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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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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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류성룡의 현존 찰갑 유물

1. 개요2. 세계의 찰갑
2.1. 발생
2.1.1. 시베리아2.1.2. 오리엔트2.1.3. 중국
2.2. 발전
2.2.1. 중앙아시아2.2.2. 오리엔트2.2.3. 중국2.2.4. 한국
2.3. 변형
2.3.1. 중국2.3.2. 중앙아시아2.3.3. 서양2.3.4. 한국2.3.5. 일본2.3.6. 이슬람
2.4. 퇴조
3. 찰갑의 특성4. 제조5. 현대6. 대중문화에서의 러멜러 아머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Scale Armor/Lamellar Armor/札甲

쇠나 뼈 따위로 만든 미늘조각(小札)들을 끈으로 연결해서 만드는 갑옷. 본질적으로 동일한 형태의 조각들이 끈으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형태가 잡힌다는 점이 특징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영국부터 동쪽 끝 일본까지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시간적으로도 문명 초기부터 사용되어 소화기의 보급으로 갑옷 자체가 퇴보한 뒤에도 북극권의 원주민들은 러시아가 진출하는 19세기까지 뼈나 나무로 만든 찰갑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북극권 외의 지역에서는 중앙아시아와 티베트에서 18-19세기까지 찰갑을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최소 기원전 2세기 고조선부여에서부터 기원후 19세기[1]까지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2. 세계의 찰갑[편집]

2.1. 발생[편집]

2.1.1. 시베리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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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티쉬 옴스크 출토 골제 찰갑

소프까 2 출토 골제 찰갑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최초의 찰갑은 기원전 2000년기에 우크라이나에서 몽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해 있던 쎄이마-뚜르비노 문화권(Сейминско-турбинский феномен)의 것이다. 이는 시베리아 남부에 퍼져 있던 최초의 기마 금속기 문화를 총칭하는데, 그 중에서도 노보시비르스크 주의 소프까-2 유적과 그에 인접한 이르티쉬 옴스크에서 출토된 기원전 2000년기 중반의 골제 갑옷은 인류 최초의 찰갑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유물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최초의 찰갑은 뼈 같은 단단한 유기질 재료에 구멍을 뚫어서 엮거나 옷 위에 꿰멘 것이 시초였을 것이다.

쎄이마-뚜르비노 문화권의 갑옷(러시아어)
쎄이마-뚜르비노 문화권의 갑옷(한국어)

2.1.2. 오리엔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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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데시 전투 기록화 모사도

신 아시리아 제국의 전차병


일각에서는 기원전 2400년경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프릴 인이 최초의 찰갑을 만들었다고도 하며,[2]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1700년대에 기록상 최초의 찰갑이 등장하고,[3] 오리엔트 북부에서는 기원전 1500년대의 청동제 소찰이 발견되었다고 한다.[4] 이에 따르면 오리엔트의 찰갑은 시베리아의 것보다 앞서거나 거의 동시기의 것이었다고 하겠으나, 문제는 이를 증거할 만한 실제 기록이나 유물이나 그림을 찾을 수가 없어서 확증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5]

다른 한편으로는 기원전 1300년경에 벌어진 카데시 전투를 그린 기록화에서 람세스 2세가 입고 있는 튜닉의 문양이 찰갑과 같이 보이지만, 그림이 그려진 시점과 모사한 바의 디테일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도 문제고 별도로 고고학적인 증거가 없는 이상에야 정말로 그냥 무늬만 찰갑(...)일 가능성도 커서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이러한 청동기 시대의 찰갑들은 역시 쇳조각들을 쇳조각끼리 엮는 것이 아니라, 옷 위에 구멍이 뚫린 쇳조각을 대고 꿰메는 가장 초보적인 방식의 포갑(布甲)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확실하게 본격적인 의미의 찰갑이 사용되는 것은 기원전 900년경 흥기한 신 아시리아 제국부터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석권했던 신 아시리아 제국의 병사들은 갑옷을 대단위로 착용함으로써 중장보병이라는 개념을 본격화했을 뿐 아니라, 단순히 쇳조각들을 옷 위에 붙이는 게 아니라 쇳조각끼리 엮는다는 발상을 거의 최초로 했던 것이다. 이는 기원전 879년부터 기원전 710년까지 신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님루드에서 발굴된 찰갑에서 확인할 수 있다.

2.1.3. 중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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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시대의 전사 재현도

증후을묘 출토 가죽 찰갑 유물


중국은 상나라 때부터 찰갑을 사용하였으나, 당시의 찰갑은 단순히 큰 청동판을 천 위에 고정시키거나 끈으로 연결하여 배치시킨 것으로 찰갑이라기보다는 통짜 흉갑과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주나라 때에도 기본적으로 비슷한 경향이 이어졌지만 춘추시대에 들어서 무기체계는 발전을 거듭해 포갑에서 본격적인 찰갑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초기형 찰갑으로써 춘추시대 말기 증후 을(曾侯 乙)의 가죽 갑옷이 남아 있다. 이는 하나하나의 조각이 크고 이에 따라 끈의 사용이 최소화된 전형적인 초기형 찰갑이지만 자주 움직이는 하체 부분은 수결법(레미네이티드 구조)[6]를 통해 쉽게 움직이게 만드는 등 활동성을 위한 조치는 잘 취해져 있는 편이다.

중국 갑옷의 발전(상~진)

2.2. 발전[편집]

2.2.1. 중앙아시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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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가트 지역 출토 찰갑 재현도

스키타이의 찰갑 재현


찰갑은 쇄갑만큼은 아니지만 몸의 세세한 움직임에 조금씩 대응할 수 있기 때문에 활동에 편의성이 있었고, 이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우크라이나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한 기마민족들에게 특히 애용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남서시베리아의 사르가트 지역에서 발굴된 기원전 500~300년경의 찰갑은 찰갑으로는 가장 초보적인 양식의 것이면서도 형태상 완전한 모습의 중기병을 보여주고 있어서 특기할 만하다.

이 시기 우크라이나에서 남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해 있던 기마 유목문화 가운데 우크라이나에는 스키타이족, 중앙아시아에는 그와 관계가 시사되는 소그드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스키타이족은 기원전 300년경에 사르마티아족에게 정복되고, 소그드족은 기원전 160년경에 월지에게 정복되었는데 이러한 사르마티아족과 월지가 세운 쿠샨 왕국에서도 모두 찰갑을 착용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기본적인 찰갑 양식은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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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마티아 중장기병 재현도

쿠샨 왕조의 금화에 묘사된 찰갑

은쟁반에 그려진 소그드 전사


이러한 초원 계통의 기마민족들은 긴 철판을 엮어서 만드는 몽고발형주(蒙古鉢形胄)와 함께 갑옷을 부위별로 나누지 않고 한 벌의 코트로 만들어서 바로 입는 방식의 갑옷을 제작한 것이 특징적인데, 이는 초원으로 전파되어 북방계 갑주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 영향은 고구려에까지 미쳐서 한국의 갑옷 양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2.2.2. 오리엔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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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중기병

파르티아의 중장기병

사산조 페르시아의 중장기병


오리엔트를 석권했던 신 아시리아 제국이 무너지자 그 영토는 바빌로니아, 이집트, 리디아, 메디아의 4강 체제로 분열되었지만, 그로부터 반세기 뒤 키루스 2세의 페르시아 제국이 급부상해 다시 오리엔트 전역을 석권하게 된다. 당초 페르시아 제국의 군대는 대체로 경무장한 보병과 기병을 위주로 편성되었지만, 방호력이 필요한 경우에는 찰갑이 사용되었고 특히 유목민들과의 항쟁이나 그리스 중장보병과의 접전에서 드러난 경장기병의 취약성을 보강하기 위해 중기병이 발생하면서 찰갑의 사용은 더욱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중기병 이념은 이후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으로 돌격전술이 도입되면서 더욱 강화되어 셀레우코스 왕조파르티아 이래로는 아예 사람과 말의 온몸을 감싸버리는 중장기병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단계에 들어서면 찰갑만이 아니라 판갑쇄갑을 조합해서 만드는 경향이 확산되었다. 이처럼 활발하게 사용되던 서아시아의 찰갑 문화는 중장기병과 함께 고대 로마로 수입되어 로리카 스쿠마타(Lorica Squamata)로 사용되었고, 이를 계승한 동로마 제국에서는 보병부터 기병에 이르기까지 전 병력이 클리바니온(klibanion)이라는 찰갑으로 무장했다.

2.2.3. 중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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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에 묘사된 찰갑과 병마용 출토 석제 찰갑

쑤저우 전한 초왕묘 출토 찰갑 재현


중국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전국시대의 아수라장(...)을 거치면서 갑옷이 더욱 개량되어 갑찰이 더욱 작아지고, 엮는 방법도 복잡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상체는 내중식 혁결법, 하체와 상박은 외중식 수결법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적인데 이는 다리와 팔의 활동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렇게 구조가 복잡해질수록 당연히 대량생산은 어려워졌던 것으로 보이고, 때문에 진시황의 병마용에서는 갑찰을 천 위에 부착시키거나 리벳으로 고정시킨 듯한 표현이 다수 확인된다.

이러한 기본 양식은 한나라로 계승되었고 갑찰이 더욱 작아지고 얇아지는 경향도 지속되어, 전한대에는 상대적으로 긴 갑찰을 나란히 엮어서 상체를 방호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지만 후한대에는 위 사진과 같이 길이도 짧아져서 어린갑이라고도 하는 물고기 비늘 모양을 갖추게 된다. 투구도 이와 마찬가지로 갑찰을 엮어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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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 출토 석제 소찰주

시안 외곽 한묘와 전한 제왕묘 출토 소찰주 재현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민족들의 중원 침투를 통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의 찰갑들이 고착화된다. 특히 기마병의 적극적인 운용으로 다리를 보호하는 갑상(甲裳)이 도입되고, 마갑까지 갖춘 중장기병이 활약한 시기이기도 했다. 후한서 채옹열전에서 175년 시점에 유주와 기주에서 개마가 산출된다고 한 기록을 시작으로, 200년에는 관도대전에서 백 단위의 개마가 운용된 모습이 보인다. 물론 당시의 개마는 가슴가리개 형태의 초보적인 마갑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기는 하지만, 이때의 영향은 고구려에까지 미쳐서 고구려 중장기병 편성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이고 있다.

중국 갑옷의 발전(한~수)

2.2.4. 한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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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 범의구석 출토 골제 찰갑

경주 죽막동 출토 청동 단추


한국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찰갑은 함경북도 무산군 범의구석 유적의 제40호 집자리에서 출토된 초기 청동기 시대의 골제 찰갑 유물이다. 구멍에 사용으로 인해 마연된 흔적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의 다른 찰갑들과 마찬가지로 가죽이나 천 위에 갑찰을 대고 꿰메거나 초보적인 혁철법으로 엮어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천 어은동이나 경주 죽동리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단추를 옷에 붙여서 갑찰처럼 사용했다는 견해도 있는데, 이와 비슷하게 중국 상주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단추도 그렇게 용도를 추정하는 바가 있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찰갑을 사용하였으나 한국 남부에서는 찰갑은 잘 사용되지 않았으며. 가야일본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가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여 가야군과 일본군을 괴멸시킨 이후에는 남부에서도 찰갑을 점진적으로 도입하는 경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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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찰갑.[7]

신라의 찰갑.

가야의 찰갑.


이 당시 찰갑을 복원할 때 고구려 벽화를 참조해서 좌측 갑옷마냥 바지 형태로 소찰을 일렬로 늘여놓아 다리를 감싸 하반신 갑옷을 만들곤 하는데 그런 형태라면 상식적으로 유연성이 떨어지고 무게가 무거워 거동이 불편하고, 말에 오르기가 거의 불가능하리만큼 힘들어진다.[8] 말을 타야 하는 만큼 최소한 가랑이 안쪽까지 찰갑편을 댔을 가능성은 없다. 이를 볼 때 고구려 갑옷의 하반신 부분은 바지라기보다는 치마 형태의 갑상(甲裳)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 사진 오른쪽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재현한 가야 찰갑은 포형 갑옷에 다리는 허벅지와 종아리에 경계를 주어 허벅지를 가리는 갑상 형태의 대퇴갑을 장비하고 종아리 부분은 토시처럼 전체를 감싸는 하퇴갑 형태로 재현되었다. 중국의 찰갑이나 몽고, 티벳 등 해외 기마민족들의 찰갑과 비교해볼 때 실제 삼국시대 찰갑의 다리 보호구 역시 두 부위로 나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2.3. 변형[편집]

2.3.1. 중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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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명광개와 같은 갑옷도 전형적인 찰갑이며 이때는 방어력 향상을 위해 거울처럼 연마한 대형 철판인 호심경[9]을 가슴 양쪽과 등, 배에 부착하기도 했다. 다만 이때부터는 찰갑의 유연성을 특별히 추구한다기보다는 가슴, 배, 어깨, 허벅지와 같은 파트를 나누고, 소찰 자체는 유연성이 적은 대신 방어력이 좋게 만드는 경향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의 양상이 우리가 흔히 중국 갑옷이라고 하면 이미지하는 스타일이다. 중국의 독특한 갑옷인 산문갑(山文甲)도 당나라 때부터 등장했다. 산문갑이 찰갑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정확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당나라 갑옷의 변화 과정

2.3.2. 중앙아시아[편집]

투르크/몽골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국가가 찰갑을 대량으로 사용하여 이들이 중동을 대대적으로 침공한 이후에는 이란이나 아랍국가에서 몽골식의 찰갑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잠시 있었으며,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동부 러시아에서도 상당량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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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삽화에서 묘사된 몽골군. 모두 찰갑을 착용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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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문학작품 제왕사기(Shah-nama) 14세기판에 수록된 삽화. 모두 찰갑으로 무장하고 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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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서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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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고전기의 호플리테스가 그려진 회화


미케네 문명에서는 데드라 515호묘 출토품으로 멧돼지 어금니 투구(Boar's Tusk Helmet)가 확인된다.[11] 역시 나무 또는 가죽으로 만든 틀 위에 뼛조각을 대고 꿰메어서 고정시킨다는 가장 초보적인 찰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런 양식의 투구는 그리스 암흑기 이후 맥이 끊기고 코린트식 투구와 파노플리아 갑옷이 이를 대체하게 된다. 하지만 철보다 비중이 높은 청동이 사용되었고, 당시 야금술이 부족한 점에 따라, 무거운 청동 흉갑의 재질은 두터운 리넨으로 대체되었다. 대신에 리넨으로 만든 흉갑의 배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 찰갑을 두르기도 했으며, 이밖에도 찰갑은 리넨 갑옷과 다양하게 복합되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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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세기 러시아군


동로마 제국에서는 이러한 중동 풍토의 영향을 크게 받아 보병부터 기병에 이르기까지 전 병력이 클리바니온(klibanion)이라는 찰갑으로 무장했다. 사르마티아스키타이와 같은 기마 민족은 대중적으로 찰갑을 사용하였다. 사산 왕조파르티아가 운용한 중장기병들도 몸통이나 스커트는 찰갑으로 구성하는 경우가 있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중동국가들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로리카 스쿠마타(Lorica squamata)라는 갑옷이 존재했다. 로리카 스쿠마타는 프랑크 왕국의 갑옷에 영향을 주었으며, 훗날 바이킹 중에서도 러시아 등으로 진출하는 스웨덴의 바이킹들은 찰갑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었다. 이들의 찰갑은 바이킹 이후 가난했던 현지 사정 탓에 대대로 전수되어 1361년 비스비 전투(Battle of wisby)의 전사자 집단매장지 발굴에서는 당시 년도에서 기본 수백년 전의 구식 찰갑이 대량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바이킹들은 쇄자갑으로 유명하지만 찰갑도 상당히 많이 사용했으며 특히 러시아 지역으로 진출했던 스웨덴 바이킹들이 애용했다. 훗날 1361년 스웨덴 고틀랜드에서 발발한 비스비 전투(Battle of wisby)의 집단매장지에서는 대규모의 찰갑과 코트 오브 플레이트가 발견되었으며 출토된 찰갑들은 대부분 1361년 기준으로도 수백년전의 양식들이었으며, 궁핍했던 당시 스웨덴 주민들이 바이킹 시대부터 대대로 물려입은 갑옷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바이킹이 노르망디 지방에 진출해 세운 노르망디 공국에서도 일부 찰갑이 사용되었으나, 곧 사장되고 쇄자갑이 주류 갑옷으로 나오게 된다. 이후 서유럽에서는 찰갑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2.3.4. 한국[편집]

한국 갑옷 문서 참조.

2.3.5. 일본[편집]

특별히 일본에서는 이러한 찰갑을 게이코(掛甲, 괘갑)라는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이 괘갑은 훗날 일본갑옷의 대표격인 오오요로이에도 계승되어 전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갑옷은 모두 작은 철판을 끈으로 꿰어 만드는 찰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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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괘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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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갑에서 진보된 오오요로이(大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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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년 지방태수 이와이의 난 당시의 일본갑옷. 괘갑과 단갑이 보인다.

2.3.6. 이슬람[편집]

이슬람 전파 이후로도 군사적 경향은 그대로 유지되어서 체인메일과 찰갑이 주력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지속되었으며, 투르크인들이 뛰어난 기마술과 전투력을 인정받아 아랍인들의 군사 전담으로 이슬람세계에 진출한 이후에는 동로마 제국의 클리바니온 스타일의 찰갑에 더해 중앙아시아 양식의 찰갑이 도입되었으며, 몽골의 침략 이후로는 선진 군사제국인 몽골의 장비를 도입하여 투르크-몽골 방식의 찰갑이 13~14세기 내내 이슬람세계 갑옷의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이집트는 투르크인이 많은 전투노예 맘루크가 정권을 잡으면서, 이란은 일 칸국으로써 몽골인의 직접통치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매우 커지게 된다.

이슬람 전파 이후에도 체인메일의 부족한 방어력을 보완하는 용도로 흉갑 정도에서부터 코트 범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며, 이슬람 세계에 용병으로써 들어온 투르크인들이 이러한 경향을 더욱 촉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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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호라즘 왕조군대.


그러나 15세기에 들어 몽골계의 영향력이 소멸하고 경번갑과 같은 신형 갑옷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찰갑일변도의 갑옷 문화는 14세기를 거치며 전환점을 맞고, 15~16세기 내내 이슬람 세계는 경번갑이나 두정갑을 중심으로 하는 갑옷 문화를 가지게 된다.

2.4. 퇴조[편집]

전성기를 구가하던 찰갑은 15세기부터 점진적으로 소멸하기 시작한다. 이슬람세계에서는 경번갑이 특유의 장점으로 유지/정비에서 불리하던 찰갑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중국에서는 명나라대까지 찰갑이 사용되었으나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하자, 두정갑을 주력 갑옷으로 채택하면서 찰갑의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도 마찬가지로써 임진왜란까지만 해도 찰갑이 상당수 확인되나 임진왜란을 거친 후기에는 두정갑을 주력 갑옷으로 채택한다. 일본은 전국 시대에 들어 찰갑 대신 넓은 철판을 이용해 갑옷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 편이 정비/보수나 방어력에서 월등했다.

중국 갑옷의 발전(송~원)
중국 갑옷의 발전(명~청)

3. 찰갑의 특성[편집]

찰갑은 철판들을 끈으로 엮어서 만들기 때문에 유연성이 있다. 체인메일 만큼은 아니지만 몸의 세세한 움직임에 조금씩 대응할 수 있기 때문에 편의성이 있었고, 이것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스키타이, 사마르티아, 몽골을 비롯한 기마 민족들에게 특히 애용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 체인메일이 찌르기나 화살, 타격에 어느 정도 취약한 면을 보이는 반면에 철판들로 구성되어 이러한 점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쇄갑에 비해 낫다는 수준이지, 찰갑 역시 찌르기에는 상당히 취약했다. 소찰주들이 마치 플레이트처럼 막아줄 것 같지만, 창으로 찌르면 표면에서 미끄러지면서 틈새로 파고 들어간다. 가죽끈 등이 버티지 못하면 관통. 특히 내중식 갑옷(흔히 생각하는 물고기 비늘 같은 배열)이 취약하다.

최대 장점은 생산의 규격화와 용이성이 압도적이라는 데에 있다. 찰갑은 작은 철판, 즉 소찰(小札)의 규격만 지정해놓으면 갑옷을 수백, 수천벌을 만들 수 있는 양을 생산해놓더라도 사용자 체형에 맞지않아 못쓸 일이 전혀 없다. 덩치가 크다면 소찰을 많이 엮으면 되고, 작으면 조금 엮으면 되니까. 제작에 손이 많이간다는건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제작 공정 대부분이 단지 소찰을 엮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어렵지 않아 부위별, 공정별로 상당한 수준의 전문가가 필요한 플레이트와는 달리 쉽게 생산인력을 양성, 투입할 수 있기에 인해전술로 메꿀 수 있는데다, 어차피 다른 갑옷들도 손이 많이가는것은 마찬가지기에 큰 문제는 아니다. 생산속도 역시 '소찰 제조'와 '부위별 조립'이라는 간단한 제작방법 덕분에 분업이 용이해[12] 생산속도 역시 빨랐다. 규격화되어있는 경우가 많아서 소찰 몇곳이 못쓸 만큼 크게 손상되었다 하더라도 해당 부분만 교체해주면 되기에 보수도 용이. 이러한 점 때문에 국가적으로 대규모 군대를 운용하는 전통이 있던 중국이나 페르시아, 동로마 제국등에서 많이 사용되기도 했으며, 특히나 중국은 찰갑으로 대표될 만큼 찰갑 생산/운용에서 압도적인 비율을 보이기도 했다.

단점은 생각보다 많은데, 가장 큰 단점은 유지보수가 엄청나게 귀찮다는 것이다. 아마 갑옷 중 가장 손이 많이가는 갑옷이 찰갑일 것이다. 소찰을 연결하는데 주로 가죽끈이 사용되는데, 세월이 지나면 반드시 약화되고 부식되는 단점이 있어 전투에 투입되지 않더라도 몇년 단위로 가죽끈을 전체적으로 교체해줘야 하는 오버홀(Overhaul)을 해 줘야만 했다. 그 수많은 소찰들을 하나하나 다시 끼워맞춰야 한다. 전투에서는 도검에 베이기라도 할 경우 끈들이 베여 전투 후 끈을 교체하는 수리를 해야만 했다. 이것도 또 전부 다 분해해서 하나하나 다시 끼워맞춰야 한다. 찰갑입은 병사가 강한 이유는 칼맞으면 유지보수 해야할까봐 그렇다카더라 아 썅 때리지마! 때리지말라고 진짜 그야말로 사용자의 근성을 무한히 요구하는 갑옷이 아닐수 없다.(...) 차라리 사슬갑옷은 손상된 부위만 적당히 때우고 세척할땐 모래통에 넣어서 굴리면 장땡이고, 철판갑옷은 열심히 닦기만 하면 되기라도하지...이녀석은 보다시피 뭐 하나 잘못되면 갑옷한벌 다시 맞추는 수준의 중노동[13]을 요구한다. 막말로 일회용품(...) 스케일 아머는 이러한 문제점이 좀 덜하지만 비늘처럼 들리는지라 아래에서부터 찌르기에 취약했다. 또 소찰들이 대량으로 겹쳐져 있는 구조여서 사이사이로 수분이나 이물질이 침투하여 부식을 시키기 쉬웠고 이것을 체크해줘야만 했으며 부식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끈을 풀어야만 하는 등 주로 정비/지원 면에서 약점들이 많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동로마 클리바니온이나 서애 유성룡 찰갑에서 보이듯 찰을 엮으면서 안감을 대어 가죽끈이 망가져도 바로 우수수 찰이 떨어지는 걸 어느 정도 막아보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이렇게 해도 두정갑만은 못했다.

4. 제조[편집]

찰갑을 구성하는 2대 요소는 소찰과 끈이다. 소찰은 한자어로써 일본에서는 코자네(小札:こざね)고자네, 영어로는 스케일(Scale) 또는 러멜러(Lamella)라고 불리는 것으로 작은 판에 끈을 꿰기 위한 구멍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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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분포한 만큼 소찰의 형태와 구멍의 위치와 숫자, 연결재료와 연결방식도 세계구급이다. 또 같은 찰갑이라도 부위에 따라 연결방식과 철판의 양식이 틀려진다. 크게 나누어 철판 여기저기에 구멍을 내어 철판끼리 끈이나 리벳으로 연결하는 러멜러 아머(Lammellar Armour)와 물고기 비늘 모양의 철판에 윗부분만 구멍을 내어 천이나 가죽 바탕에 연결하는 스케일 아머(Scale armour)의 방식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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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 아머의 전형적인 형상, 사진은 로리카 스쿠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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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멜러 아머의 전형적인 형상.


러멜러 아머의 경우 철판의 방향이 위쪽이냐 아래쪽이냐에 따라 외중식과 내중식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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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다수의 찰갑은 외중식의 형태로 만들어지는데 칼이나 창에 찔릴 경우 끝이 철판을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내중식은 끈이 끊어지거나 할 경우 스케일 아머처럼 창칼이 타고 들어가 관통할 수 있는 취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 찔릴 가능성이 높은 부분인 허벅지 부분을 가리는 방어구의 경우 내중식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초창기에는 내중식이 많았으나, 시대가 변할 수록 외중식의 경향이 커진다.

소찰의 재질은 청동, 철, 가죽, 뼈 등으로 나뉘어진다.

뼈는 초창기에 많이 사용된 물건으로 방어력이 부족하여 금방 사장되었으나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뼈로 만든 찰갑을 끝까지 유지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초기 백제 것으로 추정되는 뼈찰이 출토된 적이 있으나, 찰이 뭉쳐진 상태로 출토되어 정확하게 갑주의 어느 부분인지는 알 수 없다. 그외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인 함경북도 무산군 호곡유적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뼈찰갑편(#)이 존재하며, 시베리아 지역 청동기 시대 유적인 세이마-뚜르비노 문화의 유적(추정연대 기원전 18~기원전 15세기)도 유물이 남아있다.(#)

철판의 두께는 약 0.6mm~1.2mm정도. 철판 2개가 서로 절반씩 걸터서 겹쳐지므로 실제 두께는 1.2~2.4mm정도로 두꺼워진다. 철판은 작고 얇아 열처리 실패율이 높았으므로 열처리보다는 단조로 강화하는 웍 하든(Work Harden)방식이 더 자주 쓰였으며 중국의 후자갑은 이러한 경화법을 사용한 소찰 중 하나이다. 대부분은 그냥 철판을 잘라서 펀치로 구멍을 내고 생긴 이바리(Burr 재단시 생기는 날카로운 부분)을 숫돌로 제거한 다음 쓴다. 생산처의 각인을 찍는 경우도 있다. 녹을 방지하기 위해 녹인 주석에 담그어 코팅하거나, 옻칠을 한다.

가죽은 천연가죽을 경화처리해서 사용하며, 밀랍과 함께 끓이는 방식, 찬물에 담가두었다가 말리는 방식, 끓는 물에 단시간 투입하는 방식 등 여러 종류의 강화방법이 존재하였으나 서양 전통적으로는 밀랍과 함께 끓이는 이른바 "보일드 레더"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가죽의 두께는 재질과 가공 특성상 다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4mm이상의 두께를 가지고 있었다. 경화된 가죽의 특성은 플라스틱과 비슷하며, 도검의 베기와 화살에 대해 상상 이상의 저항력을 지닌다. 동양에서는 습기 침투에 의한 변형이나 변질을 방지하고 내구성을 늘리기 위해 옻칠을 하기도 한다.

가죽과 철판은 한 갑옷을 한가지 재질로 도배하기도 했지만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철판과 가죽이 1층씩 번갈아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몸통과 같은 중요한 부분은 철판, 어깨나 스커트 같은 부분은 가죽으로 만들어 경량화를 추구하기도 했다.

찰갑을 엮는 끈은 매우 다양한데 면, 비단, 실매듭, 리벳, 철사, 가죽끈이 사용된다. 현대에는 나일론과 같은 합성 섬유들이 추가되었다. 리벳은 가장 튼튼했으나 찰갑의 장점인 유연성이 사라진다는 단점이 있었으므로 잘 쓰지 않았다. 비단은 인장강도가 좋아 튼튼했으나 가격이 비싸 사용량이 많을 수가 없었다. 가죽끈은 튼튼하고 수급도 어렵지 않았으나 시간이 갈 수록 약화되는 문제점이 있어 몇년 단위로 교체를 해야 했으며, 습기가 심할 경우 썩어 끊어지는 문제점이 있었다. 철사는 튼튼하고 시간이 지나도 약해지지 않으나 유연성이 나빠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나일론은 주로 현대 SCA계열에서 활동하는 갑옷 자작자들이 사용하는데, 튼튼하고 싸며 잘 끊어지지 않고 습기에도 강하며 몇십년을 써도 오버홀이 필요없는 정도의 가히 기적적인 위력을 자랑하나, 제조에 필요한 기술력이 너무 높아 정작 필요했던 시절엔 존재조차 하지 못했다(...)

소찰과 끈이 선정되었다면 소찰의 옆으로 이어나가는 가로엮기를 한다. 가로엮기의 방식은 소찰의 구멍의 숫자와 위치에 따라 달라지며 천차만별이다. 동로마 제국의 클리바니온의 경우 가로엮기를 하지 않고 가죽 바탕에 리벳고정을 하여 가로엮기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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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의 클리바니온의 한 예.

가로엮기를 통해 원하는 길이대로 1층을 만들었다면 세로엮기를 통해 각 층을 연결한다. 세로엮기의 방식 또한 세세한 부분은 다 다르지만 기본적인 개념은 2가지로 나누어진다.

  • 기본엮기 - 찰갑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방식. 그림은 각각 비잔틴 클리바니온과 스웨덴의 비스비 전투 유물을 통한 재현이다. 파일:external/pds20.egloos.com/c0063102_4d7a07fba6f16.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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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성은 좀 떨어지지만 방어력은 리벳 고정을 제외하고 가장 나은 방식. 주로 흉갑과 같이 중요한 부분에 많이 쓰인다. 레미네이티드 방식은 끈이 많이 노출되어 있어 도검의 베기를 당할 경우 손상이 심하면 소찰 층층별로 분리될 수 있으므로 끈의 노출이 가장 적은 이 방식이 주로 사용된다.

  • 레미네이티드(laminated) - 유연성을 특별히 추구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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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어깨나 팔, 허벅지 같은 유연성이 필요한 부분에 주로 사용되지만 흉갑에도 제법 사용되는 편이다. 최상단의 이미지는 전신을 레미네이티드 방식으로 만든 경우. 그림처럼 소찰 중간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하연결을 하는 끈이 내려오며, 겉보기에는 끈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상하로도 소찰이 겹치므로 방어력 로스는 없다. 끈의 길이만큼 접히기 때문에 레미네이티드 방식으로 만들어진 찰갑 부위는 체인메일과 비교될 만큼의 유연성을 가진다는 점이 최대의 장점. 단점은 끈이 많이 노출되어 도검의 베기를 비롯한 손상을 많이 입을 경우 층별로 분리되어버릴 수 있다는 점과, 전투 후 수리요소가 많이 생긴다는 점에 있다. 일본 갑옷 중에서도 오오요로이~하라마키에 이르는 전국시대 이전의 갑옷들은 찰갑 중에서도 극단적인 레미네이티드에 속하며, 소찰 중간이 아니라 최상단에서 끈이 내려오므로 소찰이 끈에 가려져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세로엮기까지 완료하면 찰갑의 형태는 거의 갖추어지며, 이대로 실전에 투입할 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보다 나은 완성도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형태의 소찰들을 이용하여 겨드랑이나 어깨, 목 부분을 둥근 곡선을 가지도록 마무리하기도 하며, 테두리를 가죽으로 감싸기도 한다. 간혹 층별로 테두리를 가죽으로 감싸는 경우도 있다. 작업이 완료되면 구멍을 뚫어 착용을 위한 벨트버클 등의 악세사리를 장착하며, 이 작업까지 완료될 경우 완성에 해당한다.

5. 현대[편집]

현대 리인액트의 주도층이 서양의 매니아들이고, 주로 나오는 것이 플레이트 아머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푸대접 받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SCA 헤비컴뱃 계통에서는 의외로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다. SCA유저 상당수가 자기가 갑옷을 직접 제작하는 풍토를 가지고 있는데, 찰갑은 철판만 수급 가능하면 제작 기술은 크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또 NCT철판절단 등을 하는 공장을 알면 도면을 그려 보내주는 것만으로 균일하고 품질좋은 철판을 대량 수급할 수 있기 때문에 DIY문화가 발달한 미국에서 특히 찰갑 판매를 보기 어려운 것이다. 간혹 몇몇 아머리에서 판매하기는 하나 완성품을 파는 경우는 많지 않고 소찰만 파는 경우가 많다. 다만 역사적으로 찰갑을 많이 사용한 동유럽쪽에서는 찰갑 완성품을 판매하기도 하며 상당히 많이들 입고 나오지만 영어권에서 활동하는 사이트가 많지 않다. 우크라이나암스트리트에서 SCA그레이드로 제조한 스테인리스 찰갑을 판매하기도 한다.

6. 대중문화에서의 러멜러 아머[편집]

  • 노바1492 오리지널 전용 어깨형 부품인 러멜러는 브리게이드급 체력과 방어를 지닌 몸통으로 디퓨전과 세트로 쓰인 몸통이다.애초에 세트지만 외형은 트리뷴이 개조한 형태같다. 초창기에는 어깨형 주제에 시야가 무려 8이나 하는 괴물 템으로서 사기성을 널리 알렸으나 나중에 6으로 하향당했다.

  • 노바2에서는 소형 팔형몸통으로 나름 평균적인 스펙을 자랑하며 가운데에 옥색의 6각형 코어가 인상적인 부품이다. 공식세트에서 살투스와 리코일건에 작용되었다.

  • Warhammer(구판) 진영들은 찰갑과 판금 갑옷을 혼용해서 입는다.

7. 관련 문서[편집]

[1] 순조대의 기록에 수은갑이 확인된다.[2] 네이버 지식백과 <무기와 방어구(서양편)> "스케일 아머"; 계동혁, 『역사를 바꾼 신무기: 알기 쉬운 무기의 역사』(플래닛미디어, 2009), 33쪽.[3] 위키백과 영문판 "Lamellar armour"[4]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대사전(용어편)> "찰갑".[5] 위키백과 영문판 "Lamellar armour"[6] 끈을 길게 늘어뜨려서 위아래의 찰갑을 연결하는 방식. 자세한 설명은 아래 항목 참조.[7] 그러나 이 복원품은 1993년 자료가 부족하던 시절에 만들어 고증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갑찰의 방향이 반대인데다, 투구도 후대의 것이며 대퇴/하퇴갑을 다리 둘레로 감싸는 것도 잘못됐다.[8] 물론, 유럽 등지에서도 다리나 팔을 전체적으로 덮는 갑옷 자체는 존재하고 있지만, 최소한 기병용 갑옷의 경우 다리를 구부리는 것을 방해하는 형태로 만들지는 않는다.[9] 후일 이란에서 나온 차하르 아이네 갑옷과 같은 발상이다. 이름까지도 '거울같은 갑옷'으로 똑같다.[10] 제왕사기는 창세기에서부터 사산조 페르시아까지의 각 왕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룬 서사시로써 시대배경은 7세기까지이지만 고증의 개념이 없단 당시에는 과거의 군대를 묘사하면서 저자가 살던 시대의 군대를 자세히 관찰하여 그려넣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조선 시대 사극에 대한민국 군복 등장시키기 유럽에서도 같아서 다윗과 골리앗이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싸우는 삽화도 많다. 따라서 이러한 서사시나 역사책, 영웅담의 삽화는 오히려 당시 갑옷과 무기를 알아보는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하며, 같은 책이라도 판본에 따라 달라지는 무기와 갑옷의 묘사를 통해 시대적 변화를 알 수도 있다.[11] 일리아스에 이에 대해 '안쪽은 수많은 가죽끈으로 빳빳하게 펴져있고 바깥에는 번쩍이는 엄니를 가진 돼지의 흰 이빨들이 훌륭하고도 솜씨있게 양쪽에 촘촘히 박혀 있다'는 묘사가 존재한다. 이 투구는 아우톨뤼코스가 아뮌토르의 궁전에서 훔친 것으로, 암피다마스, 몰로스, 메리오네스를 거쳐, 트로이 전쟁에서 아우톨뤼코스의 외손자이기도 한 오디세우스가 쓰게 된다. (천병희 역 일리아스 10권 262행부터) [12] 갑옷공장은 시대를 불문하고 상당히 분업화되어 있다[13] 찰갑의 제작 난이도는 전 갑옷을 통틀어 가장 쉽다고 해도 될 정도긴 하지만, 타 갑옷의 수리난이도와 비교하면 확연히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