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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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이후 현장 검증에서 김재규김계원(왼쪽에 묶여있는 안경 낀 인물)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모습. 사건 관련으로 제일 유명한 사진일 듯하다.


당시 사건 관련 TBC의 라디오 뉴스 보도.

1. 개요2. 사건의 전말
2.1. 사건 직전2.2. 밤하늘을 가른 총격2.3. 후속 조치2.4. 결과
3. 원인
3.1. 사회3.2. 개인3.3.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재조명
3.3.1. 안동일 변호사의 증언3.3.2. 김계원의 증언3.3.3. 정보부 수사 국장의 진술3.3.4. 전기영 목사의 증언3.3.5. 학계의 해석3.3.6. 그 후
4. 계획 관련5. 트리비아6. 어록7. 사진8. 창작물9. 관련 인물
9.1. 가해자9.2. 사망자9.3. 생존자9.4. 후속 조치

1. 개요[편집]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대사건.[1]

1979년 10월 26일[2] 저녁 7시 40분경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3]에서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교과서에서 가장 많이 퍼진 표현은 "10.26 사태 or 궁정동 사건". 나이드신 할아버지 세대는 '궁정동 사건'으로 많이들 알고 있다. 한국 전쟁을 '육-이오'라고 하듯이 이를 '십-이륙'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 여담이지만 12.12 군사반란의 경우 '십이-일이'라고 읽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이걸로 보아 딱히 날짜를 읽는데 규칙성은 없는 듯 보일 수 있으나, 단지 우연히 12라는 날짜가 반복되어 부르기 쉽게 같은 단어를 반복한, 예외적인 경우로도 볼 수 있다.

1972년에 시작된 유신 체제는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경제적으로 누적된 성장 드라이브 정책의 후유증과[4] 제2차 석유 파동의 여파로 경제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1인 장기집권에 의한 국가병영화식 강압 통치,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불화 등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197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이라는 반정부 시위의 형태로 폭발하면서 박정희 정권에 큰 위기가 닥치게 된다.

그리고 이 부마민주항쟁을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방식을 놓고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더욱 커지던 와중에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의 만찬 도중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차지철 경호실장을 발터 PPK 권총으로 저격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설이 있다.

  • 김재규는 애초부터 민주주의에 관심이 많던 사람으로, 본인 스스로 법정에서도 밝혔듯 독재국가로서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거사했다는 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애초 유신독재가 시작될 무렵부터 김재규는 박정희에 대한 미련을 접었는데, 그렇게 계속 망설이며 세월이 흐르던 중 부마민주항쟁이 터지고, 대응방식에 있어 박정희가 온건파인 자신보다 강경파인 차지철의 손을 들어주자[5] 국가 규모의 큰 혼란이 올 것을 우려해 거사를 실행했다는 것이다.

  • 차지철과 갈등을 빚던 김재규가 차지철을 제거하면서 박정희도 같이 살해했다는 설. 이 시기 차지철과 김재규의 상호견제는 극에 달해있었는데, 이러한 암투 속에서 박정희가 차지철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자 결국 자신이 밀렸다고 판단한 김재규가 10.26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차지철은 성격이 안하무인이라 박정희의 총애를 받자 경호라는 본연의 임무를 넘어서서 기타 영역에까지 손을 뻗치는 월권 행위를 일삼았는데, 이에 김재규 등 측근들이 차지철의 월권을 경계하는 충언을 했지만 그때마다 박정희는 차지철을 오히려 두둔했고, 도리어 차지철 앞에서 김재규에게 면박을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차지철의 횡포는 더 심해졌고, 때문에 거사했다는 것. 이는 과거 그의 제자였던 이만섭이 추정하는 설이기도 하다. ##[6] 그 외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도 김재규가 거사 직전 " '대위밖에 안 지낸 자식이 장군, 장관 알기를 우습게 여겨! 내가 하는 일을 모조리 사사건건 방해하며 각하께 바르게 보고하지도 않고...' 하고 말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7]

  •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면 10.26이 사전계획된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분노를 못 이겨 충동적으로 저지른 우발적 살인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김재규가 거사 직후 중정이 아닌 육본으로 가는 등 김재규의 행동이 계획적이라기엔 너무 어설펐기 때문이다. 김종필도 10.26의 발단은 차지철과 김재규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며, 법정에서 김재규가 민주화투사로 둔갑되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8] 하지만 이미 술자리 이전부터 심복들에게 "오늘 밤 거사하겠다"라고 말하고, 박정희 암살 이후에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면 단순 우발적 암살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후 행동의 어설픔들은 거사 직후의 당황, 거사 직전까지 자신의 최측근들에게조차 속내를 숨겼던 내부사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아니겠냐는 의견도 있다.

  • 미국의 음모라는 설. 김재규가 CIA 요원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부터, 미국에 포섭된 주변 인물들이 그를 그렇게 몰아갔다인셉션는 버젼까지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있다. 미국의 동기로는 “박정희가 미국의 의사를 거스르며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기 때문에 제거했다”는 것이 단골 레퍼토리.[9] 하지만 당연히 신빙성 없는 음모론일 뿐이다.


보통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차지철과의 갈등 등의 요소들이 일정 부분 다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미국 음모설은 후술되어 있지만 근거가 희박하다.

당시 김재규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부마항쟁을 전국의 대도시로 뻗어나갈 가능성이 높은 민란으로 파악하여 박정희에게 보고했지만, 박정희와 차지철은 북한 간첩의 개입 내지는 김영삼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불순한 사건으로 호도하고 대량 학살을 예고하는 언행을 했다는 것이다. 이때 차지철의 말이 후덜덜하다. "캄보디아킬링필드라면서 3백만을 죽였는데, 우리야 1~2백만 죽인다고 해서 뭔 일 있겠습니까?"[10] 즉, 부마민주항쟁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될 경우, 군부대를 동원하여 강경 진압에 의한 유혈사태가 터질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11]

법정 진술에서 김재규는 민주화를 많이 언급했으며, 실제 1979년 "자유민주주의"라는 서예를 쓴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김재규가 그 이전까지 박정희와 그 정권에게 충성적이었던 면모와는 반대되는 행보이기에 실제로 그의 발언이 사실인지 여부는 불명확하다는 주장도 있으나, 김재규가 박정희 정권 내에서도 온건파이긴 했다.[12] 또 그의 법정 진술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본인만의 신념과 가치관이 오랜 시간 적립된 것이 아니면 하기 힘든 말을 의외로 많이 한다.

그럼에도 김재규가 과연 민주주의 이행에 대해 관심이 있었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진보적 사회운동가 백기완은 "당시는 박정희 유신 독재를 타파하기 위한 민중항쟁이 거셌고, 박정희 내부 권력의 모순이 더 격화되어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조그마한 사건일 뿐이며 민주화운동의 본체, 기본적인 흐름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출처.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10.26 사건 현장에 있었고 당시 권력의 내막을 알고 있는 비서실장 김계원은 평소 김재규의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은 강했다고 주장한다. 출처. 또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김학호와 운전담당 사무관 유석문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에 박정희에 대한 김재규의 충성심은 의심받지 않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출처. 그러나 이와 반대로 대구가톨릭대 전임 교수였던 최상천은 각종 문헌과 증언을 근거로 김재규의 행동이 진심이라고 주장했다. 출처.

김재규는 10.26 사태 이후 전국으로 비상계엄령확대를 서둘렀고(출처), 1980년 신군부가 추진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5.18 민주화운동을 촉발시켰던 것처럼, 전국으로의 계엄령 확대는 전국적인 저항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당시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 따르면 김재규는 군지휘관들을 중심으로 입법, 사법, 행정권을 총괄하는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육군참모총장이 부위원장을 맡은 뒤 계엄군을 장악하여 무력으로 사태를 강제로 정리하고 정권을 장악할 계획이었다고 판결을 내렸으나(출처 1, 출처 2), 김재규 본인은 이에 대해서 사리사욕의 의사 없이 유신 잔재 5개월을 청소하기 위함이라고 부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유신 정권의 일원들은 물론 신민당과 민주화 세력들 또한 김재규의 계획에 동의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낮은 계획이긴 했다.

JP의 경우 10.26 직후 그는 민주공화당의 총재로 추대되었는데, JP는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던 시절, 청구동 가택수색까지 당한터라[13] 김재규에게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다.# 거기다 10.26 이후 JP는 YS, DJ과 함께 개헌과 민주회복 이행에 공감하고 협조해나갔던 행보로 미루어보았을 때, 김재규의 구상에 따랐을지도 의문이 존재한다.##

혹자는 박정희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김재규가 일본 해군 비행 연습생 출신[14]임을 들어 종전 후 30여 년 만에 한국에서 재현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의 산물이란 드립을 치기도 했다(...).

아무튼 이 10.26 사건으로 말미암아 핵심인물이 제거되었으니 자연히 유신 체제는 붕괴되었다. 다만 이후 군부의 사조직 하나회 세력을 업은 전두환이 등장해 12.12 군사반란으로 새로운 군부독재를 불러온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김재규 한 개인의 행위로 인해 유신 체제가 붕괴된 것은 단견이며, 유신 체제는 이미 내부 권력의 모순과 사회 구조적으로 붕괴의 전조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김재규 한 개인의 행위는 민주화운동의 큰 흐름과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과 이를 부정하는 주장이 대립하기도 한다. 다만 2010년대 들어선 재평가 여론이 좀 더 우세한 듯.

이 사건에 대한 김재규의 전반적인 입장 표명은 김재규/항소이유 보충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2. 사건의 전말[편집]

2.1. 사건 직전[편집]

1979년 10월 26일 아침,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날 박정희는 충청남도 당진군에서 열린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완공식에 참석할 계획이었는데, 이 중 당진송신소는 대북방송 송신 기능 때문에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던 보안시설[15]이었고, 중앙정보부의 수장인 자신도 박정희와 같이 완공식(삽교천 포함)에 참석하려고 전화를 건 것이었다. 하지만 차지철은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 중정부장까지 자리를 비우면 어쩔 것이오? 김 부장은 그냥 서울이나 잘 지키고 있으시오"라며 단칼에 끊어버렸다. 그리고 이것이 안 그래도 차지철과의 사이가 최악이었던 김재규를 분노하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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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삽교천에서.[16]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와 차지철은 일정대로 삽교천과 당진송신소 완공식에 참석한 뒤 오후 2시 반경에 청와대로 돌아온다. 그리고 오후 4시 경, 박정희는 차지철에게 저녁에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경호실장 등과 젊은 여자들이 참석하는 연회, 즉 대행사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통해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약칭 안가) 측에 대행사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이 안전가옥은 대통령과 비서실, 경호실, 중앙정보부의 관계자 일부만 아는 보안시설이라, 당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장군이나 보안사령관 전두환도 암살 사건 수사를 개시하고서야 그 존재를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청와대 경호실로부터 대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퇴역 해군 보병대령[17] 박선호는 주방에 연회를 준비하라고 지시한 후 대행사를 도울 여성을 섭외[18]했고, 이 날 섭외된 여성은 당시 모델 겸 배우[19]였던 여대생 신재순가수 심수봉이었다.

오후 4시 10분 쯤 차지철은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오늘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라고 연락했고, 김재규는 궁정동에 도착한 후 안전가옥 집무실에서 오후 4시 40분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육군대장에게 전화로 "오늘 궁정동에서 저녁이나 하면서 조용히 시국 얘기 좀 나누자"며 그를 초대한 뒤, 중정 제2차장보(국내담당) 김정섭을 저녁 6시 30분까지 궁정동 안가로 오도록 했다. 이날 저녁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가 대행사에 호출되었다는 핑계[20]를 대었기에, 대신 연회장 옆의 본관 식당에서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을 같이 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21]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놓았다. 김재규의 살의(殺意)는 이때부터 발동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김계원의 육사 선배인 최영희가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언제 각하가 부르실 지 모르니 (저녁) 5시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는데,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 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최영희의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

오후 5시 20분, 비서실장 김계원이 궁정동에 도착했다. 안가 앞마당에서 박정희 일행을 기다리던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부산에서 직접 확인한 민심에 대해 얘기하면서 "부마항쟁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이다"라고 강하게 부르짖었다. 그리고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차지철이 부마항쟁을 신민당이 개입한 일부 불온 세력의 주도로 벌어진 사건이라 호도했기 때문이라고 그를 심하게 비난하며, "이놈(차지철)을 오늘밤 해치워 버릴까요?" 라는 등 격한 반응을 보였다. 평소 3살 연하인 김재규를 친동생처럼 아끼던 김계원은 "나도 중정부장을 해봐서 알지만 김부장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내일 박승규 민정수석의 대통령 보고 시에 차지철의 월권에 대해 각하께 보고하도록 하겠다" 면서 김재규를 달랬지만, 김재규는 "그런 뜨뜻 미지근한 방법으로는 안 된다. 확실히 해야 한다" 라고 답했다.

  • 김재규와 김계원이 친밀한 관계가 된 사연은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재규가 당시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재직할 때 신임 총장으로 김계원이 취임했고, 그 무렵 마산 시내에서 해군 장교들과 회식 후에 부대로 복귀하던 김재규의 지프가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김계원은 벼랑 밑에서 중상을 입은 김재규를 직접 업고 올라와 병원으로 후송시켰고, 이 일을 계기로 둘은 호형호제 하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 이후 김계원은 예편 후 1969년 10월 김형욱의 후임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취임했으나 불과 1년 2개월 만인 1970년 12월,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인 신민당의 선거 운동에 미온적으로 대응했다며[22] 이후락으로 경질당했고, 이후 수 년간 중화민국 대사를 역임한 뒤 귀국하여 10대 총선에 출마하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포기하자 김재규가 그를 김정렴의 후임 비서실장으로 천거했다고 한다. 이 때 김계원은 박정희에게 "저는 (비서)실장 그릇이 못 됩니다" 라고 사양할 의사를 보였지만, 박정희는 "실장 일은 안해도 돼. 나랑 술친구 말동무나 해 주면 좋겠네"라고 말했다 한다. 그만큼 집권 말기의 박정희는 판단력이 흐려져 있었다는 점을 시사할 만한 일화인 것이다.


비슷한 시각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평소 무좀으로 고생하던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 포병 대령은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어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다고 전해진다. 이 구두는 그날 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고 다시는 돌려받지 못하게 된다.

저녁 6시경, 박정희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김재규가 맞이하여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운명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이 날, 만찬에서 은 박정희와 김계원이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으로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하였다. 연회 당시 술 이외의 만찬 메뉴는 에 재운 인삼송이버섯 구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도라지나물, 전, 생채, 편육 등으로 의외로 평범했지만, 한 상에 30접시 정도가 놓인 호화상이었다. 또한, 이때 유명해졌던 술로 당시 박정희가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이 놓여 있었으며, 현장검증 사진에도 이 술이 재현된 상 위에 올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시바스 리갈 시리즈 중에서는 12년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18년산은 1997년부터 생산을 시작했고, 25년산은 1920년대까지 생산했다가 미국 금주법의 타격을 받아서 생산을 중단했고 2007년에야 생산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 고건국무총리와 이필재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편집위원은 박정희가 평소 고급 위스키로얄 살루트도 즐겨 마셨다고 하며, 김연광 조선일보 편집장이 전한 고건 전 총리의 회고록 중에는 박정희는 그 로얄 살루트를 아껴 먹었다는 내용도 있다.

    『그날은 朴대통령께서 경호원을 부르더니 「내 침대 머리맡에 양주가 한 병 있는데 가지고 오라」고 해요.
    경호원이 가져왔는데 바로 이 「로얄 살루트」야. 朴대통령이 혼자 좋은 술을 마셨다는 게 쑥스러우셨는지 「朴浚圭(박준규·당시 공화당 당의장 서리)가 미국 갔다 오면서 한 병 선물로 사왔어. 잠 안 올 때 한 잔씩 아껴먹었어.」라고 해요.
    병을 들어보니 3분의 2쯤이 남아 있었어요. 그 자리에 10명 쯤이 있었는데 한 잔씩 돌았어요.
    처음 먹어봤는데 술 맛이 기가 막혀. 다들 「한 잔은 더 마실 수 있겠구나」 군침을 삼켰어요.
    그런데 金桂元(김계원) 비서실장이 「각하, 남은 술은 침실에 갖다 두겠습니다」하고, 술병을 빼앗아 경호원에게 건네줬어요.
    朴대통령이 「어이」 하고 경호원을 한 번 부르기만 하고, 「술병 여기에 놔둬라」는 말씀을 안 하시는 거야.
    얼마나 야속하던지 말이야(웃음). #

이 때문에 실제 만찬에 오른 술도 시바스 리갈이 아니라 로얄 살루트가 아니냐는 설도 있다. 시바스 리갈은 박정희의 이미지를 위해 이후 중앙정보부 측에서 갖다 놓아서 조작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당대에는 시바스 리갈도 대단히 비싸고 귀한 술이었고, 정 이미지를 위해서였다면 차라리 소주나 막걸리 병을 가져다 놓은 것으로 충분하다는 반론도 있다.

  • 당시 안가 요리사였던 이정오는 이날 식사로는 비빔밥, 떡만두국, 칼국수를, 술안주로 잡곡무침, 전복무침, 송이버섯 구이, 장어구이, 불갈비를 준비했고, 술은 막걸리위스키 등이 나왔으며, 요리 재료는 당일 오후 5시경 중정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과 안가 경비원 방석상, 이광철이 동대문시장 등을 돌며 약 6만원 어치[23]를 구입해 왔다고 진술했다. 막걸리는 박정희 전용 양조장으로 알려진 고양군 소재 능곡 양조장에서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이 평상시처럼 공수해왔지만, 그날 사온 막걸리는 연회장엔 들이지 않고 김용남과 경호관 김용섭이 나눠 마셨다고 한다.

  • 또 다른 안가 요리사였던 김일선은 "(박정희는) 콩나물밥을 좋아했고 대가리 뗀 멸치참기름에 볶은 것을 술안주로 즐겨먹었다"라고 회상하였다(출처: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5년 5월 29일 (일) / 제 96 회, 10.26 궁정동 사람들 참고).

  • 당시 언론에서 말했던 사치스러웠던 연회장은 아직 개장을 하지 못했던 연회장으로, 실제 연회와 암살이 벌어진 나관의 시설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창 연회가 진행되는 와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신민당 공작(김영삼을 총재직에서 몰아내고 정운갑을 총재 대행으로 올리려던 정보부의 공작) 어떻게 되었는가" 라고 묻자 김재규는 "공화당에서 신민당 의원들이 제출한 사표를 일괄 반려하겠다고 발표하는 바람에[24] 때문에 당직에서 사표 내겠다던 (신민당)의원들이 전부 강경하게 돌아서면서 다 틀렸다. 아무래도 신민당 주류들이 강하게 나와서 당분간 시끄러울 것 같다" 라고 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차지철은 "신민당 놈들 중에 국회의원 하기 싫은 놈 하나도 없다. 까불면 학생이고 신민당이고 그까짓 놈들 전부 탱크로 싹 깔아뭉개야 한다" 는 살벌한 말을 뱉었고, 박정희는 "오늘 삽교천은 공해도 없고 공기도 깨끗하던데, 신민당은 왜 그 모양인가" 라며 혀를 찼다. 아니 삽교천하고 신민당하고 무슨 상관이람? 이에 김재규는 "신민당은 주류 중심으로 강경하게 전환되었고 정운갑은 비주류가 밀고 있는데 국민들이 신민당 비주류를 사쿠라로 보고 있어서 힘이 없다. 주류의 협조 없이는 정운갑 대행체제 출범이 불가능하다" 라고 설명했지만, 차지철은 또다시 "그깟 새끼들 싹 밀어버리겠다" 라며 과격한 소리만 되풀이했고 혼잣말로 "요새 정보부는 부마사태 처리도 그렇고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 라고 비아냥거리면서 김재규를 계속 코너로 몰고 갔다.

이런 살벌한 상황을 무마 시키려고 김계원 비서실장이 평소 칵테일을 좀 할 줄 아는 김재규에게 위스키로 칵테일 만드는 방법을 묻기도 하고 오늘 삽교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는 등 화제를 전환하려 했지만, 차지철이 수시로 김재규에게 시비를 걸어대는 바람에 상황을 전환 시키기에는 소용이 없었다.

저녁 6시 30분쯤 신재순과 심수봉이 연회장에 들어오면서 이런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졌고 취기가 오른 박정희가 김계원을 도승지, 김재규를 포도대장이라 부르면서 술을 권했지만, 이미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김재규는 연회장을 나와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 식사 중이던 정승화 장군에게 가서 "갑자기 각하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다. 김 차장보가 국내 정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와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시라. 끝나는 대로 곧 오겠다"라며 해명을 한 후, 집무실 책장에 숨겨놓은 자신의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김재규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박선호를 궁정동 안전가옥 마당으로 불러내어 아래와 같이 명령을 내렸다.

김재규: (호주머니의 권총을 보이며)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일이 잘못되면 자네들이나 나나 죽은 목숨이다. 오늘 저녁, 내가(차지철을) 해치우겠다.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들을 처치하라. 지금 본관에 육군참모총장과 2차장보도 와 있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박선호: 부장님, 각하도 포함됩니까?
김재규: 그래.
박선호: 오늘은 경호원이 일곱 명[25]이나 와 있고 날이 좋지 않습니다. 다른 날을 고르시지요.
김재규: 안 돼, 오늘 해치우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된다. 똑똑한 녀석 세 놈만 골라 나를 지원하라. 다 해치워 버려. 믿을 만한 놈 세 놈 있겠지.
박선호: 예,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장님 30분만 여유를 주십시오.
김재규: 30분은 너무 길다.
박선호: 30분이 필요합니다. 30분 전에는 절대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김재규: 알았다.


그리고 김재규는 박흥주 대령을 향해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라고 중얼거리고는 권총이 든 호주머니를 탁 치면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 대령은 처음엔 크게 놀랐지만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고, 같은 해병대 출신으로 박선호의 신임을 받던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 예비역 해군 보병하사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을 암살조에 합류시켰다. 유성옥은 육군 중사 출신으로 제대 후 중정 운전사로 취직했다가 박선호의 도움으로 1급 근무지인 안전가옥로 배치되었으며, 그 해 11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김재규는 세 명을 차출하라 했으나, 어째선지 박선호는 이기주와 유성옥 두 명만 차출했고, 결과적으로 거사를 치르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추후 동원된 안가 경비원 김태원은 이기주를 따라다니며 차지철과 운전수,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만 맡았다.

현장에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은 안가 나동 주방 근처에 세워둔 의전과장 차량인 제미니 승용차 내부에 숨어서 연회장에서 총소리가 나길 기다렸다. 한편 박선호는 안가 경호원 대기실에 있던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과 부처장 안재송을 처치할 준비를 했지만, 사실 박선호는 이 둘을 사살하기 보다는 잘 설득하여 어떻게든 죽이지 않고 살려볼 속셈이었다. 정인형은 해병장교 동기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안재송 또한 해병대 후배였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궁정동 안전가옥에는 정인형과 안재송 외의 차지철의 청와대 경호실 소속 수행원으로 김용태 특수차량 운행계장[26], 박상범 경호계장, 김용섭 경호관이 있었다. 이들은 평소의 관례대로 박정희 경호는 중정 경비원들에게 맡긴 채 나동 주방에서 안가 직원들과 같이 맥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고, 정인형과 안재송은 경호원 대기실에서 별도로 저녁식사를 한 후 AFKN TV 방송[27]을 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 당시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행사가 있으면 박정희 경호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안전가옥 경비원들이 담당하고 대통령경호실 소속 경호원들은 별도 장소에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28] 청와대 경호실 내에서 경호원들이 사실상 무장해제 당하는 안전가옥의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고, 이런 안전가옥의 특성이 박정희의 암살을 초래한 한 요인일 수도 있겠다.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에게 명령을 내린 후 연회장으로 돌아왔을 때 박정희는 TV 뉴스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을 보고 있었는데, 다음 뉴스로 윌리엄 글라이스틴 미국 대사김영삼을 만났다는 내용이 나오자 심사가 뒤틀린 박정희는 "이미 총재도 아닌 자를 미국 대사가 왜 만나는가" 라면서 김재규를 향하여 "정보부에서 부마사태 사진 뽑을 때 깡패들 사진만 하지 말고 진짜 소요 장면을 크게 찍으라"며 퉁명스럽게 지시했다. 그러고는 "브라운 장관[29]이 방한하기 전에 김영삼을 구속기소 하라고 했지만 류혁인(정무수석)이 말려서 그만뒀는데 안 되겠다. 법대로 하겠다는데 왜 미국 놈들이 간섭하는가" 라며 강한 어조로 몰아붙였고, 김재규는 "이미 (국회에서)제명당한 김영삼을 구속 시킨다면 국민들은 그를 두 번 죽이는 것으로 인식할 겁니다.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셔야지요" 라고 직언하자 짜증이 난 박정희는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신민당 놈들 비행 조사서만 쥐고 있으면 다인줄 아는가. 잡아 들일 놈들은 확실히 잡아 들여야지..." 라며 김재규를 다시 심하게 질책했다. 박정희의 호통에 김재규는 "정치는 대국적으로 해서 상대방에게도 구실을 주고 국회에 나오라고 해야지, 그러지 않고서야 (신민당은)절대 이번 회기에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해외 여론이 악화되는 것도 감안하셔야 합니다" 라고 받아쳤다.

그때까지 박정희의 말에 "예, 예" 라는 식으로 짧게 답하던 김재규가 이렇게 말대답을 한 것은 지시한 거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기별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박정희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2.2. 밤하늘을 가른 총격[편집]

저녁 7시 38분경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다는 소식[30]을 들은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이 때, 박정희는 양옆에 끼고 있던 심수봉, 신재순과 함께 혼성 듀오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를 부르고 있었으며, 김계원과 차지철이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심수봉이 기타를 연주하고 신재순이 부르는 것을 박정희가 따라 불렀는데, 신재순이 중간에 한 번 틀려서 다시 부르던[31] 중, 1절 후렴을 막 시작하려는 차에 7시 40분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발터 PPK를 꺼내어 노래를 끊으며 차지철을 향해 이 말을 외치며 제1발을 발사했다.

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


김재규의 제1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시켰고, 갑자기 저격당해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김 부장, 왜 이래!" 라고 외쳤다. 박정희가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 라며 소리치자, 김재규는 "야, 너도 죽어봐!" 라고 받아치며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에 제2발을 발사했다. # 뒤이어 당황하는 차지철에게 김재규는 제3발을 쏘려 했으나 발터 PPK가 격발 불량을 일으켜 발사되지 않자 밖으로 뛰어나갔고, 차지철은 화장실로 피신해 버렸다. 그리고 우측 흉부 관통상을 입은 박정희는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정좌하고 있다가 신재순이 "각하! 괜찮으십니까?" 라며 부축하려 하자, 박정희는 "난 괜찮아..." 라고 중얼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 김재규가 총을 쏘기 직전에 한 발언은 위에서 언급한 "너 건방져!" 가 아니라는 설이 존재했다. 김계원에게 "각하를 똑바로 모시라" 라고 충고한 후 박정희에게 "각하, 차지철 저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라면서 발사했다는 게 2000년대까지의 다수설이었다. 이 발언은 신재순의 진술에 의거한 것인데, 2011년 중앙일보 기사에서 신재순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 측의 강압에 못 이겨 위증한 것이라고 밝혔다.[32] 버러지 발언은 김재규의 암살이 정치적 목적이었음을 강조하여 내란죄 적용을 위해서(즉 우발적이거나 개인적 원한에 의한 단순 살인이 아니었음을 강조하려고)로 추정된다. 이 증언 차이는 의자매까지 맺으며 친밀했던 신재순심수봉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김재규의 총소리를 신호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 일행은 주방으로 달려가 식사 중이던 김용태 경호실 운행계장과 김용섭 경호관을 사살했고,[33] 그 과정에서 안가 요리사 이정오는 허리에,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은 어깨에 총을 맞는 부상을 입었다. 그 난리 중에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계장 박상범은 허벅지 관통상만 입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총을 맞고 쓰러질 때 주방 조리대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완전히 의식불명이 되어 죽은 것으로 오인되었고, 안가 경비원인 김태원의 확인 사살시 박상범 옆에 안가 직원 김용남이 부상을 입고 누워있어 사격을 포기한 행운도 따랐다.

그리고 박선호는 경호원 대기실에서 마른안주를 먹으며 TV 방송을 보고 있던 정인형과 안재송과 같이 있었는데, 김재규의 총소리를 듣고 정인형과 안재송이 뛰어나가려 하는 것을 박선호가 권총으로 제지하며 "움직이지 마라, 제발 우리 같이 살자!"라고 애원했지만 안재송이 총을 뽑으려 했고, 어쩔 수 없이 박선호는 안재송을 사살한 데 이어서 친구인 정인형도 살해하고 말았다.

박선호가 안재송, 정인형을 사살하던 시점에서 안전가옥 나동 전체의 조명이 나갔는데, 이는 지하 보일러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안가 영선(営繕)담당 강무홍이 총성을 전기 합선으로 착각하고[34] 차단기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밖에서 계속 이어지는 총소리와 고함소리에 합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강무홍은 다시 차단기를 올린 후 보일러실 문을 잠근 채 몸을 숨겼다고 한다. 만약 불이 조금 일찍 꺼졌더라면 박선호는 오히려 정인형과 안재송에게 역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한편 총기고장 때문에 밖으로 나간 김재규는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치하고 나온 박선호의 S&W M36 치프 스페셜[35] 리볼버를 넘겨받아 연회장으로 돌아왔고, 화장실에서 나와 경호원을 찾던 차지철은 김재규와 맞닥뜨리자 문 옆의 문갑을 치켜들고 거세게 저항했으나, 김재규는 차지철의 복부에 총을 발사하여 치명상을 입혔다. 차지철을 완전히 거꾸러뜨린 후 신재순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박정희를 발견한 뒤 # 우측 관자놀이를 향하여 마지막 탄을 발사했다. #

2.3. 후속 조치[편집]

10.26 사건은 계획적이라고 보기에는 우발적이었고, 준비가 엉성했다고 보기에는 치밀했다.

ㅡ백동림, 당시 합동수사본부 수사 1국장


박정희를 확인 사살한 김재규는 복도에서 공포에 떨고 있던 김계원에게 "나는 한다면 한다.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해주시오" 라고 언질한 후, 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먹고 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차에 태워 김정섭 차장보와 같이 안가를 빠져 나왔다. 김재규와 정승화, 박흥주, 그리고 운전사 유석문까지 4명이 탄 차 안에서 김재규는 정승화에게 "각하가 돌아가셨다"며 엄지손가락을 밑으로 내리는 제스처를 취하며 박정희가 죽었음을 알렸다.[36] 그리고 차안에서 김재규는 남산의 중앙정보부으로 갈지 용산 육군본부[37]로 갈지 우왕좌왕 하고 있었는데 이때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병력동원 차원에서 육군본부로 가는 것이 좋다고 권유했다. 이 의견에 박흥주도 찬성했고 김재규는 정승화의 의견을 받아들여 육본으로 차를 돌렸다.

그러나 이날 김재규의 판단은 최대 최악의 실책이었다고 아직도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김재규 입장에서는 자신의 거점인 중앙정보부로 가서 사건 수습과 뒷공작을 하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차지철과 박정희가 죽고 없는 시점에서 제 3의 실권자인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에게 대놓고 반대할 인사도 없고, 박정희 암살 사건에 간첩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대공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정보부가 조사를 전담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우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차지철이 박정희를 쐈기 때문에 내가 차지철을 사살했다'고 둘러대는 것도 가능했다. 사건을 목격한 생존자라고 해봐야 김재규 자신과 암살 공범인 정보부 요원들을 제외하면 연회장의 김계원과 신재순, 심수봉 그리고 안전가옥에 있던 일부 청와대 경호원과 안전가옥 직원들이 고작이었다. 이 중 김계원은 명목상 비서실장이긴 하지만 권력 순위에선 김재규에게 한참 밀린 데다 차지철에 대한 반감은 김재규와 마찬가지였으며, 신재순과 심수봉은 일개 대학생과 가수였고 나머지 직원과 경호원들도 이미 부상을 입거나 제압당한 상황에서 김재규와 중앙정보부가 이들을 입막음하는 것 정도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차지철은 평소 행적 때문에 박정희 살해 혐의를 뒤집어 씌우더라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상황이었다. 차지철 문서에도 나오듯이 차지철은 월권 행위에 박정희를 제외한 고위층, 심지어 김계원이나 김재규를 비롯한 장성 출신들에 대해 오만불손한 태도를 일삼았고, 권력 문제에도 마구 개입하며 김재규 뿐 아니라 건방진 새끼 차지철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일례로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수상이 방한하여 박정희와 일부 고위 인사들과 함께 골프를 치러 갔는데, 라운딩이 끝난 후 백두진 유신정우회 의장이 먼저 클럽 하우스의 샤워실로 들어간 뒤 시간이 지체되자 차지철이 샤워실 문을 두들기며 "왜 이렇게 늦는 거요. 각하 기다리시는데 빨리 나오시오. 이 늙은이가 뭘 이리 우물대는가. 늙으면 빨리 죽어야지..." 라며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

박정희 암살 직후에도 고위층 대부분은 차지철을 의심하는 상황이었다. 정승화는 김재규에게 박정희가 죽었다는 얘기를 접하자 처음에는 차지철이 암살한 것으로 생각했고, 그가 청와대 경호실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까지 시도한다고 생각하여 당시 수경사령관인 전성각 육군 소장에게 명령을 내려 수경사 병력을 장악하고 청와대를 원거리에서 포위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출처: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38] 그리고 이날 긴급 소집령을 받고 육군본부로 온 김치열 법무장관의 경우, 박정희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차지철) 그 놈의 새끼가 기고만장하며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 라며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분통을 터뜨렸고, 대부분의 고위급 인사들도 김 법무장관과 같은 인식을 가질 정도였다. 정부 고위 인사들의 차지철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즉 김재규가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차지철에게 박정희 암살 혐의를 뒤집어 씌울 명분이 있다 못해 넘치는 상황이었다. 차지철이 평범한 인물이어도 중앙정보부의 공작 능력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이렇게 평소 명분을 알아서 쌓아줬으니...

이처럼 김재규는 사건을 조작할 만한 능력도, 명분도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신의 본거지인 중앙정보부도, 간첩 사건 등으로 인맥이 있었을 법한 대한민국 검찰청이나 치안본부도 아닌, 자신과 가장 연관성이 없고 어쩌면 자신의 라이벌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육군본부로 향했다. 김재규 본인도 군 장성 출신이지만 중앙정보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군부와의 인맥은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니었고, 평소 박정희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군부가 섣불리 김재규를 지지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39] 동승했던 정승화 총장은 훗날 하나회 반란군이 김재규와의 연관점을 찾을 수가 없어서 내란죄가 아니라 내란방조죄라는 이상한 혐의로 겨우 엮을 정도로(물론 민주화 이후에는 무죄로 판결) 김재규나 적어도 이번 암살 사건과는 연관이 적은 사람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가 육본으로 간 것은 '나 잡아잡수' 하고 맨몸으로 호랑이 굴에 뛰어든 셈이었다. 이에 대해 아마 육본만 설득하면 다 해결될 거라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해석이 있다. 어차피 자신이 중앙정보부에 없더라도 부하들이 알아서 다 해줄 테니 자신은 육군본부만 잘 구슬리면 잘 해결될 거라 생각하고 그리 갔을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김진명소설 '1026'(이전 '한반도') 처럼 수많은 음모론을 낳았고, 반대로 김재규가 박정희 암살이 치밀히 계획된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일을 저질렀다는 주장도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당시 김재규가 매우 당황하고 행동을 서두른 증거 중의 하나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정승화가 있던 안가 본관으로 뛰어가면서 구두도 제대로 못 신었고, 이 때문에 김재규는 육본에 도착해서 박흥주 대령의 구두를 빌려 신어야 했다. 박흥주는 김재규에게 구두를 빌려준 후 운전수 유석문의 구두를 빌려 신었다.

김재규와 정승화가 육군본부 정문에 도착했을 때 해프닝이 하나 있었는데, 정승화 장군이 자신이 (육군참모)총장이라고 밝히자 육본 위병소의 헌병이 "총장님? 어느 대학 총장님이십니까?" 하며 정승화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게 당시 정승화는 옷차림이 군복이 아닌 사복 정장이었고, 타고 온 차도 자신의 관용 차량이 아니라 김재규의 차였다. 이후 다른 장교가 정승화의 신분을 알아채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박정희 암살 사건이라는 중대한 상황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어서 10.26을 다루는 매체에선 이 에피소드 또한 넣는 편. 이 에피소드는 정승화의 회고록에도 나오는 실제 이야기다.

육본 대회의실에서 열린 긴급 국무회의에서 김재규는 박정희가 죽었다는 사실은 숨기고 "각하가 지금 유고 상태이다. 이 사실을 최소 48시간 동안 보안에 붙이고 빨리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 김일성이 알면 큰일난다"라고 길길이 뛰었지만, 법무장관 김치열이 "이런 중대한 사태를 이유 없이 48시간이나 보안으로 숨길 수 없다. 미국에도 이 사실은 알려야 한다"며 반박했고, 뒤늦게 육본에 도착한 부총리 신현확이 김재규에게 "밑도 끝도 없이 계엄령이 말이 되느냐! 어떻게 된 일인지 전말을 밝히라"버럭 하는 통에 김재규는 깨갱한 채 버로우 해버렸다. 신현확은 김재규의 동향 선배(신현확은 경북 칠곡, 김재규는 선산 태생)였고, 평소 찬바람이 몰아치는 박정희의 면전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던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현확이 육본에 도착하기 전, 다른 장관들은 김재규의 기세에 밀려 전전긍긍하고 있던 상태였다.

한편, 박정희는 김계원에 의해 만찬장 근처의 미국인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우선 옮겨졌다. 비서실장은 심폐소생술을 실시하였으나 박정희는 소생하지 않았고 병원 도착 5분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은 비밀해제된 미국자료에 의해 밝혀졌다.[40] 후에 박정희는 이미 사망한 상태로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실려갔다.[41] 당직 군의관이던 송계용 육군 군의소령[42]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박정희 주치의인 병원장이던 공군 군의준장 김병수 장군이 시체를 검안하는 과정에서 하복부의 피부병 자국[43]에 의해 시체가 바로 박정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운전사 유성옥과 안가 경비원 서영준이 총으로 위협하는 와중에 보안사 참모장인 육군 준장 우국일 장군의 전화를 받은 김병수 장군은 아래와 같이 박정희가 죽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김병수: 예 병원장입니다.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입니다. 지금 그쪽 상황이 많이 곤란하지요? 대략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으니 제 질문에 예, 아니오로만 답하시오.
김병수: 예.
우국일: 죽었습니까?
김병수: 예.
우국일: (경호)실장입니까?
김병수: 아니, 그런 거 없습니다(옆의 경비원을 의식하여 일부러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국일: 코드 원입니까?
김병수: 예.
우국일: ...알겠소,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이에 박정희가 죽었다는 사실을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이 가장 먼저 포착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김재규는 박정희를 누가 죽였는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정승화 장군이나 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 대부분이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범인을 차지철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암살 과정과 국군서울지구병원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지켜본 김계원 실장이 육본에 와서 김재규가 범인이란 사실을 정승화 장군에게 알렸고, 정승화 장군의 명령을 받은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은 보안처 2과장(군사정보과장) 오일랑 보병중령으로 하여금 김재규를 체포시키고, 동행자였던 박흥주 대령까지 도주하면서 쿠데타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더불어 내막을 알아챈 김정섭 차장보가 자신의 부하들로 안가를 습격해 이기주 등 안가의 중정 요원들을 습격, 체포했으며, 박선호와 박흥주 대령도 그 다음 날 전부 체포되어 김재규와 함께 보안사 분실로 연행되었다.

서빙고의 보안사 분실로 끌려온 김재규를 처음엔 군과의 밀약을 통한 쿠데타 시도일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수사관들이 쉽사리 심문하지 못했다. 보안사는 방첩기관이지 전문 전투부대, 방어부대가 아니라 전투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그 상황에서 쿠데타에 가담한 전투부대라도 들이닥친다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44] 애초에 보안사가 김재규를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 분실로 이송한 것도 대장 끌려간 것 알면 중앙정보부가 기습을 걸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김재규는 과거 보안사령관을 역임한 적이 있어서 다들 전관예우로 "부장님, 부장님" 하며 쩔쩔맸다고 한다. 김재규를 체포하여 호송해 온 육군 헌병수사관 신동기 준위도 한 달 전 중앙정보부 부설 정보학교에서 6개월 과정 정보교육 수료 시 성적 우수자로 부장인 김재규에게 직접 표창을 받았고, 김재규를 정동 분실[45]에서 서빙고 분실로 호송하는 과정에서 정도 들었는지라,[46] 김재규를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박정희 사살이 김재규의 단독 범행임이 밝혀지면서, 안면몰수하고 강력하게 수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은 신동기 준위는 김재규에 대해 바로 폭행과 고문을 동반한 심문에 돌입했다.

심문 도중 김재규는 신동기 준위의 주먹에 맞아 눈 밑에 피멍이 들기도 했는데, 위 현장검증 사진을 보면 김재규의 오른쪽 눈 밑에 거무스름한 상처가 눈에 띈다. 그러므로 당시 김재규의 수사를 담당했던 이학봉 육군 보병대령이 "김재규를 고문하지 않았다"라고 한 증언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재규의 탄원서에 의하면 군용 전화기 전선을 발가락에 묶어 전화기를 돌리는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이 때 지병인 간경변으로 인해 간 기능이 거의 마비된 김재규는 고문으로 인한 내출혈이 멎지 않으며 초죽음이 되었고, 당황한 신동기 준위의 보고를 받은 전두환 장군이 일단 고문을 중단시키고 김병수 장군을 불러 김재규에게 응급치료를 하게 하였다.

여담으로, 10.26 사건으로 압송된 김재규가 수사를 당한 곳은 보안서 서빙고 분실이었는데, 이곳은 다름아닌 김재규 자신이 보안사령관 시절 만든 곳이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2.4. 결과[편집]

이 사건의 전말은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된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수사 보고에 의해 10월 28일 세간에 알려졌다. 그 후 재판을 통해 주모자인 김재규, 그리고 암살에 참여한 박선호와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안가 경비원으로 이날 피해자들에게 M16 소총으로 확인사살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 전원과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에게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가 떨어졌고(80도306), 1980년 5월 24일 이전에 총살된 박흥주[47]와 감형된 김계원[48]을 제외한 5명은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국내외에서 김재규의 구명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으나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또한 당시 대통령 경호실 차장이었던 이재전 중장은 직접적인 책임은 없었으나 직무유기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정승화 참모총장의 만류로 풀려나서 예편했다.


김재규의 말대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총탄은 철옹성 같던 유신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의 공백기를 잽싸게 파고든 자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그는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내란음모죄 혐의를 씌워 체포하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최규하를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육군본부에 갔다는 사실을 약점으로 잡아 허수아비로 만든 이후, 1980년 5월의 5.17 내란과 그 다음날부터 벌어진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을 거치면서 결국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 권력의 꼭짓점에 서는 데 성공하며, 또 다른 군사정권이 집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재규가 박정희를 쏨으로서 독재정권이 끝난 게 아닌, 새로운 독재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이렇듯 전두환이 12.12부터 5.18을 거쳐 대통령에 오르기까지의 약 6개월간의 시간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라고 일컫는다.

이 죽음을 두고 박정희 지지자들에겐 박정희의 죽음으로 인해 대한민국 발전의 맥이 끊겼다는 인식을 심어주며 이른바 박정희 신화가 생기게 되었고, 반대로 당시 운동권 진영의 사람들은 박정희가 이승만, 전두환처럼 시민 혁명으로 물러나야 했는데 하면서 안타깝다고 여기는 의견이 생겼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의견이 갈리는데, 진보진영이라고 해도 모두가 시민혁명의 성공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49] 박정희의 권력욕과 유신 체제의 경직성, 폭압성 등을 고려할 때 시민혁명으로 박정희를 하야시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아무튼 10.26 사건의 의미와 평가에 대한 논란은 대한민국이 지금도 심한 좌우 갈등으로 골머리를 앓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막 삽을 떴던 대대적인 서해안 무역벨트 사업, 가로림만 계획이 좌절되었다. 박정희는 충청 해안을 중심으로 대규모 중화학 공단과 무역항 사업을 현 공주시로의 수도 이전을 전제로 추진하였는데, 10.26 사건 직전 고인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던 삽교천 행사 또한 이 일환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정권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수도 이전 계획도 영영 중단되었다. 그러면서 수도 관련 계획과 해안 공단사업을 받기로 한 충청도, 특히 충남은 박정희의 사망으로 모든 계획이 엎어지고 이후 경상도, 전라도에 편중된 집중개발로 가장 큰 피해를 보기도 했다. 그나마 최근에 세종시 계획 하나를 받았지만 정말 이거 하나가 끝이다.안습

반면에 10.26 이후 1979년 12월 7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12월 7일~8일 사이에 문익환 등 구속된 민주화인사들이 석방되고 김대중에 대한 연금이 풀리기도 하였다. 조갑제는 김재규의 총성이 가져온 변화는 불과 두 달 전에만 해도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였고, 유신 체제의 가장 강고한 사슬을 푼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3. 원인[편집]

3.1. 사회[편집]

왜 10.26이 발생하였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존재하지만, 고려대학교 임혁백 교수의 논문 '박정희에 대한 정치학적 평가'를 토대로 10.26 사태의 발생 원인과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설명해보기로 한다.

현재 10.26 사태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김재규의 개인적 쿠데타라는 견해, 미국의 사주에 의해 발생했다는 견해가 세간에서 많이 떠돈다. 미국의 사주라는 견해는 공산진영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한반도의 비정상적 상황을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떨어진다. 또 김재규가 미국의 사주를 받았다는 뚜렷한 정황 역시 나타나고 있지 않다. 한편 김재규의 개인적 쿠데타라는 견해는 위에서 언급한 김재규의 우발적 행동이라는 설과 최근에 김종필의 회고록에서 제기된 김재규가 분노조절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설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10.26 사태가 김재규의 분노로 인한 우발적 행동으로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이전에 국내 정치와 국외 정치의 상황을 고려하여야 한다.

국내적으로 박정희 정권은 79년에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1차 석유 파동과 달리[50] 2차 석유 파동은 국내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고, 1차 석유 파동 때와 달리 이를 타개할 만한 뚜렷한 전략도 국가가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 거기다가 박정희 정권은 세계 경제가 어려워 수출이 줄어든 상황에서 재벌이 감당해야 할 비용과 손실을 중산층과 노동자, 그리고 서민에게 전가하려는 시도를 하였다(대표적인 것이 부가가치세 도입). 그렇기에 노동자, 서민의 반발이 심해졌고, 이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 감소로 이어졌다.

정치적으로도 78년 총선에서 김영삼의 신민당이 집권여당을 총 득표수에서 이기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이는 김영삼으로 하여금 박정희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는 YH여공 사건에서 신민당이 YH여공들과 연계하여 박정희 정권에 '감히' 반기를 들도록 만들었다. 또한 부마항쟁에서 대규모 민중이 박정희 정권에 반기를 든 사건 역시 정치적으로 박정희를 곤란스럽게 만들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에서 카터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미국과의 불화가 심해지고 있었다. 카터 행정부는 인권이라는 기치 아래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박정희 정권이 로비스트 박동선을 이용해 이런 상황을 무마하고자 하였는데, 오히려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 철수를 계획하게 하여 박정희 정권에 대한 대외적 정당성이 감소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내적, 대외적 상황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김재규와 같은 박정희 정권의 2인자들은 '혹시' 하는 불순한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박정희가 정권 초기나 70년대 초와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면, 아무리 김재규라 하더라도 그의 분노를 함부로 표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79년의 상황은 김재규가 분노를 조절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유신 정권 말기의 강권 통치 역시 오히려 박정희 정권을 몰락에 빠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대개 통치자들은 강권 통치를 통해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강권 통치는 통치의 마지막 수단이어야 하지 그것이 일상화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 일상화를 넘어 극에 달릴 때 역사상 많은 독재자들은 곧 물러나게 되었다. 강권 통치를 해도 사람은 폭력이나 공포에도 익숙해진다. 그러면 지금까지 강권 통치 수준으로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어렵고 강도를 올려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사람들은 또 반발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은 가할 수 있는 강권의 한계가 찾아온다. 그리고 이 한계수준의 강권 통치에 반발하는 세력이 등장할 경우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기지 때문이다. 이 이상 가려면 스탈린이나 모택동 같이 나라가 망가질 걸 각오하고 대숙청을 진행해야 한다. 괜히 이후에 전두환이 유화적으로 나온 게 아니였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10.26을 단순히 김재규의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는 것은 10.26이 가진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다. 역사를 바꾸는 한 개인의 행동은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 요인에만 의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은 그 행동이 나타나기까지 많은 정치적, 사회적 요소가 영향을 미쳤다. 10.26은 박정희 정권의 몰락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임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유신 후반기의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취약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볼 수 있다.

3.2. 개인[편집]

'동반자'였던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것은 언뜻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특히 피격 직후 김재규가 자신의 근거지인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본으로 달려간 것을 볼 때 이 사건을 우발적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워낙 다른 증언도 상반되기 때문에 단순 우발적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많다. 야사이지만 차지철이 부마항쟁을 탱크로 쓸어버리겠다고 할 때 박정희가 "하지 마라" 한마디만 했다면 죽이지 않았을 거라 한다.

본인(김재규)이 부산사태(부마민주항쟁) 직후 부산을 다녀오면서 바로 청와대로 들어가 박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린 일이 있읍니다. 김계원 실장과 차지철 실장과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읍니다. 부산사태는 체제반항과 정책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항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및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아니하면 안되겠더라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더니 박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00만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읍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읍니다.

김재규. 79고군형항제550호(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후) 항소이유보충서

  • 민주화에 대한 요구
    법정에서 김재규 본인이 한 주장.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항상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는 박정희 정권에 염증을 느껴서 독재 종식을 위해서 박정희를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이전에 바로 부마항쟁이 일어나서 김재규가 사건의 진상을 파해치러 부산, 마산 지역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큰 충격을 받고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이 정권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설이다.

    실제 김재규는 71년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국민에게 약속하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 역시도 김재규 개인의 주장이다. 김재규 자신도 유세 현장에서 자신이 건의했던 내용을 말하면서 박정희를 믿었다고. 그러나 약속을 어기고 유신 헌법이 선포되었고, 김재규는 부하들 앞에서 박정희가 다 망쳤다고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정을 드러냈다고 한다. 유신이 선포된 이후, 당시 3군단 연대작전 오순춘 참모는 김재규 군단장이 실제 박정희를 연금하려 모의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3군단에 순시하러 왔을 때 박정희를 연금하여 하야 성명을 내도록 강제하려 준비했다는 것. 또,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은 유신 정권체제에서 김재규 정보부장과 대화를 하면서 박정희를 환자에까지 비유를 하는 표현에 놀랐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청와대에 들어와서 박정희에게 조언해달라고 하면서 유신체제를 바꾸는 제3의 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김재규가 과연 정말로 민주주의에 관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즉흥적으로 외친 것인 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쟁이 진행 중이다. 다만 김재규를 다룬 재판이 전두환의 압력을 받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음을 감안하면 김재규의 목적은 명확하게 규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그가 받은 재판으로 목적이 명백히 규명되었다고 한다면 숱한 사법살인도 옹호될 것이다.[51] 이것 외에도 김재규의 집안에서 '자유 민주', '대의' 등을 적은 붓글씨가 발견되기도 했으며, 이를 근거로 그가 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는 견해가 있지만, 부정하는 견해도 많기 때문에 지속적인 논쟁이 진행 중이다.

  • 차지철과의 갈등
    김재규와 차지철 사이의 권력 투쟁과 갈등 속에서 10.26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주변 인사들에 의해서 주로 증언되고 있고 드라마 제4공화국, 제5공화국 등에서도 이러한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역시도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킨 것은 차지철과의 갈등에 있었다는 주장을 폈다. 김재규는 자기보다 새파랗게 젊고 군대 계급도 낮은 차지철에게 면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수모를 당해서 이에 대해서 격분했고, 이것이 10.26의 발단이 되었다는 주변인물들의 증언이 있다. 출처. 김재규가 교사 시절 아끼던 제자였고 가깝게 지냈던 이만섭 국회의장 역시도 김재규와 차지철의 관계가 사건의 발단이 된 것 아닌가 추측한다고 방송이나 그의 회고록에서 말하기도 했다. 출처.

    특히 유신 정권 시절에는 중앙정보부, 대통령경호실, 국군보안사령부 간에 상호 견제와 갈등이 상존하고 있었다. 출처. 김재규의 지위는 언뜻 탄탄한 듯이 보였지만,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의 대두로 위협받고 박정희의 신임을 잃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부마민주항쟁의 수습 과정에서 갈등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당시 김재규의 진술에서 김재규 자신은 온건대응을 주장했지만 차지철은 300만을 들먹이며 강경진압을 주장하면서 김재규를 깠고, 박정희도 이에 동의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대립과 반목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왔었다. 더군다나 이 무렵에 차지철계로 분류되고 있던 김치열 법무부장관이 차기 중앙정보부장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정희가 야당 문제와 부마항쟁 등에 대한 미흡한 대처에 대해서 김재규를 책망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재규 본인도 파워 게임에서 밀릴 것이라는 직감하게 되고 10.26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출처.

    하지만 부마항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 박정희를 만난 김재규가 스스로 중정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이야기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기에, 그가 권력에서 밀려나는 상황을 우려하여 10.26을 일으켰다는 설을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출처.

  • 미국의 사주
    당시 박정희와 미국의 독재자 킬러 지미 카터 대통령의 관계가 좋지 못했으므로, 미국이 김재규를 사주해서 박정희를 제거하려 했다는 설. 어르신들 중에 이 설을 진지하게 여기는 분들이 제법 있다. 특히 이 시기에 군문에 몸 담았던 사람(간부), 군과 관계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설을 정설로 여기고 있다. 남재희 전 장관의 증언.

    그렇지만 이 주장도 당시 미국 상황을 보면 이런 초대형 사건을 계획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불과 4년 전에 쿠데타로 휘청거리던 남베트남이 완전히 공산화가 되어버렸고, 중동의 최대 친미 정권이었던 이란팔레비 왕조가 79년 초 혁명으로 무너졌고, 여름에는 훗날 이란-콘트라 사건의 배경 중 하나가 된 니카라과가 공산화되었다. 그리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으로 CIA가 대단히 바쁠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암살은 뒷수습도 뒷수습이며, 암살로 인한 독재 권력의 공백은 쿠데타의 완벽한 배경이 될 수 있고, 이런 혼란 상황은 베트남 공화국의 재현과 한반도 공산화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위험한 선택이였다. 그리고 이런 제의를 위해선 대통령 암살 이후의 계획 또한 제공되어야 하는데, 쿠데타 이후의 행적이 일관성과 계획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담으로 김진명의 소설 '1026'도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이 박정희의 자주국방을 견제하기 위해 김재규를 시켜 박정희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김진명 소설이 늘 그렇듯이, 애초 미국이 박정희의 '자주국방'을 부담스러워할 만한 이유도 없고, 미국이 완전한 악역 수준으로 한국을 견제하려 했다고 보여지지 않기에 이러한 견해는 설득력이 낮다. 이 경우는 박정희가 미국을 무시하고 핵을 개발하려고 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김재규를 사주하여 박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김진명의 불쏘시개와는 관계 없는 이야기.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말에서, 사실 '야수(Brute)'가 아니라 '브루투스[52]'라고 써놓고 미국이 대본을 준 건데, 김재규 일당이 해석을 잘못해서 브루투스의 심정이 졸지에 야수의 심정으로 바뀐 거라는 그럴싸한 농담도 있다. 어디까지나 농담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말자.

  • 민주화+미국의 사주
    3번(민주화)이 2번(미국)과 결합한 가설도 있다. 일단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이기만 하면, 그 다음은 미국이 어떻게든 알아서 자기를 도와줄 거라고 추측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미국이 명시적으로 김재규를 사주한 것은 아니지만, 뭔가 책임을 져줄 것처럼 잘못된 사인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 김재규가 사인을 잘못 읽었거나. 이 이론은 암살 이전의 치밀한 계획 + 암살 이후의 우왕좌왕을 설명해주는 가설이다.

    실제 김재규는 1979년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과는 정기적으로 만났으며, 대부분의 대화 내용은 한국의 인권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공개된 비밀 문서에 따르면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이 10.26의 주모자가 김재규라는 것을 몰랐기에 글라이스틴이 박정희 암살을 권유하거나 지시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글라이스틴이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을 김재규가 암살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원래 외교적 수사라는 게 그런 식이니까.

  • 미국의 묵인
    미국의 영향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은 '암살 묵인'과 '사후 추인'을 구두 승인했을 가능성이다. 김재규의 공작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가정해보자면, "박정희는 암살되고, 새롭게 민주 정부가 구성된다"는 결론이 나게 된다. 여기서 미국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이 박정희 암살과 민주화를 일종의 "반역죄"로 보고 승인을 하지 않을 것인가, 일종의 "혁명"으로 보고 승인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즉, 김재규의 암살로 만들어질 "새로운 민주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을 수 있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쟁점이다.

    현실적으로 일국의 국가 지도자를 암살하는 것은 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정치적 부담이 큰 일이다. 뭐 대놓고 쳐들어가서 체포도 한 적 있지만 그러나 김재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암살 사건을 저지른 다음,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민주화를 하고, 미국은 사후에 승인을 하는 형식이라면 정치적 부담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의 신변은 미국에서 미국의 압력에 따라 민주화 정부에서 단순살인죄에 대한 '사면' 혹은 미국이나 제3국으로 '망명'하는 형식으로 '신변 보장'을 할 수도 있다.

  • 정권 반대 세력 관리방식에 대한 대한 이견
    3과 1(권력 다툼)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김재규는 당시 정권 반대 세력 관리 방식을 놓고 박정희, 차지철과 상당한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었고, 이것이 암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유신의 심장인 중앙정보부의 수장이었지만 실제 부마항쟁 이후 김재규는 정권이 전복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인 경상도에서 이러한 항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박정희 정권의 통치전략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기 시작했다는 징후로 해석되기도 한다.[53] 이를 관리하는 방식에 있어 박정희와 차지철의 강경일변도 노선에 상당히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김영삼 체포 등의 야당 탄압, 민주화 요구 묵살 등에 대해서 김재규가 다소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 그러나 박정희와 차지철은 끝까지 강경일변도의 진압을 주장하였고,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명을 죽였는데 우리라고 1~200만명 정도 못 죽일 것 없지 않겠냐"라는 정신 나간 소리를 했다고 김재규는 법정에서 진술했다.[54] 정리하자면 김재규가 민주화를 원했다기보다는, 당시 정권 반대 세력들에 대한 관리 방식을 가지고 충돌이 일어나 이것이 암살까지 갔다는 의견이다. 자신들의 정권 반대 세력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는 좌-우를 막론하고 국가 통제가 강한 국가의 권력층에서 늘 논쟁거리다. 이 논쟁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만, 상기된 바와 같이 대중적 저항의 격화와 강경 탄압, 그 탄압으로 인한 더 큰 규모의 저항이 반복되면서 당시의 박정희 정권이 독재 정권의 전형적인 말기적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전두환의 경우이지만 광주에서 무장 투쟁으로 전개된 상태를 보아서 이미 사회적으로 무장하고 싸우는 것도 감내할 분위기가 내재된 상태였다. 추론의 영역이지만 박정희 정권의 핵심인물이었던 김재규가 이 상황에서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꼈을 가능성은 있다.

  • 분노에 의한 우발적 암살
    전제는 3, 내용은 변형인 4와 거의 비슷하다. 박정희와의 자리에서 김재규가 부마항쟁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온건한 대응을 주장했는데, 차지철이 김재규의 말에 대해 비꼬는 투로 비난했다.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한 소리를 할 당시 차지철이 이때 전차로 밀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만화 '박정희'에 등장하는 것으로서, 차지철이 부마항쟁에 대해 캄보디아폴 포트처럼 싹 쓸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김재규는 차지철보다 나이도 많고 군 경력에서 비교도 안되게 우위에 있던 사람인데, 보잘 것 없던 차지철이 자신을 무시하기에 순간적 분노에서 차지철을 쏘고, 박정희도 뒤이어 쏘았을 거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차지철은 특전사 창설 멤버로 육군 중령으로 진급 후 바로 전역했지만 김재규는 박정희와 육사 동기였고[55], 실제 3군단장까지 했던 3성장군 출신이다. 워낙 권력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보니 흔히들 김재규를 4성장군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김재규는 예비역 중장이다. 의외로 10.26 당시 동석자 중 한 명이었던 김계원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육군 대장 출신이다. 당시 참석했던 인물의 병역 사항을 살펴보면 박정희는 대장 예편, 김계원도 대장 예편, 김재규는 중장 예편, 차지철은 중령 예편이다. 별들의 향연 그만큼 차지철과 계급차가 컸다.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는 저격 이후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않아 박흥주의 신발을 빌려 신는 등 김재규의 대응이 무척 우왕좌왕했다는 점. 특히 자신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로 향하지 않고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는 육군본부로 갔다는 사실은 도저히 저격이 계획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현재로서는 <민주화에 대한 요구>와 연계되어서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가설. 하지만 이 역시 이미 술자리 이전부터 심복들에게 "오늘밤 거사하겠다"라고 말하고, 박정희 사살 이후에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단 것을 보면 단순 우발적 암살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후 행동의 어설픔들은 거사 직후의 당황, 거사 직전까지 자신의 최측근들에게조차 속내를 숨겼던 내부사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아니겠냔 의견도 있다.

  • 중앙정보부 부장이라는 위치의 위험성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정치공작에서 최전선을 담당했으며, 역대 중정부장은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다. 하지만 박정희가 장기 집권하고 있는 한 중정부장의 막강한 권력도 시한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거대한 위치가 중정부장 개인의 일신에는 위험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김종필, 이후락, 김형욱 등 권력을 휘두르던 중정부장들은 최종적으로 박정희의 견제를 받아 몰락하는 수순을 받았다. 특히 김형욱의 말로는 후임인 김재규가 보낸 중정요원들에게 암살당하는 비참한 최후였다. 김형욱의 죽음을 보고 김재규가 자신 역시 단지 박정희의 소모품일 뿐, 언젠가는 실각 당하거나 처참한 말로를 맞을 것이라는 생각에 위기감을 가지게 되어 박정희 정권에 회의를 느끼게 했다는 분석이다.

    거기다 3선 개헌을 거쳐 유신헌법 체계가 되자 박정희는 이론적으로 종신집권이 가능해졌고,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하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박정희는 정권 내내 누군가가 '후계자'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조차도 극도로 싫어할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였다.

  • 장준하-김재규 밀약설
    한편 장준하와의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밀약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론에 불과하지만 평소에 장준하와 김재규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장준하 선생의 아들인 장호권에 의하면 장준하 선생 사후 김재규가 여러 모로 유족들을 도와줬다고 하며,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 며칠 전 김재규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다만 김재규의 행동이 장준하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주변 인물들의 증언 외에는 확실한 증거가 부족한 상태다. 이런 밀약설 중에는 시인 김지하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 사이에도 쿠데타에 대한 의논이 있었으며, 성공할 경우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국회의원의 1/3 이상을 자기쪽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즉, 실제로 시행 가능성을 전제로 둔 밀약이었다는 것. 이 밀약설을 주장한 사람은 김지하 본인인데, 그 외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 김영삼 지지설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 당수 김영삼을 지원하기 위해서라는 설. 김재규와 김영삼 두 사람은 김녕(金寧) 김씨 문중의 종친이었고, 이 점에서 야당 지도자임에도 김영삼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으며, 도리어 그가 박정희 대신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지하여 10.26을 저질렀다는 주장. 다만 이는 관련자의 증언, 물적 증거가 전혀 없는 개연성, 추측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그다지 진지하게 고려할 내용은 아닌 듯하다. 그래도 다음에 나올 건강이상설보다는 그럴듯해 보인다

  • 건강설
    前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은 발기 부전(...)을 비롯한 건강 문제가 하나의 원인이라고 근거 없는 주장을 했다. 링크.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발기부전이라니 실제로 김재규는 간경변을 앓고 있었고, 10.26 당시엔 중정부장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때의 간 기능 장애로 극심한 발기부전을 앓게 되어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생겼고, 이것이 10.26 같은 암살을 저지른 한가지 먼 원인이 되었다는 것. 그저 당시 김재규의 정신적 혼란에 대한 먼 원인을 추측한 것일 뿐 큰 의미는 부여하지 말자. 해당 칼럼에 대한 비판.

    다만 위의 김진의 억측말고 김재규의 건강문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게 당시 김재규는 간경변을 앓고 있었다 간경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간경변 환자에게 술은 독약이나 다름 없다. 이런데도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으로 연회때마다 술을 마셔야 했다. 반면에 차지철은 건강한데도 종교적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술 하나만으로는 사람을 죽일정도로 분노하는 것이 어렵지만 이전부터 분노가 쌓인 상황에서 박정희가 독약이나 다름없는 술을 강권하는 것 때문에 분노가 폭발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주장들이 존재하며, 위의 추측 중 여러 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매우 많다. 그만큼 김재규의 암살은 이해하기 어려운 뜻밖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과 차지철에 대한 적개심 등 여러가지 복잡한 심리가 뒤죽박죽 짬뽕 극대화되어서 저지른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암살이나 이후의 판단 미스도 이해는 간다. 예를 들어, 유신 체제를 지속하는 박정희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선임자 김형욱 부장의 암살을 지켜본뒤 불안감을 키우던 김재규가 부마항쟁 현장을 방문하고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 박정희 암살을 계획하기 시작했으나, 차지철의 도를 지나친 무례한 행동에 욱하는 바람에 "궁정동 안가에서 중정 직원들만으로 현장을 제압할 수 있는 지금이 기회"라는 판단을 굳히고는 아직 미완이었던 계획을 급하게 앞당겨 실행한 것이라고도 추측할 수 있다. 이후 김재규의 혼란스러운 행동은 아무리 계획된 암살이었더라도 자신이 수십 년 충심으로 따르던 박정희를 막상 자기 손으로 암살하고 나자, 김재규 스스로도 충격과 공황 상태에 빠져 정승화가 하자는 대로 육본에 따라가는 등 판단 미스를 거듭한 것일 수도 있다.

3.3.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재조명[편집]

사실은 최태민도 10.26 사건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처음에는 전두환 합수부가 제시한, 예정된 민중혁명과 정권 붕괴가 촉발한 유신 권력 내부의 모순 격화와 권력 다툼으로 인한 우발적 사건 정도의 프레임에서 평가가 진행되었지만, 사료가 점점 축적되고 발굴되어 '과연 당시 시민 사회의 역량이 역대 한반도 독재정권 중 최고로 공고한 수준이었던 유신 정권을 몰아낼 정도로 굳건했는가? 김재규 개인의 신념과 동기가 그렇게 무시하고 축소할 만한 것인가?' 에 대한 문제제기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재평가와 재조명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하여 과거의 축소 해석을 비판하는 관점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이미 2010년대 초 하나의 주장으로 정초가 끝난 상황이기 때문에, 정치적 의도에 따라 조작되어 조직된 것은 아니다. 학술적 층위에서는 상기된 축소해석에 대한 비판은 민주 회복이 이루어진 1990년대 초에 벌써 나타나기 시작하며, 저렇게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컨센서스가 2010년대 초 확고히 성립된다. 예로, 최종적으로 10.26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는 않던 (진보 성향의) 역사학자 서중석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이전 이미 '김재규 개인의 신념과 동기'를 10.26의 성립 배경 중 하나로 확실히 언급하고 있다.

대중적 층위에서는 당시 김재규가 항소했을 시 밝힌 동기가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재조명을 받고 있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이었는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삼은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民情首席) 박승규 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읍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여,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 놓은 일이 있었읍니다. 중정본부에서 한 조사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김재규가 쓴 옥중수기에도 관련 내용이 나온다. #

***음력 12월 11일**

대통령 일가의 횡포

1. 구국여성봉사단과 큰 영애(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관여치 말라는 노여움을 샀다).
2. 육사의 명예제도와 지만생도
- 백광현 고검검사가 조사를 담당함(당시 6국장)
-김근수 중정제6국장이 사실 전모를 파악하고 있음.
참고. 최의민의 전화도청으로 최가 일일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사실(기록을 국장 소지 보관중)

*상기 내용은 혁명과 직접.간접으로 관계가 있으나 일절 언급치 않았다. 그 이유는 아이들의 일이라서. 돕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간단히 여기에 기록하고 자세한 것은 후일 백 검사와 김근수 국장이 조사결과.

3.3.1. 안동일 변호사의 증언[편집]

당시 김재규 변호사를 맡은 안동일 변호사는 10.26 관련 책을 썼었는데, 신동아와 인터뷰를 했고 그게 2005년 12월호에 실렸다. 당시 김재규가 최태민을 주목했다는 점을 역시 증언하고 있다.

그는 김재규가 우발범이거나 패륜아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체제 회복에 나선 확신범 내지 양심범일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김재규를 몇 번 접견하면서 우발범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사람의 진정성이 느껴지잖아요. 꾸며서 말하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데, 전혀 그런 게 없었어요. 김재규는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10·26 혁명을 일으킨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어요."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재규는 큰영애인 박근혜가 관련된 구국여성봉사단의 부정과 행패를 보고 분개했다고 해요. 이런 일들이 '대통령이나 박근혜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조사를 시켰다는 겁니다. 조사 결과 로비나 이권 개입 등 여러 가지 비행이 드러나자 박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했는데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런 일까지 하느냐'면서 몹시 불쾌해 했다고 해요. 박정희는 영부인 육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자식들을 애지중지하고 철저히 감싸고 돌았다고 해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만 해도 그래요. 당시 항간에서 말이 많던 최태민이 총재,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구국여성봉사단의 문제점을 보고한 후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됐습니다. 박정희가 최태민의 실권을 뺏는답시고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꾼 거지요. 김재규는 자기가 괜히 조사를 해서 오히려 '개악(改惡)'이 됐다면서 뒷조사한 걸 후회했대요."

신동아 2005년 12월 #

3.3.2. 김계원의 증언[56][편집]

이호 객원기자는 2005년, 10.26 사건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던 김계원과 인터뷰를 했고, 이것은 이코노미스트 811호(2005.10.31)에 실려있다.

https://jmagazine.joins.com/economist/view/244751
http://blog.naver.com/palhj/100038634428

묻는 사람이 이호 기자고 답변하는 사람이 김계원이다.

「김계원:
그게 이제 (잠시 망설이다가) 차지철하고 김재규 최태민 때문에 많이 싸웠습니다. 최태민 아시죠? 다른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두 사람이 싸운 걸 나중에 보면 최태민 때문이야. 차지철이 최태민을 앞세우고 박근혜양을 너무 업고 다니니까. 그러면 김재규가 '그러지 마라. 그러면 안 된다' 그러거든? 근혜양은 그 때 어머니는 없고 외로운 그런 떄인데. 근혜양은 자기가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해야 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왜 자꾸 나서서 그러느냐, 이런 소리가 나오니까 이 소리가 최태민을 통해 많이 들어가거든요. 최태민이 근혜양 앞에서 자꾸 알랑거리면서. 그러니까 근혜양은 어렵게 만든 놈이 다 최태민이야! 그래서 저놈을 때려잡아라, 그래 가지고 박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친 일이 있죠."

기자: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직접 불러 혼을 냈다는 말씀 아닙니까.

김계원:
예. 이건 내가 들어가기 전 얘기입니다. 내가 비서실장 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고, 비서실장이 돼 내가 김재규에게 '뭐가 제일 문제냐' 그랬더니 '큰 영애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그래요. 그게 뭐냐 했더니, 최태민 문제다 그래요.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최태민씨가 청와대 드나드는 것은 경호실 문제 아닙니까?

김계원:
뭐 본론으로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는 건데, 최태민이 문제 있다는 걸 김재규가 얘기해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치고 막 이랬거든요. 나도 비서실장 하면서 중정이나 각 정보기관에서 올라오는 정보 보고서를 보니까 이건 뭐... 최태민이 그놈하고 관계가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요.
(최태민이) 나쁜 놈이야. 근데 근혜양은 이게 중앙정보부에서 모함해 그런 거다, 최태민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주 선량한 사람인데 왜 정보부에서 모략을 해 자기 아버지 생각을 흐려 놓느냐고 하면서 오해가 생겼어요.

그런데 대통령한테 혼나고 나서는 최태민이 청와대에 못 들어왔죠. 또 근혜양한테는 못 나가게 했어요. 외출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근혜양이 밖으로 나가니까 그건 경호실 문제지. 그래서 박 대통령께 내가 한 번 물어봤어. 이 문제는 내가 청와대 들어오기 전에 있었고 김재규를 통해 주로 들은 얘기니까. 그걸 확인하려고 비서실장 된 뒤에 박 대통령한테 물어봤어.

'각하. 요즘도 최태민이 근혜양과 만났습니까.' 내가 그랬거든. 그랬더니 '아니야. 그놈의 자식 내가 아주 그냥 혼내놨어. 요즘은 근혜도 자주 못 나가. 자주 나가지 말라고 그랬어.' 이러시잖아요. 그러니까 대통령께서도 자식이지만 속이 아프고 하시겠는데 내가 직접 확인한 거니까.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청와대 출입을 못하게 됐는데 왜 최태민 때문에 차지철과 김재규가 다투게 됩니까.

김계원:
그 구국여성봉사단인가 뭔가가 집회를 청와대에서 합니다. 그런데 그 모임 멤버가 한 200여 명 된다고 들었는데 재벌들이 그 모인 멤버가 되는 것을 굉장히 큰 영광으로 생각해요. 청와대에서 그 모임을 한 번 하면 말이야, 재벌들이 큰 뭐나 된 것처럼 으스대고 이런 판이거든. 그걸 정보부에서 다 보거든. 문제가 된다 이거지. 그런데 출입증은 경호실에서 발행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또 싸움이 되고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지요. 김재규는 못하게 하고 차치철은 왜 막느냐 하고. 그래서 차지철은 김재규가 청와대 들어오는 것까지 막거든? 대통령한테 보고할까봐.

기자:
중정부장이 대통령한테 긴급 보고도 할 수 있는데 차지철이 김재규가 들어오는 것조차 막았다는 겁니까.

김계원:
그래서 내가 청와대 간 뒤로 얼마 후에 김재규가 나에게 '실장이, 실장님도 과거에 청와대 들어오는 게 이렇게 어려웠습니까?' 그래요. 그래서 '자네가 청와대 들어와 대통령께 보고드리는데 그렇게 들어오는 것이 어렵단 말이냐'내가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아유. 지금 저 차지철이란 놈이 어떻게 제한하는지, 왜 들어가느냐, 뭣 때문에 들어가느냐, 빠르다, 늦아, 시간이 길다.' 자꾸 자기 하는 일에 제동을 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아. 정보부장은 국가 유사시에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대통령을 못 만난다니 말이 되느냐, 난 어떨 때 새벽 1시에 가 대통령 주무시는 걸 깨워 보고드린 일도 있어' 그래서 경호실장이 하는 일을 내가 도중에 막을 순 없으니까 '자네가 정 급한 일로 들어와야 되는데 들어오기 어려울 때는 비서실장 만나러 온다'고 전화하라고 했어요. 비서실장이 오라고 하면 그건 누구도 못 막거든. 그래서 내가 한 네댓 번 바로 넣어준 일이 있어요 대통령한테. 차지철이가 그랬다고 글쎄. 그러니 김재규하고 안 싸워요?"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차지철이 그토록 김재규를 막고, 김재규는 가까우니까 실장님한테 얘기하고, 그러면 결국 근혜양에게 실장님이 오해받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김계원:
그것만큼은 사실일 겁니다. 왜냐하면 노골적으로 정보부하고 쉬 틀어졌던 것이 김재규가 최태민 일로 자꾸 여러 가지 귀찮게 했는데, 그러니까 김재규는 김계원 사람이다, 왜냐하면 김재규가 나하고 가까웠고, 뭐든지 나한테 얘기하고 그랬거든. 김재규가 해군하고 같이 술 먹고 오다 차가 전복돼 거의 죽게 됐을 때 내가 언덕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걸 업고 와 살린 그런 인연이 있어요.

그래서 김재규가 그랬죠. 자기가 세상에 은인이 세 사람 있는데 하나는 박 대통령, 하나는 고 이종찬 국방부 장관, 그 다음에 김계원이라고 했거든? 그러니까 여태까지 박근혜가 아무 지장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됐는데 이게 자꾸, 김재규가 정보부장 되더니 브레이크가 걸리거든. 그러니 이건 틀림없이 김계원 지시다, 그런데다 큰 영애가 볼 떄는 김재규가 하는 일이 김계원이 정보부장 할 때 하고 똑같구나, 그렇게 느껴질 거 아니겠어요?

기자:
실장님하고 근혜양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겠습니다.

김계원:
또 하나는 최태민이 대통령한테 혼나고 그 후에 내가 최태민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비서질장 밑에 큰 영애 전속 비서실을 만들어야겠다 싶어 대통령한테 '각하 비서실을 개편해야겠습니다. 영부인이 안 계시지만 큰 영애가 영부인 역할을 하고 있으니 공식 비서를 하나 따로 두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재가받았어요. 그런 다음 내가 큰 영애에게 '비서를 따로 하나 두려고 그러는데 누가 좋겠습니까, 추천할 사람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좋아하면서 그때 구로공단 책임자로 있던 최명헌씨를 지명해요.

근데 그 사람이 또 최태민과 가까워요. 아주 곤란해 다른 이유를 대고 다른 사람을 말해 보라고 했어요. 그랬으니 큰 영애가 나를 좋게 생각했겠어요? 그러고 나서 며칠 있다 최필립 비서관이라고, 우리 비서실에 있던 사람인데 걜 지명하더구먼. 그래서 그렇게 하십시오, 그랬더니 걜 예뻐해요, 큰 영애가. 아 그런데 나중에 보니 최필립도 최태민을 아는 거야. 난 몰랐지 첨엔. 어떻게 이상하게, 최씨 세 사람이 그렇게 합쳐 움직여, 나 참"」


최태민이란 자가 박정희 딸인 박근혜를 위시하여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내용이 중앙정보부에 들어왔고, 이에 따라 김재규는 조사를 통해 박정희에게 보고했으나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김재규는 사안이 중하다고 판단해 최태민을 처벌해야 한다는 식으로 재차 건의했고, 이에 따라 박정희는 최태민을 직접 불러 김재규와 같이 심문을 시작한다. 문제는 이 조사에 박근혜가 동행했었다는 것이고, 박근혜는 최태민 관련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박정희는 이러한 박근혜의 태도만 보고 최태민을 처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김재규를 강하게 질책해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차지철 역시 최태민과 박근혜를 감싸고 돌았고, 박정희는 이때부터 차지철을 더 신임하였다고 하며 차지철의 위세가 엄청났다고 한다. 게다가 이렇게 커진 차지철의 위세는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의 청와대 출입까지 막았고, 박정희에게 긴급 보고해야 하는 상황이 되도 청와대에 들어올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김재규는 당시 비서실장인 김계원을 만나러 오는 것처럼 하여 간신히 청와대를 출입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차지철의 행동으로 인해 김재규는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꼈고, 이런 것을 외면한 박정희에 대해서도 큰 배신감이 들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 주장은 일반적인 추론이 아니라, 당시 사건 전후를 잘 아는 비서실장이 증언한 것임을 주목할 만하다.

조갑제 기자는 월간조선 2006년 2월호에서 역시 김계원과 인터뷰 한 적이 있다. 여기서 최태민 문제가 이야기에 나타난다.

https://pub.chosun.com/client/news/print.asp?cate=C01&mcate=M1001&nNewsNumb=20161222249


기자:
얼마 전 金실장께서 차지철과 김재규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대통령의 큰 딸인 槿惠씨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원인』이라고 말씀하신 게 한 주간지에 실렸는데, 무슨 의미인가요.

김계원:
자꾸 차지철이 김재규가 하는 일에 제동을 거는데, 그중 하나가 박근혜와 崔太敏(최태민) 목사 문제였습니다. 최태민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청와대로)비난이 꽤 많이 들어왔어요. 결국 대통령에게 보고되는데… 구국봉사단 총재였던 최태민이 재벌 사람을 불러 돈을 모으는데… (액수가) 꽤 큽니다.

박근혜씨가 앞서서 돕기 때문에 김재규가 朴대통령에게 몇 번 말씀을 드렸는데, 「朴대통령이 딸 얘기만 듣는다」고 해요

기자:
당시 朴槿惠씨를 시집보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나요.

김계원:
朴대통령께 두어 번 말씀드린 일이 있어요. 그런데 한번은 朴대통령께서 최태민 얘기를 했어요.「최태민이라고 있는데 金실장 알아?」 그래요. >제가 알 수 없죠.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목사라고 하던데요」 하니, 「글쎄 목사라고 하는데 진짜인지 뭔지 모르겠어. 내가 불러 親鞫(친국)을 했는데, 요즘은 덜 만나는 모양인데」 그래요

기자:
최태민을 직접 불러 친국을 했다는 겁니까.

김계원:
네, 朴대통령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김재규에게 사실이냐고 물으니 「親鞫을 했다」고 해요. 꿇어 앉혀서... 그런데 그 배후에 차지철이 있다는 겁니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최태민의 청와대 출입을 방조해 놓고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불만이 높았어요.

김재규는 자기 나름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데, 차지철이 볼 때는 김재규가 옆에서 자꾸 자기가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니, 둘 사이가 점점 나빠졌다고 봅니다. 김재규는 자연 청와대 출입이 어려워지게 된 겁니다

기자:
朴槿惠씨도 朴대통령에게 김재규를 많이 비난했겠네요.

김계원:
그렇죠. 자연 그렇게 될게 아닙니까. 자기가 하는 일에 감시하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니…

기자:
최태민이 기업체 회장에게 일종의 압력을 넣어 돈을 많이 모은다」는 보고가 청와대로 올라온 거죠.

김계원
그때 잘못한 일이 있는데, 최○○이라고 있어요. 그 친구가 청와대 비서로 있었는데, 제가 판단을 잘못해서 朴대통령에게 「槿惠양이 영부인 일을 하고 있으니 그를 보좌하는 비서관을 두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어요. 대통령께서 「글쎄...」 이러시면서 「누가 좋겠냐」고 묻길래 「槿惠양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그때 의전수석인 최광수 이야기가 「최○○이 담당하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추천하지 않았겠어요? 최씨 몇이 몰리게 된 것이지요』

기자:
최○○은 최태민과 가까워졌겠네요.

김계원:
그렇죠. 제가 생각한 것과 영 달라지게 됐어요.

기자:
참 이상한 게 그전의 朴대통령 같으면 최태민을 잡아넣었을 텐데.

김계원:
한 번은 「야단치려고 해도 에미 없는 것이 불쌍해서 눈물 나더라」고 하시던데요

조갑제는 박정희가 최태민을 잡아넣을텐데라고 의문을 품지만 김계원 전 비서실장은 "야단치려고 해도 에미 없는 것이 불쌍해서 눈물 나더라"고 답변하고 있다.

김계원 전 비서실장에 따르면 김재규의 감정엔 분명히 최태민-박근혜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 김계원 전 비서실장은 박정희-차지철-김재규 사이를 지켜봤으니 상당히 믿을 만한 증언이라고 생각한다. 거기다 이 증언들은 2005~2006년에 한 것이다.

더욱이 김계원 비서실장의 주장만이 아니라, 최태민을 증오하다시피 한 김재규의 태도가 사건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게 한다. #

1979년 11월의 합수본부기록에도 김재규의 증오가 드러난다. 다음은 기록에 나타난 정보부 수사 파트 K국장의 진술.

3.3.3. 정보부 수사 국장의 진술[편집]

<김부장은 '최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고 증오를 표시했다. 새마음봉사단의 부총재(총재 박근혜)인 사이비 목사 최가 사기 횡령 등 비위 사실로 퇴임한 후에도 계속 막후에서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각 기업체 사장들을 운영위원으로 선임하고 성금을 뜯어내는 등 새마음운동 취지를 흐리게 해서 계속 동향을 감시하라는 김부장의 지시를 받았다. 79년 내사 결과 최의 이권 개입, 여자봉사단원과의 추문 등 비위사실을 탐지하여 김재규부장에게 보고한 바 그렇게 말했다.>
동아일보, 1992.08.29. 남산의 부장들 (107) 10.26의 서막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3.3.4. 전기영 목사의 증언[편집]

그리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논란이 되자 최태민의 대한구국선교단 창설은 박정희 지시란 증언이 등장했다! # 이것까지 사실이라면 김재규에게 유리한 증거가 더 늘어나는 셈임과 동시에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박정희가 박근혜를 말리기는 커녕 오히려 스스로 최태민과 가까이 지낸 것 아니냐는 방증이 된다.

전 목사에 따르면, 박정희가 최태민 씨를 불러 민주화 운동을 하는 진보 개신교 세력[57]이 강하다며, 이를 견제할 세력을 만들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최태민 씨에게 보수 개신교 세력의 결집을 주문한 셈이다.


--노컷뉴스, 2016-10-29 20:15

3.3.5. 학계의 해석[편집]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강경파와 온건파 간 권력투쟁론" 프레임을 비판한다. 이것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이란 의견이다. #

「김재규가 박정희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그런 정치문제보다도 1977년 봄 중앙정보부가 내사해서 작성한 "큰 영애와 최태민에 관한 종합보고서"때문이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이 내사 결과를 보고하고 적절한 조치를 건의하자 박정희가 "정보부가 이런 것까지 내사하나?"라며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래도 박정희는 당사자인 큰 영애 박근혜 씨와 최태민,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김재규와 수사국장인 백 모씨를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른바 '친국'을 벌였다. 박근혜 씨와 최태민은 세간에 떠도는 풍문과 중앙정보부의 내사가 음해라면서 강력히 항변했다. 지금 같으면 특검에 맡겨 수사해서 규명해야 할지도 모르는 대통령의 자녀관련 문제였지만 박정희의 친국으로 그 근거가 밝혀지지 못한 채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중정의 능력을 고려할 때 내사까지 해서 박정희에게 직보할 정도였으니 이는 그렇게 만만한 내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사보고서는 중정의 문서이니 만큼 당연히 중정의 기밀자료 존안실에 보관돼 있다. 박근혜 후보가 유력한 대선 주자이기 때문에 법률에 의한 정보청구를 통해 검증해야 할 것이다.

10.26사건의 원인에 대해 지금도 웬만한 학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집권층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권력투쟁을 꼽는 것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에 갇힌 결과다. 무엇보다도 전두환 합수부는 훗날 대법원이 판결한 내란집단과 동질적 조직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수사결과 발표란 실체적 진실과는 가장 거리가 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역시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기 4년 전에 분석한 내용이니, 박근혜 게이트에 끼춰맞춘 내용은 아니다. 김재홍 교수에 따르면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권력투쟁'이 '전두환 합수부의 프레임'이며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두환은 김재규 재판에 압력을 가했고, 심지어 양병호 대법원 판사는 끌려가서 고문까지 당했다. #, #

이런 점을 볼 때 김재규 재판은 정상적으로 진행된 게 아닌 걸 알 수 있고, 김재홍 교수의 의견은 타당한 의견이다.

3.3.6. 그 후[편집]

최태민 부분은 과거부터 증언과 기사를 통해 조금씩 제기되어 오기는 했지만, 문제는 최태민과 관련된 내용 자체가 그동안 찌라시 취급을 받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 2016년에 들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재조명되고 있다.

김재규의 이런 판단을 했다는 내용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보도에 자주 여러번 언급되고 있다.

  • 헤럴드경제, 2016-10-26 13:02, 37년전 김재규 "박근혜-최태민 관계, 박정희에 건의해도 소용없었다" #

  • SBS CNBC, 2016-10-26 11:27, [직설] 현대판 수렴청정... 최태민·최순실, 그들은 누구인가 #

  • 한겨레, 2016-10-26 17:35, 1979년 박정희와 2016년 박근혜... 부녀 대통령의 10월 26일 #

4. 계획 관련[편집]

전후 정황을 살펴볼 때, 적어도 김재규가 궁정동 연회 직전에 특정 인물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은 분명하다. 자신이 궁정동 안가에 권총을 들고 가고, 수행원들에게도 관련 지시를 내려둔 점, 선배이기도 한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사건 직후 "난 한다면 한다"고 말했던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다만 그 암살의 대상이 어디까지였나가 현재 시대의 의문점인데, 김재규의 인터뷰 테이프에 따르면 # 김재규는 73년부터 유신헌법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74년 건설부 장관 취임 때부터 박정희 살해에 대한 충동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76년 중정부장 취임 때부터 요직에 앉은 이상 박정희의 변화를 유도하자고 생각했으나 이후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 78년부터 박정희 암살에 대해 체계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였으며, 78년 12월부터는 정말 살해밖에 답이 없다고 보았다고 말한다. 79년 4월에 10.26과 같은 방식으로 시도를 생각하였으나, 당시엔 경비가 보다 삼엄했기 때문에 6개월 가량 미루었고, 부마항쟁 당시 차지철과 박정희의 발언을 들은 후 거사를 일으켰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죽기 직전의 사람이 자기 명예를 위해서 하는 변명으로 보기엔 꽤나 복잡하고 세세하다. 또한 거사 직전 자신의 동조자들이 '각하도 포함됩니까?'라고 묻자 '물론이다'라고 답했다. 자신의 옛 제자였던 이만섭에게도 넌지시 이를 암시하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박정희 살해 이후 대처 및 행보는 지리멸렬하다는 평이 많은데, 이는 김재규가 부마항쟁, 차지철의 편집증적인 권력욕 등 여러 가지 사안을 동시에 겪고 있었기에 박정희 살해 계획의 성사 여부에만 집중하였고, 그 후의 계획을 미완성으로 남겼다는 의견이 있다.

한편 김재규 본인은 박정희의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점에 대해선 재판에서 노코멘트로 일관하였는데, 이는 10.26이 어떠한 감정도 없는 깨끗한 혁명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던 김재규의 의지가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변호사가 박정희의 부도덕성을 보이기 위해 공범으로 기소된 박선호의 증언 발언에서 술접대에 관한 언급을 유도했으나 이를 막았고, # 김재규와 가까운 관계었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박정희의 전화가 오면 일어나 차려 자세로 전화를 받거나, "각하 명령이면 어디든 가야 한다"고 말하는 등 생전 김재규의 박정희에 대한 충심이 높았다고 말했다. # 실제로 김재규는 10.26 혁명으로 자유민주정권이 안전하게 출범하면 박정희 묘소에 묘막을 짓고, 죽을 때까지 시묘하면서 살겠다고 했다. # 김재규의 여동생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김재규는 10.26 이전에 둘째 남동생에게 '박정희를 죽이겠다'면서 거사 후엔 박정희의 무덤 앞에서 권총으로 자살하겠다는 말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 그러나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진심으로 충성한 것이 아니라는 반박의견 또한 존재한다. 김재규는 10.26 이전에 수차례나 박정희의 암살을 시도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한 바 있고, 김재규의 수사를 총 지휘한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도 회고록에서 김재규의 언동에서 박정희에 대한 존경심이나 충성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으며, 10.26 직후 김재규를 목격한 국무위원들이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고도 전혀 슬퍼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고 의아해했다는 증언 등 위의 언급을 반박할 행적들이 많이 존재한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심각한 치부인 박지만의 도덕적 해이 및 대학진학에 관한 문제와 박근혜사이비 교주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도 공개된 재판이 아닌 1980년 1월 항소이유 보충서에서만 언급하였다. 이러한 정황상 김재규가 공인으로서의 박정희는 살해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으면서도 군인으로서 충성해야 되는 상관이자 자신의 고향 선배, 은인인 자연인으로서의 박정희는 존중했을 수 있다. 실제로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박정희와는 친형제간도 그럴수 없을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말했으며,# 김수환 추기경 역시 평소에 김재규가 자신의 입으로 대통령과는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고 몇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했다고 회고했다.#

김재규는 법정 최후 변론에서 "박 대통령은 많은 국민이 희생되더라도 그만 둘 사람이 아닙니다. 본인이 이를 알기 때문에 유신의 지주 역할을 담당한 사림이지만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뒤돌아서서 그 원천을 두드려 부순 것입니다"로 진술하며 사전에 계획하고 있었다는 의도를 표했다. # #

하지만 이런 모습이 나타난 개인적인 이유로는 박정희 암살을 그 당시 법원에서 정당화하면 더욱 치졸하게 느껴져서 오히려 역효과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박정희의 치부를 까발리는 것을 자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58]

5. 트리비아[편집]

  • 사건 현장인 궁정동 안가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1993년 철거되어 시민공원인 무궁화동산으로 바뀌었다.

  • 공교롭게도 딱 7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가 일어났었다.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저격 사건이 같은 날 일어난 점 때문에 호사가들 사이에선 이런저런 말이 많은 편이다. 물론 아직은 호사가들의 생각과는 달리 김재규가 하얼빈 의거를 고려했는지는 증거가 없다.

  • 디시인사이드국내야구 갤러리, 예전 주식 갤러리 등에서는 박정희를 비하하는 의미로 이 날을 '대국절', '탕탕절', '관통절', '발터절'(...)[59] 등으로 칭한다. 일베가 장악하기 이전 주갤은 거의 김재규 팬클럽 수준이라 김재규 장군을 의사라 칭하며 묘까지 찾아가는 사람도 있고, 실제 고인의 재평가와 명예회복을 위해 유족 접촉, 성금 모금 같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런 글을 올리기도 했다. 다시 쓰여지는 김재규.

  • MBC에서 매년 12월 31일에 열리는 MBC 가요대제전의 전신은 10대 가수 가요제 였는데, 원래는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다가 이 사건 때문에 연기되어 12월 31일에 열리게 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1979년 10월 20일 신묘한 통찰력으로 박정희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하는 말도 안되는 선전이 있다고 한다. 축지법도 쓰신다는데 오죽하랴

  • 이 사건의 생생한 목격자였던 심수봉은 전두환이 집권한 후 유신 정권을 철저한 부패 정권으로 낙인 찍으면서 무려 2년 동안이나 가수 활동을 정지당해야 했고, 신재순 또한 주변의 따가운 눈총에 시달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 참고로 김재규의 유족들도 이후 상당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또 김수환 추기경이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사후 유족들을 어느 정도 챙겨줬다고.

  • 대전광역시홍선기는 10.26 사건 당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아산군수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 유례 없는 현직 국가 원수 저격 사건이라 사건 전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고 한다. 삽교천 방조제 준공 치사를 박정희가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으나 참석자들의 말에 따르면, 여느 때와 달리 힘이 없어보였고[60], 준공비 제막식에서는 헝겊이 벗겨지지 않아 경호원들이 낑낑거리며 헝겊을 내렸으며[61], 행사를 마치고 전용 헬기를 타고 도고온천으로 갔을 땐 근처 울타리에 갇혀 있던 사슴이 헬기 착륙 소리에 놀라 날뛰다 기둥에 머리를 부딪혀 뇌진탕으로 즉사하기도 했다.

  • 2016년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PC 관련 보도가 나가며 본격적으로 촉발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나라가 뒤집어진 상황 속에서 10월 26일을 맞이하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계속 실검 순위에 오르는 등, 10.26에 대한 재평가가 역사학계를 넘어 일반 대중에게도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와 그의 딸 박근혜가 서로 비슷한 날 정치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셈.[62] 김재규를 평가하는 책들이 다시 서점가에 재발간되기도 했으며, 박근혜 탄핵안이 가결되었을 때와 탄핵안이 헌재에서 인용되었을 때 김재규 묘소에 탄핵 관련 기사가 올라온 신문을 놓고 가는 등 많은 참배객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 박근혜 대통령에게 탄핵 주문을 선고한 이정미 헌법재판관(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임명 청문회에서 "고등학생 때 원래 수학교사가 꿈이었는데, 10.26 사건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보고 법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고 말한 바 있다. # 운명의 장난이라면 장난일 수도 있겠지만, 10.26은 여러모로 민주주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사건이 된 셈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로 인해 한때 아버지는 탕탕탕 딸은 땅땅땅이라는 단어가 반짝 유행한 적도 있다.

  • 박정희의 동거녀 였던 이현란[63]은, 前 동거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식사하던 중에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접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다 먹었다고.

  • 사건 당시 김재규가 사용한 총기인 발터 PPKM36 리볼버는 증거품으로 보안사령부에서 몰수하였는데 그 뒤의 행적이 묘연하다. 당시 수사기록을 보면 원래 서류상 중앙정보부가 소유한 총기여서 중앙정보부에 반납했다고 나오는데, 정작 국가정보원에서 확인 결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6. 어록[편집]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YH 사건 당시 연설.[64]

김영삼 총재는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인데, 이를 함부로 국회에서 정치적 의도로 제명해서는 안 된다.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게 되면 각하께서 불행해질 것이다.
전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 당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당시.

박정희가 그가 바라는 대로 추가 6년의 임기를 더할 경우, 그는 아마도 살아서 임기를 마치지 못할 것이다.
도널드 그레그, 전직 CIA 한국지부장, 1976년 텍사스대 연설.[65][66]

박정희의 죽음은 한국사 최대의 비극이다. 마치 호랑이가 날개를 꺾인 것 같은.
다나카 가쿠에이

그분이 그렇게 빨리 허무하게 돌아가실 줄은 몰랐어. 인생도 허무하고 정치도 무상한 거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10.26 소식을 전해 들은 직후.

하나님도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박정희를 조문하면서[67]

인간 박정희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고인께서 군인과 대통령으로서 보여주신 애국심은 열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인은 국토 구석구석, 국민 생활 속속들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마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고인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에 실로 빛나는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충격적 사건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아집과 탐욕, 증오와 폭력을 우리 가슴속에서 씻어 내고 용서와 화해, 사랑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국민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나라, 억압과 폭력의 공포가 없는 나라입니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국상을 끝낸 후에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역사적 운명은 크게 발전할 수도, 침체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 곧 갈림길이며 위기의 고비입니다.

김수환 추기경. 1979년 11월 2일 명동성당 박정희 대통령 추도 미사에서.#

특이한 사람이다. 중정부장이면서도 항상 민주주의에 대해서 얘기하고 다녔다.

윌리엄 클락, 전 미 대사관 정치참사관

민주주의쿠데타암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이뤄야 진정한 민주주의입니다.

김대중 당시 민민연합 공동의장, 10.26 직후 인터뷰 당시.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심장을 쏘았다. 나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리 한 것이었다. 아무런 야심도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

ㅡ김재규 중앙정보부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사형장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나는 여기서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늘의 심판인 제4심에서 이미 나는 이겼다는 것 입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최후 변론에서 한 말.

7. 사진[편집]

파일:external/dimg.donga.com/41340816.1.jpg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가수 심수봉(왼쪽 모자 눌러쓴 여성)과 신재순(오른쪽).

파일:attachment/10.26 사건/10.26.jpg

10.26과 관련된 인물들. 박정희를 중심으로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재규, 오른쪽 끝이 차지철이다. 사진은 10.26 사건 4년 전 사방공사 시찰 때의 모습이다. 사진에 나와 있는 좌우 두 인물의 위치가 박정희의 왼팔과 오른팔의 위치와 같다는 점이 흥미롭다. - 사진 출처 : 뉴스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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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전모를 브리핑하는 당시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육군 소장.

8. 창작물[편집]

  • 제4공화국
    박근형이 극강의 김재규 포스를 보여주었다. 역대 최강의 포스를 자랑하는 김재규로 차지철을 쏠 때에 "이 새끼 너 건방져!"는 가히 명대사로서, 삽교천 행사 참석을 하지 말라는 차지철(이대근 역)과의 전화상 말싸움과 전화가 끊기자 "이런 개새끼!"라고 뇌까린 적도 있다. 박정희를 저격하기 전 집무실에서 빈 총의 방아쇠를 당기며 일본어로 '코로시마스(殺します, 죽여 버리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릴 때의 포스는 압도적이다. 10.26 사건을 다룬 영상 매체에서 김재규가 '코로시마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4공의 해당 장면에서는 자막은 '고로시마스'라고 뜨는데, 김재규 역을 맡은 박근형의 대사는 "코로스(殺す, 죽인다)"였다. 존댓말과 반말의 차이. 그 장면에선 아이러니하게 박정희의 사진이 배경으로 보이면서 총을 겨누니, 가히 긴장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명장면(근데 이건 영화 택시 드라이버 표절 냄새가 나긴 한다. 오마주라고 해줘) 박정희 저격 후 체포되고 난 다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후 등장이 없다가, 5.18 이후 4공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차지철과 말싸움을 주고받으면서 개그 캐릭터화가 되실 뻔하였으나 배우의 포스로 그나마 무게를 잡았다. 다만 육군본부 앞에서 보초병이 정승화를 알아보지 못해 "어느 대학 총장님이신지?" 라고 묻는 부분은 없다. 또한 김치열 법무장관이 "그놈의 새끼가 기고만장하며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 라고 외치는 대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재규의 총에 맞아 서거라니..."라고 말한다.

  • 코리아게이트
    사극에서 정도전 전문 배우로 유명했던 김흥기가 김재규 역을 맡았다. 제4공화국과 같은 시기에 방영되어 드라마는 신통치 않았고 4공에 묻힌 감도 있다. 배우가 배우인지라 연기력 자체는 훌륭했지만, 워낙 4공에서의 박근형 포스가 막강했던지라 그에 비하면 살짝 역부족. 그런데 드라마 초반에는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가 후반부에 착용한다. 이 드라마 19화와 마지막화 20화는 김재규의 일생이 중심이다.

  • 그때 그 사람들
    김재규와 10.26 사건을 주제로 한 블랙 코미디 영화. 백윤식이 김재규 역을 맡았는데, 특유의 능글맞은 이미지가 김재규 역에 잘 녹아들었다. 이런 류의 풍자 코미디가 드문 한국에서는 괜찮은 편에 속하는 수작이다. 다만 조롱과 희화에 중점을 둔 나머지 영화 속 청와대 사람들을 묘사할 때의 고증은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박정희와 관련자를 풍자하는 부분에서 역사 사실과 다른 경우도 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김재규: 야, 임마 차실장.
    차지철: 어?
    김재규: 만 명?
    차지철: 만 명.
    김재규: 너 하나 죽으면 돼.(탕!)
    차지철: 어얽!
    박정희: 뭐꼬?
    김재규: 나야.(탕!)
    (꺄아아악)(철컥)
    차지철: 잠시만! 잠시만! 잠시만! 으아앍! 다아앍!(불꺼짐)
    김재규: 불켜어ㅇㄺ!

  • 제5공화국
    이 작품 또한 중반부까지 명품 역사 드라마. 여기서도 김재규가 포스 있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김재규 역을 맡은 김형일이 실제 김재규와 외모,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다만 연기는 너무 점잖아보이는 감도 있다(사실 큰 차이라면 배우와 실존 인물의 음성 차이). 또한 어느 국밥집에서 박정희의 유고를 다룬 뉴스가 보도되자 "잘 죽었다! 독재자!"라고 하는 사람과 "각하께서는 나라의 아버지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라는 사람이 싸움이 붙는 장면 또한 백미. 별것 아닌 장면 같지만 이는 오늘날까지도 극명하게 엇갈리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간단명료하게 보여준 장면이다. 참고로 문서 맨 위의 10.26 사건에 대한 여러 인물들의 평 가운데 백동림 당시 합동수사본부 수사 1국장이 한 말을 이 드라마에서는 이학봉이 하는 것으로 나온다.

  • 10.26 사태를 다룬 소설로 김진명불쏘시개'한반도'가 있다. 10.26 사태의 CIA 개입설을 다룬 이 소설은 최근 1026으로 개작되어 재출간되었다.

  • 증발(1994)
    김형욱[68] 암살 사건을 다룬 신상옥 감독의 영화로 최후반부에 묘사된다. 다만 시대 때문에 사전조사를 못했는지[69], 극적 연출을 위해서였는지 고증오류가 제일 심한 축에 든다. 궁정동부터가 정말 중세시대 양식의 궁전 같은 인테리어로 나오고, PPK의 탄걸림이나 정전에 관한 묘사도 없이 그냥 이상규(신성일 분, 김재규)와 국가보안부 요원들이 권총과 M16까지 쏴대며 대통령 한성태(조지 타케이 분, 박정희)와 경호실장 김영철(김동현 분, 차지철), 경호실 요원들을 한큐에 몰살시켜 버린다. 묘사를 보면 도망가는 경호실 요원들을 중정 요원들이 쫓아가서 총을 난사해 죽이는 등 엄청 요란하다. 그리고 일을 끝마치고 난 뒤 이상규가 궁정동을 나서려는데, 이미 헌병들이 체포하려고 와 있었다. 하긴 그렇게 쏴댔는데 안 올 리가 근데 개연성도 진짜 엉망인 게, 분명히 일을 저지르고 나온 지 시간상으로 1시간도 안 된 거처럼 묘사되는데 헌병 장교는 "미국은 이미 비상 사태에 들어갔어!"라는 말과 함께 "미국은 대통령 시해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라는 뉴스 속보가 흘러나온다(...) 거사를 치른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 송강호 주연의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서도 나온다. 다만 이 작품은 실제 역사와 많이 다른 부분이 있다. 예로 경호실장은 1974년 육영수 저격 이후 박종규에서 차지철로 바뀌었으나, 여기서는 차지철이 모티브인 인물이 그냥 5.16 이후 그대로 경호실장이다. 애당초 풍자 영화에 가까우니 역사적 고증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 웹툰 제 0시 : 대통령을 죽여라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하다가 뜬금없이 다른 전개로 흘러간다. <26년>보다 자극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보니 댓글 상황은 개판. 게다가 원래 사건과는 다르게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전 중앙정보부장을 암살했다는 식으로 더 저평가를 내리려고 작가가 노력하는 바람에, 은유라고 보기에 너무 직설적으로 비방하는 내용이 되어 버렸다.



  • 윗동네에서는 당연히 왜곡되어 다뤄지고 있는데, 남한 출신의 고위급 월북자의 전기를 다룬 민족과 운명 13부 홍영자 편 3화[70]에서 그려지고 있다(다른 월북자와 달리 홍영자는 가상의 인물이다). 여기서는 궁정동 비밀 요정에서 여자들을 데리고 니나노를 벌이던 중 박정희가 김재규를 김영삼 구속 건으로 질책하고 차지철이 신민당 놈들 탱크로 어쩌고라고 떠들자, 김재규가 비서실장에게 "각하를 똑바로 모시라"고 한 뒤에 "각하, 저런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 하고 차지철의 팔뚝을 쏴버렸다. 박정희가 삿대질을 하며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이러느냐. 그만두지 못해" 라고 외치자 김재규는 비웃음을 흘리며 "야, 박정희" 라고 일갈하며 발사했고, 박정희는 테이블보를 붙잡고 술상을 와장창 무너뜨리며 쓰러졌다. 이후 중정 요원들이 경호원들을 처치한 후 김재규는 의전과장의 총을 빌려 차지철을 쏜 뒤에 네 발의 확인 사살로 박정희의 숨통을 끊었다. 몇 가지 왜곡된 장면(ex. 경호원들이 군복 차림에 거의 한개 소대 병력인 점,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만 따로 불러 쿠데타를 지시한 것과 달리 안가 요원을 전부 불러놓고 모의한 점, 김재규가 평소 형님으로 모신 김계원에게 반말을 하는 점, 나름 개신교 신자라 술을 마시지 않던 차지철이 꽐라가 된 점 등)을 빼면 위에서 언급한 다수설에 근거하는 내용이다.

  • 박정희/전두환 시대를 그린 미국의 불쏘시개 소설 파문[71]에서는 말 그대로 마약을 동원한 환락파티 끝에 김재규가 몇 달 전부터 준비한 총과 기생들의 독침에 의해서 벌어진다. 박정희는 원래대로 총, 차지철은 독침에 찔려죽는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은 독실한 불교도인 박정희가 핵개발을 하고 미국과 단교하고 기독교를 불법화할 계획을 세운 것을 알게 된 미국에서 꾸민 일이였고 이미 기생 대장 이손지[72]와 짠 갑툭튀한 전두환이 그걸 낼름했다는 이야기. 어느 정도냐면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자마자 전두환이 공수부대 병력을 끌고 안가에 들이닥친다. 소설 마지막에는 미국에서 전두환도 그렇게 처리할 준비를 하지만 전두환은 이미 눈치 챘다는 걸 암시한다. 당연히 내용이 내용인지라 8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출판 후 한국에서 일월서각을 통해 번역판이 나왔을 때 사장부터 여직원까지 모두 보안사에 끌려갔다. 그래서 80년대 해적판에서는 하나같이 파르크 대통령, 큐우 부장, 츙크[73] 장군 등으로 표기되었다.

  • 팬텀 하록의 만화 포천에서 프롤로그에 70년 간격으로 같은 날 벌어진 하얼빈 의거와 교차해서 등장한다.

  • 영화 동감에서 아침에 등교하기 전 TV를 보던 여대생 윤소은(김하늘)이 10.26 사태를 다룬 뉴스를 보면서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고, 소은의 아버지는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까봐 딸이 두려워하는 줄 알고 당장 달려가 딸을 토닥이며 달래주는데[74], 사실 소은에게 있어 박정희의 사망 따윈 아오안(...) 소은은 단지 1979년에 10.26 사태가 벌어질 거라는 걸 미리 알려준 2000년의 지인(유지태)이 실존하는 인물임을 이를 통해 알았고, 현재 소은이 짝사랑하는 선배와 자신의 절친 사이에서 태어난 인의 존재로 인해 자신의 짝사랑이 결코 이뤄질 수 없음을 깨닫고 슬퍼한 거다.

9. 관련 인물[편집]

9.1. 가해자[편집]

  •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가해자.

  • 박선호 - 중앙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 가해자.

  • 박흥주 -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 포병대령, 가해자.

  • 이기주 -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조장, 가해자.

  • 유성옥 -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운전기사, 가해자.

  • 김태원 -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원, 가해자.[75]

  • 이 외 중정 안가 경비원 유석술이 증거 인멸 혐의(사건에 사용된 총기를 안가 정원에 매장)로 체포되었다. 또다른 경비원 서영준은 박정희를 병원으로 옮길 때 유성옥과 같이 가 병원 관계자 및 대통령 주치의를 총기로 위협했다가 체포, 같이 징역형을 받았다.


살인 가해자 6명은 모두 사형이 집행되었고, 증거 인멸에 가담한 유석술과 서영준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9.2. 사망자[편집]

  • 박정희
    - 김재규의 저격에 우측 흉부 관통상과 후두부 총상으로 사망.

  • 차지철 - 대통령 경호 실장,
    - 김재규의 저격에 우측 손목 관통상과 복부 총상을 입은 후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 당함.

  • 정인형 - 대통령 경호실 경호처장,
    - 박선호의 저격에 목 관통상으로 사망. 해병대 간부사관 장교 출신이자 박선호의 동기였다.

  • 안재송 - 대통령 경호실 경호부처장,
    - 박선호의 저격에 흉부 총상으로 사망. 정인형과 같은 해병대 간부사관 장교 출신이었고 정인형과 박선호의 후배였다.

  • 김용섭 - 대통령 경호실 경호관,
    -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의 저격에 의해 사망.

  • 김용태 - 대통령 경호실 특수차량운행계장,
    -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의 저격에 의해 사망.

9.3. 생존자[편집]

  • 김계원 - 대통령 비서실장, 사건 목격자.

  • 심수봉 - 가수, 사건 목격자.

  • 신재순 - 모델, 사건 목격자.

  • 박상범 - 대통령 경호실 경호계장, 사건 피해자.[76]

  • 이정오 - 중앙정보부 안가 요리사, 사건 피해자. 별관 식당에서 대통령 경호원들과 식사중 안가 경비원의 소총 사격에 허리 총상을 입고 후송. 이후의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척수장애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보상이나 제대로 해 주었을지. 근대사에서 이렇게 큰 사건에 휘말린 일반인들은 보상도 못 받고 그대로 묻힌다.

  • 김용남 - 중앙정보부 안가 식당 차량 운전사, 사건 피해자. 별관 식당에서 대통령 경호원들과 식사 중 안가 경비원의 총격에 어깨 총상을 입고 후송. 이 사람도 이후 소식이 없는데 역시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은 상황에서 어렵게 살았을 법 싶다.

9.4. 후속 조치[편집]

  • 정승화 - 육군참모총장, 박정희 사망 후 계엄사령관.

  • 최규하 - 국무총리, 박정희 유고 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비상국무회의 주관.

  • 김정섭 -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사건 당일 김재규의 지시로 정승화 장군을 김재규 대신 영접했고, 직후 김재규가 암살범임을 안 뒤 보안사와 협조해 중정 내 자신들의 직원들을 동원, 안가에 남아있던 김재규의 부하들을 체포하고 만약을 대비해 안가 내 탄약고를 처리하는 등[77] 뒷수습을 맡았다.

  • 전두환 -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10.26 사건 수사 지휘자. 그리고 동년 12월에 12.12 군사반란을 주도했다.


[1] 사실 한국사 전반에서도, 임기 중에 수반이 살해된 사례는 극소수다. 최후가 나쁜 왕도 일단 권좌에서 내려온 다음에 처리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참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고구려 모본왕 암살 사건, 백제 부여(책계/)분서 부자동성왕, 연개소문영류왕 시해, 고려 공민왕 시해 사건 정도가 고작이다.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지도자인데 무턱대고 죽이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 폭군도 나름의 지지세력이 아예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든 후폭풍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2] 공교롭게도 70년 전 이 날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격했다.[3] 한때 백의사의 단장 염동진이 살았던 곳으로, 10.26 이후에 철거되었다. 철거된 자리에는 무궁화 동산이 생겼다.[4] 물가 상승률이 경제 성장률을 추월하는 물가 폭등의 시대로 서민고가 가중되었다.[5] 킬링필드를 언급하며 "부산, 마산 시민 100~200만명 쯤 희생시켜도 괜찮지 않겠느냐?"라는 정신 나간 소릴 했다고 한다.[6] 다만 이만섭은 차지철의 과잉 충성과 아부에 점점 무너져가던 박정희를 김재규가 가능한 한 올바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애썼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영상.[7] 사실 이 둘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두환까지 끼어서 알고보면 셋이 서로 속으로는 갈등이 매우 심한 상태였는데, 다만 전두환은 두 사람과는 달리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꾹 눌러 참았다고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아무리 보안사령관이라지만 고작 소장인 전두환은 경호실장 차지철(소장을 경호차장으로 둘 만큼 기세등등했다), 중정부장 김재규(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은 의전상 부총리급이었다)에 비해 끗발이 달렸다.[8] 김종필은 10.26이 계획적인 거사라면 상태가 불량한 총을 사용할 리가 있겠냐며 그 사건은 우발적인 것임이 틀림없다고 단언했는데, 이에 대해 김계원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김재규의 총기는 불량이 아니었으나, 본인이 김재규의 총격을 방해하는 과정에서 내구성에 문제가 생겨 격발이상이 발생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다만 김계원 역시 10.26 사태가 분노에 의해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라고 짐작하던 이들 중 하나다.[9] 여기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이 이휘소 박사인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독재자를 싫어했다.[10] 참고로 차지철은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죽어갈 때, 혼자 살아보겠다고 화장실로 도망갔던 경호실장이다.[11] 그리고 서울에도 계엄령과 군투입을 실행하려고 했다는 증거가 나와 그럴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12] 실제로 1976~1979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시절 중정은 간첩조작 사건이 전임자였던 신직수 중정 시절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그가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인 77년 초 발생한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간첩 사건(혹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인데, 이건 그가 주도한 게 아닌 국군 보안사(현 기무사) 작품이었다고 한다.[13] 그러면서도 김재규는 김종필을 항상 각하라고 불렀다. 김종필이 "이미 각하가 계신데 그런 호칭은 그만 둬 달라"고 했지만 김재규는 "습관이니 양해하시라"며 눙쳤다고 한다. 근데 육사 기수는 김재규가 김종필보다 6기 선배...[14] 정확히는 2차 대전 전황이 연합국에 많이 기운 1944년, 가미카제 훈련을 받던 중이었다. 그가 출동 명령을 받기 전에 종전. 그리고 자원한 게 아니라 징용된 것이었다.[15] 이 때문에 송신소 행사는 민간에 공개되지 않고 치러져, 일반인들에겐 당진 송신소가 아닌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이 박정희 생전의 마지막 공식 행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송신소 행사 장면이 민간에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1999년 KBS 박정희 특집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다.[16] 그리고 이 행사는 살해 직전 마지막 행사가 되었다.[17] 해병대사령부 해체 이후 대한민국 해병대원들은 모두 서류상 해군 상륙병과 인원들로 분류됐다.[18] 섭외를 청와대가 아닌 중앙정보부에서 맡은 이유는 차지철이 일을 중앙정보부에 떠넘겼기 때문이다. 경호실에 쓸 데도 없는 포병까지 배속시키려고 시도할 정도로 경호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을 듯하면 업무와 권한을 닥치고 엮어서 가져가던 차지철로서는 좀 의외의 행동인데, 선술했듯이 그가 김재규를 철저히 기죽여 놓았기에 사실상 자기 밑에 둔 거나 마찬가지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9] 당시에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3학년에 재학생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여대생으로 묘사된다.[20] 대행사를 준비하고 참여하라는 통보를 받고 나서 정승화 총장을 불렀으나, 정 총장에겐 약속을 잡고 나서 급작스레 대통령이 불러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으니 행사 끝나고 바로 오겠다고 둘러댔다.[21] 이 권총은 김재규가 육군대학 부총장이던 1960년, 당시 총장 이성가 장군에게 선물받은 것으로 예편 후 주소 관할지의 성북경찰서에 맡겨 놓았다가 중정부장 취임 후인 1977년 반환받아 집무실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다.[22] 애초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김영삼김대중이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급부상 하자 박정희는 김계원에게 유진산이 대선에 나오도록 뒷공작을 펼쳐 보라며 지시했지만 무위에 그쳤고, 그나마 김대중보다는 상대하기 수월하다고 생각한 김영삼을 신민당 후보로 선출시키려는 시나리오 마저 틀어지면서 박정희에게 미운털이 박힌 김계원은 중정부장 자리를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23] 당시 금액으로 6만원이란 얘기다. 참고로 전태일이 14시간 노동을 하며 당시 차 한 잔 값인 50원을 일당으로 받았고 7, 80년대 대기업 과장 월급이 50만원이었다.[24] 당시 신민당은 김영삼의 국회 제명에 항의하는 목적으로 민주통일당과 더불어 의원 전원(신민당 61명, 통일당 3명)이 국회에 의원직 사표를 낸 상태였고, 중정에서는 신민당 당직자들에게 압력을 넣어 당직에서 사퇴하게 한 후 총재 직무가 정지된 김영삼에게 당권을 빼앗아 정운갑 신민당 총재 권한대행에게 넘기려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그 공작의 일환으로 신민당 의원들의 사표를 선별 수리하겠다는 설을 퍼뜨리며 으름장을 놓던 중, 공화당이 사표를 전부 반환하겠다고 선언하는 통에 중정에 협조적이던 일부 신민당 의원까지 강경노선으로 돌아서면서 중정은 헛물만 켜야 했다.[25] 실제로는 정인형, 안재송, 박상범, 김용섭에 경호실 운전기사 김용태까지 합쳐도 다섯 명이었다. 김재규의 마음을 돌리려고 박선호가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물론 경호실장 차지철 까지 포함하면 여섯 명이라 일곱 명에 근접한 수치이기는 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총기를 소유한 인원은 네 명(...)[26] 평소 청와대 관용차량은 박정희의 육군포병학교 교장 시절 운전병으로 복무한 인연으로 채용된 이타관이 몰았지만 대, 소 행사 때는 비공식 행사용 차량인 토요타 크라운 슈퍼살롱을 운행했기 때문에 이날은 김용태가 슈퍼살롱 운전을 맡았다.[27] 국내 컬러방송 송출은 1980년에 시작되었기에, 몇몇 컬러 TV를 볼 수 있었던 이들이 주한미군을 위한 이 방송을 꽤 많이 시청했다.[28]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경호실 내부 회의 중에 경호실 수행계장 박상범이 "청와대 경호원들의 영향이 안가에선 무력화된다. 조치가 필요하다"라는 건의를 올렸는데, 차지철이 "김재규 부장 정도야 내 파워로 꽉 누르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장면이 있었다.[29]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이던 해럴드 브라운.[30] 박선호가 안가 관리인 남효주에게 "(김재규)부장님께 전화가 왔다고 전해달라"고 지시하여 아무것도 모르던 남효주는 연회장에 들어가 김재규에게 그대로 귀띔했고, 김재규는 박선호가 대기하던 안가 부속실로 가서 거사 준비가 다 되었음을 확인했다.[31] 심수봉의 증언에 따르면 신재순이 음정을 잘 못 맞췄다고 한다. 박정희는 젊고 이쁘장한 처자가 살짝 실수한 게 되려 애교 있게 보였는지 웃기만 했다고 한다.[32] 한편 심수봉은 꾸준히 (당시의) 소수설을 밀어, 제4공화국에서 직접 고증을 맡을 때에도 김재규의 대사를 "이 새끼! 너 건방져!"로 정했다. 근데 총을 쏠 때 차지철 팔은 식탁에 붙어 있었다[33] 안가 요원들의 사격은 거구의 김용섭에게 집중되었고, 김용섭은 다섯 발 중 네 발을 가슴에 피격당하여 쓰러진 채 한동안 신음하다 사망했다.[34] 갑자기 합선되면 펑 하는 폭발음이 난다.[35] 남아있는 증거 사진을 보면 확실히 이 총이다. 아이러니한 건 육영수문세광에게 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36] 이때 얼마나 서둘렀는지 김재규는 구두도 제대로 신지 않고 별관까지 뛰어온 상태였다.[37] 1989년까지 육군본부는 용산구 삼각지에 있었다.[38] 이후 12.12 쿠데타를 일으킨 반란군 세력은 정승화에게 혐의를 씌우면서 이 명령은 정승화가 김재규와 함께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39] 굳이 김재규와 정승화의 연관성을 따져 보자면 1979년 초 3군 참모총장 인선 시에 박정희의 특명을 받은 중정이 총장 후보 인물에 대한 평가서를 작성하여 청와대에 보고했는데, 육군참모총장은 당시 1군사령관 정승화 대장이 1순위 후보였다. 그래서 김재규는 정승화가 총장이 되는 데 일조했던 점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과대평가 한 것이 아니었나 라는 추측도 있다.[40] #기사[41] 박정희가 타고 온 슈퍼살롱 운전사 김용태는 총격으로 숨진 상태라 유성옥이 대신 운전대를 잡았고, 박정희의 시신을 차로 옮긴 안가 경비원 서영준도 같이 병원으로 이동했다.[42] 전역 후 중앙대 의대 교수로 임용되었고, 2014년 정년퇴임했다. 여담으로 이분은 중대 의대 시절에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과 얽혔는데, 1989년 공안정국 당시 의문사당한 중앙대 운동권 학생인 故 이내창 열사의 부검의를 맡아 국과수의 부검 결과와 정반대인 "고인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당한 뒤 자살로 위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견서를 제출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충격이 잊혀지지 않은 대다수 대중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것이다.[43]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티니아벨시콜레' 라고 불렀지만, 정확히는 곰팡이성 피부병인 전풍(癜風, Tinea Versicolor)이었다.[44] 군사정권 아래 중앙정보부(안기부), 보안사령부가 위세를 떨쳤지만, 그들의 순수한 전투력은 수도경비사령부보다 열세였다. 12.12 당시 전두환에게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장태완 수경사령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45] 현 세종대로 21길 TV조선 별관 건물[46] 조갑제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로 가던 김재규를 태운 호송차가 잠수교에서 전복 사고를 일으켰는데, 차가 뒤집어질 때 기절한 신동기 준위가 정신을 차려보니 김재규가 엉덩이로 신동기 준위의 머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고. 김재규가 "아이고 내가 신 선생을 깔고 앉았구먼. 미안하오" 라며 비켜주자 수갑이나 포승줄이 없어서 김재규가 도주하지 못하게 바지춤을 잡고 있던 신동기 준위는 "부장님 어디 도망가시면 안돼요" 라며 손을 놓았고, 김재규도 "내가 어딜 도망가나. 빨리 (전복된) 차나 세우시오" 라면서 조용히 호송에 응했다고 한다.[47] 박흥주는 다른 이들과 달리 육군 대령으로 현역 군인이었기 때문에 군사법원의 단심제가 적용되어 가장 빨리 사형됐다.[48] 1982년 형집행 정지로 석방.[49] 시민혁명과 이로 인한 (하야를 포함하는) 정권 타도에 대해 나쁘게 말해 순진한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다.[50] 이 때는 한국 내 재벌기업이 중동 건설 시장을 개척하며 1970년대 중반 경제 호황의 기반을 만들었다.[51] 각주 5에 대표적인 좌파 역사학자인 한홍구의 김재규 평가가 나왔지만, 한홍구는 2013년에 자신의 주장을 매우 크게 바꾸었다. 한홍구의 주장에 따르면 "비록 김재규가 민주주의를 회복하지 못 했어도 윤보선의 말을 인용하여 김재규가 민주화에 기여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주장하다 못 해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한 날이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날과 같음이 우연이겠냐면서 그를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의 마지막 인간이라 한 다음,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이처럼 한홍구의 평가가 엄청나게 달라졌다. 한홍구가 평가를 바꾼 까닭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김재규 재평가가 2013년에 나왔음이 의미심장하다.[52] 이름은 물론 Brutus이지만 '브루투스, 너마저!' 하는 라틴어 문장에서는 호격어미인 'Brute, et tu!'라고 쓰기 때문에 브루투스의 라틴어 이름을 Brute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53] 이미 부마항쟁 1년 전인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이런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유신 독재 정권의 압도적인 관권, 금권을 등에 업은 집권 민주공화당이 제1야당 신민당에 지역구 득표율에서 오히려 뒤진 것이다. 당시 공화당은 31.7%, 신민당은 32.8%로 그 격차는 불과 1.1%였지만, 민주화를 내세운 제1야당의 득표율이 집권당을 넘어선 건 헌정 사상 최초였다. 여기에 제3당인 민주통일당의 득표율 7.4%를 감안하면 10대 총선은 사실상 집권당의 참패였다. 지역구 당선자는 공화당이 68명으로 신민당의 61명보다 많긴 하지만 차이가 크진 않다. 박정희가 임명하는 유신정우회가 없다면 국회에서 공화당과 신민당은 사실상 박빙 상태였다.[54] 이만섭 전 국회의장도 방송출연 중 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출처.[55] 박정희는 훗날 육사가 되는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생이었고 김재규도 이곳 2기생이었다.[56] 이 문단에서 김계원의 증언은 김계원 생전의 증언이다.[57] 대표적으로 문익환, 함석헌.[58] 출처-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59] 다만 위 사건의 전말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발터 PPK로 박정희를 죽인 것이 아니다. 물론 임팩트는 발터가 더 센지라...[60] 1979년 10월 28일자 동아일보.[61] 조갑제 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62] 10월 24일 보도 이후 25일 대국민 사과, 26일 퇴진 시위 본격화가 일어났으니 같은 날이라고 봐도 어찌 보면 무방할 듯.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박정희는 1961.5.16 쿠데타 이후 18년 만인 79년 비극을 맞이하였는데, 박근혜도 98년 정치 입문 이후 18년 만인 2016년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점이다.[63] 김호남과 이혼하기 전~육영수와 재혼하기 전 사이에 동거했다.[64] 10.26 사태가 일어나기 약 두 달 전이다.[65] 미국이 10.26의 배후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 계기기도 하다. 다만 도널드 그레그는 그냥 쿠데타나 암살 가능성을 예측한 것일 뿐이며, 미국 정부가 10.26에 관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부인하였다.#[66] 도널드 그레그는 CIA의 동아시아 지역 전문가로 30년이 넘는 기간동안 베트남, 한국, 일본을 오가면서 활동하였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주한 미국대사로도 재직했으며, 은퇴후에는 미국내 한국전문가들을 한데 모은 코리아소사이어티를 창립해서 한미관계, 북미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미국내 한국통중에서 최고참격인 인물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굶직굶직한 사건마다 미국쪽 관계자로 이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67] 다만 이건 겉치레일 확률이 높은게, 2003년 일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10.26 당시 소회를 전하며, 박정희 사망시 솔직히 죽어도 싸다(...)고 생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다.[68] 극중에서는 박진욱이라는 이름으로 김희라가 역할을 맡았다.[69] 신상옥 감독은 사건 당시 전 아내 최은희와 함께 북에 납치된 상태였다.[70] 시간 없으면 8분 13초부터.[71] 툼스톤의 비밀, 파문, 10.26과 기생 이손지 등등의 여러 버전으로 국내 출간되었다.[72] 아버지가 민주화 인사였다가 고문당해 사망하고 이 여자도 연좌제에 걸려서 체포되었다가 중정에 의해 기쁨조로 키워졌단다...[73] 혹은 이중 장군.[74] 달래는 대사가 "괜찮아, 전쟁 안 나"다.[75] 위에 나열한 5명들처럼 직접 총격에 가담하진 않았으나, 사건 직후 뒷처리 중 박선호의 명령을 받고 M16 소총으로 피해자들의 주검에 총격을 가해 확인사살을 하였다. 본래 이 날은 비번이었으나, 다른 경비원의 사정으로 대신 근무하러 나왔다가 이 사건에 휘말렸다.[76] 여담으로 이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박상범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에도 계속 경호실에서 근무했고, 김영삼 정권 출범 때 경호실장으로 임명되어 최초의 민간인 출신 경호실장이 되었다. 박상범은 육영수 저격 사건 때 직접 총을 들고 뛰쳐나왔던 경호원 중의 한 명이었고,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때도 경호원으로 있다가 살아남았다.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얽힌 인물이자 생존왕.[77] 일설에 따르면 1개 사단 평시 재고분의 소총 탄약을 전부 그 자리에서 실탄 사격해 소모시켰다고 한다. 개노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