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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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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사진이 촬영된 지점은 현재의 서울광장 인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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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이승만 동상


"민주주의의 나무는 국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


- 『사상계1960년 5월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 대한민국 헌법 전문

4.19 혁명
四一九 革命
April Revolution[2]

날짜

1960년 3월 15일 ~ 4월 26일

지역

대한민국 전역

원인

3.15 부정선거
김주열 열사의 사망

목적

이승만의 하야

결과

이승만의 하야, 하와이로 도주
대한민국 제2공화국 출범

시위 당사자

대한민국 국민
민주당
자유당 정권
대한민국 경찰청

주요 인물

장면
윤보선
이승만
이기붕

참여 인원

10만명 이상

사상자

사망 186명[3]
부상 1,500여 명



1. 개요2. 배경: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2.1. 언론의 영향력2.2. 의외로 높은 교육수준2.3. 도시화와 매스 미디어의 보급2.4. 청년실업 문제2.5. 소결
3. 혁명의 시작
3.1. 조기 선거 실시3.2.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3.3. 3월 15일, 제1차 마산 의거
4. 혁명의 전개
4.1. 4월 11일, 제2차 마산의거4.2.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
5. 4.19 혁명
5.1. 4월 19일, 피의 화요일5.2. 학생들
5.2.1. 동국대학교5.2.2. 서울대학교5.2.3. 중앙대학교
5.3. 계엄령과 계엄군의 태도
6. 자유당 몰락의 전주곡
6.1. 등을 돌리는 우방들6.2. 4월 25일, 교수들이 나서다6.3. 어린이들이 시위에 나서다6.4. 시위대와 계엄군이 하나 되다
7. 이승만의 하야
7.1.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7.2. 이 대통령의 최후의 몸부림7.3. 제2공화국의 출범
8. 그날 이후
8.1. 한계와 의의8.2. 4.19 세대8.3. 기타8.4. 관련 창작물

1. 개요[편집]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4.19 혁명 58주년

5.18 민주화운동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시초

1960년 4월, 한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끝낸 민주주의 시민 혁명이다. 이승만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일어난 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공화국에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이다.[4]

2. 배경: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편집]

이 하위 문단의 서술은 『한국민주화운동사』 1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좀 더 학술적이고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해당 서적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한국전쟁이 휴전 협정으로 일시적으로 총성이 멎은 지 불과 7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1960년에는 이미 국민들 사이에 민주주의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요구는 적어도 5년 전부터 이미 있어 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1950년대와 같이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시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반독재 민주시위가 가능했다는 것이 의아할 수 있다. 이에는 다음과 같은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2.1. 언론의 영향력[편집]

1950년대 당시 언론인들은 최대의 지식인 계층에 속했다. 친정부적 성격을 띤 <서울신문>을 제외하고( 실제로 4.19 혁명 당시 서울신문사는 상당히 큰 재산 손실을 입었다. 민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논조는 이승만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몹시 강했다. 각 언론사들의 주필들은 다양한 논설, 사설, 칼럼을 통해 민주적 가치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초기의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탄압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의 언론 탄압 이력은 적어도 1955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어째 리스트가 좀 많긴 하지만 4.19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1955년 동아일보 "괴뢰" 표기 오식사건

    • 편집상의 실수로 대통령을 암시하는 단어인 "고위층" 앞에 북한을 암시하는 "괴뢰" 단어를 붙여버렸다. 200여 부가 인쇄된 후 부랴부랴 회수 및 폐기 처분했지만 이것만으로도 평소 눈엣가시던 동아일보 하나쯤 보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발행인 및 편집인을 불구속 입건했다.

  • 1955년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참고로 이 신문사는 같은 해 5월 20일에 견통령 오식사건'' 을 일으켜 이미 높으신 분들의 응징을 받은 적이 있다.

    • '백주대낮의 폭력은 테러가 아니다.' 황당하지만 실제로 당시 경찰 당국의 발언이다. [정치깡패]들은 소재불명으로 처리되고 정작 폭력 행위를 경찰에 신고한 주필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됬다.

  • 1957년 (류근일) 필화사건

  • 1957년 동아일보 "고바우 영감" 경무대 똥통 사건 필화사건

  • 1958년 [함석헌] 필화사건

  • 1958년 2.4. 국가보안법 파동

    • 국가보안법의 3차 개정 과정에서 17조 5항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독소조항임이 발견, 이에 반발하는 야당 의원들을 무술 유단자들을 동원하여 한데 구겨넣어버리고 여당 의원들은 자기들끼리만 점심시간에 슬쩍 모여서 통과시켰다.

  • 1959년 [경향신문] 폐간사건

    • 이 사건은 미군정법령 88호 및 주한 미국 대사인 월터 다울링이 반대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한편 경향신문사는 행정처분의 가처분 신청이 수용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일이 이렇게 되자 폐간을 철회하고 그 대신 무기발행정지 처분으로 응수했다.


당시의 시대상이 이와 같았고 이미 언론에 대한 탄압과 정치깡패를 동원한 테러행위, 날조 및 공작행위는 곪을 대로 곪아서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중이었다. 그리고 이들 언론을 구독하는 국민들은 점차로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있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2.2. 의외로 높은 교육수준[편집]

물론 오늘날에 비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교육열은 사실상 "붐" 에 가까운 것이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국가 총예산의 평균 10.5%는 교육 관련 지출이었다. 그 외에도 국민학교(초등학교) 의무교육제가 채택되었으며 또한 빈민층일수록 학구열은 더욱 높았다. 그 이유는 교육을 통해 그 누구라도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

1945년에서 1960년까지 학생 수는 3배로 증가했고, 문맹퇴치 5개년 사업을 통해 비문해율은 1945년 78%에서 1958년 4.1%까지 떨어지게 된다.[5] 그와 함께 초등~중등 교육과정 중에는 민주주의의 정신과 이상에 대한 교육이 반복적이고도 일관성 있게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승만 정부의 원래 의도는 전혀 다른 것이긴 했다. 한국이 전제왕정 체제-식민통치 체제에서 갓 민주 공화정 체제로 접어든 상황이니만큼 당연히 이것에 대한 선전이 필요했다. 게다가 국제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 정확히는 스탈린주의가 좁게는 북한, 넓게는 소련에 이르러 세계를 양분해 첨예한 대립각을 형성하던 시대이다보니 반공의 도구로나마 민주주의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즉 반공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교육 정책이 오히려 민주주의 자체의 교육과 홍보로 연결된 것이다.

게다가 대학교에 진학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매우 강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대학생들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오늘날에 비하면 결코 많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1945년 대학생 수는 7,819명[6]이었는데 1960년에는 97,819명으로 대학생만 무려 9만 명이 늘었다. 통계청 기록에 의하면 대학 재학생 수는 69,961명. 이는 한국과 국민소득이 비슷한 다른 제3세계 국가에 비해 엄청나게 높은 비율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대학생의 수가 늘어난 것 또한 다름아닌 이승만의 교육정책 때문이었다. 당시 1공의 최우선 목표 중 하나가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제도를 개선하며 학생 엘리트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원조금으로 미국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학비를 대줬는데, 이에 대해 미국은 '한국은 우리가 밥 사 먹으라고 준 돈으로 뭐하냐'고 혀를 차기도 했다. 참고로 웃기게도 훗날 이승만의 지지자들은 이 예를 들면서 이승만은 독재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2.3. 도시화와 매스 미디어의 보급[편집]

6.25 전쟁 이후 수많은 탈북민들이 남한에 정착하고 인구 구조가 새롭게 재편되면서 열 개 남짓의 도시들이 수 배의 급격한 인구 성장을 보였다. 총인구 대 도시인구 비율은 1949년에 17.2%였는데 1960년에는 28%로 늘었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교육받고 계몽되고 깨어있는 국민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집중되면서 일종의 상승 효과가 나타났기 때문. 이들은 밤을 새워가며 시국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개탄하였다.

당시의 교육 수준과 관련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955년 전국 대학교 중 85개 대학교의 소재는 도시 내에 있거나 적어도 근교에 위치해 있었으며 특히 서울 소재 대학교만 29개에 달했다. 이러다 보니 1960년 기준으로 전국에 있는 대학생들 두 명 중 한 명은 서울에서 사는 대학생이었다.

게다가 앞서도 말했듯이 당시 언론사들은 매우 활발하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정작 이를 읽을 만한 식자층이 없었더라면 언론인들의 목소리는 곧 잊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1961년 <한국신문연감> 통계자료에 의하면 전국의 일간지 보급률은 100명당 2.96부에 그쳤으나 서울의 일간지 보급률은 100명당 무려 25.5부에 달했다! 참고로 당시 유네스코에서 정한 근대화 기준 보급률이 100명당 10부였다.

2.4. 청년실업 문제[편집]

문제는 이렇게 대학교를 졸업한 훌륭한 인재들이 일할 만한 일자리가 없었다는 것. 물론 당시 한국의 경제는 대단히 낙후해서 실업률 자체가 높은 건 어쩔 수 없었으나, 고등 교육을 받은 대학생조차 일하기 힘들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서 "대학교는 예비 실업자 양성소인가" 라는 자조적인 조롱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실업률은 2명에 1명 꼴인 50%에 달했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을 수가 없었던 분위기였다. 거기다 그 무렵 들어 미국도 점차 경제 원조를 삭감하고 있던 추세였다. 그래서 사회 전반, 전 세대에서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조금씩 철회하고 있던 중이었다.

다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이 당시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이미 사회에서 '배운 사람' 축에 속했고, 이런 '배운 사람'은 (유교적 전통에 입각해서) 사회문제에 적극 뛰어들고 비판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유교적 전통에서는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사회를 이끌어야 하는 책임 역시 크다. 이 시대의 실업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들은 '배운 사람'으로서 사회에 뛰어들지 않거나 제대로 된 사람 구실을 못할 때 주어지는 비판으로, 오늘날의 청년실업 문제와는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비판의 형태가 본질적으로 다르던 시대임을 염두에 둬야 한다. 실업 문제를 이 자리에서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2000년대적 사고방식으로, 이런 '대학생이라면'이라는 태도는 20세기를 통틀어 대학가에 오랫동안 있어왔다. 게다가 2000년대 이후와 1950년대의 대학생의 위상 자체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2.5. 소결[편집]

종합해보면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 고취는 거의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부터 아득바득 학교에 갔더니 민주주의라는 것을 지겹도록 가르친다.[7] 게다가 인구의 적지 않은 수가 의외로 가방끈이 길다. 언론 활동도 활발한 데다 장기간의 검열과 탄압으로 악에 받쳐 있는 언론인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민주주의 의식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쓴 사설과 기사들을 독자들이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다. 주위에는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전국 팔도 각 도시마다 집중되어있으니 조직적 시위를 도모하기도 쉽다. 게다가 이런 인재들이 일을 하지 못하고 놀고 있으니 "하아. 이것 참 나라꼴이 수상하다!"라는 여론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4.19 혁명은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촉발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결국 이승만 정권 스스로 만든 셈이니 아이러니.

3. 혁명의 시작[편집]

3.1. 조기 선거 실시[편집]

1959년 6월 29일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는 뜻밖에도 정부통령 후보지명대회가 되었다. 진행 도중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유시'가 있자, 돌연히 정회한 뒤 전당대회를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로 바꾸었다. 통상 5월에 선거가 치러지므로, 무려 10개월 또는 11개월 전에 후보를 지명한 것이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선거 실시 두 달 전에, 1952년에는 발췌개헌이 늦어서 17일 전에 후보를 정했었다. 또 다른 나라의 예를 보거나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예를 보더라도 이 같은 후보 지명은 너무나 조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승만이 조기에 후보를 정하도록 한 것은 장관이나 자유당이 일찍부터 선거운동에 돌입하여 총력전을 펴라는 지시와 다름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최인규는 그해 11월부터 거의 매일 같이 경찰 간부와 군수, 시장, 구청장 등 공무원들을 안배해 불러서 만반의 대책을 세우도록 독려했다.

7월 31일,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 조봉암진보당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상고심을 맡았던 대법원의 그 재판부에서 7월 30일 재심을 기각하여 변호인들이 다시 재심을 청구하려 했는데, 그 다음날 바로 처형된 것이었다.[8]

이로써 이승만과 대통령 당선을 두고 경쟁할 사람은 이승만에 맞서 싸울 투지가 별로 없었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밖에 남지 않았다.[9] 자유당 전당대회에서의 후보지명보다 더 놀라운 사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이승만은 12월 11일 '반드시 농번기를 피해 조기선거를 해야 한다'고 피력한 이후 계속 그 주장을 했고, 다음 해 1월 27일에는 '농번기 전의 선거가 자신의 수 년 동안 지론'이라고 못 박듯이 말했다. 당시는 하지(양력 6월 21, 22일 경) 무렵에 모내기를 많이 했으므로 5월 초는 농번기가 아니었다.

발췌개헌으로 변칙적으로 치러진 1952년의 정부통령선거를 제외하면, 1948년 5.10 선거, 1950년 5.30 선거, 1954년 5.20 선거, 1956년 5.15 선거, 1958년 5.2 선거 등 정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가 모두 5월에 치러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5.2 선거 때까지 이승만은 '농번기 때문에 안 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연히 농번기를 피해 조기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조기선거 실시에 대한 이승만의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된다. 하나는 조병옥의 건강에 관련된 문제였다. 조병옥이 중병을 앓고 있음은 1960년 1월 중순에 보도되었다.# 조병옥은 1월 29일 '조기선거는 등 뒤에다가 총을 쏘는 격'이라고 반대하면서 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야당과 언론은 하소연도 하고 비열한 짓이라고 비난도 퍼부었지만, 그러한 반대에도 아랑곳 없이 정부는 2월 3일에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를 실시한다고 공표했다. 조병옥은 이후 2월 15일 미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언론과 야당에서 조기선거를 반대한 이유는 또 있었다. 대통령 취임이 8월 15일이어서, 만일 3월 15일에 야당 후보가 당선된다면 그간의 이승만 정권 행태로 미루어 볼 때 5개월 동안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있겠냐는 것이었다.

정부통령후보 등록 마감일인 2월 13일, 이승만은 국민을 상대로 무서운 발언을 했다. "1956년 선거에서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다른 선거보다도 1960년에 치러질 정부통령선거에 더욱 큰 관심을 보이고 총기획자로서 역할을 한 것은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 때문이었다. 8.5 정부통령선거가 치러진 1952년의 전시체제 상황도 아니고 1954년 5.20 총선이 치러진 준전시체제 상황도 아니어서, 유권자들이 조심스럽게라도 자신의 의사를 표출했던 1956년 선거에서 이승만은 자존심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유효표 721만여 표 중 이승만이 504만여 표, 조봉암이 216만여 표로 발표되었는데, 대부분이 신익희의 추모표인 무효표 185만여 표를 감안하면 이승만은 전체 투표자의 과반수를 약간 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항상 '민의를 따르겠다'면서 국민의 절대 다수가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고 과시했던 이승만으로서는 상당히 치욕적인 득표수였다. 더구나 부정 투, 개표가 적은 서울의 경우 이승만은 20만여 표밖에 얻지 못했고, 무효표가 28만여 표였다(조봉암은 11만여 표). 죽은 신익희보다 표가 훨씬 적게 나온 것이다. 사실 자유당은 서울 시민들에게 미움의 대상 그 자체였고, 선거 때마다 시민들로부터 심한 야유를 받았기 때문에 서울에서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다.

헌법 위에 군림해 헌법을 유린하는 발언을 또다시 공공연히 한 것이지만, 그의 담화는 단순히 국민을 협박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는 최인규나 자유당 간부들에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지시로 들릴 수 있었다. 최인규는 나중에 법정에서 2.13 담화가 자신에게 큰 압박을 가해왔음을 고백했다.[10]

3.2.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편집]

시위의 시작은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장면 유세일이 일요일이었는데 당국에서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갈 수 없게끔 '영화 관람' 이나 '추가시험' 등의 명목으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지시했던 것. 이에 반발한 경북고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한 대구지역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은 27일 시위를 벌였다.[11][12] 구체적으로는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계성고 등 8개 학교 총 1,200여 명.

다음날인 28일, 당시 경북고 3학년인 학생회장 이대우는 "부정에 항의하고 신성한 권리를 지키는 것" 을 요지로 하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같은 경북고 3학년의 중퇴생이던 하청일이 초안을 작성한 결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치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처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하지만 당국에서는 이를 공산당 사주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 일축하면서 학생의 시위를 경찰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켰다. 당시 이강학 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북한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허나 이런 그들의 주장과 무관하게 2.28 학생민주의거역사적인 4.19 혁명의 첫 도화선을 당기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선봉에 대구시가 있었다는 점과[13] 종래의 동원형 강제 궐기대회가 아닌 광복 이후 최초의 자발적 학생 반정부 시위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참고로 오늘날 대구에는 이 의거를 기념하는 시설물들이 존재한다. 2.28 기념탑이 경북고와 두류공원,[14] 그리고 경북대사대부고에 있으며 대구의 번화가 동성로 근처에는 2.28기념중앙공원이 있다. 그리고 명덕역 근처에는 2.28 민주운동기념회관이 있다.

다시 돌아와 이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확산되어 수많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관제시위를 통해 맞불 작전에 돌입하였으며 "학생들은 자중하라, 학원으로 돌아가라"란 구호를 외치게 했다. 이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관치행정이 민주주의냐, 썩은 정치 갈아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어떤 이들은 "대학생들은 어디 있는가? 왜 침묵하는가?" 라며 우회적으로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 서울 1,000여명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균명고[15], 강문고[16], 중동고, 대동상고, 배재고, 수송고, 선린상고, 경기고, 보인고, 조양고, 중앙고, 대신고, 경동고 등

  • 부산 7,800여명 "우리가 민주제단을 지키자"

    • 동래고, 부산상고, 동성고, 혜화여고, 데레사여고, 항도고, 영남상고, 북부산고 등

  • 기타 경기도 해동고 130여명, 대전시 대전고 1,000여명, 대전상고 300여명, 충청도 충주고 500여명, 청주고 100여명, 강원도 원주농고 100여명, 경상도 포항고 200여명 등

3.3. 3월 15일, 제1차 마산 의거[편집]



3월 15일,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이른바 3.15 부정선거. 전국적으로 부정선거가 적발되고 광주등 일부 도시에서는 투표권을 우롱당한 시민과 학생들이 시위를 하기도했다. 한편 3월 15일 마산의 경우 아침에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참관인이 투표함을 엎어버리자 그 투표함에서 부정선거가 적발되었다. 투표함을 엎어버린 참관인 안맹선과 그의 남편이자 민주당 도의원 정남규는 사전투표를 발견했으나 곧 경찰서에 끌려가버린다. 당시 자유당에서 펼친 부정선거공작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3.15 부정선거 문서를 참조.

경찰서로 끌려간 정남규는 도의원 신분이라서 곧 풀려났는데, 그는 곧장 오동동 마산시당부로 가서 민주당원들과 논의한끝에 아침 10시 30분 독자적으로 선거포기를 선언하고 참관인들을 철수시킨다. 이후 방송을 통해 부정선거무효를 주장하고 오후 3시 30분부터 민주당원들이 모여 시위에 시작한다. 민주당원들은 가두시위를 벌이며 시위대를 모았고 오동동 마산시당부에 1,500여명의 시위대가 모였는데 이때 경찰들이 들이닥쳐 민주당원들을 연행하고 시위대들에게 해산할것을 요구하나 시민들에게 욕만 대차게 먹고 자리를 떠난다. 그 후 남은 시위대들이 독자적으로 시위에 돌입하자 경찰과 반공청년단들이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시위대들은 저녁에 개표가 시작되는 시청으로 모이자고 서로 약속하고 해산하게 된다.

이 소식이 시내에 퍼지자 마산 시민들은 저녁 즈음 옛 마산시청 앞에 모이기 시작했고 시위 인원은 만여 명을 넘을 정도로 불어났다. (일부는 남성동파출소로 모였다.) 일몰 후 시위대와 경찰과 대치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던 중 시위진압을 위해 출동한 소방차가[17] 무학초등학교[18] 앞 전신주를 들이받아서 전기 공급이 끊어졌다. 이로 인해 정전이 되고 신마산 일대가 깜깜해졌다. 경찰은 때를 놓치지 않고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같은 시각 남성동파출소에서도 발포로 한 명이 사망했고 시청 앞 발포 이후 시위대들은 자정이 다될 때까지 관공서, 경찰서, 자유당사 등을 습격하며 저항했다. 제1차 마산의거로 총 8명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마산 시민들은 물론 전 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 3.15 마산 의거 사망자 명단 [보기 / 접기]

3.15 마산 의거 사망자 및 상이후사망자[19]

김주열

오성원

전의규

김용실

김삼웅

김효덕

김영호

김영준

김종술

김평도


이 사건에 대해 후에 국회조사단이 이승만이기붕에게 경찰의 강경 대응에 대해 따졌는데 이승만은 공산당 사주로 벌어진 시위라고 보고받은 것을 그대로 발표했다. 심지어 최인규 내무장관 주도로 도립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마산고 1학년 C반 반장 김용실의 주머니 안에 '인민공화국' 운운하는 날조된 삐라까지 집어넣는 등 공산당의 배후조종으로 모는 공작을 펼쳤다.[20]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은 "은 쏘라고 줬지 갖고 놀라고 준 게 아니다" 라는 망언을 터뜨렸다. 가뜩이나 정부 수립 이래 최초의 "평화적 시위대를 향한 대민발포" 사례라서 그 파장은 컸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AP통신이 마산 사건에 대해 묻자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였다.

본인과 그의 부통령 러닝 메이트인 이기붕 민의원 의장은 3.15 선거가 부정하다고 비난하는 민주당을 물리치고 석권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정부가 질서유지를 위한 경우 이외에는 선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민주당의 선동을 받은 일부 시위자들이 일을 저지를 때 수습을 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경찰이 야당측의 정치적 활동을 방지하는 데 동원되었던들 이런 불행한 난동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민주주의적 발전에는 방해가 있게 되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폭력수단으로써는 결코 정권을 잡지 못할 것이다. 민주당은 어느 시기에 가서 국민이 동당을 권위있는 자리로 이끌게 될 참을성 있고 건설적인 지도역량을 기르지 않으면 안된다. 폭력행위는 정부나 자유당이 원하는 바도 아니요 실지 행하고 있는 일도 아니다. 민주당은 수치스럽게도 그들의 패배를 은폐하기 위해 그런 수단을 강구하였던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킨데 대해 한국 국민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은 직접 경찰에게 어느 정당이나 후보자를 위해서도 어떠한 종류의 영향을 주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며 경찰은 하시에도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사실 수많은 한국 애국자들이 민주당의 전술과 공격의 일부에 대해 분개하고 보복을 원하였으나 그들은 경찰 당국에 의해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다음날 성명을 다음과 같이 내었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실질적 자격이 결여된 것이다. 이 대통령이 AP 기자에게 폭력 행위는 정부나 자유당이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이 수치스럽게 수단을 강구하였던 것이며 그들이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에 대해 한국 국민에게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하였는데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말을 국민에게 부끄럽게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으며 또 하늘이 무섭지 아니한가? 이번 3.15 선거에 있어서 도덕과 법을 파괴하고 부정, 추잡, 폭력, 살인 등 모든 악랄한 방법을 사용하여 국민 주권을 철저히 강탈하고 민주주의를 도살하였으며 그러고도 부족하여 마산에서는 학생과 시민을 무차별 총격으로 대량학살하였음을 전 국민이 몸서리나게 체험하였고 민주 우방제국인 공인한 바이며 런던 타임즈의 사설에선 폭력이 가장된 선거보다도 나쁘다라는 요지로 비난하고 또 워싱턴포스트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세력은 또 한번의 선거승리를 불도저로 밀고 들어가듯이 차지하였다라고 비난하였다. 이 대통령은 이를 알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지 아니면 진실로 아무것도 모르고 말하는지? 어느 것이건 간에 대통령으로써 실질적 자격이 결여된 발언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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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의거 기념탑. 창원시 마산 합포구 서성동 소재.


15일의 발포 사건은 이미 중앙 언론과 외신의 주목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기에[21] 당국에서는 여야합동 국회조사단을 파견, 이강학 치안국장의 사임 및 최인규 내무부장관의 교체로 사건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홍진기 법무장관을 내무장관으로 자리만 옮기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인사조치였다. 게다가 홍진기 신임 내무장관은 공산당 사주설을 주장하면서 경찰의 실탄 발포를 지시하고 이후 강경 진압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마산 의거가 벌어진 뒤 여론은 계속 험악해져 갔다. 이에 몇몇 자유당 인사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어차피 우세한 선거였는데 너무 오버했다" 라며 지도부를 비난하였다. 또한 이승만, 이기붕에 의해 모든 당론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의해 국회의원들이 거수기로 전락했다라며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모여 혁신 위원회를 조직하며 집단반발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이승만이 직접 호통을 치자[22] 이들은 기가 죽었다. 이에 이들은 이기붕과 면담을 갖고 이기붕이 당을 위해 애쓴다며 치하한 뒤 선처할 것을 약속하자 이에 만족하여 해산한다. 이에 동아일보 기자가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 것입니까?" 라고 묻자 이들은 '이기붕 의장이 선처를 약속하셨으니 앞으로 더 이상 혁신에 대해 거론 않겠다' 라고 답하였고 이를 동아일보측에선 이승만의 호통 한 번에 잠잠해졌으니 논에 우는 개구리한테 돌 던지자 순신간에 잠잠해진 격이라며 비꼬았다.

민주당은 3.15 선거 무효선언을 한 뒤 당 내 방침을 두고 신파와 구파가 내분을 일으켜 계속 지리한 회의를 거듭하였다. 구파는 국회 총사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신파는 원 내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3] 이들은 이 논쟁으로 인해 3월이 다가도록 2주 동안에 걸쳐 대응방침조차 결정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신파가 이겨 원 내에서 투쟁하기로 결정했을 땐 이미 자유당 측에서 마산 경찰들 체포와 내무장관 경질 등의 조치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자유당 측은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여러 희생양을 찾으려고 했었고 때문에 민주당의 정남규 도의원을 남로당에 가입한 공산당원으로 총지휘하였다라고 혐의를 씌운다. 정남규 도의원은 당시 유치장에 갇혀있었는데 기자가 경찰의 혐의가 사실이냐고 물어보자 노발대발하며 "뭐요? 날더러 빨갱이라고? 그러면 어째서 나를 시의원으로 놔두고 도의원으로 당선되게 놔두었단 말이요?" 라며 반박한다.

그리고 22살 먹은 청년을 체포해 그가 경찰서를 방화하였다고 하고 그가 6.25 때 공산당 측에 부역한 자라고 하였는데 6.25 때는 그의 나이가 12세였으므로 말이 되지 않았고 이에 대해 민주당 측과 언론의 거센 비판을 받는다. 그러자 경찰측에선 32세라고 나이를 조작해서 발표하는 해프닝을 벌인다.[24]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청년은 그냥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체포되었으며 그의 신원조회를 하는 중 자동차 정비 면허증이 발견되었으며 이를 본 순경은 자동차=휘발유=방화라는 마주작스러운 공식이 머리속에 떠올라 그에게 방화 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싫어→질어→좋아도 이것보단 논리적이다

한편 3.15를 지휘하였으며 이 책임으로 물러난 최인규 전 내무장관[25]의 후임으로 임명된 전 법무장관 홍진기 내무장관은 "경찰의 구속, 마산 시위대의 선처 등의 대략적인 조치를 한 뒤 모든 조치를 마쳤다" 라고 밝힌다. 이러한 눈 가리고 아웅식의 조치에 여론은 더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이때 민주당은 간신히 내부 의견을 통합하고 서울 시내에서 집회를 열겠다고 하자 서울시장은 부정선거는 서울시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서울 어디에서도 집회를 열 수 없다라고 통보한다.

그러자 민주당 측은 이를 무시한 채 4월 6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이 시위가 엄청난 시민의 호응을 받아 인파가 상당한 규모로 불어난다. 이 시위의 결과로 자신감을 얻은 민주당 측은 지부를 통해 각 지역에 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한다.

하지만 서울시에서의 시위에 놀란 정부측은 등교중지령을 선포하는 등 시위를 철통 같이 감시토록 하였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에워쌌다. 부산에서 4월 8일 민주당의 지부에서 시위를 벌였으나 이러한 자유당 측의 감시에 의해 시위대는 소극적으로 가두행진을 벌인 뒤 해산하게 된다.

4. 혁명의 전개[편집]

4.1. 4월 11일, 제2차 마산의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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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1943.10.7 ~ 1960.3.15)


한편 3.15 마산의거 이후 마산 시내 분위기는 계속 을씨년스러웠다. 멀리 전라북도 남원에서부터 마산상고(現 마산용마고등학교) 입학시험 결과를 확인하러 왔던 상고생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된 상태였기 때문. 3월 15일 이후로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어머니인 권찬주씨는 한 달 가까이 마산 거리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연히 시민들의 입에는 김주열이란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고 관심도 집중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당시 마산시청 뒤에 있었던 저수지의 물을 몽땅 퍼내고 시신 수색을 했을 정도.

그리고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신포동 부둣가(현 마산합포구 중앙동 대한통운 앞(다음 로드뷰))에 떠올랐다. 김주열은 3월 15일 형 김광렬과 함께 저녁시위에 참여했고 시청앞 발포 이후 경찰이 시신을 거두어들이던중 오후 10시경 자산동 옛 한전 앞에서 최루탄을 맞고 죽은 상태로 발견됐다. 당시 김주열의 시신을 발견한 경찰은 손석래 서장에게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 물었고 알아서 처리해라는 손서장의 명령을 듣고 한 사업가의 운전기사를 시켜 마산세무서에서 마산항으로 옮겨 바다에 버리게 했다.# 그의 시신 사진은 당시 부산일보 허종(1924~2008) 기자가 찍어 특종으로 보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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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신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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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이 발견된 장소

경찰 당국은 김주열의 시신을 도립병원(현 경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마산의료원)으로 다시 옮기고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시내로 퍼졌다. 이에 흥분한 3천여 명의 시민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병원 안으로 밀려들어가 김주열의 사망을 확인했다. 김주열의 시신은 최루탄이 왼쪽 눈을 관통한 상태였다.[26] 어머니 권찬주는 충격을 받아 시신의 인수를 거부했다. 여담이지만 이후 먼 훗날 이와 거의 유사한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시신의 참혹한 몰골을 본 시민들은 당연히 분노가 폭발했고 학생들이 제일 먼저 대열을 이루어 "살인선거 물리치자" 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먼저 마산상고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불종거리를 거쳐 시청 쪽으로 향하며 마산고 학생들과 합류했다. 1차 마산의거에서 총상으로 사망한 김용실 군이 마고생(1-C반 급장)이었고 김주열은 상고생이었기 때문.

이때 학생들 중 일부가 마산여고와 성지여고로 올라가서 시위에 참여하라고 악다구니를 쳤다고 한다. 처음에는 여고생들이 시위에 합류할 수가 없었는데 이유는 교사들이 신발을 전부 감춰버렸기 때문. 결국에는 안전을 이유로 교장이 직접 학생들을 인솔하고 나오는 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장면이 사진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전국판 신문에 실리며 타 지역의 시위 열기에 다시 불을 붙였다.

이때 중년 여성들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죽은 자식 살려내라!", "김주열을 살려내라!", "차라리 우리도 죽여달라!" 고 절규하며 시위대의 행진에 함께하였다. 또한 특이한 점으로서 해인대학교 학생 5,000~6,000명,[27]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도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 정도면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 제2차 마산의거 사망자 명단 : 보기 / 접기

제2차 마산의거 사망자 명단

강융기

김영길


시민들은 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고 시위 대열에도 합류했다. 이윽고 성난 2만여 명의 시민들이 마산 경찰서와 시청에 난입하였으며 많은 관공서 건물과 차량들이 대파된다. 그날 밤 경찰은 또 발포를 했고 두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는 마산 시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마산 시민들은 3일간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였으며 마산의 행정은 온통 마비되었다. 정부에서는 2차 마산 시위를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라고 몰아붙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날 난동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특별담화를 발표, 15일에도 공산당 선전 때문에 마산 "폭동" 이 일어났다는 담화를 발표했다.[28]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소위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회" 를 구성, "적색분자들의 준동 혐의에 대해 과학적으로 수사하겠다" 고 하는 한편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 이라고도 하였다.

1960년 4월 11일 밤 분노한 시위대는 마산경찰서를 습격하여 수류탄을 탈취하고 경찰서장실 앞에서 터뜨렸다. 시위대의 숫자가 굉장히 많고 기세가 세다보니 경찰도 어찌 못할 정도였다.

이 즈음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 마산고, 마산상고,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고, 동래고, 총합 3,000여명.

4.2.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편집]

5. 4.19 혁명[편집]

5.1. 4월 19일, 피의 화요일[편집]

4.19 당일의 모습을 담은 영상.


4월 19일 화요일,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그날의 시위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그동안 미적거리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서울의 경우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문을 나서자 여러 단과대생들이 합세하였고 서울 시내 대부분의 대학교, 이어 고등학교, 중학교 학생들까지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여담이지만 문리대 학생회가 당초 계획하던 의거일은 4월 21일이었다고. 이들은 정부의 반공 프로파간다를 의식했는지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29] 즉 자기들은 결코 용공이 아니라는 구호다.

원래 문리대 학생회 등 대학생들이 계획했던 의거일은 4월 21일이었고 서울의 고등학교 학생들의 의거일이 4월 19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먼저 안 고대생들이 고등학생들에게 뒤쳐질 수 없다며 4월 18일날 먼저 시위를 했고 고려대생 피습 사건이 일어났으며 4월 19일 오전 8시 30분 서울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제일 먼저 가두시위를 시작하였고 부랴부랴 그 소식을 듣고 서울대 문리대생이 그 시위에 합류하였다.

이 날 정부에서는 귀가조치를 단행했으나 이미 10만명 이상의 학생들과 시민이 몰려나왔고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가득 메울 정도가 되었다. 학생들은 각기 세 방향으로 나뉘어 국회의사당[30]이 있던 태평로를 점거하고 면담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이기붕의 자택 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은 중앙청[31] 앞에서 저지선을 형성, 공포탄과 최루탄을 발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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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서울지역 시위 사망자[32] 및 상이후사망자 명단

강석원

강창조

고병래

고순자

고완기

곽영현

구순자

김관식

김부연

김영기

김왈영

김용안

김응수

김재준

김찬우

김창무

김창섭

김창필

김철호

김지호

김태년

김현기

남기성

남정만

노희두

문화웅

민병록

박건정

박도일

박동훈

박상범

박찬원

박호진

백남웅

서현무

손경호

손중근

송영근

신경식

신보웅

심은준

심자룡

안경식

안병채

안승준

안응헌

안종길

염춘식

유재식

윤경웅

윤광현

윤지섭

이규복

이근형

이기석

이상관

이상헌

이성엽

이시광

이익관

이정옥

이종양

이창원

이채섭

이청수

이향길

이흥수

임동성

임성희

임용학

임원협

장동원

장동환

장인서

전무영

전한승

조광집

조선관

조조남

조주광

지영헌

진삼두

진영숙

차명진

차성원

천인복수

최기두

최기태

최동섭

최신자

최정규

최태식

한명남

한정기

홍순선

홍종필

황규직

김병진

한진수

김광석

김영곤

장기성

최현석

장인모

정석조

최학서

최현철

구자숙

김길현

이기태

차대공

채광석

곽종한

원일순

유종환

이효희

안부자

정임석

전재근

김성수

정규철

이영

고해길

김정기

이항구

하정수

한인관



오후 1시 30분경, 경찰이 곽영주의 지휘하에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기 시작했고 선두에 있던 여러 명이 쓰러졌다.[33] 이때 발포로 인해 총합 21명 사망, 172명 부상. 특히 하단에 다시 서술하겠지만 경무대 앞에서의 소위 "죽음의 행진" 에서 피해가 워낙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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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부산지역 시위 사망자 및 상이후사망자 명단

강명진

김세창

김영계

백윤선

신정융

옥치용

정환규

지복수

최경자

최봉옥

최정수

강수영

전청언

박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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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광주지역 시위 사망자 및 상이후사망자 명단

강정섭

고정석

김준호

박순희

이귀봉

장기수

김재복

최금동


이날 서울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104명으로 이 중에 경찰측 사망자도 3명이 포함되어 있다. 기타 지역의 경우는 부산의 경우 사망 13명 부상 60명. 광주는 사망 6명(경찰 1명 포함) 부상 70명. 그 외의 지역에서는 경찰의 발포가 없어 사상자가 없었다.

5.2. 학생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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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에게 쫓기는 시위대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광복을 위해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한성여중 2학년이었던 진영숙[34]이 시위를 떠나기 전 홀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집에 남긴 쪽지였다.


4.19를 주도한 것은 학생들의 힘이었다. 서울시내 소재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왔고 청년들의 의기는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원인 중 하나지만 시초는 고등학생이다.

이것은 실제 4.19 혁명 유공자로 건국 포장(4.19 혁명 유공자는 건국포장을 일괄적으로 수여받음)을 받으신 분의 회고다.

3.15 부정선거 후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른 후 가장 분개한 사람들은 실제 같은 나이 또래인 고등학생이였다. 실제 각 학교 대표들은 미리 비밀스럽게 모여서 4월 19일날 전후로 지역적으로 각각 대대적인 데모를 계획하였었고 이 계획을 들은 고려대학생들이 어찌 고등학생들이 나서는데 우리가 잠자코 있을 수 있느냐며 4월 18일날 먼저 시위를 하였고, 하지만 서울시내 대학연합에서 4월 19일에 대대적으로 시위하기로 결정난 것을 먼저 튀어보이기 위해 핑계를 대면서 정작 사망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그 훈장을 포기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그로인해 고려대 피습사건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고등학생이었고 그 후에 국민 전체가 들고 일어서면서 대표면담 등 협상은 어른들에게 맡기는 분위기였으며 그러다보니 언론에서 묻히며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게 된 것 뿐이다. 그러다보니 아래의 글이 적히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생들이 주도하였다고 하였지만 대학생들이 주도한 곳은 서울의 시위였고 그 당시 지방에는 각 시도에 한두 개의 대학과 대학생들의 인원도 작았다. 실제 주도적으로 앞장선 이들은 대부분이 그 지방의 고등학생들이 앞장섰고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동참하는 형태였다.

예를 들어 충북지방에서는 충주고를 시작으로 시위를 시작했고 참여한 학교는 청주고, 청주상고, 청주공고, 청주농고 등이였다. 실제 4.19 혁명 며칠 전 각 고등학교에서 그 학교들을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 모여 거사일을 정하여 지금의 청주시내 도청 앞에 모여 시위를 하였고 경찰들의 곤봉에 수많은 학생들이 다쳤다. 자료는 그당시 충청일보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4.19 당일 맨 먼저 시위에 참가한 것은 의외로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들이었다. 신설동 로터리에 있는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오전 8시 30분경 로터리를 점거한 후 동대문 쪽으로 쪽으로 행진을 시작했고, 혜화동의 동성고등학교 학생들, 경기고등학교 학생들 또한 합류하였다. 그리고 거의 때를 같이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들이 종로로 진출했다. 이어 9시경에는 법대와 약대, 수의대, 치의대 등 동숭, 연건 캠퍼스의 거의 모든 단과대학이 합류했고 사범대 및 비교적 멀리 있던 상과대학생들은 9시 30분경에 합류했다.[35]

특히 다소 늦게 합류한 의대생들은 의사 가운을 입고 시위에 참여했는데 의대생답다면 의대생다운 자기들만의 독특한 구호를 썼다. 예를 들자면 "학우들이여, 메스를 들어라! 썩은 정치 수술하자!" 이런 구호들.

10시경에는 전날 시위를 벌였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다시 시위대에 합류했고 이어 건국대학교, 동국대학교,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이 각각 수천 명 단위로 몰려나왔다. 그리고 정오가 되자 연세대학교중앙대학교 학생들까지 가세하여 학생시위대는 순식간에 10만 명까지 불어나 서울 도심을 가득 메웠다.

다음은 시위에 참여한 대학교들의 이름과 참여 숫자를 시위에 참여한 순서대로 정리한 것이다.

5.2.1. 동국대학교[편집]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태평로의 국회의사당 앞을 선점했을 때 동국대학교 학생들은 효자동 쪽으로 진출했다. 시위를 주도했던 김칠봉(당시 법대 '58)은 "이승만과 면담하러 가자!" 고 외쳤고 이 소리를 들은 학생들은 경무대(현 청와대 위치보다는 약간 뒤쪽)로 향하기 시작했다. 중앙청 앞에서 경찰과 부딪친 시위대는 이에 맞서서 큰 수도관을 굴리며 행진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최루탄을 도로 주워 경찰들에게 던지며 전진했다.

당시 동국대는 서울대보다 경무대에 가까웠고 서울대생이 동국대로 올때쯤엔 이미 바리케이트를 뚫기 시작했다. 이러한 바리게이트를 뚫을때 동국대생은 당시 효자동 근처에서 공사중이었던 대형 수도관 2개를 앞에 굴리며 전진했다.[38] 이에 경찰은 해산을 위해 최루탄을 쐈고 이 최루탄에 항거하기 위해 학생들은 두건으로 눈을 가리고 전진했다. 이것이 유혈사태의 시작이 될거라곤 모른채로 말이다.[39]

대치 상황에서 선봉을 맡은 법대와 농대 학생들 중 일부가 3차 저지선으로 형성해 둔 소방차(혹은 전차(電車)) 위에 기어올라갔고[40] 저지선을 뚫은 시위대 중 일부는 최종목표인 경무대를 향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위대의 선두로부터 경무대까지는 100여미터를 목전에 둔 상황. 나머지 대열은 중앙청 옆길에서 경찰과 여전히 엉켜있었다.

마침내 오후 1시 30분경(40분이라는 얘기도 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했고 총격을 맞고 노희두 열사(법대 '59)와 박흥규, 이종학(농학 '59) 등 여러 명이 즉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러한 조준사격은 경고사격에서 최루탄으로 눈을가린 몇몇 학생들이 전방을 보지 못해 당하게 된것이다. 시위대가 앞으로 와도 경고사격의 조준점을 낮춰야했던 경찰들은 그러한 행위를 하지않았고 결국 이렇게 몇명의 학생들은 즉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당시 조준사격은 일반 소총이 아닌 기관총을 쏜것이다.조준 사격에 분노할 대로 분노한 법대 학생들은 서소문을 지나 서대문 로터리로 몰려가서 적십자병원 옆 이기붕 국회의장 자택을 점거해버린 후 한달음에 서쪽 끝인 서대문에서 동쪽 끝인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까지 시위를 벌이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한참 지나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해산했다.

"희두가 4.19 혁명 당일의 최초 희생자였다" 라고 김칠봉 열사는 증언하였고 이 노희두 열사의 경우는 불행히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법정대학의 후신인 동국대학교 법과대학은 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현재에도 '선봉법대' 의 칭호를 유지하고 있으며 매년 4월 중순에는 단과대 로비에 분향소를 마련해 추모하고 있다. 또한 동국대 전체적으로는 만해광장 한 켠에 '동우탑' 을 건립하여 기리고 있으며 매년 수유리 4.19 민주묘역에서 북한산을 오르는 '4.19 등반대회' 를 개최하고 있다.

이후 4.19 혁명 50주년을 맞이하여 정부에서 수여한 4.19 혁명 공로훈장 건국포장 239개 중에서는 35개가 동국대학교에 추서 혹은 서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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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당시 동국대학교 학생들이 행진에 들고 나갔던 플래카드. 2006년 당시 신축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입구 로비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옮겨졌다.

5.2.2. 서울대학교[편집]

시위 현장에서 가장 가까웠던[41] 서울대학교는 피해가 가장 컸다. 이 날 하루에만 7명의 학생이 사망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현재 서울대학교 교정에는 4.19 탑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사회대와 법대를 내려가면 있는 두레문예관 앞에 있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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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시스.


이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발표한 4월 혁명 선언문.[43]

象牙(상아)의 眞理塔(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疾風(질풍)과 같은 歷史(역사)의 潮流(조류)에 自身(자신)을 參與(참여)시킴으로써 理性(이성)과 眞理(진리), 그리고 自由(자유)의 大學精神(대학정신)을 現實(현실)의 참담한 薄土(박토)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自身(자신)들의 知性(지성)과 良心(양심)의 엄숙한 命令(명령)으로하여 邪惡(사악)과 殘虐(잔학)의 現狀(현상)을 糾彈(규탄), 匡正(광정)하려는 主體的 判斷(주체적 판단)과 使命感(사명감)의 發露(발로)임을 떳떳이 宣明(선명)하는 바이다.

 

우리의 知性(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現狀(현상)이 民主(민주)와 自由(자유)를 僞裝(위장)한 專制主義(전제주의)의 표독한 專橫(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斷定(단정)한다. 무릇 모든 民主主義(민주주의)의 政治史(정치사)는 自由(자유)의 鬪爭史(투쟁사)다. 그것은 또한 如何(여하)한 形態(형태)의 專制(전제)로 民衆(민중)앞에 君臨(군림)하든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헤슬픈 것임을 敎示(교시)한다. 韓國(한국)의 日淺(일천)한 大學史(대학사)가 赤專制(적색전제)에의 果敢(과감)한 鬪爭(투쟁)의 巨劃(거획)을 掌(장)하고 있는데 크나큰 自負(자부)를 느끼는 것과 꼭 같은 論理(논리)의 演繹(연역)에서, 民主主義(민주주의)를 僞裝(위장)한 白專制(백색전제)에의 抗議(항의)를 가장 높은 榮光(영광)으로 우리는 自負(자부)한다.

 

近代的 民主主義(근대적 민주주의)의 基幹(근간)은 自由(자유)이다. 우리에게서 自由(자유)는 喪失(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剝奪(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理性(이성)의 慧眼(혜안)으로 直視(직시)한다. 이제 막 自由(자유)의 戰場(전장)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正當(정당)히 가져야 할 權利(권리)를 奪還(탈환)하기 위한 自由(자유)의 鬪爭(투쟁)은 燎原(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自由(자유)의 戰域(전역)은 바야흐로 豊盛(풍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民主主義(민주주의)와 民衆(민중)의 公僕(공복)이며 中立的 權力體(중립적 권력체)인 官僚(관료)와 警察(경찰)은 民主(민주)를 僞裝(위장)한 家父長的 專制權力(가부장적 전제권력)의 하수인으로 발 벗었다. 民主主義 理念(민주주의 이념)의 最低(최저)의 公理(공리)인 選擧權(선거권)마저 權力(권력)의 魔手(마수)앞에 壟斷(농단)되었다. 言論(언론), 出版(출판), 集會(집회), 結社(결사) 및 思想(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專制權力(전제권력)의 악랄한 發惡(발악)으로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漆黑(칠흑)같은 밤의 繼續(계속)이다.

 

나이 어린 學生 金朱烈(학생 김주열)의 慘屍(참시)를 보라! 그것은 假飾(가식)없는 專制主義 專橫(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裸像(나상)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卑屈(비굴)하게도 威(위하)와 暴力(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百步(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學究(학구)의 良心(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自由(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沈默(침묵)에 自由(자유)의 鐘(종)을 亂打(난타)하는 打手(타수)의 一翼(일익)임을 자랑한다. 日帝(일제)의 鐵槌(철퇴)아래 미칠듯 自由(자유)를 歡呼(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兄(형)들과 같이...

 

良心(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永遠(영원)한 民主主義(민주주의)의 死守派(사수파)는 榮光(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現實(현실)의 뒷 골목에서 勇氣(용기)없는 自虐(자학)을 되씹는 者(자)까지 우리의 隊列(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自由(자유)의 秘密(비밀)은 勇氣(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隊列(대열)은 理性(이성)과 良心(양심)과 平和(평화), 그리고 自由(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隊列(대열)이다. 모든 法(법)은 우리를 保障(보장)한다.

 
단기 4293년 (서기 1960년) 4월 19일 서울大學校(대학교) 文理科大學(문이과대학) 學生 一同(학생일동)

사망자 명단 : 고순자(당22세) - 미술대 3학년, 김치호(당21세) - 문리대 3학년, 박동훈(당19세) - 법대 1학년, 손중근(당22세) - 사범대 4학년, 안승준(당22세) - 상대 3학년, 유재식(당24세) - 사범대 2학년

5.2.3. 중앙대학교[편집]

중대신문 4.19 특집기사 - 의에 죽고 참에 살았다.

4.19 혁명에 참여한 당시 재학생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하여 기사를 작성한 것이다. 4.19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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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학생들은 시위 참가자 중 하루만에 6명이 사망했다. 7명이 사망한 서울대학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낸 셈. 이런 연유로 중앙대의 별명이 '의혈' 이다.

다음은 중앙대에서 발표한 선언문.

우리 중대생이 자유당 정권의 폭정을 규탄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파렴치한 유산을 물려받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의 정당한 저항이다. 총칼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감행되어야 할 이 항쟁은 우리 후손에게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광적인 장기집권이 가져다 준 부정과 부패의 무서운 해독을 오염시키지 않으려함에 있다."

사망자 명단 - 고병래(상학과3), 김태연(약학과3), 서현무(법학과3), 송규석(정외과3), 지영헌(신문학과3), 전무영(신문학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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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의 열사들의 영정과 이름은 중앙도서관 앞의 탑에 새겨져 있다. 다음은 탑의 비문의 내용.

우리들은 남으로부터 싸워 올라가
마침내 사월학생혁명 그 대열에
기를 높이 올렸다
그러함에 있어 우리들은
우리들의 영원한 사랑
조국의 자유와 독립
민주와 번영
생존의 평등 평화를 위하여
모든 지성 모든 생면 모든 사랑을
다하여 아낌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섯 명의 벗을 잃었으니
아! 슬프도다 4월이여! 광영이여!
벗의 이름으로 끝이 없어라

4293년[44] 9월 중앙대학교 학생일동.

5.3. 계엄령과 계엄군의 태도[편집]

사태가 워낙 심각해지자 정부는 19일 당일 오후 3시 서울지역 일대에 긴급히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이때 총격사망 문제를 덮기 위해 1시로 소급하여 적용하였다. 계엄령은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전주, 청주,수원 일대에 선포되었다. 이로써 시위는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계엄군은 경찰과는 대조적으로 중립을 지켰고[45]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시위가 있어도 발포를 하지 않았으며 시위대와 협상을 하기도 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서울에 계엄군이 진주하자 어느 노신사가 계엄군에게 "우리를 죽이려고 왔는가? 죽이고 싶다면 얼른 죽여라!"라고 울부짖었고 이에 지휘관이었던 젊은 장교가 당황하여 경상도 사투리로 같은 대한민국 사람들끼리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하자 시위대가 군대가 시민의 편이라고 환호하고 군인들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 사건도 있었다 한다. 이들 계엄군이 경찰들처럼 강경하게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군부 내에서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 이승만이 경찰 세력을 비호하는 한편 독재 연장에 공헌을 한 적 있는 군부에게 보상을 제대로 내려주지 않았다는 점. 당시의 경찰은 내무치안 조직이라기보다는 공비 토벌 등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으면서 사실상 준군사조직에 가까웠으며, 국내의 '무력 조직'으로서 경찰과 군의 라이벌 의식은 상당히 강했다.[46]

  • 유력한 부통령 후보였던 국방부 장관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점.


당시 서울지역 계엄을 담당했던 부대는 15사단 (사단장 조재미 준장)으로 자체적으로 이하와 같은 세 가지의 원칙을 엄정히 지킬 것을 각급 부대에 지시한 바 있다.

  • 상관의 허가 없이 시위대에 무단으로 발포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가 건물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간인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받는 것을 금지한다.


저녁이 깊어가면서 시위대는 점차 진압되어가기 시작했다. 잔혹한 유혈진압을 서슴지 않는 경찰과 탱크를 앞세우고 압박해 오는 계엄군 앞에 시위대는 쫓기고 쫓기기를 거듭했다. 일부 시위대는 차량을 닥치는 대로 징발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완강하던 시위대도 맨 주먹으로는 더 이상 일제 사격 앞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무렵부터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면서 도심지에서 점점 밀려났다. 한편 일부 시위대는 눈에 띄는 차량들을 닥치는 대로 징발, 차에 올라타고 경찰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한 채 길을 누볐다. 오후 6시 40분경, 소방차와 트럭 등에 분승한 시위대가 동대문경찰서 앞을 지날 때 경찰서 안에서 발포, 다시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기동화한 시위대는 밤 8시 경, 40여 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의 파출소를 모조리 불질렀으며 파출소에서 탈취한 카빈 소총 27정으로 무장, 한때는 경찰과 총격전까지 벌였다. 시위대 일부는 20여대의 차량에 분승, 미아리 쪽으로 퇴각하여 의정부무기고를 찾아 창동까지 밀려갔다. 이들은 창동지서 경찰들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정무렵 급거 출동한 계엄군과 경기도경이 협공할 기세를 보이자 다시 시내로 되돌아와 고려대 뒷산 쪽으로 몰렸다.[47] #, # 시위대는 결국 고려대학교 교정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바로 이때의 에피소드가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극적인 사건이다. 궁지에 물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이대로 곧장 밀고 들어갔다가는 양쪽 모두 최악의 참사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 자명한 일. 이때 놀랍게도 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단 두 명의 부관만을 대동하고 캠퍼스에 진입했고 학교 강당으로 들어가서 즐비하게 놓인 수많은 희생자들의 태극기로 덮인 시신들 앞에서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로 조의를 표했다. 당혹감과 착잡함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이를 지켜보던 시위대들은 결국 그 자리에서 전원이 무기를 버리고 해산, 계엄군에 연행됨으로써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고 한다.

6. 자유당 몰락의 전주곡[편집]

6.1. 등을 돌리는 우방들[편집]

상황이 이러할진대 이제는 감을 좀 잡아도 좋으련만 이승만은 여전히 착각 속에 빠져있었다. 다음은 4월 20일자 대국민 담화의 내용 중 일부다.

"어제의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전 생애를 바쳐 온 애국적인 한국민이 그러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고는 거의 믿지 못할 일이다..."


그동안 미국은 1, 2차 마산 항쟁에 유감의 뜻을 표했을 뿐이었지만 4월 19일의 사태에 대해서는 월터 패트릭 매카나기(Walter Patrick McConaughy) 주한미국대사가 경무대를 방문해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고 요청했으며 대사관으로 돌아오는 즉시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미 국무부장관이 주미 한국대사에게 항의각서를 보내기에 이르렀다.[48]

다음은 미국 국무부 기자회견 내용 중 일부이다. 세세한 토씨의 경우 다소 다를 수 있다.

"국무부는 금일 오후에 한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국민의 불안과 폭력행위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중략) ...미국 정부는 한국의 시위가 근래의 선거와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에 대해 품고 있는 국민들의 불안을 반영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양유찬 대한민국 대사에게 통고하였습니다..."


이렇게 미국이 등을 돌린지 얼마 안 되어 4월 21일에는 국무위원이 일괄 사표를 냈고 23일에는 장면이 부통령 사임서를 냈으며[49] 그 날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50] 그러나 한 번 끓어오른 사회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6.2. 4월 25일, 교수들이 나서다[편집]

學生(학생)의 피에 報答(보답)하라!


점차 소강되기 시작하던 시위에 다시 불을 붙인 계기.
이번에는 학생이 아닌 대학 교수들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오후 5시 50분경에는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를 하기에 이른다. 이에 시민들이 호응하여 시위 군중은 삽시간에 1만 명까지 불어났다.

이들은 19일에 있었던 참혹한 사태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생때같은 자신의 제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두려움 없이 나섰고 자신들을 겨누고 있는 총 앞에서 의연히 행진했고 결국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에 대해 자신들 역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굳이 25일이냐 하면 먼저 매달 25일은 교수들의 봉급날로서[51] 이 때 정기적으로 많은 교수들이 한데 모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봉급을 핑계로 당국의 의혹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생기는 셈이었다. 처음에 교수들은 많아봐야 50~60명 정도만이 모이리라 여겼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모인 교수들은 무려 258명에 이르렀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는 대학가 사이에서 "교수가 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벼룩을 일렬로 세우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말이 있었다. 당시에는 유교적 문화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던 시절이라 식자층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 자체를 매우 비판적으로 보던 때였다.[52] 그만큼 교수들 사이에서 정치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꺼렸다는 이야기이며, 교수들이 직접 시위에 참여한다는 것은 4.19혁명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교수들이 대단히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했다는 방증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열화와 같은 기립박수 속에 일사천리로 반정부 시위 및 행진을 결의하고 시국선언문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시국선언문에는 참석자 258명 전원이 서명하였다. 그 중에 몇 명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 이종우(고려대), 이희승(서울대), 정석해(연세대), 조윤제(성균관대) 외 시국선언문 서명자 25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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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4.19의거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한 계기다. 이에 대한 철저한 규정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이 비상 시국에 대처하여 우리는 이제 전국 대학 교수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아래와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1) 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학생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 정기의 표현이다.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의 곡해이며 학생들의 정의감의 모독이다.
3) 평화적이요 합법인 학생 데모에 총탄과 폭력을 기탄 없이 남용하여 대량의 유혈, 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기본으로 한 국립 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 집단의 사병이었다.
4)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서의 민족적 대참극, 대치욕을 초래케 한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으면 국민과 학생의 분노는 가라앉기 힘들 것이다.
5) 3.15선거는 불법 선거이다. 공명 선거에 의하여 정, 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6) 3.15 부정 선거를 조작한 주모자들은 중형에 처해야 한다.
7) 학생 살상의 만행을 위에서 명령한 자 및 직접 하수자는 즉시 체포 처형하라.
8) 모든 구속 학생은 무조건 석방하라. 그들 중에 파괴 또는 폭행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료 피살에 흥분된 비정상 상태하의 행동이요, 폭행 또는 파괴가 그 본의가 아닌 까닭이다.
9) 정치적 지위를 이용 또는 권력과 결탁하여 부정 축재한 자는 관, 군, 민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 기강을 세우라.
10) 경찰은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11) 학원의 정치 도구화를 배격한다.
12) 곡학아세하는 사이비 학자와 정치 도구화하는 소위 문인, 예술인을 배격한다.
13) 학생 제군은 38선 넘어 호시탐탐하는 공산 괴뢰들이 군들의 의거를 선전에 이용하고 있음을 경계하라. 그리고 이남에서도 반공의 이름을 도용하던 방식으로 군들의 피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악이용하려는 불순 분자를 조심하라.
14)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여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고 이성을 지켜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 단기 4293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이는 이전의 시위와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 것이었다. 위에 인용된 각 학교별 선언문에서 보듯 이전에는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는 것이 주요 요구였고 이승만 하야는 주요사항이 아니었으나 교수들은 이승만 하야를 직접적으로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교수들이 서울 시내를 질서정연하게 행진하고 그 뒤를 시민들과 학생들이 따르고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하고 애국가까지 제창했는데도 단 한 명의 경찰도 얼씬하지 않았다. 사전에 당국에 알리지도 않은 강행 시위였는데도. 당대의 교수라는 직분이 가지는 사회적 권위와 책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주는 예.[53]

교수단 데모가 끝난 뒤에도 시민, 학생들이 통금 사이렌을 무시하고 시위를 계속했으며 일부는 철야농성까지 벌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5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오전 7시에는 3만여 명이 모여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였고 1만여 군중은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윽고 9시경에는 서대문에 있던 이기붕의 집이 파괴되는가 하면[54] 같은 시각 45분경에 파고다 공원에 있는 이승만 동상이 군중들에 의해 철거되었다.#[55]

6.3. 어린이들이 시위에 나서다[편집]

10시경 시위 군중은 10만명으로 불어났으며 국민학생[56]들도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하였다. 지난 19일, 피의 화요일 때 수송국민학교[57] 6학년 학생이었던 전한승(13세)군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던 것이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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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국민학교 학생들이 데모하는 모습.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라는 플래카드가 보인다.


아래는 당시 수송국민학교 학생 강명희가 남긴 글 《나는 알아요》.

아! 슬퍼요
아침하늘이 밝아 오면은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하늘과 저녁 놀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6.4. 시위대와 계엄군이 하나 되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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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전차(M4A3E8 셔먼) 위에 올라간 시위대의 모습.


교수들의 시위가 끝난 후 계엄군이 출동하긴 했지만 탱크를 앞세운 데다 착검까지 하고 방독면을 쓰고서도 이미 군인들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위대 속 한 10대 소년이 탱크 위로 뛰어올라가서 외쳤다. "대한민국 국군 만세!" 민주화 관련 사료들 중에는 이때 눈물을 흘리는 군인들도 있었다는 서술이 있다. [59]

이후로 계엄군은 시위대 건으로 현장에 출동할 때마다 시위대의 따뜻한 환영과 환호,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미 계엄군은 이승만 정부를 지킬 마음이 사라져버린 상태였으며, 계엄군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사병'이 아닌 국민을 지키는 '군대'가 되어있었다. 이후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는 곳에는 항상 탱크가 상징처럼 따라다녔다. 시위대는 탱크 위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쳤다.

7. 이승만의 하야[편집]

7.1.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편집]


"미국으로 망명하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것만이 오직 유일한 길입니다."
ㅡ 이승만 대통령과 시민 대표 5명과의 면담 中


상황은 이승만에게 명백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26일 아침 김정렬 국방장관이 강경히 이 대통령에게 하야를 진언했고[60], 부인 프란체스카도 귀에 대고 결심을 재촉했으며, 4월 25일 수석국무위원으로 입각한 허정도 하야를 권유했다. 김정렬 회고록에 따르면 이때 이승만은 "내가 그만두면 더 이상 다치는 사람이 없단 말이지?"하고 결국 하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이승만은 박찬일 비서관을 불러 성명서를 쓸 것을 지시했다. 초안에는 대통령 하야, 내각책임제, 재선거 등이 적혀있었지만 이승만은 그렇게 쓰면 안된다고 새로 쓰게 했다. 송요찬의 건의로 이기붕의 공직 사퇴 내용도 첨가되었다. 두번째로 쓰인 성명서가 밑에 있는 성명서다.

그때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시민, 학생대표 5명과 이승만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했다. 고려대 정치학과 유일나 등이 경무대 후원에서 이승만과 면담했다. 유일나가 "각하께서 하야하시는 길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라고 직언했고 이승만이 "뭘 하라고?"라고 알아듣지 못하자 옆에서 곽영주가 "step down"이라고 속삭였다. 이승만은 "날더러 저 하와이나 외국에 가서 살란 말인가?"라고 물었고 유일나는 "국민이 원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미국 대사 맥카나기가 도착했다. 이승만은 대사를 기다리게 한 다음에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유일나는 이집트의 나세르의 예를 들며 북한과 대치 중이니만큼 2년간 군정을 한 다음에 민정으로 이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허정이 옆에서 반대의 뜻을 밝혔고 이승만은 그게 송요찬의 지시로 한 말인 줄 알고 한국과 이집트는 상황이 다르다고 반대했다. 결국 이승만은 시민 대표와의 면담을 받아들였다.

10시 20분경 드디어 이승만이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사임할 것을 발표했다.[61] 비슷한 시간인 9시 45분경 파고다공원에 몰려든 데모 군중이 이승만 동상의 목에 철사줄을 걸어 쓰러뜨렸다. 현재는 그 자리에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10시 40분에 이승만은 맥카나기 대사와 면담했는데 미국의 사퇴 압박을 전하려던 대사는 사퇴 성명서를 듣고 성명 지지 의사를 전달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가지 결심을 요구했다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내가 한가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삼팔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사 공산군이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이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짐작하겠지만 저기 "국민이 원한다면" 이라는 표현이 논란의 여지가 있었는데 이에 외무부장관은 기자들에게 이는 단지 문구상 표현에 불구하고 사실상 하야한 것이라고 확인해주었다.

시민들은 방송을 듣고 경무대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승리를 환호하였다. 시민들은 새로이 "질서를 지킵시다" 플래카드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였으며 길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 4월 26일 시위 사망자 명단 : 보기 / 접기

4월 26일 시위 사망자 및 상이후사망자

강명석

김경이

김두호

김선길

김영호

박완식

박춘봉

손흥구

심점구

안정수

윤석헌

이강섭

이연하

이재섬

이판갑

이한수

임기택

장영옥

정태성

정태훈

조진구

최장성

양대춘

함장호

안창원

송시환

7.2. 이 대통령의 최후의 몸부림[편집]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갑자기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이미 방송으로 다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비서들의 잇따른 사임서 사인 요구에 버텼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노(老) 독재자의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허정도 설득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김정열이 나서서 또 촉구했지만, 이승만의 대답은 역시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허정이 질서를 확고히 유지할 수 있다고 역설하자 그때서야 어쩔 수 없었던지 사임서에 사인을 해 국회에 제출할 수 있었다.[62]

7.3. 제2공화국의 출범[편집]



이리하여 오후 2시, 국회는 이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다음날 오후 3시에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 사임서가 즉시 수리되었으며 헌법 규정에 따라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63] 후에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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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가는 이승만을 신문 보도한 경향신문.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 추종자들은 저항할 여지도 없이 힘을 잃었으며 집이 무너진 이기붕은 이화장으로 이사한 28일 장남 이강석의 자결 총격에 의해 일가족이 모두 자살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64] 그리고 하와이에서 1965년 7월 19일에 사망하였다.[65]

참고로 망명은 사진에서 배웅하고 있는 허정의 주도로 각료들도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되었는데, 이승만은 떠나는 순간까지도 "하와이에서 잠시 쉬다 아이크(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가 오기 전에 곧 돌아오겠다"고 갔다고 한다. 무슨 혁명이 그저 며칠 시간이 지나면 진정될 줄 알았는지...[66][67]

8. 그날 이후[편집]

8.1. 한계와 의의[편집]

대한민국 제2공화국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지 않다.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조직적인 혁명이 아니었고 민중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혁명 결과 권력은 야당인 민주당에게로 돌아갔고 반공보수가 아직까지 당내의 정책이었던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장면 내각 때 경찰 내 발포 책임자에게 무죄 선고를 하자 시민들은 크게 실망하게 된다.

한편 경찰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극에 달한 데다 자유당 정권 내내 억압되었던 시민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폭발하자 시위로 시작하여 시위로 끝나는 하루가 이어지기도 했고[68] 경찰서 등 관공서 건물에 대한 파손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곧 대한민국 헌법4차 개정의 빌미가 되었고 법률불소급의 원칙을 무시한 이 개정은 그 이후로 줄곧 "소급입법개헌" 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국이 안정되고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화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고 하는데[69] 정치권은 민주당 신파인 장면 총리와 구파인 윤보선 대통령 사이에 치킨게임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그틈을 타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시민들의 피로 일군 4.19를 1년만에 뒤집게 된다(5.16 군사정변). 장면은 수녀원으로 도망가서 나오지 않았고 윤보선은 이를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여 쿠데타는 성공하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이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5.16 혁명이라 치켜세우고 4.19 혁명을 깎아내리기 위해 4.19 의거라고 정의하였다.[70]

그래서 4.19 혁명은 '미완의 혁명' 이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는 4.19를 혁명으로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몇 번 이의가 제기된 적이 있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의는 4.19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에서의 이의제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혁명' 의 성격과 정의에 관한 학문적인 논쟁의 일종으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혁명이라는 명칭의 학문적 논쟁은 단순한 극우파의 유사학문은 아니다. 일례로 프랑스 혁명만 하더라도 학계에서는 현대에 그 '혁명'이라는 명칭을 엄정한 시험대에 올리고 있으며, 전체주의 비판으로 유명한 한나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혁명'으로 시작했으나 '반란'으로 끝나버렸다고 평가하기까지 한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전, 프랑스 제1공화국이 태어나는 그 때에도 이미 공화국은 사산(死産) 됐다는게 아렌트의 평가다. 혁명은 해방(liberty)이 아니라 자유(freedom)를 지향하는 활동이고, 결국 자유(freedom)가 얼마나 헌법에 잘 스며들고 성공적인 체제가 들어서는지가 중요하다는게 그녀의 설명이다. 때문에 아랜트는 미국 혁명프랑스 혁명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이런 엄정한 잣대로 평가한다면, 4.19가 혁명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기준은 제2공화국에 대한 평가와 크게 관련될 것이다. 만약 제2공화국이 근본적으로 자유를 헌법에 명시하는데 실패한 체제라면 4.19는 의거, 혹은 미완의 혁명일 것이다. 반대로 만약 제2공화국이 성공적으로 자유를 헌법에 명시했는데 단지 5.16 반란이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붕괴한 것이라면 4.19는 혁명일 것이다.

한편 당대에는 실제로 5.16 군사정변을 4.19 혁명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평가에 대한 변화상은 5.16 군사정변 항목에 잘 설명되어 있으니 해당 항목을 참고.

그래도 4.19는 독재정권을 뒤집은 사건이며, 한국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정신을 똑바로 심어주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도 4.19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문구가 있다.[71][72]

8.2. 4.19 세대[편집]

4.19 세대 구술 증언록.

4.19 혁명 기간에 대학생으로 운동에 참여하고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세대를 4.19 세대라고 한다. 당시 대학생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386세대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맨땅의 대한민국에서 독재정권을 타도하여 최소한의 민주적 원칙을 수호하였고 산업 발달을 실질적으로 이끌어낸 위대한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73]

한편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 로 칭송하는 일부층에서는 '4.19 세대나 6.3 세대가 이승만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 고 주장하고 있다.[74] 이 주장은 보수층의 집권이 장기화되며 차츰 보수 계열 정치인들 가운데서도 심심찮게 언급되고 있다. 김문수, 김무성 그리고 이명박 전 대통령.

2011년 4월17일 이승만의 유족인 이인수[75]가 공식적으로 사과하였으나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고 최근 동상 건립 시도 및 이승만 기념관 건립 사업으로 인한 이벤트성이라고 대차게 까인데다가 희생자들과 4.19 단체 또한 사과에 대해서 진정성이 없다며 사죄에 대해서 거부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결국 이인수는 당초 의도했던 대로 4.19 민주묘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사과문을 읽었다. 근데 잘 들어보면 4.19 혁명을 4.19 의거라고 칭했다!

거기에 뉴라이트는 이인수 혼자만의 생각일 뿐, 북한의 입김이 크며 이승만을 몰락시킨 4.19 자체를 사과하는 일은 있어선 안된다고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벤트성' 의혹은 곧바로 사실로 밝혀졌다. 4.19 혁명을 맞아 유족에 대한 사과성명을 발표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서울행정법원에 '4.3 사건 희생자 결정 무효확인' 항소장을 원고 대리인을 통해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

참고로 4.19동지회는 2006년 당시 뉴라이트 학술회에서 4.19 혁명의 의의와 위상에 관련한 문제로 이영훈 교수를 비롯한 참가진들에게 항의를 격하게 한 바가 있다. 뉴라이트들도 문제 있는 것이 4.19를 진압하려던 정부 요인이 후에 세운 언론사에 많이 기고를 하는 교수도 포함되어 학술회 자체가 문제 될 수밖에 없다.

8.3. 기타[편집]

서울 수유동에는 국립 4.19 민주묘지가 있다. 워낙에 큰 랜드마크인지라 인근의 경전철 역명도 4.19민주묘지역으로 정해졌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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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컷은 정의의 불꽃 조각상이다. 맨 밑에 있는 구멍 부분이 애들 들어가기 딱 좋은 곳이긴 한데 참배 와서 저기 들어간 채로 사진 촬영하는 몰지각한 짓은 하지 말자

국가보훈처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계절을 좀 타기는 하지만 참배객들도 꾸준히 있는 편이며 인근 주민들은 은근히 동네 공원으로 여기고 드나들기도 한다(...) 가끔 어디선가 노동자들이 와서 단합대회도 한다. 기념관은 당시 사건개요를 순서대로 둘러볼 수 있는 구조로 정리되어 있으며 나무위키에 작성된 글들도 일부 볼 수가 있다. 희생자 김주열 열사가 오웅진 신부와 주고받은 편지 등[77] 참배시 간단하게 싸온 음식들을 취식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참배를 와서 쓰레기 버리는 쓰레기짓은 제발 하지 말도록 하자.

2012년 4.19 혁명 52주년 행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었을 때 화환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했다. 보통 정부주관의 행사들에 화환을 보낼 때 정부에서 지정한 권장 '규격' 이 있다고 하는데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일반 장례식장용 화환을 보내면서 추모 문구도 전혀 없이 이름과 자신의 직책만 적어서 보낸 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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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지역에서 4.19 운동이 크게 벌어진 곳 중 한 곳인 광주광역시에는 4.19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2012년 4월 14일 금남 56번 버스를 419 버스로 바꾸었다.[78]

현재 이투스에서 역사를 강의하고있는 설민석의 아버지 설송웅[79]씨가 이승만을 직접 대면한 시민 대표 중 한 명이다. 설민석의 말에 따르면 컬러링도 애국가고 휴대폰 번호도 0419로 끝나는 등 평생의 자랑이시라고. 설민석 한국사 교재에서도 당시 설송웅을 찍은 사진이 매년 실려있다.설송웅 인터뷰

대구광역시에서는 4.19 혁명도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혁명의 발단이었던 2.28 학생민주의거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명덕역 근처에 2.28 민주운동기념회관이 있으며, 지방 단위 말고 국가 단위 행사로 격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창원시[80]에서도 본격적인 혁명의 발단이 된 3.15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마산회원구 구암동에 4.19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국립묘지도 3.15 민주묘지이며, 마산 시가지를 통과하는 대로를 3.15대로로 명명하여 기리고 있다.

2013년부터 4.19 혁명 국민문화제라는 이름으로 강북구에서 각종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81]

8.4. 관련 창작물[편집]

  • 마산MBC(現 MBC경남)에서 4.19 혁명 특집 드라마로 '누나의 3월' 을 제작했다.

  • 시인 김수영은 혁명의 요구사항 중 하나인 민주주의와 관련된 '하... 그림자가 없다' 라는 시를 썼고 시인 김광규는 군사독재에 침묵하는 등 현실에 순응하게 된 4.19 세대에 대한 반성으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라는 시를 썼다.

  • 일본 애니메이션 마리아 홀릭에서도 잠깐 언급된다. 일본에는 혁명 같은 건 눈 씻고 찾아 봐도 없다면서 죽간(...)에 전 세계의 혁명을 적어놨는데 거기에 잠깐 등장했다. '1960 4.19 學生運動(학생운동)' 이라고 나와있다.

  • 작가 이문열이 4.19 혁명을 다룬 배경의 소설이 있다. 하나는 그 유명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 있다.

  • 보컬로이드 시유가 부른 '너를 소리쳐' #

  • 야인시대 121화에서 4.19 혁명을 다룬다.

  • 빌리 조엘의 노래 중 하나인 We Didn't Start The Fire에도 짤막하게 가사로 언급된다.

  • 제2공화국(드라마)에서는 제2공화국 탄생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기 때문에 몇회에 걸쳐 4.19 혁명을 묘사한다.

  • 효자동이발사의 앞부분에서 4.19 혁명에 대해 다루고 있다.

[1] 뒤쪽에 보면 대한체육회 건물이 보이는데 이 건물 터에 더플라자호텔이 세워졌다.[2] 'April 19 Revolution'이나 'April 19 Movement'라는 명칭도 쓰인다.[3] 1960년까지 집계된 숫자이다.[4] 엄밀히 따지면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2.28 학생민주의거3.15 부정선거로 인한 시위가 더 앞에 있기는 하다.[5] 이는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여서 1950년대 들면 북한에서 문맹은 거의 퇴치되는 수준까지 다다랐다. (공식적으로 1949년에 문맹이 전부 퇴치되었다고 한다. 물론 신빙성이 있는지 의문이겠지만 그만큼 문맹 퇴치가 빨리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다만 북한은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반대파의 싹이 확 잘려버리는 바람에 이후로 학생운동이 꽃을 피우지 못했다.[6] 참고로 현재와 비교하자면 웬만한 대규모 대학의 전체 학생수가 약 1만명 정도 된다. 즉, 1945년 당시에는 전국의 대학생 규모가 지금 현재의 1개 대학 학생수만도 못했던 것.[7] 물론 원래 의도는 북한을 괴뢰로 만들고 남한과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을 주장하자는 거였지만.[8] '신두영 국회 비망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조봉암을 어떻게든 제거하라고 지시했다.#[9] 홍진기에 따르면, 조병옥이 이승만과 대결할 수 없다고 하면서 후보 사퇴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와 비슷한 증언은 당시 정치부 기자들한테서도 나왔다. <출: 홍진기, '나의 혹중회고', 신세계 1962년 2월호. p208~p209.[10] 출처 - 학민사편집부 편, '혁명재판', 학민사, p39.[11] 1990년대 이후로는 고등학교 학생운동의 맥이 끊겼고 고등학교 학생운동단체 자체는 존재하지만 그리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고등학생들의 시위라 하면 낯선 느낌이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생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던데다가 중학교 입학하는데도 시험치르는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지라 고등학생 쯤 되면 이미 다 배운 성인 취급했었고, 사회 참여 역시 빈번했다. 물론 명문고가 존재하는 등 고등학교가 서열화 되어있는 것도 한 이유여서 상위권 고등학교가 그 주체가 되었다[12] 반면에 의외로 대학생들의 사회 참여는 저조했었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에 역시 어렵게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여 신분 상승의 길을 걷기 위해 대학에 입학했다 보니 체제순응적(출세지향적)인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학생들의 미적지근한 사회 참여에 열 받은 고등학생(!)들이 대학교 앞에서 시위하는 일도 있었을 정도. 사실 4.19 혁명이 이후 대학생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의 신호탄이 된 사건이다.[13]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좌익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대구는 제1공화국 당시에도 야당 지지 성향이 매우 짙었던 지역이었고, 반 자유당 성향이 아주 강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진보적 성향은 박정희 정권 시절을 거치면서 사라져 갔고, 민청학련 사건인혁당 사건을 겪으면서 대구의 좌파적 지식인들이 뿌리뽑혔다.[14] 원래는 명덕로터리(오늘날 명덕네거리)에 기념탑이 있었지만 훗날 두류공원으로 이전했다.[15] 현 환일고등학교.[16] 현 용문고등학교[17] 요즘의 물대포 용도 외에도 염색약이 들어간 물을 뿌려서 시위에 가담한 학생이나 시민을 색출해냈다. 2000년대 이후에도 본 거 같으면 그건 눈의 착각 대부분 흰 광목으로 된 옷을 입고 다니던 시절. 학생들의 교복도 칼라 부분은 흰색. 여담이지만 일제도 조선 사람들이 흰색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 흰색 옷만 보면 닥치고 먹물을 뿌리기도 했다.[18] 당시 총알자국이 남은 담벼락은 후에 철거되고 복원된 담벼락이 현재 길거리에 전시되어 있다. 다음 로드뷰 [19] 상이후사망자는 당일에 사망하지 않고 상이를 당했으나 4.19 혁명 기간은 물론이고 1960년까지 생존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을 포함한다. 후술할 타 지역/타 날짜 사망자 명단 또한 그렇다.[20] 당시 도립병원 간호사들은 김용실을 알고 있었다. 1년 전 길거리에서 술에 취한 채 피를 흘리는 할아버지를 들쳐업고 뛰어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간호사들은 검찰 조사에서 "경찰이 병원장에게 김용실의 검안서에 주머니에서 삐라가 나왔다는 내용을 쓰라고 했으나 원장이 거부했다"고 진술했다.[21] 동아일보는 3.15 카르테라는 코너를 아예 따로 마련해서 매일 선거 관련 소식을 현지 르포로 보도했고 AP통신도 사안의 귀추에 주목하고 있었다.[22] 이승만은 장관들과 만난 자리에서 "요새 자유당 내가 대단히 소란한 것 같이 들리는데 우리가 민주당의 내분을 옳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흉을 보았던 것인데 자유당이 단결해서 일을 잘해오다가 소란과 내분의 인상을 국민에게 주는 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부끄러운 일이라. 합심하여 조속히 수습책을 강구하라" 라고 발언하였다.[23] 장면을 중심으로 한 신파는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식 자유주의자들이라 장외투장 같은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이 오히려 미국식 자유주의는 폭압적인 독재자(tyrant)에 저항하기 위해서 시민들이 총 들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자유당이 작정하고 국민들을 두들겨 패는 상황에서 원내투쟁 운운하는 신파는 참으로 사태 파악이 안되던 것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을 듯. 그러니 5.16 때도 그 지경이었나 [24] 동아일보에선 이를 두고 "10살을 마음대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경찰이니 공산당원 하나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군" 이라며 비웃는다.[25] 최인규는 훗날 5.16 군사정변으로 군정이 시작되자 군부에 의해 마산 시민에 대한 발포의 책임을 물어 사형당한다.[26] 나중에 국회 조사단이 조사한 결과 그 최루탄은 벽을 뚫고 들어가는 고성능 최루탄이었으며 심지어 그 최루탄에는 "군중을 향해 쏘지 말 것" 이라는 설명까지 적혀 있었다. 원래 최루탄은 군중을 향해 쏘는 게 아니라 공중에서 터뜨려서 시위대를 분산시키는 용도다. 그러나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는 경찰이 대놓고 직격으로 최루탄을 발사하고는 했다. 흥미로운 것은 후일 5공화국 정권을 무너뜨린 6월 항쟁에서도 경찰이 직사한 최루탄을 머리에 맞아 죽은 사람이 나왔고, 이 사건이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래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일지도.[27] 이때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의 참여는 상대적으로 미진한 편이었다. 앞 주석 참고.[28] 그러나 이때는 부산일보와 동아일보가 이미 11일 당시에 취재하고 전국에 특종을 터뜨린 상태였다. 이때 기자가 훗날 할 말은 하는 정치인으로 국회의장까지 오른 이만섭.[29]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 속에 이와 같은 구호들은 사실 수없이 많았다. 당장 저 5.18 민주화운동 때만 해도 "김일성은 오판 말라, 반공 정신 이상 없다" 같은 구호도 있었고.[30] 현재 서울특별시의회 본관 건물.[31] 광화문은 이때 복원되지 않고 있던 상태여서 세종로 앞은 뻥 뚫린 공터였다.[32] 경찰 사망자는 하늘색으로 구분하였다.[33]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의 만해광장 옆 언덕배기에 있는 동우탑은 노희두 열사를 기리기 위한 추념물이다.[34] 진영숙은 당시 희생자중 유일하게 유서를 남긴 학생이다. 데모대의 버스를 타고 구호를 외치다 북선파출소에서 날아온 총탄에 그자리에서 사망. 당시 나이 불과 14세였다.[35] 당시 서울대학교는 단과대별로 캠퍼스 소재지가 달랐다. 상과대학의 경우는 현재의 종암동 서울사대부고 위치에, 사범대학은 신설동 건너서, 서울사대부고는 현 청량리 미주아파트 부지에 있었다.[36] 해방 후 정인보가 학장으로 취임한 종합대학이었다. 현저동에 있었다고 하며, 60년대 후반 우석대학교(현 우석대와 무관)에 흡수되었으나 이 우석대마저 통째로 1971년 고려대에 흡수합병됨에 따라 현재는 고려대학교의 전신 중 일부로 인정받고 있다.[37]중앙대 예술대학.[38] 지금도 좁지만 그 당시에도 좁던 그 길을 대형 수도관 2개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39] 당시 이런 두건은 최루탄을 막기도 했지만 후에는 시야 방해로 기관총에 학생들이 죽는것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을 상대로 총을 쏜 경찰의 진압은 이러한 이유로도 용서가 될 수 없다.[40] 이 부분은 기록에 따라 전후 사정이 뒤바뀌어있다. 동국대학교 측과 3.15의거기념사업회측의 기록은 발포 전이 아니라 발포 후 탈출로를 찾는 과정에서 소방차 쪽으로 오히려 진출하여 이탈에 성공했다고 기록하고 있음. 이 외에도 여러 상황과 기록을 종합해볼 때 동국대생들이 바리케이트를 뚫은 것은 버려진 전차(電車)였고 소방차는 조준 사격을 피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듯하다.[41] 당시 문리대 캠퍼스는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맞은편인 마로니에공원 자리로 일설에는 관악캠퍼스로의 이전 이유가 서울시내로의 진입이 용이한 서울대생들을 산골짜기에 격리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서울대학교 정문의 로터리 구조나 전투경찰부대 입지를 보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 사실 현재 서울대의 관악캠퍼스는 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들어가는 것도 힘들다. 심지어 그 일대는 등산객들이 자주 온다는 카더라가 있다(...).[42] 본문에서는 7명으로 표시되고 있지만 확인되는 명단은 6명밖에 확인이 되지 않는다. 2009년 10월 서울대 캠퍼스 내에 조성된 '서울대 민주화의 길' 4.19 공원에 있는 명단에 보면 6명의 명단만이 확인되는데 자세한 것은 더 알아봐야 할 사항 같다.[43] 이 선언문을 기초한 이수정은 한국일보 기자로 재직하다가 후에 5공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서 5공 체제 홍보의 일익을 담당했다.[44] 단기로, 서기 1960년이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1961년까지 단기가 국가 공식 연호였다.[45] 그리고 당시 박정희는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다. 계엄군으로 위장한 일부 군인들이 경무대에 잠입해 이승만을 끌어내리고 쿠데타를 하겠다는 것. 그러나 이종찬 육군대학 총장이 있었기에 이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당시 박정희는 명망높은 군인이였던 이종찬 총장을 설득, 후에 일어날 구설들을 막기위한 바람잡이로 기용할 생각이였으나, 이종찬 총장은 군이 시위진압, 쿠데타에 이용되는 걸 반대했기에 박정희의 쿠데타는 무의로 돌아갈 수 있었다.[46] 아이러니한 것은 1957년경 사망한 경찰 초대 총경 차일혁은 무정부주의자적 성향에 가까웠다는 것.[47] 김정남, '4.19 혁명', 2003, 84페이지.[48] 이는 미국이 이승만 정권의 독선배타적 외교 행태를 탐탁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특히 미국은 자본진영 우방국인 일본과 남한이 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원했으나 이승만은 항일운동가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승만 라인(평화선)을 선포하는 등 대일외교 부분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행보 때문에 2ch 혐한들은 이승만을 매우 싫어한다. 정작 한국에서는 친일파를 자기 세력에 끌어들여서 친일파 득세의 원흉(게다가 보수우익 가운데 상당수도 친일을 용서했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찬양하는 경우까지 있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여담이긴 하지만 이승만이 한 일 중 호평받는 것 중 하나가 독도 해역 들어오는 일본 배는 꼬박꼬박 나포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이른바 '이승만 라인(평화선') 이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49] 이에 대해 "이승만이 하야하면 대통령직을 받을 사람이 사임하면 어찌하겠느냐" 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하야를 촉구하는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50] 전날인 23일에 이승만이 허정에게 찾아가 사태수습 방안을 물으며 입각을 권유할 때, 거의 애걸조였고 목소리가 떨렸으며 흥분되어 있었다. 출처는 《사실의 전부를 기록한다 - 허정 편》, 희망출판사, 1966, p.207.[51] 은행이 전산화 되기 이전에는 월급이 계좌이체 되는 것이 아니라 수령자가 직접 봉투에 담긴 두툼한 현금으로 받았다.[52] 그런데 이것도 사실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다. 조선시대에서 식자층은 모두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했고 선비의 의무였다. 물론 벼슬하는 일을 거절하는 것이 청빈의 상징으로서 좋게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벼슬직을 해먹는 것과 정치를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가령 남명 조식 역시 벼슬은 전혀 하지 않았으나 상소는 여러 번 올렸다.[53] 지금도 대학 교수는 대단한 직업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직업이였다. 광복 후 가난하고 초등교육조차 못받았던 시대에 대학을 나와서 그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당시 대한민국의 최고 지식인인 셈. 다른 일화로는 사사오입 개헌 당시 이승만이 자문을 구했던 사람도 수학교수였다.[54] 현재 그 자리에는 4.19 혁명기념도서관이 설립되었다.[55] 현재 그 자리에는 김구 동상이 서있다.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보수개신교계와 보수세력, 뉴라이트들이 광화문 광장에 이승만 동상 건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조선일보가 적극적으로 기사화하고 있다. 물론 실속은 영...[56] 1960년 당시 국민학교 3~6학년이면 1948~1951년 생으로 2018년 현재 60대 후반-70대다. 참고로 이 연령대에 계신 분들은 1970년대 유신정권 철폐를 위한 운동은 물론 6월 항쟁 당시 넥타이 부대로 나선 분들이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하이라이트를 몸으로 겪으신 분들. [57] 현재 종로구청 자리에 있었다. 도심 한가운데여서 당시 총격의 한가운데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학교는 1977년에 폐교되었으나 2001년 강북구 번1동으로 자리를 옮겨 재개교했다.[58] 물론 일설에 의해 알려진 바와는 달리 국민학생들의 자발적인 시위는 아니었고 교사들이 먼저 협의하고 교사의 인솔하에 거리로 나온 것.[59] 비슷한 일화로 6월 민주항쟁당시 진압 경찰들에게 을 주며 전경들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이 꽃 받으세요가 있다.[60] 이승만에게 가장 충격을 주었다. 이는 군대가 이승만에게 등을 돌렸다는것이 드러났다.[61] 어떤 만화에서는 끝까지 버티려 하다가 도움을 줄 거라 예상했던 주미대사관의 직접적 압박에 의해 현실을 직시하고 비서에게 자신이 말하는 대로 적으라고 했으며 비서가 무슨 내용을 말하실 거냐고 묻자 사임서를 쓰겠다고 말하는 내용으로 나타나 있다.[62] 출처- 김정렬, '김정열회고록', 을유문화사, 1993년, p268~269.[63] 재미있는 것은 당시 서울시내 치안 유지를 계엄군 외에도 각급 학교에 맡겼다는 사실이다. 4월 27일, 허정 내각수반과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시민들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이같은 조치를 요청했고 예컨대 시경과 종로경찰서는 동국대학교가 담당했다.[64] 하지만 일가족 자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타살일 가능성도 있다는 음모론이 있다지만 확실한 것은 불명. 야인시대에서는 일단 영상으로는 이승만에 양자로 들어갔던 큰아들 이강석이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다는 걸로 묘사했으며 나레이션을 통해서 타살이라는 설도 있음을 밝혔다.[65] 5.16 이듬해인 1962년 3월 귀국하려 하였으나 정부(특히 박정희 당시 의장)에서 거부해서 실패하였다.[66] 아이젠하워는 1960년 6월 방한하였다.[67] 사실 이승만이 어릴 적 겪었던 갑신정변은 문자 그대로 3일천하였다(...). [68] 마침 국제정치계에서 일던 제3세계의 비동맹주의 중립화론이 국내 지식인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유입되기도 했고, 이 영향으로 민족통일연맹(학생)과 민족자주통일협의회(혁신계 정치인) 등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모임이 결성되어 활동하기도 했다.[69] 박정희는 4.19 1주년이 되면 1주년 기념 시위로 사회가 혼란스러울 것이라 생각하고 쿠데타를 준비하였지만 그날이 생각보다 조용해서 수틀려버려 무산되었다는 말이 있다.[70] 이후 다시 혁명으로 공식적으로 격상된 건 1995년. 몇몇 뉴라이트는 이를 근거로 4.19를 혁명이 아닌 의거로 주장하며, 심지어 4.19가 혁명이 된 것은 좌파 때문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으나 비록 '의거'로 깎아내렸을지언정 박정희 정권 내내 헌법 전문에 (심지어 그 악명 높은 유신헌법에서도!) 4.19 정신 계승을 기록한 걸 보면 흠좀무...[71] 헌법 전문에 나와있는 '4.19 정신 계승' 문구는 시민의 저항권에 대한 근거 내용으로 언급되기도 한다.[72] 때문에 5.18 민주화 운동들의 의의를 어떻게든 깎아 내리려는 수구세력들도 4.19만큼은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 4.19에 대한 부정은 곧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 대한 부정으로 직결되기 때문. 그러나 2010년대 들어서는 뉴라이트를 비롯한 우파 쪽에서 이승만을 '국부'로 숭앙하는 움직임 때문에 4.19 정신도 흔들릴 수 있는 위기에 처하고 있다.[73] 이들은 2015년 현재 70대 중후반이다.[74] 이러한 주장들은 주로 조선일보뉴라이트, 뉴데일리가 주도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 같은 경우는 오래 전부터 이승만 재평가에 앞장섰는데 이미 90년대에 솔빛조선 미디어라는 사업부로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이라는 CD를 내서 팔기도 했다. 더불어 이승만이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다고 한기총까지 동상 건립을 시도하고 있으나 개신교계에서도 찬반이 워낙에 엄청나서 갈등이 크다고 한다.[75] 자식이 없던 이승만은 양아들이던 이강석(이기붕의 큰 아들)이 자살했기에 하와이에서 당시 30대인 이인수를 양아들로 받아들였다.[76] 해당 역에서 덕성여자대학교가 4.19 묘지보다 가깝지만 4.19 혁명 그 자체의 가치가 일개 대학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위치이며 4.19라는 것이 강북구에서도 밀어주는 주요 랜드마크이다보니 그렇게 정해진 듯 하다.[77] 꽃동네를 설립한 그 오웅진 신부 맞다. 김주열 열사와 오웅진 신부는 펜팔 친구였다고 한다.[78] 금남 56번이 광주에서 4.19 혁명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광주고등학교 앞을 지나기 때문.[79] 초대 민선 용산구청장, 16대 국회의원(용산).[80] 마산시진해시를 병합했기 때문에 마산시의 역사도 계승한다.[81] 자세한 내용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