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딩로딩중

채널 제도

최근 수정 시각: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영국, 세계의 섬 목록

Channel Islands

1. 채널 제도 (영국)
1.1. 개요1.2. 자연1.3. 역사1.4. 정치1.5. 경제1.6. 스포츠
2. 채널 제도 (미국 캘리포니아)

1. 채널 제도 (영국)[편집]

1.1. 개요[편집]

영국판 서해 5도[1]

영국프랑스 사이 바다에 위치하고 있는 영국령 섬. 정확히는 영국 왕실이 소유하는 영토이다. 건지(Guernsey) 섬과 저지 섬(Jersey)을 포함, 올더니(Alderney), 사크(Sark), 험(Hurm), 제투(Jethou), 브레쿠(Brecqhou), 리우(Lihou) 등의 섬을 포함하고 있다. 저지 섬을 제외하고 모두 건지 섬 관할 구역에 속한다.

면적이 작고 인구도 적기에 일반적으로 '채널 제도'라고 뭉뚱그려 이야기하지만, 채널 제도는 행정적으로 저지 행정관 관할구(Bailiwick of Jersey)와 건지 행정관 관할구(Bailiwick of Guernsey)로 나뉘며, 둘은 입법기관도 따로 가지고 있는 별개의 왕실 속령이다.

파일:attachment/guernsey.png

건지 섬의 항구

파일:attachment/jersey.png

저지 섬의 항구

총 면적은 194㎢. 면적의 대부분은 저지(116㎢)와 건지(62㎢)가 차지하는 면적이다. 인구는 2012년 기준 163,857명. 인구밀도가 844.6명/㎢로 탈유럽급으로 높다. 지구 반대편의 어떤 섬과 비슷하다

1.2. 자연[편집]

일년 일조량이 2,000시간이 넘는 따뜻한 기온을 자랑하며 위도에 맞지 않게 아열대 식물들이 자란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에서는 대표적인 피한지(避寒地)로 손꼽힌다.

1.3. 역사[편집]

파일:attachment/mount_orgeuil_castle.png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예를 들어 저지 섬에서 가장 웅장한 명소인 13세기 마운트 오거이 성 (Mount Orgeuil castle)은 청동기 시대 요새의 폐허 위에 지어졌다. 이곳은 섬의 수도 세인트 헬리어(St.Helier)에서 동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바다 건너 프랑스 본토에 있는 노르망디의 일부였지만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정복왕 윌리엄)이 바다를 건너 영국이 정복한 이후 윌리엄의 대를 이은 영국 왕실이 계속해서 가지고 있던 영지였다. 그러나 백년전쟁의 패전으로 영국은 프랑스 본토에 있던 모든 영토를 말아먹었고 노르망디 역시 프랑스가 점령했지만 섬이라는 특징 때문에 이곳은 노르망디의 일부임에도 프랑스가 점령하지 못했다. 결국 이 곳은 영국이 프랑스 내에 가지고 있는 유일한 땅이 되었다.[2], 쉽게 말해서 영국 왕실이 영국 왕실에 오르기 전부터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영지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혁명정부는 영국 국왕이 명목상 가지고 있던 프랑스 국왕 칭호를 폐지할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채널 제도는 프랑스의 고유영토이므로 양도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영국왕의 프랑스 국왕 칭호는 폐지했지만 채널 제도 양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프랑스 혁명정부도 크게 집착은 하지 않아서 영국령으로 남게 되었다.

1.3.1.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점령[편집]

채널 제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유일하게 독일군에 점령된 영국 영토라는 점이다.[3]

1940년 6월 15일, 영국 정부는 채널 제도가 전략적 중요성이 없으니 방어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영국 본토에서는 128km나 떨어져 있었지만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에선 4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이 곳을 지키는 건 득보다 실이 많았다. 반면 독일군에게 채널 제도는 영국과 맞설 최전선이었기 때문에 채널 제도를 점령하면 이곳에 많은 병력을 할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영국 정부는 독일군이 진주하기 2주 전, 채널 제도 주민들에게 영국군이 철수한다고 통보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섬에 남았지만, 제도 가운데 하나인 올더니 섬은 주민 투표를 통해 전부 브리튼 섬으로 피난하기로 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야 돌아왔다. 소설 '독수리는 내리다'에 주민들이 모두 떠나고 독일군만 주둔하고 있는 올더니 섬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1940년 6월말 일요일 아침에 영국군이 모조리 철수해 무주공산이 된 채널 제도 건지 섬에 루프트바페수송기 한 대가 착륙했고, 권총으로 무장한 독일군이 내렸다. 이들은 영국 공군기 3대가 나타나자 곧바로 도주했지만 곧이어 다른 비행기가 착륙해 육군 병력 세 명을 내렸다.

파일:attachment/channel_islands-Germany.jpg

그 중 인솔자인 장교가 영국 경찰에게 자신들이 이 섬을 접수할 것이라 통보했다.

독일군 본대는 이 점령통보 이후 선박을 타고 채널 제도에 투입되었고, 육공군 병력이 혼성되어 주둔했다.

파일:attachment/channel_islands-Germany2.jpg

건지 섬의 세인트 피터 포트 거리를 행진중인 독일 육군 군악대.

채널 제도를 점령한 독일군은 꽤 신사적이긴 했지만 야간 통행금지, 금주령, 영화관에서 나치 선전영화 상영, 해안 방어시설 및 방공시설 건설 등 주민들에게 많은 불편과 불쾌감을 주었다. 나중에 독일군은 주민들이 비둘기를 이용해서 영국 본토에 군사기밀을 유출하고 있다고 의심하며 비둘기를 사육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황당한 포고도 내린다. 주민들은 될 수 있으면 독일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얌전히 지냈다. 독일군이 처음 도착했을 때는 이들이 지역 주민들의 상점에서 많은 물건들을 사들였기 때문에 이들을 환영하기도 했지만, 본토로부터 계속 내다 팔 물자가 공급될 리가 없었으므로 이 특수는 얼마 안 가 끝장났다. 도리어, 전쟁 말기로 갈수록 섬의 생산량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기는 (주둔군 병력이 대부분인)과도한 인구[4]로 인해 식량 부족 문제가 발생했고, 이는 1944년 중반 프랑스 북부의 대부분이 해방되어 물자 수송편이 끊기자 더욱 심해졌다. 다행히 기아를 겪는 수준까지 가진 않았다.

파일:attachment/channel_islands_military_museum.png

APX 시리즈 포탑이 오른쪽에 달려 있다.

영국군의 계산대로 아돌프 히틀러는 채널 제도를 대서양 방벽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요새로 만들기 위해 해안포로 쓸 중포와 2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채널 제도에 투입된 물자와 병력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고, 대서양 방벽의 전체적인 방어태세를 약화하는 데 한 몫했다. 처칠의 계획대로. 심지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은 채널 제도는 탈환할 가치가 없다고 보고 보급선만 끊은 상태로 종전 때까지 방치했다. 결국 채널 제도는 나치가 패망한 직후인 1945년 5월 9일에서야 해방되었다.

해방될 당시 독일군 우편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노획된 편지 일부가 2007년 기증되어 2012년 원 수신자와 연고가 있는 독일의 가정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그 편지들에 성탄절이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 당시 보급이 끊긴 지 오래여서 이미 우편이 상당히 적체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꿀보직. 동부전선으로 갔으면 다 죽었다 그러나 20대의 쌩쌩한 장병들은 누리지 못했다. 전방에 병력이 부족하여, 특히 육군 병력은 전쟁 중후반에 국민척탄병급 중장년 및 예비역들로 대부분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 곳 주변의 작은 섬들 중에 무인도도 있는데, 이곳에도 정찰 목적의 소규모 병력을 배치해 두었다. 문제는 여기 있던 독일군들은 영화 지중해에서처럼 무전기가 고장나고, 상부에서도 배치해 놓은 걸 까먹고 있었기에 전쟁이 끝나고 몇 주가 지난 다음에 비로소 독일이 패했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그걸 알게 된 것도 전쟁이 끝나면서 바다로 배를 몰고 나온 어부가 이 섬에 들렀기 때문이라고.[5]

1.4. 정치[편집]

영국 영토이기는 하지만, 채널 제도의 건지 행정관 관할구(Bailiwick of Guernsey)와 저지 행정관 관할구(Bailiwick of Jersey)는 맨 섬과 마찬가지로 영국 의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 영국 왕실의 영토, 즉 왕실 속령(Crown dependencies)이다. 각 관할구에 독립적인 의회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은 "왕실 평의회 (The Queen in Council)"에 의해서 왕의 비준(Royal Sanction)"에 따라 각 정부에서 법을 성립한다. 이 "왕실속령"(Crown dependencies)에는 독자적인 입법기관, 독자적인 정부가 존재해 독자적인 법을 만들어 운영된다. 영국 정부는 이 영토들의 국제 관계와 방위만을 책임진다.

채널 제도가 왕실 속령이 된 이유는 "잉글랜드"의 영토가 아니라, 영국을 정복한 "노르망디 공公 윌리엄"의 5대조인 노르망디 공국의 창시자 롤로 시대부터 내려온 "노르망디 공(公)의 영토"로서 영국 왕실에 소속된 땅이기 때문이다.

즉 이 지역은 그때부터 계속 상속되어 온 노르망디 공의 영지로서 "영국 왕실"에 속하는 땅이며, 영국 왕실이 가지고 있는 잉글랜드 왕의 영토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오히려 노르망디 공은 프랑스 왕의 신하이므로 넓은 의미에서 프랑스 왕의 영토이다. 즉 잉글랜드에 속하는 땅이 아니므로 잉글랜드 의회의 관할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당연히 노르망디 공작을 칭하고는 있으나[6], 이는 비공식적인 칭호로 채널 제도의 군주에 대한 호칭의 관례라고 할 것이지, 후술하는 1259년의 파리 조약 때문에 법적인 작위는 아니다.[7]

그러나 잉글랜드 밖에서는 잉글랜드령 노르망디로서의 채널 제도의 지위가 인정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1259년 파리 조약으로 인해 잉글랜드 왕실이 프랑스 영토 내의 작위를 아키텐 공작위(가스코뉴 지방을 유지하되, 이 신분으로서는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서의 예의를 다한다는 조건이 붙었다)를 제외하고는 포기했기 때문에, 즉 헨리 3세가 노르망디 공작위의 상실을 인정하였으므로 더 이상 잉글랜드 국왕이 노르망디 공작을 칭하며 채널 제도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단, 이 조약에는 잉글랜드 국왕에게 속한 모든 섬은 그가 아키텐 공작이자 프랑스의 귀족으로서 있는 한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으며, 이전에 맺어진 1217년의 램버스(Lambath) 조약이라든가 당시의 역사적 기록을 통해 볼 때 이후 이 지역은 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잉글랜드 왕에게 속한 땅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이에 관해서는 국제사법재판소의 1953년 판결문에서도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 정부가 채널 제도가 프랑스 고유영토라며 양도할 것을 요구한 적이 있으나 명목상 프랑스 국왕 칭호를 없앤 것과 달리 이건 수백년을 지배해온 영토라서 영국도 씹었고 혁명 정부도 완고하게 나오진 않아 큰 분쟁 없이 그대로 영국 영토로 굳어졌다.

그렇지만 영토 분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이 지역에 위치한 무인도 맹키에(Minquiers)와 에크레오(Écréhous) 섬의 영유권에 관하여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두 섬이 자국 영토인 쇼제(Chausey)섬 관할에 속한다고 주장하였으나, 1953년 국제사법재판소는 두 섬이 영국 영토라고 판결하였다. 그 결과 이 두 섬은 현재 저지 섬 행정관 관할구에서 관할하고 있다.

사크(Sark)섬은 2006년에 보통 선거를 치르기 전까지 봉건제가 유지되던 곳이였다. 그래서 유럽 최후의 봉건 영지로 불렸다. 건지섬 관할이지만 독립적인 법률과 자치권이 있으며, 인구는 600명 정도. 자동차가 없기 때문에 표지판은 km도 mile도 아니고 도보로 몇분 걸린다는 식으로 써있다. 놀랍게도 사크 섬의 주민들은 봉건제는 이 섬에 알맞는 완벽한 제도라면서 봉건제의 철폐를 매우 불만스러워했다. 600명의 주민 중에 165명 만이 봉건제 폐지를 지지했다.

채널 제도의 주민은 영국 본토에 자유로이 거주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이 영국 본토로 이주하더라도 투표권이나 피선거권, 공무담임권 등은 없으며 이를 가지려면 시민권 획득 절차를 밟아야 한다. 물론 외국인이 영국 시민권을 따는 것보다는 엄청나게 쉽다. 영국 본토와는 여권도 따로 나오지만 해외에서는 대체로 영국 시민권자 여권과 같게 취급한다.

유럽 내 해외 영토로서 유럽연합에 소속되어 있는 지브롤터와는 다르게, 같은 왕실 직할령인 맨 섬과 함께 유럽 연합에는 가입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채널 제도 주민은 유럽연합 시민이 아니며 유럽연합 내에서 이동이나 노동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다만 이들도 유럽연합 모든 국가에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므로 솅겐조약에 따른 이동의 자유는 누릴 수 있다.

1.5. 경제[편집]

이렇게 복잡한 관계가 있으므로 EU와의 관계는 무역권에만 국한되어 있다. 관세 관련 법규는 영국에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조건이 적용된다. EU 전체 안에서 사람과 서비스가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권리는 확대 적용되지는 않지만 이곳의 주민들은 영국 안에서는 전통적 권리를 여전히 누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맨 섬과 함께 조세 피난처로 각광 받고 있고 이게 뉴욕 월스트리트의 부상에도 런던의 시티가 아직도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로 남을 수 있었던 강력한 경쟁력 중 하나다. 조세를 회피하고 싶은 법인이나 개인은 채널 섬에 방 한 칸 빌려놓고 채널 자치기구에 본사로 법인 등록을 한다. 그리고 채널제도와 맨 섬은 조세제도가 이런 부유한 사람들에게 매우 유리하게 되어있고 이들을 항상 유혹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각종 세금을 면제받는다. 이런 꼴을 보고 진노한 각 국가의 세무기관들이 징세를 하러와도 채널 제도에 가면 "우린 영국왕의 영토에염 런던으로 가세용"이라고 하고 런던으로 가면 "아니 작은 섬이라도 엄연히 자치지역인데 우리한테 내정간섭 하라는 건가염 ㄷㄷㄷ" 이런 무한루프 뺑뺑이를 치다가 차마 버킹엄궁으로 쳐들어가지 못하고 만에 하나 버킹엄궁에 가봤자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며 발 빼려나 지친 세무기관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본국의 부자들은 유유자적 조세회피를 누린다. 그리고 맨 섬과 채널 제도에 조세회피 목적으로 맡겨진 돈들은 런던 시티의 금융 기관들의 손에 들어가 이런저런 돈을 굴리는 용도로 사용이 된다. 맨 섬과 채널 제도의 기묘한 위치를 런던이 눈감아주고 넘어가는 데는 이런 쏠쏠한 돈놀이 거리가 되는 것도 한몫한다.

1.6. 스포츠[편집]

1990년대 프리미어리그 첼시에서 뛰며 잉글랜드의 1998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으로도 뛴 그레이엄 르 소(Graeme Le Saux)와 사우스햄튼의 원클럽맨, 레전드로 멋진 중거리슛으로 유명세를 날린 매튜 르 티시에(Matthew Le Tissier)가 이 지역 출신이다. 각각 저지 섬, 건지 출신. 둘의 성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인접한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각 섬마다 비공식적인 축구대표팀들이 있다. 이들은 FIFA 국제대회에는 참여할수 없으나(다만 우수 선수가 있다면 영국 4지역의 어느 한 대표팀 선수로 뛸 수 있다), 자체적인 리그가 있고, 전 유럽 곳곳에 있는 속령들이 한 곳에 모여 올림픽 비슷한 대회인 아일랜즈 게임에는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특히 저지와 건지의 경기는 그 역사가 오래된 더비 매치 중 하나로 지금까지 무려 100회 이상 열렸다. 이 곳 지역끼리 하는 축구대회 "무라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만 중단되고 1905년부터 계속 이어진 전통이다.

이름난 레이서도 꽤 배출한것으로 유명하다. 1992년 F1우승자이자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포뮬러 원을 주름잡았었던 나이젤 만셀, 투어링카 챔피언십에서 나름 자리를 돋보였던 앤디 프리얼스(Andy Priaulx)의 출신지이다.

2. 채널 제도 (미국 캘리포니아)[편집]

캘리포니아 주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8개(산타 크루즈, 산타 로사, 산 미구엘, 아나카파, 산타 카탈리나, 산 클레멘테, 산 니콜라스, 산타 바바라)의 섬들. 로스앤젤레스, 산타 바바라, 벤츄라 등 3개의 카운티로 나뉘어 소속되어 있다. 일부 섬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부 섬은 군 기지가 자리하고 있다.

[1] 실제로 한국에 거주하는 영국인들 중 일부는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2] 칼레도 있긴 한데 여기는 백년전쟁 종결 100여 년 후 프랑스가 점령에 성공하므로 패스.[3] 이집트는 공식적으로는 독립국이었고(실상은 영국 식민지에 가까운 괴뢰국이었지만) 독일에게 일시적으로 뺏긴 지역도 황량한 사막 지대라 아무 쓸모도 없었다. 그밖에 이탈리아에게 동아프리카 식민지 일부를 뺏겼지만 금방 되찾았고, 일본에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 반도와 북보르네오, 버마를 뺏겼다.[4] 보통 20,000명 이상이 주둔하였고, 한 때는 40,000명을 넘겼을 정도다...[5]안습한 지경에 처했던 독일군들도 있다. 북극 가까운 대서양스발바르 제도에 파견된 육군 보병 1개 소대였는데, 역시 무전기 고장에 상부에서는 이들에 대해 아웃 오브 안중... 거기다 할당치 식량과 연료가 모두 다 떨어져서 결국 바다표범을 잡아 고기는 식량, 껍질과 지방은 연료로 쓰는 그야말로 안습 그 자체인 극한 생존일지를 전쟁이 끝나고도 8개월 넘게 지속해야만 했다. 이들의 본의 아닌 무인도 생활이 끝날 수 있었던 것은 노르웨이 어부가 섬에 들렀기 때문. 어부에게 항복하고 무장을 모두 넘긴 뒤에 귀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럴 거면 왜 보낸 걸까... 어쨌든 몸 성히 살아남았고 마음의 상처 없이 귀국할 수 있었으니 그들은 운이 좋은 것 아니겠는가.[6] 여왕이 1967년 노르망디에 갔을 때, 현지인들이 "공작부인 만세!"라고 외치자 여왕이 자신은 공작(Duke)이라며 화답했다는 일화가 있다.[7] 이후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노르망디 공작은 프랑스 왕에게 속한 작위로서 유지되었다. 마지막으로 노르망디 공작위를 받았던 사람은 다름아닌 루이 17세. 태어나자마자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