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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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공화국

참여정부

參與政府

시작일

2003년 2월 25일 자정

종료일

2008년 2월 24일 오후 11시 59분

권한정지 시작일

2004년 3월 12일 오후 5시 15분

권한정지 종료일

2004년 5월 14일 오전 10시 28분

대통령

노무현

국무총리

고건이해찬한명숙한덕수

여당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 → 없음[1]


1. 개요2. 국정원리/목표/과제
2.1. 국정원리2.2. 국정목표2.3. 12대 국정과제
3. 외교/통일/국방4. 정치/행정5. 경제
5.1. 부동산 정책
5.1.1. 긍정론5.1.2. 비판론
5.2. 경제성장률5.3. 세계화 정책5.4. 저환율 현상
6. 교육/문화7. 사회/복지/여성8. 주요 사건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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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또는 노무현 정부는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이 이끌었던 정부이다. 제6공화국 4번째 정부로 기간은 2003년 2월 25일부터 2008년 2월 24일까지다. 참고로 인수위에 따르면 '참여정부'란 명칭은 "우리 민주주의를 국민의 '참여'가 일상화되는 참여 민주주의의 단계로 발전시키겠다는 점과 진정한 국민주권, 시민주권의 시대를 열겠다는 의미"에서 정해진 이라고 한다. 실제로 대통령 취임 전인 2003년 1월 14일에 노무현 대통령은 "토론을 국정운영 방법으로 정했으면 한다"라고 하면서 "토론공화국이라 말할 정도로 토론이 일상화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2]

2. 국정원리/목표/과제[편집]

2.1. 국정원리[편집]

  • 원칙과 신뢰

  • 공정과 투명

  • 대화와 타협

  • 분권과 자율

2.2. 국정목표[편집]

  •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

2.3. 12대 국정과제[편집]

  • 외교안보분야

    •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 정치행정분야

    • 부패없는 사회 봉사하는 행정

    •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

    • 참여와 통합의 정치개혁

  • 경제분야

    •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 확립

    •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

    •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

    • 미래를 열어가는 농어촌

  • 사회문화여성분야

    • 참여복지와 삶의 질 향상

    • 교육개혁과 지식문화강국 실현

    • 국민통합과 양성평등의 구현

    •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구축

3. 외교/통일/국방[편집]

  • 외교방침: 동북아 균형자론
    외교방침으로 한국동북아의 균형을 이뤄낸다는 일명 동북아 균형자론을 내세웠다. 참여정부는 자주성을 강조하며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 한국의 운명을 바꾸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던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반성의 인식 위에서 동북아 균형자론이 탄생한 것이라고 밝혔다.[3]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무력이나 힘의 사용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동북아 역내에서 중견 국가의 위상에 맞는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국익을 위해, 변화하는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협력국가가 되기 위해, 과거 우리가 종속적 변수였던 상황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우리의 역할을 찾아 나가자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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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관계 및 대북관계가 한국의 안보정책과도 밀접히 연관된 만큼 자주국방의 원칙을 세워서 미군 의존도를 낮추는 동시에 6자회담 당사국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북한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력했다.

  • 국방방침: 자주국방
    국방개혁 2020을 통해 국방개혁의 '법제화'로 문민화를 목표로 하여 진행 중이고, 장기적으로 증가된 예산을 바탕으로 국방력이 강화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2006년 정부에서는 전시작전권을 환수를 미국에게 요구하여, 미국은 3년안에 한반도 유사시 한국군에게 이양하도록 하기로 했다. 병역제도 개선안으로는 2014년까지 군 복무 기간 6개월을 단축하고 여성들의 사회복무도 가능하게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4. 정치/행정[편집]

  • 전자정부 구축

  • 권위주의적[5] 정치문화 극복
    평검사들과의 대화[6] 및 검찰권 독립에 대한 의지(혹은 포기), 당권 포기 등 기존 대통령에게 수족과 같은 권력 기능에 대한 통제를 스스로 포기하면서 권위적 정치문화의 극복(혹은 청산)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탈권위주의적 대통령을 내세웠으며, 이로 인해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금기시되었던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 심지어 폄하할 수 있는 상황에 일조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통령을 욕함으로써 주권자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라고 발언하며[7] 사회저변의 군부잔재, 3김 시대 이후의 권위주의적 정치문화를 바꾸는 것을 시대정신으로 삼았다.

  • 지방 분권
    참여정부의 국정 핵심 과제 중 하나로 국가 균형 발전을 위해서 지방 분권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참여정부는 수도권 집중에 따른 폐해를 막기 위해선 국가균형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동안의 국가균형발전 계획이 수도권 집중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중앙 정부를 지방으로 이전하는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균형발전특별법,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세종시 건설), 지방분권특별법으로 국토균형발전 3대 특별법을 제정하였다. 이 외에도 여러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에 따른 혁신도시 계획을 수립하였다.

  • 4대 개혁 입법
    탄핵 역풍 속에서 원내 과반수를 달성한 열린우리당은 2004년 17대 국회 첫 정기회의에서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의 4개 법안을 개혁 대상으로 지목하였다. 이러한 '4대 개혁입법' 논란으로 여야는 2004년 첫 국회부터 파행을 거듭했다. 한나라당은 이를 '4대 국론 분열법(4대 악법)' 으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결과적으로 4대 개혁 입법은 여야간에 적당히 타협되어 '누더기 법' 으로 전락했다. 특히 이후 계속해서 벌어진 때문에 이 때 사학법 개혁을 제대로 했었어야 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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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개혁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정치개혁이 이뤄졌다. 여야 모두 개혁 경쟁을 펼치고 있었으므로 쉽게 수용되었다. 먼저 선거법 개정을 통해 비례대표제와 선거공영제가 자리잡았다. 기존의 전국구 의원은 지역구 당선수에 비례하여 배정하였으나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 이후 별도의 정당투표를 하는 것으로 개정되었다.[8] 이를 통해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원내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정치자금법 개정을 통해 정당후원회가 폐지되고[9] 법인이나 단체의 정치자금 기부가 금지되었다. 또한 개인의 기부금 한도가 정해졌다. 마지막으로 정당법을 개정하여 정당의 지구당 제도가 폐지되는 등[10] 전반적인 정당 구조를 변경시켰다. 이들 개혁이 2004년에 이뤄졌다 하여 이후 정치 체제를 소위 '2004년 체제'로 부르는 정치학자들도 있다. 다만, 이렇게 부르는 학자들의 경우는 2004년 체제에 대해 정당 정치의 근간을 흔들어 풀뿌리 민주주의를 교란시킨 요소가 많다는 평을 내리기도 한다.

  • 인사개혁
    2003년 4월 노무현 대통령 임기 첫 해에 인사정책이 국무회의에 보고되면서 실체화되었다. 공정성과 전문성에 기초한 참여형 인사시스템을 지향함에 있어, 인력계획, 임용관리, 인력개발, 복무관리 등, 총 4개의 영역을 포함한 10대 아젠다를 확정지었다. 인사개혁의 목표는 ‘자율과 책임에 기초한 인사시스템’, ‘투명하고 공정한 인사운영’, ‘공무원과 함께하는 인사관리’, ‘전문성과 역량을 강화하는 인사제도’ 등의 네 가지로 혁신이란 키워드를 내세웠다. 국가기록원 참고. 요약하자면, 체계화된 인사시스템을 통해 정책방향 설정과 결정의 투명화를 원칙을 둠으로서, 사실상 정실인사를 차단하려는 노력을 보였다.[11] 또, 조직의 기능화와 실무화를 요구하였다. 즉, 비서는 어디까지나 비서일뿐이라는 것. 참여정부는 인사로 승부할 것이라는 문희상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12]의 발언은 인사정책을 정부가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13]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리 관련 말썽 일으킨 인물들도 많았고, 코드인사 문제는 보수층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되었기 때문에[14] 실제 인사 결과는 무조건 잘 되었다고 보기엔 관점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인사 청문회 대상자들에 한정해서 볼 경우 도덕성 문제에서 위장전입만으로도 낙마하던 이 시절이 이후 정권들과 비교되는 것은 사실.

5. 경제[편집]

참여정부의 경제 정책은 한국내 보수, 진보 양측으로부터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보수 진영은 그의 경제 정책이 '반시장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는 반기업 정서로 이어지고 투자를 위축시켜 결국 경기 침체로 이어진다는 프레임 공세를 펼쳤다. 그리고 진보 진영은 노무현 대통령을 신자유주의자로 몰아붙이며 "친 기업적, 반 노동자적 경제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애초 참여정부가 내세운 사회자유주의가 제3의 길과 비슷한 짬뽕된 개념이긴 하다. 한편, 친노동자적이라는 지적에 대하여 노무현 대통령 본인은 재벌 총수와의 회동에서,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을 친노동자 정책이라고 말하면 노동자들이 화낸다"면서 "제가 전경련에 입회도 안했지만, 전경련 회원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또 다른 강연에선 자신을 좌파에선 신자유주의자, 우파에선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한다며 그럼 '좌파 신자유주의자' 쯤 되는가보다라고 본인을 풍자하기도 했다.[15]

5.1. 부동산 정책[편집]

5.1.1. 긍정론[편집]

4가지 원칙[16]을 실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켰다는 평이다. 정부 산하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사 특별기획팀이 전문가 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설문조사에 따르면 특히 "부동산 시장의 투명성과 조세형평성 제고 및 서민 주거복지 확충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다.[17]

실거래가 신고제등기부 기재 도입은 옛부터 내려오던 이중 계약서 관행을 근절시켰다는 점에서 금융실명제에 버금가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종합부동산세,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 등도 부유층의 반발을 이겨내고 불로소득 환수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받았고, 국민임대주택 건설, 다가구매입임대 실시, 비축용 장기임대주택 건설, 임차가구 지원 등은 최저주거기준 미달가구가 크게 감소하는 등 이상적일 뿐 아니라 실효성 또한 갖추고 있었던 대책으로 여겨진다. 또한 투기억제와 공급확대라는 일관된 정책을 임기 내내 밀어붙였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이런 법률적인 규제는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나타나기 힘들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기에 당시의 투기 붐을 억제하는데는 실패하였으나, 세월이 흘러선 어느정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다만, 누더기가 되었다고 평가받았던 종합부동산세의 경우는 차후 헌법재판소에서 위헌결정을 받고 폐지된 이후, 재개정을 통해 이전대로 개별과제로 전환되었다. 위헌 결정으로 인해 사실상 참여정부식 종부세는 유명무실해졌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 종부세를 다시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참여정부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부동산 정책의 핵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가격 안정화를 이루어냈다는 데에 있다. 실제 2003~2006년 세계 부동산 시장은 호황에 힘입어 어마어마하게 팽창하였다. 이 기간 동안 덴마크의 부동산 가격은 60%가 넘게 증가하였으며 프랑스, 스페인, 홍콩은 약 50%, 미국의 부동산은 약 40%, 스웨덴, 노르웨이, 아일랜드는 약 35%, 영국, 이탈리아, 핀란드는 약 25% 상승하였다. -14%를 기록한 일본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들의 부동산 가격은 폭등하던 시절이었으며 이는 결국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한국은 이 기간 24% 정도 상승했는데[18] 참여정부는 다양한 억제책을 통해서 영국, 이탈리아, 핀란드 수준으로 부동산을 잡으며 한국이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를 빗겨나가는 데 어느정도 기여를 했다. 참여정부 때 만든 LTV와 DTI 등 금융 수단을 동원한 부동산 규제책은 이후의 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와 같은 위기를 대비하는데는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부동산 대책으로 인해 투기 심리가 위축되면서 시중의 투기자금들이 대부분 주식 시장으로 몰렸고, 이는 종합주가지수와 코스닥 지수의 폭등으로 직결되어 기업의 자금 운용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참여정부 초기 당시 금융시장은 국제금리 하락 흐름에 따라 금리 인하 압력을 크게 받고 있었고 기업 설비투자는 부진하며 안전자산인 주택담보대출 경쟁으로 자금이 흘러들어가던 실정이었다.

부동산 대책에 정권의 명운을 걸겠다고 공언하며 취임 초부터 부동산 대책을 내놓기도 했었다.

2003년 5월 23일: 5.23 주택가격 안정대책 발표.
2003년 10월 29일: 10.29 부동산 대책 발표.
2005년 2월 17일: 건설교통부 판교 투기방지대책 발표.
2005년 5월 4일: 재정경제부 5.4 부동산 대책 발표.
2005년 6월 30일: 부동산중개업법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2005년 8월 31일: 8.31 부동산 대책 발표.
2006년 3월 30일: 3.30 부동산종합대책 발표(재건축 개발이익 환수가 뼈대).
2006년 11월 15일: 11.15 부동산시장 안정화방안 발표.
2007년 1월 11일: 1.11 부동산 대책 발표.

5.1.2. 비판론[편집]

물가상승률이 경제성장률을 뛰어넘던 1970년대를[19] 지나 안정을 되찾던 땅값은 버블 경제 속에서 급등하던 1980년대말~1990년대초를 제외하곤 안정세에 접어들면서, 90년대초 이후부턴 물가상승에도 불구하고 10년간 큰 변동없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후기쯤부터 상승하기 시작한 아파트값은 참여정부 5년간 폭등한다. 즉, 상기한 각종 규제 정책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를 곳은 꾸준히 오른 것.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물론 반론측에선 그나마 규제를 했으니 저정도라도 잡았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당시 더 치솟던(...) 타 국가 대비로 보면 일견 맞는 말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오른건 사실이고 특히 서울의 강남, 강북간 집값이 크게 벌어지면서 IMF 이후 심화되던 양극화 현상이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된다. 소위 좌파정권에서 신자유주의로 인한 양극화 문제가 대두되는 아이러니가 빚어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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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마이뉴스 - 서브프라임 뺨치는 서울 아파트값 폭등

투기과열지구, 투기지역, 조정대상지역 등 수많은 대책을 쏟아냈으나 부동산 시장을 전혀 잡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히 비판받아야 한다.

게다가 참여정부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무시한채 공급을 억제하는 정책을 잇달아 펼치면서 오히려 아파트값 폭등을 부채질하는 것 아니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건설경기 활성화와 부동산값 안정을 놓고 정책 혼선이 빚어지면서 투기 현상이 빚어졌다는 주장도 있으며, 검단 파주의 신도시 건설 같은 주택공급 계획에 대해서 김영봉 교수는 한국경제에 글을 기고하면서 이로 인해 강남 집값이 오히려 올라갈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이재웅 교수는 정부가 가진거라곤 집 한채 뿐인 평범한 봉급 생활자나 은퇴한 고령자들의 불만조차도 그저 투기꾼들의 볼멘 소리 정도로 매도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가격은 시장에서 결정하는 것인데 참여정부는 무리하게 가격을 통제하려 한다며 정부가 추진한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 등은 시장경제 원리를 무시한 조치라고 주장했다.[20]

여담으로 참여정부 시기 부동산값을 잡기 위해 진지하게 논의되었던 정책 중 하나가 건설회사 CEO 출신이었던 한나라당 김양수 의원이 추진한 분양원가공개제도였는데,[21] 김근태 장관이 끝장토론을 하자고 제의할 정도로 당시엔 이슈거리였으나, 결국 시장원리에 위배된다 등의 이유로 무산된 바 있었다. 다만 이후 일부 투기 지역에선 부분 시행되기도 한다.

썰전 231화에서 유시민 전 장관은 참여정부 때 부동산 시장이 과열됐지만 부동산 대책은 집값을 못 잡았다고 평가했다.

5.2. 경제성장률[편집]

참고로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이 통계는 기관마다 발표 시점마다 엇갈리는 경향이 있다. 추정치, 전망치 등을 남발하는 추측성 기사들은 언급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같은 기관이라도 이후 수치가 바뀌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어 이전엔 참여정부 당시 평균 경제성장률이 4.3%였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개편된 한국은행 자료 기준 참여정부 평균 경제성장률은 4.48%다.[22] 당연한 말이지만 후자가 더 양질의 자료다. 그러므로 다른 정권도 마찬가지지만 통계 수치를 볼땐 원본이 없는 한 (사실 있어도) 해석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여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4.48%는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 공약으로 제시했던 '임기 중 7% 성장'엔 못미치는 수치였지만[23] OECD 국가들 중에선 최고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한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OECD 평균 성장률과 비교해볼 경우 참여정부의 평균 경제 성장률은 OECD 평균 성장률보다 뒤진 적이 한번도 없다.[24] 실제 거시경제 지표상 참여정부의 성적은 수출이나 부채, 외환 보유량 등에서 좋으면 좋았지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실 당시엔 경제성장률이 낮다고 공격받던 참여정부가 이후 일각에서 재평가받는 또다른 이면엔, 그 공격의 주체였던 당시 보수세력들이 큰 소리치며 집권했지만[25]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경제 성장률이 되레 둔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반론측에선 이런 저성장률이 이명박 정부 초 터진 2008년 세계금융위기 같은 참사가 벌어졌기 때문이고, 오히려 한국은 금융 위기를 훌륭히 극복한 나라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고 역설한다.[26] 박근혜 정부야 딱히 할 말 없지만. 또 지니 계수나 임금 불평등, 소득 배율로 비교한 계층 간 소득 격차 같은 지표의 경우 이명박, 박근혜 정부나 참여정부나 별반 큰 차이는 없기 때문에 양극화 해소엔 매한가지였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이전 정부들도 다 변명거리는 있다. 소득 격차의 경우 IMF 위기 극복을 위해 시행되었던 신자유주의적 즉 우파 성향의 정책 유지로 인한 후유증이라고 볼 수 있고, MB정부 글로벌 금융 위기 극복의 경우 참여정부 당시 경제성장률 좀 깎이는 것 감수하고서라도 부동산 시장 규제를 통해 거품 생성을 억제했기 때문에 도움을 줬다고 평할 수 있다. 실제 부동산 시장 과열을 놔두었더라면 당시엔 경제성장률이 반짝 높아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결국 그 덕을 본 미국이나 유럽은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터지자 바로 경제에 직격탄을 맞았다. 물론 이명박 정부의 금융 위기 극복은 고환율 상황을 역이용한 정부와 한미 통화 스와프로 인한 외화 유동성 위기 해소, 기업들의 수출 지향 노력 등이 겹쳐진 것이라 참여정부의 부동산 대책만으로 위기를 넘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금융위기 역시 큰 위기긴 했지만, 서구권에 더 심각한 타격을 줬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엔 IMF 위기만큼의 영향을 주진 못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사람이 행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경제성장을 하는거지 경제성장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순 없을 뿐더러, 경제성장률만으로 경제 성과를 판단하는 것부터가 오류라는 지적도 많지만[27] 여하튼 경제성장에 대한 부분은 각자 알아서 판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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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시절 국민소득 수준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1달러당 1000원 미만인 저환율로 인해 상대적으로 해외 물가가 저렴해지고,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처음 1인당 GDP 2만달러를 달성했고, 코스피 지수도 처음 2천을 돌파하면서 웰빙이란 단어가 유행하기도 했다. 다만 한편으론 이런 저환율 정책으로 인해 수출산업엔 악영향을 끼쳤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물론 이에 대한 이견도 있는데 자세한건 후술된 저환율 현상 단락 참조.

5.3. 세계화 정책[편집]

아시아에서 최초로 미국과 역대 최대규모의 자유무역협정을 계획하였으며, 이명박 정부 때 체결되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다국적 FTA 전략은 지지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 시기 만들어진 것이다.[28] 이렇게 지지세력과 갈등을 겪으면서까지 결국 타결한 한미 FTA는 여러 논란을 낳았지만 지금까진 비교적 성공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미국 외에도 유럽연합(EU), 캐나다 등과 동시다발적 FTA를 추진하는 등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통해 10년 후를 대비했다는 평가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에서 '부산로드맵(Busan Roadmap)'이 합의되었다.

참여정부의 세계화 전략은 또 다른 차원에서 의미가 있었다. 경제적 논리 이외에 기존의 정치세력으로 국가 개혁을 이룰수 없으므로 시장 원리를 도입하여 구조 개혁을 이룬다는 비전이 있었다. 세계화 정책으로서 국내의 폐쇄적이고 지체된 경제, 사회 구조를 개방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러한 비전이 한국은 자력으로 개혁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외세를 유입하려는 것 아니냔 자조적 비판의 목소리가 일부 나오기도 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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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무역수지 및 경상수지 부문에서 김대중 정부 때부터 흑자를 기록한 것을 5년 연속 이어갔고(경상수지 연평균 132억7천300만 달러 흑자), 수출 실적도 기존 역대 정권 중에 최고를 기록했다. 그리고 국민의정부 당시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으로 돌아선 이래 참여정부도 5년 동안 순채권국을 기록하였다.

5.4. 저환율 현상[편집]

참여정부 때는 원화가 급격하게 절상되었는데 2003년에 정부 출범 당시에 1달러에 1,192.6원으로 시작해 줄곧 환율이 인하되어 2005년 말에 1달러 당 1,000원 선이 붕괴되며 2006년 평균 원/달러 환율은 1달러에 929.80원을 기록했고 2007년에는 그보다 약간 높은 936.10원을 기록했다. 자료 참조. 특히 2007년 10월 31일에는 한때 환율이 899.60₩/USD까지 떨어진 적이 있었다.# 아마 2006~2007년은 유일하게 OECD 가맹국들 중 달러 당 환율이 네 자리 수를 기록하는 나라가 단 하나도 없었던 시기였을 것이다.[30]

게다가 2005년 말부터 정권이 끝나는 2008년 2월까진 환율이 단 1번도 1,000원을 넘지 않아서 이 시기엔 해외여행이 급증했다. 특히 이때 원/엔 환율이 100엔에 750원 정도밖에 안 해서 일본 물가가 처음으로 한국 물가보다 저렴해졌기 때문에[31] 일본 여행이 급증했고 일본으로 쇼핑 가는 게 유행하기도 했다.[32] 웰빙이란 단어가 괜히 유행한게 아닌 것.

유학생 가정들도 크게 재미를 봤다. 예를 들어 미국으로 유학 간 자녀에게 학비로 4,000달러를 송금하는 가정이 있다면 과거 국민의 정부 시절엔 1달러 당 1,200원을 넘는 고환율로 인해 500만원 내외로 송금해줘야 했는데 환율이 뚝 떨어져서 370~380만원만 보내줘도 됐기 때문이다. 무려 120~130만원의 이득을 본 셈이니 나쁘지만은 않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저환율 덕택에 노무현 대통령이 내세운 공약인 '1인당 GDP 2만 불 시대'를 본인 임기에 달성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2007년에 환율이 1년 내내 900원대에 머무는 바람에 눈에 띄는 국민 소득의 변동이 없었어도 그 해에 1인당 GDP가 2만 달러를 돌파하게 되었다. 또 이런 저환율 효과와 성장 정책이 겹쳐지면서 한국은 참여정부 시기 대만을 1인당 GDP로 최초 추월하게 된다.

허나 서민들이 이득을 본 것과 달리 수출 기업엔 타격이 왔다. 위 단락만 보면 이 시절이 마냥 좋았던 것처럼 써놨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항상 낙원이었던 건 아니었다. 환율이 세 자리 수에 머물고 한 때 800원대까지 떨어지는 일이 발생하자, 당시 수출 업계엔 난리가 났었다.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특성상 수출 불황은 곧 경기 침체나 다름 없었고 이 사실은 보수 언론과 보수 정당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고 종국에는 정권을 뺏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허나 뒤이어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주구장창 고환율 노래를 불렀던 강만수가 수출 동력을 살린다며 2008년 3월에 다시 환율을 4자리 수로 덜컥 올려버렸다. 그러자 원자재 가격이 미친 듯이 상승하여 도리어 긁어 부스럼만 만들었고 뒤늦게 환율을 낮춘다고 달러를 쏟아부었으나 전혀 효과가 없이 도리어 참여정부 시절에 쌓아두었던 막대한 외화만 날려먹었다.

사실 환율이라는 건 시장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고, 원화가 강세를 띄는 건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생길 수밖에 없는 과정이다. 사람의 신체가 성장하면 옷도 그 신체에 걸맞게 입어야 하듯이 나라의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통화 가치도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걸 수출 동력을 살리겠다고 억지로 통화 가치를 절하시키면 뒤탈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당시 강만수 장관이 한 일은 수출 기업 몇 개 살리자고 서민들 다 죽인 꼴이고, 되레 시장의 흐름과 경제 성장의 흐름을 역행하는 행동이었다는 비판이 일각에서 나온 이유.

오히려 훗날 적정환율은 참여정부 때의 환율보다 더 낮았어야 했다는 게 드러나면서 이명박 정부는 더 혹평을 받게 되었다.

6. 교육/문화[편집]

수능 등급제법학전문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을 시행하며 다양한 찬반논란을 낳았다.

참여정부 당시 언론자유지수는 양호한 편으로 아시아에선 최상위 수준을 유지했고 2002년 이후 자료에서 국내 최고 순위(31위)를 기록했다. 참고로 2016년의 언론자유지수는 70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을 지속하였다.

7. 사회/복지/여성[편집]

성매매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장기체류 외국인 지문 날인 제도가 폐지되었다.[33]

사스, 조류 독감 등이 퍼졌을 당시, 역병에 대한 정부의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주고 그것을 구체화시켰다.

IT산업의 발달과 함께 정보화 시대의 대중화가 사회 전반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8. 주요 사건[편집]

8.1. 2003년[편집]

8.2. 2004년[편집]

8.3. 2005년[편집]

8.4. 2006년[편집]

8.5. 2007년[편집]

8.6. 2008년[편집]

9. 관련 문서[편집]

[1] 대통합민주신당이 사실상 여당의 역할을 했다만, 대선을 앞두고 있던 상황이었고, 당 주류로 부상한 상당수의 당내 보수파 계열이 노무현 대통령과 거리를 두었다.[2] 토론 역시도 사람들이 참여해야 이루어진다는 걸 생각해보자.[3] 이에 대해 당시 보수진영에서 일부는 자학사관 혹은 허울좋은 균형자론이라는 비판이 나왔고, 진보진영에서 일부는 개혁정권이 오히려 보수가치에 가까운 자주성에 더 집착하는거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지만, 동의 여부를 떠나 참여정부가 그렇게 인식했다는 것이다.[4] 그러나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현실적인 문제로 인하여 한반도균형자론은 실제로 큰 효과는 없었다.[5] 참고로 '권위'와 '권위주의'라는 말은 엄연히 다르다. 당장 용례만 살펴봐도 그러하다. ex)이 사람은 학계에서 '권위'가 있다. VS 이 사람은 성격이 '권위주의'적이다. 쉽게 말해 꼰대[6]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라는 발언으로 유명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위/서열 문화에 젖어있던 검찰 개혁을 추진하면서 젊은 평검사들의 지지를 기대하고 이런 자릴 마련했으나, 이 자리에서 젊은 검사들은 오히려 조직논리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고, 이에 실망한 노무현 대통령과 토론이 이어지다 한 검사가 대통령의 과거 청탁의혹을 제기하자 이를 부인하면서 저 발언을 한 것이다.[7] 대선후보 시절 당시에는 유세장에서 한 시민이 던진 날계란을 정통으로 얼굴에 맞았으나, "정치인이 계란도 맞고 해야 국민들 화가 풀린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8] 지지후보는 A 정당이지만, 막상 지지하는 정당은 B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택권을 확장시켜준 셈이다.[9] 이 유탄을 가장 크게 맞은 정당은 의외로 민주노동당이었다. 정치자금법 개정 시점에서 다른 당들의 정당 후원금을 모두 합쳐도 10억이 안 되었는데, 민노당으로 들어온 정당 후원금이 55억이었기 때문.[10] 지구당은, 당 지역위원회나 당협위원회로 승계되었다.[11] ▲국민인사제안제도 ▲5단계 선정방식 ▲다면평가제 실시 ▲개방형 직위 공개채용(134개 지위) ▲정부산하기관 임원 공개모집 ▲인사 로드맵 제시 등이 그 실험이다. 인용 출저.[12] 現 국회의장.[13] 그도 그럴 것이 인사 선택권은 권력을 야기하는 힘의 원천이자, 대통령의 '다 주고 남은 마지막 권력'으로, 이는 어느 정부에게나 해당한다. YS-DJ의 인사정책을 교훈삼아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당시 기자들은 해석했다.[14] 이에 대해 당시 이해찬 총리는 오히려 정권이 자기들 성향에 맞는 인사 쓰는게 당연한거지 코드인사가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반문하기도 했다.[15] 참고로 노무현 대통령 본인은 참여정부의 과로 양극화, 비정규직 양산, 북핵 세 가지를 들었다. 양극화나 비정규직이나 비슷한 문제 같지만 넘어가자.[16] 부동산시장의 투명성과 조세형평성 제고, 주택공급의 지속적인 확대, 투기수요 억제와 개발이익 환수, 서민 주거복지 확충 이상[17] http://archives.knowhow.or.kr/policy/report/view/16829?cId=769.[18]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1/03/2008010300895.html[19] 강남땅값은 1978년 기준 15년만에 무려 176배가 폭등한다. 참고로 경제성장률이 물가상승률을 뛰어넘는건 1983년부터다.[20] 참고로 분양가 상한제는 좌우 가리지 않고 정권마다 시기마다 부활과 폐지를 반복하고 있다.[21] 근데 정작 두산백과엔 2003년 10월 29일 정부가 부동산시장 종합대책을 내 놓으면서 토지공개념의 일환으로 원가공개제도의 법제화를 추진하였다고 되어있다. 실제 열린우리당 총선 공약이기도 했고. 물론 실현되진 않았다.[22] 2003년 2.9%, 2004년 4.9%, 2005년 3.9%, 2006년 5.2%, 2007년 5.5%.[23] 사실 애초부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6% 대선공약 반박용으로 나온 실현 가능성 희박한 공약이긴 했다.[24] 세계 평균 경제 성장률의 경우 검색해보면 글들이 상반된다. 고로 굳이 거론할거면 추측성 기사나 글 말고 신뢰성 있는 원본 출처 제시 바람. 물론 애초에 한국이 과거 개발도상국 당시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던 것처럼, 이 당시 베트남 등 후발국들과 한국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전제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있다.[25] 이명박 정부는 대선 기간 747 공약까지 내세우며 7% 경제성장을 강조했다.[26] 다만 2008년 세계금융위기는 서구권에 직격탄을 안겼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엔 상대적으로 큰 타격을 입히지 않았다. 특히 서구권이 휘청거리는 동안 중국 경제가 G2로 부상하면서 바로 옆에 있던 한국도 꽤 이득을 보던 시기. 사실 진짜 한국 경제에 직격탄을 날렸던건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2~3년 터진 카드대란 사태였다.[27] 예를 들어 물가상승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으면 그건 경제성장률이 아무리 높다 해도 좋은 경제 정책을 펼쳤다고 볼 수 없다.[28] 노 대통령 본인은 지지자들이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게 당연하다며, 이건 자기가 지지자들을 설득해야할 문제라고 평했다.[29] 하지만 외세의 유입을 거의 대부분 차단한 주체사상국 북한의 경제가 영 아닌 상황을 보면 이 비판은 적절하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게다가 한국은 각종 국제협약과 조약, 경제 질서에서 단순히 순응하는 국가가 아니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나라이다. 예를 들면 환율조작국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자국 기업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환율시장에 개입하는 면을 볼 수 있다. 환율시장개입에 대한 평가는 물론 비판도 있고 긍정도 있겠지만 외국에서 뭐라고 한마디 한다고 깨갱하고 물러나는 나라는 아니라는 것이다.[30] IMF 외환위기로 원/달러 환율이 4자리 수를 기록하기 전까진 이탈리아터키가 달러 당 환율이 4자리 수를 넘었고, 이탈리아가 유로로 전환한 이후엔 한국과 터키가 남아 있었으나, 2004년에 터키가 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이후엔 한국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 얼마 안가 2005년 말 한국의 환율도 3자리 수로 떨어지면서 하나도 없게 되었다.[31] 담배를 예로 들면 당시 한국의 담뱃값은 1갑에 2,500원이었는데 일본의 담뱃값은 300엔이었다. 환산하면 2,300원 정도로 일본 쪽이 한국보다 약간 더 쌌다.[32] 다만 원화 강세가 지속됐기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해서 바로 엔을 원으로 환전을 하면 출국 때보다 환율이 더 떨어져서 재미를 못 보는 경우도 있었다.[33] 전 버전에선 지금 와서 진보정당 어느 곳에서도 말하지 않으니 참여정부 최악의 흑역사였다는 식으로 평했는데 이건 객관적 근거가 없는 매우 주관적인 평이다. 그런 식의 논리면 이전 정부가 했는데 지금은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아 말하지 않는 혹은 묻힌 수많은 정책들 역시 모조리 최악의 흑역사였다는 식의 오도가 가능한 셈. 또 유의할 것이 이 당시 외국인 지문 날인 제도 폐지의 경우 모든 외국인들이 다 해당되는냥 주장하는 일부 제노포비아성 주장자들과 달리, 장기체류자 한정이었다.[34] 민경찬氏는 노무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氏의 처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