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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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의 당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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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의 상징[2]

중국공산당
中國共產黨 [3]
中国共产党 [4]
Communist Party of China

약칭

중공당, 中共党, CPC, 중공

중앙 총서기

시진핑

정치국 상무위원

시진핑, 리커창, 장더장, 위정성,
류윈산, 왕치산, 장가오리

창당

1921년 7월 1일

창당자

천두슈, 리다자오

중앙 당사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시 중난하이

당보

인민일보

청년조직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중국 소년 선봉대

군사조직

중국 인민해방군

국제조직

공산당-노동당 국제회의

당원

약 90,000,000명

슬로건

为人民服务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전국인민대표대회

총 2,987석 중 2,157석 차지(72%)

이념&정치노선

공산주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정치적 스펙트럼

좌익 ~ 극좌

상징색

빨강

중국공산당뉴스포럼(중국어)

창당 95주년 TV광고[5]


1. 소개2. 역사
2.1. 중화민국 시기의 역사2.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3. 구조
3.1.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3.1.1. 중앙위원회 중앙정치국
3.2. 전국인민대표대회
4. 당원5. 비판
5.1. 인권탄압5.2. 분리주의 탄압5.3. 종교탄압5.4. 정경유착 및 부정부패
6. 관영언론7. 파벌8. 기타 등등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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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정당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에서 천두슈, 리다자오의 주도하에 설립된 공산당. 중국 공산당은 7월 1일이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7월 23일에 열렸다.

1949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집권당이자 사실상 유일한 정당.[6] 약칭은 중공(中共)[7]. 중국 현지에서는 더 줄여서 그냥 "당"(党)이라고도 부른다. 일당제인 중국에서는 중국 정부가 곧 중국 공산당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자국 정부를 단순히 "정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중국 국내에서 중국인들이 "당"이라고 하면 높은 확률로 중공을 가리킨다. 당원은 약 8,476만 명[8]이다.

전국대표회의라는 5년마다 열리는 전당대회가 있다. 공산당 주요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는데 여기서의 결정이 다음 회의때까지의 중국 정책방향을 결정한다.[9]

2. 역사[편집]

2.1. 중화민국 시기의 역사[편집]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소련볼셰비키당에 영향을 받고 5.4 운동의 시류를 탄 여러 지식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제1차 당대회는 1921년 7월에 있었는데, 이때 50여명의 당원을 대표해 13명의 중국인과 2명의 외국인(코민테른에서 파견)이 참가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쑨원과 연합한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아 국민당에 개별 입당하는 식으로 국공합작에 나서게 된다. 이어 소련 군사고문단이 중국에 파견되어 국민당군의 재건을 도왔다.

이후 장제스는 국민당군을 이끌고 군벌이 장악한 북양정부를 토벌하기 위한 북벌을 거의 성공시키지만, 국공합작을 깨고 국민당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으킨 4.12 상하이 쿠데타로 당원 70% 가까이가 학살되고, 취추바이나, 리다자오 등의 당 지도부가 처형되는 위기가 있었으나, 소련의 지원과 중국 국민당의 초공 작전을 격파해 국 남부에 거의 5천만을 지배하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이런 눈엣가시를 가만 둘 수 없었던 장제스의 국민당은 독일 군사고문단과 200만 병력을 동원하여 소비에트를 함락시켰고, 공산당은 8만의 병력을 이끌고 중국 대륙을 시계방향으로 반바퀴 돌아서 1년동안 대장정 끝에 산시성에 도착한다.

이어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장학량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체포하고 국공합작을 강요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장제스가 이를 받아들여 중일전쟁당시에는 어쨌든 느슨하게나마 연합해 있었다.

일본과의 전쟁이 중국의 승리로 끝나자, 미국의 중재로 잠시 휴전상태가 되지만, 장제스는 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해 먼저 군사를 일으켰다가, 1948년 겨울에 만주에서 참패하면서 전세가 기울어 1949년 중국 국민당을 대만으로 밀어내고 대륙을 통일한다. 이어 건국된 나라가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완전히 새 되어버린 중국 국민당은 후퇴하면서 중화민국 정부를 대만으로 이전시켰다.

공산당 창립 초창기에 있었던 코민테른 제1차 대회의 중국 공산당 소속 참가자 13명 중 1949년 중공이 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공산당에 남아 있었던 사람은 마오쩌둥과 둥비우 2명이었고, 4명은 혁명활동중 전사하고, 나머지 7명은 중국 국민당이나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전향하였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에 있어서 중국 국민당과 더불어 최대 후원자이기도 했는데 동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지원을 보내주었고, 좌우합작을 모색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부분적으로 협력관계를 맺기도 했다. 규모면에서 국민당에 월등히 밀리기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당대의 공산당이 야당이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렇기 때문에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도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많은 인연을 가졌었으며 분단만 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받는건 당연하겠지만 이후로 한반도가 분단되고 북한을 지원한지라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을일은 없게 되었다.

2.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편집]

집권 중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등의 병크를 저지르기도 했으나, 장제스 정권시절보다는 뛰어난 행정력을 가지고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며 대륙을 그럭저럭 운영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덩샤오핑 이래 보여주고 있는 중국의 고속성장은 공산당의 집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 공산당이면 어떠냐,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10] 그 와중에 생기는 빈부격차나 부정부패, 오염문제도 상당히 크고, 정치에 관한 불만도 크지만 조금씩 통치의 경직을 풀어주는 방법으로 그 불만을 교묘히 컨트롤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을 낮추고 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정부 비판이 조금도 허용되지 않았지만 현재는 언론의 웬만한 비판은 눈감아주는 추세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어떠한 경우의 정부비판도 금지되었지만, 현재는 중앙정치와는 거리가 먼 하급공무원 비리, 환경오염, 행정부조리 등은 보도가 가능하다. 말하자면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배합하여 국민들을 통제하고 있다.

시진핑의 권력이 늘어가는 것은 사실이고, 독재가 우려된다고는 하지만, 이는 공산당 내의 권력다툼에서 반대파를 억누르고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듯,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이지, 원래부터 참정권이 제한되어 있던 중국인민들을 더 탄압한다는 것은 아니라서, 전버전의 기술처럼 딱히 중국인민들을 못살게 구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시진핑이 1인권력을 수립한다고 해서 당장 김정은처럼 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 시진핑때나 전임 후진타오때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마오쩌둥 (심지어는 마오쩌둥이 전복한 장제스시절에도 중국국민당의 독재시기로, 국민(인민)이 참정권을 가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시절까지 인민들은 현실 정치에서는 단절되어 있었다. 그러니 시진핑이 권력을 늘린다고 해서 딱히 중국인들이 더 정치적 압박을 받는 것은 아니다.

3. 구조[편집]

3.1.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편집]

중국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통치기관이다. 전 공산당원 중 3000명 정도를 대표로 뽑아 5년에 한 번 개최하고 중앙위원회의 요청이나 전국 성급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3분의 1 이상의 요청이 있을 때는 임시로 개최할 수 있다.

3.1.1. 중앙위원회 중앙정치국[편집]

전국대표대회에서 300명 가량을 뽑아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중 25명을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뽑는다. 이 25명중 7명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다. 이 중앙위원회의 주석이 중국 공산당의 대표다.

3.1.1.1. 중앙군사위원회[편집]

중앙위원회의 하부조직으로 중앙군사위원회가 있다.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인민해방군의 최고명령권자이다. 항목 참조.

3.2. 전국인민대표대회[편집]

흔히 말하는 전인대로 국무원의 결정을 표결하는 기관이다. 헌법 개정, 법률 제정, 국가 예산결산 심사 및 승인 등을 한다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중앙위원회에서 모두 결정된다. 5년에 한 번 열리고 여기서 국가주석, 국가부주석, 중앙군사위원회주석, 국무원총리, 최고인민법원장, 최고인민검찰원장 등을 선출한다.

4. 당원[편집]

중국 공산당의 당원 선발 절차는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워서 우선 공산주의청년단이라는 예비조직에 들어간 뒤에 약 3년이 걸리는 능력검증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거꾸로 실력있는 사람들을 당원으로 받아서 체제를 유지하고 당 내의 세대교체를 하려고 하는 기능도 있다고. 실제 사례로 중국 베이징대학 학생들은 1991년에는 5%, 2009년에는 10%가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는 등 점점 증가추세다. 심지어 처음엔 차단되었던 자본가들도 많이 입당했다. 그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는 '꽌시', 즉 인맥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 하지만 이것이 중국만의 특별한 문제점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개발도상국인 인도나 필리핀은 아예 정치를 가업으로 삼는 가문이 있으며, 민주제도가 정착된 선진국인 일본,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유명 정치인의 자녀나 친인척은 쉽게 정계에 진입하기 때문이다. 또한 유력정치인과 기업이 유착하여 불공정한 특혜를 받는 정경유착도 상당히 심각하긴 하지만, 이 또한 많은 개도국에 있는 공통적인 현상이며, 선진국의 경제성장기에서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중국만의 문제점으로 보기는 힘들다.


공산당의 지휘부를 이런 개국공신의 2세가 상당히 장악하고는 있으나, 핵실험을 주도하고 있는 북한보다 심각하지는 않다. 개국공신 2세들이 당 상층부에 진입하는 것은 상당히 유리하기는 하지만, 공청단(공산주의 청년단)이라는 당의 유소년 조직에서 제도적으로 고급당료가 수혈되고 있기 때문에, 2세들이 대부분의 고위직을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지방조직[11]에서 실력을 검증받지 못하면, 최고위직까지 오르기가 힘들다. 아무리 부모 덕을 보더라도 20대 중반부터 시작하는 당조직 말단에서 30년 안에 4-5 단계의 직위를 한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고속승진해야 상무위원(정원7명)의 후보자로 들 수 있는 당 중앙위원회(정원 205명)에 진입할 수 있다. 개인 비리에 연루되거나 혹은 실적이 나쁘면 이 과정에서 미끄러져 중앙위원회까지 오르기가 불가능.[12] 2013년에 출범한 중국 최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 7인 상무위원회의 멤버를 봐도 시진핑만이 개국공신 아버지의 덕을 볼 수 있었던 정통 태자당이며, 나머지 6명(리커창, 장더장, 위정성, 류윈산, 왕치산, 장가오리)은 태자당이라고 해도 부모의 배경과는 거의 무관하다. 태자당의 범주에 드는 사람들의 부모는 대장정 이후와 공산화된 1949년 사이에 당 고위직에 진입한 자들로서, 대략 800여명-1000명으로 보고 있다. 이들의 자녀만 수천 명이며, 북한의 지배계층인 김일성-오씨 일가들 처럼 소수가 아니기 때문에, 태자당으로 고위직에 오르려면 아버지 배경만으로는 부족하며, 본인의 능력도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덩샤오핑의 9자녀들 가운데서도 장관급(전국 정협 부주석)까지 오른 자는 단 한명 장남 덩푸팡 뿐이며, 이자리도 거의 장애인 할당으로 얻은 자리다.[13]

5. 비판[편집]

일당독재 국가 답게 심각한 인권 문제가 존재한다.

5.1. 인권탄압[편집]

일당 독재에 대한 반대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경직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정부에 비판적인 인권 운동가들을 "국가전복 혐의" 또는 "허위사실 유포"로 몇 년간 가두는 건 예사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는 서명이나 항의와 같은 평화적인 민주화 운동을 했음에도 국가전복선동혐의로 체포되어 11년형을 받다가 옥사했으며, 여러 인권운동가들이 체포되어 "국가전복선동", "허위사실유포"와 같은 어거지 혐의로 수년이상의 중형을 받고 있다.

5.2. 분리주의 탄압[편집]

특히 티베트인들과 위구르인들과 같은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에는 "분리운동"이라며 강경대응을 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중국측 표현으로는 분리주의운동가) 들을 몇년씩 옥에 가두는 것은 예사이다.[14] 물론 이런 현상은 다민족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중국의 탄압은 매우 선제적이고 철저하다. [15]

5.3. 종교탄압[편집]

종교에 대해서는 헌법상으로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국가가 통제하고 있고, 특히 국가적으로 사교로 지정된 파룬궁은 엄청난 탄압을 받고 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체제가 뒤집힐뻔한 엄청난 종교민란을 겪었기 때문에(황건적, 홍건적, 태평천국), 교주를 신격화하는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는 엄격한 면이 있는데다. 서방과 이어진 외래종교인 가톨릭개신교는 불교나 이슬람교에 비하면 더더욱 경계하는 편이다. [16]

근대 서양의 침략을 받았고 현대에도 미국을 위시한 서방 진영과의 대립 때문에 기독교를 서방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 보는 것. 하지만 기독교는 중국에서도 수백년 역사를 가지는 것이며, 각 왕조나 공산정권 수립 이후 상당한 탄압을 받았음에도 중국에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전통적인 중국인들의 비종교적 성격과는 안 맞는 것이 기독교였다. 그래서 역사 내내 기독교를 믿는 이들은 인구 비율로 따져보면 그 비율이 정말 극소수였다. 인도에서의 불교 수준이었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어느정도 제한이 풀어졌기 때문에 신자수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으며, 현재 개신교 신자는 4천만명 내외, 가톨릭 신자는 500만에서 1200만 내외로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이다.

불교야 인도에서 기원되었지만 이미 중국 현지에서 오랜 시간 동안의 로컬라이징을 거쳤기 때문에 단순한 종교가 아닌 문화와도 연결시켜 홍보하는 분위기고, 이슬람교는 위구르 족 등의 소수민족들을 다독일 필요가 있기 때문에 관대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라마단 행사를 금지시킨거보면 이슬람에 그리 관대하지 않다. [17]

5.4. 정경유착 및 부정부패[편집]

많은 개도국과 마찬가지로 중국도 정경유착과 부패문제가 심각하다. 사실 중국의 대부분 재벌은 공산당 실세와의 유착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18] 정치적 후견인이 권력투쟁에서 패해 몰락하면 그룹이 해체되는 경우도 많은데, 그 대표적인 예가 보시라이와 유착되어 있던 다롄 스더 그룹. [19] 중국 당국도 이에 대한 문제점을 알고 있고 시진핑 주도로 반부패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다.[20] 다만 일각에서는 이 운동으로 시진핑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들어 시진핑의 1인 독재로 발전할 것이라는 비판을 제기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자세한건 시진핑 문서의 비판 문단 참고.

자세한 것은 중국/문화 검열, 중국/인권, 중국/정치 문서로.

6. 관영언론[편집]

  • 인민일보 (런민르바오)

  • 환구시보 (환추스바오) - 인민일보에서 출자해서 만들었지만, 반관영이다. 꼭 인민일보나 중국 공산당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공산당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적는 인민일보가 점잖은 논조를 표방한다면 환구시보는 그와 정반대로 상당히 국수적인 논조를 나타낸다. 공산당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신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산당 내 강경파들의 속내가 어떠한지는 알수는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유용한 편. 환구시보는 영어로 치면 글로벌타임스 정도 된다. 환구시보에 대한 중앙일보 기사

7. 파벌[편집]

8. 기타 등등[편집]

2016년 기준으로 창당된 지 95주년을 맞이하였다. 관련 기사 백 년을 바라보고 있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중앙일보관련 기사

야당 견제가 없는 중국공산당이 왜 멀쩡한지에 대한 기사 #

중국 공산당이 마치 중국 공자당되는 것처럼 유교화되고있다는 중앙일보 기사 #

모택동 시절 이후 다시 재조명받고 있는 공자 #

도올 김용옥차이나는 도올 방송에서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당독재 개념과는 좀 다르고 워낙 크고 체계, 토론 제도가 잘 되있고 각 계파별로 서로 견제를 해서 오히려 다당제보다 더 민주적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후진타오의 퇴임시 부정부패가 문제라는 발언이나 중국에서 원로한테 훈수 받는 제도나 보시라이, 저우융캉, 링지화 등 호랑이 4인방 같은 사례를 들면서 비리가 많다는 걸 말하기는 한다.

9. 관련 문서[편집]

[1] 소련 국기와 비슷하긴 하지만 낫 모양이 다르다. 그리고 별도 없다.[2] 당사국 헌법에 정의됨[3] 정체[4] 간체[5] 이 문단은 중국 공산당의 선전이 아닌 현재 중국 공산당이 어떻게 선전하는지 보여주는지 드러내기 위해 문서에 넣었다. 절대 선전을 퍼트리는 것이 아니다! [6] 정확히 말하면 중화인민공화국에는 공산당 말고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에 참여한 8개의 민주당파 정당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정치활동만 하고 있는 정당이며 정권 교체는 실질적으로 할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7] 1988년 이전까지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공'이라고 불렀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일개 국가가 아닌, 그냥 중국 공산당 당국, 혹은 중국 공산당 정권이라는 의미로.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당시 수교중이던 중화민국 때문이었다. 한국-대만 관계 참고.[8] 중국 인구의 약 6.3%를 차지하며 세계에서 2번째로 규모가 큰 정당이다. 1위는 인도의 바라티야 자나타로 약 1억 1000만 명의 당원을 가진다.[9] 서성, <한 권으로 읽는 중국 문화>, 넥서스, 2005, p38-40[10] 실제로 바이두에 "왜 중국이 일당제여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공산당이 모든 걸 다 해주는데 다당제가 왜 필요하냐"는 답변이 올라온 사례가 있다.[11] 중국에서 최고위직에 오르려면 지방 행정 실무 경험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시진핑만 하더라도 허베이, 푸젠, 저장 성 등을 거쳤다. 이렇기 때문에 베이징에서 주재하는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오를 수 있는 직위가 장관급이 한계이다.[12] 물론 부모가 대단한 사람이거나 고위직에 후견인이 있으면, 문제가 생기더라도 빠져나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장쩌민 같은 경우는 1980년대 상하이 지역의 부정부패 문제 때문에 날라갈 뻔했으나, 보시라이의 아버지인 건국 1등공신 보이보가 구해줬다고 한다.[13]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중쉰급의 아버지를 둔 보시라이(개국공신 보이보의 아들)는 7인에 뽑히는 것이 유력했으나, 2012년에 비리로 몰락했다. 보시라이의 몰락은 역설적으로 시진핑의 집권을 도왔는데, 태자당 내 유력 주자 한명이 날라가면서 당 중앙위의 태자당의 표가 분산되지 않고 시진핑으로 집결된 것이다. 보시라이 몰락 이전의 시진핑은 당내 예상 서열이 높아봐야 4-5위 정도로 상무위원 선출도 턱걸이였다.[14] 하지만 일부 중까들이 주장하듯이 소수민족을 말살하려 한다거나, 혹은 강제동화책을 쓴다는 이야기는 전혀 사실무근이다. 아직도 한국어(조선어)를 모어로 쓰는 조선족만 보더라도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고 나서 모든 민족의 평등을 주장하기 위해 표준중국어의 명칭을 중화민국 시절의 국어가 아니라 한족의 언어라는 "한어"라고 한 것만 봐도 그렇다. 장제스의 중화민국 시절에는 소수민족의 정체성이나 자치를 아예 인정하지를 않았다.[15] 물론 다민족국가에서 특정 민족의 독립이나 분리주의 운동은 내전 및 국가분열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들은 소수민족을 순순히 독립시켜주기보다는 크고 작은 형태로 탄압하고 있다.중국에 비해 외형상 서방식 민주국가의 형식을 가진 인도만 보더라도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은 엄청나게 탄압한다. (인드라 간디라지브 간디 총리가 테러로 암살당한 것도 타밀족 분리주의자들의 소행이었다) 딱히 중국만이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을 강경히 탄압하는 것은 아니다. 인도네시아가 벌인 잔혹한 동티모르의 독립운동 탄압은 유명하고 (인도네시아 특수부대가 동티모르인들을 수없이 학살했다), 터키같은 나라는 2000년대 이전만해도 쿠르드어를 사용 금지하는 강제동화책을 폈다. 민족적 문제는 아니지만, 미국도 남부가 독립을 선언하자 전쟁을 벌여서까지 이를 진압한 바 있다. [16] 다만 파룬궁은 사이비 종교 보기엔 무리가 있고 오히려 본격적인 탄압 이전엔 인민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었다 하여 중국 정부로부터 여러 표창도 받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장쩌민이 파룬궁 수련자의 숫자가 공산당원 숫자를 넘어가자 뜬금없이 이들을 권력의 위협이 되는 반체제 집단으로 지명하여 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장쩌민 본인을 제외한 상무위원 6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이를 실행한것으로 아래 나오는 시진핑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중국공산당 본인들의 언급과는 달리 시스템에 굉장한 헛점이 있다고 밖엔 볼수 없는 사례이다.[17] 하지만 이슬람의 많은 가치는 세속국가인 중국과 충돌한다. 이런 세속정부와 이슬람이 충돌하는 예는 비단 중국 뿐만 아니다. [18] 알리바바 그룹의 마윈이나 텐센트의 마화텅과 같은 이커머스나 IT그룹들은 좀 덜하지만, 건설-부동산기업은 이런 실세를 끼지 않으면 성정할 수 없다. 사실 이런 종류의 기업들이 정경유착의 원흉이 되는건 경제성장기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한보그룹이 대표적인 예. [19] 하지만 경제성장기에 정치권과 유착된 재벌이 등장하여 불공정한 특혜를 받는 것은 중국의 문제만도 아니며 선진국도 경제성장 초반기에 비슷한 과정을 겪은데다가 한 중국과 비슷한 소득의 개도국들은 대부분 부패문제를 겪고 있다. [20] 허나 이후 시진핑도 탈세와 친인척 비리가 발생함에 따라 보여주기식 쇼였다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