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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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晉
1.1. 춘추시대의 진나라1.2. 위진남북조의 진나라1.3. 오대십국 시대 후당의 초명 진나라1.4. 오대십국의 후진
2. 秦
2.1. 진한시대 진나라2.2. 오호십육국 시대의 전진2.3. 오호십육국의 후진2.4. 오호십육국의 서진2.5. 수말당초의 할거 정권 설진(薛秦)2.6. 당나라의 할거 정권 진나라
2.6.1. 역대 황제
3. 陳
3.1. 춘추시대의 진나라3.2. 남북조시대의 진나라
4. 軫5. 辰
5.1. 개요5.2. 문헌적 증거5.3. 관련 서적5.4. 고고학적 근거?5.5. 현재 역사학에서의 진국의 위치5.6. 발해, 후고구려의 '진'과의 관계?

1.[편집]

1.1. 춘추시대의 진나라[편집]

1.2. 위진남북조의 진나라[편집]

  • 서진(西晉) : 사실 이 쪽도 삼국지의 통일 왕조였고 존속 기간도 훨씬 긴데도 위 진시황의 진나라에게 표제어에서 밀려났다(...).[1]

  • 동진(東晉)

1.3. 오대십국 시대 후당의 초명 진나라[편집]

1.4. 오대십국의 후진[편집]

2.[편집]

2.1. 진한시대 진나라[편집]

  • 진(통일왕조). 춘추 전국 시대의 제후국이자 전국 칠웅의 하나. 아마 해당 항목 중에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국가일듯. 뒷날 중국을 통일하는 진시황이 나왔다.

2.2. 오호십육국 시대의 전진[편집]

2.3. 오호십육국의 후진[편집]

2.4. 오호십육국의 서진[편집]

2.5. 수말당초의 할거 정권 설진(薛秦)[편집]

  • 수말당초의 설거가 난주에서 건국한 단기왕조이다. 통칭 설진(薛秦).

2.6. 당나라의 할거 정권 진나라[편집]

  • 중당(中唐)의 군벌 주차가 경원병변 때 장안을 점거하고 건국한 나라의 초명이다. 통칭 주진(朱秦), 진한(秦漢)

2.6.1. 역대 황제[편집]

한의 역대 황제

건국

초대 한원천황 주차

멸망

3.[편집]

3.1. 춘추시대의 진나라[편집]

3.2. 남북조시대의 진나라[편집]

4.[편집]

5.[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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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국 辰國

파일:진국의 지도.png

존속 기간

기원전 3세기? ~ 기원후 2세기?

위치

한반도 남부(추정)[2]

민족

삼한, 예맥

정치 체제

연맹국가와 같은 성격으로 추정

국가 원수(?)

신지·견지(대군장)
읍차·부례(소군장)
/(韓王) [3]
혹은 진왕(辰王)으로 추정

언어

고대 한국어로 추정

주요 사건

기원전 2세기
준왕의 남하, 국가 건설(?)[4]
전한과의 통교 중단[5]
? 년 소멸
마한, 변한, 진한의 성립[6]

성립 이전

부족 사회[7]

성립 이후

삼한[8]

5.1. 개요[편집]

고조선[12]과 같은 시대에 한반도 중부와 남부에 존재했던 국가 혹은 국가들의 연합체를 통칭하는 명칭.

5.2. 문헌적 증거[편집]

기록상에서의 진국이 역사에 나타나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辰韓者古之辰國也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
- 삼국지(三國志) 한(韓)의 기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凡七十八國 … 皆古之辰國也
한은 세 갈래가 있는데 마한, 진한, 변진(변한)이 있으며... 모두 78개국이다... 전부 옛날의 진국이다.
- 후한서(後漢書) 한(韓)의 기록 [13]

魏略曰 初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일찍이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에게 간(諫)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戶)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朝鮮)·진번(眞番)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 삼국지(三國志) 한(韓)의 기록
- 『위략(魏略)』 「동이전(東夷傳)」[14]

傳子至孫右渠, … 眞番·辰國欲上書見天子, 又雍閼弗通.
(위만의 왕위는)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까지 이르렀다. (중략) 진번과 진국이 천자께 글을 올리려 했으나 조선이 계속 가로막고 있어 한나라와 교통하지 못하고 있다.
- 『한서(漢書)』 권95 「서남이양월조선전(西南夷兩粤朝鮮傳)」 조선(朝鮮)의 기록 [15]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또한 진국이라는 명칭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진국을 의미한다고 파악하는 내용은 더 있다.

하나는 위만 이전 고조선 지배자인 준왕(기원전 250년경 인물)이 고조선 왕좌에서 쫓겨난 이후 남쪽 한지로 와서 한왕을 칭했다는 기록이며 다른 하나는 삼한 성립 후 마한의 맹주인 목지국 왕이 진왕이란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다. 이 때문에 진왕 또는 한왕이라는 명칭이 진국을 대표하며 이후 원삼국시대 대 중국 교류 등에 있어 목지국 왕이 대표로서 진왕을 칭한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기에는 판본에 따라 ‘진번방중국(辰番旁衆國)’, ‘진번방진국(辰番旁辰國)’ 두 가지 기록이 공존한다. 이에 진국을 역사적인 실체로 인정하는 입장이 있는 반면 진번 곁에 있는 중국(衆國), 즉 여러 나라라는 보통 명사로 해석하는 입장도 있다. 따라서 진국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또는 진국을 중국 중의 하나로 보는 등 그 설이 다양하다.

이들 중 『후한서』를 근거로 하여 진국을 한반도 남부 지역의 토착 집단 정치 집단군 전체에 대한 명칭으로서 ‘신지(臣智)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 집합 명사로 이해하기도 하며 이와 달리 『삼국지』의 자료를 취하면서 진국을 중남부 일부 지역에 성립되어 있었던 특정 집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즉, 진국이란 요동(遼東)의 세력이 점점 남하하여 지금의 경상도(진한)에 최종 정착지를 얻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한반도 중부 지역에 세운 정치 집단이라는 것이다. 또, 위만(衛滿)에게 쫓겨나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일대에 자리잡은 고조선 준왕(準王)의 치소가 진국이며, 이 준왕계의 진국이 경상도 지역으로 이동해 진한의 일부를 구성했다는 해석들이 있다

하지만 자세한 기록들이 거의 없어 교과서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당연히 통일된 학설도 없으므로, 실을 수 있는 내용도 없다. 물론 한국사 고대사 파트는 뇌피셜과 20세기 학설, 재야사학의 향연을 자랑하지만...

5.3. 관련 서적[편집]

5.4. 고고학적 근거?[편집]

기원전 7세기 한강 이남의 비파형 동검 문화는 기원전 4세기 이후 요동 및 만주 지방의 영향을 받은 세형 동검 문화권으로 전환되며 북방의 고조선과 독립적인 문화권을 형성한다. 이 시기 수많은 성읍 국가들이 나타나고 이들이 정치적 통합을 거쳐 연맹 형태로 이루어진 게 최초의 진국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아니면 가야와 비슷하게, 실제로 1개의 통합된 나라가 아니라 그냥 그 일대 작은 국가들 여러 개를 통틀어서 가리키는 명칭일 수 있다.[16]

고고학적 관점에서 진국은 기원전 3세기 ∼ 2세기경 중남부 지역의 세형동검문화(細形銅劍文化)의 중심지인 충청남도와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청동기 제작과 보급을 통해 원거리 교역을 주관하면서 일정한 범위의 정치 집단들을 통할하던 정치적 구심체로 해석할 수 있다.

진국 사회는 정치적인 지배자가 농경 의례를 비롯한 각종 제사 의식과 교역을 주관하는 동시에, 농경 기술을 지도하거나 행정·군사 기능을 겸하는 제정일치사회(祭政一致社會)였다고 본다. 그리고 이 지배 집단의 주된 묘제는 석관묘(石棺墓)와 석곽묘(石槨墓)·토광묘(土壙墓)였다. 경제적으로는 석제 농기구와 목제 따비·괭이를 사용해 벼와 함께 조·기장·수수 등 잡곡을 경작하는 농업 경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다.

근래에 조사된 진국 시기 지배자의 대표적 분묘 유적으로 충청남도 당진 소소리 유적, 부여 합송리 유적, 전라북도 장수 남양리 유적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세형동검·동과·동모·세문경과 함께 중국 전국 시대의 주조 철제 도끼·끌 등이 부장되어 있어, 대동강 유역과의 교류 관계를 시사하고 있다.

5.5. 현재 역사학에서의 진국의 위치[편집]

진국과 관련 있는 사료에 대해서는 회의와 논쟁이 많다. 북한 학계의 경우 진국을 단일 국가 체제로 인식하지만[17] 대한민국 학계는 북한 학계의 주장에 회의적인 입장이다. 이유는 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것을 고사하고라도 그 큰 땅덩어리를 가지고 나라의 구심점이 될 만한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후 시대의 삼한은 100여 개의 나라가 있었다고 하며 그 위치는 대개 현재 우리 나라의 마을이나 도시 하나 수준인데 상식적으로 대한민국만 한 크기의 나라가 망한다고 갑자기 100개의 성읍 국가 단계로 후퇴하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남한 학계는 진나라를 위서 동이전에 나온 기록을 말 그대로 해석하여 진한의 전신으로 보거나 마한 목지국 왕이 삼한을 대표하였다는 점에서 형식적인 대표자를 의미하는 정도로 파악하는 상황이다. 혹자는 이것이 우리가 단일 민족이라는 의미인 등으로 해석하나, 고대 국가는 민족 개념과 무관하다. 또한 사서에 쓰였으니 사실이라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임나일본부설도 사실인가? 고대의 사료는 대개 명확하지 않은 전달 체계와 시공간 관념에 의거하여 쓰여졌으며 이를 19세기 이후의 근현대적 관념으로 해석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는 점을 명심하자. 고대 역사 사료의 일부분을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이것이 ...의 증거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유사 역사학으로 주화입마 하는 가장 큰 길이 된다.

5.6. 발해, 후고구려의 '진'과의 관계?[편집]

이 문서의 이전 서술에는 위의 진국하고 발해 건국 초기의 국호인 진국, 궁예후고구려[18]를 세운 뒤 중간에 바꿨던 국호인 마진 등이 진국과 연관이 있다고 썼으나 근거가 너무 박약하다. 일단 이 진국의 진과 발해의 진국(震國), 마진(痲疹)의 진은 모두 그 의미가 다르며 마진은 불교의 마하진단(摩訶震旦, Maha Cinisthana)을 줄여서 끼워맞춘 의미도 있다. 고대 음가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음이 같은 이두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 역시 억지이다.

[1] 엄밀하게는 통일 제국으로서의 존속 기간이 길었다는 얘기이다. 시황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도 진(秦)은 독립된 제후국으로서 존재했었고 그 시절까지 포함하면 당연히 시황제의 진이 존속 기간이 길다. 또한 시황제의 진은 사마씨의 진(晉)처럼 중간에 왕조의 허리가 끊겨서 방계가 망명 왕조를 세워 겨우 명맥을 유지한 것도 아니다. 다만 통일 제국으로서의 수명은 사마씨의 진이 약간 길었을 뿐이다.[2] 추정인 이유는 진국이 진한이라는 이야기나 멸망 이후 마한, 변한, 진한이 사실 진국 때도 있고 몽두리채 이야기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인 것과 예족이 강원도와 그 일대에 있는 것이 그 이유다.[3] 고조선에서 온 준왕이 사용한 칭호이지만, 준왕이 진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도 하나의 일설일 뿐이기에 진의 국가 원수의 칭호를 한왕으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고고학적으로 전혀 실체가 없으며 오히려 준왕이 진의 나라 중의 하나인 목지국에게 굴복했다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4] 준왕이 남하하여 국가를 건국하고 쌓은 산성이 있다고 전해지는 산성이 있는 등 설화가 많다.[5] 위만조선의 통교 방해로 인해 한과의 직접 교류가 어려워졌으며 이는 한이 조선에 대해 적대적 정책을 취하는 계기 중 하나로 작용한다. [6] 마치 국가가 분리된 것처럼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완전한 뇌피셜. 그냥 삼한은 진국과는 별도로 한반도 각지의 마을에서 생겨난 초기 국가를 의미한다. 애초에 진국은 존재 자체가 불분명하고. 아래 설명처럼 국가들의 연합체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7] (성읍국가/도시국가)[8] 마한[9], 진한[10], 변한[11]으로 6세기에 모두 병합되었다.[9] 목지국과 그외 국가들이 주변을 주도하다 백제에게 점차 통합된다.[10] 진한의 국가중 하나인 사로국이 마한,변한,진한을 모두 통합한다.[11] 삼국시대 전기까지 구야국이 변한의 국가들을 주도하고 삼국시대 후기까지는 반파국이 주도했다.)[12] 단군조선 기원전 4세기 ~ 기원전 2세기, 위만조선 기원전 2세기[13] 후한서에는 삼한 모두의 옛땅이 辰國으로 표현되어 있어 위 항목 삼국지의 기사와 큰 대조를 보인다.[14]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에 인용.[15] 당시 전한과 무역을 하려 했다고 해석하는 이가 있는데 원문을 읽기 바란다. 천자께 글을 올리는 것 = 무역 인가? 이는 체계적 국가 성립의 근거와는 매우 무관하다.[16] 가야도 역사학계에서 서로 어느 정도 이어진 연맹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근래에는 그냥 여러 작은 나라가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17] 우리가 삼한이라 부르는 지역을 통틀어.[18] 흔히 후고구려를 건국했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처음 썼던 국호는 고려였다. 태봉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