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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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몰락
2.1. 북이탈리아2.2. 이베리아2.3. 일리리아와 발칸2.4. 갈라티아2.5. 프랑스2.6. 브리튼 제도
3. 기타4. 켈트어5. 켈트 십자가6. 켈트 신화7. 켈트 해

1. 개요[편집]

Celts[1]
라틴 : Celtus

켈트는 프랑스, 영국 등지에 살던 민족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스어로는 Keltoi, 라틴어로는 Gallus 혹은 그리스어 형태를 받아들여 Celtae라고 불렀다. 라틴어 이름 Gallus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들이 살던 땅, 즉 현재의 프랑스 지역은 갈리아라고 불렸다.[2]

켈트족이란 개념 자체가 고대에 켈트어를 쓰던 집단에서 파생된 개념이라, 근대 이후의 민족 개념에 대입해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현대의 민족 개념보다는 '튀르크 어족'이라거나, 남아프리카를 석권한 '반투(어)족'같은 광범위한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

현대 켈트인들도 사는 지역이나 나라마다 언어가 조금씩 다른 편이며 종교적인 차이도 존재한다. 아일랜드와 브르타뉴는 가톨릭이 주류이지만, 스코틀랜드[3]웨일스[4]개신교가 주류이다. 북아일랜드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언급되었듯 가톨릭을 믿는 토착 아일랜드인과 개신교를 믿는 스코틀랜드계가 충돌하여 유혈 사태로까지 발전했고, 지금도 서유럽에서 드물게 내전이 언제 다시 발발할지 모르는 화약고처럼 취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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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스칸디나비아에서, 슬라브족흑해 너머에서 이주해온 것과 달리 켈트족은 이론이 있기는 하지만 유럽의 할슈타트 문화로부터 정체성을 형성하였다.[5] 오늘날이야 유럽의 여러 민족 집단들 중 소수 집단에 불과한 상태지만, 한때는 게르만족은 물론 로마가 존재하기 전부터 유럽 전역에 분포해 살며 유럽의 주인 노릇을 했다. 전성기에는 흔히 켈트족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프랑스 지역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나 동유럽, 이집트(!),[6] 아나톨리아[7]까지 진출하여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를 자주 약탈했다.

이 시절 켈트의 원정은 스키타이의 활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키타이가 폴란드와 보헤미아에 영향을 끼치며 그 지방 부족들의 세력이 약화되었기 때문.

BC 4세기(기원전 390년) 에트루리아가 켈트에 털리면서 두 개의 도시를 빼앗겼는데, 이때 빼앗긴 도시들은 메디올라눔,[8] 보노니아[9]로 개명된다.

이때 에트루리아는 다급한 나머지 한때 따가리(...) 취급했던 로마 공화국SOS를 때렸고, 로마에서 온 지원군 덕에 수도 클루시움은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잔뜩 빡친 켈트가 남하하여 로마의 동맹 도시들을 공격하였고, 군사적 역량이 부족했던 로마 공화국은 7개월 동안 처절하게 발리며 끝내 본진인 로마마저 약탈당한다. 하지만 켈트족은 로마에 들어와서 약탈만 하고 건물이나 시설은 거의 박살내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없이 다음에 로마가 적당하게 무르익으면 다시 털어먹으려 했기 때문이다.[10] 이 당시 로마의 각종 기록들이 대규모로 유실되어서 B.C. 390년 이전 로마사는 신화와 실제 역사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켈트 남부 부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휘젓고 있을 때, 동방 부족들은 흑해 연안까지 진출, 이후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그리스를 침공한다. 이때 그리스펠로폰네소스 전쟁코린토스 전쟁의 여파로 정상이 아니었고, 켈트 부족들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결국 델포이 신전까지 약탈당하는 굴욕을 겪게 된다.

2. 몰락[편집]

한때 지중해권을 제외한 유럽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야만족답지 않게 군사기술적으로도 우월해서 로마를 비롯한 여타 유럽 문명에 자신들의 군사 기술을 널리 전파시킨 전투종족이었지만[11] 기원전 2세기 경을 시작으로 거짓말처럼 몰락하기 시작했다. 가장 주된 이유는 로마의 팽창 때문이었지만, 대체로 각 지역별로 켈트족의 몰락은 다음과 같은 양상을 띈다.

2.1. 북이탈리아[편집]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은 이탈리아인들의 위협으로 계속 남았으며 자신들과 다른 야만족이 바로 위에 거주한다는 것은 로마 중심의 이탈리아 지배가 고착화되는데 기여했다. 즉 로마가 아무리 아니꼽더라도 인간 같지도 않은[12] 야만족속들을 막기 위해서 로마를 중심으로 단합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 과정과 그 이후에 북이탈리아를 수시로 공격한다.

기원전 3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북이탈리아 공격은 한니발 전쟁기를 제외하면 상시적으로 일어났으며 끝내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들은 로마의 물량빨로 인해 패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들은 로마에 끈질기게 저항하고 2차 포에니 전쟁 이후에도 7번이나 로마의 집정관-법무관 군대를 격퇴시켰으나 그래봤자 그 다음해에 똑같은 규모로 다시 쳐들어오니 GG(...). 기원전 2세기 중반이면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들은 로마에 거의 복속된다.

2.2. 이베리아[편집]

이베리아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동남부 해안가는 비-인도유럽어족의 이베리아인들과 카르타고인들, 중부와 북부는 켈트족 혹은 켈트-이베리아 혼혈족, 남부는 카르타고인과 투르데타니아인, 서부는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루시타니아인, 북동부 구석탱이에는 바스크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중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한 종족이 켈트계 제민족이었고, 2차 포에니 전쟁으로 로마의 영향력이 이베리아에 미치게 되자 이들은 로마에 맞서 100여년간 투쟁을 벌인다.

전쟁의 양상은 북이탈리아처럼 로마의 물량빨로(...) 로마는 지든 이기든 꾸준히 군대를 보냈고, 처음에는 이베리아인들, 이후에는 켈트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했다. 이 와중에 누만티아의 학살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 이어졌고, 켈트족을 포함한 이베리아의 민족들은 세르토리우스 반란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기원전 1세기 중반에 북부 바스크계 제민족들을 제외하고 모두 복속된다.

2.3. 일리리아와 발칸[편집]

과정은 동일하나 기록이 충분하지는 않다. 그리스의 로마군과 카르파티아의 다키아인들에게 밀려서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키아인들중 상당수가 켈트족 혈통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문화적으로 다키아인들과 켈트족의 관계는 깊다.[13]

일리리아의 켈트족 또한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그들은 현재 보헤미아라는 지명의 기원이 된 보이족을 중심으로 통합을 하였지만 다키아인과 게르만족, 로마인의 진출로 1세기경 복속된다.

2.4. 갈라티아[편집]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를 공격한 후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에 이주한 켈트족들은 소아시아 서부 내륙지역인 갈라티아에 정착하여 그들의 왕국을 세운다. 갈라티아의 켈트족은 프톨레마이오스조와 셀레우코스조의 전쟁에 용병을 파견하면서 디아도코이 왕조간의 전쟁의 큰 변수가 된다.

하지만 기원전 189년 로마에 복속된다. 이후 미트리다테스 전쟁 등의 전화에 휩싸이고 최종적으로 속주가 된 것은 기원전 25년. 하지만 그들의 문화는 오랫동안 유지되어 기원후 4세기에도 켈트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성경의 갈라티아서가 이 갈라티아 지역의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2.5. 프랑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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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세기경까지는 도나우 지방에서 이동해 온 켈트족이 현재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방에 정착했다. 켈트족이 이동 정주를 반복하며 켈트족의 "위대한 팽창"이 시작됐는데 그들은 이때 소아시아까지 이동하였다. 오랜 시간 로마를 침략하기 시작하고 그곳에 영구 거주지를 만들기도 했는데 고대 로마 또한 카이사르처럼 대적하면서 확장하여 켈트족은 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갈리아에 부임한 카이사르는 점점 갈리아를 평정해 나가고 켈트의 아르베르니족의 베르킨게토릭스는 켈트족을 통합하여 로마와 동맹 부족이었던 하이두이족까지 로마에 등을 돌려 반기를 일으키게 한 후 로마와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모든 켈트족이 로마에 패배하고 아르베르니족의 베르킨게토릭스가 처형당한 후 켈트족은 약체화되었고, 독일 북부 서부쪽에선 게르만족의 공격에 의해, 다른 쪽에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에 의해 사라졌다.

알프스 이남의 켈트 세력은 로마와의 처절한 전투 끝에 소모전으로 나온 로마군에게 패배했다. 실제 기록상으로, 오랜 전란으로 약화된 켈트인은 포에니 전쟁 이후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동수의 로마군을 수차례 격파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여러 단편적인 기록을 검토해봤을 때, 리비우스가 켈트와의 전쟁에서 로마가 겪은 패전을 다수 생략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는 이런 패배를 메꿀 인적, 물적 자원이 충분했지만 이미 포에니 전쟁 이전부터 약화되기 시작한 인수브리-보이족 켈트 세력은 이를 메꿀 역량이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천재적인 군사적 역량이 성공의 핵심이었지만, 그 전에 켈트인들은 크게 소모되어 있었고, 카이사르 역시 깊이 골이 패인 여러 켈트 부족 세력들간의 반목을 적절히 이용해가며 갈리아를 평정했다. 그 후 아르베르니족이 켈트족을 통합하고 로마에 동맹 부족으로 있던 하이두이족까지 반기를 일으키게 했지만 패했다.

어쨌든 드루이디즘을 비롯한 전통 문화를 잃어버렸지만 대신에 로마식 문명을 기초로 하여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골어는 거의 소멸하고, 로마의 라틴어가 바로 이를 대체하였다. 이는 이후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지속되며,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로마 제국의 비호를 받으며 로마 제국에 들어온 프랑크족과 같은 게르만족에 융합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6. 브리튼 제도[14][편집]

브리튼 섬에 건너간 켈트 족들은 이후 브리튼과 아일랜드 등 브리튼 제도 곳곳으로 퍼지게 된다. 브리튼 섬의 켈트족들은 여타 지역의 동족들이 모두 로마에 복속된 이후에도 로마의 정복 활동에 맞서 끊임없이 저항했고 기원후 43년경 로마에게 복속된 이후에도 하드리아누스 성벽 이북의 픽트족들은 끝내 로마의 통치를 받지 않아 전 유럽에서 유일하게 켈트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지역이 되었다. 이들은 로마 제국 말기까지도 지속적으로 로마화한 브리튼인들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였다. 이후 쇠퇴기에 접어든 로마 제국이 브리튼 섬에서 철수하면서 브리튼 섬은 오랜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중세에는 게르만족의 한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이 네덜란드를 거쳐 바다를 건너와 침략해왔고 북쪽에서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역시 게르만족의 일파인 노르드인[15](바이킹)이 침략해 왔다. 그리고 11~12세기에는 윌리엄 1세가 이끄는 노르망디노르만족들이 브리튼 제도를 남쪽에서부터 휩쓴다. 이때 잉글랜드 지역의 켈트족들 중 많은 수는 앵글로색슨족, 그리고 노르만족들에 지배당하며 흡수되었고,[16] 앵글로색슨족과 노르만족들에게 지배당하거나 섞이기를 거부한 켈트족들은 웨일스로 쫓겨났다. 이때 켈트족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인물을 신화화한 것이 아서 왕이다. 아마도 잠시나마 앵글로색슨족을 막아냈던 어떤 켈트족 지도자가 미화되어 전설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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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현재까지 남은 순수한 켈트족의 나라는 아일랜드가 유일하다. 아일랜드어(겔러, 혹은 게일어 Gaeilge)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켈트어군의 상용 언어지만 아일랜드를 400년간 지배한 영국에 의해 영어가 깊숙히 퍼진 데다가 영어의 힘에 압도되어 현재 아일랜드 인구의 대부분은 영어를 상용어이자 모어로 쓰고 있다. 아일랜드 정부가 겔러를 퍼트리고 유지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는 있지만 상용자는 줄고 있다. 모어로 쓰는 사람은 7만 명 정도이고 그나마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머지않아 모어로 쓰는 사람이 소멸되면 사실상 사어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완전하게 동화된 것은 아니어서 켈트족의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 북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 등이 연합왕국의 구성원이 되거나, 프랑스의 한 지역으로 편입된 것은 겨우 근대 이후의 일이며, 지금도 그들의 민족적 문화적 자부심이 대단하다.[17]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사람들끼리도 "우리야말로 진짜 켈트 문화, 켈트 민족의 종주국이다, 너희는 찌질하게 잉글랜드 지배나 당했다", "아니다 너희가 잉글랜드 꼬붕으로 보냈던 시절이 더 찌질했다"라는 식으로 서로 놀리며 상호 디스하는 풍경을 에딘버러, 글래스고, 더블린의 술집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 두 나라는 물리적인 거리나 문화적인 거리도 상당히 가깝고 예나 지금이나 얼스터 지방과 하이랜드는 인구,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는 한 나라라고 볼 만큼 같이 해온 역사와 상호 소통, 교류가 깊어 스코틀랜드에도 아일랜드인들이 굉장히 많고 아일랜드에서도 스코트인들이 많이 산다.[18]

다만 이렇게 혈통적으로는 가깝고 친밀할 것 같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관계도 역사와 종교 부분으로 들어가게 되면 험악해진다. 아일랜드로 건너간 스코틀랜드 신교도들이 아일랜드 독립 이전까지 아일랜드 지역에서 지주로서 토착민 구교도들을 소작농으로 부리며 착취하고 탄압한 역사나, 감자 대기근 이후 고향을 떠나 스코틀랜드로 이주한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토착 스코틀랜드인들의 차별과 탄압의 역사,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북아일랜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19] 1990년대~2000년대까지 벨파스트같은 북아일랜드 도시에서 농담이랍시고 이런 주제에 대해 잘못 말했다간 진짜 총폭탄이 날아왔다.

영국의 켈트족들은 켈트족의 전성기였던 고대에는 동족들과 실질적으로 단절되어 기술적,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대륙의 동족들이 로마화하여 정체성을 잃어버렸음에도 꾸준히 살아남음으로서 존재감을 지속하였고, 때문에 오늘날 내려오는 켈트족의 이미지는 대부분 이들에게서 비롯되게 되었다. 벌거벗은 채 푸른 물감을 몸에 바르고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한 채 싸우는 야만적인 켈트 전사의 이미지는 실질적으로 브리튼 섬의 켈트족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이런 문화적 특성을 갈리아 전쟁 당시 브리튼 인들이 갈리아 인들에게서 구분되는 주요 차이점으로 묘사하였다. 참고로 영국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선사 시대의 건축물 스톤헨지는 켈트족 도래 이전에 지어진 것이다. 후대에 켈트족들이 들어와서 종교적 의식에 쓰이긴 했지만.

영화 '폼페이'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마일로'는 이 영국에 살고 있던 켈트족이다.

3. 기타[편집]

켈트인들의 최대 판도는 매우 넓어서 에스파냐 전역과 북아프리카 일부,[20] 흑해 부근에도 갈리아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흑해 연안은 갈리아인들의 본래 근거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이 설을 채용했는지, 빛의 신 의 창 브류나크를 살로니카에서 발견한다.[21]

영어로 발음하면 셀틱으로도, 켈틱으로도 모두 발음하며, NBA 농구팀 보스턴 셀틱스도 여기서 딴 이름이다. 또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를 연고지로 하는 유명 축구팀 셀틱 FC도 있다. 둘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팀의 창단 기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현 프랑스 일대의 켈트족은 골족이라고도 불리고, 유명한 프랑스의 만화 아스테릭스도 켈트족의 영웅 아스테릭스가 로마에 점령당하지 않고 오히려 괴롭히는 내용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네 선조들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만화라고 하면서 매우 좋아한다. 물론 근대 이전의 프랑스인들은 엄밀히는 골족과 프랑크족의 혼혈이지만, 프랑크족은 일단 게르만족의 분파였으므로 자존심 강한 프랑스인들이 선조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고, 프랑크족의 직계후손인 네덜란드인이 엄연히 현존하고 있다. 그와 달리 갈리아의 골족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만의 선조였고 영국와 한창 사이가 좋지 않을 때는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와 공조해서 영국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어떤 반역 애니 시리즈어떤 비범하게 맛간 제국 황가의 시조(라고 그들이 주장하는) '알윈 1세'도 따져보면 켈트족이다.[22]

한편 일본에서 나온 중세풍 판타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특히 쯔꾸르 계열)에서 채용되곤 하는 BGM이나 OST들 중 뭔가 중세 유럽 분위기의 멜로디가 나온다 싶으면 보통 이 켈트족의 전통민요가 모티브인 경우가 많다. 이런 부류를 많이 접한 사람의 경우 유튜브 등지에서 Celtic folk라 검색해서 들어보면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본, 상당히 익숙한 느낌의 멜로디를 많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웨스테로스의 3대 민족 중 하나인 최초인들은 켈트족이 모티브다.

인터넷에서는 아래와 같은 글이 고대 켈트족의 전통 기도문이란 이름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다. 다만 정확한 출처는 불분명하다.[23]

당신 손에 언제나 할 일이 있기를, 당신 지갑에 언제나 한, 두 장의 지폐가 남아 있기를
당신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태양이 비치기를
가끔 당신의 길에 비가 내리더라도 곧 무지개가 뜨기를
불행에 대해선 가난하고, 축복에 대해선 부자가 되기를
적(敵)을 만드는 것에는 느리고 친구를 만드는 데에는 빠르기를, 이웃들은 당신을 존경하고, 불행은 당신을 아는 체도 안하기를
당신이 죽을 것을 악마가 알기 30분전에 당신은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기를
앞으로 겪을 가장 슬픈 날이, 지금까지 겪은 가장 행복한 날보다 더 나은 날이기를
그리고 하나님께서 늘 당신 곁에 함께 계시기를

아일랜드 켈트족 전통 기도문

4. 켈트어[편집]


켈트어는 라틴어 등과 다르게 단수, 복수 체제가 아니라 단수, 양수, 복수 체계이다. 양수란 '두 개인 것'을 가리키는 말. 즉 켈트어에서는 하나짜리인 것과 두 개짜리인 것, 세 개 이상인 것을 구분한다는 소리로, 이와 같은 특징은 산스크리트어와 고전 그리스어[24]에서도 동일하다. 어순도 VSO형으로 한국인에게 익숙한 영어나 프랑스어 등 익숙한 유럽어들과 차이가 있다.

오늘날 살아남은 켈트어 가운데는 웨일스어가 수적으로 가장 많다. 아일랜드에서는 게일어의 분파인 아일랜드어를 국어로 삼고 학교에서 가르치지만, 일상적으로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철자 개혁을 하지 않아 옛 정서법을 그대로 쓰기 때문에 영어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철자와 발음의 관계가 괴악하다. 쓰기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 쓰고, 읽기를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라고 한다고 보면 된다.

5. 켈트 십자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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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원이 둘러져있고 그 안에 여러 문양으로 장식된 형태를 켈트 십자가라 부르는데, 이 역시 전설에 의하면 성 파트리치오 주교에 의해 최초의 형태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원래는 인종차별적 의미가 거의 없었고, 단순히 성당 등에서 일반적인 십자가와 함께 널리 쓰던 표식이었지만 1970년대 네오 나치 단체들이 하켄크로이츠를 대체하기 위한 상징물로 애용하면서 점점 이미지가 안 좋아져가는 문양이기도 하다.

6. 켈트 신화[편집]

켈트족과 관련된 신화로 켈트 신화가 있다. 아서 왕 전설 신화도 켈트 전설이다.

7. 켈트 해[편집]

켈트 해는 영어 표기로는 Celtic Sea이며, 영어 발음에 가깝게 하는 표기법으로 적용될 경우, 셀틱 해로 표현한다. 통상적으로 아일랜드 섬 남쪽의 대서양 해역을 지칭한다. 동부는 세인트 조지 해협과 브리스틀, 영국 해협 등을 경계로 정한다.

[1] 본래 유래를 따지자면 '켈트'로 읽는 게 맞지만, 영어에서는 어두에 c가 오고 다음에 e가 올 때 c를 /k/로 읽는 경우가 극히 적기 때문에 '셀트'로 잘못 발음하기도 한다.[2] 비슷한 것으로 게르만-게르마니아가 있다.[3] 칼뱅주의 개신교의 일파인 장로회(presbyterianism) 명칭이 이곳에서 유래했다.[4] 1904년 감리회 부흥운동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되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와 복음주의 신학자로 잘 알려진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가 이곳 출신이다.[5] 할슈타트 문화도 결국 흑해 너머에서 이주해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이주민들에게서 형성된 문화이므로 켈트족 또한 흑해 너머에서 왔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다만 켈트족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된 이후에 넘어왔는가 아닌가의 차이일 뿐.[6] 하지만 이건 단순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요청에 따른 켈트족 용병대의 평화로운 이집트 정착이다. 이런 식으로 정복이나 군사적 원정이 아닌 단순 이주까지 따지면 전 세계에 진출하지 못한 민족이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7] 아나톨리아에 갈리시아란 왕국을 세웠다.[8] 현재의 밀라노.[9] 현재의 볼로냐.[10] 이때 로마를 털어먹은 켈트의 족장 브렌누스는 로마쪽에서 화평의 대가로 내놓은 재물에 검을 얹으며 "패자에겐 재앙이 있으라"(Vae victis)고 조롱했다(저울이 균형이 맞지 않아 당초 약정한 무게보다 더 많이 내놓게 된 것을 로마 측에서 항의하자 저렇게 대꾸한 것이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켈트에게 털린 굴욕을 잊지 않기 위해 침공당한 날에 개를 패고 거위는 방석에 모시는 퍼포먼스를 취했다. 왜냐하면 켈트군이 쳐들어왔을 때 개들은 조용하고 거위들이 꽥꽥 설쳤기 때문.[11] 켈트식 장검과 투구, 갑옷은 로마군에게 거의 그대로 차용되어 로마 제국 시기는 물론, 중세까지도 이어진 유럽인들의 군사기술의 기초가 되었다.[12] 물론 비-켈트족 이탈리아인의 눈으로.[13] 물론 다키아인들은 켈트가 아닌 트라키아인들에게서 파생된 민족으로 추정되며, 문화적으로는 트라키아와 스키타이의 영향이 더 짙다. 다만 켈트족과 부대끼면서 그들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14] 영국(+맨 섬)과 아일랜드.[15] 흔히 노르만족이라고도 불리나 엄밀히 따지면 노르만족은 노르망디 지방에 거주했던 프랑스화된 노르드인을 뜻한다.[16] 현대 잉글랜드인들의 유전자를 가지고 혈통을 분석한 결과 앵글로색슨족의 지분은 1/3 정도였고, 나머지는 켈트, 그리고 노르만족 등의 혈통이었다. 즉, 오랜 기간 동안 잉글랜드 지역 내에서 켈트-노르만-앵글로색슨족 사이에 이뤄진 광범위한 융합의 결과가 오늘날의 잉글랜드인들인 것이다.[17] 같은 영국 국가안에 있지만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축구 시합을 하면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프랑스를 응원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게 아니다.[18] 스코틀랜드라는 국명의 기원이 되었던 스코트족 자체가 원래는 아일랜드에 거주하던 종족이었다. 아일랜드에서 발상한 스코트족이 브리튼 섬 북부로 건너가서 패권을 잡으면서 스코트족의 땅, 즉 스코틀랜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특히 얼스터 지방)는 거리가 가까워서 교류가 많았다.[19] 위에서 말한 스코틀랜드계 신교도 중 상당수가 북아일랜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아일랜드 독립 이후 남부 지역의 스코틀랜드계 신교도들이 북부로 이주하였다.[20] 용병으로 내려가 헬레니즘 제국에서 복무하다 그 대가로 파윰 분지를 받아 아직도 파윰 분지엔 켈트족의 후예가 있다고 한다.[21] 당시 흑해 연안에 켈트족의 조상이 살았겠지만 그때 켈트족 이라는게 존재했을지는 의문이다. 흑해 연안은 인도유럽어족의 발원지와 그 인근지역이기 때문. 인도유럽어족에서 켈트족으로 분화한 기원지는 북부 알프스 기슭 할슈타드-라 텐느 문명이다.[22] 주인공을 필두로 이 집안 사람들 상당수의 눈동자가 보라색계열인데, 이 눈색은 켈트족에서 드물게 나오는 색이다.제작진이 인종 설정을 제대로 해놓은 건지도?[23] '당신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으로 시작하는 축복문('Go n-éiri an bóthar leat')은 있기는 한데 번역이 잘못된거다. 이건 그냥 대충 '좋은 여행이 되기를'이라는 말인데, 여기에 저기저기 출처가 분문명한 살이 더 해져서 켈트식 축복/아이리쉬 축복(기도)문 이라는 형태로 여기저기에 떠돌고 있는 것이다.[24] 그리스어는 이미 코이네 시대에 양수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