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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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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역대 선거 결과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pyungmindang.jpg

평화민주당의 로고가 나타난 전당대회 사진

1987년 10월 29일 김대중통일민주당 내 자신의 동교동계를 규합해 분당을 결행하여 만든 정당. 오늘날 민주당계의 실질적인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정당이다.[1]

2. 역사[편집]

파일:pyungmin_changdang.jpg

1987년 13대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 문제로 김영삼과 대립하던 김대중은 결국 통일민주당을 나와 1987년 10월 말에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평화민주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재야 민주화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입당시키며 세를 불렸다.[2]

창당 당시 민주당이란 이름을 김영삼 쪽이 먼저 사용해 평화당이란 이름을 사용하려 했는데 "우리도 통일민주당처럼 민주당 이름을 못 쓸 이유가 없으니 우리도 평화당이라고 하지 말고 평화민주당이라고 하면 되는 게 아니냐?"라는 제안이 당무 회의에서 받아들여져 평화민주당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풀네임이 길어 일반적으로는 축약어인 평민당으로 불렀고, 애초에 의도되었다. 반면 통일민주당은 통민당이란 약어 대신 민주당을 약칭으로 썼다.

파일:external/www.anewsa.com/20100328060447.jpg

"평민은 평민당, 대중은 김대중"이라는 구호와 함께 의욕이 넘치던 출발에 비해 평민당은 1987년 13대 대선에서 36.6%의 득표율로 당선된 민정당 노태우, 그리고 28.0%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한 통일민주당 김영삼에 이어 김대중이 27.0%의 득표율을 얻어 3위로 떨어지면서 위기에 몰렸다.

사실 대선 당시 나름대로 전략도 있었다. 이 당시 노태우의 어부지리 당선을 염려한 민주화 세력은 양김의 단일화를 촉구하였다. 사실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가 번복하고 대선에 뛰어든 것이었던 김대중은 명분 싸움에서 밀리자 '4자필승론'이라는 반박 논리를 만들어냈는데, 내용은 이렇다.

자신호남, 노태우TK, 김영삼PK, 김종필충청을 나눠먹을 테니, 자신이 수도권에서 압승하면 도리어 양자 대결이 아닌 4자 대결일 때 승산이 높다는 것이었다.[3] 하지만 KAL기 폭파 사건으로 PK충청도의 지역주의 정서가 옅어졌고, 군인 투표자들의 표가 대부분 신군부 정권의 수뇌부였던 노태우에게 날아가면서 결과는 3등으로 끝났다.

당시엔 여론조사가 시범적으로 시행된 정도라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한국갤럽에서 대선 여론조사를 진행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재 정권 시절이다보니 제대로 된 표본을 잡을지 의문시 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권에서 야권 분열을 위해 일부러 김대중에게 유리해보이는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했다는 음모론도 존재한다. 심지어 앨빈 토플러의 책에도 등장하는 컴퓨터 선거 조작설도 호남에서의 지나친 몰표에 따라 큰 인기를 끌었으나 총선 결과를 보면 그다지... 다만 이전까지 호남은 여당 지지세는 전국 평균 수준으로 나쁘지 않았다. 물론 당대에는 관권 선거나 금권 선거가 대놓고 벌어진데다가 중대선거구제이기도 했지만... 이것이 단박에 뒤집어진 것은 김대중조차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 해인 1988년 13대 총선에서는 박영숙 총재 권한대행이 선거를 운영하였는데 당초 통일민주당과의 단일화에도 실패하여 김대중김영삼에 대한 실망감이 더더욱 강해지는 바람에 야권 성향 유권자들이 대거 기권해서 평민당과 통일민주당 모두 참패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지만 선거 막판에 민주정의당이 알아서 자폭한 덕택에 여당 표심이 옅어져서 호남호남에서 출향한 서울 시민들이 평민당에게 표를 대거 몰아주었고[4] 그에 따라 평민당은 서울 17석 + 호남 36석+ 경기도 1석을 얻어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의 자리에까지 올라서는 반전을 일으켰다.

이런 평민당의 약진은 당 상징색이 누렇게 익은 벼를 상징하는 노란색이여서 이른바 황색 폭풍이라 불렸다. (후에 15대 총선 자민련의 선전과 2016년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호남에서 압승한 것을 두고 "녹색 바람" 또는 "녹색 돌풍"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를 통해서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때로는 합종연횡을 하면서 민정당을 견제했다. 2016년에 출범한 20대 국회와 비슷한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1990년 합당민주자유당이 되면서 전략을 이런 여소야대 상황은 뒤집혀 버렸고, 평민당이 원내의 유일한 야당으로 남게 되었다. 3당 합당 직후 민자당의 의석수는 무려 214석에 달했다. 반면 평민당의 의석은 71석에 불과했다. 이렇게 여당과의 규모 차가 안드로메다로 나 버리고,[5] 1991년 3월 지방선거에서 선전을 목적으로 재야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영입하면서 신민주연합당으로 명칭을 바꾸었지만 1991년 6월 광역 의원에서도 참패했다.

결국 김영삼김대중의 평민당 창당에 뒤지지 않는 치졸한 작전으로 복수에 성공했다. 두 사건으로 한국 정치는 정책과 이념 대결보다는 지역주의를 앞세운 저열한 이전투구로 크게 의미가 퇴색된다. 평민당의 창당이 김대중이 불복의 멍에를 쓰는 데 가장 일조한 사건이라면,[6] 김영삼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정략으로 보답한 셈. 정확히 말하면 3당 합당김영삼김대중이 이미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후의 일이긴 하지만, 명색 민주화와 진보를 기치로 내걸고 정치 인생을 걸어온 김영삼유신독재의 당사자제5공화국의 주인공과 손을 잡았다는 점을 볼 때 배신에 가까운 행위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후 김대중 또한 스스로 원조 쿠데타 세력이라고 하던 김종필DJP연합으로 대선에서 승리를 위해 공동 정권을 잡고 공동 정권을 운영한 것을 볼 때 비판의 여지가 존재한다.

이후 1991년 9월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과 합당하면서 민주당(1991년)이 된다. 합당 후에는 후자의 민주당과 구분하는 의미에서 통합민주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3. 역대 선거 결과[편집]

4. 관련 문서[편집]

[1] 직접적인 뿌리는 아닌 게, 이 정당이 후에 신민주연합당→민주당→통합민주당으로 바뀌고, 후에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에 흡수합당되어 한나라당이 되면서, 이 정당의 직계 후신은 자유한국당이다. 충공깽 다만 오늘날 민주당계의 정신적인 뿌리라고 할 수는 있는데, 특히 민주평화당의 경우 사실상 평민당을 계승하는 정당이라고 보면 된다.[2] 당시 평민연 소속으로 입당한 재야 인사들은 이해찬, 임채정, 박영숙, 문동환 등 총 98명으로 이들은 계속 민주당 계열에서 활동하면서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에서 국회의원, 장차관, 청와대 수석 비서관 등 고위직에 오른다.[3] 후에 이것이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지역 등권론"으로 이어진다. 이 4자 필승론은 김대중의 오리지널 아이디어가 아니라 훗날 2번의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며 자신의 정치 생명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발악하다 결국 2012년 새누리당 쪽으로 이적하게 되는 한화갑이 제기한 아이디어라고 한다.[4] 다만 득표율로 보면 나름대로 골고루(?) 표가 나눠지기는 했다. 서울 지역 선거 득표율로만 본다면 평민당은 27%, 민정당은 26%, 민주당은 23%, 공화당은 16%의 득표율을 보였다.[5] 사실 원래 민자당은 평민당을 합당 대상으로 삼아서 교섭을 진행하려 했다. 그러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지 10년이 채 되지도 않는 시점에서 전두환 정권의 피를 이어받은 민정당과 한솥밥을 먹는다는 건 평민당 스스로가 텃밭인 호남을 배신하는 것이 되어버리는데다가 재야 인사들로부터 욕을 들어먹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포기했다.[6] 이외에도 김대중은 제14대 대통령 선거 낙선의 정계 은퇴를 번복했고,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후 의원 내각제 개헌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개헌의 경우 1990-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의 민자당(총 의석의 70%에 달했다.)과는 달리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을 합해서 과반을 넘긴했지만 개헌선에 한참 모자른 상태인데다가 개헌저지선은 확보한 한나라당에서 적극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내각제 개헌이 이루아질래야 이루아질 수가 없는 상태이긴 했지만. 거기에다가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공조가 제대로 안 이루워지는 바람에 개헌선 확보는 커녕 군소 정당과 무소속을 끌여들여서 겨우 과반을 확보했으니 내각제 개헌이 물건너갈 수 밖에 없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