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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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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ATIGERS_1.png

KIA 타이거즈

KIA Tigers

창단

1982년 1월 30일

법인 설립

1982년 5월 29일

팀명 변경

2001년 8월 1일

법인명

㈜기아타이거즈

상장유무

비상장기업

기업규모

대기업

구단명 변천

해태 타이거즈 (1982~2001)
KIA 타이거즈 (2001~)

지역연고지

광주광역시[1][2] (1982~)

구단주

정몽구[3]

사장

허영택[4]

단장

조계현

감독

김기태

홈 구장

무등 야구장 (1982~2013)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2014~)

제 2구장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 (1982~1989)
월명 야구장 (2001~2013[5])

2군 구장

전남 야구장 (2006~2011)
기아 챌린저스 필드 (2012~)

마스코트

파일:external/www.tigers.co.kr/20170209102036_sukrrztt.png

호연이&호걸이

킷 스폰서

파일:external/www.majesticathletic.com/mjst-logo.png

워드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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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파일:external/s20.postimg.org/kiatigershat.png 파일:트위터 아이콘.png 파일:유튜브 아이콘.pn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png | 파일:디시인사이드_로고.png

최종 우승 (11회)[6]

파일:external/oi67.tinypic.com/2wppm35.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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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986년

1987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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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991년[7]

1993년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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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igers_2017_v11.png

1997년[8]

2009년

2017년

페넌트레이스 우승 (9회)

단일 리그

1991년, 1993년, 1996년, 1997년, 2009년, 2017년

전·후기 리그

1983년 전기, 1988년 통합[9]

프랜차이즈 팀 기록

최고 승률

.659
1993년 126경기 81승 42패 3무

최저 승률

.392
2005년 126경기 49승 76패 1무

최다 승

87승
2017년 144경기 87승 56패 1무

최다 패

77패
2015년 144경기 67승 77패

최다 관중

1,024,830명
2017년[10][11]

최소 관중

69,830명
2000년[12][13]


1. 소개2. 팀의 역사
2.1. 해태 타이거즈 시절2.2. KIA 타이거즈의 탄생
2.2.1. 감당하기 힘든 연봉2.2.2. 닥쳐온 경제 한파2.2.3. 팔고 팔고 또 판다2.2.4. 제발 사가 주세요2.2.5. 탄생, KIA 타이거즈
2.3. 김성한 체제 2.4. 유남호, 서정환 체제 (2차 암흑기)2.5. 조범현 체제2.6. 선동열 체제 (3차 암흑기)2.7. 김기태 체제
3. 우승 경험4. 관련 기록들
4.1. 역대 사장(대표이사)4.2. 역대 단장4.3. 역대 감독4.4. 역대 주장4.5. 역대 은퇴식4.6. 역대 성적4.7. 포스트시즌 상대 전적4.8. 역대 유니폼4.9. 역대 등번호 리스트
5. 선수단6. 응원단
6.1. 역대 응원단장
7. 응원가 8. 유니폼9. 마스코트
9.1. 호돌이&호순이 (1996~2016)9.2. 호걸이&호연이 (2017~ )
10. 구단 BI11. 영구결번12. 외국인 선수 선발
12.1. 투수12.2. 타자
13. 이모저모
13.1. 선수 육성 체계13.2. 인기도13.3. 라이벌 팀13.4. 신인왕 잔혹사13.5. 군기 및 징계13.6. 선수들의 충성심13.7. 노란 응원막대13.8. 잠수함 투수 전성시대13.9. 호랑이가족한마당
14. 홈 구장15. 지역 연고 학교16. 출입기자단17. 사건 사고18. 팬 커뮤니티19. 각종 이야깃거리20. 유명 타이거즈 팬21. 관련문서22. 둘러보기

1. 소개[편집]

역대 한국시리즈 우승 장면 모음[14]


KBO 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광주광역시.[15] 본격 준우승을 해본 적이 없는 팀.[16]

한국 시리즈 11회 진출-11회 우승이라는 진기록을 갖고 있는 팀이자 대한민국 프로 스포츠 사상 역대 최다 우승팀[17]이다.

팀 컬러는 창단 초기부터 막강 투수진과 일명 KKK[18]포라고 불리는 야수진의 조화로 우승을 경험했고, 선동열의 일본 진출과 이종범의 입단 이후부터는 투수에 중점을 두는 투수 위주의 팀으로 흘러가고 있다.

팀의 상징색은 빨강색이고, 세컨드 컬러로 검은색을 밀었다가, 2015년부터는 유니폼에 다크블루(감색)를 적용하면서[19] 점차 다크블루 사용 빈도수가 늘어나고 있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응원도구 색상은 빨간색, 감색 둘 중 하나도 아닌 노란색이다.

해태 타이거즈의 경영 악화로 인해 당시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이 인수하여 2001년 8월 현재의 이름으로 구단명이 바뀌었다. 굳이 기아라고 한글로 팀명을 표기하지 않는 것은 굶주린다는 의미의 기아(飢餓)가 연상되기 때문이라는 카더라가 존재한다.[20][21] 물론 KIA는 Killed In Action의 약어로 사용되는데 어차피 여긴 영미권 국가도 아니고 애초에 내수시장을 염두한지라 그런 것까지 고려해야 할 이유는 없다. 어찌되었든 한국어 기반인 기아는 로마자로, 영어 기반인 'Tigers'는 한글로 적혀있는 희한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2011년 모 기업이 새 CI 통합으로 인해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바뀜에 따라 팀명도 현대 타이거즈로 바뀔 수도 있다는 예상이 있었으나 루머로 밝혀졌다. 결과적으로는 모기업 이름이 아닌 모기업의 계열사명 중 하나를 딴 셈이 됐다. 두산그룹을 모기업으로 하는 구단이 한때 두산이 아닌 OB라는 팀 이름을 사용한 것과 비슷한 셈. 이는 현대자동차그룹 내부의 '1사 1구단' 정책에 따른 것이다. 모기업 중 가장 중심에 있다고 볼 수 있는 현대자동차전북 현대 모터스 축구단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밑에 설명하겠지만, 덕분에 기아자동차가 타이거즈 구단을 맡으면서 본래 기아자동차 밑에 있었던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농구단을 같은 계열인 현대모비스에 넘겨야 했다.

2. 팀의 역사[편집]

2.1. 해태 타이거즈 시절[편집]

1990년대까지의 역사는 해태 타이거즈 문서 참조.

2.2. KIA 타이거즈의 탄생[편집]

2.2.1. 감당하기 힘든 연봉[편집]

KIA 타이거즈의 탄생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1980년대의 야구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해태 타이거즈는 프로야구 초창기에 지역위주의 신인 선발[22]로 인해 당대 최고의 고교 야구팜중 하나인 호남팜을 모조리 휩쓸어 갈 수 있었고 이들을 지휘했던 김응룡 감독의 리더쉽, 그리고 열성적인 호남 지역 팬들의 응원등이 합쳐지며 왕조를 건설할 수 있었다. 더구나 당시는 이름만 프로야구지 경기력, 리그운영, 신인육성, 피지컬 트레이닝, 스카우트 등 전반적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후진적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투자가 성적으로 꼭 직결되지는 않았다. [23] 거기에 FA제도도 없고 각 구단들의 담합에 따른 연봉인상제한[24] 등으로 각 구단별 예산의 격차가 크지도 않았다.

하지만 당시 재벌 중에서도 하위권이었던 해태그룹은 자금력 측면에서 다른 재벌 구단에 비해서 현저하게 뒤진게 사실이었고,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해태는 선수단 연봉을 지나치게 짜게 준다는 불만이 노골적으로 터져 나올 정도였다. 이에 관해서는 해태 타이거즈의 부실 지원 문제를 참고.

그리고 1990년대 접어들면서 프로야구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자금력이 취약했던 해태(그리고 쌍방울)와 여타 구단의 격차는 날이 갈 수록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야구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진원지는 당시 야구단을 창단하려고 몸부림을 쳤던 현대그룹이었다. KBO는 프로야구 출범을 준비하면서 강원도 통천이 고향이었던 정주영 회장한테 인천·경기·강원 연고 프로야구단 창단을 제안하였지만 서울올림픽에 집중하고 싶다면서 거절당했다.[25] 그리고 인천경기 지역 연고에는 인천에 공장을 가지고 있던 삼미그룹이 자진해서 나서면서 결국 삼미 슈퍼스타즈가 창단되었다.

하지만 프로야구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1990년대 들어서 현대도 프로야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구단을 운영하고 있던 다른 재벌들의 견제로 진입이 쉽지가 않았다.[26] 신생팀 제 9구단 창단도 힘들고, 다른 팀을 인수하려고 해도 신통치 않자 현대그룹은 현대 피닉스라는 실업야구단을 창단해서는 기존 프로야구단을 훌쩍 뛰어넘는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여, 당시 아마야구 유망주들을 말 그대로 싹쓸이 해버렸다. 프로에서 족히 4~5년은 뛰어 지명도를 얻어야만 가능했던 꿈의 액수라고 알려진 1억대의 연봉이 프로 데뷔를 하지 않은 젊은 선수들에게 뿌려지자, 타 구단들은 유망주들을 모셔오고자 현대의 에스컬레이터식 금액을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 KBO구단들과 현대그룹은 정면충돌하였고, 아마야구계는 선수확보를 둘러싼 양자의 이전투구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결국 이 갈등은 현대그룹이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서 현대 유니콘스로 이름을 바꾸는 방식으로 프로야구에 진입하면서 봉합되었다.[27] 즉, 이젠 대놓고 선수를 비싸게 살 수 있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리고 1996년 드디어 재계 서열 1위의 현대가 야구판에 등장하면서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이라는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현대그룹삼성그룹은 야구판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기 시작한다. 두팀은 신인계약금과 선수단 연봉으로 고액을 책정했고, 그외에 승리수당과 각종 포상금으로도 어마어마한 거액을 뿌렸다. 거기에 2군전용 훈련장, 외국인 코치, 트레이닝 시설 등 시설투자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오직 우승을 위해서 현금 트레이드도 수시로 단행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다른 구단들도 최소한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계약금과 연봉을 훨씬 높여줄 수 밖에 없었고, 야구단 운영비가 치솟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프로야구에도 본격적인 머니게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자금력이 취약했던 호남 연고의 두 구단 해태 타이거즈쌍방울 레이더스는 야구단 운영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다.

2.2.2. 닥쳐온 경제 한파[편집]

돈싸움은 시작 되었고 마침 1997년 외환 위기가 슬슬 터지려고 해서, 구단주인 해태 그룹의 경제가치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해태와 상당한 친분이 있던 대우그룹이 인수를 시도했지만, IMF로 사이좋게 재정위기가 오자 GG치고 포기하였다. 거기에 대우그룹 오너였던 김우중 회장은 대한축구협회 회장까지 지냈을 정도로 열혈 축빠였기 때문에 야구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대우가 한참 잘 나가던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에 삼성그룹LG그룹 등 다른 재벌기업이 프로야구단 운영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자 대우그룹 임원이 "회장님, 이참에 우리도 야구단 하나 만드시죠"라고 제안했지만 김우중 회장은 야구단 창단을 제안한 그 임원을 "뭐 이런 병X 같은 인간이 다 있나"라면서 거부한 적이 있을 정도. 결과론이지만 대우가 야구단을 창단했으면 얼마 안가 모기업이 망해 현대, 쌍방울의 길을 밟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대우도 광주 지역을 연고로 한 기업이나 하청이 있는 것도 아니라 창단하려 해도 KBO나 지역팬들이 그렇게 달갑지 않게 볼 수도 있다. 프로야구가 왜 창단되었는지,또 정치인들이 이걸 어떻게 써먹었는지를 보면 이상할 것도 아니다.

2.2.3. 팔고 팔고 또 판다[편집]

팀의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서 해태가 선택한 방식은 선수의 재판매였다. 팀의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선동열이종범일본에 팔아[28] 스카우트 머니로 어찌어찌 일년은 버텼지만 모기업인 해태그룹이 1998년에 부도가 나버려서 있는 선수, 없는 선수 모조리 팔아치우는 상황에 직면했다.

삼성 라이온즈가 이 시기에 선수를 대량으로 세트 덤핑구입을 하는 통에 '돈성'이란 이름을 굳히게 되었다. 참고로 당시 FA가 생긴 이유도 돈으로 선수를 쉽게 사기 위한 삼성의 계략이였다. 당시 지역연고제가 아직가지 남아있었고, 트레이드의 경우 선수의 의견과 상관없이 기업이나 감독이 하는 거기 때문에 구단이나 감독이 " 나 얼마 이상 아님 이 선수 안줌" 이래버리면 그 선수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림에 떡이 된다. 그러나 FA가 시작되면서 선수가 가고싶은 구단에 갈 방법이 생겼고, 자금을 바탕으로 " 그 구단보다 이정도 더줄태니까 그냥 와라" 라고 하면 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와서는 상황이 반대로 돌아가고있지만.

2.2.4. 제발 사가 주세요[편집]

선수를 팔아치워, 정상적인 경기운행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오자, 한국 프로야구가 4팀 2리그제로 운영된다는 사실이 대두되었다.

간단히 말해, 한 팀만 빠져도 전반적인 밸런스가 엉망이 되는 상황에 빠진다는 것인데 프로야구 관계자들이 해태 타이거즈의 새 주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리그 판이 박살난 상태였고, MLB붐으로 인한 프로야구의 상징성이 약화되어 인수처는 나타나지 않았다.

포스코전라남도 광양시에 제철소를 가지고 있어 연고지 조건을 아슬아슬하게 갖추었기에 인수시도가 있었으나 포스코의 재정이 파탄난데다 포스코의 대주주들이 손해보는 행동을 하려한다며 업무상 배임으로 고발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기본적으로 포스코의 대부인 박태준 회장이 야구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29] 프로야구 출범 시에도 대구·경북지역 연고구단으로 포스코가 거론되었으나 거부했던 역사가 있다.[30] 그리고 IMF 이후 외국 펀드들이 주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별다른 수익도 없고 생산재 기업으로 뚜렷한 홍보효과도 기대하기 힘든 프로스포츠 투자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31]

광주 시민들은 광주를 발판으로 성장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인수하기를 원했으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프로리그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호남 지역색을 지우려 하는 기업이기 때문이었다. KBO 창설 때도 삼양사, 교보생명과 함께 호남권 구단 1순위 기업이었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거부했고, 1997년에 서울을 연고지로 한 프로리그 팀을 찾아보다가 관두었다고 한다. 뒤에 금호생명 여자농구단을 창단하지만 투자는 좆망. 결국 금호생명 여자농구단은 한국산업은행 산하 KDB생명으로 인수되어서 현재 구리 KDB생명 위너스가 되었다. 게다가 금호그룹은 지역색 문제 이전에 본래 프로 스포츠보다는 음악 등 문화 예술 분야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었다.

2.2.5. 탄생, KIA 타이거즈[편집]

파일:external/www.kia.com/img-Vs-2001.jpg

타이거즈의 새 주인을 구하느라 하루하루 속을 태우는 와중에 구원의 손길이 갑자기 나타났다.

2001년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 회장이 오늘 내일 할 즈음,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 둘째 아들인 정몽구 회장이 현대카드, 기아자동차, 현대자동차 등 일련의 계열사를 분리시켜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을 설립하는 속칭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는 금융법상 사소한 절차가 무시되었다고 하여 문제가 되었는데 정부가 OK사인을 내주어 왕자의 난은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은 돌연 해태 타이거즈의 인수를 선언했다. 참고로 당시 기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기아차 측에서 인수를 거절했으나 이후 마음을 바꿔 인수하기로 결정 내린 사항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그룹 설립 과정에서 사소한 절차가 무시된 것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정부에서 해태 타이거즈 인수를 요청했다는 카더라가 있지만, 실제로 정몽구 회장은 인천을 떠나 수원에서 유랑 생활을 하던 자신의 동생 구단인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려고 접근했다고 한다. 허나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대주주였던 하이닉스는 그야말로 오늘내일 하던 상황이라 인수 대금으로 현대 유니콘스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했을 때보다 훨씬 높은 가격이었던 900억원을 불렀는데, 이것에 정나미가 떨어진 정몽구 회장은 현대를 쌩까버리고 비교적 싼 가격을 부른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하게 된 것이다.

당시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이 지불한 인수 대금은 채권은행인 조흥은행에 180억, KBO 가입기금 30억으로 총 210억원이었다. 광주광역시기아자동차 공장(구 아시아자동차 본사)[32]이 있어서 지역 연고 요건을 갖추었다.[33] 이에 따라 1사 1팀 정책 때문에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농구단은 현대모비스로 이관되어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로 탈바꿈했고 현대자동차전북 현대 모터스 축구단만 전담하게 되었으며, 현대자동차 배구단[34]은 현대캐피탈로 이동, 현재의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로 탈바꿈했다.

일부팬들의 경우 KIA 타이거즈의 출범을 놓고 어째서 KIA가 해태의 V9를 가져가려고 하는거임? KIA가 우승하면 V1 아님? 이라는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KIA 타이거즈의 출범 경로는 SK 와이번스넥센 히어로즈같이 해체된 의 선수들과 계약해서 신규창단한 것이 아닌 과거 LG그룹MBC 청룡인수해서 창단한 전례를 따르고 있어, 당연히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를 계승한다.[35] 즉 KIA 타이거즈는 해체 후 신규창단이 아닌 인수 후 창단 형식이기 때문에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를 그대로 이어가게 되는 것. 팀은 해체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KIA가 V1이라면 MBC나 삼청태를 모조리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삼성의 경우 제일기획으로 팀의 의사결정이 이관되었지만 제일기획 역시 삼성그룹의 계열사이며, 아직 삼성전자가 삼성 라이온즈의 주주이기 때문에 다르다.

그런데 창단 30주년이 되는 2011년에 구단에서는 창단 10주년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했다KIA로 이름이 바뀐 것만을 기념하면 10주년이 맞지만, 엄연히 해태를 계승한 구단이기에 의아하게 생각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MBC를 인수하고 홈페이지 역사관에서도 전신 시절 언급을 하지만 구단사를 가리켜 23년이라고 하는 LG와 같은 식이다.

2.3. 김성한 체제 [편집]

2001년 8월 1일 공식적으로 KIA 타이거즈로 출범하였다. 출범과 동시에 농구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에서 경험을 쌓은 프런트를 대거 이동시키며 해태 타이거즈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훗날 타이거즈에게 최하위를 선사하고 짤려버린 정재공 전 단장이 처음 부임한 것도 이 시기.

그 다음 날 인천 도원구장에서 KIA 타이거즈의 이름으로는 첫 경기를 가졌다. 상대는 SK 와이번스. 그리고 이 경기는 이종범이 타이거즈로 돌아오는 경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채종범의 맹활약으로 2:6으로 패배했다. 덧붙여 지금 저니맨 외인구단의 구단주로 있는 최익성이 그날 홈런을 때리며 최익성은 해태를 제외한 KIA역사상 1호 홈런타자 되었다. 그리고 8월 7일에 KIA의 광주에서의 첫 경기 겸 이종범의 광주 복귀경기가 펼쳐졌고 이 경기에서 광주구장이 2001시즌 첫 매진[36]되었다. 2001년 시즌은 유례없는 4강전쟁의 해였다. 삼성, 현대, 두산의 3강은 일찌감치 굳혀졌고 나머지 한자리를 놓고 5개구단이 싸움을 벌이던 해였다. 타이거즈가 해태유니폼을 입을 때는 6월까지 두산과 엎치락거릴정도로 선전했으나 7월이후 급격히 힘을 잃었다. 장성호김종국. 그리고 해태의 마지막 4번타자 산토스에다 이종범이 돌아온 타선은 강했으나, 선수층이 얇았던 투수진이 과부하에 걸림으로써 10점을 내고도 11점을 내주며 지는 경기가 많아졌다. 결국 한화와의 마지막 2연전 중 첫 게임에서 패배, 그 다음 경기에서 이겼지만 0.5게임 차이로 한화에게 가을잔치티켓을 넘겨주며 5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2002년부터 일본에서 돌아와 3할 20-20을 바라봤던 이종범, 한참 전성기에 돌입하며 타격왕에 오른 장성호,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그 시즌 도루왕을 했던 김종국 등이 팀의 주축이 되며 시즌 초반부터 상위권에 랭크되며 잘 나갔다. 투수진에서는 7억 신인 김진우와 용병 듀오 다니엘 리오스, 마크 키퍼, 암흑기 에이스였던 최상덕, 삼성에서 돌아와 타이거즈의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한 이강철이 있었다. 4월부터 5년만에 페넌트레이스 1위를 달리기며 계속 승승장구했으나 9월 들어 폭풍 연패를 하며 결국 삼성 라이온즈에 1위를 내주고 페넌트레이스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37] 무엇보다 투수진의 방어율이 전년 5.01에서 3.93으로 급감하였는데 이것은 무려 33승+13세이브를 올린 키퍼-리오스 원투펀치의 공이 컸다. 문제는 용병타자였는데.. 워렌 뉴선과 루디 펨버튼이 지명타자 또는 좌익수로 리그평균정도도 못하고 워낙에 민폐를 끼쳤다. 이전년의 산토스, 아니 이해의 LG의 매니 마르티네스가 기아에서 뛰면서 김창희를 대신했어도 정규시즌 1위는 KIA의 몫이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김성근 감독이 지휘하던 LG 트윈스에 2승 3패로 패배,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다. 당시 김성한 감독은 고질적인 마무리 문제 때문에[38] 선발 요원이었던 김진우를 마무리로 돌렸는데, 이는 엄청난 재앙이 되고 말았던 것. 11월 01일에 열렸던 마지막 5차전이 압권인데, 장성호의 투런으로 앞서가던 KIA는 김진우가 구원으로 올라와서 폭풍처럼 두들겨맞으며 패배한다. 김진우는 마운드에서 불을 질렀고,[39] 박용택에게 홈런 맞은 후에 열받은 KIA팬 아재들은 관중석에 진짜로 불을 질렀다.

2003년 시즌을 앞두고는 정성훈과 현금 10억을 현대 유니콘스로 보내면서 광주 출신의 박재홍을 영입하였고, 이 트레이드가 성사된 다음날 은퇴 파동을 일으킨 손혁과 김창희를 두산 베어스에 내주고 진필중을 영입하는 등 스토브리그의 큰 손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해는 승률제가 아닌 다승제가 시행되었다.

하지만 어째 시즌 초반에는 엇박자를 내며 중위권에 랭크되었다. 재계약한 마크 키퍼의 부진이 두드러졌고, 박재홍 역시 시즌 초반에 당시 인조잔디였던 대구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며 썩 페이스가 좋지 못했던 것. 허나 반전이 일어났다. 마크 키퍼를 두산으로 넘기고 대체 용병으로 들어온 마이클 키트 존슨이 후반기에만 8승을 거두며 팀의 상승세를 주도했던 것. 그 덕분에 당시 승승장구를 달리던 현대 유니콘스를 잠시 제치고 1위를 하기도 했으나, 결국 0.5게임 차로 선두를 뺏겼다. 흔히 KIA가 이 시즌 막판에 현대에게 대역전패를 당해서 선두를 빼앗겼다고 아는 팬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시즌 자체가 순위는 승률제가 아닌 다승제를 택한 시즌으로 기아는 손해를 보았다.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SK전에서 승리하면 승률에서 현대를 앞설 수 있었지만 다승제였기 때문에 승리에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그해 전경기 출장이었던 이종범도 결장했다.[40] 현대에게 대역전패를 당했던 경기는 5월 27일 경기였다.[41] 오히려 막판에는 맹추격으로 올라갔으나 결국 반 게임차의 2위가 되어 버린 것.

그렇게 직행한 플레이오프에선 당시 신임 조범현 감독이 지휘하던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2승 무패로 관광보내버리고 올라온 돌풍의 팀 SK 와이번스0승 3패로 쳐발리며 또다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였다.(…) 이렇게 캐발린데에는 김성한 감독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도 한몫을 했다. 김봉근 투수코치를 의견 충돌로 잘라버리자, 조범현 감독은 짤린 김봉근 투수코치를 낼름 영입했던 것. 그덕에 KIA 투수들의 약점이 속속히 조범현 감독에게 들어갔고 그 덕에 조범현 감독은 KIA를 농락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2004년에는 FA로 풀린 마해영을 영입하며 또다시 스토브리그에서 총알을 소비하여 팬들에게 엄청난 기대감을 안겨줬다. 허나 마해영은 삽질을 거듭했고, 김성한 감독이 경질되는 등[42] 어수선한 시즌을 보내다 페넌트레이스 4위로 마감하고 가까스로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허나 준플레이오프에서 3위 두산 베어스에 2전 전패로 탈락했다. KBO리그 최대의 미스터리였던 전설의 빵 사건이 바로 그 해의 플레이오프에서 나온 것.

그러나 극악의 2차 암흑기가 도래할 줄 누가 알았으랴...

2.4. 유남호, 서정환 체제 (2차 암흑기)[편집]

2005년 시즌 들어서는 팀 캐미스트리를 저해하던 박재홍SK 와이번스로 보냈고, 2003년 시즌 후반기에 활약했던 마이클 키트 존슨을 다시 데려오는 등 의욕적으로 시즌을 맞이했다. 그리고 소소경과 이원식을 내주고 홍현우를 다시 데려오는 트레이드도 했는데, 이 트레이드는 훗날 KIA팬들이 LG팬들에게 사랑해요 LG라고 놀리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홍현우 덤으로 껴온 선수가 바로 이용규.

하지만 시즌 초반부터 영 좋지 못하더니 결국 5월에는 꼴찌로 추락하고 말았다. FA로 영입했던 선수들은 죄다 실패작으로 남았고, 그나마 LG에서 트레이드 된 이용규와 전년도 부진(AVG 0.260)에서 벗어난 이종범이 3할-20도루를 하며 분전했지만 붕괴된 투수진은 어찌 막을 도리가 없었다.[43] 결국 유남호 감독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퇴, 서정환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2005년 시즌을 꾸려갔다. 이 와중에 다니엘 리오스를 두산에 넘겨주고 전병두를 받은 후 세스 그레이싱어를 새 용병으로 데려오기도 했다.[44]

팀은 개박살난 상황에 그나마 얻은 수확은 우익수 자리를 꿰찬 이용규, 중간에서 노예질을 하던 윤석민이었다.

2006년 시즌엔 서정환 감독이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고, 서정환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골칫거리였던 마해영LG 트윈스로 보내는 데 성공했으며[45] 10억 신인 한기주가 입단하는 등 나름대로의 기대를 품게 했다. 상대적으로 약한 공격력[46] 을 투수력[47] 으로 상쇄하며 시즌 내내 4, 5위를 왔다갔다 하다가 시즌 막판 두산 베어스와의 3연전을 모두 승리하면서 4강행 막차에 탑승했다. 하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에 1승 2패로 패하며 탈락하였다.[48]

2007년 시즌에는 시즌 도중 메이저리그에서 최희섭이 돌아왔으나[49], 투수진의 줄부상과 공격력 약화로 인한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서정환 감독의 서머리그 우승이라는 무의미한 목표를 향한 선수 혹사 및 부상이 겹쳐, 최하위의 원인이 되었다. 대들보였던 장성호의 3할 커리어가 끊기는 등 경기 외적인 악재도 수더분하였으며, 이 당시 성난 팬들은 단장인 정재공의 퇴진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걸었다가 정재공 단장이 보낸 용역에 의해 강제로 철거당하기도 했다. 급기야 훗날 LG 프런트들이 쌍둥이마당을 닫아버린 것처럼 호사방을 폐쇄해버리는 희대의 병크를 저지르고 말았다. 2004년 이후 롯데가 4연꼴 사슬을 끊자마자 2년 간격으로 LG와 꼴찌를 나눠먹기 했는데, 결국 이로 인하여 엘롯기라는 고유명사가 생겼다. 그야말로 한국프로야구 최다 우승팀으로서는 씻기 힘든 불명예. 결국 정재공은 2007년 시즌을 끝으로 경질당했고, 후임으로 김조호가 취임하게 되었다. 시즌 후 서정환 감독 역시 최하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이 시기의 성적은 848. 가을야구를 했던(2004년, 2006년 시즌) 이듬해에 최하위를 찍은 양상이 반복되었다.

2.5. 조범현 체제[편집]

2008년 시즌에는 서재응이 팀에 합류하고, 조범현이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나, 일찌감치 선수층이 무너져버린 터라 팬들도 좋은 성적보다는 리빌딩이나 잘 하길 기대하였다. 출발은 좋지 못했다. 시즌이 시작되자 최희섭이 뇌진탕 후유증으로 인한 두통으로 삽을 들었고, 장성호 역시 지난 시즌 무릎 부상의 여파로 인해 잔부상에 시달렸다. 게다가 김상훈 역시 큰 부상을 당해 차일목이 주전포수로 써야하는 등 팀에 먹구름이 잔뜩 꼈고, 팀은 5월 초까지 쭉 꼴찌를 달렸다. 하지만 5월 중순부터 최희섭을 대신해 이재주가 4번타자를 맡기 시작하고 윤석민이 에이스로 등극, 유망주 수준이었던 이범석이 호투를 펼치며 선발진에 진입하며 점점 순항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5월 말부터는 히어로즈LG 트윈스를 제치고 5-6위권을 형성했다. 심각하게 부족했던 공격력을 투수력으로 상쇄하는 야구를 펼치며 4위를 내다보나 했으나, 올림픽 브레이크 이후 힘이 떨어졌다. 시즌 막판에는 무리한 4강 싸움 대신 1.5군을 돌리면서 경험을 주는 형태로 운영하였고 6위로 시즌을 마쳤다. KIA로 바뀐 이후 2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하지만 손영민, 양현종이 급부상했고 전반기에 부진했던 대졸신인 나지완이 후반기에는 맹타를 휘두르며 팀에 가세했으며 고졸신인 김선빈이 그간 공백이었던 키스톤 자리[50]를 메꿀 유망주로 기대받기 시작했다.

2008년에 무리하지 않고 유망주들에게 경험을 주는 식으로 시즌을 마무리한 다음, 2차 1지명으로 안치홍을 지명하고 구리본즈였던 김상현을 트레이드로 데려오면서 전력이 급상승, 1997년 이후 12년, KIA 타이거즈로는 처음으로 7차전까지 간 끝에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고, 2010년에는 16연패라는 수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4강을 놓고 다투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011년에 윤석민이 투수 4관왕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하지만 불펜이 불을 지르면서 4위에 그치면서 SK에 1승 3패로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고, 구단은 그 책임을 물어 조범현 감독을 경질하고 후임으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던 선동열을 선임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대재앙이 찾아오는데...

2.6. 선동열 체제 (3차 암흑기)[편집]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

조범현 감독이 16연패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롯데와 4강을 두고 다투는 뒷심을 발휘한 반면, 선동열은 선수단을 아예 새로 짜는 수준의 개혁을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희대의 암흑군주라는 평만 듣고 말았고, 재계약을 확정지었다가 팬덤에 밀려 3일 만에 자진사퇴했다.

2.7. 김기태 체제[편집]

1년차의 5강 싸움, 2년차의 포스트 시즌, 3년차의 우승, 4년차의 과제는 리빌딩

588이라는 저조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선동열과 재계약을 추진하자 팬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선동열 감독은 자진 사퇴라는 모양새로 퇴임하고, 그 자리에 김기태 전 LG 감독을 선임하였다. 첫해에는 7위를 기록하는데 리빌딩 시즌이라고 해서 순위는 다들 이해하는 분위기.[51] 그리고 2016시즌은 구단에서 이범호 잡아준것 말고는 관심이 없는 분위기이고[52] 2017시즌은 양현종 등 거물급의 FA가 기다리기 때문에 어차피 외부 FA를 못잡는 관계로 김기태 감독을 동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신인 드래프트에서 삽질을 거듭한데다 '합리적인 선' 운운하며 스토브 리그에서 손을 놔버린 프런트에 대한 팬들의 분노가 임계점에 근접한 상황인줄 알았는데 무려 최형우 영입. 일본행이 유력했던 양현종까지 붙잡는 데 성공하면서 지금은 갓런트로 불리는 중.[53]

2016년 시즌은 양현종-헥터 외에는 사실 상 땜빵선발로 시즌을 치뤘다. 잘 던지던 지크가 날이 더워지며 난타당했고, 전반기 잘 던지던 홍건희도 후반기부터 폭락. 젊은 선수 위주로 구성된 불펜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최영필, 김광수 두 베테랑이 분전하며 승리를 지켰고 7월부터 가세한 41세의 임창용이 힘을 보탰다.

2016년 8월 31일, 4위로 9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잔여경기가 30경기도 채 남지 않은 상황. 남은 경기에서 5할 승률만 유지해도 높은 확률로 가을야구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0월 5일, 타지인 대구에서 삼성을 잡아내며 5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비록 와일드카드에서는 5위 핸디캡 때문에 1승 1패를 하고도 LG에게 밀려 탈락했지만, 히 드랍 더 볼로 한 경기만에 허무하게 끝나버린 작년 와일드카드와는 달리 1차전을 잡아내며 KBO리그 첫 와일드카드 2차전을 열었고, 두 경기 내내 수준높은 경기를 보여주며 팬들을 설레게 했다. 엠팍, 디씨 등 주요 야구 커뮤니티의 팬들 반응은 그야말로 장밋빛 물결. 서정환 감독 시절이나 조범현 감독 시절에도 하위권 팀이 다음년도에 바로 가을야구[54]에 진출했던 전례가 없던 것은 아니나 2군 선수들에게 골고루 기회를 제공하면서 두터운 선수층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전임 감독들 시절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올 시즌보다 내년 시즌이 더욱 기대되는 팀이 되었다는 점에서 김기태 감독과 코칭스텝 + 프런트에게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듯.

또한 2020년까지 최고의 명문구단이 되자는 TEAM 2020이라는 계획을 선언했는데 당시 팬들은 비웃었지만 실제로 현대-KIA 자동차그룹에서 엄청난 지원을 해주고 있다느 사실이 알려지며 재평가 받기도 했다. 나유리 기자의 말에 따르면 모기업 지원이 엄청나서 현장에서 부담을 느낄 정도라고. 실제로 2015년에 1,2군 경기장에만 110억을 투자했으며, 기아 챌린저스 필드에 최첨단 재활센터도 건설했으며, 야간 경기가 가능한 신축 2군 경기장을 신설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다.

그리고 16시즌 종료 이후 FA에서 팬들의 우려와는 달리 프런트가 최형우를 영입하고 양현종나지완을 잔류시키는데 성공하면서 2015년까지 조용했던건 이 FA를 위함이었다는 프런트의 큰그림이라면서 팬들의 찬양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이 FA로 인해 선동렬 시절 한화보다도 답이 없었던 팀이 드디어 팀 구실을 하게 되었다는 평이 많으며, 불펜진이 그렇게 좋진 않아서 우승은 힘들겠지만, 적어도 3~4위권에는 들거라는 예상이 많은 편이다. 그렇게 시작한 2017 시즌, 선발투수들의 연이은 호투와 조용하다가도 결정적일때 점수를 내는 응집력있는 타선, 탄탄한 수비가 더해지며 전반기를 1위로 마감했다. 이후 고질적 불펜불안에 선발진 붕괴로 위기를 맞지만 1위 자리는 놓치지 않았고 10월 3일 마지막 정규시즌 경기를 승리로 페넌트레이스 1위를 확정짓고 KS로 직행했다. 그리고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3. 우승 경험[편집]

전신 해태 타이거즈 시절을 포함하여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11회 우승을 일군 팀이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우승은 선동열 효과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선동열 이전에도 1983년에 우승한 적이 있고, 선동열이 팀을 떠난 후에도 이종범 등 다른 선수들의 활약으로 인해 1996~1997년에 다시 2연패를 달성했고, 의외로 선동열은 한국시리즈에서 6승 1패 4세이브 72.1 이닝 1.74의 평균자책점으로 리그보다 부진(?)했다. 다만 정규 시즌 경기에서는 선동열의 역할이 매우 컸는데, 선발로 하루 등판시켜서 며칠씩 쉬게 하느니 선발, 불펜, 마무리 가리지 않고 등판시키는 방식을 썼다. 선발이 일찍 무너지거나 무너질 기미가 보이면 바로 올려서 몇 이닝씩 던지게 하고 심지어 컨디션이 엉망인 날에도 상대팀 기죽이기를 위해 불펜에서 몸을 풀게 했을 정도. 실제로 선동열은 프로 통산 367경기에 출장했지만 선발로 출장한 경기는 109경기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이 당시에는 에이스 투수고 나발이고 마구잡이로 굴리는게 관례였다.

역대 우승 연도는 1983년, 1986~1989년, 1991년, 1993년, 1996~1997년, 2009년 그리고 2017년에 우승했고,1986년부터 1989년까지 이어진 한국시리즈 4년 연속 우승 기록은 깨지기 힘들 기록이라는 평을 받았었다. SK 와이번스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이렇게 4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3번 우승하며 이 기록에 도전하였으나 2009년엔 바로 KIA 타이거즈가 SK의 승리를 막으며 타이거즈의 V10을 찍었다. 그러나 결국 이 4년 연속 우승 기록은 후에 2011년~2014년까지 한국시리즈를 연속 우승한 삼성 라이온즈가 타이 기록을 세웠다.[55] 덧붙여 현재까지 인수/인계 경험이 있는 구단 중 인수 전후 모두 우승 경험이 있는 구단은 타이거즈가 유일하다. 현대삼청태 시절에 우승한 적이 없고, 트윈스청룡 시절에 한 적은 없다. 베어스이글스이름만 바꿨을 뿐 모기업이 바뀐 것이 아니다.[56]

2017년까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기만 하면 한 번도 우승을 놓치지 않았다는 징크스가 있다.[57] 즉, 우승은 무려 11번이나 했는데 희한하게도 준우승이 한 번도 없다. 홍진호가 이 글을 싫어합니다. 반대로 준플레이오프에선 이긴 적이 한 번도 없다.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의 상대팀은 LG[58], 삼성[59], 한화[60], 현대[61], SK[62], 두산[63] 등이며 롯데와는 한국시리즈에서 한 번도 격돌했던 적이 없다.[64]. 넥센, NC, kt와도 아직까지 한국시리즈는 물론 포스트시즌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4. 관련 기록들[편집]

4.1. 역대 사장(대표이사)[편집]

KIA 타이거즈 역대 사장

순서

이름

기간

초대

김익환

2001년 ~ 2005년

2대

조남홍

2006년 ~ 2008년

3대

서영종

2009년 ~ 2010년

4대

이삼웅

2011년 ~ 2014년

5대

박한우

2015년 ~ 2017년

6대

허영택

2018년 ~


2018년 이전까지는 여타 현대자동차그룹 스포츠단과 비슷하게 기아자동차 국내 판매부문 사장이 KIA 타이거즈의 사장도 겸했다. 같은 산하 스포츠 구단인 전북 현대 모터스의 경우도 현대자동차 국내 판매부문 사장이 구단 대표이사도 겸하고, 나머지 현대자동차그룹 산하의 구단은 계열사 CEO가 구단주를 맡고 있다.[65]

하지만 회사 업무만으로도 업무량이 막중한 회사 대표이사 입장에서 회사 산하 스포츠구단의 운영에 간섭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프로야구 제10구단 관련 논란과 관련해서 이사회에 2번 연속으로 KIA 사장이 불참한 것을 놓고 억측기사가 나오기도 했는데, 사실 KBO 윈터미팅 등 오래전부터 KBO 이사회 관련해서는 한화 이글스 사장에게 결정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따라서 한화 이글스 구단의 의견 = 기아 타이거즈의 의견인 셈.

그러다가 현대자동차그룹 스포츠단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전임 구단 대표이사를 두는 것으로 변경되어 KIA 구단의 의견을 적극 반영할 것으로 보인다. 즉 전임 대표이사로서는 초대. 그 첫 타자는 바로 3대 단장이었던 허영택. 그리고 공석이 된 단장에 조계현 전 수석코치를 내정했다.

4.2. 역대 단장[편집]

KIA 타이거즈 역대 단장

순서

이름

기간

초대

정재공

2001년 ~ 2007년

2대

김조호

2008년 ~ 2013년

3대

허영택

2014년 ~ 2017년

4대

조계현

2018년 ~ 현직


정재공 단장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시절의 경험을 살려 적극적으로 프런트가 현장에 개입하도록 하는 스타일이었다. 이 시기에 모기업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많이 얻어내고 FA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등 구단 운영에 대한 열정만은 진짜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지나친 현장 개입으로 김성한 전 감독이 알력다툼 끝에 옷을 벗는 일이 있었고 FA로 영입한 선수들이 먹튀가 되면서 평가가 급락하기 시작,2007년에 팬들과의 충돌과 사상 최악의 성적인 팀 창단이래 최초 꼴찌를 하게 되며 퇴진 압박을 받으면서 경질되고 말았다.

김조호 단장의 경우, 정재공과는 달리 현장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고 내부 행정에만 신경쓰는 스타일이라 비난의 목소리가 크지는 않은 편이다. FA 영입에 소극적인 편이지만, 현장에서 꼭 필요로 한다면 과감히 영입하고 있다. 다만 2013년 전라북도 연고지 문제[66]로 많은 욕을 먹기도 했다. 2013년 시즌 종료 후 단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상근 자문직을 맡게 되었다.

기아자동차 슬로바키아 공장 관리직에 있었다 단장으로 들어온 허영택 기아자동차 상무는 2005년 10월부터 2007년 1월까지 타이거즈 부단장으로 있었던 임직원. 선동열 감독의 2014년 시즌 이후 재신임 관련 인터뷰에서 무책임한 발언으로 KIA 팬들의 미움을 사고 있어서 부단장 시절 정재공 단장에게 안 좋은 것을 배웠다는 반응이 거셌다. 게다가 정재공 단장 밑에서 배웠다면 적극적인 트레이드 시도나 FA 영입을 시도할 만 한데,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김조호 단장처럼 조용히 있다가 과감히 한 번씩 데려오는 스타일도 아니라 아무 것도 안하는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어서 팬들의 불만이 많다. 하지만 모기업 지원 하에 인프라 개선과 육성시설 강화에 힘을 쓰면서 팀 체질 개선에 힘을 쓰고 구단 비전 목표를 세우는 등 기조를 재건하려는 시도를 했고 2017 시즌 전에는 최형우를 데려오는 등 김조호 단장이 보여준 모습과 비슷한 행보를 걸었다. 그리고 2017 정규시즌 우승으로 이끈 공로로 시즌 후 구단 대표이사로 영전했다.

전반적으로 모기업이나 프런트의 분위기는 정재공 단장 시기를 제외하면 야구 자체에 관심이 크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터치가 적어서 현장과의 트러블이 적은 편이고 현장에서 추구하는 자유로운 팀 운영을 보장한다. 대신 결코 뒤지지 않는 모기업의 자금력에 힘입어 팀 성적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과감한 투자를 하는 편이다. FA 영입이나 인프라 구축(챔피언스 필드챌린저스 필드 건립, 재활센터 구축) 역시 현장의 강한 요구보다는 성적 및 기량향상을 목적으로 구단 모기업의 판단에서 추진한 사업이 강하다.

4.3. 역대 감독[편집]

KIA 타이거즈 역대 감독

순서

이름

재임기간

성적

우승횟수

초대

김동엽

1982년[67]

5승 8패

-

2대

김응용

1983년 ~ 2000년[68]

1164승 934패 51무

9회

3대

김성한

2001년 ~ 2004년[69]

257승 212패 18무

-

4대

유남호

2005년[70]

60승 67패 2무

-

5대

서정환

2006년 ~ 2007년

130승 159패 4무

-

6대

조범현[71]

2008년 ~ 2011년

267승 254패 4무

1회

7대

선동열

2012년 ~ 2014년

167승 213패 9무

-

8대

김기태

2015년 ~

1회

  • 감독 대행 체제로 시작해서 잔여 시즌을 마무리 했으나, 결국 정식 감독이 되지 못하고 다음 감독에게 감독직을 이양한 조창수 감독 대행의 성적은 기록하지 않았다.

  • 감독 대행 체제로 시작해서 정식 감독이 될 때까지 그 사이의 전적도 포함된 기록이다.

  • 김응용 감독의 장기 집권으로 코치나 2군 감독들이 기를 펴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지만, 실제로 김응용 감독이 코치와 2군 감독을 꽤나 돌봐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간에 한 감독이 징하게 오래한 건 사실이다.

  • 몇 경기만에 짤린 김동엽을 제외하곤, 우승을 11번이나 했지만 전부 비 해태출신 감독이 이뤄냈다. 오히려 해태 출신들은 김성한을 제외하곤 전부 성적이 좋지 않다. 김성한도 성적은 좋았지만 포시에서는 항상 광탈하고[72], 폭력사건을 일으키는 등, 좋은 감독으로 기억되진 않는다.

4.4. 역대 주장[편집]

해태 타이거즈 역대 주장

기간

이름

1982년 ~ 1983년

김봉연

1984년

김준환

1985년

김일권

1986~1993년 추가바람

1994년 ~ 1997년

이순철

1998년

이강철

1999년 ~ 2001년

이호성

KIA 타이거즈 역대 주장

기간

이름

2001년

이호성[73]

2002년 ~ 2004년

이종범

2005년

김종국

2006년

이종범

2007년

이종범장성호[74]

2008년

장성호김상훈[75]

2009년

김상훈

2010년

최희섭김상훈[76]

2011년

김상훈

2012년

차일목

2013년

김상훈

2014년 ~ 2016년

이범호[77]

2017년 ~

김주찬

  • 이종범이 주장을 제일 길게 했으며[78], 특수 포지션인 포수 김상훈도 주장을 길게 했다. 그 외에도 이적생 출신 최초로 주장을 맡은 이범호도 주장을 길게 한 편.

4.5. 역대 은퇴식[편집]

KIA 타이거즈 역대 은퇴식

이름

활약 기간[79]

날짜

비고

김성한

1982년 ~ 1995년

1995년 9월 24일

[80][81]

이강철

1989년 ~ 1999년, 2001년 ~ 2005년

2006년 4월 12일

[82][83]

김종국

1996년 ~ 2010년

2010년 9월 15일

[84]

이종범

1993년 ~ 1997년, 2001년 ~ 2011년

2012년 5월 26일

[85][86]

유동훈

1999년 ~ 2014년

2015년 6월 13일

[87][88]

김상훈

2000년 ~ 2014년

최희섭

2007년 ~ 2015년

2016년 5월 15일

[89][90]

서재응

2008년 ~ 2015년

  •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은퇴식이라는게 갖춰지지 않아서 초창기~90년대 초반에 선수생활을 마감한 김봉연, 김준환, 김종모 등 타 팀으로 트레이드 되지 않고 해태에서 현역 생활을 마무리 한 레전드 선수들도 은퇴식을 하지 못하고 바로 플레잉코치를 해야했다.[91]

4.6. 역대 성적[편집]

­

우승

­

준우승

­

포스트시즌 진출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 순위

경기수

승률

해태 타이거즈

1982

4위/6팀[92]

4위

80

38

42

0

0.475

1983

2위/6팀[93]

V1

100

55

44

1

0.556

1984

5위/6팀[94]

5위

100

43

54

3

0.443

1985

3위/6팀[95]

3위

110

57

52

1

0.523

1986

2위/7팀[96]

V2

108

67

37

4

0.644

1987

2위/7팀[97]

V3

108

55

48

5

0.532

1988

1위/7팀[98]

V4

108

68

38

2

0.639

1989

2위/7팀

V5

120

65

51

4

0.558

1990

2위/7팀

3위

120

68

49

3

0.579

1991

1위/8팀

V6

126

79

42

5

0.647

1992

2위/8팀

3위

126

71

54

1

0.567

1993

1위/8팀

V7

126

81

42

3

0.655

1994

3위[99]/8팀

4위

126

65

59

2

0.524

1995

4위/8팀

4위[100]

126

64

58

4

0.524

1996

1위/8팀

V8

126

73

51

2

0.587

1997

1위/8팀

V9

126

75

50

1

0.599

1998

5위/8팀

5위

126

61

64

1

0.488

1999

7위/8팀[101]

7위

132

60

69

3

0.465

2000

6위/8팀[102]

6위

133

57

72

4

0.442

KIA 타이거즈

2001

5위/8팀

5위

133

60

68

5

0.469

2002

2위/8팀

3위

133

78

51

4

0.605

2003

2위/8팀

3위

133

78

50

5

0.609

2004

4위/8팀

4위

133

67

61

5

0.523

2005

8위/8팀

8위

126

49

76

1

0.392

2006

4위/8팀

4위

126

64

59

3

0.520

2007

8위/8팀

8위

126

51

74

1

0.408

2008

6위/8팀

6위

126

57

69

0

0.452

2009

1위/8팀

V10

133

81

48

4

0.609

2010

5위/8팀

5위

133

59

74

0

0.444

2011

4위/8팀

4위

133

70

63

0

0.526

2012

5위/8팀

5위

133

62

65

6

0.488

2013

8위/9팀

8위

128

51

74

3

0.408

2014

8위/9팀

8위

128

54

74

0

0.422

2015

7위/10팀

7위

144

67

77

0

0.465

2016

5위/10팀

5위

144

70

73

1

0.490

2017

1위/10팀

V11

144

87

56

1

0.608

KBO 통산 36시즌

V11

4483

2307

2088

88

0.525


그외 사항은 KBO 리그/역대 팀 스탯 문서 참조.

4.7. 포스트시즌 상대 전적[편집]

LG 트윈스
(MBC 청룡)

83KS : 4승 1무
97KS : 4승 1패
02PO : 2승 3패
16WC : 1승 1패

WC 1패, PO 1패, KS 2승
개별 경기 총 전적 : 11승 1무 5패

삼성 라이온즈

86KS : 4승 1패
87KS : 4승
90PO : 3패
93KS : 4승 1무 2패

PO 1패, KS 3승
개별 경기 총 전적 : 12승 1무 6패

두산 베어스
(OB 베어스)

87PO : 3승 2패
04준PO : 2패
17KS : 4승 1패

준PO 1패, PO 1승, KS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 7승 5패

한화 이글스
(빙그레 이글스)

88KS : 4승 2패
89KS : 4승 1패
91KS : 4승
94준PO : 2패
06준PO : 1승 2패

준PO 2패, KS 3승
개별 경기 총 전적 : 13승 7패

현대 유니콘스

89PO : 3승
96KS : 4승 2패

PO 1승, KS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 7승 2패

롯데 자이언츠

92PO : 2승 3패

PO 1패
개별 경기 총 전적 : 2승 3패

SK 와이번스

03PO : 3패
09KS : 4승 3패
11준PO : 1승 3패

준PO 1패, PO 1패, KS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 5승 9패

4.8. 역대 유니폼[편집]

4.9. 역대 등번호 리스트[편집]

5. 선수단[편집]

6. 응원단[편집]

2018 시즌 KIA 타이거즈 응원단

파일:kia_cheer.jpg

서한국 응원단장, 류세미, 김맑음, 최미진, 원민주, 김혜수, MC이슈
송경민, 권용진, 김소연, 김유나, 정가예


6.1. 역대 응원단장[편집]

KIA 타이거즈

순서

이름

기간

초대

임갑교[103][104]

1982년 ~ 1995년

2대

김창규[105]

1996년 ~ 2001년

3대

조지훈[106]

2002년 ~ 2003년

4대

김주일[107][108]

2004년 ~ 2014년

5대

나윤승[109]

2015년 ~ 2016년 6월 4일[110]

6대

서한국

2016년 6월 28일 ~

7. 응원가 [편집]

8. 유니폼[편집]

9. 마스코트[편집]

KIA 타이거즈의 마스코트는 2016년까지 호돌이, 호순이였으나, 2017년 시즌 전에 호걸이, 호연이로 교체되었다. 호돌이는 이제 없어져요?라고 팬들의 많은 질문이 들어와 기아 측에서 공식적으로 호돌이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실제로 호돌이는 공식 마스코트에서는 물러났지만 2009년 유니폼을 입는 경기에서 등장하고 있다.(이와는 별도로 장내에서 메인 마스코트로 활동중인 사람은 동일하다.)

9.1. 호돌이&호순이 (1996~2016)[편집]

9.2. 호걸이&호연이 (2017~ )[편집]

파일:external/www.tigers.co.kr/20170209102036_sukrrztt.png

호걸이 문서로.

10. 구단 BI[편집]

KIA 타이거즈의 엠블럼 변천

파일:KtFaXn9.jpg

파일:32zZQzk.png

파일:external/s20.postimg.org/KIAtigersold.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ia_Tigers.svg.png

파일:Tigers_negative_logo.png

해태 타이거즈

해태 타이거즈

KIA 타이거즈

KIA 타이거즈

KIA 타이거즈

1982~1995

1996~2001

2001~2009

2010~2016

2017~


해태는 로고가 한번 바뀌었고, KIA 타이거즈로 전환한 뒤에는 두 번 바뀌었다.

KIA 타이거즈 초기 로고는 텍사스 레인저스와 유사한 글씨체를 차용했다. 비록 꼴찌를 두 번 찍는 참담한 암흑기를 거치기도 했고 충격과 공포의 회색 원정 유니폼을 사용한 적도 있었지만, 이 로고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해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젊은 KIA 팬들에게는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로고이다. 실제로 KIA의 올드유니폼 데이(Go T09ether Day 등) 경기에서는 현재 로고 대신 2009년 이전까지의 로고가 표시된다.

우승 이후 2016년까지 사용했던 로고는 이전의 대칭형 로고에서 벗어나 비대칭형 로고를 채용하면서 역동적인 모습을 담아내려 했다. 다만 전반적으로 한화 이글스와 로고가 비슷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이 시기 KIA는 2011년 준플레이오프 진출과 2016년 와일드카드 진출을 제외하면 가을야구와는 연이 없었고, 특히나 KIA의 팜을 작살냈다는 평을 받은 선동열 감독의 부임시기와 맞물리면서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시기가 되었다. 덤으로 타이거즈 역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우승기록이 없는 로고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이 시기부터 KIA는 팀의 얼터너티브 컬러로 감색(어두운 청색)을 내세웠다.

현재의 로고는 2017 시즌전 공개한 로고이다. 이전까지의 비대칭형 로고 및 원형 로고에서 벗어나 대칭형과 홈베이스를 상징한 것이 특징이며, 팀의 세컨드 컬러인 다크 블루(감색)를 본격적으로 밀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111] 현대글로비스 럭비단의 로고를 응용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KIA 타이거즈를 시작으로 현대자동차그룹 산하 스포츠단의 로고 및 유니폼 디자인이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11. 영구결번[편집]

KIA 타이거즈 영구결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KBO_Retired_Kia_07.svg.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KBO_Retired_Kia_18.svg.png

이종범

선동열


영구결번에는 7번18번이 있는데 이종범이 달고 뛰었던 7번은 영구결번이 확실하나, 18번의 경우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18번은 해태 타이거즈영구결번이었으나 구단이 KIA에 매각되면서 눈치 없는 KIA의 프런트진이 해태 색 없애기의 일환으로 영구결번을 무효화하고 당시 유망주이자 신인 최고액 계약금을 받았던 김진우에게 주려고 했던 것. 하지만 이를 알게 된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면서 결국 KIA에서도 영구결번으로 남게 되었다. 정작 18번을 잠깐 받았던 김진우도 구단이 주니까 받기는 했지만 부담이 되었던 눈치. 선동열 본인이 KIA 감독으로 복귀할 때 이 번호를 되살리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영구결번의 취지를 살리고자 감독 선동열에겐 90번이 갔다.

다만 영구결번이 없어도 너무 없으니[112]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타이거즈의 영구결번 기준이 너무 높은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오는 처지.롯데는? 선동열이종범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앞으로 다시는 나오기 힘든 어머어마한 선수들이다보니... 특히 선동열의 경우에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분업화가 자리잡기 전인 8~90년대에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기록한 성적이라 더더욱 나오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지금이라도 김응용. 김봉연, 김성한, 조계현, 이강철 등의 레전드들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해 진입장벽(?)을 낮춰야 한다는 의견이 꽤나 득세하고 있지만, 딱히 영구결번을 늘리거나 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프런트가 해태 시절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냐는 쪽이 중론인데, 가뜩이나 해태색 지우기에 이골이 난 기존 팬들 사이에서는 이런 데서까지 해태색 지우기냐며 성화.

12. 외국인 선수 선발[편집]

12.1. 투수[편집]

과거 해태 타이거즈의 팀 컬러였던 투수 위주의 팀 컬러답게 외국인 선수 선발에 있어서는 투수 용병을 잘 뽑기로 유명하다. 해태 시절을 포함, 투수 용병에 있어서는 게리 레스[113], 다니엘 리오스, 변화구 구사가 뛰어났던 마크 키퍼, 캐나다 국가대표 마이클 키트 존슨, 일본으로 건너가 더 좋은 활약을 한 세스 그레이싱어, 2009년 KIA 타이거즈의 V10을 이끌었던 아킬리노 로페즈릭 구톰슨 등 쟁쟁한 외국인 선수들이 많았다. 게다가 2010년 이후 야구계의 용병농사가 외국인 투수에 집중되면서 더욱 돋보인다. 타선이 시망이라서 그렇지 매년 10승급 외국인 선수를 데리고 올 정도.

2012년에 아킬리노 로페즈를 포기하면서까지 데려온 앤서니 르루호라시오 라미레즈가 시즌 초반 부진하고, 결국 호라시오 라미레즈헨리 소사로 교체되면서 팬들을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이후 앤서니와 소사 모두 선발로서의 제 역할을 다해주면서 어느 정도 우려는 불식되었다. 하지만 팀 성적은 시망... 2013년에는 희대의 설레발 디버프로 본인들 성적마저 수직하락했다.[114]

2014년에는 NPB 다승왕 경력이 있는 데니스 홀튼을 선발 투수로, 마이너리그에서 수년간 마무리로 경험을 쌓았던 하이로 어센시오를 영입하였다. 홀튼은 시즌 초부터 선발진의 한 축을 이루며 좋은 성적을 낸 반면, 어센시오는 마무리로 못 쓸 정도는 아니지만 기대보다는 불안한 피칭 내용을 보이며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그래도 시즌을 거듭할수록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제대로 망한 2013년을 제외하면 그래도 외국인 투수를 보는 스카우터의 능력은 좋다고 평가받나 싶었으나.. 데니스 홀튼은 7월이후 무릎연골이 찢어져 구위저하의 원인이 되었고 수술이 불가피해 방출통보를 받았다. KIA구단은 어센시오를 경험한 뒤 외국인 마무리투수를 뽑으면 안 된다는 인식의 흑역사를 가져다주었고 당시 활약하고 있던 브렛 필만 애꿎게 되었다[115]. 결국 팬들의 불만을 가져왔고 투수용병쪽에선 실패한 스카우트 사례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2~2013년을 KIA에서 뛴 헨리 소사는 2014년 넥센에서 뛰다가 2015년부터 LG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뛰고 있다.

다만 2012년 이후로는 투수 픽이 예전 같지 않아졌다. 2009년 한국시리즈의 영향으로 타 팀에서도 수준급의 외인 선발투수를 오버페이까지 해오면서까지 데려오게 되었고, 선 감독의 고집으로 인해서 뽑아온 투수들은 딱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2014년 타자 잔혹사를 끊음과 동시에 투수 픽은 흉작이 되어가는 현실. 2015년 외인 투수인 조쉬 스틴슨필립 험버 역시 피장타율이 높아서 2009년의 외인 콤비를 봐온 KIA 팬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지 못했다. 그나마 스틴슨이 나아졌지만 험버는 역대 KIA 외인투수 중에서 역대 최악의 투수가 되어버렸다. 조쉬 스틴슨은 2015년 9월 이전까지 10승투수가 되어 다음시즌 재계약에 청신호가 켜졌지만 9월 이후 어깨부상으로 1승밖에 추가하지 못했고 어꺠부상 이후 구위저하와 제구난조가 찾아와 재계약에 적신호가 켜져 다음시즌 재계약에 실패했다. 험버대신 대체용병으로 영입한 에반 믹은 초기엔 불펜의 핵으로 활약했지만 이후 팔통증과 부상으로 저조한 성적을 남겨 결국 이번시즌도 투수용병 뽑기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2016년 시즌에는 프런트가 각성하였는지 헥터 노에시, 지크 스프루일이란 최상급의 용병을 영입하였다. 헥터 노에시는 마이너리그에서 9시즌, MLB에서 5시즌을 보내왔는데, 마이너리그 통산 123G 98선발출전에 584.1이닝, 35승 28패 ERA 3.71 WHIP 1.16을 기록하였는데, 주목할 만한 기록은 삼진/볼넷 비율이다. 584.1이닝동안 삼진은 537개, 볼넷 126개를 던졌다. MLB 5시즌 동안 총 4개의 팀(양키스, 매리너스, 레인저스, 화이트삭스)을 거치며 107G 53선발출전 395.1이닝 12승 31패 ERA 5.30 WHIP 1.46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크 스프루일은 프리미어 12에서 미국전 선발대표로 나섰다. 한국 vs 미국 예선전에서 6이닝 무실점의 호투를 보여주어 KBO 스카우터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이너리그에서 8시즌, MLB에서 2시즌을 보내왔는데, 마이너리그 통산 191G 143선발출전에, 903.0이닝, 52승 60패 ERA 3.86 WHIP 1.30을 기록하였다. 승보다 패가 많지만 통산 ERA가 3점대로 준수하며, 이닝당 출루 허용률도 1점대로 굉장히 훌륭한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MLB에서 2시즌동안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활약하였는데 통산 12G 3선발출전 1승 3패 ERA 4.24 WHIP 1.56으로 크게 뛰어난 활약을 하지는 못하였다. 단순 MLB기록으로만 보면 위력적인 투수로 보이지는 않지만, 마이너리그에서 수차례 팀을 옮긴 것으로 보아 성장가능성이 매우 높은 투수로 평가되었다. 결과적으로 헥터는 예상대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지크는 결정구의 부재와 한국의 폭서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로 득점지원 덕에 간신히 10승은 거두었지만 높은 평균자책점과 날씨에 따른 심한 기복 등 세부적인 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활약을 거두어 재계약에 실패하게 되었다.

17년에는 헥터와 재계약했고 지크와 헤어진 뒤 미네소타에서 뛰던 팻 딘을 90만 달러에 영입하였다. 16년에는 메이저와 마이너를 오가며 보낸 투수. 좌완으로 140km대의 속구와 벌컨 체인지업을 비롯하여 몇 가지 변화구를 갖춘 투수로 메이저리그에서는 구속은 빠르지 않지만 정교한 제구력으로 승부를 보는 타입의 투수였으나 140km대의 속구면 메이저에서는 느린 공이지만 한국무대에서는 파이어볼러 소리를 듣기에 충분한 구속으로 빠른 구속에 제구력까지 갖춘 완성형 투수로서의 활약이 기대되고 있다. 헥터는 양현종과 더불어 32년만의 단일 구단 20승 콤비[116]를 결성했고, 펫 딘은 제구에 난조를 보이며 성적은 좋지 않았으나 후반기에 위력을 발휘해 팀의 정규시즌 우승에 한몫핬다.

12.2. 타자[편집]

투수 쪽에서는 꾸준히 평타 이상을 쳐주는 반면 타자 용병은 정말 눈물 날 정도로 뽑기운이 없었는데, 그나마 해태-KIA 역사상 제 몫을 해줬던 타자 용병이라면 1999년 해태에서 뛰었던 트레이시 샌더스, 윌리엄 브릭스, 2000년에 대체 용병으로 들어와 쏠쏠한 활약을 했던 준족의 똑딱이 헤수스 타바레스[117], 3할에 20홈런을 넘겼던 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 그리고 2012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소유자인 2014년 외국인 타자 브렛 필 정도밖에 없다.(…)

이로 인해 이름이 로 끝나는 외국인 타자를 데려오면 성공한다고 말했지만 밑에 서술된 윌슨 발데가 그 전통을 깨뜨리고 말았다.(…)

해태-KIA 타이거즈의 타자용병 잔혹사를 설명하자면, 실력 외에 애초에 해태의 무책임한 태도로 인해 잘할수가 없던 숀 헤어는 일단 논외로 두고, 2000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던 호세 말래브와 에디 피어슨부터 시작해야 할 듯 싶다. 호세 말래브는 입국 당시 총기를 소지하였던 것이 들통난 데다 실력마저 신통치 못해 시즌 시작도 전에 짐을 쌌으며 에디 피어슨은 1999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뛰면서 실력은 검증받았지만 당시 해태의 열악하기 짝이 없는 대우에 실망해 자기 스스로 짐을 싸서 나왔다.(…) 그 대체 용병으로 제이슨 배스와 일본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뛰었던 내야수 아르키메데스 포조를 데려왔으나 제이슨 배스는 좀 하다 싶더니 부상으로 짐을 쌌고, 포조는 시즌 초반 부진하자 곧바로 쫓아냈다. 여담으로 포조는 해태에서 쫓겨난 후, 해태의 열악한 대우에 대해 자신의 에이전트를 통해 항의하기도 했다.

2002년 KIA 타이거즈로 바뀌고 첫 풀시즌을 치렀을 땐 멕시칸리그 홈런왕 출신 워렌 뉴선을 데려왔는데, 이 선수는 키는 엄청 작은데 거포스윙을 남발하다 폭삼만 당하며 결국 퇴출. 후임이었던 루디 펨버튼도 마땅한 수비 포지션이 없어 지명타자로만 나왔으나 성적은 썩 좋지 못했다.

2007년에는 현대 유니콘스에서 홈런왕을 했던 래리 서튼을 영입했다. 나이가 많고 무릎이 좋지 않아 전년도엔 지명타자로 뛰었으나 KIA로 오면서 좌익수 수비에 들어갔고, 그나마 타율은 괜찮았으나 득점권 타율이 처참했고 장타력마저 떨어지면서 최희섭이 KIA에 입단하자마자 퇴출되었다. 서튼은 KIA 타이거즈를 끝으로 은퇴했는데, 2008년 시즌 종료 후 새로운 외국인 선수를 물색하던 KIA 타이거즈에 이 선수를 추천해줬다.

2008년에는 유격수 홍세완의 공백 때문에 메이저리그 경력이 있던 윌슨 발데스를 영입했다. 시범경기만 해도 빠른 발과 쏠쏠한 타격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똑딱이인 주제에 큰 스윙을 가져가고 수비마저 정줄 놓은 수비를 보여주며 일찌감치 퇴출되고 말았다. 이 선수는 KIA에서 퇴출된 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대체 용병으로 입단하였으나 거기서도 퇴출. 이후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거쳐 신시내티 레즈에서 활약하였다.(…) 그냥 동양 야구와 안 맞았던 모양.

그런데, 2014년 시즌을 앞두고 외국인 선수 보유 한도가 3명 보유 2명 출장 및 타자용병 의무 영입으로 늘어나면서, 6년만에 타자 용병을 영입했다. 그 주인공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뛰던 브렛 필. 이전까지의 타자 외국인 잔혹사 때문에 의혹을 가지기도 했고 실제로 시범경기까지는 매우 부진했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 되자 OPS 0.894를 찍었다. 득점권 타율은 낮았지만 이것은 매 시즌 편차가 심하니 선수의 능력으로볼수는 없다. 중요한 시점마다 영양가 넘치는 홈런을 때려내며 기아 타선에서 돋보이는 타격능력을 보여주었고, 삼성 배영수의 공에 손등을 맞아 경기수가 부족해서 누적 기록은 마땅치 않았다.

재계약에 성공한 2015년에는 KIA의 소년가장 역할을 하였다. 예상 대로 득점권 타율이 평균으로 돌아오는지 아주 좋아졌다. 인성 좋고 성실하고 사고 위험이 없으며 잘생기고 잘하자 팬들 사이에서는 타리그로 다시 갈까봐 전전긍긍. 필은 이렇게 타이거즈 타자 잔혹사에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다만 2014~2015 시즌이 엄청난 타고시즌이라 1루수 포지션임에도 타 구단 외인타자들과 비교해서는 아주 특출나지 않다는게 문제. 나쁜공에도 스윙이 나가는 배드볼 히터라 출루율이 타율 감안하면 낮은 편. 미국에서도 항상 스타일이 비슷해서 이게 한계가 아닌가 하고 교체하자와 3번째 시즌을 같이하자는 의견이 충돌했지만 브렛필은 이번에도 재계약에 성공하며 타이거즈 역사상 최장수 타자용병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브렛 필 본인도 자신을 보는 외부의 시선을 신경쓰고 있는 듯 비시즌 기간 동안 웨이트로 몸을 키웠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2016 시즌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2015년 종종 보여주던 팬들을 환장하게 하는 클러치히터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럭저럭 건실하던 수비마저 무너지면서 다른 의미로 환장하게 했다. 포털 사이트 등에서 '필까충 VS 필맘충' 이라며 팬들끼리 서로 비난해대며 싸우는 씁쓸한 광경도 흔히 볼 수 있었고, 이곳 위키에서도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사상 최악의 용병', '90만달러 거품' 이란 표현도 쉽게 볼 수 있었다.

6월 중순부터 잠시 살아나는 듯 했으나 다시 추락을 거듭하며 최종성적 20홈런 OPS .868로 마무리했다. 시즌 내내 1루만 전담했음에도 시즌 초 무상 트레이드로 영입된 OPS .882를 기록한 2루수 서동욱보다도 OPS가 낮다.게다가 두자릿수 병살+실책을 기록하며 수비에서도 안정감을 주지 못했으며 결국 시즌 후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2016년 12월 1일, 외야수 로저 버나디나와 85만 달러에 계약했다. 그리고 버나디나는 초반 타격에서의 끔찍한 부진으로 퇴출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김기태 감독이 특유의 동행 야구[118] 정신을 발휘해 끝까지 믿어준 결과 20-20을 달성하고 사이클링 히트를 치는 등 KIA 역사상 최고의 타자 용병이 되었다. 게다가 한국시리즈에서는 5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며 KIA의 한국시리즈 우승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

13. 이모저모[편집]

13.1. 선수 육성 체계[편집]

일단은 KIA 타이거즈는 2010년부터 8개 구단 최초로 3군 체제를 시작한 팀이다. 하지만 창설 초기에는 무늬만 3군이라는 성격이 매우 강했다. 일단 2군 시설부터가 낙후되어 있던 상황이니 막 생긴 3군 시스템의 모습은 말할 필요도 없다. 2012년 말에 완공된 함평 육성전용구장이 완공되기 전까지 함평 전남야구장#을 임대하여 2군 구장으로 사용하였던 기아 타이거즈 2군은 그야말로 이었으며 전용구장이 완공된 이후에도 함평군의 훈련시설이 아직 완공 전이라 육성체계가 완성되지 못한 탓에 2012년까지는 잔류군 및 재활군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선동열 감독 체제 이후로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신인들을 많이 뽑고 신고선수들도 많이 영입하여 3군 체계를 강화시켜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부여하면서 경쟁을 통해 훌륭한 팜 시스템을 구축하여 제 2의 이준호나, 넥센의 서건창 등을 발굴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2012년 시즌 후반기에 고양 원더스 소속의 외야수 강하승을 신고선수로 영입한 것[119]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2군 총괄코치가 3군까지 전체적으로 선수단을 관리하는 체계이다.

또한, KIA는 코칭스태프 체계에서 2군 감독이 따로 없고 1군 감독이 2군, 3군까지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체계를 따른다. 대신 2군 총괄코치라는 일종의 수석코치 및 감독대행을 두어 관리하는 체계. 그만큼 1군 감독이 2군과 3군까지 세밀히 점검을 하면서 모든 선수단의 운영을 관리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더욱이 선동열 감독 체제가 들어서면서 선수 육성에 대한 의미를 더욱 강조하면서 경쟁 시스템 구축이 가속화 될 전망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함평에 좋은 시설이 들어서고 무한 경쟁체제가 확립되어 좋은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야지만, 그리고 선동열 감독 이후의 코칭스탭진이 2군 및 3군 육성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2012년 시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던 선 감독이었지만, 그의 부임 이후 육성군 체질 개선으로 2군이 좋은 성적은 얻은 것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120]

일단 최초로 3군이라는 단어를 도입하고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산물이었던 함평-KIA 챌린저스 필드가 완공되면서 선수 육성의 하드웨어는 갖춰진 상태이다. 챌린저스 필드 클럽하우스 완공이 늦어진 상태에서 2군 코치진들이 새로운 선수 발굴에 실패한 결과 2013년 시즌의 참담한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과거 2군 시스템과 인프라는 어느정도 개선은 된 편이지만 별개로 재활시스템은 10개 구단중 최악으로 꼽혔다.[121] 2015년 12월 7일 홈구장인 챔피언스 필드 부지내에 재활센터를 만들계획이라고 한다. 완공이된다면 구단 자체 재활치료가 가능해진다고 한다. KIA, 인프라 대확충...프리미엄 좌석, 3군 구장, 재활센터 건립 그리고 2016년 7월 13일 2군 경기장인 함평-KIA 챌린저스 필드 옆 부지에 재활센터 개소식을 가졌고 10개 구단중 최악으로 꼽혔던 재활시스템은 이전보다는 나아졌다.

13.2. 인기도[편집]

LG 트윈스, 롯데 자이언츠와 더불어 인기도가 매우 높은 구단. 들쭉날쭉한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특히 인근 지역으로 원정올 때마다 아무리 못해도 절반이 넘게 붉은 유니폼과 노란 막대로 뒤덮여 있는 것을 보면 KIA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실감할 수 있다.[122]

프로야구가 태동한 1980년대 5번의 우승을 거머쥐면서 성적과 흥행을 동시에 거머쥔 구단으로 자리매김했으며 한국 최초의 어린이 야구단/팬클럽 사업을 시작하는 등 철저한 팬 관리도 병행했다. 여기에 전국 각지로 진출한 연고지역 출신 팬들은 물론 해태의 압도적인 성적과 아우라, 그리고 기라성 같은 스타들에 의해 유입된 비연고지 팬들까지 합쳐지며 전성기에는 원정에서도 결코 꿀리지 않는 관중버프를 등에 업고 경기를 펼친다.[123]

하지만, 해태 타이거즈의 몰락시기와 이후 성적 침체기에는 당연히도 팬들이 많이 떨어져 나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국구 인기구단의 위상을 잃지는 않으며, 잠실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는 엄청난 관중 동원을 보장하고 있다. LG 트윈스 정도를 제외하면 수도권 경기에서 기아팬이 50%는 구장을 채운다고 느끼는 팬들이 많다. 잠실의 경우 농담삼아 제2 홈구장이라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이고[124] 그 외에 목동, 문학에서도 공격 때 엄청난 응집력으로 응원열기가 홈팬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2015년과 2016년부터 각각 추가/변경된 수원, 고척 원정 역시 마찬가지. 한마디로 수도권 원정경기는 말이 원정이지 최소한 중립경기나 다름없다. 특히 2009년과 2017년처럼 성적 좋은 시즌의 잠실경기 정도 되면 전광판 빼고 모두 우리 것이라는 선수들의 호언장담이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이다. 2009년 후반기 승승장구하며 정규리그 우승 가능성이 가시권에 들어올 즈음의 잠실은 KIA 관중이 홈팀 LG/두산 관중의 1.5배 가까이 될 정도였으며 한국시리즈 잠실 중립 경기 때도 SK팬보다 최소 2~3배는 훌쩍 넘겼고, 2017년 시즌 막판 두산과 치열한 우승 경쟁을 벌일 때 수원에서 kt와의 3연전이 마지막 일정이었을 때는 kt가 창단 이후 처음으로 위즈파크 3경기 연속 매진을 기록한다. 물론 KIA 관중들이 절대다수였던건 당연지사. 아니나 다를까, 2017년 한국시리즈두산 베어스가 진출하면서 잠실에서 3~5차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최근 우승을 차지한 시리즈 때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1~7차전 모두를 홈에서 치르는거나 마찬가지인 셈이 되었다.

오히려 한동안 무등 시절에는 광주의 관중동원이 원정보다 적어 이것만 본 안티들이 홈도 못 채우는 주제에 무슨 인기구단이냐? 라는 이야기를 해왔다. 해태 시절부터 무등야구장 관중동원 실적은 어디까지나 원정에 비해 좋지 못한 편인 것은 맞다. 상대적으로 적은 광주광역시 인구와 규모도 작았지만 환경도 열악했던 무등구장의 취약함 탓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행정적으로 보면, 잠실이나 문학 등지를 가득 채우는 원정 타이거즈 팬들이 다 홈팀 관중으로 집계되는 집계 시스템 문제를 개선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하겠다. 실제로 원정관중 동원은 2011년1위로 나타났다. 2016년에 진행한 한 여론조사에서도 서울에서 두산, LG 다음가는 인기를 보여주고있다.

그리고 박동희 기자가 쓴 기사라든가 여타 을 보면 기아가 프로야구 중계 시청률 1위를 달린다는 집계가 종종 등장한다.

이런 근거를 내놓아도 몇몇 어그로나 안티팬들이 여전히 상황을 부정하는 탓에, KIA 타이거즈 갤러리 같은 곳에서는 아예 스스로 비인기구단 드립을 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최근엔 안티들도 팬이 많다는 점은 인정하고 들어간다. 일례로 K리그 광주 FC남기일 감독은 라이벌 팀을 꼽는 기자의 질문에 여타 K리그 팀이 아닌 기아를 언급할 정도로 같은 연고지에서 넘어야 할 산[125]으로 여기고 있다. 전라남도에 연고를 둔 전남 드래곤즈[126]도 사실상 마찬가지인 상황.

다만, 전국적인 인기에서 예외가 있다면 놀랍게도 연고지역인 전라북도. 이는 전북에서 타이거즈에 대한 열기가 떨어진다기보다, KIA 타이거즈가 아니라도 도민들을 열광시키는 지역 축구팀 전북 현대 모터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전북연고 10구단 창단도 성공하지 못하고, 2014년 이후 도내에서 경기가 열리지도 않으며 전북 아마야구와 초창기 해태타이거즈의 심장이나 다름 없던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의 1차 연고지명권이 NC 다이노스로 넘어가는 등[127] 타이거즈 팬이라도 야구 관련해서 전북 지역엔 그간 좋은 일이랄게 전혀 없었다. 그런데 모터스의 경우 09년 이후 리그우승 5회에 아시아 프로축구의 왕좌를 가리는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두 차례 거머쥐고 지역밀착 사업까지 착실히 수행하면서 그야말로 해태 타이거즈 시절이 돌아온 듯한 즐거움을 지역 팬들에게 주고 있는 것. 그 결과, 전북 현대의 2015년 평균관중은 17,000명을 넘겨 K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중요경기는 관중 3~4만 명에 육박하는 정도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128] [129]

2014년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가 완공된 후 평균관중수 1위를 기록 중. 성적도 좋지 않지만 팬들이 이 정도로 몰린다는 것이 정말 놀라울 따름. 그동안의 홈관중 동원 부진은 정말 옛 무등구장의 열악했던 시설과 환경 때문이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성적 하락에 가속화가 붙은 6월부터는 관중수 역시 줄었지만 66만으로 총 관중수 5위를 기록. 2016년에는 71만명을 기록하면서 기존 수치를 경신했다. 새구장도 있겠다 성적만 좋으면 80~90만도 가능할 듯. 허나 지역특성상 100(평관 14,000명)만은 인구수나 원정관중 버프가 없기 때문에 힘들듯 싶다. 구도라고 불리우는 부산도 인구 350만에서 100만 넘길려면 4강 싸움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는데 (우승권 들어가면 200만도 할 수 있을것 같기도 한데 홈관중 전경기 매진시켜도 200만은 안된다는게 함정 아닌 함정) 150만 인구에 광주가 100만을 넘긴다면 뭐 더이상 할말이 없다.

그리고 2017년, 기아는 초반부터 선두로 치고 나가며 또다시 수많은 관중들을 불러모으는 중이다.. [줌업]중계방송 시청률이 말하는 KBO리그 최고 인기팀은 KIA 광주의 자존심 KIA, 꿈의 첫 100만 관중 보인다 암흑기였던 2012~2014년에도 관중동원은 꾸준히 했던 팀인데, 올해는 성적까지 좋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드디어 첫 100만 관중 기록을 달성했다.

관중 수 증가에 이은 또다른 호재는 바로 팬덤 연령대의 하향화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호남출신 노년, 중년 이상 연령층들이 주로 좋아하는 구단'이라는 이미지가 압도적이있다면 2008 베이징 올림픽 직후인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 그리고 김기태 감독 부임 이후 팀 연령대가 낮아지고 팀컬러가 180도 달라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10~30대 젊은 팬층의 유입이 증가하고 있다. 당연히 2017시즌의 선전과 2017년 한국시리즈 우승과정에서 많은 젊은 팬층이 유입되고 있다.

13.3. 라이벌 팀[편집]

초창기때는 영호남 지역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두 팀이 라이벌 관계가 되었다. 삼성과는 90년대 초까지 번번히 한국시리즈에서 만나 승리했고, 롯데와는 선동열 VS 최동원 그리고 해태제과롯데제과로 대립했었다.

삼성 라이온즈는 창단 초창기부터 큰 라이벌이었다. 일단 영호남을 상징하는 도시가 연고지인데다가, 거기에 팬들의 해태 버스 방화 사건과 양 팀과의 설전 등등으로 지역적인 라이벌 구도가 흥했다. 물론, 해태의 전성기 시절엔 삼성이 우승을 한 번 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전성기가 지난 해태의 선수들을 영입한다거나, 혹은 돈으로 영입을 해가며 해태를 따라가려는 모습에 라이벌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으나, 아무튼 라이벌 구도임은 확실하다. 그 후 2011~2014 시즌 4연속 통합우승을 일궈내며 V8까지 달성하면서, 이러다 '우리의 우승 횟수를 뛰어넘을 수도 있겠다'는 타이거즈팬들의 여러 우려[130]에 인터넷 상에서는 양 팀간의 설전이 계속 있었다. 하지만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 발생하고 삼성의 암흑기가 시작되고, 정작 기아는 우승을 하게 되며 다시 양 팀간의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프로야구가 없어지는 날까지 영원한 라이벌 대전으로 남을 두 팀의 관계라고 생각하면 된다.

롯데 자이언츠의 경우에는 창단 초창기에 선동열과 최동원으로 라이벌 관계가 형성[131]되었으나, 롯데의 성적이 계속 하위권을 맴도는 반면에 해태는 우승을 계속 차지하고 인수 뒤인 기아가 우승을 2번이나 차지했지만, 롯데는 92년 우승을 마지막으로 우승을 쌓지 못하면서 라이벌 관계라고 보기에는 애매해졌다. 그래도 영호남 더비로 보자면 삼성 라이온즈와 함께 라이벌 관계라고 생각하면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 그래서였는지 해태-KIA와 롯데는 두 팀 간 선수교환이 거의 없었다. 기껏 해야 창단 초창기에 좌투좌타 내야수 백업으로 활약했던 김일환 정도. 그리고 한 20년이 흘러서, KBO 2차 드래프트로 선수를 데려오거나 김주찬을 KIA가 FA로 영입하면서 롯데에 보상선수로 홍성민을 내 준 것이 거의 유일한 선수 교환 사례일 정도.

88,89,91년으로 4년간 3번이나 계속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한화 이글스가 라이벌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 광주와 가장 가까운 팀이고, 포스트시즌 횟수를 보면 빙그레/한화 이글스전이 가장 많다. 하지만 한화가 2008 시즌부터 암흑기가 시작되며 현재까지도 가을야구에 올라오지 못하면서, 라이벌로 보기엔 애매해졌다. 기아 인수 이후인 2001년부터 현재까지 한화전 성적은 승률 .562로 인수 후 상대팀 승률 중에 승률이 제일 높다. 해태 vs 한화 성적이나 해태 vs 빙그레 승률도 전부 .550을 넘을 정도로 전형적인 타이거즈의 강세.

SK 와이번스가 4연속 한국시리즈 제패할 뻔 했던 것을 막았던 2009년에 사제 간의 대결로 라이벌 플래그가 생성된 적은 있었다. 당시 SK 감독이었던 김성근은 당시 기아 감독 조범현이 충암고 재학당시 감독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 에는 90년대 급격히 떠오른 LG 트윈스와 라이벌 관계가 섰다. 특히 이 시기 잠실구장에서 LG와 해태의 대결에는 주중에도 매진이 될 때가 많았다.

13.4. 신인왕 잔혹사[편집]

의외로 많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1982년 리그가 시작된 이래 가장 최우수 신인왕과 연이 지지리도 없는 팀이다. 1985년 신인왕과 KBO 골든글러브를 거머쥔 이순철[132]이 배출된 이후 2017년까지 32년동안 타이거즈에서 신인왕을 배출해내지 못했다. 11번의 우승을 거머쥐는 동안에도 빼어난 신인이 나오지 못하거나, 그 해에 신인왕에 버금가는 활약을 했음에도 그 해에 더 괴물같은 선수들이 타 팀에서 나오면서 인연을 맺지 못했다.

  • 1989년 이강철이 성적만 보면 신인왕을 탈법한데 실패했다

  • 1990년에 1차지명으로 입단한 이호성의 경우 그 해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준수한 성적을 보였으나 그 해 신인왕은 김동수의 차지였다.

  •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이종범의 케이스로, 1993년에는 걸출한 스타급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한 해였고 특히 삼성 라이온즈의 교타자 양준혁과의 라이벌 구도가 그려졌다. 결국 신인왕 투표에서 양준혁에 밀려 신인왕 타이틀을 놓치게 되었다. 대신 이종범은 그 해 한국시리즈 MVP와 이듬해 리그 MVP로 신인왕의 설움을 풀기는 했다.

  • 2002년의 김진우도 12승에 탈삼진 타이틀을 따는등 신인왕을 탈만한 성적이지만 더 뛰어난 신인 조용준의 등장으로 실패했다

  • 2006년 최고 계약금 10억을 쥐고 입단한 한기주의 경우에도 데뷔후 선발 및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수준급의 성적을 거두기는 했지만 그 해에 혜성처럼 나타난 MVP와 신인왕을 동시에 거머쥔 괴물급 투수의 등장으로 묻혔다.

  • 2009년 최연소 올스타전 MVP와 한국시리즈의 숨은 공신으로 활약했던 안치홍 역시 그 해에 유일한 순수 신인으로 신인왕에 도전했으나 후반기에 접어들어 약점이 노출되어 삽질을 거둔 끝에 0.235라는 멘도사 라인 급의 타율을 기록했고, 결국 중고 신인인 이용찬에게 자리를 내줬다.

  • 2012년에도 박지훈이 순수신인 출신 신인왕으로 도전했으나 서건창이 등장하면서 그대로 망했어요...

13.5. 군기 및 징계[편집]

해태 타이거즈 시절과 2000년대 초반까지 KIA 타이거즈 군기는 악명 높았다. KIA로 트레이드 될 바에는 은퇴하는게 낫겠다고 옷 벗은 선수들도 있을 정도였는데[133] 이종범이 일본에서 돌아온 후 이대진과 함께 앞장서서 똥군기들을 정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종범 본인도 이 부분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그런데 여전히 군기는 다른 9개 구단에 비해 강한 편인데, 김주찬의 경우 FA로 KIA로 이적한 후 한 인터뷰에서 "군기가 다른 팀에 비해서 센 편인거 같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것과 연관되어서 만일 구단 내의 선수가 사생활이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을 경우 내부 자체 징계를 세게 때리는 편이기도 하다. 무단 이탈을 한 김진우나 음주운전을 한 손영민, 구단물품과 관련되어 문제가 생겼던 한성구의 경우 임의탈퇴라는 강수를 거는 한편 SNS에서 부적절한 언어를 사용하여 팬들의 분노를 산 윤완주의 경우에도 KBO에서는 경고 정도로 끝난 부분을 구단 자체적으로 3개월 선수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린 사례가 있다.

13.6. 선수들의 충성심[편집]

강한 군기와는 별개로 타이거즈에 엄청난 충성심을 보이는 선수들이 제법 있다. 보통 해태 시절에 활약했거나 해태 야구를 보고 자란 연고 지역 출신 선수들에게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

대표적으로 임창용의 경우 삼성으로 떠난 뒤에도 몇 번이나 '타이거즈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였으며 결국 돌고돌아 기아로 돌아와 활약하고 있다. 이호준은 한창 SK와 기아가 대립했을 시절에도 인터뷰로 '기아가 좋은 성적을 냈으면 한다'고 말했고 주장임에도 벤치 클리어링때도 안 나왔다. 정성훈은 현대로 트레이드된다는 소식을 듣자 팀을 떠나기 싫다며 울었고 아예 올스타전때 현대 유니폼에 기아 헬멧을 쓰고 나오는 기행을 보여주기까지 했으며 결국 친정팀으로 다시 돌아왔고, 신종길은 한화시절 자신이 트레이드 대상에 올랐다는 얘기를 듣자 구단에 'KIA가 아니면 안 가겠다'고 선언했다. 김상현LG로 트레이드될때 소주를 마시고 감독이 쉬던 숙소 방에 들어가서 '제발 타이거즈에 남게 해주세요'라며 무릎을 꿇고 감독한테 빌었다. 양현종은 광주 출신의 로컬 보이인데다 본인도 기아의 영구결번을 노린다고 이야기할정도로 팀에 애정을 보여주고있고, 노수광의 경우 SK와 4대4 트레이드가 결정되고 눈물을 흘리고 감독에게 큰 절을 올리려고 했다고 한다. 트레이드 된 이후에도 자주 기아 덕아웃에 놀러오는 모습을 보여줬다. 서동욱도 팀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걸로 유명한데, 기아에서 다른 팀으로 넘어간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자꾸 기아로 자신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고.[134] 넥센은 서동욱을 대체할 주전이 이미 충분했기 때문에, 딱히 활용법도 마땅치 않은 서동욱을 무상 트레이드로 기아에 넘겨주면서 서동욱은 11년 뒤 기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와 또 별개로 타팀에서 건너온 선수들도 팀에 대한 상당한 애정을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특히 군기가 점차 약해져갔던 2010년대에 들어온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80년대에는 대표적으로 서정환이 있고[135], 근래에는 이범호노수광, 최형우 등이 대표적.

13.7. 노란 응원막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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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기사)

각 팀마다 팀 컬러를 반영한 응원막대를 판매하고 있지만, 빨간색과 감색을 팀 컬러로 내세우고 있는 타이거즈는 뜻밖에도 노란색 막대풍선을 쓰고 있다. 일부 KIA 팬들은 노란색 응원막대를 단무지라고 부르기도. KIA 타이거즈의 BI나 CI에서도 호랑이를 제외하고는 노란색을 찾기 힘들고 CI 변경 전에도 노란색 계열을 쓴 부분은 마찬가지로 호랑이 캐릭터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노란 막대풍선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LG 트윈스가 1990년대 초반 처음으로 막대풍선을 이용한 응원을 시작한 뒤 다른 프로야구 구단에서도 응원 막대풍선을 차용하기 시작했는데, KIA의 전신인 해태 타이거즈에서 막대풍선 색상으로 고려할 때 빨간색도 써봤지만 잘 보이지 않아서 시각적으로 빨간색보다 잘 보이고 부피도 커보이는 노란색 막대풍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KIA 타이거즈로 팀이 바뀌면서 2004년까지 빨간 응원막대로 바뀌기는 했지만 결국은 다시 노란막대로 회귀했다. KIA가 한 번 쓰다가 버린(?) 붉은색 응원막대는 훗날 팀 상징 컬러가 바뀐 SK 와이번스에서 쓰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좀 단순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해태 로고 중에도 노란색이 일부 있기도 하고 나름대로 호랑이 캐릭터에 노란색 계열이 들어가는 만큼 의외로 잘 어울리는 응원 막대풍선 색깔이 되었고, 노란 막대풍선은 타이거즈만의 상징물이 되었다. 이 덕분에 기아를 응원할 때 보면 빨간 베이스에 노란색이 강조되는 효과가 나온다. 특히 경기가 기아의 압승으로 흘러가기라도 하는 날에 그 기세는 더 말할게 없을 정도.

일각에서는 호남에서 노란색이 정치적으로 남다른 의미를 상징하는 만큼 타이거즈의 응원색으로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한다. 실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0년대에 이끌었던 평화민주당의 상징색이 노란색이었고 훗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탄생한 열린우리당도 노란색을 상징색으로 썼다. 모두 호남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정당들이다. 현재는 정치색과 완전히 무관.[136]

현재는 일반적인 긴 모양의 막대풍선 외에도 호랑이발을 형상화시킨 막대풍선이나 탬버린 등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나오고 있다.

미스터 고에서 이런 걸 고려하지 않고 노란색 응원봉을 사용했다가 망했어요.

13.8. 잠수함 투수 전성시대[편집]

타이거즈에 대해 설명할 때 왼손잡이 선수 수난사와 함께 언급되는 특징으로 수준급의 옆구리 투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팀이라는 것. 이 중 왼손잡이 수난사는 수많은 우투좌타 야수가 배출되고 있는 현대야구의 추이와 함께 타이거즈 왼손투수의 기록을 속속 갈아치우고 있는 양현종의 등장으로 사실상 옛날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지만 수준급의 옆구리 투수의 배출은 기아자동차로 모기업이 바뀐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

1989년부터 2012년까지 지속되었던 이강철-(박충식)-신용운-손영민의 등번호 19번 계보의 선수들이나 해태에서 뛴 적 있는 재일교포 선수 주동식, KIA 2009 시즌의 뒷문을 책임졌던 유동훈 등도 타이거즈를 대표했던 옆구리 투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이며, 해태에서 데뷔한 뒤 삼성에서 오래 선수생활을 하다 우여곡절을 겪고 KIA로 돌아온 임창용 역시 타이거즈가 배출한 KBO 리그 대표 사이드암 투수이다.

2012년을 끝으로 '등번호 19번 옆구리투수'의 계보가 끊겼고[137] 2010년대 초~중반 잠시 잠수함 투수의 기세가 줄어든 적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도 박준표, 박정수 등의 선수를 발굴해 냈고, 한화에서 데뷔했지만 상무에서 군 생활을 보낸 뒤 제대하여 KIA의 선발투수진을 꿰찬 임기영 역시 타이거즈 옆구리 투수 배출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13.9. 호랑이가족한마당[편집]

시즌이 끝나면 매년 실시하는 구단의 축제 겸 팬미팅. 자세한건 호랑이가족한마당 문서 참조.

14. 홈 구장[편집]

KIA의 홈 구장으로 사용중인 곳은 다음과 같다.

15. 지역 연고 학교[편집]

16. 출입기자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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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최진화 전남매일 차장, 김종국 코치, 김여울 광주일보 기자

  • 이선호 OSEN 기자 - 기아팬들 사이에서는 KIA 타이거즈 밖에 모르는 바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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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건 사고[편집]

그 외에도 롯데, LG와 더불어 팬 많기로 유명한 구단이기에 그만큼 이야깃거리도 많은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KIA 타이거즈/사건사고 문서 참조.

18. 팬 커뮤니티[편집]

19. 각종 이야깃거리[편집]

  • 2012년 시즌 들어 롯데 자이언츠넥센 히어로즈 등 각 팀의 여성 경기보조요원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고 있다. 야구의 인기가 확대되면서 또 다른 구단의 인기요소가 되기 때문인데, KIA는 그런 거 없다. KIA의 경우에는 경기 보조요원을 지역의 유소년 야구 선수들을 활용하는데, 구단 측에서는 유소년 야구선수들이 경기에 보조로 참여함으로써 선수가 되기 전 프로야구 경험을 축적하여 선수 생활의 바탕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유명한 야구 선수들을 직접 그라운드 안에서 보면서 선수로써의 꿈을 키우는 경험을 해준다는 차원에서는 나름대로 실속있는(?) 방침이라 할 수 있을 듯. 보조요원으로 참여한 학생들에게는 소속 학교에 일 수당 5만원을 지급한다고 한다... 하지만 2015, 2016 시즌에서는 유소년야구선수 대신 다른 구단들처럼 배트걸을 썼다. 이 배트걸은 구단 치어리더들이 번갈아가며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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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11년 올드 유니폼 데이 당시의 이종범.)

  • 2005년 이래 시즌 개막전 전패를 기록하면서 2012년까지 8연패를 기록하였다. 그렇다보니 초반에 팀 분위기가 꼬이는 경우가 계속 발생하였으며 그 분위기가 계속 진행되면 팀 운영에 차질이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KIA 타이거즈의 개막전 승률이 2012년까지는 0.393으로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고. # 그러나 2013~15 시즌 개막전에서 모두 승리하며 3연승을 기록하며 개막전 승률을 어느 정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 구단 상품들이 정말 안습한 수준이다.## KIA 타이거즈의 유니폼과 상품은 10개 구단 중 삼성 라이온즈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영 좋지 못했다. 프런트에서도 인식은 하고 있다고.## 그래서인지 2017년을 끝으로 기존 사업자였던 비젼코리아와의 계약이 끝나자 마자 킷 스폰서인 마제스틱의 한국 판매를 담당하는 '케이엔코리아'와 상품 계약을 맺은 뒤 상품의 다양성이 증가되면서 점차 고객들의 의견을 만족하고 있다. 다만 아직 초기여서인지 몰라도 일부 상품의 마감이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은 있다.

  • 한동안 지나칠 정도로, 해태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출신 감독을 선호하는 일명 해태순혈주의를 고집하였다. KIA 타이거즈 역대 감독들은 현재 김기태 감독, 조범현 전 감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태 출신이였다. [140] 하지만... 2009년 타이거즈에 12년 만의 V10을 안겨준 비해태출신 조범현감독은 2011년 전반기 1위를 했지만, 후반기의 16연패로 인해 빗발치는 팬들의 원성을 들어야 했고, 결국 정규리그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패배를 기록하며 조범현 감독은 이에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를 한다. 그러나 구단과 팬들에게 이를 깨게 만든 장본인이 있었으니... 2012~2014년 3년간 감독을 맡은 한국야구의 살아있는 전설 해태출신인 선동열. 하지만 3시즌 연속 포스트시즌 탈락과 588이라는 처참한 성적은 감독이 꼭 해태 출신이 아니어도 된다는 해태순혈주의를 깨는 시금석이 됐다.

  •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인성이 좋고 실력이 좋은 선수라면 용병이든 누구든간에 차별하지 않고 섭섭하지 않게 대우 잘해주는 구단으로 정평이 나있는 편. 이를 증명하는게 2015년 7월 27일 외국인 타자 브렛 필의 딸 킨리의 돌잔치가 열렸는데,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외국인 선수가 한국식으로 돌잔치를 열게 된 건 처음이고, 돌잔치를 여는 과정에서도 구단은 이를 위해 많은 신경을 써준 것은 물론, 선수단, 코칭스태프, 구단 직원까지 참여를 하였다. 또한, 2015년 시즌 전반기에는 필의 가족을 초청하여 시구를 하는 시구자가 되었고 이후 경기를 관람할 수 있게 신경 써주었다. 게다가 필의 은퇴 이후에는 외국인 선수의 북미지역 담당 스카우터로 채용하고, 한국시리즈에도 초청하는 등, 이러한 복지 면에서는 뛰어난 편이다.

  • 지방 연고 구단인 만큼 시구행사가 많은 편은 아니다. 다만 타 구단들이 유명인사를 시구자로 섭외하기 위해 돈을 쓰는 것에 비해 KIA는 반대로 시구를 원하는 쪽에 돈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덕분인지 유독 광주/전남[141] 산하 기초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시구가 잦은 편이다. 해당 지역의 단체관람객 동원은 덤. 그러면서 구단 한 켠에(특히 외야 출입구 부 울타리) 해당 지자체의 지역 행사를 홍보하는 현수막이 걸리는 등 홍보의 장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KIA가 시구행사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러브 투게더 행사 등 자선단체 기부에 쓰인다.

  • 김기태 감독이 취임 후 2015년 시즌 선수들의 부상을 막기 위해 홈팀 덕아웃인 3루 쪽에 고사를 지낸 뒤 덕아웃에 북어를 달았다고(!!!) 한다. 그러자 놀랍게도 선수들의 부상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물론 김주찬 덕에 효과가 미미해진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지만 북어는 현재까지 걸려 있다고 한다.

  • 구단 프런트가 야알못이라고 오랫동안 까였었다. 현대자동차 그룹의 방침상 사장이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한화 이글스 사장이 대신 결정권을 행사하며 오는 단장들 역시 순수하게 돈과 인프라 지원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재공 단장 이후 프런트가 구단 운영에 함부로 간섭하지 않고 현장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야말로 지갑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2015년 이후로는 조금식 개선되는 모습이 보이는데, 현장의 요청이 있기 전에 박한우 사장을 필두로 한 구단 고위층이 2020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에 재활센터를 건립하는 등[142] 구단 인프라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다.

  • KIA 협력병원에 안과병원이 있는데, 이 곳이 나름대로 시력교정 수술이 유명해서 KIA 소속 선수들이나 KIA를 거쳤던 선수들 중에서 이 곳을 통해서 안경에서 벗어난 선수들이 몇몇 있다. 양현종[143]이나 김종국, 노수광 등이 그 예이고, 장성호는 롯데 시절에 했음에도 KIA와의 연을 통해 안경에서 해방되었고 조영훈 역시 삼성 시절에 시력 문제로 고생했다가 KIA 이적 후에 안경에서 해방되었다.

  • 2017년 7월 5일 기준 한미일 사상 최초 8경기 연속 두 자리수 득점을 기록하였다. 다음 날인 7월 6일에는 5득점만을 기록하면서 연속 기록이 중단되었지만, 7월 9일 20득점을 하며 두 자리수 득점을 기록했다.[144][145]

  • '타이거즈(스)'를 구단 이름으로 하는 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017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합하면 전신이었던 해태 시절까지 포함한 11회 우승으로 최다이다. 두번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소속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4회의 우승 기록을 소유. 3위이자 맨 꼴찌인 일본대표 한신 타이거스고작 1회인데다가 그마저도 1985년 우승이다.

  • SK 와이번스가 가을야구 전문구단이라면 여기는 한국시리즈 전문구단이다. 전신이던 해태시절을 포함, 총 11번의 한국시리즈 진출 모두 우승으로 종결지었다.

  • 해태 아줌마가 올드팬들 사이에선 제법 유명하다. 평소에는 껌이나 담배, 응원도구 등을 파는 행상인인데, 경기가 시작되면 특유의 한복치마 복장을 하고 응원단석까지 올라가 해태를 응원했다고 한다.[146] 반응은 꽤 괜찮았던 편. 팀명이 KIA로 바뀐 지금도 가끔 야구장을 찾으시는 모양이다.

20. 유명 타이거즈 팬[편집]

21. 관련문서[편집]

22. 둘러보기[편집]

[1] 도시연고로는 광주광역시지만 광역연고로 보게 된다면 호남 지방 전체가 KIA의 연고다. 과거 유니폼 한쪽 팔 부분에 지역명을 표기하던 시절 해태 타이거즈의 연고지역명에 '광주' 대신 '호남'을 표기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2] 연고 학교 또한 호남 지방 전체에 퍼져 있다. 단 전북 지역 연고 학교 중 군산상고전주고NC 다이노스 산하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NC가 군산상고, 전주고 선수들을 대상으로 1차지명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지 해당 지역의 제2구장 홈 경기를 치를 권리까지 준 것은 아니다. 이 둘은 별개의 사안이다.[3] 공식적인 구단주는 정몽구 회장이나, 실질적인 구단주는 정의선 부회장이 하고 있다.[4] 구단주 대행 겸임[5] 아직 홈구장 지위를 잃은 건 아니지만 2014년 이후로 프로야구 홈경기가 없다.[6] 한국시리즈 무패 기록중이다. 11전 전승의 기록.[7] SERIESSERISE라고 적어 놓았고시라이스, V6이니까 별이 여섯 개여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별이 일곱 개다. 모기업이 KIA로 바뀌면서 엠블렘을 재정리했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이 말이 맞다면 엠블렘을 다시 그리다가 실수로 별 개수를 착각한 듯하다. 자세한 경황을 아시는 분 추가바람. 그리고 2017년 우승 로고를 교체하면서 홈페이지의 로고들의 오류가 전부 수정되었다.[8] 여기서도 series가 아니라 serise라고 써있다.[9] 전기, 후기 우승[10] 포스트시즌을 제외한 정규시즌 기준.[11] 경기 당 평균 14,234명[12] 포스트시즌을 제외한 정규시즌 기준.[13] 경기 당 평균 1,049명[14] 이거 말고 과거 올라온 버전 링크는 여기. 링크. 배경음악은 남행열차. 남행열차 영상에서 틀린 점이 하나 있는데, 87년 한국시리즈의 상대는 빙그레 이글스가 아닌 삼성 라이온즈였다. 1983년 영상은 빠져있다. 83년도가 포함된 버전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링크[15] KBO 리그가 도시연고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명목상 연고지는 광주광역시로 국한되지만 실질적으로는 호남 지방 전체를 대표하는 구단이다. 다만 쌍방울 레이더스 해체 이후 프로구단이 사라진 전라북도는 팬 분포가 다양한 편. 타이거즈를 응원하는 팬이 여전히 많지만 바로 윗동네 팀인 한화 이글스를 응원하는 팬들도 적지 않으며 과거 쌍방울 레이더스 출신 선수들이 있었던 SK 와이번스를 응원하는 팬들도 있다. 이외에 신인 지명에 있어서도 NC 다이노스의 지명 지역으로 편입된 전주시군산시를 뺀 호남지방 전역(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전주, 군산 제외))이 타이거즈의 지역연고 신인 선수 지명지역이기에 타이거즈를 명실상부한 호남 대표 구단이라고 인정하는 분위기.[16] 정규 시즌 2위는 꽤 있다. 1989, 1990, 1992, 2002, 2003년에 2위를 기록했다. 그 중 1989년에는 업셋 우승까지 했다. 이 중에서 우승한 것은 1989년이 유일하다. 1989년에는 정규시즌을 2위로 마감해서 플레이오프에서 '돌풍의 팀' 태평양 돌핀스를 제쳤고 한국시리즈에서는 빙그레 이글스를 꺾고 당시로서는 최초의 기록이던 한국시리즈 4연패에 성공했다. 1990년은 시즌 막판까지 LG 트윈스와 선두경쟁을 하다 결국 뒤집히면서 분위기가 꺾였고 결국 삼성 라이온즈에게 플레이오프에서 스윕당했다. 1992년에는 롯데 자이언츠와 만났는데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승 3패로 패했고 2002년에도 LG 트윈스에 2승 3패로 아쉽게 패했다. 이듬해에는 SK 와이번스에 완패로 끔살당했다.[17] 11회.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챔피언결정전 최다 기록이다. 2위는 아산 우리은행 위비의 10회, 공동 3위는 삼성 라이온즈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의 8회.[18] 혹은 여기에 김준환이 빠지고 김종모가 추가 될 수 있다.[19] 다크블루는 모기업인 현대자동차그룹의 CI 컬러다.[20] 이 소문의 가장 큰 배경은 해태 타이거즈의 말년과도 연계된다. IMF 한파 당시 모기업 해태제과가 부도를 맞았던 해태 타이거즈는 영광스러운 전성기에 비해 초라하고 가난한 말년을 보내야 했는데 후신 팀이 '굶어 죽는다'는 뜻의 구단명을 쓸 경우 부잣집으로 팀의 주인이 바뀌었음에도 전신 팀의 가난 DNA가 전수됐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영어를 썼다고 전해진다. 이는 '해태와의 단절'을 추진했던 초창기 기아 프런트의 업무 마인드와도 맥이 통한다.[21] 참고로 기아자동차에서의 '기아'는 '아시아에서 일어나다.'(起亞)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단어인 Gear를 일본식 발음대로 옮겨적은 것이기도 하다. 자세한 사항은 기아자동차 문서 참고.[22] 프로야구 출범 초기에는 각 구단들이 연고지의 지역연고 선수들을 무제한 지명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연고 1차지명은 점점 축소되지만, 신인육성의 개념이 없고 즉전감에 의존하던 90년대 초반까지는 지역연고의 최상위권 유망주들을 싹쓸이해서 해태 타이거즈는 정상권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23] 이때문에 전용훈련장 경산야구장 건설,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의 제휴, 미국 전지훈련 등 막대한 투자를 단행하던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을 하지 못하고 오랜기간 콩라인에 머물러 있던 것이다.[24] 1990년대 초반까지는 KBO차원에서 매년 연봉인상률을 25%로 제한하였다.[25] 일단 정주영 회장 본인이 야구에 큰 관심이 없었다. 정주영 회장은 유명한 농구애호가이며, 현대일가가 야구보다는 축구쪽에 관심이 많았다.[26] 여타 구단들은 당시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현대라는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27] 하지만 현대 유니콘스 창단 이후에도 기존 현대 피닉스 소속 선수들의 보유권을 인정하는 문제를 가지고 기존 구단들과 현대그룹이 또 충돌했다. 참고로 1982년 프로야구 출범때는 기존 실업야구팀들의 선수보유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어찌하던 이 문제를 봉합하는 과정에서 현대의 막강한 위세에 밀려서 어정쩡한 타협이 이루어졌고 롯데 자이언츠는 애초에 자신들의 연고 선수였던 문동환을 트레이드를 통해서 데려와야만 했다.[28] 김응용 감독의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의 명언(?)이 여기서 나왔다.[29] 박태준 회장은 축구를 선호했다.[30] 이때 포항제철 야구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실업무대에 남았다.[31] 실제로 60%에 달하는 외국펀드 주주의 제동으로 포항 스틸러스에 점점 지원금이 줄어들고 행정도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도 더블을 달성한 황선홍이 놀라울 따름. 게다가 전남 드래곤즈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살림은 더욱 빠듯할 수 밖에 없다.[32] 아시아자동차는 1965년광주에서 설립되었으며 1976년에 기아가 인수한 이후에도 줄곧 본사를 광주광역시로 적어왔다. 오히려 모기업이 된 기아자동차 본사를 서울사무소 취급할 정도였다.[33] 기아는 광주에 공장과 출고사무소를 두고 있다. 특히 공장의 영향이 크다.[34] 옛 현대차서비스 배구단.[35] 실제로 LG 트윈스의 1700승 기념 행사 역시 MBC 청룡의 역사를 따랐기에 가능했던 것.[36] 참고로 그날은 화요일이었다. 그만큼 광주 야구팬들의 기아에 대한 기대감이 확실히 드러났던 경기였다.[37] 이 때 삼성의 김응용 감독은 KIA를 잡으려고 3선발 체제에 임창용을 그야말로 애니콜 체제로 투입했다.(…)[38] 이때 KIA 불펜진에서 그나마 믿을만한 선수는 백전노장 이강철 뿐이었다.[39] 결국 그해 플레이오프에서의 부진 때문에 김진우는 고졸 신인으로 선발로테이션을 돌며 10승과 탈삼진 1위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인왕을 대졸 신인이었던 조용준에게 내주고 말았다.[40] KIA가 현대에게 선두를 아깝게 빼앗긴것은 맞으나, 실제로 1위 결정전은 9월달에 있었던 광주 현대전에서 결정됐다. 초반부터 5-0으로 끌려다니며 현대의 투수진에 압도당하면서 싱겁게 끝났던 게임이었다. 사실, 2003년 당시 KIA는 전반기에 5위에 머물고 있다가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연승을 달리며 현대를 잠시 제친 것이었고, 그 뒤 연승의 부작용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 1위를 내준 제일 큰 원인이다.[41] 당시 현대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선발로 올라온 정민태가 난타당하며 KIA에게 1회 6점 2회 4점을 헌납하며 10-1로 뒤진 상태였다. 그러나, 현대는 김동수의 연타석 홈런과 이숭용의 홈런으로 추격했고, 9회말에 진필중이 3점차를 지키려 올라왔지만 2점을 내준 뒤 심정수에게 15호 끝내기 장외 쓰리런을 맞고 그만 참고[42] 성적은 크게 나쁘지 않았으나 당시 단장이었던 정재공과 선수단 기용을 놓고 트러블이 잦았다. 프런트의 수장인 정재공이 선수단을 장악하고 흔들며 현장의 권한인 선수단 기용에까지 손을 뻗치며 김성한 감독과 마찰을 빚었기 때문. 그러나 김성한 감독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SK에게 캐발린 것 때문에 뜬금없이 데이터 야구를 하겠다고 방동민을 줄창 올려서 불바다를 만든 것.(…) 당시 KIA팬들은 진필중만큼이나 방동민이 올라오면 뒷목을 잡아야했다. 거기다 김지영폭행한 사건때문에 대외 이미지도 안좋았던 상황이였다.[43] 시즌 초에 유남호 감독의 구상은 리오스-김진우-존슨-강철민-최상덕 순의 선발진이었으나, 김진우가 스프링캠프에서 지나치게 체중감량에만 신경을 쓴탓에 훈련량 부족으로 1군에 오르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자 유남호 감독은 리오스-존슨-강철민-최상덕의 4선발 체제라는 말도 안되는 선택을 했다가 선발진이 와르르 무너진 것. 5선발로 이동현을 투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불펜 난조로 이강철-조규제 듀오는 노쇠화와 부상으로 일찌감치 물러나고 신용운은 한남자의 실수가 트라우마가 되어 클로져를 못하게 돼버리는 총체적 난국이 도래했다는 거다. 상황이 이리되자 유남호 감독은 신인 투수 2명을 필승조로 삼았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윤석민이었다.[44] 당시 리오스가 KIA에서의 마지막 선발 등판 후 포수 김상훈과 포옹하는 장면이 감동적이다.[45] 사실상 양 팀 전부 폐품 처리 트레이드라고 봐도 무방한 트레이드였다. 마해영과 최상덕은 2006년 시즌 후 전력 외가 되었으며, 그 때 낑겨간 유망주 서동욱은 백업으로 활동하다 2013년 최경철을 상대로 넥센 히어로즈로 트레이드되었다가 2016년 11년만에 다시 친정 팀으로 돌아왔다. KIA로 넘어온 장문석은 2006년 시즌 초반 마무리를 맡았으나 똥줄 세이브를 계속 보여주며 중반 이후 윤석민에게 마무리 자리를 넘겨주고 방황하던 김진우에게 노장진을 소개시켜주며 김진우가 팀을 이탈하는데 엄청난 공헌을 했다. 장문석과 함께 KIA로 넘어온 한규식, 손상정 역시 별 활약 없이 조용히 팀을 떠났다.[46] 극단적인 상하위타선이 분리된 공격을 하였다. 이용규-김원섭-장성호-이재주가 버틴 상위타선은 2006년 시즌의 미친 투고타저를 감안할 때 리그 최상급 상위타선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5번을 맡아주거나 이재주를 밀어내고 4번을 차지했어야 할 용병이 전부 망했고, 이종범은 커리어 멸망의 신호탄을 쏘았으며, 그나마 손지환이현곤은 포지션 및 타순 대비 감내할 만한 수준의 성적을 냈다.[47] 2006년 시즌 기아의 젊은 투수진이 커리어가 폭발한 결과로, 그레이싱어와 장문석을 제외하면 30살이 넘는 투수를 찾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아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대들보들은 바로 다음 해에 감독의 혹사 및 무분별한 기용이 겹쳐 윤석민 정도를 제외한 대다수가 박살이 난다.[48] 한기주의 10억 보크 사건이 바로 이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나왔다.[49] 여담으로, 홈 복귀전이 522 대첩으로 기억되고 있다. 9:10으로 KIA 승리.[50] 당시 홍세완은 부상병동을 들락거렸고 김종국은 서서히 노쇠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손지환이나 이현곤 등이 키스톤 알바를 뛰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고, 유격수 용병이었던 윌슨 발데스를 영입하기도 했으나 역시 리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출되었다.[51] 애초에 기대도 안했는데 후반기 5위 싸움에 끼어들 정도로 팀을 이끈 것은 대단한 것이다.[52] 정우람박석민은 워낙 거액이어서 이 부분은 팬들이 이해를 많이 하고있다. 그런데 이번 FA시장에서 구단이 가만히 있었던건 아니다. 손승락을 잡아주라는 김기태 감독의 요청으로 손승락에게 60억 배팅을 하였지만 그 이상을 원하는 손승락이 거절하여 구단에서 그 이상은 무리라 판단하고 포기했다고 한다. 다만 아쉬운 건 다른 FA선수들인 윤길현유한준조차 안 잡았다. 물론 윤길현은 기아와 안좋은 사건이 있었으니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있으나 유한준은 아쉬운 감이 있었다.[53] 다만 2016년 밝혀지길 FA 투자 대신 선수 육성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 중이라고 한다. 현장에서 부담스러워 할정도로 투자되고 있다고.롯데는?[54] 심지어 09년엔 무려 우승을 했다.[55] 농담이 아니고 저 해태의 4연속 우승은 삼성 라이온즈가 큰 지분을 담당했다. 86년87년에 모두 해태에게 셧아웃 당했던 것. 뿐만 아니라 빙그레 이글스도 마찬가지로 1988, 1989년에 해태에게 연속으로 패했다. 4연속 우승 이후에도 삼성은 93년에 다시 한번 패하여 준우승, 빙그레도 91년에 패하여 준우승, 알고 보면 해태 왕조 건설은 이 두 팀의 희생이 컸다고 볼 수 있다.[56] NPB에서도 이런 사례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정도밖에 없다. 참고로 저 두 구단 전부 후쿠오카와 연관되어 있고(호크스는 현재 연고지, 라이온즈는 과거 연고지) 매각과 동시에 연고이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57] 7차전까지 가더라도 꼭 마지막에 이겼다. 2009년 한국시리즈 참조.[58] 1983년 한국시리즈, 1997년 한국시리즈. MBC 청룡 시절 포함[59] 1986~1987년 한국시리즈, 1993년 한국시리즈.[60] 1988~1989년 한국시리즈, 1991년 한국시리즈. 빙그레 시절에 3차례나 대결했다. 한화로 팀명이 바뀐 이후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61] 1996년 한국시리즈[62] 2009년 한국시리즈[63] 2017년 한국시리즈[64] 그 대신 플레이오프에서 만났으며 1패를 기록하고 있다.[65] 여담으로 이 부분에서 '사장=구단주'라고 표기돼 있었는데 배구단의 구단주는 정태영 부회장이다.[66] 1차지명이 부활하면서 지역연고 고교 5개를 선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시기 타이거즈의 뿌리와도 같은 군산상고가 빠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KIA에서 선정한 고등학교는 광주일고, 광주동성고, 광주진흥고, 순천효천고, 화순고. 프런트 측에서는 어떻게든 군산상고의 지명권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 군산상고는 NC 다이노스가 가져갔다.(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1차지명 권한 행사와 제2구장 홈 경기는 엄연히 별개의 사안이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KIA는 신생 야구단이 있는 전북 정읍의 인상고를 가져갔다.[67] 중도사퇴 후 조창수 코치 감독대행.[68] 무려 18년 동안이나 했다. 그중 9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 2000년 시즌 도중 사퇴로 잔여 경기는 김성한 수석코치 감독대행.[69] 중도사퇴 후 유남호 기아 타이거즈 2군 감독이 감독대행.[70] 중도사퇴 후 서정환 기아 타이거즈 2군 감독이 감독대행.[71] 김응용 이후로는 처음으로 비 해태출신 감독. 2007년 시즌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KIA 감독으로의 데뷔전은 2007년 시즌에 치렀다. 자세한 내용은 KBO 슈퍼 한국시리즈 문서 참조.[72] 전부 4위팀한테 졌다.[73] 해태의 임시주장직을 맡았다가 결국 주장이 되어서 해태의 마지막 주장직을 맡았고, 2001년 8월 1일부터 기아 타이거즈로 팀이 인수 된 후에도 주장을 맡다가 2001년 시즌 후 은퇴.[74] 이종범의 부진으로 인해 시즌 도중 주장 교체. 참고로 타이거즈 역사상 최초로 비 호남 출신 주장이다.[75] 조범현 감독 지시로 시즌 도중 주장 교체.[76] 최희섭에게 주장을 시켰으나 엄하게 군기잡는 스타일이라 후배들의 반발이 있어서 시즌 도중 주장이 교체되었다.[77] 타이거즈 역대 주장 중 최초로 이적생 출신 주장이다.[78] 특유의 리더십으로 국가대표에서도 주장을 여러 번 맡았다.[79] 현역으로 타이거즈에서 뛰었던 연도만 기록.[80] 유일하게 해태에서 치뤄준 은퇴식이자, 현재까지 타이거즈 역사상 유일하게 은퇴경기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대타로 출장하여 1타수 무안타.[81] 당시 라이벌이었던 이만수가 김성한의 은퇴를 축하해주기 위해 자신의 경기를 뒤로하고 직접 무등구장까지 찾아왔다.[82] 원래 4월 11일에 진행하려 했으나, 우천으로 하루 미뤄졌다.[83] KIA 인수 이후 처음 열린 은퇴식이다. 경기는 접전 끝에 4 : 4 무승부로 끝났다.[84] 서재응의 7이닝 1실점 호투와 신종길의 4안타에 힘입어 5 : 6으로 승리하며 은퇴식을 빛냈다.[85] 구단 최초 은퇴식과 영구결번식이 동시에 진행. 선동열의 경우에는 주니치 드래곤스로 가자마자 영구결번이 됐다.[86] 은퇴식 날인 LG전에서, 기아 선수들이 전부 이종범 배번인 7번을 입고 뛰었다. 결과는 5 : 6으로 극적인 승리를 따내며 은퇴식을 빛냈다.[87] 구단 최초 합동 은퇴식.[88] 은퇴식에서 기아 K5 앞좌석 창문을 열어놓고, 유동훈이 그 사이로 공을 던지고, 공이 그 사이로 빠져나와 김상훈이 포구를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 날 경기 결과는 4 : 7로 승리하며 은퇴식을 빛냈다.[89] 구단 두번째 합동 은퇴식.[90]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입었던 홈 유니폼을 재현한 2009 챔피언스 저지를 입고 투수는 서재응의 등번호 26번, 타자들은 최희섭의 등번호 23번을 달고 뛰었다. 경기는 7 : 8로 극적인 승리를 따내며 은퇴식을 빛냈다.[91] 더욱이 김응용 감독의 특성 상 선수의 가치가 떨어졌다 싶으면 바로 트레이드를 해서 타 팀으로 보내버리고, 구단에 돈이 없어서 트레이드로 보낸 경우도 많아서 타이거즈에서 은퇴를 한 레전드를 보기 힘든게 이유이다.[92] 전기리그 4위, 후기리그 4위[93]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4위[94]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3위[95]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3위[96]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2위[97]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2위[98]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1위[99] 한화 이글스와 공동 3위.[100] 왜 4위하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냐면 3위인 롯데 자이언츠와 3경기 이상 벌어져 준플이 생략되고 대신 플레이오프가 7전 4선승제로 진행했기 때문이다.[101] 드림리그 4위/4팀[102] 드림리그 4위/4팀[103]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구단에서 공식으로 임명한 응원단장. 원래는 해태제과 직원이었고 부산 구덕구장에서 열린 해태와 롯데의 원년 개막전에서 활동한게 시작이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104] 프로야구 역사 상 최장기간 응원단장을 했다. 13년.[105] 당시 팬들에게는 붐붐 아저씨 내지는 붐붐 단장으로 불렸다. 응원단장으로 있을 당시 원래 생업은 식당 운영. 광주지방법원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했다고 한다. 해태 타이거즈의 최후를 지킨 응원단장으로 2000년대 초 해태 살리기 운동에도 나선 바 있다.[106] 지금이야 약 10년간 롯데 자이언츠 응원단장으로 일하다보니 롯데 이미지가 아예 고정된 사람이지만 기아에서도 혁혁한 공적을 쌓았다. 이종범장성호, 홍세완 등 2000년대 초반부터 기아에서 뛰던 선수들의 응원가는 다 이 사람이 만들었다. 그야말로 응원가 제조 측면에서는 신계에 도달할 수준. 기아 응원단장직을 내려놓고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 롯데 응원단장으로 옮겼다.[107] 현재 기아타이거즈의 응원 체계를 구축한 사람. 조지훈 단장에 비견할 만큼 응원가도 잘 만드는 편. 그 덕에 10년간 한 팀에서 장수 응원단장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다만 응원단장이라는 직업 자체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점도 있었고, 그 외에도 개인적인 집안 사정으로 인해 결국 kt 위즈 응원단장으로 옮겼다.[108] 그렇지만, 완전히 타이거즈와의 연이 끊어진건 아니었던지 2017년 한국시리즈때 후임인 서한국 단장에게 2009년 한국시리즈때 자비로 구매했던 약 100만원짜리 호랑이 가운을 빌려줬다고 한다! 바로 이 옷이다! [109] 2016년 잠실 야구장 폭력 사태의 책임을 물어 결국 2016년 6월14일 응원단장직에서 경질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110] 응원단장 대행 호돌이&치어리더(2016년 6월 5일~27일)[111] 로고의 상하단에는 기아자동차의 특징인 호랑이코 그릴의 모습이 담겨있는 것도 특징이다.[112] MLB, NPB 최다 우승팀인 뉴욕 양키스,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모두 소속 리그에서 가장 많은 영구결번을 가진 팀이기도 하다. 거기에 순혈에 골몰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조차 영구결번에는 순혈을 따지지 않는다.[113] 2001년에 대체 용병으로 해태에 입단했으나 정작 해태에선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고, 다음 시즌 두산으로 이적해서 확 터졌다.[114] 앤서니 르루는 팀 사정상 마무리로 전환했다가 무너졌고(결국 시즌 도중에 퇴출되었다), 헨리 소사는 2012년에 비해 자주 난타를 당하였다.[115] 선발 투수용병이 등판하는 날이면 브렛필은 강제휴식이었다. 경기에 외국인선수는 2명만 출전할 수 있었다.[116] 1985년 삼성라이온즈의 김일융&김시진 이후 처음[117] 2000년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1년에도 재계약을 맺었는데, 발바닥 부상을 당해 퇴출되었다. 그런데 웃기는 건, 계약 내용 중 부상을 당해 퇴출되어도 잔금을 받지 못한다는 노예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118] 소위 믿음의 야구. 나믿가믿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근데 가코는 짐쌌잖아[119] 그러나 강하승은 타어강이라는 역대급 DTD이후 방출되었다.[120] 막상 12시즌이 끝나자마자 박철우 2군 총괄코치는 타격코치로 밀려나고 한화에서 잘린 한대화를 새 2군 총괄로 데려왔다.[121] 당장 기아시절에 혹사에 허덕이며 재활군에 있던 신용운이 삼성에서 다시 정상적으로 선수생활 하는것을 보면 어느정도인지 실감간다. 오죽하면 팬들도 안타깝지만 그래도 기아 나가서 천만다행이란 말을 할정도니.[122] 당장 잠실, 고척과 문학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으며 수원 kt 위즈 파크 역시 장성호 은퇴식 때만 봐도 그 인기를 실감할수 있다. 한 kt 위즈 팬에 따르면 두산 베어스와 더불어 가장 원정팬이 많다고 한다. 두산은 서울 연고 구단이지만 KIA는... 두산 베어스 응원 영상 기아 타이거즈 응원 영상[123] 요즘처럼 상대팀을 응원하는 친구나 가족들이 나란히 앉아 사이좋게 관람하는 문화가 자리잡기 전인 80년대 사직 같은 곳에서도 해태 팬들은 열렬한 응원을 했을 정도.[124] 수도권 중에서도 특히 잠실의 KIA 경기를 보면 홈팀과 원정팀이 뒤바뀐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때문에 일부 KIA 팬들이나 금지어 응원단장잠실 기아 챔피언스 필드라고 부르는 경우까지 있었으나 기아팬들끼리만 모인 상황이 아니라면 이런 표현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125]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시즌 개막전에 시구자로 나섰을 정도이다.[126] 전 경기가 광양과 순천에서만 치러지니 서부권인 목포나 나주 등지만 가도 존재감을 느끼기 힘들다. 최근엔 성적도 그다지 좋지 못하다.[127] 전주고까지 포함하여, 연고지 변경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지만 지역 유망주와 새로운 스타 육성, 이와 병행되는 야구 생태계 선순환에는 당연히 좋을 리가 없다. 지역의 심각한 문제인 유망주의 수도권 유출에 사실상 기름을 붓는 구조. 지역 축구팀이 국내 축구 유망주들이 전주로 축구유학 오도록 유스 시스템을 설계하고 육성사업을 병행하는 모습을 보면 더 명확하다.[128] 리그 핫 경기에서 3만을 돌파하거나 2만 5천대를 찍기도 하며 챔스 결승 정도되면 국가대표 경기 수준인 4만의 만석 수준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토너먼트 국제대회인 챔피언스리그 관중이 리그 관중보다 많으며 징계로 챔스대회가 없던 2017년 관중동원은 리그 우승에도 예년보다 부진했을 정도.[129] 전주의 인구는 완주군까지 더해야 70만을 넘기는 실정이고 챔피언스필드는 시내 중심가에 있지만 전주월드컵경기장은 시의 가장 외곽인 고속도로 진출입로 인근에 위치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준. 비슷한 사례를 꼽아보자면 일본사이타마현이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라는 야구팀이 존재하고 있으나 인기는 축구가 압도적으로 높은 편이다. 우라와 레즈는 일본 최고의 인기 축구구단이다.[130] 정작 기아는 2011 시즌엔 4위에 그쳤고, 2012년부터는 선동열 감독의 암흑기가 시작되어서 더 비참함을 느꼈다.[131] 당시에 라이벌 관계가 상당해서, 전라도에서는 해태제과와 관련된 식료품만 먹고, 롯데껌(이외 기타 식품)을 먹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반대로 롯데의 경우도 마찬가지.[132] 이 해 같이 데뷔한 선수가 바로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이다.[133] 해태 타이거즈 문서 참조. 대표적으로 손혁이 트레이드 이후 입단을 거부하다가 임의탈퇴로 은퇴했다.[134] 사실 기아에 대한 충성심 보다는 그 당시 기아의 얇은 뎁스가 본인에게 기회를 줄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기아행을 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도 그리 애정이 없는것도 아니지만.[135] 대구 출신임에도 "난 전라도 사람이여"라고 말할정도로 팀에 애정이 많았다고 한다. 기아팬들도 감독으로서는 무척 싫어하지만 선수로서는 딱히 싫어하지는 않는다.[136] 2017년 현재 노란색 정당은 정의당이며 지역 기반이라기 보다 계층/이념 기반 정당이다. 반면 호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인 국민의당의 색깔은 초록색, 광주광역시를 포함한 호남 지역에서 압도적으로 지지를 보이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파란색이다. 정치상황 변동에 따라 이제 노란색(정확히 말하자면 빨강과 노랑 조합)은 기아 타이거즈 고유의 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137] 2018년 손영민이 다시 이 등번호를 되찾음으로써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138] 2014년 이후로부터 경기가 없지만 아직 홈 구장 지위를 잃지는 않았다.[139] 군산상고와 전주고는 NC 다이노스의 1차지명 대상 학교로 편입되었다.(어디까지나 1차지명권을 행사할 권리를 얻은 것이지 제2구장 홈 경기와는 상관이 없다. 전주시,군산시 지역은 제외이고 정읍시,고창군은 지역 연고 학교이다.)[140] 김기태도 광주광역시 출신이라 사실상 비연고지 감독은 조범현이 유일하다[141] 전라북도의 경우 경기도 열리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그룹 계열사가 스폰하는 지역 축구팀이 리그를 탈탈 털며 왕조를 구축하다 못해 아시아의 정복자로 등극하고 있는 형편이라, 국내축구와 K리그의 전반적인 사정과 달리 지역내 위상과 축구 열기가 이례적으로 뜨겁다. 그래서 이 지역 지자체장들은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자주 볼 수 있고 지역 지자체의 날이나 홍보행사 역시 전주성에 집중되어 챔피언스 필드에서 볼 수 있는 전북권 정치인들은 정세균 국회의장처럼 전국구 헌법기관장 등으로 축소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단 이러한 현상이 전북 지역에서 타이거즈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다.[142] 현장의 요청 때문에 만든 게 아니라 그룹 고위층의 지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143] 경기를 할 때 안경을 쓰지만 도수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2017시즌 전 팀 우승이 확정된다면 다음 시즌부터 안경을 벗고 던진다고 했으나 2018년 시범경기 첫 등판에서 안경 없이 나와 좋지 못한 기록을 남기면서 안경을 다시 쓰고 던지기로 했다.[144] 한미일 종전 기록은 뉴욕 자이언츠가 1929년 6월 20~23일까지 기록한 6경기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이다. 기간 동안 더블헤더 4경기가 포함돼 나흘 만에 이러한 기록이 탄생하게 되었다.[145] 타팀 팬들이 한미일 사상최초 혹은 메이저리그를 넘어섰다는 등의 수식어 때문에 리그 간의 수준차를 논하면서 이 기록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대로면 2003년 이승엽이 기록한 아시아 홈런 신기록도 종전 기록이 NPB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것 역시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종전 기록은 1929년에 뉴욕 자이언츠가 기록한 6경기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이다. 이 기록이 탄생한 해가 최근이라면 수준차를 논할 수 있었겠지만 1929년 탄생한 기록이기 때문에 수준차를 애초에 논하기 힘들다.[146] 잠실이나 인천(숭의야구장 시절) 원정때도 종종 따라 오셨다.[147] 부산 출신임에도 본인의 히트곡 남행열차가 해태 타이거즈 시절부터 국민 응원가로 등극하자 자신도 그 덕에 타이거즈 팬이 되었다고 한다. 그 덕으로 시구 행사에 초청되기도 했다.[148]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최원준의 유니폼을 입고 인증샷. 글 문구에는 가자 V12를 적은 것으로 보아 기아 팬 확정.[149] 과거 해태 타이거즈 어린이 회원이었다고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 인증한 적이 있다. 김유식 문서 참고.[150] 해당 문서의 인물 맞다.[151] 개인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서, KIA 타이거즈의 모자를 쓰고 먹방을 진행하기도 한다. 현재 유튜브 블랙리스트 소속이다.[152] 사회인 야구도 할 만큼 야구를 좋아한다고 전해진다.[153] 쌍둥이가 2명 다 KIA의 팬이다. 목동 야구장에서 KIA 시절 진해수의 유니폼을 들고 사진을 찍은 적도 있다.[154] 전라남도 담양군 출신이다. 문희는 가수를 하기전 직관도 다니던 KIA 팬이었다고....[155] 그 유명한 랜디신혜 시구를 2006년 프로야구 준PO 2차전 한화 이글스KIA 타이거즈 광주 홈경기 시구에서 보여줬다.[156] 타이거즈의 연고지나 변희재의 고향이나 현재 성향으로 볼 때는 믿기지는 않지만... 다만 과거 80~90년대 해태는 잘 이기고 우승 많이해서 생긴 팬덤까지 더해져 전국구 인기를 자랑하긴 했다. KIA 타이거즈로 바뀐 뒤에도 타이거즈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157] 수원 한국전력 빅스톰 소속의 배구선수[158] 수업 내용에 따르면 KIA 타이거즈가 잠실로 원정을 올 때 보러 간다고 한다.[159] 실제로 타이거즈에서 뛴지 벌써 5년이 넘었는데도 자기집 대문에 타이거즈 마크를 떡하니 붙여놨다. 타이거즈에 도미니칸이 갈 때마다 어드바이싱을 해주며 도미니카 용병을 보러 스카우터가 오면 자가용으로 공항까지 간다고.[160] 프로야구 1억번째 관중사건의 주인공. 당시에는 야구에 대해 잘 몰랐지만 후일 야구에 눈을 떠 기아팬이 되었다고 한다.[161] 페미니즘 관련 기사로 유명하지만, 과거 야구 칼럼을 썼던 적도 있다. 본인의 트위터에서도 KIA 얘기를 자주 꺼낸다.[162]KBS N Sports의 아나운서가 맞다. 과거 선동열의 팬이었으며 '타이거즈 키즈'라고 스스로 밝혔다. 그리고 2017년 8월 16일 NC 다이노스와의 홈 경기에서 시구를 했다. 기사 참조[163] 강심장에 당시 KIA 타이거즈 소속이었던 이용규가 출연했었을 때 KIA에 꼭 남아달라고 부탁하면서 기아 팬임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164] 전라북도 순창 출신이다. 2016 KBO 와일드카드 결정전 2차전에 잠실야구장에 출연했다. 다음 해 7월 23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에서는 시구까지 했다. 이때 정용운의 특유의 루틴을 따라하며 타이거즈 골수팬임을 인증하였다.[165] 해태 타이거즈 시절부터 팬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KIA 팬이 됐다고 한다. 얼마나 타이거즈 덕후냐면 최군과의 아프리카 방송에서 응원가는 기본이요 치어리더와 서한국 응원단장 이름까지 알 정도이며 김동재 코치 돕기 일일호프에서도 선수들과 인증샷 까지 남길 정도로 타이거즈의 덕후를 인증했다.[166]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시구한 적이 있다.[167] 최단신과 화순초-화순중 1년 선후배 사이라고 한다. 게다가 어렸을 때 둘이 같이 배드민턴을 치고 놀았다고 한다.[168] 전주 KCC 이지스 소속의 농구선수. 나지완과 친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농구장과 야구장을 번갈아 직관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169] 전라남도 목포시 출신이다. 2017년 8월 19일 SK 와이번스와의 홈 경기에서 시구를 했다. 기사 내용 참조. 홈에서 시구하는 것이 소원이라 했다.[170] 대치동 수학 일타강사가 맞다[171] 제20대 전반기 국회의장[172] 2017년 한국시리즈 2차전 시구자로 나왔고 해태 타이거즈 시절부터 조계현 단장의 열혈한 팬이라고 한다.[173] 충청도에서 태어났지만 전남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KIA 팬이 됐다.[174] 배우자 이보영과 같은 KIA 타이거즈 팬이다. 그런데 2017년 두산 베어스의 시구자로 초청되어 시구를 한 적이 있다.[175]kt 위즈 선수이자 현 상무 피닉스 야구단 코치 박용근의 아내. 인스타그램에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최종전을 시청하는 모습을 올리고 기아가 우승한 것에 감격을 표했다.[176] KIA 타이거즈의 팬으로 유명하다. KBS N Sports에서 방영했던 "불야성"이란 프로그램에서 KIA 타이거즈 팬 대표로 출연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