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최근 수정 시각:


バブル景気 / Japanese asset price bubble

1. 개요2. 1980년대 일본3. 배경4. 진행과정
4.1. 주식4.2. 부동산4.3. 골프장, 호텔4.4. 국내4.5. 해외4.6. 거품붕괴
5. 각종 부정부패 사건
5.1. 오노우에 누이 사건5.2. 리쿠르트 코스모스 사건5.3. 허영중(이토만) 사건
6. 거품경제 이후의 일본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코카콜라 광고.
저 당시로부터 30년이 지난 2010년대를 사는 현대 일본 사람들의 기준으로도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화려하고 낙천적이다.[1]

거품경제 말기인 1990년 도쿄시내를 촬영한 영상.

버블을 통하여 "공짜 점심은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경제의 대원칙이 재확인되었다. 버블 안에 있을 때는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버블이 한번 발생하면 경제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 1993년 일본 경제백서 中[2]


1980년대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 시장 전반에 나타났던 거품경제. 이후 1500조엔[3]자산이 공중분해되었다. 짧게는 1985년부터 1990년까지[4], 길게는 1980년부터 1992년[5] 일본의 비정상적인 자산 가치 상승 현상을 통칭하는 말. 붕괴 후 휴유증이 인구 고령화, 금융시장 부실화, 정부의 미약한 대응, 디플레이션등 여러 요인과 결합해 일본의 장기불황을 가져왔다.

2. 1980년대 일본[편집]

세계 50대 기업 순위[출처](이미지) (단위=백만달러)

순위

기업

국적

주식
시가총액

87 매출액

88

87

1

1

NTT

파일:일본 국기.png

276,840

46,639

2

2

IBM

파일:미국 국기.png

76,049

54,220

3

4

스미토모은행

파일:일본 국기.png

65,335

300,933

4

3

엑슨

파일:미국 국기.png

62,572

82,100

5

8

다이이치칸교은행

파일:일본 국기.png

61,971

325,206

6

9

후지은행

파일:일본 국기.png

59,746

293,103

7

6

도쿄전력

파일:일본 국기.png

57,318

32,455

8

10

미쓰비시은행

파일:일본 국기.png

53,934

296,063

9

5

일본개발은행

파일:일본 국기.png

52,170

225,909

10

7

노무라증권

파일:일본 국기.png

51,154

28,707

11

13

로열 더치 쉘

파일:영국 국기.png
파일:네덜란드 국기.png

49,312

78,312

12

14

도요타

파일:일본 국기.png

46,334

54,984

13

12

산와은행

파일:일본 국기.png

46,136

262,051

14

11

제너럴 일렉트릭

파일:미국 국기.png

39,617

39,300

15

23

마쓰시타전기

파일:일본 국기.png

34,852

39,696

16

77

신일본제철

파일:일본 국기.png

32,252

19,276

17

32

히타치

파일:일본 국기.png

31,721

40,980

18

27

도카이은행

파일:일본 국기.png

31,288

194,270

19

16

일본장기신용은행

파일:일본 국기.png

30,078

156,087

20

20

미쓰이은행

파일:일본 국기.png

29,351

185,106

21

17

AT&T

파일:미국 국기.png

28,855

33,600

22

24

포드

파일:미국 국기.png

28,585

71,600

23

15

BP

파일:영국 국기.png

27,441

51,589

24

22

브리티시텔레콤

파일:영국 국기.png

26,612

19,073

25

19

미쓰비시신탁은행

파일:일본 국기.png

25,621

99,750

26

25

제너럴 모터스

파일:미국 국기.png

25,050

102,000

27

21

스미토모신탁은행

파일:일본 국기.png

23,517

94,590

28

40

NEC

파일:일본 국기.png

22,986

22,362

29

38

간사이전력

파일:일본 국기.png

22,744

16,573

30

31

미쓰비시부동산

파일:일본 국기.png

22,647

2,076

31

30

다이와증권

파일:일본 국기.png

22,282

361,606

32

18

듀폰

파일:미국 국기.png

22,182

30,500

33

26

메텍

파일:미국 국기.png

22,162

5,061

34

46

도쿄가스

파일:일본 국기.png

21,431

6,013

35

98

미쓰비시중공업

파일:일본 국기.png

21,297

14,788

36

82

도시바

파일:일본 국기.png

21,151

29,425

37

41

도쿄은행

파일:일본 국기.png

21,055

153,363

38

37

닛코증권

파일:일본 국기.png

20,801

24,077

39

44

벨소우

파일:미국 국기.png

20,753

12,300

40

42

도키오화재해상보험

파일:일본 국기.png

20,155

6,244

41

35

필립 모리스

파일:미국 국기.png

19,817

27,700

42

62

후지쓰

파일:일본 국기.png

19,335

16,862

43

33

아모코

파일:미국 국기.png

18,743

22,400

44

69

전일본공수

파일:일본 국기.png

18,140

4,217

45

39

모빌

파일:미국 국기.png

17,946

56,700

46

99

닛산자동차

파일:일본 국기.png

17,919

34,957

47

64

주부전력

파일:일본 국기.png

17,490

13,452

48

47

월마트

파일:미국 국기.png

17,307

15,959

49

60

다우 케미칼

파일:미국 국기.png

17,186

13,377

50

58

다케다화학

파일:일본 국기.png

17,170

5,214


이 당시(1988년) 주식 시가 총액 기준 세계 50대 기업 순위. 무려 2/3(33개)가 일본인데 그 중에서도 상당수가 은행증권회사 등의 금융 관련 기업들인 것에 주목할 것. 또한 더 유심히 봐야 할 것은 1987년 매출액 1,000억달러 이상 기업은 일본의 은행들과 다이와증권을 제외하면 제너럴 모터스 뿐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20위까지 일본 기업이 아닌 기업이 4개 밖에 없다. 게다가 압도적인 시가총액 1위 NTT의 시가총액은 2위 IBM의 3배가 넘고 서독 주식시장 전체 시가총액에 맞먹었다. 이 때 한국의 국내총생산은 2023억 달러로 , NTT시가총액의 70%수준에 불과하다. 당시 일본의 GDP가 나머지 아시아 전체 GDP보다 컸다.[7]

JVC, 소니, 파나소닉, 도요타, 혼다, 캐논같은 일본의 기업들은 우수한 기술력으로 미국과 유럽의 경쟁사들을 고사시키며 세계시장을 장악했다. 이 시기의 분석가들이 언젠가 히타치소니인텔이나 IBM을 인수해버릴 것이다고 전망했을 정도. 이 과정에서 일본은 세계 1위의 무역흑자를 기록하며 막대한 자본을 비축해 놓치만 동시에 타국간의 무역마찰도 심해진다.

극단적으로 보자면, 도쿄전력/도쿄가스/간사이전력/주부(中部)전력 등도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일개 지역의 전력/가스 공급업체가 글로벌 기업들의 순위권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전력공사의 서울지사가 애플, 삼성 등과 비슷한 규모의 기업이라 평가받는다고 보면 된다흠좀무

3. 배경[편집]

1980년대오일쇼크의 여파가 잦아들었고 오일쇼크 이래로 인위적인 엔저로 일본의 수출이 매년 급속하게 불어 나면서 기업들의 매출이 불어나자 1983년을 기점으로 자산시장이 급속하게 활성화 되었다. 부동산 가격과 주식가격은 이때를 기점으로 나날이 상승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부동산 시장은 기존의 부동산 불패 신화도 있었기에 더더욱 상승하였고 이에 따라 기업들과 개미들이 재테크로 거금을 벌어들었다는 소식이 잇따라 전해졌다. 투기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혹한 기업들과 중장년층들이 대박을 꿈꾸며 자산시장에 대거 진입하였다.

1985년플라자 합의로 수출이 감소하며 성장률이 떨어졌다. 정확히는 1986년-0.5%(달러 기준. 엔화 기준은 +2.8%). 오일쇼크 이후 최악의 성장률. 달러 기준 마이너스 성장[8]이었다. 이에 일본 기업들은 아우성쳤고, 일본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라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의 공격적인 내수 경기부양책으로 경제성장률은 다시 1987년 달러기준 +1.6%(엔화기준 4.1%), 1988년 엔화기준 7.1%, 1989년 엔화기준 5.4%, 1990년 엔화기준 5.6%, 1991년 3.3%(엔화기준)까지 성장하기는 했다. 문제는 이게 내수경기 부양책이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쏠린 결과물이었다는 것.

1986년 경기부양책이 시행되자, 당시 기업들과 투자가들은 저금리로 대출받은 자금을 부동산과 주식 투기에 쓰면서, 안그래도 올랐던 주식값과 부동산 가격은 더더욱 오르는 악순환을 반복하였고 그로 인해서 수많은 기업들과 개미들이 주식과 부동산 시장으로 더더욱 몰려들게 되었다. 집값이 너무 비싸진 나머지 주요 대도시 실수요자들이 집을 구하지 못하고 근교 지역으로 계속 밀려 나갔다.

결국 일본 정부1989년에 소비세 신설과 금리 인상이라는 악수를 두게 된다. 물론 금리 인하가 자산 시장 버블의 요인이 되었던 만큼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 한 것이겠지만, 천천히 올려야할 금리를 너무 급속히 올려버린 나머지 이전까지 크게 올랐던 주식값과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고 이는 소비 심리를 급속하게 위축시켜서 경제의 경착륙을 불러 왔다.

일본은행1988년 9월에 2.50%이던 기준금리를 1990년 12월 6.00%까지 올렸다. 즉 2년 3개월만에 3.50%나 금리가 폭등한 것. 이로 인해 주식시장이 먼저 고꾸라지고, 부동산 시장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 1991년에는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 즉 신규대출 전면금지, 기존대출도 LTV 200% -> 70%로 제한이라는 자폭을 하고 만다. 부동산은 기본 거래단위가 수천만엔 단위로 매우 큰만큼 LTV에 손을 댈 때에는 조금씩 길게 손을 대는 등의 조치로 신중해야 하는데, 담보가치를 130%나 변동시키는 조치를 너무 쉽게 꺼냈다.[9] 당연히 부동산 담보가치 폭락으로 인해 시장에는 부동산 매수세가 뚝 끊겼고, 일본의 부동산 시장은 한방에 훅 가버리고 만다.

이후로도 일본 정부는 불량 채권 회수에 미비하게 대처하면서 경기 침체를 악화시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중심인 생산 가능 인구가 1992년 정점에 도달한 이후 감소하기 시작해 자산 거품 붕괴로 인한 단발적이며 일시적 경기 침체는 이후 구조적이며 장기화되었다. 게다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로 인해 일본 기업들의 해외 자산마저 대규모 손실을 기록하면서 일본의 견실한 기업들마저 줄도산, 글로벌 경쟁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실제로 1996년까지는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회복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1998년부터 완전히 마이너스 성장과 0% 성장을 반복하는 고사 상태가 되었다. 1996년까지는 도산하는 기업이 부동산, 주식 리스크가 컸던 중소형 은행/증권사, 중소 건설업체, 부동산 회사 등에 집중됐으나, 1998년부터는 일본의 대기업과 대형 금융사들마저 쓰러지게 된다. 이른바 ‘눈물의 파산선언’으로 유명한 일본의 3대 증권사 야마이치 증권(1998년 파산), 일본 최대의 지방은행 홋카이도 탁쇼쿠 은행(1998년 말 파산), 일본장기신용은행(1999년 파산)은 전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 아시아 사업 손실때문에 파산했다.

학자들은 자산 거품이 꺼지는 중에 금리 인상과 대출 총량 규제 등의 정책을 펼친 것이 잃어버린 20년의 원인으로 보았고 이런 일본의 사례를 바탕으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시 미국은 금리 인하와 강력한 부양 정책을 펼치는 등 일본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다.

4. 진행과정[편집]

4.1. 주식[편집]

1980년대 초반 일본 기업들은 재테크를 벌이고 있었는데, 1984년에 일본 대장성은 "투금 계정"[10]이라는 불법 계정을 합법화함으로써 일본 기업들이 주식이나 채권 등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일본 기업들은 자본이득세를 한 푼도 안 내고 일본 증권사들의 투금 계정에 돈을 넣어두고 재테크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1980년대 들어 성장이 느려지자, 정부에선 일본은행을 윽박질러 기준금리를 5.00%에서 2.50%까지 떨어뜨리게 된다. 이는 은행들의 대출 폭풍을 유발하여 엄청난 양의 돈이 각종 자산들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은행의 고위 간부와 기업가, 그리고 이를 감시해야할 관료들이 서로 인맥으로 묶여있는 일본의 특성으로 무분별하고 부주의한 대출이 많았다. 이는 일본 기업들의 재테크 수익을 높여주었고, 다시 기업들의 주가가 오르면서 더 큰 재테크 수익을 갖다주는 악순환이었다. 1985년 투금 계정의 잔액은 9조엔이었지만, 1989년에는 40조 엔까지 팽창했다. 당시 일본사람들은 기업들의 현금흐름은 신경쓰지 않고, 재테크로 불어나는 자산만 보고 달려 들었다. 이것도 일본 기업들을 부실하게 만드는 한 원인이 되었다. 언제든지 흑자도산이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PER이 67을 찍었고 전통적인 기업들이 성장주로 과대평가받기 시작했다.

일본 증시가 이렇게 폭등하자, 일본 정부에서는 NTT 민영화를 시작했는데, 공모가와 공모 주식 수를 발표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공모청약에 몰려들었으며, 상장 시초가가 120만엔이었다. 그럼에도 단 이틀만에 25%가 추가상승했고, 2주만에 정확히 두배인 240만엔까지 치솟았으며, 1989년 연말에는 400만엔 부근까지 치솟았다. 이쯤 되면 정말 개똥 막장이다[11] 당시엔 수백만엔대를 호가하는 NTT보다 주가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주식이 폭등하기도 했었고, 언젠가는 뜰 것이라는 예상에 주가가 폭등하기도 하는 등 막장 증시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4.2. 부동산[편집]

우주 한복판을 날고 있었던 주식 거품은 부동산 거품으로 합리화되었다. 일본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토지 가격이 50배 정도 뛰는 동안 소비자 물가 지수가 단 두 배 오르는 기현상, 즉 땅값의 실질 가치가 25배 급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일본 국민들에게 토지 불패 신화를 불어 넣었다. "오르기는 해도 절대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당시 일본 부동산 버블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기준금리가 2.5%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은행들은 대출 경쟁을 벌였다. A은행에서 8% 금리를 제시하면 옆 B은행에 가서 7.5% 대출을 제안받고, 다시 그 옆 C은행에서 7% 대출을 받아 가며 토지 투기가 벌어졌다. 당시 토지 가격의 200%까지 담보가 인정(LTV 200%)되었으며[12], 지속적으로 지가는 오르기만 했다. 현재 한국의 수도권 LTV는 50% 수준인 걸 생각해 보면 이게 얼마나 어이 없는 담보율인지 계산이 나온다.

처음에 도쿄 중심가(미나토 구)에서부터 시작했던 부동산 광풍은 도쿄 전역을 넘어서 요코하마, 오사카, 나고야, 교토 등 일본 주요도시들로 확산되었다.[13] 1988년 도쿄 지가는 1987년3배로 폭등하는 등 이쪽도 엄청난 거품이 끼어 있었다. 역시 주식 거품과 마찬가지로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니 더 많은 대출이 가능해져 계속 오르는 악순환이었다. 당시엔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농담이 유행하기도 했고[14][15] 이 당시 도쿄 황거 지가가 캘리포니아주 전체 지가와 맞먹었다. 물론 당시 미국은 1987년 검은 월요일 하루동안 주가가 22% 폭락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버블 시기 도쿄 지가는 1981년 대비 정점(1990년)에서 전체적으로 5배 이상 폭등했지만 그 이상 폭등한 지역을 보면 도쿄 메트로 긴자선 연선을 타고 땅값이 폭등했다 특히 아오야마나 신바시, 아사쿠사같은 동네는 무려 10배 이상 폭등, 아오야마는 15배나 폭등해서 신기록을 갈아치웠던 곳이다. 이 시기에 민영화된 국철은 부채 청산을 위해 시오도메 화물역 부지(현재의 시오도메 시오사이트 부지)를 매각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지나치게 높은 토지 가격으로 인해 과열 경쟁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매각 보류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화물역 기능이 철거된지 10여년이 지난 1997년에 들어서야 겨우 개발될 수 있었다. 땅값이 워낙 높아진 탓에 도쿄의 상업용지값은 거품이 터지기 이전인 80년대 말에 하락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건 역으로 따진다면 암만 월급이 올라도 집을 사기에는 택도 없다는 셈이므로 당시 내 집 마련을 꿈꾸던 당대 일본 월급쟁이들에게 상당한 재앙이었던지라 100년 만기대출같은 황당한 상품이 등장하기도 했고, 직장인들로 인해 지바현이나 사이타마현, 가나가와 현, 도쿄 중서부지역[16]의 인구가 급증하기도 했다.[17] 더군다나 공공 임대 아파트의 공급은 이에 훨씬 못미쳤기에 청약 경쟁률이 턱없이 높았다.
당연히 이들 난개발 지역들도 땅값이 폭등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더 심각한 것은 버블이 꺼진 후에도 사이타마나 지바의 땅값은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미 도쿄에서 한번 유출되기 시작한 인구가 도쿄로 복귀하지 않으면서 사이타마나 지바의 수요층으로 편입되어 버린 것이다. 1981년 대비 1991년(버블 붕괴 시작할 때)의 사이타마나 지바 땅값은 3배~4배 정도 상승했는데, 2015년 현재까지도 그 수준에서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 종사자들은 보너스가 왕창 나오던 시절이었고 중소기업도 인력 부족으로 봉급을 왕창 올렸던 때인 건 맞기 때문에 집을 사는 것만 포기하면(...) 생활 자체는 풍족하기는 했다. 그래서 당대 일본 문화 산업이 초호황이었던것도 이런 영향이 크다는 의견도 있는데 암만 월급 모아 봤자 집 사는 데 턱도 없으니 집 사는 것에 신경 끄고 문화 생활이라도 즐기려는 젊은층이 많아서 그렇다나(...)

오늘날 도쿄, 오사카 등 일본 대도시들의 주요 거점 스카이라인은 대부분 이 시기에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주쿠, 시부야, 이케부쿠로, 롯폰기, 우에노, 오다이바(이상 도쿄), 우메다, 난바, 텐노지, 쿄바시(이상 오사카), 나카교(교토), 미나토미라이(요코하마) 등. 1990년대 이후에 완성된 일본 주요 대도시 상업 지구들은 신주쿠, 시부야, 우메다, 난바 정도 빼면 1981년까지만 해도 빈민가, 놀고 있는 공지였다. 지가 폭등으로 이 동네에 주거 지구를 남겨두는 것보다 상업 지구로 철저하게 재개발하는 것이 몇 배나 남는 장사가 되면서 부동산 개발 회사들이 난립했고, 이 회사들이 자체 도시계획을 짜고 부지들을 지방자치단체나 소유주로부터 사들인 뒤 1986년부터 전부 오피스 지구로 재개발하게 된 것.[18] 한국의 건설사들이 자체적인 도시개발 능력이 딸리는 것에 비해 버블 붕괴로부터 살아남은 일본 건설사들은 자체적인 도시개발 및 건축기술을 축적하여 1990년대 이후에도 전 세계적으로 신도시 개발 수주를 따내고 있다. 한국의 건설사가 자체적인 도시개발 능력이 딸리는 이유는 일개 건설사가 자체적인 도시개발을 할 수 없기 때문. 한국토지주택공사나 지방공사가 도시개발을 하고 건설사는 단지 시공만 한다. 파산해버린 부동산 업계들과 건설사들의 미분양 물량마저 살아남은 회사들이 인수하여 완공하게 된 것이 2000년대 이후의 일본의 스카이라인.

4.3. 골프장, 호텔[편집]

주식과 부동산 투기가 커피라면, 골프장과 골프회원권, 호텔 투기는 티오피였다.

일본인들이 1980년대 갑자기 돈이 흘러넘치게 되자, 상류층들의 친목을 다지고 돈지랄을 과시하기 위해 골프장과 골프회원권, 호텔 투기가 극성을 벌리게 된다. 특히 이 골프회원권, 호텔 투기는 1986년 일본 경제성장률이 -0.5%를 찍어 금리를 낮춘 이후로 극성이되는데, 이를 근거로 일본 버블경제 시점을 이 골프회원권과 호텔 투기 시점으로 잡는 미국 경제학계의 연구도 많다.

특히 이 쪽은 야쿠자, 정치인, 관료들의 이권개입까지 더해져서 상황이 더 심각했다. 완전 복마전. 유력 부자들이 돈을 모아 골프장을 짓거나 호텔을 짓자고 하면, 그 지역의 정치인과 관료들과 접촉하여 골프회원권과 호텔분양권을 담보로 허가권을 매수한다. 그리고 갑자기 야쿠자들을 동원하여 수용대상지에 있는 원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내고 심지어 토막살인까지 저지르는 사례가 발생한 바 있다. 1988년에는 야쿠자가 골프장을 건설하기 위해 일가족을 전부 살해하고 콘크리트에 암매장하여 바다에 수장시킨 사례가 실제로 있었다. 너희들은 왤케 콘크리트를 좋아하니...

이런 골프회원권, 호텔 투기는 1991년 대출 총량규제가 발동되자마자 투자자들과 야쿠자, 지역 정치인들까지 한번에 대형 손실을 보고 서로가 서로를 살인하는 살인사건으로 번지기까지 했을 정도로 후유증이 심각했다.

일본 수도권 지역의 골프회원권 시세는 1990년 정점을 찍고 1999년 정점대비 97% 폭락한 뒤, 2018년 지금까지도 고점대비 30% 수준에 머물고 있다. 오히려 공급 과잉과 일본 상류층들의 취미 변화(골프 -> 승마 등)로 인해 골프장이나 호텔들이 줄도산하고 을씨년스럽게 방치되거나 재개발로 철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호텔/골프회원권 투기 세태를 반영해서 당대의 작품들에도 반영된 케이스가 있는데, 바로 소년탐정 김전일 시리즈. 몰락한 리조트나 골프회원권을 사이에 두고 이권다툼으로 살인사건을 벌리는 작품들이 바로 이 것을 소재로 했다.

4.4. 국내[편집]

거품경제 시절에 대한 2ch의 회상. 단 사이트가 사이트인지라 신뢰성은 보장할 수 없으니, '그 시대엔 대충 이랬구나' 라는 참고용으로만 보는 게 좋다.

  • 외제차 수입이 급증해 벤츠 주력 모델이던 W201 190E[19]는 너무 많이 보급돼 코(子)벤츠로 불리웠으며 BMW 3시리즈롯폰기 코롤라[20]란 별명이 붙었다.

  • 호기로 술집 단골 아가씨에게 그 자리에서 가게 하나를 내준다는 말도 있었다.

  • 프리터도 이 때 유행하고 있었다. 언제든 취업할 수 있는데 안 하는, 새로운 낭만적인 라이프스타일 쯤으로 취급받았다. 애초에 면접만 받으러 가도, 교통비로 쓰라며 3만엔에서 5만엔까지 꽂아주는 시대였으니 면접만 보러다니는 사람들까지 있었을 정도.

  • 테마파크도 우후죽순으로 지어졌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노동 시간 최장 국가 중 하나였고[21] 당연히 당시에는 주당 44시간 노동제를 체택했기 때문에 야근은 물론이고 토요일 오전에도 일하거나 학교에 다니는건 당연했는데 국내외에서도 여러모로 태클을 받는 일이 많아지자 1980년대 중반부터 차츰 노동 시간을 줄이기 시작했다. 때 마침 시기가 버블이랑 겹치게 되면서 여가 시간도 늘어나고 돈도 넘쳐서 테마파크붐이 일게 된 것. 후나바시 시에는 일본 최대의 실내 스키장인 자우스[22]가 생기는가 하면 미야자키 현에는 한때 세계 최대 워터파크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오션 돔이 생겼다. 하우스텐보스도 비슷한 흐름을 타고 생겨났으며 그외에 여러 지방 도시들에도 테마파크나 박물관 같은 데가 생겨났다. 물론 80년대초에 생긴 도쿄 디즈니랜드가 흥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 일조한 듯 했다. 하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거품이 꺼진 뒤 결국 하나둘 씩 망했고 일례로 오션돔도 거품이 꺼지더니 세계최대 워터파크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파리만 날리다 2000년대 중후반 망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23] 더 안습인 건 탄광산업이 사양세로 접어들때 생명줄로 버블을 타고 볼거리들을 유치하려다 그 볼거리들마저 거품이 꺼지자 도시까지 끌고가서 망한 동네도 있다. 천조국 본점 후광 도쿄 디즈니랜드 정도만 제외하면 버블시대에 생긴 테마파크중 살아남은 곳이 있다고 해도 불황때문에 여전히 힘들다. 하우스텐보스조차 예전만 못하다고. 우후죽순으로 생겼던 대형시설들이 2010년대 이후에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곳을 보자 굳이 장점을 꼽자면 도시권을 개발하고도 돈이 남다 보니 이 돈이 지방도시까지 퍼져서 어지간한 시골같은 데서도 우리나라 지방의 문화인프라와는 비교할수도 없을 정도의 문화인프라 같은 게 많이 확충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구감소가 만회된건 아니다보니 지금 대가를 치르는중(...) 앞서 말한 테마파크의 난립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 일본의 기업들이 아이디어(혹은 독창적인) 제품을 생산한다는 이미지가 버블경제의 영향이라 분석하는 의견도 있다. 기업이 기술부문에 R&D를 투자하고도 남아도는 잉여의 돈으로 괴상한 제품을 만든것. 그시절 일본의 자동차, 제품등을 보면 괴랄한 것이 돈지랄로 보이는게 많다(...) 물론 당시로서는 일본의 화려한 발전에 눈이 멀어 그런 것들마저도 일본의 저력이라는 마냥 우러러 보는 시선들이었지만.

  • 일본인들의 베토벤 교향곡 9번에 대한 병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의 애정이 돈과 인력을 듬뿍 들인 매머드급으로 팽창한 것도 이 시기였다. 매년 2월 중순 혹은 하순에 도쿄의 실내체육관인 료고쿠 국기관에서 5000명(!)의 합창단을 모아놓고 공연하는 국기관 5천명의 제9 콘서트(1985~), 간사이 지방에서 가장 큰 이벤트 홀인 오사카성 홀에서 10000명(!!)의 합창단과 공연하는 산토리 1만명의 제9(1983~), 히로시마 최대의 이벤트홀인 히로시마 선플라자에서 1000~2000명 규모의 합창단과 공연하는 제9 히로시마(1985~) 같은 이벤트성 공연이 시작된 것 역시 이 시기였다. 이 때의 영향으로 수많은 가수들이 교향곡 9번의 An Die Freude를 일본어로 커버했으며, 일본어 커버 버전 뿐만이 아니라 독일어 원곡 버전도 일본제 노래방 전기종에 수록되어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24]

4.5. 해외[편집]

일본의 부동산 광풍은 해외로 뻗어나가 미국록펠러 센터(미쓰비시가 매입),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일본인, 미국인 투자자들이 파트너쉽을 체결해 매입)이나 콜럼비아 픽처스(소니가 매입) 등을 싹쓸이하기도 했다. 이 당시 일본 자본의 해외 진출을 두고 치를 떨면서 록펠러 센터가 넘어갈 쯤 일본이 제 2의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고 있다는 표현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 되자 되려 미국에서 일본의 세계경제 장악에 대한 공포가 번지기 시작했다. 당시 헐리웃 영화 중 많은 수가 미래에는 일본이 미국을 능가할 것이다라는 예측을 담고 있다.[25]

주가와 부동산이 뛰어오르면서 이를 담보로 한 대출도 급속도로 많아지고 시중에 풀리는 돈이 급증하자, 넘쳐나는 돈을 써보기 위해 일본인들은 세계 명화(名畵)들을 싹쓸이하기 시작했다. 고흐해바라기를 3629만 달러에 낙찰받는 등, 피카소르누아르를 비롯하여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오는 미술품들을 일본인들이 싹쓸이해 갔다. 예술품은 경매가가 정해지면 그 가격이 다음 경매가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계속 거래가가 치솟을 수 있으며[26] 부를 과시하는 수단[27]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품이 꺼진 이후에 은행들이 담보로 압류한 미술품들이 너무 많아서 일부는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은행 창고에서 잠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미술품 특성상 제대로 보존 처리를 받지 못하면 아무래도 손상이 쉽게 가게 마련이고, 이런 작품들이 다시 세상의 빛을 봤을 때 이전의 가치가 제대로 남아 있기 힘들다. 그래서 버블 이후에 몇몇 명화들은 압류하고 있던 은행까지 도산해버려서 영영 찾을 수 없게 된 것들이 있다. 이런 작품이 대략 백여점 쯤 된다. 보통 이렇게 소실된 미술품은 모조품 제작 등으로 전시회에 나오긴 하는데, 전시회 큐레이터가 '이는 진품이 아니며 진품은 소실되었다'고 말해주는 작품들이 있다.

실제로 한국인이 유럽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싶은 경우 국내에는 물건 자체가 거의 없으므로 외국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초대전으로 작품이 잠시 들어왔을 때 보는 경우가 아니면 결국 외국에 나가서 봐야 하는데, 유럽이나 북미의 미술관들이 너무 멀다면 일본이 훌륭한 대안이 된다. 유럽이나 미국을 제외하면 세계적인 명화가 가장 많이 들어와 있는 나라가 일본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전공자도 알 수 있을만한 유명 화가의 대표작은 다 서양에 가 있지만, 그런 최고 등급의 대표작을 제외하면 바로 아래 등급의 작품은 일본에 매우 많다. 실제로 한국의 미술 전공자들이 유명 화가들의 원화를 보러 일본에 다니는 경우도 꽤 있다. 국립서양미술관, 브리지스톤미술관, 모리미술관, 국립 신미술관, 요코하마미술관, 손보저팬 도고 세이지 미술관 등 수도권 미술관 뿐 아니라 야마자키마작미술관, 나고야시미술관, 히로시마미술관 등 지방 미술관들조차 그 컬렉션의 양과 질에서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다 거품경제 시절에 넘치는 돈으로 전 세계에서 미술 작품을 사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

다만 이 해외 투자가 완전히 헛짓은 아닌 게, 덕분에 일본은 지속적으로 상당한 수익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일본은 여전히 대외 순자산 및 외국 채권 보유 규모에 있어 세계 1위이며 2위인 독일의 2배 규모에 육박한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수익으로 수십 년 동안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일본 경제에 있어 외환위기 같은 본격적인 붕괴를 막아주는 최후의 보루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차라리 처음부터 국내의 버블에 미쳐 돌아가는 어리석은 짓 대신 해외 투자에만 전념했더라면 현재 같은 꼴은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동일본 대지진 때문에 상당한 타격을 입긴 했으나, 버블 붕괴 때와 같은 피해를 입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4.6. 거품붕괴[편집]


1990년과 1991년 수치에 주목해 보자. 2010년대 아베노믹스를 기점으로 엄청난 회복세를 보였음에도 2만 초반에서 움직이고 있다.

1990년대 새해 첫날부터 주식에서 지나치게 높은값으로
거래가 끊기자 가격이 하락하고 매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거품경제 붕괴의 전형적인 케이스를 타기 시작한다. 연말에는 연초 최고치의 절반수준으로 급감, 그리고 1990년대 후반에 IT버블로 잠깐동안 주가가 상승하나 싶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IT거품이 꺼지면서 그 절반으로 급하락. 물가 역시 계속해서 디플레이션을 거듭하고 있다.

부동산 시장에는 1990년까지는 버텼다. 그러나 1991년 3월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대장성 장관이 발표한 대출 총량규제를 통해 고꾸라졌다. 대출 총량규제는 쉽게 말하면 총량규제 발표 시점부터 신규 부동산 대출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였다. 발표 시점부터 6개월간 전면 금지하고 이후로도 3년간 이전에 200%까지 막나가던 LTV를 감정평가액의 70%로 제한했다. 이러다보니 대출이 없으면 매매가 발생하지 못하는 부동산 시장은 한순간에 거래가 끊겼고, 거래없이 호가만 대폭락했다.

버블이 무너진 1992년부터는 엔화 기준으로 경제성장률이 0.8%(1992), 0.2%(1993), 0.9%(1994), 2.7%(1995), 3.1%(1996)으로 어느정도 회복되나 싶더니... 태국을 위시로 한 아시아 외환위기로 일본 기업들의 동남아 및 한국 투자자산들이 대거 파산하며 일본 기업들도 다시 줄파산, 1998년부터는 엔화기준으로도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된다. -1.1%(1998), -0.3%(1999), +2.8%(2000), 0.4%(2001), 0.1%(2002) 등... 참고로 일본에서 엔화기준으로 완전히 경제성장률 통계를 바꾼 건 1998년부터이다. 1997년까지만 달러기준 성장률을 발표하다가 1998년부터 폐지했다. 이유는 달러기준으로는 엔화가 강세로 갈 때마다 마이너스 성장을 피할 수가 없어서 이를 은폐하기 위함이다.

5. 각종 부정부패 사건[편집]

5.1. 오노우에 누이 사건[편집]

파일:external/s3.amazonaws.com/main_56750.jpg
주화입마 초기
파일:external/images.china.cn/001ec94a25c50f61429303.jpg
주화입마 완료
오노우에 누이(尾上縫)[28]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레스토랑 웨이트리스를 시작으로 레스토랑 여사장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본산업은행으로부터 10억엔 어치의 채권을 구매한 것을 계기로 증권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이후,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레스토랑 가치의 1,500배에 달하는 3조 에 가까운 돈을 빌려 주식을 사들였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금융계의 큰손이 되었고, 그녀의 레스토랑에는 수 많은 금융계인사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저택 앞에는 오후마다 금융계 인사들이 서류가방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 다음날 새벽 2시~3시가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29] 사실, 이 사람들이 그녀의 저택에 찾아온 이유는 다름 아닌 두꺼비에게 매주 지내는 의식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버블로 인한 전근대적인 정신세계로의 회귀
파일:external/photos1.blogger.com/toad3.jpg

이 두꺼비 의식이 왜 중요한고 하니, 이 두꺼비 의식을 통해서 어떤 주식을 사고 팔지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당한 액수가 말이다. 에라이 차라리 파울이 더 믿음직스럽겠다

사람들이 모이면 누이는 두꺼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정원에 세워진 불상 앞에서 불경을 왼다. 그러라고 편찬한 불경이 아닐텐데누이 부인이 두꺼비 앞에 앉아서 신내림을 받게 되면, 그 순간 어떤 주식을 사고 팔지 신탁을 알려주는 의식이 진행된다. 이런 방식으로 사고 팔린 주식이 전성기인 1990년에는 무려 100억 달러[30] 에 달했다. 거품붕괴 이후, 오노우에 누이는 파산했으며, 가짜 예금증서로 첫 대출을 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1991년 8월에 경찰에 체포됐으며, 그녀는 은행의 후원자들과 더불어 여러 해의 징역을 선고받게 되었다. 그녀의 파산으로 대출자들은 2,700억 엔의 돈을 잃었고, 일본산업은행장은 사퇴했으며, 은행 2곳이 도산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오노우에 누이가 정확히 언제 사망했는지 모르지만, 2014년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정확히는 2017년 3월 20일 한 방송에서 오노우에 누이의 행적을 추적했는데 이미 3년 전에 사망하였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다. 물론 1930년생인 오노우에는 2014년 기준, 이미 팔순의 고령이었으므로 세상을 떠나도 무리는 아니다. 개인의 병크로 일어난 엄청난 사건으로 자업자득이지만 육체적, 심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에 비하면 오히려 오래 살았다고 볼수도 있을듯.

5.2. 리쿠르트 코스모스 사건[편집]

1988년 6월 가와사키의 하급 공무원 한 명이 외부에 양심고백을 함으로서 세상에 내막이 드러났다. 내부정보를 활용해 리쿠르트 코스모스[31] 주식을 매입하여 이익을 챙겼다고 시인하고 사임한 것이다. 당시 리쿠르트 회장이었던 에조에 히로마사가 자사 관련 입법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정치인, 공무원, 관료, 기업인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자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선물했던 것.[32] 이 사건으로 당시 법무부 장관은 임명된 지 나흘 만에 사임했으며, 대장성 장관도 물러났다.

거기다 타케시타 노보루 당시 일본 총리도 리쿠르트 주식으로 1억 5,000만엔의 부당이익을 챙긴 것이 몇달 뒤 드러났다.[33] 이 사건으로 타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사퇴했고, 후임 우노 소스케도 불륜 혐의가 드러나며 자민당의 지지율이 급감, 소비세 신설문제와 함께 엮여 1989년 7월 23일에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처참한 성적을 받게 된다. 그 이전에는 자민당이 중의원 선거에서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면 자민당 참패! 타이틀이 뜨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차에 개선의석의 1/3(126석/ 총의석 252석)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총의석에서도 과반에 18석씩 미달하는 상황이 되니 자민당 입장에선 이보다 처참할 수 없는 선거결과였던 것. 오죽하면 다음 해 치러질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중심의 야당연합이 압승하여 55년 체제가 끝장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하면서 55년 체제 붕괴는 몇년 더 늦춰졌지만...

5.3. 허영중(이토만) 사건[편집]

허영중 참조.

6. 거품경제 이후의 일본[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eal_GDP_growth_rate_in_Japan_%281956-2008%29.png

(1956년~2008년)실질 GDP 성장률

파일:버블경제.jpg

(1985년~2013년)일본 정부부채 증가율

파일:687e2560c69995d569ec8edc1318b28c.jpg

일본의 연평균 실질소비지출 지수. 거품경제가 꺼지고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파일:maney.png

일본의 명목임금, 실질임금의 추이. 1997년 정점을 찍고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파일:2016022101_03_1.jpg

일본의 실질 가처분소득 추이. 1997년 정점을 찍고 2015년에는 1985년 이전 수준으로 떨어졌다.


아직도 거품경제 침체의 늪에서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 하고 있는 일본인들은 1990년부터 2000년까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른다.[34] 이 시기를 통해 한국 경제는 일본 경제와의 격차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1990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일본이 2만 달러가 넘던 시절 한국은 5,000달러 중반 대 정도 수준이었다. 2014년 한국의 1인당 GDP가 약 28,700달러로 추산되는데 일본은 37,500달러 수준이며, 물가를 고려해보면 사실상 제자리 걸음이다.

취업시장 역시 버블 붕괴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안그래도 에코 베이비붐(1971~1974년생) 세대가 취업을 준비할 때라 더 많은 일자리를 필요로 했는데 일자리가 왕창 줄었으니 스펙이 아무리 좋아봤자 취업문은 바늘구멍이었다.[35] 이 시기가 취업빙하기라 불리기도 했다. 이것이 일본 사회의 출산율 급감의 한 원인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덧붙여서 베이비붐 에코 세대 중 상당수가 나이가 들어서도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하지 못하고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경우가 상당했고, 니트족으로 남는 경우도 상당하기 때문에 현재까지 일본경제에 큰 짐이 되어서 일본 경제에 막대한 후유증을 남겨주었으며 또한 베이비붐 에코 세대들이 아이들을 매우 적게 출산하였기에[36] 일본의 고령화 현상을 더더욱 가속화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2010년대 이후로 출생률이 낮아졌을때 태어난 세대들이 본격적으로 취업에 돌입할 시기에 오고 나서부터는 버블경제 시기에 버금갈 정도로 사람 구하기가 힘들어지게 되자 뒤늦게 신입사원을 우대한다거나 외국인 노동력을 수입해야 한다느니 하는 등 호들갑을 떨고있다지만 이미 이미 배는 떠난 셈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다만 일본의 대졸자 취업구조는 한국과 많이 달라서, 취업난의 개념도 좀 다르다. 일본은 대학 4학년 1학기가 시작하는 4월부터 공식적인 리크루팅이 시작되어(대기업의 경우는 설명회 등의 비공식적인 리크루팅을 그해 1월부터 시작한다.), 이르면 골든위크 전, 늦어도 졸업 전에 입사가 확정되는 시스템이다. 물론 취활(就活-취직활동)은 3학년 1학기부터 시작한다. 3학년 2학기가 되면 취직 세미나 등에 참석하고, 빠른 경우 11월쯤부터 입사면접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정년이 보장되며, 기업도 30년은 쓸 의도로 뽑기때문에, 일단 입사하면 이직이나 경력자 전직 등의 형태로 회사를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 간단히 말해 졸업식 전까지 결정된 회사가 이후 인생행로를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졸업식까지 취직이 결정되지 않았다면 이런 경우 정상적인 취업은 사실상 불가능.

한국처럼 휴학을 반복한다거나, 졸업을 미룬다거나, 졸업하고도 계속 도서관 다니며 취업준비하는 경우는 없다...기보다 불가능하다. 아주 작은 중소기업도 졸업 =신입사원이라는 공식이 박혀있다..[37] 이렇게 입사하는 경우를 일본에서는 신졸(新卒)이라 부른다. 따라서 졸업예정인 4학년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단 몇개월에 불과한 리쿠르트 시즌에 전인생이 걸린거나 마찬가지. 여기서 밀리거나 탈락하면 패자부활의 기회따위는 없다.[38]

그러다보니 누구나 채용오퍼를 서너개씩 받아서 느긋하게 골라가며 졸업준비하던 거품경제 시기와 비교해서 힘들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 객관적인 수치로는 일본의 고용시장은 다른 OECD국가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안정적이다. 특히 청년실업율은 일부 유럽국가들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환상적으로 낮은 수준. 결국 눈높이 때문인 거 맞다.[39]물론 1980년대 호황기에 비해서 비정규직이나 블랙기업이 늘어나는 등 일자리의 질에서 보면 확실히 떨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이건 한국을 비롯해 더 심하게 나타나고 있는 나라들이 여럿 있다.

실제로 2011년 기준 일본의 대학 졸업예정자의 취업확정율은 90%를 넘고, 잃어버린 20년 기간 중에도 90% 선이 깨진 것은 미국 금융위기가 폭발한 직후인 2009년 정도였다. [40][41][42]

일본으로 넘어갈 듯 하던 세계경제의 패권이 다시 미국에 돌아오게 되자 미국에서도 엄청난 거품경제가 발생했는데, 빌 클린턴 시대의 IT버블이 그것. 다만 일본 거품경제 처럼 장기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IT버블 붕괴 이후 투기자본들이 대거 부동산으로 몰려들어가면서 부동산 거품이 발생했고, 정부에서 이를 방관하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며 일본 못지 않은 힘든 상황으로 된다. 이 사건으로 미국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아 국방비까지 크게 축소해야 했으며[43] 유럽도 남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거품경제 붕괴의 후유증을 톡톡히 겪으며 아예 우크라이나러시아의 공격을 받아도 손 쓰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번외편으로) 북유럽은 일본과 같은 시기인 1980년대 말 부동산 거품이 달아오르다 90년대 초에 꺼지며 경제위기를 겪었는데, 특히 핀란드의 타격이 가장 심했다. 1994년에는 전 국민의 20%가 실업자였던 수준. 다행히 노키아로 대표되는 IT산업 육성과 체질 개선으로 일본만큼 '길게 잃어버리는' 일은 면했다. 그러나 2008년 아이슬란드 은행 연쇄부도를 시작으로 북유럽은 또다시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이번에도 핀란드가 크게 잃어버렸다.

버블경제가 존재했고, 꺼진후 장기 불황까지 오면서 곧 세대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2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취업빙하기를 직접 겪은 세대들은 경기 침체 시대에 힘들게 살고있다는 것을 버블경제때 호황을 누리면서 고생도 안해본 기성세대들 때문이라고 비관하면서, 니들이 망쳤으면 니들이 책임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물론 그럴일은 없어서 세대불문하고 세금 꼬박꼬박 내야한다. 일본 정부에 신용이 가지않아 세금은 물론이요 연금조차 안내는 이들도 실제로 허다하다. 이렇게 갈등이 생기는건 한국도 비슷한데 일본의 세대갈등은 더욱 심하다.

7. 관련 문서[편집]


[1] 참고로 CF속 미소짓는 여주인공은 마츠모토 타카미(松本 孝美, 1965년 생). 연인으로 나온 남자는 일본계 미국인인 켄 브레니스(ケン・ブレニス)이다. 2분 쯤부터 나오는 광고는 80년대 한국에서도 거의 똑같이 리메이크되어 방영되었었다. 심혜진이종원이 출연했으며, CM송도 한국어 가사였는데 당시 국내 반응도 매우 좋았다. 코카콜라 내부 정책에 따라 일본의 원본을 정식으로 로컬라이징한 것이다.[2] KBS스페셜 '욕망과 혼돈의 도쿄, 1991년'의 마지막 나레이션. 일본 거품경제에 대해 아주 잘 그린 다큐이다.[3] 1경 6500조 1000억원, 14조 6600억 달러. 이게 어느정도냐면, 2015년 한국의 국민 총자산이 무려 1경 2360조 원이다. 한 마디로 이 버블을 전부 메꾸려면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가진 부동산과 재산을 팔아도 매우 힘들다는 뜻.[4] 환율평가 절상 합의때부터 헤이세이 불황이 터지기까지[5] 2차 석유파동이 끝난시점부터 부동산경제 붕괴까지[출처] 매일경제신문 1988년 9월 24일 제4면[7] 당시 석유붐이 끝나면서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 이라크의 GDP가 대폭 평가절화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에 중국이나 인도나 인구만 많지 경제력은 미약한 후진 개발도상국이었다는것도 크기도 하고.[8] 1985년플라자 합의가 결정타였다. 달러 가치가 절하되면서 마이너스 성장이 나온 것.[9] 한국 문재인 정부에서 8.2 부동산대책으로 LTV를 비수도권 70% -> 60%, 수도권 60% -> 50%, 투기과열지구 50% -> 40%로 고작 10%p 깎는 데에도 한국 국민들의 반발이 엄청나고 부동산/건설업계가 죽는다며 난리를 쳤다. 일본의 130%p 변동은 미친 짓이었다.[10] 투금계정이란, 재무상태표에만 나타나고 손익계산서에는 기타포괄손익으로 처리할 수 있는 특별자산들을 모아놓은 펀드 투자자산 계정이다. 기업들이 펀드 투자할 수 있는건 당연한 거 아닌가 싶겠지만, 일본에서는 1984년 이전까지 비금융권 기업이 펀드에 투자하는 것은 불법으로 규제해왔다. 회사의 본업을 망각하고 돈놀이에만 올인하면 안 된다는 이유. 한국에서는 불법이었던 적이 없다.[11] 위 50대기업 시가총액 표에서 1위인 NTT항목을 보라. 2위와는 아예 자리수부터 다른, 몇 배 이상 큰 것을 알 수 있다.[12] 시장 가격 10억짜리 땅을 가지고 있으면 20억까지 대출해 준다는 소리. 물론 은행들이 '언젠간 두배가 될 거니까 그 정도쯤 쳐줘도 됨'하는 생각에서 이런 담보율을 설정했다고 단순화시킬 수는 없지만(타 은행과의 경쟁, 실제 파산 비율 등도 고려해야 한다), 요는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거다.[13] 농촌 제외. 후쿠오카까지만 가도 당시 소득 대비 큰 거품이 끼었다고 보기 어렵다.[14] 당시 토지 가격을 보자면, 미나토 구는 평당 1,900만엔, 스기나미 구는 350만엔을 기록했다. 오사카는 평당 200만엔, 나고야는 85만엔, 후쿠오카는 45만엔까지 치솟았다. 긴자는 평당 1억엔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사실 2015년에 와서는 별로 비싸다는 생각이 안 들게 된다. 런던의 벨그라비아, 나이츠브리지만 해도 평당 최소 2,500만엔은 하기 때문에... 단 물가상승률을 무시하지 말자. 우리는 25~30년 전 가격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30년 동안 지속적인 디플레이션을 겪었기 때문에 실질 가치는 명목상의 1900만엔보다 훨씬 높았다.[15] 미나토구 중에서도 아자부나 아오야마 같은 곳은 평당 5000만엔에 육박했다. (출처:상기한 KBS스페셜)[16] 타마지역, 이 지역은 한국으로 친다면 1970년대-1980년대 강남이나 노원구 비슷한 지역이라고 볼수 있다.[17] 하지만 버블 붕괴 후엔 상황이 반전되어서 상속을 받았다가 거액의 세금을 무는 바람에(이 경우에는 버블 시기에 재산 신고해서 서류상 재산은 빠방했는데 막상 상속받을 시기가 되자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애물단지가 되어 버리고, 설사 부동산이 팔리더라도 엄청나게 손해를 보기 때문에 세금 감당도 못할 지경이 되면서 결국 파산하게 되는 것) 파산하는 일이 잦아서 상속을 포기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고 한다.[18] 한국과는 다른 것이 한국에서는 이런 상황이면 공공기관에서 토지 수용 후 전면 개발한다. 공공의 수용이므로 감정가의 2배 이내에서 수용가가 결정된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공공의 수용이 아닌 민간이 토지를 다 사야 하므로 개중에 몇몇 알박기 등으로 인해 토지가가 무작정 올라갈 수 있다.[19] 현재 팔리는 메르세데스-벤츠 C클래스의 전신이다. 당시 상대는 BMW의 3시리즈.[20] 토요타의 준중형 세단. 한국에서 흔히 쓰는 "강남 쏘나타"와 비슷한 표현이다.[21] 연간 노동시간이 2,200시간 정도를 찍어줬었다. 참고로 OECD 노동시간 2위라는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이 2016년 2113시간이다.[22] 지금은 망해서 이케아 일본 1호점이 생겼다. 그러나 이 이케아는 엄밀히 말해서 최초의 일본 1호점은 아니다. 일본에서 한번 실패를 겪은뒤 2000년대에 재진출해서 리부트로 1호점을 다시 세웠는데 공교롭게도 자우스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23] 지브리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24] 물론 버블 당시의 일인지라 버블시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현재의 젊은 층들은 수록되어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25] 대표적으로 블레이드 러너(1982년)에서는 2019년의 LA의 길거리 음식으로 일본 음식이 자연스럽게 팔리고 있으며, 가게 주인도 일본인이고, 전광판 광고로 기모노 입은 일본인이 나온다. 또한 영화 백 투 더 퓨쳐에서도 미래(2015년)에 기업은 일본 기업 외에는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것들의 영향으로 SF의 상류층 집은 일본적인 인테리어나 정원 등을 가지는 모습이 종종 묘사된다. 데몰리션 맨에서도 지배층은 일본의 문화를 향유하고 있으며, 헤일로 리치에서도 시노비에트라는 대기업의 빌딩의 인테리어가 일본풍이다.[26] 물론 거품 꺼진 뒤에는 예술품 가격도 폭락했다.[27] 당시 돈 좀 있다 싶은 부동산 회사는 입구부터 명화를 사장실까지 걸어놨다고 한다. 미국인이 사업차 와서 이를 보고 뒷담화를 까기도 했다고 한다.(...)[28] 이명으로는 오사카의 흑녀, 거품 부인(Bubble lady).[29] 그녀의 저택에 들어간 인물들 중에는 일본산업은행 총재와 같은 거물도 있었으며, 이외에도 JP모건 일본 지사, 야마이치 증권 등과 같이 내로라하는 증권사에서도 직원을 파견했다.[30] 2018년 4월 1일 기준, 한화로 따지면 약 10조 6300억원이다. 물가상승배수로 2018년 2월 기준으로 현재 가치로 따지면 무려 25조 7000억원이나 되는 엄청난 금액이다. [31] 일본 굴지의 구인구직정보 회사인 리쿠르트의 자회사. 역시나 부동산사업을 하던 곳이다.[32] 당시 주식을 받았던 사람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NTT 회장,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회장 등 약 50명이었다.[33] 당시 총리를 대신해서 현금을 받은 비서는 자살했다.[34] 다만 거품 붕괴의 후유증이 오래 간 만큼, 그 충격도 서서히 나타나서 1995년까지는 분위기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위협론이 아직 힘을 얻던 시기이기도 했고.[35] 그 시기에 한 명문대생이 취직하지 못한 것을 비관해서 전철역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일어나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린 적도 있다.[36] 실제로 베이비붐 에코세대들이 본격적으로 출산에 돌입할 시기가 출산율이 가장 낮은 시기였다.[37] 우리나라의 중, 고등학교처럼 생각하면 편하다. 우리나라는 군대 때문에 대학 졸업시기가 엉망진창이 되서 다소 약하지만 군의무가 없는 일본은 그렇지 않은 것. 입사담당자가 고등학교 1년 휴학한 학생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믿고 뽑을수 있겠는가?[38] 물론 그 대신에 일본은 사회 전반적으로 다른 방식의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는 것에 한국보다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긴 하다. 졸업 이후 뭔가 예술을 하고 싶다거나 사회운동을 하고 싶어서 취직을 하지 않고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나서 취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취업한 회사는 일반적인 이미지의 회사보다는 조금 크리에이티브한 일자리, 혹은 그만큼 이직이 잦은 일자리들이다. 소위 말하는 '리크루트 수트' 입고 돌아다니는 회사원의 인생과는 많이 다른 것.[39] 고용시장을 파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들만 보더라도 고용률이 70%를 넘으며(평균 65% 수준. 그 이하도 수두룩하다) 비정규직 비중도 평균 수준(근데 이건 비정규직의 정의가 기관마다 학자마다 차이가 크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청년 고용률도 정확히 평균. 거의 모든 면에서 한국보다 훨씬 낫다. 다만 가계 소득을 기준으로 하면 얘기가 조금 달라지는데 이는 가구구조의 변화, 고령화가 제일 큰 원인이지 노동시장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OECD/중위 가처분 소득 참고. 물론 국가 경제의 문제라고 본다면 맞지만.[40] 하지만 일본의 대졸자의 구직율 수치인 90퍼센트라는 숫자를 여과없이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마치 한국의 여느 지방대가 취업률 90프로라고 자랑하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는 맥락이 그 이유이다. 참고로 일본은 한국보다 더욱 극심한 학벌주의 사회이다. 다만 그렇다고 그게 우리나라만큼 문제시 되거나, 딱히 실제로도 비명문 출신의 생활 그 자체에는 지장이 없는데, 일본은 학벌주의가 더 심하고 한번 취업 못하면 대기업/중견기업 정직원 입사는 끝장나는 것이긴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하면, 정직원 입사고 리쿠르트고 나발이고 아예 기업 정직원 입사 자체를 신경끄고 프리터나 비정규직으로 살기로 작정한 경우에는 우리나라보다 생활여건이나, 그 노후가 훠어어어어얼씬 좋다. [41] 그에 덧붙여, 2017년 대졸자의 취업률은 97.6%이다 이러니 완전고용이라는 말이 나오지..[42] https://news.mynavi.jp/article/20170519-a164/[43] 이 때문에 투자 대비 수익이 안 나오는 중동,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손 떼고, 중국 견제에 전념하고 있다. 아니, 그 이상 할 여력 자체가 없다.[44] 이 때가 배경인 만화[45] 이 때를 컨셉으로 잡은(...) 시리즈[46] 이 극장판이 제작된건 잃어버린 10년이 끝나기 전이었고 주 스토리는 '잃어버린 10년'에 실망해 상상하던 '꿈의 21세기'와는 다른 모습이 펼쳐졌기에 20세기가 그리웠던 어른들이 다시 20세기로 추억을 재현하려 하나 노하라 일가가 20세기에 취해서 미래를 포기하기보단 가족과 함께 21세기에서 살기 위한 사투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버지의 회상 또한 이 극장판의 명장면, 아니 일본 애니메이션 중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회상이기에 더욱 깊은 감명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극장판은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19위에 꼽히는 힘을 보여주었다. [47] 원래는 마르코 폴로 이후 유럽인들에게 황금이 넘치는 나라 지팡구라는 환상 속의 지역으로 알려졌지만, 정체는 바로 일본. 사실 초가집과 볏짚을 황금으로 보고 착각한 것이지만, 1980년대에는 그게 빈말이 아니라고 할 수준으로 돈이 썩어 넘쳐났다.[48] 신격호가 도쿄 땅 50평 팔아서 세웠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물론 실제로는 일본 롯데의 주력 계열사들을 모두 동원한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였다. 다만 이때 롯데가 엄청나게 성장한건 사실. 80년대 당시 신격호는 일본 4위의 부자였다고 하며, 실제로 당시 세계 부호 리스트에서 일본의 10억 달러 이상 자산가에 나와있다. 참고로 같은 시기 한국은 이병철정주영만이 그 리스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