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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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식 키릴 문자(로마자) 표기 : 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Karl Ivanovich Veber)
영어식 로마자 표기 : Karl Ivanovich Weber
독어식 로마자 표기 : Carl Iwanowitsch (von) Waeber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편집]

구한말 시기 활동한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주한 러시아 총영사로 활동하면서 고종과 친분을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1896년 아관파천을 주도한 인물로 한국인 사이에서 유명하다.

2. 생애[편집]

1841년 6월 17일 독일계 러시아인의 후손으로 태어나 1865년 외교관으로 임용된다. 개인적으로 동양의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탓에 청나라로 파견되어서 베이징 주재 공사관 서기와 톈진 영사를 거쳐서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알렉산드르 3세의 전권대사로 활동하였고 이듬해에는 주한 러시아 총영사로 서울에 부임한다.

이후 1894년 잠시 청나라로 파견됐다가 동학농민운동 이후 조선의 정세가 급변하자 다시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러시아 총영사로 재임하면서 고종의 총애를 얻었는데,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베베르가 다른 지역으로 부임하게 되자 고종이 이에 대해 항의하는 편지를 니콜라이 2세에게 써서 베베르의 임기를 연장시킬 정도. 사실 1895년 7월, 러시아 외무부는 베베르를 멕시코 공사로 발령하고, 대신 알렉세이 스페에르를 후임 공사로 파견했다. 지나치게 한국에 친화적이었던 베베르를 대신해서 일본에 친밀했던 스페에르를 파견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고종과 베베르가 한 뜻으로 반대했다. 뒤에 고종이 베베르에게 막대한 이권을 챙겨주고 매수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대했다는 것이 드러난다.관련 기사 어쨌든 베베르는 고종의 친서까지 전하면서 반대하고, 스페에르가 한양에 도착했을 때에도 한양에 머물고 있었다. 이 때 주일 공사가 사망하면서 베베르는 2년동안 더 한양에 남아있을 수 있게 된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력하고 갑오개혁을 실시하면서 조선에서 세력을 확대하자 프랑스독일을 끌어들여 삼국간섭으로 일본에게 압력을 행사하면서 일본을 견제하는데 힘을 쏟는다. 삼국 간섭 이후 박영효를 비롯한 친일 관료들이 추방되고 이완용을 비롯한 친러[1]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이라는 초대형 무리수까지 저지르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잃지 않기 위해 발악을 한다. 을미사변 이후 공포에 사로잡힌 고종을 꼬득여서 베베르는 두 차례의 시도[2] 끝에 마침내 1896년 2월 고종의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데 성공하니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 한 나라의 군주가 외국 공사관에 거처하니 국가적으로는 치욕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아관 파천을 통해 일본은 고종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후려맞았고 러시아의 대조선 영향력은 이 시기 최고에 이른다.

아관 파천 이후인 1896년 5월 14일, 베베르는 일본 영사 고무라 주타로와의 합의를 통하여 러시아의 한반도 내 우위를 인정받았다. 일본은 러시아가 4개 중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승인하였으며 아관 파천을 통해 김홍집 내각을 대체한 새로운 친러 내각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것이 베베르 고무라 각서, 혹은 고무라를 한자식으로 읽어서 베베르 소촌 각서이다.

이후 1897년 새로 러시아 외무부 장관에 임명된 무라비예프는 다시, 베베르가 너무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는데 불만을 품고, 스페에르를 다시 한양에 부임시킨다. 이후 베베르의 행적은 다소 불투명하다. 하지만 러시아로 돌아간 이후에도 베베르는 대한국 외교에 여러모로 참여하고 있었는데, 로젠 니시 협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902년 러시아 황제의 명령으로 고종에게 성안드레이 훈장을 수여할 때에도 서울에 방문하여서, 1903년 5월까지 한양에 머물다가 돌아갔다. 러일 전쟁이 1904년 2월에 터지기 때문에, 러일 전쟁 관련해서 충고를 했을 것이란 추정을 한다.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다가, 1910년 사망했다.

3. 여담[편집]

  • 아관파천에서도 보이듯이 고종과 친분이 정말로 깊었는데, 1903년에도 대한 제국을 방문하여 고종과 대담한 적이 있다. 둘 사이에 정확히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야 미궁이지만, 러일전쟁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던 시기였던만큼 아마 두 강대국 사이의 충돌에서 조선이 어떤 외교적 스탠스를 취해야하는지에 대해서 고종이 베베르에게 조언을 구한거 아니었을까라고 추정중.

  • 한국에 대한 애정이 꽤 있었는지 한국어 이름도 있었다. 음차 표기 위패(韋貝)가 바로 그의 한국식 이름이다.

  • 독일계 러시아인임에도, 막상 한국에 머무를 당시에는 한국에 거주 중이었던 독일인들과 사이가 별로였다고 전해진다.[3] 사이가 안좋았던 정확한 이유는 미지수이지만 베베르의 아내가 '독일 외교관들이 음란하게 논다[4]'라는 소문을 내고다녀서라는 썰도 있다. 흠좀무.

  • 베베르와 따라온 인물이 바로 후일 한국 초기의 서구식 호텔[5] 중 하나인 손탁호텔을 세운 안토니트 존탁이다. 존탁의 정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좀 있는데,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베베르의 처남의 처형[6]이다. 존탁은 수시로 고종을 방문하면서 춘생문 사건과 아관 파천 등의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이 때 핑계거리로 활용한 것이 바로 커피이다. 고종이 커피를 좋아한다고 소문난 것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1] 말년의 매국노 포스가 너무 커서 그렇지, 18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완용은 친러, 친미 세력을 오가면서 일본을 견제하는데 힘을 쏟는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을 몰래 러시아 공사관으로 빼돌리는 임무를 수행한 당사자도 바로 이완용.[2] 첫번째는 미국 공사관으로 튀려고 하다가 밀고자에 의해서 발각된 춘생문 사건이다. 베베르는 이 사건에도 협력자로 참여했었다.[3] 이게 당연한게 독일계 러시아인이라 해도 이미 조상 대에 독일에서 러시아로 이주한지 오래 됐으므로 본인을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한다. 독일계 러시아인이 독일에 대해서 특별하게 생각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었다. 1차 대전 당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과 대치했던 러시아군 사령관 파울 폰 렌넨캄프도 독일계 러시아인이었다.[4] 영사관에서 수소문한 결과 자신들이 난교 파티를 벌인다는 소문이 돌아 다닌다고...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들을 왜 꺼려하는 지 알게된 독일 영사가 중재를 위해 영국 공사를 데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쳐들어가 러시아 공사 측에서 수습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여담으로 이 독일 영사는 서양인들이 모이는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산타 복장을 했다고 한다.[5]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은 인천에 세워진 대불 호텔이다.[6] 베베르의 처남이 맥이고, 맥의 부인이 존탁의 여동생이다. 베베르 입장에서는 처남댁의 언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