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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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카를 마르크스 (Karl Marx)

본명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출생

1818년 5월 5일, 프로이센 왕국 라인란트 트리어

사망

1883년 3월 14일 (64세), 영국 런던

국적

프로이센 왕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lag_of_Prussia_%281892-1918%29.svg.png무국적

직업

역사학자, 경제학자, 사회철학자, 기자

학력

본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예나 대학교 철학 박사

종교

없음 (무신론[1])

배우자

예니 마르크스 (1843년 결혼 ~ 1881년 사망)

신체

175cm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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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생애 초반2.2. 저술 활동2.3. 사망
3. 사상과 그 영향4. 사회과학에서의 영향력5. 비판6. 이름 표기에 대해7. 일화8. 여담9. 대표저작

1. 개요[편집]

Die Ph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 interpretiert, es kommt aber darauf an, sie zu verändern.
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however, is to change it.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여러가지 방법으로 세계를 해석해오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2]

Proletarier aller Länder, vereinigt euch!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공산당 선언


19세기 이후 철학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며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3]

독일[4] 출신의 철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언론인 및 사상가.

사회학, 철학, 정치학, 경제학, 역사학, 문화인류학 등 수많은 학문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 논문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학자이기도 하다.[5] 2005년 BBC가 시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꼽히기도 했을 정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창시자라는 이미지 덕택에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현대 독일 정치에도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끼친 만큼.[6][7]

근대 사회과학의 분과학문들을 새롭게 창시하였고[8] 자본론공산당 선언 등을 저술하였으며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말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인류 전체의 사상과 철학, 사회, 문화, 외교, 정치 등의 방향성에 대해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그는 매우 중요한 사상가로 지목된다. 대표적인 마르크스의 명언으로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있다.

반세기가 넘도록 냉전-반공체제에 익숙해진 한국 사람들은 그를 '원조 빨갱이' 정도로 취급하지만,[9] 사실 그의 업적은 사회과학 뿐만이 아니라 순수철학역사학에 있어서도 중요성을 갖고 있다.

2. 생애[편집]

2.1. 생애 초반[편집]

독일(당시엔 프로이센) 트리어 태생. 트리어는 독일과 룩셈부르크를 흐르는 모젤 강변에 위치한 독일의 서부 지방으로, 당시 독일 동부 지방은 농촌이 많고 전통적 색채가 강했으나 서부는 영국, 프랑스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산업화, 근대화가 상대적으로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마르크시즘이 자본주의의 폐단에 반대해 나타난 사상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배경이 쉽게 이해된다. 아버지인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유대인 집안이었으나 당시 프로이센 내 유대인 차별 경향 때문에 마르크스 출생 이전에 루터파로 개종한다. 어렸을 때부터 변호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적 사고를 많이 가졌다고 한다. 특히 아버지가 17~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루소, 볼테르)에 관심이 많아 마르크스 역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유대인 집안이었으나 마르크스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았으며, 집안이 개종했던 종교인 기독교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어릴 때부터 상당히 총명했던 모양으로, 처음에는 트리어에서 멀지 않은 본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종교, 철학, 문학, 거기에 술에 심취한 탓에[10] 아버지가 걱정 끝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11] 법학과로 전학시켰다.

그러나 베를린에 와서도 법학은 커녕 역사와 철학 공부에 열심이었고, 특히 베를린 대학은 헤겔이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했던 곳이라 헤겔주의가 성행했다. 비록 마르크스가 다니던 시절은 헤겔이 사망한 후였으나 헤겔의 제자들이 아직 베를린 대학에 남아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절. 헤겔의 제자들은 헤겔 우파와 헤겔 좌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들과 주로 어울리며 꽤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원래 박사학위를 받아 대학에서 강연을 하며 살려고 했었지만 당시 대학에서는 프로이센 정부의 압력으로 헤겔 좌파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고 있던 터라[12] 좌절된다. 1838년 마르크스가 20살이 된 해 학비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관심없던 법학에 완전히 손을 뗀다.

사실 마르크스는 결코 얌전한 학생이 아니었고 '청년헤겔주의자당 사건'에 연루되는 등, 당대 자유주의 운동에 깊이 공감하여 매우 적극적인 정치운동을 벌인, 말하자면 당대의 '학생운동권'에 속했으니 얄짤없이 코렁탕 좌절.

베를린대에서는 박사 논문을 내 봤자 학위를 안 줄 것이라 생각한 마르크스는 당시 학위논문심사가 빠르고 정부의 입김이 덜 닿는 예나대학에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 박사학위를 딴다. 급진 헤겔철학을 공부했지만 정작 박사학위 논문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Über die Differenz der domokritischen und epikureishen Naturphilosophie)"[13]라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사상가들을 다룬 비교철학 논문으로, 문과 박사과정 학생들에게는 "현대사회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을수록 오히려 박사논문만큼은 더욱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써 볼 필요가 있다."는 사례로 자주 활용된다.

2.2. 저술 활동[편집]

졸업 뒤에는 라인신문(라인지방의 신문) 신문 편집장[14]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라인지방은 개발이 본격화되던 산업도시였기에 정부와 산업부르주아지와의 충돌이 꽤 있었던 모양인데, 아마 정부를 까려고 부르주아지들이 마르크스를 신문 편집장 자리에 앉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정부 비판적 기사를 꽤나 많이 다루었다.

아무튼 이 시기부터 당대 독일철학자들과는 다르게 현실적인 이슈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고 한다. 특히 이때의 프로이센은 봉건주의적 형태가 많이 남아있는 막 산업사회로 넘어가던 때로, 여태까지 농노들에게 전통적으로[15] 묵인해오던 나뭇가지줍기(즉 장작)를 정부가 금지하자,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에 그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유럽에서 19세기 내내 반계몽주의와 야만적 관습 및 탄압의 대명사였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프로이센에 비해 힘이 강했다. 이런 사실 때문에 마르크스는 일련의 사설에서 러시아를 신랄히 공격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이 맹렬한 탄핵문들이 실린 신문 한부를 우연히 보고는 깜짝 놀라 프로이센 대사에게 노여움을 표시했다. 프로이센 정부는 힘이 강한 러시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1843년 4월, 라인신문은 경고도 받지 못한 채 폐간되었고[16] 마르크스는 다시 한 번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라인 신문에서 보낸 1년 동안 마르크스는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정부들에게 거침없이 비판을 하는 탁월한 정치 평론가로 변신했다.

1843년에는 귀족 집안 출신의 제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했다. 제니의 아버지는 훔볼트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는 등 출신성분에 학구적 가풍까지 여러 모로 빵빵한 집안의 딸내미가 사회에 불만 많은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하니 당연히 집안에선 반대가 극심했다. 그러나 지적인 마르크스의 풍모에 반한 제니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했다고.

라인신문 폐간 후 마르크스는 프랑스로 거처를 옮겼고, 여기서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많은 만남을 가지면서 큰 영향을 받게 되었고, 그 자신도 '의인동맹' (Bund der Gerechten) 이라는 비밀결사에 가입했다. 이때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나 '프랑스-독일 연보'라는 부정기 간행물을 발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의인동맹의 영향을 받은 분파 중 하나가 프로이센에서 국왕 암살을 기도하다 실패하자 프로이센은 의인동맹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전 유럽에 검거에 협조할 것을 요청했다. 당연히 마르크스도 파리에서 추방 당해 벨기에 브뤼셀로 이주했다. 벨기에에서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저술했고, 1848년에는 의인동맹이 '공산주의 연맹'으로 개칭하며 창당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창당선언문을 의뢰받아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저술한다.

1848년 2월과 3월에 걸쳐 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 혁명이 발발(1848년 혁명)하였으나 늦어도 가을 쯤에는 모두 진압되고 만다. 혁명의 좌절에 실망한 마르크스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다. 영국에서 생활하며 마르크스는 지속적인 저술활동을 펼쳤다. 단순히 저술활동만 벌인건 아니고 이전에 기자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서 당시 미국 진보매체이자 당시 세계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신문사[17]인 뉴욕 데일리 트리뷴[18]의 런던 특파원으로 10년간 재직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고, 미국에서도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다만 이때 벌어들인 수입은 단순히 생계를 꾸려나갈수있던 수준이었지[19] 잘먹고 잘살았다는 얘기는 아니기는 했다. 이때 마르크스는 유럽 각지로 돌아다닐수있었던 처지는 아니었기에 대영도서관에서 영국과 유럽 각지의 신문들을 살펴보면서 유럽에서 벌어지는 주요소식에 대한 칼럼을 썼고, 때때로 미국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기사를 작성했다.

남북전쟁이나 아편전쟁에 대해서 서술한 마르크스의 글도 이 시기에 작성된 것이었으며 현대 기준에서 보았을때 현장성이나 객관성은 부족한 편이지만[20] 그럼에도 마르크스 자신이 가지고있던 풍부한 역사적인 지식과 경제적인 지식, 엥겔스가 가지고 있는 군사학적인 지식 등을 백분활용하면서 칼럼과 기사를 작성했기에 유럽 정치의 주요 사안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주는 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1] 여하튼 미국신문 특파원을 지냈던 인물이었기에 후에 미국에서 일어난 매카시즘 광풍이나 미국과 소련이 대립한 냉전시기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아이러니를 느낄수있다.요새로 치면 뉴욕타임즈 특파원으로 일한사람이 수십년 후에 적의 수괴로 낙인찍힌셈[22]

여하튼 이때 기사작성등의 이유로 대영도서관에 틀어박혀 하루 10시간 이상을 공부하던 흔적이 담겨있는 노트 등이 여전히 유품으로 남아있다. 이때 매일같이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써낸 게 '정치경제학요강', '정치경제학비판', '잉여가치론' 등. 영국 체류시절부터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중 특히 중요한 인물들에는 그의 맹우 엥겔스 이외에도 카를 카우츠키, 폴 라파르그 등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중요 사상가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마르크스와 이들의 활동은 훗날에 세계 최초의 국제노동자연대 운동으로 발전할 "인터내셔널"을 낳게 된다.

당시 전유럽에 퍼진 산업혁명으로 인해 경제적 환경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마르크스는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정치, 경제적 현실을 끊임없이 연구한 끝에 1867년 자본론을 내놔 이후 100년도 넘는 오랜 시간 두고두고 떡밥이 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화두로 던졌다.

2.3. 사망[편집]

On the 14th of March, at a quarter to three in the afternoon, the greatest living thinker ceased to think. He had been left alone for scarcely two minutes, and when we came back we found him in his armchair, peacefully gone to sleep-but forever.
3월 14일 오후 2시 45분,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겨우 2분 동안 혼자 남겨져 있던 사이, 우리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안락 의자에 앉은 채 평화롭게, 영원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장례식에서 한 연설에서 발췌


1870년대 이후로는 이렇다 할 만한 주요활동이 없으며 대중적인 저술만 가끔 하는 등 조용히 살다가 1883년에 사망한다.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는 최우선 발생국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한 영국프랑스를 꼽았고, 정치적으로 사회주의가 득세했던 조국 독일 역시 후보로 보기는 했다. 몇십년 뒤에 민족사회주의란 게 득세하기는 했다[23][24] 그런데 세계정치의 흐름 및 자본주의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말년의 마르크스는 자신의 초기 이론에 약간의 수정/보완을 가미하여 러시아중국과 같은 낙후된 조건에서 혁명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했으며, 러시아를 공부하는 등 흥미를 드러냈다. 그리고, 실제로 1905년1917년, 총 세 차례에 걸쳐 혁명을 통해 마침내 러시아 땅에서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중국도 마찬가지고... 한편 미국에서 성행하던 사회주의 운동은 좌초되었고 1948년 선거를 마지막으로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정당이 하원에서 의석을 확보하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 아직 내공을 쌓기 이전인 1848년에 프랑스의 알제리 침략을 지지하는 글을 남기는 흑역사스러운면이 있지만, 내공이 쌓인 이후로는 알제리의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이나 인도의 세포이 항쟁에 대해 적극 지지했으며, 아일랜드의 독립도 영국 노동자들의 손으로 아루워질것으로 예상했지만 연구를 거듭하면서부터는 아일랜드인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입장을 바꾸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마르크스 사후 그의 유해는 런던의 하이게이트(Highgate) 공동묘지[25] 동편에 안장되었다. 직접 찾아가 보고 싶을 경우, 런던 지하철 노던 선을 타고 Archway역에 내려서[26] 하이게이트 방면으로 걸어가면 된다.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측에서는 아예 입구에서 마르크스의 묘비 사진을 붙여놓고 홍보하고 있고, 매표소에서 입장권[27]을 구매하면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표를 건네주면서 마르크스의 묘지 위치를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묘하게도 마르크스 무덤 맞은편에는 허버트 스펜서의 무덤도 있다.

원래는 묘지 주 도로보다 좀 더 안쪽에 묻혔었는데, 마르크스 묘지를 방문하는 참배객과 관광객이 늘자 접근성 문제로 지금의 자리로 이전 안장되어서 훨씬 찾아가기가 쉬워졌다. 예전 무덤 자리에도 석판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금이가고 흐릿해저서 읽기 힘들다. 묘비에는 마르크스 얼굴 동상과 함께 그가 남겼던 두 가지 유명한 말이 적혀있다. 묘비 상단에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적혀있고, 하단에는 상술한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의 글귀가 적혀있다.

여담으로 그가 사망한 해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태어났다.

3. 사상과 그 영향[편집]

"20세기의 세계는 마르크스 사상의 실험장이었다."

마르크스 이론의 독특성은 그의 정신적 원류라 할 수 있는 헤겔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과격한 일부는 마르크스와 헤겔에는 차이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역사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띤다는 헤겔의 관점을 가져오되 이성의 발전과 종착역을 설정한 헤겔관념론과 차별점을 두면서 생산양식의 발전과 그에 따른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경향적 이행을 주장했다. 물론 이는 마르크스의 다양한 사상적 면모들 중에서 그가 핵심으로 삼았던 과학적 공산주의의 측면을 아주 아주 극히 단순하게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사상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모든 철학자가 그렇듯 깊이 있는 공부가 요구된다.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문서와 마르크스경제학 문서 참조.

마르크스가 저지른 일을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갑툭튀하여 근대 인문학 전체를 재규정하려 시도했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현 시대의 기본 개념을 모조리 재정립하려 했다고 시도했다는 사람이 존재하고, 나아가 새로이 도래한 자본주의 시대라는 게 존재한다고 주장하고[28]그 시대에 있어 핍박받던 "노동자"라는 계급이 존재한다고 한 뒤 그 계급 전체의 중대한 각성을 일으켰다고 평가 받기도 한다. 또 그와는 다른 입장에 있는 인텔리/지식인 및 중간적 위치의 계급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그들이 어떠한 사회적 의무가 있는지를 일깨워야 한다고 주장했다.[29]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에릭 홉스봄이 정의한 "혁명의 시대"의 중심에 서 있는 자이다. ㅎㄷㄷ

그가 미친 영향을 인문학 영역 요소요소 별로 뜯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문학에서는 후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사조가 형성되는 데 영향을 끼쳤으며, 비단 문학사조만이 아니더라도 그의 토대와 상부구조론은 문학해석에 있어서의 반영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장 모더니즘에서도 마르크스의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다. 역사학은 어떠한가? 그의 사적 유물론(즉, 유물사관)은 역사를 보는 중요한 관점이자 연구방법론을 제시했다. 즉, 사회이념이나 관념, 가치관이 역사를 추동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경제적 생산양식의 변화나 과학적 발견에 따른 기술혁신 등이 우리 삶을 뒤바꿔놓았으며 사상이나 이론은 그 뒤를 쫓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역사구분(원시, 고대, 중세, 근대)은 오늘까지도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나아가 철학에서는 그의 저작이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독일 이데올로기』나 다양한 저서에서 엿보이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은 오늘날 철학자들의 주요한 테마가 되었다. 그리하여 칸트를 통해 집약된 근대사상은 헤겔을 통해 한층 발전되고 마르크스(와 니체, 프로이트)를 통해 오늘날까지도 철학의 열매가 자라는 사상적 토양을 완벽하게 일궈놓게 되는 것이다. 사회학에서는 갈등론 패러다임을 열어놓은 장본인이며, 경제학에서는 고전경제학의 비판인 『자본』을 집필했다.[30] 여기서 멈추면 좋겠지만 정치학에서도 그의 관점은 중요하게 다뤄지며 특히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섬세한 통찰이 드러나있어 정당이론과 국가론의 중요한 분석서로 여겨진다. 당장 그의 정치사상이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이쯤되면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인문학이 무엇인지를 셈하는 게 더 빠른 수준이라거나 없다고 보는 게 맞으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마르크스는 다양한 학문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르크스 등장 이전까지 고전경제학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자본주의는 완전한 시장방임주의다 보니 비판받을 점이 많았다. 당시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영국만 봐도 뒷골목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의 숫자가 수천 명이었고 .[31] 죽음을 면한 아이들도 제대로 된 교육이나 기본적 수준의 의식주 보장도 없이 공장 노동자로 내몰렸으며, 가난한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인권은 물론이요, 제대로 된 노동권의 행사나 복지, 참정권 등은 보장받지 못한 채 자본가들에게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근근히 살아가던 형편이었다. 또한 자본가들은 이와 같은 노동 착취에 관해, 그것이 일할 권리를 정당하게 보장하는 것이자, 자본가들이 그들을 필요한 만큼 부려 먹을 자유 역시 보장하는 것이라 여겼으며, 당시는 사회적으로 그런 생각이 팽배한 시대였다. 요즘은 좀 나아졌...나? 자본론 1권에는 이런 자본가들이 미성년자들의 노동시간을 제한하자는 법을 어떤 식으로 반대하는지에 관해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보고 매력을 느낀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프롤레타리아가 잃은 것이라곤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공산당 선언』 中


마르크스 이전까지는 "가난한 사람들이 굶어죽는 건 그들이 게을러서 그런 거지 사회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자본가들과 자신들의 신분을 망각한 다수 대중들은 생각했지만,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지지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에서 심상치 않은 조짐들이 보이자 "빈부격차가 큰 데에는 사회적 책임도 있다는 걸 인정하겠다"로 입장이 바뀌게 된 것. 그 후 자본주의공산주의의 이론을 일부 받아들여 사회적 책임과 분배에 대한 의무를 인정하게 된다.[32]

기독교로마 제국에 본격적으로 퍼져 나가기까지 수백 년, 온 세계에 퍼지기까지 1천 수백 년이 걸렸음을 생각할 때, 본인이 살아있는 당대에 이미 유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 하나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의 사후 40년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벌써 지구 표면의 1/6이나 되는 면적을 차지하는, 그의 이론을 추종하는 국가가 생겨났음을 생각한다면, 마르크스가 19세기 이전에 태어났더라면 종교의 창시자나 성인으로 취급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사람이 세계에 미친 영향은 이렇게 정리하면 된다. '''세계의 1/3은 그를 찬양했고 또다른 1/3은 그를 못 끌어내려 안달이 났다.

4. 사회과학에서의 영향력[편집]

에밀 뒤르켐, 막스 베버와 함께 사회학의 삼대장이자 최종보스

인류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학자 중 하나인지라 수능 사회탐구 영역의 거의 모든 과목에서 그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평가원양반! 단적으로 현대 역사에서 시대구분론은 마르크스의 시대구분론과 완전히 같다. 시대구분론이 기본적으로 경제사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다. 마르크스와 현대 역사학의 차이는 공산주의를 현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뿐으로, 애초에 큰 틀에서 역사분류할 때는 고대-중세-근대현대근세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하다. 그나마 현대를 구별하는 경우도 2차대전 종료가 기점이지만, 이 역시 근대자본주의의 틀에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기록하는 경우는 드물다. 2차 대전 이후의 시기에 대한 가장 흔한 표현은 에릭 홉스봄이 주창한 장기 19세기를 포함한 세기별 분류. 같은 이유로 최초의 시대구분론이 등장해서 스스로를 근대라고 선언했던 르네상스 시대를 현대 역사학에서 근세로 만들어버린 것 역시 근대의 상징인 자본주의 발달의 부족 때문.[33]

대학을 가도 사회계열에서 사회학의 최종 보스는 마르크스고 인문학계에서는 근대 철학의 방법론 및 그 내용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이고 사학계에도 유물론적 사관을 남겼다. 그냥 쉽게 말해 근대 인문사회과학의 보스는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Max Weber)[34] 정도이다.

마르크스가 좌파적 관점에서 거시적인 인문사회의 제반을 해석한다면, 베버는 대체로 우파적 관점을 가진 인문사회 연구자들의 미시적인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다.[35] 물론 둘을 단순한 좌우 대립관계로 간주하는 것은 극도로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오히려 베버가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을 더욱 정교한 형태로 발전시켜 연구하였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사실, 베버 본인이 '마르크스와 니체의 이론적 기여를 인정하지 않는 학자는 사기꾼'이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자세한 것은 배버 항목 참조.

하지만 마르크스나 베버나 한결같이 글쓰기 스타일이 독일인 학자다운 악랄한 만연체라 학적 토대를 만들어야 하는 대학원생들이 둘 중 하나의 저서를 읽다가 수없이 학을 떼면서 사상적 기반을 만들기 때문에 둘의 이념을 다 포섭하여 자신의 사상적 토대를 만드는 인문사회계열 연구자는 보기가 힘들다(안습). 그래도 이 둘은 헤겔보다는 낫다 물론 우파적인 학문으로 알려진 경제학을 봐도 사정은 사실 비슷하다. 경제학의 대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만 해도 제대로 완독한 사람은 거의 없다. --원래 고전이란 누구나 사고 아무도 안 읽은 책이란 뜻이다. (음?)

그의 사상은 현대 공산주의의 원동력이 되었다.[36] 그러나 정작 그는 사회주의가 성립한 이후의 사회에 대해서 말한 것이 많지 않다. 프랑스 내전 같은 저술에서 과도기적 사회인 “프롤레타리아 독재”[37]를 그나마 구체적으로 묘사해 둔 정도다.

마르크스주의의 후계자라고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 - 레닌, 플레하노프, 로자 룩셈부르크 , 트로츠키, 스탈린, 마오쩌둥, 그외 멘셰비키 및 사회주의자들 - 사이에서 토론과 논쟁으로 분파가 세분화 - 수정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이즘 등 - 된 이유가 여기에 기인한다.

5. 비판[편집]

그의 이름을 딴 사상이 사실상 학계에서 전멸 상태에 놓였다는 한 마디로 비판을 정리할 수 있다. 경제학계에서는 전형논쟁을 비롯한 몇 차례의 대규모 내부 갈등 이후 마르크스의 주요 전제를 기각했으며, 사회학을 비롯한 기타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인정하나 더 이상 그의 핵심 명제들을 진지하게 탐구하지 않는다. 혹자는 이를 두고 학계가 영미식 학풍에 경도된 까닭이라 비판하기도 하나 단지 그것뿐일까?

마르크스 본인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를 오해했을 뿐 그의 잘못은 전혀 없다고 말하는것도 우스운 일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향성에 대한 설명은 곧잘 필연적인 예언으로 둔갑하여 독단주의로 이어지고, 혁명가들로하여금 그의 이론이 묘사하는 필연적인 종착역에 도달하기 위한 폭력을 정당화하도록 부추기기도 했다. 또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어떻게 운영할지에 관한 그림을 선명하게 그리지 않고 추상적으로만 묘사했는데, 이 점 역시 혁명가들이 제멋대로 마르크스이론을 해석하고 변형하면서 정치적 야욕을 정당화하는데 쓰이기도 했다.

포퍼 등의 과학철학자들이 곧잘 비평하는 점 역시 이러한 모호함에 대한 부분이 존재한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주의의 몰락이 도래할 것임을 반증할 수 있는가, 즉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포퍼가 마르크스에게 제기하는 비판이다.[38] 더 덧붙이면 포퍼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라는 체계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어떤 점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며 그것을 실제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비판가의 자질을 타고 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과학이 아니며 형이상학적이며, 이상론이기 때문에 위험한 이론이거나 좋지 않은 이론이라 주장했다. 애초에 마르크스가 스스로가 기존의 여러 다양한 사회주의/공산주의와 자신의 이론과의 차이점으로 내세운 것이 "과학적 사회이론"이었으며, 마르크스 스스로의 정의한 바 "공산주의"는 곧 "과학적 사회주의"이기에 포퍼의 비판은 바로 그 지점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포퍼는 마르크스 이론의 또다른 독특성을 마르크스 자신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는 도덕적 경향이 이론 가득 묻어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자본을 읽으면서 앞 부분의 선험적 명제들을 검증하는 내용을 지나 현실을 비판하고 사실들의 목록을 구성하는 측면 쯤에 도달하면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분노하고 참여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폭로들을 전술적으로 기술하는데, 바로 이러한 점을 이끌어내는 것이 마크르스 이론이 영향력을 갖게 된 이유라는 것이다. 분명 이 점에서 포퍼의 비판은 일견 중요한 지점을 가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 자신은 이론의 도덕성을 배격했고 철저하게 현실을 바꾸고자, 독일 이데올로기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바처럼, 해석이 아닌 실천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의도까지 그의 죄과로 씌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포퍼 스스로부터가 후대의 비판가들과 철학자들에게 똑같은 비판을 당하는 처지라...

알튀세리언을 비롯 마르크스의 '과학성'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포퍼를 비롯한 과학철학자들의 비판에 대한 몇 가지 반박을 제시해왔다. 하나는
마르크스가 말한 과학은 생시몽과 푸리에의 공상론과의 차이점에 기반한 것이기에 포퍼 등이 사용하는 '과학'과는 쓰임이 다르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마르크스 시대의 '철학'이 재현된 현상을 분석한 것인데 반해, 마르크스주의는 현상의 허위와 표면을 파헤쳐 그 내부를 관찰하는 이론이기 때문에 과학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기존의 사회과학은 (지배) 이데올로기이며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정리하자면 마르크스주의자들, 특히 알튀세리언들이 말하는 과학은 기존 과학철학에서 논의하는 과학이 아니기에 비판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포퍼가 비판하는 과학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과학이 아니고 심지어는 이데올로기이며, 따라서 포퍼가 내세운 기준들은 통용될 수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다만 자연과학과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이 다르다는 주장은, 어찌됐든 자본을 공저한 것으로 되어 있는 엥겔스부터 포물선 운동 등의 자연법칙을 그대로 마르크스를 해석하는 데 인용하였고, 그 후의 소련에서 과학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보면 설득력이 부족한 편이다. 그리고 현상이 아닌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주장 역시, 많은 과학철학자들이 동의하는 테제임은 인정하나, 포퍼 등의 비판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닌 새로운 기준을 내세워 회피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러한 논쟁은 모두 마르크스가 과학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식화하지 못했으며, 과학을 정의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본격적인 논의에는 접근하지 못했기에 발생한 것이다. 충분히 비판받을 만하다.

마르크스의 가장 강력한 비판적 계승자 중 하나인 막스 베버는 마르크스의 계급이론 등 이론은 물론이거니와, 방법론에 대해서도 전방위적인 비판과 수정을 시도했다. 베버는 마르크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기민하게 파악하여 계급의 유형과 그 사이에서 매개되는 힘들에 대해 더욱 정교한 분석을 시행했고, 사회과학에서 가치와 사실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방법론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얼치기 좌파들이 베버를 적대하는 경향이 있으나, 베버야말로 그들보다 비판적이면서도 정확하게 마르크스를 독해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의 식민지들에 대한 인식에서는 계몽주의적, 유럽중심주의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물론 그가 근대 유럽의 사람이었고, 인간이란 그 자신의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자. 당시 유럽인이 비유럽을 향해 갖고 있는 인식은 극단적으로낭만적이었거나 극단적으로 차별적이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마르크스의 저작이 전기와 후기가 서로 다른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르크스 후기 이론들보다 오히려 전기 이론들이 더 중요하다는 비판도 있다. 이러한 해석/비판에 따르면, 보통 마르크스를 논할 때 등장하는 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학적 비판 등은 마르크스 후기 저작들의 이론들이며, 마르크스가 '과학적 이론', 현실 정치에서의 변혁 등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단순한 정치투쟁이론이 되어 버렸다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소련 및 동유럽을 위시로 한 스탈린주의는 국제적 정세, 냉전적 패권 경쟁, 현실 정치에 매몰되어 본래의 사회주의적 이상, 마르크시즘 이론 등과 전혀 관계없는 압제적인 것에 불과하며, 오히려 아직 헤겔과의 접점 등이 보이곤 하던 초기의 마르크스주의 저작들이 인간본질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 서유럽의 학자들 사이에서 등장했는데, 이를 프랑크푸르트 학파라고 하고 이들의 사상을 비판이론이라고 부르는데, 20세기 사회학 및 현대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게오르크 루카치, 막스 호르크하이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등 ㅎㄷㄷ한 라인업의 학파다. 최근에는 악셀 호네트 등이 이를 계승하고 있다.

6. 이름 표기에 대해[편집]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Karl Heinrich Marx의 이름은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가 맞다. 하지만 예전에 '칼 맑스'라는 이름으로 불려서, 요즘도 이런 표기법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이유를 감안하여 나무위키에서도 이 항목을 맑스, 칼 맑스로도 들어올 수 있게 해 놓았다. 내일은 맑습니다! 칼의 색이 참 맑습니다(...).

이 표기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연변 조선족들이 출판한 마오쩌둥 어록에도 이 표기가 쓰이고 있다. 문서 참조.

'맑스' 표기법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원음과 비슷한 발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Marx'는 모음이 하나 밖에 없는 1음절짜리 이름인데 '마르크스'로 표기하면 4음절이 돼버리니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다.

또 '마르크스'는 받침 발음을 할 수 없는 일본에서 '마', '르', '크', '스'(マルクス)의 네 음절로 나누어 표기한 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주장도 있다. '맑스'조차 1음절을 2음절로 늘린 것이지만 일본어의 한계로 인해 1음절을 4음절로 뻥튀기시킨 것보다야 낫다는 말. 굳이 옛한글까지 동원해 억지로 1음절로 만들려면 '마ᇌ'으로 표기할 수 있다(...).

'Marx'라는 단음철(單音綴)의 이름을 우리는 원음 비슷하게 표기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맑스'라고 원고에 적으면 출판사에서는 에누리 없이 거의 일본식 표기처럼 '마르크스'라는 4음절의 표기로 바로(?)잡아 놓는 데에 나는 매번 당황하고 있다.
최정호 교수의 동아일보 기고.#


'마르크스' 표기를 고수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우선 '맑스는 옳은 한글 표기가 아니라는 것.'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받침에 ', , , , , , '만을 사용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어의 한 음절 끝에서 날 수 있는 실제 발음[ㄱ, ㄴ, ㄷ, ㄹ, ㅁ, ㅂ, 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39] 비록 표기상으로는 ', , …' 등의 온갖 겹받침이 다 존재하지만, 외래어는 발음에 기반하여 표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에는 실제로 발음될 수 있는 위 일곱 받침만을 허용하고 있다. 비슷한 이유로 '맑시즘[막씨즘]' 역시 '마르크스주의' 내지 '마르크시즘'이 맞다. 사실 굳이 한글로 '독일어 원음과 비슷한 발음'으로 옮긴다 한들 '칼 마륵스' 내지는 '카알 마악스'[kaːɐ̯l ˈmaːɐ̯ks] 정도. 참고로 독일어의 R은 영어의 R과 발음이 전혀 다르니 한글로 표기된 것도 완전히 믿지 말자.[40]

또한 표준발음법을 살펴볼 때, '맑스'라고 표기할 경우의 올바른 발음은 [막스]이다. 독일어 발음으로는 맞네 받침은 맨 끝에 오거나 자음 앞에 올 경우 ㄹ이 탈락되고 ㄱ만 발음되기 때문. 그러므로 '맑스'라는 표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이유 중 하나인 '부드러운 ㄹ 발음'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ㄺ'에 들어 있는 'ㄹ'이라는 표기에 이끌린 착각일 뿐.[41] '닭', '맑다', '밝다'의 올바른 발음이 [], [막따], [박따]인 것과 같은 이치. 같은 맥락으로 ''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어원을 살리기 위해서인지 [붸륵] 비슷하게 발음하는 경우가 있지만 표준발음법대로 발음하자면 []이 맞는다.

'맑스'는 운동권 일각에서 '맑'을 이용해서 '맑음','맑다'는 느낌을 주려는 뜻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표기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실제로 이러한 유사성을 활동에 이용하기도 하지만, '맑음'과 비슷해보이려고 일부러 '맑스'라고 표기했던 것은 아니다. 위에 언급된 마오쩌뚱 어록에도 나와있고, 무용가 최승희의 싸인 사진을 보면 최소 60년 전부터 쓰였던 걸 알 수있다.
파일:external/blog.joins.com/4b15c17db90a7.jpg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친 운동권 성향의 서울권 대학 연합동아리들 중 '맑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있으며, 2000년대 초에 열린 '맑스 코뮤날레'라는 행사에서는 "날씨가 맑다"와 "맑스입니다."는 뜻을 함께 담아 "내일은 맑습니다."라는 이름의 문화행사를 열었다.#

노동자연대에서 주관하는 연례 마르크스주의 포럼 역시 공식 표기가 '맑시즘'이다. 그리고 가판에서 파는 책을 보면 '삐딱이들을 위한 맑스 가이드'가 있다. 그런데 얘네들은 이 둘은 '맑'으로 표기하면서 나머지는 전부 다 '마르크스'로 표기한다.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맑'스

'맑'스는 맑음의 덩어리,
혹은 당원을 친 이념의 빵
칼 막 쓰지 마라
반박이 불가능한 이 빵에
입을 대는 순간
포도주보다 붉은 혁명의 밤이
촛불처럼 타오른다.
너 이념 장사꾼이지?
칼 막 쓰지 마라.
이 빵으로 인해 세상은
맑거나 맑지 아니하며
공평하거나 공평하지 아니하도다.
오, 내 몸에 흐르는
타락천사의 붉은 피
너 칼 막 쓰지?

- 원구식, '맑'스 『시와사상』 (2008. 겨울)[42]


참고로 미국에서는 marks와 발음이 동일해서인지 러시아식 유머와 이를 활용한 다음과 같은 개그가 있다.

In America, your job determines marks. (미국에서는 당신의 직업이 당신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In Soviet Russia, Marx determines your job.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마르크스가 당신의 직업을 결정합니다.)


여담이지만 북한에서는 막국수라고 돌려 말하기도 카더라.[43]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 치숙에서는 막걸리(...)로 언어유희가 되었다. 국어시간에 배우는 언어유희의 예시 중 하나. 태평천하의 원본에는 '막덕(마르크스 추종자를 얕잡아 부르는 말)'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대학생 사이에 떠도는 농담 중에 레포트를 작성할 때 '맑스'라고 표기하였더라도 레포트를 제출할 때는 '마르크스'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레포트 분량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공안 당국의 학생 운동에 대한 탄압이 극성을 부리던 독재 정권 당시, 교문 앞에서 학생들의 책가방을 검문하던 형사들이 막스 베버[44]가 쓴 책을 발견하곤 잡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회학 가르치는 교수님들께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이야기 중 하나다.[45]#

7. 일화[편집]

  • 그의 딸 엘리노어에 의하면 매우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가정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가족끼리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거나 동네 아이들과 놀기도 했다고 한다.

  • 어머니인 헨리에타는 네덜란드 Nijmegen 출신인데, 친척이 그 유명한 필립스였다. 물론 외조부 리온을 제외하면 마르크스를 무개념이라고 꽤 싫어했다.

  • 마르크스는 엥겔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많이 얻곤 했는데, 엥겔스가 자신의 아내(정확히는 정부인은 아니지만 사실혼 관계의 여자)가 죽었다는 편지를 보냈을 때도 이에 대한 답장에 돈 좀 부쳐달라는 말을 넣었다. 격분한 엥겔스는 절교를 선언했고, 마르크스의 친지들이 애걸해서야 겨우 화를 풀었다. 이때 마르크스가 사과 편지를 썼는데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진지한 사과 편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당시에 재정적으로 굉장히 궁핍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성격으로 보아 그 사과조차도 절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절친까지도 절교를 선언할만한 인간성

  • 아내가 사망할 당시 둘 다 병은 걸렸으나 돈이 없어서 골골거렸을 때 자기 아픈 건 끝까지 숨기면서 아내의 임종을 지켰다. 평생 혁명 생각만 하면서 아내를 고생시킨 마르크스가 유일하게 아내에게 잘한 일로 꼽힌다. 그나마 자식들에게는 잘해준 편이지만 반대로 형제자매나 모친을 멀리했다고 한다. 부친은 예외로, 죽는 날까지 아버지 사진을 갖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남긴 이런 부류의 수 많은 일화들을 보면, 아무래도 인간적으로는 전형적인 "머리는 더럽게 비상한데 타인의 기분이나 감정은 안중에도 없는 자기중심적이고, 냉소적이고, 재수없는 천재타입"이었던 것 같다. 그런 성질머리로도 그런 부인과 그런 친구가 있었다는게 나름 복받은게 아닌가 싶다

  • 일단 마르크스가 파산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행했던 사치와 향락의 파티를 했던 돈은 그가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은 바로 그 아버지의 재산으로 이루어졌다.[46] 그는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준 예술작품을 팔려 할때 그의 어머니가 반대하자[47] 엥겔스를 찾아가 "어머니가 죽는 게 더 나은 때가 온 것 같다"며 패드립망언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아내의 임종을 지킨 애처가로 알려져 있지만 살아있을때 여자를 꽤나 밝혀서 바람을 많이 피웠고 사람들 앞에서만 애처가인척 했던 것 뿐이었다. 후술될 하녀 뿐만 아니라 많은 여자들과 관계한 것으로 유명했다. 거기다가 아버지 유산을 다 팔고 돈이 없자 역시 귀족 딸이었던 부인이 물려받은 유산(주로 예술품)까지도 다 팔아버렸다. 그래도 사치를 감당못해 파산을 했다. 경제관념은 역대 경제학 관계자 중에 최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써댄 재산 때문에 그의 어머니와 누이까지 가난하게 살게 되어버렸고 그들은 카를 마르크스를 미워하고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 특히 어머니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가관이다.[48] 그의 어머니는 집 재산을 다 날려먹은 아들이 책을 써서 꽤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소식을 전한 사람에게 책의 이름을 물어봤다고 한다. 그 사람은 그녀에게 그 책 이름이 자본론이라고 했고, 그 말을 듣자 마자 그의 어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통탄하며 "지 자본도 못 챙기고 날려먹는 놈이 뭔 자본론 같은 소리를 하고 있냐"며 한심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 마르크스의 천재성과 반신분주의적 성향은 일찍부터 싹이 보였다. 이미 고등학교 졸업직전, 한국나이로 18세였을때 '어느 젊은이의 직업선택에 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썼는데, 그 내용은 젊은이는 직업선택을 할때 젊은이의 의무와 자기희생과 인류의 미래를 모두 심사숙고를 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결국 젊은이의 직업선택이 모여 인류의 진보가 일어나고 그 직업선택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과정 자체가 인류의 진보과정과 닮아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회상황은 신분주의가 다 가시지 않았던 시절이라 대부분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는 걸 당연히 여겼을 때였는데 마르크스는[49] 그 어린 나이에도 이미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고 직업선택은 정해진 것을 따르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는 거시적 관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아가 단순한 사회 개념을 넘어 그 직업선택이 전인류 진보사에 영향을 준다는 범인류적 사상까지 보이고 있었다.[50]

  • 뛰어난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생활에서의 경제관념은 폐기물급이었다고 한다. 매일 대영도서관에서 책 읽고, 책만 쓰고, 가끔씩 신문사에 기고하는 글로 쥐꼬리만한 수입을 얻었다고 한다.[51] 그런데 여기에 부잣집 출신 엥겔스의 지원금까지 포함하면 당시 노동자의 세배 정도로 벌이가 괜찮았다고 한다. 그는 집에 하녀를 두고[52], 종종 온가족이 예쁘게 차려입고 소풍을 가며, 집안의 가구를 수시로 바꾸었으며 자주 친한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했다고 한다(...).

  • 이러한 마르크스의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예로 들면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그런 모순된 인간의 탐욕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고 폄훼하려는 의도는 늘 있어왔는데, 사실 어떤 지도자나 영웅, 위인 등의 사생활적 측면이나 개인사를 두고 평가절하려는 시도를 그 정치적 반대자들이 하는 것은 세계공통의 현상이라... 굳이 따진다면 어느 시대든간에 기본적으로 놀고 먹고 섹스하고 하는 유희와 옳고 그름 등을 생각하거나 공부를 하는 등 사색 등을 하기 위해서는 하루 24시간 먹고 사는 것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는 삶의 여유가 필요한 것이라서, 굳이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중대한 변혁을 주도하거나 불의에 항거하거나 한 지도자들은 대개는 그 시대의 중류계급 정도 이상의 신분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대거 등장한 좌파 사상가들 및 행동양식 또한 그와 다를 바 없다. 역시 유대계 중상층 출신이었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마르크스 동시대 인물이었으며, 후대 아나키즘과 민주 사회주의, 그리고 러시아 대중적 사회주의의 도덕적 지향성을 놓은 알렉산드르 게르첸도, 국제 아나키즘의 선각자이자 1차 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와 대차게 싸운 후 공산주의와 결별한 미하일 바쿠닌도 해당된다.소련의 탄생을 이끌어낸 탁월한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 또한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사는 집안이었으며 그 아버지는 공로로 하급귀족위를 받을 정도의 집안이었다.

  • 실제로 당시 사회주의 운동가 중에는 중상층 출신자들이 다수였으며 이들은 중산층 이상의 생활양식에 익숙했고, 관용적이었다. 룩셈부르크 시절 숱한 이론가들과 혁명가들이 모여있던 독일 사민당은 왈츠 파티를 열고, 와인을 마시는 등의 세련된 모습을 보였다. 재밌는 것은 이런 중상층 출신 운동가들이 하층 출신 운동가에 비해 변절하는 일은 적었다고.

  • 많은 독서량과 사고력은 물론이고, 당원들 앞에서 상대방의 논리를 논파해 가며 설득 할 웅변력, 게다가 외국의 활동가들을 만나 사상적 교류를 하고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는 외국어 능력까지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론가들은 어렸을 때 부터 공장에서 노가다 하는 대신 부모님이 사준 책 보고 자란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게 당연하다는 주장도 있다.[53][54] 마르크스가 한 말 부터가 "이론은 곧 무기다"인데, 실로 '이론'은 불의에 항거하는 대중활동, 체제를 전복시키는 혁명투쟁의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지만 정작 그 불의와 부조리의 피해자인 노동계급에서 "왜 내가 핍박을 받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고 그 부조리에 항거할 방법들을 발견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 시대의 계몽주의의 영향을 짙게 받은 당대 근대사상은 어쩔 수 없이 계몽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성향을 띌 수 밖에 없다. 당대 수 많은 사상가, 활동가, 혁명가들은 심한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고 충분히 공부할 수 있었던 여유, 그런 여유를 통해 획득한 지식, 그러한 지식을 개인의 영달에 쓰기 보다는 스스로는 일어나 싸울 수 없는 대중들 앞에 서는 "선봉(vanguard)"이 되어 부조리를 혁파하겠다는 사명감으로 뭉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 마르크스, 엥겔스, 바쿠닌, 게르첸, 등 19세기 좌파 사상적 조류의 큰 이름들 치고 진짜 노동자 계급 출신인 경우는 없거나, 설령 집 자체는 가난 했어도 자신의 명석함을 눈여겨 본 주변인들이 지원을 해주는 등 집안 형편과는 별도로 공부 하면서 자랄 수 있었던 경우들이 대다수다. 심지어 주변에서 무식하다고 비웃었던 스탈린도 신학교 다니면서 지식인으로 필요한 교양과 독서는 그래도 다 기본적으로 하고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또한 이러한 중상층 출신 운동가들의 사상에 대한 충성심도 이런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이해가 가는 현상이다. 당장 사람이 이상을 품고 그에 투신 한다는거 자체가 어렸을 때 부터 눈 앞의 물리적 이익을 넘어 뭔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믿는 습관이 있어야 하는데, 당장 배가 고프고 추우면 이상이고 철학적 지향성이고 뭐고 눈에나 들어 오겠는가? 단순히 자기 처지에 기반하여 자연스러운 계급적 증오심으로 좌익에 투신한 사람들이야 "먹고 살기 위해서 했는데 알고 보니 걍 체제에 충성 하는게 더 밥벌이가 된다"라고 철면피만 깔면 쉽게 전향 할 수 있지만, 중상층 출신의 이론가들은 자신들이 구상 내고, 서술하고, 선동해 온 일생의 가치관 자체를 버리는 일이니 더 우직하게 자기 사상을 관철할 수 있는게 당연하다. 게다가, 생활수준에 있어서 여유를 갖고 보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론적 고찰을 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나중에 상황이 변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공부하고 배운 것에 비추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 보다 확고한 중심이 자리잡았기에 쉽게 변절하지 않는 반면, 탄탄한 이론적 기초 없이 정의감과 정열, 순간의 열혈한 증오심으로 투쟁을 시작한 사람들은 나중에 상황이 바뀌면 큰 위화감 없이 기존의 입장을 180도 바꾸어 정 반대의 정치적 세력에 들어가는 일이 종종 있다. 어떤 부류인지 궁금하면 새누리당 국회의원 명부 잘 훑어 봐라

  • 계몽주의의 영향을 짙게 받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사상 및 그 사상가들의 경향성, 심리, 의무감 등에 대한 고찰을 집대성하여 간단하게 책 한 권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 실존주의 철학가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장 폴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도록 하자.

  • 베를린의 고위 관료의 1년 평균 수입이 800 탈러였고, 부잣집의 돈 잘 쓰는 한량도 1년에 500탈러 이상을 쓰는 일은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1년 지출은 700탈러에 육박했다고 한다. 이에 빡친 아버지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아이가 여섯 명이 있었는데, 밥은 못 먹여도 춤과 피아노 교습은 시켰다. 이 결과 세명이 어려서 요절. 딸이 죽었을 때 외상으로 관을 사려 했는데, 외상을 못해서 절망했다는 일화도 있다.

  • 그의 자녀들 중 유명한 인물은 여섯 번째 자녀인 엘리노어 마르크스(Eleanor Marx)이다. 카를은 그녀를 가리켜 사내아이로 태어나야 했어야 했다고 자주 농담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면은 여성스럽고 인간을 그대로 사랑할 줄 알아 적들도 인간적으론 존경했다 한다. 부전여전(?)이라고 딸도 영국에서 진보적 활동을 많이 했다. 사회민주연맹에 참여한 것이 대표적인 활동. 43살의 나이에 독약으로 자살했다.

  • 그나마 부인이라도 금전관념이 있었다면 이렇게 상황이 최악은 아니었을 것이나 마르크스보다 4살 연상이었던 그의 부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은 밥은 굶어도 '폰 베스트팔렌 남작부인'(베스트팔렌 남작의 영애)이라는 문구가 쓰여진 금박달린 비싼 편지봉투만 애용했다고 한다. 역시나 부창부수.

  • 노동자의 해방을 외치던 그도 집에선 하녀를 고용해서 생활했는데 그 하녀를 거의 노예로 부려먹었고 심지어는 관계까지 가져서 아이를 가지게 했지만,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아이를 처리(?)하는 데도 엥겔스가 도움을 줬다. 엥겔스가 그 아이는 사실 내 아이라고 둘러대준 후, 평범한 가정에 입양을 시켜주었다. 그 아이는 후에 외과의가 되었다.

  • 이렇게 빈민촌에서 고생을 한 시절도 있지만 그래도 유산 받은 것과 엥겔스의 도움 등으로 교외 괜찮은 집에서 말년을 보냈다. 레알 관포지교? 고로 흔히 알려진 마르크스가 가난해서 노동자들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 그도 천생 기자인지라 마감이 닥쳤을 때만 능력을 발휘했다. 만화가, 소설가, 기자들의 창작욕구는 마감에서 나오는 듯하다(출처). 반면에 마감에 대한 거부감은 당연히 강해서, 자본론의 경우도 엥겔스는 빨리 낼 것을 독촉하였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초저속 마감 시스템을 추구했다. 그래서 자본론 2, 3권은 아예 끝을 못냈다!

  • 심각한 악필로도 유명하다. 아내와 엥겔스 정도만 그의 글씨체를 해독할 수 있었다고.

  • 잘 알려진대로 혈통은 유대인. 하지만 아버지 대에 기독교개종해서 당시 분류로는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고 유대인 사회에서도 유대인 취급을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그의 사상에 대한 반대자들이 유럽서 수천년 동안 천민 취급을 받은 유대인드립과 엮어서 "조국과 민족이 없는 유대인의 사회주의"라고 디스했다.물론 가장 많이 울궈 먹은건 나치.

  • 자신을 전혀 유대인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회주의자 페르디난트 라살로를 "폴란드 유대인은 모든 종족중에 가장 천박한 족속이다"라고 유대인 드립으로 디스한적도 있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라살로를 "진정한 폴란드 유대인"드립을 하면서 또 한번 디스를 한적이 있다. 마르크스 처럼 후대 사회주의자 중에 유대인 출신으로 알려진 인물들(트로츠키,로자 룩셈부르크등)도 유대인이라는 의식이 없던건 마르크스와 마찬가지였다. 이론상으로는 국가나 민족같은 개념은 종국엔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유대 민족이란 자각이나 민족 의식, 해방 같은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 시대를 초월한 포스 넘치는 명언을 여럿 만든 사람 아니랄까봐, 유언[55]에 대한 일화에서도 상당한 포스가 느껴지는 양반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길 유언이 뭔가?"라는 친구이자 동지인 엥겔스의 질문에 대한 이 양반의 대답.

"집어치워! 유언이란 살아서 충분히 말하지 못한 바보들이나 남기는 거야!"

  • 말년에는 드디어 자기의 사상이 유럽 전역으로 알려지기 시작하고, 재정적으로도 어느 정도 돈을 벌며, 각지의 추종자가 도움을 주면서[56] 어느 정도 삶이 펴서 자기가 그리도 까던 부르주아 라이프를 누리다 죽었다. 특히 자신의 언변을 이어 받은 로라와 라파르그 커플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이 노년의 낙이었는 듯 하다.


정작 노동자들의 단결을 외친 그가 일화, 성격등 모든 면에서 노동자적인 면이 눈꼽만큼도 없었다는 점이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8. 여담[편집]

  • 마르크스가 저술한 서적들은 한국에서는 공산주의와 관련되었다고 보는 인식이 박혀버려서 아니 공산주의랑 관계가 있는 것은 맞지 정작 북한에서는 자본론금서에다(도서정리사업 문서 참조), 심지어 공산주의를 포기했다 순수한 공부 혹은 연구 목적으로 마르크스가 저술한 책을 소지하거나 보고 있어도 꼰대들은 몹시 안 좋게 본다. 특히 나이 좀 있는 경찰이나 군인들은 굉장히 의심스럽게 본다. 심지어 그의 이름을 주로 '맑스'로 표기하던 시절에는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성향이 완전히 다른 보수주의 학자인 막스 베버의 서적 역시 문제되기도 하였다.[57][58] 현역으로 군 복무를 하다가 말년에 공부할 시간이 난 병장이 복학 준비를 하려고 대학에서 보던 책들을 반입시키다가 마르크스 서적이 끼어 있어서 개난리가 나기도 한다. 사회에서는 그냥 공부할 때 쓰던 책이라서 무심결에 들어왔겠지만... 과장 없이 헌병대 + 기무사 선물세트가 몰려와 무슨 목적으로 갖고 들어왔냐고 갈구는데, 안 좋게 끝나서 재수 없으면 말년에 군사법원 순례 혹은 영창을 갈 수도 있다고 한다. 사회에서도 학생들이 불심검문 당해 가방 속에 마르크스 책이 있다고 해서 바로 경찰서로 압송당하는 일이 사라진게 채 20년이 안된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마르크스 책을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받을만한 일이었다. 남한 북한 모두에서 고통받는 마르크스 저서들... 안습 다만 완전히 범국가·사회적으로 금서 취급하고 말살해버린 북한과 달리, 87년 민주화 이후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자본론과 같은 사회주의·공산주의 관련 서적을 소유하거나 읽는 것 자체의 자유는 있다는 점에서 한국이 훨씬 나은 것이다.


다만 부대마다 다른 점이, 군 인트라넷에 마르크스에 대해 다룬 도서에 대한 서평이 올라와있기도 했다. 본 위키러는 해당 책을 무려 '보안성 검토'를 받고 반입해 읽었고 아무 문제가 없었다.

  • 군대의 레드 컴플렉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다. 범우사에서 출판된 카프카의 <>(Das Schloß)의 표지가 단지 빨간 색이라는 이유로 압수당한 사례도 있다. (1999년의 사례라고 한다.) 정전 100주년 정도는 되어야 풀리려나 ㄷ

  • 딸이 아빠는 어떤 색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빨간색이라고 대답해서 빨간색이 공산주의자들의 상징색이 되었다(...)라는 말이 있다는 말이 있지만 그 이전부터 빨간색은 좌파 내지는 진보의 이미지로 차용되었다. 대표적으로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때 시민들은 빨간색 깃발을 휘날리며 혁명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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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망명 생활 당시 한국에도 잠시 들어와 길음역 근처에서 해장국집을 운영하였다 카더라

9. 대표저작[편집]

1842년 24살 이래 계속 책을 썼고 65세로 죽고 나서도 책이 나왔다. 자본론의 경우, 마르크스가 직접 교열하고 출판한 것은 1권 '자본의 생산과정' 뿐이고 나머지 2권, 3권은 엥겔스에 의해 편집, 출판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마르크스의 저작은 단행본 이외에도 전집의 형태로 나와있는데 영어나 독일어를 잘한다면[59] 이쪽을 보는 편이 마르크스의 집필활동을 전반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마르크스가 당시의 사상가들과 교류했던 편지부터 낙서까지 정말 세세하게 실려있다. 마르크스 덕후 물론 분량은(...) 정본으로 여겨지는 전집은 크게 MEW(Marx-Engels Werke/메프)와 MEGA(Marx-Engels-Gesamtausgabe/메가)로 나뉘는데 메가만 해도 총 114권짜리 기획이다(...)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발간 현황 'MEGA' 내는 강신준 교수

  • 1839년,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60] -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

  • 1842년, The Philosophical Manifesto of the Historical School of Law

  • 1843년,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전문 보기

  • 1845년, 《신성가족

  • 1845년,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Theses on Feuerbach)전문 보기

  • 1847년, 《철학의 빈곤》(The Poverty of Philosophy)

  • 1847년, 《임금 노동과 자본》(Wage-Labour and Capital)전문 보기

  • 1848년, 《공산당 선언》(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전문 보기

  •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Napoleon)

  • 1862년, 《잉여가치론》(Theories of Surplus Value), 3권

  • 1865년, 《임금(혹은 가치), 가격 그리고 이윤》(Lohn, Preis und Profit/ Value, Price and Profit)전문 보기

  • 1867년, 자본 I》(Das Kapital)

  • 1875년, 《고타강령비판》(Critique of the Gotha Program)
    사후[61]

  • 1885년, 자본 II》(Das Kapital)

  • 1894년, 자본 III》(Das Kapital)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Marxists Internet Archive)에서 제공하는 마르크스의 저작들 출간연도 별 저작

의미가 심하게 변한 잉여(...)를 포함해 수많은 말들을 창조한 사람이다. 제목만 들으면 잉여가 가치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가치 있었어! 제목들만 봐도 어디선가는 들어본 제목들이 많다.

[1] 반신론과 무신론의 입장을 공유하고있다.[2] 이 글귀는 마르크스의 무덤 묘비에도 적혀있다. 하단의 사망 문단을 참조.[3] One of the most influential figures in human history.[4] 의외로 러시아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5] 공식적으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제쳤다. 하지만 근대나 그 이전의 문헌까지 합친다면 마르크스보다 나이가 많은 고대 철학자들이 압도적이다.[6] 독일 사회민주당이 마르크스의 동료이자 친구인 엥겔스가 직접 사회민주당을 후원하면서 많은 영향을 끼친데다가 사회민주당 초기 당원들도 마르크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있기 때문에 사회민주당의 역사와 이념을 얘기할때 마르크스 얘기는 빼놓을수없으며, 좌파당도 계보로 따지면 1차 세계대전 당시 사민당의 우경화에 반발해서 떨어져나간 독일 공산당에서 이어지고 독일 공산당과 그 후신인 사회주의 통일당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념으로 삼은 만큼 마르크스 얘기를 빼놓을래야 빼놓을수가 없다.[7] 독일내에서도 위인으로 많은 존경을 받고있기는 하다. 물론 위인으로 존경받고있다고 해도 호불호가 많이 엇갈리는건 엄연한 사실인지라 기민/기사련 지지자들이나 자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마르크스를 영 못마땅해하는 경향이 강하다.[8] 국내에서 반백 년 가까이 독일 사회과학과 막스 베버 사회학을 연구한 전성우는 "마르크스는 생존의 사회과학을, 베버는 자존의 사회과학을, 뒤르케임은 공존의 사회과학을 펼쳤다."라 요약한 바 있다.[9] 지금도 마르크스를 다룬 대학생 교재를 어떤 꼰대가 함부로 버린 사건이 일어났다[10] 본 대학 시절에는 친구들끼리 술 먹고 소란 부리는 일이 잦았고, 심지어 당시 독일 젊은이들의 유행이었던 결투 경험까지 있다.[11] 오늘날의 베를린 훔볼트 대학. '훔볼트 대학'이란 명칭은 1949년 동독 정부 수립 이후의 명칭이다.[12] 베를린대는 수도에 있어 특히 영향이 강력했다. 그리고 베를린대에 남아있던 헤겔의 제자출신 학장이 해임된다.[13] 사실 후일 마르크스의 사상과는 큰 관련이 없어서 마르크스주의 공부를 한다고 해도 이 논문을 찾아볼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우리나라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할 때 마르크스의 인기에 힘입어 그다지 학술적 가치는 없는 이 논문까지 번역출판되기도 했다.[14] 실제로 신문의 편집장은 매우 강력한 권한을 갖고있다.[15] 여기서 '전통적으로'라는 말은 중요한데, 유럽 봉건시대의 판단기준(법)은 이전의 관례/관습에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법적 확신에 의해 지속된 관습법 수준이란 말.[16] 여담으로 당시 프로이센의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라인신문을 '라인강의 창녀'라고(...) 씹었다고 한다.[17] 그래봐야 20만부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쇄술이나 교통의 발달이 아직 덜 이루워졌기 때문에(철도가 깔리기 시작한지 몇년이 채 안되었고, 증기기관차였기때문에 현대기준으로 보았을때 속도는 느리기 그지 없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많은 발행부수였다.[18] 마르크스가 한창 특파원 일을 했을 당시에는 공화당 지지성향의 신문사로 이때는 공화당이 노예제에 반대한 진보스탠스 정당이었다. [19] 사실 1857년 경제공황과 1860년대 남북전쟁의 영향을 심하게 받은 탓도 있다. 그래도 기사를 잘썼기 때문에 편집부와의 마찰에도 꾸준히 기사를 썼지만 결국엔 결별하게 되었다.[20] 다만 이건 당시 마르크스가 유럽 각지로 돌아다닐 형편이 안되었던것도 있다.[21] 다만 특파원으로 일한것과는 별개로 편집부에서 마르크스에게 원고를 작작내라고 압박을 가했던 모양인지 마찰이 심했다고 한다. 뉴욕 트리뷰지에 실린 마르크스의 원고 상당수를 엥겔스가 대신 써서 내주었을 정도.[22] 케네디 대통령도 마르크스의 기자이력에 대해 공부한 모양인지 신문편집인을 앉혀놓고 이런 농담을 한적이 있었다고 한다. “1851년에 ‘뉴욕 데일리 트리뷴’이 칼 마르크스라는 이름의 보잘것없는 저널리스트를 런던 특파원으로 고용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회당 5달러라는 괜찮은 원고료를 받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올려달라고 졸랐다는군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친구는 다른 생계수단을 찾아 나섰고, 결국엔 ‘트리뷴’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이 세상에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혁명과 냉전의 씨앗을 뿌리게 될 그 사상에 풀타임으로 자신의 재능을 바치게 되었지요. 만일 뉴욕의 그 자본주의 신문이 그에게 원고료를 조금 더 올려주고 계속 특파원으로 활동하게 했더라면 아마 역사는 크게 달라졌겠지요.”[2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름에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들어있지만 독재 국가인것처럼 이것도 사회주의라는 단어만 들어가있지 실상은 사회주의자들을 엄청 탄압했다.[24] 사실 따지고보면 후에 영국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양당을 형성할 정도의 세를 확장해나가고, 프랑스도 한때나마 공산당이 제1당 자리를 차지했을 정도고, 사회주의적인 정책도 일정 부분 펼쳐지기는 했다. 뭐, 혁명이 나서 공산당이 집권하거나 그런 건 아니기는 했지만. 68운동은 실패로 끝났으니 예외로 치고... [25] 참고로 더글러스 애덤스도 여기 묻혀있다. 그 무덤 앞에는 참배객들이 꽂아둔 볼펜이 가득 있다.[26] Archway역 다음역이 Highgate역인데, 이 역을 기점으로 운임구간이 바뀌기 때문에, 런던 시내에서 출발했다면 Archway역에서 내리는 것이 유리하다.[27] 공동묘지인데도 입장료 4파운드를 받는다.[28] 흥미롭게도 이 자본주의 시대 역시 마르크스가 정의한 것이다![29] 그래서 이런 농담이 있다. "당신 직업은?"
"저술가요."
"흠. 노동자가 아니군. 그럼 양친 직업은?"
"상업을 했지요."
"뭐야, 부르주아인가. 당신의 아내는?"
"귀족의 딸이요."
"아아, 안돼 안돼! 당신에게 사회주의는 어울리지 않아! 이런 반동분자 새끼! 거 이름이 뭐요? 어디 한 번 들어봐야겠군!"
"카를 마르크스."
※ 카를 마르크스 외에도 유력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가 중 상당수는 프롤레타리아와는 거리가 먼 돈많은 부르주아-중산층 지식인 출신이 많았다. 그리고 진짜 프롤레타리아 출신 운동가들과 달리 변절하는 일도 적었다.
[30] 고전경제학은 애덤 스미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로 이어지는 존 스튜어트 밀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이어 받았으며 그 이후 케인즈주의 혁명(?)이후 신경제학에 반발한 오스트리안 학파가 이어받는다. 맑시즘 경제학은 고전경제학에게도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대의 따른 학파의 경제학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31] 거기에다 영국의 자본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아일랜드 대기근과 그 대처 방법을 생각해보면.....[32]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현대 자본주의는 마르크스 사상이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낸 사생아라고 할 수도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노동자들의 각성을 촉진시켜버리는 바람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자각하게 되었고, 자본가들은 이제 노동자들에게 이익을 나눠주지 않았다간 한밤 중에 들이닥친 노동자들에게 자기 머리통이 박살나고 집이 불타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게 되었고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노동자에게 이익을 나눠주는 이론을 만들어야 했기때문. 애초에 사회 복지 정책이나 수정 경제 체제의 탄생의 근본적인 원인은 빈부격차 증대에 대한 반발이 확산된 탓이지만, 이렇게나 퍼진 이유는 자본주의의 맹점을 열렬하게 까면서 급속도로 확산되는 공산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몸부림이라는 평이 있을정도. 단적으로 복지국가로 이름높은 스칸디나비아 복지정책은 공산화를 피하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교훈을 잊어버린 자본가들은 다시...[33] 애초에 대부분의 역사학에서는 근세를 인정 안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르네상스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중세의 전성기다.[34] 이 사람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관료제를 완성했다. 그리고 현대의 모든 조직은 관료제를 사용(혹은 변용되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은)하지만 관료제를 부정하거나 탈출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35] 막스 베버의 대표적인 저작이 자본주의를 기독교적 도덕관념에서 정당화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현대 미국식 자본주의자들의 사상적 원류. 라고 생각하는 것은 베버를 피상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베버는 근대자본주의의 발전과 청교도정신(그 중에서도 칼뱅교)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연구했을 뿐, 자본주의를 기독교를 통해 정당화 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현대 신자유주의자들이 베버의 정치,사회이론을 껍데기만 들고와서 프로파간다처럼 써먹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이것은 베버가 근대화의 흐름을 가치중립적인 스탠스에서 서술했기 때문에 베버 이론을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신자유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베버의 이론이 자유주의나 자본주의를 옹호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비약이다[36]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할 때 마르크스 사상에서 공산주의 혁명은 자본주의의 발달이 극한에 다다른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이 터져버린 것에 대하여 후대 공산주의 이론가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에서 가장 중세적 요소가 강했던 국가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르크스는 말년에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며, 실제 러시아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요상한 이론이 많이 등장했다. 참고로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로 꼽은 것은 자신의 조국인 독일.[37] 이 독재는 노동계급의 과도 정부를 뜻하는 말로 오늘날 흔히 쓰는 독재라는 단어와는 다르게 사용된 것이다[38]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인가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심도 있는 철학적 논쟁을 요한다. 이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경제학/비판 항목 참고.[39][] 말음의 경우 더 익숙한 'ㅅ' 표기로 옮긴다.[40] 프랑스어처럼 구개수음이기 때문이다.[41] 하물며 저 'ㄹ'이 발음된다 하더라도 그게 [r]인지 [l]인지조차 보장할 수 없다. [마륵쓰]? [말륵쓰]? [42] 참고로 학동역 하행선 5-3 개찰구 근처 스크린도어에 적혀 있다(...).[43] 돌려 말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북한에서 레닌-마르크스주의는 이미 폐기된 사상이므로 주체사상에 어긋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공공연히 말하다가는 끔살이기 때문이다.[44] Max Weber. 마르크스와 함께 근대 사회과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학자이다. 문제는 이 사람이 마르크스와는 정반대로 대표적인 보수 우파 학자다. 사실 철자도 다르다. 전술했듯이 이쪽은 중간에 r이 없는 Max. 그리고 이쪽은 막스가 이름이고 베버가 성이다.[45] 이것은 영화 변호인의 중심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으로 나오게 된다.[46] 그의 아버지는 지금으로치면 돈많고 잘 나가던 로펌 변호사였다. 마르크스는 엄연히 금수저였던 것이다. 그래서 수입과 재산도 굉장히 많은편이었는데 마르크스는 10대 후반부터 주변 귀족들만을 부러워하고 시기하여 기분이 나쁠 때마다 파티를 자주 하느라 그 재산들이 팍팍 줄어들 만큼 써댔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아빠는 로펌 변호사, 아들은 패리스 힐튼급 파티광이었다. 패리스 힐트은 사업으로 돈이라도 벌지, 얘는 아주 돈만 쓰고 ㅉㅉ 뭐하는 애냐 결국 그 과도한 사치로 약 20년 내외의 시기에 집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파산한다. 오죽하면 아버지가 이미 대학생 시절의 마르크스에게 "돈 좀 덜 쓰면 안 되겠냐"는 편지까지 쓴 적이 있다. 물론 마르크스는 무시하고 계속 돈 부쳐 달라고만 답장을 썼다. 마르크스는 법대나 변호사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로 그렇게 된 것에 불만이 있었던 것 사실이었다고 하나, 누구나 알듯이 그게 집안 재산 다 날려먹을 근거는 되지 않는다.[47] 결국은 어머니 말 무시하고 다 팔았다.[48] 몇몇 작가들이 쓴 마르크스의 전기에 꽤 실려 있으나 사실 정확히 확인된 바는 아니고 유명한 소문이었다고만 알려져 있다.[49]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변호사가 되라고 요구했던게 거슬렸는지도 모르지만[50] 물론 요즘으로 보면 어린 청소년의 중2병틱한 반항으로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사회는 지금과 개방적인 수준이 달랐고, 그의 글은 당시에도 체계가 있었기에 쉽게 볼 수는 없다.[51] 우리도 잘 아는 《뉴욕트리뷴》의 런던 주재 특파원으로 송고한 기사가 남아있다.[52]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달라고 처가에 부탁을 하니 돈 대신에 하녀를 보냈다. 처가가 귀족가문인 베스트팔렌 남작가 였기 때문에 이런 당황스러운 지원이 가능했다.[53] 근대 이후로 큰 인구 이동이 없고, 전통적으로 사회 구조 자체가 상당히 정적인 동양, 특히 사방이 바다와 국경 아닌 국경으로 막힌 우리나라식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 하기 힘들지만, 유럽은 기본적으로 수 많은 다양한 문화와 국가들이 국경 하나 두고 갈라져 있어 스페인에서 옳은 소리 하다 찍히면 프랑스로, 프랑스에서는 영국으로 튀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처럼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발상이 별 의미를 가지지 않고, 자기의 사상적 신념에 따라 국적을 바꾸는 일도 흔하다.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 같은 인물도 우리나라에서야 '조국을 러시아에게 팔아 먹을 죽일놈' 같은 소리를 듣지만, 서양에서는 '폴란드인이 공산주의를 신봉 해 소련군을 끌고 조국에 진주했다'라는 사실 자체는 그리 욕 먹지 않는다.[54] 아주 드문 예외로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이 있다. 이 사람은 인쇄소 일을 하며 독학으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였다.[55] 물론 실제로 마르크스는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56] 그 중에서 두 프랑스인인 샤를 롱게와 파울 라파르그는 자기 두 딸 예니와 로라와 결혼하여 사위까지 되었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사상적으로 명석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아나키즘 논쟁에서 마르크스와 각을 새웠던 파울 파라르그를 총애했다.[57] 이 시기 검열을 피하기 위해 중국어 사회과학 서적이 슬금슬금 들어오기도 하고, 계급 투쟁class struggle같은 내용을 '학급 문제'와 같은 내용이라고 검열원에게 둘러대는 일도 있었다.[58] 이는 2015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막스베버의 저작이 국가보안법 위반의 증거물로 사용되는 사례가 있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50530145645130 [59] 다행히도 메가의 경우 동아대 강신준 교수를 중심으로 한국어 판본에 대한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60] 이 논문은 훗날 알튀세르에 의해 '우발성의 유물론'이라는 이름으로 재해석되게 된다.[61]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가 그의 유고를 정리하여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