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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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용어 정립3. 프롤로그4. 전개
4.1. 루터와 95개조 반박문4.2. 신성로마제국의 혼란4.3. 스위스의 개혁가들4.4. 중간 체크: 개신교는 얼마나 퍼졌는가?4.5. 분열된 제국4.6. 가톨릭의 반격: 대항종교개혁4.7. 번외: 오스만 제국
5. 종교개혁이 남긴 것들
5.1. 개신교의 출현5.2. 근대의 출현5.3. 이단심문과 마녀사냥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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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formation[1], Protestant Reforma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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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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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敎改革


1. 소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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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기독교 내부의 개혁 운동

일반적으로,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타락을 비판하는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한 개신교 종파들의 출현을 일컫는다. 한편 그동안의 연구로 영미권에서도 가톨릭 교회의 자체적 쇄신 운동이 조명되면서, 넓게는 가톨릭 교회의 자체적인 쇄신 운동까지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이는 단순히 기독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역사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약 천 년 간의 중세를 끝내고 근대 유럽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종교 개혁의 결과,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하여 나온(입장에 따라서는 분리 된) 사람들을 개신교라고 한다.

2. 용어 정립[편집]

흔히 ‘종교개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처음에는 유럽사에서 워낙에 큰 사건이라 the Reformation처럼 고유명사로 쓰였고[3], 다른 종교의 개혁에 대해서는 정관사 the가 빠지고 소문자로 reformation으로 쓰였는데 현대에 와서 기독교, 유럽 중심적이란 비판 때문에 가장 좁은 의미의 종교개혁인 개신교의 출현 사건의 경우, Protestant Reformation이라는 중립적 용어가 생겨났다. 그렇다고 기존용어가 완전히 폐기 된 것은 아니다. 워낙 오래 관습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병용하고 있다. 우리 식으로 굳이 번역하면 가톨릭을 포함하는 의미로 쓸 경우'기독교 개혁', 개신교의 출현만을 의미한다면 '프로테스탄트 개혁'정도로 번역해야 겠지만, 그러면 또 번역상의 난제가 생기는 탓에[4] 굳어진 종교 개혁으로 사용하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종교 개혁이란 표현을 그대로 써주는 편인데,[5] 그 갈라진 양상을 강조할 때는 교회 분열 또는 종교 분열이라고도 한다. 즉 소위 "종교개혁"이라고 일컫고 상세한 내용은 분열이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또한 일부 천주교 보수파에서는 개신교의 출현만을 일컫는 경우 '종교 개혁'이라는 표현 대신 '종교 분열'이라는 표현을 즐겨쓰기도 한다. 이는 교회 역사상 루터 말고도 각종 분열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대표적으로 정교회와의 동서 분열(The Great Schism이라고 한다)이 있고, 그 다음에야 아비뇽 유수, 그리고 루터가 있다.

또한 종교개혁에서 프로테스탄트의 태동만을 주목하는 것은 그림의 한쪽 면만을 보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에 대응하여 대대적인 가톨릭의 쇄신 움직임도 일어났다. 예전에는 독일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가 처음 대항 종교개혁으로 명명한데에서 유래 학술적으로 이 개혁을 대항 종교개혁, Counter-Reformation이라고 불렀으나,[6] 현재에 와서는 이 용어가 지나치게 한쪽에 치우친 용어임이 지적되어 '가톨릭 종교개혁(The Catholic Reformation)'이라고 부른다.

3. 프롤로그[편집]

흔히 종교개혁의 시작을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면죄부 판매에 반대해서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을때로 보는게 일반인들의 시각이지만 학자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 그에 맞선 가톨릭 교회의 반종교 개혁 모두 시대적 산물이고 내적인 변혁이라는데 견해가 보통이다.[7] 다만 개신교계에서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1517년 10월 31일종교개혁 기념일[8]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인물사적인 관점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9세기 토머스 칼라일마르틴 루터가 없었더라면 하는 if 떡밥으로 루터가 없었으면 프로테스탄트도 없고 독일의 분열도 없고 프랑스 혁명도 없고 미국의 독립도 없었다는 이런식의 책을 써서 유명해지긴 했지만 근대 사학의 입장에서 이러한 영웅주의 사관은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추세였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부터 두드러 졌는데 종교개혁 다룬책에 루터나 츠빙글리 같은 인물에 대한 연구 자체가 빠져버리고 대략적인 서술만이 남은 경우도 남아서 1970년대부터는 인물사 경시에 대한 반성이 이뤄져서 시대적 사건과 함께 균형적으로 연구하는 추세다. 다시말해, 오늘날 학자들은 종교개혁을 루터와 츠빙글리와 가톨릭 쇄신가 등 개인들에 맞추는 영웅주의적 사관을 배격함과 동시에, 종교개혁이 어떤 필연성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사관도 배격한다. 이는 다른 역사학 분야에서도 유사하다.

신학계 역사 신학의 입장에선 현재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역시 인물사적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종교개혁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던 고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와 종교개혁 바로 이전시기 '후기 스콜라 철학'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중이다. 종교개혁 시기 수백년 전 중세 가톨릭 교회 자체는 물론이고 유럽 각지에서 개혁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루터도 이전의 개혁적 분위기나 사상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일으킬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교회론에 대한 근본적 회의주의 운동이 기존에는 번번히 실패로 끝나고 몇몇은 가톨릭에게 이단으로 찍혀 음지에 숨어있어야 했던 반면, 루터와 칼뱅 등이 양지로 끌어내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결과가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9] 종교개혁가들에 대한 연구 또한 이뤄지는게 사실이다.

사실 언제부터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봐야되는지는 논란이 있긴 하다. 중세 초기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 모습이 오늘날에 비해 상당히 부패하여 있던 것은 크게 이견이 없고[10], 성직매매, 수도원(수녀원)의 타락, 교회의 세속권력, 가톨릭교회가 사회 현실과 타협한 여러 풍습등의 문제는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점이기 때문에 15~16세기의 개혁가들이 처음으로 주장한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부패상을 가톨릭 신자들이 손놓고 바라본 것은 아니다. 중세이전부터 교회 구성원들이 부패와 매너리즘에 빠질때마다 그런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수도원 운동이 개혁의 모습으로 볼수 있고, 심지어 루터교가 출현하던 시기에도 수도회들의 쇄신 운동은 단절되지 않았다. 오늘날 가톨릭에서 존경 받는 쇄신 운동가들인 성녀 테레사 데 아빌라, 성 후안 데 라 크루즈(십자가의 요한)는 이 시기 스페인에서 배출한 개혁가들이다.

물론 루터의 출현은 순수하게 우발적 사건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으며, 중세 후기로 가게 되면 개혁을 위해 나타난 수도원들도 조직화되어 가면서 부패의 늪으로 빠지기도 하는 등 상황은 굉장히 복잡하다. 거기에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라고 할수 있는 교황과 교황청도 100여년간 아비뇽 시절과 분열시기를 겪으며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점점 힘을 잃어갔다.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로 분열시기는 마감하였지만 교황청은 잃었던 세속권력을 회복하고 교황령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세속적 영토다툼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주교나 대주교는 대체로 왕족이나 귀족들이 독점했고, 추기경들은 대체로 이탈리아 명문가에서 선발되었고 교황선출도 그리했는데 오랜 세월 동안 교회체계가 경직 되면서 교회 조직이 관료화되면서 경직성이 더해져 갔다.

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것이 크게 3가지 흐름인데, 첫번째는 신비주의 운동이라고 볼수 있다. 중세 3대 신비주의자로 불리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요한 타울러 등은 영성을 갖춘 신비주의자들로 이들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직접적으로 비난한것은 아니었지만 개혁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다.

두번째는 데보티오 모데르나라 불리는 일종의 신도 경건운동으로[11] 수도원적인 경건을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렸다. 이는 마르틴 루터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세번째는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사보나롤라, 발도파 등의 사상적/윤리적 개혁가,개혁 공동체들이었다.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는 과감하게 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비판했다. 사보나롤라의 경우는 피렌체에서 활동하면서 메디치 가문을 쳐바르고 피렌체의 개혁을 이끌다가 화형당한바 있다. 발도파는 청빈을 강조하여 당시 비대해진 가톨릭 교회의 사치와 부의 축적을 비판했다. 다만 이들이 번역이 금지되었던 라틴어 성경을 번역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번역한 것은 사실이지만 라틴어 성경의 번역은 그 이전에도 행해지던 일이며 금지된 것도 아니다. 단지 인쇄술의 발달로 후대에 갈수록 번역이 활발해진 것 뿐이다.

또 한편으로, 가톨릭 교회 내를 개혁하자는 목소리의 일환에서 나왔던 것 중 하나가 바로 "공의회 주의"였다. 아비뇽 유수 이후 무류한 세계 공의회를 통해 신앙의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하자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었고 이에 따라 열린 공의회들은 난립하던 교황권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는 공을 세우긴 했다. 다만 공의회주의 내부에서도, 세계 공의회가 수위권을 가진다는 쪽과, 세계 공의회가 무류성을 가지되 수위권은 교황이 가진다는 쪽으로 의견이 달랐다. 참고로 21세기의 가톨릭 교회의 해석은 '세계 공의회의 무류성, 교황의 수위권'이다.

제 749 조 ② 보편(세계)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이 신앙과 도덕의 스승들이며 재판관들로서 보편 교회를 위하여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확정적으로 고수해야 할 교리를 선언하여 교도권을 행사하는 때, 또는 전세계에 산재하여 있으면서도 상호간에 또 베드로의 후계자와 친교의 유대를 보전하면서 교황과 함께 신앙이나 도덕의 사항들을 유권적으로 가르치는 주교들이 하나의 의견을 확정적으로 고수해야 할 것으로 합의하는 때, 주교단도 교도권의 무류성을 지닌다.
③ 어떤 교리도 무류적으로 확정된 것임이 명백히 확증되지 아니하는 한 그러한 것으로 이해되지 아니한다.


가톨릭 교회법


다시말해, 공의회 역시도 일정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무류성을 지니며, 이러한 무류적 가르침은 당연히 교황도 받아들여야 한다.[12]

하지만 대립교황 문제가 해결되면서 공의회주의는 밟히고 말았는데, 교황의 입장에선 당연히 무류한 공의회들이 교황직에 제약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공의회주의가 득세해서 교황권을 제어하고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주도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공의회주의도 그다지 큰 도움은 안되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긴 하다. 얀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출석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는 요청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신변보장까지 받아내서 공의회에 출석했음에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서 화형을 당했다.

거룩한 콘스탄츠 공의회는 ······ 선언하노라. 첫째, 이 모임은 성령 안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공의회를 구성하며 가톨릭교회를 대표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그 권위를 받으며 교황 자신을 포함하여 어떤 계급과 조건에 속한 어떤 사람이라도 신앙, 대분열의 종식, 하느님의 교회를 머리에서 지체까지 개혁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에서 공의회에 복종해야만 한다. 둘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어떤 계급과 조건에 속하는 어떤 사람이라도 이 거룩한 공의회에 의해서 만들어진 또는 만들어질, 아니면 다른 합법적으로 소집될 공의회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만들어질 명령, 포고, 법령, 지침을 반항적으로 복종하길 거부하는 자는 ······ 바른 마음 자세로 돌아오지 않으면, 적절한 형벌을 받아야 하며 온전히 처벌될 것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법의 다른 권위에 호소될 것이다.


콘스탄츠 공의회의 선언 中, Henry Bettenson의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에서 간접 인용.]


이러한 일련의 쇄신 운동들은, 가톨릭 교회에서 인정 받은 쇄신이든, 인정되지 않은 쇄신이든 간에, 근래의 역사학자들이 종교개혁을 더욱 넓은 범위로 해석하는 단서가 된다.

우선 아주 기본적인 질문부터 해보자. 실제로 '종교개혁' 따위가 있었는가? 이 표현이 가리키는 사태가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오늘날 우리가 공통으로 받아들이는 의미로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독교 내부의 '개혁' 요청은 이 종교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고, 매 시대마다 기독교를 시급히 개혁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역사가들은 베네딕트회의 수도원 생활 쇄신과 연관되었던 잉글랜드 교회의 '10세기 종교개혁', 교황의 지시를 받아 기독교권 서방 전역에서 성직자의 독신을 강요하는 데 성공한 12세기 종교개혁을 확인했다. 훗날 14세기에 경쟁자 두 명(한때 세 명)이 교황 성좌에 앉을 권리를 주장한 '대분열'은 다음 세기에 격렬한 레포르마티오(reformatio, 개혁)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15세기 종교개혁에는 공식적인 면과 비공식적인 면이 공히 있었다. 성직자 지도부는 공의회를 통해 교회 정체를 조직화함으로써 지도력 위기를 봉합하고 분열 추문을 예방하고자 했다. 그런 위엄 있는 모임은 피사(1409), 콘스탄츠(1414~1418), 파비아와 시에나(1423~1424) 바젤과 기타 장소(1431~1449)에서 열렸다.
(중략)
유럽의 반대편 끝자락에 자리한 보헤미아 왕국에서 또다른 급진적 사제 얀 후스(Jan Hus)는 외국의 대군 주권과 로마의 관할권에 대항하는 민족 봉기를 고무했다. 또한 후스파는 미사중 성찬식에서 평신도에게도 빵만이 아니라 포도주까지 줄 것을 요구했다. 목표와 우선사항이 각기 다른 개혁 운동들이 항상 양립 가능했던 것은 아니지만(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이단자로 화형에 처해졌다), 총괄해서 보면 그 운동들은 마르틴 루터 이전 세기에 유럽 종교생활의 두드러진 특징이 무기력과 현실 안주였다는 어떠한 견해도 거짓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루터 이전에 숱한 개혁 시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연관된 종교개혁에 정관사를 붙이고 'r'을 대문자로 바꾸어 'the Reformation'이라고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강력한 논증들이 있다. 단수(單數) 종교개혁에 관한 옛 교과서들은 으레 1517년에 루터가 항의한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했고, 1546년에 루터가 사망하고 길어야 10년 남짓 지난 시점에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독일의 사건으로 보였고(잉글랜드 같은 다른 곳에서도 중요한 반향이 일어나긴 했지만), 서사 형태가 깔끔한 운동이었다. 다시 말해 이런저런 이유로 루터가 로마 교회와 결별하고 뒤이어 독일 가톨릭교도 황제의 뜻에 대항해 프로테스탄트 국교회들이 설립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종교개혁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이었고, 정치적 사건이었으며, (종교개혁 이전 가톨릭교회의 무질서한 상태를 감안하면) 예측 가능했다.
이제 이런 단수 종교개혁의 연대기도 지리도 더는 설득력 있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불가피했다'는 가정은 중세 후기 가톨릭교의 유연성과 정신적 활력을 강조하는 새로운 연구를 고려하면 적어도 논박이 가능해 보인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한때 16세기 종교개혁의 시작이자 끝으로 보였던 것 ―독일에서 전개된 루터의 운동―이 실은 훨씬 더 큰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주장을 이제 학계에서 두루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단수 종교개혁은 복수 종교개혁들에, 즉 저마다 고유한 지향과 의제를 추구했던 복수의 신학적·정치적 운동들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이처럼 뚜렷이 구별되는 국가·지방·지역 단위 종교개혁들이 있었다. 그 운동들이 모두 루터파였던 것도, 모두 성공했던 것도 아니다. 신교의 어느 야심찬 갈래는 루터주의와 경쟁하며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더 정확한 명칭은 '개혁파' 신교이지만, 그 갈래는 흔히 신학적 약칭으로 '칼뱅주의'라 불린다. 유럽 여러 지역에서 구교인 가톨교를 처음으로 대체한 신앙으로서 칼뱅주의를 경험하긴 했지만, 칼뱅주의는 이따금 '제2종교개혁'이라고도 불린다. 당대의 종교 실험자들 모두가 루터와 칼뱅을 비롯해 권한을 가진 위치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세속 행정관들과 동맹을 맺은 '관료적' 개혁가들의 선례를 따랐던 것은 아니다. 그들과 별개로 일부 집단과 개인이 시도한 아래에서 위로의 '급진 종교개혁'도 있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사회질서를 상상했고, 관료적 개혁가들마저 당연시한 기독교의 기본 전제를 과감히 재고했다. 가장 중요한 개혁들 중 하나는 가톨릭교회 밖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났다. 루터와 칼뱅의 도전에 직면하여 로마가 세력을 결집하고 성직 위계를 재정비한 사실은 오래전부터 인식되었다. 19세기에 독일 신교 역사가들이 대중화한 상투적 서술에서 가톨릭의 이런 움직임은 소극적이고 본질적이고 반동적인 대응이라는 뜻으로 '대항―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라 불렸다. 그 이전가지 종교개혁에 관해 쓴 이들은 (그리고 오늘날에도 놀랄 정도로 많은 이들은) 테베라 강의[13] 이런 견해를 생략하든지 아니면 책 뒤쪽의 부수적인 장에 우겨넣었다. 그러나 점차 '가톨릭 종교개혁' 또는 '가톨릭 쇄신'이라 알려진 것은 단순히 적에 직면하여 방어시설을 보강한 대응책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넓은 운동이었다. 신교 반란에 앞서 가톨릭교 내부에 이미 개혁을 지향하는 새로운 정신적 동향들이 있었다. 그중 일부는 신교 반란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다른 일부는 그러지 않았다.


「The Reformation」, Peter Marshall[14]


한편, '교회 구성원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타락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의외로 각 개혁운동들 사이에서, 가톨릭 개혁가와 개신교 개혁가 사이의 논쟁이든 개신교 개혁가 사이의 논쟁이든, 합의된 의견은 없다. 이를테면 재세례파들은 유아세례가 성경에 직접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집어넣은 타락이라 주장했지만 루터와 칼뱅의 관점에서는 전혀 타락이 아니다. 또한 침례교 신자들이 보기에는 교회의 권위있는 교의라는 개념 자체가 타락이겠지만, 역시 루터의 관점에서는 교회의 권위 그 자체가 (가톨릭의 해석보다는 소극적으로 해석되지만) 근본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무엇이 타락인가'는 합의가 안되어있고 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다. 이를테면 성 도미니코 데 구스만은 베네딕도회로 대표되는 중세 수도원들이 민중의 삶과는 지나치게 격리되어 있다고 느끼고는, 도시에서 소규모 공동체 위주로 민중의 삶에 적극적으로 끼어드는 도미니코회를 설립했다. 반면 성녀 테레사 데 아빌라는 수도자들이 세속의 신자들과 너무 심하게 어울려 산다고 느끼고는, 봉쇄수도원이 개혁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가톨릭 내부의 수도원 개혁운동들 사이에서도 '문제의식'과 '해결'이 다른 방법으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1571년 10월 6일에 테레사 데 아빌라가 엔카르나씨온에서 겪었던 일은 가톨릭 내부에서도 '타락'과 '개혁'에 대한 해석이 근본적으로 달랐음을 보여준다. 교황 성 비오 5세가 특파한 순찰사 베드로 페르난데스는 테레사를 엔카르나씨온의 가르멜회 수녀원장으로 임명했는데, 이날 새 원장 테레사에게 수녀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수녀들은 "어용 원장 물러가라", "선거권 박탈이다"라며 아우성을 쳤다. 수녀들이 보기에는 자치권에 대한 교황청의 간섭이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타락이였던 것이다. 반면 테레사측은 각 지역의 수도원이 중앙(교황청)과는 격리되어 지역 인사들과 온갖 연줄로 얽혀있는 것이야말로 타락이라고 여겼다.

특히 '무엇이 타락인가'라는 논쟁이 가톨릭 개혁운동들 내부 혹은 개신교 개혁운동들 내부를 넘어, 가톨릭 개혁운동과 개신교 개혁운동 사이의 논쟁이 될 경우는 문제가 더더욱 꼬인다. 단적인 예로 대사(면벌부) 논쟁을 살펴보자. 개신교 개혁가들은 성경에 직접 언급되어있지 않은 대사라는 개념이야말로 타락의 증표라고 여겼으나, 가톨릭 개혁가들은 대사라는 개념 자체는 타락이 아니되 신앙의 공로로 받아야 할 대사를 '상품'으로 전락시켜버린 성직자들의 행태를 타락으로 여겼다.[15] 또한 중세 가톨릭 교회 특유의 활발한 자선 문화는 가톨릭 개혁가들이 생각하기에는 아름다운 사회였으나, 개신교 개혁가들은 구원을 돈 주고 산다고 여기며 타락의 증표로 생각하였다. 또한 후에 소개할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과로 가톨릭 교회가 각 지역의 성직자들을 효율적인 신학교 체계로 교육하려고 한 것 역시도, 시선에 따라서는 타락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바로 네덜란드 지역의 개신교 개혁가들이 그러하였는데, 이들은 신학교야말로 지역 교회에 대한 과도한 간섭이자 폭정이라 여겼다.[16] 교황청에서 성직자의 독신의무를 통해 사제들이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만 하더라도, 오늘날의 가톨릭 신자들이 보기에는 개혁이지만, 오늘날의 개신교 신자들이 보기에는 성경에 직접 언급되지 않은 것을 교황이 밀어붙인 타락이라고 여긴다. 또한 중세 교회의 초대형 떡밥이던 서임권 논쟁에서도 타락에 대한 관점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이 논쟁의 중요한 결론 중 하나인 보름스(Worms) 정교조약(1122년)과 제1차 라테란 공의회(1123년)를 살펴보자면, 황제나 봉건영주는 서임식에서 반지와 지팡이 대신에 홀(笏)을 통해 세속재산을 하사하도록 하여 주교직에 내리는 교권과 속권을 구분하였다. 다시말해, 후대로 갈수록 성직자의 속권은 세속 통치자들에게로 돌아가고 교권은 더 엄밀하게 정의되어가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이는 가톨릭 신자들이 생각하기에는 역사적인 진보이지만, 개신교 개혁가들이 생각하기에는 세속권력과의 결탁으로 보일 수 있다.

4. 전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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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대체로 종교개혁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이들은 서로 영향은 주고 받았으나 상대적으로 거의 독자적인 움직임이었기 때문에 분류함.

  • 북독일과 북유럽의 마르틴 루터 와 루터주의 (마르틴 루터, 필리프 멜란히톤, 유스투스 요나스, 요하네스 부겐하임, 게오르크 슈팔라틴 등)

  • 스위스와 남독일에서 시작된 개혁주의 (츠빙글리, 하인리히 불링거, 마르틴 부처, 외콜람파디우스, 장 칼뱅 등)

  • 영국의 종교개혁 [17] (니콜라스 리들리, 토마스 크랜머, 휴 라티머, 존 녹스[18] 마르틴 부처[19] 등)

  • 과격 혁명론자 (토머스 뮌처, 라이덴의 얀, 한스 뎅크 등)

  • 재세례파 운동[20] (후터파, 스위스 형제단, 메노나이트 등)

  • 반삼위일체파 (이들은 예수가 도덕적으로 우수했기때문에 신적 능력을 받았다고 보았다.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일위일체론을 주장했다. 후에 유니테리언으로 이어졌다.)

  • 가톨릭 교회의 개혁운동


등으로 앞의 2개는 꼭 들어가나 중간의 혁명론자와 재세례파는 같이 묶이거나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빼는 경우도 있어 크게 네가지 움직임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4.1. 루터와 95개조 반박문[편집]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이었던 루터는 스승인 요한 스타우피츠의 권유를 받아들여 중세 가톨릭의 스콜라 철학 최신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 자체로 돌아가 연구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때 루터는 사도 바오로의 발언으로부터 이신칭의, 즉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정립하기 시작한다.

이미 루터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지 오래된 가운데 1517년, 한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중 하나인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겸 할버슈타인 주교인 알브레히트가 면벌부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알브레히트가 면벌부 판매에 나선 이유는 마인츠 대주교직에 오르려고 빚을 내서 샀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알브레히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동생[21]인데 교회법을 위반하여 20세 이전에 주교 서품을 받았고, 이후 겸직을 금지하는 교회법을 어기고 할버슈타트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구를 돈으로 패키지로 사모았는데 마침 신성로마제국 최선임 선제후 직위인 마인츠 대주교 자리가 매물(?)로 나오자 다소 무리를 하여 빚을 내서 선도 구매 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교황청에서 파견한 도미니코회 수도자인 요한 테첼[22]을 브로커로 고용하여 당시 독일서 가장 큰 사채업자(?) 푸거 가문의 야코프 푸거에게 2만1천 두카트의 빚을 졌고[23]8년간 면벌부 판매수입을 보장받았으며 판매수입의 절반과 초입세[24]를 교황 레오 10세에게 바치기로 합의했다.

사실 성직 매매 문제를 파고들자면, 16세기초에만 있는게 아니었고 그냥 이전부터 자주 있던일이라 사실 딱히 고대의 교회보다 이 시절이 더 심했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1215년에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무려 공의회 차원에서 다루는 등 중세의 교회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하려고 노력한 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 문제는 루터의 시대에도 16세기에도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 중요하다.[25] 그리고 독일에서 그간 교회의 경제적 수탈로 인하여 반로마 감정이 폭발하자 전유럽에 순식간에 파급력이 미치게 된다.

독일 작센지방의 마르틴 루터는 이신칭의의 결론에 도달하여 면벌부는 아무 의미가 없어보였고, 이에 루터는 면벌부에 대한 학문적 토론의 차원에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이 때 루터가 하필 교회 대문에 내건 이유로 '루터가 가톨릭 교회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위해 대문에다가 박아놨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교적인 의미는 없고 단순히 교회 대문이 일종의 '게시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종교개혁의 파급력을 최대한 작게 해석하는 입장의 가톨릭 교회사가들은 루터가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게 아니라 교구 주교들에게 면벌부에 대한 토론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루터가 직접 쓴건 사실이고 이전부터 동료 신학교수나 학생들에게 공개적으로 비판하였으며. 브란덴부르크와 마그데부르크 주교 등에게 항의편지를 보내고도 답변이 없자 직접 내건 걸로 본다. 이러한 주장은 1960년대 가톨릭 교회사가가 주장한것인데 1540년대 필리프 멜란히톤의 루터파 신학자의 서술에 의문을 제기했을뿐이지 개신교나 일반역사가들은 그냥 뭐 어쩌라는 반응(날짜는 별 중요치 않다)이다. 어쨌든 95개조 반박문은 루터의 작품이며 공론화 되었을때 마르틴 루터가 자신의 저작임을 부인하지도 않았고, 루터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고, 이 주장이 가톨릭 내부적으로 대단한 센세이션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사실 루터는 이 시점에서 가톨릭 교회와 완전히 등지려는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대사제도의 남용과 면벌부의 효력에 대해서 "교회가 그럴 권한이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의문제기였다. 루터는 로마 교황청이 면벌부의 원리로 내세운 수많은 성인들의 공덕이 쌓여서 그것으로 죄인들의 죄를 사면해줄 수 있고, 그 공덕의 관리는 교황이 담당하며 이 공덕을 면벌부로 판매한다는 이론을 반박했던 것이다.

애초에 면벌부에 대한 논쟁은 루터가 혼자 말하던 것도 아니고, 루터가 속한 아우구스티노회와 도미니코회에서 이미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작센의 수도 비텐베르크의 성 근처에 자리한 교회의 문에 반박 조항들을 길게 열거한 문서 ―95개 논제―를 붙였다. 장차 역사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 순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태어나고 중세가 급사한 날이었다. 그렇지만 실상은 생각보다 무미건조했다. 일부 학자들은 95개ㅑ 논제를 붙였다는 것마저 부인해왔다. 반박문을 게시한 것은 신실일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경천동지할 행위는 결코 아니었다. 당시 루터는 얼마 전에 설립된 베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고, 신학부 내에서 학구적 논쟁을 시작하는 관례적인 방법은 사전에 논제를 게시하는 것이었다. 접근하기 편한 위치에 있었던 까닭에 성채 교회(Castle Church)의 문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게시판 역할을 했으며, 루터의 행위는 오늘날 대학에서 강의 목록을 공지하는 행위보다 별반 극적일 것이 없었다. 95개 논제 자체는 딱히 혁명적이지 않았다.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거나 새로운 교회 창설을 요청하지 않았고, 신학에서 그리 대수롭지 않은 모호한 문제를 제기했다. 1517년에는 교회를 개혁하려는 청사진도, 예측 가능한 결과도 없었다. (중략) 면죄부를 둘러싸고 도미니크회와 아우구스티누스회가 반목하기도 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두 수도회가 논쟁한다는 소식을 처음 듣고는 대수롭지 않은 "수사들 간의 다툼"으로 치부했다.


Peter Marshall, 「종교개혁」


이러한 과정 속에서 면벌부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이 가열되었고, 내부자로서 교회의 비리와 부패를 비판하던 루터는 점점 교황청과 대립을 하게 된다. 당시 교계에서는 루터의 주장을 억누르려는 입장이었고, 루터는 자신의 소신을 굽힐 마음이 없었다. 교황청에서는 처음에는 루터의 사상을 신학적인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반박하고자 1518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모임에서 그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발언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도리어 이는 루터의 사상을 널리 퍼트리는 데에 일조하였고, 교황청은 이제 루터를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4.2. 신성로마제국의 혼란[편집]

결국 1520년에 루터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다음해 신성로마제국 제국의회는 루터를 불러 신앙 검증을 요구한다. 그 곳에서도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의회는 루터를 제국 밖으로 쫓아내도록 결의한다. 이는 당시의 황제였던 카를 5세가 가톨릭을 수호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비록 카를 5세의 시대에는 제국의 황제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를 초월한 지 오래였지만,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명목상의 정통성은 당시의 시점에서도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26] 이후 루터는 암살자를 염려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 중도에 납치 당하고,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이는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의 신학은 별로 이해하지 못 하지만 루터를 보호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27] 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 바로 다음 가는 서열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선제후가 루터를 보호한다는것은 제국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반로마 감정과 민족 감정에 따라 루터를 열렬히 지지한 독일 민중들의 열망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황제와 교황을 나란히 적으로 돌릴만한 독일 제후들은 몇 없던게 사실이고 1526년 슈파이어 제국회의 까지조차 300여개 영방군주와 60여개 제국 도시중에 루터의 입장에 따라 새로운 신앙을 믿는다고 고백한건 고작 6개 제후와 14개 제국도시 뿐이었다. 그나마도 선제후는 7명중에 작센 선제후 달랑 한명이었다. 그러나 루터파에게 행운이라면 당시의 카를 5세는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는 것(...) 이 무렵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났고[28] 카를 5세는 이를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하필이면 이 무렵부터 이탈리아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524년에 제국 전역에서 중세 봉건 질서에 반발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난다. 이는 후에 '농민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규모가 거대하여 독일 중, 남부 전역을 휩쓸었다.

단, 루터는 여기에서 농민들이 아닌 기존 질서를 지지하였고[29], 이는 후에 루터가 농민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훗날 좌파들에게 까이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30] 이후 루터는 1522년에 비텐베르크에 귀환하여 이러한 민중 운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기존 가톨릭 질서에 정치적으로 루터를 지도자감으로 본 농민들에겐 실망이었다..[31] 결국 지금까지 거의 루터 본인의 힘만으로 진행되던 개혁은 이 시점부터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얽히기 시작한다.

결국 독일농민 전쟁 후에 독일 땅에서 정치적 문제는 루터의 손을 넘어갔고 스위스에서 츠빙글리 노선이 원동력을 이어받게 된다.

4.3. 스위스의 개혁가들[편집]

루터가 열심히 활동하던 무렵, 스위스는 당대 최고의 병사들인 스위스 용병들의 나라였다.[32] 이들은 여러 곳에서 용병으로 근무하면서 수입을 냈고, 이는 스위스 지역의 경제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한편, 당시의 스위스는 아직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사이의 주도권 다툼에 계속 희생되고 있었고, 스위스의 자주적인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져만 갔다.[33]

이러한 시대에 취리히에는 울리히 츠빙글리라는 또 다른 개혁가가 있었다. 그도 동시대의 루터처럼 면벌부와 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였으며, 성경에 종교의 근본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단, 루터와 그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실제로 그가 머물던 취리히를 본인의 손으로 개혁시키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취리히는 그의 손에 의해 성공적으로 탈바꿈하였다. 이후, 츠빙글리는 이러한 개혁을 스위스의 다른 곳에도 전파시키려 노력했으나, 가톨릭 도시들, 그리고 신학적인 해석에 차이를 보이던 루터교를 믿는 도시들과 반목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은 결국 내전으로 확산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스위스에서의 영향력을 잃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카를 5세는 스위스의 가톨릭파를 도와 진압군을 보내고, 이 과정에서 츠빙글리는 전사한다. 자세한 전개 과정은 울리히 츠빙글리 항목을 참조할 것. 그리고 이러한 내전은 스위스 용병이 몰락하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한편, 제네바에는 종교적 탄압을 피해 프랑스에서 망명 온 루터와 츠빙글리보다 한 세대 아래의 법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종교개혁의 2번째 불씨를 당긴 장 칼뱅이다. 그의 사상[34]은 신학 외적인 부분에서는 철저히 보수적이던 루터교보다도 진보적이었고, 그 덕에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들이 주로 채택한 루터교[35]와 달리 일반 민중들이나 상공업자들에게 그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된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루터보다 능력있는 개혁가여서 츠빙글리처럼 제네바를 자신의 손으로 탈바꿈시켰으며[36], 법학과 고전 문학을 전공한 그의 경력을 바탕으로 '기독교 강요'라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책을 펴냈으며,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도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칼뱅의 교리는 안 퍼지려야 안 퍼질 수가 없었고, 1530년대에 이르면 칼뱅의 교리를 신봉하는 세력도 상당히 커지게 되어 단순한 탄압만으로는 이들을 누를 수 없게 되었으며, 루터교와는 달리 독일을 넘어서 프랑스와 영국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청교도의 출발점이 바로 칼뱅이며, 1534년에는 영국의 헨리 8세가 영국 교회를 로마치하에서 독립시켜 영국 국교회로 국가교회화했고 [37][38] 그리고 결국 칼뱅파는 1550년대 무렵에 스위스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4.4. 중간 체크: 개신교는 얼마나 퍼졌는가?[편집]

1560년 무렵 신교는 사실상 저지할 수 없는 불가항력처럼 보였다. 원호를 그리는 북부 왕국들 ─스웨덴, 덴마크,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이 모두 신교로 넘어갔고, 한때 신실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가톨릭 도시들에서 이단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동유럽 도처에서 가톨릭교는 소수파 종교가 되어가고 있었고, 합스부르크 군주정은 자기 뒤뜰에서마저 가톨릭 신앙을 지킬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오스트리아 귀족층 대부분이 16세기 3분기에 신교도가 되었던 것이다. 독일은 인구의 약 80퍼센트가 신교로 개종한 재해 구역으로, 중요한 가톨릭 국가들 가운데 변하지 않은 곳은 바이에른 공국 하나뿐이었다. 가톨릭교의 지중해 심장부─포르투갈, 에스파냐, 이탈리아─에서만 심지에 불이 옮겨붙기 직전에 당국이 가까스로 신교의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Peter Marshall,「종교개혁」


이 무렵 가톨릭의 교세는 그야말로 궁지에 몰렸다고 할 수 있다. 튜튼 기사단국은 기사단장이 루터교로 개종하여 프로이센 공국으로 변신했으며, 가톨릭의 보호자로 여겨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홈그라운드인 오스트리아는 귀족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독일은 전체가 개신교로 개종할 기세였고, 영국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 역시도 가톨릭의 교세에서 이탈했다. 이 시점에서만 보자면 개신교가 유럽 전체에 퍼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4.5. 분열된 제국[편집]

사태가 이쯤 되자 카를 5세는 대립을 중재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황제 본인도 교회 개혁파 아드리안 신부(훗날 하드리아노 6세)가 가정교사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가 이대론 안된다는 생각으로 교황청에 공의회를 강요 했으나 교황청에선 황제 위주의 공의회를 미적거렸고 이런저런 이유가 겹쳐 빡친 황제가 로마로 군대를 보내자 그제서야 로마 약탈로 참교육을 받고나서 공의회를 시작했는데, 20몇년간 교회 개혁문제엔 거의 비협조적으로 진행하여 본인 생전에 끝을 못 봤다.

당시 신성로마제국내에선 아직은 루터파 제후는 몇 없고 작센선제후와 헤센방백 정도를 빼면 거의 듣보잡들인데다가 세력도 미약했는데 1526년 기준 당시엔 5개제후 14개 제국도시들이 루터의 주장에 지지했다.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교회령만 1/3~1/4정도에 합스부르크 가문 세력 하나만으로도 신교도들 쳐바르기엔 충분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영지 오스트리아는 오스만투르크의 위협을 직접 쳐맞고 있었기 때문에 루터와 그 추종자들 추방령을 당분간 유임하고 간을 보다 1529년 다시 제국추방령을 때리자 루터파 제후들은 약속 번복과 제국법위반을 들어 1531년이 되면 신교도 제후들이 아예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여 황제에 대항한다.. 아마 이 무렵의 카를 5세는 스페인 반란 진압, 프랑스 견제, 오스만 견제만 해도 정신없는데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는 도시들 때려잡으랴, 제후들 때려잡는건 동생이자 후임 황제로 선출된 로마왕 페르디난트 1세에게 위임했는데 페르디난트는 독일 사정에 대해서 형보다 비관적으로보고 신교도들과 타협하려는 모양이었다.

결국 1547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영국의 헨리 8세, 그리고 마르틴 루터가 연달아 세상을 떠났고, 오스만 투르크와 잠시 평화협정이 맺어지자 황제 카를 5세는 생애 최대의 유감이었던 독일 내 종교 일원화를 추진한다. 공의회는 20년 넘게 배가 산으로 갈지경으로 거의 노답상태였고 앞서 황제위주의 공의회 추진에 로마 교회 내부에서도 반발이 컷고 프랑스에서는 로마교황청에 자금을 끊어버렸다. 어쨌건 로마 약탈로 교황이 거의 포로로 잡히자 열리긴 했는데 교황청의 체면을 고려하여 교황령도 아니고 합스부르크가 영지가 아닌 트렌트에서 열렸으나, 그곳은 거의 오스트리아 앞마당이었다. 이런 공의회는 신교도들은 거부했고 교황청에서는 돌림병 핑계대면서 거의 비협조적이었다.(카를 5세가 루터파 주장을 받아들여서 사제독신 제도 폐지, 평신도 양형영성체를 요구했기 때문에 충공깽이었다.)카를 5세가 죽고나자 활기를(?) 띄고 처음 의제였던 교회 개혁은 번복되고 기존교리 재확인으로 끝났다.

기다리다 지친 카를 5세는 스스로 공의회 노릇을 하며 독일 전체에 루터파 의견을 약간 받아들인 자신이 직접 수정한 교리를 강요하고 반대자는 제국추방령을 때리고 신교도 제후들은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때리면서 내전이 발생했다.(자세한건 카를 5세, 마르틴 루터 참조) 결국 황제의 구상은 실패했고 반란군에 쫓기던 황제는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고는 황위를 동생에게 물려준 뒤 스페인으로 갔다.

후임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파사우 합의(1552),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를 통해 루터파는 공식적으로 공인받았고, 루터교를 믿는 지역은 가톨릭교회를 용인하는 조건으로 종교의 자유를 누렸다. 이 당시에는 독일왕이며 로마왕 자격 으로 체결한 것이다. 1547년 황제가 스페인으로 도망가서... 카를 5세는 이를 승인하고 1556년 퇴위했다. 이는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때 루터파 기존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 화의에는 2가지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하나는 신앙을 결정하는 주체가 일반 민중이 아닌 그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라는 것("Cuius regio, eius religio") 이었다. 1547년 종교 전쟁시 대부분의 제후가 신교도였다는건 사실무근이다. 작센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헤센방백 필리프1세는 나란히 황제군에 체포되어 제국추방령을 맞았고 나머지 소제후 10여개 제국도시들도 굴복한다. 훗날 대표적인 신교도 제후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은 1560년대에 종교개혁에 나섰고, 제후들도 개인적 신앙은 신교도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황제 카를 5세와 교황청이 무서워서 신교도 세력은 크지 않았다.

따라서 제후의 신앙과 다른 견해를 가진자는 재산을 팔고 이전해야했다. (알다시피 이시대는 문맹율이 90%라 농부들을 종교개혁이 뭔소린지 신학적인 이해가 불가능했기에 별상관 없지만...) 그리고 부르주아들이 시민자치 정치를 벌이는 제국도시들[39]는 이조치에서 예외라 개신교 우세지역의 가톨릭 신자나 반대의 경우는 도시에서 자신의 신앙대로 예배를 했다간 위협을 받았다.

다른 하나는 이 화의가 루터파와 가톨릭만의 화의였으므로 이미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성장하고 있던 칼뱅 파에 대한 논의가 아예 없었다는 것. 합의 이후 팔츠 선제후령은 가톨릭에서 루터파, 루터파에서 다시 칼뱅파로 개종했는데 이 조치가 유효한것인지.. 또한 합의전에는 개신교세가 미약하였다가 16세기 후반 바이에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개신교로 넘어간 상황에서 쾰른이나 뮌스터 주교구등 지역주민 다수가 가톨릭 에서 개신교로 전향한 지역의 처리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극심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더 이상 신성로마제국은 하나의 제국으로 묶일 수 없게 되었으며, 황제의 권위는 추락하기 시작하고 제후 각각의 힘이 점차 강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강해진 제후들은 신나게 자기들끼리 계속 치고받게 되었고, 이는 결국 1618년에 30년 전쟁으로 대폭발하게 된다.

30년 전쟁이 끝난 뒤에야 유럽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전쟁을 마무리짓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 비로소 개인의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칼뱅파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썼던 시기에서 100년이 더 지난 뒤였다.

4.6. 가톨릭의 반격: 대항종교개혁[편집]

이 시점에서[40] 60년 후로 넘어가면 상황이 사뭇 달라 보일 것이다.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은 패배하여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네덜란드 남부는 구교에 의해 수복되어 재차 가톨릭화되었다. 독일 남부 대부분은 가톨릭의 수중에 있었고, 활기찬 가톨릭 부흥이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를 휩쓸고 있었다. 신교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고,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냉소적인 답변으로 제시할 후보가 있긴 하다. 바로 군사력이다. (중략) 그러나 무력이 전부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가톨릭교는 자체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유서 깊은 위력에 의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의 충격에 자신을 노출하기도 하면서 스스로를 뜨어고쳤다. 그 과정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중략) 트리엔트 공의회의 제1차 회기(1545~1547)에는 주로 가톨릭의 견해와 신교의 견해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식으로 가톨릭 교리(예컨대 성서와 전승의 상보적 위상에 관한 교리)의 정의를 공식화했다. 제2기(1551~1552)와 제3기(1562~1563)에는 제도를 개혁하는 문제와 씨름하여, 주교들에게 한가한 귀족이나 정부 관료처럼 유유자적 돌아다니지 말고 신자들의 목자로서 각자의 교구에 상주하라고 명령하는 교령을 도출했다. 가장 중요한 개혁은 모든 교구에 성직자 양성―중세에는 명백히 마구잡이 과정이었다―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라는 교령이었을 것이다. 규율에 충실을 기하는 교육받은 사제를 길러내려는 열망은 가톨릭 개혁의 주춧돌이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가톨릭교도로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시했다. 라틴어화된 형용사 '트리엔트식(Tridentine)'은 그 방식을 나타낸다. 공의회가 마무리될 무렵,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했지만 가톨릭 개혁은 부인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둔 터였다. 우선 논란이 분분한 거의 모든 쟁점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명료하게 밝힘으로써 단일한 로마 가톨릭교회―종교개혁 이전 유럽에서 공존했던 더 엉성한 표현인 '가톨릭교들(Catholicisms)'을 대체했다―의 통일된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평신도를 위한 표준화된 교리문답서(종교 교육서)를 공인했고, 미사 집전의 균일한 순서를 정했다 ― 트리엔트식 전례는 지금도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공의회는 '악폐'를 척결하고자 사제와 주교가 교회의 목회 임무에 정력을 쏟게 했다. 그리고 15세기 공의회들과는 반대로 교황직의 권한을 약화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했다. 연이은 교황들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진행을 면밀히 감시했고, 비오 4세(1559~1565)는 교령을 승인하면서 그것을 해석할 권한을 자신에게 남겨두었다. 트리엔트 이후 교황의 권위는 제도적으로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강화되었다. 보르자 가문의 불명예스러운 교항 알렉산데르 6세가 예증하는 르네상스기 로마의 퇴폐적인 분위기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16세기 후반 비오 5세(1566~1572),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 식스토 5세(1585~1590) 같은 후계자들은 높은 수준의 금욕생활로 교황직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중략)
트리엔트식 성성들 중 하나는 (1622년 설립된) 포교(Propaganda fide) 성성이었다. 여기에 쓰인 프로파간다(Propaganda)가 현대에 정치적 기만과 조작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는 사실은 어원에 때때로 문화적 편견이 파고든다는 것을 보여 준다. 포교 성성은 로마 교회가 더이상 유럽에만 국한된 교회가 아님을 꺠달은 교황청이 뒤늦게 공인한 기구였다. 포르투갈 무역상들과 에스파냐 정복자들에 뒤이어(때로는 그들에 앞서) 가톨릭교는 세계 종교, 남극 대륙과 아직 유럽인이 발견하기 전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를 뺀 모든 대륙에 신봉자를 둔, 진정으로 지구를 아우르는 최초의 신앙이 되었다.


Peter Marshall,「종교개혁」


한편 가톨릭 교회에서도 드디어 반격을 하기 시작한다. 개신교에 대항하기 위해 쇄신운동을 펼친 것으로 '가톨릭의 종교개혁' 또는 '대항종교개혁'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반종교개혁, 반동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썼지만 지나치게 가톨릭을 폄하한다는 평가를 받고 위의 용어로 대체되어가고 있다.

예수회의 등장과 트리엔트 공의회 등으로 대표된다. 개신교계에서는 결과적으로 당시의 사회상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고, 내부의 부패를 완전히 뿌리뽑지도 못했고, 단지 일부 제후들을 다시 가톨릭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을 뿐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가톨릭 교회의 주요 교리와 윤리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담고 있는 교리문답서가 발간되었고, 성직자와 수도자가 사용할 새로운 성무일도서가 개정되었으며, 세계 모든 라틴 가톨릭교회가 로마 전례로 통일하여 사용하게 될 개정판 미사경본이 간행되어 트리엔트 미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가타 라틴어 성경의 개정판이 발간되었으며, 지역교회의 주교들은 임지에 상주하는 의무를 다하면서 주일과 축일에는 강론을 하고 본당을 방문하는 사목활동에 충실하였다. 그들은 사제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세웠는데, 중세기에는 일정한 기간 개인 교육을 받은 다음에 사제가 될 수 있었지만, 이제 주교들은 신학교에서 신학교육과 영성지도를 받은 사제 지망자를 엄격하게 심사하여 사제로 서품한 것이다. 이로서 기존에는 기사와 귀족들에 가까웠던 봉건적 성직자들이, 장교와 관료들에 가까운 근대적 성직자들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전체 가톨릭 교회가 체계화되고 일원화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다만 신학교 시스템에는 기존 지역사회의 기득권층이 교황청의 과도한 폭정이라며 아우성을 치기도 하였다. 또한 가톨릭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도입된 새로운 영성운동은 바로크 예술과 결합되어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가톨릭 종교개혁은 그저 단순한 반격 수준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에서 중세 내내 꾸준히 되풀이되던 쇄신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4.7. 번외: 오스만 제국[편집]

대체로 개신교 신자들도 무슬림을 가톨릭에 대항하는 동맹군으로 환영하지 않았다. 실제로 1571년 가톨릭의 신성동맹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을 무찌르자 개신교 신자들도 다 함께 풍악을 울렸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은 종교개혁의 시대에 큰 역사적 족적을 남겼는데, 독일 개신교 신자들에게 대응하려던 카를 5세의 주의를 돌려놓고, 펠리페 2세가 저지대의 반란에 주력하지 못하게 했다. 대체로 오스만은 제국내의 개신교 신자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고, 서유럽의 분열상을 흥미진진하게 팝콘을 뜯으며 관람했다. 대체로 무슬림들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개신교 신자들의 논리에 더 공감을 했는데, 이는 성상과 성화 등 이미지에 대한 공경에서 개신교와 논리가 유사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서유럽에서 루터파-칼뱅주의자-가톨릭 신자들에게 다굴을 당하던 재세례파오스만 제국에서 그 어떤 유럽 국가에서도 누리지 못하는 안전을 보장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국 내의 그리스도교 지역에서 복수의 종파가 공존하게 되었다.

5. 종교개혁이 남긴 것들[편집]

종교개혁이라는 큰 폭풍이 지나간 100년 사이에 유럽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개혁이 시작되었던 신성로마제국은 폭풍이 지나간 뒤 후대의 볼테르의 말마따나 더 이상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게 되었다. 교황의 속권과 황제의 힘이 세트로 약해지면서 교황이 주는 황제의 권위라는 것 자체가 무색하게 되었고, 제국을 구성하던 제후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종교의 자치권을 얻은 것을 시작으로 점차 거의 완전한 자치권을 얻어 더 이상 하나의 제국이 아닌 일종의 연방과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여기에 30년 전쟁의 폭풍이 지나가면서 독일 인구의 상당수가 죽었고, 결국 독일은 이후 프로이센이 부상할 때까지 유럽의 무대에 등장하지 못하게 되고, 제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가 되어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프로이센이 등장할 수 있던 배경이 신성로마제국의 몰락에 있었다는 것.

또한 종교개혁은 근대 독일어를 만들었다시피 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에는 마르틴 루터의 공헌이 컸는데, 루터 본인이 번역한 성경은[41] 독일 전역에 퍼지면서 그 자체로 근대 독일어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와 달리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등장한 인쇄술에 힘입어 막대한 파급력을 갖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루터라는 한 사람에 의해 근대 독일어가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개신교 개혁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것은 독일 지역이었지만, 다른 나라에도 개신교 개혁은 큰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영국은 칼뱅파의 교리를 일부 빌려 성공회를 만들어 독립하였고[42], 프랑스도 위그노가 중요한 사회 세력으로 떠올라 위그노 전쟁이라는 홍역을 앓게 되고, 결과적으로 발루아 왕조가 몰락하고 부르봉 왕조가 등장하게 되는 기원이 되었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는 직접적으로는 큰 30년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기에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서 중흥을 맞았고, 프랑스는 한 세대 일찍 국내의 갈등을 봉합한 뒤, 30년 전쟁을 정치적으로 잘 이용한 루이 13세리슐리외를 통해 절대왕정을 완성하고 한동안 유럽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다.

5.1. 개신교의 출현[편집]

마르틴 루터 신학은 바울로아우구스티누스의 재발견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근대적이라기 보단 중세적이고 중세적이라기 보단 고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어디까지나 로마교회를 박차고 나가서 새로운 교회를 설립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진정한 초기교회를 회복한다는 모토 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새시대를 이끌 사회변혁의 수단이 되지 못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루터의 개혁 운동은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를 제외하면 별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독일적인 현상이었다. 이후 츠빙글리를 이은 칼뱅의 신학 역시 루터와 차별된 독자적인 시도했고 세계주의적인 시도를 했지만 역시 북유럽 네덜란드 영국 스위스 정도에 머물렀다. 16세기 중후반 한때 가톨릭 교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였지만 가톨릭 교회에서도 새로운 반격에 나섰고, 17세기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강제력이 따르긴 했지만 유럽의 개신교도는 전체 인구의 20%선에 그치게 되어 결론적으로는 게르만식 기독교 신앙으로 이미지가 굳어져 버렸다. 이후 유럽에서의 종교적 갈등은 마무리되고 유럽외의 선교는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 교회에서 주도하게 된다.

개신교회에서는 19세기 이전까진 해외 선교에 부정적이었는데 영미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문화권 국가의 기독교 전래는 한국을 제외하면 그다지 성공적인 편은 아니다. 20세기 후반 이후 개신교가 서구에서는 완전히 몰락했고, 신자수와 출석률로만 보면 아프리카와 남미, 아시아 등 비서구권에서 자체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개신교 선교가 성공적이지 않다 보는 시각도 있으나 북한등의 공산권, 타종교가 국교화된 지역, 이란등의 이슬람권 등 기독교가 제한된 곳에서는 지하교회 형태로 성장하고 있다.

5.2. 근대의 출현[편집]

가톨릭이든 개신교이든 개혁자들은 개개인의 신앙을 넘어서, 공동체 전체를 개혁하기를 원했다. 그들이 지향한 것은 더욱 균일한 사회, 더욱 경건한 국가였다. 그러나 이 목표와 달리 유럽의 복수 종파들이라는 결과를 산출한 아이러니를 낳았다. 극단적인 예외들을 제외하면, 개혁자들은 국가의 권력을 열렬히 옹호하여 국가 자체를 복음화하려고 했으나, 국가의 권위에 도전할 온갖 논리를 산출했다. 개혁자들은 사회를 신성화하려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전의 유럽인이라면 상상하는 것 조차 거북해할 정도의 세속화된 유럽을 산출했다. 개혁자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근대라는 사생아가 태어난 것이다.

종교개혁은 잉글랜드왕의 지배를 받는 가톨릭 신자, 프랑스왕의 지배를 받는 개신교 신자 등 사회에 용인되지 않는, 그렇다고 해서 무슬림이나 유대인과는 달리 이방인은 아닌, 수많은 소수자들을 낳았다. 이러한 소수자들의 탄생은, 속권에 대한 복종의 한계를 전례없이 이론화시켰고, 소수 집단의 저항에 관한 세련된 논리들이 발견되기에 이른다. 가톨릭, 루터교, 칼뱅주의, 재세례파를 막론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본래 중세에 군주의 속권이란 '그리스도인의 보호자'라는 명목에서 옹호된 것으로, 군주의 속권은 하느님으로부터 보장된 것이 틀림없어보였다. 이것이 바로 왕권신수설이다. 그런데 잉글랜드의 가톨릭 신자 등에게는 국왕이 '그리스도인의 보호자'일 수 없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보호자'가 아닌 필부(匹夫) 헨리, 동네 아낙 엘리자베스 등이 왕을 참칭하는 것일 뿐이며, 이들은 국왕이 아니라 참주(tyrant)일[43] 뿐이다. 이를 참주 살해론(폭군 살해론)이라고 한다. 물론 비슷한 개념 자체는 중세에도 있기는 했다. 교황이 군주를 파문하여 권위에 타격을 준 개념은, 참주 살해론과 연결될 구석이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기 이후로는, 이전 시대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세련된 논리들이 등장하여 군주들의 권위를 박살내기 시작한다.

루터와 칼뱅은 속권을 부정하는 인물들은 결코 아니였으나, 가톨릭 군주에 대한 불복정을 권유하였고, 잉글랜드인 로버트 퍼슨스(Robert Persons) 등 예수회 신학자들은 참주 살해를 정당화하였고, 이러한 논리에서 1534년에 아일랜드에서는 킬데어 백작의 주도로 헨리 8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영국의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개념은 퍼져갔다. 영국의 왕은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의 보호자이면서도, 동시에 스코틀랜드 국교회의[44] 보호자라는 두개의 자리를 겸직했는데 이는 "영국의 개신교는 어떠한 개신교여야 하는가?"라는 개신교 내부의 투쟁인 영국 내전을 부른다.

또한 종교개혁을 통해 비로소 유럽 역사에서 교권과 속권이 본격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45] 비록 종교개혁 이전에도 교회의 권위는 추락하고 있었고 사코 디 로마와 같은 막장사태까지 일어나는 상황이었지만, 그 사건을 직접 일으킨 카를 5세조차도 권위를 위해 교황이 내려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가 필요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통해 등장한 프로테스탄트는 이러한 권위에서 자유로웠고, 제국의 제후들은 이를 잘 이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는 교황의 속권은 호소력을 점차 잃어갔다. 다만 권위를 뺏기지 않고자 시작되었던 예수회로부터 시작된 가톨릭 내부의 자정 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정치에서 멀어진 덕에 오히려 가속되어 이후 그럭저럭 성과를 거두게 된다. 물론 교권과 속권의 더욱 엄격한 분리는,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유럽의 세속화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또한 교황의 속권은 15세기 이후 낮아졌지만, 반대로 교황의 교권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더욱 엄밀하게 정의되고 옹호되어 훨씬 강화되었다. 종교개혁 이후로 추기경들은 더이상 교황과 반목하는 전통적인 귀족적 직분이 아니였고, 교황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관료적 직분으로 재편되었으며, (아주 중요한 예외인 혁명 이후의 프랑스를 제외하면) 중세처럼 가톨릭 군주들이 성직자를 서품하겠다며 교황과 멱살을 잡는 사례도 사라졌다.

한편 가톨릭의 쇄신 운동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포교 성성을 출범시키고 남극을 제외한 지구의 구석구석까지 선교사를 보낸다.[46] 이를 통해 가톨릭은 서유럽의 지역적 종교를 넘어, 오대양 육대주를 아우르는 초거대 종교로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근대로 진입하는 중요한 발견이 있었는데, 바로 예수회가 중국 선교를 하면서 일어났다. 동아시아는 고도의 문화를 갖춘 지역이였고, 따라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유럽인들보다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원들은 중국인들이 유럽의 문화까지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며, 다만 그리스도교 신앙만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회원들은 중국인 고관처럼 차려입었으며, 그리스도교는 생소한 외래종교가 아니라 유교적 논리의 완성이라고 주장하였고, 때문에 유교식 제사가 '미신적 요소가 없다'며 허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예수회원들은 중국어로 교회의 전례를 행할 수 있도록 로마에 요청하여, 1615년에 바오로 5세로부터 성경의 중국어 번역 및 중국인 사제들의 중국어 미사를 허용 받았다.[47] 유럽인들이 모두 라틴어 미사를 참례하고 있던 시절에 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적응주의적 선교는 다른 지역에도 적용되었는데, 예수회원들은 인도에서는 브라만처럼 입고 먹었고, 인도인 출신 개종자들을 위해 시체 태운 재를 뿌린 강물에서 목욕하는 '사회적' 관습 등을 허용하였다. 물론 예수회의 선교 노선은 가톨릭 내부에서도 많은 반대에 부딪혔으나 이는 선교에 있어서 있어서 효과적인 방법임이 역사적으로 점점 증명되어갔다. 문제는 유럽이다. 이방인들이 유럽의 문화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똑같은 원리로 유럽에서도 문화와 종교의 분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전도의 목표를 위해 낯선 사회의 관습과 의례를 존중한 태도가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문화적 종교적 상대주의를 촉진하고 결국 기독교 자체가 그 상대주의의 제약을 받게 되는, 예상치 못한 장기적 결과를 가져온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


그야말로 역설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진행될 수록 예수회 뿐만이 아니라 유럽인 전체에서도, 어느샌가 스물스물 "유럽의 문화와 그리스도교는 분리될 수 있다"라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렇듯 종교개혁의 시기에 각 종파들은 각각의 방법으로 근대라고 하는 방항적인 사생아를 낳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그러나 이후의 역사를 뒤집어버릴 사생아 말이다.

"대관절 종교개혁이 우리를 위해 무얼 했는가?"라는 수사적 의문을 제기하는 회의론자는 종교개혁의 기념비적인 성취 ─근대 자본주의, 정치적 자유 개념, 과학의 발전, 마술과 미신의 쇠퇴─를 열거하는 장황한 답변을 들을 공산이 크다. 이 모든 성취는 오래전부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낳은 조숙하고 다루기 힘든 자식으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리 명확하지 않으며, 종교개혁이 근대성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는 생각은 혈통과 양육에 관한 골치 아픈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종교 운동으로서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문제들이 아니라 해묵은 문제들과 씨름했으며, 루터는 만약 근대가 그를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한다면 격렬히 부인할 것이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


5.3. 이단심문과 마녀사냥[편집]


한편 종교개혁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로,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의 이야기가 있다. 스페인에서는 유대인 출신의, 혹은 무슬림 출신의 개종자에 대한 과도한 의심으로 종교재판이 폭주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식 종교재판은 교회와 국가의 제대로 된 통제를 받게되면서 1530년대 이후 급격히 희생자가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비극적이게도, 가톨릭권과 개신교권은 모두, 서로의 신심의 상대방보다 경건함을 증명하기 위해 마녀사냥이라는 명목으로 생사람들을 잡게 된다. 다만 마녀사냥에 상대방 종파를 고발했다는 통념은 사실은 아니다.

마녀를 가장 맹렬하게 박해한 1570~1630년은 신교 국가들과 가톨릭 국가들이 교파화되고 이데올로기 전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기간이기도 했다. (중략) 가톨릭교도들과 신교도들 중에 어느 쪽이 박해에 더 열을 올렸느냐는 것은 이견이 분분한 문제다. 박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은 대게 독일의 작은 영역을 통치한 가톨릭 주교들이었다. 일례로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율리우스 에히터 폰 메스펠브루니(Julius Echter von Mespelbrünn)은 가톨릭 개혁의 강경파로서 1616~1617년에 마녀를 300명 넘게 화형시켰다. 그러나 가톨릭 남유럽은 처형률이 가장 낮은 축에 들었고, 에스파냐 종교재판소는[48] 로마 종교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마녀들이 저지른다는 소행에 회의적이었다. 칼뱅의 제네바에서는 화형당한 마녀가 거의 없었고, 신교권 네덜란드와 칼뱅파 팔츠에서는 사실상 마녀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다른 칼뱅파 지역들은 1660년대까지 계속하여 마녀를 가장 혹독하게 박해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전반적으로 마녀 재판이 줄어들었지만, 잉글랜드 이스트앵글리아에서 내전 막바지에, 루터파 스웨덴에서 1668~1647년에, 그리고 유명한 사례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에 정착한 청교도 공동체에서 1692년에 추악한 마녀 재판이 발생했다. 마녀 재판을 종식하는 데는 다수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다양한 법률 체계들이 도입된 더욱 엄격한 증거 기준, 고문 제한, 과학적 회의주의, 비열한 마을 주민이 광분해서 제기하는 고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엘리트주의적 태도 등이 그런 요인들이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들은 종교 전쟁의 종결과, 다원주의를 향해 절뚝거리며 나아간 발걸음이었다. 우럽 사회들이 실제 "타자들"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통합함에 따라 상상 속 타자들은 더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엄밀하게 균일한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고 다른 무언가를 우연히 낳아주는 데 성공했음을 말해주는 또다른 증거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

가톨릭교와 신교는 과격한 종교적 수사법을 곧잘 구사하면서도 좀처럼 서로를 마녀술 혐의로 고발하지 않았다. 마녀들의 주된 죄목과 종교개혁의 주요 논쟁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예전부터 마을 주민들은 반사회적인 늙은 여자들이 주술을 걸고 고약한 저주를 내린다고 항상 의심했지만, 공식 박해에 시동을 건 동력은 마녀들이 악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악마의 명령에 따라 기독교 사회와 전쟁을 벌이는 대규모 배교자 군단이라는 의심을 굳혀간 신학자들의 확신이었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


Both Catholics and reformers tended to hunt witches, as they hunted Anabaptists, to demonstrate their doctrinal purity and fervour. With the exception of Zwingli, the German reformers accepted the mythology of witchcraft. Luther thought that witches should be burnt for making a pact with the Devil even if they harmed no one, and he had four of them roasted at Wittenburg. The Protestants relied on Exodus 22:18: Thou shalt not suffer a witch to live.' As Calvin said: 'The Bible teaches us that there are witches and that they must be slain ... this law of God is a universal law.' The Calvinists, in fact, were much fiercer against witches than the Lutherans. On the whole, Anglican Protestants were not keen witch-hunters, and during the whole period 1542-1736 many fewer than 1,000 were executed (by hanging) in England, against 4,400 in Calvinist Scotland during the ninety years beginning in 1590. The worst year in England was 1645, when the Calvinist Presbyterians were in power. Where English Calvinists could, they propagated witch-hunting. Bishop Jewel, who had lived in exile in Geneva, brought the craze with him on his return in 1559; and in the 1590s, the Calvinist William Perkins lectured on the subject at Emmanuel College, Cambridge, a Puritan institution where some of the Founding Fathers of New England were educated. Wherever Calvinism became strong, witches were systematically hunted. Equally, on the other side of the religious barriers, it was the followers of Loyola, the puritanical Catholic, who now popularized the witch-hunt.

재세례파를 사냥한 것 처럼, 가톨릭 교도들과 개혁자들 모두는 자신들의 교리적 순수성과 열정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마녀사냥에 열을 올렸다. 츠빙글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독일의 종교개혁자들은 마법의 신화를 받아들였다. 루터는 마녀들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귀와 협정을 맺은 존재들이기에 화형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4명의 마녀를 비텐부르크에서 화형에 처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마녀를 살려두어선 안 된다"라는 출애굽기 22장 18절에 의존했다. 칼뱅은 "성경은 마녀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을 없애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 하느님의 이 법은 보편적 법이다"라고 말했기에, 칼뱅주의자는 사실 루터파보다 마녀들을 훨씬 혹독하게 다뤘다. 이에 비해 잉글랜드 국교회는 마녀사냥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1542~1736년 동안 잉글랜드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사람들은 1천 명 미만이었지만 칼뱅파가 지배했던 스코틀랜드에서는 1590년부터 90년 동안 4,400명이나 처형당했다. 잉글랜드에서도 칼뱅주의자들은 가는 곳마다 마녀사냥을 선전했다. 잉글랜드에서 최악의 해는 칼뱅파 장로회가 지배한 1645년이다. 잉글랜드 칼뱅주의자들은 그들의 능력이 되는 곳에서는, 마녀사냥을 선전했다. 제네바에서 유배 중이었던 Jewel 감독은[49] 1559년에 돌아오면서 그 대유행(the craze, 마녀사냥)을 가져왔다. 그리고 1590년대에, 뉴 잉글랜드의 아버지들이(Founding Fathers) 교육 받은 퓨리턴 기관인, 케임브리지 대학의 임마누엘 칼리지에서 칼뱅주의자 William Perkins가 그 주제를 강의했다. 칼뱅주의자들이 힘을 얻는 곳 어디에서든, 마녀들은 체계적으로 사냥당했다. 마찬가지로, 신앙적 장벽의 다른 곳에서, 퓨리턴적 성격이 있는 예수회원들이 마녀사냥을 대중화시켰다.


A History Of Christianity」, Paul Johnson[50]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1] 광의[2] 협의.[3] 이는 다른 유럽 언어들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역사적으로 개신교의 세력이 미약했던 스페인마저 오랫동안 la Reforma로 써왔었다.[4] 예를 들어 '개신교 개혁'이라고 하면 한자어 특성상 겹말처럼 보일 수 있다.[5] 넓은 의미의 종교개혁(가톨릭 쇄신 포함)이 아닌 좁은 의미의 종교개혁(개신교 출현)에서도.[6] 매우 편향된 어조로는 반동 종교개혁으로 번역하기도 한다.[7] 다만 칼 마르크스의 경우 자본주의가 종교개혁을 탄생시켰다고 평가했고, 반대로 막스베버는 종교개혁의 신교도 지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했다 주장했는데 두 상반된 주장처럼 간단하게 원인과 결과를 찾지 않는다. 각각 현대에 보기엔 무리한 근거들이 많기 때문.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와 개신교의 연관성에 관한 시선에 역사학자들이 회의를 보내고 있다. 자세한건 막스 베버 항목 참조.[8] 따라서 개신교에서는 10월 마지막 일요일(주일)을 종교개혁 기념 주일로 삼는다. 물론 가톨릭은 그런 거 없다.(그리스도교 일치 기도 주간은 10월 마지막 일요일이 아닌 사도 바오로 축일에 맞춰서 1월 후반으로 삼는다)[9] 그 이전까지 발도파는 알프스 산속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밑 각주에서 반복하지만 후스와 위클리프의 말로는 별로 좋지 않았다.[10] 존 줄리어스 의 교황연대기를 보면 르네상스 시절 막장 교황들보다 11~12세기 시절이 더 타락했다 평가한다. 10세기의 창부 정치시대는 여인천하 왕좌의 게임 실사판이었고 요한 12세처럼 벼라별 엽색 행각과 전쟁으로 반대파의 코와 손가락을 자르는 막장인도 있었다.[11] 現 네덜란드 즈볼러(Zwolle) 근처에 위치한 빈데스헤임(Windesheim)을 거점으로 하여 토마스 아 켐피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De imitatione Christi)란 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수도원이 있던 자리는 종교개혁 이후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되었으나 일부는 남아서 |네덜란드 개혁교회 건물로 활용되고 있다. [12] 다만 공의회에서 하는 선언 하나하나가 모두 무류한 것은 아니며, 교황이 무류하게 선언하는 경우들과 같은 원리로, 무류성에 대한 명확한 명시를 하여 선언해야 무류하다고 해석된다. 이것을 나타내는 가르침이 바로 교회법 749조 ③이다. 따라서 콘스탄츠 공의회는 적법한 공의회로서 권위를 지니되, 무류한 가르침은 아니라고 오늘날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해석한다.[13] 이탈리아 중부를 흐르는 강으로 가톨릭을 가리킴[14] 영국 워릭 대학 역사학과 교수. 근대 초기 영국과 유럽의 종교사 및 문화사를 주로 연구한다.[15] 때문에 대사(면벌부) 자체는 엄연히 현대의 가톨릭 교회에도 사라지지 않은 개념이다.[16] 이게 왜 중앙의 권력 강화인지 이해가 안간다면, 한국사에서 고려 광종이 과거제를 도입하여 호족들을 견제한 것을 생각해보자. 신학교 시스템의 의의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설명하겠다.[17] 헨리 8세만을 연상하나 마무리 된건 한참 나중이다.[18]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완성한 자이나 잉글랜드에도 영향을 줌.[19] 에드워드 6세시기 케임브리지 흠정교수로 초청[20] 과격혁명론자들도 모두 재세례를 주장했으나 모든 재세례파가 과격 혁명주의는 아니었다.[21] 1525년 같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로이센에서 튜튼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이 개종해서 같이 개종했다는 잘못된 썰이 있긴한데, 프로이센과 브란덴부르크 같은 호엔촐레른 가문인건 맞는데 이시기엔 아직 프로이센공국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친척일뿐 동군연합이 아니었다. 1618년 프로이센 공작가가 대가 끊어지자 친척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물려받은것.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가 개종한것은 알브레히트의 형 선제후 요아힘 네스토르가 사망하고 다음대 선제후인 요아힘 헥토르 시절이고.. 물려받을때 유언으로 개종하지 말것을 남겼지만 쌩까고 개종해버렸다. 한편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1518년에 추기경에 오르고 1540년대 자신의 영지 할레가 개신교 지역으로 넘어가자 야코프 푸거에게 빚진 돈을 개종한 교회에다 넘겨버리기까지 한다.[22] 무늬만 수도자로 인스부르크에서 간음등 수치스러운 범죄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교회빽으로 석방된 전적도 있었다.[23] 4만8천이라는 설도 있다.[24] 십자군 시기 전쟁비용을 대기위해 성직제후들에게 부과된 세금으로 교구내 첫해 수입을 몽땅 바쳐야한다. 후에 십자군전쟁이 없어져도 관습적으로 세금으로 고착화된다.[25]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기는 하지만, 교황청의 결정에 의해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이미지는 트리엔트 공의회 등을 거치며 정착해나간 것이다.[26] 1415년 지기스문트 황제의 신변보장 약속을 받은 얀후스는 화형에 처해졌지만 카를 5세는 마르틴 루터가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어도 신변보장을 했다곤 하는데 조금 사실과 다르다. 제국 공민권을 박탈하는 제국추방령을 내렸기에 누구든지 루터를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루터를 작센에 돌려보내자 암살자들이 뒤 따랐다.[27]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가 비텐베르크 신학대에서 새로운 신학이론을 펴고 작센에서 지지받자 못 마땅해하긴 했는데 내버려 뒀다., 후계자인 동생 요한 1세와 조카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열렬한 루터 지지자이긴 하다.[28] 카를 5세는 스페인의 초대 국왕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의 이름은 카를로스 1세.[29] 사실 과격 혁명세력은 루터에 영감을 받아 루터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루터가 거부한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농노제 사유재산 화폐 폐지, 토지분배 까지는 현대 좌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할만하지만, 성령체험 강조로 성령을 받은자가 못 받은자보다 우월하다는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냈고, 성령체험받은 새로운 상위계층 주도의 새로운 신정정치 체제를 열며 구약성경을 근거로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며 여자가 모자르기에 소녀부터 노파까지 결혼을 거부한 미혼 여성은 사형... 지배계급은 재산몰수가 정도가 아니라 가라지나 풀무 잡초등의 비유를 들어 적극적으로 쳐죽여야 될 대상으로 정당화 했다. 또한 독일 군주들에게 자신을 지원해서 적그리스도 교황 목을 따러 가겠다고 선포하는 등 이념면에서부터 사이비 종교 냄새가 폴폴 나며, 농민 보다는 몰락기사, 용병, 광부 유랑민들이 숫적으로 우세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 연구에선 독일 농민전쟁이 특수한 예가 아니라 흑사병 이래 약 200년 동안 서유럽에서 동시 다발적인 농민의 난에 연속선상에서 일부로 보고 있다.[30] 그런데 루터에 대한 근대 역사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다 민족주의자들은 말할것도 없고, 좌파성향의 마르크스와 엥겔스, 무신론자였던 포이어바흐나 니체 조차 공적을 인정하고 있고, 동독시절 사회주의자 그룹도 토마스뮌처를 가장 높이 치지만 그가 나올 수 있던 원동력은 루터가 필수적이었다고 본다..[31] 루터는 항상 본인을 신학자로 생각했으며, 신학 외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마르틴 루터 항목을 참고할 것.[32] 다만 절정기는 아니었다. 이 무렵부터 총기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등장하여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중이었기 때문. 실제로 이들은 당시 시점에서 얼마 못 가 몰락하고 최강의 병사라는 타이틀은 스페인의 테르시오가 이어받게 된다.[33] 결국 스위스는 종교개혁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30년 전쟁이 끝난 뒤 독립을 이루게 된다.[34] 자세한 내용은 장 칼뱅을 참조할 것.[35] 이는 신학적으로 가톨릭에서 벗어나 황제의 권위와 멀어지는 대신, 민중 반란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서는 보수적이여야 하는 그들의 입장과 루터교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36] 다만 극도로 금욕적인 칼뱅의 교리 때문에 이는 반발도 심했으며, 실제로 칼뱅은 이 과정에서 제네바에서 잠시 추방당하기도 했다.[37] 이는 북유럽의 루터파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덴마크 스웨덴에서 국가교회화 하자 지배하에 있던 핀란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등도 루터파를 받아들인 국가교회로 전환한다.[38] 물론 현대 성공회 자체는 프로테스탄트 계열로 분류된다. 그러나 헨리 8세시기에는 개신교 성향이 오히려 탄압받았고 본격적으로 개신교화 된건 에드워드 6세와 엘리자베스 1세 시기 칼뱅주의를 받아들이고 나서이다. 그리고 개혁교회이면서 동시에 보편교회를 지향하는 모호한 정체성 때문에 18세기까지도 혼란이 제법 있었다.[39] 뉘른베르크 레겐스부르크 슈트라스부르크등 제국도시는 명목은 황제직할지였으나... 실질은 재산과 학식등 소양을 갖춘 시참사회가 통치했다.[40] 위에서 인용한 1560년에서[41] 이 과정에서 루터는 상당수의 단어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야 했다.[42] 다만 이 과정에서 여전히 청교도들은 탄압받았고, 그러다 일부 청교도들이 1620년대에 신대륙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미국의 기원이 된다![43] tyrant는 폭군으로 흔히 번역되지만, 여기서는 왕이 아니라는 의미이므로 폭군보다는 참주나 독재자가 알맞을 것이다. 또한 근대적 뉘앙스가 강한 독재자보다는 참주가 더 어울리는 번역이라 판단되어 참주로 옮겼다.[44] 영국 내전 이전을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시스템적으로는 잉글랜드처럼 하이브리드하였지만 퓨리턴적 성향이 더 강했다. 때문에 스코틀랜드 국교회 신자들은 잉글랜드 국교회를 교황 없는 가톨릭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영국 내전의 불씨 중 하나가 된다.[45] 다만 없던 개념은 아니고, 중세동안 교황과 군주가 서품 논쟁을 겪으면서 느슨하게나마 '교권과 속권의 분리'라는 개념이 자리잡았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발달한게 종교개혁 시기이고, 역사상 강경하게 분리하려던 시도가 프랑스 혁명이라 할 수 있다.[46] 알려지지 않은 사례지만, 복자 빈첸시오 권을 통해 조선에도 선교하려고 했었다. 복자 빈첸시오 권은 조선인 출신의 예수회원으로, 고니시 가문의 후원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인데, 중국을 통해 조선에 진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명청교체기의 혼란기라서 중국을 통한 조선진입 계획이 막히고, 복자 빈첸시오 권이 일본에서 순교하여 이 시도는 실패한다.[47] 「예수회 역사」후안 카트레트[48] 사실 스페인의 경우는 정말로 억울한 경우인데, 스페인은 마녀사냥도 적었을 뿐더러, 이단심문 역시도 알려진 것보다는 덜 광폭했다. Helen Rawlings의 통계(저서인 The Spanish Inquisition에서 인용)에 의하면 사형이 집행된 희생자 숫자는 최대한도로 올려잡아서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약 2000명이며 이마저도 1540년대부터는 콘베르소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고, 재판에 체계가 잡혀가면서 1700년까지 에스파냐 이단심문의 모든 관할권을 합쳐 총 826명만이 처형되었다. 롤링스의 통계를 토대로 최대한도로 잡는다면 1480년부터 1700년까지 연간 12.9명이, 가장 참혹했던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연간 40명이 처형된 것인데, 이는 끔찍한 희생이기는 하지만 동시대 유럽의 타국가들보다 더 광신적인 신앙이라 말하기엔 힘든 숫자이다. 물론 이단심문 자체는 에스파냐가 가장 적극적으로 한 것도 사실이지만, 에스파냐는 마녀사냥으로부터는 안전지대였고, 종교적 박해의 막장성은 이단심문보다는 마녀사냥쪽이 훨씬 심했다. 스페인보다 훨씬 인구수가 적었던 스코틀랜드의 마녀사냥 희생자 숫자가 1590년부터 1680년까지 4,400명이였던 것과 비교한다면, 그리고 독일 가톨릭 신자들이 저지른 마녀사냥의 희생자 숫자와 비교한다면, 에스파냐가 유럽에서 가장 광신적인 지역이였다는 해석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다시말해 에스파냐의 이단심문이 유럽에서 가장 광신적이였을지 몰라도, 에스파냐의 교회는 남독일과 스코틀랜드의 교회보다는 덜 광신적이였다. 또한 유대인 역사학자 Henry Kamen의 저서 The Spanish Inquisition에 의하면 스페인 이단심문에서는 10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경우 한두명만 사형이 집행되었고 나머지는 인형을 처형했는데, 이것이 사형 집행자 숫자가 터무니없이 오해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특히 스페인 이단심문에서 40만이 처형되었다는 황당한 정보도 많이 돌아다니므로 주의. John Vidmar의 저서 「십자군과 이단심문 Q&A 101」에 의하면 17세기 스페인 톨레도 법정의 경우 151건의 마녀재판을 다루었는데, 이는 연간 약 1.5건이다. 또한 이들 전체가 처형된 것도 아니다.(이 문서에 자주 인용된 Peter Marshall에 의하면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유럽 전체에서 약 10만명이 고발당해 4만명이 사망) 뿐만 아니라 인용된 헨리 카멘의 연구에 따르면 수감 상태에서 죄수에 대한 처우나 사법 과정의 잔혹성 또한 종교 재판소의 여건이 평균적으로 일반적인 그냥 지방 감옥보다 훨씬 인도적인 편이었다.[49] 개신교 인물이므로 주교가 아닌 감독으로 번역했다.[50] 국내에 번역본이 있는데, 위의 원문에서 "The worst year in England was 1645, when the Calvinist Presbyterians were in power"에 해당하는 부분이 역본에 없고 "Equally, on the other side of the religious barriers, it was the followers of Loyola, the puritanical Catholic, who now popularized the witch-hunt"에 해당하는 부분이 "어느 누구보다 마녀사냥을 대중화한 장본인은 예수회 회원들이었다"로 적혀있고 , "Wherever Calvinism became strong, witches were systematically hunted" 등의 문장에 해당하는 부분도 실려있지 않다. 이것이 오역과 의도적 삭제의 결과인지, 혹은 원문의 판본(edition)이 차이나서 그런 것인지는 추가바람. 일단은 링크한 쪽이 인용한 판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