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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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37대 국무총리

이름

한명숙(韓明淑)[1]

출생일

1944년 3월 24일 (74세)

출생지

평안남도 평양[2]

본관

청주 한씨

학력

정신여자중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불문학 학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여성학 석사

종교

개신교(장로회)

남편

박성준

자녀

아들 박한길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6, 17, 19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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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37대 국무총리
(전)참여연대 공동대표
(전)제16대 국회의원(비례대표)
(전)제17대 국회의원(고양 일산갑)
(전)제19대 국회의원(비례대표)
(전)여성부 장관
(전)환경부 장관
(전)당혁신위원회 위원장
(전)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전)민주통합당 대표최고위원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px-Han_Myong-suk_signature.png


1. 개요2. 생애
2.1. 여성운동2.2. 정계활동
3. 정치자금수수혐의4. 트리비아5.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대표적인 거물급 여성 정치인이자 민주당의 한 축이었던 인물

한국의 前 정치인. 여권 신장을 위해 노력한 여성운동 1세대의 대표적 인물로 환경부, 여성부 장관국회의원을 거쳐 한국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가 됐다. 하지만 2015년 국회의원 재직 중 과거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최종 확정됨으로써, 전직 국무총리 중 최초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오점을 남겼다.

2. 생애 [편집]

1944년 평안남도 평양시에서 출생했다. 6.25 전쟁 때 부모를 따라 월남해 서울에서 자랐다. 정신여자중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했다.

1967년 박성준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바로 감옥으로 끌려갔다. 소위 통혁당 사건 때문이었다. 10년 여 동안 옥바라지를 하며, 1977년 한신대학교에서 신학 석사를 받은뒤 한신대 강사가 되었다. 민주화 및 재야 여성 운동가로도 활동하다 1979년 광주교도소에 투옥됐다. 2년 6개월여 만에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같은 해 남편도 크리스마스 특사로 출소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엄마가 된 한명숙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여성학 석사학위도 받는 등, 가사와 학업을 병행했다. 이후 남편은 일본 릿쿄대학에서, 한명숙은 오차노미즈여자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다 중단하고, 부부가 함께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명숙은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객원연구원 자격을 받았다.

2.1. 여성운동[편집]

호주제 폐지, 군가산점 폐지, 여성쿼터제 도입, 출산-육아 휴가제, 성매매특별법 제정, 여성부 창설 등에 참여했다. 1989년부터 5년간 한국여성민우회 회장이었다. 2000년 전국여성대회에도 참석하는 등 여성부 신설에 힘을 보탰고 2011년 당개혁특별위원회 때 유승희 전국여성위원장을 통해 당시 여성 공천 15% 의무화 실시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관측되며, 2015년 12월 당적을 스스로 던질 때까지도 새정치민주연합 내 전국여성위원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당내 여성 운동을 주도했다.

이미경 의원, 유승희 의원, 서영교 의원 등과 조현옥 현 청와대 인사수석이 그녀의 인맥이다. 또한 국회의원 시절부터 보좌관으로 국무총리 때도 의전비서관을 역임한 조한기(현재 충남개발공사 감사)도 한명숙 계로 분류된다.[3]

2.2. 정계활동[편집]

1999년 김대중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듬해 새천년민주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시작으로, 이듬해 신설된 여성부 초대 장관을 역임했다. DJ정권의 주요 업적 중 하나인 호주제 폐지 및 여성쿼터제 역시 한명숙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며, 모성보호법 차원으로 생긴 출산휴가, 최대 5년간 여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육아휴직 등이 이때 생겨난 것이다.

2003년 노무현정권 당시 환경부 장관이 됐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땐 지역구 도전에 나서 고양시 일산구 갑으로 국회에 재입성했다. 경륜은 물론 여성으로서 갖는 상징성 덕분에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내렸고, 이해찬에 이어 총리에 올랐다. 대한민국 사상 최초 여성 국무총리다. 김대중 정권 시절이던 2002년 장상이 서리직을 맡은 적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임명된 최초의 여성 총리는 한명숙이다. 정치인 장상은 한명숙의 이화여대 선배이며 고향도 평안도로 같은 점이 흥미롭다. 장상은 한명숙보다 5살 위인 1939년생으로,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나 1947년 월남, 이대 수학과를 졸업했다.

퇴임 후 암울했던 당에 복귀해 2007년 말 대선주자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고건의 불출마 선언 이후 혼돈에 빠진 경선 레이스에 한명숙은 이해찬과 후보 단일화를 선언하고 양보했지만 이해찬은 경선 3위로 떨어졌다. 이후 열린우리당 대선 후보 정동영을 보좌해 문국현 창조한국당과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를 지휘했으나 실패했고 별 이변 없이 이명박대통령이 당선됐다.

설상가상으로 2차례의 정치자금수수 혐의로 2009년 기소되면서 수년간 곤혹을 치렀고 이명박 정부 내내 언론과 여당의 정치 공세를 견뎌야 했다. 지리한 법정 공방 끝에 대한통운 건은 무죄를 받았으나, 한신건영 건은 유죄 판결이 확정돼 실형이 선고됐다. 자세한 과정은 후술된 내용 참고.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대통합민주신당은 대선 과정의 당내 잡음 및 패배 후유증으로 친노와 비노로 갈라졌고, 이해찬유시민이 한명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탈당하기에 이르렀다. 당에 남은 한명숙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를 공천받았으나 낙선했다. 초반 여론 조사로는 무명에 가까운 한나라당 백성운 후보[4]에 10% 가량 앞서며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나 불과 투표 사흘 전 캠프 소속 선거운동원이 지역 대표들에게 밥을 산 것이 드러나 불구속 입건됐고 결과는 3.3%차의 패배.

2010년 대한통운 정치자금수수 혐의에서 벗어난 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민주당 경선(100% 여론조사 방식)에서 이계안 후보를 누르고 서울특별시장 후보에 선출됐다. 그렇지만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의 압승이 될 것으로 예측됐고 더구나 3월 천안함 피격사건이 터져 언론 보도와 여론은 야당에게 불리했다. 선거 2주 전 여론 조사로도 적게는 11.9%포인트(조선일보), 많게는 22.8%포인트(중앙일보) 오세훈의 리드였다. 그렇지만 서울만은 광우병 논란, 용산 참사 등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이 있었고 노무현에 대한 동정 및 향수가 있어 한명숙이 해볼 여지가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왠걸 투표 당일이 되자 자체 조사상 한명숙의 근소한 역전이 점쳐졌다. 서울시청 앞에서 지지자들과 승리 예감을 만끽할 정도였다. 그러나 막판 강남 3구의 오세훈 지지표에 덜미를 잡혀 다시금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불과 0.6% 차의 선전이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명숙은 민주통합당 대표최고위원[5]으로서 선거를 지휘했고 본인 역시 비례대표로 출마했다. 그러나 야권단일화, 여성 15% 할당 공천 강행 과정의 당내 갈등, 비례대표 공천문제, 김용민 후보 막말 파문 등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으며, 이명박 정부에 불리한 여론 결과가 이어졌음에도 민주통합당이 새누리당에게 단독 과반을 내주고 완패하자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뇌물죄로 실형을 산 것에는 판결이 과하다 정당하다를 놓고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때 당시 총선의 대 참패가지고는 모두가 위아더월드로 무능하다고 까는 편. 오죽하면 실형판결을 받은 것보다 총선때 보인 무능함이 더 용서가 안 된다할 정도(...)

3. 정치자금수수혐의[편집]

전술한 경선 과정에서 대한통운에서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를 받아 2009년 기소되었고 한신건영에서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2010년 추가 기소되었다. 먼저 대한통운 건은 4천 5백만 원의 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공방 끝에 3심까지 전부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한신건영 9억 원 관련 건은 기소된 이듬해 재판이 시작되어 1심에서 증인이 진술을 번복하여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찰이 항소하여 2013년 진행된 2심에서 유죄로 판결받아 징역 2년, 추징금 8억 8천 3백만 원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015년 3심이 진행되었는데 결과는 뒤집지 못한 채 유죄로 판결받아(13명 중 유죄 8명, 일부 유죄 5명) 2심과 같은 형량을 받았다.

추징금 중 3억 원의 소재를 대상으로 해서는 파악되어 모두 일치한 의견을 보였지만, 남은 6억 원의 증거 여부를 대상으로 해 의견이 갈린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주요한 증거와 수사 기록을 검토하는 것이 아닌 1심과 2심 판결을 대상으로 한 법리를 심의하여 판결을 확정한다. 그러므로 이번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1심보다는 2심의 법리가 합당하다 하여 형을 확정한 것이다. 그것과 반대로 법리에 맞지 않는다. 판결하였을 때는 원심을 파기하여 고등법원이나 지방법원 합의부에 돌려보내 다시 재판을 받게 한다.

결국 한명숙은 '최초로 실형을 선고받은 전직 국무총리'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일지] 수사부터 대법원 선고까지.

조금 더 상술하면,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다던 한신건영 대표이사 모 씨가 검찰에서의 진술과 달리 1심 재판에서는 이것을 번복하여 무죄로 선고받았다. 하지만 항소심에서는 1심 공판 과정에서의 증언을 배제하고 검찰 수사 기록과 전 국무총리 한명숙의 남동생 한 모 씨가 전세 자금에 정치자금으로 제공되었다던 수표를 사용한 정황을 들어 유죄를 선고하였고 대법원에서 이것을 확정하였다.

그 결과 기간이 1년도 안 남은 무렵이긴 했을지라도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았을 때에 당선을 무효로 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리고 12년간 피선거권도 상실하였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해 형의 집행 후 10년까지 피선거권을 제한한다.

이것은 당시 한명숙의 나이가 71세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83세까지 참정할 수 없다는 말이니, 한국 여성의 평균 수명이 대략 84세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실상 정계에서 완전히 후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2010년대 이후인 현대에 태어나는 여성의 기대 수명은 85세에서 86세 정도로 더 길다. 기대 수명이 남은 것과 무관하게, 아직까지 한국에서 80살이 넘고서 중단된 정계 활동을 재개하는 때가 없어서 어려울 뿐이다. 수십 년간 계속 국회의원과 국무총리 같은 중앙 정치인 활동을 했고, 90년을 넘게 산 김종필조차 80세 직전에 낙선해서 정치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한명숙은 결국 2015년 8월 24일부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것을 두고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정치권력이 개입된 정치 보복성 판결이라며 목멘 소리로 반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보수성향 네티즌들은 '첫 번째 3억 원에 한해서는 대법관 전원 일치 유죄판결이 나왔으므로, 야당 추천 대법관도 유죄라고 본 것이다.'며 반박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사실이라는 견해도 있다. 헌법재판관에는 정당 추천 몫이 있지만[6], 대법관에는 정당 추천 몫이란 게 없다. 대법관은 전원 모두 대법원장이 지명한다. 그래서 제왕적 대법원장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처음 건네진 3억 원에 대해서는 전원일치로 유죄를 선고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나머지 6억 원을 대상으로 해서만 견해가 엇갈린 즉, 액수의 차이일 뿐 대법관들이 보기에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하긴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대상으로 해 조선일보는 '대법관들이 허투루 대법관인가? 분명한 근거와 증거를 가지고 내린 판결인데 그걸 정치 보복성 판결이라고 하는 것은 법치를 무시하는 것이다', '오히려 5년이나 재판을 끌게 한 것이 더 문제다'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물론 법원이 주요한 증인의 진술 번복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공판중심주의[7]와 증거재판주의[8]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있고, 검찰의 진술 조서와 정황 증거만으로 무리하게 유죄로 확정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법관이 어떠한 증거 때문에 어떠하게 판결할지는 오로지 그 법관의 양심과 자유심증주의[9]에 따르기에, 해당 판결은 소송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게 중론이다. "정치자금 공여자가 법정에서 검찰 진술을 번복하였다는 이유만으로..검찰 진술의 신빙성이 부정될 수는 없고.."(대판 2013도11650).

그리고 유죄의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근거는 논란의 대상이 아닌 한명숙의 동생이 사용한 수표였다.

어쨌든 반대 이유를 대상으로 해선 이 기사도 참조. 대법관 이상훈 등 5명, 대법원 ‘한명숙 유죄’ 판결 정면 비판 왜?.

전 국무총리 한명숙을 대상으로 한 이런 판결을 두고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내에선 격론이 오갔다. 이것을 억울한 정치 탄압으로 간주하고 쟁점화해야 한다는 의견과, 대법원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부딪혔다. 이 과정에서 대법원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는 처지였던 혁신 위원 이동학의 일부 발언이 당내 반대 세력에게 꼬투리가 잡혀 혁신 위원 이동학이 사과하는가 하면, 당시 대표 문재인은 당 최고위에서 전 국무총리 한명숙의 추징금 8억 8천만 원을 당 차원에서 대납하자고 제안했다가 빈축을 사고 취소하는 등 여러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정작 한명숙 변호인단에서는 "추징금을 모금하면 혐의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또한 대납하더라도 선처받는 것이 아니다. 형벌은 민사상 배상이나 범죄로 얻은 수익을 대상으로 한 추징과는 별도로 국가가 내리는 제재 겸 재사회화 조치이기에 피해자에게 제대로 배상했을지라도 국가는 그것과 무관하게 제재한다.

그리고 이런 당내 분란 속에서 국회의원 안철수를 위시한 당내 세력의 탈당 움직임까지 가속화되었고 안철수는 2015년 12월 13일 새정치민주연합을 전격 탈당한다.

2015년 12월 11일, 결국 한명숙은 당시 대표 문재인에게서 당적 정리를 요구받았고, 본인도 이것을 받아들여 탈당해 무소속 신분이 되었다.

2017년 8월 23일, 징역 2년을 마치고 만기출소했다. 관련 기사 한명숙 전 총리의 출소식에는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 이해찬, 문희상 의원과 지지자 100여 명이 모였으며 추미애 대표는 "기소도 잘못됐고, 재판도 잘못됐다"며 사법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명숙 전 총리의 출소에 대해 김진애 전 의원은 "그 맑음이 감동이다", 최민희 더불어민주당 디지털소통위원장은 "큰 감동과 깨달음을 안고 간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보수언론은 물론이고 진보 성향의 경향신문도 사설을 통하여 검찰이 표적수사를 했지만 건설업자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증거가 나와 유죄를 받은 건 사실인데 한명숙을 영웅시한다고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했다.#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한명숙이 추징금을 내지않고 버티자 검찰은 환수팀을 구성하여 전세보증금 1억5000만원을 환수하였다.# 검찰은 나머지 추징금 7억3000여만원도 환수할 계획이라고 한다.

4. 트리비아[편집]

과거 넷상에서는 "한명숙과 접촉하는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때가 잦다"면서 한명숙의 별명으로 한명숙청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했다. 한명숙이 현재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터라 지금은 크게 쓰이진 않는다. 또 실상을 파고 보면, 이름값 높은 정치인으로서 이런저런 사람과 접촉하고 사진 찍히는 일이 잦았을 텐데 이렇게 만난 사람들이 훗날 몰락하는 때가 생기면 예전에 한명숙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재발굴되어 한명숙청 어쩌고 몰아갔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이게 반대 진영인 박근혜까지 이 숙청 목록에 거론되었을 정도로 억지였는데 지금 와서 보면 사실이었나 싶긴 하지만 그런 식이면 접점이 안 닿을 사람이 없다.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새천년민주당

6,780,625 (35.9%)

당선 (5번)

[10]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고양 일산 갑)

열린우리당

48,286 (49.0%)

당선 (1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고양 일산동)

통합민주당

37,902 (43.8%)

낙선 (2위)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민주당

2,059,715 (46.8%)

낙선 (2위)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민주통합당

7,777,123 (36.5%)

당선 (15번)

[11]

[1] 한때는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을 할 때는 성을 어머니의 성과 아버지의 성을 같이 사용했다. 그리고 성을 부모님 성을 사용했을 때는 이름이 한이명숙이었다. 그러나 친한 지인들과 있을 때를 빼면 공적인 자리에서는 한이명숙이라는 이름을 거의 쓰지 않았다.[2]평양직할시[3] 조한기는 고향이 충남 태안군 안면도안희정 충남지사와도 친분이 깊고 안희정 충남지사 후보 선대위 대변인 경력도 있긴 하다. 현재는 안희정 계라고 해도 좋을 듯?[4] 이명박 대통령당선자 인수위 행정실장 출신[5] 현재의 당대표와 비슷한 지위. 당시에는 최고위원 경선과 당대표 경선을 따로 하지 않은 집단지도체제였다. 박영선, 김부겸 등이 공동대표였다.[6] 헌재 재판관 9인 중 국회 몫이 3명인데, 그 3명을 여당 추천 1명, 야당 추천 1명, 여야합의 1명으로 나눈다.[7] 모든 소송 자료를 공판에 집중하여 공판에서 얻은 심증만으로 재판하는 태도[8] 증거에 따라 사실의 인정을 행하여야 한다는 태도. 형사소송에서는 증거조사의 절차를 거친, 증거능력이 있는 증거만을 사실의 인정에 이용하여야 한다.[9] 증거가치를 법관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기는 태도.[10] 2001.1.29 사퇴 (초대 여성부 장관 입각)[11] 2015.8.20 자격상실 (뇌물수수로 인한 정치자금법 위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