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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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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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임꼴은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된 인구로 계산)

· · · · · 강전 · · · · · ·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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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독고 · · · 동방 · · ·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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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황목 · 황보 · ·


1. 秋
1.1. 본관1.2. 역사1.3. 추씨인 인물 목록
2. 鄒

1.[편집]

가을을 뜻하는 한자를 쓴 한국의 성씨이다.

가장 일반적인 로마자 표기는 Chu이다. 2011년 외교부 여권 통계에 따르면 Chu가 약 52%, Choo가 약 47%, Chou 등 기타 표기는 1% 미만이다. 참고로 '주' 씨도 Ch를 사용하기도 하므로 로마자 표기만 보고서는 '주' 씨인지 '추' 씨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거의 대부분은 '추'씨일 가능성이 높다. 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Chu,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 따르면 Ch'u이다.

1.1. 본관[편집]

대표적으로 추계 추씨가 있으며 전주 추씨,성주 추씨도 있다. 문헌에는 개성, 강화, 파평등이 있었지만 현재는 이 두 개만 남았다.[1] 인구는 2000년 기준 54,667명이다. 274성 중 65위
54,667명 치고 추씨의 유명인이 많은 건 기분탓이다.

1.2. 역사[편집]

본디 중국에 기원을 둔 성씨로서 한국보다 중국에 기록이 훨씬 많이 남아있다.

시조 추엽은 중국 남송 고종 소흥 11년(서기 1141년) 문과에 급제하여 적부라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고려 인종 때 가솔을 이끌고 함흥 연화도에 정착하여 한국 추씨의 시조가 되었다. 시조 추엽의 묘소는 함경남도 함흥시 연화도에 있으며, 1868년(고종 5년) 통훈대부 연천현감 남정하가 묘갈명을 썼다.

추엽의 아들 추황(추영수)이 1209년(희종 5)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1213년(강종 3) 문과에 급제한 후 몽골의 침략으로 1232년(고종 19년)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항전하던 비상 시대에 임금을 잘 모신 공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문하시중을 역임하였으며, 명유 우대정책에 힘입어 훌륭한 제자를 많이 배출하였기 때문에 이학종사로 추앙받았다.

추황의 아들 추적은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한 뒤 안동서기·직사관을 거쳐 좌사간에 오르고, 충렬왕 때 민부상서와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추적은 시랑 겸 국학교수로 재임할 때 《명심보감》을 편찬하여 중국에 전파하였다.

추적의 장남 추진은 교서랑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원주 판관을 지낸 다음, 천장시에 급제함으로써 일약 보문각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 공민왕이 등극한 후에 광록대부 병부상서가 되었다. 친원파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자 과업을 수행하였다. 공민왕 12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궤장을 하사 받았다. 시호는 충효.[2]

추진의 장남 추유는 1362년(공민왕 11년) 18세에 성균시에 급제하였으나, 권세와 간신배들로 인하여 기울어져 가는 고려를 떠나 중국으로 귀환하였다. 양쯔강하류 강변에 있는 고찰 금산사에 도착하여 주원장을 만나 혈맹을 맺고, 호주 출신의 지장 서달과 탕화와도 동지로서 뜻을 같이하기로 맹세하였다. 1363년 화주에서 반원군의 지도자 진우량의 대군을 격파하였다. 추유는 이 결전에 행군총관으로서 치밀한 작전을 세워 성의백과 함께 첫 출전하여 승전을 올린 것이다. 추유는 명나라 개국공신으로 병부시랑 좌간의대부가 되어 북벌군에 합류하여 원나라의 수도 연경을 점령하고 몽골 세력을 멀리 카라코룸으로 몰아냈다. 벼슬은 호부상서에 이르렀다. 1393년(홍무 26년)에 명나라의 안위사로서 조선을 방문하였다.[4]

추유의 아들 추귤은 1392년(명나라 홍무 2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산동첨사가 되자 영락제를 황제의 보위에 올린 공신이 되어 상서좌복야에 이르렀고, 추귤의 아들 추섭은 1438년(정통 3년) 명나라 문과에 급제하여 중서사인 등을 역임한 뒤 안찰사가 되었다.

추섭의 아들 추서는 명나라 성화 원년(1465년) 문과에 급제한 뒤 도지휘사가 되었을 때 왜구명나라 해안의 도처에 침범하자 봉수제를 시행함으로써 왜구를 소탕하였으며, 벼슬은 병부상서에 이르렀고, 추서의 아들 추천일은 명나라 정덕 원년(1506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정덕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좌시랑을 지냈다.

8세손 추익한은 홍문관 부수찬, 호조좌랑을 거쳐 호조정랑으로 승진한 뒤, 한성부윤을 끝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인 강원도로 낙향하였다. 영월 유배 중인 단종을 극진히 모신 충신으로 단종의 영정을 모신 영모전과 충절사에 엄흥도·정사종과 함께 배향되었다

10세손 추수경은 명나라 문과에 급제하여 안찰사 등 요직을 역임한 후, 벼슬은 무강자사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독 이여송의 부장으로서 명나라 총병아장으로 아들 5형제와 함께 조선에 파병되었다. 곽산, 동래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명으로 돌아가지 않고 함께 참전한 아들들과 전주의 추동에서 살았다. 정유재란 때 전주싸움에서 전사하여 사후에 완산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이에 선조가 공을 기려 본관을 부여하였다. 전주 추씨의 시조.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하였는데, 한말 칠의사 중 한 사람인 추치경은 충주 장현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국하였고, 추용만과 추용소 형제는 합천에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또한 추기엽은 해남·영암 등지에서 150여 명의 부하 의병을 이끌고 육지와 해상에서 일본군과 대소 40여 회의 전투를 수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가 순국하였고,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 외에 독립운동가 추교철은 1919년 7월 군자금 모집을 통해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비밀결사 독립애국단을 조직하였고,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 모금지령서를 교부받아 자산가들에게 독립군 명의의 사형선고서를 우송하며 군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그러다가 1920년 일경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고,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3. 추씨인 인물 목록[편집]

2.[편집]

본관은 미상. 2000년도 인구조사 당시 전국에 209가구 642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경상북도 상주군 낙동면 성동리에 추석숭(鄒石崇) 1가구가 사는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역사적으로 고구려 대무신왕의 장수 추발소 및 여말선초의 후백제의 장수 추허조가 있으나, 지금의 추씨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1] 그러나 모두 혈족관계로서 본디 같은 뿌리였다.[2] 추적의 차남 추뢰 또한 국학에서 배운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사간원 사간에 이르렀다.[3][3] 추뢰의 아들 추영은 충목왕 때 철성부 판관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는데, 일을 잘 한다는 평가를 받아 왕명을 출납하는 요직인 지신사로 승진하였다. 다만, 이를 시기하는 소인배들의 참소로 부당한 탄핵을 받아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얼마 후에 공민왕이 즉위하자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하였다. 이성계 일당의 역성혁명을 보고 분개한 추형은 관직을 버리고 한때 현령으로 있었던 강원도 평창으로 들어가 청빈낙도하며 초야에 묻혀 시서(詩書)를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4] 추진의 차남 추협 또한 1363년 형 추유를 따라 중국으로 떠나 절강성에서 농민군을 모아 한때 8,000명의 군세를 거느리고 명나라 창업에 큰 훈공을 세워 추유와 함께 건국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벼슬은 태복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