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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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세월호_사고_요약도.jpg

해상사고 요약도

일어난 날짜

2014년 4월 16일 오전 08시 30분

유형

운항 중 침몰

출발지

인천 인천항 연안 여객터미널

도착지

제주도 제주항 연안 여객터미널

일어난 위치

대한민국 전라남도 진도군
맹골수도 인근 해상

좌표

북위 34°13'5.16"
동경 125°57'00"참조

탑승인원

476명

사망자

299명

실종자

5[1]

구조자

172명[2]

선종

여객선

파일:external/blog.donga.com/ps140416003122.jpg

1. 개요2. 월별 상황3. 사고 배경
3.1. 세월호의 제원3.2. 선박 개조
4. 사고 상황
4.1. 구조 현황4.2. 세월호에 탑승했던 단원고 학생 인원 현황 및 배치4.3. 침몰 원인4.4. 선장을 비롯한 선박직 승무원들이 퇴선 지시를 지체한 원인4.5. 사고 전 메시지들
5. 구조 및 수습 과정
5.1. 사고 보도 및 가족들의 반응5.2. 구조 및 수습의 어려움5.3. 실종자의 생존 가능성5.4. 해경의 발표
6. 피해 상황
6.1. 경기 안산 단원고등학교의 피해 상황6.2. 일반인 & 승무원 피해 상황
6.2.1. 일반인 희생자 이야기
6.3. 진도 및 안산 지역 피해 상황6.4. 그 밖의 피해 상황
7. 수사 상황
7.1. 배 운영과 승무원 관련 논란
8. 형사 사건의 진행
8.1. 1심 판결 (광주 지방 법원)8.2. 2심 판결(광주 고등 법원)8.3. 3심 판결 (대법원)
9. 해경 123정 정장, 김경일 경위의 업무상 과실 치사죄, 징역 3년형 판결10. 각계 반응과 대처
10.1. 각계의 반응10.2. 정부의 대응10.3. 실종자 가족들10.4. 반응의 배경
10.4.1. 정보 전달 체계의 문제10.4.2. 국가위기 관리 매뉴얼 축소화 논란10.4.3. 지나친 관심이 낳은 문제
11. 이 사건으로 드러난 사회의 어두운 일면12. 사건의 여파
12.1. 경제적 영향 논란
12.1.1. 부정적 영향 주장12.1.2. 부정적 영향 반박
13. 의혹14. 인양 관련 사항15. 유사 사건·사고
15.1. 유사 해상 사건·사고15.2. 해상사고 외 유사 사고15.3. 학생들이 사망했던 비극들
16. 기타

1. 개요[편집]

파일:세월호_침몰_사고_상공_촬영.jpg

오늘 , 참사 D+1649일.

2010년대 대한민국을 가장 크게 뒤흔든 최악의 해난 사고

2014년 4월 16일 전라남도 진도군 관매도 부근 해상(맹골수도)에서 청해진해운이 운영하는 인천항-제주항 정기 여객선 '세월호'가 뒤집어져 침몰해 전체 승객 476명 중 304명이(단원고 250여명) 죽거나 실종된 사고이자 안전불감증으로 인해 확대된 인재로, 대한민국해난사고들 중 두 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낸 사고다. 그리고 수학여행 사고 중 가장 많은 사망자를 야기한 참사다.

이 사건은 안전 불감증에 빠져 있던 우리나라의 안전 관리의 현실과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까발린,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비극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출범 2년차의 박근혜정부는 물론, 대한민국 경제계, 사회계, 정치계는 모두 엄청난 후폭풍과 침체, 그리고 공황에 시달렸다. 사실상 이 참사 이후 언론뿐만 아니라 정계, 경제계 그리고 교육계 모두 이 사건에 매몰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며, 특히 가장 많은 탑승객인 고등학생들이 재학하던 단원고의 주소지이면서 생활권이 겹치는 안산시시흥시, 그리고 세월호가 침몰한 지역인 진도군은 아직까지도 이 여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수학여행 관련 사고 중 역대 최대의 참사[3]이다. 이명박 정부의 2008년 선박연령 규제완화로 일본에서는 운항이 금지된 노후선박인 세월호의 수입운항[4], 사주인 유병언 일가의 부도덕한 경영,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부실한 선박 관리와 안전교육, 이러한 현실이 발생하도록 방치한 승무원들, 이준석 선장과 항해사의 판단 착오와 늑장 대응, 그리고 그로 인한 시간 지체, 가만히 있으라는 비상식적 안내 방송[5], 그리고 정부와 관료의 대처[6]모든 것이 잘못되었던 최악의 해난 사고였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 남영호 침몰사고 같은 대형 재난의 경우 불특정 다수가 피해자인 게 대부분이었는데, 이번 참사는 안산시 단원구에 있는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및 교직원들이 수학여행을 가던 도중에 발생함으로 사망자의 상당부분이 어린 학생들이었다. 단원고의 주소지인 경기도 안산시와 사고현장인 전라남도 진도군은 이 사고 때문에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사고 당일, 세월호에는 차량 150여대와 승무원 29명, 화물 기사 33명을 포함해 총 476명이 탑승해 있었다. 이 중에는 3박 4일 일정으로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학생 325명과 교사 1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전에 발표된 해운사의 브리핑에서는 탑승자가 477명이라 했지만, 오후 브리핑에서 승선권과 탑승자 명부를 조회한 결과 462명으로 조정되었다. 하지만, 이후 23시경 해운사는 475명으로 총 인원수를 정정하였다. 이번엔 CCTV로 탑승자를 일일이 헤아렸다고.[7] 그러다가 4월 18일 오후 10시경에는 476명으로 정정되었다.[8] 외국인중국 국적조선족 두 명을 포함하여 총 5명이 탑승했으며 필리핀 가수 2명은 구조되었으나 중국인 이 모 씨와 조선족 이 모 씨와 러시아 출신 학생은 4월 21일 수색작업에서 발견되었다. 러시아 출신 학생은 단원고 유학생인데, 주니어 수영 선수 출신으로 수영에 매우 능숙했다고 한다. 객실에서 대기하라는 방송만 아니었다면 생존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안타까움을 더했다.

오세아노스호 침몰 사고처럼 선장이 튀었음에도 승객이 전원 구조된 사례를 본 사건과 견주어 보려는 시각도 있으나, 사건의 경위 차이가 상당한 시점에서 섣부른 추측 및 비판은 삼가야만 한다.

세월호 침몰 1년 전의 모습. 세월호 침몰 한 달 전의 모습. 세월호 침몰 전 3월 27일의 모습. 이것이 세월호 마지막의 모습이다.[9]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정부측 인사인 '해경 123정' 정장이었던, 경위 김경일업무상 과실 치사 혐의가 대법원에 최종적으로 유죄(징역 3년)로 결론났다. 가 완전히 침몰하기 전인 9시 30분에 현장에 도착한, 해경에서 간단하게 대피방송만 했어도 인명피해가 극심하지 않았을 거란 법원의 판단이며, '부실한 구조행위'로 대량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후에 야기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건과 박근혜정부의 비참한 몰락도 결국 세월호 참사와 직간접적 연관이 있었다.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대통령 탄핵이였지만, 탄핵 여론 형성의 시발점이 세월호 참사였고, 궁극적으로는 국민이 세월호 참사의 무한책임을 정부와 대통령에게 물은 것이기 때문이다.[10][11] 결국엔 정부를 파멸로 이끌만큼,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태였던 것이다.

이후, 이 문제는 대통령 박근혜의 탄핵 사유 중 하나로서(세월호 7시간 및 생명권 침해) 탄핵안에 포함되어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가결되었으나,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10일 판결하면서 이를 직접적인 탄핵사유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12][13] 그러나 헌법재판관 김이수, 이진성은 보충 의견으로서 당시 박근혜의 태도를 지적하긴 했다.

2. 월별 상황[편집]

3. 사고 배경[편집]

3.1. 세월호의 제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세월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세월호1994년 6월, 일본 나가사키의 하야시카네선거(林兼船渠)에서 건조한 카 페리선이며, 건조 후 일본 마루에이 페리(マルエーフェリー株式会社, A-Line Ferry Co.,Ltd.)사에서 약 18년간 Ferry Naminoue(フェリーなみのうえ 페리 나미노우에 [14])라는 이름으로 가고시마~오키나와 나하간 운항하다가 2012년 10월 1일을 나하발 운항을 끝으로 퇴역하였으며, 같은 달 중고 선박 시장 매물로 올라온 이 선박을 청해진해운이 2012년 10월에 매입하여 개수작업을 거친 후 세월호(歲月號)라는 이름으로 2013년 3월부터 인천-제주 항로에 투입했다.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는 세월호와 오하마나호 뿐이었으며 인터넷에서 세월호나 오하마나호의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그 이유다. 하지만 청해진해운이 취득했던 제주-인천간 면허가 취소되고 사실상 회사가 사라지게 되어서 더 이상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는 없다.

명칭인 세월호는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의미의 歲月(해 세 + 달 월)이다. 이름은 유병언 회장이 직접 지었고.작명을 사유로 한번 출항시 수천만원의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당초에 정확한 한자표기가 알려지지 않아 가장 흔한 단어로 음차한 명칭인 歲月號라는 명칭으로 일본, 중국, 대만 등지에서 보도되었으나 일부 언론에서 나온 (世)상을 넘는다(초(越)한다)는 의미가 퍼지면서 수정 보도되고 있다. 중국 방송의 수정 보도(중국어 링크): 한국 조선일보를 인용하였다고 되어 있다. 원래 중국어권에서는 표음문자의 특성상 외국어의 정확한 명칭을 알아낼 때까지는 가칭을 쓴다. 그러다 2015년 7월 26일 구원파[15] 및 유병언 전 회장 관련 정정 및 반론'에 따라 다시 歲月로 정정되었다.#

3.2. 선박 개조[편집]

파일:attachment/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naminoue_old.jpg

파일:attachment/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SEWOL.jpg

페리 나미노우에[16] 시절

세월호 시절


승객 더 태우려 선박 개조?.."구명보트 오작동" 결함 의혹이란 기사에 따르면, 당초 600명 정도[17]가 타는 배였는데 300여명 정도를 더 태우기 위해 배 뒤쪽에 객실을 추가하였다. 선수부 우현 사이드 램프 도어(램프웨이) 제거가 되었으며, 배 뒤쪽을 개조했다는 전직 세월호 기관사의 증언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객실을 증축하면서 세월호의 무게는 페리 나미노우에(4대)때와는 달리 239톤이 증가했다.

이게 첫 개조가 아니었는데 일본에서도 이미 1994년 건조한 지 불과 한달만에 589톤이 증가했었다. 결국 맨 처음 개수했을 당시 5,997톤이였던 선박은 개조로 인해 6,586톤으로 증가했고, 개조한 세월호의 순수 선박의 무게가 일본당시 239톤 + 한국에서 589톤 총합 838톤 증가하여 6,835톤에 달했다. 상세 내역은 선박 개조 논란 쪽을 참조.

4. 사고 상황[편집]

세월호 72시간의 기록

우측 하단에 가 시간에 따라 잠기는 모습이 나온다.

4.1. 구조 현황[편집]

※ 이 문단을 갱신할 때에는 정보의 출처를 반드시 표기할 것. 기타 조건은 테이블 아래 목록 참조.

파일:external/static.news.zumst.com/SSI_20140421034206_V.jpg

해상사고 요약도

발생일

발생시각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 (추정)[18]

유형

발생위치

운항 중 침몰

대한민국 전라남도 진도군
동거차도 인근 해상

탑승인원

구조

일반인: 151명

단원고교생: 325명

일반인: 97명

단원고교생: 75명

사망

미수습

일반인: 51명

단원고교생: 248명

일반인: 3명

단원고교생: 2명

기종

연안 여객선

총합

탑승: 476명

사망: 299명

미수습: 5명

구조: 172명

출처

이데일리


(2017년 6월 5일 17:42 기준, 단위: 명)

  • 단원고등학교 학생의 현황에는 단원고의 교사를 제외한다.

  • 2014년 4월 22일 이후로 사망자 중에서 탑승 명단에 없는 사람들도 발견되었으나, 공식적인 탑승객 명부의 인원수는 476명에서 변경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사실상 총인원수는 476+α인 상황.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는 승선원 명부의 정확성 문제, 차량탑승 미신고자 등 여러 예측 불가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탑승객 숫자는 언제나 변동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밝혔다.#

  • 단원고 사망자의 수는 2017년 6월 2일자 기준으로 갱신되었다. # 학생 피해 집계가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아 실제 파악 인원과 차이가 날 수 있다.

  • '단원고'는 단원고 학생 뿐만 아닌 선생님들도 포함된다.

  • '일반인'은 일반 승객 뿐만 아닌 세월호 승무원도 포함된다.

  • '사망'은 시신이 발견된 경우, '미수습'은 시신이 발견되지 못한 경우이다.

4.2. 세월호에 탑승했던 단원고 학생 인원 현황 및 배치[편집]

파일:external/i59.tinypic.com/lbse9.jpg

연합뉴스 측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학생들은 이미지와 같이 선실에 배정되었다고 한다. 도면상으로 확인되는 선실 절반의 출입구 방향이 선체가 기울어진 쪽 반대 방향이다.

선체가 90도 이상 기울면서 출입구쪽 벽면이 천장으로 바뀌었고, 아래 후술하지만 벽을 타고 올라갈수가 없는 구조였기때문에 대피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19] 하지만 수사 상황을 보면 대피를 못했다기 보다는 승객들이 안내 방송을 믿고 대피를 안 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아무리 배가 기울어져도 승무원의 퇴선명령(지시)가 있었고, 승객들이 적극적으로 탈출하려 했다면, 창문을 깨는 방법 등으로 출구를 확보하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탈출 선원들 "구조순서 밀릴라"…승객대피 안 시켜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휴가 중이었던 선장은 선박의 복원력이 저하됐다고 사측에 의견을 제시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는 전했다.#

4.3. 침몰 원인[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침몰 원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4. 선장을 비롯한 선박직 승무원들이 퇴선 지시를 지체한 원인[편집]

선장 이준석이 구속될 때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사고 해역은 맹골수도로 물살이 굉장히 빠른 지역이다. 구조선이 도착하기 전에, 지나치게 빨리 바다에 뛰어들 경우 빠른 조류의 영향으로, 사고 지점에서 상당히 멀리 떠내려가서 생존 확률이 급격히 떨어진다.

세월호 침몰 당시, 사고 해역의 수온은 약 11~12도 정도로 추정되며, 그 정도의 수온에서는 구명조끼를 입어서 물에 떠있는다 하더라도, 생존 시간이 일반적으로는 1시간, 최대 2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조류로 떠내려갈 경우, 바다에서 1시간 이내에 다른 선박에 발견되어 구조되기는 지극히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09시 20분경, 사고 지점에 최초로 도착한 유조선 두라에이스호는 2,700톤급 선박으로 작은 가 아니다. 충돌 우려 때문에 세월호에 가까이 붙여서 구조할 수 있는 배는 아니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구명정은 모두 불량이어서 펴지질 않는 상태였다. 따라서 선박직 승무원들은 구조선이 도착한 이후에도 500여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기 때문에 승무원 신분인 자신들이 구조 우선 순위에서 밀릴 것이라는 우려와 구명정 승선절차 없이 그냥 퇴선 명령을 내려서 바다에 500여명이 구명조끼만 대충 입고 뛰어든다면, 비록 어느 정도는 구조된다고 하더라도, 조류에 밀려 떠내려가는 인원을 감안하면, 최소 수십명 이상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면서 판단을 지체했을 것이다.[20]

그러는 사이 배는 더욱 기울었고, 결국 자신들이라도 먼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대피 방송이고 뭐고 일단 빠져 나오는데 급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순직한 서비스직 승무원 박 아무개가 무전으로 계속 퇴선명령 여부를 조타실에 문의했음에도, 이를 무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무전기는 무전기를 가진 전원에서 송수신 내용이 다 들리기 때문에 못 들었다거나 고장났다거나 하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 이외의 선박직 이외의 다른 승무원을 포함한 승객들은 자신들이 구조되는데 걸리적대는 장애물로밖에 보지 않았던 정황이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이들 선박직 선원들은 해경 123정의 보트에 의해 기관직 승무원들 다음 두 번째로 구조되지만, 자신들의 안전이 확실히 확보된 이후에도 승객 퇴선 명령은 내리지 않았고 해경에 그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승무원 중 1등 항해사 강 아무개는 구조된 이후에 자기 소지품인 휴대폰을 챙기려 배에 다시 올라 자기 휴대폰은 챙겨 오면서도 퇴선명령(선실 옆 객실에 탈출하라고 소리치지도 휴대폰으로 전화하지도)은 끝내 내리지 않았다.

그냥 아무 지시도 없이 줄행랑을 친 것도 아니고 안내방송으로 승객들의 발을 묶어놓고 자신들은 안전하게 구조된 이 행동이 어찌나 기이했는지 처음 사고소식을 듣고 현장에 출동했던 어선의 선장은 갑판 위에 나온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서 사고현장상황을 배가 화물선이어서 승선인원이 얼마 안 되거나 이미 상당수 인원이 구조되었단 상황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긴 상식적인 상황이라면 이렇게 판단하는 게 무리가 아니다.

안내방송을 담당한 승무원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안내방송 담당 서비스직 직원 강 아무개는 사고 최초 시점에서 기운 배에서 움직이면 위험할 거 같아서 자기판단하에 첫 안내방송#을 했고 이후 조타실 지시에 따라 선내에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을 했다.

그리고 9:30분 이후 선원들이 탈출하여 더 이상 추가지시가 없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엽기적인 것은 이 방송이 10시 14분 이후 곧 배가 거의 가라앉기 직전에도 나왔다. 단원고 학생들과 일반인 승객들은 물이 차오를 때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마지막 생존자 박준혁 군만이 10시 24분, 마지막으로 겨우 잠수해서 빠져나왔다.[21]. 다른 사람들은 탈출 시기를 놓쳤다.

이번 참사에서 인명피해가 극대화된 가장 어이없는 원인이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이었음을 생각할 때 안내방송 담당자의 책임도 가볍지는 않다. 선박직 승무원은 아니지만, 안내방송을 한 강 아무개는 1년 이상 승무원으로 근무하던 사람이었지만 선박안전에 대한 지식에선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일반인만 못했다. 숨진 단원고 학생들 중 일부는 구명조끼=침몰 직전 상황을 인지하고 안내 방송에 의구심을 품었으며, 심지어 대구 지하철 참사[22]를 예로 들며 "승무원이 먼저 탈출하는 것이 아니냐"는 예상까지 했다!

타이타닉에서도 선박 설계자의 이론적 판단으로 배의 침몰이 확실시된 이후에는, 승객들을 모두 갑판 위로 올리고, 승객들이 상황을 오판해서 다시 객실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객실의 문을 승무원이 모두 잠궜다. 승객들을 왜 대책없이 객실에 머물게 했는지는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기울어진 배에서 움직이면 넘어지거나 움직이는 물체에 부딪쳐 다칠 수 있다는 원론적인 안전교육 내용은 떠올려서 자기판단으로 방송을 했지만, 배가 복원한계를 넘어가 기울면 결국 침몰하며, 기울기가 기울수록 물이 급격하게 들어차기 때문에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했다. 탈출지시여부를 물었으나, 선박직 선원들에게서 어떠한 응답도 없는 상황에서 승객들이 동요하자, 동요를 막기 위해 (자기도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하면서) 방송을 되풀이했다.# 조타실의 추가 지시가 없는 상황에서 아예 안내방송을 하지 않았다면 승객들은 알아서 각자 살길을 찾았을 것이다.

퇴선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고는 하지만, 시시각각 배가 기우는 것을 몸으로 느꼈을 상황에서 대기지시후 무대응으로 일관한 선박직 승무원들에게 무언가 사고로 인해 신상에 이상이 생긴 것 정도로 자체 판단하고 탈출을 지시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안내 방송을 안할 수는 없었는지 두고두고 안타까운 부분이다.[23] 게다가 사고초기 인터뷰 내용을 보면 사고책임을 의식했는지 안내방송의 정확한 경위에 대하여 얼버무리는 모습도 보인다.

배식을 담당하던 주방 직원들의 말에 따르면, 이 직원은 "성실하지만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안내방송 담당 강 아무개도 결국 검찰에 구속되었다. # 조타실과 안내방송 지시의 주체와 경위에 대한 수사 필요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 직원은 대기 지시를 믿고 착실하게 따른 탓에 참사를 당한 학생&교사들과 더불어 지시 매뉴얼을 믿고 고지식하게 따른 탓에 결과적으로 악마의 방송을 해 버린 피해자로 보는 시각도 가능하다.

그 외에 배 안에서 대기하라고 한 추가적인 이유는 과거 세모그룹 시절 너무 일찍 물속에 뛰어들어 피해자를 많이 낸 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구조선이 올 때까지 배안에서 기다리라는 것이 청해진 해운 회사 내부 지침이었다고 전해진다. 하필 또 이 사고 당시의 승무원 중 하나가 이준석이었다. 즉 이준석에게 사고났을 땐 배에 대기시키는게 안전하다란 잘못된 경험칙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4.5. 사고 전 메시지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사고 전 메시지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구조 및 수습 과정[편집]

파일:external/99d1ac8655f3312db72ad2ff4edb951b3ba83a730573db19834a151a45b6f6f6.jpg

당시 언론인들(관훈클럽)도 고백한 대한민국 재난 방송 중 다시 있어서는 안되는 최악의 오보 #

5.1. 사고 보도 및 가족들의 반응[편집]

파일:external/facttv.kr/1427954706-77.jpg

2014년 4월 18일 저녁부터 5월 8일까지 팩트TVGO발뉴스가 공동으로 취재하며 세월호 사고 현장을 생중계(대부분 시간은 현장 방송을 재방송으로 방송중)하였다. 이후엔 합동생방송을 종료하고 각자 보도 중이다.

다른 방송은 여기(욕설이나 실신등 자극성이 심한 장면이 찍힐경우 방송이 잠시 끊기기도 한다). 아무런 지원이나, 방송사 관계 없이 한 남성분이 독자적으로 방송하였으며, 방송 중간에 상황설명에 대한 코멘트를 하는데 사고자 가족들의 감정이 북받쳐 울음바다가 될 때마다 방송진행자 역시 울먹이며 방송하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더하였다. 혼자 방송하기 때문에 힘든점이 많다고 토로했으나, 현장에 뛰어들어가 방송하기보다는 사고자 가족들의 상황을 담담히 전하고 싶다고 4월 19일 오후 방송 중에 밝히기도 했다. 차이점은 카메라 각도와 소리가 좀 작고, 계속 현장 상황만 중계한다는 것. 4월 22일 오후부터 방송을 중단하고 현재 서울광장 합동 분향소를 중계하고 있다.

당시 사고자의 가족들은 강당에 모여서 구조 관련 소식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급하게 현장으로 달려온 학부모들이 많은 관계로 현장에 생필품 등이 부족하였으나 각지에서 구호품이 도착하였고, 4월 19일 이후로 개인 구호품은 접수받지 않고 있다.

사고 당시 구조된 사람들은 정신적 충격이 심해서 외부면회가 통제된 상태이며 특히 단원고 학생들의 정신적 충격이 특히 심각했다. 단원고 학생들 중 구조된 학생들 중에서 거의 PTSD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는 학생도 있었다.# 이에 따라 수학여행을 가지 않은 단원고 1학년과 3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PTSD 검사를 실시했다.# 배에 탑승한 2학년 학생들의 PTSD 증상이 매우 심한 관계로 교육부에서는 학교가 아닌 병원에서 수업을 하도록 조치했으며 수업과 치료를 병행하기로 했다.#

학부모들은 현장 상황이 언론이 전파하는 상황과 많이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수색이 지지부진한 건 둘째 치고 의지조차 있는 거냐며 학부모들의 불신이 커졌으며, 오죽하면 현장책임자가 경비정에 탑승하고 있는 학부모들을 통해 상황 파악을 하고 있을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장에서 한 학부모와의 인터뷰 내용 결국 여러 일들로 실종자 가족들은 불신이 커졌고, 같은 해 4월 20일에 청와대로 가겠다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수학여행 총책임자 자격으로 세월호에 동승했던 단원고등학교 교감이 목을 매단 채로 발견되었다. 경찰에 의하면 학생들을 구하지 못하고 자신만 구조된 것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것으로 그동안 단원고 교감은 "나만 구조됐다"며 자책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교감의 지갑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이러한 자책의 감정이 담겨있어, 주변 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또한 단원고 교감이 사고 당시 가능한 한 생존자들을 구하며 배에 늦게까지 남아있다가 탈출했다는 것이 밝혀져 더욱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버락 후세인 오바마의 지시에 세월호 사고 현장 구조작업에 투입된 주한미군"아직 포기할 단계가 아니다, 실종자들을 충분히 구조할 수 있다."고 말하며 구조작업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5.2. 구조 및 수습의 어려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구조 및 수습의 어려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3. 실종자의 생존 가능성[편집]

파일:external/img.newspim.com/1604151716001620.jpg
없었다. 위의 사진은 박준혁 군의 사진으로, 박 군은 10시 21여분, 물이 턱까지 차오르는 그 세월호를 겨우 빠져나왔다. 그의 증언으로 보면 10시 30분에서 11시 30분쯤에 모든 세월호 방들 그리고 선박 자체 안에 물이 들어왔다는 것.

파일:attachment/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20140416172120_TEDRekUs_3EB93B1EC8BA4.jpg

이 사진은 세월호 3등칸의 모습. 여학생들이 탄 선미 부분의 대형실들이다. 잡을 것 하나 없는 형태로 되어 있어, 배가 기울었다면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참고로 세월호만 이런 건 아니고 국내 여객선 3등칸은 대개 저런 형태다. 더 자세한 내부 사진은 이 링크[24]를 참고.

선박 사고 특성상 일단 가라앉은 뒤에는 구조 가능성이 매우 낮아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단순히 사망자 수(실종 포함 304명)로만 따지면 남영호 침몰사고의 326명보다는 적지만, 사망자 중 대다수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 안산시 단원고 학생들이고, 시대가 훨씬 앞섰기 때문에 사회적 파장을 감안한다면 한국 역사상 최악의 선박 사고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25]

상황이 좀 다르지만,, 2013년에 대서양에서 선박 전복 사고로 바다 밑에 갇혀 있던 선원이 선내에 남아 있는 공기(에어 포켓.air pocket)로 연명하다 3일만에 구조된 경우(한국어 기사 / 영어 기사)[26]도 있기 때문에 최종결과가 나오기까지 모두 사망했다는 판단은 금물이라는 주장이 구조 초반에는 지지를 얻었다. 에어포켓 관련기사

하지만 에어포켓 생존자설은 허구였던 것이 일단 하나하나 설명을 하자면 위의 사례는 비교적 따뜻한 바다였고, 유속도 느리고 무엇보다도 배가 작아서 수색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잠수부가 비교적 빠르게 3일안에 진입할 수 있었다. 세월호는 훨씬 큰 배이기 때문에 구조 작업 자체가 훨씬 어려워서 단순하게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그리고 이런 에어포켓 주장은 이미 천안함 피격사건에서도 이미 전국민을 3일간 감쪽같이 속인 전력이 있다. 당시 천안함은 두쪽난 채로 침몰했기 때문에 에어포켓이 형성될 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언론은 지속적으로 에어포켓이 형성되었을 경우 내부의 사람들이 69시간 동안은 생존할 수 있으니 69시간이 골든타임이라는 주장을 일관적으로 내보냈다. 그나마 "천안함은 에어포켓이 형성될 수 있는 수밀격벽 구조이긴 하지만, 자동으로 격실벽문을 닫혀 폐쇄되는 구조가 아니라 수동으로 닫아야만 하는 구조인데 과연 그 급박한 상황에서 문을 닫을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는 하였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피해자들이 침몰 직후 거의 바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지자, 그제서야 언론은 "잠수함도 아닌데 물속에서 어떻게 3일동안이나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겠는가?" 또는 "수밀격벽은 맞지만 환풍통로가 차단되어 있지 않아 환풍구를 통해 물이 들어오기 때문에 결국 완벽한 수밀 구조는 아니다." 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뒤늦게 보도하였다.

이번 역시 에어포켓 주장은 여전했다. 차이점은 천안함은 처음부터 두쪽나면서 가라앉았기 때문에 수밀이 애초부터 불가능했지만, 온전하게 가라앉은 세월호는 에어포켓이 존재할 가능성이 분명 존재하기는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뒤집혀서 가라 앉은 세월호는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물위에 떠 있었다. 이것이 에어포켓 존재설의 결정적인 증거였다.

에어포켓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사람은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인데, 그는 내부에 에어포켓이 존재할 테니 빨리 생존자들을 구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잘 알려진 미디어들 중에서는 오직 JTBC만이 사건 초기부터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분석하는 전문가의 인터뷰를 보도[27]했다. JTBC 9시 뉴스에 출연한 전문가들은 에어포켓은 온몸 전체가 그 공간 안에 있을 때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몸의 일부는 물 속에 있는데 머리 위에 숨 쉴 공간 약간만 존재하는 형태로는 산소 부족의 문제는 없을지 몰라도 체온이 떨어지기 때문에 결국 생존이 불가능하며, 온 몸 전체가 들어갈 만한 에어 포켓은 형성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28]

기본적으로 세월호는 잠수함이 아니기 때문에 에어포켓이 존재할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 배가 한 시간에 걸쳐서 180도 회전하면서 침몰하는 바람에 골고루 물이 차올랐기에 천장 쪽에 에어포켓이 생기는 것도 여건상 불가능했다. 생존자들이 촬영한 영상에 의하면 배가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탈출하려 할 때 열려있는 문 쪽에서 물이 빠른 속도로 차오르는 것이 확인된다. 다시 말하자면, 배가 누운 상태에서 문은 천장에 해당한다. 이미 이 천장까지 물이 차올랐던 것이다. 즉 한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배는 이미 물이 가득 찼고, 심지어 해경이 찍은 영상 중에는 배 안에서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영상까지 존재한다. 이런 정황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마저 착각하게 만든 요인은 세월호의 뱃머리가 떠있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 부분에 에어포켓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이곳은 원래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가 채워져야 할 공간이었다. 검경합동수사본부의 수사 결과, 세월호는 평형수를 권고 기준의 4분의 1 정도만 채운 것으로 드러났다. 평형수가 부족한 사실을 몰랐던 상황에서 배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이유를 에어포켓에서 찾게 된 셈이다.#

언론의 에어포켓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은 국민들과 실종자 가족들을 상대로 한 희망고문과 구조방식의 왜곡이라는 좋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특히 후자의 경우, 사건 초기에 민간인 잠수사창문으로 사망자를 확인한 뒤 창문을 깨고 시신을 인양하려고 했으나 창문을 깨면 바닷물이 들어가 에어포켓이 사라진다는 논리로 시신 구조를 막은 일, 에어포켓을 유지하기 위해 공기를 주입해야 한다며 수색에 지장을 준 일 등이 벌어졌다.

최종적으로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뒤 1달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애시당초 실종자들이 당일 거의 사망했을 거라는 사실이 표면화되었다. 설령 배 안에 생존자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공기와 물 등이 충분치 않기 때문.[29] 그 동안 잠수사 1명이 순직했을 만큼 수색 작업은 철두철미했지만,[30] 여지껏 단 한 사람도 찾거나 구조하지 못했다. 실종자 중 생존이 보고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4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실종자는 곧 사망자다.

5.4. 해경의 발표[편집]

23일, 해양경찰은 민관군 합동 다이버팀의 수색결과 에어포켓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우울한 소식을 전했다.

에어포켓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발표에 구조작업을 포기하고, 시신이라도 제대로 회수 할 수 있도록 인양작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성되자, 대책본부는 끝까지 구조한 후 인양작업을 하겠다는 발표를 급히 내놓았다. 세월호가 침몰한 곳의 정조 시각을 최대한 활용해 탐색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6. 피해 상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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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고등학교 학생 및 일반인 승객을 포함해 총 476명의 승선 인원 중 172명만이 살아남아 이번 사고의 생존율은 고작 36%에 불과했다. 거꾸로 말하면 64%가 사망했다는 뜻이다. 참고로 이 사건이 일어나기 100년 전에 일어났던 타이타닉호 사고의 생존율이 이와 비슷한 32%다. 즉, 선박에 대한 안전 의식이 생기기 전인 20세기 초반에 나올만한 사망률이 나온 것이다! 전체를 통틀어 겨우 36%에 불과한 생존율이 이 사건의 참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적나라하게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생존율도 배를 두고 도망간 선장과 승무원, 배의 구조를 잘 알고있던 화물기사가 많이 살아남아 생존율이 그나마 30% 후반이라도 나온 것이다. 실제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생존율은 고작 23%로 1/4도 안되었다.

6.1. 경기 안산 단원고등학교의 피해 상황[편집]

학급

생존 학생 수

담임교사 생존 여부

2-1

19명

X

2-2

11명

X

2-3

8명

X

2-4

9명

O

2-5

9명

X

2-6

13명

X

2-7

1명

X

2-8

2명

X

2-9

2명

X

2-10

1명

O

총 75명 생존

총 248명 사망

총 3명 미수습(학생 2, 교사 1)

339명 중 248명 사망
탑승자 73.2%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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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잊지 않는다고 단원고는 친구들에게 약속했다.

정부는 오직 권력의 눈치만 살필 뿐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으며, 믿을 수 없는 언론은 참된 진실을 외면한 채 자꾸 유가족과 세월호 참사의 본질을 왜곡하려고 만든다. 이번 참사를 통해 어른들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세상에 대한 신뢰마저 잃었다. 우리나라는 미쳤다. 이 나라를 떠나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겉만 선진국인 우리나라를 바꿀 수 있게 도와달라.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무엇인지 우리나라를 믿을 수 있도록 이 썩어 빠진 정부를 제발 바꿔 달라. 어른들만 믿다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친구들과 그 가족, 그리고 앞으로 비슷한 사건의 재발로 인해 또 다시 희생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법 제정과 친구들이 왜 자신들의 곁을 떠나게 됐는지 그 진상규명을 밝힐 수 있도록 도와달라.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린 학생들에게 또 다시 지금과 같은 나쁜 세상을 물려주어 죄를 짓지 않게 도와달라.


세월호 참사 생존 여학생의 편지


단원고는 이날 선배, 후배, 선생님을 포함한 대부분의 2학년 관계자 들을 서해 바다 밑에서 잃었다.

2학년 학생 325명(남 175명, 여 150명)과 인솔자 14명(단원고 교감 1명+담임교사 10명+보직교사 2명+여행사 인솔 담당 직원 1명)이 수학여행에 참가했는데, 학생 325명 중 75명(남 34명, 여 41명)만이 구조되고 인솔자는 14명 중 3명(교감+단원고 담임교사 2명)만이 구조되었다.

참고로 1~3반은 인문계 여자반, 4~6반은 인문계 남자반, 7~8반은 자연계 남자반, 9~10반은 자연계 여자반이다. 숫자가 높은 반으로 갈수록 생존자가 적어지는 이유는, 각 반 본래 정원이 자연계열 반이 인문계열 반보다 적었으며, 자연계열 학급은 배의 안쪽 객실을 배정 받아서 빠져 나오기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6반 학생들이 인접 학급에 비해 비교적 많이 생존했는데, 이는 6반 담임 교사가 '선실에 있지 마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안타깝게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단원고 2학년 학생 중 비행기 편으로 제주도로 가기 위해 김포국제공항에 갔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 급히 안산으로 복귀한 특수반 학생들과 수학여행 대신에 탁구 대회에 참가한 탁구부 여학생 3명(밑의 기타 참고), 그리고 항암 치료로 수학여행에 불참한 남학생 1명[31]등 13명만 이 사고를 경험하지 않았다.

단원고 수학여행단의 책임자였던 강모 교감(51세, 윤리 전공 교사)은 구조되었으나, 학생들을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취지의 유서를 남기고 4월 18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당시 사고 현장에서 최소 7~8명을 구조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

그런데 후에 공개된 휴대전화 영상으로도 확인되듯이, 학생들에게 배가 침몰 중이라는 사실과 심각성은 제대로 전파가 안 되었다. 애진이의 4월16일 세월호 탈출기 그외에 바다에서 보내온 편지라고 하여 유족들이 피해 아이들의 스마트폰에서 복구된 동영상이나 사진등을 JTBC에 제공하여 시리즈로 총 8편이 보도되었다.


주의
: 하단의 영상은 자신들의 죽음이 임박했음에도 사고자들이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순수하게 장난을 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안타깝게 담겨 있으므로 시청 후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다면 시청을 삼갈 것.[32]



단원고 학생들의 생존율은 불과 23%였다. 일반 승객에 비해 턱없이 낮았는데, 이는 일반 승객들은 안내 방송을 듣고 침몰 중임을 직감하고 자체 판단을 해서 생존 대책을 강구했지만, 단원고 학생들은 안내 방송과 그 안내 방송을 믿고 따른 교감 및 각반 담임선생님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해 침몰 직전까지도 학생 대부분이 꼼짝 안하고 객실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 대부분은 구명조끼를 입고 객실 안에서 대기할 때, 배가 침몰 중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전달 받거나,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학교나 청해진해운 측에서 학생들을 집결하여 간단한 선박 안전교육이라도 했었다면 수 십명이라도 더 살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는 의견을 표하기도 한다.

인솔교사 11명의 교사진 중에 단 3명만이 구조되었고, 피해 교사들 중엔 학생들을 구하려고 갑판에 나왔다가 다시 객실로 들어가 변을 당한 분들이 있었으며, 자살하신 교감을 제외한 나머지 2명은 현재 무기한 병가를 내고 학교로 복귀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생존학생 수는 75명으로 이 중 추가치료가 필요한 4명을 제외한 70명이 4월 30일 부모와 함께 안산 합동분양소를 찾아 피해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넋을 위로했다.# 의료진은 말렸지만, 분향소가 마련된 시점부터 학생들은 조문을 원했다고 한다.

5월 12일부터는 2학년 생존학생 69명이 병원에서 퇴원하여 6교시 교과수업을 안산 내 모 시설에서 받기 시작했다. 치유수업은 방과후에 진행하고 있으며 부모와 함께 합숙하는 형태이다. #

이전에는 실종상태인 학생들의 사망이 시신인양으로 완전히 확인되어야 교실에 남은 학생들의 물품을 처리하기 때문에 단원고 교정으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6월 25일에 생존 학생들이 단원고 교정에 복귀했다.#

그리고 2014년 10월 2학년 故 황지현 양(당시 17세)을 마지막으로 수습자가 2년 7개월동안 없었다가 2017년 5월 5일에 사고 해역에서 길이 34cm에 사람 정강이뼈로 보이는 뼈 하나가 수습되었다. 신원 파악을 위해 국과수에 정밀검사를 의뢰했다.

여드레 뒤인 5월 13일 세월호 4층 객실에서 조은화 양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유골의 형태는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으며 신원 확인을 위해 유전자 감식 중이다. 3년 1개월 동안 바닷물 속에 들어 있었기에 감식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한 달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사흘 뒤인 5월 16일에 세월호 3층 우현에서 또 온전한 사람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단원고 학생의 유골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5월 17일, 5일에 발견된 유골의 유전자 감식 결과 체육교사 고창석 씨(당시 40세)의 뼈로 밝혀졌다. 이로서 단원고 교사 및 학생 사망자는 247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참고로 故 고창석 교사는 수영실력이 뛰어난 편으로 알려졌지만 세월호 사고 때 제자들을 가장 먼저 피신시키고 자신은 끝까지 남았다가 순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유골이 선내가 아닌 사고 해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유실될 뻔했던 우려를 낳기도 하였다. 결국, 고창석 교사가 세월호 참사의 296번째 사망자가 되고 말았다.

이틀 후인 5월 19일, 사흘 전에 발견된 유골의 신원은 허다윤 양(당시 17세)로 밝혀졌다. 유골 치아 상태를 검식한 결과 10대 여학생의 치아였음이 입증되었고 허다윤 양이 과거에 치아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유골 속 치아의 흔적과 일치해 신원이 확인되었다. 이로 인해 허다윤 양이 세월호 참사의 297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그리고 5월 25일, 13일 4층 객실에서 발견된 유골의 신원은 당초 추정대로 조은화 양(당시 17세)으로 유전자 감식 결과가 나왔다. 이로 인해 조은화 양이 세월호 참사의 298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2017년 5월 25일 현재, 단원고등학교 교사 양승진 씨, 남학생 남현철 군과 박영인 군[33]까지 총 3명이 아직도 수습되지 못했다. 아직도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가슴 속에 남은 상처는 아물지 못한 셈이다. 남은 이 3사람의 유골도 모두 수습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2017년 6월 5일 2주전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당시 입고 있던 그대로 온전하게 발견된 유해가 故 이영숙 씨로 밝혀졌다. 이로써 故 이영숙씨는 세월호참사 299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2017년 6월 5일을 故 이영숙씨 유해발견을 끝으로 반년이 지난 2018년 3월까지 나머지 5명은 아직도 세월호에서 내리지 못하고있다. 2018년 10월 19일, 세월호 마지막 수색에도 끝내 발견이 되지 않았고 안타깝게도 단원고 교사 양승진 씨와 학생 남현철, 박영인 군 그리고 일반인 승객 권재근 씨와 권혁규 군은 영구 실종자로 남게 되었다.

==== 단원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이야기 ====

  • 1. 최덕하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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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로 해경에 신고해서 170여 명의 시민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구명조끼도 못 입고 빠져나오지 못해 끝내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꼭 친구들을 구출해 달라며 눈물의 편지를 쓰셨다.

  • 2. 정차웅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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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원고 최초 피해자이다. 생일을 하루 앞두고 본 사건이 일어났다. 옆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면서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고 물에 들어갔다가 의식 불명이 되어 구급대원들이 심폐소생술을 했으나[34] 끝내 숨졌다. 그리고 정차웅 군을 사랑한 여학생이 그의 추모곡을 썼다.

  • 3. 남윤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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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사.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하달한 후 학생들을 대피시키려고 끝까지 싸우셨던 선생님. 사건 이후 하루만에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다. 1년뒤, 그의 모교에는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남윤철 이라는 수강방을 만들었다.

  • 4. 최혜정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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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원고 최초 교사 피해자다. 동국대학교 출신의 새내기 교사였다. 역사교육과 영어교육을 복수전공으로 이수했고, 졸업 전에 역사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하였으며[35], 역사교육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 이력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이 될 정도. 졸업 직후 안산 단원고에 부임했다. 여러모로 우수한 재원이었으며, 장래가 기대되는 신임 교사였으나 자신의 사랑하는 첫 제자들을 구하느라 정작 본인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향년 24세.

  • 5. 전수영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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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사. 약 1년 근무 중이었던 선생님. 사건 발발 후 자신의 부모님에게 마지막 문자와 전화를 하고 학생들을 지키려다 사망했다. 그리고 60일뒤, 사랑하는 제자들 옆에 묻혔다. 생존자 말로는 그가 마지막으로 전 선생님을 보았을때는 전수영 교사는 학생들을 구하느라 너무 많이 지쳐 보였다라고 한다.

  • 6. 양온유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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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학년 2반 반장이었다. 침몰사건 당시 빠져 나올 수 있던 4층에 있었으나 아래에 있는 선실로 가서 친구들을 구하려고 하다가 끝내 숨졌다.

  • 7. 생존자 조대섭 학생
    : 75명의 생존자 중 1명. 침몰이 일어나고 난 후, 자신도 빠져나오기 어려운데도, 자기 친구들인 여학생 20명을 구조하고 자신도 겨우겨우 구조되었다.

  • 8. 생존자 박호진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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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가장 나이가 어렸던 권지연 어린이(당시 5세)를 구조했다. 그러나 권지연 어린이의 7살 오빠, 엄마, 그리고 아빠는 끝내 숨졌다. 오빠인 권혁규 군이랑 아버지께서는 아직도 차가운 세월호 안에 있다.

  • 9. 생존자 박준혁 학생

세월호 마지막 생존자 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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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박준혁

생년

1997년

: 공식적으로 확인된 세월호의 마지막 구조자 그리고 단원고 생존자 75명 중 하나.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10시 21분 경, 그는 복도에서 그의 담임 선생님, 100여 명의 친구들하고 일반인 승객들하고 필사의 탈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친 물살이 그들에게 왔고. 박 군만이 겨우 줄을 놓치지 않았다. 그때 김수정이라는 단원고 여학생하고 같이 나오려고 했으나 물결을 이기지 못하고 김 양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10시 24분, 박 군만이 겨후 세월호 안에서 탈출하였다. 그리고 2년 뒤, 졸업식에 2명의 여학생들과 2년 전 못 갔던 수학여행을 갔다. 그리고 지금도 대학생이 되어서도 세월호를 알리고 있다. 사학과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며, 단원고 특별전형으로 스무살이 되던 2016년 3월에 경기도 모 대학의 사학과에 진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EBS 다큐 ‘감정시대’에 따르면, 박 군은 선배들이나 또래 여자 아이들과는 왕성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데 반해, 또래 남자 아이들과는 새로운 친구 관계를 잘 맺지 못한다고 한다. 어머니 인터뷰 결과, 고락을 함께 했던 같은 학교 친구들을 대부분 잃어버린 상실감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에도 역사에는 단순히 20만명이 죽었다고만 쓰여 있는데, 그 20만명의 사람들의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잖아요. 20만명의 사람에게는 20만가지의 이야기가 있다… 기억은 언젠가는 사라지잖아요.”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창비, 2016

  • 10. 김동혁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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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자 메세지로 자기의 여동생에게 수학여행을 가지 말라고 오빠로서 마지막 당부를 했다. 그래서 김예원(여동생)은 '약속을 꼭 지키고 살겠다.' 라는 응답을 했다. 참고로 고인의 여동생도 단원고 학생이었다. #

  • 11. 박수현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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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시 11분에 세월호의 마지막 사진 8장을 보내고 숨졌다. 10시 18분, 박준혁군이 빠저나오기 2분전, 해경이 44명의 승객들을 구출할때 창문을 물체로 깨려고 시도했으나 깨지지 않았고, 밖에 있던 해경들이 보지 못했다. 그리고 30초에서 1분후, 그가 있었던 방에 물이 들어왔다. 이 학생이 보낸 마지막 사진들은 이후 이준석이 재판 받을 때, 결정적 증거 중 하나가 되었다.

  • 12. 안중근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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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래희망이 야구선수 였으며 두산 베어스의 팬이었다. 더불어 그의 유니폼 마킹은 '21, 안중근'이었는데, 백넘버 21번은 두산 베어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박철순의 백넘버이자 안중근 군의 출석번호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 유니폼은 두산 베어스가 선수들이 사인한 야구공과 함께 기증했다.[36] 그의 사연은 이 기사에서 더 볼 수 있다.

  • 13. A 학생
    : 자기 형에게 9시 25분쯤에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형이 문자를 다시 보냈는데 확인을 못했다고 한다.

  • 14. 생존자 B 학생
    : 이준석 선장 등에게서 재판이 열렸을 때 "배 안에서 선원들은 아무것도 안 했고, 가만히 있으면 산다고 했는데 가만히 있다가 저까지 죽을 뻔했어요.''라고 말했다.

  • 15. 고창석 교사
    : 세월호 미수습자 9명 중 최초로 유골이 발견되어 수습되어졌다. 생전에는 단원고 2학년 체육 과목 교사였으며 또치머리를 가졌다고 하여서 학생들로부터 '또치 샘' 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수영에 능하였던 편으로 알려졌던 편이었다. 세월호 사고 때는 인솔교사로서 학생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던 중 세월호가 침몰하게 되자 자신이 입었던 구명조끼를 제자들에게 입히면서 사고 와중에도 제자들을 먼저 피신시키는 유도를 해왔다가 본인은 끝내 배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3년동안 세월호와 함께 해저에서 미수습 상태로 수장되어졌다가 2017년 5월 5일 미수습자 9명 중 최초로 유골이 사고해역에서 발견되어 미수습자 중 첫 수습자 및 296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 16. 허다윤 학생
    세월호 미수습자 9명 중 고창석 교사에 이어서 2번째이자 미수습자 학생 중에서는 최초로 신원이 확인되었다. 단원고 2학년 2반에 재학중이었으며 어린시절에 치아 수술을 받았던 경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서 유골의 치아 상태에 결정적인 역할을 주었다. 세월호 승선 당시 우현쪽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3년만에 세월호가 인양되어서 수색을 하게 되었을 때 세월호 우현 부분에서 유골이 발견되면서 정밀 유골 치아 검식과정을 거친 결과 10대 여학생의 치아였음이 확인되어서 297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수학여행 당시 아버지의 검정색 모자를 쓰고 마지막 출항을 하였던 사연이 있었고 세월호 침몰 때 친구들을 먼저 탈출시키고 자신은 배에 나오지 못한채 3년동안 해저에 수장되어 유골로 발견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어머니는 세월호 참사의 충격으로 청각장애를 앓게 되었다.

  • 17. 레네미아(어르미) 학생
    단원고 2학년, 생전 트위터를 했던 트위터리안이다. 주로 마비노기를 즐겨 했으며, 마지막으로 트위터에 "지금 타고 있다고요. 침몰하는거에.... 살려달라고요"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작성 기록은 2014년 4월 16일에 끝나 있다.

  • 18. 양승진 교사
    불명확한 여러 이슈가 제기된 실종자 교사. 충격 발생시 열린 문으로 심하게 튕겨져 나가 바다에 빠졌다는 다수 학생의 목격담도 있지만, 더 많은 학생들에게 구명조끼 착용 등 주의사항을 알리려고 뛰어다니며 다른 층으로 이동한 후 실종되었다는 말도 있어서 증언이 일치되지 않는다. 양쪽 의견 모두 사실일 가능성 (최종 좌초충격 십여분 이전에 최초 충격이 있어서 위험을 인지하고 담임으로서 아이들을 챙긴 후 뛰어나가 다른 학생들도 챙기던 와중에 좌초충격으로 바다에 팅겨져 나갔다는 추측 등)도 있으며, 결국 마지막까지 실종 상태가 되었다.

6.2. 일반인 & 승무원 피해 상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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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속에 묻힌 죽음.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역사속의 세월호 참사가 단순히 교통사고 또는 단원고 수학여행 참사로만 기억되면 안되는 0번째 이유

세월호 탑승객 중 단원고 학생 325명과 교사 인솔진 14명을 제외한 일반인 승객은 104명이었다.[37] 이중 생존인원은 71명으로 약 69%의 생존율을 보였다.# 일반인 승객의 생존율이 단원고 학생에 비해 높았던 것은, 일반인들은 사고 당시 인원통제를 받지 않고 개별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였고, 성인이어서 사회경험&자기판단에 따라 안내방송을 믿지 않고 각자 살길을 찾아 행동했던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세월호를 자주 이용했던 화물차기사들은 30명중 29명이 구조#되었는데, 이들이 세월호를 여러번 타는 과정에서 배의 문제점을 평소에 느끼고 있었고, 배 구조에 익숙하여 비상상황에서 초행길일 다른 승객들보다 탈출로를 찾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피해자 중에 단원고 학생들이 워낙 많은 비중을 차지하여 일반인 승객들은 인원집계등의 구조작업부터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과 배려를 받아온 측면이 있으며, 안산에 설치된 합동분향소에서 일반인 승객들은 영정등의 배치등에서 배려를 받지 못해 일반인 유족들이 이의제기를 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세월호 참사의 같은 피해자로서 동등한 대우와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

향후 설치될 세월호 추모공원의 대상에서도 일반인 유족들이 대상에서 제외되어 일반인 유족들이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실정. #

승무원들의 경우 33명중 23명이 구조되었고 10명이 사망 또는 실종상태이다. 이번 사건에서는 선박직 중심의 일부 승무원들의 막장행각이 워낙에 큰 공분을 일으켰는지라, 승무원 희생자 또는 실종자의 유가족들은 세월호 승무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죄인이 된 심정으로 숨죽이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사고 초기 서비스직 박지영 씨나 양대홍 사무장의 영웅적 일화와 이후 비선박직 승무원들이 선박직 승무원들에게 사고정황을 전해듣지 못한 채 처절히 버려졌던 정황이 드러나면서 같은 피해자로 보는 상황.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 등은 알바라는 이유로 청해진해운으로부터 장례비 지급도 거부당하여 청해진해운에게 맹비난이 쏟아졌다.

한편 언론이 입수한 국정원 보고서와 사망한 김영한 민정수석이 남긴 비망록에 정부가 단원고 유족과 일반인 유족을 분리하고 갈등을 조장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비판을 받고 있다.

사고 발발 후 3년 1개월이 지난 2017년 5월 22일에 일반인 승객으로는 처음으로 이영숙 씨(당시 51세)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 유골은 구명조끼를 착용한 상태였는데 복장 상태가 승선 당시 이영숙 씨의 복장과 같고 옷 속에서 이영숙 씨의 신분증까지 발견됐으므로 이변이 없는 한 유골의 신원은 이영숙 씨가 맞을 것이다. 다만, 정확한 신원 파악을 위해 역시 유전자 감식 중이다.

그리고 2017년 6월 5일 세월호 선체에서 발굴된 유골 일부를 감식한 결과 일반인 희생자 이영숙씨의 유골이 확인되면서 일반인 희생자로서는 최초로 유골이 수습되어서 299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하지만 권재근 씨, 권혁규 군 부자는[38] 그 이후로도 수습되지 못했고 1년 4개월 동안 더 수색했지만 끝내 2018년 10월 19일, 마지막 수색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유골이 발견되지 않으면서 세월호에서 내리지 못했다.

6.2.1. 일반인 희생자 이야기[편집]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들은 단원고 학생들과는 다르게 수학여행이 아닌 개별여행 및 제주도로 귀농을 하기 위한 목적 등을 안으며 세월호에 올랐었다. 단체여행으로 있던 단원고 학생들과는 달리 일반인 승객들은 개별 목적 및 여행이 대부분이라 각자가 행동하였기 때문에 단원고 희생자들에 비해서 희생자 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 중 미수습자로 알려진 권재근씨와 아들 권혁규군은 베트남 출신의 부인과 딸 또는 여동생과 함께 제주도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세월호에 타게 되었다. 사고 전까지만 했어도 제주도에 가서 감귤 농사를 지으며 제주인으로서의 삶을 꿈꾸었던 이들이었기에 기대도 컸었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로 끝내 이들은 제주땅을 밟지 못하고 진도 해상에서 세월호에 갇혀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해저에 3년동안 수장된 상태로 있는 상황이다. 부인은 이미 숨진 것으로 알려졌고 당시 5살배기 어린 딸만이 유일한 생존자 및 구조자가 되었다. 현재 딸은 권재근씨의 형님인 큰아버지가 보호자로 보호하고 있는 상태이다.

세월호 선원 중 한 명이자 의인으로 알려진 박지영씨는 20대의 젊은 선원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청해진해운에 입사하여 세월호 선원으로 승선하게 되었다. 상관인 이준석 선장과 나머지 선원들이 승객들을 버리고 도망갔던 와중에도 자신은 끝까지 승객들의 대피를 유도하였으며 동생들과도 같은 단원고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눠주고 학생들에게 먼저 탈출하라고 지시하는 등 선장과 나머지 도망간 선원들과는 다르게 선원의 본분을 지키며 승객 일부를 구조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끝내 본인은 세월호에 탈출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희생되어 싸늘한 시신이 되어있었다. 이 당시 박지영씨의 나이는 한창 젊은 22세였다.

박지영씨와 함께 세월호 사무장으로 있었던 양대홍씨는 아이들을 구하러 가야한다며 부인과의 마지막 통화를 하고 난후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끝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상관인 선장과 나머지 선원들이 승객들을 버리고 도망갔던 와중에도 동료인 박지영씨와 함께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가족들에게도 아이들을 구해야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사망하였다.

세월호 침몰 때 민간 잠수사로 활약했던 이광욱씨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목표를 삼으며 인도선을 세월호에 연결하고자 바다에 입수하게 되었지만 잠수 중 호흡곤란을 앓게 되었다가 끝내 숨지게 되었다.

청해진해운 커플 사원으로 알려진 정현선, 김기웅씨는 결혼을 앞두고 세월호 승무원으로서 승선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세월호 침몰 당시 무사히 탈출하게 되었지만 배 안에 갇힌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다가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두 사람이 모두 숨지게 되었다. 두 사람의 희생은 한 번 세월호를 빠져나오고나서 완전히 도망쳐버린 상관인 선장과 나머지 동료 선원들과 대비되는 사례이기도 하였다.

미수습자 중 최초로 일반인 신분으로 유골이 발견된 이영숙씨는 단원고 학생들과 함께 세월호 한 배에 탔던 일반인 승객이었다. 2014년 4월 15일 밤 단원고 학생 및 나머지 일반인 승객들과 세월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진도 해상을 항해하던 세월호가 침몰하게 되었을 때 이씨는 그 당시 세월호 3층 선실에 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끝내 세월호 선내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세월호안에 3년동안 해저에 수장된 상태로 있었다가 2017년 5월경에 신원미상의 유골로 발견되었고 6월 5일 유골 감식결과에 따라 이영숙씨의 유골이었음이 확인되면서 세월호 299번째 사망자이자 일반인 승객으로는 최초로 미수습자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6.3. 진도 및 안산 지역 피해 상황[편집]

사고가 난 지역인 진도해역에서는 사고 직후부터 인근 어민들이 구조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어 귀중한 생명을 살렸으나, 어민들로서는 사고 때문에 정상조업을 할 수 없어 나날이 경제적 피해가 누적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구조활동에 우선적으로 전력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라 현지 주민들의 속앓이가 깊어지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세월호에서 흘러나온 기름 때문에 피해는 어업조업 이외에 인근 양식장까지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아직 실종자 수습작업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기름방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팽목항에 실종자 가족및 구조인원이 들어서면서 종래 인근 섬으로 운항했던 여객운항이 하루 두 차례로 줄어 낙도 주민들 또한 큰 불편을 겪고 있는 상황.#

이번 사고로 피해 인원이 가장 많은 안산 지역의 경우 피해자들이 모두 같은 학교이자 그 인근지역에 거주하는 관계로 해당 지역에는 인명피해를 입은 가정이 집중되어 있고, 이웃, 친족 등의 혈연 지연관계로 연계되어 있어 지역적, 집단적으로 안산시는 심각한 트라우마가 우려되는 상황이다.[39]

마침 고등학교 평준화 된 이후[40]라 집 가까운 고등학교를 가게 된 상황이여서 심한 경우 한 아파트에서 8가구의 피해자가 나온 경우도 있다. 특히 단원고 인근인 고잔1동과 와동은 두세 집에 한 집 꼴로 초상(初喪)이 난 상태라 동네 분위기 자체가 침울한 상태이다. 그리고 단원중 후배들도 단원중을 나온 단원고 선배들이 사고를 당해서 슬퍼했다. 단원중도 단원고처럼 우울하고 침통했다.

전국적으로도 그렇지만 진도와 안산 두 지역은 특히 소비심리 및 경제활동이 극히 위축되고 있고, 대형사고의 부정적 이미지가 지역 이미지에도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하고 있다. 국가에서 소기업, 상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공제 사업만해도 안산, 시흥 지역에서 폐업 해지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늘었으며 이는 사업 출범 후 유례없는 일이라고한다. 100일이 경과하며 더욱 늘어나고 있다.

진도 안산 두 지역은 4월 20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으며, 진도,안산의 경제활동 회복을 위하여 금융지원등의 추가 대책마련이 이루어지고 있다. 안산시에서는 피해 유족에 대한 생활안정자금을 지원해주고 있으며, 피해 단원고 학생들의 유품(옷가지, 책, 책상)을 유품 정리 신청받는대로 무상으로 수거하여 시내 소각장에서 무료로 소각해주고 있다.#[41]

6.4. 그 밖의 피해 상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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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건의 큰 여파로 배를 이용한 수학여행, 나아가 수학여행 자체가 금지되었으며, 이 때문에 국내 단골 수학여행지로 꼽히는 제주특별자치도, 경주시, 설악산 등의 관련업체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어 해당 지역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관광, 전세버스 업체도 마찬가지로서 4월무렵이 수학여행으로 이들 업체의 성수기인 점을 감안하면 올해 영업은 거의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결국 단순한 사고여파로 감수(甘受)하기에는 연쇄적 피해가 현저하자, 안전을 전제로 수학여행을 재개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한다.#

특히 수학여행 관련 업체이라기보다는 사고이후 관광업계 전반이 꽤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사고 시일이 지나면서 조금 경황을 둘러볼 여유가 생기면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고 있는 상황.

국가적 차원에서 세월호 사고 수습에 들어가는 비용은 직접피해보상액만 최소 5500억#에 달하며, 직간접적 비용을 합친 총비용은 2조원에 달한다는 견해#까지 있다. 도주및 책임회피중인 유병언 일가를 붙잡아 구상권을 청구한다고 하더라도 이들 비용을 모두 커버하기에는 모자랄 수 밖에 없으며, 국세로 충당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들이 있는 재산을 순순히 내놓을 위인들도 아니라서...처리과정에서도 지난한 법적 절차와 더불어 온갖 추하고 짜증나는 꼴을 보게될 가능성이 크다.

더불어 세월호 사건 여파로 파생되는 각종 사안이 사회 전분야로 확산되고 있으므로, 직간접으로 예상치 못하는 분야의 사람들이 불이익[42][43]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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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인 측면에서도 국민에게 절망감을 주었다. 어른들의 말,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을 잘 지키는 바람에 250여명의 학생들이 어이없이 수장당한것을 보며 단원고 피해 학생들과 그 또래의 아이를 가진 부모들, 혹은 초중고 교사중에는 방송을 보면서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당시 고2 학생들은 나도 수학여행가서 죽는거 아니야?, 언제부터 우리가 학교를 목숨걸고 다녀야했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7. 수사 상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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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해양경찰에 의해 진행된 수사로 선장 이준석과 항해사, 조타수, 기관사 등 배의 운항과 관련된 선박직 직원 15명은 전원 구속 수감되었다. (주)청해진 해운의 물류부장 김모와, 물류팀장 김모, 청해진해운 해무 담당 이사인 안모, 그리고 김한식 대표이사도 구속되었다.

파일:attachment/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info98ofvv879c.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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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해운 사장 김한식

전 세모그룹 회장 유병언


세월호의 구명정 정비업체인 '한국해양안전설비'의 대표도 구속되었다. 구명정이 펴지지 않는 불량 상태였는데도, 양호하다고 허위로 기재한 검사 결과 보고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유병언 회장의 측근인, (주)아해 전 대표 이강세, 오경석(53세) 헤마토센트릭라이프연구소 대표, 김동환 (주)다판다 감사(48세)도 구속되었다.

유병언의 장남인 유대균(44세)는 검거시 일계급 특진 조건을 걸고 A급 지명 수배가 되었다. 그의 자택에 체포 영장을 들고 강제 진입했지만 유대균은 없었다. 그러나 7월 25일, 경기도 용인시에서 검거되었다. 유병언의 장녀 유섬나가 5월 말, 프랑스에서 인터폴에 의해 체포되었다. 당시 인터폴은 이미 고인이었던 유병언을 수배중이었다.

미국에 체류 중인 유병언의 측근 김혜경 한국제약 대표, 김필배 전 문진미디어 대표에 대해서는 여권 무효화 조치와 함께, 체류자격 취소를 미국 국토안보조사국(HSI), FBI에 요청했다 .관련 기사 미국 국세청(IRS)이 "미국 구원파교회 헌금 유용 의혹"제보와 신고, 각종 고소·고발이 있어 자체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련 뉴스

7.1. 배 운영과 승무원 관련 논란[편집]

우선, 4월 17일 시점에서 수사본부에서 조사중인 혐의는 다음과 같다. 선장은 만약 배가 급회전으로 넘어진 게 사고 원인일 경우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가 있고,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선박법 위반 혐의도 추가된다. 다른 승선원들은 선장 지시 없이 선박을 떠났거나 인명 구조 조치를 하지 않았다면 선원법 위반 혐의가 있다.#

불과 11일 전에 같은 회사-청해진 해운의 배에서 사고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 이번 사고와 연관성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상황.

해경의 발표에 따르면, 사고 당시 본래의 선장이 휴가 중이어서 다른 선장인 이준석이 대리 운항을 했다고 한다. # 하지만 선장의 대리 운항은 자격 조건만 되면 흔히 있는 일인지라 무조건 대리 운항 자체를 나쁘게 보는 건 지양해야 한다. 또한 이후 이준석 선장은 원래 세월호와 오하나마호를 오가며 전문적으로 대리운항을 했던 사람이라는 증언이 나오면서 선장으로서의 능력과 경험은 충분한 것으로 밝혀졌다. [44]결정적으로 한 달에 절반은 ‘1선박 2선장’ 지휘체계 산으로 갔던 세월호라는 증언이 나와 이준석 선장은 대리운항이 필요할 때만 탄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서 한달에 15일은 세월호를 탔던 전문가라는 점이 입증되었다. 원래의 선장은 신모로, 신 선장은 배의 복원성 문제와 과적 문제를 충분히 인지하고 평상시에도 계속 본사와 인천항만공사에 문제제기를 하였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고 당일 휴가를 냈다는 설이 있다. 신 선장은 사건 초기부터 JTBC와 인터뷰를 하면서 적극적으로 세월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반해 이준석 선장은 청해진해운에서 퇴직한 후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다시 계약직으로 채용된 대리 운항 전문 선장으로 평소 회사에 고분고분했다고 한다. 이는 이준석 선장이 구원파 신자이기 때문에 특혜차원에서 이루어 졌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막상 재판에 들어가니 원래 선장인 신선장이 "나는 수습 보조 선장일뿐 원래 선장은 이준석 선장"이라고 주장 했다. 그러나 신선장은 사건 초기부터 언론사와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했었는데 그때부터 자신의 보조선장 설을 일관되게 주장하면 모르겠지만 재판에 와서 처음 주장하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만 신선장 말이 사실이라면 왜 잉여인 이준석 선장이 평상시에도 신선장과 함께 배를 탔는지 의문이 해결되기는 하다. 처음 일본에서 세월호를 몰고 왔을 때 이준석이 선장이었고, 신선장이 1등항해사였다. 이 둘은 오래전부터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사건 초기 이준석은 사고 원인을 묻는 질문에 “암초 충돌은 아니다. 갑자기 가라앉았다. 하지만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다”고 답했다.[45] 이준석은 부상을 당해 옆 침상에 누워있던 경기 안산시 단원고 학생들이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 얘기를 나누자 귀를 세워 듣기도 했다. # 자신이 선장이냐고 묻는 질문에 나는 선장이 아니라 선원이라고 발뺌했던 정황까지 드러나면서 도의적 책임 논란에서 빠져나오기는 힘들어 보인다.# 또한 꼬리뼈에 부상을 입었다며 치료를 원했지만 병원에서는 이상 없다고 돌려 보냈다. 이후 재판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부상을 호소하는등 계속해서 면피성 발언만 하고 있다.

사건 초기에는 이준석 선장이 상의는 스웨터를 입고 하의는 팬티만 입고 탈출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방송 화면 상으로는 상의는 입고 있는데 하의는 담요로 두르고 있거나 바지를 갈아입는 것으로 보여, 온몸이 물에 빠지지 않고 하체만 젖은 채 나온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물 한방울도 젖지 않고 안전하게 퇴선한 것이 확인되었다. 그 이유로는 3가지가 꼽힌다.

첫째로는 선원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급히 선원복을 벗고 탈출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다. 다른 승무원들도 사복으로 갈아 입고 탈출했으니 일견 합당해 보인다. 그러나 모두가 이준석 선장처럼 팬티만 입고 탈출한 것은 아니다. 사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승객들이 살려달라고 외치는 객실을 지나서 옷을 갈아입고 유유히 돌아온 선원도 있는데다가, 조타실에 모여 있다가 탈출할 때까지 한시간 가량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서두르다 그렇게 되었다기보다는 갈아입을 사복이 없었다는 쪽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또한 사복을 입고 있어 선원인지 모르고 구조했다는 해경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언론이 그대로 받아 적다보니 그런가 보다 했지만, 해경에서 찍은 구조순간의 영상을 보면 다른 선원들은 작업복을 입고 있어서 누가 선원인지 알 수 있었다. 즉 모든 선원들이 사복을 입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결과론적이지만 선원복을 입고 있어도 해경은 조타실부터 배를 붙여서 선원부터 구조했을 것이다.

둘째로는 에 취해 늦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을 제대로 갈아입을 시간이 부족했을 거라는 추측이다. 이준석 선장 본인은 사고 당시에 대해 담배를 피우느라 자신이 조타실을 잠시 비운 동안 가 급격히 기울어 조타실로 급히 돌아왔다고 진술했으나 #, 선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사고 전까지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평상시에도 술에 자주 취해 있었고, 항해기간 내내 술을 마시고 늦잠을 자느라 식당에 늦게 나타나 아침을 혼자 먹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고 당일 그는 식당에 늦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고, 이로 미루어 볼때 줄곧 늦잠을 자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 조타실을 지켰다는 진술은 당연히 거짓이다. 그러나 해경에 의해 구조된 직후 해경이 선원이냐고 묻자 아니라고 거짓 대답하는 바람에 음주측정이 이뤄지지 않아 그의 음주 여부는 추측에 그친다. 다만 이 선장이 술에 취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300명이 물에 빠져 죽는 순간을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며 태연하게 곰탕에 밥말아 먹거나 방송사의 카메라들 앞에서 유유자적하게 걸어다녔던 등의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이 어느 정도 아귀가 맞는다.

당시 여러증언들을 보면 사건 발생 이후, 사건을 직접적으로 일으킨 3등 항해사 박한결(여성, 당시 25세)는 구석에서 울고만 있었고[46] 실질적으로 1등 항해사가 지휘를 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준석이 에 취해 지휘 능력을 잃은 것은 선장실에 가서 바지도 못 갈아 입을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번째는...전기세가 아까워 간단히 설명하자면 필리핀 여가수랑 방에서 검열삭제를 하다가 갑작스러운 사고에 놀라서 팬티만 입고 도망쳤다는 것인데 필리핀 여가수의 남편도 배에 함께 탑승해 있었고, 특히 여가수는 선원들이 자신들을 구조할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에 이쪽은 언론사들이 기사의 클릭을 유도하기 위해 지어낸 낚시용 루머로 보인다.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이들은 조타실 바로 뒤에 객실이 있어서 선장과 함께 1차로 구조되었다. 애초에 필리핀 여자 가수 라는 이유로 문란하거나 돈을 위해 몸을 팔것이라고 넘겨짚는 자체가 인종차별적인 매우 저열한 발상이다. 필리핀 정부한테 직접 항의 먹어도 찍소리도 못할 수준.

사고 시각 당시 의 운항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은 선장인 이준석이 아니라 20대의 3등 항해사인 25세의 여성 박한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 사건 초기 대부분의 언론들은 왜 경험없는 3등 항해사에게 조타실을 맡겼냐고 집중적으로 추궁했고 심지어 키를 잡은 것이 조타수라는 점에 놀라 비난했다. 하지만 이것은 선박의 운전대를 선장이 파이프 담배를 물고 운전한다고 생각하는 막연한 이미지에서 생긴 오류다. 일반적으로 선장은 조타실, 기관실은 물론 탑승객들까지 배 전체를 관리하고 1,2,3등 항해사들은 조타수 C,B,A와 각각 짝을 지어 시간대별로 3교대로 운항하는 것이 전세계 표준이다.[47][48] 그렇기 때문에 사건 초기에 전문가들은 이런 운항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언론에서 설명 하였다. 그러나 이후, 해경 조사에 의하면 위험지역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선장이 지휘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 부분을 고려하면 완전히 제대로 운항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세월호의 매뉴얼에는 이러한 규정이 빠져 있다고 한다.

문제가 되는 3등 항해사 박한결은 총 경력 1년 남짓에 해당 노선의 운항 경험은 4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은 초짜라는 부분도 언론에 의해 집중적으로 추궁되었으나, 항해사 경험자들에 의하면 항해사들은 이미 해양대에서 실습을 통해 수많은 경험을 쌓는데다가 하루에 8시간씩 운전하니 1년이면 100일만 운항해도 800시간을 조함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경험면에서는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 데다가 3등 항해사는 조타수 중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노련한 조타수 A(12년 경력)가 짝지어져 보좌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언론에서 문제삼고 있는 또다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원래대로라면 국내에서 2번째로 조류가 센 맹골수로는 시간상 1등 항해사가 조함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사고 전날 안개로 인해 출항이 늦춰져 3등 항해사가 조함하는 시간에 맹골수로를 통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항해사 출신들의 인터뷰에서는 해당 시간에 3등 항해사가 조함하는 것은 전세계 공통임으로 큰 문제가 없으며, 그보다는 위험한 수로에서는 선장이 조타실에서 직접 조함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즉, 경험이 적은 3등 항해사가 하필이면 맹골수로에서 조타실을 맡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위험한 항해 구간에서 선장이 조타실에 없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선장이 조타실에 있었을 경우 항해가 문제 없이 이뤄졌을거냐면...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세월호는 맹골수로에서뿐만이 아니라 원래 심하게 흔들렸다고 한다. 거기서 사건 첫날 인근에서 조업중이던 어선에서 당시 맹골수로가 안개도 없고 호수같이 잔잔 했다고 증언했다. 결국 1등 항해사가 조함했느냐 3등 항해사가 조함했느냐, 혹은 선장이 조타실에 있었냐 없었냐는 문제의 핵심이 아닐 수도 있다.

3등 항해사 다음으로 문제가 된 것은 12년 경력의 55세의 조타수A 조모였다. 조모는 평상시에도 험하게 운전해왔고, 이전에 조타와 관련된 문제를 일으켜 일시적으로 조타 금지를 당한 전력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성격이 험해 직원들과 불화가 심했기 때문에, 이번 항해를 마지막으로 오하나마호로 보내지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49] 항해사 출신 전문가들은 왼쪽으로 5도 틀거나 오른쪽으로 5도 틀라고 항해사가 지시하면 그대로 따르는 것이 조타수이기 때문에 경험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듯 하다.(작은 상선의 경우는 조리원이 조타수도 하는등 무경력 초보자도 조타를 한다고 한다.)

사건 초기에는 세월호가 과적 상태인데다가 평형수도 1/4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사고 당시의 항적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조타수가 키를 135도로 무리하게 꺾는 바람에 사고가 발생했다고 알려졌다. 조타수 조모는 구속 당시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키를 많이 꺾기는 했지만 실제로 꺾은 것보다 조타기가 더 많이 돌아갔다고 증언해, 이때에는 선박 조함 장치에 결함이 있어서 사고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정설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에 세월호 항적 기록이 복원되면서 키는 135도가 아니라 45도밖에 꺾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50]과적 사실과 평형수 문제도 연이어 밝혀지면서 조타수의 평상시보다 조타기가 더 돌아갔다는 말은 면피를 위한 위증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여기에 조타수 조모가 자신의 막내딸 뻘인 3등 항해사 박모와 사이가 좋지 않아 사고 당일 아침에도 두 사람이 다투는 것을 목격했다는 탈출 선원들의 증언이 나오면서, 일부 언론에서는 조타수 박모가 3등 항해사 박모의 지시를 듣고도 일부러 조타기를 더 무리하게 꺾었을 가능성도 점치고 있는 판국이다. 그러나 3등 항해사 박모가 아직까지도 검찰 조사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어 현재로서는 위의 이야기들은 모두 추측일 뿐이다.[51] 2018년 초 뉴스타파 기사 참조. 네덜란드에서 실시한 시뮬레이션, 그리고 인양한 세월호의 조타시스템 유압계통에 이상한 부분이 발견되었다. 그 부분의 고장으로 타가 완전히 돌아갔고, 원래라면 그래도 괜찮아야 했지만 과적과 화물고정 불량, 지나친 평형수빼기로 불안정했던 세월호가 기운 채로 항해하다 해수가 유입되고 돌아버리면서 배가 누웠다는 추측이 나왔다. 방향타의 방향 자체는 유압을 잃어버린 다음에는 조류의 흐름과 인양시 외력이 작용하는 대로 움직인다고 한다.[침몰시]

배가 침몰되는 와중에도 선장 및 항해사들에게 조기 탈출 의혹이 있는 점과 승객들에게 객실에 들어가있으라는 방송을 내보낸 점과 승무원이 도망갔다는 점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또한 참사의 큰 원인이 선장(기관사)의 조종 과실인 것도 있다. 지하철 참사 당시 정작 불이 나기 시작한 안심행 1079호보다 얼마 뒤 도착한 반대편의 진천행 1080호에서 사상자 대부분이 발생하였으며, 1080호는 전 역인 대구역에서 출발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출발했다. 진천행 열차가 중앙로를 향해 출발하지 않았다면 대구역을 통해 승객들이 빠져나가 사상자가 크게 줄었을 것이다. 그리고 생존자 한 명이 말하기로는 배에 탔을 때 비상대피 방법에 대해 전혀 설명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배에 기울기 시작하면서부터 실질적인 지휘는 1등 항해사 A가 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선박의 항해직은 비정규직 선장 이준석, 경험많은 1등 항해사 A 강모, 그날 처음 세월호를 탄 견습 1등 항해사 B, 2등 항해사 오모, 3등 항해사 박모로 이뤄져 있었는데 선장은 현재로서 추정되는 바로는 술에 취한 채 잠들어 있느라 지휘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때문에 차선임자인 1등 항해사 A가 지휘를 맡은 듯하다. 선원들이 책임 회피를 위해 입을 맞춘 정황이 포착되어 정확한 내막이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 실질적인 지휘를 맡은 1등 항해사도 다른 항해사들과 조타수들이 조타실에 모여 사복으로 갈아 입고 구명조끼까지 입은 채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객실 사무장에게 구조선이 없어 위험하니 객실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린 이후 객실 승무원들이 10여차례 무전으로 탈출여부를 물었으나 답변을 하지 않은 점을 볼때 딱히 지휘랄 것을 한 것 같지는 않다.[53] 1등 항해사로부터 객실 내에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게 아니라 객실 승무원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지금 밖으로 나가면 위험할 것 같아 전원 객실 내에서 대기하라고 자의적 판단 하에 방송한 후 위로부터의 추가 지시를 기다렸으나 끝내 지시가 없었다는 약간 다른 버전의 기사도 존재하지만, 어쨌든 탈출한 승객들은 공통적으로 객실 직원들이 지시를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무전기에서 답변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재판중에 선장인 이준석이 2차례에 걸쳐서 승객들은 객실내에 있으라고 지시했다는 말이 나왔다. 선장, 1등항해사, 객실직원이 서로 자신이 생각해서 방송을 했다고 하니 혼란스럽다. 어쩌면 10여차례 방송을 했으니 극 초기에는 1등 항해사가 방송하고 이후 술취한 선장이 뒤늦게 나타나 2차례 방송 지시를 하고, 이후 객실 직원이 무전으로 어떻게 할지 지시를 묻는데 답이 안오니 자신의 판단에 의해 객실에 있으면 안전할 것 같아서 배가 가라앉기 직전까지 방송 한걸 수도 있다. 다만 사건 초기엔 여자목소리로 모두 배 밖으로 뛰어내리라는 방송이 가라앉는 순간 나왔다고 해서 또 다른 객실 직원 박지영이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에 대한 후속 기사를 찾기 힘들다. 월간조선 2014년 6월호에는 객실 직원 박지영이 9시 35분 경비정 123정이 도착한 이후 3층 안내데스크 부근에서 큰소리로 "모두 탈출하라!"라고 소리 질렀다고 하는 정도.

이 일련의 사태에는 선장 외의 다른 선박직 직원들에게도 책임이 크다. 침몰시에는 대피방송이나 통신, 구명정, 의료지원 등 각 직군이맡아야 할 업무가 있는데도 아무도 그것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사고 직후 한 조타수는"객실에 어떻게 가냐. 정말 이 사람들 희한한 사람들이네"라는 태도를 보이며 오히려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다. 사실 이는 말도 안되는 변명이다. 300명 규모의 단체 승객이 있다는 것을, 승무원이 몰랐을리 없다. 그냥 단체 여행단 대표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알리면 된다. 전화번호를 모르면 114를 경유해 단원고 교무실에 물어보면 된다. 분명한 상황판단 미숙이다.

다만 그는 이 인터뷰에서는 퇴선지시를 선장이 내렸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1등 항해사 A와 선장 중 누가 당시 지휘를 하고 있었는지 불분명한 점이 있다. 이들이 승객과 객실 직원들을 버려두고 도망친 사이, 객실 직원들은 선장 등의 탈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계속 무전을 통해 탈출 여부를 물었으나 당연히 지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객실승무원인 22세의 여성 승무원 박모가 자신의 독단으로 전체 방송을 통해 전부 밖으로 뛰어내리라고 방송하면서, 이때가 되어서야 백여명의 승객들이 밖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건졌다. 이 시점은 선장 등 선박직 선원 15명 전원은 이미 탈출하여 팽목항으로 가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객실직원이 직접 판단하여 탈출 방송을 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박모인지는 아직 의문이다. 왜냐하면 박모를 포함 객실직원들의 거의 다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여차례 객실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말했던 객실직원은 최후의 순간 기적으로 탈출했고 이후 여자 목소리로 탈출하라는 방송이 나왔다고 하니 정황상 박모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한편 위에서 언급된 선장과 항해사 등의 8명 외에도 기관실에는 기관장 등 7명의 직원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선장의 어떠한 지시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관장의 판단에 따라 배의 엔진을 끄고 탈출한다. 일각에서는 그들이 배의 상황을 알 수 없는 배의 가장 밑바닥, 기관실에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을 때까지 남아 있다가 위기의 순간에 어쩔 수 없이 배를 버리고 탈출한 것이 아니냐고 그들을 바라보았고, 기관실 직원들 또한 이런 시각에 힘입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언론과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배가 침몰할 때 보통은 엔진을 끄지 않는다는 점이다. 배가 침몰하는 경우, 조금이라도 수심이 낮은 곳에서 배가 좌초되어야 탈출 및 구조에 유리하기 때문에 기관실 직원들은 침몰시에도 각자 맡은 곳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직무를 팽개치고 자신들만이 아는 통로를 이용하여 탈출하였다. 이 선원용 통로는 배의 가장 밑바닥인 기관실에서 배의 최상단에 위치한 조타실까지 한번에 이동할 수 있는 통로로, 이곳을 이용한다면 배의 바닥쪽에 있던 승객들을 구조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전혀 구호활동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탈출 중 객실 직원들인 조리원 2명이 돈까스를 튀기다가 배가 기우는 바람에 부상을 입고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을 보고도 못본 척 했다는 증언마저 나오고 있다. 이후 해경 123정이 도착하자 이들은 제일 먼저 도망쳤다. 선장이 가장 먼저 도망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기관실 직원 7명이 선장 등 8명조차 버린 채 제일 먼저 도망쳤고, 그 뒤 두번째로 선장 일행이 도망친 것으로 밝혀졌다.

언론에서 문제를 삼는 부분은 정규직인 기관장이 비정규직인 선장을 평상시에도 무시하였고, 이번 역시 어떠한 지시 없이 독단적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이다. 세월호는 항해사 이하 선원들이 대부분 외국인인 다른 선박들과는 달리 임금을 적게 주면서도 착취할 수 있는 구원파 출신들을 선호하였다는 증언이 있고, 임금을 적게 주기 위해 15명의 선박직 선원중 단 4명만 정규직이었다. 심지어 퇴직 후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던 이준석을 불러들여 270만원이라는 턱없이 적은 돈을 주면서 비정규직 선장을 맡겼다.(정규직 선장은 400만원) 이 때문인지 이준석은 항해 중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방에서 자거나 술을 마시면서 보냈고, 실질적으로 기관장이 선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원래 선장이었던 신 선장이 운항할 때도 이준석 역시 배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한 배에 지휘자가 2명도 아니고 3명인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15명의 선박직 선원들은 기관장을 중심으로 한 기관사 7명이 먼저 해경 123정을 타고 도망가고, 1등 항해사 A를 중심으로 한 선원 8명은 2차로 해경 123정을 타고 탈출하였다. 이들은 선원복을 벗어버리고 선원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름까지 속이고 다 함께 팽목항으로 가서 자원봉사자들이 주는 곰탕을 맛있게 먹은 후 후식으로 커피까지 받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선원들은 자신은 해경과 함께 구조를 도왔다거나 탈출을 지시하는 방송을 했다거나, 5도 밖에 꺾지 않았다고 하거나, 잠깐 담배피러 나왔을 뿐 조타실을 비운적이 없다는 등의 밑도 끝도 없는 면피성 거짓말을 계속 쏟아내고 있다. 이들은 이미 외신을 통해 세월호의 악마로 규정되었다. 일반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언행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바, 이들이 전원 구원파의 신도들이며 이 교리에 의해 이런 일을 저지른 건 아닐까 의심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즉 자신들은 이미 구원받았으니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알바가 아니라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이에 대해 구원파측에서는 선원들 대부분은 구원파가 아니라고 하지만 이 부분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다만 이준석 선장의 아내를 포함한 주변인의 인터뷰에 의하면 이준석은 술을 좋아할 뿐 광신교도적인 면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한다. 물론 주변인 인터뷰이니만큼 걸러 들어야겠지만, 그냥 자기들끼리 아는 사람이므로 다른 사람들의 목숨보다 자신들의 유대관계를 우선해서 탈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선장과 관련 직원들의 탈출은 그냥 부도덕한 책임회피이고, 사이비 종교랑 엮는 이상한 선동성 글들은 이들을 악마처럼 묘사하는 병맛 글들이 넘쳐나니 주의.

일반직(객실) 직원 14명은, 선박직 직원 15명과는 다른 영웅적인 행동을 보였다. 사무장, 사무원, 조리원4명, 아르바이트 불꽃놀이 담당(아르바이트는 총 6명) 등으로 이루어진 14명의 객실 직원들은 무려 10명이 사망하고 4명만이 생존하였다.(이중 조리원 1명, 알바생 1명등 2명은 양사무장이 구해주어, 양사무장의 의로움에 대해 증언 하였다.) 선장 등 책임자에게 조기 탈출 의혹이 있는 와중에, 23세의 여승무원 박지영은 끝까지 남아 승객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눠주었는데 한 여고생이 왜 언니는 탈출 안하냐고 묻자 "선원은 제일 마지막이다. 언니는 친구들 다 구해주고 나중에 나갈게." 라는 선원로서의 당연하나 선박직 직원등은 안한 영웅적인 모습을 보이고 끝내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다.#[54] 그리고 사무장 양모(45세)는 가족에게 "통장에 있는 돈은 애들 학비로 쓰라. 나는 승객을 구하러 가니 전화를 이만 끊겠다."라고 마지막으로 전화하고 학생들 등 승객들을 지키고 빠져나오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다가 끝내 숨졌다.. # 또는 아르바이트에 불과한 불꽃놀이 담당인 김모마저 객실직원이자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함께 목숨을 걸고 수많은 승객들을 구한 업적을 인정받아 둘이 함께 의사자로 지정되었다. 사건초기에는 김모 집에서는 예비며느리가 탄 배가 가라앉았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나중에야 자신의 아들이 알바로 세월호에 탄 것을 알았다고. 이후 이 둘은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즉 객실 직원들은 끝까지 승객들을 구하다가 대부분이 실종되거나 사망하였다. 선실 내에 대기하고 있으라는 방송 역시 이들이 한 것인데 어디 안전한 곳에 숨어서 방송한 것이 아니라 선장 등에게 버려진 채 승객들과 함께 로비에서 벽에 드러누운 채로 최후까지 방송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기적적으로 탈출하였으나 대부분은 결국 승객들과 함께 사망하였다. 때문에 살아남은 4명의 객실 직원들은 같은 직원이지만 선박직 직원들과 달리 아무도 비난하지 않으며, 사망/실종된 객실 직원 중 대부분은 의사자로 지정되었거나 지정될 예정이다. 심지어 아르바이트생들의 부모들조차도 "내 아들은 수영 선수 출신이니 제 몸만 건사하자고 하면 탈출을 못했을 리가 없다. 아들은 끝까지 학생들을 구조하려다가 탈출하지 못한 것이다. 장하다, 내 아들아!" 라고 말할 정도로 전원이 깊은 신뢰를 받고 있다.

여러가지 정황상 일반직(객실) 직원은 배 운항과 관련된 정보를 바로 접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직 객실 직원 14명 중 대부분은 선장, 항해사, 기관사 등 배의 운항을 담당해서 배의 침몰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던 선박직 직원들에게서 같은 회사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언질을 받지 못한 채로 선내에 남아있다가 승객들과 함께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보다 중요한건 객실 직원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상식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고, 선박직 직원들은 상식을 초월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여서, '한번 구원을 받았으면 이후 어떠한 악행을 해도 상관 없다'는 구원파의 교리에 따라 선박직 직원들이 행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찌라시까지도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하지만 이건 어디서 이걸 구원파의 악마적인 교리가 문제라는 식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일부 정치/종교 커뮤니티들의 선동성 주장이고, 선박직 직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 앞에서 도망친 평범한 리더들이었다고 보는 편이 상식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유대인 학살의 나치 범죄에 협력했던 독일군 장교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본 정치철학자 아렌트가 사용하여 유명해진 ‘악(惡)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차용해 선박직 직원들의 행동을 해석하는 의견도 제기되었는데, 이 논리가 매우 유사하며 대부분의 신문에서 아이히만과 선원들을 비교하는 기사를 실었다.

사고 선장의 2004년 신년 인터뷰가 갑자기 화제가 되고 있다. 원본 또한 사고 선장은 2010년에는 OBS, 2012년에는 Channel A에서 직원들의 지시만 따르면 자신의 배가 안전하다고 인터뷰 했다.# 외신들도 이 부분에 대해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해당 기사

사고 당시 세월호에게 먼저 다가간 유조선 두라에이스(2720t)호의 선장은 배가 기울어가는 데도 탈출하려는 승객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위쪽에 있는, 두라에이스호가 찍은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세월호 선장이 탈출명령을 내렸다는 진술이 더더욱 신빙성을 잃었다. #

2014년 4월 28일을 기준으로, 생존한 선박직 선원 15명(선장 포함 항해 7명 + 기관 선원 8명) 전원이 경찰에 의해 구속되었다. 선원들의 처벌 수위와 유사 사례, 각종 논란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논란을 참조.

8. 형사 사건의 진행[편집]

8.1. 1심 판결 (광주 지방 법원)[편집]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4111106280005400_P2.jpg

2014년 11월 11일 광주지방법원에서는 이준석 선장 등 세월호의 선원 15명에 대한 1심 선고공판을 진행하였다. 이 선고공판에서 이준석 선장은 업무상과실 선박매몰죄와 선원법 위반, 해양관리법 위반, 유기치사상 혐의가 인정되어 36년 형을 선고받았다. 당초 논란이 되었던 살인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고 검찰의 사형 구형도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피소된 주요 선원인 박 모 기관사[55]의 경우 세월호에서 빠져 나오는 과정에서 부상당한 조리원들을 방치한 혐의로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가 일부 인정되었다.

일단 가장 논란이 되었던 이준석 선장에 대한 판결에는 세 가지 쟁점이 있다. 먼저, 이준석 선장의 퇴선 명령이 있었는가 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이준석 선장이 퇴선명령을 내리지 아니 하였다고 입증할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보았다. 즉, 퇴선 명령을 했다고 주장하는 이준석 선장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이에 앞서 이준석 선장은 검찰 조사에서는 퇴선 명령을 하지 아니 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했는데, 정작 공판에서는 이러한 진술을 번복하며 퇴선 명령을 했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왜 검찰 조사에서의 진술을 번복하는가를 이준석 선장에게 질문했고, 이에 대해 이준석 선장은 "나 혼자 살아야겠다. 승객을 다 죽여야겠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살아야겠다는 진술은 죄책감에서 자포자기상태로 한 것이다"라고 답변했고, 다른 선원들도 비슷한 취지로 법정에서 진술했다. 이에 대해서 검찰은 '선원들이 입을 맞추었다', '검찰에서의 진술이 다르다'라는 식으로만 대응할 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쉽게 이야기해서 검찰은 이준석 선장의 퇴선 명령 쟁점에 대해서 이준석 선장이 스스로 한 진술에 의존해서 재판을 진행한 것이고, 이에 대한 직접적 증거나 방증 자료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특별히 논란이 되는 쟁점에 대해서 충분한 물질적 증거가 없는 경우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해당 공소 요건은 인정되지 않는다[56].

다음으로 살인죄를 적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일단 재판부는 이준석 선장의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같은 날 선고된 박 모 기관사의 판결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준석 선장이 세월호를 빠져 나오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방치하지 아니하였는가가 문제가 된다. 그런데 여기도 첫번째 쟁점과 마찬가지로 이준석 선장이 세월호를 빠져나오면서 승객을 방치하고 나왔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할 증거가 없으므로[57], 살인죄가 인정되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쟁점, 검찰이 제기한 주요 공소 요건의 입증 실패가 있다. 일단 검찰이 제기한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퇴선 지시가 있었는가', '수난구호법을 적용할 수 있는가', '세월호가 침몰한 항행지점에 사고 위험성이 존재하는가'하는 것이다.

퇴선 지시와 관련된 부분은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으므로 생략한다. 수난구호법 적용은 재판부에서 아예 인정을 하지 않았다. 재판부에서는 수난구호법을 '두 선박이 해양에서 충돌했을 때, 책임이 있는 선박의 선원에게 적용하는 법'이라고 설명하면서, 검찰의 법 적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어서 수난구호법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역시 적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세월호가 침몰한 항행지점에 사고 위험성에 대해서 재판부는 '사고 위험성이 없었으므로 선장이 반드시 조타할 책임이 없다'는 취지로 설명하였다. 즉, 세월호가 항해할 당시 기상이 불순하지 않았고, 다른 선박이 통과하지도 않았다며 그동안 제기되었던 위험수역 문제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재판부는 검찰이 애초에 제기했던 주요 공소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준석 선장에게 적용된 유기치사상죄가 원래는 검찰이 제기한 공소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검찰은 위에서 기술한 사항으로도 이준석 선장에게 사형을 구형하고 살인죄를 이끌어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고 자신하면서 재판을 진행해 왔는데, 이러한 가운데 재판부가 검찰에게 유기치사상죄도 추가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만일 검찰이 이러한 재판부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이준석 선장에게는 무죄가 선고되거나 아주 경미한 처벌만이 이어졌을 수도 있다.

이러한 판결과 관련하여 유가족들과 많은 국민들은 형량이 부족하다, 재판부의 판결이 잘못 되었다고 많은 비판을 가하고 있지만, 법률적으로는 기본적 원칙에 입각한 매우 정련된 판결이라 할 수 있다. 형사 재판은 단순히 피고인이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검찰이 공소 제기한 사실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이고, 그러한 공소 사실에 대해서 입증할 책임은 전적으로 검찰에게 있다. 하지만 검찰은 국민의 법감정, 공분에만 기대어 무리하게 법 적용을 하려했고, 결정적으로 그러한 법 적용을 뒷받침할만한 사실적 증거도 확보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서 법조계에서는 검찰이 '형사 재판은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수사를 바탕으로 한 정교한 법리로 하는 것'이라는 기본적 원칙을 망각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검찰에서는 일단 항소하겠다고 밝혔으나[58], 법조계에서는 형사 사건에서 1심 판결의 결과가 상급심에서 크게 뒤바뀌지 않는 점[59]을 들어 향후 재판이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내다보고 있다.

8.2. 2심 판결(광주 고등 법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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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기다리는 세월호 유가족[60]

2015년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 항소심 결과 이준석 선장의 살인죄가 인정되어 원심 36년형을 파기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 이준석 살인죄 인정... 무기징역 선고. 판결문. 재판장인 서경환 부장판사도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며 양형사유를 설명하는 중간중간 울먹이고 몇 차례 헛기침을 하기도 했다고. 잠시 목이 매이는듯

8.3. 3심 판결 (대법원)[편집]

그리고 2015년 11월 12일, 전원 상고 기각으로 대법원 판결이 나와 2심의 형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이 날은 이준석 선장의 무책임한 행동이 없었더라면 살았었을지도 모르는 많은 단원고 학생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렀을 날이었다. 선고 영상, 판결문

  • 1등 항해사 강원식: 징역 12년

  • 조타수 조준기: 징역 5년[62]

  • 기관장 박기호: 징역 10년


9. 해경 123정 정장, 김경일 경위의 업무상 과실 치사죄, 징역 3년형 판결[편집]

대법원 재판부는 전 '해경 123정장이었던 경위 김경일이 낸 상고심에서, 상고를 기각하고 최종적으로 유죄(업무상 과실 치사죄 인정, 징역 3년)를 확정했다.

대법원은 사고 당일 '해경 123정, 정장 김경일이, 현장에 도착했던 오전 9시 30분에 세월호가 약 45~50도 정도 기울어 있었으며, 선체 상태를 감안하여 승객들이 빨리 퇴선하지 않으면 선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익사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예상할 수 있었다며, 당연히 퇴선 지시를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조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당시에 선체 내부에 있던 승객들과 구조자 사이에 대화가 가능했고, 일부 출입문이 열려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구조를 기다리던 승객들에게 123정이 세월호에 접근해 대공 마이크 등으로 퇴선방송을 실시하거나 승조원이 갑판에 승선해 퇴선을 유도했다면 승객들이 밖으로 나오거나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대법원은 밝혔다. 대법원은 해경 123정이 현장에 도착했던 오전 9시 30분부터 9시 45분까지 약 15분이, 인명을 구조할 수 있었던 ‘골든타임’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세월호가 61도 이상 기울어 내부 진입이 어려워진 9시 46분 이후에 대해서는 해경의 업무상 과실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해경 123정(승무원 13명)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데, 세월호 사고 현장에 도착하기 전은 물론, 도착해서도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았다. 도착하기 전에 9시 3분과 4분에 총3회 교신을 시도한 것이 전부다. 가는 도중과 도착해서도 교신을 시도해야 할 텐데 그러지 않았다. 또한 세월호 안에 있는 승객들의 상황을 살펴야 할 텐데, 123정 승조원 13명 중 단 한 명도 세월호 선내에 진입시켜 상황 파악을 하도록 하거나 하는 행위도 하지 않았다. 이미 구조한 승무원과 승객들에게 다른 승객들의 상황을 질문도 하지 않았다.

해경 123정은 보유하고 있던 고무 보트 하나를 하강시켜, 세월호에 근접시켜서, 기관실 선원과 조타실 선원들을 차례대로 전원 구조한다. 일반 승객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퇴선 지시만 내려서, 사람들이 구명조끼를 입은 상태에서 바다에 뛰어들기만 했어도 주변에 2700t급 유조선 두라에이스호(Doola Ace)가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구조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해경123정 정장 김경일은, 세월호내 승객들에게 탈출 방송을 하지 않았는데도 한 것처럼 상황을 조작했으며, 세월호 선내에 대원들이 진입하지 않았는데도 진입한 것으로, 항적일지 등의 문서를 조작했다. 생존 학생들도 “해경은 선내로 들어오지 않았고 모두 밖에서 쳐다보고 있기만 했으며 배안 상황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고 재판에서 증언했다. 해경이 배에서 탈출하라고 방송했더라면 과반이 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이 생존자들의 일관된 발언이다.

그러나 해경이 구조를 '포기했다' 혹은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명백한 거짓이다. 사건당시 해경 123정[63]은 탑재고무보트를 이용해 79명을 구조했다. 해경 항공대 소속 헬기가 35명을 항공구조했고 어선 두 척과 관공선(어업지도선 등)이 58명을 구조했다. 이는 법원의 공판기록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사망자가 0명 내지 1~2명이 될 수도 있었던 사건이라는 점이다. 해경 123정 승무원들이 세월호 핵심 승무원(선장,항해사,기관장,)이 퇴선해서 세월호의 선박 지휘권이 사실상 무주공산이 된 직후 또는 300명에 이르는 단체여행객의 존재를 알게 된 후에, 직권으로 마이크, SNS, 전화, 문자메시지 등 모든 수단을 활용해 퇴선 명령을 내렸으면 단체여행객 전원 생존이 가능했다. 사고 해역으로 출동하면서 서둘러서 조치를 했으면 단원고 교무실, 경기도교육청 등을 경유해서 단원고등학교 교감과 인솔 교사, 반장, 부반장 등의 연락처를 확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또한 좁은 구역에 모여 있는 단체여행객의 특성상 1~3명에게만 퇴선 지시가 분명하게 전달되었다면, 단체여행객 전부다 바다에 뛰어들어 생존했을 것이다.

즉, 해경이 긴급상황에서 지나치게 무능하게 대처했고, 부실하게 구조 작업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간도 아예 없지도 않았다. 해경이 신고 접수를 받고, 사고해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 09시이고, 사고해역에 도착한 시간이 대략 9시 30분 정도이고, 세월호에서 탈출한 마지막 생존자가 구조된 시간이 10시 24분이다. 구명조끼를 입고 물 위에 뜰 수 있는, 그리고 물 위에 뜬 사람들, 선원실에서 나오는 선원과 선장을 우선 구조하고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다 재차 접근해서 자력으로 탈출한 사람을 배 위에 올린 정도가 해경의 구조 작업이었다. 이런 임무는 사고 즉시 근처에서 달려온 화물선과 어선들도 할 수 있었던 구조 작업이다. 선내 상황 확인과 탈출 유도라는 가장 기본적인 임무조차, 무슨 이유인지 방기했다. 당시 해경은 사고 대처에 대한 전문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10. 각계 반응과 대처[편집]

10.1. 각계의 반응[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반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2. 정부의 대응[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정부 대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3. 실종자 가족들[편집]

실종자 가족들은 굉장히 불안해 하고 흥분해 있는 상황이다. 현장을 방문한 정부 관계자는 사고 초기에 실종자 전원 구조라고 알린 것(#) 등의 정부의 잘못된 정보 제공 등으로 격앙된 실종자 가족에게 뺨을 맞기까지 했으며 정홍원 국무총리는 물 세례도 받기도 했다.#

10.4. 반응의 배경[편집]

10.4.1. 정보 전달 체계의 문제[편집]

이 상황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은 정보 전달 체계 문제였다. 이미 관련 부서에서는 부정된 배를 들어올릴 것이라는 내용을 사고자 가족에게 계획으로 설명하거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산소공급을 했다고 통보했는데 이후 아직 장비가 도착하지 못해 주입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고, 생존 인원과 실종 인원의 숫자가 크게 변동되는가 하면, 선체 내부에 진입했다고 했다가 하지 않았다고 하는 등, 중앙대책본부의 번복이 심각하게 잦다. 과거 해군과 국방부로 명령-보고 체계가 일원화되었던 천안함 피격 당시와 달리 이번 사고에서는 중앙대책본부와 해경이 같은 조직이 아니어서 정보 공유나 전달 체계가 미비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 대해 자세한 문제점들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만 한 사실 역시 문제로 꼽혔다. 사고자 가족들을 안정시키는 것 역시 정부 당국의 역할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중대사안의 번복은 여러모로 그 역할을 다 하지 못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결국 당국은 상황 전달에 혼선이 잦았던 이유로 사고 현장 브리핑 창구가 분산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결국 4월 18일 밤 브리핑 창구를 서부해양경찰청으로 단일화하겠다고 발표했다. # 또한 정홍원 국무총리는 혼선이 있었던 사실에 대해 사과하였다.#

이를 갑작스러운 사고이기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로 볼 수도 있지만 그 대상이 이를 감안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경황이 없고 사소한 소식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사고자 가족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관련 작업 및 통보들이 보다 세심하게 이뤄지지 못한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다. 결국 일련의 사태는 정보 전달 체계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거나 있더라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소리이므로 대참사 앞에서 부실한 정부의 위기 대응 능력이 드러났다는 소리가 된다. 결국 21일 박근혜 대통령은 정부의 초동조치 미흡과 복지부동하는 공무원들에 대해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의 모두발언에서 지적하였다.

10.4.2. 국가위기 관리 매뉴얼 축소화 논란[편집]

국가위기 관리 매뉴얼을 이명박 정부에서 폐기하고 NSC를 축소, 분산시켰다는 지적이 있다. 참여정부 시절 안보와 사회 재난까지 포괄하는 체계적인 위기관리 시스템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청와대 지하벙커에 위기관리 센터를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어느 정도 강력한 위기관리 통제력을 갖고 있냐면 정부의 총 27개 안보, 재난 및 안전 관련 상황 정보가 센터 상황실에 연결되어 있어 대통령 필요시에 언제든 국가의 상황 정보를 실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안보/재난 상황 시 정부 주부부처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총 33개의 위기 유형에 대비한 국가 위기관리 기본지침과 운영 매뉴얼이 있었다. 심지어 27개의 상황정보 중에서 선박 관제 시스템이 있어 500톤급 이상의 선박에 대해 전 세계 어디서든 조난이 발생하더라고 즉각 청와대가 이를 파악할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의 계획과는 반대로, 다중 상황에 대한 일원화된 대응 방안이 실제 상황 발생시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연평도 포격 사태 등 북한의 직접적인 공격 행위가 연속으로 발생하면서 자연스레 정부의 주요 관심사는 안보로 이동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매뉴얼은 이명박 정부는 물론 박근혜정부에 이르기까지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 상황이다. 그러나 정부부처 개편을 하면서 방재청 업무가 안전행정부로 이관이 됐는데 현장 전문성이 부족한 행정직이 지휘 중이라는 의견이 요점이다.# 또한 각 부처별로 재난 관련 부서가 분리되어 있는 등 기존 참여정부가 의도한 일원화된 재난대책 구성과는 차이가 난다는 게 또 하나의 쟁점.# 박근혜정부에선 이명박 정부 시절 폐지한 NSC 사무처를 다시 부활해 상설화# 시켰지만 다원화된 구조 속에서 매뉴얼과 관련조직이 실제 초기대응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고, 사고 발생 3일차인 18일 밤에서야 이런 단일화를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 초기대응에 있어서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매뉴얼은 없어지지도 않았으며, 이명박 정부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다만, 정부가 바뀌면서 매뉴얼을 실행해 줄 주체가 변경 및 축소되어서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참여정부는 포괄적 안보라는 개념 하에 국방뿐만 아니라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사회시설 마비 등에 청와대가 컨트롤타워로서 대비했었지만, 이명박 정부 때 안보라는 개념이 국방으로 좁아졌고, 박근혜정부가 이를 그대로 계승했기에 기존의 매뉴얼이 힘을 쓸 수 없었다고 한다.[64] #

10.4.3. 지나친 관심이 낳은 문제[편집]

그 외에 사고 관련인들에 대한 배려 없이 자극하는 행위도 문제다. 일부 정치인들이 별다른 대책도 없이 재난 지역을 방문하여 사실상의 유세 활동을 벌인 것은 물론, 앞선 총리의 경우도 사고자들의 가족들이 있는 체육관 안에서 언론과 인터뷰를 강행하다 그들을 분노케 했음이 누출 영상에서 드러났다. 생방송 중 욕 먹은 기자 역시 구조가 지연되는 와중에 지난 밤의 상황을 진척 상황이라고 전달하다 욕을 먹었다. 답보 상태에 빠진 현 상황을 전달하는 것과 전날의 사태 추이를 마치 지금 벌어지는 것처럼 전달하는 건 엄연히 다른 것임에도, 진척되지 않는 상황에 답답해하는 피해자들의 가족들을 전혀 배려치 않은 셈이다. 결국 20일 새벽에 실종자 가족들과 유가족들이 직접 청와대로 찾아가서 항의를 하겠다는 소동이 일어났다.

당연하지만 사고자 가족들 외에 일부 여론이 모든 공무원들과 구조팀에 비난을 퍼붓거나 그들에 대한 음모론을 펼치는 것은 도를 넘은 행위임에 분명하다. 사고자 관련인들을 제외하면 이 상황에서 가장 애태우는 것이 바로 구조팀이며 주위 어민들과 함께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하고 카메라 달린 헬멧을 착용하고 기울어진 선체로 올라가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소중한 영상을 촬영했던 사람들 또한 공무원들이다. 실제로 위에서 이야기했듯, 진도, 해남 근처 해역은 예로부터 물살이 거세서 과거 삼별초의 항쟁시에 몽골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몽골군이 곤욕을 치른 곳 이며 이순신 장군이 명량 해전에서 활용한 지형이다. 당시 왜군이 외해를 돌아서 공격하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위험한 수역이다. 때문에 물살이 다소 약해진 현 시점에서도 동력선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수준. 이러한 상황에서 구조팀을 닦달하거나 비난하는 건 그들의 마음만 조급하게 하고 추가 인명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키울 뿐이다. 실제로 천안함 피격사건 때 서해에서 한주호 준위가 순직했던 건 이런 여론의 닦달 때문에 각종 안전 기준을 넘은 상태에서 기를 쓰고 구조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었다.[65] 이 사고로 여론과 천안함 유가족들은 한주호 준위의 유가족에게 사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된다.

5월 6일 결국 일이 터졌다. 민간 잠수사 중 한 명이 기뇌증으로 사망했다.

단원고 학생 이외의 일반인 탑승객에 대한 소홀한 관리 또한 문제다. 세월호 선원 등을 제외한 구조된 일반인 탑승객들은 약 80명 남짓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마저도 퇴원한 50여명의 위치/행방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뉴스 링크를 부탁합니다) 학생들에 비해 나머지 실종.사망자들의 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치료도 자비를 하며 합동분향소에도 없는 등, 그 수가 학생들에 비해 적어서니 묻히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일반 승객들의 대한 뉴스조차 적으며 그나마 있는 것도 묻혔다.

세월호 침몰 당시 구출된 6세 여아의 연고자를 찾는다는 트위터가 올라왔는데(#), 17일에 나오기로는 다행히 친척들과 연락이 되었다고 한다. 이 아이는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이사를 가는 중이었다고 하며, 다른 가족들은 여전히 실종 상태이나 친척들이 아이를 돌보고 있다고 한다.# 24일에 아이 어머니의 시신이 발견됐다. 아버지와 오빠는 아직 실종 상태이다. # 구조 당시 가족 중 7세 오빠가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아이에게 입혀줬다고 하며, 현재 오빠는 실종 상태이다. 태국의 한 네티즌은 Prayforsouthkorea 캠페인에서 이 사연을 그림으로 그려서 올렸다. #[66]

11. 이 사건으로 드러난 사회의 어두운 일면[편집]

사고도 사고지만, 이 사고가 도화선이 되어 한국 사회의 병든 일면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전후상황을 살피지 않고 구조 작업의 진전에 대해 비난하거나, 음모론을 펼쳐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일이 일어났으며, 실제로 SNS를 통해 생존자가 어디에 있다는 허위성 글들이 판을 쳤고, 이 때문에 구조 골든타임이 모두 소모가 되었다. 이 사고의 국민적 관심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려 하는 행위까지 벌어지고, 무엇보다 머리가 돼야할 정부는 7시간30분간 아무 대처도 없는등, 큰 문제가 드러나고 있지만, 이런 것들이 평범해 보일 정도로 여기저기서 사건들이 계속 터져 나오고 있었다.

상세 내용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사건사고를 참조.[67]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이 그 동안 단기간의 고도성장을 추구하면서 윤리 함양/사회안전망 구축에는 매우 미흡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12. 사건의 여파[편집]

이때부터 박근혜정부총체적인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평가가 수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정부가 비난을 받는 사건들이 터지긴 했지만 이런 유형들은 이전에도 여러 번 있거나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지던 부정이어서 '우리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면 화가 나지만 일단 넘어가겠다.'는 것이 시민 여론이었다.

하지만 세월호 건의 경우 내용과 대처, 피해자들의 신분 등 여러모로 볼 때 너무 충격적인 사고가 벌어졌는데도 바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대통령의 모습을 본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다. 더군다나 정부 기관인 해경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누워 있던 여객선엔 아직 희생자들이 살아 있었다. 이후 배가 완전히 침몰하는 과정이 보도를 타면서 국민들은 해경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승객들이 희생되는 모습을 봐야 했다.

역대 재난사고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 못한 대응방식과 수습과정 때문에 박근혜정부에 대한 국민적인 실망과 분노를 안겼고, 이는 이후 지지율 폭락으로 이어지게 된다.[68] 이후 다른 사건들로 인해 박근혜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는 자리가 생길 때마다 세월호는 꼬리표처럼 따라붙게 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18px-Park_Geun-hye_Presidential_Approval_Rating.svg.png [범례]

2014년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이 사건의 초동 대응 실패와 정경유착 등 구조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해양경찰청을 해체할 것을 발표하였다. 해양경찰의 수사, 정보 기능은 경찰청으로 이관되고 구조, 해안 경비 기능은 신설되는 국민안전처로 이관했다. 경찰은 18년 만에 독립했던 해양경찰의 수사와 정보 업무를 흡수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조직이나 관련자들이 해경 때와 같이 그대로 유지되었음은 물론, 당시 해경 본청의 주요 요직들은 줄줄이 승진하는 모습을 보여줘 결국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임이 밝혀졌다.기사

이 사건 이후로 수년이 지나고 정권도 바뀌었지만, 국가 주도의 재난 안전시스템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씁쓸한 의의를 남기기도 했는데 ,이러한 후진국 형 참사를 한번이라도 허용하게 되면 정권이 흔들릴 수 있음을 정치권에 인식 시켜주게 되었다는 것.

12.1. 경제적 영향 논란[편집]

12.1.1. 부정적 영향 주장[편집]

연초 민간소비와 건설투자가 회복되던 가운데 그야 말로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다. 박근혜정부의 지출이 세월호의 사고 수습에 집중되고 있었고 시민사회는 애도의 분위기로 회식이나 야구장의 응원도 자제할 정도였다. 결국 국내 경기가 회복에 대한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2014년 1분기 GDP는 전년대비 3.9%의 성장을 보였으나 2분기는 3.4%로 감소했고 이는 전분기 대비 0.5% 성장에 불과했다. 미국과 일본의 경기가 회복인 시점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사후처리가 정쟁화 되고 정부의 대응이 세월호 유족들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장기화되자 3~4분기까지 지연이 된 것이다. 3, 4분기 GDP 성장률은 각각 3.3%, 2.7%까지 하락하여 연초 기대감과 달리 점차 하락을 보였다. 동기간 유럽미국은 경기가 회복임에도 불구하고 해외 경기에 민감한 한국으로서는 이례적인 저성장을 뜻한다. 통상 국가적인 재난의 경우 빠른 수습과 원만한 해결이 관건이다. 길어질수록 사회구성원의 본업 복귀가 늦어지고 그만큼 경제의 활성화는 늦어지게 된다. 또한 추경을 통해 인위적으로 투자를 늘려야 하나 정부의 세수 부족과 전 정권의 부채부담으로 인해 추경 편성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12.1.2. 부정적 영향 반박[편집]

  • 사건 여파로 인해 경기 침체를 불러왔다는 것에 대해 변명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해당 동영상 강의의 12분경을 보면, 소비자 심리지수는 곧바로 회복되었지만 다시 감소했다고 나온다. 만약 경기침체가 세월호로 인한 것이었다면 소비자심리지수가 아예 내려가서 천천히 회복되어야 하지만, 곧바로 회복되었다가 다시 감소되었다는 것은 세월호로 인한 경기침체는 바로 회복되었지만 다른 요인으로 인해 다시 감소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바로 밑의 메르스 침체로도 반증할 수 있다. 세월호는 정신적인 충격은 있을지언정, 물리적인 충격은 없었지만 메르스의 경우 외출하여 접촉함으로써 전파되는 바이러스가 원인이기 때문에 바깥 활동을 삼가하게 되고 직접적인 충격이 온다. 그랬기 때문에 메르스의 경우에는 소비자 심리지수가 크게 감소하여 6개월에 걸쳐 천천히 회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또한 GDP 성장률 저하를 단순히 정부의 책임으로 돌렸다고 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세월호 침몰사고를 드립하는 것도 근거가 부족하다. 관광을 예로 들었지만 한국관광공사의 월간관광시장동향보고서를 보면, 2014년에 외국인의 국내관광으로 17조~18조를 벌어들였으며, 이전부터 꾸준한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광지식정보시스템 에서의 2014년 통계를 확인해 보면 총 국민여행총량의 국내여행에서 2013년에 비해 여행자 수는 20만 명 증가, 여행 횟수는 400만회 감소, 총 여행 비용은 1조 6천억 원 증가로 나타난다. 개연성으로 생각해봐도 소비심리 위축은 이해가 갈 수 없는 상황이며 이는 통계학으로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13. 의혹[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의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내용이 길어져서 따로 분리하였다.

14. 인양 관련 사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인양 관련 정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7년 3월 22일 인양이 결정ㆍ착수되었다. 31일 현재 목포신항에 도착하였다.

15. 유사 사건·사고[편집]

15.1. 유사 해상 사건·사고[편집]

선박 침몰 사고를 참조. (선박명 기준 ㄱㄴㄷ순)

  • 고창 심원면 거룻배 전복 사고
    1986년 7월 30일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용기리 앞바다에서 29명이 탄 거룻배가 전복된 사고. 이 사고로 김을 따러 바다에 나갔던 용기리 주민 21명이 사망했다. 사고 거룻배는 최대 9~10명까지 탈 수 있는 것이었는데, 최대 정원의 3배에 달하는 인원이 무리하게 탑승한 게 결국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 도나 파즈호 침몰 사고
    세월호처럼 일제(日製) 선박이다. 그리고 선장과 승무원들의 막장 대처로 인해 승객들을 더 구조할 수 있었음에도 사망자가 늘어났다.

  • 둥팡즈싱 호 침몰 사고
    이 사건은 세월호 참사와 달리 생존가능시간이 지난후에는 유족들의 의견은 무시하고 인양을 강행했다. 중국 정부가 세월호 참사를 반면교사로 삼았기 때문이였다.

  • 마할리카 2호 침몰사고

  •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언론의 추악한 행태 및 정부의 무성실한 대응책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 대한민국 영해에서 발생한 역대급 선박 사고라는 점에서 이 사고와 유사점이 많다. 다만, 훼리호의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피난시키다 전원 배 안에서 사망해, 먼저 탈출한 세월호의 대다수 승무원과는 큰 차이가 있다.

  • 연호 침몰 사고
    1963년 1월 18일 전라남도 목포시 허사도 근처 바다에서 과적과 돌풍으로 여객선 연호가 침몰한 사건이다. 이 사고로 무려 140명이 사망하였으며 생존자는 당시 23세이던 서종수씨 단 1명에 불과했다.

  • 코스타 콩코르디아 호 좌초사고
    선장이 승객들을 버리고 먼저 탈출했다는 점에서 이 사고와 유사하다. 이 선장은 사실상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징역 2697년을 구형당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오보이다. 저런 몇백, 몇천년에 이르는 징역형은 영미법계에서나 가능한 것이고 이탈리아는 영미법계 국가가 아니다. 검찰은 26년형을 구형했고, 1심 재판결과 선장은 징역 16년을 선고 받았다.# 세월호 사건과 다른 점은 항만 당국자가 탈출한 선장에게 '배로 돌아가라'고 여러 차례 명령했다는 것과, 사망자가 승객의 1%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 한성호 침몰사고
    1973년 1월 25일(10월 유신 3개월후) 목포한일기선 소속의 한성호가 진도군 지산면 앞바다에서 침몰한 사고로 61명의 승객이 해를 입었다. 원인은 승객과 화물을 초과해서 실었음이 지적되었다. 구명대는 제공되지 않았고, 당시 선장이 아닌 갑판원이 배를 몰았으며 배가 좌초되고 파도가 심해지자 승객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선실 문을 밖에서 잠가버려 피해자가 많았다고 보도되었다.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6380 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선장 김아무개는 승객을 버린채 먼저 탈출을 했다. 또한 이사건은 세월호와 유사하게 당시 어린 학생들(관매초등학교 학생들)이 많이 타고있었다고 한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36525.html세월호 사고와 침몰한 위치와 원인, 이후 정부 대처가 비슷하다는 점 때문인지 국민TV 뉴스K는 8월 29일 '참사의 대물림…1973년 한성호, 세월호와 판박이'라는 기사를 실었고, 국민라디오 '주진우의 현대사 시즌2' 첫회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대본

15.2. 해상사고 외 유사 사고[편집]

아래 사고들은 해상사고는 아니지만 세월호 참사와 유사한 사고이다.

  •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정비결함으로 기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음에도 항공기를 그대로 운행한 일본항공안전불감증, 추락직후 많은 생존자가 있었지만 먼저 출동했던 주일미군 구조대도 거부해 놓고 정작 당국도 미적거리며 구조가 늦어지는 바람에 524명의 탑승자 중 생존자는 겨우 4명에 불과했다. 오죽했으면 관련 다큐멘터리의 방영명이 '늑장대응의 대가'인 사고이다. 해상사고와 항공사고의 차이 만 아니면 굉장히 유사한 사고라고도 볼수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와는 다르게 비행기의 총책임자인 기장과 부기장, 항공기관사가 희망이 없어 보이는 항공기를 끝까지 놓지 않았으며, 절망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조종을 시도해 모든 탑승자들과 비행기를 살리려 처절하게 노력했고, 캐빈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안심시키려 안간힘을 썻으며, 도쿄 관제사들과 주일미군 관제사는 애타게 조종사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했다는 큰 차이가 있다.

  • 런던 그렌펠 타워 화재사고
    화재 초기 당시, 아파트 방송에서 집 안에 가만히 있으십시오. 라고 방송했다. 결국 거의 대부분의 주민들이 새벽시간때와 맞물려서 대피하지 못했고 현재 약 수백명의 사람들이 실종상태이다. 안전 관리 미비와 정부의 잘못된 정책 지시로 인해 발생한 후진국형 인재라는 점과 사고 이후, 정권의 안일한 대처까지 세월호 사고와 놀랍도록 닮아 있으며, 현지 언론에서도 세월호 사고를 인용하고 있다.

15.3. 학생들이 사망했던 비극들[편집]

아래의 사고들은 세월호 사건과 같이 학생들이 집단으로 사망했던 안타까운 사고들이다.

16. 기타[편집]

트위터에서 외국인들도 #PRAY FOR SOUTH KOREA 트위터 메시지들이라는 해시태그를 달면서 실종자의 생환과 사망자에 대한 애도에 동참했다. 사고를 보도한 뉴스에도 많은 해외 네티즌들이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댓글을 달고 있다고 한다.# 덧붙여 해외 웹에서는 사건 사고와 관련된 한국 자료가 영어로 번역되어 퍼지고 있다. 1 2 3


  • 세월호에 승객들이 탑승한 시점부터 마지막 구조와 침몰 때까지의 영상을 종합한 세월호 94분간의 영상 기록. #직링크


  • 2014년 9월 21일, 일본 후지TV의 시사 프로그램 Mr.Sunday는 '생존고교생이 말하는 "기적의 생환" ~한국 세월호 침몰의 진실~'을 방송했는데 이 방송이 올라간 유튜브에 우리말 자막이 덧붙여져 많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직링크[72]


  • 2014년 12월 20일, 미국 뉴욕WCC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있는 오스틴 오레쵸(Austin Orecchio)가 제작한 다큐영상 'Day of the Living Dead', 우리말 자막이 덧붙여졌다.#직링크

  • Eric Benet도 2014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세월호 리본을 달고 추모 공연을 했었다. 관련 영상


  • 히스토리 채널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Engineering disaster' 에피소드 1에서 이 사고를 다루었다.

  • ‘세월호, 그날의 기록' 이라는 책의 159페이지[74]에는 한 학생이 참사 와중에 겨우 해경의 손에 끌어올려지지만 “존나 늦게 올라오네, 씨X. 이 새X 존나 무거워” 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을 들은 학생은 "죄송해요"라고 대답했다는 주장이 있다. # 그리고 구조된 또 다른 학생은 바다에 빠지는 게 무서워 노란색 펜더가 달린 로프를 몸에 감았는데, 해경이 “그거 빨리 놔라, 개새끼야”라고 말했다. 학생이 “안 돼요. 죽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자 해경은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고 주장했다. 결국 구조된 학생은 펜더 밧줄을 풀어야 했다고 한다. #해경레기

  • f(x)의 정규 3집 앨범 타이틀곡 Red Light의 가사 내용이 이 사고를 비판했다는 팬들의 추측이 있었고, SM엔터테인먼트의 이성수 본부장 인터뷰 기사로 사실임이 확인 되었다. 또한 레드벨벳의 미니 2집 앨범 타이틀곡 7월 7일의 가사 및 뮤직비디오가 이 사고를 추모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 버즈의 4집 앨범 Memorize의 수록곡 그림자가 세월호 사건의 비판/추모곡이라고 한다. 그림자는 버즈 멤버들의 자작곡인데 앨범 Memorize를 작업하던 도중 세월호 사건이 터져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버즈의 노래답지 않게 헤비메탈스럽고 음침하다. 앨범은 2014년에 나왔지만 2016년 박근혜의 탄핵이 가결되면서 버즈 2집 Buzz Effect일기가 절묘하게 들어맞는 가사로 재조명 받으면서 전국투어에서 멘트 도중 밝힌 사실이라 몰랐던 이가 대다수이다. 가사 중에 "감추려 했던 차갑게 뻗친 손끝"이 인상적이다.

  • 미국의 한 민간회사가 피해자들 사진으로 추모 우표를 만들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를 두고 국내 네티즌들은 블로그 등에 빠르게 해당 내용을 퍼 나르면서, 4~50여년이나 지난 박정희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와 비교하며 미국이 잘났다느니, 한국이 독재국가라느니 비난을 하는데, 미국에서 나온 그 우표는 누구나 돈을 내고 원하는 아무 사진이나 넣어서 만들 수 있는 나만의 우표 형식이다. 즉 돈만 내면 하다 못해 자신의 얼굴 사진도 넣을 수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미국 우편 당국은 공식적으로 세월호 추모 우표를 발행한 적이 없다. 그리고 발행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발행된 대통령 취임 기념 우표에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도 있다. 그래도 정 그렇게 아니꼽다면 본인이 직접 우리나라 우체국에 가서 나만의 우표에 피해자들 사진을 넣어서 만들면 된다. 잘못된 정보로 여론을 선동하는 몰지각한 일은 지양해야 할 부분이다. 잘못된 여론 선동의 예1, 잘못된 여론 선동의 예2, 잘못된 여론 선동의 예3 참고로 "세월호 피해자 추모 우표"로 알려진 그 우표는 이벤트성이기 때문에 당연히 일반 판매는 안했고, 주문 회사에서 유가족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 그것이 알고싶다 2016년 11월에 이른 바 '골든 타임'에 하라는 구조는 안하고 청와대에 보낼 영상을 찍느라 정신없었다는게 밝혀졌다. 재난시 우선적으로 해야할 것은 선조치 후보고지만 당시 정부관계자는 현장에 출동한 이들에게 집요하게 사진과 영상을 요구했고 그 덕분에 구조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 고민정 아나운서의 남편인 조기영은 당신의 일곱 시간이란 시에서 세월호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내용으로 담았다고 한다. 내용

  • 두 번째 콜드플레이 내한공연에서 잠시 10초간 공연을 중단한 다음 세월호 참사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에게 묵념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 강풀의 만화 브릿지(웹툰)에서 박자기 일행은 한때 백기형과 장세윤을 잃는 사고로 사람들을 구하지 않았었으나, 다시 사람들을 구하게 된 계기가 바로 세월호 사고였다.[75]

  • 여담이지만 세월호 참사로 박근혜정부의 무책임으로 인해 군경소방의 모든 공무원들은 박근혜라면 이를 간다. 군 같은 경우에는 세월호 구조작업하다가 군인 1명이 순직했고, 소방 쪽에서는 이번 사고와 관련이 없는 소방방재청을 해체시킨 데다가 구조헬기가 추락해 5명의 소방관이 순직했고, 경찰은 해양경찰청을 해체했기 때문. 이번 사고로 해체돼 국민안전처로 격하돼 들어간 해양경찰청과 소방방재청은 박근혜의 파면 이후 문재인 정부가 국민안전처를 폐지시키면서 소방방재청은 독립기관이 되었고, 해양경찰청은 원래 있던 해양수산부 산하로 돌아갔다.

  • 단원고 탁구부는 이 사고가 일어나기 전, 제 60회 전국남녀종별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16일에 열릴 예정이었던 준결승전까지 진출했다. 때문에 탁구부 7명 중 2학년 3명은 수학여행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준결승전 당일, 친구들이 탄 배가 침몰했지만 모두 구출되었다는 오보를 받았고, 이를 그대로 믿고 다시 힘을 얻어 결승까지 따낸 단원고 탁구부는 몇 시간 뒤 200명이 넘는 친구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접하게 된다. 단원고 탁구부는 결승에서 승리해 우승을 따냈지만, 메달 수여식 도중 눈물을 감추지 못해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날, 바다가 2018년 4월 12일 개봉했다. 제시된 주요 논점은 AIS데이타 조작설과 앵커 투하 외력설이었으며, 이러한 의심을 불러일으킬만큼 당시 발표과정이 혼란스럽고 이상했음에 많은 공감을 샀다. 하지만 뉴스타파에서 이 내용을 반박하며 검증을 시도했고 그 내용 또한 많은 수긍을 얻었으며, 뉴스타파의 반론 중 일부 역시 일부 시청자의 예리한 재반박에 직면했다. (뉴스타파는 급변침의 원인을 솔레노이드 고착 고장증상인 것으로 분석한다.)

  • 과도한 취재와 관련해, 단원고 생존학생들이 학교에 복귀하면서 낸 성명서의 내용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전문

    "빨리 친구들과 선생님, 부모님을 만나고 싶다는 기대와는 달리 많은 기자들이 우리를 둘러싸 사진을 찍고, 질문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그런 사진을 찍을 수도, 질문에 대답할 상황이 아님을 앎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바빴습니다.
    아직도 기자라는 말만 들어도 공포에 떠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기자들의 카메라 렌즈가 저희에겐 다신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다가왔습니다.
    팽목항으로 이동하여 버스를 타기전까지도 많은 기자들이 사진을 강제로 찍었습니다. 싫다고, 하지말라고 했지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촬영을 감행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카메라 뒤로 보이던 한 기자의 웃는 얼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팽목항에서 진도체육관으로 이동해서도 저희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연속이었습니다. 많은 기자들을 차단하지도 않고 저희들을 방치했습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많은 기자들이 인터뷰를 권유했고 그 역시 친구들에게는 상처로 다가왔습니다.
    친구들의 생사여부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중략) 사고로 인한 많은 기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와전되어 오보되는 기사가 많았습니다. 특정 정치인들이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내용들이 마치 생존자 학생과 가족들이 사고를 어떤 기회로 삼으려는 듯이 기사 내용에 표현되었고 그런 기사를 접한 사람들은 우리 모두를 비난했습니다. 그 비난은 또 다른 상처로 저희들에게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 사고가 일어났던 날 오전부터 사고 해운사인 청해진해운 홈페이지는 접속자 폭주로 일찌감치 일일 트래픽이 초과(웹호스팅은 하루에 쓸 수 있는 데이터 전송량이 호스팅 상품 중류에 따라 정해져 있다.)되었는데, 마침 청해진해운 홈페이지를 호스팅하던 호스팅 업체 팀장은 아침 뉴스에서 이 사고 뉴스를 접하고선 심상찮은 느낌이 들어 청해진해운 홈페이지에 대해서는 일일 트래픽 제한을 풀어버리라고 직원들에게 지시했는데, 홈페이지가 계속 열리자 청해진해운에서 호스팅 업체로 전화를 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홈페이지가 계속 열려 있어 자기네 회사에 전화가 폭주하고 있으니 홈페이지를 막아 달라'고 요청하는 전화를 한 것이다. (정상적인 회사라면 오히려 '홈페이지 접속이 차단되지 않도록 해주세요'라고 요청하는게 정상이다!) 청해진해운의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행위에 격노(...)한 호스팅업체 팀장은 직원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청해진해운 홈페이지는 다운되어서는 안 된다."는 특명을 내렸고, 역시 분노한 직원들도 청해진해운의 거듭된 홈페이지 폐쇄 요구를 씹어버리고 홈페이지가 계속 원활히 열리도록 조치했다. 결국 사고가 발생한 지 1주일만에 청해진해운은 호스팅 서비스 해지 신청을 했는데, 상식 밖의 이 처사에 또 분노한 호스팅 업체 직원들은 서비스 해지 신청 처리를 일부러 지연시켜 해지 신청한 지 1달이 지나서야 호스팅 서비스를 중단시켰다. (물론 추가 과금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2017년 1월 신년 기자 간담회에서 박근혜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연도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자 이 호스팅업체 팀장은 "나와 우리 팀 직원들 모두가 그날 일을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어찌 저 따위의 무책임한 발언을 할 수 있는가!!!" 하며 또다시 격노(...)했다고..


[1] 시신이 확인되지 않은 미수습자이다. 물론 사망했다고 밖에 볼 수 없으나 사망선고를 내리기 위하여서는 심장과 호흡의 정지를 의사가 확인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시신의 인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망선고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민법상 실종자인 것이다. 다만 민법 제27조 제2항에 의하여, 사고 발생 후 1년이 지난 때부터 유족 등이 사실상 사망에 준하는 실종선고를 법원에 청구할 수 있다.[2] 사고 초반 보도에서 전원 구조라는 오보가 있었다.[3] 이전까지 최대의 참사는 1970년, 경서중학교 학생 45명이 사망한 모산 수학여행 참사이다.[4] MB 규제완화가 노후 선박 길터줘[5] 항공이나 대형 선박 등의 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승객들이 교통수단을 지휘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합리적인 일이다. 사고 또는 비상 상황 발생 시 승객들이 따라야 하는 매뉴얼이 일반인 상식에 어긋나는 경우 승객의 단독 행동으로 상황이 더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선박 지휘에 책임이 있는 인물들은 일반적으로 선박을 떠나지 않고 대피와 안전조치를 비롯한 여러 매뉴얼이 잘 진행되도록 감독하고 (특히 항공의 경우에는) 승객이 대피 또는 지시사항 이행을 거부하는 승객들에게 물리력까지 동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승객들이 선장의 지시 사항을 수용한 것은 잘못된 판단이 아니다. 잘못된 지시를 내린 선장 탓이지.[6] 대통령은 7시간 동안 자고 있었고, 그 근처에는 비선실세가 있었다.[7] 선사와 정부 발표간의 인원 혼선이 벌어지고 있다. 이유인 즉, 세월호는 카페리인데 카페리에 승선권을 끊지 않고 트럭 째 탑승하는 화물차와 기사들을 포함하지 않았던 숫자였기 때문. CCTV로 확인된 화물기사는 총 13명.[8] 475명 중에서 2명은 배에 탑승하지 않았다는 게 확인되고, 승선원 명부에는 없지만 그냥 배에 탄 사람들이 3명 확인되었기 때문.[9] 심지어 마지막 링크의 블로그 글은 세월호가 침몰하기 불과 2시간 전에 올려진 글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블로거는 무사했다.[10] 국회의 탄핵 소추안에 세월호 관련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11] 세월호 참사 직후 석연찮은 7시간 30분의 행보와 미용시술 등의 논란은 탄핵 정국에서 박근혜정부의 지지세를 회복하지 못했던 결정적 요인이였다.[12] 아무리 심각한 재난 상황이라도 대통령이 직접 구조활동 등에 참여할 의무가 직접 도출되지는 않으며, 직무의 성실성 같은 개념은 모호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탄핵사유로 직접 인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에서도 비슷한 논지로 판시된 내용이 있었다. 실제로 이것이 탄핵사유로 인정되었다면 앞으로 모든 대통령은 어떤 사고라도 일어나면 직접 구호활동을 하지 않았다며 탄핵될 수 있는 사례를 만들어버리는 셈이므로 정치적 안정성이 심각하게 저해될 가능성도 있었다.[13] 헌법재판소의 다른 판례들을 종합해봤을 때 직무불성실로 탄핵감이 되려면 말 그대로 그 어떤 액션도 안 하고 가만히 손 놓고 있어야 한다. 실제로 박근혜는 이에 준하는 상태로 있었을 거라는 의심이 되지만 세월호 7시간 등에 대한 명확한 정황이 밝혀지지 않았고 어쨌든 세월호 사건이 터진 다음 중대본으로 출석하거나 어떠한 지시를 내린 흔적이 확인되는 현재 상황에서는 직무불성실 등을 문제삼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14] 마루 자체가 ~호 라는 뜻의 일본어이기 때문에, 나미노우에마루는 나미노우에호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나미노우에마루는 3세대 선박이며, 우리가 아는 페리 나미노우에 4세대와 전혀 다른 선박이다. 사족으로 "나미노우에"라는 뜻은 "파도를 넘어"라는 뜻이며 기항지인 나하의 명승지인 나미노우에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15]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명칭이있지만 엄연히 천주교개신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사이비 종교이다.[16] 4대.[17] 2014년 4월 17일 일본 아사히의 보도 내용에 따르면 일본에서 운용시에는 약 800여명이 정원이었다 한다.[18] 참고로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라는 책에선 1분 빠른 8시 49분으로 표기하고 있다.[19] 실제로는 배의 기울기가 20도가 넘어가는 시점부터 사람의 이동은 크게 제한된다고 한다. 20도가 뭐 대수인가 하시는 분들은 이 그림을 보시라. 원본 문서는 이쪽을 참고.[20] 그러나 설령 이런 우려를 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승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고 갑판 위로 올라오라고 지시를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최대한 배 위에서 기다리다가 마지막 순간에 바다에 뛰어들어 생존확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 실제로 타이타닉 침몰 당시에도 구명정에 타지 못한 승객들은 갑판에서 버티다가 최후의 순간에 바다에 뛰어들었다. 물론 당시는 배가 망망대해 한 가운데 있었고 구조용 헬기도 없었기 때문에 바다에 빠진 승객들은 몇 시간동안 기다리다 사망했지만, 세월호의 경우 (구조원들의 삽질을 감안해도) 당연히 이보다 구조가 훨씬 신속히 올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이랬다면 상당수 승객이 살 수 있었다. 최소한 살아남으려는 시도조차 못하고 배 안에 갇혀 비참하게 익사하는 참사는 없었을 것이다.[21] 김수정 양과 같이 탈출을 시도 했으나 물살 때문에 김수정 양은 탈출을 못하고 박 군만이 나왔다.[22] 기관사가 키를 뽑고, 승객을 나몰라라 하고 먼저 탈출한 일[23] 안내방송 담당 직원들은 승객과 떨어진 채 고립된 곳에 있었던 게 아니라 3층 로비에서 일반인 및 일부 학생승객들과 함께 있었다. 배 침몰 상황에 대한 안전교육을 받거나 관련 지식이 있었다면 기울어져 움직이기 힘든 상황을 보고도 대기 명령을 그대로 따르진 않았을 것이다[24] 사고 26시간 전에 포스팅 되었으며 해당 블로그 작성자는 3월 27일에 배를 탔다.[25]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의 인명 피해를 넘어섰고, 파악이 불가능한 무임승차 인원 규모가 많다면 남영호사고와 동급 이상일 수도 있다.[26] 이 생존자는 약 60시간 정도 생존이 가능한 공기가 압축되었던 에어포켓 속에 있었으며, 물이 아니라 매트리스에 올라타 있었으므로 저체온증을 피할 수 있었다. 물을 찰박거리던 손이 목격되어 구출되었다고.[27] 이때 손석희 사장이 눈물을 흘리며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장면이 큰 화제가 되었다.[28] 다만 에어포켓의 존재 가능성을 들어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던 전문가들도 더이상 생존자가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할 정도로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대부분 의견을 바꿨을 때도 JTBC는 아직도 에어포켓과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알파인 이종인 대표와의 인터뷰를 보도하기도 했다.[29] 생존의 333 법칙. 즉 공기 없이 3분, 물 없이 3일, 식량 없이 3주가 지나면 생존이 어렵다. 안타깝게도 공기는 3분, 은 3일, 식량은 3주를 넘긴지 너무 오래되었다. 공기의 경우는 선박 내 침수로 인해 공기가 빠져나가 에어포켓 범위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데다, 에어포켓 부위에 있더라도 호흡에 필요한 산소가 바닥날 것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그나마 물이라도 섭취할 수 있다면 생존 기간이 늘어나지만, 침몰한 선내에서 맑은 이 있는 곳으로 갈 여지가 없다. 바닷물을 마시면 된다는 의견도 있는데, 바닷물은 알다시피 소금물이다. 마시면 되레 탈수가 일어난다.[30] 사망 원인은 기뇌증으로 추정된다 관련기사 http://newstapa.org/10742[31] 그러나 2015년 6월 16일 1년 2개월 간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32] 동영상 내용 중에 갑판 위에 올라와 있는 친구들이 혹시나 바다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내용이 나와 있다. 하지만 정작 갑판 위로 바람 쐬러 나온 학생들 대부분은 구조되어 살아남고 객실에 머무른 자신들은 영영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는 점이 안타까운 대목이다.[33] 사고 다음 날인 2014년 4월 17일에 故 이다운 군의 시신이 처음 수습되었을 때 이 학생으로 신원이 오인된 적이 있었다. 이다운 군의 바지 주머니에서 박영인 군의 학생증이 나와서 신원 파악이 잘못된 것인데 다음 날 이다운 군의 부모님이 진도에 와서 확인한 후에야 신원이 정정되었다.[34] 이때 정차웅 군 부모님께서 진도로 오고 계셨다[35] 영어교사의 TO가 많아 역사교사는 상대적으로 합격이 힘들다고 평가받는다.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에 역사의식이 투철했기에 국사교사가 되고자 하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고 한다.[36] 안산 정부합동분향소에 가보면 실제로 두산 베어스 유니폼이 있었는데 그의 영정사진 밑에 있다. 그 유니폼을 보자 깊은 울음을 터트렸던 빈소객이 있었다고... 2018년 4월 16일 4주년 후로 분향소가 철거되어서 볼 수 없다.[37] 인솔진중 1명은 여행사 직원이었기 때문에 단원고 소속이 아니라 일반인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이 경우 105명이 된다[38] 이 사고로 모든 가족을 잃어버린 가엾은 5세 권지연 양의 아버지와 오빠다.[39] 사실 안산은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니다. 노는 시내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시험기간이 끝나면 늘 중앙역 근처가 안산 중/고등학생들로 붐볐고 때문에 오며가며 어깨라도 한 번쯤 스쳤던 사이이다. 직접적으로 아는 피해자가 없었더라도 임시 분향소에서 틀어주는 영상 화면 속의 얼굴들은 한 번쯤 보았던 얼굴들이었기 때문에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분향을 하러 왔다가 충격에 휩싸여 나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40] 공교롭게도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을 비롯하여 안산지역 97년생들은 안산 평준화 1세대이다.[41] 2014년 현재 화장장의 유품 소각로가 폐쇄된 지 10여년이 지났고 환경 관련 법률로써 개인적인 유품 소각이 금지되어 있어, 오늘날의 유족들은 유품을 일부만(옷가지 위주로) 불법 소각하거나(사찰에서 49제 할때 사찰 자체 소각로에서 태우는 경우 포함) 전문 소각업체에 돈을 주고 위탁하고 나머지 유품은 일반 폐기물로 버려지거나 헌옷수거함에 버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청 차원에서 피해자의 옷가지는 물론이고 대형 유품인 책상의 소각까지도 시가 운영하는 대형 소각시설을 통해 무상으로 소각 처리해준다는 것은 유족한테는 적지 않은 지원이 될 수 있다.[42] 예를 들어 사고수습에 책임이 있는 해경의 해체는 제껴놓더라도 직접관련없는 소방방재청이 독립청에서 신설될 국가안전처 산하 본부로 격하되면서 사고와 직접 무관한 일선 소방관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관피아 문제로 불거지면서 그 해결책으로 5급 고시비율을 50%로 줄이고 민간경력자를 50%선발하겠다고 하여 고시준비생에게는 날벼락으로 돌아왔다[43] 선박, 관청과는 무관한 분야에서도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광역버스 입석금지. 입석을 금지하여 교통사고 시 생존율을 높이자는 것이 취지였긴 하나 결과적으로는 경기도에서 서울로 대중교통을 통해 가는 모든 길은 헬게이트가 열렸고, 자동차전용도로를 이용하던 도시형 버스는 일반도로로 빙 둘러가게 되어 많은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44] 하지만 능력과 경험은 충분했을지라도 책임자로서의 책임감이 마이너스였다 책임감있게 대피방송과 승객들의 탈출을 지시했다면 299명의 사람들이 비참하게 물속에서 사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45] 사건 초기에는 이준석이 바닷물에 젖은 5만 원짜리 2, 3장과 1만 원짜리 10여 장을 치료실 온돌침상에 말리고 있었다가 다른 승무원 1명이 5만 원을 빼앗아가면서 “내가 갖겠다”고 하자 막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어서 정신상태를 의심케 했다. 그러나 수사과정에서 돈을 말린 것은 다른 승무원임이 밝혀 졌다.[46] 구속후 포토존에서 사과를 하던 선장, 1등 항해사와 달리 3등 조타수는 울기만 하느라 인터뷰를 안했다. 이후 언론에 의하면 검찰조사에서 울기만 하느라 조사가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한다[47] 즉 전세계 어디서나 똑같이 3등항해사는 오전8시~낮12시, 2등항해사는 낮 12시~오후4시, 1등항해사조는 오후 4시~오후8시 순으로 근무하며 그 다음은 다시 3등항해사부터 반복된다. 이렇게 되면 1,2등항해사가 가장 어려운 야간항해를 하게 되며 3등항해사는 상대적으로 편한 주간 근무만 2번 하게 된다. 즉 비교적 경험이 적은 3등항해사에 대한 배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 3등항해사는 운명의 8시 44분에 조타수 C와 조를 이루어 배를 운전하게 된다.[48] 일반적인 선박의 운항체계에 대해 설명하자면 조타실은 항해장이 지휘하고 기관실은 기관장이, 객실은 사무장, 기타 잡일은 갑판장이 책임자이다. 이 모든 부서를 관리하는 것이 선장이다. 다만 앞서 말한 항해장과 언급 안한 통신장은 없어지는 추세이다. 대신 1등항해사가 조타실을 관리하며 기관장과 같은 레벨로 취급된다.[49] 다만 그가 초짜 조타수여서 경험이 적은 3등 항해사와의 조합이 잘못됐다는 증언도 발견되는 등 반되대는 기사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데로 가장 경험 많은 조타수 A와 가장 경험이 적은 3등 항해사를 함께 묶는 것이 세계적인 표준이다. 물론 세월호가 평상시에도 한배에 선장이 2명이 있는 상식을 초월한 배라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50] 이후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더 적게 꺾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최종 결과가 나오면 수정 바람[51]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는 45도든 135도든 무리하게 꺾은 게 문제가 아니라 세월호 자체의 복원성이 없었던 게 문제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세월호는 과적 상태인데다 평형수도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에서도 얼마든지 가라앉을 위험성이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군함의 경우 좌현전타, 우현전타가 다반사이지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에 비추어 봐도 그렇고. 그러나 신상철 대표는 천안함 사건에 이어 이번에도 에어포켓을 주장하며 국민들을 상대로 희망고문을 한 전과가 있어서 걸러서 들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유람선은 좌현이든 우현이든 5도까지만 꺾는게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 또한 세월호는 워낙 상태가 안좋아 평상시에는 좌우로 5도씩만 조심 조심 꺾는다는 기사도 있다.[침몰시] 사진, 침몰 후 스캔화면, 인양시 사진에서 모두 달랐다.[53] 2등항해사 오모가 바로 선장의 지시로 초단파무선통신으로 제주 해상교통관제센터에 구조 요청한 사람이다. 승객들의 생명은 안중에 없고 오직 자신이 살기 위해 무전으로 "그게 아니고, 지금 탈출하면 바로 구조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만 외친 전형적인 답정너.[54] 안내데스크에서 승객들에게 모두 탈출하라고 외친 것고 박이고, 모두 배 밖으로 뛰어내리라고 방송 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박모이고, 다친 사람들에게 휴지를 건네주고 편의점 출입문을 잡아주어 탈출을 도와준 것도 박이다. 더군다나 박시영씨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자신의 목숨은 다 포기하고 구조활동을 했던 셈. 사람들는 박지영씨가 한 일을 보고 아직 대한민국에는 희망이 있다라고 말할정도. [55] 실명을 표기해도 되는 경우 실명으로 표기 바람[56] 이는 법정증거주의를 중시하는 한국 사법부의 기조상, 대부분의 형사 및 민사 사건에서도 해당한다. 즉, 어떤 자연인의 증언보다는 물질 증거의 가치를 훨씬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100명의 증인이 어떤 증언을 한다고 해도 그러한 증언들과 배치되는 단 하나의 물적 증거가 나온다면 100명의 증언은 어떠한 효력도 갖지 못한다. 다만, 물적 증거가 전무한 사건이나 일명 뺑소니, 강간 사건 등과 같이 특정인이나 목격자의 증언이 특별히 중요한 경우에는 극히 이례적으로 증언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경우가 있다.[57] 이준석 선장이 탈출하는 장면이 담긴 해경 측 동영상에는 이러한 쟁점을 오히려 정면으로 반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는 이준석 선장이 조타실로 보이는 공간에서 선실이나 선내를 거치지 않고 바로 탈출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살인죄를 구성할 만한 요건을 완전하게 탄핵한다. 실제 재판에서도 해당 증거는 이준석 선장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다.[58] 일단은 검찰에서 항소하겠다고 밝혀서 큰 문제는 없겠으나 만일 검찰이 항소하지 않고 이준석 선장만 항소하는 경우 불익변경금지원칙에 따라 상급심에서는 1심의 형량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할 수 없게 된다.[59] 대법원이 파기한 민간법원 형사사건 비율은 2008∼2012 년 5년 평균 2.8%에 그친다. 2008년 3.9%에 달했으나 추세적으로 낮아져 2011년 2.1%, 2012년 2.3% 등 2% 초반대를 유지하고 있다.[60] 희생자 김동혁 군의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김예원 양[61] 사고 당시 운행을 맡고 있었다.[62] 사고 당시 운행을 맡고 있었다.[63] 당시 별다른 구조장비도 없고, 구조직별경찰관도 승선하지 않았다. 이런 장비나 인원은 한강급 정도는 되어야 보유할 수 있다.[64]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건, 화산 폭발 등의 사건이 터지면 군이 재난구조 작업을 수행한다. 세월호 침몰 사건의 경우에도 관련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해군 구조부대이며, 해경은 관련 자원이 없다.[65] 이전 버전에는 "서해가 더 물살이 약했다"고 하지만, 환경 자체는 더 나빴다. 수온이 더 찬 3월 말의 중부지방 바다였던 데다 수중 시야가 더 나빴고 조수가 심했다. [66] 태국 네티즌들은 비영어권 국가 중에선 이례적으로 뉴스나 사진을 스스로 번역해서 공유하고 있다.[67] 논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서에 개인적인 주장이나 견해를 적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68] 세월호 이후 박근혜의 50% 지지율 선이 무너졌다.[범례] Approve: 지지율
Disapprove: 반(反)지지율
Sinking of Sewol: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Year-end tax adjustment controversy:연말정산 논란
MERS outbreak: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
Defeat in legislative election: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원내정당 지위 획득 실패
Park's confidante scandal: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70] 이 사고가 터지고 2달만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해 또 안타까운 학생들의 목숨을 잃었다.[71] 어학연수를 가던 학생들이 변을 당했다.[72] 달려있는 일본어 댓글들을 번역기로만 돌려봐도 세월호를 애도함과 더불어서 혹여 이 참사에 기뻐할지도 모르는 넷 우익 등의 성향을 지닌 일본인들을 비판하는 내용의 댓글들임을 알 수 있다.[영상끝부분관련참고] 끝에 나오는 노란 리본의 끝이 뾰족해서 '축하'의 의미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노란 리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추모글에 마침표를 찍으면 안 된다'라는 것과 비슷한 도시전설, 한마디로 헛소문이다. 그리고 일베에서 사용했다고 하면서, '역시 일본인은 나쁘다', '이건 조롱의 의미로 넣은 거다'라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거 없다. 순수하게 추모의 의미로 올린 것이니 일본을 싫어하더라도 이 영상에 담긴 뜻을 곡해하지는 말자.[74] 사진 하단에 159페이지라고 표시되어 있다. [75] 작중에 직접 어떤 사고라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배경인 2016년 2월로부터 22개월 전에 있었던 사고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무엇보다 박자기가 펼친 노트에 적힌 날짜는 2014년 4월 16일.[76] 원래부터 성수기에는 B747이 서울-제주 노선에 고정 투입되었었다. 이 사고로 인천 출발 배편이 전멸하여 항공사들이 쾌재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