복 발전했다. 서한 후기엔 전국 5대도시중 하나까지 상승했고, 장안, 낙양 다음 가는 중국 3대 경제도시였다. 한대 한단성, 주성지역의 면적은 13.6km^2이고 인구는 40~50만에 달했다. 전국시기보다 인구가 더 많았다.
邯鄲在戰國、秦朝以及西漢持續了百年興盛之後,便開始走向衰落,主要原因就是東漢開國皇帝劉秀與王郎的「邯鄲之戰」。劉秀在河北起兵後,攻占邯鄲,「因攻城邑,遂屠邯鄲」,對邯鄲城內進行報復性地屠殺和洗劫,使這座百年名都毀於兵燹。此戰為劉秀後來建立東漢奠定基礎,但是使邯鄲的人力、物力遭受前所未有的損耗。這次戰爭是古邯鄲由盛到衰的重要轉折點,213年,甚至改為邯鄲縣,屬魏郡,邯鄲第一次由王國之都改為縣治,邯鄲逐漸從「五大都城」之一變為一個普通的縣城,從此一蹶不振,邯鄲開始衰落。東漢初期,邯鄲由於長期戰亂和災難,元氣並未恢復。到了東漢末年,袁紹占據河北建立鄴城,取代邯鄲,鄴城逐漸興盛,遂成為冀州治。
전국, 진, 서한시기의 백년 흥성 이후 (한단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주요원인은 동한 개국황제 유수와 왕랑이 벌였던 한단전투 때문이다. 유수는 하북에서 거벙한 이후 한단을 점령하고 한단성내에 보복성 학살과 약탈을 감행했다, 이 때문에 백년명도는 전쟁으로 파괴됐다. 이 전투는 유수가 동한을 건립하게 하는 기초가 됐지만, 한단의 인력, 물자는 전무후무한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는 고도 한단의 쇄락에 중요 전환점이 됐다. 213년 심지어 한단은 최초로 왕국의 도읍에서 현급으로 몰락했다. 위군 소속 한단현이 된 것이다. 한단은 전국 5대도시에서 그저 지방의 현으로 줄곳 쇄락하기 시작했다. 동한 초기, 한단은 장기간 전란과 재난으로 원기를 회복하지 못했고, 동한 말기엔 원소가 건립한 업성이 한단의 자리를 대신해 기주의 중심지가 됐다.
"동한(후한) 초기의 통계에 따르면, 한단(邯鄲) 성내의 인구는 불과 5만에서 6만 명뿐이었다. 이는 서한(전한) 시기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천양지차)이며, 전체 인구수는 서한 시대보다 훨씬 적었다."손계민, 학량진. 《한단간사(邯郸简史)》. 중국도시경제사회출판사. 1990년: 제128—137쪽. ISBN 7507404676#
이후 후한 개국 전(24년) 통일전쟁 때 유수(광무제)가 경쟁 군벌 왕랑의 거점이었던 여기를 초토화시키면서 확 주저앉기도 했는데 전한 시기 한단은 4~50만여명의 인구를 보유한 하북 굴지의 대도시였지만 광무제 유수의 학살 이후에는 전후 복구 후에도 도시에 남은 인원이 5만여명이 될 정도로 철저하게 박살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213년에 방자현으로 치소가 이전될 때까지 200년 가까이 조(趙)국의 치소로서 기능하였다.
때문에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원상을 추격할 때 단 한번 언급이 될 뿐이다. 대신 삼국지 기준으로는 한단보다는 그보다 조금 남쪽에 있었던 업성이 떠올라서 후한말에서 남북조시대까지 400년간 한단시 주변, 즉 하북(기주) 남부 지역의 중심지는 업성이었다. 송나라 이후에는 그나마 현 한단시 지역에 속한 대명부가 같은 역할을 했는데, 송대에는 만리장성은 말할 것도 없고 연운 16주를 북방 세력에 내주고서 시작했기 때문에 개봉 인근에 북방 저지선 역할을 할 거점 선정이 시급했고 그것이 바로 대명부로서 공식명칭은 북경대명부였다.[2] 정강의 변 이후 금나라가 세운 괴뢰국인 제나라의 수도가 되기도 하였다. 명-청대에는 이런 '경'급 도시에서는 내려왔지만 적어도 하북(북직예) 남부 일대의 소중심지 정도는 유지했다. 지금이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이 모두가 어쨌든 하나의 '지급시'로 묶여있지만 원래는 한단 - 업성 - 대명부는 서로 다른 발전과정과 역사를 가진 별개의 도시들이다.
중흥의 계기는 석탄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80년대에 한단의 서쪽에 있는 태항산맥에서 거대한 석탄의 광맥이 발견되었다. 이때부터 공업 도시로 발전하며 2천 년간 단역으로 머물렀던 도시가 지금 같이 천만의 인구를 자랑하는 거대한 도시가 되었다.
다만 광업 도시답게 대기 오염이 매우 심하다.
의외로, 중국의 여러 도시들 중 고대로부터 단 한 번도 이름이 변하지 않은 얼마 안 되는 지명 중 하나이다. 좀 유명한 도시들은 황제의 기분대로 이름이 자주 고쳐졌는데, 한단은 남양(南阳:현재는 난양시에 편성되었다.)처럼, 춘추전국시대에 처음 기록에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지명이 변경되지 않았다. 그 이외에는 그나마 낙양이 선진(先秦) 시대의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는 유명 역사도시이지만, 낙 자의 한자가 洛과 雒 사이에서 여러 번 바뀌었던데다가 '낙'자가 아예 빠지고 하남부 혹은 하남군으로 불렸던 적도 있었다.

광부진 성
조왕성 유적 지도
[1] 왕망이 본인다운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정책을 시행하려는 가운데 그 시범 케이스로 전국 6대 도시를 꼽았는데, 거기에 한단이 들어간다.[2] 송나라의 경제(京制)는 본수도가 아닌 배도(陪都)들도 본수도인 개봉에서 다 가까운 편이기 때문에(더군다나 중국과 한국의 상대적인 거리개념을 생각하면 더더욱), 한국사로 따질 때 고려의 3경제는 경주와 평양이 개성에서 제법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는 할 수 없고, 조선 중후기 경기도에 한양을 둘러싸는 형국으로 군사적인 차원에서 개성, 수원, 강화, 광주(남한산성) 등의 유수부를 설치했는데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3] 중국으로 귀화한 쇼트트랙 선수인 임효준이 이 회사 팀의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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