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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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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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타 | |
프로 입단 | |
소속팀 | |
지도자 |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0) 해태-KIA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2001~2002) KIA 타이거즈 1군 작전·수비코치 (2003)[3] KIA 타이거즈 2군 작전·수비코치 (2003)[4] KIA 타이거즈 1군 작전·수비코치 (2004~2007)[5] KIA 타이거즈 2군 작전·수비코치 (2007)[6] 우리-서울 히어로즈 1군 수비코치 (2008~2009)[7] KIA 타이거즈 1군 작전·주루코치 (2010~2012)[8] KIA 타이거즈 2군 작전·주루코치 (2012~2013)[9] KIA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2014) KIA 타이거즈 2군 수비코치 (2015~2016) KIA 타이거즈 3군 총괄코치 (2017~2018) 홍익대학교 야구부 코치 (2019)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20) KIA 타이거즈 2군 타격코치 (2021)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22~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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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에 해태 타이거즈 1차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루키 시즌부터 서정환-차영화 키스톤 콤비를 잇는 후계자 역할로 낙점되어 1군에서 뛰었는데 첫 해부터 주전 유격수를 맡아왔다. 1989년 6월 1일 빙그레와의 경기에서는 김준환, 백인호, 박철우 순으로 연속 홈런을 날리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것은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3타자 연속 홈런이었다.
그 후 1990년 윤재호에게 자리를 내준 뒤 2루수로 전향했다.[10] 부상으로 인한 포지션 변경이었으나 전향한 뒤 골든글러브급 성적을 거두었고, 이듬해인 1991년엔 삼진율 5.0% 기록하였다. 이후 30년 동안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1980~1990 년대 삼진율이 더 낮은 선수들이 있지만 투수들의 구속이 빠르지 않았고, 타자들은 장타를 치는 것보다 방망이에 공을 갖다 맞춰 인플레이 시키는 게 가장 미덕인 시기이었다. 하지만 2022년 이정후의 삼진율 5.1%를 기록하며 31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였다. 이종범, 홍현우 혹은 김종국으로 이뤄진 키스톤 콤비가 등장하기 전 윤재호와 콤비를 이루어 막강 해태의 주전 2루수로 활약하다 91년 9월 교통사고를 당해 양쪽 허벅지가 모두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다. 이 교통사고로 1992년을 뛰지 못한 데다가 이종범이 입단하고, 홍현우가 성장하자 1992 시즌 후 박노준과 함께 고향 팀인 쌍방울 레이더스로 이적한다.
쌍방울에서는 3루수로 있었다. 그러나 부상 때문에 외야수로 전향한다. 하지만, 당시 정영기 수비코치의 도움을 받아 다시 3루수로 전향했고 양쪽 허벅지가 모두 부러진 선수가 누구도 재기하리라는 예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1994년 2할8푼1리의 성적을 냈고 당당하게 골든글러브 3루수부문 후보에도 올랐었다.
은퇴 직후에는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1년 만에 해태 타이거즈로 돌아가게 된다. 이는 고교-대학 직속 선배였던 김성한의 부름 때문이었는데 김성한 코치가 감독으로 부임하자[12], 수비코치가 되어 2007년까지 KIA 타이거즈에서 코치를 한다.
2008년에는 선배 이순철의 부름을 받고 장채근과 같이 우리 히어로즈로 옮겨 2009년까지 수비코치를 했다.
2010년에 다시 KIA 타이거즈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2012년,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이건열 타격코치와 2군으로 내려갔다. 내려간 자리에는 김종국 코치가 1군 작전코치로 올라왔다. 2012 시즌 후 이강철은 넥센 히어로즈의 수석코치로, 이건열은 동국대학교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2013 시즌 후 김태룡이 2군으로 내려가면서 다시 1군으로 올라왔다.
2015년엔 김민호가 1군 수비코치로 부임하고, 김태룡이 1군으로 올라오면서 김성규와 같이 2군 수비코치를 하게 되었다.
2017년에는 3군 총괄코치로 선임되었다. 시즌 중반부터 이름을 백인수로 개명을 했다. 그래서 역대 등번호 목록에서도 현재 등번호 이전의 등번호는 백인호로, 현재 등번호는 백인수로 표기한다. 2018년에도 3군 총괄코치로 일했으나, 정회열 수석코치, 김태룡 수비코치, 신동수, 홍우태 투수코치 등과 같이 해임되었다.
2019년에 장채근이 감독으로 있는 홍익대학교 야구부 코치로 부임했다. 2020년에는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 2021년 KIA 타이거즈로 다시 복직해 2군 타격코치가 되었다. 그러나 이 2군 타격코치 부임이 논란이 되었는데, 타자는 2군에서 어느 정도 담금질이 필요한 만큼 2군 타격코치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반면, 20년에 가까운 프로 지도자 경력에서 타격 지도를 해 본 적이 없었던 백인수가 느닷없이 2군 타격코치로 복직한 것은 상식적인 인선으로 보기 어려웠기 때문. 이런 의외의 상황이 가능했던 것은 조계현 단장의 군산상고 동문(1년 선배)이라서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었는데, 2021년 정규리그 종료 후 나온 박흥식의 증언으로 보아, 그 추측이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즌 후 공식 발표된 2022 시즌 코칭스태프 명단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복귀했다.
2008년에는 선배 이순철의 부름을 받고 장채근과 같이 우리 히어로즈로 옮겨 2009년까지 수비코치를 했다.
2010년에 다시 KIA 타이거즈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2012년,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이건열 타격코치와 2군으로 내려갔다. 내려간 자리에는 김종국 코치가 1군 작전코치로 올라왔다. 2012 시즌 후 이강철은 넥센 히어로즈의 수석코치로, 이건열은 동국대학교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2013 시즌 후 김태룡이 2군으로 내려가면서 다시 1군으로 올라왔다.
2015년엔 김민호가 1군 수비코치로 부임하고, 김태룡이 1군으로 올라오면서 김성규와 같이 2군 수비코치를 하게 되었다.
2017년에는 3군 총괄코치로 선임되었다. 시즌 중반부터 이름을 백인수로 개명을 했다. 그래서 역대 등번호 목록에서도 현재 등번호 이전의 등번호는 백인호로, 현재 등번호는 백인수로 표기한다. 2018년에도 3군 총괄코치로 일했으나, 정회열 수석코치, 김태룡 수비코치, 신동수, 홍우태 투수코치 등과 같이 해임되었다.
2019년에 장채근이 감독으로 있는 홍익대학교 야구부 코치로 부임했다. 2020년에는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 2021년 KIA 타이거즈로 다시 복직해 2군 타격코치가 되었다. 그러나 이 2군 타격코치 부임이 논란이 되었는데, 타자는 2군에서 어느 정도 담금질이 필요한 만큼 2군 타격코치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반면, 20년에 가까운 프로 지도자 경력에서 타격 지도를 해 본 적이 없었던 백인수가 느닷없이 2군 타격코치로 복직한 것은 상식적인 인선으로 보기 어려웠기 때문. 이런 의외의 상황이 가능했던 것은 조계현 단장의 군산상고 동문(1년 선배)이라서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었는데, 2021년 정규리그 종료 후 나온 박흥식의 증언으로 보아, 그 추측이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즌 후 공식 발표된 2022 시즌 코칭스태프 명단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복귀했다.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사사구 | 삼진 | 출루율 | 장타율 | OPS |
1987 | 95 | 302 | 0.272 | 82 | 10 | 4 | 3 | 25 | 31 | 21 | 20 | 19 | .316 | .361 | .677 | |
1988 | 96 | 280 | 0.261 | 73 | 12 | 4 | 3 | 22 | 38 | 14 | 33 | 21 | .337 | .364 | .701 | |
1989 | 103 | 379 | 0.266 | 101 | 17 | 1 | 3 | 26 | 58 | 11 | 50 | 25 | .351 | .340 | .692 | |
1990 | 94 | 337 | 0.297 | 100 | 13 | 3 | 8 | 34 | 51 | 9 | 60 | 50 | .403 | .424 | .827 | |
1991 | 103 | 358 | 0.232 | 83 | 12 | 1 | 3 | 26 | 44 | 18 | 50 | 21 | .325 | .296 | .621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사사구 | 삼진 | 출루율 | 장타율 | OPS |
1993 | 40 | 100 | 0.200 | 20 | 1 | 0 | 0 | 6 | 7 | 0 | 13 | 17 | .290 | .210 | .500 | |
1994 | 108 | 356 | 0.281 | 100 | 17 | 0 | 7 | 49 | 30 | 3 | 31 | 30 | .334 | .388 | .722 | |
1995 | 106 | 352 | 0.244 | 86 | 13 | 2 | 7 | 40 | 36 | 3 | 34 | 54 | .309 | .352 | .662 | |
1996 | 49 | 125 | 0.232 | 29 | 5 | 0 | 2 | 10 | 14 | 1 | 19 | 23 | .333 | .320 | .653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사사구 | 삼진 | 출루율 | 장타율 | OPS |
1997 | 62 | 106 | 0.245 | 26 | 5 | 0 | 1 | 16 | 9 | 0 | 12 | 24 | .322 | .321 | .643 | |
1998 | 70 | 133 | 0.278 | 37 | 6 | 0 | 3 | 12 | 9 | 2 | 8 | 21 | .319 | .391 | .710 | |
1999 | 27 | 25 | 0.240 | 6 | 0 | 0 | 0 | 4 | 2 | 0 | 3 | 7 | .321 | .240 | .561 | |
KBO 통산 (12시즌) | 953 | 2853 | 0.260 | 743 | 111 | 15 | 40 | 270 | 329 | 82 | 333 | 312 | .336 | .352 | .688 | |
- 야구계의 전설로 전해지는 유격수 직선타 홈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대학시절 친 타구가 상대 유격수가 점프를 해서 잡힐 뻔 했는데 글러브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서 그대로 홈런이 되었다고. 정철우 기자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로사리오가 훈련 때 유격수 직선타 홈런과 비슷한 장면을 선보여서 깜짝 놀랬다고 한다.
- 최동원과 선동열의 마지막 맞대결인 1987년 5월 16일 사직 경기에서 김일환이 9회말 대타로 나와 동점 2루타를 쳤다. 문제는 이 타순이 이미 주전포수인 김무종을 교체시킨 자리에 들어와 있던 장채근의 자리였고, 동점은 만들었지만 공을 받을 포수가 한 명도 없게 된 상황이었다. 이때 김응용 감독이 포수를 맡도록 지시한 선수가 입단 첫 시즌을 치르고 있던 백업 내야수 백인수였고, 그는 10회부터 무승부로 끝나는 15회까지 선동열과 배터리를 이루어 홈플레이트를 지켰다. 백인수를 포수로 기용한 이유는 단지 덩치가 커보여서 포수 같았다고. 백인수 자신의 회상에 따르면 공이 손에서 놓기 전에 보였다가 사라지더니 미트 안에 들어왔다고 하며, 이런 공을 어떻게 받나 고민하였으나 다행히도 선동열의 제구가 너무 좋아 다행히도 15회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주심이었던 김광철 심판은 백인수에게 '네가 실수하면 내가 죽는다'면서 백인수 뒤에 바짝 웅크린 상태로 판정을 봤다고 한다.[13] 더욱 놀라운 것은 도루 저지에도 성공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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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수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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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명 전 이름은 백인호.[2] 1987년 5월 16일 경기에서 포수 자원이 소진되자 10회부터 15회까지 6이닝 동안 포수를 소화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술.[3] ~5월 18일[4] 5월 19일~[5] ~6월 17일[6] 6월 18일~[7] 6월 10일~[8] ~6월 12일[9] 6월 13일~[10] 백인호가 부상으로 이탈하며 고졸 신인인 홍현우에게 유격수 기회가 먼저 주어졌으나 홍현우 역시 얼마 안 가 무릎 부상을 입으며 2루 백업을 준비하던 윤재호가 주전 유격수를 맡게 되었다. 이후 5월초에 복귀한 백인호는 주전 2루수를 맡는다[11] 이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당시 개막전이 열린 광주구장이 조명탑 보수공사가 완료되지 않아 가동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개막전이 오후 2시부터 열렸기 때문에 별 일이야 있겠나 싶어 경기를 개시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경기가 연장에 접어들었고... 연장에서도 한 점씩 주고받으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하자 해태 프런트 직원들은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고 한다. 심지어 광주 내에서 파는 모든 손전등을 구해와 관중들에게 나눠줄 생각까지 했다고. 이런 대위기에서 손민한이 11회말 끝내기 폭투로 경기를 종료시키자 해태 프런트 직원들은 손민한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12] 이 당시 서정환, 이건열, 백인호, 최해식 등 해태 선수 출신들이 줄줄이 모두 이 해에 코치로 부임한다.[13] 그리고 선동열은 포수 자리에 백인수가 들어온 후부터 경기 끝날 때까지 변화구 하나 안던지고 오로지 패스트볼 하나만으로 나머지 이닝을 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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