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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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1990년대의 대한민국: 에서 으로1.2. 1990년대의 미국: 20's 시즌 21.3. 1990년대의 일본: 잃어버린 10년
2. 문화
2.1. 음악2.2. 게임2.3. 패션2.4. 영화2.5. 드라마2.6. 방송2.7. 예능2.8. 만화, 애니메이션
3. 기타
3.1.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3.2. 이 시대에 시작된 것들3.3.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
4. 이 시대에 나온 말들5. 이 시대의 상징들
5.1. 이 시대를 풍미한 것5.2. 이 시대의 유행어
6. 1990년대생
6.1. 사회·정치적 성향
6.1.1. 공통된 특성6.1.2. 남성6.1.3. 여성
6.2.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1990년대생의 고향 변동
7. 1990년대에 들어가는 해

1. 개요[편집]

서기 1990년부터 1999년까지를 가리키는 말.

세계적으론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가 확립 된 시기. 그리고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IMF전초전으로 경제위기를 실감하는 시기이자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인한 시련기.

1990년, 독일통일과 이듬해 발생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사건 등, 체제 경쟁에서 공산주의 진영이 몰락하고, 자유(자본주의) 세계가 승리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냉전 체제가 종식되고 드디어 인류에게 평화의 시대가 찾아 오는가 했지만, 콩고 전쟁·걸프전·유고 내전·체첸 사태·보스니아 내전·코소보 전쟁 등이 세계 각지에서 터졌다.

또한, 1990년대는 정보 혁명[1]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된 시기로 평가받는다. 대중들에게 정보통신(IT) 기술이 본격적으로 전파된 것이 이 시대로, 휴대전화, 무선호출기, 고성능 컴퓨터 등의 통신 기기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특히 월드 와이드 웹의 등장은 세계인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기에 이른다.

금융과 경제 영역에서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화가 아주 활발히 진행되었던 시대였다. 미국은 이런 환경에서 아주 극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물론 중남미 지역은 그런거 없었다.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보수주의가 정국을 주도했던 1980년대와 달리 전세계적으로 ‘신진보주의(신자유주의를 가미한 진보)’의 시대였다. 빌 클린턴토니 블레어가 대표적으로, 1990년대 말 유럽은 대부분 제3의 길 성향의 사민주의 정권이 집권했다. 이른바 ‘장밋빛 유럽’.

북한에게는 드디어 반세기 가까이 집권하던 김일성심장마비로 사망하고, 김정일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동구권 붕괴와 각종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경제난으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어 중국과 러시아 파견 노동자를 통한 본격적인 북한 주민의 이탈이 시작된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태국을 시작으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을 습격한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도네시아에서는 30년간 집권한 수하르토 정권이 퇴진하였다.

해체된 구소련 지역에게는 그야말로 헬게이트의 시대였다. 체제전환의 진통과 외국 자본 및 재벌들의 약탈에 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유럽 연합에 편입되어 구제를 받을 수 있었던 발트 3국조차도 정치 및 경제적으로 엄청난 고생을 하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9천 달러에 육박하던 러시아권의 경제는 이 시기 바닥을 찍게 되었으며, 2000년 푸틴의 집권으로 그나마 상승세를 그리는 중. 그러나 그 사이에 세력권은 쪼그라들었고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인구는 줄었다.

구소련에 속했던 나라들 말고도 공산권에 속했던 여러 나라들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질개선을 하느라 여러 성장통을 겪어야만 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그래도 비교적 그 정도가 덜한 편이었지만, 역시 힘들었고, 폴란드도 심한 경기 부침을 겪어야 했다. 내전까지 간 유고슬라비아1991년부터 1999년까지 1990년대 내내 전쟁터였던 셈이다.

반면 아프리카는 이 시기를 즈음해 여러 문제들이 터지면서 소말리아, 르완다, 라이베리아, 콩고민주공화국, 앙골라 등을 비롯해 내전이 일어나면서 지옥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부족전쟁이 주 원인인데 그나마 이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지만 적대 관계를 청산한 것은 아니다. 북쪽에서 진짜 무시무시한 폭풍[2]이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장쩌민의 3세대 지도부 하에서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이 시기에 중국의 초강대국화가 예고되었다. 다만 지금만큼 커진 건 10년 정도 앞당겨진 결과.

1.1. 1990년대의 대한민국: 에서 으로[편집]

아이러니하게도 최고 경제 호황의 시기[3]와 최악의 경제 침체의 시기가 동시에 있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세계에 위상을 떨치는 데 성공하였고, 사회적으로도 독재 시대의 종식과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는 장및빛 경제 등으로 인해 대체로 반은 ‘좋은 시절’로 기억되는 경향이 많지만. 하지만 동시에 성수대교 붕괴사고,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의 여러 인재(人災)로 인한 참극이 잇달아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Seoul MyeongDong 1993 서울 명동거리.[4]


경제적으로는 1980년대의 경제최대 호황기와 1986~89년의 삼저호황(저유가,저환율,저금리)의 달콤한 열매의 효과가 1988년 이후부터 시들어지긴 했지만[5] 후광은 1990년대 중반까지는 갔으므로 장및빛 경제를 예상하는 현상이 높았다. 또 한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구간인 베이비붐 세대 386세대가 이미 결혼도 하고 어느 정도 아이들도 성장한 상태로서(물론 1965년 이후 386 후반생들은 제외) 본격적인 경제 활동을 하면서 어느 때보다 보기 힘들었던 소비의 규모가 커졌으며 샐러리맨 월급이 처음으로 백만 원을 넘어섰다 1995년에 1인당 GDP 1만 달러를 돌파해 염원하던 국민소득 만 불(萬弗) 시대에 접어 들었고[6] 1995년에는 국내총생산 세계 11위를 차지하였으며 1996년에는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다. 물론 명목상 달러화 기준으로 한국의 소득수준은 여전히 전통적인 서구선진국의 비해 40~ 60% 수준이었지만 80년대 20 ~30%대 소득 수준에 비하면 상당히 빠른 속도로 따라잡았다.

또한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 당시에 사회문제점으로 꼽혔던 부동산 가격의 폭발적인 상승도 1991년을 정점으로 1기 신도시 분양 및 토지 공개념 3법으로 대표되는 부동산 값 억제정책으로 하락세로 접어들었고 이후로 부동산 가격이 90년대 내내 안정세를 보였던데 반해 소득증가율은 두자릿수대를 유지했기 때문에 소득이 오르면 곧바로 소비 및 저축의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 과정을 거쳤으며 1990년대 환율은 1달러=700~800원대를 선점해(1981년에 1달러에 600~700원 하던 수준의 환율을 경제적 호황의 후광으로 1990년 중반까지 700~850원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유지해옴) 소비자물가지수가 1994년을 제외하면 OECD 평균을 밑도는 정도로 굉장히 안정되었고 서민들의 생활비 부담도 적었던 시절이다. 또 1970년대부터 증가하기 시작한 중산층이 1980년대는 더욱 두터워졌으며 이 층들이 1990년 중반까지도 유지해 당시 자기가 중산층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70%가 넘었다.(이 수치도 IMF이후로 확 줄어든다.) 하지만 지나친 저환율 정책으로 인해 경상수지 적자는 1990년 이래로(1993년에 소폭의 흑자를 낸것을 제외하면) 매년 적자를 기록했으며 1997년부터 외환보유고는 점점 바닥이 나고 있다가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발생하는데... 그 파장으로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하루 아침에 수십만 명의 실업자가 양산되었으며 환율은 급속도로 올라가 1996년 13,137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1998년에는 8,083달러로 떨어졌다가 마지막 해인 1999년에 10,410달러로 소폭 증가로 마무리했다.

문화적으로는 이 시기의 청소년과 대학생들은 1980년대의 이념적인 면에서 탈피하여 자유로운 사고를 했으며, 특히 이 시기에 등장한 X세대[7]는 개성을 중시하고 대중 문화에 열광하는 뭔가 모순되어보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8] 그래서 음반시장도 세계 수위권에 들 정도가 되었다.

여하튼 덕택에 학교 그러나 X세대는 주체적인 문화를 창조하기보다는 상업문화의 소비주체로 전락하며 사회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에 일조하였다는 비판 역시 공존한다.[9] 이 시대의 구호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 그렇지만 문화적으로 자유로워졌다고 하지만,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문제인 과도한 사교육 문제나 학생인권 침해는 이 시대에도 별반 다를 건 없고 오히려 일부 부문에서 악화되기까지 했는데[10]

우선 1986년에 교복의 부활이 이루워졌다고는 하지만 일단 1990년대 초반까지는 교복을 착용하지 않는 학교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데 반하여 1990년대 초반부터 교복이 대부분의 학교에서 부활하면서 교복을 지정하지 않은 학교를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고,[11] 학교에서 빠따 같은 것이 잘만 돌아다니고 두발규제와 야간자율학습이 적용된건 마찬가지였으며 방과후 학원 혹은 학습지 여러 개 시키기 등의 사교육도 1990년대에도 변함없이 진행되었으며[12] 경제력의 향상과 더불어 사교육비는 지속적으로 향상되었기 때문에 사교육비 문제가 엄청난 사회적 문제가 되어갔다.

다만 2010년대인 현재와 비교하면 1990년대의 문화 및 사회풍토는 지금에 비해 여전히 보수적인 면이 많았고, 촌지, 주6일 근무+야근이나 갑을문제,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유소년층의 성비불균형 같은 사회부조리들도 여러모로 강했기도 했다. 부분적으로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IMF 외환위기 이전은 '단군 이래의 최대 호황'이라는 표현이 회자되고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넘고 그 여세를 타서 OECD에 가입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을 정도로 한국 경제가 부흥하고 있던 시기였지만 그러면서도 점진적으로 진보화되었기는 했지만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여전히 강했고 단군이래 최대호황기라고 불리던 시기라해도 이전시기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워진 사회적인 부조리도 많았기도 했다. 개인주의는 2018년 현재는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조금씩 라이프스타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급 취급 하면서 배척하려는 분위기가 여전히 어느 정도 있었고 당대 신문기사에서도 오렌지족이 어쩌니 하는 기사들도 많이 나왔으며 샴페인, 과소비 타령도 많이 나오기도 했다. 다만 신토불이가 강조되었던 것은 단순히 민족주의의 영향이라기는 어폐가 있고 당대 농촌이 인구감소와 저소득 문제, 수입 농산물 유입 등으로 지속적으로 지속적으로 황폐화되던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려던 노력의 산물이었다.[13] 물론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농어촌 지역의 지속적인 황폐화를 막지 못한 채 아예 지방소멸 얘기까지 나올 지경이 되었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외환위기 전까지는 한국의 황금기이며 재미교포가 한국으로 일하러 오던 시대다. 명목상 경제지표는 2000년대 이후가 1990년대보다 더 성장했으나 이 당시의 희망찬 사회 분위기와 정서는 되돌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이는 단순히 물가 상승으로 인한 숫자 놀음이라는 평가도 많다.

1991년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의 입국이 허용되어 매년 수십만의 외노자들이 들어오고 불법체류자들도 대량 양산되는 계기가 되는데[14] 이는 1990년대 중반부터 국내노동자들의 임금 하향화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1980년대의 호황취업경기도 1990년대 초반부터는 서서히 서늘해지기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1996년에는 비정규직법이 날치기로 통과, 1997년 외환 위기로 가속화 되어서 비정규직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학교 입학률도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대학교들도 전국에 우후죽순 생겨났다. 인구 분포에서도 청소년층이 줄고[15] 386세대 - X세대를 위시한 성인층이 급격히 증가하고 노년층도 급격히 증가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대학진학률이 증가하였고[16] 상고와 공고를 천시하고 인문계를 중시하는 풍토가 만연하게 되고, '대학만능론'[17]은 2000~2010년대 이후 사회의 이 되고 있다.[18]

대한민국의 정치 분야로 들어가자면, 보스 정치, 3김 정치로 대표되는 시절로, 정당 간 정책대결은 커녕 거물급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합집산이 비일비재했었다. 그럼에도 문민정부하나회를 해체했고, 전임 대통령을 비자금 횡령 혐의로 감옥으로 보내버리는 등 군사독재의 잔재가 어느 정도 척결되는 등의 변화는 있었기는 했다.[19]

1990년대는 1970년대1980년대에 비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굵직한 '역사적'이라 할만한 사건은 많이 없었다. 물론 그와 별개로 1970-80년대 고도 성장기의 반작용(부실공사, 안전의식 부재) 격으로 벌어졌던 대형사고는 참 많이 일어났다. 사실 정치적으로 변동이 없었다고 보기에도 뭐한 게, 1990년 3당 합당 시기 이후부터 PK지역이 보수권으로 넘어가는 등의 변화는 엄연히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이전 시대에 비해 눈에 띄는 정치·사회적인 사건이 눈에 덜 띄었던 것은 사실이다.

군사정권이 종식됨으로써 제6공화국 체제하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더 이상의 정치 체제상의 변동이 없을 뿐 아니라 공산권의 몰락과 북한과의 군사적 격차가 현저히 커짐에 따라 안보적 위기 역시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1990년대는 한국인의 삶과 가치관이 가장 크게 변화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안정된 민주주의와 경제적 풍요, 그리고 개인용 컴퓨터, 휴대전화 등의 정보기기 보급에 의한 정보기술의 발전 속에서 한국인들의 삶은 은밀히, 그러나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까지의 권위주의적이고 무거운 사회 분위기를 떨쳐내고 좀 더 다양하면서도 깃털처럼 가벼운 사회 분위기로 바뀌었다.[20] 더불어 경제적 풍요와 넘쳐나는 상품들 속에서 더 소비지향적인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사람들의 의식 역시도 좀 더 다양성에 대해 관대해지고 소비 트렌드에 민감해졌다. 하지만 교복을 착용하지 않는 학교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지게 되었다

1990년대는 1980년대까지의 대한민국과 단절하면서, 이후 시대인 밀레니엄 이후 시대의 모든 사회적 요소들의 맹아를 품고 있었던 시대이기도 하다. 21세기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예능, 아이돌, 한류, IT산업, 온라인 게임, 개인용 PC, 한국산 블록버스터, 핵가족, 휴대폰, 오타쿠, 엽기, 패러디, 해외여행 등등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무수한 문화 요소들이 모두 이 시대에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한국의 새로운 시대를 연 시대라고 보아도 되겠다. 2000년 이후의 한국 사회는 사실상 1990년대의 연장선상에 가깝다. 그렇다 보니 2010년대에 30~40대에 접어든 세대는 2010년대의 10대~20대 문화에 잘 적응하는데 비해 50대 이상 세대에서는 적응을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군사정권, 운동권[21], 절대적 빈곤 등 이전 시대의 산물들이 확실하게 몰락해 버렸으며, UN에 가입하고 경제적 수혜국에서 지원국으로 지위가 바뀌는 등 국제적 위상도 올라갔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 당시의 분위기 역시 오늘날 201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더 이상 한국이 무한히 성장하기만 하는 국가가 아닐 것이라는 자각, 무절제한 소비에 대한 경각심, 그리고 기업과 국가의 경제가 제대로된 운용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우려 등이다.[22]

1.2. 1990년대의 미국: 20's 시즌 2[편집]

1990년 독일이 공식적으로 통일되고 이듬 해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의 연쇄적인 붕괴가 시작되면서 말 그대로,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 위치에 등극함과 동시에 빌 클린턴 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제적으로 상당한 호황을 누린 시기이도 하며 이는 아래의 다우 존스 지수 그래프를 통해 그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ow_jones.png
1990년대의 미국은 종종,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 직후인 1920년대와 비견되기도 하며, 두 시대는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다만, 1920년대는 미국이 세계의 유일의 초 강대국이 아니었고, 패권 국가들 중의 하나로 올라서게 된 시기였지만, 1990년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약 50여 년간 지루하게 대결해 왔던 소련 및 동구권의 붕괴를 지켜보며 미국이 1극의 국가로 등장하게 되었으므로 대개 1920년대보다 1990년대를 더 화려하게 보는 경향[23]이 짙다.

1990년 이후, 중국이 G2로 떠오르기 전까지 약 20년간은 세계의 정세를 미국이 자유자재로 통제 가능했던 시기였으며, 이라크 전쟁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겪은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군사력 세계 1위이다.

1.3. 1990년대의 일본: 잃어버린 10년[편집]

1990 - Yokohama Walkabout 横浜散歩 (901208)

파일:일본주식.png

(1988년~2010년)일본의 주식 시장 흐름

일본잃어버린 10년으로 더 이상 호황을 누리지는 못하게 되었다.

파일:일본부동산.gif

(1980년~2010년)일본의 주택 시세 흐름

1990년대 일본의 부동산 폭락은 매우 유명한 거품붕괴의 선례가 되었다.

1990년, 일본은 주식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10년간의 장기불황에 접어든다. 많은 기업과 은행이 도산했고 평균 성장률은 0%에 달했다.

이웃 나라 이야기 2부 필패신화


해당 시기를 일본인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 칭한다. 이 불황은 2010년대까지도 지속되어 잃어버린 20년 또는 잃어버린 30년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다.

1.경기부양

2.부동산 거품 양산

3.거품 붕괴

4.경기 침체/1번 경기부양으로 무한 반복


이후 일부 경제학자들이나 관련 전문가들은 1990년대 일본의 부동산, 주식 폭락을 예로 들면서 경기 부양으로 인한 거품양산과 그로 인한 거품붕괴, 침체의 사이클에 대하여 설파하게 된다.[24]

(1980~1989)일본과 주요 국가의 명목 GDP 흐름[25]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단위: 10억 달러(약 1조 원)

미국 전체 명목 GDP

5,979

6,174

6,539

6,878

7,308

7,664

8,100

8,608

9,089

9,660

일본 전체 명목 GDP

3,103

3,536

3,852

4,414

4,850

5,333

4,706

4,324

3,914

4,432

독일 전체 명목 GDP

1,547

1,815

2,068

2,008

2,152

2,525

2,437

2,159

2,181

2,133

프랑스 전체 명목 GDP

1,278

1,279

1,411

1,331

1,404

1,610

1,614

1,462

1,512

1,502

영국 전체 명목 GDP

1,024

1,069

1,112

998

1,080

1,181

1,243

1,384

1,477

1,518

중국 전체 명목 GDP

404

424

499

641

582

756

892

985

1,045

1,100

대한민국 전체 명목 GDP

284

332

356

391

458

559

603

560

376

486


일본은 성장 동력이 꺾여 오히려 경제규모가 줄어든 연도(1996년, 1997년, 1998년)도 있었던 시기다. 그래도 거시경제면으로 바라보면 경제의 규모는 여전히 세계2위였다. 하지만 미국과의 격차는 점차 고착화되었으며 미약하지만 차이가 벌어졌다. 게다가 유럽 국가들이 조금씩 일본을 추격하고 있었으며 한국과 중국도 경제 성장기에 접어든다.

2. 문화[편집]

2.1. 음악[편집]

황금기를 맞이한 힙합, 그리고 R&B 디바들의 시대

1990년대를 평정했던 음악은 흑인음악이다. 마이클 잭슨이 1980년대에 음악계에서 흑인의 장벽을 깨부순 이후 그동안 인기는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묻히는 음악이었던 힙합은 'Golden Era'라 불리는 시대를 맞아 2pac노토리어스 B.I.G.으로 대표되는 황금기가 시작됐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힙합 문화가 한국에도 수입되어서 한국 힙합씬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수많은 R&B가수들이 탄생해 대중음악과 결합하였다. 그전까지는 대중음악과 거리가 멀었던 R&B음악들이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의 3대 디바와 보이즈 투 멘, 마이클 볼튼 등의 남성가수들에 의해서 팝과 일체화 되었고 본격적인 대중음악의 절정기를 만들어내었다.

록 음악의 경우, 록 음악의 헤게모니가 하드 록에서 출발한 메탈 계열에서 펑크 록에서 출발한 얼터너티브 록로 완전히 돌아선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변화는 아직까지 유효하다. 얼터너티브 록 쪽에서 너바나의 <Nevermind>, 펄 잼의 <Ten> 등의 명반이 등장하였으며, 스매싱 펌킨스와 같은 그룹도 1990년대 초부터 후반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1990년대 초반까지는 메탈의 기세도 여전히 등등해서 건즈 앤 로지스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메탈리카Metallica를 발매하며 대중적 인기를 드높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가 지나면서 메탈의 인기는 식어갔으며, 그나마 판테라 정도가 자존심을 지켰다. 하지만 오히려 노르웨이, 스웨덴등의 북유럽에서는 Darkthrone, Mayhem 같은 밴드의 블랙 메탈멜로딕 데스 메탈필두로 메탈이 얼터니티브와 관계없이 기세등등했다.

1990년대 중반에 오면 1980년대 끝무렵에 더 스미스, 스톤 로지스 등을 통해 비롯된 브릿팝 음악이 본격적으로 부상한다. 스웨이드를 시작으로 블러, 오아시스 등이 커다란 인기를 끌었으며, 라디오헤드는 1990년대 중후반 <The Bends>와 <OK Computer>라는 명반을 내놓음으로써 1990년대 록 음악을 집대성하고 'Radioheadism'이라는 음악 풍조를 탄생시키기까지 한다. 이는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 콜드플레이Muse, 엘보우, 과 같은 밴드들에게 영향을 준다.

일렉트로니카 음악이 이 시기에 매우 발전했다. 펫 샵 보이즈 류의 신스팝이나 테크노 등에 머무르던 일렉트로니카는 이 무렵 정말 다양한 스타일로 분화되게 된다. 프로디지, 케미컬 브라더스 등의 메가 히트 밴드들이 등장하였으며. 에이펙스 트윈은 비단 일렉트로니카만이 아닌 대중 문화 전반에 큰 흔적을 남겼다.


한국은 이 시기에 대중음악의 양적 황금기를 맞았다.

음반의 100만 장 판매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200만 장이 넘게 팔리는 앨범도 볼 수 있었다. 이후 오프라인 음반시장은 ADSL의 보급으로 2000년에 정점을 찍었다. [26] 음반판매량에 있어서는 댄스와 발라드음악이 절대적으로 그 비중을 차지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힙합문화의 도입을 제외한다면 장르적 다양성은 차라리 1980년대가 나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전람회, 015B와 같이 대학생들이 가요계에 데뷔하는 경우가 있었으며[27]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김건모, 신승훈 등의 아티스트가 등장하였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경우 댄스, 랩장르의 뮤직을 주류로 이끌었으며 기존 가요와 다른 파격적 시도들을 함으로써 가요계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김건모, 신승훈 역시 서태지 못지않은 인기와 히트곡들, 엄청난 상업성을 누리며 90년대 대중음악계의 3대장의 위치를 가졌다.

듀스는 1993년에 데뷔하여 매니아층을 만들었고 대표적 곡인 '여름안에서' '우리는' 등을 내놓고 인기를 누려가고 있었으나 1995년 11월 20일 김성재의 사망으로 이후 듀스는 중단되었다. 이현도가 결국 마지막으로 Deux Forever라는 곡을 끝으로 듀스는 해체되었다.

뮤직비디오 문화 등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 시대로 전환되기 시작한것도 1990년대였다. 서태지가 음악이 아닌 비주얼적인 면에서도 세일즈 포인트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뮤직비디오 제작시장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며, 이는 1990년대 케이블 TV 시대를 맞아 생겨난 음악 채널들의 탄생과도 궤를 같이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음악시장에서 뮤직비디오라고 할만한것은 없었으며,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같은 음악 쇼 프로그램에서 즉석무대를 갖춰주는 일종의 유사 뮤직비디오들이 그나마 갖출 수 있는 가수들의 비주얼 판촉수단이었다. [28][29]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에 데뷔하였고,'난 알아요', '하여가'등을 내놓으며 승승장구했지만 1994년에 '교실이데아'라는 곡을 거꾸로 돌리니 '피가 모자라'가 들린다며 여론이 시끄러웠다. 그 뒤 그들은 'Comeback home'으로 활동하며 199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 아이콘으로 등극한다.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창작의 고통'을 이유로 1996년에 은퇴선언을 한다.

그 이후부터는 서태지의 영향을 받은 H.O.T.를 필두로 한 1세대 아이돌 음악의 홍수가 시작되었다. 다만, 초창기였던 만큼 일본 음악산업을 데드 카피하는 악습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고 이에 대한 비판 역시 직면했었다. 지금은 한류다 뭐다 해서 아이돌 음악의 위상이 나아지긴 했지만 이때는 현재와 같은 아이돌 문화가 걸음마를 떼던 단계였던지라 성숙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일본도 한국과 비슷하게 다양한 장르들의 음악이 여럿 나왔으며, 음반 판매량이 최고를 기록하던 시기였다. 일본이 장기적 경제 불황에 빠져들었던 상황을 고려해보면 상당한 성과라고 볼 수 있는 부분. 물론 장기적 경기 침체가 오히려 음악과 같은 대중문화 소비를 늘렸다는 분석도 여럿 있다. Mr. Children, B'z, Spitz와 같은 록밴드들이나 시부야계 아티스트들이 크게 인기를 끌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한 X JAPAN을 통해 비주얼계 록 음악도 성행했었다.

또한 에이벡스의 Super Eurobeat 시리즈가 컴필레이션 앨범의 딜레마와 한계를 딛고 오리콘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고, 아무로 나미에V6유로비트 장르로 1990년대 중후반을 휩쓰는 등 유로비트도 약진했었다. 그리고 이는 2000년 5월에 발매되었던 슈퍼 유로비트 110집이 70만 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량과 오리콘차트 3주간 1위라는 엄청난 성과를 내게 되는 씨앗이 되었다.

1995년 홍대 일대의 클럽 드럭을 중심으로 펑크 록 위주의 인디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한다. 이듬해인 1996년 11월 기념비적인 앨범인 Our Nation Vol.1이 발매되고 '스트리트펑크쇼' 등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알려지기 시작한다.

2.2. 게임[편집]

게임계에서는 1990년대 초중반엔 게임보이, 슈퍼패미컴, 메가드라이브, PC엔진 등의 16비트 콘솔 게임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콘솔 전쟁이 1980년대보다 상당히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16비트 콘솔 싸움은 결과적으로 슈퍼패미컴이 승리하였지만 1980년대에 패미컴이 온갖 게임 시장을 장악하던 때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치열한 싸움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때만 해도 후반 때와는 달리 1980년대 전반의 게임들과 같은 선상에 있거나 약간 상위호환에 있는 편이였다. 실제로 1991년에 등장한 희대의 명작 스트리트 파이터 2의 등장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을 제외하면 게임의 역사에서는 본격적으로 게임이 발달하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 때부터 1990년대 초중반까지를 같은 세대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것이 딱히 문제점인 것도 아니며 이때부터 게임이 점차 더 대중적으로 변모했기 때문에 1980년대 전반 게임들의 장점들과 스타일을 지니면서 더 대중적이고 더 세련된 모습을 보이게 되어 1990년대만의 특징을 부여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16비트에서 32비트로 넘어가기 시작한 5 콘솔 시대로, 이 시기에 비디오 게임의 비약적인 그래픽 상승 경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PC에서는 둠 시리즈가 그래픽 혁명, 미스트(게임)시리즈가 CDROM의 대용량 매체를 적극 활용한 인터랙티브 혁명을 이끌어 냈고, 콘솔 쪽에서는 32비트 게임기들이 보다 제대로 된 폴리곤 그래픽 지원과 세가 새턴은 2D가 훌륭한 대신 타 32비트 기종보다 3D가 구리긴 했지만 일단은 CDROM 매체를 이용한 풀모션 비디오[30] 활용으로 3D 게임의 중흥기를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은 세가 새턴플레이스테이션, PC-FX등의 게임기들이 경합하며 만들어낸 2D 게임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세가소니의 너 죽고 나 죽자식의 치열한 무한경쟁이 수없이 많은 2D 수작 게임들이 탄생한 배경이 되었다. 1990년대말 플레이스테이션 2드림캐스트가 등장하며 보다 완연한 3D게임 시대가 열렸으나 그전까지만해도 폴리곤 기술은 텍스쳐의 해상도도 낮고 해서 아직 조악한 수준이었으며 1999년까지는 2D의 우세가 지속된다. 그나마 새턴과 플스의 초반 싸움에서 새턴이 플스하고 호각을 뜬 이유도 새턴이 2D 쪽에서는 확실히 우위를 점했기 때문. 그 게임 이후로 새턴이 밀릴때에도 2D 격투게임/슈팅게임의 이식률이 좋은 새턴은 이쪽 장르 매니아들에게 여전히 수요가 높았었다. 2000년대 초반, 6세대 콘솔의 등장을 거치면서 3D 구현기술이 발전해 2002년쯤에는 완전한 3D의 우세가 굳혀졌다.

휴대용 게임의 경우는 게임보이가 1990년대를 주름잡았고 전 세계를 평정했다. 게임보이는 아직 흑백 8비트 그래픽으로 작동되었다. 하지만, 당시로선 성능이 매우 좋았던 혁명적인 휴대용 게임기였다.

한국 게임계의 최고 호황기는 아이러니하게도 IMF폭탄을 맞은 직후였는데, 바로 스타크래프트의 등장이다. 그 많던 당구장이 우수수 폐업하고, 그 자리에 게임방이 들어섰다. 오락실 게임이 죽어가던 와중에 청소년들은 또다른 게임 문화에 순식간에 적응했고 IMF 극복기에 절정에 달해 상가 건물은 조금만 규모가 커도 한 건물에 게임방이 두 개씩 들어가 있는 광경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IT 투자 붐(거품이었다)이 게임 업계에도 흘러들어 아트록스, 아마게돈 따위의 스타 아류작이 수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 일쑤였고, 90년대 초부터 중소규모 업체 위주로 소소하게 이어져 오던 게임 개발업계는 거품이 꺼짐과 동시에 확실하게 가지치기를 당해 현재는 소위 3N이라는 업체들만이 살아남아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우습게도 이 중에서 그렇게 다들 만들지 못해 안달이었던 RTS(더 정확히는 스타 아류)로 성공한 업체는 없다.

2.3. 패션[편집]

2.4. 영화[편집]

2.5. 드라마[편집]

2.6. 방송[편집]

2.7. 예능[편집]

2.8. 만화, 애니메이션[편집]

3. 기타[편집]

그 유명한 공전절후의 수집품인 띠부띠부씰이 나왔던 시기였다.

2010년대 들어 건축학개론, 응답하라 시리즈 등 1990년대를 추억팔이하는 영상물이 많이 제작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1990년대에 청소년기를 맞은 1970년대, 1980년대 초중반 출생들이 주요한 소비세력으로 진입한다는 의미. 또한 오버뮤직씬에서는 UV, 인디뮤직씬에서는 1990년대 K-POP을 컨셉으로 한 기린(뮤지션)[31]이라는 아티스트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서울의 이태원과 홍대 등을 시작으로 밤과 음악사이라는 1990년대 가요를 튜닝해주는 주점형 클럽 체인점도 이런 맥락에서 히트치고 있다. 설립 자체는 2005년이지만 근년의 1990년대 복고풍 붐에 이어서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카더라.

묘하게 세기말적 분위기가 감돌기도 하였는데 1990년대 초에는 다미선교회가 시한부 종말론(휴거) 소동을 일으켰다. 1990년대 말로 갈수록 노스트라다무스 떡밥과 Y2K 문제 등이 이런 분위기에 일조했다. 한국에서도 IMF 시대라는 경제적 원인이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 시기 젊은이들의 패션을 다룬 뉴스 영상이 갑자기 2016년에 재발굴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 문서 참고.

3.1.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편집]

3.2. 이 시대에 시작된 것들[편집]

3.3.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편집]

이전 시대에 나와 지속적으로 쓰인 것들을 적을 것.

  • 경양식

  • 대한뉴스

  • 오디오

  • 운동권: 1996년 연세대 사태로 사실상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 학력고사: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시행으로 폐지되었다.

  • 협궤열차: 1995년 12월 31일 수인선 협궤열차를 끝으로 운행이 중단된다. 단 수인선 자체는 2012년 통근전철로 부활한다.

  • LP: CD가 등장하면서 망했다. 하지만 LD, 배타맥스, VHS, 카세트 테이프, VCD 등이 시대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단종된 것과 달리 이쪽은 쇠퇴한 뒤에도 한시적으로 생산 중이다.

  • VCD

  • 산아제한 정책: 1990년대 들어와서도 출산율이 다소 반등하기는 했어도 2명대를 지속적으로 밑돌게 되자 1996년도에 전면적으로 폐지되었다.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 항공기관사:B747-300까지만 해도 조종실에 이 포지션이 존재하였으나 -400을 시작으로 조종실이 디지털화되고 이 포지션의 역할을 기장,부기장이 대신하게 되고 항공기관사가 탑승하는 기종의 퇴역으로 사라져갔다.

  • 도농통합 행정정책에 따라 폐군 및 통합된 시군 단위 지역들

  • 다른 은행과 합병되거나 IMF로 정리 및 폐지된 은행들

    • 경기은행

    • 대동은행

    • 동남은행

    • 동화은행

    • 보람은행

    • 장기신용은행

    • 충청은행

    • 평화은행

  • 대우그룹 : 1999년 IMF로 인해서 국내 재벌로서는 부도 및 파산이 확정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우의 계열사들은 자동으로 분리, 분산되어져서 다른 그룹에 인수되거나 자강으로 운영되었다.

  • 조선총독부 청사 : 일제 잔재 중 하나였으며, 김영삼 정부 지시로 경복궁 복원 공사 일원으로 1995년에 해체되었다.

4. 이 시대에 나온 말들[편집]

5. 이 시대의 상징들[편집]

5.1. 이 시대를 풍미한 것[편집]

5.2. 이 시대의 유행어[편집]

6. 1990년대생[편집]

현 시대 대한민국의 20대를 대변하며 청년기를 주도하는 세대

SNS와 발달한 인터넷 커뮤니티등을 통해 문화, 사회적으로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있는 세대

1990년부터 1999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이다. 2000년생을 제외하면 20세기/제2천년기를 살아본 가장 어린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서 특이하게 출산율이 올랐던 시대[45]의 산물인 1991년생~1995년생이 여기에 속해 있다. 여담이지만, 이 세대는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없는 남초 세대이기도 한다. 자세 한 건 해당 문서로.

현재 20대 중후반인 1990년~1994년생들은 88만원 세대 못지 않게 한국 사회의 문제점으로 인해 고통 받는 2030세대에 속한다. 자연스레 해외취업 등으로 한국을 떠나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유년기 시절에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다.

또한 놀토를 제대로 겪은 유일한 세대이다. 1980년대생까지는 토요일에 정상 등교한 세대이고, 2000년대 중후반 이후생은 전면적 주 5일제 도입 이후이기 때문이다. 지상파에서 틀어주는 애니메이션들을 보고 자랐다. 이게 이 세대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한데, 이 시기 이전까지는 지상파 애니메이션이 대세가 아니었고, 주로 방영되던 일본 애니들은 국민의 정부 이전까지 아예 대한민국에 들어올 수도 없었다. 이 시기 이후에는 대부분 케이블로 옮겨가 지상파에서 방영을 안 했기 때문. 그 애니들의 상당수가 로봇 만화였고, 이는 이 세대 남자 아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또한 투니버스가 황금기를 맞았을 때의 대상이 바로 이 세대이다. 인터넷이 대중화 되기 시작해 스타크래프트, 크레이지 아케이드, 메이플스토리, 카트라이더 등을 하고 놀았고 각종 사이트들에 출몰해서 무개념한 행동, 욕설등을 난무하여 개초딩이라는 단어를 탄생시켰다. 오프라인에선 미니카나 탑블레이드 등을 갖고 놀았다. 디지몬 카드나 유희왕 카드를 열심히 모은 세대이다.

초·중·고등학생 시절 동방신기, 버즈에 열광했다. 이후 바톤을 이어받은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 카라 등을 보면서 열광했다.

1990년대생들 중에 1990년 1월 1일생~ 1993년 2월 24일생은 노태우 정권에서 태어났으며, 1993년 2월 25일생~ 1998년 2월 24일생은 김영삼 정권에서 태어났고, 1998년 2월 25일생~1999년 12월 31생은 김대중 정권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유아기를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에서 보내고, 어린시절과 유년기를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에서 각각 보냈으며 현 20대에서는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문재인 정권에서 보내고 있는 중이다.

6.1. 사회·정치적 성향[편집]

다른 세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 있는데, 성별에 따른 편차가 생긴 최초의 세대라고 정의할만큼 남녀의 정치적 지지성향이 엇갈리기 시작한 세대이다. 이 특징은 1980년대생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페미니즘 등의 영향으로 인해 래디컬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정당에 대한 여성들의 압도적인 지지세, 그리고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 도발, 서부전선 포격 사건, 북한의 핵개발 등을 눈앞에서 겪은 남성들[46][47]의 보수화로 인한 현상이다. 그래서 본 문서에서 서술하는 대부분의 정치적 특성은 남과 여, 둘 중에 한 쪽에만 해당되는 경우가 많다.

6.1.1. 공통된 특성[편집]

청소년기 들어서 스마트폰, SNS의 등장으로 인해 일찍이 커뮤니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거나 허물없이 직설적으로 의사표현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세대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SNS, 커뮤니티와 같은 온라인매체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크게 내고 있는 세대이다.

앞선 80년대 후반생과 더불어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유튜브등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이를 이용해 여론을 생성해내고 있는 세대이다. 온라인에 익숙해진 면모와 이를 통해 자기 주관을 드러내는 것이 워낙에 강한 세대이기에 일베, 워마드와 같은 극단적인 성향의 커뮤니티 사이트에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어두운 모습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관습적으로 존재하는 꼰대나 똥군기, 권위주의 문화를 가장 날 서게 비판하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며 서구권 시민들과 맞먹을 정도로 개인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한 세대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사회적으로 이전의 모든 세대들을 압도할 정도로 상당히 진보적인 세대[48]

더 나아가서는 윗 세대와 고리타분한 관습에 대한 공격성향 못지않게 자국이성혐오도 상당히 심한 편. 원인으로는 몇가지가 있는데 태어날때부터 인위적일 정도로 차이나는 남초 인구 비율, 2010년대 온라인으로부터 대두된 여혐사상과 극단적인 페미니즘의 등장, 이를 제때 제지못하고 심지어 방관, 옹호하여 문제를 심화시킨 정부의 태도등이 있다.

윗 세대와의 갈등, 자국이성혐오, 비리로 점철된 정재계와 여러모로 불안하기만한 사회분위기, 앞으로의 불투명한 장래등이 시너지 효과가 나면서 자국 혐오적인 성향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세대이며 그래서인지 '헬조선', '탈조선', '이민만이 답이다'같은 주장도 서슴없이 하는 세대이다.

6.1.2. 남성[편집]

정치적으로 정의하자면, 민주정당계에 대한 압도적 지지세 속에 은근히 보수적인 세대. 말그대로 젊은이세대 답게[49] 민주정당계에 대한 지지가 막강하다. 다만 1970년대생, 1980년대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 정당에 대한 지지가 상당하여 일반적으로 '은근히' 보수적인 세대라고 불린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갤럽이 여론조사하길[50], 유승민, 홍준표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20대 남성에서 각각 19%, 14%에 육박하기도 했고, 문재인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37%에 그쳤다(?). 안철수심상정은 각각 19%, 10%.

정치적 우경화의 영향으로 인해 소위 말하는 감성팔이(언더도그마)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보이는 세대이다. 언더도그마를 반박하기 위해 이 세대에서는 엄벌주의가 대세로 자리잡았다.[51][52] 사회에 진출할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경제성장이 둔화되며 N포세대라는 단어가 나와 사회진출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극단적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과 문재인 정부 및 자유주의 · 개량주의 엘리트들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담한 경제적 현실 때문에 대안우파 성향을 가장 강하게 띠는 계층이기도 하다. 물론 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고, 남한 사회의 대안우파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세대라는 이야기다. '안티페미'를 표방하는 대안우파 경향과 운동을 가장 열렬하게 지지하는 계층이 바로 이들 90년대생 남성들인데, 이는 기성 정치세력 가운데서는 좌우 막론 그 누구도 이들의 코드를 맞춰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거꾸로 극단적 페미니즘이나 거기에 동조하는 중도진보(자유주의 및 개량주의) 정치세력에 대한 반발심, 그리고 암울한 경제 상황 때문에 아예 더 좌측의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경우도 극소수지만 존재한다. 하지만 극소수라고는 해도 70년대생이나 80년대생에 비해서는 많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대는 89년 동구권 붕괴, 91년 소련 붕괴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고, 70년대생이 대학을 다닐 땐 딱히 사회주의적이지는 않은 좌파 민족주의 성향인 한총련의 영향을 받았으며 80년대생이 대학을 다닐 땐 아예 운동권이 찌그러진 뒤였기 때문이다. 70~80년대생에겐 "사회주의=몰락한 과거의 유물"이란 인식이 박혀 있기에 오히려 앞선 세대인 60년대생보다도 전반적으로는 더 진보적일지 몰라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비율은 낮은 것이다. 그러나 90년대생들은 08년 금융위기 이후 대학에 입학했고 이명박근혜 9년을 거치면서 사회주의 운동이 다시금 고양되기 시작하여 대학가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에[53] 대학 생활을 했기에 수적으로는 적을지라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경우가 70~80년대생 세대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다. 다만 이러한 경우에도 스탈린주의나 주체사상에는 비판적인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정리하자면 극좌파에서 극우파까지 한국사상 가장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보이는 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6.1.3. 여성[편집]

1980년대생 여성과 더불어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세대

1990년대생 여성들은 진보성향 정치인이 내거는 쇼맨쉽, 페미니즘, 퀴어 등에 대해 막강한 지지를 보인다.
https://youtu.be/M1mZc-X1G4I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갤럽여론조사하길[54], 문재인심상정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20대 여성에서 각각 56%, 18%를 기록하며 진보정당에 가히 '몰표'에 가까운 지지를 보였다. 홍준표, 유승민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각각 8%, 7%로, 가혹한(?) 메세지를 보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오랫동안 반공을 국시의 제 1로 해 온 역사를 가진 남한 사회를 기준으로 봤을 때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이야기이지, 보다 더 좌측, 그러니까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지지는 극히 미약한 편이다. 사회주의를 지지한다고 해도 페미니즘과 사회주의라는 상호 적대적인 사상 두 가지를 함께 지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순수하게 사회주의만 지지하는 경우는 90년대생 여성들 가운데서는 정말 극소수다. 페미니즘에 비판적인 90년대생 여성들이라 해도, 대개는 페미니즘에 비판적인 자유주의나 개량주의, 혹은 신좌파 경향을 지지한다.

정리하자면 진보적인 건 맞지만 정치적 스펙트럼은 좁은 계층이라 할 수 있다.

6.2.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1990년대생의 고향 변동[편집]

1995년 문민정부행정구역 개편 및 도농통합 정책으로 이들은 출신도 엇갈리거나 애매한 편이기도 하다. 1995년에 통합된 충청북도 충주시는 이전에는 충주시와 중원군으로 나뉘었는데 충주시 동 단위 출신들은 충주시, 읍면 단위 출신들은 중원군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군 단위지역 중 읍 단위 지역들이 자치시로 승격되면서 군에서 분리된 영향으로 시와 군으로 나뉜 영향이 컸는데 문민정부가 행정구역 개편 및 도농통합 정책을 하면서 일부 통합되지 못한 시·군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시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른다. 1995년 이전에 태어난 충주시 읍·면 단위 출신들은 중원군 출신으로 분류되었으며 1995년 중원군이 충주시로 통합되면서 충주시 출신으로 분류하게 된다. 강원도 강릉시도 강릉시와 명주군으로 나뉘었던 시절에는 1994년생까지 강릉시 시내 출신은 강릉시, 읍·면 출신은 명주군으로 분류되었다가 1995년 강릉시로 통합되면서 강릉시 출신으로 통합되었다.

울산 출신들의 경우 1997년 상반기 출신까지는 경상남도 울산시 출신으로 등록되었는데 그 해 울산이 광역시로 분리·승격 되면서 1997년 하반기 출신부터 울산광역시 출신으로 등록된다. 때문에 이전 광역시 분리 이전 출신들은 경상남도민으로 분류된 적이 있었다.

인천 강화군, 옹진군(인천) 출신들은 1995년 2월까지는 인천시민이 아닌 경기도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 당시까지는 강화, 옹진이 인천이 아닌 경기도 군이었기 때문. 1995년 3월 1일에서야 정부 행정령에 따라 경기도에서 인천으로 강화, 옹진이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천 서구 검단 지역도 1995년 2월까지는 경기도 김포시였기 때문에 그 당시 출신들은 김포시 출신으로 분류되었다가 3월 출신부터 인천 서구 출신으로 분류된 것이다.

그리고 1992년 시로 승격되어서 일산신도시 러시를 맞았던 고양시 출신들은 1992년생을 기준으로 고양시 출신으로 불렸지만 92년 이전생들은 고양군 읍·면 출신으로 분류되었다. 여기에 고양 일산과 성남시 분당구1기 신도시화가 되면서 일산과 분당에서 태어난 이들은 고양과 성남이 아닌 일산과 분당 출신이라고 자칭한다.

7. 1990년대에 들어가는 해[편집]

[1] 과거 선사 시대농업 혁명, 18세기산업 혁명과 더불어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3대 혁명 중 하나에 해당된다. 그 첨병은 바로 인터넷.[2]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점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3] 단순 성장률로만 본다면 새마을 운동 시절의 1970년대나 산업화가 이루어진 1980년대가 더 높을 수 있지만[4] 뒷부분에는 종로성신여대입구역 근처의 모습도 나온다.[5] 하지만 이 당시 시중 자금이 부동산으로 대거 몰려든 덕택에 집값과 전월세비 상승폭이 임금 상승률을 추월할 정도로 폭등하여서 실제 일반인들 체감은 이에 못미쳤다. 물론 자가용이 한창 대중화되어갔고, 해외여행 자유화에 따라 해외여행객도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기때문에 어쨌든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느낌이 들기는 들었다.[6] 그해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국민소득은 2만 달러 초반대였고 미국, 독일은 2만 달러 후반대였으며 일본만이 3만 달러가 넘던 시기였다.[7] 더글러스 커플랜드라는 캐나다 작가의 소설에서 유래한 단어로, 원래 뜻은 1970년대에 태어나 석유파동의 후유증을 보며 자란 뒤 실업률이 급증한 상태에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는 꿈은 포기했으나 옷차림 등을 통해 개성을 표현하려는 욕구는 넘쳐났던 세대를 가리키는 단어였다.(출처는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과 시사저널 1993년 8월 19일자 기사) 다만 한국에서는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이었던 데다 1996년경까지 호황기였던 관계로 뭔가 다른 의미가 된 것.[8] 그러나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대중 문화는 본래 취향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며 그러한 과정이 수용자의 개성을 확정짓는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 당시까지는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 범위가 그리 많지 않아서, 개성을 추구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획일적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9] 이 시기의 문화 소비에 대해 일명 '명품세대'라는 용어도 있다.[10] 엄밀히 말하자면 노태우 정부 시절에 "고등학교 운동"이라는 것이 상당히 성행하기는 했고 1991년 시위에도 참여하기는 했지만 1991년 지방선거 자체가 여당의 압승으로 끝난지라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고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동력을 완전히 잃었다.[11]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방영된 영심이달려라 하니, 천방지축 하니, 사랑이 꽃피는 교실, 푸른교실과 1990년대 중후반에 방영된 신세대 보고 어른들은 몰라요, 학교 시리즈, 사춘기(드라마), 나(드라마)를 보면 등장인물로 나오는 학생들의 복장이 확 다르다는 것을 느낄수 있다.[12] 애초에 서슬퍼른 5공화국 시절에도 과외는 금지시켰지만 멀쩡히 운영하고 있던 학원들까지 죄다 문을 닫게 할 수 없는 노릇인지라 학원들이 운영하였고 그 덕택에 사교육 문제는 여전히 문제점이었으니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기는 했다.[13]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1980년대까지는 그래도 농촌지역 인구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어도 그나마 수는 되었지만, 이것도 인구유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무력했던 데다가 1980년대 이후로 저출산 현상까지 나타나면서 농촌 지역 자체의 인력이 부족해지게 된 것이다.[14] 1990년대부터 기업주들이 싼 임금의 유혹으로 인한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외노자들이 급격히 늘어났다.[15] 사실 이는 당연한 것이 1980년대 산아제한 정책의 영향으로 출산율이 1.5명대까지 줄어들면서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출생아수가 60만 명대까지 떨어졌고, 이 시기에 태어난 세대들이 한창 학창생활을 보냈을 때가 1990년대 ~ 2000년대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 참조. 물론 당대에는 남아선호사상을 제외하면 그다지 큰 문제로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농어촌지역이나 탄광촌에서 고령화와 인구감소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이에 비례해서 인구정책이 따라온것은 아니라서 산아제한 정책은 1996년도에 와서야 폐지되었다.[16] 사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대학진학률은 20-30%대 정도의 수준이었고 대학에 입학하는 것 자체가 위낙에 빡센 일이었기 때문에 덜했던 정도였다. 물론 대입시험 보느라 생고생했던 사람은 많았지만.[17] '사람은 무조건 대학을 가야 한다', '대학 안 가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라는 용어.[18] 1990년대~2000년대 당시 중학교에서는 인문계를 중시하고 상고와 공고를 천시했으며, 인문계고교에서는 무조건 대학 입학만 중시하고 학생의 진로와 생각을 편협하게 만드는 교육을 북한처럼 세뇌교육 형식을 통해 교육했다(한국판 북한 학교). 학부모들도 역시 이에 격렬하게 동조하였고 당연하게도 당대에도 많은 사회문제가 되었지만 이후에도 대학을 가야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기 쉽다는 메리트 때문에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0년대엔...[19] 최근 2018년 6월 22일자로 마지막으로 살아있었던 김종필이 별세하면서 3김 정치는 막을 내렸다.[20] 대통령에 대한 호칭이 각하에서 님으로 바뀐 것도 이때다. 강원국의 '대통령의 글쓰기'에 따르면, 연설문에서도 권위적인 면을 줄이려고 노력했다고 나와있다.[21] 1996년 연세대 사태로 운동권은 헤드샷을 맞아 사실상 대학 내에서 소수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22] 엄밀히 말하자면 1970년대 오일쇼크 때도 있었기는 했지만 너무 간격이 멀고(...) 1990년대 초반에도 3저호황이 끝나고 해서 중소기업들의 파산률이 크게 늘어나고 경상수지도 적자로 돌아섰으며 물가도 급상승하는 테크를 밟았지만 그래도 성장률은 5% 이상 정도의 수준은 유지하기는 했다.[23] 이 무렵 헐리웃에선 에어 포스 원, 아마겟돈, 진주만 등 미국 중심 사관의 영화들이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는 냉전에서 승리한 당시 미국민들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24] 어설픈 경기 부양과 인구 감소로 집값 폭락한 일본[25] (1990~1999)일본과 주요 국가의 명목 GDP 흐름[26] 이후 추락을 거듭하여 2007년부터는 800억대 선까지 내려왔으나 온라인 음반시장은 자리를 잡아가면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27] 확실히 이건 MBC 대학가요제의 공이 컸다. (그런데 015B는 전신이었던 무한궤도부터 생각하자면 1988년 데뷔다.) 하지만 대학가요제로 대학생이 가수로 데뷔하는 건 대학가요제가 만들어진 시기인 1970년대 후반부터 있었다. 단지 1970년대 후반의 대학생들이 아마추어의 풋풋함이 있었다면 198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대학생 가수들은 등장부터 이전 선배들과는 다른 프로 뮤지션으로서 데뷔했다는 차이가 있다.[28] 거꾸로 말하면, 한국에서 레이저디스크가 영 힘쓰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특히 이러한 분위기가 팽배했던 1980년대 이전 가수의 평가기준은 순수하게 가창 실력 및 음악 그 자체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조용필 등이 이러한 시스템 하의 최대수혜자(중 하나)라는 의견도 존재한다.[29] 이 문단은 독자연구/집단연구임을 밝힌다.[30] 게임외적인 부분의 CG/실사동영상을 재생하는 용도가 메인이었지만 몇몇 게임은 이러한 풀모션 비디오를 배경에 일부 박아넣는 식의 연출 용도로 활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파이널 판타지 7에서 이런 기법이 많이 사용되었다.[31] 후자의 경우, 정확히는 1990년대 초중반의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같은 뉴 잭스윙, 힙합, 브레이크비트성 댄스 뮤직이다.[32] 주인공인 황경민, 정종석이 15년 전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김철이 존재했을 당시의 중학교 시절을 회상한 시기로, 김철이 "부모? 야, 내가 국민학교 때 아빠라는 인간은 사업 망하자마자 도망쳐버렸어. 우리 버리고..."라고 말하는데 그 대사를 봤을 때 '국민학교'라는 단어는 1995년까지 사용했다. 그리고 일부 장면에서는 워크맨도 언급했다.[33] 물론 오락실2000년대 시망했지만.[34] 1995년 4월부터 출고되는 입석형 버스에는 냉·난방장치가 설치되서 나온다.[35] 정확히 말하면 대책으로 내놓은 2번째 프로그램이다. 1번째는 브라보신세대...[36] 당시 전뇌회선상 유머의 주 매개체였다. 인터넷 보급은 90년대 말이 되어야 보급이 되었다.[37] 이 외에도 PC통신으로 시작된 유머 시리즈들은 많지만,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기에 언급해본다.[38] 오늘날의 포털 사이트 카페 서비스 같은 개념이다.[39] 1990년대 말을 풍미했던 당시 휴대전화통신 시스템.[40] 한국에서는 스타크래프트 때문에 잘 와닿지 않지만, 의외로 게임 완성도와 재미를 떠나 세계적으로 오카리나라는 악기의 인기를 견인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41] 다만 90년대 중반 이후로 주도권을 CD에게 내줘야만 했다.[42] 귀를 뚫지 않고 귓바퀴에 끼워 거는 식의 악세사리.[43] 당시 이렇게 개작해서 많이 하곤 했다.[44] 캡틴의 줄임말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어원은 일진문화에 두고있다는 게 씁슬하다. 그래서 근성모는 그레이트 캡짱이라는 만화를 내놓았나보다?[45] 특이 할 수밖에 없는게 이 시기 산아제한정책이 다소 완화되어 늦둥이 붐이 일어났기 때문이며, 손위 형제와 5살 이상 차이나는 아이들이 많았다.[46] 특히 이 사건들을 군 생활 도중 겪은 사람들이 주로 1990-95년생 남성들이다.[47] 정치 성향을 떠나서 북한에 대한 경멸적인 시선이 강하다. 심지어 극좌, 사회주의 성향이라도 북조선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 국가자본주의론이나 관료집산제 이론, 세습 봉건 왕조론 등을 지지하는 경우가 절대다수이며 주체사상, NL에 대해서는 극혐하는 경향이 우세하다. 소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에도 북조선은 극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이들 중에서도 원래부터 북한에 포용적이었거나 문재인 정부의 대북 유화 정책으로 인해 생각이 바뀌는 이들도 많다.[48] 애초에 기성세대를 비웃는 용어인 틀딱충이나 꼰대, 개저씨 등의 멸칭을 이들이 만든 거다. 90년대생 이전의 초창기 인터넷 문화를 주도했던 70년대 후반 - 80년대생들도 이전 세대의 권위적인 면모들을 온라인을 통해 종종 비판하기도 했지만 거기에 그쳤을뿐 90년대생들 만큼 적개심을 드러내며 완전히 배척하거나 끝까지 싸우려는 면모를 보이진 않았다. 그만큼 한국 사회 패러다임의 변화와 세대교체가 스마트시대를 맞이하여 매우 빠르게 일어난다는 증거이다.[49] 최순실 게이트의 여파가 상당하다.[50] 선거 전전날~전날[51] 노점 철거 갈등, 리쌍 곱창집 사건만 봐도 무조건 약자를 옹호하지 않고 법에는 법대로 엄벌주의 사고방식에 입각한다. https://m.fmkorea.com/best/1283661685[52] 이전, 이후 세대와 달리 유독 이들 세대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로는 이들의 발달된 인터넷 문화, 현재 실정 영향이 크다.[53] 운동권 자체가 눈에 띠게 성장하진 못했지만, 00년대 초까지 NL 민족주의 일색이던 운동권에 서구식 사회주의가 진출하면서 정파, 노선이 다양화된 것이다.[54] 선거 전전날~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