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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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당시 상황3. 배경4. 원인
4.1. 정권 홍보차원의 다량 외화방출4.2. 대기업의 차입 경영과 금융기관의 부실화4.3. 원화가치 고평가와 경상수지 적자4.4. 외환보유고의 비상식적 운용4.5. 외화자산과 부채의 만기갭(maturity gap)
5. IMF의 구제금융과 가혹한 구조개혁 요구6. 발생원인에 대한 다른 견해들
6.1. 민간경제 책임론6.2. 김대중 책임론6.3. 펀더멘탈 타령
7. 영향
7.1. 경제적 영향7.2. 정치적 영향7.3. 사회적 영향
7.3.1. 철도 및 항공 교통계7.3.2. 자동차계7.3.3. 스포츠계7.3.4. 문화계7.3.5. 취업시장7.3.6. 물가7.3.7. 사회현상
8. 세계경제계의 변화9. 트리비아10. 관련 외부문서11. 연표
11.1. 1997년11.2. 1998년11.3. 1999년11.4. 2000년11.5. 2001년

1. 개요[편집]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이 맞이한 최대의 국난
미국은 9.11 테러로, 일본은 거품경제 붕괴로, 대한민국은 이 사태로 21세기를 시작하였다.

1997년 대한민국 각 기업의 무분별한 과잉투자와 이를 방조한 국가의 금융정책, 외국 단기자본의 공격으로 일어난 대규모 외환위기를 말한다. 이때 파산 일보 직전까지 갔던 대한민국 경제는 10년간 호황 경기 시절 동안 쌓았던 자본이 거의 사라졌고, 대규모 실직과 무더기 부동산 매각으로 인해 중산층의 비율은 줄어들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뼈를 깎으며 감행한 구조조정의 결과는 전체적으로 자산양극화노동양극화가 극심해져, 지금도 대한민국 경제는 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청년실업의 만악의 근원.

2. 당시 상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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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 위기가 일어나기 몇 달 전인 3월 8일9월 18일 조선일보 지면에 나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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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998년의 평범한 뉴스 이 모든 뉴스가 불과 2년 만에 일어난 것이다! 그 와중 창사특집 뉴스데스크[1][2]

자고 일어나니까 이랬다. "부도... 부도... 부도... 이제 이 말도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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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친듯한 환율 폭등으로 절망감에 빠진 외환딜러들의 모습.

3. 배경[편집]

먼저 배경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1997년 외환위기는 동아시아 전체에 닥친 것이다! 1997년 여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부터 시작한 외환위기는 같은 해 가을 한국을 연쇄적으로 강타했고, 직접적인 경제위기까지는 아니었던 중국과 일본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3] 그래서 외국에서는 이 사태를 한국을 포함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발생한 동일한 사태를 묶어서 아시아 금융 위기(Asian Financial Crisis)라고 칭한다.

1980년대 말 일본의 부흥에 힘입어 동아시아에서 대한민국중화민국이 그 뒤를 쫓아 치고 오르고 있었고, 그것을 본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4]이 따라하기 시작한 이른바 안행효과(雁行效果)가 일단 세계적 흐름의 배경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일본의 버블 붕괴가 시작되면서 3저 호황으로 경제성장률이 오르기 시작했고, 각 나라들이 수출주도형 국가를 꿈꾸며 따라하기를 시작하였는데, 기본적으로 당시 수출주도형 국가들의 시스템은 자기 자본이 없는 국가지만 외국자본을 많이 도입함으로써 자국 화폐 가치를 평가절하[5] 그 반사이익으로 수출의 증대를 노려 그렇게 생산되는 제품들을 통해 생산기술력 증가를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하여 결과적으로 자국의 경제적 부흥을 이끌어 내는 시스템이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계속해서 잘 굴러가게 되면 자국의 자본이 적더라도 외국 자본을 통해 외국의 설비를 들여와 자국의 생산기술을 올리며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기초과학과 기본기술을 올려 생산설비의 자체제작도 노려볼 수 있는 괜찮은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이미 그렇게 성장해 온 나라로서 싱가포르와 한국, 대만이라는 이른바 '아시아의 네 마리 용'[6]이라는 아주 좋은 케이스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이 경우 수출의 증대 를 통해 자국의 국가경쟁력이 강화 되면 자국의 화폐가 평가절상[7]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경상수지 적자 상황이 나기 때문에 환율조작을 통해 다시 강제적으로 자국의 화폐를 평가절하시켜야만 다시 수출을 할 수 있게 되고 경제가 굴러갈 수 있게 된다.

게다가 기업고정자본형성라는 고정투자로 투자 증가로 인한 경기확장으로 이어지게 만들었고, 이는 물가안정에 도움을 주는 동시에 경상수지와 경제성장률을 높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국은 1996년에 GDP의 5%에 달하는 경상수지 적자를 맞았고, 정부는 사치성 수입재가 원인임을 해명하며, 투자로 수출을 늘리는 투자조치를 취했지만 실패한다. 게다가 1997년 1월, 미국에서 금리 인상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미국 내수가 축소되는 동시에 미국 수입이 감소되어 수출주도형 국가들이 수출을 할 장소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생산된 물품을 판매하는 것은 고사하고, 달러의 금리 인상을 통해 외국자본을 대량으로 유치한 국가들은 갚아야 할 돈이 늘어나는 사태를 맞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수출을 늘리기 위해 자국의 화폐를 평가절하 시키는 순간 갚아야 할 돈이 더더욱 크게 늘어나는 상황도 맞게 되었다. 화폐의 평가절하를 못하게 되자, 기업들은 경상수지 악화를 견뎌야만 했고, 일시적인 수출량 부재에 이어 전에 계약해둔 수입물품으로 인해 유동자금 경색이 시작되어 재고품을 덤핑 판매로 자금을 수혈했으며,[8] 최후의 보루로 단기부채를 끌어오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말 그대로 외환위기.

정확히 말하면 외채 상환은 해야 하는데, 당장 갚을 외화는 없어서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문민정부IMF에다 "돈 좀 빌려주세요. 곧 갚을게요."라고 요청한 사건이다. 2008년 그리스 경제 위기 같은 사건까지는 아니어도 엄청나게 큰 재앙이다.[9]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 즉, 외환위기 사태 발생 전인 1996년[10]까지의 대한민국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라고 불리던 시절을 누렸다. 잃어버린 10년을 겪던 일본을 능가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전망은 매우 좋았다. 그러나, 결국 외환보유액 부족과 여러가지 경제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지 못한 것이 발목을 잡게 되면서 현대의 대한민국 경제에 크고 작은 악영향을 끼친다.

당시 대통령이던 김영삼은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매년 300억 달러를 유지한다면서 자랑했으나 실상은 정부 발표 외환보유액의 5배를 족히 뛰어넘는 1700억 달러라는 막대한 외채가 국민들을 절망케 한 사건이다. 돈을 함부로 빌리면, 그리고 외환을 적정 수준으로 보유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좋은 사례다. 자세한 것은 이 기사를 참고.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 10월과 11월 사이 정부는 환율 급등을 막기 위해 118억 달러를 외환시장에 쏟아부었다. 이 통에 대외부채상환용 외환마저 모두 다 써버려서 추후 있는 외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앞서 말한 300억달러 유지는 사실상 11월을 지나면서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 전이었다.

1997년 12월, 사태가 시작되기 직전의 국내 실업률은 3.1%로 집계되었다.[11] 그러나 98년 1월이 되자 실업률은 한달만에 무려 1.4%P나 폭등하여 4.5%까지 폭등하고 한달만에 무려 3300여개의 기업이 줄도산한다.[12][13] 다음해 2월이던 1999년 2월, 실업률은 무려 8.7%에 달해 단군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 상황을 실감케 하였다. 1999년 2월을 피크로 실업률은 감소하였으나 현재까지도 여파가 미쳐 취업난은 한국경제를 괴롭히는 주요 문제다.[14][15]

1997년 10월, 외환위기 직전 노동부에 신고된 전국 사업장 체불임금 금액은 6480억원에 달해 수많은 직장인근로자들이 임금도 못받는 상황에 직면해 경제위기 상황을 실감케 해준다.[16]

경제위기 이전에 눈부신 성장을 이어가던 대한민국은 경제위기 이후 한동안 벼랑 끝으로 추락했다. 단기간에 회복하긴 했지만 사회적, 경제적으로 막대한 후유증을 불렀다. 예를 들면 자살률의 급증, 가정의 붕괴와 이혼, 가족 해체, 출산율 저하, 양극화, 고용불안, 청년실업 등등의 암울한 그림자를 남겼다. 이 문제들을 보면 알겠지만 하나하나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현재진행형 문제들이다. 이렇게 한 국가의 미래를 한순간에 뒤바꿔버린 사건도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 외환위기가 거진 20년 가까이 지난 2017년 이후에도 그 원인 규명에 대해서는 다분히 그냥 대충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분명히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당시 가계저축률 감소 추세를 수치로 보면, 92년에는 17.5%였던 것이 97년 12.6%로 줄었다. 물론 가계저축률 12.6% 수준이 과소비라면 겨우 3% 대를 깔짝거리는 지금은 초 과소비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서민들은 '경기 침체'라는 단어 자체를 낯설어했으나, 현재는 경기침체는 물론이고 가계 소득이 악화되었으며 생필품 가격은 OECD에서도 탑클래스를 달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당시에는 웬만해선 저축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저축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으면 오히려 중산층 정도는 된다는 소리다. 저축률이 3% 대로 떨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편 외환위기 이전의 가계저축은 실제로 감소했다기보다 사회보장부담의 증가에 따라 가계저축이 정부저축으로 이전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부저축률은 1982년에 5.5%를 달성한 이후 1997년에야 겨우 10%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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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계저축률 하락에 발을 맞추듯 총저축률 역시 감소추세에 들어가고 있던 시점이기도 하다.[17] 하지만 당시 부동산 상황을 보면서 부동산 광풍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 것이 1996년도를 제외하면 주택가격이 그리 오르지 못했다.[18][19] 이는 1990년대 이후로 신도시 건설을 통해 주택이 대거 공급되면서 80년대 후반의 부동산 상승세가 진정되면서 주택가격이 안정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단, 상승세가 진정된다고 높아진 가격수준이 낮아지고 물류비용이 감소하는건 아니다.) 부동산 광풍이 원인이라면 차라리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의 경제성황이 어려워졌어야 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임금 인상투쟁이 상당히 벌어졌고 그 덕분에 고용도 안정되었다. 물론, 당시에도 정부와 언론사들은 파업에 대해 우호적인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내수는 급속히 신장되긴 했다. 하지만 실상은 생각보다 그렇게 만만하지 않고, 이러한 진단 때문에 오히려 현재에도 별로 안 좋게 작용하는 것도 많다.

4. 원인[편집]

4.1. 정권 홍보차원의 다량 외화방출[편집]

김영삼 정부는 1995년 국민소득 1만달러를 달성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996년에는 이른바 '선진국 모임'이라 부를 수 있는 OECD에 가입하였다. 이를 정권차원의 치적으로 여기고 있는 김영삼 정부는 국민소득 1만달러를 유지하기 위해 원화가치 고평가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김영삼 정부는 환율시장에 개입하여 수시로 다량의 외화를 시중에 방출하였다. 1997년 10월말에 외환보유고는 305억 달러였으나 12월 말에는 204억 달러로 무려 약 1백억 달러가 줄어들었는데 원화고평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방대한 외환보유고를 시중에 푼 것이다. 당시 외국인투자는 일본이 가장 많이 하였는데 외환위기의 징조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은행들은 채권을 회수하여 달러로 바꿔가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에 덩달아 다른 나라들도 채권회수에 열을 올려 달러부족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4.2. 대기업의 차입 경영과 금융기관의 부실화[편집]

외환위기의 주범은 대기업의 무분별한 차입 경영과 그로 인한 금융기관의 부실화였다. 그러니까 교과서에서 지껄이는대로 서민들 탓이 절대 아니다. 서민들이 소비를 많이하면 그만큼 경제가 살아나면 살아났지 무너질 이유가 없다. 대기업이 얼마나 빚에 의존해서 경영을 했는지는 30대 재벌 기업의 평균부채 비율이 자기자본의 5배를 넘었다는 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1998년 4월 15일 공정거래위원회가 총 자산을 기준으로 삼아 30대 기업집단을 새로 지정해 발표했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이들 신규 30개 기업집단의 1997년 말 총 자산은 435조 3천억 원으로 1년 동안 24.96% 증가하였다. 이는 환차손에 따른 부채 증가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자기자본은 오히려 1조 8천억 원이 줄었다.

이에 따라 30대 재벌 계열사 중 금융/보험사를 뺀 804개의 부채 총액은 1996년 말 269조 9천억 원에서 1997년 말에는 357조 4천억 원으로 급증하였다. 평균 부채비율이 386.5%에서 518.9%로 치솟았던 것이다. 반면 총 자산에서 자기 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20.6%에서 16.2로 급하락하였다. 이 중 한라(-5천 7백억 원)와 진로(-5천 3백 60억 원)는 자기 자본이 마이너스 상태이며 뉴코아(1,793%), 해태(1,507%), 아남(1,275%) 등은 부채 비율이 1천%를 넘었다. 이에 비해 롯데는 부채 비율이 216.45%로 가장 낮았으며, 동국제강, 동부, 동아, 삼성, 쌍용, 한솔, 강원산업 등이 300%대를 나타내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300%의 부채비율은 결코 건실한 것이 아니다. 부즈/앨런&해밀턴의 <한국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로 개혁을 이룬 국가에서 우량기업은 대부분 부채 비율이 100% 이하라고 한다. 외환위기 뒤 들어선 김대중 정부조차 재벌기업의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출 것을 요구했는데, 최소한 200% 이하로 낮춰야 무한 경쟁의 시대에 생존이 가능하단 얘기다. 이런 식으로 보아 한국의 재벌들은 국민이 저축한 돈을 끌어다 덩치만 키운 부실 덩어리, 즉 '허풍선'에 불과했던 것이다.

재벌들이 허풍선에 불과하단 것은 기업의 손익계산을 따져보면 당장에 나온다. 단적으로 1998년 3월 20일 증권거래소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2월 결산법인 510개사는 평균적으로 1997년에 1천원어치를 팔아 10원을 손해 보는 헛장사를 했다. 이들 기업의 전체 매출은 1996년에 비해 19.5% 늘어난 441조 2,743억 원이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의 순이익은 1996년 3조 8천여억 원 흑자에서 4조 5천 5백43억 원 적자로 돌아섰다. 특히 이 중 26개 은행의 적자 규모가 3조 8천여억 원에 달해 전체 적자의 84%나 차지하였다. 기업의 차입 경영과 연속되는 부도에 따른 은행 경영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실제로 1997년 말 조흥, 한일, 제일, 상업, 서울, 외환, 신한, 국민은행 등 8개 시중은행의 무수익 여신[20]은 35조 7천 7백억 원으로 은행 총 여신 2백 52조 5천 8백억 원의 14.2%를 차지하였다. 그만큼 부실채권을 떠안고 있어 은행 대출이 위험하다는 증거이다.

국내 은행들의 부실한 경영 상태는 외국계 은행과 비교하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1997년 한해 동안 국내 우량은행으로 손꼽히는 주택, 국민, 신한은행의 당기 순이익은 각각 1천 83억 원, 1천 44억 원, 5백 33억 원이었다. 그러나 이들 세 은행의 당기순이익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는 규모의 흑자를 미국계 은행인 시티은행이 냈다.

은행감독원과 금융계의 자료에 따르면 1997년 국내 26개 은행 중 18개 은행이 무더기 적자를 낸 것과 달리, 외국계 은행들은 사상 유례없는 흑자를 기록했다. 시티은행은 당기순이익이 2천 6백억 원에 육박하여 1996년에 비해 186%의 증가율을 기록했으며 뱅크 오브 아메리카는 당기순이익이 9백 80여억원으로 전년도 대비 307%, 체이스맨해튼 은행은 750여억원으로 46% 가까이 증가했다. 하지만 97년이면 닷컴버블붕괴 전이며 당시에 엔론과 월드컴과 같은 에너지,통신기업들이 분식회계를 해가며 부풀린 매출로 잘나갔던 버블기였으니 단순히 미국은행들의 경영상태가 한국보다 우월했기 때문이라곤 보기 어렵다. 1997년 한 해 동안 기업 부도가 도미노 현상처럼 이어지고 경기와 주가가 바닥을 치는데도 외국계 은행들의 순이익이 급증한 것은 무엇보다도 달러화 가치가 폭등했기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 경영 기법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문민정부 5년 동안 국내 은행과 이들 은행의 순이익 추이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국내 시중은행의 순이익이 1994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하강한 반면, 위의 외국계 은행들은 계속해서 상승세를 유지한 것이다.

국내 은행들의 이런 경영 부실화는 기본적으로 관치금융에서 시작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은행 등 금융권은 그 자체가 금융산업이기보다는 경제 개발을 위해 일반 기업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어 관치금융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WTO 체제와 같은 무한 경쟁의 국제화 시대를 맞아 국내 은행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금융산업으로서의 경쟁력과 경영 노하우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것은 곧바로 국가와 금융기관의 신인도와 연결되었고,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렇듯 한국 경제의 추락은 약간 멀리서 보면 일본 노무라증권 금융연구소의 분석가 히라누마 마코토의 말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1987년 6.29 선언 뒤의 자유화와 자율화 10년간 근육질의 경제 구조를 만들지 못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기업들이 자유화 후 국제 경쟁력을 높이지 못한 게 결정적 요인인 것이다.

또 그는 1992년 이후 재벌을 필두로 경제 전체가 단기외화 차입에 지나치게 의존한 게 중기적 요인이라 하며 "철강 분야의 포항제철이 한국의 유일한 세계 유일의 초일류기업일 뿐, 그 외엔 세계적 기업이 없다"고 말하였다. 더 나아가 아무리 반도체나 자동차 분야가 기간산업이라 하지만 세계적 메이커랑 거리가 멀다고 하는데, 이는 대부분의 기간산업을 재벌에 의존해 재벌들이 모든 업종에 손을 대는 이른바 '풀세트주의'로 사업을 구상하는 바람에 우량 전문화 기업을 만드는 데 실패한 것이라고도 주장하였다.

그는 재벌 그룹들이 기술자립을 위한 독자적 연구개발(R&D) 대신에 "기술은 사오면 된다"식의 손쉬운 기술도입을 통한 성장전략을 택한 것 역시 대기업 실패의 원인 중 하나라고 분석했으며, 더불어 재벌들의 방대한 상호지급 보증과 재벌총수에 의한 봉건적 경영이 파탄을 심화시켰다고 지적하였다.

4.3. 원화가치 고평가와 경상수지 적자[편집]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미국의 금리인상과 이에 따른 달러인덱스의 동향은 원화가치 하락을 예상케 했는데, 당시 김영삼 정부는 원화가치를 방어하려 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화가치를 방어한다는 말은 달러보유고를 내다 팔아 시장에서 원화가치를 지킨다는 것이었고, 달러보유고는 결국 무역수지 흑자와 외국자본의 투자로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금리인상은 기본적으로 달러의 유출에 무게를 얹는 신호였다.[21][22]

이는 투자자들로 하여금 '원화의 평가절하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회의적 예측을 하게 만들었다. 또 원화가치 고평가는 한국 기업들의 대외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수출부진에 따라 현금흐름에 위기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실제로 한국의 경상수지는 1996년 - 229억달러로 막대한 적자규모를 기록하게 된다. 이러한 경상수지 적자의 누적은 외국 투자자들이 국가경제의 펀더멘털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만들었다.[23] 이러한 회의감이 누적된 차에 태국의 바트화 위기가 심리적 트리거로 작용하면서 투자 자금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가게 되었고, 이에 한국 정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원화 가치 붕괴와 연쇄도산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4.4. 외환보유고의 비상식적 운용[편집]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는 한국 정부가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돈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앨런 그린스펀(美연방준비위원회 의장)

각국의 중앙은행은 갑작스러운 대외결제의 증가에 대비하여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보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행은 보유외환을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보유하지 않고 시중은행에 예치하였고, 시중은행 역시 이를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운용하지 않아 한국은행이 이를 국제결제에 사용할 수 없었고, 신용공급이 중단되자 갑작스런 외환부족에 대처할 수 없었다.

4.5. 외화자산과 부채의 만기갭(maturity gap)[편집]

당시 난립했던 비은행금융기관, 이른바 종금(종합금융회사)[24]들은 단기자본을 도입하여 장기대출로 자금을 운용하였다. 이와 같이 자금의 조성과 운용의 만기가 불일치하는 것을 자산-부채 미스매치라고 하는데, 이 때 단기차입자금의 만기가 도래하는 경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만기불일치는 당시 외환업무에 경험이 없었던 종금사들의 경험부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장기 외화차입보다 단기 외화차입이 금리가 싸고 차입이 쉬웠기 때문에 단기 차입금의 리스크도 제대로 모르고 닥치는대로 차입해서, 다시 수익성이 높은 장기대출사업에 사용했던 것이다. 외화유동성 부족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동남아 외환위기의 여파가 한국으로 다가올 때, 종금사들의 자금난은 한국경제의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리고 은행들의 단기차입마저 끊게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다.

5. IMF의 구제금융과 가혹한 구조개혁 요구[편집]

잘못을 했으면 계도를 할 것이지, 왜 죽도록 매를 때리는가?
ㅡ 같은 시기에 외환위기를 겪은 태국의 관료가 IMF의 "가혹한 처방"에 항의하면서 했던 말.[25]


대한민국의 미래를 말아먹은 IMF의 대삽질

결국 1997년 11월 21일, 한국 경제는 쓰러졌다.

정부는 1997년 11월 12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동년 12월 3일 IMF는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승인했고, 더불어 IBRD 세계은행이 100억 달러, ADB 아시아개발은행이 4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하여 총 350억 달러의 국제기관의 지원이 결정되었다. 다음날인 12월 4일 긴급히 55억 달러가 공수되었다. 그리고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캐나다, 호주가 지원을 결정함으로 200억 달러가 추가로 지원되어 총 550억 달러를 지원 받았다. 이 중 일본은행에서만 100억 달러 이상을 지원받았다.

여기까진 '국제통화기금' 이라는 단체명에 걸맞는 아주 시기적절한 조치였다. 하지만 IMF의 구제금융 210억달러가 한국에 유입되는 조건이 세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고금리, 다른 하나는 구조조정, 또 다른 하나는 공공재 영리화이었다.

첫째, 고금리. 시중 은행의 금리를 연 29.5%까지 올려야 했다.[26] "고금리로 자본유입을 늘린다."는 명분이었지만[27], 무수한 기업이 도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도 그럴 것이 금리가 인상되면 시중의 화폐유통이 경색되어 단기적으로 경기가 악화된다. 물론 실물경제 자체가 파탄나지 않는 한 단기적 악화는 원상회복이 될 수는 있으나 당장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 언제 원상회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당시까지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확장을 거듭해온 국내기업들에게 초고금리는 기업의 부채상환부담을 가중시켜 연쇄부도를 발생시키고, 대량의 실업과 경기후퇴를 유발하였다. 결국 고금리정책은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정부는 국내 금융기관을 외국에서 인수 가능하게끔 하는 금융시장 개방을 조건으로 IMF와 재협상해 이율을 낮추는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고금리정책의 이론 상으로는 "경기과열로 인한 물가상승 방어" 혹은 "경상수지가 급격히 악화된 국가의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약"이지만,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오히려 확인사살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극약처방이기도 하다.[28] 또한 고금리 기조로 부채는 그 6개월간 오히려 더 늘었으며, 명예퇴직 후 자영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개인사업자들은 높아진 이자를 갚기위해 차환기채[29]를 할 수밖에 없을만큼 어려운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채권시장은 "미약하다"는 표현으로 설명이 어려울만큼 비활성화 되어있었으며, 여기에 투자자들의 자본 유출이 애초에 금리때문이 아닌, 동물적 감각에 의한 위험회피 목적임을 감안하면 현실성, 적절성 측면에서 비판이 나오는게 자연스러운 일.[30] 결정적으로 애초에 당시 죽을 쑤고 있던 주식시장으로 유입된 극히 소소한 외환이 고금리로 채권시장에 유입된 양보다 많았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한지... (결론적으로 외국 자본의 배만 불려준 셈)

게다가 고금리는 외자가 급했던 DJ정부의 다른 정책과 맞물려 현재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일본 대부업자본에 한국 시장을 열어준 것이다. 이 시기 일본정부는 때마침 끊임없이 이어지는 야쿠자들의 자살보험 이용[31]을 막기 위해 이자제한법을 만들었고, 그 영향으로 야쿠자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사채 사업의 수익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 구미는 전통적으로 사채 관련 사업에 영향력이 있었던 나고야 계열 조직들의 입지를 크게 흔들었다. 야마구치 구미는 일본내에서 재일교포의 비중이 높았고, 이들 조직원과 간부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보유한 한국 내 커넥션을 활용하여 한국 사채사업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정부는 이자제한법 폐지를 진행하였고, 살인적인 고금리와 맞물려 일본계 사채업자들은 야쿠자조직의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토종 대부업체들을 싸그리 밀어내버리고 사업을 독점하게된다. 실제로 당시 가장 먼저 한국에 진출한 기업중 하나인 아프로파이낸셜 대부(현재는 러시앤캐시로 유명한 기업)는 J&K 캐피탈이라는 일본쪽 페이퍼컴퍼니가 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곳의 최윤 회장은 현재는 한국인임을 전면에서 강조하고있지만, OK저축은행 문제로 국적건이 논란이되기전만해도 나고야 출신 및 나고야 대학원을 다녔다는 기록이 계속 남아있었다. 결국 20년 정도가 되어 가는 2010년대에는 상장기업을 인수 경영하고, 기업인수합병의 큰 손으로 행동하고 증권, 저축은행을 인수해 경영하는 데에 이르렀다.

둘째, 구조조정. 한국중공업, 한국통신, 한국전력, 담배인삼공사, 한국가스공사 등 굵직한 공기업들을 민영화 함과 동시에, 당시 공공부문 전체 인력의 20%인 14만 1천 명을 감원 하였다. 그리고 대기업에서도 구조조정의 이름을 내걸고 명예퇴직, 희망퇴직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구조조정이라는 단어가 나올만큼 한국이 정말 막대한 빚으로 망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2008년 ~ 2015년 연간의 일부 유로존 국가들처럼 진짜 돈이 없는 경우와, 돈은 있는데 당장 상환할 외화만 부족했던 경우가 다를 수 밖에 없는 만큼, 그 적절성 여부를 놓고 오늘날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전 산업계에 걸친 구조조정 유행으로 나온 것이 사내하청과 아웃소싱이다. 직영과 정규직을 줄이고 다단하청과 파견직과 비정규직을 대폭 늘리게 되었으며, 9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효과가 줄어들기 시작하던 낙수효과를 완전히 끊어 소득 양극화를 뚜렷한 사회현상으로 노출시켰다. 2010년대 노동관계 부조리의 많은 내용이 여기서 시작한다.

다소 성과가 있었던 부분은 해외 빚쟁이들 채권자들, 특히 일본과의 채무조정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 IMF가 한 역할은 미미하며, 포항제철 시절부터 대표적인 지일(知日) 인사인 박태준 전 국무총리가 협상에 나서서 이끌어낸 성과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금융가 어르신들의 탁상공론의 끝을 보여줬으며 차라리 채무재조정 외에 자금수혈. 만약 그것이 안되더라도 거시경제적으로 방임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돈 주고 너희 알아서 해결하고 돈 갚아라 하는게 상책이었다는 소리 고금리 정책이 아니었다면 비록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은 피할 수 없었겠지만, -6.9%라는 재앙적 수준은 아니었을거다. 경제회복은 어차피 드라마틱하게 폭등해준 환율이 수출을 통해 이끌어 내주었을 것이고...

셋째, 공공재 영리화. 이집트의 빵 보조금 폐지, 볼리비아 수도 영리화 등에서 보듯 한국에서도 전기, 가스, 수도, 의료, 철도 등의 공공재를 정부가 아닌 기업에서 운영하도록 하였다. 참고로 이 부분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현재진행형인 상태다.

이렇듯 가혹한 구조조치로 인해 오죽하면 사람들이 IMF를 조선총독부에, 감독관을 총독에 비유할 정도였다.

6. 발생원인에 대한 다른 견해들[편집]

6.1. 민간경제 책임론[편집]


투자만능론에 눈이 먼 민간이 큰 책임을 가진다는 주장. 비슷한 견해가 힘을 얻은 사례의 예로는 잃어버린 10년을 들 수 있다.

다만 정부는 과거 자산동결조치처럼 기업의 채무조정이 필요할 때 정공법보다는 편법을 씀으로써 금융업을 사채업자들을[32] 박살내고 대기업들의 편을 드는 등 애시당초 정부 자체가 매우 친기업 성향임을 고려해야한다.[33] 애시당초 포스코 등 대한민국의 제조업 기업 대다수가 세계은행 등에서 채산성이 떨어진다는 판정을 받았다.

초등학교 교과 과정에서는 당시 국민들의 "과소비" 가 너무 심해서(...) 라고 가르쳤었다

6.2. 김대중 책임론[편집]

국내에서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 책임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실제로 김영삼 전 대통령 본인을 비롯해 행정부 관련 인사들이 DJ와 야당의 정리해고 같은 관련 법안 보이콧 때문에 초동대응 타이밍을 놓쳤다는 불만을 금융위기 전후 여러 경로로 표출한 적[34] 있다. 하지만,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은 1996년 12월 26일 새벽에 정리해고안이 포함된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정안을 신한국당 단독 표결로 날치기 통과가 가능했을 만큼 의석 다수를 점유하고[35] 있었다. 단독 표결 통과가 가능할 정도로 총선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던 여당(신한국당)[36]이 야당의 반대가 심해 일을 제대로 못했다는 말부터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DJ의 재택근무 비서였던 장성민의 증언에 따르면, "(날치기 여파로) 여론이 먼저 뒤집어져서 야당이 굳이 나설 일은 아니었다."고. 애초에 IMF 위기는 원화의 고평가, 외환보유고의 부실한 운용, 종금사의 채권운용 미숙 등으로 인해 발생한 금융위기에 가깝다.

6.3. 펀더멘탈 타령[편집]

경제 펀더멘탈(fundamental)이라는 어구가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도 IMF 이후로, 당시 아시아 금융위기 가운데 한국 경제는 근본적으로 튼튼하다며 위기의 확산 가능성을 부인하려 하던 경제관료들의 수사가 언론을 타면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강만수 장관의 책에서 인용하자면 이렇다.[37]

경상수지 개선과 경제 구조조정을 위한 대책을 추진한 것은 펀더멘틀은 문제가 있었다는 인식을 갖고있었다는 반증이다. 확실히 펀더멘틀은 문제가 있었고 특히 경제수지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 (중략) …대외신인도의 유지를 위한 전략 측면에서는 외국금융기관들이 급속하게 자금회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의 펀더멘틀은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그 말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 (중략) …내부에서도 펀터멘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솔직히 말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 주장을 하는 간부를 불러 펀더멘틀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도인 것은 사실이지만 외환사정이 날로 어려워가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한 다음 어떻게 대처하겠느냐고 물었다. … (중략) …펀더멘틀에 문제가 있는데도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고 비극이었다.


이것은 강씨나 우리 관료들의 창안은 아니고 외국의 평가이기도 했다. 외국 연구자들의 경우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한국은 산업구조가 튼튼하고 무역수지 흑자가 누적되고 있던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1990년대 초중반 미국 연방준비이사회에서 벌인 금리정책의 연쇄효과에서 비롯된 변동과 이에 따른 역내 외환시장 불안정에 금융부문의 문제가 터져나온 것이지 한국 경제 전반의 부실의 문제는 아니었기에, 인도네시아 등 다른 주요 피해국들에 비해 해외악성채무가 장기화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진단하는 것이 통설이다. 과도한 레버리지가 낳은 자본수지 왜곡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존재했다는 것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지만, (IMF 구제금융의 빠른 상환이 증명하듯) 단기적 유동성 악화의 초크포인트를 지나서라면 딱히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음에도 같은 신흥국으로 도매금으로 얻어맞은 측면이 있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연결되는 것이, IMF의 처방이 아닌, 차라리 고정환율로 묶어놓고 여유자금을 방어에 쏟아부은 '말레이시아 방식'이 나았다는 자성론이다. 하지만, 1998년 1월에 36억달러만[38] 남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말레이시아는 180억달러를 환율방어에 쏟을만큼 외환보유고에 여유가 있었다. 즉 하고 싶어도 말레이시아 방식은 불가능했다는 얘기.[39]

7. 영향[편집]

7.1. 경제적 영향[편집]

IMF 주도의 신자유주의 처방을 받으면서 혹독하게 경제체질이 바뀌었다. 문민정부는 '세계화'를 외치며 신자유주의를 따르자고 했지만, 정작 한국 내의 모든 경제주체는 아무 준비도 없이 정부주도 하에 무한경쟁하는 세계로 뛰어들게 되었다. 구조조정을 통해서 많은 기업들이 망했지만 살아남은 기업들은 더욱 강해졌다. 이 시기의 대기업들에 대해서는 "저승사자"라 일컬어졌던 이헌재 금융감독원 위원장[40]이 악역을 맡아, LG반도체 정리, 삼성자동차 매각 등 대기업들이 "확실한 시행이 전제된" 자체 구조조정계획을 세우도록 강하게 압박, 30대 그룹 전원이 5일 만에 구조조정 계획수립 및 제출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이 구조조정계획을 다시 이헌재가 수장을 맡은 은행감독원에서 심사해 미비점을 보완하도록 독려(?)하였다.

하지만, 공적자금 180조원이 투입되었는데[41], 그 중 70조원이 회수 불가 처리가 된 흑역사도 생겼다. 살려서 회수한 돈이 더 많았지만, 그 중에 살리는 데 실패했거나 일부는 제도 미숙으로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공적자금 지원의 목적은 회사를 살려 업주에게 돌려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고용을 유지하고 산업생태계를 유지해 국가경제를 굴러가게 하며 회사를 살리는 데 있기 때문이었다. 회수 못 한 공적자금이라도 노동자 월급주는 데 들어갔다면 목적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어쨌든 최선은 회사가 자립하도록 하고 고용을 늘리면서 지원자금도 회수하는 데 있으니까.

삼미그룹, 청구그룹, 해태그룹, 한라그룹, 한보그룹, 진로그룹, 쌍용그룹, 대우그룹 등 유명한 재벌기업들도 이 때를 계기로 모두 망하거나 해체되었다. 그리고 정주영현대그룹도 회사가 분할화되어 현대건설, 현대자동차, 현대산업개발,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백화점, 현대중공업 등으로 계열분리가 되어서 지금은 현대엘레베이터가 지주회사 역할을 맡고 있지만 현대자동차그룹에 아예 재계순위나 지위에서도 밀리는 편이다.[42] 그 밖에도 동화은행, 대동은행, 평화은행, 경기은행, 충청은행, 보람은행 등 여러 은행들도 모두 부도했거나 다른 은행과 합병되어 사라지기도 하였다.

다만 살아남은 기업들에게는 뼈아픈 충고가 되었다. 정말 300%~400%라는 (2010년대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부채율을 가진 건실한[43] 기업들은 부채의 감축에 온 역량을 퍼부어 현재는 건실한 기업치고 100%를 넘는 곳이 드물고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위기면역력과 긴축경영이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잃은 것에 비하면 적은 소득이지만...[44][45]

다만, 외환위기 이전 시대 회사들의 수백 %가 되던 부채비율은 IMF이후 세대가 보면 기절할 노릇이지만 숫자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시각이다. 그런 부채비율을 가지고도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시장과 매출과 고용이 계속 확장되던 때가 개발시대의 국내외 경제 여건이었기 때문이다. 90년대 들어 그것이 불가능해지고 있는데도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며 그런 부채비율 자체를 있을 수 없는 수치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지금의 신흥국 시장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로 부채비율 하나에만 매여 있지 말고 그 나라 자체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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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선다변화 정책도 이 외환위기로 인하여 조기에 폐지되었다(1999년 7월 전면 폐지).

7.2. 정치적 영향[편집]

이로 인해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 공약 당시 한국병을 반드시 고치겠다고 주장하여 대통령에 당선된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오히려 임기말에 한국병을 고치기는 커녕 한국병을 부르게 한 원흉으로 전락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아가며 퇴임하였다. 대선을 앞두곤 신한국당 지지자들이 YS 화형식까지 펼치며 현직 대통령을 당에서 쫓아냈다. 사실상 외환위기가 김영삼의 정치생명에 사형선고를 내린 결정타였던 것이다. 퇴임 이후에도 김포공항에서의 빨간물 계란투척 사건, 고려대학교 특강 무산[46]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심지어 퇴임 뒤인 1998년 3월 당시 PC통신 유니텔이 네티즌 1,78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김영삼은 '역사상 가장 지탄받아야 할 인물' 1위에[47] 뽑히고 말았던 것이다. 대통령 임기 초기인 1993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을 제치고 무려 인기유명인 1위에 올랐던 것을 생각한다면, 김영삼은 그야말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급전직하한 것과 다름없었다.

1997년의 이 참사는 15대 대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김대중 후보가 신한국당한나라당이회창 후보에게 신승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이 많다.[48] 김대중 대통령은 선거 과정에서 국제적인 인지도를 통해 IMF를 비롯, 국제 외교로 경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부분과 자신이 이미 대중참여경제론 같은 경제학 책까지 집필한 전문가였다는 것을 어필했었다.[49]

그리고 국민의 정부 하에서 정리해고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이 진행되었다. 1996년 연말 여당의 노동법 날치기로 도입된 유연화된 노동제도도 원래대로라면 다시 재검토 되어야 했지만 이 위기로 인해 일시적 유예만 거치고 즉각 도입되었다. 그리고 그 일시적 유예가 20년이 됐다(...)

정리해고 같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기 이전,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직접 우리나라를 방문해 1997년 대선 유력 후보 3인(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모두에게 다음 대통령이 되면 IMF가 요구한 신자유주의적 조치를 따르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아놓았던 데다가, IMF의 구제금융을 무조건 받아야만 국가 신용이 유지되는 상황이었기에 누가 당선되었더라도 정리해고 조치와 공공재 영리화를 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빚쟁이의 말로 국민투표 해놓고 유럽의회가서 무릎꿇은 치프라스를 봐라

곁다리 얘기로, 1997년 동아시아 외환 위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국내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특히 가장 크게 내홍을 겪은 곳은 인도네시아로, 30년간 독재를 해온 수하르토 대통령이 시민혁명에 의해 물러났고 이후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정착하게 됐다. 인도네시아 치하에서 억압을 받던 동티모르가 독립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덤이다.

7.3. 사회적 영향[편집]

7.3.1. 철도 및 항공 교통계[편집]

IMF 사태를 겪으면서 서울 3기 지하철 계획이 9호선과 3호선의 오금 연장을 제외하고 전부 폐지되었고, 부산 4호선[50]과 5호선, 대구 3~6호선, 대전·광주 2~5호선, 인천 2~3호선, 부산 3호선 반송선(이후 4호선으로 분리된 그것) 등 수많은 계획들이 지연 및 변경되거나 폐지되었다. 많은 비용이 드는 당시 대부분의 지하 유인 운전 중전철 계획들은 현재 지상 무인 운전 경전철(모노레일 포함) 계획으로 대체되어 각지에서 건설되거나 운행되고 있다. 신남역같은 막장환승역이 생기게 된 건 이거 때문이다 광주광역시같은 경우는 1호선을 추후 계획 노선들의 환승용 보조 노선으로 먼저 착공하였지만, 2~5호선의 추후 계획이 전부 취소됨에 따라 1호선만 제대로 추진되어서 공기수송하는데 재정 부담의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다. 지금 광주광역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2호선이 개통되면 1호선 상황이 달라질수도..? 또한 고지가 눈앞이던 경부고속선 공사 또한 외환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도중에 공사가 중단되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고속선 완공을 제시간에 이루지 못하였으며 대구~부산 구간은 도중 예산 절감으로 인해 고속선에 쓰이는 CWR공법을 쓰지않고 기존공법으로 레일을 깔았으며 이 구간의 고속선 공사가 끝날때까지 기존 경부선을 전철화시켜 밀양을 거쳐 부산으로가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그래도 다른 국가,도시철도 계획들은 모조리 취소되었지만 고속철도 계획만큼은 정부에서 되도록이면 살리려 했다고 한다.[51]

사실 국제통화기금이 전면적으로 각 지방자치단체도시철도 계획을 철폐한 것은 아니었다.[52] 지자체들이 도시/광역철도를 계획할 때 민자사업을 유도하여 당시 위기에 빠진 기업들을 구제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고[53],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당시 민자사업을 할 수 있을 법한 수준의 기업들이 외환위기 과정에 줄줄이 쓸려 나갔으므로 추진 주체가 없어셔 무산된 것. 나중에 현대자동차그룹이 출자한 서울 지하철 9호선 정도만 부활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정부가 국고에 돈이 없는데 공공사업을 벌여 경기순환을 진작시킬 필요는 있었기에, YS정부때 시작된 민자사업 형태의 공공사업 집행을 DJ정부때 크게 확대해 도로망을 확충하는 등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시행착오가 많아서 눈뜨고 코베이는 상황을 자초하기도 했고, 지역 정치인과 발주자와 채권자와 평가용역기관이 돈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이것은 DJ정부 말기에 가서 고치기 시작했고, 이후 정부는 민자사업을 엄격하게 심사하고 이미 집행된 사업에 대해서는 부채 재조정 등 뒷처리에 힘쓰는 처지가 되었다.

항공 교통 측면에서도 타격이 심했는데 수 많은 외국 항공사들이 이 당시에 한국 노선을 단항하거나 운항 횟수 또는 운항 항공기 규모를 축소시켰다. 이 때 철수한 다수의 외국 항공사들은 IMF 사태가 극복되고 인천국제공항[54]이 개항한 후 하나둘씩 한국 노선 운항을 재개했지만[55] 아직도 여러가지 이유(대형 한국 국적사들의 텃세, 주변국인 중국이나 일본보다 작은 시장 규모, 안보 리스크 등)들을 이유로 복항하지 않고 있는 항공사들도 많은데 대표적으로 콴타스에어 뉴질랜드 등이 있다. 그리고 대형 한국 국적사들도 이때 이용률이 저조한 상당수의 노선들을 정리했다.

7.3.2. 자동차계[편집]

7.3.3. 스포츠계[편집]

KBO 리그의 경우, 모기업이 직접 부도를 당한 해태 타이거즈쌍방울 레이더스는 선수를 팔아서(혹은 선수 임대)[56] 연명했고, 이 때문에 하위권을 전전했다. 해태는 2001년 시즌 중 현대자동차그룹에 인수되어 KIA 타이거즈로 재탄생했고, 쌍방울은 아예 팀이 해체되어 SK그룹이 자유계약이 된 쌍방울의 선수단 및 지명권을 인계하고 SK 와이번스재창단했다. 즉 실질적으로 쌍방울을 흡수했으나 형식적으로는 구단 자체를 인수한 게 아니다. 이 때문에 인천 야구의 정통성 논란이 터지게 되었다. 상세 내용은 삼청태 문서를 참고.

K리그의 경우 부산 대우 로얄즈현대산업개발에 인수됐다. 부산 아이파크는 대우 로얄즈 시절 축빠이던 대우김우중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안정환, 김주성 등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을 앞세워 K리그 최고의 인기구단중 하나이자 강팀으로 군림했었다. 그러나 대우그룹의 도산으로 구단 해체 위기까지 갔다가 간신히 현대산업개발에 인수된 이후로는 기업구단답지 않은 투자로 점차 상위권에서 밀려나더니 끝내는 2015년, 기업구단 최초로 2부리그인 K리그 챌린지로 강등됐다. 야구도시로 알려진 부산이지만, 롯데 자이언츠 이상의 인기를 누리던 90년대 대우 로얄즈를 생각해보면...

대전지역의 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창단했던 대전 시티즌도 계룡건설을 제외한 다른 구성 기업들의 도산으로 계룡건설의 후원으로 근근히 버티다 끝내 2006년, 완전한 시민구단으로 전환했다. 시민구단화 이후 고질적인 재정난으로 역시 2부리그나 들락거리는 신세. 이 여파는 실업축구라고 안심할 수는 없어서 1997년에는 국민은행 축구단한일은행 축구단, 기업은행 축구단, 이랜드 푸마가, 1998년에는 (구) 할렐루야 축구단과 한일생명 축구단, 주택은행 축구단이 모두 각각 해체되었다.

프로농구광주 나산 플라망스도 역시 모기업이 망해서 이후 골드뱅크-코리아텐더로 2단 변신 후 2003년 말 KT에 인수되게 된다. 한편, 여자농구의 경우 남자농구가 프로화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프로화에 의지가 없는 팀들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프로화를 준비했으나 IMF 이전에 13개 팀이었던게 5개 팀으로 반토막 이상이 나는 후유증을 겪게 된다.[57] 실업 리그였지만 거의 프로리그나 다름없었던 배구 역시 전설의 남자배구팀인 고려증권 배구단이 모기업의 부도로 1998년을 끝으로 해체됐고, 여자배구는 더욱 더 심한 상황이었던지라 9개 팀이 5개 팀으로 쪼그라드는[58] 암흑기를 맞았다.

민속씨름(프로씨름)의 경우 1997년에 부산조흥금고 호랑이, 세경진흥 사자(구 삼익가구 사자)가, 1998년에 일양약품 원비[59], 청구 청룡, 1999년에 동성[60] 백호(구 한보 멧돼지), 진로 두꺼비가 각각 해체되었다.

이 사태로 인해 올림픽에서 매회 금메달 따는 비인기 종목들도 안전할 수 없었다. 1997년에 국민은행은 테니스팀과 사격팀을, 기업은행은 자사의 사격팀을, 해태그룹은 자사 역도팀을, 동아그룹은 자사가 자랑하던 동아생명 탁구단을, 외환은행이 여자 탁구팀을 각각 해체한 걸 필두로 1998년에 제일제당은 자사의 마라톤팀, 쌍방울은 자사의 마라톤팀과 석탑건설 아이스하키단을, 조흥은행은 사격팀을, 1999년에 주택은행은 자사의 사격팀을, 2000년에 대우중공업은 자사 테니스팀을 각각 해체했다. 그 여파 때문인지 몰라도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평소 10위권보다 낮은 종합 순위 12위라는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7.3.4. 문화계[편집]

문화계도 심한 타격을 입기는 마찬가지. 산업 특성상 국민생활이 윤택해야 꽃피는 게 문화인데 이 때 한 번 죽었다 살아났다.

특히 환율에 영향을 받는 외국 뮤지션 공연의 경우 갑자기 뛰어오른 환율 때문에 공연기획사들이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물론 1998년 메탈리카 내한 때처럼 기획사에서 한국의 사정을 설명한 것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개런티를 25만 달러나 깎아주는 대인배적인 사례가 있기는 했다. 그리고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콘텐츠 분야는 투자자나 유통사들이 대거 발을 빼면서 기존의 시장이 급격하게 무너지는 현상을 겪기도 했다.

특히 1998년에 방송된 국산 애니메이션 스피드왕 번개의 경우, 당초 반응이 좋으면 세계무대를 배경으로 한 시즌 2 제작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흥행도 좋은 편이었으나 이 사태의 여파로 인해 그대로 시즌 2의 계획이 엎어져버렸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TV 방영을 시작한 바이오캅 윙고삼성그룹 계열의 삼성영상사업단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프로젝트였지만 역시 외환위기로 삼성그룹이 해당 사업을 접게 되면서 이후 VHS 타이틀로만 출시되고 DVD로는 아예 출시조차 되지 않은 채 잊혀졌다.

출판만화의 경우는 청소년보호법 파동의 여파와 외환위기 콤보로 1998년에는 성인만화잡지 <미스터 블루(세주문화)>, <매주만화(트루패밀리[61]>[62], <투엔티 세븐(도서출판 대원)>이, 2000년에는 <빅 점프(서울문화사)>까지 각각 폐간되었다.

케이블 TV, 비디오 유통, 게임, 영화배급 등의 문화산업에 참여했던 여러 대기업들도 관련 사업을 접는 상황이 벌어졌다. 별도로 미디어그룹을 만들어 운영했던 삼성그룹도 케이블 TV를 중앙일보[63]로 넘겼고 영화, 음반, 비디오 부문을 정리하거나 분사하였다. LG그룹 역시 게임사업부를 분사하여 현재의 한빛소프트로 분할 설립하였으며 비디오 부문은 정리하였다. SK그룹 역시 계열사 SKC 사업분야 중 하나였던 게임사업도 위자드소프트란 업체로 분사시켰으며 왕성하게 활동했던 비디오사업부는 정리되었다. 대우그룹도 비디오나 케이블 TV 관련 부문 역시 정리하거나 다른 기업으로 매각했다.[64][65] 이후 CJ그룹 같은 기업 정도가 그나마 문화산업에 힘을 싣고 있으며, 당시 소규모였던 몇몇 연예 기획사들이 잇따른 아이돌 그룹의 대히트로 대형화된 상태다. 또한 대종상의 후원기업인 쌍방울이 부도나면서 1998년에 대종상이 일시적으로 폐지된 적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특기할만한 점은, 나라종금 등등 일부 종금사들이 일본에서 끌어온 단기 차관을 연장시킬 방안으로 일본에 문화시장을 개방해야 했다는 것이다. 경제난으로 투자 활력이 떨어진 문화산업계였던만큼, 이 조치는 큰 폭탄과 다름없었다. 이 무렵에는, 만화 분야처럼 사실상 준개방 상태에 있는 분야가 적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중화문화권에 흡수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저력을 대통령 및 정부 관계자들이 언급하곤 하였다. 빚쟁이인 일본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조처가 몇 없다는 것, 그리고 이제 믿을 것은 우리 국민들밖에 없다는 걸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만큼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회적인 흐름으로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경제적 부흥에 힘업고 '신토불이' 등의 레토릭으로 서서히 강해지고 있던 일종의 국수주의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걸 들 수 있다. 개인주의를 서구의 퇴폐적 풍습으로 여겨 배척하던 사회적 풍토가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부정적인 부분도 적지않다. '한국적인 가치'에 대한 선호가 완전히 박살나면서 자국혐오나 미국병도 심해졌다.

그리고, 1980년대를 비롯한 대중음악 순위 프로그램의 레전드였던 가요톱10이 폐지되는 계기가 되었다. IMF 외환위기(구제금융) 때 "국민이 절망에 빠져있는데 연예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종영시켰다. 그 후 시청자들이 KBS에 전화를 하면서 항의를 하는 등, 후폭풍이 엄청나게 안 좋게 되자 KBS에서는 땜빵용으로 <브라보 신세대>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방송했지만 당연히 인기를 끌지 못했고, 다시 가요톱10의 뒤를 잇는 대중음악 순위 프로그램 뮤직뱅크가 신설되어서 1998년 6월 16일부터 현재까지도 방송을 하고 있다.

7.3.5. 취업시장[편집]

취업 시장은 구조 자체가 달라졌다. 원래 공무원은 대기업 직원보다 급여가 적어서 인기도 낮았는데,[66] 외환위기 때문에 기업들이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으로 직원들을 해고하는 일이 터지자, 어지간해서는 해고될 여지가 없는 공무원으로 돌아섰다. 한때는 경쟁률이 1:1도 되지 않았던 순경도 안정성 하나 때문에 사정이 달라졌다. (노량진에 집중되어 있는 여러 경찰학원들이 이를 입증해준다.) 이제는 공무원이 대기업 직원보다 어려운 지경이다. 직업군인도 신청만 하면 대부분 장기복무를 했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경쟁자가 넘쳐나고 말았다. [67] 2010년대에 국가직 9급공무원 지원자만 20만 명이 몰린다는 현상이 빙하기같은 취업시장의 모습을 방증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경찰대학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인기가 상승하였다.

그리고 IMF 사태 이전에 몇몇 유명 기업 생산직들은 산업체 부설학교를 통해 고등학교 학력을 주는 조건의 중졸 사원 모집으로도 원서만 넣으면 합격을 넘어서 한번에 수십명이 미달이 날 정도였으나#, IMF 사태 이후로는 경쟁률이 크게 올라서 고졸은 물론이고 대졸자도 들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어버렸다.

실직자들은 자신이 애써 실직당했다는 것을 자신 혹은 주변에게 부정하고 싶어서 아침에 양복차림으로 출근하는 척하고 산에서 지내다 다니던 직장 퇴근시간 될때쯤 귀가하는 이른바 등산출근 현상이 언론지상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등산'을 '오락실'로 바꾸면 한스밴드의 히트넘버 '오락실'의 가사내용이 된다.

이 시기 이후로 대부분의 기업[68]이 45세 전후로 차장/부장까지 승진을 못하면 명예퇴직을 강요했다.

당시의 취업시장 충격은 90년대나 2천년대 초반에 태어났거나 어린이였던 사람들에게는 그 여파가 청년실업 등으로 현재진행형이다. 더구나 호황이 아닌 불황과 어려움, 경제난 등만 겪으며(...) 양극화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세대는 위축된 가치관 문제가 심각하다. 아래 기사에서 보듯 심각할 정도의 안정지향성 추구 등은 2018년 현재에도 계속 사회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명문대 → 교사·공무원…'꿈'은 사치가 된 아이들, 극단적인 안정성의 추구로 어린 학생들의 선호직업도 10년째 교사가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꿈이나 소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진 상태이다. 반상진 전북대 교육학과 교수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IMF 이후 학생들은 꾸준히 공무원, 교사 등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게 됐고 최근 양극화 현상의 가속화와 맞물려 과도한 안정성을 추구하게 됐다”고 한다. 교육부가 발표한 조사결과에서도 청소년의 꿈은 행복보다는 ‘안정’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7.3.6. 물가[편집]

이 사태 이후로 그전까지 고정되었던 과자 등의 식료품 가격이 크게 인상됐으며[69] 이는 훗날 과대포장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70] 실제로 식료품의 가격인상, 과대포장, 가격담합 등의 문제점들이 IMF 사태가 일어난 해부터 크게 급증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71]

다시 말해 이 사태로 청년 실업이 크게 늘어났는데 식료품 등의 가격도 덩달아 올라가버린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난 것이다.

요식업계에는 IMF국밥 등 IMF 수식어를 단 염가메뉴들이 생겨났고(대표 유행 음식물로 롯데리아(대한민국)의 IMF버거), 지금 생각하면 웃지 못할 IMF 드립도 성행했다. 반대로 고가의 외국계 패밀리 레스토랑 등 고급 식당들은 철수하거나 문을 닫았다.

7.3.7. 사회현상[편집]

국민은 피눈물 나는 세월을 견디고 버텨 위기를 극복해냈고 국가 경제는 더 크게 성장했지만, 외환위기가 바꿔놓은 사회경제구조는 국민의 삶을 무너뜨렸다.
- 2017.11.01 문재인 대통령이 새해예산안 통과를 위한 국회시정연설에서... (출처: 연합뉴스)


IMF 사태 이후 한국은 매우 각박한 사회가 되었다.[72][73] 청년층은 대규모 청년 실업에 마주치고 N포세대로 몰렸으며, 가족해체,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황금만능주의가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인터넷 문화에 대한 얘기까지 곁들이자면, 사회학적 관점에서 현재 대한민국의 막장스러운 인터넷 문화탄생하게 된 원인이 바로 이 사태 때문이라는 얘기까지 있다.

IMF 이후 출산율이 급전직하하게 되면서 초저출산 기조를 현재까지 유지하는 원인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출산율 문서를 참조 바란다. 당장 1998년 신생아 출생이 1997년에 비해 3만여 명이 줄긴 했지만 다시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이는가 싶더니 외환위기가 진정된 2000년 신생아(일명 즈믄둥이) 63만여 명을 끝으로 근 20년 가까이 신생아 60만 명선은커녕 오히려 2017년 현재는 40만 명선도 위태로운 상황이다. 결국 2017년 들어서는 우려대로 35만으로 떨어졌다.[74] 물론 출산율 급락의 원인에는 육아시설 부족, 과도한 사교육 열풍 등의 원인도 있으나, 당장에 청년실업이 주는 충격 하나만으로도 출산율 저하의 큰 요인 중 하나임을 무시할 수 없다.[75]

또한 저출산 고령화 때문에 인구는 줄고 저성장이 예견되는 상황이라[76]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노후 돈이 없으면 갈 곳이 없으니 절대 돈을 쓰지 않으며, 청년들은 돈이 없어서 못 쓴다. 이렇게 투자 가치가 높지 않은 시장인데다 일자리에 대한 공급은 수요를 한참 초과하고 있어 기업들은 인건비를 높여줄 필요성도 못 느끼고 있다. 장기적인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 갖고 있는 자산도 중국이나 미국 등지로 돌려야 할 판이다.[77]

국내에는 최소한의 투자조차도 꺼리지만 반대로 중국이나 제3세계 신흥국들에는 대기업들이 앞다퉈 투자하는 것이 명백한 증거다. 기업은 장기적인 미래보다는 현재를 중시하며 신흥국이라는 대안도 존재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동안 가장들의 수입으로 가정 경제를 꾸려가던 구조였으나, IMF를 기점으로 하여 주부들이 취업시장에 대거 뛰어들게 됐다. 그래서 IMF 이후에는 맞벌이가 이전 시대와는 달리 당연한 것으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부모님이 돈을 벌러 나가게 되면서 아이들만 집에 남게 되는데, 가정에서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이 이전 세대들과는 다르게 엇나가는 현상이 일어났다.

심각한 경우는 가장의 경제적 무능이 큰 문제가 되어 부부간의 이혼이 늘어나 가족 해체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기도 했다. 이 당시 초중고교를 다녔던 1980년대~1990년대 초반 태생의 사람들은 이 시기에 본인의 가정에건, 주변에서건 IMF 때문에라는 이유로 여러 안 좋은 일을 겪거나 봤던 경험이 한 번쯤은 다들 있던걸 생각해보면 얼마나 큰 파급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진짜 막장이었던 사건들은 바로 자해를 한 뒤, 폭력 범죄의 피해자인 것처럼 신고해서 보험금을 받으려다가 들통나버리는 사건도 많았다는 것이다. 한 택시 기사는 택시 강도를 당한 뒤 범인들이 자신의 발을 기차 선로 위에 고정시켜 놓고 도망가는 바람에 발이 잘렸다고 해서 뉴스에 실렸으나... 결국은 얼마 못가 자기가 보험금을 노리고 한 짓이었음을 자백하고 말았다.

또, 1998년에 경남 마산의 한 가정에서는 아빠와 어린아들만 있던 집에 강도가 들었는데, 돈 있는 곳을 대지 않으면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다가 그 집 아빠가 돈이 없다고 하자 진짜로 자르고 도망친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도 알고 보니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가 친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뒤 강도 사건처럼 신고했다는 게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IMF에서 금융위기에 빠진 우리나라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 자본을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이자율 상한선 폐지를 권고하자 이를 폐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부작용으로 인해 오히려 고리 대금업이 성행하여 엎친데 덮친격으로 돈없는 서민들이 더욱 고통을 입었다. 얼마나 심했으면 연 2000%가 넘는 살인적인 이자율이 나왔을 정도. #[78]

1998년에는 금모으기 운동이 있었다. 또한 국민들이 동전 모으기 운동에 동참해 너도나도 집안 곳곳에 있는 동전을 모으다 보니 동전이 쏟아졌고, 그 여파로 외환위기 이듬해인 1998년에는 오백원 주화가 전체 통틀어서 8,000여개 밖에 발행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대부분 외국인이나 한국은행 직원들에게 주는 민트세트로 발행하였고, 현재는 수집상한테서 대략 기본 50만원 선에서 거래된다. 특히 사용하지 않은 것은 100만원 선에서 거래된다.

이외에 교육 분야에서도 대다수의 초, 중, 고교[79]들이 통폐합되거나 분교장으로 격하되었는데, 특히 1999년도에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외에 대학교도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없어진 대학이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전문대학세무대학이 있다.[80] IMF 외환위기로 인해 1999년을 끝으로 신입생 모집이 중단되었고, 최종적으로 2001년에 폐교되었다. 그리고 국군간호사관학교도 같은 이유로 사라졌다가 2001년에 되살아났다.

사족으로 IMF 당시에는 농담조로 '나는 F학점이다'(I'm F(failed)), '나는 해고당했다'(I am Fired)라는 말이 유행했다.[81] 심지어 'I'm Fucked'라는 버전도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치환하면 IMF의 별칭은 이런 게 좋을 듯싶다. 바로 International MotherFucker.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도 이 무렵에 회자되었다. 정확히는 "total crisis"라는 영어의 번역. 이것은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표현과 더불어, 언어의 마술사 박희태 전 대변인의 작품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 말을 그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며 그냥 이 무렵부터 유명해졌을 뿐이라고. 그리고 때가 때인지라 세기말과 엮여서 그런지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라는 말도 자주 쓰이기도 했다. 사실 1997년의 외환 위기가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국가가 위기에 대응하지 못한 무신경한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후에 IMF를 가까스로 넘겼으나 오히려 사회적으로 비윤리적인 사건이 증가하게 되면서 '모럴 해저드'를 많이 언급하곤 했다.

파일:attachment/1997년 외환 위기/과소비.jpg

이미 언급했지만 7차 교육과정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외환위기의 원인이 국민들의 과소비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정부와 기업의 잘못, 그리고 사치품 수입과 해외여행 자유화를 앞장서 누린 부유층의 "과소비"를 애꿎은 일반 국민에게 뒤집어씌운 셈이다. 오히려 이 짤에는 소비가 늘어야 돈도 돌고 경제도 좋아진다는 진리가 쏙 빠져있다. 부실한 교과서(...) 학생들에게 올바른 지식을 제공해야할 교과서가 되려 거짓선동을 하는 판이다. 이 항목을 쭉 읽으면 알겠지만, 1997년 외환위기는 국민 개개인의 과소비가 원인이 아니라, YS 정권의 '세계화' 정책의 대응 실패, 즉 시장개방에 따른 정부의 대응 미흡, 재벌들의 정경유착, 국가 경제체제의 구조적인 문제(펀더멘털)와 국제 투기자본의 자본 유동이 주 원인이라고 봐야 합당할 것이다. 그 덕분에 2010년도에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수정이 되지 않았다.[82] 그리고 지금 30대인 85~86년생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거나 졸업예정이어서 수학여행을 가야하나 나라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학여행을 가지못하고 졸업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86년생들이 피해를 많이 봤다. 어찌보면 사회문제로 청소년들이 피해본 상황인것. 여담이지만 이 시기에 태어난 97~99년생들[83] 또한 다른 심각한 문제들로 인해 초, 중, 고등학교의 수학여행이 계획만 세우는 단계에서 아예 없어져버리는 일을 겪게 되었다.[84] IMF로 나라가 힘들던 시기에 태어나 또 다른 심각한 한국의 병폐로 인해 고통받게 된 케이스. 그 중 가장 심각한 일로 꼽히는 세월호 참사는 정부 관료의 입이나 언론에서 IMF와 엮여 표현되기도 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1997-1998년생이었으니...

거기에 IMF 사태가 일어난 것을 노조가 노사분규를 일으키고 과도한 임금상승 등의 압력을 넣어 기업의 비용부담을 증가시킨 것이라는 식의 교육을 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남탓하기의 끝장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 사태의 파장으로 저 바다건너의 먼 나라에서 또 다른 사태가 벌어졌다.

8. 세계경제계의 변화[편집]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심한 구조조정 요구에 시달린 탓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지역통화기금 창설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 아시아통화기금 출범을 주창했을 정도. 그러나 IMF도 지역단위의 통화기금 체제가 들어서는 데에 딱히 찬성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어서 아시아만 통화기금기구 창설은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2010년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한중일이 공동으로 조성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hiang Mai Initiative)라는 금융협정이 공식출범하게 되었다.[85] 총 기금 1200억 달러 중 중국, 일본이 각각 32%, 한국이 16% 그리고 동남아 10개 국가가 총 20%를 분담한다. 물론 구제금융이라는 것이 아무 조건 없이 제공될 수는 없겠지만 대안이 존재하다 보니 그리스처럼 진짜 작정하고 막장짓만 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필요한 수준 이상의 비상식적으로 과도한 구조조정 요구나 IMF가 작정하고 해당국가를 파산시키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IMF의 해당 항목을 참고할 것.

상기에서도 언급됐듯, 좁게는 대한민국이 맞이한 외환위기였지만 넓게는 동아시아 전체에 불어닥친 외환위기[86]였을 만큼 그 후폭풍은 대단했다. 이 외환위기로 IMF의 개혁요구를 충실히 따른 대한민국의 사례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국고를 풀어 내수진작에 힘을 쓴 말레이시아의 사례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든 간에 동아시아 각국은 외환보유고에 거의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로 집착을 하게 되며, 2000년대 중후반 들어 전 세계의 달러화, 미국 국채 등을 거의 폭풍흡입하듯이 빨아들였다. 당장에 달러 보유고 상위 10위권 국가의 다수가 동아시아 국가다.

중국, 브라질, 러시아, 인도 등 2000년대 들어 소위 BRICs라 불리는 신흥국들이 IMF의 현 체제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기존에 유럽의 독식으로 덕좀 보는 체제였는데 신흥국이 경제강국이 되었으니 미국과 유럽이 독식하던 IMF와 IBRD의 총재 자리를 넘보고 있다. 특히 2011년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前 IMF 총재가 성추행혐의로 자리를 비우자 유럽과 제3세계는 서로 총재자리를 차지하려고 상당한 신경전을 벌였다. 2008년 이 사건보다 더욱 큰 부도 사태가 일어났었고, 그리스 발 유럽연합 위기로 서구권의 세계 통화 패권에 대해 더욱 더 불신이 깊어지는 가운데에서도 기존 기득권 층은 '지금 유럽에 IMF위기가 도래했으니 차기 총재도 유럽인이 해야 그리스 위기를 쉽게 헤쳐나갈 수 있다'는 주장[87]도 나왔지만 이미 유럽이 그런 소리를 하기에는 신흥국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커져 있다.

결국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회의에서 지분의 6% 이상을 신흥국에 넘기고 유럽 이사 2명을 줄여 신흥국의 참여권을 확대하는 구조개편이 합의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최국인 대한민국의 역할이 매우 컸고, 대한민국 역시 IMF 쿼터에서 과소평가를 받았던지라 2010 G20 재무장관 회의를 통해 IMF 쿼터를 늘리게 됐다. 또한 2012년에는 그동안 관례적으로 미국이나 서유럽국가 출신이 맡아온 IMF 사무총장으로 중국 경제학자 린젠하이(林建海)를 임명했고, 뒤이어 세계은행 총재에 한국계 미국인인 김용(Jim Yong Kim) 전 다트머스 대학교 총장을 임명했다. 이젠 미국과 유럽도 신흥국가의 입김을 무시할 수는 없는 셈.

9. 트리비아[편집]

  • 석유파동 때와 마찬가지로 대통령 이하 주요 국무위원들이 국내외에서 영업활동에 나섰다. 석유파동 당시 방미(訪美)해 달러貨 지원을 요청구걸했던 김종필 국무총리는 사태 수습에 한창이었던 1998년에도 국무총리를 맡아 김용환과 함께 경제를 조율할 관료들을 대통령에게 추천하는 역할을 맡았다.[88] 김대중 대통령은 해외 순방 때마다 투자유치 활동을 겸하여 홈플러스의 모기업인 테스코社가 이 무렵 한국 투자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지일(知日) 인사로 유명한 박태준 자민련 총재는[89] 포항제철 활동 당시 구축한 일본(日本) 인맥을 활용해 "단기차관→중장기로 전환"하는 협상을 벌여 성사시키기도 하였다.[90]

  • 당시 DJ정부는 폭락한 국내 부동산시장을 떠받치기 위해서 외국자본의 국내 부동산 매수를 크게 허용해주었고, 재외동포 등 비거주 한인이 국내 부동산을 살 때 제한을 풀고 '고국의 부동산을 사라'며 홍보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금많은 부유층의 미분양 아파트 매수를 권장해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한시 면제 등 혜택을 주었다. 이것은 노무현정부 초기의 경제적 어려움을 타파하는 데도 그대로 재탕되어서 세제혜택을 받는 다주택자가 많이 늘었다.

  • 2015년 7월, 그리스의 제3차 구제금융시 한국의 IMF 사태와 비교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그리스는 기반 산업이 전무해서.. 미래가 안보인다

  • 관련된 루머로 통일교가 자신들을 인정해주는 댓가로 부채를 모두 갚아주겠다고 했느니 대만중국과 단교하고 다시 자기네들과 수교하는 조건으로 부채를 모두 갚아주겠다고 했느니 하는 말들이 떠돌고 있지만 모두 사실 무근이다.

  • 베스트셀러이지만 사이비 경제학서적인 '화폐전쟁(Currency Wars)'의 저자 쑹훙빙은 1997년 대한민국의 외환위기가 국제 유대 자본의 음모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국제 유대 자본이 저리 대출을 늘려 한국의 자산버블을 키웠다가 버블이 최고조에 이르자 갑자기 대출금을 회수하여 한국을 사실상 파산시킨 다음에 한국의 알짜 자산들을 걍 헐값으로 먹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양털 깎기 문서를 참조할 것.

  •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치를 경기장을 건설해야 하는데,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영국의 스포츠 도박업체 타이거 풀스社가 "한국內 사업 허가"를 조건으로 자금지원을 하겠다고 나선 적도 있다. 특히 이 일에 적극 나선 이벤트 사업가 송재빈의 수완으로 타이거 풀스 한국 지사가 설립됐으며, 나중에 시작된 정부의 체육복권사업인 토토의 지분도 사들여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 하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현재 송재빈의 지분은 사라진 상태.

  • 10년 뒤, IMF 사태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이었던 강만수[91]가 이명박 정부의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년도 안 되어 경질을 당했다.(...)

  • 1997년 정부가 IMF측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후 정확히 18년 되는 2015년 11월 22일, 공교롭게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 흔히 IMF 혹은 IMF 사태 라고 많이 이야기 하는데, 사실 IMF는 구제금융을 해준 기관인 것이지 외환위기의 원인은 아니다. 일단은. 여하튼 이런 관계로 사람들이 이 사태를 항상 IMF 사태라고 부르며 IMF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어 IMF 관계자들은 "우리는 한국 경제를 구제해준 기관 인데 왜 IMF를 나쁜 것처럼 말하느냐?"라면서 싫어한다고 한다(...) 허나 고금리와 구조조정이라는 어마무시한 처방(금리제한 없애기, 대량해고)으로 국민들에게 막대한 고통을 전가시킨 점도 있긴 해서 고맙다고 하기엔 많이 껄끄러운건 사실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버텨냈으니 다행이긴 하다 정말?

  • 이 사건 최대의 피해자는 197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당시 대학 졸업을 코 앞에 두었던 1975년생 여학생과 재학 중 병역을 마친 1971~1973년생(방위 복무를 한 경우) 남학생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졸업 직전에 이 사건이 터져 취업시장에 큰 지각변동이 발생해 이 세대가 제대로 직격탄을 맞아 인생이 꼬이고 말았다.[92] 추가로 당시 수능세대인 1977년생(삼수생), 1978년생(재수생), 1979년생(고3)에서는 직업 장교로 평생을 보낼 수 있는 육군사관학교, 항공기 조종사가 될 수 있는 공군사관학교, 경찰관이 될 수 있는 경찰대학교의 입결이 거짓말 수준으로 급상승했다.

  • 경제가 이렇게 안 좋아지자 대학교 재학생들은 경제난을 피하는 방책으로 '에라이 차라리 군대나 가자' 스킬을 대량으로 시전하여 군대입영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일부 부대는 막사를 긴급히 지어 올리는 등 군대는 한동안 병력적체에 시달려야했다.

  • 서울역, 영등포역 노숙자는 이 때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전에도 있었지만, 1998~2001년 사이에는 서울역앞 광장은 물론 시청앞으로 나오는 지하도까지 노숙자가 가득했다.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는 경우도 많았다.

10. 관련 외부문서[편집]

11. 연표[93][편집]

  • 아래 내용 중 부도 관련 내용은 모두 굵게 표시한다.

11.1. 1997년[편집]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현 현대제철) 부도 처리 확정

1997년 1월 30일

한보건설 및 재계 순위 14위 한보그룹 최종 부도 처리[94]

1997년 3월 19일

재계 순위 26위 삼미그룹 부도

1997년 3월 21일

한보건설 법정관리 신청

1997년 4월 7일

한보 청문회 시작(4/7 ~ 4/25)

1997년 4월 21일

진로그룹 부도, 진로그룹에 대한 부도유예협약 채택

1997년 4월 27일

진로그룹 6개 계열사 부도유예협약의 첫번째 대상으로 지정

1997년 5월 2일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확대(20% → 23%)

1997년 5월 15일

국내 최대 제빵업체 삼립식품 부도, 수원지방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

1997년 5월 19일

대농그룹 부도유예협약

1997년 5월 30일

한신공영그룹 법정관리 신청

1997년 5월 31일

한신공영그룹 부도

1997년 7월 2일

태국 바트 화 폭락

1997년 7월 15일

재계 순위 8위[95] 기아그룹 부도유예협약 체결(사실상 부도), 10대 재벌도 안심할 수 없다는 항간의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 충격, 청와대 확대경제장관 회의

1997년 8월 14일

인도네시아 루피아 화 폭락

1997년 8월 15일

재경원 종금사에 외화자금 긴급지원 검토(3억$이상)

1997년 8월 25일

금융시장 안정 및 대외신인도 제고 대책

1997년 8월 26일

대농그룹 4개사 가운데 미도파만 회생시키고 나머지는 매각, 대농그룹 사실상 공중분해

1997년 8월 27일

무역관련 자본자유화 폭 확대조치 시행

1997년 8월 30일

재경원 증시 안정대책 발표

1997년 9월 1일

무디스 방한 협의(9/1 ~ 9/5), 주식매매수수료 자율화 시행

1997년 9월 10일

산업은행 외환채권 발행(15억불)

1997년 9월 19일

ASEM 재무장관 회의 및 IMF/세계은행 총회 부총리 참석

1997년 9월 22일

진로그룹 6개사에 대한 법정관리 신청

1997년 9월 29일

외환시장 개장 40분만에 대미달러 환율이 1일 변동폭 상한선인 964원까지 상승, 사실상 거래 중단

1997년 10월 15일

쌍방울그룹 부도

1997년 10월 16일

태일정밀 부도, IMF 조사단 한국방문

1997년 10월 17일

대만 외환방어 포기

1997년 10월 18일

외국환 관리규정 전면 개정안 발표(외자유입 관련 자유화 조치)

1997년 10월 20일

당정 금융시장 안정대책 발표(근로자주식저축 1년연장, 한통주상장연기, 3년이상 투자 배당 소득분리과세)

1997년 10월 21일

IBCA, 현행 국가신용등급 유지 발표

1997년 10월 22일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1997년 10월 23일

홍콩 증시 폭락

1997년 10월 24일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

  • 장기 : AA- → A+

  • 단기 : A1+ → A1

1997년 10월 27일

환율 1달러에 940원 돌파

무디스,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 조정

  • 장기 : A1 → A2

  • 단기 : P1 → P2

1997년 10월 28일

미국 다우 존스지수 하루 만에 7.2% 하락, 한국 종합주가지수 500선 붕괴
미국 투자기관 모건스탠리 '아시아를 떠나라' 라는 보고서를 띄움
강경식 부총리는 한국은행에 외환시장 개입중단을 지시(재판에서는 불인정)

1997년 10월 29일

정부 금융시장 안정대책 발표(연기금3조 규모 주식매입, 채권시장개방확대, 기업구조조정)

1997년 10월 30일

외환시장 개장 8분만에 대미달러 환율이 1일 변동폭 상한선까지 또다시 폭등, 사실상 거래 중단

1997년 10월 31일

환율 급등으로 11월 1일부터 유가가 인상된다는 소식에 전국 주유소 북새통 진풍경 연출

1997년 11월 1일

재계 순위 24위 해태그룹 부도, 유가 인상

1997년 11월 3일

해태그룹 화의절차개시신청,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확대(23% → 26%)

1997년 11월 4일

재계 순위 25위 뉴코아 그룹 부도[96]

1997년 11월 5일

블룸버그 "한국 가용 외환 보유고 20억달러" 보도

1997년 11월 6일

한국은행 실무진 한국은행 총재에게 IMF행 건의, 미쉘 캉드쉬 IMF 총재 "한국 금융시장은 동남아 국가와 같은 위기상황 아니다"라고 언급해 한국의 신용도가 회복된 걸로 예측

1997년 11월 7일

주가 사상 최대 폭락

1997년 11월 10일

원화 환율 달러당 1,000원 돌파

1997년 11월 14일

강경식 부총리 르네상스 호텔[97]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청와대 보고에서 "미국 등 우방으로부터 돈을 빌려 보겠으나 여의치 않으면 IMF로 가야 한다"고 설명, 김영삼 대통령 사실상 IMF로 갈 것을 지시

1997년 11월 16일

캉드쉬 IMF 총재 극비 방한해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도착

1997년 11월 17일

AMF(아시아통화기금) 관련 차관회의(마닐라), 외국언론들 한국의 IMF구제금융 요청 가능성 시사, 프랑스 경제 전문지 레 제코는 IMF가 한국에 400-600억달러 긴급지원 검토 중이라 보도하나 재경원 '사실무근'이라며 부인

1997년 11월 18일

한국은행 정부에 IMF구제금융 요청 촉구

1997년 11월 19일

김영삼 대통령 오후 5시 기자회견에서 IMF구제금융 지원요청 발표를 재가받으려던 강경식 부총리, 김인호 경제수석을 전격 경질하고 통상산업부 장관 임창렬을 신임 부총리 겸 재경원 장관으로 임명

임창렬 부총리 금융시장 안정 및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위한 종합대책(환율변동폭 확대, 부실채권정리기금 확충, 부실금융기관 조속한 정리, 채권시장 추가 개방) 발표하지만 IMF 언급하지 않고 이는 이후 IMF와의 협상에 난행 요소가 됨

1997년 11월 20일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 방한, 1일 환율변동폭이 2.25%에서 10%로 확대되나 환율은 다시 확대된 변동폭 상한선까지 폭등해 사실상 거래 중단

1997년 11월 21일

김영삼 대통령은 박태준 자유민주연합 총재,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조순 한나라당 총재와 회담

오후 10시, 임창렬 부총리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했다 발표

1997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 구제금융 신청에 관한 대국민 특별 담화문 발표[98]

1997년 11월 23일

재정경제원 IMF 협의단(단장 강만수 차관) 편성, IMF의 실무협의단 1진이 입국

1997년 11월 24일

일본 야마이치증권 창립 반세기만에 파산 선고

1997년 11월 25일

IMF 실사단 공식활동개시, 국무회의 : 예금자 보호법 등 4개 법안 새행령 개정안 채결
금융시장 안정 및 기관투자가 주식매입 기반 확충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 조정

  • 장기(2단계) : A+ → A-

  • 단기(1단계) : A1 → A2

1997년 11월 26일

IMF 휴버트 나이스 대표단이 김포공항 도착, 금융시장 안정 및 기관투자가 주식매입 기반 확충
국내 최대 해외여행사인 온누리여행사 도산

1997년 11월 28일

임창렬 부총리 일본 방문해 미쓰즈카 대장상과 원조회담에 들어갔으나 "IMF로 가지 않으면 지원은 없다"라는 대답만 돌아옴

무디스, 한국의 신용도를 A1에서 A3로 낮춤.

1997년 11월 29일

종합주가지수 400선 한때 붕괴

서울 힐튼호텔에서 한국 정부와 IMF간 지원 협상 사실상 합의 하라는 대로 다 양보한 사실상 백기 선언

1997년 12월 2일

재경경제원(현 기획재정부), 고려종합금융[99] 등 9개 종금사 영업정지 명령

셰프라인 부도.

1997년 12월 3일

싱가포르 항공편으로 도착한 미셸 캉드쉬 IMF 총재 정부중앙청사에서 임창렬 재경부장관과 공식적인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해 대기성 차관 제공에 관한 양해각서 체결, IMF 한국에 555억 달러 지원 확정

1997년 12월 4일

대기성차관협약(Stand-By Arrangement) IMF 이사회 승인
총 210억달러 승인 : 대기성차관 75억 달러, 보완준비금융 135억 달러

1997년 12월 5일

고려통상 계열 고려증권 부도

1997년 12월 6일

재계 순위 12위 한라그룹 및 영진약품 부도, IMF 1차 지원금 56억 달러 제공

1997년 12월 7일

대우그룹, 쌍용자동차 인수 최종 확정[100]

1997년 12월 9일

경남모직, 동양어패럴 부도, 엘칸토 화의신청.

1997년 12월 10일

환율이 3일 연속 1일 변동폭 상한선까지 폭등하여 외환시장 개장 40분만에 거래가 중단되고 기업어음(CP) 금리가 6일째 법정 상한선까지 치솟았으며 회사채 유통수익률은 법정 발행금리 상한선인 연 25%를 초과하는 등 금융시장 전반이 마비

무디스 한국국가신용등급을 준 Junk 수준으로 하향조정

  • 장기(2단계) : A3 → Baa2(준 Junk)

  • 단기(1단계) : P-3 → N∙P(투자부적격)

삼성제약 부도.

5개 종금사 추가 업무정지(대한∙나라∙신한∙중앙∙한화종금)
종금사 거래기업 및 개인예금자에 대한 지원
은행신탁계정의 CP 매입 한시적 허용
외국인 주식투자한도(50%) 12월 11일부터 적용 등

1997년 12월 11일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

  • 장기(3단계) : A- → BBB-

자본시장 전면개방
외국인 투자한도(1인당 한도 50%로) 확대 : 개인당 7%, 종목당 26% 한도(12/10발표)
한국은행,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자금지원 발표
14개 종금사관련 지원 : 7조 3,000억 원(은행, 종금, 증권)
채권시장 개방확대
대기업 무보증, 보증회사채 개방(10% → 30%)
대기업 무보증 CB투자 한도 확대(30% → 50%)
중소기업 무보증회사채 및 CB 투자한도 폐지

1997년 12월 12일

극동건설 계열 동서증권 영업정지, 법정관리 신청

1997년 12월 16일

정부 환율변동 제한폭 폐지(17일 시행), 제3차 경제대책회의 내용 발표
최고금리 확대 : 연 25% → 40%, 금융기관에 대한 외국인투자 대폭 허용 등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 야당의 김대중 후보 당선, IMF 2차 인출 이사회 승인

1997년 12월 19일

세계은행 및 ADB 자금지원 협상 완료

1997년 12월 21일

무디스,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 등급으로 하향조정

  • 장기(2단계) : Baa2 → Ba1(투자부적격)

IMF 협의단 방한

1997년 12월 22일

미국 립튼 재무부 장관 입국, 재무부 금융기관 외채만기 연장을 위한 정부지급보증 국회 동의

1997년 12월 23일

원화환율 사상 최고치 기록(1995원), 국공채시장 등 채권시장 전면개방

1997년 12월 24일

정부 IMF 구제금융 협상에 대한 신청 발표

1997년 12월 25일

IMF 및 주요 선진국 자금 조기지원 발표, 1997년 12월말 및 1998년 1월말에 걸쳐 100억 달러 조기지원 약속

1997년 12월 27일

재계 순위 35위[101] 청구그룹 부도[102]

1997년 12월 30일

IMF 20억 달러 조기 지원(3차 지원)

1997년 12월 31일

부실 종금사 처리를 위한 가교종금사(한아름종금)설립 완료

11.2. 1998년[편집]

1998년 1월 3일

기업구조조정 5대 원칙 천명, 이론배당락지수 368.85, 실제 385.49(+9.18)

1998년 1월 5일

노사정위원회 발족

1998년 1월 8일

IMF는 한국정부 3차 의향서 승인(20억 달러 인출승인)

1998년 1월 11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재계 4대그룹 총수와 만나 재벌개혁 5개항 합의

1998년 1월 12일

미쉘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 극비 방한, 청와대가 접견내용 발표

1998년 1월 14일

나산그룹(현 인디에프) 부도

1998년 1월 16일

현대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

1998년 1월 18일

재계 순위 31위 극동건설 부도

1998년 1월 21일

김용환 자민련 부총재[103]를 수석대표로 유종근 전북지사[104] 등 250억달러 안팎의 단기외채를 장기외채로 전환하기 위해 국제채권단을 상대로 뉴욕 협상 시작

1998년 1월 25일

김용환 수석대표 귀국

1998년 1월 30일

재경원, 종금사 1차 폐쇄 대상 10개사 명단 발표(한화, 쌍용, 경남, 고려, 삼삼, 항도, 청솔, 신세계, 경일, 신한종금), 감사원 외환위기 특별감사 착수, 삼양식품 화의신청

1998년 2월 1일

파스퇴르 부도

1998년 2월 3일

S&P, 국가신용등급 3단계 상향조정

1998년 2월 6일

노사정 공동협약 체결

1998년 2월 8일

금융시장 안정 및 단기금융시장 개방계획 발표

1998년 2월 12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신정부「100대 국정과제」발표, 청와대에서 IMF 외환위기 현장감사 실시

1998년 2월 15일

외국인에 대한 인수, 합병 제한 완화

1998년 2월 17일

10개 종금사 인가취소(첫 금융기관 퇴출), IMF 한국정부의 4차 의향서 승인(20억 달러 인출승인)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3단계 상향 조정 - B+ → BB+

1998년 2월 19일

BIS 8%미달 12개 은행 경영 개선 조치

1998년 2월 24일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퇴임

1998년 2월 25일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취임

감사원은 이경식 전 한국은행총재, 강경식 전 재정경제부 총리, 김인호 전 경제수석에 대한 특별감사 착수

1998년 3월 2일

주식가격제한폭 8% → 12%

1998년 3월 6일

뉴욕에서 단기채권 외채의 만기 연장을 위한 설명회 개최

1998년 3월 7일

국내 대학 중에서는 처음으로 단국대학교 부도

1998년 3월 11일

1차 경제대책 조정회의(IMF체제 극복의 목표와 과제)

1998년 3월 12일

단기외채 2백 18억 달러 만기 연장

1998년 3월 18일

국내 1호 백화점 미도파 부도

1998년 3월 23일

IMF 서울사무소 설치

1998년 3월 24일

세계은행 1차 구조조정차관 20억 달러 승인

1998년 3월 26일

무디스, 한국 장기신용등급 전망 상향조정

1998년 3월 27일

IBRD 한국에 대한 1차 구조조정차관 승인
차관액 : 20억 달러 - 이자율 : 리보 +0.75% - 만기 : 15년(거치기간 5년포함)

1998년 3월 30일

무디스, 한국장기신용등급(Bal) 전망 상향 조정

1998년 4월 1일

금융감독위원회 공식 출범

1998년 4월 3일

외평채 40억 달러 발행

1998년 4월 9일

외평채 40억 달러 발행 성공

1998년 4월 10일

감사원, 외환 특감결과 발표및 수사의뢰 : 강경식 김인호 출국 금지

1998년 4월 22일

IMF에 한국은행 외화대출 벌칙성금리 인하 요청

1998년 4월 27일

외국인 투자유치 종합대책 발표

1998년 5월 2일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서면 답변서 제출, IMF 6차 의향서 합의(금리정책에 대한 신축성 확보)

1998년 5월 3일

5차 경제대책조정회의, 외국인 투자업종개방 추가확대, 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 촉진방안과 중기비전

1998년 5월 9일

법무부, 강경식 체포동의요구서 임시국회 제출

1998년 5월 12일

재계 순위 28위 거평그룹 부도

1998년 5월 14일

중기대출만기 연말까지 연장

1998년 5월 16일

법원, 강경식 영장실질심사 위한 구인장 발부,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폐지

1998년 5월 18일

검찰, 강경식, 김인호 직무유기 및 직권남용 혐의 구속
채권단 동아그룹 해체하고 동아건설만 남김

1998년 5월 20일

64조 원 규모의 금융 구조조정 재원(1차 공적자금) 조달 방안 마련

1998년 6월 5일

강경식, 김인호 구속 기소 및 환란 수사 결과 발표

1998년 6월 12일

5대그룹 간 빅딜 추진, 한국전력공사 등 9개 공기업 조기 민영화 확정

1998년 6월 15일

엔화 환율 8년 만에 최고치경신(1달러=146.85엔)

1998년 6월 18일

금감위, 퇴출 대상 55개 기업 발표(5대 그룹 20개사, 6∼64대 그룹의 32개사, 비재벌 계열 3개사)

1998년 6월 29일

금감위, 금융기관 구조개혁 조처(동화, 동남, 대동, 경기, 충청 등 5개 시중은행 폐쇄 발표), 퇴출은행, 조건부 승인은행 발표

1998년 6월 30일

금융경색완화대책 발표

1998년 7월 1일

공기업 1차 민영화방안 발표, 재계 순위 32위[105] 한일그룹 부도

1998년 7월 3일

외환매입제한 폐지

1998년 7월 10일

개정 예금자보호법 시행, 환란 1차 공판을 발표

1998년 7월 11일

상업은행, 한일은행 합병 발표

1998년 7월 24일

IMF 7차의향서 합의(재정적자 GDP 4% 확대)

1998년 8월 12일

금감위, 20개 보험회사에 대해 경영 개선 조처

1998년 8월 17일

공기업 2차 민영화방안 발표

1998년 8월 19일

4개 보험사 영업정지

1998년 8월 25일

정부출연, 위탁기관 경영혁신 계획 발표

1998년 8월 28일

재경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및 기업교환(빅딜)에 대한 세제 지원 방안 마련

1998년 9월 4일

강경식, 김인호 보석 석방

1998년 9월 7일

재계, 사업구조조정 방안 발표

1998년 9월 10일

하나은행, 보람은행 합병 발표

1998년 9월 11일

국민은행, 한국장기신용은행 합병 발표

1998년 9월 20일

장은, 동방페레그린 증권 퇴출

1998년 9월 28일

대통령 경제기자회견 : 외환위기 재연 가능성은 없으며, 구조개혁은 지속추진

1998년 10월 7일

기아자동차, 현대에 낙찰

1998년 10월 19일

5대 재벌 계열 사업 구조조정 방안 발표

1998년 10월 28일

은행권, 117개 기업 워크아웃 대상 선정

1998년 12월 7일

정부·재계, 5대 재벌 구조조정안 합의

1998년 12월 17일

조흥은행이 현대종합금융, 강원은행과의 합병을 발표

1998년 12월 18일

IMF 긴급보완금융(SRF) 18억불 IMF 자금 중 처음으로 상환

1998년 12월 19일

무디스, 한국 신용등급 상향조정 검토 발표

1998년 12월 30일

IMF 긴급보완금융(SRF) 10억불 상환

1998년 12월 31일

제일은행, 뉴브리지 캐피탈에 매각(지분 51%)하기로 합의

11.3. 1999년[편집]

1999년 1월 19일

영국 피치,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조정

1999년 1월 25일

영국 피치,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 조정(한국 장기외화채권 등급을 BB+에서 BBB로)
S&P, 한국 신용등급 투자적격 상향조정(BB+→BBB-), 국회에서 경제청문회

1999년 2월 12일

무디스, 한국 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 조정(장기외화채권 등급을 Ba1에서 Baa3으로)

1999년 3월 21일

금융감독원, 퇴출 및 여신중단 대상 80개 기업 중 25개사 정리

1999년 4월 1일

제1단계 외환거래자유화

1999년 4월 14일

김대중 대통령, "구조조정 약속 안지키면 5대 그룹도 워크아웃"

1999년 4월 19일

대우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대우중공업 조선 부문(현 대우조선해양) 매각, 김우중 회장 보유 주식 매각대금 3천억원 출연 등 구조혁신 방안)

1999년 4월 21일

부실 5개 생보사(동아(현 KDB생명), 태평양(현 동양생명), 한덕, 조선, 두원) 공개 매각 절차 개시

1999년 4월 23일

현대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

1999년 5월 6일

종합주가지수 800 돌파

1999년 5월 19일

미셸 캉드쉬가 방한해 롯데호텔에서 기자 회견

1999년 5월 20일

현대전자, 빅딜로 LG반도체를 인수

1999년 6월 21일

결심공판(26차공판), 검찰 강씨 징역 4년, 김씨 3년 구형

1999년 6월 30일

삼성자동차 (현 르노삼성자동차) 법정관리 신청으로 삼성자동차·대우전자 (현 동부대우전자) 빅딜 무산

1999년 7월 1일

정부, 긴급자원지급 40억 달러 조기 상환하기로 IMF와 합의

1999년 7월 19일

대우그룹의 12개 계열사에 대한 합의서로 워크아웃 공식 신청을 발표

1999년 7월 20일

강봉균 재정경제부 장관, "김우중회장이 내놓은 담보는 처분대상" 발언

1999년 7월 23일

대우그룹 shock, 최대 하락폭 71.70포인트

1999년 8월 6일

대우그룹·GM 자동차 부문 전략적 제휴 양해각서 체결

1999년 8월 12일

투신사 수익증권 환매 대책 마련(대우 구조조정 추진에 따른 금융시장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 투신사 수익증권 환매에 대한 대응 방안 강구해 8월13일 시행)

1999년 8월 20일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에 대한 선고공판(27차공판)에서 무죄 판결

1999년 8월 26일

대우그룹의 유동성 문제 해결과 구조조정 추진을 위한 (주)대우 등 12개 계열사 워크아웃(기업개선 작업) 돌입

1999년 9월 1일

현대전자 주가조작, 회장 이익치 shock

1999년 9월 17일

제일은행, 뉴브리지캐피털과 매각을 위한 주요 조건에 합의하고 투자약정서

1999년 9월 18일

보완준비금융 135억 달러 9개월 앞당겨 조기상환 완료

1999년 9월 19일

제일은행 투자약정서(TOI) 체결, 11월 금융대란설에 대비 금융시장안정대책 발표
채권시장 안정기금 설립키로 결정하고 1차로 다음달 초까지 10조 조성
대우채권 환매비율 19991110(80%), 20000208(95%)로 환매요구 폭주로 인한 대란 가능성 상존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유럽, 아프리카 출국

1999년 10월 30일
~12월 1일

대우그룹 12개 계열사에 대한 워크아웃 계획 확정

1999년 11월 1일

대우 회장대우그룹 사장단 퇴진으로 대우그룹 사실상 해체

1999년 12월 24일

대기성 차관 잔액 15억 달러 추가인출 중단

11.4. 2000년[편집]

2000년 2월 12일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및 화의 신청 종결 결정

2000년 2월 14일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양해각서를 하고 결과 체결을 못한 합의서

2000년 2월 17일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졸업 및 파업

2000년 2월 18일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및 화의 신청 종결

2000년 3월 14일

현대 정몽구 회장, 동생 정몽헌 회장의 해외출장 중에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보 조치[106], 왕자의 난이라 불리는 현대그룹 경영권쟁탈전 시작

2000년 3월 24일

귀국한 정몽헌 회장, 이익치 회장의 인사 발령을 무효화하고 정몽구 회장의 그룹 공동회장직을 박탈

2000년 3월 27일

정주영 명예회장이 직접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정몽헌 단독 회장 체제를 공식 승인하면서 왕자의 난은 정몽헌 회장의 승리로 마무리

2000년 4월 23일

투자신탁 회사 구조조정 공적자금 투입 결정

2000년 4월 24일

IMF 협의단 채결

2000년 4월 25일

투자신탁에서 투자신탁증권 체제로 전환

2000년 5월 26일

현대투신 사태로 현대그룹 유동성 문제 표면화되자 채권단, 현대건설에 1000억원 긴급지원

2000년 5월 31일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 등 3부자 동반퇴진 및 5조9000억원 유동성 확보 등 자구안 발표

2000년 6월 11일

IMF 총재 호르스트 쾰러[107] 출국

2000년 6월 12일

최종 정책협의 종료 (동년 8월 IMF 이사회 승인), 프로그램 3년 동안 IMF와 정책협의 11회 실시

2000년 6월 13일

호르스트 쾰러 입국

2000년 7월 24일

한국기업평가, 현대건설 등 현대 8개 계열사 신용등급 하향조정

2000년 8월 6일

정부, 현대건설 워크아웃 돌입 경고

2000년 8월 13일

현대, 자동차·중공업 계열분리 및 1조5000억원 자금조달 등 추가 자구안 발표

2000년 9월 1일

현대자동차 등 자동차 계열사 현대그룹에서 분리

2000년 9월 7일

정부개혁추진위원회를 발족

2000년 9월 12일

정부, 공적자금 40조원 추가조성 결정

2000년 9월 20일

IMF 대기성차관 60억달러 조기상환 방침 발표, 00년 IMF연차총회시(체코 프라하) 정부대표 기조연설

2000년 10월 18일

현대건설, 5810억원 유동성 확보 추가 자구안 발표

2000년 10월 30일

현대건설 1차 부도

2000년 11월 3일

2차 29개 퇴출 대상 기업 발표, 삼성자동차, 삼성상용차, 진로종합식품, 진로종합유통, 우성건설 등, 현대건설은 채권단으로부터 퇴출 대신 조건부 회생 판정

2000년 11월 6일

대우자동차 1차 부도 처리

2000년 11월 8일

대우자동차 최종 부도 처리, 현대채권단은 현대건설 채무 만기연장 결의

2000년 11월 10일

동아건설 부도

2000년 11월 20일

현대건설, 서산간척지(: 총 3,082만 평) 매각 등 1조2974억원 규모 자구안 발표

2000년 12월 3일

대기성차관협약 및 프로그램 종료

2000년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 "국제통화기금의 모든 차관을 상환했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라고 공식 선언

2000년 12월 17일

예금보험공사, 5개 부실은행에 공정자금 1분 투입 결정

11.5. 2001년[편집]

2001년 1월 8일

대기성 차관 조기상환 개시

2001년 1월 16일

산업은행, 회사채신속인수 대상에 현대건설 선정

2001년 3월 5일

현대건설, 출자전환 동의서 제출

2001년 3월 28일

채권단, 자본잠식 상태인 현대건설에 2조9000억원 출자전환 결정

2001년 5월 11일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파산이 확정되어 동아그룹 해체

2001년 5월 18일

현대건설, 임시주주총회 통해 5.99대 1 감자 결의 및 심현영 사장 선임

2001년 6월

현대 채권단, 2조9000억원 출자전환 실시

2001년 8월

현대건설,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

2001년 8월 10일

정부 IMF에 조기 상환

2001년 8월 22일

김대중 대통령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 방문

2001년 8월 23일

한국은행, IMF 구제금융 차입금 195억 달러 전액을 상환해 당초 예정보다 3년 빨리 IMF 관리 체제 종료





[1] 출처는 1997년1998년MBC 뉴스데스크다. 출연자는 당시 평일 앵커인 이인용/김지은-정혜정, 주말 앵커인 권재홍/최율미.[2] 대우그룹 부도는 1999년이다. 그 밖에 위의 스크린샷에서 언급된 기업들 가운데 일부는 외환위기 이후에 회생되었거나 부도를 당하지 않은 다른 기업에게 넘어가 이름까지 바뀌기도 하였다.[3] 그런데 중국일본의 경우에는 동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동남아 지역의 투자가 증가하면서 일시적인 반사이익을 좀 받긴 했다. 특히 중국은 동아시아 외환위기로 동아시아 경제블록 내에서 위상이 급격히 높아졌다.[4]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5] 간단히 설명하자면 원-달러 환율 액면가를 높게 설정하는[6] 보통 여기에 홍콩도 포함이 되나, 홍콩은 제조업이 아닌 금융업이 성장을 주도했다는 차이점이 있다.[7] 상기의 평가절하의 반대상황으로, 원-달러 환율 액면가가 낮아지게 되는 상황이다.[8] 외환위기 직전 중반 한국은 자동차 덤핑 대미 수출로 미국의 반덤핑 무역 제재 법인 슈퍼 301조 조치를 받았던 게 대표적인 예이다.[9] 그래서 지금의 그리스 경제위기와 달리 IMF가 까인다. 그냥 돈을 빌려주고, 제때 이자를 쳐서 받으면 그만인데, 괜히 긴축정책과 고금리정책을 강요했다가 나라를 없앨 뻔했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IMF 때문에 청년층 인생이 뭐같아진 것을 생각하면, 한국인에게 시한폭탄을 선물로 받아도 모자랄 지경이다.[10] 대한민국이 OECD에 가입한 해다.[11] 지난달 실업률 3.1% 4년 반만에 최고, 실업률 3.1% 최악 수준 [12] 한달새 27만명 실직 [13] 3월 실업률 6.5% 폭등 [14] 실업률 8.7%... 사상최악 [15] 실업률 8.7%... 사상최악2 [16] 체불임금 6480억원 [17] 다만 상당수 대기업들이 호황기를 틈타 투자를 과도하게 했다가, 외환위기가 닥쳐온 후 (혹은 닥쳐오기 직전에) 부도된 사례는 꽤 많았다. 예: 기아그룹, 한보그룹, 대우그룹, 뉴코아그룹, 해태그룹, 나산그룹, 쌍방울그룹 등등.[18] 1988년~1996년 신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주택이 대거 건설되면서 부동산 가격이 안정화 된 영향.[19] 하지만 자금력도 안 되면서 아파트를 무리하게 건설하고 방만한 경영을 하던 중견 건설업체들이 사라졌다. 1995년 4월 유원건설, 1995년 10월 삼익건설, 1995년 12월 우성건설, 1996년 8월 건영건설이 도미노처럼 부도났다.[20] 돈을 빌려줬다가 이자를 받지 못한 대출금.[21] 이전 버전에는 엔화와 원화를 링크해 설명했는데 그것은 직접 관계가 없다. 원-엔 환율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으로 정해지지 않고, 그냥 한국시장의 원-달러 환율과 일본시장의 엔-달러 환율을 가지고 재계산한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원-엔 직접 거래 시장을 개설하려는 노력은 이천년대에 들어와서도 꾸준히 있었지만 일본에서 시장 조성에 호의적이지 않아 무산되었다.[22] 엔화가치의 하락이 한국의 원화가치에 미치는 영향은, 이를테면 한일 공통의 최대 경쟁시장인 미국에서, 더 싸진 엔화때문에 일본산 상품의 수출경쟁력이 오르는 와중에 원화가치가 비싼 채로 있으면 한국산 경쟁상품이 덜 팔리고, 한국이 달러를 못 벌(것 같으)면 원화가치도 싸진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돌아온다.[23] 물론 당시 한국의 경제적 펀더멘털이 문제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98년과 같은 경제환란에 이를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24] 기업에 대한 종합금융지원을 원활하게 하고 금융산업을 균형있게 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회사로서 예금·대출업무와 투·융자업무, 증권중개업무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회사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정부의 육성정책으로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위주로 전환되면서 외화자금 수요가 확대되고 기업의 자금수요가 점차 복잡·다양화됨에 따라 이를 충족하기 위하여 민간 중심의 외자 조달의 창구를 마련하고, 기업에 대한 복합적인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자 미국의 투자은행제도를 모델로 하여 설립되었다. 1976년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6개 종금사체제가 유지되었으나, 1990년대 들어서 김영삼 정부의 금융자유화정책에 따라 30개의 종금사가 난립하게 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대부분 문을 닫았다.[25] 이에 대해서 훗날 당시 IMF의 총재였던 미셸 캉드쉬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설 때 즈음, "당시 무리한 경제처방을 강요한 측면이 있었다."는 발언으로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한 바 있다.[26] 콜금리는 40%까지 인상되었다.[27] 미국 같은 제1 기축통화 국가는 금리를 높이면 중장기적으로 해외에서 투자가 들어오지만 한국 같은 소위 쩌리 국가는 고금리로 특히 외환 위기 시기때 자본유입이 될리가 만무하다.[28] 실제로 미국의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美 연방준비위원회는 초저금리 정책과 무제한적 양적완화 정책을 펼친 바 있다.[29] 돌려막기[30] 아무리 고금리를 주더라도 곧 부도날 국가의 채권을 사 줄 은행은 없으며 고금리를 유지했다는건 부채도 막대하게 늘어난다는 것이다.[31] 장기채무자들에게 강제로 보험을 들여서 죽이고 돈을 가로채는 수법[32] 사채 이자에 시달리는 기업인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추진됐던 조치였기 때문에, 자영업자들의 성원을 받기도 했다.[33] 오죽하면 대우의 김우중 회장 등이 대마불사, 정부가 해주겠지 따위의 마인드를 가지고 안이하게 대처했다가 망했다![34] YS "IMF 맞은 책임의 65%는 DJ에게 있다" [35] 이인제 경기지사가 의원 6명을 이끌고 탈당한 건 하반기인 1997년 9월. 하지만 그래도 132석으로 79석의 국민회의 + 50석의 자민련보다 더 많은 과반수 정당 지위를 유지하였다.[36] 96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여권이 대승을 거두었다. 이 때는 YS의 차남 김현철정책 연구 및 여론조사를 담당여의도 연구소를 설립, 가동해 공천에 적극 관여해 성과를 거뒀는데, 김현철의 입김이 점점 강해지자, 여기에 줄을 대려는 기업들이 나타나면서 정권 末에 악재로 작용하기도 했다.[37] 자세한 내용은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강만수 저 - pp.438-439를 참고[38] 그나마 1/4분기에 대부분 지출될 예정이었다.[39] 추가적으로 말레이시아는 외환보유고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긴축재정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과는 반대로 오히려 양적완화를 통한 내수진작으로 경제위기를 해결했다.[40] 김용환 부총재가 경제구원투수로 대통령 당선자에게 추천한 사람이다. 수험 5개월 만에 행정고시(6회)에 합격한 수재로 30대 중반에 행시 1회 출신들과 동일한 직위로 일할만큼 초고속 승진을 했지만, 1979년 율산그룹 해체 당시, 주무 담당자로써 책임을 지고 공직을 떠났다가, 20년 만에 다시 친정으로 돌아온 것.[41] 이중 대우그룹의 부실로 투입된 공적자금이 29조 8천억원 [42] 다만, 현대그룹의 분할은 IMF의 후폭풍이라기보다 정주영 회장 사후 2세들의 경영권 승계에서 발생한 다툼, 즉 왕자의 난이 원인인게 더 정확하다.[43] 1996년 말 30대 그룹 평균 부채율이 387%였다. 1998년 5월 부도난 30대 기업 거평 그룹이 부도 6개월 전까지 부채율 347%인 자사는 양호한 수준(두 번째 장, "부도 리스트~~~" 참조)이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시절이었던 것.[44] 물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제는 조금만 경제상황이 불안정하다고 판단하면, 긴축경영이다 위기상황이다 하여 신규채용억제, 인원감축, 아웃소싱, 비정규직 이용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지나칠 정도로 고용을 줄여 실업이 늘고 고용상황이 안좋아지는 부작용도 있다. 솔직히 1997년 이전 당시 대학만 졸업하면 기업에서 모셔간다는 것이 사실이었던 것은 결국에는 그 과잉투자 때문이었으니까.[45] 말하자면 신입 100명이 필요한 기업이 외환위기 이전에는 향후 성장할 것을 대비, 입도선매 차원에서 정규직 120명을 채용했다면 지금은 향후 나빠질 것을 대비 40명만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40명은 비정규직, 아웃소싱 등으로 채용, 총원 80명을 가지고 100명분의 일을 시킨다고 생각하면 된다.[46] 그 당시 고려대학교에서 김영삼을 특강자로 초청하였는데 이에 고대생들이 반발하는 뜻으로 김영삼이 탄 차가 학교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바람에 김영삼은 차안에서 수시간 밀봉된 상태로 있었으며 꼼짝없이 차안에 갇힌탓에 분유통에 소변을 봤다는 그야말로 굴욕을 당했다. 결국 김영삼은 강연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고대생 한 명이 김영삼에 손가락질을 하여 김영삼 개XX라고 욕까지 하는 바람에 민주산악회 회원들로부터 멱살을 잡히기도 하였다. 결국 그로 인해 고려대 총장이 학생들을 대신해서 김영삼에게 사과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때 김영삼과 동행했다가 곤욕을 치른 인물 중 하나로 당시 동아일보 회장이었던 故 김병관이 있다.[47] 2위는 전두환 전 대통령. 반면 '존경받아야 될 인물' 1위로는 백범 김구 선생, 2위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선정되었다. (사실 당연한 것이, 경제가 망한 뒤에는 그와 관련해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가 기억나는 법이다. 실제로도 여러 경제적 업적을 이룩한 적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에 가장 걸맞는 인물일 것이다.), 그 뒤는 충무공 이순신, 세종대왕, 김대중 대통령이 뒤를 이었다.[48] 어느 나라를 봐도 나라가 부도가 난 때에 여당인 쪽이 차기 선거에선 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선 경선 결과에 불복하여 독자 출마한 이인제 후보가 여당표 500만 표를 분산시키지 않았다면 김대중 후보의 당선은 아마 어려웠을 것이다.[49] DJP 연합으로 인한 충청권 유권자들의 가세와 앞선 각주에 쓰여져 있듯 이인제 후보로 인한 득표 분산 등이 더 컸다는 분석도 많다. 자세한 건 15대 대선 문서를 참조.[50] 부산 앞바다에 인공섬 해상신도시를 매립해 연결하는 노선으로, 이후 2011년 3월 30일에 개통한 부산 도시철도 4호선(반송선)과는 전혀 다른 노선이다. 서울의 3기 지하철 계획이나 부산 도시철도 5호선처럼 같은 시기에 외환위기로 백지화되었던 다른 노선들은 대부분 경전철로 대체되어 재추진 중이지만, 이 경우 노선의 핵심인 부산 앞바다 인공 계획 자체가 무산되면서 부활의 여지도 없이 완전히 폐기되었다.[51] 사실 계획을 아예 엎어버리기도 뭐한게 이미 서울에서 부산방향으로 60%이상(서울~대구) 토목 공사와 시설 설치(교각,터널,선로,가선,신호)를 완료 해놨기 때문이다. 위에 취소된 철도계획들은 전부 구상단계거나 이제 막 공사를 시작하려는 단계였다.[52] 어쨌든 철도 동호인 사이에서는 도시철도 계획을 뒤틀어버린 IMF가 어마어마하게 까이고 있다.[53] 계획상 보면 알겠지만 3기 지하철 계획이나 각 지방들의 철도 사업은 지금 추진하려 해도 각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을 엄청나게 압박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대규모 사업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100% 세수만으로는 불가능했고, 처음에는 민자사업을 다들 고민했었다. 서울 지하철 9호선 등 일부는 민자사업으로 사업이 성사된 것.[54] 인천국제공항도 외환위기로 인해 개항이 지연되다가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1년 전인 2001년에야 간신히 개항되는데 성공했다.[55] 한국 노선 철수 이후 아예 항공사 자체가 망하는 바람에 복항하지 못한 항공사들도 있다. 예를 들면 안셋 오스트레일리아 항공이나 스위스에어. 반면 핀에어아메리칸 항공처럼 외환위기 이전에 조차도 한국에 관심이 없다가 2000년대 후반 이후에야 한국 노선에 취항한 항공사도 있다.[56] 주니치에 입단한 선동열이종범. [57] 여자농구팀을 운영했던 다수의 팀들이 은행권 팀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는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음이 분명하다.[58] 후지필름, 효성, 한일합섬, SK케미칼이 해체됐다.[59] 강호동이 씨름선수 시절 바로 이 팀 소속이었다.[60] 모기업은 동성종합건설이다.[61] 1996년 격주간으로 재창간될 당시 상호명은 미디어유니버스.[62] 모체인 주간야구가 스포츠신문들의 증면경쟁에 따른 기자스카웃이 이어지면서 93년 11월 말 없어져 폐간되었다가 96년 여름 격주간 형식으로 재창간됐다.[63] 이 당시 Q채널, 바둑TV, 캐치원중앙방송으로 넘어갔다.[64] 현재의 OCN이 초기에 대우에서 설립한 영화전문채널이다.[65] 당시 삼성, LG, 대우 등은 TV와 VCR 등의 영상 및 음향가전 하드웨어를 생산,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련 소프트웨어 분야에도 손대면서 시너지효과를 얻고자 하였다. SK의 경우 SKC에서 비디오테이프와 CD 등을 직접 생산하였기 때문에 역시 영상, 음반 분야에 진출하기도 했다.[66] SKY급 상위권 대학교에서는 행정고시(5급 공채)나 일부 학생들이 지망했으며, 7급은 대기업 입사보다 더 아래로 보는 시선이 강했지만 2010년대에 청년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이들 대학교에서도 과거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7급, 9급에 입문하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67] 부대에서 간부들 군번을 살펴보면 87년 1명 88년 1명... 97년 1명 이런식으로 흘러가다가 이후 장기복무에 성공한 간부들이 가끔씩만 추가 되는걸 알수있다. [68] 주요 대기업들은 1995-96년 연공서열제 폐지와 능력별 진급제 도입 이후.[69] IMF 사태가 스태그플레이션의 대표적인 사례중 하나이기 때문에 안그래도 높은 실업률 때문에 개고생인데 물가까지 덩달아 올라가버리니 대한민국 경제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아닐 수가 없다.[70] 특히 빅파이새콤달콤이 대표적인 예. 빅파이 같은 경우에는 IMF 이후로 같은 가격에 크기는 더욱 작아졌다가, 다시 커졌을 때는 가격까지 덩달아 올라가면서 식감이 푸석푸석해지고 맛도 오히려 퇴보해버렸다. 새콤달콤도 마찬가지로 IMF 사태 이전에는 7개에 100원이었는데 이 사태가 일어나자 6개에 200원으로 갯수는 줄어둘고 가격이 더 올라가버렸다. 아이스크림 빙과류도 이 가격 인상을 피할 수가 없었는데, 사태 이전에는 대게 200~300원이었다가 IMF 사태로 300~500원으로 올랐고 (같은 시기에 투게더의 가격은 1000원) 뒤이어 500~700원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현재 시판 중인 대부분의 초콜릿들이 카카오버터 대신에 팜유를 추가한 것도 이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덤으로 부라보콘역시 이 사태 때문에 단종될 뻔한 적도 있었다.[71] 비슷하게도 영국에서 판매하고 있는 토블론 역시 브렉시트의 여파로 초콜릿의 양이 기상천외하게 줄어들었다. #[72] 아예 21세기 기준으로 이 사태 때문에 본격적으로 헬조선이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73] 정확히는 예전처럼 경제 발전이 지속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이제는 사회의 주류가 아니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74] 당연한 얘기이지만, 이러한 출산율이 급격히 줄어든 것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육현장으로, 2017년 현재 2000년생인 고2와 2001년생인 고1, 2002년생인 중3 사이의 학급수가 매 학년 2학급 씩 줄어들고 있다. (참고로 해당 연도의 신생아 출생은 2000년 63만여 명-2001년 55만여 명-2002년 49만여 명) 단 2년 사이에 14만 명이 줄어든 셈. 2007년 황금돼지해, 2012년 흑룡해 등 일시적으로 출산율이 오른 적도 있었으나 전체적인 하락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10년대 중반 3년에 걸쳐서 태어난 출생아의 수는 1990년대 중반의 2년간 태어난 출생아 수보다 적다.(2014~16년 출생아수 약 128만 명 < 1995~96년 출생아수 약 141만 명.)[75] 1996년까지만 해도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 28세, 여성 25세 전후였다. 하지만 2003~2007년도의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 30~31세 여성 27~28세였으며 2014년 남성 33세 여성 30세. 한국인들이 흔히 쓰는 동아시아식 나이가 아닌 만 나이 기준이다. 초산 연령은 더 올라가서 1993년 26세였던 것이 2014년 32세로 상승했다.[76]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성장이 덜할 뿐이다.[77] 실제로 한국의 해외 도피 자산은 세계 3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중국, 러시아 다음이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는 경제 스케일이 큰 것도 고려해야 하니 실질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상당한 막장인 러시아 다음이라고 보는 게 맞다.[78] 이 시기를 전후해서 러시앤캐시산와머니 같은 일본계 사채업체가 한국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그동안 일본에서는 사채업이 잘 안 돼서 사채업이 자유로운 한국에 온 거 같다.[79] 물론 이때도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 농촌에 많이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도시에도 있다.[80] 당시 세무대학은 학비 전액 무료, 전교생 기숙사 생활, 졸업후 국세청 8급 세무 공무원으로 특채되는 등 여러 특전이 주어져 입결이 웬만한 인서울 대학교와 맞먹었다. 폐교 이후 그 자리는 국세공무원연수원으로 쓰다가 최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혁신도시로 이전하였다.[81] 실제로 이 부분은 초등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에 있었던 '가마솥'이라는 작품에도 나왔다.[82]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다는 말 처럼 90년대 중반에 국민들의 과소비 문제가 있긴 했다. 그러나 이것은 외환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외환위기의 원인인 과잉투자로 인한 일부산업의 호황으로 인해 일부에서 과소비가 일어난 것.[83] 빠른년생까지 포함.[84] 단 00년생, 01년생 등의 경우 신종플루보단 나머지 문제로 못간 경우가 많아서 제외하였다. 워크아웃 종료가 01년임을 생각해보자.[85] 처음 협정이 체결된것은 2000년 ASEAN+3 재무장관회의 때였다.[86] 사실은 1997년 여름 태국에서 먼저 경제위기가 발생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웃나라들을 거쳤고, 이후 같은 해 가을에 한국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87] 유럽에 IMF 위기가 도래한 시기가 유럽인이 총재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을 감안하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소리다.[88] "저승사자" 이헌재 前경제부총리가 이 시기에 구원투수로 등판, 30대 기업의 구조조정을 강하게 밀어붙여 1996년 말 기준 평균 387%의 부채율을 평균 200% 이하로 줄이고, 은행의 자기자본비율(BIS)을 8% 이상으로 강제해 재무구조를 강화하는데 성공한다.[89] 김종필의 뒤를 이어 국무총리가 된다.[90] 하지만, 얼마 후 일본 측에서 약속을 틀어버려 외교문제로 비화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미국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 우리나라와의 주요 협상을 앞두고 일본 측에 압력을 넣었다거나, 일본 측 관계자가 "우리도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는 부연설명까지 포함된 루머가 시중에 돌았지만, 아직까지 확인된 사실은 없는 상태. 문제의 차관 전환은 1999년에 다시 논의되어 성사된다.[91] "6.25 때부터 누적되어 온 한국경제의 문제점을 내가 어떻게 해결하느냐?"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92] 유학을 가려는데 달러환율이 1,800원이 나왔다는 일화도 있다.[93] 위키백과 중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 항목을 기반으로 일부 수정 및 보완을 하였다.[94] 이 한보그룹의 부도가 IMF 사태의 시발점으로 불린다. IMF 대신 한보 사태라 말해도 몸서리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한보 사태는 충격이었다. 한보그룹은 그 유명한 대치동 은마아파트 신화를 만든 회사로, 은마아파트의 초대박이 터지면서 건설업 외에 철강 등의 사업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철소를 짓는답시고 돈을 마구 끌어쓰고 뇌물을 뿌려서 5조 원대 제철소 건설을 했지만 결국 부도가 났고, 이것이 IMF 사태의 예고편이었다. 한보의 부실경영은 우리나라 기업들의 부실경영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본이었고 결국 한보의 부도처럼 부실경영을 하던 대기업들은 줄줄이 무너졌다. 이때 직원들의 증언을 꼬투리 잡아 "머슴들이 뭘 알아"라고 한 대사는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그리고 사과상자를 뇌물로 사용한 것도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으로 사과상자를 주면서 맛있게 드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다만 사과상자가 국민들에게 알려진건 95년 말-96년 초 전두환의 비자금을 은닉한 쌍용그룹의 회장 자택에서 사과상자 61억 원 어치가 나온 것이 시초. 그 상자 안의 사과들은 어떻게 했을까. 갈아마셨겠지. 상자만 사도 된다.[95] 위의 이미지에서는 4위라고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8위였다.[96] 뉴코아는 한신공영그룹의 사위가 회장으로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한신코아백화점도 있었다. 뉴코아의 마트인 킴스클럽도 당시 회장의 성씨가 김씨였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부도 이후 한신코아는 사라졌고 뉴코아는 이랜드그룹에 인수되었다.[97] 1988년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에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고 93년 르네상스 호텔로 이름을 바꾼다. 이후 2016년 1월1일부로 벨레상스 호텔로 다시 이름을 바뀌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 먹방을 찍은 곳이 이 호텔 4층의 가빈 중식당이다.[98] 정확히 18년 후 같은 날 김영삼 대통령이 사망했다.[99] 고려증권과 같은 고려통상 계열.[100] 이 일을 계기로 대우그룹은 삼성그룹을 뛰어넘고 재계 2위가 된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101] 1996년 기준.[102] 다른 부도 기업의 직원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청구그룹의 직원들은 특히나 고통을 당해야 했다. 회사에서 직원들의 명의로 14억의 대출을 받고서는 부도가 나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회사가 감당해야할 빚을 직원들이 감당하게 되었다. 회사빚 떠안은 청구직원들, 푼돈 거래해 종일 은행업무 마비 (MBC) 청구직원 140명『회사빚 왜 직원이 갚나』집단訴 (동아) 이후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 아는 분은 추가 바람. 참고로 이후 청구는 다시 부활하여 다원이라는 철거 전문 업체에 인수되는데 말이 인수지 실제로는 단물만 먹고 뱉은 격이라, 2013년 당시엔 짓던 아파트는 전부 완공 실패에 본사는 폐업한 피아노 학원이라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청산됐다.[103] 당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대표[104]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경제고문[105] 1996년도에 우성그룹을 인수했을 때는 17위까지 올라갔던 기업이다.[106] 현대의 자동차 부분을 맡고 있던 정몽구 회장 측은 현대증권으로 대표되는 그룹의 금융 부문을 노리고 동생 정몽헌 회장의 측근이자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의 가신격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배제하려 한 것으로 사람들은 추측한다.[107] 독일의 정치인으로 2000년부터 2004년 3월까지 국제 통화 기금의 총재직을 역임했으며 2004년 7월 1일부터 독일연방공화국의 제9대 대통령에 재임했으나 2010년 5월 31일 중도 사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