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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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창당과 분열2.2. 위기와 3당 합당
3. 상도동계의 신한국당 장악4. 지지층5. 정당 이미지6. 역대 선거결과7. 통일민주당 출신 정치인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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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진행 순서

1987년: 신한민주당 창당과 통일민주당의 탈당, 창당[2][3]

1

1984년 12월 20일: 창당발기인대회(민주화추진협의회과 구신민당(1967년) 최고위원연합)

2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 창당

3

1987년 이민우 개헌투쟁노선에서 의원내각제 지지

3

신한민주당(1987년)

김대중, 김영삼 지지의원 포함 73명 분당 선언(1987년)

4

통일민주당 창당(1987년 4월)


민주당계 정당의 직계 조상이면서도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의 직계 조상인 당. 민주당 계열의 친노, 동교동계의 정계 발판이면서도 보수정당 계열의 상도동계, 민주계의 정계 발판이기도 하다.

신한민주당의 다수파인 상도동계(YS)와 동교동계(DJ)가 1987년 4월 선도탈당해 창당한 정당.[4] 그러나 대선 갈등으로 같은 해 10월 말 동교동계가 탈당하면서 평화민주당을 창당, 상도동계와 일부 비주류가 남았다. 그 해 12월의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로 패배하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제2야당(제3당)이 되었다. 이후 3당 합당으로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뿌리 중 하나가 됐다.

주로 불린 약칭은 "민주당"이었으나, '통민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군부독재 시대 이래 약칭으로 민주당을 사용한 첫번째 정당으로, 후술하는 꼬마 민주당 세력이 평화민주당(잠시 신민주연합당)과 민주당(1991년)을 구성하면서 민주당의 계보가 2010년대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2. 역사[편집]

2.1. 창당과 분열[편집]

이민우 구상에 반대한 김영삼김대중의 "빅딜"로 1987년 4월 창당되었다.

창당 당시 용팔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정치깡패들의 테러로 온갖 동정표를 잔뜩 받은 상태에서 출발했고, 전두환 정권에 대대적으로 반발하며 6월 항쟁을 주도하였고, 결국 6.29 선언이 나오게 하는 기염을 토하였지만....

진행 순서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과 분열

1

통일민주당 창당(1987년 4월)

2

김영삼통일민주당 상도동계(1987년 10월 29일)

김대중의 통일민주당 동교동계 탈당(1987년 10월 29일)

3

김영삼통일민주당(1987년 11월 12일)

김대중평화민주당 창당(1987년 11월 12일)


애초에 쌍두마차 체제로 움직이던 파벌이라 대통령 후보를 놓고 단일화에 실패해 벌어저 김대중 파벌이 탈당해서 평화민주당을 만드는 바람에 김영삼 파벌만이 남게 된다. 이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고[5],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부진을 면하지 못하여 제 2야당으로 전락했다. (득표율에서 2위를 기록했지만 정작 지역구에서 2등으로 탈락하는 경우가 많아, 당선자 숫자에서 평화민주당에 밀렸다.) 게다가 대통령 선거 직후 한겨레민주당으로 일부 양김이 아닌 세력들이 탈당했다. 하지만 한겨레민주당은 폭망.[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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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 있습니다"의 사진기자로 유명한 당시 경상일보 김종구 사진기자의 사진 #

이후 평민당, 신민주공화당과 연합해 노태우 정권에 대한 정치적인 견제를 효과적으로 선보여 당시 리더십이 부족했던 노태우에게 물태우란 별명을 안겨주기까지 했었다. 도리어 초기에는 선명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평민당보다 강경했던 측면도 있었다고.

2.2. 위기와 3당 합당[편집]

강원도 동해시 국회의원 보궐선거의 후보 매수 사건으로 김영삼 총재의 측근인 서석재 사무총장이 위기에 놓이면서 김영삼의 차기 대선 자체가 위험해지는 상황이 되었다.

진행 순서

1990년: 민주자유당 창당에 참여한 정당과 과정

1

민주정의당(1981년)

김영삼통일민주당 상도동계(1988년)

신민주공화당(1987년)

2

민주자유당(1990년)


이런 상황에서 노태우가 이미 김종필을 끌어들인 상황에서 김영삼을 꼬셔서 민주자유당으로 3당 합당을 해 버렸다. 당연하게도 재야를 중심으로 "김영삼이 민주화를 뒤로 한 채 군부와 야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이에 대한 김영삼의 답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

1990년 2월 9일,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으로 민자당 창당


물론 3당 합당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쪽에서는 결국 야합으로 대통령이 되었으니 거꾸로 잡혀먹힌거나 다름없다고 폄하하지만, 당내 소수파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하나회를 완전히 뿌리뽑아버리고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사실상 주도한 점은 긍정적이다. 물론 말년엄청난 흑역사를 겪긴 했지만....

3당 합당을 반대하면서 항의하는 노무현 초선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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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회의입니까? 이것이 어찌 회의입니까? 이의가 있으면 반대토론을 해야 합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도 있습니까?"[7]3당 합당에 반대했던 당시의 노무현 초선의원.[8]


원래 김영삼과 그를 위시로 한 경남 민주세력의 일원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경력에 있어서 첫 정당이기도 한데, 이때 3당 합당을 반대하면서 잠시 유명해졌다. 합당 반대파들은 당에 잔류해 민주당(꼬마민주당)으로 재창당했다. 또한 통일민주당은 영원한 피닉스 이인제의 첫 정당이기도 한데, 그는 노무현과 달리 3당 합당에 참여했다.[9] 김무성 역시 이 당에서 YS 휘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고 YS를 따라 3당 합당까지 김영삼을 도왔다.

3. 상도동계의 신한국당 장악[편집]

이들 상도동계 일명 "민주계"[10]는 김영삼 집권기를 거치며 신한국당의 주류가 되었고, 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졌고, 이후 바른정당, 자유한국당등으로 나뉘어 현재는 대체로 보수로 분류된다. 다만 김영삼도 정계를 은퇴했고, 세월이 오래 흐르면서 더 이상 단일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는 파벌은 아니다. 다들 알아서 각개약진.[11][12] 이로서 3당 합당을 계기로 보수정당도 민주화 세력의 후계를 자처할 수 있게 되었다[13][14]. 다만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덕룡, 문정수 등 김영삼계 일부 정치인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였다.

4. 지지층[편집]

양김 분열 후에는 김영삼상도동계가 주축이었던 정당인만큼 PK 지역, 즉 부산광역시경상남도가 주요 지지 기반이었다. 부산이 한 때 야도(野都)였다는 말은 민자당에 흡수된 3당 합당 전까지[15]라고 보면 된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 곳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16]을 올렸으며 다음 해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부산에서는 금정구, 단 1석을 제외[17]하고 싹쓸이 했는데 당시 부산, 경남에 출마한 인물들로는 김영삼을 비롯하여 노무현, 김정길, 서석재, 최형우, 신상우, 이기택, 황낙주, 강삼재, 김동영 등 당의 간판급 인물들이었다. 경상남도 중에서도 대도시인 진주 그리고 김영삼의 고향인 거제군 정도가 대표적인 지역 기반이었다. 공업, 산업 도시에 젊은 층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영향도 있던 셈. 다만 서부 경남지역(특히 대구와 가까워 대구권이라고 불리는 창녕군, 합천군 등)은 민정당 우세 지역들도 많았고, 군사 정권 시절 경제 개발의 덕을 봤던 울산도 민정당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의외로 보이겠지만 서울특별시 강남구[18], 강동구[19]중산층 거주 지역도 우세지역이었다. 강남3구, 강동구 일부와 당시 새로 개발된 목동, 과천시 등 대규모 아파트 주거 지역이 거의 김영삼 우세 지역이었다고 보면 되는데 원래 강남 일대는 대략 1980년대부터 신(新)정치 1번지로 불릴만큼 개혁적이어서 전신인 신한민주당 시절, 아니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때부터 집권 여당인 민정당이 비교적 약세였던 곳이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도 서울특별시 대부분 지역에서는 김대중, 경기도에서는 노태우가 앞섰으며,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평화민주당 바람이 불었지만[20], 강남권에서만큼은 김영삼과 통일민주당 지지세가 타 지역에 비해 더 높았다. 이 지역에 주로 거주하던 중산층 이상 계층 및 고학력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21][22] 이러한 지역들은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으로 재편되고 나중에 신한국당으로 간판을 바꾸면서 자연스럽게 보수 강세 지역이 되었다.[23] 이 흐름은 2017년 현재까지 이어진다. 다만 3당 합당 직후에 그 지지층이 전부 민주자유당으로 간 것은 아니고 상당수 지지층이 꼬마민주당이나 신정치개혁당, 통일국민당으로 흩어지기는 했고, 상당수 통일민주당 지지층들이 민주당 지지층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여러 우여곡절을 통해 결과적으로 보수정당으로 수렴되었으며, 2000년대와 2010년대에 걸쳐서 상당기간 동안 1940년대와 50년대생의 보수정당 지지율이 60%대를 넘나들게 하는데 공헌(?)하게 된다.

1987년 대선 후 한국갤럽이 조사한 예상 득표율 자료를 인용한 분석 기사에 따르면 20~30대와 대학생, 화이트 칼라 및 고소득층의 지지율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24]

5. 정당 이미지[편집]

정당 이미지 색깔은 하얀색으로 태극기와 같은 하얀 바탕을 거울삼아 나라와 국민에 힘써 이바지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심벌마크는 파란색 원 안에 하얀 한반도를 본딴 무늬를 새겨넣었다. '백의민족'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설도 있고, 한민족이 민주주의로 하나되는 정당을 표방한다는 일설도 있고, 민주정의당전두환의 어둠에서 벗어나 광명어린 세상으로 가자는 뜻에서 하얀색을 정했다는 일설도 있다. 방송사 선거방송 때도 하얀색으로 나왔던 적이 있다.

당의 색깔이 빨간색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고정된 색깔은 아니었으며, 이런 얘기는 주로 평민당의 노란색과 대비되는 87년 대선 시절 때 나온 소리로 보인다.

6. 역대 선거결과[편집]

  •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 김영삼 28.0% 낙선

  • 1988년 13대 국회의원 총선거 24.3% 59/299

7. 통일민주당 출신 정치인[편집]

통일민주당 출신 정치인

소속기간

이름

직위

비고

1987년 4월 ~ 1990년 1월 22일

김영삼

2대 총재

자유당 3대 국회의원
민주당(1955년) 5대 국회의원
민정당 6대 국회의원
신민당(1967년) 7.8.9.10대 국회의원
통일민주당 13대 국회의원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14대 국회의원직 사퇴
14대 대통령
신한국당 명예총재

1988년 1월 ~ 1990년 1월 12일

노무현

통일민주당 13대 국회의원(부산 동구)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의 3당합당에 반발 탈당.
해양수산부 장관(국민의 정부)
새정치국민회의 15대 국회의원(서울 종로)
16대 대통령

1987년 4월 ~ 1990년 1월 22일

김무성

의사국장
의원국장

※ 삼동산업(주) 대표이사
통일민주당 총무국장, 국회행정실장, 기조실차장
1994년 제48대 내무부 차관
김영삼 대통령후보 추대위 총괄국장
※ 제14대 김영삼 대통령후보 정책보좌역
※ 대통령 민정비서관, 대통령 사정비서관
신한국당 15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한나라당 16대 국회의원(부산 남구)
한나라당 17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 2007년 한나라당 박근혜 대통령 경선후보 조직총괄본부장
※ 2008년 5월 18대 총선에서 친박무소속연대 출마 당선(부산 남구을)
※ 2008년 7월 한나라당 복당 [25]
※ 15~18대 신한국당 한나라당 국회의원
새누리당 19대 국회의원(부산 영도)
2014년 7월 ~ 제16대 새누리당 대표
바른정당 20대 국회의원(부산 영도)
※ 2017년 3월 제19대 대통령 선거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선거대책위원장
※ 2017년 11월 자유한국당 복당

1987년 11월 12일 ~ 1990년 1월 22일

이인제[26]

대변인

1.1987년: 김영삼의 권유로 통일민주당 입당
2. 1990년: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3당합당을 함.

3. 3당합당으로 창당한 민주자유당에 합류함.

4. 1995년: 민주자유당의 후계 정당인 신한국당에 합류
5.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 신한국당 경선: 이회창에게 패한 불복하고 탈당, 국민신당 창당
6.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
7. 2000년: 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인 새천년민주당 합류

8.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에게 패한 후 불복 / 탈당 / 김종필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에 입당
9. 2005년: 김종필의 정계 은퇴/자유민주연합 탈당/심대평국민중심당에 입당
10. 2007년: 새천년민주당의 후신인 민주당에 재입당
11. 2008년: 민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이 합당한 통합민주당에 합류함

12. 2008년: 18대 총선 통합민주당 공천 탈락 후 불복/탈당/무소속 출마 후 당선
13. 2011년: 자유선진당국민중심연합이 합당한 자유선진당에 입당함
14. 2012년: 자유선진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가 됨. 당명 선진통일당 변경
15. 2012년: 10월 25일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에 합당/새누리당에 합류함

8. 관련 문서[편집]

[1] 민주당계 정당으로 분류되지만 이 당의 대다수가 현재의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으로 이어지며, 보수정당 내의 계파 중 하나인 민주계를 형성하기에 보수정당으로 분류되기도 한다.[2] 두산백관 신한민주당[3] 한국근현대사전 신한민주당[4] 민주화 이후 YS의 영향이 강한 신한국당, DJ의 영향이 강한 평민당의 뿌리가 이 당이었기 때문에 현재 4개의 정당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모두 이 당과 어떻게든 연관이 있다. 다만 박근혜와 문재인은 YS/DJ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서 통일민주당과의 뚜렷한 연관성이 없다고 평가된다.[5] 이는 단일화 실패, 군인의 부재자투표의 사실상의 공개투표의 영향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영향이 크다.[6] 한겨례민주당은 박형오 1명이 당선됐으나, 평화민주당에 입당한다.[7] 노무현 당시 초선의원의 격렬한 이 항의발언이 끝나자마자 바로 뒤에, "신당 창당을 위한 만세삼창을 하겠습니다."가 나오고 자화자찬을 하면서 만세를 부른다.[8] 훗날 대선후보가 된 노무현이 정말로 호랑이를 잡겠다는 약속을 지킨 김영삼을 만나 이 때의 이야기를 하며 화해 분위기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경남의 상징인 YS를 만난 것 때문에 전라도 유권자들이 반감을 보이자 노무현이 그걸 달래면서 YS의 기분을 상하게 하며 노무현과 YS 사이는 또다시 멀어졌다. [9] 참고로 이인제는 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경기도 안양시 갑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10] 상도동계와 민주계는 현재는 별 구분없이 사용되나 엄격한 의미에선 다르다고 한다. 1985년을 기점으로 이전 YS의 상도동 사저시절부터 정치적 운명을 같이한 사람들은 상도동계라 칭하고(김덕룡등이 포함 김무성은 막내), 1985년 이후 12대 총선을 전후하여 통일민주당시절에 YS측에 참가한 사람들은 민주계라고 구분한다고한다. 이인제,서청원,김광일등이 해당된다.[11] 사실 2010년 이후에도 현역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옛 상도동계 인사도 거의 없다. 이건 오랜 라이벌이었던 동교동계도 마찬가지. 각자 보스도 이미 정치를 떠났고, 다들 나이도 먹었고. 이제는 가끔가다 모여서 친목회나 하는 정도로 보면 된다.[12] 참고로 3당 합당 당시 상도동계 가장 막내였던 '김무성'이 2017년 현재 66세로 새누리당 대표였으며 바른정당 최고참 국회의원으로 꼽힌다. 민주계 막내로도 표현되기도 하는 정병국 역시 바른정당 1대 대표였다.[13] 다소 애매한 개념이긴 하다. 원칙적으로 민주화 이전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모두 진보적이라기보다는 보수주의에 이념적 기반을 둔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5.16이전 집권당인 민주당도 신, 구파 모두 반공을 기반으로 한 보수주의에 신념을 두는 정당이다. 민주당이 진보적 색채를 띄게 된 것은 노무현정부 이후 부터이다.[14] 당시 민주화 운동은 참여한 각 주체의 세부적 이념은 다를지라도 반독재정권이라는 기치로 모였으므로 이념을 가릴 것이 없었다. 애초에 프랑스대혁명부터 보수적인 혁명이다.[15]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학생 시위도 마산과 부산에서 시작됐으며 부마민주항쟁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6월 항쟁 때도 서울과 함께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곳이었다.[16] 의외로 노태우가 부산,경남지역에서도 30~40%의 득표율을 올려 크게 선전하였다. 또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 등 서부 경남지역에서는 노태우가 아예 1위를 차지한 곳도 있었다. 김대중 측에서도 4자필승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근거가 김영삼이 고향인 PK에서 70% 이상 압도적인 득표율을 올리는 것이었지만 노태우가 이 곳에서 표를 잠식시키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17] 당시 부산에서 유일하게 민정당 후보가 당선된 곳이 바로 금정구. 가장 영향력 있는 지역 유지인 동일고무벨트 회장 김진재가 민주당 바람을 뚫고 2위인 이대우 통일민주당 후보에게 1,800여표차로 신승했다. 워낙 지역기반이 탄탄하게 다져놓아 나중에는 아들인 김세연에게도 지역구를 물려줬다.[18] 당시 강남구서초구 일대로, 1988년에 각각 분구되었다.[19] 당시 강동구송파구 일대로, 1988년에 각각 분구되었다.[20] 물론 서울에서도 김대중이 큰 표차로 앞선 곳이 아니라 많아야 3% 차이로 앞섰을 뿐이었다. 단 총선 때는 평민당 의석수와 득표율이 전부 앞섰다.[21] 이전 버전에는 이 지역의 PK 지역 출신 상경자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해당 지역은 전라도충청도 등지에서 상경한 주민들이 많은 서울 타 지역보다는 상대적으로 경상도 원적자들이 많기는 하나 해당 지역 전라도, 충청도 원적자들의 인구 비중과 비교할 때 선거를 좌우할만큼 크게 유의미한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 지역이다. 또한 서울 다른 지역에 비해 의외로 서울경기 출신 원적자 비중이 높은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이 당시 선거는 경상남도 출신 후보와 경상북도 출신 후보가 동시에 출마했음을 상기하면...[22] 이 지역의 투표 결과를 좌우한 요소는 주민들의 출신지나 원적지보다도 계급 투표적 측면이 더욱 강했다. 아래 후술하지만 김영삼은 화이트칼라, 경제적 상류층에서 지지도 1위를 차지했다. 하기한 갤럽 자료에서, 김영삼은 중산층 이상에게 높은 지지도를 보이고 나머지 노태우김대중, 김종필 후보 지지층은 거의 유사한 소득 계층 분포를 보이고 있다.[23] 예를 들어 88년에 통일민주당 당적으로 서초구 을 지역에서 당선된 김덕룡 의원은 이후 해당 지역에서 보수 정당 간판으로 4선을 더해서 5선까지 한다(...)[24] 이전에는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1위라고 나와있었는데 해당 갤럽 자료에서 해당 종교 신자들에게 1위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후보는 김대중 후보였다. 김영삼 후보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2위, 노태우 후보가 3위.[25] 프로필[2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