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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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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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화에 그려진 주막

최후의 주막으로 알려진 삼강주막


조선시대 후기 상품경제가 발전하면서 생긴 식당술집여관우체국이다.

1. 역사2. 주막의 모습들3. 조선식 체크카드?4. 기타5. 각종 매체에서

1. 역사[편집]

고려시대에는 주막이 아니라 술집(주점)의 형태로 성종대에 개경에 처음으로 주점의 설치를 허가하고 숙종 때 민간주점이 처음으로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도 술 파는 집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그 당시 개경에 좌우 주점을 두고 각 주와 현에 주점을 내었는데 이러한 관설주점은 당시 해동통보, 동국통보 등과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시키기 위한 유인책이었다고 한다. 또 불교 사원들은 세금과 역을 면제받고 술, 국수, 마늘, 소금 등을 판매하면서 숙박업까지도 하였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복합시설로서 주막의 형태는 임진왜란 후 등 관설 (院)의 기능이 쇠퇴하고 참마다 참점(站店)을 설치하여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등장하는데, 이 시절의 주막은 그렇게 규모가 크지 않았다. 1604년에 편찬된 갑진만록(甲辰漫錄)을 보면 영남이나 삼남대로변에 있는 주막에도 술과 말을 먹이기 위한 풀, 그리고 땔나무밖에 없어서 여행객들은 여행에 필요한 생필품을 두세 마리의 말에 나누어 싣고 다녔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 대동법이 시행되고 상품경제가 발달하여 화폐 유통량이 증가하면서 본격적인 주막의 형태가 된 것으로 본다. 이 시설에서 일하는 여성 종업원을 주모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만 해도 존재한 업종이였으나, 교통이 발달하면서 급격하게 사라졌고 최후의 주막으로 알려진 삼강주막의 주모 유옥련 씨가 2005년에 사망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삼강주막은 2005년 12월 경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고 2007년까진 빈집으로 방치되다 2008년 해체 후 관광지로 개발되어 옛날처럼 술이나 음식 등을 판매하기도 하지만, 본래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1][2]

주막이 점차 사라지던 시기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초기부터인데, 이때 신작로가 뚫리고 자동차들이 많이 다니면서[3] 많은 주막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세태 변화에 빠른 주모들은 도로 공사를 하러 나온 측량사나 자동차 운전기사들에게 돈을 찔러주거나 술을 먹여 꼬드겨서 자기네 주막에 사람들이 들러갈 수 있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휴게소가 된 셈. 실제 고속도로나 국도에 있는 휴게소의 상당수가 옛날 주막 터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름은 변경되고 술은 안 팔지만, 행객들이 쉬다가거나 눈을 붙이는 용도는 그대로인 셈이다.

2. 주막의 모습들[편집]

산간벽촌에도 주막이 없는 곳이 없다. - '조선풍속집'(이마무라 도모, 1909)


큰 지역 뿐만 아니라 작은 시골지역까지 주막이 존재하였으며, 굳이 마을이 아니여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마다 주막이 존재했다.

음식점과 술집, 여관, 심지어는 우체국까지[4]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당하는 모든 서비스를 제공해주다 보니, 해당 지역 주민들의 양반, 평민, 천민이라는 신분을 뛰어넘은 교류의 장소이자, 지나가던 나그네들에게도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는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등, 없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시설 중 하나였다. 또한 마을에 주막이 단 한곳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곳의 주모는 가히 마을주민들의 대모로 통하기도 했다. 또한 인터넷, 신문이나 TV, 라디오가 없던 시기에[5] 정보유통과 여론형성을 담당하는 일종의 창구였기도 했다.

어떠한 마을에 임금님의 행차가 지나가거나, 무언가 중요한 행사가 벌어질 때는 주막을 잡기위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사람들을 상대로 숙박을 제공해주는 여관같은 시설이 당시에는 주막이나 객주말곤 없었다. 자리가 없어서 합숙을 하기도 했고, 합숙으로도 안돼서 마구간에서 자는 등의 일도 있었다고 기록으로 전해진다. 구한말에 실제 이런 주막시설을 이용해 본 영국여성 이사벨라 비숍은 '좁은 방에 몇명이 들어사며 자는데 벌레가 들끓고 방은 화상 입을 정도로 뜨거웠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 시절 주막은 온돌을 좀 세게 틀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런 시설을 경험해 보지 못한 외국인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주막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숙박만 하면 1냥, 삼시세끼 다 챙겨먹고 사소한 팁까지 챙겨주면 2~3냥 정도의 요금이 나왔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여관임에도 소란은 별로 없어서 가끔식 약주먹고 소란을 잠깐 부리는 아저씨들이나 조랑말이 지들끼리 싸우는 정도가 다였던 듯.

물론 큰 싸움이 없었던 건 아니라 가끔 양반님네를 수종하던 노비들이나 머슴들끼리 싸움이 붙어서 상전인 양반님네들이 뒷수습하느냐 쩔쩔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보니 장소에 따라서 각종 범죄자들과 노름꾼들이 주막에서 술판과 도박판을 벌이는 경우도 꽤나 많았는데 도박판이 그렇듯 돈 문제로 싸움이 벌어진다거나 꽐라가 되어서 진상짓을 한다거나 하는 일도 많이 벌어지는게 당연했으며, 중요한 범죄사건이 벌어졌을 때 범죄자들도 일단 도망칠 때 잘 곳은 있어야 되니까 주막에서 묵는 경우가 많았기에 무슨 사건사고만 터졌다하면 포도청같은 곳에서 범죄자를 색출하려고 주막부터 뒤지는게 관례였다. 북부지방에선 쌀밥 대신 기장이 나왔다고 한다.

관직을 가진 사람은 지방으로 출장나가는 관리들은 보통 그 지역의 동헌 같은 관청이나 파말마를 관리하는 역같은데서 숙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산길 등 관아가 가깝지 않은 경우 주막에서 묵었다. 하지만 사적인 일로 지방에 내려갈 경우에는 주막이 없으면 민가에서 하룻밤을 청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물론 이는 권력이 미미한 관직이거나, 권력이 있어도 이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에 한하며, 권력도 있고 이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타입이라면 자연스럽게 행차가 크며 요란해진다. 이 행차소리를 듣고 지역유지들이나 지방관이 알아서 마중을 나와준다. 이런 경우는 잠자리는 기본 제공이고, 권력의 정도에 따라 술자리에 기녀에 거마비까지 두둑히 찔러주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높으신 분들이 투숙객들이 가득 찬 상태인 주막으로 오면 다른 투숙객들이 골치아파졌는데, 으레 높으신 분들은 독방을 원했기 때문. 이럴때는 신분이나 돈의 힘을 이용하여 투숙객들을 내쫓는 일도 빈번했다고 한다. 그런데 신분을 내세워 독방을 원했던 높으신 분들이 큰코를 다친 사례도 많이 전해지는데, 조선시대에 교리직이였던 어떤 양반이 첫 지방출장에서 신분을 내세워 한 방의 모든 투숙객을 쫓아냈다. 그런데 그 투숙객 틈에 신분 내세우지 않고 묵고있던 판서[6]가 끼어있었다. 산소에 제사를 올리러 가던 도중 우연히 주막에 묵게 된 것. 판서는 그 자리에서 교리를 꾸짖고, 후일 이 사실을 임금에게 고해 파직시켰다.

3. 조선식 체크카드?[편집]

1903년조선을 찾은 러시아 작가 Y.시에로셰프스키의 기록 <꼬레야, 1903년 가을>에 따르면, 여행길에 처음 묵는 주막에 돈을 맡기고 영수증을 받은 다음, 그 영수증으로 여행길에 있는 다른 주막에서 돈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행의 마지막에 묵는 주막 주인은 영수증을 회수하고 처음 주막에 맡긴 돈에서 그동안 사용한 금액을 차감하여 남은 금액을 거슬러 줬다고 한다.

주막에 한정되어있으나 주막에서 발급한 영수증을 마치 오늘날의 체크카드처럼 사용했던 것이다. 중세 수도원들이 수행했던 자금 보관 및 결제 기능과 유사한 점이 흥미롭다. 렛츠고 시간탐험대 시즌3 8화에서 재현했다.

4. 기타[편집]

왜 조선의 숙박업이 같은 시기의 중국이나 일본, 서양과 비교하면 초라한 편인 주막 정도만 발달했는가는 여러가지 설이 있겠지만 어느정도는 원인이 양반들에게 있다는 얘기도 있다. 조선시대 양반의 가계부를 보면 전체 수입의 1/3 정도를 접빈에 썼다고 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봉 1억인 사람이 3,000만원을 손님에게 썼다는 이야기. 한마디로 그 동네 유력한 양반집은 일종의 호텔 비슷한 역할을 했다는 것.[7]

도대체 뭔 손님들에게 그렇게 돈을 썼었냐 하면, 친분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개는 바로 길가는 나그네들. 옛날 야사나 동화, 사극을 보면 나그네들이 그 고을의 좀 살만한 집 문앞에 가서 하룻밤만 신세지고 싶다고 하면 그 집주인이 성격이 고약하거나 집안에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재워주고 식사도 주고, 노잣돈까지 쥐어주는 얘기를 들을 수 있다.

접대의 관습에서 보듯 오죽하면 김삿갓의 시조 중 황혼축객비인사라는 말까지 있어서 밤늦게 재워달라는 나그네를 그냥 쫓아보내는 건 패륜으로 봤을 정도라니. 월남 이상재 선생도 젊을적에는 양반집의 식객으로 있었고 전봉준 같은 경우 흥선 대원군의 집에 눌러앉아 식객 노릇을 하기도 했다. 양반들이 얼마나 이를 중요시했는지는 지금도 양반 종가집에 남아 있는 말인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뜻.

양반들이 이렇게 손님을 대접하는데 열심이었던 이유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자신의 관대함과 깍듯한 손님 접대를 보여줘서 인심을 얻고 자신은 양반이라 베풂을 실천한다고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또 교통, 통신이 좋지 않아서 타지의 정보 모으기 힘들던 시기에 이야기를 하며 양질의 정보도 얻어낼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재산을 불리거나 손실을 최소화 하는데 이용했다. 대표적인게 경주 최부자 문중이다. 이는 접대의 관습과도 약간 이어지는데 해당 문서를 참고할것.

한 마디로 숙박비를 안 받으면서 번듯한 방에 재워주고, 운 좋으면 식사도 공짜에 노잣돈도 주는 호텔(?)들이 고을에 널려 있는데 숙박업이 기를 펴긴 어려웠을거란 추측이란 이야기.

그러나 그나마도 상당수의 식객을 먹여주고 재워줄 만큼 재력있는 양반 가문은 수도인 한양에서도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식객들 자체가 해당 양반 가문의 정치적 추종세력 등과 같이 가문에 이익이 될 만한 사람들만 받아들였다. 더욱이 숙박업은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야간 문화, 교통 등 사회적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야 발전될 수 있는데 조선은 동시기 타 국가들과는 달리 이러한 부분의 발전이 조선 후기에 가서야 비로소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야간 문화가 발달하기 위해선 밤에도 불을 밝히기 용이한 조명 시설이 필수적이었는데 동시기 유채꽃을 대량으로 재배하면서 저렴해진 유채유를 조명 기름으로 사용하면서 야간 문화가 발달하게 된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지배계층 외에 일반 서민들이 사용하기엔 조명용 물건들의 가격이 매우 고가였다.[8] 그렇기에 일반 백성들은 물고기 기름, 송진 등과 같은 악취와 그을음이 많이 나는 재료들을 대체품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각자가 필요한 만큼 자급자족하는 수준이었다.[9]

하지만 주막이 단순한 동네 모텔 정도는 아니었나보다. 언제부터 이런 시스템이 정착됐는지는 몰라도 거의 모든 주막 간의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망이 있었던 모양.링크

5. 각종 매체에서[편집]

언급한 대로 오늘날 알려진 여객업소로서의 주막과 같은 시설이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시대이후인 것이 분명하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고려시대 이전에 여객 업소가 등장하면 무조건 고증오류다!'고 할 수 있냐면 그렇지도 않다는 점. 아시다시피 조선시대에서 과거로 올라갈 수록 사료가 부실해지고, 과거 역사서는 왕사를 중심으로 쓰여졌으므로 주막같은 사관이 보기에 시시한 것은 실재하였지만 사료로 남아 있지 않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에 이미 기생이 있는 술집이 있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근거는 신라김유신천관녀라는 기녀를 만나러 술집에 다녔다는 사료.[10] 이 일화는 고려시대에 쓰인 파한집에서 유래하므로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으나, 그렇지도 않은 것이 실제 천관녀를 기리는 천관사(天官寺)라는 절이 7세기 경주시에 지어진 것이 분명하니,(지금도 유적이 조금 남아있다) 신라에 기녀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삼국시대에 기생술집이 있었다는 근거는 우연히 역사적 인물인 김유신이 천관녀에게 반했기 때문이고,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일화는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고 당연히 신라에 술집이 있었다는 사실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막과 비슷한 숙박, 접객 시설도 단지 사료에 남아있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있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즉, 주막같은 시설이 조선 시대 이전에 있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없었다고 단언할 수도 없으므로 무조건 고증오류라고 할 수도 없다는 말. 다만, 설령 있더라도 흔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11]

조선 후기를 다루는 사극은 물론이고 심지어 원삼국시대를 다루는 사극에서조차도 등장하는 단골요소. 등장인물들이 서민적인 술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계획을 꾸미는 시츄에이션을 넣기엔 이보다 적절한 장소가 없기에 넣는듯. 언급한 대로 고증에 맞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사극은 아니지만 부여-고구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바람의 나라에도 주막이 등장하며, 동동주와 막걸리를 판다.(...) 판타지니까 관대하게 넘어가자

렛츠고 시간탐험대/시즌3 7~9화에 주막 준비 및 운영하는 모습이 나온다.

[1] 유옥련 씨 생전에 찍힌 사진들을 보면, 삼강주막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로 보수한 전형적인 시골집으로 주변에 논과 풀밭, 강둑이 있었는데, 2008년 해체 후 복원하면서 황토벽에 초가지붕 얹은 전혀 다른 건물로 만들어 버리고 주변도 싹 밀고 정비해서 옛 자취는 완전히 사라진 단순한 관광지가 되었다. 옛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건 주막 내부에 보전해 놓은 유옥련 씨의 외상장부(문맹이라 벽에 금을 그어 표시했다.)와 주막 뒷편의 느티나무 뿐이다.[2] 생전에 찍힌 다큐 영상을 보면 유옥련씨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숙박업소 기능은 사라지고 동네노인들 마실 나와 간단한 안주에 소주 한잔 걸치는 점방 정도의 역할에 머물렀다.[3] 물론 이때에 자가용 대중화가 이루어졌다는 얘기가 아니며(자가용 대중화는 19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이루어졌다.) 걸어다니거나 타던사람들이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가 늘었다는 뜻이다. 애초에 이때는 일본에서도 돈많은 사람들이나 자가용을 몰수있었던 시기였다.[4] 서신이나 물품을 전달하거나 받는데에 주막이 거점 역할을 했다. MBC 드라마 상도에서 우체국으로서의 주막의 역할이 잘 드러나 있다.[5]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시대에도 조보라는 신문이 있었지만 관료나 양반가등 한정된 사람만 읽을 수 있었다. 선조연간에 민간발행된 적이 있지만 선조가 조보가 민간발행된다는 사실을 알고 관련자를 처벌해서 현대적인 의미의 신문이 조선에서 발행되게 된건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였다.[6] 3 바로 밑인데다가 이호예병형공, 즉 6명밖에 없는 고위 관리로, 쉽게 말해서 형조판서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이다. 당시 기준으로 궁궐 내부까지 사인교를 타고 갈 수 있었던 직책. 정부청사 정문까지 최고급 세단을 타고갈수있는사람이 대통령(왕), 총리(정승), 장관(판서)정도 뿐일 것을 생각해보면 그 위치가 짐작이간다.[7] 엄밀히 말하면 '식객'이라 해서 자신의 정치파벌에 합류시킬 수 있는 전도유망한 젊은 관료나 재담꾼, 유명인 등을 자신의 집에서 먹이고 재우며 관리를 하는 것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개나소나 아무에게나 먹이고 재워주진 않았다. 삼국지에서 조조에게 패한 유비가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할때 바로 이 식객 자격으로 대접을 받았다.[8] 당시 왕족 및 고위 양반계층들은 밀랍을 이용한 양초나 참기름(!!)을 조명으로 사용하였다.[9] 에디슨의 필라멘트 발명이 인류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해 본다면 값싸고 질좋은 조명기기가 인류의 생활 및 문화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10] 김유신이 천관녀라는 기녀에 빠져 술집에 다니다가 어머니의 꾸지람을 듣고 말머리를 베었다는 일화. 자세한 내용은 김유신, 천관녀 문서 참고바람. 나중에 김유신 본인도 천관녀가 딱했던지 그녀를 기리기 위해 천관사라는 절을 지었다.[11] 기녀를 동반한 고급 숙박업소가 아닌 주막과 같은 대중들이 이용하는 숙박/요식업은 발달이 더디었을 가능성이 높다. 위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사회적 인프라, 적정수준의 수요가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