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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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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割腹
1.1. 개요1.2. 역사1.3. 절차와 내용
1.3.1. 가이샤쿠 (介錯, 개착)
1.4. 실제로는1.5. 사례
1.5.1. 사카이 사건
1.6. 위장할복1.7. 그 밖에1.8. 관련 문서
2. 철권 캐릭터 요시미츠의 필살기

1. 割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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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作 우국(憂國)의 일부(열람 주의). 미시마 유키오는 훗날 실제로 할복으로 자살했다.

1.1. 개요[편집]

를 갈라 죽는 자살의 한 종류. 일본어로는 切腹(셋푸쿠)나 腹切り(하라키리)라 하고 드물게 自刃이란 단어를 쓸 때도 있다.

일본의 무사 계층 사이에서 행해지던 양식화된 자결 방법이자, 시대에 따라서는 사무라이에 한해 행해지던 자결 형식의 사형 방법이기도 했다. 대체로 사형을 받을만한 죄를 지었으나 참수형을 내릴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되면 할복으로 대체하거나, 판결 전에 죄를 지은 당사자가 알아서 할복하는 일도 있었다.

1960년대 이후로 일본의 사무라이/시대극 영화들이 서양권에서도 제법 입소문을 탄 탓에 사무라이, 스시나 스모, 닌자보다는 인지도가 덜하지만 어쨌든 서양인들이 익숙할 일본어 명사 중 하나가 되었다. 주로 Harakiri를 쓰며, 일부 영어사전에서도 신조어 등으로 등재되어 있다.

1.2. 역사[편집]

최초로 행해진 것은 헤이안 시대이며 정확하게 누가 처음으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제설이 존재해서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헤이안 시대 귀족이면서 도적으로 유명한 후지와라 야스스케가 붙잡히자 배를 가르며 난동을 부렸다는 기록이 있긴 하다. 다만 이러고도 안 죽었고 결국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 밖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어느 무사의 아이가 떡을 훔쳐 먹었다는 의혹을 받자 무사는 치욕을 씻기 위해 자식의 배를 갈라 무죄를 증명한 뒤 상대방 역시 죽이고 자기도 할복했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다.[1] 이는 실제로 군국주의 시절 일본의 도덕 교과서에 실려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후대에 정형화된 일반적인 의미의 할복과는 차이가 있으며,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중국 등지에도 존재하므로 일종의 설화로 추정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할복의 원조로 꼽는 것은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인 미나모토노 타메토모이다. 여러가지 다른 견해도 있으나, 할복이 가장 성행하였던 에도 시대 사무라이들이 할복의 원조를 미나모토노 다메토모로 보았기 때문.

어쨌거나 이후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와 할복자들이 종종 보이기 시작하더니,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할복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당시 무사도의 개념이 원숙해짐과 더불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 실례로, 가마쿠라 막부의 탄생을 다룬 헤이케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할복은 여섯 건에 불과한데 반해, 무로마치 시대 이야기인 태평기에 기록된 할복은 무려 2140건에 달한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할복은 대체로 전쟁에서 패배한 장수가 행하는 경우에 국한되었으며, 극형이나 순사 등 평화시에 행해지는 경우는 적었다. 또한 엄격히 말해 이런 사례가 모두 형식적으로 제대로 된 할복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대체로 당시 기록에서 패장이 적에게 붙잡히는 것을 수치로 여겨서 자인(自刃)했다는 문구를 볼 수 있는데, 이는 후세의 할복처럼 '배를 가른다'는 고정된 형식으로 해석하기 어렵고, 좀 더 포괄적으로 스스로 날붙이를 써서 자살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

한편, 이렇게 패배 이후 할복(내지 자인)하기 시작한 것에는 명예와 자존심 이외의 다른 목적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해석이 있다. 이는 바로 적군에 의해 효수당하는 불명예를 피한다거나 자신의 죽음을 숨기려는[2] 등의 실질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것. 실제로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몇몇 장수의 경우 목이 발견되지 않거나 목이 달라보였다는 이유로 생존설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제법 존재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오다 노부나가아케치 미츠히데.

어쨌든 이러한 할복 내지 자살이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할복이라는 형태로 극도로 형식화, 절차화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당시 어떤 기록은 시골 사무라이들이 정확하게 할복하는 작법을 모른다며 비웃는 내용을 적었을 정도인데, 이는 당시 할복이 작법이란 것이 등장하였을 정도로 절차화되었음을 입증한다. 또한, 이때부터 할복이 단순히 전쟁에서 패배한 경우 뿐 아니라, 사무라이들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거나 명예를 입증하기 위한 경우 내지는 정치적인 수단으로서까지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전쟁이 아닌 평화시에도 순사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할복의 성격이 명예와 결합된 정치적인 수단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전국시대의 무사인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들 수 있다.

당시 시미즈가 속한 모리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혼노지의 변이 발생하여 히데요시가 긴급히 회군하게 되어 화친을 맺기로 하였다. 그런데 히데요시 측은 화친의 조건으로 무네하루의 할복을 요구했고, 무네하루는 굳이 할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3]임에도 불구, 더 이상 다른 요구를 묻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배를 갈랐다. 이에 한시라도 빨리 회군해야되는 히데요시조차도 무네하루의 할복을 진정한 무사의 죽음이라 하며 그의 할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훗날 일본을 석권한 다음 그 아들인 카게하루에게 다이묘로 삼아줄 테니 자신의 직신[4]이 되라고 제안하였으나, 카게하루는 모리에 대한 의리로서 그것을 거절하였다고 전해지며 이 일화는 무사도의 본질을 관통하는 일화로서 유명하다.

결국 이런 식으로 책임을 지거나 명예를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할복이 정립되었다.

또 한편으론, 전국시대 말기에 들어서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격이 나쁜 탓인지[5] 점차 할복이 사형을 대체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참수형이나 십자가형(책형) 같은 다른 사형이 불명예스러운 죽음이라고 여겨진 것과 대비되어, 할복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형태로서 사무라이의 명예를 지킬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 즉, 당시 사무라이 계급의 관념이 '목숨 <<<<<(넘사벽)<<<<< 명예' 였기 때문에, 내용은 사형이지만 형식은 할복이라는 형태로 형의 집행이 제도화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에도 시대에 오늘날까지 전하는 형태로 할복이 고도화, 절차화되어 급기야는 권위 있는 할복 전문가(...)가 등장하여 올바른 작법을 설명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으며, 결국 오늘날 알려진 고도로 절차화된 할복의 형태가 완성되었다. 할복 전문가는 할복 안 해본 사람 아니냐 결과적으로는 명예를 입증하거나 지키기 위한 최종 수단으로서의 할복이란 것이 완전히 정착해버렸다. 이렇게 에도시대에 사형으로 정립된 할복은 한국사약과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지배계급인 사대부/사무라이에게만 허락된 사형법이었고, 자살의 형태를 취하면서 그나마 최소한의 명예는 지켜주는 방식이라는 점이라는 점에서 공통 분모를 찾을 수 있다.


보신전쟁 당시 패배한 아이즈 번의 소년 무사집단인 백호대(白虎隊)가 쓰루가 성(鶴ヶ城) 근처 뒷산에서 집단 할복한 사건도 있었다. 원칙적으로 조슈 번 출신들이 장악한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반역자들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르자 2차대전 당시 일본 군부에서 백호대 할복 사건을 명예로운 사무라이의 표상이라며 치켜세우는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났으며, 카미카제 대원들에게도 정신 교육용으로 이 일화를 자주 인용했다.[6]

비록 제도적으로는 메이지 유신 무렵 폐지되었으나, 그 이후로도 '뛰어나거나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고상하게 뜻을 관철시키는 자살'의 방법으로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존속되었다. 실제로도 독립군에게 패해 붙잡힌 일본군 장교들이 구차하게 포로가 되어 명예를 훼손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할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는 독립군에게 붙잡힌 일본군 중장이 할복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경우는 일본군/문제점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의 군법 상, 도망가서 살아돌아오면 무조건 사형이요, 어찌저찌 사면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도 본인은 물론, 남겨진 가족들까지 싸그리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했기 때문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하는 심정으로 장교들이 자살하는 사례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도망치면 무조건 사형'이라는 군법에 사병들이 쉽게 복종할 리 없어서, 자결을 거부하고 달아나서 마적단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몇몇은 점령지 주민들에게 몸을 의탁해서 그곳에서 현지인처럼 살아간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한국인 출신 징집병이나 장교들은 탈영해서 독립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1.3. 절차와 내용[편집]

바로 위에서 언급한 에도 시대 할복 전문가(...)인 이세 타이조(伊勢貞丈 : 1718~1784)에 따르면 정확한 작법은 다음과 같다.

몸의 청결을 위해 특별한 입욕법 + 적절한 머리모양 + 올바른 의복 착용법(보통 흰색 옷)을 지킬 것
할복 자리는 흰 천으로 덮은 다다미 2매
술잔 2개 & 간단한 음식을 담은 접시가 놓인 의식용 상을 제공
이때 음식을 제공하는 것과 먹는 것에는 매우 번잡한 예법이 있음
이후 칼 중간을 흰 종이로 싼 의식용 칼을 나무 쟁반 위에 놓는다. 칼 중간을 흰 종이로 싸는 것은 손잡이로 쓰기 위함이다.
그 뒤에 가이샤쿠(介錯)가 할복자의 뒤에 선다.
이후의 과정은 글로 쓸 수 없고, 오직 구전(口傳)으로 전할 수 밖에 없다.


상의를 벗고 종이로 감싼 칼날을 사용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배를 가른다. 이 때 뒤에서 대기중이던 가이샤쿠(介錯)가 할복자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신속하게 목을 쳐준다.

배를 가르는 이유는 옛날에는 일본인들이 사람의 영혼이 뱃속에 들어있다고 믿어서 그것을 통해 자신의 긍지나 결백함 등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할복을 할 때 다다미에 천을 덮는 것은 목이 잘렸을 때 다다미 바닥을 구르는 추태를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때 타인에게 선물 받은 천을 사용하면 그것은 선물한 자에 대한 최대한의 호의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할복 과정에 사용되는 의복, 천, 장막 등은 대체로 흰색을 사용하였다. 하얀 천에 붉은 피가 뿌려져 시각적으로 확실하게 드러나는 형태를 이상적으로 여긴 듯하다.

일본의 사무라이 그림을 보면 칼을 두 자루 차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큰 쪽을 혼자시라고 부르고 작은 쪽을 와키자시라고 부르며 이 중에서 와키자시를 할복용으로 쓰는 경우가 있었으나 원래부터 그렇게 쓰라는 것은 아니고 때마침 할복용의 단도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나 와키자시를 할복용으로 썼다. 실제 길이도 할복을 하기에는 불편할 정도로 긴 편. 그래서 보통 칼날 부분에 옷감을 말고 그 부분을 잡고 베었다. 할복용 칼은 대개 은장도보다 살짝 큰데, 흔히보는 가정용 식칼정도라고 보면 된다.

원래 전국시대 초기에는 예법이 정착되지 않아, 가이샤쿠 없이 배가 아니라 가슴을 가르거나 목을 찔러 죽었던 경우도 많았다. 이 경우 즉사에 가까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 논의될 문제점들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나, 할복의 예법이 어쩐지 '배를 가른다'로 정착된 탓에(...) 결국 가이샤쿠가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다.

1.3.1. 가이샤쿠 (介錯, 개착)[편집]

보통 일본인이 아닌 사람이나 할복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은 가이샤쿠라는 존재를 모르고, 할복은 그냥 스스로 배를 갈라 죽는 것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할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이샤쿠다. 가이샤쿠가 중요한 이유는 간단한데, 자기 스스로 배를 갈라 죽는다는 행위가 사실 매우 어렵기 때문.

할복을 할 때 주요 사인은 과다출혈 내지 쇼크[7]인데, 문제는 양쪽 모두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일단 과다출혈의 경우, 빠른 시간에 죽음에 이를 정도의 출혈이 일어나려면 등 쪽의 간동맥을 찔러야 한다. 그런데 배 쪽에서 칼을 꽂으면 당연히 고통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에 힘이 들어가게 되고 복근이 수축해 칼이 더 안들어간다. 이런 상태로는 초인적인 의지와 힘이 아니고서는 기껏해야 복근이나 복막, 아주 대단해도 장을 베는 정도에서 그칠 뿐 간동맥에 도달하지 못한다. 즉,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몇 시간 동안이나 엄청난 고통에 끙끙대다가 결국 흉한 꼴로 죽는다는 것. 결국 완전히 혼자서 할복을 할 경우 고통을 못 이긴 끝에 자기 목이나 가슴을 마구잡이로 찔러 자해를 해야지만 그나마 출혈로 죽을 수 있긴 한데 이마저도 고통과 저혈압으로 인해 불가능이나 다름 없다. 이해가 안 된다면 전쟁 영화 등에서 부상당한 아군이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경우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정신상의 쇼크의 경우 그냥 이론상으로만 가능할 뿐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할복자가 '나 할복한다!'고 인지한 채로 할복을 시행하는데, 쇼크가 발생할 가능성이 적다. 게다가 일단 칼이 배에 꽂히는 그 순간부터 굉장한 고통을 느끼게 되고 두려운 감정이 들게 된다. 따라서 본인의 배를 갈라 죽는다는 것은 초인적인 의지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즉 가이샤쿠가 없다면, 배에 칼을 꽂는다 → 아프고 무섭다 → 망설인다 → 배를 가르기 위해 노력해본다 → 아프고 무섭다 → 망설인다 → 노력해본다...무한 루프로 몇 시간이나 고생하다가 비참한 꼴로 죽는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현대에 도검에 의해 발생하는 우발적/계획적 사고에서 가장 흔한 경우는, 도검이 꽂힌 상태이거나 꽂힌 후 다시 빼면서 발생한 2차상이다. 도검을 꽂거나 관통시킨 후 다시 힘을 주어 날을 진행시켜 베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때문에 실질적으로 할복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존재가 바로 뒤에서 목을 쳐주는 가이샤쿠다. 이 가이샤쿠를 행하는 사람의 격에 따라서 할복을 하는 사람의 격이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변변치 않은 가문에서는 돈을 주고 가이샤쿠를 해줄 사람을 몰래 구해왔다는 기록도 있고, 그 밖에도 아는 사람이 인맥을 동원하여 불러왔다는 예도 있다.

그렇기에 가이샤쿠 역시 할복자의 죽음에 이르게 할 때에는 단번에 목을 베어주는 것이 미덕이였으며, 이는 할복자와 할복자의 가문 그리고 그의 가족의 명예를 지켜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한번에 못 죽이고 여러번 베는 행위는 할복자와 그의 가문과 가족을 모욕하는 행위가 되어 사회적으로 가이샤쿠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그래서 가이샤쿠도 자신의 칼로 한번 베었는데 안 죽으면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 또한 할복자가 고통스럽게 죽게 되기 때문에 카이샤쿠의 역할을 박탈당하지는 않더라도 평판이 나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아예 자격 자체를 박탈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고.

이 가이샤쿠에도 작법이 있었다. 각 지방마다 달랐다고 하지만 보편적으로 으뜸으로 치는 것은 바로 목이 완전히 절단되지 않고 가죽이 한 장 붙어서 들러붙어있는 상태. 해리포터의 목이 달랑달랑한 닉처럼그렇게 자르면 목이 땅바닥을 구르지 않고 죽은 자의 품 안에 안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듯하다. 일본에서는 거기에 유래해서 목의 가죽 하나의 차이로 살았다는 뜻의 관용구가 있으나 실제로 그런 상태가 되면 당연히 죽는다. 게다가 이론적으로는 이게 이상적이라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았다. 한마디로 입스타

할복에 심취한 작자들은 카이샤쿠가 뒤에 서있기 때문에 할복자 스스로도 미련없이 더 비장하게 깊숙히 배를 가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할복 과정의 물리적이자 논리적이자 심리적인 완성이라고 논하기도 한다. 그러나, 카이샤쿠도 하는 사람의 담력이 어느정도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코이케 카즈오의 픽션만화에서는 가이샤쿠만 전문으로 해주는 가이샤쿠닌이 있다고 나오는데 실제로 그렇게 정해진 직책이 있는 건 아니고 가문이 좋은 자 + 검술에 뛰어난 자 가 임명되는 임시직이었다. 다이묘를 할복시킬 때는 할복을 도울 가이샤쿠닌을 정하는데 몇달씩 걸릴 정도 였는다.

1.4. 실제로는[편집]

위에서 설명했듯이 '스스로 배를 갈라 죽는다'는 행위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배를 가르는 행위' 자체가 형식화되어 버렸다. 나중에는 아예 할복 시행시 칼 대신 부채를 줘서 배를 긋는 시늉만 하는 식이 일반적이 되었다. 설령 칼을 쓴다해도 할복할 사람이 칼을 집는다고 손에 칼잡이가 닿기도 전에 목을 베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물론 상술했듯 할복이라는 행위 자체가 어렵기도 하거니와 고통도 상당하니...그냥 참수형이라고 말해

원래부터 사무라이라는 것이 시험으로 뽑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가의 자손이면 무조건 사무라이이기 때문에[8][9] 모든 사무라이들이 스스로 배를 가를 정도의 기개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연좌제에 걸려 할복을 명령받은 대상 중에는 매우 매우 극히 드물게 코흘리개 어린아이도 있었으며, 특히 이런 어린아이의 경우는 100% 부채 지급이었다.

아예 에도 시대 중기에 이르면 이런 문제 때문에 복잡한 절차 거칠 것 없이 참수형을 집행한 다음 서류상으로만 할복으로 보고하는 경우도 제법 존재하였다. 이쯤되면 그냥 일반적인 참수형이 된 셈. 이렇다 보니 에도 후기부터는 진짜 자기가 배를 가르고 죽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지 표명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때문에 스스로 배를 가른 극소수의 진짜 할복은 숭고한 죽음으로 포장되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으며, 이런 성향은 제국주의 시대까지 이어졌다. 진짜로 할복이 실행된 경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우였다.

1. 사건 자체가 무사도와의 관련성이 매우 높고, 세간의 상당한 주목을 받는 경우.
2. 형벌로서의 할복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행하는 자살 형태의 할복. 개중에서도 진심으로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는 경우.


1번 케이스로 유명한 경우가 바로 추신구라 사건이다. 사건을 일으킨 46명의 낭인은 이후 할복을 명받았고 그중 10명의 할복이 모리 가문의 저택에서 이루어졌는데, 할복에 대한 온갖 뻥튀기 기록들이 존재하는 와중에, 이때의 기록은 과장된 점 없이 매우 객관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모리의 가신들이 처음에는 부채를 주었다[10]는데 이를 본 막부의 관리가 단도를 사용하라고 요구하여 결국 진짜로 배를 찌르는 퍼포먼스(...)가 연출되었고, 10명 중 특별히 기록될 만한 케이스는 단 2건으로서, 하나는 할복 직전 가이샤쿠에게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한 것과, 나머지 하나는 정말로 깊게 배를 갈랐다는 것이라고 한다. 즉 대부분의 경우 인사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벌벌 떨었다 긴장했으며, 제대로 배를 가른 자도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 이는 진짜 제대로 된 할복은 소수에 불과했다는 방증이다.

또다른 1번 케이스로 막말 유신지사 다케치 한페이타의 할복이 있다. 한페이타는 도사번의 가로 요시다 도요를 암살한 죄로 할복을 하게 되는데, 이때 가이샤쿠역을 맡은 자에게 자신이 명령을 내리면 목을 치라고 부탁한다. 할복장에서 단도로 처음 배를 가르자 가이샤쿠역이 목을 치려하자 '아직이야!'라며 말렸고 다시 한번 배를 가른다. 이에 가이샤쿠역이 목을 치려하자 또 말리며 3번째 배를 가른 후 죽는다. 이 모습을 본 도요의 조카인 고토 쇼지로[11]와 쇼지로의 친구 이누이 다이스케는 한페이타의 최후가 장렬하다고 말했는데, 적에게 삼촌을 잃은 조카와 그 친구마저 적의 할복이 장렬하다고 인정한 것이다. 대부분의 할복이 장렬했다면 굳이 그렇게 말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므로, 이는 진짜 제대로 된 할복은 소수에 불과했다는 또 하나의 방증이다.

2번의 경우 역시 극히 드물었다. 사실 자살 형태의 할복 또한 대부분의 경우 할복자가 나 할복한다고 선언한 뒤, 실제로 배를 가르지는 않고 가이샤쿠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일은 대체로 주군인 다이묘가 죽은 뒤 가신들이 따라 죽는 순사에서 벌어졌다. 사실 순사란 것이 충성과 도리라는 포장은 되었으나, 그 이면에는 경제적 · 정치적 이익[12]이 따랐기 때문. 실제로 17세기 무렵 순사자가 너무 많은 것에 골머리를 앓은 막부가 순사자의 가문에게 벌을 주겠다는 포고령을 내리자 순사는 그 즉시 소멸했다.(...) 실상이 이런데 당연히 진짜로 배를 가르는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에도 막부 측에서 막부의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말기 양자[13]를 금지하려 하거나 사소한 것을 구실로 개역[14]을 하려고 하는 경우, 지방 쪽에서 막부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선수를 쳐서 다이묘의 가신급에서 할복을 해버리는 경우 또한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런 경우는 할복이 아니라 책임회피용 자살내지 빠른 형집행.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할복이기 때문에 막부에서도 어쩔 수 없이 사후 처리를 관대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건이 너무 크다면 설령 할복을 했어도 다이묘 참수+개역 크리를 먹이는 경우도 있었다.

1.5. 사례[편집]

기록은 썩어 넘칠 정도로 많긴 하지만, 위에서 논했듯이 정말로 배를 가르는 할복으로 믿을 수 있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며 실제로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이 기재된 경우가 태반이다.

1.5.1. 사카이 사건[편집]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한 사례 중 유명한 것으로 사카이 사건(堺 事件)의 할복을 들 수 있다. 일본 위키의 사카이 사건 항목.

사건과정을 살펴보면 메이지 원년인 1868년, 무진전쟁이 발발한지 얼마 안 된 시점인 2월. 이때 오사카 근처 사카이(堺)에는 신정부군 측 토사번의 보병대가 주둔해서 치안 유지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외국인 출입 금지 지역임에도 프랑스 해군 일부가 상륙하여 소동[15]을 벌여 토사 보병대가 이들을 군함으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 한 프랑스 수병이 토사 측의 군기를 빼앗아 달아나는 장난을 쳤고, 열받은 토사 측 기수대장이 쇠갈고리를 던졌는데 이게 이 수병의 뒤통수를 맞춰 버렸던 것(...) 그 즉시 양쪽에 총격전이 발생하였고,[16] 프랑스 수병 11명(혹은 13명)이 사망하였다.

이에 열받은 프랑스 공사는 일본 조정에 토사번주의 직접 사과, 배상금 지불 및 사건을 저지른 병사 20명의 사형을 요구하였고 일본 조정은 이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병사들은 임무를 수행한 자신들을 사형시킨다는 사실에 매우 큰 불만을 가졌고, 이에 불복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결국 이들을 달래기 위해 책임자인 토사번은 이들에게 할복을 허락한다. 그리고 묘고쿠 사(妙國寺)에서 프랑스 공사 레온 로슈(Michel Jules Marie Léon Roches 1809~1900)와 프랑스 해군 사령관 등 프랑스인들 다수에 어네스트 사토 등 영국 공사관 직원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사상 최초로 외국인들 앞에서 할복쇼가 벌어지는데...

문제는 이때의 할복쇼가 에도시대의 배를 긋는 시늉을 하는 참수형이 아니라, 정말로 순수하고 똘끼 충만하던 센고쿠 시대의 레알 유혈 낭자쑈(...)였다는 것.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은 할복자인 토사번의 병사들이 젊고 혈기왕성한 나이였고, 존왕양이의 신념으로 봉기한 자들로 외국인들 앞에서 할복하게 된 데다, 하급 사무라이 계급 출신들로 성정이 과격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외국인들 앞에서 할복하게 되었으니 자존심 때문에서라도 정말로 진짜배기 할복을 보여주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당연하지만 단순히 참수형 정도로[17] 생각했던 프랑스 공사와 해군 사령관 등 프랑스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먹었다.

심지어 특히 최초의 할복자인 미노우라 이노기치의 경우는 정말로 이게 가능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유혈 낭자쇼를 펼쳤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미노우라는 일단 프랑스 공사에게 "지금부터 잘 봐라!"라고 큰소리로 선언한 뒤, 배를 가르고 손을 넣어 창자를 꺼내 집어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가이샤쿠가 목을 칠 때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적중하지 않자 "좀 더 침착하게 치게!"라고 큰소리로 격려했다고 하며, 두번째 칼질 역시 제대로 먹히지 않자 장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다시 쳐라!"고 외쳤다고 한다. 결국 세번째 칼질에 사망했는데, 이 첫 할복부터 프랑스 공사의 멘탈이 붕괴하여 새파랗게 질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했다고 한다. 이후 할복자들 역시 전원이 진짜로 배를 갈랐다고 하며, 심지어 일부 기록에 따르면 내장을 꺼내놓고 그걸 정렬한 다음, 피 묻은 손으로 모래바닥에 '나 죽는다'고 쓴 다음, 그 내장을 프랑스인들을 향해 집어던졌다는 얘기(...)까지 전해지고, 어느 할복자는 처음에 배를 가른 것이 얕다고 여겨 다시 한 번 그었다거나, 어느 할복자는 배를 좌우 다른 방향으로 두 번 그어 창자가 땅에 쏟아지는 연출(...)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신뢰할 만한 기록들에 따르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충분히 엽기적이라고 할 만큼 유혈이 낭자했다.

마침내 참다 못한 레온 로슈 프랑스 공사는 현장에서 탈출해버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토사번은 일단 형 집행을 멈췄는데, 이 시점에는 11명이 할복을 하였고, 9명이 대기중이던 상황. 그리고 레온 로슈 공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데 감탄했으나 너무 처참하므로 더 지켜볼 수가 없다는 뜻을 전했고, 남은 9명의 목숨을 살려주도록 정부에 건의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렇게 되어 9명은 유배형으로 사면되었고, 비록 유배는 되었으나 칼을 차고 가마에 탄 채로 유배지로 떠나는 등 모든 이가 이들을 영웅 대접하며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이후 유배지에서 한 명이 병으로 사망하였으나 1년도 안 된 메이지 천황의 즉위를 핑계로 완전 사면되었다. 결국 할복한 11명과 유배지에서 죽은 1명만 불쌍한 결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프랑스 공사인 레온 로슈(Michel Jules Marie Léon Roches 1809~1900)는 이날 일기에 기록을 남겼는데, 그들에게 동정을 느낀 동시에 이런 형태의 처형은 프랑스 측이 원하는 대로 책임을 묻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할복자들이 영웅시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중단시킨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한편, 영국 외교관인 어네스트 사토는 자신의 저서에 "온 힘을 다해 이 형벌을 입회하는 일에서 뒷걸음치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라고 적었다. 그냥 옆에 프랑스 공사 일행이 있어서 억지로 버틴 것 같긴 하다만(...).한마디로 사우나에 먼저나가는놈이 지는 거다

여담이지만, 이 할복 중지 사태가 발생한지 불과 일주일 뒤에 영국 공사 일행이 길거리에서 양이지사 2인에게 습격받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18]

1.6. 위장할복[편집]

시대극 등에서는 위장할복의 사례가 대단히 많이 나온다. 주로 악덕 상인과 결탁한 막부의 중진이나 다이묘들이 자신들의 뜻에 거스르면서 음모에 가담하길 거부하거나 자신들의 악행을 까발리려는 정의로운 성품의 인물을 제거하는데 사용한다. 반항하는 틈을 타서 재빨리 상대의 칼을 빼앗아 배를 그어버린 다음, 미리 만들어둔 가짜 유서를 넣어놓고 "이 놈이 미쳐서 깽판치는 바람에 가문에 누를 끼쳐 사죄의 뜻으로 스스로 배를 갈랐다."며 자기들끼리 말을 맞춰 놓고 애먼 사람을 나쁜 놈으로 만든다.

그러나 대체로 이런 위장할복은 주인공들의 활약으로 밝혀지기 마련이라 참살당하기도 하지만 자기도 위장할복을 당해 죽어버리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특히 악역에 의해서 어처구니 없게 생을 마감한 단역의 불쌍한 모습과, 인과응보로 위장할복을 당해 소리도 제대로 못 지르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악역의 꼴사나운 모습이 묘하게 대비되는데 워낙에 통쾌한 장면이라 악역이 위장할복으로 죽을 때는 불쌍하다는 의견이 거의 없다.

이 분야의 본좌는 필살 시리즈나카무라 몬도인데, 악당의 수괴이자 권력을 앞세워 온갖 더러운 공작을 벌이면서까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했던 지체 높은 고위 사무라이들을 위장할복으로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태운 적이 많다. 상대가 완전히 숨이 끊어진 후에는 "훌륭한 최후(자해)이십니다(見事なご最後(自害)でございます)", "언젠가 지옥에서 만나자고(いずれまた地獄で会おうぜ)"라고 비꼬면서 유유히 자리를 뜬다.

1.7. 그 밖에[편집]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살한 경우가 몇몇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특수한 사례였고, 고대의 기록들로 신뢰성이 적다. 게다가 일본처럼 정례화된 경우가 아니었으므로 할복은 일본의 고유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전투에 나가 죽은 위의공의 시체가 온전하지 못하여 멀쩡한 부위가 밖에 없게 되자 한 신하가 배를 가르고 자신의 내장을 꺼낸 후 그 안에 위의공의 간을 집어넣어 장례를 치르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공화주의 정치가인 소(小) 카토의 경우가 유명한데, 자신이 수비하던 우티카가 카이사르 군대에게 항복하는 전날 저녁에 친구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인 후 배를 갈라 자살했다. 기록에 따라 손목을 긋고 자살한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도 있고 배를 가른 뒤 창자를 끄집어내기까지 했다는 얘기도 있다. 로마인들이 자살을 "의지의 죽음"이라고 불렀다고 하지만, 카토의 방식은 워낙 충격적이어서 카이사르가 카토의 행동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고 한다. 물론 카이사르의 정적이었던 키케로는 다시 카이사르를 비판하는 글을 적었고...

조선의 경우에는 병자호란 시기 이조참판 정온이 출성항복에 반대하여 배를 갈라 자살을 기도했으나 사람들이 달려들어 치료하는 바람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하술하겠지만 헤이그 특사 중 한 사람이 이준이 회의장에 들어가 할복자살을 했다는 민담[19]이 전해지지만, 이준은 할복은 커녕 자살한 것도 아니다.

근대의 경우 자신이 사무라이의 후예[20]라고 생각하던 일본군에서도 이런 할복이 잦았다고 한다. 유명한 할복자로는 러일전쟁 당시 뤼순에서 일본군을 지휘했던 노기 마레스케. 노기는 메이지 덴노[21]가 사망하자 아내와 함께 할복자살하였다. 이는 일본의 전형적인 할복 + 순사에 해당하는 경우.

또한 카미카제 특공대를 최초로 만들었던 오니시 다키지로는 패전 후 가이샤쿠 없이 할복하다가 삑사리가 나 무지막지한 고통 끝에 15시간만에 사망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패하자 참모장 조 이사무, 사령관 우지시마 미쓰루도 할복자살했다. 그러나 모든 일본군 자살자가 할복으로 자살한 것은 아니며, 나구모 주이치 같은 사람은 권총을 쏘아 자살하였다.

현대에 들어서도 광기와 강렬한 의지를 표하기 위해 간간히 행해지는데, 특히 일본의 극우 지식인이었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유명한데, 미시마의 가이샤쿠 역은 칼질이 서툴렀던 탓에 즉사하지 못하고 두 번이나 목을 쳤으며, 이때 사용한 일본도는 날이 나갔다고 한다. 어쨌든 미시마 유키오 덕분에 할복이란 것이 이론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명확하게 밝혀졌다(...). 자세한 내용은 미시마 유키오미시마 사건 문서를 참고할 것.

그 밖에 일본에서나 와패니즈 할복을 잘못 이해한 외국인들이 할복 비슷한 그 무엇을 행한 경우가 극소수 존재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할복이라고 할 만한 것은 미시마 유키오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현대 한국에서도 할복을 했다고 일컬어지는 자들이 간혹 등장한다. 정치인들 중에는 특히 검찰 조사를 받게 도중이나 재판 과정 중 세간의 이목을 끌기 위해 이런짓을 벌이는 경우가 있다. 이런 짓을 한 사람 중에 유명한 인물로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자 김을동 여사의 아버지이며 송일국의 외할아버지인 김두한'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이 유명하다.

일부 죄질이 극히 불량한 깡패, 조폭 등의 경우 아직까지도 심심찮게 이런짓을 벌인다고 한다. 다만 위의 설명대로 실제 할복은 실행하기 상당히 어려우며, 김두한이나 김현철 등이 사용한 도구도 커터칼이나 통조림 깡통 뚜껑(...) 등이었다.[22] 즉, 할복으로 보기 어렵고 복부에 자상을 입히는 수준의 자해에 불과한 것.[23] 당연하지만 이 정도로는 사람이 결코 죽을 수 없고, 고통도 심하지 않다. 결국 동정심과 이목을 끌기 위한 쇼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이다.

실제 한국의 민주화운동가나 재야인사 중에도 할복자살로 신념을 드러낸 사례도 있는데, 1975년에 숨진 김상진 열사, 1988년에 숨진 조성만 열사[24], 2003년에 숨진 이경해 열사가 대표적 사례였다.

어째됐건, 할복은 한국의 문화가 아니었으며, 한국과 일본의 문화를 비교할 때 드러나는 대표적인 차이점이다. 할복(정도의 퍼포먼스)을 하기 위해서는 할복을 명예로 여기는 문화와, 칼을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다. 한국은 효 사상때문에 몸을 훼손하는 일에 저항감이 있고, 양반들은 예로부터 도검을 멀리했다. 이런 문화적 문맥을 일절 무시하고 "~~가 사실로 드러나면 할복하겠다!"고 호기롭게 외치는 자들은 말뿐이며, 어떤 칼을 써서 어디를 찔러야 할복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를 것이다.
조선-한국을 통틀어서 유명인중에 할복에 성공한 사람은 0명이다.(무명인중에는 가끔 있음) 유치하게 할복같은 말을 함부로 꺼내지 말라. 한국에서는 설사 그걸 성공하더라도 미친 놈 취급받을 뿐 명예회복이 되지 못한다.

헤이그 특사로 잘 알려진 이준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서 할복으로 순국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정확한 사인은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 입장도 못하게 된 상황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지병인 뺨종기가 도져서 돌아가신 것인데, 어니스트 베델대한매일신보에서 오보를 낸 것이 민중들에게 강렬한 임팩트를 주며 퍼진 것이다.

조선을 유린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톨릭 신자였던 탓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할복 자살을 종용받았으나 하지 않았다.[25] 그 때문에 조리돌림을 당해 갖은 모욕을 당한 후에 참수형으로 죽었다.[26]

오히라 미쓰요씨도 15살 때 왕따를 심하게 겪은 나머지 시도했다고 하는데, 사실상 이는 자해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 유학자로서는 유일무이하게 17세기 초반 사무라이 문화를 관찰할 수 있었던 강항은 당대 유행하던 할복을 통한 순사가 겉으로만 요란할 뿐 사실은 다른 속내가 있음을 간파하고, 겉으로는 주군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며,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다고 논하였다. 강항이 이렇게 말한 까닭은 순사의 설명을 참조할 것.

할복이 워낙 세계적으로 센세이셔널한 처형 or 자살 수단으로 알려진 탓에 문화 컨텐츠에서도 숱하게 등장하였다. 예를 들면, 상대를 잔인하게 끔살시키기로 유명한 격투 게임 모탈 컴뱃: 디셉션에서는 상대에게 끔살당하느니 차라리 치욕을 덜하기 위해 할복이 가능하다. 이중 실제 할복과 가장 흡사한 케릭터는 켄시. 철권 시리즈에서도 요시미츠 역시 바로 아래에 별도 항목이 존재할 정도로 할복 기술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추신구라 사건을 영화화한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희대의 괴작 영화 "47 로닌"에서 중요한 소재로 작용한다. 주인공인 키아누 리브스와 그의 일행들 역시 결말부에 직접 할복으로 자살한다

한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박근혜 탄핵에 대하여 박사모가 할복단을 모집한다고 했다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실제 실행은 하지 않았다고.

아케이드 게임카부키 Z는 오프닝이 할복이다. 참으로 경파하고 끔찍한 게임이다.

1.8. 관련 문서[편집]

2. 철권 캐릭터 요시미츠의 필살기[편집]

커맨드는 66 lp+rk, 2 lp+rk.

칼로 자기 배를 관통(!) 시켜서 등 뒤에 있는 상대에게 대미지를 주는 가불기이지만 자기 몸을 관통하는 만큼 자기도 대미지를 입는다.하지만 죽진 않는다(...) 가불기들 중에서 상당히 빠르고 앞으로 길게 전진하기 때문에 기습으로 넣으면 상대가 맞아주기도 하지만 공격 사거리가 짧아서 그냥 자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요시미츠인 만큼 할복에도 파생이있다. 할복 훼이크라든가 연속 할복이라든가 할복 후 스핀이라든가... 일향포(rk~lk)후에 2 lp+rk로 할복을 공중 콤보로 넣어줄 수도 있다(...)

이 기술을 사용해서 이기면 엄청난 쾌감을 얻지만, 이 기술로 KO 당하면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TTT까지는 할복으로 상대를 KO 시켜도 더블 KO 처리되었지만 4편부터는 자신의 피가 몇 프레임 늦게 달기 때문에 상대가 KO 당하면 요시미츠의 승리가 된다. 6편부터 레이지에서 사용시 상대방이 반 피 이상이 날아가기 때문에 간보다가 써주면 생각보다 짭짤한 편. 상대방은 '막고 때려야지' 하다가 가불기 맞고 죽는다. 믿음과 신념의 할복.

실제로 할복 기술로 이긴 사례가 유튜브에 치면 나온다.

[1] 葉隱 혹은 常山紀談이 출처다. 일본 아키타현의 민간 설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2] 당시에는 적이 죽으면 반드시 목을 쳐서 그것이 본인의 목이 맞는지를 확인함으로서 죽었다는 것을 확인했다.[3] 시미즈 가문은 지방의 토착세력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다이묘의 권력하에 놓여진 존재는 아니었다. 또한 당장 회군이 급했던 것은 사실상 히데요시 측. 이로 인해 무네하루를 부하로 삼은 모리측도 이것에는 반대하였으나 무네하루는 쾌히 이것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4] 자신을 직접 주군으로 섬기는 신하를 뜻한다.[5] 히데요시 집권 당시 할복이라 쓰고 처형으로 읽어야 할 사례들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기 때문이다.[6] 이세연, 《메이지시기 백호대 전사자를 둘러싼 기억의 재구성》, 2008[7] 의학적으로 대부분의 쇼크는 저체액성 쇼크, 즉 과다출혈 = 쇼크이지만 정신성 쇼크 등의 예외적인 경우도 있긴 하다.[8] 이는 서양의 일부 기사도 비슷해서, 초기의 기사 뽑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세습기사도 생겨난다. 물론 기사와 사무라이는 어렸을때부터 평민이 받기 어려운 교육을 받았으므로 실력면에서 모자라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9] 이전엔 조선 양반이 세습적 귀족이라고 잘못 써있었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다.양반이란 사회적 신분이지 계급이 아니다. 즉 대대손손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서 양반자리를 꿰찰 수 있는, 세습이 가능한 계급이 아니었다. 애초에 양반이라는 것은 문반과 무반(문관과 무관)을 합친 말로, 양인은 누구나 과거를 통해 양반이 될 수 있었고, 법제적으로 양반은 양인이었으며, 양반가에서 자식이 과거를 치루지 않고 관직에 오르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때문에 양반가문이 양반으로 남기 위해서는 자신만 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도 관직에 올라야 했다. 양반이 귀족으로 오해 받는 이유는 아무래도 하루 벌어 힘들게 입에 풀칠하던 민초들과는 다르게 양반가 자제들은 오로지 공부에 시간을 쓸 여유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로인해 과거에 붙는 이들이 거의 다 양반자제들이었기 때문에 양반가는 계속 양반가로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10] 신선조야마나미 케이스케는 당시 부채를 집는 풍습이 퍼졌음에도 무사답게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11] 보수파였지만 나중에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다.[12] 순사자가 나온 가문은 포상을 받고 남들에게 존경받았다. 이것이 가문에 얼마나 큰 이익이 될지는 설명을 생략한다. 조선시대 열녀를 강조해서 열녀가 '양산'되었던 것과 비슷하다.[13] 다이묘가 죽기 직전, 죽은 후에 양자를 들여서 가문을 잇게 함으로서 가문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14] 改易(かいえき), 무사의 봉록을 모두 빼앗고 평민으로 강등하는 것.[15] 술 처먹고 여자 희롱하는 수준의 그 소동이다.[16] 어느 쪽이 먼저 발포하였는지는 양쪽의 주장이 엇갈린다. 다만 프랑스 쪽에서만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점, 사후처리에서 보인 일본의 저자세를 볼 때 일본 쪽이 먼저 발포했다는 것이 정설이다.[17] 사실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 1981년에 사형을 폐지하기 전까지 일부 총살형 사례를 제외하면 사형에 단두대를 이용한 참수형을 고집했고, 1977년에 있었던 마지막 사형집행도 기요틴으로 할정도로 참수형에 익숙한 국가다. 더군다나 사카이 사건이 벌어진 19세기 중엽은 공개처형이 기본이었던 시기였다. 프랑스에서 공개처형 제도는 1939년에야 사라진다. 2차대전 직전이 시대적배경인 영화 빠삐용을 보면 죄수의 공개처형이 묘사된다.[18] 두 명의 자객 중 하야시다 사다카타(林田貞堅)(별칭은 스자쿠 미사오(朱雀操)이며 일본 위키에는 별칭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습격 직후 호위였던 사쓰마 번사 나카이 히로시(中井弘)와 도사 번사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에게 격퇴 당해 그자리에서 목이 잘렸고(!), 나머지 한명인 사에구사 시게루(三枝蓊)는 영국인 호위병 몇명에게 상처를 입히며 영국 공사 파크스 쪽으로 돌진했으나 어네스트 사토가 직접 달려들어 칼을 빼앗는 바람에 결국 생포되었다. 덧붙어서 범인 두 명 모두 사진이 남아있다. 사에구사는 처형 2시간에 서양인들에 의해 초상 사진을 남겼고, 하야시다는 잘린 머리의 사진이(..).[19] 그 외에도 바리에이션은 많다.[20]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많은 고급 사무라이들이 몰락했다. 그러나 애초에 막부에 대한 충성심이 그리 깊지 않거나 처음부터 막부와 척을 졌던 사무라이들은 후에 메이지 정부에 편입되어 화족이 되었다. 이에 권력에서 배제당한 사무라이들과 그 후예들은 자유주의 운동, 은거 등의 방법으로 메이지 정부를 외면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 정치사에서는 일본 진보주의 계열의 시조를 사무라이 계층 중에서도 박탈감이 심했던 고급 사무라이 계층 중에서 찾기도 한다. 한편으로 하급 사무라이들은 적극적으로 메이지 정부에 등용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치안유지나 소방업무 같은 필수불가결한 업무를 맡고 있는 것도 전부 사무라이였기 때문에 완전히 사무라이를 배제한 정권을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또 군대를 조직하면서도 이들을 사관이나 부사관으로 받아들였다. 일본군이 일본도를 차고 다니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21] 러일전쟁의 전사자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노기 장군은 승전을 했음에도 할복을 하려고 하였지만, 메이지 천황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안 된다고 말렸다.[22] 야인시대 77회에서 김두한이 미군 법정에서 군사재판을 받을 때 최후진술을 하면서 통조림 깡통 뚜껑을 꺼내 할복을 시도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 방송심의상 연출이 아닌 실제장면에 가까울 정도로 잔인한 데다가 통조림 뚜껑이 흉기로 판정되어 모자이크 처리한 상태로 나왔다.[23] 김두한의 경우 야인시대 작 중 미군 법정에서 할복을 했는 데 자상을 입는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출혈이 수반되었지만 미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24] 그쪽은 할복 후 투신.[25] 이유는 기독교 교리를 아는 사람은 당연히 알겠지만 기독교계에서는 자살을 금기로 하기 때문.[26] 죽을 때 불교식대로 승려가 고니시의 머리 위에 불경을 놓고 을 읊었는데 고니시는 "허튼 짓 하지 말아라, 나는 기리시탄(크리스천)이다"라며 경을 냅다 팽개치고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참수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