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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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장칭


중국어: 四人帮, 영어: Gang of Four 사천왕
사실 방(幇)이라는 글자는 '깡패', 또는 '패거리'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파생되어 '암흑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상하이의 청방(靑幇)과 홍방(紅幇)이다.

1. 개요2. 준동3. 종말4. 평가5. 트리비아

1. 개요[편집]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마오쩌둥의 주위를 맴돌며 권력을 장악한 네 사람을 가리킨다. 각각 마오의 부인이자 정치국 위원이었던 장칭(강청江青)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이었던 왕훙원(왕홍문王洪文), 정치국 상임위원이자 국무원 부총리였던 장춘차오(장춘교張春橋), 문예비평가 겸 정치국 위원 야오원위안(요문원姚文元)을 가리킨다.

주요 무기는 언론기관이었는데, 이 언론을 장악해 홍위병을 선동했다.

2. 준동[편집]

대약진 운동의 개삽질이 당 내부에서도 비판받게 되자, 마오쩌둥은 라이벌이었던 류사오치에게 밀려나 상하이로 옮겨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이를 박박 갈던 마오가 준비한 것이 바로 문화대혁명이었고, 4인방은 마오와 함께 문화대혁명의 실행을 도맡으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두목 역할은 마오의 부인이었던 장칭이 맡았고, 왕훙원은 상하이에서 혁명 지지 위원회를 결성해 세력을 키우는 임무를 맡았다. 언론인이었던 장춘차오는 혁명 지도 소조의 요직을 맡아 이 병크의 이론화/체계화를 담당했고, 야오원위안은 각종 논설에서 반대파에 대한 공격을 맡았다.

하지만 강한 권력욕을 지닌 사람이 네 명이나 모이다 보니 가끔 스텝이 엉키거나 다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하고, 심지어는 마오가 신임하던 저우언라이린뱌오 같은 혁명 동지들조차 맹렬하게 비난하거나 제거 음모를 꾸미면서 권력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등 마오 자신도 통제가 힘든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사실 이때쯤이면 마오 자신도 말년에 접어들어 병상에 누워있는 처지에 있기에..

3. 종말[편집]

결국 1976년 저우언라이 사후 벌어진 천안문 사건에서 이들은 중국 인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마오쩌둥이 죽으면서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해줄 사람들도 없었다. 이에 4인방은 마오쩌둥의 뒤를 잇기 위해 자신들의 정치적 근거지인 상하이에서 병력을 소집하고 장칭과 친밀했던 마오쩌둥의 조카, 마오위안신을 통해 베이징의 군부대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예젠잉 등이 4인방 체포를 촉구했고 10월 4일 저녁 예젠잉이 직접 화궈펑을 찾아가 "선발제인"이라는 고사를 인용하며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화궈펑을 독촉했다. 이날 예젠잉은 화궈펑에게 10월 6일이나 7일에 4인방을 체포하겠다고 못을 박고 떠났다. 이후 왕둥싱도 가세함에 따라 10월 6일 저녁 8시에 4인방을 체포한다는 계획이 준비되었다.

10월 6일 왕둥싱은 중앙 판공청 부주임 장요사를 비롯한 휘하의 행동조를 소집했다. 8시 30분, 왕둥싱의 명령을 받은 행동조는 중난하이의 장칭의 숙소인 만자랑 301호에 돌입했다. 실크 잠옷을 입고 외국 비디오를 시청하고 있었던 장칭은 이들이 자신을 체포하려 들어온 줄은 모르고 허락없이 들어온 행동조에게 무슨 일이냐고 화를 냈지만 행동조는 장칭에게 어떤 경칭도 사용하지 않고 격리 심사를 통보하고 즉각 연행했다. 장요사는 장칭에게 개인 문서고 열쇠를 내놓으라고 명령했는데 자존심 강한 장칭은 장요사를 노려보다가 갈색 봉투 위에 화궈펑 동지 친전이라고 쓰고 열쇠를 넣어 건네줌으로 자신이 행동조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 화궈펑에게 자신의 손으로 열쇠를 넘겨준 것이라는 정신승리를 했다. 이후 장칭은 발악하며 저항했다는 썰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한편 7시 55분, 중난하이의 회인당에서 화궈펑과 예젠잉이 장칭을 제외한 나머지 3인방을 호출했다. 왕둥싱도 현장에 있었으나 상임위원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으면 의심을 살 수 있었으므로 병풍 뒤에 숨어 있었다. 맨 먼저 장춘차오가 서류 가방을 들고 나타나자 중앙경호대 8341부대 소속 행동조들이 그의 양 옆에 붙어섰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장춘차오는 자신의 의자가 없고 화궈펑과 예젠잉이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고 뭔가 크게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화궈펑이 4인방을 반당, 반사회주의 혐의가 있으므로 격리 심사할 것이라는 선포문을 읽었고 경악한 장춘차오는 맥없이 끌려나갔다.

뒤이어 들어온 왕훙원은 행동조가 자신을 붙잡으려들자 격렬히 저항했다. 행동조에게 붙들려 화궈펑 앞에 끌려온 왕훙원은 격리 심사 선포문을 듣자마자 예젠잉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이에 왕둥싱이 소총을 들고 와서 왕훙원을 제압하려 했지만 예젠잉이 다칠까봐 쉽사리 발포할 수는 없었다. 결국 체포조가 왕훙원을 결박하여 끌고 나갔다. 8시 15분에야 도착한 야오원위안은 자동차에서 내리자마자 행동조에게 포위됐다. 다급해진 야오원위안이 측근들을 소리쳐 불렀지만 회인당 바깥에서 대기하던 측근들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대기실로 끌려간 야오원위안은 조금 전과 같은 소동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앙 경호대 경호국 부국장에게 격리 심사를 통고받고 연행되었다.

체포된 4인방은 마오쩌둥이 사망한지 28일만에 중난하이 지하실에 수감되었다. 4인방이 체포되자 예젠잉과 화궈펑은 탕산 대지진 피해 현장의 복구 작업을 맡고 있던 베이징 군구 부정치위원 지호전과 당 중앙 대외 연락부장 경표를 불러 4인방 체포를 알리고 야오원위안의 입김이 강하던 중앙 전시대, 인민일보사 등의 언론 기관을 점거했다. 10시 30분, 예젠잉은 자신의 별장인 옥천산 9호관에 정치국원들을 불러모아 긴급 정치국 회의를 소집했고 11시에 회의가 시작되었다. 예젠잉은 4인방 체포를 알렸고 이에 리셴녠 등 정치국원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회의는 다음날인 7일 새벽 4시까지 이어졌고 정치국 회의는 화궈펑을 당군 최고 지도자로 지명했다.

10월 12일 4인방 체포가 서방 언론에 보도되었고 이에 4인방의 근거지인 상하이에서는 4인방 석방을 요구하는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하지만 10월 18일 상하이의 지도자들이 신속하게 체포되면서 4인방의 무력기반도 붕괴되었다.

1981년에 공개 재판이 열렸는데, 장칭은 게거품을 물며 재판관들과 덩샤오핑을 저주했지만 나머지 3인방은 즉각 태도를 돌변하여 이게 다 장칭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매우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여 장칭에게 덩달아 욕을 먹었다. 결과적으로 장칭과 장춘차오는 사형 집행유예로 원래는 사형이지만, 2년간 별일없이 복무하면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주는 형을 받았고, 왕훙원은 종신형을, 야오원위안은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판결 후 2년 뒤에 장칭은 종신형으로 형량이 조정되었지만, 1991년에 지병인 식도암 치료를 위해 병원에 옮겨진 뒤 목을 매 자살했다. 왕훙원은 1992년에 감옥에서 복역 중 병사했고,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는 각각 1996년과 1998년에 가석방됐는데, 장춘차오는 가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병으로 죽었고 야오원위안은 2005년에 상하이에서 지내다가 병사했다.

4. 평가[편집]

원체 해먹은 게 많은지라 중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쿨타임 없이 까이지만, 다른 주동자들에 비해 이들의 악함을 너무 과하게 부각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허나 그걸 빼더라도 까일 수 밖에 없다는 게 함정. 마오도 제지하려고 했을 정도라고 하는데, 사실 이 시기쯤되면 마오도 늙어 병석에 앉아있을 시기가 되었기에 4인방의 행동을 일일히 제지하기가 힘들었다고 보면 된다. 마오쩌둥은 1970년 이후로는 루게릭병과 비슷한 증세를 보여 거동이 극히 제한되었다. 1972년 리처드 닉슨의 방중 때도 건강이 나빠서 직접 회동하지 못하고 저우언라이가 모든 의전을 담당했을 정도.

문화대혁명과 이들의 빠순이질 덕분에 도리어 마오쩌둥은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낮아졌고, 그 덕분에 마오쩌둥의 후계자라고 자처하던 화궈펑도 덩달아 영향력이 약해졌다. 원래 까였던 덩샤오핑의 경제정책들은 오히려 지지도가 높아졌기도 했고, 사실상 중국 정치권에 만연하던 마오이즘의 끝을 찍어준 인물들. 물론 반대로 이들이 문혁의 병크를 모조리 감당하면서 마오쩌둥 신격화가 더 공고해진 면도 있다.

이들이 숙청된 뒤 덩샤오핑이 화궈펑을 축출할 때 마오 신봉자였던 화궈펑의 측근 네 명을 같이 쫓아냈는데, 이들도 '소4인방' 이라며 잠시 까였다. 하지만 원조의 치적이 워낙 막강한 지라 이내 듣보잡화.

그리고 재미있는 게 장칭이 재판에서 한 발언인데, 자기가 여자로서 마오쩌둥을 따라다니며 대장정을 완료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깔 자격이 없다는 거였다. 문제는 당시 재판장에 마오쩌둥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수많은 원로들이 넘쳐났다는 것. 이것은 곧 대장정, 국공내전, 중일전쟁 동안에 전선에서 구른 베테랑들을 안전한 후방에서 노가리 까고 있던 자신보다 못한걸로 치부했다는 말이다. 게다가 정작 장칭은 대장정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평소 장칭의 성격을 보면 그런 말 하고도 충분히 남을 사람이긴 하다.

5. 트리비아[편집]

이들에게서 유래한 표현으로 몇 명이 몰려다니는 집단을 가리킬 때 'n인방'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에는 3선 개헌을 주도한 김성곤, 길재호, 백남억, 김진만을,90년대 초반 바둑계를 주도했던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유창혁을 뭉뚱그려 4인방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을 오래 보좌한 핵심 비서진 3명을 '문고리 권력 3인방'이라 부르기도 한다. 최순실까지 포함하면 권력구도 까지 완벽한 '4인방 체제' .


배철수만화열전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이각, 곽사, 장제, 번주를 4인방이라고 지칭했다.

영국 펑크록 밴드인 갱 오브 포는 이들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만든 밴드다...라는 건 훼이크고, 그냥 신문 훑어보다가 눈에 띄길래 이름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