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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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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펑크밴드에 대해서는 텔레비전(밴드)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개요2. 역사
2.1. 기계식 TV2.2. 전자식 TV (브라운관)
2.2.1. 컬러TV
2.3. 한국의 상황2.4. 2000년대2.5. 2010년대
3. 종류
3.1. 텔레비전의 종류
4. 방송 종류5. 기타6. 매체에서의 텔레비전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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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텔레비전,티비

영어

Television, TV

일본어

テレビジョン, テレビ[1]

중국어

电视

1. 개요[편집]

Television 텔레비전 수상기. 전파적인 신호를 받아서, 그것을 보여주는 전자 기기. 흔히 TV(티비) 혹은 '테레비'라고도 한다. 브라운관이라고도 불린다.

2. 역사[편집]

2.1. 기계식 TV[편집]

TV의 시작은 셀레늄이 광전효과 즉 빛을 받으면 전기가 흐르는 효과를 아일랜드의 전신기사 조지프 메이가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이 원리를 이용하여 셀리늄판을 이용 빛을 셀리늄판에 투과시켜 빛을 전자신호로 바꾸고 역으로 과정을 거처서 빛을 발산하여 화면을 보이게 하는 기술을 알렉산더 베인이 개발하였으나 이것은 전자식이 아닌 기계식으로만 동작했기 때문에 단일사진만 보낼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독일의 전기기술자 파울 고틀리베 닙코프라는 사람이 닙코프 디스크라는 것을 개발하였는데 디스크에 24개의 구멍을 나선형으로 뚫고 각부분을 영화처럼 전기 신호를 한 프레임씩 보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좀 더 쉽게말하면 영화필름을 세로로 24조각으로 나눈후 각 조각마다 순서대로 빛을 보내는 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후 영국의 사업가 존 로지 베어드가 텔레바이저(televisor)[2]라는 이름으로 상용화 하였고 1929년 BBC에서 최초로 기계식 TV방송이 시작되었다,

2.2. 전자식 TV (브라운관)[편집]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이 1897년에 전자를 쏘아서 형광 물질을 때리게끔 하여 형상을 나타내게 하는 브라운관을 발명한다. 그후 기계식과 브라운관을 혼용하는 등 수많은 개발을 거쳐 미국의 필로 판스워스가 1921년에 완전한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개발하면서 우리가 잘아는 화면이 볼록한 TV가 등장하였다. 이후 1936년 BBC를 시작으로 방송국들이 브라운관용 TV방송을 선택하면서 기계식 TV는 3년뒤인 1939년에 완전히 사라졌다.

2015년 샤프전자 및 인도 업체들을 마지막으로 브라운관 TV 생산은 중단되었다.##

2.2.1. 컬러TV[편집]

텔레비전을 컬러로 방송한다는 아이디어는 19세기부터 존재했었지만 본격적인 컬러방송을 시도한 것은 1950년 4월 미국 CBS에서 '필드 연속 컬러 시스템(Field-sequential color system)'이란 방식을 선보인것이 최초이다. 이 방식은 브라운관과 유리막 사이로 3원색이 칠해진 원판을 모터로 돌려서 컬러신호를 주고받는 방식으로[3] 구조가 복잡하고 실용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연히 수상기가 필요이상으로 비싸져 상업적으로 실패한데다 하필이면 6월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져버리는 바람에 얼마 못 가 사장되었다. 이후 1954년 우리가 아는 NTSC방식이 등장하면서 디지털TV가 생겨나기 이전까지 오랫동안 북미권과 한국, 일본의 방송 시스템으로 군림했었다.

이후 1960년 9월에 NTSC 방식을 받아들인 일본을 시작으로[4][5] 주요 강대국인 소련, 영국, 프랑스[6], 서독등이 각각 PAL과 SÉCAM방식으로 컬러TV 방송을 개시하여 전 세계적으로 컬러 텔레비전의 수요가 급속히 늘기 시작했다. 다만 이 나라들이 처음부터 올컬러로 방송을 개시했던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1950년대에 컬러방송을 시작했지만 1950년대 당시에는 컬러TV는 가격이 무척이나 비싸서 부유층들이나 가지는것이었고 송출지역도 상당히 제한적이라서 컬러방송 초기 10년간은 흑백 프로그램이 대부분이었고 컬러 프로그램은 적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것은 1960년대부터로 이 시기 즈음해서 컬러텔레비전의 생산량이 크게 늘고 가격도 합리적인 수준으로까지 떨어졌으며 컬러 프로그램이 차차 늘어나기 시작하자 196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컬러 텔레비전의 대중화가 이루워졌다.

일본도 마찬가지라서 1960년대에는 대부분의 프로그램과 광고들을 여전히 흑백으로 방송했었고 컬러로 제작된 프로그램을 1~2편정도 따로 편성하는 식이였었다.[7] 하나다 소년사아따맘마의 번외편(쇼와 아따맘마 목욕탕 이야기, 266화)을 보면 1960년대 중반까지는 일본에서도 컬러TV는 아무나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단 걸 알 수 있다. 실제 60년대 초반에는 컬러TV 1대가 수십년치 봉급 수준인데다가(당시 일본 공무원 초봉이 연 1만엔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컬러TV 가격은 54만엔.) 기껏 컬러TV를 사와도 컬러로 볼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지않아서 그다지 큰 메리트를 가지지 못해 부자집에서나 가졌던 물건이었고 60년대 중반에 도쿄올림픽 등의 영향으로 컬러TV가 좀 늘어나긴 했지만(당시 대졸 신입사원의 초봉은 2만엔 수준이었고 컬러TV가격은 20만엔정도의 수준)대부분의 가정집에서 컬러TV는 꿈도 못꾸고 흑백TV로 만족해야하며 컬러TV는 밖에 나갈일이 있을때에나 조금 볼 수 있었던 물건이었다. (번화가나 기차역, 백화점에서 컬러TV 홍보 목적으로 텔레비전을 설치하는 일은 있었기 때문 하지만 컬러TV를 사는 사람은 극소수라는게 함정) 그러다가 60년대 후반-70년대 중반에 걸쳐서 전면 컬러화가 이루어지고 일반 가정집 소득이 컬러TV를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어가자[8] 컬러TV가 대중화 되었다.

서유럽권에서도 방송 전체가 컬러화 된건 1970년대 초중반부터이며[9] 어느정도 텔레비전 기술이 발전되어가던 때였기때문에 빠르게 대중화 되었다. 그러나 동유럽에서는 컬러TV가 널리 보급되는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흑백TV에 비해서 몇배나 비쌌던데다가 70년대 후반의 경기침체로 인해서 컬러TV의 보급이 더뎌졌기 때문이다. 또한 북유럽 국가들은 70년대 말까지도 뉴스 프로그램은 흑백으로 내보냈으며 교육방송의 경우 어린이들이 컬러 영상을 보면 모방심리를 가질 수 있다고 우려해서인지 1980년대 초까지도 흑백으로 방송하는 비중이 높았다.

2.3. 한국의 상황[편집]

한국에 도입된 시기는 1950년대 초, 중반 외국에서 수입으로 들어온 흑백 텔레비전이 시초이고, 텔레비전 방송이 1956년에 시작되었으며, 미군 PX를 통해서 흑백텔레비전이 상당수 도입되었다. 검정 고무신을 봤다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최초의 국산TV는 금성사(현재 LG전자)의 VD-191이다. 19인치의 진공관 흑백 TV로 1966년부터 생산이 시작되었고, 1968년까지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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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국산 TV인 VD-191)

하지만, 당시 TV 보급률은 낮았는데, 당시 텔레비전 자체가 무척 비싼 물건이라 (60년대 후반 기준으로 일제 TV가 10만원, 미국산이 13만원, 위에 금성TV가 7만원 정도로 당시 서울 집값이 평당 5~10만원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고가였다. 수입텔레비전만 있었던 1950년대 중후반과 1960년대 초중반에는 더해서 텔레비전 자체가 일부 지역에서만 볼수있었던데다가 사치품이라며 관세를 비싸게 매겼기 때문에 부자들이나 고위급 공무원급은 되어야 살수있던 물건이었다.) 전화기와 마찬가지로 부유한 가정에나 살 수 있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일전이나 인기 드라마같은 대박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동네 한 두군데 있는 텔레비전 있는 집으로 몰려들어서 방송을 보기도 했고, 당대 대다수 만화방도 거금을 들여 TV를 설치한 다음에 만화책을 단골로 보는 애들이나 푼돈을 낸 청소년과 성인들을 상대로 TV를 볼 수 있게 하는 식으로 영업했다고한다. 그래서 당시 TV가 있었으면 동네에서 엄청나게 떵떵거리는것이 당연해서 TV가 있는 집안 아이에게 각종 아부를 떨면서 TV를 볼려고 얘썻던 아이들이 많았고, 어른이라고 크게 다를것이 없어서 TV가 있는 집 주인에게 성격이 어떻건 간에 아부떨기 바빴다는 후문이 전해져내려온다. 그렇지 않으면 만화방에서 돈내고 봐야했으니까. 이 풍경은 1970년대 중 후반에 없어지는듯하다가 1980년대 초반에컬러방송이 시작되면서 잠시 부활했지만 1980년대 중후반 들어 컬러TV가 어느정도 보급되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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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70년대 중후반 들어 TV가 좀 잘사는집 위주로 그럭저럭 보급되면서[10] 디자인상 약간의 현지화가 이루어졌는데 좌식생활에 맞게 다리가 짧아지고 고가품답게 도둑맞지 않도록 화면을 가리는 미닫이문과 자물쇠가 채워진 형태[11] 즉 보통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흑백TV의 형태로 바뀌게 된다.

한편, 컬러 텔레비전 도입과 관련해서 일종의 흑역사가 있는데 1970년대 중반들어 한국 업체들도 컬러TV를 생산하기 시작하고, 방송사들(그래봐야 KBS, MBC, TBC뿐이었지만)도 이미 60년대 말즈음부터 컬러방송 실시 계획이 있었으며 그 때문에 1970년대 중반에 와서는 컬러방송 송출용 장비를 전부 도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기계만 컬러이지 방송국에서 컬러방송을 하지를 않아서 컬러 텔레비전을 사 봐야 컬러방송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12][13] 이유인 즉슨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다 같이 흑백방송 보자는 기존의 흑백TV 사용자들을 배려(?)한 정책 탓. 그가 말한 것 중에서 흑백도 없는 사람이 많은데 흑백보다 더 비싼 컬러가 나오면 없는 사람들은 더 비참한 생각을 갖게 될것이라는 여담과 청계천 다리 밑에 사는 사람들까지 다 잘살게 해 줄 수는 없지만 못사는 사람에게 더 초라한 생각을 갖게 해주기는 싫다는 여담이 있다고 한다.[14] 실제로는 유신정권의 여느 정책들이 그렇듯 풍기문란과 '퇴폐문화'[15]를 막기 위한 의도가 더 컸다는 주장도 있다. 즉 말로는 계층간 위화감이나 사치풍조 조장때문이라곤 하지만 실제로는 총천연색으로 외국 문물들을 보게 될 경우 사회 분위기나 정권에 불만을 갖게 될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걸 당시 정권에서 알아버린 것이라는 이야기.

극장에서 상영하는 대한뉴스의 경우에는 1974년부터 컬러 필름으로 상영이 되었지만, 당시 방송쪽은 거의 안습일 정도로 시험방송에 가깝게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제작된 일부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일부 광고를 보면 컬러로 제작된 것이 존재)

1980년 12월 1일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개시하긴 했지만[16][17], 애석하게도 이는 전두환 제 5공화국의 우민화 정책3S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결국 당시 한국에 컬러 텔레비전은 땡전뉴스를 더욱 효과적으로 방송하는 기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덤으로 컬러 텔레비전 방송 개시 바로 전 날은 언론통폐합이 시작된 일자로, TBC는 컬러방송도 못 해보고 폐국되었다. 지못미.[18]그래서 JTBC 로고가 무지개색인건가? 이듬해인 1981년 초에는 광고도 전면 컬러화 되었다.

볼록화면 형식의 브라운관 컬러 텔레비전은 1980년대 당시 전성기를 누리게 되고 1980년대 후반 당시 연령대가 대략 만 5~6세 이상이셨던 분들이라면 대부분 이런 텔레비전으로 86아시안게임이나 88올림픽 경기중계방송을 시청했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방영했던 각종 TV 프로나 광고들도 해당한다. 이 후로 텔레비전은 크기는 더 커지면서 성능 및 기능은 더욱 향상되어 나왔다. 비록 1990년대에 평면화면 형식의 텔레비전이 출시하지만, 볼록화면 형식은 1990년대 중후반에도 구입하거나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2000년대 중후반, 아니 현재까지도 현역으로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에서는 2012년 12월 31일 오전 4시부터 전국 지상파 아날로그 방송이 전면 중단되었다.[19] 이제 디지털 방송 리시버를 달거나, 기존 아날로그 TV를 교체하지 않으면 방송을 볼 수 없다. 다만 기존 아날로그 TV 이용자들에게는 정부에서 무상 임대 방식으로 디지털 -> 아날로그 변환 셋탑박스를 제공해 준다.[20]

  • 수도권 아날로그 TV 송출 종료 장면 (KBS 1TV, UHF 25) : ##


디지털 수신기 보급이 미비한 북한 주민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정부는 전방 지역의 아날로그 송출을 유지하기로 했다.기사 전파라는 특성상 경기 북부 지역에서도 수신이 가능할 듯 싶다. 가령 송신소가 근처에 있는 동두천시, 연천군이라든가.[21]

2.4. 2000년대[편집]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크고 무겁고 발열도 많은 CRT 제품이 주류였으며 기존 CRT의 방식으로는 34인치 이상이 될 경우 브라운관의 무게 때문에 더이상 대형으로 제작을 할 수 없었으므로 기기 아랫쪽에서 상을 비스듬히 쏴올리면 거울을 통해 반사되어 화면에 비춰지는 방식의 '프로젝션 TV'가 고가의 대형 화면 제품 포지션을 맡았다.[22]

이 프로젝션 TV는 기존 CRT에 비해 얇긴 얇지만 대신 아래에서 쏴올릴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기에 높이가 올라간다. 크기도 크기지만 제법 보급됐던 DLP 방식의 프로젝션 TV는 램프의 수명 문제가 심각했다. 램프의 수명이 다해 밝기가 떨어질 수록 화면도 어두워지기에 보통 2년에 1번씩 교체해줘야 하는데 램프값으로 10만이 기본으로 깨지는 환상적인 유지비용을 보여준다. 다른 문제점으로는 시야각. 정 중앙에 앉아서 보지 않는 이상은 화면이 거무튀튀하게 보이는 문제가 심했다. 결국 LCD 패널의 보급과 함께 금방 사장되어버린 과도기적 제품. 이런 사정을 모르고 가끔 무료나눔 같은 걸로 프로젝션 TV가 나오면 얼씨구나 업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2013년쯤까지만 해도 크고 저렴하다는점 때문인지 학교에서 많이 쓰였지만, 수명문제로 요즘엔 전부 LCD패널 TV나 프로젝터로 교체되는 추세다[23].

그러나 시장이 LCD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는데, 2000년대 초반의 LCD는 반응 속도 문제 때문에 보급이 더뎠다. CRT에서 LCD로 넘어가는 2000년대 중반의 과도기에는 PDP가 대형 TV 시장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PDP는 LCD가 빠르게 치고 올라오면서 2014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2005년 이후로 LCD 패널의 가격이 급속도로 하락되어 HDTV가 대중화되어 기존 아날로그 방식의 CRT TV는 시장에서 완전히 사장되어 자취를 감추었고, LCD 디스플레이의 라이벌 격이었던 PDP 디스플레이도 LCD 디스플레이에 화질/전력 소모/제품 수명등에 약점을 보여 PDP 디스플레이 TV 조차 시장에서 도태되기 시작한다.

2000년대 중후반까지는 LCD TV의 BLU(back light unit)로 CCFL(Cold Cathode Flourscent Lamp)이나 EEFL(External Electrode Flourscent Lanm)이 많이 쓰였고, 2007년 말부터는 고급형 모델로 CCFL 대신 LED 백라이트 유닛을 사용한 LCD TV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보통 LED 백라이트 LCD TV를 LED TV라고 많이 표현하나 LED 자체에서 색상을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고, LED는 단지 백라이트 유닛 발광만 담당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LED TV는 잘못된 표현이다. LED 백라이트는 2009년부터 대중화하여 기존 백라이트 유닛을 빠르게 대체하기 시작했다.

2.5. 2010년대[편집]

2010년 이후로 기존 CCFL 백라이트 TV보다 더 밝고 전력 소모도 적고, 더 얇은 팬널의 생산이 가능한 LED 백라이트 LCD TV가 보편적인 백라이트로 자리 잡았다. 2010년 초 3D TV를 시작으로 동년 말 이후 스마트 TV가 본격화했으며, 2012년 WOLED 방식의 OLED TV와 LED 백라이트 기반의 4K UHD LCD TV, 2013년 커브드(곡면) TV, 2015년 양자점을 백라이트로 이용한 SUHD[24] LCD TV와 HDR을 지원하는 TV가 등장했다. 스마트 TV와 같은 디지털 TV가 새로 등장하고, 2010년대도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이제는 TV시장에선 아날로그식 텔레비전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3. 종류[편집]

3.1. 텔레비전의 종류[편집]

4. 방송 종류[편집]

4.1. 디지털 방송[편집]

4.1.1. ATSC[편집]

디지털 방식으로 미국에서 표준화되었다. 단, 기술 자체는 대한민국 기업이 간접 보유하고 있다.[25] 변조방식으로는 8VSB를 사용한다. 2~6ch(54~88MHz)는 사실상 DTV 서비스가 불가능하므로 예비용으로 사용하고 7~13ch(174~216MHz)는 지상파 DMB용으로 사용하도록 되었다. 이전에 할당된 698~806MHz는 다른 용도로 분배하기로 결정.

  • 14ch~51ch : 470~698MHz

4.1.2. DVB[편집]

유럽 방식. 남아프리카공화국, 대만, 호주 등에서 채택하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 지상파 표준인 DVB-T와 그 후속인 DVB-T2는 별다른 변조없이 이동수신이 가능하며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디지털 텔레비전 방식이다. HD에 특화된 방식은 DVB-T2이지만 대만프랑스호주를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는 DVB-T 포맷으로 HD 방송이 실시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식에서는 ATSC에 졌지만 Skylife에서 위성방송 전송방식인 DVB-S 방식을 채택하고 있고 2015년 6월, UHD 방송의 기술검증을 위한 시험방송이 DVB-T2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UHD 최종 표준확정은 복잡다단한 어른의 사정으로 ATSC 3.0로 채택.

4.1.3. ISDB[편집]

일본과 필리핀, 타이, 몰디브, 남미 대부분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디지털TV 전송 방식으로 사단법인 전파산업회(Association of Radio Industries and Businesses, ARIB)에서 관리한다. 모바일 방송으로 원세그가 있다.

4.1.4. DTMB[편집]

중국 방식. 중화인민공화국과 홍콩, 마카오에서 사용하는 디지털 텔레비전 방식이다.

4.2. 아날로그 방송[편집]

4.2.1. NTSC[편집]

한국에서 사용되는 NTSC 방식의 경우 채널당 대역폭 6MHz씩으로 영상은 4.5MHz의 AM으로 변조하며 음성은 1.5MHz의 대역폭으로 50~15kHz의 음성 신호를 FM으로 변조하여 전송한다.[26]

4.2.1.1. NTSC-J[편집]

일본에서는 NTSC를 자국에 맞게 변형해서 썼었다. 채널 1~3번의 주파수 대역이 타국에서는 FM방송으로 쓰는 대역이었기 때문에 1번 채널이 존재했었다.


참고로 일본 내수용 TV를 한국에 가져와서 수신을 하면 2~6번 채널을 수신할수없었다. 단 채널 미세조정 기능이 있는 경우 운좋게 수신할수있다고 한다. 아날로그 케이블 방송도 마찬가지 였는데 한국기준 98~99, 14~22, 24~64(65)번을 제외한 7~118번 채널[36]은 수신이 가능했다.

4.2.2. PAL[편집]

유럽 방식으로 디지털 전환 이전에는 프랑스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전역[37][38], 남/동/북아프리카, 아르헨티나, 브라질, 오세아니아 등에서 정말 폭넓게 이용되었다. 물론 한국/일본의 전파월경을 바라지 않았던 냉전시절 중국/북한도 PAL 방식을 사용. 상당수 국가들은 PAL과 SÉCAM을 동시에 송출했다. 원칙적으로는 NTSC와는 달리 채널 번호 1번부터 사용할 수 있지만 미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은 관습적으로 안쓰기도 한다. 참고[39]

기계적으로 보았을때 유럽의 1960~80년대 초반 텔레비전 수상기는 동시기 NTSC권 수상기와 채널을 돌리는 방식도 좀 달랐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로터리 방식(VHF, UHF 다이얼을 돌려서 채널을 바꾸는 방식)이 아니라 프리셋 버튼 방식으로[40] 1에서부터 7까지 임의로 버튼이 있으면 각 버튼마다 일일이 실제 채널을 맞춰주는 방식이었다. 유럽의 몇몇 텔레비전 방송국이 채널 1 비슷한 이름을 달고 있는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70년대 텔레풍켄 수상기의 채널 버튼)

참고로 NTSC와 PAL/SÉCAM과는 주사선 수 부터 많은 것이 다르므로 한쪽 수상기로 다른 쪽 방식은 전혀 수신할 수 없다. 물론 가격이 비싼 겸용 수신기를 사용하면 세 방식 모두 수신 가능하다.[41]

  • 47~806MHz

5. 기타[편집]

그러니 제 말 들으십쇼. 똑바로 들으십쇼. 텔레비전은 진실이 아닙니다! (Television is not the truth!) 텔레비전은 놀이 공원이란 말입니다! 서커스이고, 카니발입니다! 무용수와 이야기꾼과 가수와 춤꾼과 저글러와 괴물과 사자 조련사와 축구 선수가 놀아납니다! 지루함을 달래서 돈을 쓸어담을 뿐입니다! 그러니 진실을 원하신다면... 하느님에게 가십시오! 상담을 받으십시오! 자기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오직 그렇게 할 때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화 네트워크(1976)에서. 동영상 참조)


종종 '바보상자'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교사나 교수 같은 교육자 집안에서는 아예 텔레비전이 없는 경우도 있다.[42]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영상 자체가 사실 유익한 것은 별로 없고, 또한 뇌발달을 고려해볼 때 유아의 경우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동안에는 뇌가 사실상 아무 행동도 하지 않기 때문에 뇌발달이 저해된다. 그래서 교육자 집안에는 텔레비전이 없는 경우가 있는 경우보다 많고, 대신 가족간의 담화를 나눈다거나 책을 보는 경우가 있다. 물론 지금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수많은 유희를 즐기는 경우가 많기에 비교적 줄어든 일이지만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TV를 보느냐고 정신이 팔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보니 공부에 방해되는 매체라는 인식도 생겨났던것도 바보상자라는 별명이 붙여지는데 한 몫했다.

헌데 진짜로 TV가 바보상자라는게 입증되었다. 하루 3시간 이상 TV를 접하면 치매 발생확률이 현저히 상승한다고 한다.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51209008000075&mobile

한편, 이 '바보 상자'라는 단어는 비단 한국어로만 바보상자인 것이 아니라 영어로도 Idiot box는 텔레비전에 대한 슬랭이다. 이 Idiot box를 바보들이 들어있는 상자로 해석해서 만든 것이 네모바지 스폰지밥의 바보 상자 에피소드. 실제로 에피소드 초반부에 스폰지밥이 커다란 상자를 얻기 위해 커다란 TV를 사는 사소한 서술 트릭도 있다. 하지만 움베르토 에코는 인터뷰에서 TV를 바보상자라고 여기는 것은 음악회를 가거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등의 문화적 경험이 가능한 사람들의 생각이고 오지에 살거나 직접적 문화적 경험이 불가능한 사람들에게 TV는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도구라고 옹호했다. 실제로 밥값을 걱정해야 할 처지의 빈민들조차 TV는 사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43]

그리고 무엇보다 TV를 보지 못하면, 목숨을 잃어버리고 많은 사람들의 애를 태우는 경우가 있다.

"텔레비전은 처음 6개월이 지나면 시장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합판으로 만든 상자를 보는데 지겨움을 느낄 것이다."
- 대릴 자눅(Darryl F. Zanuck). 당시 20세기 폭스 회장

이 말은 현재 와서 희대의 망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뉴스코프가 폭스 영화사를 인수한 뒤 이 이름으로 지상파 TV 방송도 차리고... 요즘 텔레비전은 합판은 안쓰니까 반은 맞을지도

컴퓨터를 두고 나온 비슷한 발언이 있다.

유럽 국가의 텔레비전 방송은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혹은 프로그램과 광고 사이에 아나운서가 음성으로, 혹은 직접 화면에 나와서 다음 프로그램이나 예고편에 대한 해설을 해주는 개념이 존재한다. 다만 직접 화면에 나오는 형태는 비용이나 스튜디오 공간문제등으로 인해 사라져가는 추세. KBS TV를 보다 보면 "주말의 KBS 1TV" 따위의 제목을 달고 아나운서나 아이돌들이 주말 편성표를 안내해 주는 것이 있는데, 맹장처럼 남은 유럽식의 흔적이라고 보면 된다.[44]유럽 외 지역에도 이런 게 있었는지는 누가 확인바람.

여담으로 텔레비전의 발음 자체가 어려워서인지 아니면 일본어의 영향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은 그냥 '테레비(テレビ)'라고 발음하고 있다. 또 1970년대 광고 등에서는 텔이라는 더욱 영어스러운 얄딱꾸리한 표기도 자주 보였었다고.. 원래 어원은 그리스어 "테레" 라틴어 "비시온" 을 합쳐 프랑스어로는 테레비ㅈ"시온이라고 하는게 뭔가 발음이 비슷한면도 있어 보인다.

2000년도 말엽부터 텔레비전이 LCDHD 해상도로 대동단결하고 DVI, HDMI 등의 출력 단자를 채용함에 따라, 컴퓨터와 연결해서 모니터 대용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컴퓨터 모니터에 IPTVHDMI로 연결해 소형 TV로 쓸 수도 있다.단 일부 모니터는 TV용으로 나온 것 이 아니기 때문에 스피커가 없어서 소리를 못 들을 수 도 있다.(그대신 외부스피커 단자가 있는 제품이 있어서 스피커를 연결하면 된다)

지금이야 텔레비전 놓는 방향이 전 세계적으로 통일(?) 되었지만, 과거 브라운관 아날로그 TV시절에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다.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거실 벽면 가운데에 놓지만, 서양권과 일본은 거실 구석에 대각선 방향으로 놓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백남준이 TV를 이용한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테레비전 형상을 이용한 것도 있고, 화면에 나오는 그림과 영상까지 포함하는 것이 있다. 항목 참조.

6. 매체에서의 텔레비전[편집]

방송이 끝난 뒤에는도 그렇고 여러 매체에선 은근히 호러쪽으로 자주 묘사되는 주 아이콘. 매체에서 주로 TV속의 존재가 TV 밖으로 빠져나오는 연출이 자주 보인다.


역으로 시청자가 TV 속으로 들어가는 연출도 있다.


The Twonky처럼 텔레비전 수상기 자체가 생명력을 지니는 작품도 있다. 호러라기보단 코미디에 가깝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주파수가 안 잡히거나 스크램블이 걸려 화면이 나오지 않는 경우 기계의 옆이나 뒤를 쳐서(...) 다시 화면이 나오게 하는 경우가 있어 드라마만화의 클리셰처럼 여겨졌지만, 방송송출이 안정화된 2010년대부터는 그런 현상이 거의 사라졌다. 때리려고 해도 벽걸이가 되어서 칠 수가 없다. 그 외에 외지에서는 전파를 잡기 위해 기와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 안테나의 방향을 고치는 일도 있었다. 나라는 다르지만 아이언맨 3의 개리가 대표적인 사례. 채널미세조정(아날로그)를 하거나 증폭기(디지털)을 사면되는데 왜 그랬을까?

7. 관련 문서[편집]


[1] 사실 국립국어원에서 정한 일본어 표기법대로라면 레비가 옳다.[2]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이 표현을 사용한다. телевизор(찔리비죠르)[3] 당연히 전용 촬상관이 있는 카메라로 제작된 프로그램이여야 한다. 아무 프로그램이나 저 색원판을 돌린다고 컬러화면이 되는게 아니란 소리.[4] 의외로 쿠바에서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일찍 시작했는데 1959년에 아바나 등 일부 지역에서 컬러 TV방송을 시작되었다. 물론 이때의 컬러방송은 시험방송에 가까웠던 형태였기에(당장 미국만 봐도 컬러TV가 대중화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쿠바 혁명이후로는 NTSC방식의 컬러방송은 종료되었고 1976년에 PAL 방식으로 컬러방송이 재개될때까지 쿠바인들은 흑백으로 TV를 봐야했다. 다만 쿠바가 지속적으로 자본주의 체제하에 있어서 컬러방송의 명맥이 이어졌더라도 일찍 컬러방송을 시작한 미국과 일본에서 컬러TV가 완전히 대중화 될때 15년이 걸렸다는 점과 당대 쿠바의 빈부격차가 몹시 커서 하루하루 먹고사는 가난뱅이들과 돈이 썩어날정도로 넘쳐나는 부유층이 공존하는 상황 막장상황이었던걸 볼때 컬러TV 보급이 고작 몇년 정도 더 앞당겨졌을 수준이라는것이 주평이다.[5] 이러한 현상은 1970년대 중반의 베네수엘라에서도 재현되었는데 1960년대 말에 컬러방송이 시작되었지만 1970년대 중반에 갑자기 컬러방송의 송출이 종료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베네수엘라가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2000년대 중반 시기와 더불어 역대급 호황을 누렸던 시절이었기에 왜 컬러방송이 종료되었는지 이해가 안되겠지만 컬러TV가 베네수엘라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아 전량 수입해야하는 사치재라는 이유때문이다. 물론 당시 대통령인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가 흑백TV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아챙겨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6] 1967년 ORTF 제2텔레비전(지금의 France 2)에서 개시했다.[7] 그래서 당시 방영된 컬러프로그램들을 보면 화면 밑에 '컬러방송'이란 식으로 자막이 떴었거나 본방송이 시작되기전에 "컬러로 방송됩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떴다.[8] 물론 불편한 진실도 좀 숨어있기는 한데 당시 일본 가전업체들이 일본 국내에서 컬러TV를 비싸게 팔면서 미국으로 수출할때는 반값에 떨이로 판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9] 프랑스의 경우 제1텔레비전이 1974년 TF1로 분리 독립한 뒤에도 76년 1월까지 흑백으로 방송했었다. 당시 프랑스의 경우 흑백방송이 819주사선, 컬러방송이 615주사선으로 흑백이 화질면에서는 좋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라고 한다.[10] 물론 당시 정부에서 프로파간다 전달 목적으로 TV의 물품세를 면제해주고 저가형 텔레비전을 싸게 공급하는 방식으로(쌌기는 했지만 품질은 좀 떨어졌다.) TV보급을 적극 지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명 새마을TV라고 불렀다.)TBC의 전국방송화가 진행되지 않아서 수도권과 PK지역에서만 방송되거나 DBS 동아방송의 TV방송 허가가 나지 않았던것도 그와 연관이 있다.[11]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TV나 피아노, PC처럼 고가품, 귀중품으로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물건들은 예외없이 이런 잠금장치가 내장되어 있었다.[12] 다만 1976년부터 AFKN은 컬러로 볼수 있었다. 여담으로 AFKN이 컬러방송을 시작한 이유가 흥미로운데,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된 주한미군 초병들이 한국으로 올때 아직도 TV화면이 흑백으로 나오는 후진국(...)에 왔다며 문화적 충격을 느껴서라고한다.[13] 당시 부산직할시울산시 등 영남 해안가 지방에선 일본방송의 전파가 잡혀서 이미 1960년대 초반부터 컬러로 나오고 있는 일본 TV방송을 볼수 있었다. 단, 양국의 TV채널이 겹쳤기 때문에 일부 채널만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일부 부유층들은 컬러화면을 즐기기 위해 일제 VCR(U-MATIC이나 베타맥스 등)을 같이 들여놓기도 했다 카더라[14] 그 때문에 웃지 못할 일도 있던게, 당시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프로스포츠는 프로복싱이였는데 대부분의 국가에서 컬러방영을 할 시기라서 국제대회 같은 경우 당연히 양 선수가 파란 트렁크, 빨간 트렁크를 입고 경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걸 흑백TV로 중계하면 둘 다 같은색으로 보이므로 아나운서가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물론 한국 선수가 경기하는 경우는 흑백TV 사용자를 배려, 흑백에서도 트렁크 색상이 구분되도록 했다.[15] 서구권과 일본에서 컬러TV가 막 보급되던 당시에는 히피와 사이키델릭 문화가 같이 유행하던 시대였고 실제로 이런것들을 표현하는데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60년대 당시 미국내 민권운동도 이 컬러TV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활발해졌다는 분석도 있을 정도.[16] 물론 대한민국뿐 아니라 당시 아시아, 아프리카 개도국들 중에는 컬러TV 나이가 동갑이거나 더 늦었던 나라들이 수두룩하긴 했다. 공산권에서도 중국(1973년)이나 윗동네(1974년), 베트남(1978년)처럼 남한보다 더 빠른 나라가 있는가 하면 미얀마(1984년)나 부탄, 네팔, 라오스처럼 더 늦은 나라도 있을 정도. 서아시아에서는 이스라엘시리아, 터키(...)가 한국과 동갑이다. 그리고 유럽에서 컬러방송이 가장 늦었던 나라는 포르투갈로, 한 때 식민지로 두었던 나라가 1972년에 개시한 것보다도 훨씬 늦었으며, 대한민국보다는 9개월 빨랐다(1980년 3월 7일).[17] 이스라엘은 노동당 정권이 컬러TV 도입을 반대했었고, 리쿠드당 소속인 메나헴 베긴이 집권하고 나서야 해금되었다.[18] 그래도 TBC에서 제작된 쇼쇼쇼 700회 특집과 샅은 일부 프로그램은 컬러로 제작된 것이 존재하는데, 공연 프로그램은 컬러로 제작된 것이 존재하며 고별방송 프로그램도 컬러로 제작되었다.[19] 이에맞게2013년 1월 1일부터 HD로고를때고 영상을 16:9에 맞게 제작하고있다.그런데 EBSMBC는 HD로고안땠다가 커뮤니티사이트에 전날리났다.[20] 일반 안테나를 이용하여 TV시청을 하는 가정에만 해당하며 유선방송, 케이블TV, IPTV, 위성방송(스카이라이프) 시청 가정은 해당 사항이 없다.[21] 단, 북한과 중국의 아날로그 TV 방식은 PAL 방식이라서 한국용 NTSC 방송은 수신 불가능하다. 북한을 향해 송신되는 KBS1 아날로그 전파는 PAL 방식 10번으로 통일이 될때까지 송출될 것으로 전해졌다. 극소수의 겸용 수신기나 PAL 지원 TV수신카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수신은 전혀 불가능하다. 북한지역에서는 따라서 PAL방식으로 계속해서 시청중일것으로 추정된다. 접경지역과 평양 남부 일부지역에서는 약한 전파로도 멀리까지 신호 전달이 가능한 DTV 특성상 NTSC방식으로 DTV수신을 직접 하는 북한 주민들이 상당히 많다고. 북한 내부의 태블릿과 노트북 보급도 일조한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화이트박스 태블릿가운데 TV자체수신기능을 가진 모델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것들이 북한으로 흘러들어간듯하다.링크 [22] 16:9모델과 4:3모델이 동시에 팔렸으며 후반부에 나온 모델들은 HDMI입력과 DTV 디코딩으로 1080p을 지원하기도했다. 프로젝터와 유사한 방식으로 동작되어서 DLP,3색관 방식등이 사용되었다. [23] 램프교체비용도 많이들지만 잔고장도 의외로많아서 여러모로 골치다. LCD TV가 많이싸진 마당에 더이상 굴릴이유가 없는것. 게다가 프로젝터는 작아서 설치하기도 쉽다.[24] 삼성전자 측의 마케팅 용어이다. 이후 LG전자에서도 같은 단어를 마케팅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가리키는 의미는 서로 다르다.[25] 특허의 대부분을 LG전자를 비롯한 한국 기업이 갖고있다. LG전자의 경우 미국 자회사인 제니스사가 가지고 있는 거지만. 아무튼 미국식이 한국의 디지털 지상파 TV 방송 방식으로 채택되고 UHD 기술도 DVB-T2에서 ATSC 3.0으로 표준이 변경된 것에는 이런 측면이 큰 것으로 보인다.[26] 이론적으로는 주파수만 맞으면 FM 라디오로 아날로그 TV방송의 음성신호를 들을 수 있다곤 하지만 대한민국과 미국의 경우 라디오보다 주파수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채널6번 빼고는 거의 불가능했다.[27] 원래 NTSC 초기에는 45MHz 대역으로 1ch가 있었으나 미국에서 타 무선통신과 겹친다는 이유로 해당 주파수대역을 회수했다. 또한 대역 특성상 노이즈가 많은 등 TV방송용으로는 영 좋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채널번호가 방송사의 브랜드처럼 여겨지는 상황에서 채널번호를 하나씩 밀어 재할당하기가 곤란하자 그냥 1번 채널 없는채로 표준화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조.[28] 참고로 한국의 FM라디오 주파수대역은 미국,유럽과 동일한 88~108MHz로 88MHz에서 6ch의 TV 음성전파와 겹친다. 일부 FM라디오에서 SBS TV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이유.[29] 83ch까지 할당되어 있으나 규정상 69ch, 실제로는 59ch까지만 사용한다[30] 휴대이동통신이 800MHz 대역을 사용하는데 채널과 채널 사이이다[31] 하지만 국내에서는 134ch까지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32] 한국의 FM라디오 주파수대역과 거의 중복된다. 당연히 한국제 FM라디오를 가지고 일본의 1~3ch TV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33] 참고로 일본의 FM라디오 주파수대역은 76~90MHz이며 일본에서만 이 대역이다. 이런 이유로 일본에서는 과거 국내/해외 수신 가능한 76~108MHz 밴드의 FM라디오를 만들었었다. 해외에서는 FM라디오로, 국내에서는 FM + TV 1~3ch 음성수신용으로. 일본의 아날로그 TV 송출 종료 이후로 일본내수용 라디오는 76~90MHz 대역만 잡히게 제작되었으나 최근 와이드FM 도입으로 다시 76~108MHz 대역의 라디오가 발매되고 있다.[34] CPR-4103A기준[35] 일본에서는 셋톱박스를 이용한 케이블 방송시청이 보편적이라서 TV에서 이 대역은 수신할수없다.[36] 물론 최대 송출 채널은 미사용 번호가 존재하지만 97번까지 송출한다.[37] 이 두 나라는 SÉCAM을 사용했다[38] 폴란드나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발트 3국, 우크라이나등 동구권 국가들도 SÉCAM 방식을 체택했지만 1990년대 중반에 PAL로 방식을 전환했다.[39] 북한도 마찬가지, 그런데 여기는 반미 성향이 강함에도 채널번호 1번부터 사용하지 않았다.(조선중앙TV는 10번, 만수대TV는 8번, 룡남산(前 교육문화TV)는 12번[40] 자동차 라디오의 숫자버튼을 떠올리면 된다.[41] 주로 중동지역처럼 같은 아랍어를 사용하면서 국가마다 TV 방식이 다른 지역을 위해 이런 수신기를 만들었다. 물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필요 없다. 과거에 한국에서 북한TV를 보거나 북한에서 한국TV를 보려면 필요 하긴 하다. 그 전에 코렁탕[42] 1990년 6월 가와시마 키코일본 황실로 시집올 때, 그녀의 친정에 텔레비전이 없어 가와시마 가문의 독특한 교육이 화제가 되었다. 키코 비의 친정아버지 가와시마 타츠히코(川嶋辰彦)는 저명한 경제학자로 가쿠슈인 대학 교수였으며, 가와시마 가문은 대대로 학자, 의사, 교수 등이 많이 나온 집안이었다.[43] 아비지트 배너지, 에스테르 뒤플로 저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참조.[44] 한때 KBS 1TV도 1990년대 초반까지 프로그램 사이에 아나운서가 나와서 이어질 프로그램을 설명해 주기도 하였다. KBS 1TV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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