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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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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筠
1569년 12월 10일, 음력 11월 3일 ~ 1618년 10월 12일 음력 8월 24일
파일:external/www.kado.net/696890_257168_2528.jpg

1. 개요2. 가족3. 일대기4. 시대의 이단아인가 소인배인가5. 저서6. 오늘날의 허균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학자·문인·정치가이고, 호는 교산(蛟山)·성수, 본관은 양천이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때 권신 이이첨 막후에서 종사하던 중, 반역 혐의를 쓰게되어 결국 거열형을 당했다. 소성대비(인목왕후)를 끔찍이 싫어하여 몇 차례에 걸쳐 암살을 기도한 것이 매우 유명하다.

2. 가족[편집]

동인의 실세인 허엽의 아들로 형제로는 형인 허성, 허봉과 누나인 허초희가 있다.

그의 아버지 허엽의 호는 '초당'인데, 바로 '초당 두부'를 고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허엽은 널리 알고 박식했지만 정작 학문의 깊이는 얕다는 비웃음을 주변 유학자들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신분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친절하였고 온화한 인물이었던 퇴계 이황마저도 그를 가리켜 "만약 그 친구가 학문을 하지 않았다고 실토한다면 참 거짓없는 사람이라 할텐데''라고 비꼰 적이 있을 정도다.

그는 율곡 이이와 정치적 성향이 달랐기에 서로 크게 대립했는데, 오죽하면 허엽의 별명이 묘지(卯地)[1]였을 정도.

허균의 가족들은 모두 문장에 재능이 있어 당대에 허균 가족을 가리켜 '허씨 5문장'[2]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집안에 뭔가 마가 꼈는지 모두 하나같이 최후가 좋지 못하였는데, 허균의 형인 허봉은 종성까지 유배를 갔다가[3] 풀려나 방랑하다가 38세가 되던 해에 요절했고, 허엽은 말년에 경상 감사로 나갔다가 지나치게 호색하였고, 건강이 좋지 않아지게 되어 약을 복용한 뒤 행정을 괴이하게 하여 결국 관직에서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주에서 객사했다.

허난설헌은 널리 알려져있다시피 고생 끝에 요절하였다. 허균은 밑에서 보겠지만 반역죄로 오체분시를 당하였다. 그나마 장남인 이복형 허성이 좀 낫지만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도 다녀왔고[4] 전란 중에 매우 고생했는데, 훈명(공 있는 신하에게 주던 칭호)도 받지 못한 채 죽었다.[5]

3. 일대기[편집]

조선 중기에 태어나,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가 바라보기에는 최초의 한글 소설을 집필한 타이틀을 거머쥔 사람[6][7][8]으로 알려진 사람. 가족 중 유명한 사람은 '시'로 유명한 허균의 누나 허난설헌(허초희)가 있다.

아무래도 그는 집안의 막내였던터라 귀여움을 받아 방종하게 자랐는데, 이런 성향은 그의 성격의 근간을 이루었다.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면 마이페이스 속성 보유자였던 셈인데, 이러한 사실은 생전 본인도 시인했다.

집안에선 여성이었던 허난설헌에게도 오라비들이 따로 스승을 붙여 주어 글공부를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스승이라는 사람은 서자 출신의 유명한 학자였던 손곡 이달이다. 그런 탓인지 허균은 기존 사회의 적서(嫡庶) 차별과 신분제에 강한 회의와 불만을 가지게 되었는데, 후에 당시 사회에 불만을 갖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서얼과 접촉하여 역성 혁명을 일으키고 적서와 반상의 차별을 타파하기 위한 모의를 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이 카더라와는 별개로 허균은 사람을 시켜 도성 내외에 유구국인들이 쳐들어온다는 내용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당시 소외되어 있던 불교계를 끌어들여 봉기 계획을 진행하던 중, 일당 하나가 불심 검문으로 붙잡혀 계획이 탄로났다.

설상가상으로 허균의 제자인 기준격이 허균이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보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서 체포되었다. 원래 기준격은 전 영의정 기자헌의 아들로 불교에 심취한 기자헌이 역시나 불경을 섭렵하여 인연을 쌓게 된 허균에게 보내 글을 배우게 했는데 허균은 기준격 앞에서 언행을 조심하지 않았고, 때문에 기준격은 허균의 위험한 사상과 행보를 목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허균은 기자헌이 폐모론에 반대했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맹렬히 공격하여 유배를 가게 했고 기준격이 격노하여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 논의 끝에 이이첨의 강력한 주장으로 조사도 하지 않고 반역죄로 단정지어 그는 사형되었다.

하지만 그가 적서 차별을 혁파하고 역성 혁명을 일으키려 했다는 일부의 주장은 실록에 남겨진 기록을 보면 그다지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여겨진다. 허균은 광해군권신이이첨의 수족으로 영창대군 제거 이후 소성대비의 폐서인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유언비어를 살포하고 사람들을 모아 불궤[9]를 도모했다가 일이 커지고 발각이 나자 이이첨에게 버림받은 것 같다. 수감 중에도 부하들에게만 심문이 이루어졌으며 본인에게는 제대로 된 심문이 없었으며 곧 이이첨이 의금부에 드나들며 허균을 안심시키다가 창졸간에 끌어내 처형해버렸다.

허균은 심문 받는 줄 알고 나왔다가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자 경악하여 광해군에게 "잠깐만! 아뢰올 말이 있습니다!"[10]라고 외쳤지만 신하들이 "닥쳐라 역적 놈아!"라고 욕을 퍼부었고 결국 한마디도 못하고 끌려나가야 했다. 자신이 역적이라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하자 동의 못한다고 버텼지만 억지로 서명하곤 사지가 찢어졌다. 그 이후 광해군의 반교문을 발표하기를, 성품이 짐승 같은 역적 허균을 잡았으니 대사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과정이 억지스럽고 의혹이 많기는 하나 어쨌든 역적행위로 잡힌 것이었기에 아들들은 연좌되어 처형당했고 허균의 아버지 허엽의 묘 또한 파헤쳐졌다. [11] 그와 관련된 인물들 역시 대거 체포당하였는데, 다만 사위 이사성과 조카들은 의금부에서 허균과 평소 친하지 않았음을 강조해 처벌받지 않았다.

보다 온건한 중북에 속했던 기자헌은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훗날 유희분도 이이첨이 허균을 심문도 안하고 죽인 것을 깠고 이에 이이첨이 주위에 “허균의 죽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던데 내가 평생 역적을 잡은 몸이 아니더냐?”라고 항변하니 다시 "이이첨이 평생동안 역적을 잡아 나라에 충성했다고 자랑하던데 그런 사람이 역적 처리를 그따위로 할 수 있습니까?"라고 허균의 죽음에 대해 까댔다.

허균이 평생을 친밀하게 지내며 벗처럼, 혹은 누이처럼 지내던 기생이 있었는데 바로 부안의 명기 이매창. 그러나 남녀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매창은 공공연하게 유희경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밝혔기 때문이다. [12] 허균도 매창에게 보내는 편지에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소울 메이트로 남은 것을 평생 자랑으로 삼았다.

4. 시대의 이단아인가 소인배인가[편집]

현대적 관점으로 허균의 업적을 평가하자면 정말 저자가 허균이 맞는지 의문점이 있는 홍길동전이나 대다수가 날조, 표절 의혹이 있는 허난설헌의 시보다는 허균이 천주교를 국내에 들여온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을 더욱 높이 평가한다. 천주교12단(端)이라는 책을 들여옴으로써 천주교 전파의 기초를 마련한 것. 하지만 정작 허균 본인이 천주교 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평소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던 허균이 중국에서 책을 수천권 들여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천주교 책도 같이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보다 심취했던건 불교로 사명당과도 친분이 있었고, 그가 탄핵된 주된 이유가 불교 신자였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율곡 이이나 김시습이 직간접적으로 불교와 인연이 있어 반대파에 공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점도 당대 인사들에게 허균이 공격당하는 이유가 되었는데, 선조는 "원래 글쟁이들이 불경을 두루 섭렵한다는데 그러다 그렇게 된거겠지. 뭘 괜히 그러냐?"며 두둔했다.[13]

미디어에선 시대의 이단아라는 과분한 평가를 받기도 하나 실상 허균은 자신과 친했던 서얼들이 반역에 연루되자 당대의 권신 이이첨의 밑에 들어가 목숨을 연명했다. 그리고 반역이라는 것도 정황상, 그가 반역을 일으킬 만한 사정도, 그릇은 아니어서 최근에는 그가 이이첨에게 토사구팽당해 죽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당시 광해군의 처이자 이이첨의 딸이 세자손을 출산하지 못하자 이를 대신하기 위해 허균의 딸이 광해군의 후궁이 될 터라 허균에게 반역을 일으킬 만한 동기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이첨이 허균을 제거할만한 이유로는 충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옥에 갇혔다가 제대로 심문 한번 받지 못하고 바로 처형되었다는 점이 그 정황 증거로 손꼽힌다. 그래서인지 죽기 직전에 한 말(유언)은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였다고 한다. 오늘날 혁명가, 이단아 취급을 받는 허균이 문장은 몰라도 처세에는 썩 뛰어나지 못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허균의 사상은 굉장히 급진적이며 진보적인 것으로 유명한데, 세간에서 흔히들 말하는 것과는 달리 그의 사상이 시대의 한계를 크게 넘어서진 못했다. 이는 그가 쓴 홍길동전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결국 홍길동의 결말은 나라를 떠나 새로운 신분제로 이루어진 율도국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14]

허균의 사상이 잘 드러나는 글은 그의 "호민론"이라는 글이다. 여기서 그는 백성의 종류를 항민, 원민, 호민으로 나누고, 항민은 불합리한 현실에 순응하지만, 원민은 현실에 불만을 품고, 호민은 한술 더 떠서 반란을 기획한다고 썼다. 허균은 우리나라의 지배층이 폭정을 일삼는데도 호민의 수가 적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높은 사람이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사실 호민론 자체는 춘추 전국 시대 맹자가 주장한 역성 혁명론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지만, 맹자의 역성혁명론은 천명을 받은 자가 하늘을 대리해 백성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그 천명을 잃고 새롭게 천명을 받은 자가 나타난다는 수준이었다면, 허균의 호민론은 그 골조는 같으나 그 어떤 평범한 백성이라도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맹자의 역성혁명론보다 서술의 정도가 다소 과격하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허균은 호민론에서 단순히 관직에 있는 사람을 까는 정도가 아니라 고려의 조세제도와 조선의 조세제도를 비교하며 현재의 조정이 고려보다도 못하다며 직접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까지 한다. 이는 어찌보면 현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봐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급진적인 발언이다.

인격적으로는 썩 훌륭치 않은 사람이었다는 기록이 여럿 있는데, 삼사의 탄핵도 6번이나 받았으며[다만] 중앙 요직으로 올라가기 전까지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할 일을 내팽개치고 탱자탱자 놀았다는 기록도 있다. 성대중의 수필집인 <청성잡기>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르면서 이런저런 궤변으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풍조를 비판하면서, 허균의 '욕망은 하늘이 인간에게 내려 준 것이고 도덕은 사람이 나중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니,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 옳다'라는 발언을 같은 것으로 보아 비난했다. 이런 말이나 하니 역적이 된 것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결론. 굳이 역모 사건이 아니더라도, 조선조의 유자들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비판받을 만한 구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5. 저서[편집]

저서로는 <홍길동전>[16], <성소부부고>[17]가 존재한다. 고등학교 / 대치동 중학교에서 배우는 <유재론>이나 <호민론>도 여기서 나왔다.

문장력 하나만큼은 자타 공인의 괴수였던 모양. 실록마저도 허균의 문재에 대해서는 '문장의 화려함이 근래에 견줄 만한 자가 없다', '문재가 뛰어나 붓만 들면 수천 마디의 말을 써내려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상당한 미식가였던 모양. 성소부부고에서는 자신에게 미식가 기질이 있는 것에 대한 글이 있으며, 도문대작이란 제목으로 전국의 유명한 토산품과 별미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도문대작(屠門大嚼)이란 고기가 먹고 싶어서 도축장의 문이나 바라보다가 입만 씹어본다는 뜻이며, 서문에서는 "죄를 짓고 귀양살이를 하다 보니 이전에 먹었던 음식 생각이 난다. 그래서 이에 대해 글을 써보며 대신 즐겨보려고 한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대한민국 최초 맛집 블로거.

그리고 허균의 저서라고 해야 할지 애매한 책이 있는데, 바로 누이인 허난설헌의 명의로 발표된 <난설헌집>이다. 허난설헌이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태우면서, 허균이 기억을 바탕으로 복원했다고 알려져서 허난설헌의 현재 평가를 만들어낸 책인데... 문제는 표절 논란이 조선 시대 이래로 꾸준히 일고 있는 책이란 것이다. 그것도 시 전체에서 단어 몇 개만 바꿔놓은 수준인 시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로, 현재 허난설헌의 시 중에서 표절 논란도 없고, 허난설헌 본인이 쓴 것이 분명해보이는 시는 정말 몇 수 안되는 상황이다.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이는 최유력 후보자가 바로 허균이다. 허균이 평범한 문인이어도 의심쩍은데, 하필이면 허균의 문장력은 당대 최고 수준이라서 충분히 '창작'을 하고도 남을 상황이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허난설헌이 썼다고 알려진 규원가의 경우는 저자가 허균의 첩인 소쌍이라고 홍대용이 기록하고 있다.

6. 오늘날의 허균[편집]

만화 풍장의 시대에서 한 선비의 스승으로 능지처참된 선비가 바로 허균이다.

홍길동전 때문에 거열형에 처해진 거라거나, 그냥 사약 받고 죽었다는 둥 잘못 알고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조선왕조 5백년에서는 임진왜란 편부터 꽤 일찍 등장한다. 왜란 때 가족을 잃고 방랑하다가 혁명적인 사고를 가지고 이어 회천문 편에서 처형되는 역할... 악역 전문인 김주영 씨가 열연했다.

KBS에서 방영된 최재성을 주인공으로 한 천둥소리라는 사극이 바로 허균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는 류승룡이 맡았는데 살해 위협 때문에 광해군을 보위하고, 가짜 광해 배역을 하선으로 직접 고르고 그를 도와주는 극중 중심 인물이 되는 역할을 맡았다. 무게있는 진중하면서도 엉뚱한 허균의 면모를 살렸다는 평. 류승룡은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도 허균 역으로 특별 출연하였다.

화정에서는 안내상이 배역을 맡았다.[18] 실제 허균의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 광해군, 이이첨과의 관계 사이에서 가상의 인물인 강주선과 자신의 오랜 계획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협력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상기에 언급된 실제 허균의 일대기가 최후의 모습까지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그려졌다.

웹툰 허식당에선 미식가에 엉뚱함이 충만한 캐리터로 나온다. 이보다 조금 늦게 나온 드라마 명불허전타임슬립이란 소재와 주인공이 같은 허씨란 점 때문에 비슷한 느낌이 난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시기 상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이 높다.


[1] 무덤이 있는 묘지가 아니라 십이지에서 토끼(卯)로서 방위는 정동쪽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십이지 항목 위에 있는 시계 사진에서 토끼가 어디에 있나 확인해 보자. 여기에 빗대 동인의 핵심이었던 허엽을 풍자한 표현이다.[2] 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3] 허봉은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유배를 가게 되었던 3명의 동인 인사 '계미삼찬'의 한 사람이다. 나머지 두 인물은 송응개와 박근원이다. 그들은 이이를 탄핵했으나 당시 율곡을 정치적으로 지원하던 선조는 그들을 무시하였고 오히려 그들을 유배보내었다. 형제가 나란히 율곡과 대립했기에 허균 집안과 율곡 이이는 악연으로 맺어진 셈이다.[4] 조선 통신사로 간 김성일, 황윤길을 따라서 서장관으로 갔다. 돌아오고 나서 황윤길과 함께 왜침을 주장했다.[5] 허성의 졸기를 보면 허성이 죽자 광해군이 "훈명을 받지 못했는데 갑자기 죽었으니,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물품을 지원 해 주자"고 말한다.[6] 현재는 설공찬전의 발견으로 최초는 아니다, 참고로 설공찬전의 저자는 허균보다 약 백여 년 전 사람인 채수[7] 채수의 설공찬전은 창작된 후 곧바로 한글로 번역되어 세간에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중종 실록 권14, 6년 9월 기유 기사에 '혹은 한문으로 베끼고 혹은 한글로 번역하여 널리 퍼져 대중을 미혹시킵니다.'라고 나와 있다. 이를 감안하면, 본래 한문으로 지어진 것이 후에 한글로 번역되어 전파된 것으로 보이며, 설공찬전은 애초부터 한글로 지어졌다고 여기기는 어렵다.[8] 단 정말로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는가? 에 대해서는 학계의 경우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많다. 일단 100여년 이후의 사람인 택당 이식이 "지금 세상에서 홍길동전이라 하는 소설은 허균의 작이다"라고 하면서 반역자인 허균이 소설도 그런 것을 지었다며 비난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사실 명시된 기록은 이것 밖에 없으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물론 반대로 이 기록을 명백히 부정할 만한 근거가 없기는 하지만, 허균은 평소 한학자였고 그가 지었다는 홍길동전 이외에는 국문으로 된 작품을 일절 남기지 않았다. 게다가 그 시기는 상류층의 한문 문화권과 하류층의 한글 문화권으로 철저히 갈라져 있었다. 택당집은 당연히 한문 문화권. 따라서 택당 이식이 말한 홍길동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한문 홍길동전일 것이다라는 설이 있다. 더불어 일제 시대 경성 제국 대학에서의 일본 학자가 택당집에서 말한 홍길동전은 한글 홍길동전이다라고 말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 홍길동전을 허균의 작품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 이전의 많은 학자들은 택당집의 홍길동전과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연결시킨 사례가 한번도 없다.[9] 아무래도 소성대비를 암살하려고 한 것 같다.[10] 다른 전승으로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라고도 한다.[11] 허광 등 일부 아들은 도망치는데 성공해 화를 면하였다.[12] 그런데 이매창과 유희경은 거의 아빠와 딸 정도로 나이 차이가 있었다... 거기에 자주 만나지도 못했는데도 정절을 지켰다고.[13] 여담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에서 불교가 맨 처음 들어왔을때 불교는 도교의 별파나 방술의 일종 정도로 인식되었다. 이런 인식을 타개하기 위해 승려들은 불경을 한자로 번역하는 사업을 통해 불교 교리 전파에 힘썼는데 불경들의 문학성이 실로 대단하여 식자층의 인기를 끌어 중국에서 불교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이러니 글쟁이들이라면 불경을 한번 읽어본다는 말이 나온 것.[14] 단 홍길동전이 정말로 허균의 작인가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또한 홍길동전 자체가 오랜 전승을 거쳐 변형되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 홍길동전의 기본 주제는 그가 나라로부터 서출의 능력을 인정받고 어디론가 떠나는 시점에서 완결되며, 이후의 이야기는 사족으로 붙었을 수도 있다. 다만 홍길동전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저서들을 살펴보아도 그가 신분제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다만] 이중에는 서자들과 어울려 놀기를 즐긴다는 둥 현대의 기준으로는 흠결이 되지 않는 탄핵도 있다[16] 현존하는 <홍길동전>이 정말로 허균의 작품인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는 논란이 있다. 일단 <홍길동전>은 한글소설로 전해지고 있는데, 허균은 어찌 되었건 한문에 능한 문장가였고 이 작품 외에는 한글로 딱히 글을 남긴 것이 없다. 택당 이식이 허균을 비판하면서 <홍길동전>과 같은 작품을 지어 나라를 어지럽혔다고 한 것이 허균 작가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인데, 이식은 상당히 뒷대의 사람인데다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이 그저 현전하는 작품과 이름만 같을 가능성도 있는 것. 하지만 현재로서는 딱히 이식의 이 분명한 언급을 부정할 만한 근거도 없는 상황이다. 허균이 현존 작품 그대로 쓰지는 않았더라도, 그가 지은 작품이 한글로 번역되고 수정이 가해져셔 내려왔을 가능성도 높다.[17] 惺所覆瓿藁. 성소(惺所)는 허균의 또다른 호이고, 부부고(覆瓿藁)는 '장독 뚜껑이나 덮을 만한 보잘것 없는 원고'이라는 의미다. 본래 '장독 뚜껑'이라는 표현은 쓸모없는 책을 비유할 때 사용하던 전통 표현이다. 김부식삼국사기를 완성한 뒤 인종에게 올린 글인 진삼국사기표에서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현대 감각으로는 작가들이 장난 삼아서 "제 책은 냄비받침으로나 쓰세요"라고 너스레를 떠는 것과 비슷한 느낌의 제목이다.[18] 화정 방영 전에 KBS의 단막극 간서치열전에서도 허균을 연기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