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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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경 찍혔다고 하는 사진

黃徹 (1912년 1월 11일 ~ 1961년 6월 9일)

1. 소개2. 생애
2.1. 초기 생애2.2. 연기에 입문을 하다2.3. 홍순언과 배구자의 인연2.4. 인기스타가 되다2.5. 일제강점기 말기2.6. 광복 이후
3. 연기 스타일, 배우로서의 평가4. 미디어에서5. 그 외

1. 소개[편집]

황철은 일제강점기때의 조선, 북한의 배우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1912년 1월 11일, 청양군수를 지낸 황우정의 아들로 충청남도청양군에서 태어났다. 배재고등보통학교[1]를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 근거가 없고, 춘천고등보통학교[2]를 다니다가 어려워진 가정형편으로 인해 학교를 중퇴하고 돈을 벌기 위해 운전 기술을 배웠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운전기사가 인기직종이자 유망직종[3]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6개월간 조수로 운전 기술을 배운 후 택시 운전사가 되어 주로 춘천과 홍천을 오가다가, 어느 날 음주운전으로 큰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는데, 하필이면은 차 안에 승객으로 홍천의 주재소장의 딸이 탑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철에게는 불운하게도 이 사고로 이 여성은 얼굴에 큰 화상을 입고 말았고, 시집도 안 간 젊은 처녀가 얼굴에 화상을 입고 말았으니, 그녀의 혼삿길은 막힌 것이나 다름없게 된 안타까운 상황. 결국 주재소장은 그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사고를 낸 황철에게 "감옥에 가는 대신, 장애를 입은 내 딸과 결혼하여 내 딸을 평생 책임지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황철은 감옥행을 피하기 위해 원치 않는 결혼을 하였고,[4] 그렇게 원치 않던 결혼을 한 황철은 결혼 직후 야반도주를 하였고, 황태철이라는 가명으로 지방의 유랑극단에서 잡일을 하며 연기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고, 결국 극단이 경성에 올라왔을 때 몰래 빠져나와 간판집에 취업했는데, 그가 그림과 글씨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2.2. 연기에 입문을 하다[편집]

간판집에서 황철은 극장의 간판그림을 그리다가 1931년 말 당시 유명 극단이었던 조선연극사에 연구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지방 극단의 듣보잡 잡부에서 당대의 유명극단의 연구생이 된 것도 행운이었지만, 더 큰 행운이 그에게 찾아오는데 조선연극사에서 공연을 준비 중이던 연쇄극[5] '청춘난영'의 주인공 이경환이 아편을 피우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가고 만 것이다. 그리고 황철은 이경환의 대역으로 발탁 되어 '청춘난영'에서 첫 주인공을 맡으며, 강홍식(姜弘植)[6], 전옥[7], 변기종, 지두한 등의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 공연을 나름 무난하게 마치게 된다.

뜻하지 않은 행운으로 주인공을 꿰찬 황철에게 이후에도 계속 주인공을 맡을 기회가 주어졌는데, 지방 공연을 꺼리는 강홍식을 대신하여 조선연극사의 지방 공연에서 항상 주인공을 맡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서서히 이름을 알려가던 황철은 연출가 홍해성에게 가르침을 받아 연기력에 있어서도 점점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지만, 그러나 1935년 조선연극사에서 공연하였던 '신라의 달'이 검열에서 문제가 되어 단원들 10여 명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연극사의 활동은 크게 위축이 되고 말았으며 극단은 재정난에 휩싸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조선연극사를 이끌기 위해 전 재산을 투자했고 3명의 딸마저 배우로 키웠던 지두한의 큰 딸이자 조선연극사의 인기 여배우였던 지최순이 심장병과 폐결핵으로 쓰러지자 지두한은 결국 극단을 해산하기로 결정하였고, 지두한과 그의 딸 그리고 황철을 포함한 조선연극사의 단원 전원은 1935년 7월 개관한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청춘좌로 그 소속을 옮기게 된다.

2.3. 홍순언과 배구자의 인연[편집]

동양극장의 설립자인 홍순언은 열차 식당의 종업원으로 시작하여 호텔 지배인과 극장의 사장으로 입지적인 성공을 거둔 인물인데, 동양극장을 개관했을때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었다고 한다. 홍순언의 부인 배구자는 배정자의 조카로[8] 11세 때 텐카츠 예술단[9]에 입단하여 쇼코쿠사이 텐카츠의 양녀가 되어 무용을 배운 이래 텐카츠예술단의 최고 스타가 되었는데, 1926년 6월 4일 공연을 마치고 돌연 텐카츠예술단에서 탈출하여 잠적하는데[10], 이때 배구자의 탈출을 도와준 이가 당시 배구자가 머물고 있던 평양철도호텔의 지배인 홍순언이었고 그 인연으로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된다.[11]

배구자가 어째서 텐카츠예술단에서 탈출하였고, 탈퇴하게 되었는지는 그 이유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텐카츠예술단의 단장이자 양모였던 쇼코쿠사이 텐카츠의 의붓아들과 사랑에 빠지게 돼서 그 처지가 곤란해 졌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긴 하지만 정설은 아니다. 참고로 배구자의 텐카츠예술단 무단 이탈은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던 일인데, 1921년 6월 배구자의 탈주를 보도한 매일신보의 신문기사는 배구자가 배정자의 딸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가 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텐카츠예술단에서는 배구자의 탈주를 배정자와 배구자의 부모의 음모로 인한 것으로 몰아 붙이면서, 그 이전에 일본에서 있었던 탈주 사건도 배구자의 부모가 텐카츠예술단에 돈을 요구하였다가 거절 당하자 배구자를 탈주시켰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매일신보에서 보도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텐카츠예술단을 탈퇴한 배구자는 은인인 양어머니를 배신하고 도망친 배은망덕한 여자로 몰려 위기를 맞이하지만, 1929년 6월에 국내 최초[12]로 배구자무용연구소[13]를 개소하였고, 텐카츠예술단의 방식으로 소녀 단원들을 모집하여 맹훈련에 들어갔고, 곧 배구자무용연구소는 배구자예술연구소, 배구자소녀가극단 등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본격적인 공연에 나선다.

홍순언은 그런 배구자의 매니저 역할을 하였고 일본의 여러 흥행사들과 손을 잡고 배구자소녀가극단의 일본 순회공연에 들어갔는데, 그 일본 순회공연에서의 흥행으로 수익이 제법 나면서 이에 자신감을 얻은 홍순언은 마침 극장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지라, 와케지마 후지로라는 야쿠자 흥행사와 손을 잡고, 그의 자금지원을 받아[14] 1935년 11월 국내 최초의 연극 전용 국장 동양극장을 개관하게 된다.

황철을 설명하는 항목에서 이야기가 잠시 딴 길로 빠졌는데, 황철을 설명함에 있어서 동양극장을 빼놓을 수 없고, 또 동양극장을 얘기함에 있어서 홍순언과 배구자 부부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개관한 동양극장은 총 3개의 전속극단을 두고 있었는데, 청춘좌와 사극을 전담적으로 공연하는 동극좌 그리고 희극전담의 희극좌가 있었는데, 동극좌와 희극좌는 후에 호화선으로 통합된다.

동양극장에는 당대의 명망 있는 작가, 연출가, 배우들이 모두 모였는데, 우선 홍순언의 먼 친척[15]인 소설가, 극작가 최독견이 지배인으로, 극작가 겸 연출가인 박진이 부책임자이자 청춘좌 전속 연출가로 실무를 책임지고, 최독견을 필두로 이서구, 송영, 임선규, 박영호 등의 전속 작가진에, 홍해성과 박진 두 당대 최고의 연극 연출가가 소속되어 있었고, 전속 극단인 청춘좌에도 황철, 심영, 차홍녀, 서월영, 김선영, 김선초, 지최순, 지경순, 지계순, 지두한 등의 당대의 유명 배우들이 모여있었다.

2.4. 인기스타가 되다[편집]

아무튼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상술했듯이 조선연극사는 해산되고 새로 개관한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청춘좌로 흡수되었는데, 이제 막 주연을 맡기 시작하여 이름을 얻기 시작한 황철로서는 이미 일본에까지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유명 배우였던 심영은 넘어야할 산이었고, 라이벌이었다. 두 사람은 동양극장의 청춘좌에서 공연한 여러 작품들에서 주역을 맡으며 선의의 연기 경쟁을 펼쳤는데, <춘향전>에서는 황철이 이몽룡, 심영이 방자 역을 맡았고, '단종애사'[16]에서는 황철이 문종, 심영이 성삼문 역을 맡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심영이 황철에 비해 그 인기나 위상이 우위에 있는 편이었지만, 이후 이 구도가 결정적으로 뒤집히게 되는 작품이 바로 <홍도야 울지 마라>라는 제목으로도 유명한 임선규 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다.[17]

동양극장에서 야심차게 준비하고 공연했던 '단종애사'가 수양대군이 왕의 자리를 찬탈하고 조카인 단종을 죽인다는 내용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 내용이 조상을 모욕하는 내용이라는 이유로 이왕직[18]이 공연 중단을 요청해 와 결국 '단종애사'가 조기종영되자, 땜빵으로 선택된 작품이 바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인데, 임선규가 이 작품을 처음 탈고하였을 때 최초 원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청춘좌의 연출가인 박진은 이 작품을 읽어 보고 "내가 싫어하는 신파극의 내용이 이 안에 전부 다 들어있다."며 이 작품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는데, 그러나 동양극장의 사장인 홍순언은 이 작품을 마음에 들어했고,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어했지만, 박진은 "이런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이야기를 누가 보겠냐."며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걸 끝까지 반대했다. 하지만 홍순언은 박진의 말에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의 제목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바꿨고, 박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단종애사'의 조기 종영 이후 급하게 무대에 올릴 마땅한 다른 작품이 없었기 때문에 박진도 더는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걸 마냥 반대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인데 그렇게 급하게 무대에 올려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하게 된 것이다.

홍순언은 "어쨌든 연극해서 돈을 벌려면 덮어놓고 눈물을 팔아야 한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생각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오빠인 철수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여주인공 홍도가 오빠의 친구 광호를 만나 결혼했지만, 기생이었다는 이유로 시가(媤家)의 무시와 괄시를 받다가 결국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남편의 새로운 약혼녀를 칼로 찔러 살해하고 잡혀가서 재판을 받는데, 오빠가 담당 검사다라는[19] 이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막장 신파극[20][21]은 그야말로 온 경성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놓으며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전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공연을 보러 동양극장 앞으로 몰려왔으며, 서대문 경찰서에서 동원된 순사들이 질서 유지를 위해 관객을 두들겨패기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이후 경성에서 수십 번의 재공연이 있었지만 만원관객이 아닌 적이 없었고, 지방공연도 연일 대 성공이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그야말로 동양극장의 마르지 않는 돈줄이었고[22], 이때까지 적자 운영을 하며 돈에 쪼들리던 동양극장은 극장 개관 이후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하게 된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권번의 기생들에게 특히 더욱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어느 정도였냐 하면 기생들이 이 연극을 보러 동양극장에 가느라 요정이 장사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반면 동양극장에는 기생들을 구경하기 위해 장안의 한량들이 몰려 들었다고 한다. 극장 안은 기생들이 피는 담배 연기와[23] 그녀들이 흘리는 눈물로 가득 찼고, 여주인공 홍도의 오빠 철수를 연기한 황철과 여주인공 홍도를 연기한 차홍녀는 기생들의 아이돌이 되었는데, 공연이 끝나면 동양극장 앞에는 기생들이 황철을 모시기 위해 대기시킨 인력거들이 줄을 이어 서 있었다고 한다.[24]

어쨌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인해 황철과 심영의 인기와 위상은 180도 완전히 뒤집혔고[25], 이 때 부터 황철의 전성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하는데, 그럼에도 흑역사가 하나 있었으니,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기록적인 흥행과 동시에 영화화 까지 되었고, 황철과 차홍녀도 그대로 영화에 출연해 영화는 1939년 3월 17일 동양극장과 부민관에서 동시 개봉되었지만, 흥행에도 실패하였고, 1939년 제작된 영화들 중 가장 최악의 실패작이라는 불명예도 얻는다. 이유는 기술상의 문제인데, 녹음이 잘못 되어 배우들이 하는 대사가 관객들에게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즈음 황철은 동양극장의 또 다른 전속극단인 호화선의 여배우 이정순과 결혼하였고, 부업으로 여관을 운영하기도 하였는데, 1939년 동양극장의 사장 홍순언이 안타깝게도 급사하고 만다. 배구자는 동양극장의 경영을 최독견에게 일임하였지만, 홍순언이 사망한지 몇 달이 채 안 되어 최독견은 방만한 경영으로 동양극장을 말아먹고 중국 상하이로 도망가고 만다.[26] 배구자는 동양극장을 채권단에 넘겨버렸고[27], "극단은 샀을지 모르지만 사람까지 산 것은 아니다."라는 박진의 말에 동조한 청춘좌의 소속 배우들은 배구자의 이런 조처에 반발하여 청춘좌를 집단 탈퇴하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청춘좌의 소속 배우들은 극단 아랑을 조직하여 모이게 되는데, 이 때 최고의 스타가 된 황철이 대표가 되어 극단을 이끌게 된다. 아랑은 주로 동대문 근처에 있던 제일극장을 사용하였는데, 서대문 근처에 위치했던 동양극장과 제일극장은 자연히 라이벌이 된다. 어찌 되었건 황철과 아랑은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며 잘 나가게 되는데, 1940년 4월 임선규작 '김옥균'은 아랑의 최고 성공작이자 흥행작이라 할 수 있는데, 임선규가 여러 해 동안 다듬은 '김옥균'은 무대의상, 장치비용만 8,000원이 든 당시로서는 엄청난 스케일이었고, 심지어는 경비행기를 사용하여 경성 시내에 선전지를 뿌렸다고 한다. 참고로 이광수는 '김옥균'을 관람하고자 했으나 끝내 표를 구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어찌저찌 하여 관객석이 아닌 분장실에서 '김옥균'을 관람하게 되었는데,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 연극을 관람 하였고, 나중에 공연이 끝나고 난 뒤에 보니, 어찌나 울어댔던지 눈이 퉁퉁 부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쨌건 아랑이 최고의 극단으로 자리 매김하고, 황철 본인이 여전히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이 때 부터 본격적으로 흑역사가 시작되게 되는데, 우선은 불륜, 황철은 당대의 최고 인기 스타였고 그의 주변에는 여자가 항상 끊이질 않았다. 거기다가 황철 본인이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자신의 바람기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했는데, 문제는 불륜의 상대가 극단 아랑의 후배 여배우 문정복[28]이었던 것이다. 문정복인게 왜 문제가 되냐면은 문정복은 황철의 부인 이정순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29], 더군다나 가정이 있는 유부녀였기 때문이다.

문정복의 남편은 배우 양백명이었는데, 뭐 기생들과의 관계를 가진 정도는 황철이 평소에 여자 관계가 난잡했고, 또 당시 관례상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지만, 선배 배우의 부인이자 자기 부인의 친구와의 불륜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히 이 스캔들이 알려지자 황철은 선배의 부인을 뺐은 인간으로 엄청 까이게되지만[30] 그래도 그의 인기에는 별로 타격이 가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당시에 인터넷 같은게 있었을리 없을테니, 그의 이러한 악행이 대중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5. 일제강점기 말기[편집]

그러던 와중 일제의 횡포는 더욱 악랄해졌고, 공공기관이나 언론에서는 한국어의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한국어를 사용하는 언론 매체는 모두 폐지되었다. 또한 창씨개명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횡포와 만행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더욱 더 악랄해졌고, 따라서 연극, 영화, 무용 등 대중문화예술에 대한 탄압과 통제도 더욱 악랄해졌다. 연극이나 영화의 경우 기존의 단체들과 회사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여기에 가입하지 않는 사람은 활동을 하지 못하게 막아버린 것이다.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 '무지개'의 이규환 감독이 그렇게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참여를 거부하고, 결국 강제 징용에 끌려가 평택서 비행장을 만들다가[31] 그 곳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한국어로 공연을 할 수도 없었고, 영화를 제작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극단 아랑도 조선연극협회의 통제 아래 움직일 수 밖에 없었고, 황철과 아랑의 소속 배우들은 적극적으로 친일 부역을 하게되는데, 물론 이 당시 예술인들의 친일 부역 행위는 당사자들의 자발적인 행위가 아닌, 강요되고 강제된 행위였을 수도 있겠지만[32], 황철의 경우 그 부역 행위가 아주 적극적이었다. 1942년 7월 일제는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를 통합하여 조선연극문화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이 단체에서는 국민연극경연대회라는 것을 열기 시작했는데,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 당시에는 국책, 친일 연극이 아닌 연극을 제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경연에는 국책, 친일 연극들만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황철이 이끄는 극단 아랑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개최된 3회의 모든 대회에 참가하였으며, 단순히 참가만 한 것이 아니라 상을 모두 휩쓸어 갔고 황철은 이 3회의 대회에서 모두 남자 연기상을 수상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친일 부역 행위로 인해 황철을 포함한 아랑의 대부분의 배우들과 스텝들 그리고 아랑의 전속 작가 임선규의 부인 문예봉 등은 먼 훗날인 2008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을 당당히 올리게 된다.

2.6. 광복 이후[편집]

광복 이후 극단 아랑은 해산되었고, 황철은 극작가 함세덕, 배우 서일성 등과 함께 낙랑극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나, 공연한 작품들이 모두 흥행에 실패하였고 급기야는 극장 대관조차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당대의 탑스타 황철에게는 굴욕적인 일이었겠지만, 사실 낙랑극회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극단들이 흥행 실패와 극장 대관의 어려움으로 인해 고생을 하고 있었다.[33] 연극의 흥행력이나 영향력이 1930년대 같지 않았기 때문에 연극에 돈을 대려는 사람이 없었고, 연극 공연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배고픈 연극인들은 좌익 쪽으로 편향될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 북한에선 연극인들에게 극장을 무상으로 준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러한 소문에 연극인들은 자연 북한을 동경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많은 연극계 인사들의 월북이 시작된다.

이런 상황에서 황철은 좌익 연극인들의 대표기관이던 연극동맹에 그 이름을 올렸으며, 1946년 11월에 남로당의 결성대회에 축사를 하였고 그로 인해 사실상 남로당에 가입을 한 것으로 간주되었다.[34] 또한 12월에는 연극동맹 서울지부 부위원장이 되었는데, 이로인해 황철은 우익 단체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1947년 3월에는 파업 선동 혐의로 경찰에 검거되기도 하였고, 같은해 7월에는 사실상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춘천으로 지방 공연을 갔다가 우익단체의 청년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다.[35]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여운형이 암살되어 좌우 합작 운동이 사실상 완전히 와해되자 미군정은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과 탄압을 시작하였고, 연극동맹 같은 좌익 단체에 가입을 했다는 혐의만으로도 체포 사유가 되었다. 황철도 그렇게 미군정에 체포되었으나, 경찰청에 다니는 친구의 도움으로 정치집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이런 상황에서 황철은 1948년 8월[36] 마침내 월북을 하였는데, 불륜 상대였던 문정복 역시 결국 남편과 당시 8살의 아들 양택조를 버려둔 채로 정부인 황철을 따라 월북을 하였다. 충격적인건 당시 문정복만 황철을 따라 월북한 게 아니라 황철을 따라 월북을 한 여배우들이 몇 명 더 있었으며,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모 여배우는 황철을 따라 월북하려다 삼팔선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제지당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고 한다.

월북 후 황철은 사리원 형무소에 수감되어 몇 달 동안 공산주의 사상 교육을 받았고, 이후 북한의 국립극장에 배속되어 연기활동을 재개하는데, 평양에서도 황철의 인기와 위세는 대단해서 어떤 연극에서는 같은 배역을 황철과 배용이라는 배우가 번갈아 가며 공연을 했는데, 황철이 공연할 때는 표가 없어 입장할 수 없을 정도로 매번 만원이었던 것에 비해, 배용이라는 배우가 공연을 하는 날에는 객석의 절반 이상이 텅텅 비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황철을 비롯한 문화예술인들도 문화공작대로 편성되어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이 때 황철과 심영은 서울해방공연을 하기위해 완장을 찬 채 화려하게 서울로 귀환하였고 자신들과 친분이 있었던 여러 연극계 인사들을 강제로 납북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 최은희, 김승호 같은 배우들이 황철과 심영에 의해 북한으로 끌려가다 간신히 탈출하였다. 이 일 때문에 최은희는 차마 글로 적을 수 없는 참혹한 고초를 당하기까지 하게 된다.

이러한 악행으로 인한 천벌을 받은 건지는 몰라도 황철은 수원에서 평택으로 가던 길에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오른팔을 절단하는 중상을 입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황철은 1951년 4월, 국가훈장 2급을 수여 받는다.[37] 황철과 훈장을 같이 받은 이는 이기영, 한설야, 이태준, 임화, 조기천.[38], 최승희, 이상 7명인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최승희와 같은 등급의 훈장을 받는다는건 사실 전선에서 중상을 입고 오른팔을 잃기까지한 황철에게는 다소 억울할 수도 있는 처사였다. 최승희 항목에서도 설명되었지만, 최승희는 한국전쟁 도중 중국에 머물고 있었고 인민들이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중국, 소련, 동유럽 등지로 해외공연을 다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당시 북한에서도 엄청 까이고 있었는데, 그런 최승희와 황철이 같은 등급의 훈장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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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이순신 장군'에 출연한 황철

어찌 되었든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황철은 낙심하지 않았고, 김일성의 배려로 헝가리에서 제작된 의수를 착용하고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1953년 조영출 작 '이순신 장군' 에서 황철은 이순신 장군을 연기하였는데, 관객들이 그의 오른팔이 의수임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열연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공로와 무대에서의 투지로 황철은 1955년 8월 북한 최초의 인민배우가 되었다.

이후 황철은 국립극장 총장과 교육문화성 부상[39]이 되었고,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에도 선출되었으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황철은 연기와 연출을 병행하면서 평양연극영화대학교의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연극이론서인 '무대화술'과 '분장론'을 저술했다. 참고로 '무대화술'의 경우 남한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남한에서도 그 내용을 인용한 논문이나 서적이 많이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극의 여배우 우인희도 황철이 평양연극영화대학교의 교수로 있을때 그의 제자였고, 황철이 직접 배우로 발탁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 도중 입은 중상의 후유증 때문인지는 몰라도 1961년 6월 9일 비교적 이른 50세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1953년의 남로당 숙청, 1956년의 8월 종파 숙청도 무사히 살아남았고, 최고의 위치에서 그야말로 편안히 죽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월북 예술인들이 불행한 말로를 맞이한 거에 비하면 편안한 말로를 맞이했다 볼 수 있겠다. 특히 최승희의 말로와 비교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사후 애국렬사릉에 묻혔다.

다만 황철이 일찍 죽지 않고 더 오래 살아 있었더라면은 어쩌면은 최승희처럼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최승희가 숙청되었던 1967년은 갑산파가 숙청되었고, 김일성의 5.25 교시 후 도서정리사업이 시작되며 김일성의 우상화가 본격화되던 시기이며 김정일이 문화계의 전면에 나서며 혁명 가극, 영화 등을 창작하며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시기다. 문예봉도 이 시기에 협동농장으로 쫓겨나서 1980년대가 되어서야 겨우 복귀할 수 있었는데, 문예봉이 처신을 잘못 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황철이라고 과연 숙청을 피할 수 있었을까? 싶다. 뭐 결국에는 일찍 죽은 게 복인 셈.

3. 연기 스타일, 배우로서의 평가[편집]

저, 소위 황철하고 심영하고 두 인물이 있었는데 연기는 심영이 황철이 못 쫓아가요. 심영이가 확실히 떨어져요. 심영이는 너무 오바고 그냥 자연스럽지가 못하고 황철이가 거기다 대면 훨씬 나아요. 그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하여간.

상당히 좋습니다. 나도 소위 신파고 뭐고 한국의 연극배우를 통틀어서 황철이가 제일인 거 같아요. 그만한 배우가 안 나왔다고 봐요. 그래서 참 재주가 있어요. 그리고 그… 하여간 코믹한 것도 잘하고 사투리도 잘하고 하여간 참 재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 이 발음이 아주 저음이 멋있어요. 저음이 덜덜덜덜, 아주 리드미컬하고, 그 대사에 아주 묘미가 있고. 그렇게 잘해요. 자연스럽게 잘합니다

-출처: 김동원[40] 구술, 김성희 채록, 『2003년도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2: 김동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하여간 (황철이라고 쓴 글자를 가리키며) 이 사람 나오면 무슨 야단법석이 나고 (심영이라고 쓴 글자를 가리키며) 이 사람 나오면 야단법석이 나와. 이 사람이 황철이가 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검사 했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같은가 하나 윈가 그래. 나하고 술도 같이 먹고 그랬는데. 그리고 심영이는 심영이 극단에 가서 여기 나오지만 내가 무대장치 해주고 그랬어. 근데 이 지금 드라마 센터 서울예술대학. 예술대학의 그 학... 이사장이 유덕형이래는 사람인데 유덕형이 어머니가 유치진 선생부인이거든. 심재순이라고. 심재순이가 부민관에서 황철이가 나오는 연극을 봤어. 그 2층에서 보는거야. 그 무대는 꽤 멀어. 지금 저 시의회 자리거든

그 2층에서 이렇게 저길 보고 있는데. 황철이가 가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에서 자기 누이동생이 기생질해서 자기를 이 공불 시켰다. 그 생각하니까 가슴이 그냥 찢어지는 것 같아서 이렇게 어디 한쪽을 이렇게 보면서 한숨을 "허유" 이렇게 쉬고 있는데. 이거 그 유덕형이 어머니 얘기야. 그 눈이... 마주쳤데. 응 그 우연히 마주친거야. 마주쳐서 저기서 "허" 하는데 이 호홉 입김이 자기에게 오는 것 처럼 (숨을 빨아들이며) "헉" 이렇게 되드래는거야. 이게 연극이래는 거야. 이게 거 뭐 공부 많이 하고 대학에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하고 뭐... 다 거지같은 소리야. 저절로 되는거야.

근데 심영이가 무대에 나오면은 전부 관객들이 흥이 나서 어쩔줄을 몰라해. (어깨를 한쪽씩 올리며) 쓱 어깨 하나가 한 짝 올라가고 고 다음에 이렇게 되면은 고 다음에 "으악" 그러고 뭐 박수치고 야단이야. 그니까 연극은 되건 말건 심영이가 어떤 짓을 허는고 하니 관객 좋아하게 하면은 나가서 (어깨 비틀며) 홱 이따위 짓 하거든. 게 연극이랑은 상관 없어. 근데 이 사람은 정 반대로 그 머리는 있는 거니까 심영이처럼 안하고 다른 짓으로 한숨쉬는 이런 식으로 한단 말야. 이게 이게 신파의 테크닉이야. 아유 멋있는 사람들이야.

-출처: 이원경 구술, 백현미 채록, 『2004년도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19: 이원경』,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원로배우 김동원의 평이나 '1달 동안 연극을 계속 해도 목이 쉬지 않는 천부적 배우로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연극쟁이'라는 변기종의 평처럼 황철의 연기의 가장 장점은 바로 발성이었으며 풍부한 성량을 타고났다고 한다. 라이벌인 심영 과 비교했을때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판단하자면 연기력에 있어서 황철이 심영보다 한 수 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찍부터 배우 훈련의 중요성을 의식하였던 그는 최고의 스타였음에도 이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자신을 단련하고 공부하며 노력하였으며, 그가 집필한 '무대화술'은 남북한을 통틀어서 국내에서 저술된 최초의 연기 이론서 라는 의의가 있으며 북한 연극의 형성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김일성이 황철의 친일 부역 경력에도 불구하고 괜히 그를 띄워준 게 아니다.

해방 전 최고의 스타였고, 또 상술되었듯이, 남한이나 북한의 연극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지만, 복잡했던 여성 편력이나 친일 부역 경력,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남한 연극인들을 강제 납북시키려고 했던 행적 등은 그야말로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또 까여도 할말 없다.

4. 미디어에서[편집]

월북한 문화 예술인들 중에 최승희와 함께 네임드에 속하기 때문에 197-80년대 방영된 반공 드라마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그 중 1986년 MBC에서 방영한 반공 드라마 '북으로 간 여배우' 에선 연극배우 이승철이 황철을 연기하였다.

KBS 2TV에서 2001년 방영한 주말 드라마 '동양극장'에서는 이재룡이 황철을 연기하였지만 상술되었듯이 주인공인 황철이 상당히 미화되었다. 또한 이 드라마에서는 배우 장태성이 김두한을 연기하였는데, 황철과 김두한이 친분이 있었으며 김두한이 황철을 형님으로 모시는데, 당연히 실제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다. 다만 1950년대1960년대에서 활약한 명배우 김승호[41]는 김두한의 친구였는데, 김두한의 권유로 배우가 되었고, 김두한이 동양극장의 청춘좌에 김승호를 소개 시켜줘서 김승호가 연구생으로 청춘좌에 입단할 수 있었던 걸로 볼 때 황철과 김두한은 서로 면식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황철과 김두한이 친하게 지냈을 확률은 극히 적다. 애초에 김두한이 무슨 항일투사 어쩌고 하는건 그저 미디어의 창작이고, 황철이나 배우들에게 있어서 김두한은 막말로 말해서 그냥 깡패 새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작가가 인터뷰에서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선의의 창작이라 인증하기도 했고. 이 미화되었다는 김두한도 나중에 자기 아버지가 공산당 손에 죽었다는 것을 알고 증오에 사로잡혀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막판엔 총까지 쏘면서 난동을 부렸다.

SBS야인시대에서는 단역으로 나온다. 배우는 이정성, 심영, 문예봉과 함께 중앙극장에서 을 공연하다가 김두한 패거리에게 습격을 당하지만, 습격 직후 간신히 몸을 추스리고 나와서 정진영에게 심영이 도주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전진석, 한승희의 순정만화 '춘앵전'에서는 거의 서브 남주인공 급으로 나온다. 물론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임춘앵과의 관계는 다 픽션이다.

5. 그 외[편집]

황철은 월북 후 문정복과 결혼하였다고 남한에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황철의 부인 이정순과 황철의 자식들도 이후 모두 황철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볼때 이는 사실무근으로 보인다. 참고로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납북, 탈북 수기에서 최은희는 같은 동네에 살았던 문정복에게 부탁하여 극단 아랑에 연구생으로 입단한 것을 계기로 배우가 되었기 때문에 문정복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하고, 또 문정복을 북한에서 만났다고 하는데, 문정복은 여동생 문정숙이 남한의 유명한 배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최은희는 문정복이 사는 아파트에도 가보았고, 그 아파트는 냉난방 조차 제대로 안 될 정도로 낡았고, 방 두 칸이 딸린 12평의 허름하고 좁은 아파트였다고 한다. 문정복은 그 아파트에서 재혼한 후 낳은 아들과 단 둘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최은희는 그 아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수기에서 밝히지 않았지만 정황상 황철의 아들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 5월 4일 문정복의 부고 소식이 남한에 알려진 후 문정복의 아들인 양택조는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에 20대의 남동생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1990년에 20대면 1960년 이후에 태어났단 이야기인데, 1961년에 사망한 황철이 문정복의 아들의 아버지일 확률은 떨어진다. 물론 확인된 사실이 아닌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그러나 최은희는 수기에 문정복의 아들의 나이가 21세라고 적었고, 수기를 읽어보면 최은희가 문정복을 만난 시기가 대략 1984년 쯤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북한에 20대의 남동생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라는 문정복 사망 당시의 양택조의 인터뷰 내용과도 맞아 떨어진다. 물론 양택조의 그 인터뷰도 사실 최은희에게서 전해 들은 사실을 말한 거겠지만

어쨌건 황철은 이정순하고 사이에서 3남 4녀를 두었으며 황철의 자녀들은 북한에서도 고위직에 있다고 한다.

[1]배재고등학교[2]춘천고등학교[3]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자동차가 몇대 없던 시절이었으니 자동차 운전을 한다는게 뭔가 있어 보였고, 또한 경쟁자들도 거의 없었으니 제법 돈벌이가 될수도 있었다.[4] 황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 '동양극장' 에서는 주인공 보정으로 이 음주운전 사고도 상당히 미화 되었는데, 우선 황철은 음주운전을 하지 않았고, 대관령 산골길을 가던 도중 노루갑툭튀하는 바람에 사고가 난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주재소장의 딸은 황철에게 노잣돈을 주면서 도망가라고까지 한다. 참고로 주재소장의 딸 역은 배우 홍수현이 연기하였다.[5] 연극과 영화를 결합한 형태의 공연 형태로 연극으로 표현할 수 없거나 힘든 야외 장면을 영상으로 만들어 연극에서 필요하게 되면 스크린을 내리고 상영해 무대의 연극과 연결되도록 하는 형태로 영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고 유행하기 이전에 유행하였던 공연 형태지만 이후 영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고 유행하면서 연극도 영화도 아닌 잡탕 취급을 받고 몰락하게 되었다.[6] 최민수의 외할아버지.[7] 최민수의 외할머니.[8] 조카가 아니라 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배구자가 이토 히로부미와 배정자 사이의 사생아 라는 소문은 꾸준히 돌던 소문인데, 배구자의 동생인 배한라는 "언니가 이토 히로부미와 고모 배정자 사이의 딸이었던 까닭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참고로 1905년생인 배구자는 2003년까지 장수하였는데, 나중에는 정신이 훼까닥 돌았는지 자신이 메이지 왜왕의 10번째 딸이고, 할머니는 민자영이고, 자신의 어머니는 조선의 공주라는 미친 소리를 하고 다녔다.[9] 1900년, 쇼코쿠사이 텐카츠에 의해 창단된 텐카츠 예술단은 기술, 마술, 곡예, 무용, 연극, 가극등 여러 분야의 공연을 하였으며, 단장인 쇼코쿠사이 텐카츠는 다양한 레파토리의 공연을 개발하여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영국유럽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40여 명의 단원들은 모두 춤과 노래, 연기, 곡예 등을 할 수 있는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국내에선 1913년에 처음 내한공연을 한 이래, 역시나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10] 참고로 이때까지 배구자는 조선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고 한다.[11] 드라마 '동양극장'에서는 김병세가 홍순언을, 박지영이 배구자를 연기하였다.[12] 배구자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최승희가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연건 그보다 몇 달 뒤의 일이다.[13] 여담이지만 배구자와 최승희를 비교하자면 배구자가 텐카츠예술단에서 대중적인 춤을 배운 반면, 최승희는 일본 무용계의 거두인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서 정통 서양 무용을 배웠고, 배구자의 무용이 흥행을 위주로한 대중적인 것이라면 최승희의 무용은 흥행이나 대중과는 상관 없이 예술적인 품립을 목표로 한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최독견의 개인적인 견해에 의하면 사실 학벌에 있어서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배구자는 숙명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최승희와 비교가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용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가도 최승희에게 우호적인 분위기였던 지라 점차 무용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하였다고 한다.[14] 홍순언이 자본금으로 가져온 돈은 4천 원 남짓한 푼돈이었지만, 와케지마 후지로가 은행의 지원을 받아 약 20만 원 정도의 자금을 끌어왔다고 한다. 이 때 배구자의 로비가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있지만 확증 되지는 않았다.[15] 최독견이 재혼한 부인의 7촌 조카가 홍순언이라고 하는데, 사실상 남인 관계다. 그래도 그 인연으로 홍순언은 배구자와의 결혼에서 부터 동양극장의 개관 등 자신의 인생의 많은 중대사들을 최독견과 의논했다고 한다.[16] 이광수(소설가)의 소설을 최독견이 각색[17] '홍도야 울지 마라'라는 노래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진 노래다.[18]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을 이왕가로 격하시켰고, 이왕가의 업무를 관장하던 곳이 이왕직이다.[19] 판본에 따라서 오빠가 검사가 아니라 순사로 나오고, 마지막에 남편의 새로운 약혼녀를 살해한 홍도가 오빠의 손에 잡혀가면서 끝나기도 한다.[20] 오늘날의 막장 드라마들의 원조라고 할 수 있겠다.[21] 임선규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를 황철과 차홍녀를 생각하며 썼기 때문에, 차홍녀가 연기한 여주인공의 이름은 홍도가 되었고, 황철이 연기한 여주인공의 오빠의 이름은 철수가 된 것이다.[22] 심지어 동양극장이 망하고 나서도, 해방 후에도 계속 리바이벌 해서 공연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홍도야 울지 마라' 라는 제목은 해방 후의 재공연에서 바꾼 제목이다.[23] 요새야 뭐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극장이나 버스, 지하철 안에서 담배를 피는 사람들이 많았다.[24] 한 번은 황철과 차홍녀가 그대로 출연한 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반대되는 내용, 그러니까 기생이 악녀로 나오는 연극을 올린 적도 있었는데, 기생들의 항의로 연극이 중단되는 사태도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기생들은 동양극장의 단골 VIP 손님이자 돈줄이었던 것이다.[25] 더군다나 심영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홍도의 남편 광호, 그러니까 악역을 연기하였다.[26] KBS 드라마 '동양극장'에서는 김갑수가 최독견을 연기하였고, 최독견이 동양극장을 말아 먹고 상하이로 도주한 뒤 결국 자살한 것으로 묘사를 했지만, 실제 최독견은 1970년에 죽었다. 동양극장을 말아먹은 후에는 다시 언론인으로 돌아갔었는데, 그마저도 1959년 최독견이 발행인으로 있던 월간지 '야화'에서 조영암이라는 놈이 전라도 사람들을 모욕하는 글을 게재했다가 조영암이라는 놈은 명예훼손으로 구속되었고, 최독견 본인도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이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은 최독견은 언론계나 문단계에서 사실상 완전히 매장되었다.[27] 남편의 초상이 끝나기도 채 전에 이미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배구자는 재혼과 함께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하였으며, 배구자가극단도 해체되었다. 후에 배구자는 1950년 일본계 미국인인 3번째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갔으며, 98세로 장수하였으며 2003년 사망하는 순간까지 평생 그 곳에서 살았다.[28] 배우 문정숙의 언니이자 배우 양택조의 어머니.[29] 문정복과 이정순 두 사람 모두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호화선 출신이다.[30] 황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 '동양극장'에서는 김규철이 양백명을 최정윤이 문정복을 맡았는데, 문제는 주인공 미화로 불륜의 피해자인 양백명을 나쁜 놈으로 표현하였다. 드라마의 제작진은 고소미를 피하기 위해 양백명은 양천명으로 문정복은 문정현으로 이름을 바꿔 등장시켰다.[31] 새벽부터 밤까지 혹독한 강제 노동을 시켰는데, 그야말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수준의 헬게이트 였다고 한다. 참고로 그런 헬게이트에 끌려갈 당시 이규환 감독은 이미 40대의 나이였으며, 당시 문예봉은 수소문을 통해 스승인 이규환 감독이 끌려간 곳을 알아내어 그 곳으로 찾아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32] 물론 아주 일부의 경우였다.[33]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극장들이 대부분 흥행밖에 모르는 모리배들 손에 넘어가고 말았고, 그러한 모리배들이 흥행이 안 되는 연극에다 극장을 대관하는걸 꺼렸기 때문이다.[34] 다만 그 당시 황철이 실제로 남로당에 가입을 하였고, 공산주의자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실제로 그 당시 인터뷰 등에서의 그의 언행을 보면은 공산주의적인 색채가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35] 이 사건으로 황철은 크게 충격을 받고 멘붕했다고 한다. 당대의 톱스타로서 무대에서 박수 갈채를 받는데 익숙해져 있던 그였기 때문에, 무대에서 테러를 당했다는 건 그만큼 황철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큰 충격이자 배우 생활 20년만에 처음으로 겪은 크나큰 치욕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사건이 황철이 월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을지도 모른다.[36] 월북 배우들 중에서 가장 늦게 간 편에 속한다.[37] 소설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포로로 붙잡혀 납북되다 간신히 탈출하였는데, 이 당시 그가 황철과 문예봉을 직접 만난 적이 있었고, 이 때 황철은 김일성에게 받은 훈장을 가슴에 달고 그에게 자랑했다고 한다.[38] 주사파들의 경전 격인 서사시 '백두산'을 쓴 고려인 출신 시인.[39] 오늘날의 남한으로 치자면 문화관광부 차관 정도 된다 볼 수 있겠다.[40] 1951년 국내에서 최초로 햄릿을 연기한 적이 있는 원로배우로 '목장길 따라'의 가수 김세환의 아버지다.[41] 배우 김희라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