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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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村面 / Toechon-myeon

파일:toichon.gif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탑골길 6에 위치한 퇴촌면사무소 전경.

퇴촌면
退村面 / Toechon-myeon

광역자치단체

경기도

기초자치단체

광주시

인구

13,878명
(2017년 8월 주민등록인구)

면적

60.75㎢

인구 밀도

228.44명/㎢

하위 법정리

10

면사무소

광동리

퇴촌면사무소 홈페이지


1. 개요2. 연혁
2.1. 지명의 유래
3. 대중교통4. 교육5. 특산물6. 관할 리
6.1. 관음리6.2. 광동리6.3. 도마리6.4. 도수리6.5. 무수리6.6. 오리6.7. 우산리6.8. 원당리6.9. 영동리6.10. 정지리

1. 개요[편집]

경기도 광주시 북부에 있는 .

2. 연혁[편집]

  • 1912년 6월 20일 퇴촌면 관내 이석리(현 남종면)의 개인집에서 집무하다가 광동리 204번지로 옮겼음.

  • 1925년 을축년 수해로 면청사가 유실되어 면민의 기부금으로 광동리 307번지에 신축.

  • 1950년 10월 한국전쟁 1.4 후퇴 시 대파되어 개보수하여 사용.

  • 1959년 12월 25일 국비지원으로 광동리 327번지에 청사신축.

  • 1959년 12월 면사무소 대지에 복지회관을 건립(1993. 철거).

  • 1973년 7월 1일 :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금사리, 삼성리, 이석리가 남종면에 편입됨.

  • 1991년 4월 27일 현청사 신축 (지하 50평, 지상 1층 100평, 2층 100평의 건물 신축).

  • 1995년 오리 73-1번지에 퇴촌문화복지회관 신축.

2.1. 지명의 유래[편집]

퇴촌면에 대한 지명의 유래는 두가지 설이 내려오는데 하나는 조선시대 초기의 개국공신이며 특히 조선 태종(太宗)의 총애(寵愛)를 받았던 한산군(漢山君) 조영무(趙英茂)가 노약하여 정계를 은퇴하면서 광주(廣州)의 동쪽 마을인 광동리(光東里)로 와서 말년을 보내면서 호(號)를 '퇴촌(退村)'이라고 하였는데 조영무의 호가 지명이 되었다는 설이다.

또 하나의 설은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의하면, 고려말에 왕(王)씨와 백(白)씨 성을 가진 두 사람의 상서(尙書)가 나라가 패망할 때를 당하여 함께 조정(朝廷)에서 물러나 이 곳에서 살았는데, 지붕을 맞대고 이웃이 되어 살구나무를 수백 그루 심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마을 이름은 '상서동(尙書洞)' 또는 '행방(杏坊)'이라고 하였는데 두 사람의 상서(尙書, 고려시대 정3품 문관벼슬)가 퇴촌하여 살았다고 하여 '퇴촌(退村)'이라는 고을 이름이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3. 대중교통[편집]

4. 교육[편집]

5. 특산물[편집]

6. 관할 리[편집]

6.1. 관음리[편집]

1914년 이전까지는 상관음동(上觀音洞),하관음동(下觀音洞) 2개 마을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관음리가 되었다. 이 마을에는 예전에 관음사(觀音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관음골, 관음동이라고 불러왔음.

피서철이 되면 휴양지로 종종 퇴촌 계곡부터 천진암이 거론되는데 대부분 관음리에 속해있는 곳들이다.

6.2. 광동리[편집]

예전부터 산수(山水)가 아름답고 들판이 넓어 항시 밝은빛이 비추고 풍년을 이루어 와서 복 받은 마을이라 하여 광복동이라고 불러왔다. 조선조 말 대한제국시대 까지는 광복동'(光復洞)과 동대동(東垈洞으로 2개 마을이었으나,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광복동의 '광(光)'과 동대동의 '동(東)'을 따서 광동리가 되었다.

2017년 7월 기준, 도수리와 더불어 퇴촌면에서 그나마 다운타운 수준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어느정도 편의시설 들이 들어서 있다. CUGS25같은 편의점 정도. 그렇다고 해서 맥도날드와 같은 패스트푸드점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에서야 이디야 커피숍이 들어섰다.

  • 퇴촌면사무소

6.3. 도마리[편집]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도마치(倒馬峙)라고 기록되어 있는 바, 이는 "말이 넘어진 고개"라는 뜻으로 도마치 고개가 너무도 가파르고 험하여 말이 고개를 넘다가 여러번 넘어지는 일이 발생하여 이런 이름이 생겼다는 설화가 전해짐. 마을에 여우가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자주 있어 어느 도공(陶工)이 여우를 잡아 죽이자, 죽은 여우의 혼이 다시 사람을 괴롭혀서 그 여우의 혼을 누르기 위하여 도공이 도자기로 만든 말(馬)을 여러개 만들어 고개에 세웠다고 한다. 그 뒤로는 여우의 괴롭힘이 없어지고 이마을 이름을 도마리(陶馬里)라고 하였음.

지리적으로 서울 부근에서 만약 퇴촌면에 들어오게 된다면 맨 처음 발을 들이밀 수 밖에 없는 곳이다.

6.4. 도수리[편집]

예전에 마을앞에 연못이 하나 있었고, 그 연못가에 도자기를 굽던 가마가 있어서 그 연못의 이름을 도지(陶池)과 함. 김생원의 집 안마당에서 물이 솟아 올라 샘을 파고보니 그 물이 매우 차고 맑아서 '참샘' 이라고 했으며 이 마을의 이름을 수동리(水洞里)라고 함.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도지동의 '도(萄)'와 소동리의 '수(水)'를 따서 도수리(陶水里)라고 함.

6.5. 무수리[편집]

조선조 말 대한제국시대 까지는 초월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퇴촌면 관할에 편입하였다. 광산 김씨(광산 김씨)의 세저지로서 이곳이 물이 맑고 산수가 수려해 사람들이 모두 장수하고 근심없이 신선과 같이 살아 왔다고 하여 '無愁里'라고 불러 왔다. '무술', '무시울' 이라고 함.

6.6. 오리[편집]

마을에 큰 오동나무가 있어 '오동나무골' 이라고 불려왔는데 한자(漢字)로 마을이름을 지으면서 '오리(梧里)라고 함.

6.7. 우산리[편집]

조선시대에는 상우산동(上牛山洞), 하우산동(下牛山洞)의 2개 마을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우산리가 됨. 이 마을의 주위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산모양이 마치 소가 드러누운 것 같은 와우형(瓦牛形)이라하여 우산(牛山)이라는 마을이름이 생겼다고 함.

  • 천진암 성지[3]

6.8. 원당리[편집]

1914년 이전까지는 초월면 관할이었다가 행정구역 통폐합시 퇴촌면 지역으로 편입하였다. 조선시대에 이 마을에 금척원(金尺院)이 있어 '원당'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옛날 이 마을 출신의 장수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이 마을의 으뜸 되는 사람이라 하여 그의 집을 원당이라고 하고, 마을이름을 '원당이' 혹은 '원댕이'라고 함. 마을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아무리 날씨가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원지(元池)가 있었다고 하여 '원당'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함.

6.9. 영동리[편집]

조선초기에 광주목사가 이곳을 지나면서 동쪽에 있는 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영동리'라고 불러왔음. 거먹골, 구룡동, 석둔 등 3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음.

  • 퇴촌 스파 그린랜드[5]

  • 포사이 [6]

6.10. 정지리[편집]

조선조 말 대한제국 때 까지는 정자동(亭子洞)과 지위동(支渭洞)으로 두 마을이었으나,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정자동의 '정(訂)'과 지위동의 '지(枝)'를 따서 '정지리'라고 함. 정자동은 예전에 마을에 정자(訂子)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위동은 조선시대에 한양의 명문거족의 자제들이 이곳에 내려와 한가롭게 낚시질을 하는 것이 마치 강태공과 같고 그 경치가 삼국지에 나오는 중국의 기산(祁山)에서 위수(渭水)를 바라보는 듯 하다고하여 기산위수(祁山渭水)'를 줄여 '기위'라고 했던 것이 '지위(枝渭)'로 바뀌었다고 함.

토마토 농사 지역이 많이 몰려있는 지역이다.

[1] 유일하게 서울 강동구광진구로 오갈 수 있는 대중교통이다. 배차 간격은 20~40분 [2] 척보면 알겠지만 광동리와 도수리를 합쳐 만들어진 교명이다.[3]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이다. 천진암 대성당이 공사중이다.[4] 위안부 발언 사건으로 유명했던 김구라가 사과하기 위해 방문하였던 나눔의 집과 같은 건물이다.[5] 현재 임시 휴장 중이지만 계속 깜깜 무소식이다.[6] 백종원의 3대 천왕에 나온 쌀국수 가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