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당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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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위 도표는 2003년 가을에 나왔다. 그래서 아직 창설되지 않은 열린우리당이 "국민참여통합신당"으로 표기되어 있다. 95년에 창설된 통합민주당은 통일민주당으로 잘못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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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창당연에서 술잔을 나누어 든 3당 합당의 장본인 4인방. 좌측부터 박태준,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진행 순서

1990년: 민주자유당 창설에 참여한 정당과 과정, 국회의원 수

1

민주정의당 125석 (1981년)

통일민주당 59석 (1987년)

신민주공화당 35석 (1987년)

2

민주자유당 218석(1990년)


1. 개요2. 배경3. 4당 합당?4. 합당 과정의 이탈자5. 합당 이후 권력투쟁6. 평가
6.1. 긍정적 평가6.2. 부정적 평가
6.2.1. 기울어진 운동장과 지역주의 강화6.2.2. 민주세력의 분열과 반목
7. 트리비아8. 관련 문서

당시 문화방송 보도 뉴스.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은 민주 발전과 국민 대화합,민족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 오로지 역사와 국민에 봉사한다는 일념으로 아무 조건 없이 정당법의 규정에 따라 새로운 정당으로 합당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

1. 개요[편집]

정치계의 큰 영향을 줬던 전례없는 사건
현재의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이 탄생한 사건

1990년 1월 22일 발표되어, 그해 2월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야합한 사건. 그래서 지금까지 국내 보수 세력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민주자유당이 탄생한다.[1] 3당 야합이 터지면서, 13대 총선에서 비롯된 여소야대는 도로 여대야소가 되었고, 김대중평화민주당은 유일한 원내 야당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동안 호남 VS PK VS TK VS 충청도의 4자 구도로 이어져 왔던 지역 정치 구도가 순식간에 호남 VS 非호남으로 단순화되면서 지역적으로 호남이 고립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2]

2. 배경[편집]

1987년 12월 16일 치뤄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화 투쟁의 선봉장에 섰던 양김인 김대중김영삼의 분열로 의해, 군사 독재 정권의 후신인 민주정의당노태우가 어부지리격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애초부터 낮은 지지기반 속에서 시작한 노태우 정권은 이듬해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레민주당 1석[3], 무소속 9석이라는, 국내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집권 여당이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는 여소야대 국회를 불러오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여소야대 상황과 강해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정치사회권도 자연스레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제도권 정치인 국회 운영에서도 항상 과반수를 차지하던 제1당 그러니까 집권당이 독식하던 국회 부의장과 상임위원장을 정당 의석수대로 배분하는 관례가 처음 만들어지고 모든 법률/예산 심사와 국회 통과가 여야 4개 정당의 협상으로 처리된다. 4개 정당이 의석을 절묘하게 나눠가진 결과 어떤 정치세력도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국회선진화법 이전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인 집권당의 날치기와 이를 막기 위한 야당의 국회점거농성, 일명 국회공성전이 유일하게 없던 때가 바로 이 시절이었다. 각자의 원칙과 주장을 목청높여 외치면서도, 서로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민주주의 정치 본연의 모습이 살아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여소야대는 한국정치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5.18 민주화운동, 언론통폐합, 제5공화국의 권력형 비리 등 과거 군사정권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 국회 청문회가 TV생중계가 되면서 전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4] 곧바로 전두환 일가와 측근들의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로 수십여명이 구속되거나, 정계에서 강제 퇴출되었으며, 전두환은 백담사로 사실상 귀양을 떠나야 했다. 이와 함께 사회 각 분야에 민주화 분위기가 몰아치면서 국민성금으로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으며, KBSMBC는 그동안 독재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해온 것을 반성하는 프로그램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또한 그간 억눌려있던 노동자들이 경제 성장에 기여한 자신들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면서 전투적 노동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전교조가 탄생했고, 프로야구 선수들은 선수 노조 결성을 시도했으며,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약칭 경실련)이 등장하면서 시민운동이 태동했다. 학생운동과 재야에선 금기시되던 통일 논의에 불씨를 당기면서 1989년 한 해에만 문익환 목사, 전대협 대표 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 등 여러 건의 방북 사건[5]이 일어났다. 즉, 군사 독재 정권 시절 억압에 의해서 감춰져 있던 사회 각 분야의 모순들이 일제히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노태우 대통령과 민정당 그리고 보수 언론 등 기존의 주류 기득권 세력들은 이런 상황을 매우 불만스럽게 보았다. 정점에 선 독재자를 중심으로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모습에 익숙하던 사람들에게, 여론을 살피고 야당과 타협하면서 한 발자국씩 전진하는 모습을 거추장스럽고 비효율적이며 나약한 것처럼 여긴 것이다.[6] 사회 곳곳에서 분출되는 다양한 목소리는 각 분야에서 군대식으로 조직되있던 기존 질서를 흔들기 시작했으며, 이것을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대통령의 위엄이 사라졌다, 정부가 사회 불만 세력에게 질질 끌려다닌다, 국회가 경제 발목을 잡고 있다, 공권력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등의 보도가 나오면서 이로 인해 노태우물태우라는 조롱섞인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이에 노태우와 민정당은 이런 위기 상황을 한 방에 바꿀만한 해결책을 연구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합당을 통한 정계 대개편이었다. 1992년 차기 총선과 대선까지 지역 대립에 기초한 4당 구도가 계속 갈 거라고 본 사람은 드물었다. 4당 체제에 만족하는 정치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야 3당도 그리 상황이 순탄한건 아니었다.

우선 김대중평화민주당은 제1야당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호남과 수도권 호남표 + 개혁 성향의 20~30대 야당표 + 비판적 지지의 진보표만으로는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한계점을 명확히 깨닫고 있었다. 13대 대선 결과는 4자필승론이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었단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김영삼통일민주당은 제2야당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고, 총선에서 평민당에 뒤진 것이 온건 이미지 때문에 고정 야당표를 놓쳐서라고 판단해서 한동안은 강경한 대여선명투쟁을 외쳤다. 13대 대선에서 노태우는 올림픽 이후 국민투표로 재신임을 묻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중간평가)을 내걸었는데 김영삼과 통일민주당은 강경한 대여선명투쟁의 일환으로 중간 평가 즉각 실시를 끝까지 외쳤다. 그러나 민정당이 이에 대해 오락가락한 태도를 보여주는 가운데 오히려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중간 평가에 반대하여 투쟁에 큰 성과가 나지 못했다. 이에 김영삼은 유신 본당이라 자처하던 김종필에게 접근해서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합당 냄새를 피우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평생을 권력의 핵심부에서 보내던 김종필신민주공화당은 말년의 야당 생활이 달갑지가 않았다. 거기에 3공, 4공을 거치며 내각제가 옳다는 신념을 가지게 돼 내각제를 외치고 있었지만, 확고부동한 직선제 지지 여론을 넘을 수가 없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수백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온지 불과 2~3년 정도 지난 시점이라 이때까지는 직선제가 곧 민주주의고, 내각제는 그들만의 야합이란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팽배했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온갖 종류의 정계 개편 시나리오가 떠돌아 다니고 있었고, 언론에서도 수시로 기사화하고 있었다. 3당 합당을 아무런 조짐이 없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1989년 들어서 정계 개편과 관련해서 정말로 많은 언론 보도가 있었다. 구글링만 해봐도 과거 기사들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물밑에선 정말 경천동지할 시나리오들이 논의되었고, 그 중에 한가닥 현실화된 것이 민주정의당 + 통일민주당 +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인 것이다.[7] 심지어 1989년 12월에는 박준규 민정당 대표가 노태우 대통령 탈당, 민정당 해체, 양당제 정계 개편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다가, 당 내분으로 사퇴하는 소동까지 일어났을 정도. 그리고 불과 한 달 뒤에...

총선이 여소야대로 끝나고 난뒤 정권 핵심부에서 나온 첫 번째 방안은 민주정의당(129석)[8]신민주공화당(35석)의 합당이었다. 이러면 164석으로 국회 과반수를 훨씬 뛰어넘는 숫자이며, 두 당 모두 군사 독재 정권 출신으로 정치 노선이나 정책상에 큰 차이가 없어[9] 합당 후에도 별다른 잡음이 나오지 않고, TK충청권을 중심으로 보수층을 확실하게 끌어모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당연히 권력의 단맛을 아는 김종필신민주공화당 정치인들이 합당에 적극적일 것이란 점도 크게 작용했다. 실제 김종필은 합당 제안을 듣자마자 무조건 OK를 외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럴 경우 합당에 반발해서 김대중김영삼이 다시 손을 잡아 거대 단일 야당을 만들 위험성이 있었으며, 사실상 박정희, 전두환의 피를 이어받은 두 당이 합치면 그 당시 국민들이 염증을 내던 군바리 색채가 오히려 강화된다는 점에서 다음 선거에서 중도표를 까먹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민주정의당 + 신민주공화당 시나리오는 유야무야 묻히게 된다. 그렇게 시간만 계속 흐르면서 여소야대 상황에 시달리던 노태우 정권 핵심부에선 더 이상은 안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1989년 봄을 기점으로 보수대연합을 명분으로 하는 정계개편론이 불거진다.

이 때 노태우 정권은 김대중이 이끌던 평화민주당과의 합당을 구상했다. 이 합당이 성공하면 무엇보다도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국민대통합이란 걸출한 명분을 내걸 수 있고, 일거에 군사 독재 정권의 색채를 지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의석수도 199석으로 단독 개헌선인 200석에 단 1석 모자라는 초거대 여당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평민당 내에서 뚜렷하게 진보적 목소리를 내고 있던 재야 출신들은 당연히 이탈했을 것이지만, 호남에 기반한 당 주류 세력들은 재야 출신과는 제법 거리가 있던 사람들이 다수였다.

더구나, 당시 평민당김대중 총재는 제1야당으로 책임감 있는 정치 세력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상당히 온건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공개적으로 평민당은 '온건 중도 정당'이라면서[10] 급진적인 학생 운동, 전투적인 노동 운동과는 선을 그었다. 참고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강하던 시절에는 독재정권에 반하는 좌우 세력들이 모두 대동단결하여 소위 범민주세력을 형성해서 민주 vs 반민주(독재) 구도를 형성했지만 실제로 군사정권 시기 범민주진영의 다수는 반공주의, 민족주의[11], 사회적으론 진보적이나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를 신뢰하는 자유주의자들이었으며 이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극복하려는 사회주의, 사민주의 세력과는 확연히 구분된다.[12]

여하튼 이런 친정부적인 스탠스를 보여준 평민당은 노태우와의 영수 회담을 통해서 중간평가 공약 철회를 주장하였으며, 민정당은 우물쭈물거리는데 제1야당인 평민당이 대놓고 중간평가를 실시할 경우 정국이 혼란 속에 빠질 것이라는 주장을 하며 오히려 중간평가를 하면 안된다는 논리를 폈다. 당시 평화민주당 원내총무[13]였던 김원기가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김대중 총재를 비롯한 평민당 수뇌부는 아무리 노태우 정권이 5공의 연장선에 있다 해도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만큼 중간평가는 애초부터 말이 안 된다고 판단했었다.

더불어 1989년 10월에는 12.12 군사반란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진실 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 의문사 진상규명, 5공 비리에 대한 사법 처리, 방송민주화 등 수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국회 증언 단 한 가지만을 조건으로 5공 청산 완료에 합의해 주었다. 그 증언이라는 것도, 사실 전두환은 사전에 서면통보된 질문에 대한 답변만 하고, 개별적인 질의응답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89년 12월 31일 국회 본회의에 나온 것이며 전국에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정작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고 두리뭉술하게 변명조의 연설만 하면서 야당 의원들이 명패를 던지면서 야유를 하는 소동이 일어나는 등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일관된 김대중의 온건 행보를 보고 노태우 정권은 충분히 합당도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노태우 정권의 실세였던 박철언 정무장관이 김원기 원내총무를 통해서 합당을 처음 제안했고, 이후에도 여러차례 제안이 들어갔다. 1989년 겨울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김대중 총재에게 다시 제의하기도 했다. 당시 합당의 조건으로 신당의 총재직은 물론이거니와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에 대한 전권을 주는 방안까지 나왔을 정도로 노태우 정권은 합당을 통한 정계 개편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계속되는 노태우의 합당 제안에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가 불편하다고 마음대로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키는 일이고 정치 윤리를 망치는 일이다”, "끝까지 야당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고 싶지, 합당을 통해서 정권을 잡고 싶지 않다"라면서 거절해버렸다.

한편 제2야당으로 전락해 숙명의 라이벌인 김대중과의 대권 경쟁에서 밀렸다고 생각했던 김영삼은 초기엔 김종필과의 연대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과 평민당이 점점 부각되면서 노태우 정권에 대한 대립각과 선명성을 부각하던 김영삼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간데다, 1989년 말 동해시 보궐선거에서 가신인 서석재 의원이 신민주공화당 이홍섭 후보를 매수하려 한 혐의를 받아 도리어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노태우 측으로부터 합당 제의가 오자 김영삼은 회심의 승부수로 이를 수락했고, 원래부터 민정당과 비슷한 성향이었던 김종필 역시 합류하여 1990년 1월 새해 벽두에 기자회견을 통해 이를 공개하게 되었다.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당의 이름을 민주자유당이라고 했는데, 이는 비슷하게 보수대연합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자유민주당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추정된다. 참고로 이 이름은 김영삼이 제안했다고 알려져 있다.[14] 이들은 합당 당시 개헌 가능 의석수인 200석을 훨씬 넘겼으므로 "내각제 개헌"을 비밀리에 약속했고, 각서까지 만들어 두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당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이 맡았고, 대통령을 대신하여 당 운영을 책임지는 대표 최고위원은 김영삼이 맡았다. 그리고 김종필민정당의 대표였던 박태준은 최고위원을 맡았다. 이로써 노태우 정권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절대 다수의 의석을 확보한 여당을 갖게 되었고, 합당을 거부한 김대중평화민주당만이 유일한 야당으로 남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지역주의 구도도 호남 VS PK VS TK VS 충청도의 4자 구도에서 호남 VS 非호남 양자 구도로 변하게 된다.

3. 4당 합당?[편집]

사실 나중에 드러난 바로는 노태우 대통령은 첫번째로 김대중 총재 측에 합당 제안을 했다가 거절당한 후 바로 김영삼, 김종필 총재한테로 눈을 돌려서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협상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후 김영삼, 김종필 총재와 어느 정도 이야기가 풀려나가고 있던 시점에 재차 김대중 총재한테 합당 제의를 했지만, 그는 이때도 상술했듯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일이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제는 지난 얘기지만, 만약 김대중 총재가 이때 이 안을 수락했다면, 한국 정치계는 장기간 옆나라처럼 일당 독점 체제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실제 노태우 정권의 전략가였던 박철언 정무장관의 최초 정계 개편 구상은 보수대연합(4당합당)+내각제 개헌 콤보였다고 한다. 당시 집권 민정당과 나머지 야3당이 지지기반만 다르지 정치노선은 큰 차이가 없는 보수정당들이니 다 합쳐서 보수대연합 정당[15]을 만들고, 평민당과 민주당에 있던 진보파 인사들은 당연히 합당을 거부할테니 이 사람들이 재야세력과 합쳐서 진보정당을 만들면 절대다수 보수당 vs 소수 진보당의 1.5당 구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회의원들이 권력을 균점하는 일본식 내각제 개헌을 곧바로 성사시켜서 압도적인 집권 보수당내에서 계파들끼리 돌아가면서 정권을 잡으면 된다는 것. 즉, 옆나라 국민들이 자민당/총재 교체를 곧 정권교체로 인식하던 일본의 55년 체제를 그대로 재현할려고 했던 것이다.

이게 이뤄지지 않은게 박철언 입장에선 못내 아쉬운지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호남에 기반한 김대중 총재가 합당을 거부하면서 의도치 않게 호남 포위 구도가 되버렸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때문에 일각에선 호남 고립 현상을 김대중 총재가 어느정도 자초했다는 시각도 있는데, 애초 이런 인위적인 정계개편은 김대중 스스로 말했듯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 정국에 대한 배신이었고 정치 윤리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떳떳지 못한 일인건 사실이었다.

또 다른 당과 달리 5.18학살을 겪은 호남을 기반에 둔 김대중으로선 학살의 가해자격인 5공 세력의 후신과 손을 잡는다는게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16] 그리고 덕분에 국내 진보 세력은 그나마 사면초가를 면할 수 있었으니 아이러니이다.

군부독재의 후신인 민정당, 공화당과 민주세력인 평민당, 통일민주당의 정치노선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에 의문을 느낄법한 위키러가 있을텐데,상술한대로 당시 언론들은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도 보수야당이라고 분류했다.

가령 당시 우익 세력과 혁신 세력[17]을 갈랐던 중요한 잣대인 국가보안법에 관한 당시 4당의 입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노태우의 민정당 : 문제조항 부분 개정 가능.
2. 김종필의 공화당 : 문제조항 부분 개정 가능.
3.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 문제조항 부분 개정 가능.
4.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 폐지 후 민주질서보호법 대체입법과 형법상 간첩죄/내란죄 부분 강화.

한편 재야와 학생운동/노동운동 쪽에서는 조건없는 완전폐지를 주장했고 대체입법도 반대했다. 즉, 앞의 3당은 큰 차이가 없었고, 실제로 이렇게 개정된 것이 현행 국보법이다.

한편, 평민당의 주장인 "과거 악용된 사례가 많으니 일단 폐지하지만 분단현실을 고려해서 유사한 내용의 대체입법과 형법강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은 훗날 참여정부에서 이와 유사한 안을 통과시켜보려 했지만 한나라당의 극렬한 반대로 결국 실패하는데, 이것조차 완전폐지를 주장하는 비제도권 진보세력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그 외 외교안보정책은 굳건한 한미동맹의 바탕 위에서 공산권 및 북한과의 대화로 4당 모두가 대동소이해서, 실제 노태우 정부가 공산권 및 북한과 조건없이 대화하겠다는 7.7선언을 발표하고 북방정책을 추진했을때 모든 정당들이 환영했다.

경제는 어차피 관료가 주도해서 재벌 중심, 수출위주 성장으로 똑같았고 교육 정책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18] 당시 노태우 정권 핵심부가 평민당과의 합당 혹은 정책연합을 고려했던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4당 합당은 불발되었고 3당 합당만 이뤄지게 된다.

4. 합당 과정의 이탈자[편집]

(동영상 6분 55초부터) 3당 합당을 반대하면서 강하게 항의하는 노무현 前 대통령. (당시에는 초선의원이었다.)

"이게 회의입니까? 이것이 어찌 회의입니까? 이의가 있으면 반대토론을 해야 합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도 있습니까?"

- 3당 합당에 반대하던 당시 노무현 초선의원.[20]


3당 합당 발표 직후에는 통일민주당의 거의 모든 의원들과 원외인사들이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심지어 상도동계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최형우조차 공개적으로 "나는 안간다"면서 합당거부를 선언하고 다른 합당거부파 인사들과 함께 새로운 야당 창당을 준비했을 정도. 이를 보면 협상이 진짜 극비리에 이루어지긴 한 모양이다.[21]

그러나 김영삼이 직접 1:1 설득에 나서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김영삼의 간곡한 설득에 최형우가 결국 마음을 바꿔서 합당동참을 선언했고, 그 뒤를 이어 시간이 갈수록 김영삼의 설득에 넘어가는 인사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결국 통일민주당의 거의 절대 다수가 합당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이 때 김영삼 총재는 "노무현 의원은 어차피 동참 안 할 사람"이라면서 아예 만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훗날 "솔직하게 나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은 이때의 YS를 회상하며 나의 일그러진 영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의 합당은 야합이라면서 끝까지 이를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다.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이었는데 이들은 합당발표 직후부터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끝까지 소신을 지켰다.

또한 당시 야당에서 김영삼, 김대중의 바로 다음 급이었던 이기택 부총재는 오랜시간 고민하다가 결국 합당거부로 마음을 정하고 앞의 통일민주당 내의 합당거부파 의원들과 당시 무소속이었던 이철, 박찬종과 더불어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당시 민주당은 소속 국회의원이 이기택,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이철, 박찬종 딱 8명에 불과했기에 언론에선 속칭 꼬마민주당이라고 불렀다.

김종필이 이끌던 신민주공화당에서도 대전직할시 동구 갑 선거구의 초선 김현 의원이 민자당 합류를 거부하였다. 그는 무소속으로 있다가, 상술한 꼬마민주당이 신민주연합당[22]과 합당하여 민주당을 창당하자, 여기에 참여하게 된다. 한편 뜬금없지만 무소속이던 정몽준, 유한열[23] 의원도 당시 3당합당에 동참해 민주자유당에 합류하게 된다.

5. 합당 이후 권력투쟁[편집]

일각에서는 김영삼이 3당 합당 이후 여당으로서 정치 여로가 열리고 대통령도 수월하게 당선되었다고 하지만, 절대 수월하지 않았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것이 당시 민자당내 최대 계파는 김영삼의 민주계가 아닌 노태우의 민정계였다.[24] 3당 합당은 사실 사상과 기반이 전혀 다른 세력들이 어쩌다보니까 이해관계가 맞게 되어서 일어난 일이었다. 따라서 김영삼이 당내의 헤게모니를 장악해나가는 과정은 그동안 박정희전두환과 싸우면서 겪었던 격렬한 정치 투쟁을 이젠 같은 당 안에서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영삼은 합당 당시 내각제 개헌을 하기로 한 당초의 약속을 깨는데, 이유는 내각제 합의 비밀 문서가 어떤 경로를 통해 언론에 유출되어 내각제에 반대하던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자 이를 빌미삼아 내각제를 할 수 없다고 깽판짓을 한 것.

애시당초 의원내각제가 목표였던 김종필과 달리 대통령이 목표였던 김영삼은 내각제를 할 생각이 없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김종필 본인도 YS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내각제 합의 문서를 누가 유출했는지는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그리고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밀지 않으면 탈당하겠다는 배수진까지 치며 노태우 대통령을 압박한다.[25]

김영삼의 이런 행보에 박철언 등을 포함한 민정계는 강력히 반발했고 일부 민정계 강경파는 차라리 분당을 하자고 주장했지만, 낮은 정권 지지율과 함께 마땅한 대권후보도 없었고 김영삼이 김대중과 합당이라도 해서 혹여나 정권교체가 되면 정치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노태우 정권 측은 결국 김영삼에게 총재 자리를 내주게 된다.

그리고 김영삼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 재임 기간 도중 진행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사실상 패배하지만, 김영삼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자신을 흔드는 비민주계에게 전가하며 오히려 여론을 반전시킨다. 이전까지 김영삼은 대통령 후보를 지명제로 하여 자신을 대표로 지명할 것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협박요구해왔으나, 총선 패배를 기회로 이용해 여론을 자신에게 돌려놓은 후 경선을 통한 대통령 후보 선출이라는 타협점을 마련한다. 그리하여 민정계인 이종찬김영삼은 대통령 후보 경선을 했고, 김영삼은 압도적인 표차로 이종찬을 누르고 민자당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었다.

이에 평소 김영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이종찬, 김복동, 박철언, 이자헌, 유수호[26], 장경우 등을 비롯한 일부 민정계 의원들은 탈당했으나, 대부분의 민정계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당에 남았다. 이 탈당자들은 후에 현대그룹 명예 회장인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합류하거나 새한국당을 창당하게 된다. 이때 부산의 시민사회 비YS세력도 국민당에 합류했으나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다.

한편, 이러한 계파간 갈등을 두고 일부에선 당시 문화방송에서 방영하던 일요 아침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라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적절한 네이밍 센스다. 시사 팟캐스트 방송인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에서 김영삼민주자유당의 실권을 잡아가는 과정을 다루었다. 1시간 1분 5초부터 시작.

6. 평가[편집]

3당 합당은 보수정당들의 연합이라는 점에서 "보수대연합"이라고도 하고, 또한 PK 지역을 대변하는 통일민주당과 TK 지역을 대변하는 민정당이 합당했다는 점에서 "영남 대연합" 혹은 "호남 고립화"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을 낳은 3당합당은 지금까지도 한국정치사에서 여러 평가를 받는다.

6.1. 긍정적 평가[편집]

3당 합당이 과정은 떳떳하지 못했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김영삼이 민자당 당권을 먹고 대통령까지 되어 문민정부가 탄생하였고, 이로 인해 하나회 숙청 등 5공 세력의 상당수를 청산해내고 '역사바로잡기 운동' 등을 통해 쿠데타 명기 등 군부독재의 잔재를 많이 쓸어냈다는 점에서 그 공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잡았다는 것. 이를 마냥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회 숙청은 김영삼 개인의 능력과 더불어 민주계가 민정계를 밀어내고 민자당을 휘어잡았기에 쿠데타 없이 깔끔히 실행될 수 있었다. 만약 노태우 이후 정권 교체를 통해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이를 우려한 하나회의 역공을 당할 수도 있었다.

물론 YS 집권기가 끝난 이후 거대보수정당이 이런 분위기를 지속하는데 실패하고 거대보수정당인 채 다시 권위주의 정당 시절로 회귀하는 듯한 모습이 종종 보이면서 과오가 더 크다는 시각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3당합당보다는 문민정부의 정책 실패에 따른 YS의 입지 축소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는게 더 맞을 것이다. 집권초기만 해도 압도적이었던 그의 대통령 지지율이 임기 중 연이어 터진 대형 사고들과 최종 보스 외환 위기로 인해 훅 내려가 상도동계의 힘이 축소되면서, YS가 그토록 투쟁했던 당사자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한나라당에 입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회창 총재가 물러난 2000년대 중반 부터는 한나라당 내 소위 친박이라 불리는 박근혜 세력이 급격히 커지게 된다.

이회창의 경우 대쪽이란 인상에 권위주의적 총재로 여러모로 보수적이었던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독재자 참배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회창이 가진 '대쪽' 이라는 별명은 이회창이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약한 사람들을 도운 소신있는 법조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였다. 때문에 당시 갓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을 시작한 박근혜와 갈등을 빚기도 했고, 실제 2002년 박근혜가 이회창에 반기를 들어 한국미래연합이란 당을 만들어 탈당했다가 큰 성과를 못내고 몇 개월 후 조용히 복당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27] 허나 그런 이회창이 2연속 대선 패배를 겪고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리더가 사라지자, 한나라당은 본격적인 친박/친이 구도로 갈리게 된다.

물론 유신과 5공의 후신이 많던 친박계의 경우, YS 세력 및 소장파와 이상득계가 연합한 이명박의 친이계에 의해 예상외의 공습을 받고 대권 및 당권에서 밀려나기도 하지만, 결국 2010년대 들어선 다시 권력을 차지한다. 하지만 몇년 안가 친박도...

6.2. 부정적 평가[편집]

6.2.1. 기울어진 운동장과 지역주의 강화[편집]


우선 "지역주의를 고착화하고, 특히 호남을 거의 따돌리기 수준으로 내몰았다"라는 점에서 한국 정치 발전에 매우 악영향을 끼쳤다는 평을 받는다. 1980년대 후반만 해도 군부독재의 광주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을 은폐하기 위한 호남 비하 공작과 실례들이 6월 항쟁 이후 약화되고, 13대 대선에서는 노태우,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후보들 모두 지역감정 유발 요소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조심하였으며, 특히 양김의 경우 몇몇 지역충돌에 대해 정권의 공작으로 비판하면서 지역 유세를 자제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3당 합당 이후 다시 지역주의를 자극하는 움직임이 정치권과 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고 보는 분석도 있다. 그리고 이런 지역주의와 함께 한국 정치계에서 소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부르는 보수 우위 구도가 민주화 이후 30년 가까이 지속된 결정적 요인 중 하나로 평가받기도 한다.

3당 합당이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은 지금도 존재한다. 3당 합당으로 인해 장기간 호남은 고립되었고 경남과 경북의 연결고리는 강화되었다. 또 당시의 민자당 vs 민주당 구도는 지금까지 큰 틀에선 깨지지 않고 이어져내려오고 있는데, 3당 합당 직후에 치러진 1992년의 14대 대선과 2012년의 18대 대선이 20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양새가 비슷하다는 것이 대표적인 증거다.

그나마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기간 동진정책을 폈고, 특히 참여정부 이후 개혁성향의 민주당계 정당부울경 지역으로 쏟아부은 노력이 어느 정도 통했는지 낙동강 벨트를 이룩하고 PK 지역권에서도 지지세를 확장하는 선전을 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을 비롯한 상도동계 정치인 중에서 김덕룡, 심완구, 문정수, 김정수, 강삼재, 이신범, 노병구, 박희부, 최기선 등이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고, 반면에 권노갑과 함께 양갑이라 불리는 중진이었던 한화갑과 같은 동교동계(김대중계) 정치인 중의 일부가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변화도 있었다.

그리고 2017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치뤄지게 된 19대 대선에선 기어코 이변이 벌어지는데,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부산, 울산에서 승리하고 경남에선 불과 0.5% 차이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에 아깝게 석패함으로써 3당 합당으로 시작된 영남 결집이 상당히 와해되었음을 증명했다. 그 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10% 중반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TK에서도 지지율 1위를 내줄 정도로 그 기반이 많이 무너졌다. 물론 자유한국당의 지지층은 무당층에 많이 숨었고 막상 투표날이 되면 높은 투표율로 여전히 자유한국당으로 결집 하는 걸 생각 하면 적어도 부울경과 강원도는 경합에 TK는 사수할 것이다. 이젠 반대로 TK VS 비TK 구도 또는 60 VS 2050 구도가 되어 대구경북인들이나 60대 이상 노년층이 3당 야합으로 고립 당했던 호남인들 이상의 고립을 당할 수도 있다는 말도 나온다.

6.2.2. 민주세력의 분열과 반목[편집]

일명 4자필승론과 3당합당은 민주세력의 두 거목이던 DJ와 YS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았다. 그리고 이들이 뭉치지 못하고 당장의 권력에 눈이 먼듯한 모습을 보임으로서 민주세력의 정통성에 큰 오점을 남겼다. 그나마 4자필승론은 이후 양김의 후회와 국회의 협공으로 어느정도 무마라도 되었지만 이 사건은 갈등의 골만 깊어갔지, 관계 개선 그딴 거 없었다. 이후 양김은 2009년 DJ 사망 직전 YS가 병문안을 가서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기까지 무려 20여년 가까이 티격태격한다.(...) 결국 둘의 싸움에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지지자들만 피 본 일이었던 셈.

7. 트리비아[편집]

이 사태로 한국 정치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그나마 국내 정치학자들이야 실시간으로 상황을 확인할 수라도 있었지, 해외에 체류 중이던 한국인 정치학자들은 사태 파악이 안 돼 한동안 혼란을 겪기도 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심지어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던 모 교수의 경우 3당 합당 발표 다음 날[28] 강의에 들어가서 "한국은 4개의 유력 원내정당 체제다"라고 설명했더니, 한 학생이 "오늘 2개가 되었던데요?"라며 신문을 보여줘 기절초풍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자면 원내 7개 정당 체재인 현재,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 대한애국당 같은 모태와 이해관계도가 다른 정당들이 합당결정을 내린 것이니 기절초풍할만 하다.[29]

3당 합당으로 태어난 민주자유당은 훗날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했고, 대선이나 총선 당시에 몇몇 정치인들의 이탈 및 분당 사태도 더러 있었지만 보수적 기조를 유지하며 사실상의 보수 단일 정당으로서 군림해왔다.

하지만 2016년 4월 13일에 실시된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를 맛보고, 설상가상으로 몇달 후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새누리당 내부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달아 결국 자유한국당바른정당으로 당이 쪼개지게 되었다.[30]

8. 관련 문서[편집]

[1] 이후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등으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거대 보수 1당으로서, 보수층의 거의 통일된 지지를 받다. 하지만 현재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전례없는 사건 때문에 자유한국당바른정당으로 나뉘었다.[2] 수도권, 강원도, 제주도는 애초에 한 지역 정당에게 표를 몰아주는 경향이 호남, 영남, 충청보다는 약했고, 게다가 강원도, 제주도의 경우 예나 지금이나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정치권에서 큰 관심을 못받고 있다. 안습[3] 이것은 전남 신안군에 출마했던 평민당 한화갑 후보가 선관위에 의해서 후보 자격을 박탈당하자, 당선 후 평민당 입당을 조건으로 한겨레민주당의 박형오를 밀어준 결과였다. 박형오는 선거 이후 약속대로 평민당에 입당하였다.[4] 당시 5공 비리 청문회로 유명해진 국회의원이 바로 훗날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 의원이었다.[5] 이 당시는 불법을 저지르지 않으면 방북할 수 없었다.[6] 독재 정권과 독재를 옹호하는 일부 사람들은 대화와 타협에 바탕한 민주주의를 비효율적인 중우정치로 여기기도 한다. 일일히 대화하고 타협하느니, 그냥 힘 쎈 사람 한마디에 시원스레 문제가 해결되는게 훨씬 빠르다고 여기는 것이다. 특히 전반적인 삶의 질을 하락시키는 경제위기 같은 국면에선 잘못된 방향일지라도 일단은 변화를 갈망하기 쉬운 대중의 정서가 독재를 부르고 파시즘을 호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때 독재가 오히려 사회적 자원을 낭비하고, 인권탄압과 부패를 조장하는 비인간적인 체제라는건 역사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당연하지만 사람은 짐승이 아니다. 때문에 대화와 타협에 들어가는 시간이 단기적으로는 불필요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건설을 둘러싼 핀란드와 한국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합의에 기반해서 국민통합을 촉진하고 오히려 자원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다. 사실상 독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간 사례는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한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7] 두 김씨 또 힘 겨루기(정계개편 바람분다:3, 김영삼 총재 민정당과 평민당도 포함이 된 온건 중도신당 창당구상 [8] 친여 무소속 당선자 4명이 선거 직후 입당하였다.[9] 차이를 굳이 꼽자면 김종필은 의원내각제에 대한 신념이 있었고, 5공 시절 고초를 겪었다는 점 정도였다.[10] 물론 국내에서 민주정의당이나, 통일민주당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것은 사실이다. 다만 유럽의 좌파들을 '진보'로 분류한다면, 오늘날의 민주당계 정당이 그렇듯이 평화민주당은 진보정당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중도 자유주의 성향이 주류를 이루는 정당 내에 진보 성향의 재야 출신들이 일부 존재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언론이나 정치학자들도 대체로 과거부터 지금까지 민주당계 정당미국 민주당과 리버럴한 성격이 비슷하다고 보는 편이다. 실제로 김대중은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에드워드 케네드 상원의원을 비롯한 미국 민주당 인맥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민주당과 연을 맺은 바 있다.[11] 대다수 진보는 탈민족주의다. 때문에 사실 민족, 자주를 강조하는 NL 같은 경우 말로는 진보라고 하지만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 김대중은 생전에 열린 민족주의를 많이 강조했다.[12] 당시 한국의 좌파들은 제도권 정치 바깥에 존재하던 소수의 좌파세력이 비판적 지지론을 내걸고 활동하였을 뿐이다. 당시 한국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색깔론 때문에 좌파 정당이 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소수나마 60~70년대 내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어 있던 통일사회당이나 40~50년대부터 활동하면서 근근히 명맥을 이어오던 혁신계 인사들이 몇 있긴 했지만, 법과 권력의 통제하에 이들은 성장할 수 없었고, 툭하면 잡혀갔다(...). 80년대에 새로이 등장한 NLPDR, PD 계열을 비롯한 소위 운동권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철저히 제도권 밖에서 활동했다.[13] 지금의 원내대표[14] 민주통일당 등의 당명도 제기되었다.[15] 민정당 129석+평민당 71석+민주당 59석+공화당 35석+무소속 3석=297석.[16] 물론 나중엔 DJP연합도 하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고(애초 DJP연합도 3당 합당과 그로 인한 김영삼의 집권을 봤기 때문에 김대중이 바로 다음 대선에서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단 DJP연합 당시에도 상대방 주축은 5공이 아니라 김종필이었다. 물론 당시 YS에 반발해 민자당을 탈당한 박철언 의원 같은 경우는 DJP연합도 적극적으로 주도한 당사자이긴 하다만. 본격 정계 개편 전문가.[17] 지금은 보수와 진보라는 잣대의 위치가 복지/노동 분야 쪽으로 많이 이동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익과 혁신이라는 구세대적 잣대 관점을 이용.[18] 어차피 이때는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의 정책능력이 보잘 것 없던 시대라 경제사회정책은 사실상 관료들이 주도했다. 민간의 시민사회운동도 걸음마 단계였기 때문에 각 분야별로 체계적인 정책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던 시절이다. 참고로 한국 사회에서 시민운동이란 용어를 처음 유행시킨 경실련의 창립이 삼당합당 직전인 1989년이다.[19] 사진에서 주먹을 움켜쥔 가운데 인물이 노무현 前 대통령 (당시에는 초선의원) 이고, 그의 오른쪽에서 눈을 부릅뜨고 외치는 사람이 김상현 前 의원이다. 참고로 그 앞쪽에 앉아서 웃고 있는 사람은 김우석 前 의원으로 문민정부 출범 이후 건설부(현 국토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한보그룹 장태수 회장한테 뇌물을 받은 것이 폭로되면서 구속되었다.[20] 그의 격렬한 항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직후 "신당 창당을 위한 만세삼창을 하겠습니다."가 나오고 사람들은 자화자찬을 하면서 만세를 부른다.[21] 최형우 입장에서 저런 말이 나올 만 했던 것이 최형우는 유신과 5공시절 상도동계 중진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민주투쟁을 했던 인물이었다. 10월 유신의 공모를 국회연설에서 폭로함과 동시에 그로 인해 임신한 아내까지 남산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은 전력이 있었다.[22] 평화민주당이 1991년 지방선거 패배 이후에 재야 세력 일부와 통합하면서 이름을 바꿨다.[23] 유진산의 장남.[24] 다만 민정계 내에서도 김영삼을 지지하는 일명 '신민주계' 의원들이 있긴 했다.[25] 다만 김영삼의 탈당 협박은 본인에게도 큰 모험이었는데, 김영삼은 군사독재정권의 연장이라 해도 무리가 없는 노태우 정권과 손을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민주진영에서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꽤 큰 출혈을 입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탈당을 한다 한들 옛 동지였던 민주화 세력에게서 예전만큼의 호응을 얻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오로지 대통령 하나 보고 그 모든 비난을 감수해가며 3당 합당한건데 다시 김대중과 합당을 한들 명분에서 밀리는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대통령 후보 자리를 먼저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고로 김영삼도 회심의 배수진을 친 것이다.[26] 유승민 의원의 아버지.[27] 아이러니하게도 2007년 대선땐 역으로 이회창 후보가 박근혜 지지를 얻기 위해 박근혜 집에 갔다 문전박대당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28] 발표는 전날 오후에 있었으니까[29] 자유한국당의 정우택 원내대표가 제2의 3당 합당 떡밥을 뿌리기도 했다.# 일단은 그냥 떡밥 정도지만.[30] 다만 바른정당에서 다시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가는 이탈자들이 나오는 등 악재도 발생하고 있어 바른정당이 차세대 보수정당으로서 확실히 자리매김 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한 실정이다.[31] 3당 합당의 영향과 당내 힘겨루기에서 승리한 정치인 김영삼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선거.[32] 오래 지속되었던 지역구도가 완화되고 대신 세대구도가 발생한 선거.[33] 3당 합당 이후 있었던 지역구도가 깨졌음을 다시 확인한 선거.[34] 김대중 대통령의 동진정책이 시도되었던 선거.[35] 영남에서 민주당계 의원이, 호남에서 보수당 의원이 상당수 당선되어 공고한 지역구도가 약화되었음을 입증한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