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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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박정희 개인의 상황4. 과정 및 주요 인물5. 결과 및 반응6. 평가7. 여담8.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五一六軍事政變
대한민국 32년 군사정권의 시작

1961년 5월 16일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결국 제2공화국은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졌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32년 군사정권이 시작되었다.

당시 국군에는 이승만 정권 때부터 승진가도가 막힘에 불만을 품고 4.19 혁명 이후 정군 운동을 벌여 미국과 충돌했던 일군의 장교 세력들이 있었다. 육군소장 박정희[1]와 1961년 2월 강제 예편당한 김종필[2]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3]을 중심으로 한 장교들은 이로인해 1961년 5월 말 강제 예편이 예정되었고, 이에 비밀리에 쿠데타를 기획하게 된다.

쿠데타 세력들은 예비사단 병력과 포병단, 해병대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하여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을 비롯 대구시, 부산시 등의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하였다. 이들은 주한미군주한미국대사관의 공식적인 반대 성명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민을 비롯한 국민을 인질로 삼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과 통수권자 대통령 윤보선을 회유함으로써 국무총리 장면을 사퇴시키고 봉기 60여시간 끝에 제2공화국을 무너뜨려 행정부, 국회, 대법원의 역할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전권을 군사혁명위원회로 가져온다.

이튿날 아침 박정희군사혁명위원회를 장도영을 의장으로 하고 자신을 부의장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였으며, 1962년 12월 31일까지 전국의 모든 정치인 활동을 일체 불법화하고 언론 사전 검열을 실시함은 물론 정기 간행물 1,200여 종을 모두 폐간시킨 뒤 2년 반 가량 대의민주주의를 벗어난 군부 독재(군정)를 실시했다.

예전에는 이 사건이 군사혁명(문민정부 이전 군부 보수계 세력), 군사반란(민주화 및 진보계 세력), 군사정변을 비롯한 여러 이름으로 통했다. 5.16 주체세력이 정권을 잡고서부터 6월 민주항쟁 이전까지는 독재정권이 5.16 군사혁명으로 포장했지만, 민주화 후로는 5.16. 군사정변이 공식 표현으로 자리잡았다.[4]

2. 배경[편집]

1960년4.19 혁명으로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외교부 장관이던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상황에서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해야 했지만 부통령 장면은 하야를 촉구하기 위해 4월 20일 사퇴했다.[5] 그 다음 승계순위는 외교부 장관[6]이 1위였기 때문에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것이다.

허정 내각은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개혁 정책을 펼치고자 했으나 1948년부터 1960년까지의 10년이 넘는 이승만 독재 정치가 한국 사회에 남긴 해악은 너무나 지대했고, 사방팔방에서 터져나오는 국민들의 요구에 모두 응하지 못했다.

이후 다시 치러진 총선 결과에 따라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와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를 중심으로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여전히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설상가상으로 집권여당민주당의 신, 구파간 갈등이 더 심해졌다. 10여 년 동안 억눌려 온 요구들을 쏟아내는 데모도 연일 끊이지 않았다. 이때 오죽하면 데모를 하지 말자는 데모도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발언 등을 종합해보면 어느 정도의 혼란은 지속되고 있었음은 사실로 보인다. 일단 3.15 부정선거 - 4.19 혁명 - 이승만 대통령 하야 - 개헌 - 총선거 - 장면정권 수립이라는 엄청난 일들이 1960년 한 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벌어졌으며, 독재 정권이 무너졌는데 세상이 조용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군부가 의도적으로 혼란을 조장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급하게 이루어진 혁명으로 인해 "내가 주인인 나라에서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도둑질이나 폭행 시비가 빈번했다고 한다.

한편 당시 육군 장교들의 사정을 보자면, 6.25 전쟁 이후 조직이 비대해지고 그 결과 인사적체가 발생하면서 승진이 막혀버린 육사 8기생 등 중견 장교들의 불만이 극심했다. 즉, 그 앞 기수들까지는 육군의 비대화 과정에서 대령 이상으로 빠르게 진급했으나, 8기부터 확장에 제동이 걸리며 진급이 적체되어 대령을 못 단 중령들이 대량으로 발생했다. 가령,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장도영은 20대에 사단장, 30대에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불과 3살 연하의 김종필은 만년 중령 신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만을 기다릴 수 없었던 장면 정부는 이후 군사정권이 거의 그대로 베껴서 실행하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재원의 일부를 국군을 감축하여 조달하려 했다. 당연히 장교들 입장에서는 정부의 정책에 더 극심하게 반발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퇴역한 군인에게 직장 자리 봐주거나 우대하던 시절도 아니었으니까.

이 시기의 군인들은 질적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시스템에서 커리어를 쌓았지만 대접 자체는 매우 박해서 군인 월급으로 일가족이 건사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부정부패, 물자 횡령과 뇌물이 오가는 암담한 상황이었고 뜻있는 청년 장교들이라면 불만과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거기다 6.25 전쟁을 거치며 미군식 행정 시스템에 속해 있던 당시 군인들은 훨씬 뒤떨어진 일제강점기 행정 업무 능력을 가진 당대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의 삽질에 불만도 많은 편이었다. 4.19 혁명으로 인해 계엄령이 선포되자 대민/대관 업무에 파견된 장교들은 공무원들의 일처리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1953년 기준 대한민국 전체의 미국 민간 유학생이 7백명이 좀 못되는데, 미국으로 유학간 장교들은 1천에 육박한다.

3. 박정희 개인의 상황[편집]

박정희여순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백선엽이나 원용덕과 같은 육군 원로들의 옹호와 남로당 간부들에 대한 정보 제공으로 사형은 면하고 예편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후 민간인 신분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문관으로 재직했다. 1950년 6월 23일경 박정희는 북쪽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뭔가 이상하다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묵살되었고 그 결과가...[7]

이 시기 박정희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숙군 연류자로 군부에서 언제 짤려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이화여대생이었던 내연녀 이현란과의 문제로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결혼 생활도 파탄이 났다. 당시 박정희 주변 인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매일 마다 술이나 퍼마시고 인사불성이 되기 일쑤였고, 월급은 술집 외상값 갚기도 바빴다고 한다. 다시 말해 완전 폐인 상태. 이대로 놔뒀으면 낙향해서 농부학교 교사로 살았을 수도 있다.

6.25 전쟁 때 박정희는 포병 소령 계급을 달고 군인으로 복직되었다. 그 후 군생활을 이어가면서 준장, 소장으로 차례로 진급하였다. 진급 자체는 그다지 순조롭지 않아 미국 측은 박정희남로당 전력을 문제 삼았고 준장, 소장 승급 때마다 태클이 들어왔으나 5.16 군사정변의 근대화 계획을 예상한 백선엽 장군 등의 적극적인 변호로 무사히 승급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6군단 부군단장, 군수기지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의 요직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정변 당시에는 제2야전군사령부(현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런데 사실 군에서의 부사령관은 갈참퇴역 예정자라는 의미가 크다.

군 생활 동안 박정희는 정권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었다. 그것은 박정희의 기질 때문이었다.

첫째,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 전력이 있었다. 둘째,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당시 이승만이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 4개 소대 병력을 육본에 요청했는데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은 대통령 면전에서 병력파병을 거부한다. 이때 육군본부 제2작전참모부장이였던 포병대령 박정희는 "육군장병들에게 고함"이라는 훈령(217호)을 기초하여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고 현재 자신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때에는 9년 뒤의 상황과는 달리 박정희는 계급도 대령으로 많은 상관과 선배들을 제치고 무슨 일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고 그 시대 많은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승만 정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터지자, 박정희는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을 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 포항에 주둔한 대한민국 해병대 제1상륙사단해병소장 김동하 장군과 공모하여 쿠데타 계획을 꾸몄지만 4.19 혁명이 터지면서 이 역시 종이 위의 구상에 그쳤다.

하지만 박정희는 1960년 5월 2일,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장군을 위시로 한 수뇌부에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김종필 중령을 필두로 한 육사 8기생 중령들의 연판장이 돌아 수뇌부 불신을 천명하자 박정희에게 이를 갈면서 그를 박살내려던 송요찬은 실각했고 군 수뇌부는 붕괴했다.

어쨌든 그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인 반항적기질은 육본으로 하여금 그를 경계하게 했고 박정희가 정변 등등의 소리를 하고 다니자 아예 그를 좌천 또는 예편시킬 구체적인 입안을 하게 된다. 특히 과거 좌익에 가담했던 경력까지 문제 삼아, 결국 육본 작전참모부장에서 2군부사령관으로 좌천당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박정희가 5.16 정변을 결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박정희는대외적으로는 4.19 혁명 이후의 사회불안 때문에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부득이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해명했다. 부패한 정권으로 인한 민초들의 고통은 이승만 정권 이후 장면 내각에서도 지속되었으며, 특히 50년대에는 군부대 특히 육군 부대의 보급물자 유출이 심해 겨울만 되면 동사자가 속출했다. 박정희가 맡은 사단은 동사자가 '적어' 상부의 표창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동사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적어서다.

박정희는 실제론 청년시절부터 나름 야망은 있었던 듯 하다. 제자나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교사 시절 문경의 하숙집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초상화를 떡 붙여놓고 숭배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8] 그도 그럴 것이 나폴레옹은 키도 작고 같은 육군 포병장교인 점 등 자신과 닮은 부분이 많은(?) 식민지 코르시카의 몰락 토착귀족 출신임에도 프랑스 본국 황제가 되었다.

박정희는 만주로 가서 만주국 육군에 입대했다. 당시 만주에서도 민족차별은 있었지만, 동양의 서부라 불릴 정도로 혼란한 곳이라 나름대로 기회를 잡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인이 된 후에도 나폴레옹이나 터키케말 파샤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했다고한다.[9]

박정희는 또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갔을 때 일본 황도파의 영향을 많이 받은듯 하다. 소령으로 복직된 후 2.26 사건을 거론하며 가까운 장교들에게 "우리도 이런 식의 군사혁명을 해 보자"는 식의 이야기를 종종 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친구인 소설가 이병주에게 "우리도 2.26 사건의 우국 장교들처럼 한번 일어나야 하지 않겠냐"라는 이야기를 대놓고 했다고 한다. 애당초 어린 시절부터 일본/역사를 읽으면서 메이지 유신처럼 군인이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4. 과정 및 주요 인물[편집]

5. 결과 및 반응[편집]

6. 평가[편집]

7. 여담[편집]

  • 수도권 북쪽의 경기도 김포 최전방을 경계, 방어하는 임무를 지닌 해병대 제1여단[10] 병력 1,500명을 쿠데타를 위해 서울로 빼돌리고 전방쪽을 비워둔 건, 북한의 남침을 야기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이렇게 전방 부대를 빼돌려 쿠데타에 동원하는 행위는 이후 12.12 군사반란제9보병사단 29연대에 의해 다시 되풀이 된다.

  • 박정희가 한강다리를 건널 때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박정희에게 이것저것 보고를 하러 간 전속부관의 말에 따르면 이미 그의 몸에서 술냄새가 상당히 풍겼다고 한다.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제3공화국 5.16 정변 관련 에피소드를 보면, 박정희 외 1명이 쿠테타가 실패했다고 스스로 자포자기하여 대포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고, 정변 지휘부들은 박정희가 안 보인다며 당황하다가 술에 취한 듯한 박정희를 부하들이 찾아서 데려오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5.16 정변 당일 정명환을 필두로 한 진압군을 박정희가 직접 말빨로 귀순시켰다는 것을 감안하면, 술을 한 두잔 했을 수는 있어도 몇몇 증언처럼 정말 자포자기 상태로 술에 만취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11] 단순히 한두잔 정도는 아니고 술 냄새가 풍길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셨더라도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닌 게, 박정희는 술이 상당히 셌다. 훗날 박정희는 태국푸미폰 아둔야뎃 국왕과 만난 자리에서 육영수 여사와 태국 외무장관이 기겁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셔서 좌중의 불안한 시선을 받았지만,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연설까지 마친 일화가 있다.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명백히 박정희가 쿠데타 당시 술에 취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 훗날 박정희의 심복이자,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는 5.16 정변에 가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5.16 정변 직후 반혁명 분자로 몰렸으나 박정희의 보증으로 풀려났다. 김재규는 군대의 정치 중립을 매우 강조한 이종찬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고 그 영향을 받아서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MBC 드라마 왕초에서는 마지막회에 아베 등 악역들이 일제히 몰락하는 사건으로 비춰진다. 정변이 구악을 척결하는 모습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그려졌다. 김춘삼과 아는 사이였던 어리버리한 중대장은 혁명재판부의 검찰로 출세했다고 좋아라 한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케이블에서 재방을 할 때는 서울 시내에 진입한 계엄군이 친일반민족행위자 경찰들과 이정재 등을 잡아가는 장면을 삭제해서 방영했다. 민주화 투쟁을 하신 높으신 양반들이 보시기에도 거시기 했을 듯

  • 이 사건 발생 3일 전인 1961년 5월 13일재보궐선거가 열렸는데 이때 당선된 의원들은 취임한지 12시간만에 국회가 해산되어 의원자격이 박탈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그중엔 4번의 좌절[12] 끝에 강원도 인제군에서 당선된 이도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김대중이었다. 참 질긴 악연(...).

  • 51년 6개월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에 출마했는데 51.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마 박근혜에게 516이란 숫자는 다른 숫자들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 대표적 보수 논객인 전원책 변호사도 썰전에서 5.16은 쿠데타라고 명확하게 말했다. 심지어 자기 군 복무 시절에 터진 12.12 군사반란 당시엔 '군인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논문을 쓰며 군인 신분임에도 12.12는 쿠데타라고 대놓고 말했다가 치도곤을 치룰 뻔 하기도 했다고. 사실 보수인사 중에서도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세력들은 5.16을 쿠데타라고 비교적 쉽사리 인정하는 반면, 권위주의 보수 계열에선 쿠데타나 군사정변이란 표현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후술된 김현웅 법무부 장관 말처럼 교과서엔 얄짤없이 군사정변이라고 기술되어있다.

  •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의 정치깡패들과 그들의 조력자였던 곽영주 등의 친 자유당 경찰 세력은 복역 중 5.16 정변 소식을 듣고, "아싸! 민주정권이 물러났으니 이제는 다시 우리 세상이다!" 하며 좋아서 쾌재를 부르며 날뛰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그들은 불과 4일 후에 자신들이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서울 시내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래는 육군 공수특전단 대원들에게 끌려다니며 공개적으로 조리돌림을 당하는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를 포함한 동대문파의 화랑동지회. 결국, 갑종장교 출신에 대학 나온 인재라고 살려준 유지광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된다. 깡패도 학벌이 좋아야 살아남는 더러운 세상 자세한 내용은 3.15 부정선거4.19 혁명, 그리고 혁명재판 항목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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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래, 5.16을 미화하려는 측에서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서 구국의 결단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링크. 과정은 쿠데타이지만, 결과를 놓고본다면 혁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라는게 그들의 입장. 하지만 당해 용어의 사용이 일종의 화 되면서 구국의 결단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확대되어 굳이 5.16이 아니더라도 특정 정치적 이슈에 대한 정치인의 판단이 엇갈리는 결정을 구국의 결단으로 표현하는 용례가 늘어나고 있다. 링크.

8. 관련 항목[편집]

[1] 여순사건 직후 남조선로동당 비밀당원 신분이 들통나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전력에 이어 정군 운동의 배후로 지목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예편 압력을 받아왔다. 장도영이 도움을 주어 당장의 예편은 면하고 한직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었으나, 1961년 1월 육군본부 개인보안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결국 1961년 5월 말에 강제 예편조치될 예정이었다.[2] 2인자 김종필 또한 정군 운동으로 1961년 2월 예편당했다.[3] 대부분은 영관급 장교였다. 정부 수립 초기였기에 1기생은 절반 가량이 입대 5년만에 별을 달았다. 그러나 그보다 4년 늦게 시작한 8기생들은 12년이 지나도록 준장조차 배출하지 못했고, 선배들이 아직 은퇴하지 않았기에 대령 승진자도 10%가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4] 참고로 정변은 한자로 쿠데타를 뜻한다. 갑신정변을 생각해보자. 또한 여기에서 보듯 정변에는, 비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였다는 뜻이 들어간다. 그래서 다른 이름이 5.16 군사반란이다.[5] 부정선거에 따른 부통령 당선자였던 이기붕은 아들의 총격에 가족과 함께 사망했으나 취임식이 8월 15일이었으니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애초에 선거가 개헌으로 무효화 되기도 했고.[6] 지금은 부총리 급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장관들 가운데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다. 정부조직법이 매 정권마다 바뀌기 때문. 그래도 뭐 과기부 장관 다음은 외교부장관이니 높은 건 사실이다. 앞에 경제부총리와 사회부총리(교육부장관 겸직)이 있는 건 함정.[7] 김종필도 발발 당시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8] “어느 일요일 동무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주셨다.”(이낙선 비망록, 1962)[9] 다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참 군인' 이순신을 많이 존경하고 강조했다. 대통령이 된 후 우국지사가 아닌 케말 파샤와 같은 급진주의자들을 존경한다고 하면 난처해지잖아(...) 실제로 당시 CIA한국지국장이었고 훗날 주한미국대사를 역임하는 도널드 그레그가 박정희에게 ‘각하께서 터키의 케말파샤와 비교된다는 걸 아십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 박정희는 케말 파샤를 잘 모른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10] 현재는 해병대 제2사단[11] 특히 박정희가 만취했다고 회고한 박치옥 같은 경우는 초기에 정변에 가담했다가 나중에 반혁명 혐의로 숙청된 인물이라서 박정희를 부정적으로 묘사할 수 밖에 없다.[12] 3번 낙선했고, 한번은 방해공작으로 등록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