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

최근 수정 시각: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존 F. 케네디의 아들에 대한 내용은 존 F. 케네디 주니어 문서를, 미국의 공항에 대한 내용은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 펼치기 · 접기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임스 먼로

존 퀸시 애덤스

앤드루 잭슨

마틴 밴 뷰런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윌리엄 해리슨

존 타일러

제임스 포크

재커리 테일러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밀러드 필모어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

에이브러햄 링컨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앤드루 존슨

율리시스 S. 그랜트

러더퍼드 B. 헤이스

제임스 가필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체스터 A. 아서

그로버 클리블랜드

벤저민 해리슨

그로버 클리블랜드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우드로 윌슨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제45대

도널드 트럼프

※ 22.24대 미합중국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한차례 건너뛰고 연임한 사례의 대통령이다.

파일:JFK.jpg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본명

존 피츠제럴드 "잭" 케네디(John Fitzgerald[1] "Jack" Kennedy)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png

출생

1917년 5월 29일, 미국 매사추세츠 브루클라인

사망

1963년 11월 22일 (향년 46년 177일), 미국 텍사스 댈러스

학력

초우트 로즈마리 홀 고등학교(1931-1935)
프린스턴 대학교(1935-1935)(자퇴)[2]
하버드 대학교(1936-1940)[3]

직업

정치인

배우자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신장

185cm[4]

종교

가톨릭

정당

민주당

경력

매사추세츠 하원의원(1947 ~ 1953)
매사추세츠 민주당 상원의원(1953 ~ 1960)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제35대 미국 대통령(1961 ~ 1963)

부모님

조지프 P. 케네디(1888년 9월 6일 ~ 1969년 11월 18일)
로즈 케네디(1890년 7월 22일 ~ 1995년 1월 22일)

자녀

아라벨라, 캐롤라인, JFK 주니어, 패트릭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John_F_Kennedy_Signature_2.svg.png


1. 개요2. 초기 일대기
2.1. 젊은 시절2.2. 2차대전 참전2.3. 정계 활동과 대선 승리
3. 행적4. 평가
4.1. 비판4.2. 옹호
4.2.1. 대외 정책4.2.2. 대내정책
5. 갑작스러운 암살6. 가족과 개인사7. 어록8. 한국에 대한 시각9. 트리비아10. 대중매체에서의 등장11.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미국 민주당 리버럴의 상징이 되어버린 가장 인기 높은 대통령 중 하나

냉전 후 미국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대통령이자 미국 정치권에서 가장 유명한 스캔들과 음모론을 가지고 있는 대통령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본격 TV정치시대의 개막을 알린 대통령이자 미국에서 선거를 거쳐서 취임한 최연소 대통령[5], 그리고 유일한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기도 하다. 또한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이므로, 몇 안되는 비WASP 대통령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암살 당한 유일한 대통령이자, 20세기 암살당한 두번째 대통령.[6] 현재까지도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함께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정신적 지주에 근접한, 진보의 화신같은 존재이다.[7]

20세기에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이자 트루먼, 아이젠하워보다 한 세대 가까이[8] 젊은 대통령. 단적으로, 60년대 초를 풍미한 케네디보다 80년대를 풍미한 로널드 레이건이 그보다 여섯 해 먼저 태어났다.[9]


대선 당시 광고(1960년)풀버전(컬러)

광고 초반에 자세히 보면 린든 존슨도 보인다.

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당신을 위한 케, 네, 디!
세상을 알기엔 충분히 먹을만큼 먹었으면서도, 무엇이든 해내기에 충분히 젊은 사람!

2. 초기 일대기[편집]

2.1. 젊은 시절[편집]

매사추세츠 주 브룩라인(Brookline)에서 당시 보스턴의 부유한 사업가인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10](J.P 케네디, 1888년 ~ 1969년)의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Joseph_P._Kennedy%2C_Sr._1940.jpg

케네디 가문은 19세기 후반 아일랜드 대기근을 피해서 미국으로 이주한 가톨릭교 신자들이다. 그의 아버지인 조지프 케네디는 주식투자와 영화사업, 기업M&A 등으로 엄청난 부호가 되었고, 동시에 영국 주재 대사로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11] 이런 명문가이자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남부러울 것 없었던 조지 케네디의 야망이었던 '우리 집안에 대통령 하나 쯤은 나와야 한다'는 교육 방침에 따라 케네디의 자녀들은 어릴 적부터 집안의 빵빵한 지원 속에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12]

조지프 케네디의 이런 태도는 "인간 성공의 척도는 돈이 아니고, 그가 만드는 가문(가정)의 종류이다." 란 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로버트 F. 케네디, 에드워드 케네디 등도 대기후보(?)로 정계에 투신하였다.

운동, 공부 모든 것에 만능이던 장남 조 케네디(Joe 케네디)에 비해 좀 왜소하고 어려서부터 잔병 치레를 한 잭 케네디는 성적이 다소 떨어졌음[13][14] 에도 정계 유력인사이자 하버드 출신인 아버지의 후광에 역시 명문가였던 친척들의 신원보증을 얻어 하버드에 입학했다.[15]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고 학창 시절 유럽 여러 나라들을 탐방하였던 그는 외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실로 졸업 학위 논문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1940)는 출간 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의 네임 체임벌린이 뮌헨 협정아돌프 히틀러독일 제3제국에 대해 펼쳤던 유화정책을 비판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교수들은 이 논문이 굉장히 장황하고 내용이 반복된다고 하면서도 그 깊이는 인정한다고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는 당시 주영 미국대사로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을 적극 지지했고, 미국이 유럽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6]아빠 디스 케네디는 주영 대사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대학생의 신분으로 구할수 없는 미, 영 외교문서들을 탐독하고기밀 누설 전속 속기사와 타이피스트를 고용하여 3개월만에 학위 논문을 써냈다. 여담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어느 석기시대 예찬론자는 대놓고 존 케네디 면전에서 뮌헨 협정을 언급하며 케네디의 쿠바에 대한 유화 정책을 비판한 적이 있다. 위 내용을 감안할 때 이 말을 듣고 당시 케네디가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2. 2차대전 참전[편집]

원래 부신피질 호르몬 분비 이상인 에디슨병을 앓고 있었고, 대학시절 미식축구를 하다 등에 큰 상처를 입어 늘 진통제를 달고 살았는데, 이 등의 부상은 제2차 대전 때 입은 부상으로 더 악화되었다. 이 때 입은 등의 부상은 평생 영향을 미쳤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t._John_F._Kennedy_aboard_the_PT-109.jpg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군에 복무, 대위전역했다. 아버지의 연줄이 아니라면 에디슨병, 성병 등의 부상 등으로 군대에 갈 수 없는 신체 조건이었지만[17][18] 세계대전에 참가해야 향후 정치 인생에 영향을 끼칠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아버지의 연줄을 이용해 입대했고, 아버지를 설득해 후방이 아닌 전선에 배치받았다. 서방국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에 입각해 리더가 되려면 참전경험이 선거에 유용하게 작용한다. 실제 케네디가 경력도 일천한 젊은 나이에 하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참전용사 출신이라는 점을 크게 부각했다. 항간에 나오는 노르웨이 출신의 나치주의자와의 만남 때문에 군으로 쫓겨났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참고로 케네디의 영원한 맞수인 닉슨 역시 태평양 전쟁 참전자이자 같은 해군 출신이다. 단 창고 관리 직책을 맡았던 보급병과 장교[19]이었기에, 닉슨은 케네디의 전쟁 경험 때문에 선거때 자신도 병역을 이행했다는 부분을 유난히 강조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T-109_crew.jpg
중위 시절, 어뢰정 PT-109정장(艇長)으로 근무했는데, 작전중에 전원 자느라고 어둠 속에서 미처 일본 구축함 아마기리[20] 함을 발견하지 못해 구축함에 들이받히고 PT-109는 격침되었다. 아마기리측에서도 PT-109의 발견이 늦었고, 어설프게 피하는 것보다는 똑바로 들이받는 게 안전하다는 판단으로 충각전술을 사용.
이후 케네디는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은 승조원들을 이끌고 6km를 헤엄쳐 인근에 위치한 무인도에 상륙하여 일주일정도 버틴 후에 구출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케네디는, 구사일생 끝에 살아온 전쟁영웅이 되어있었다. 케네디가 조난되었을때 100여년 정도 되는 플레이페어로 암호를 보냈는데, 일본군은 이를 해독도 못했다가 정설.

다만, 애초에 들이받히지 않고 구축함을 격파하는 게 어뢰정의 진짜 임무 아니냐는 비판도 있으며, 이 사건은 군인으로서 케네디가 무능했다는 걸 드러낸다는 주장도 있다.[21] 어뢰정의 빠른 가속력을 생각할 때, 구축함을 못 피한 건 확률적으로 어려운 일이긴 하다. 이미 아버지 대에 거물이 된 케네디 가문빨로 인해 징계감인 사건이 훈장 수여로 뒤바뀐 건 아니냐는 조롱이 나올 정도. 물론, 격침까지 몰고 간 책임을 묻는 사람들도 그의 사후 대처[22]는 훌륭했다는 걸 인정한다. 훈장 수여 또한 이 점이 감안된 듯 하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1960년대에 'PT-109' 라는 제목으로 영화도 만들어졌다.

사실 '왜 영국은 잠자고 있었는가' 등의 지명도 있는 여러 케네디의 서적들도 대필 의혹 가능성이 상당히 있으며, 대박이 나는 데 있어서 영국 대사와 초대 증권감독위원장을 지낸 아버지 조셉 케네디의 '빽'이 작용했다.

원래 아버지의 계획은 큰 아들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가 대통령이 되는 거였다. 그러나 그가 1944년 사고로 사망[23]하면서 대권의 꿈은 둘째인 존에게로 자동 승계되었다.[24]

여담으로 조지프 케네디는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취임한지 11개월만에 뇌경색으로 반신불수 상태가 되었고, 2년 후 존에 이어서, 역시 대선에 출마한 로버트마저 피살당한 이듬해인 1969년 향년 81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자신의 거동이 불편해진 것과 더불어, 자신의 꿈을 이루어준 아들을 셋이나 먼저 떠나보냈던 점에서 매우 불우한 말년을 보냈던 셈. 거기에 넷째 아들 에드워드 케네디마저 조지프 케네디의 사망 직전에 여비서의 사망 사건(차파퀴딕 스캔들)[25]에 연루되면서 대권 가도에서 멀어졌다.

2.3. 정계 활동과 대선 승리[편집]

1946년 하원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으며, 1952년에는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 되었다. 1953년 《타임 헤럴드》의 사진기자 재클린 부비에와 결혼하였다. 1956년 대선에서 민주당 전당대회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 인지도만을 높였다. 그러나 현직 아이젠하워의 인기가 너무 좋았던 만큼 이 실패는 도리어 약이 되었다. 1957년《용기 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1958년 상원의원으로 재선되었으며,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경선에서 거물인 린든 B. 존슨을 꺾고 후보로 출마, 뉴 프런티어(New Frontier)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공화당리처드 닉슨을 누르고 승리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처음 개최된 생방송 텔레비전 토론은 미국 선거운동에 새로운 장을 열면서 미디어 정치, 이미지 정치의 시대를 열었다.
이날 토론은 TV와 라디오로 동시 중계되었는데, 라디오 중계를 들은 고참 신문기자들은 무승부 혹은 닉슨의 약간우위라고 평가했다. 반면 TV 중계를 본 신참기자들은 예외없이 '케네디 압승'으로 다음날 지면를 도배했다. 즉, 스마트한 케네디의 이미지가 약간 노쇠해보이는 닉슨과 대비되면서 시청자들에게 각인됐다는 것. 기자들조차 내용보단 이미지에 현혹됐다는 건 말 그대로 미디어 정치의 일면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 후에 닉슨은 자신이 라디오로만 토론을 했다면 승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쉬운 말로 케네디는 이미지 정치에 능했단 이야기.

선거 자체는 0.2~0.6%, 10~40만표의 신승이었지만, 선거인단에서 303:219로 발라버렸다. 이때 대선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오하이오는 물론 최대 선거인단캘리포니아(닉슨의 고향)가 닉슨에게 넘어갔으며, 15명의 남부 선거인단이 가톨릭 교도나 다른 이유를 핑계삼아 투표 사기(즉 반란표)를 쳐버렸음에도 이 정도였다.[26][27][28]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쇼맨십이 능했고, 또한 기자회견 등에서도 텔레비전을 유효하게 활용하였다.

3. 행적[편집]

취임 두 달만에 피그만 침공 작전 실행을 승인했다가 개털리며(...) 외교적으로 큰 부담을 지게 된다. 국내에서도 큰 비난에 직면할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발빠른 대국민 사과로 인해 비교적 조용히 넘어갔다(...) 그러나 베를린 위기를 통해 미숙한 자신을 깔보는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의 위협을 적절하게 선방하여 서유럽 국가들의 여론을 다시 자기 편으로 되돌리는데 성공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즈음하여 핵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흐루쇼프 정권과 대결한 결과,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대신에 소련은 미사일·폭격기 등을 쿠바에서 철수하고, 미국 측의 사찰을 인정함으로써 소련과의 극적인 타협을 이루며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또한 중남미 여러 나라와 '진보를 위한 동맹'을 결성하였고, 평화봉사단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냉전시대 최악의 위기였던 베를린 장벽 사건도 당시에는 배짱과 용기가 없다며 큰 비난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냉전을 냉전으로 남게 만든 행동으로 평가된다. 즉, 양측의 전면전은 없었다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이에 대한 독일인들의 평가가 지금까지도 후하다. 핵 위기의 반성으로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Partial Test Ban Treaty)을 제창하여 이를 성사시켜 후일의 수많은 핵제한/감축 협정의 시금석을 심은 것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당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날리면서 미국을 추월한 소련을 따라잡기 위해 아폴로 계획을 계획한 것도 이 무렵. 비판론자에게서는 이 또한 군산복합체들에게 숨통을 틔워주는 사업이었다는 비판을 받고있다. 하지만 2차 대전의 유럽 사령관 출신 대통령도 해결을 못해서 퇴임사에서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으로 그친 상대를 대위가 무슨 힘으로 막으라고?

내정 면에서는 뉴프런티어 정신을 내세우며 개혁법안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정작 의회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해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고 재정 압박만 가중시키는 꼴이 되었다. 군사비는 급속도로 증가했음에도 되려 군부와의 마찰이 심화, 쿠데타 위협이 가시화 되는 등 껄끄러운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으로 촉발된 민권운동에 대해서는 유연하게 대처하여 정권 기간 중 연방재판소에 최초의 흑인 판사가 취임하고 흑인 검사를 10명에서 70명으로 늘리고 오랜 악습이던 투표세를 없애 흑인은 물론 푸어 화이트 계층의 선거 참여율을 높인 것은 업적으로 인정받는다. 반면 우파의 공격은 거세졌고 너무 급격한 변화로 중산층의 여론이 갈라지며 사회 분열을 가중시켰다는 비판도 함께 받고 있다.

실제로 베트남전의 계기를 어느 정도는 제공했으며, 주변의 매파 때문이라고 해도 냉전을 축소시키려는 행동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단적으로 미사일 격차 논쟁은 케네디가 촉발시킨 것이다. 그리고 복지 등 각종 개혁은 케네디 재임 중 입안됐지만, 그의 재임 중에는 예산 문제로 의회에서 난항을 겪었고, 그가 죽은 후 의회에서 잔뼈가 굵었던 린든 존슨 대통령이 의회를 거듭 설득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통과시켜 그의 작품에 가깝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케네디 자신은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려고 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의 전임 '아이젠하워'가 프랑스의 직접 개입 요청을 끝내 거부하고 장비와 자금 등 물자 지원에 한정했는데 반해, 케네디 정부 시절엔 군사고문만 1만명 가까이 파견하는(이들은 말로만 고문이지 실제로 전투에 참가했다.) 정책을 결정했는데, 이건 상황이 달라진 탓도 있었다.(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 -> 자유국가 베트남 공화국) 실제로 베트남에 대해서 케네디는 깊숙이 개입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고, 일단 재선을 한 다음에 베트남 철수를 다룰 예정이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결국 한참 뒤로 밀린 끝에 경쟁자가 전격 철수를 결정

수려한 외모와 젊은 이미지, 여러 캐치 프레이즈, 그리고 암살되었다는 점 때문에 재임 기간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대중적 인기는 좋은 편이었으나, 이젠 케네디를 실제로 본 세대(핵심 지지층)가 완전한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예전만큼 회자되진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인지도는 현재까지도 미디어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며 민권운동에 크게 노력한 점과 (재임 기간이 짧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의 재임 중에 큰 실책은 없었다는 점은 장점이다.

4. 평가[편집]

4.1. 비판[편집]

재임기간 이루어놓은 업적에 비해 과대평가 받는 미국 대통령들 중 한 명##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과대 평가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젊고 잘생긴 대통령, 타고난 언변과 극적인 죽음, 아름다운 아내 등의 여러 가지 좋은 이미지가 겹쳐지나치게 미화되었다는 것. 미국 내에서도 여러 정치학자들이 케네디가 업적에 비해 지나치게 좋은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다.
정치학자들이 대통령 업적 평가를 하면 주로 10위권(11위에서 20위 사이) 중후반으로 랭크된다. 루즈벨트 이후 미국 대통령의 권한과 위상이 과거보다 비약적으로 커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다지 높은 순위라고 할 수는 없다. 재임 기간 중 업적이 없는 대통령이라는 평가도 있다. 단지 미디어를 통한 젊고 진취적인 이미지와 갑작스런 암살 때문에 과대평가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는 비판.

피그만 침공 실패와 같은 막장 병크도 젊은 지도자의 시행착오로 인한 사소한 실수 정도로 가볍게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는 케네디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의 업적으로 띄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사태를 초래한 것에 케네디에게도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일이 커지고 나서 케네디가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했다는 측면만 부각되고 있다.

그의 좋은 이미지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진보적 복지정책들은 과중한 예산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의 재임 기간 중 의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사장될 뻔 했다. 그러나 린든 존슨 대통령의 정치적 수완으로 나중에 부활하게 된다. 케네디 본인은 복지정책을 내놓고 의회 통과를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별로 기울이지 않았지만, 후임자 린든 존슨은 다선 의원 출신답게 의회에서의 오랜 경륜을 살려 의원들 개개인을 직접 설득한 끝에 전임자의 정책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복지정책은 나중에 70년대~80년대에 미 정부를 골치아프게 한 막대한 재정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케네디의 또다른 대표적 업적이라는 우주개발계획 역시 그가 한 일은 사실 많지 않은데, 그가 직접적으로 한 일이라곤 60년대 안으로 인간을 달로 보내겠다고 말한 것 말고 실제로 추진한 것은 별로 없다. 사실 케네디의 이 발언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이고 무모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소련이 먼저 인간을 우주로 보내자 당황한 케네디는 실현 가능성 따위는 따져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10년안에 인간을 달로 보내겠다고 질러버린 것에 가깝다는 반응이 많았다. 이런 무모한 계획을 정말로 실현시킨 것은 후임 대통령인 린든 존슨이었다. 또한 천재 로켓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의 미친듯이 과감한 추진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당시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플랜도 마련되지 않은 채 막연한 구상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던 달 착륙을 실현시키기 위해 아폴로 계획과 이에 수반된 제미니 계획을 구체화시켜 실행시켰고, 이를 위한 막대한 예산을 지원해줬다.
우주 개발에 있어서 케네디의 역할이 지나칠 정도로 띄워진 것은 NASA의 마케팅빨이 크게 작용했다. 아폴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예산이 필요로 했고 이 막대한 예산을 따내기 위해서는 국민 여론의 지지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다. 때문에 NASA는 케네디 前 대통령의 유훈이었다는 점으로 내세우며 국민들의 향수를 자극하여 우주개발 및 아폴로 계획에 대한 국민 지지를 끌어내려고 했다. NASA는 휴스턴의 케이프 케네버럴(Cape Canaveral) 우주기지의 이름도 케이프 케네디로 바꾸어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또한 케네디의 중요한 업적으로 크게 내세워지고 있는 인종차별 완화 정책은 케네디의 업적 중 하나임은 분명하나, 지나치게 부풀려지고 있는 측면이 많다. 이미 아이젠하워 시절 인종차별 완화를 위한 노력들이 많이 있어 왔는데,[29] 전임 정권의 업적까지 가져와 케네디의 업적으로 포장되는 경우도 많다.

4.2. 옹호[편집]

요약하자면 케네디의 업적 자체는 짧은 임기로 인해 한계가 있지만 능력 자체는 뛰어난 대통령이었다. 그에 대한 향수와 동경 역시 단순한 이미지만이 아닌 "저런 능력있는 사람이 조금 더 대통령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에서 나온다고 봐야 옳다. 케네디에 대한 반감도 마찬가지로 저런 아쉬움과 그를 동반한 케네디에 대한 열광의 반작용에서 나오는 부분이 많지 케네디의 능력 자체에 대한 의심은 적다. 정치학자들 역시 케네디가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지적은 할 지언정 케네디가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하진 않으며, 실제로 미 정치학회가 2015년에 평가한 역대 미국 대통령 업적 순위에서도 44명 중 14위에 이름을 올려 중상위권이라고 할 만한 성적을 받았다.

극적인 인생 때문인지 그와 그의 정권은 '카멜롯(그 유명한 아서 왕의 근거지)'에 많이 비교되었다. 실제로 35살의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를 비롯해서 백악관 참모진 상당수가 3~40대의 아이비리그 출신 동부 엘리트들이었다. 끼리끼리 게다가 32살의 막내동생 에드워드 케네디는 상원의원.[30]

4.2.1. 대외 정책[편집]

사태를 일으킨 책임은 별개로 보더라도[31], 케네디와 미국 행정부가 보여준 외교적 유연성, 노련함은 높히 평가 받아야 한다. 실질적인 해상봉쇄(blockade)를 진행하면서도 검역(quarantine)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는 조심스러운 모습과 동생인 법무장관 RFK를 포함한 다수 매파의 압박에 맞서 외교적인 실마리를 고집해 사태를 해결한 것 모두 케네디의 역량이라고 봐야한다. 단어 선택 하나가 무슨 큰 의미가 있냐고? 서독의 국방장관과 수상을 역임한 헬무트 슈미트는 본인의 회고록 "Menschen und Machte"에서 그 부분을 콕 찝어 이야기해 "소련 지도부의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본인이 원하는 것을 이뤄냈다"고 매우 높이 평가한다. 그렇게 말 한마디로 정세가 뒤집히는 게 바로 외교다. 일본은 묵살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핵을 얻어맞았다.

실제로 상단에도 적혀 있는 피그만 침공못 막았다라는 것이 비판으로 적힌다는 것은 당시 미국 상황을 무시하고 현대적 시각으로 재단한 결과이다. 쿠바 혁명은 케네디는 취임하기 전인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의 일이고,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전쟁 일촉즉발의 상황 + CIA와 국방부에 대처 방안을 요청해 놓은 상태에서 케네디에게 정권을 넘겨줬다. 그 상황에서 국방부는 쿠바와 케네디를 불신했고 어떻게든 전쟁하려고 여념이 없었다. 국방부가 얼마나 미쳤는지는 노스우즈 작전 문서로 충분하다. 이 상황에서 CIA에서 올라온 것이 피그만 작전이다. 그리고 피그만 작전이 실패하자 국방부는 다시 몽구스 작전을 통해서 전쟁 각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케네디는 전쟁을 모르고 유약하다고 언플을 하면서, 강경 노선으로 몰고가기 위해서 노력했다. 무엇보다 피그만 침공을 주장했던 인사들은 정작 해당 작전이 실패하자 자기는 그런 적 없다고 나서서 케네디만 독박을 쓰게 된다. 노스우즈 작전 보고서가 제복군인들을 모두 통과해서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까지 올라온 것이나, 피그만 침공 이후 강경파들의 말바꾸기를 본 케네디는 정보 부처와 주요 장성들을 모두 불신하게 된다.

그래서 케네디는 미국 대통령 역사상 처음으로 1962년 여름 대통령 집무실과 각료회의실에 녹음 장치를 설치했으며 이 사실은 그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과 단 둘만이 존재 사실을 알고 있었다.[32] 케네디 사후에는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지시로 248시간 분량의 회의 기록, 12시간의 전화 통화 내역이 케네디 도서관으로 옮겨졌으며, 특히 쿠바 미사일 사태 부분인 43시간의 녹음 부분은 1983년, 2001년에 나뉘어 공개됐다. 이 녹취 대화록에서 케네디는 소련과 쿠바에 강경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쿠바 공습과 관련한 직접적인 문제에서는 매우 이성적인 모습이 나타났기에 케네디의 국무 능력이 단순한 쇼맨십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군부가 얼마나 전쟁을 주장했는지, 그리고 사태가 해결된 다음에 비둘기파였다고 주장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매파였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우방들에게도 그의 진취적이고 리버럴한 모습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런 부분은 간과되기 쉬운데, 21세기 들어 "소프트 파워"가 강조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의미 있는 부분이다. 위에서 언급한 헬무트 슈미트의 회고록 역시 케네디의 이미지과 그에 대한 독일인들의 열광을 설명하면서 "그가 부탁한다면 독일인들은 우방으로서 더 많은 것을 희생할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케네디 역시 이런 부분을 중시해서 임기 중에 평화봉사단(Peace Corps)를 창설해 미국의 젊은이들이 개도국에 봉사활동을 떠나는 것을 장려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외교관의 길이나 학자의 길로 들어선 미국인이 상당히 많은데, 한국과 인연이 깊은 인물로는 크리스토퍼 힐 前 주한 미대사, 캐슬린 스티븐스 前 주한 미대사, 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교수 등이 있다.

4.2.2. 대내정책[편집]

100여년간 공화당을 찍어주던 흑인들을 민주당 지지로 돌려세웠다. 이 정도면 더 설명이 필요한가? 선거 직전 흑백차별 반대를 외치다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체포되자 공화당 후보였던 닉슨은 공개적인 석방 요구를 하지 않은 반면, 케네디는 킹 목사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킹 목사의 가족은 케네디 지지 선언을 했다. 흑인 지지가 대거 민주당으로 이동한 건 당연지사. 노예해방을 선언한 에이브러햄 링컨이 공화당 소속[33] 이었기 때문에, 흑인들은 전통적으로 공화당 지지층이었는데, 1960년대 들어서 흑인 민권운동이 폭발하는 가운데 케네디를 선두로 해서 민주당 진보파들이 여기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일거에 민주당으로 넘어온 것이다.

당선 후에도 대표적인 흑인 민권 단체인 NAACP의 수석 변호사 출신인 서굿 마셜을 연방 판사 자리에 임명하고 필요에 따라 주 방위군을 연방정부 지시에 놓고 흑인 학생들의 보호를 명령하는 등 민권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케네디의 이러한 전향적인 모습과 후임자인 린든 존슨의 정책들을 기반으로 민주당은 그 이후로 비-백인표를 단 한번도 놓친적이 없다. 물론 남부 백인표는 포기-

동시에 이것은 오랜기간 유지되온 공화당과 민주당의 포지션이 변화했다는 것을 뜻한다. 19세기 남북전쟁 당시 북부의 산업자본가 계층에 기반해서 출발한 공화당은 오랜기간 리버럴,진보에 가까운 포지션이었고, 반면에 남부 백인(농민)에 기반한 민주당은 보수우익에 가까운 포지션이었다. 지금과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이런 구도가 수십년째 지속되자 남부 백인만으로는 도저히 집권할 수 없었던 민주당은 20세기 들어선 적극적인 사회개혁 노선을 표방하면서 동부 엘리트 그룹, 자유주의자들까지 지지층을 확대하였다. 이런 결과물이 바로 프린스턴 정치학 교수출신으로 집권후엔 이상주의 노선을 걸었던 그러나 인종문제에선 개꼴통이던 우드로 윌슨이다. 그리고 1929년 대공황이 터지자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본진인 남부의 백인(농민)표를 지키면서 적극적인 사회개혁 정책으로 동부 (자유주의) 엘리트의 환심을 샀으며, 동시에 과감한 친노동자 정책으로 북부의 공업노동자 계급까지 민주당 지지층으로 만들었다. 이제 민주당은 남부 백인+동부 엘리트+북부 노동자가 모인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을 언론에선 "뉴딜 연정"이라고 불렀다. 이 뉴딜 연정은 막강한 위력을 과시해서 민주당은 루즈벨트의 4선 성공에 트루먼까지 20년 연속 집권에 성공했고, 잠시 아이젠하워에게 정권을 내줬지만, 이때도 의회는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1960년 다시 케네디의 당선을 이끌어냈다.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래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정치노선보다는 지역과 인종, 종교에 따라서 대립하는 구도였다.[34] 마치 우리나라의 지역정당들 처럼 북부의 공화당 vs 남부의 민주당. 하지만 루즈벨트가 동부의 진보적 엘리트들을 대거 등용해서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펼치자, 1930년대말부터 남부의 보수파 민주당원들이 반발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1960년대 케네디와 린든 존슨 집권기에는 겉잡을 수 없이 커져서 남부 민주당은 거의 갈갈히 찢긴 상태가 된다.[35] 그리고 케네디와 후임 린든 존슨 정권이 흑인민권운동에 대한 지지를 명확히 하면서 흑인표가 민주당으로 쏠리자, 남부에서 흑인들을 탄압하고 있던 보수파 백인 민주당원들은 아예 민주당을 버리고 공화당으로 넘어가버렸다. 그리고 이때부터 남부 바이블 벨트 백인 + 중서부 농업지대에 기반한 보수파 공화당과 비-백인 + 공업지대 노동자 + 리버럴 엘리트에 기반한 진보파 민주당이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재 미국 정치의 대립구도가 형성된다.

미국 민주당원들 사이에선 가장 이상적인 대통령의 롤모델로 꼽히기도 한다. 뉴 프런티어 정신으로 대표되는 젊고 도전적인 이미지. 베를린 연설에서 보여준 대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그리고 완벽한 미국 중산층 가족의 모습[36]. 흐루쇼프와의 정상회담으로 최초로 군축을 시도하고, 달착륙으로 결실을 맺은 우주개발을 시작하는 등 베트남 전쟁으로 엉망진창이 되기 직전 미국의 황금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 떄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민주당 정치인들이 케네디와의 접점을 부각하려고 노력한다. 1992년 전국적으론 듣보잡이던 빌 클린턴은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하면서 10대 시절 케네디를 만나서 악수하는 사진의 포스터로 도배하면서 기회가 있을때마다 "케네디를 만나면서부터 대통령의 꿈을 키워왔다"고 썰을 풀었다. 2004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한 존 케리는 선거운동 도증 뜬금없이 이니셜을 JFK로 바꾸었다. 결국 낙선 2008년 오바마는 '블랙 케네디'라는 표어를 대놓고 밀었고, 결국 케네디가의 수장이자 민주당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진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지지를 이끌어 내면서 민주당 대선 후보 자리를 쟁취했다.

개인사에서 보듯 여성 편력건으로 까이는 경우도 많지만, 여하간 미국에서는 그나마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이라, NASA의 우주선 발사장은 케네디 우주센터, 워싱턴에는 케네디 센터가 있고[37] 뉴욕에는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이 있다[38]. 사실 공항 등 대형 공공시설이나 항공모함 등에 전직 대통령 이름이 붙는 것은 미국에서는 흔한 일이며, 업적과도 무관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저평가받는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도 최신 항공모함에 네이밍되었다. 세계적인 명문대학인 하버드에도 행정 전문대학원의 이름이 케네디 스쿨이다. 물론 대통령의 업적도 있지만 원체 부호 가문 출신이기 때문에 집안의 기부금이 네이밍에 큰 영향을 미쳤을 터.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폴 존슨은 자신의 저서인 모던타임스에서 케네디를 비록 잘 싸운 것은 아니지만 대처나 레이건과 같은 냉전의 전사라고 평가했다.

5. 갑작스러운 암살[편집]

1963년 11월 22일 현지 시각으로 오후 12시 30분 쯤, 유세지인 텍사스댈러스 시 다운타운에서 컨버터블로 퍼레이드를 벌이다가,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현직 대통령이 퍼레이드 중에 살해되는 장면이 TV로 전국에 방송되었다. 그야말로 전미가 울었다.

자세한 내용은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참조.

6. 가족과 개인사[편집]

어릴 적에 식탐이 장난 아니어서 식사 전 기도하는 시간조차도 뭔가를 집어먹곤 했다고 한다. 형의 음식까지 집어먹어서 형이 때리려 했는데, 입에 파이를 가득 물고 잘못했다고 비는 모습이 하도 웃겨서 봐줬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

모자를 쓰지 않은 첫 대통령. 그 전까지는 신사의 정장에는 당연히 중절모가 따라오는 것이 상식이었으나 케네디는 맨머리로 대중 앞에 나섰다.[39] 그 후로 미국 대통령들은 대중에 나설 때 모자를 대부분 쓰지 않게 되었고, 그 풍조는 전 세계로 퍼져서 모자는 지금도 드레스 코드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유난히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당시 케네디의 패션 코드는 전세계에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아마도 정치가가 디자이너를 제치고 패션 아이콘이 된 사례는 에드워드 8세를 빼면 케네디 밖에 없을 것이다.

사생활적 면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원앙부부 같은 이미지와 달리 재클린 케네디(1929~1994)[40] 와의 부부 사이는 사실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케네디가 바람둥이였다는 말이 있으며[41], 그 자신의 건강에 자신감이 없어 그 심리적 반동으로 성을 지나치게 탐닉했으며 아내 몰래 비밀 검열삭제 파티(...)를 열었고, 또 그 유명한 메릴린 먼로와도 썸싱이 있었다.(...) 이 때문에 먼로와 사이가 좋았던 전 남편 조 디마지오는 케네디 일가가 마릴린 먼로를 죽게 한 배후 인물이라고 의심해서 평생을 증오했다. 그러나,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를 상대로 매일 야구배트를 사용해서 폭행을 일삼은 인간 쓰레기라서 오십보백보인 건 마찬가지였고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42] 그 밖에도 백악관에서 아내가 외출만 하면 수영장에서 여비서 2명[43]과 검열삭제를 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그리고 케네디가 우상이었던 클린턴은 따라한다

앞서 언급했듯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건강이 상당히 안 좋았다. 에디슨 증후군 등의 이야기는 선거 당시에도 논란이 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상의 문제는 당시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건강상태를 사실대로 이야기했다면 정계은퇴까지도 갈 정도였고, 평생 두 번의 병자성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44][45] 대학시절 사고로 척추수술을 받았고 엄청난 재활훈련을 겪었다만 그 후유증이 평생 남아 있었던 듯 하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어뢰정의 침몰 후 구사일생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허리 부상이 크게 악화되었다고 한다. 선거 당시에는 하루 종일 유세를 뛰고 나면 등(허리)의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저녁에 한 시간씩 목욕탕에서 뜨거운 탕 안에 앉아 있어야 했다고 그의 전기에 소개되어 있다. 5.16쿠데타 이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수행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회담 때도 케네디는 허리가 좋지 않아 흔들의자에 앉아있어야 했으며, 이마저도 매우 힘들어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사후에 공개된 사진 중에 대통령 재직 중 크레인에 실려서 비행기를 타는 사진도 있다. 케네디의 사진이나 영상물을 보면 구부정한 자세로 허리를 이용하지 않고 상체 전체를 통째로 움직이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또 연설을 할 때 연단은 두 손으로 짚는 경우가 많다. 이런 건강상 문제로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해서 체중을 불리려 했고 남성 호르몬도 투여했다고. 이런 류의 소문이 신빙성 있게 돌기만 해도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존 에드거 후버 FBI국장에게 슬슬 기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아내 재클린과의 사이에서 2남 1녀가 있다. 장남인 존 F. 케네디 주니어는 1963년 당시 3살 나이로 아버지 장례식에서 경례하던 모습으로 세계를 울렸으나 그 역시 커가면서 데릴 해나와의 관계 등으로 여러 루머에 시달려야 했고, 1999년 7월 타고 다니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갑자기 아내와 함께 세상을 떠나면서 온갖 음모론이 나왔음은 물론이다.
차남인 패트릭 부비어 케네디는 미숙아로 태어났으며 신생아 호흡곤란 증후군으로 아버지가 죽기 수 개월 전 1963년 생후 2일만에 사망했다. 당시에는 미숙아에 관한 의학지식이 부족하여 의료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나 대통령의 아들인 그의 죽음은 이후 신생아 호흡곤란증후군과 각종 미숙아 관련 질환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파일:Caroline_Kennedy_US_State_Dept_photo.jpg
현재 케네디와 재클린의 아이 중 살아있는 건 첫째인 딸 캐롤라인(1957년생)뿐이다. 캐롤라인은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숙부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2009년 타계)과 함께 버락 후세인 오바마 후보를 공개 지지하여 그의 당선에 기여하기도 했다. 캐롤라인은 2013년 후반기부터 2017년 1월까지 주일 미국대사로 재직했다.

참고로 이런 가족사와는 달리 케네디의 어머니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장수했는데 1890년에 태어나서 100세를 훌쩍넘긴 1995년에 사망했다.

2남

이름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1917년 5월 29일 ~ 1963년 11월 22일

결혼

이름

재클린 리 케네디 오나시스 (Jacqueline Lee Kennedy Onassis)
1929년 7월 28일 ~ 1994년 5월 19일

결혼

1953년 9월 12일

자녀

1녀

이름

아라벨라 케네디 (Arabella Kennedy)
1956년 8월 ~ 1956년 8월

2녀

이름

캐롤라인 부비에 케네디 (Caroline Bouvier Kennedy)
1957년 11월 27일 ~ 현재

남편

에드윈 아서 슐로스버그 (Edwin Arthur Schlossberg)
1945년 7월 19일 ~ 현재

자녀

1녀

이름

로즈 케네디 슐로스버그 (Rose Kennedy Schlossberg)
1988년 6월 25일 ~ 현재

2녀

이름

타티아나 셀리아 케네디 슐로스버그 (Tatiana Celia Kennedy Schlossberg)
1990년 ~ 현재

1남

이름

존 부비에 케네디 슐로스버그 (John Bouvier Kennedy Schlossberg)
1993년 1월 19일 ~ 현재

1남

이름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주니어 (John Fitzgerald Kennedy Jr.)
1960년 11월 25일 ~ 1999년 7월 16일

아내

캐럴린 잔 버셋 (Carolyn Jeanne Bessette)
1966년 1월 7일 ~ 1999년 7월 16일

2남

이름

패트릭 부비에 케네디 (Patrick Bouvier Kennedy)
1963년 8월 7일 ~ 1963년 8월 9일

7. 어록[편집]


취임 영상. 잘 보면 이 동영상에는 미국 대통령이 5명이나 등장한다. 트루먼, 아이젠하워, 린든 존슨, 닉슨, 그리고 케네디 본인. 오로성 다만 대통령에 재직한 순서가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닉슨이라서 촬영된 시점 기준으로 따질 경우 이 영상에 등장하는 미국 대통령은 총 3명.[46] 이 5명의 재임기간은 1945년부터 1973년까지 총 28년에 달한다. 뭐 8 곱하기 5보다는 작지만[47]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My fellow citizens of the world, ask not what America will do for you, but what together we can do for the Freedom of Man."
자, 미국 국민 여러분.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그리고 세계의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베풀어 줄 것인지를 묻지 말고 우리가 손잡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십시오.[48][49]



연설문 풀버전

"Two thousand years ago, the proudest boast was 'civis romanus sum'. Today, in the world of freedom, the proudest boast is "Ich bin ein Berliner!"... All free men, wherever they may live, are citizens of Berlin, and therefore, as a free man, I take pride in the words "Ich bin ein Berliner!"

151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라틴어: 'Civis romanus sum')'였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일 것입니다. (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든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전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라는 이 말을 자랑스레 여길 겁니다![50]


동독 한복판에 있는 관계로 '냉전의 최전선'이나 다름없던 서베를린을 방문했을 때의 연설. 동독의 갑작스런 베를린 장벽 구축 후 위기감이 고조되던 당시 빌리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이 동독과 소련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 미국의 도움을 요청했는데, 린든 존슨 부통령을 보낸 이후 케네디가 직접 왔다! 보시다시피 케네디는 폭풍간지의 명언으로 동독소련에 맞서 서베를린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는데, 이 날 무려 5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연설이 있었던 시청 주변으로 쏟아져나와 케네디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오죽했으면 자타가 공인하는 달변가인 케네디가 연설 도중 터져나오는 환호성에 눌려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었을 정도였는데 미국 대통령이 유럽에서 이런 환대를 받은 건 전무후무한 일.

"전쟁은 오늘날 군인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명성, 특권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누릴 수 있을 때 끝나게 될 것이다."

"세계에 많은 나라가 있는데 정부끼리는 잘 지내기 어렵더라도 사람들끼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여러분이 미래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미래의 희망이다. 우리가 서로 도움의 손길을 건넬 의지만 있다면 국경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51]

"평화적 혁명을 불가능 하게 만드는 사람이 폭력적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Mankind must put an end to war, or war will put an end to mankind."
우리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우리를 끝내리라.

"Two thousand years ago, the proudest boast was 'civis romanus sum'. ... All free men, wherever they may live, are citizens of Berlin, and therefore, as a free man, I take pride in the words "Ich bin ein Berliner!"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라틴어: 'Civis romanus sum')'였습니다. (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든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전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이 말을 자랑스럽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in this decade and do the other things, 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 .... Well, space is there, and we're going to climb it, and the moon and the planets are there, and new hopes for knowledge and peace are there. And, therefore, as we set sail we ask God's blessing on the most hazardous and dangerous and greatest adventure on which man has ever embarked. Thank you."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10년 안에 달에 가고 다른 일들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쉬워서가 아니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우주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에 오릅니다. 달과 행성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 지식과 평화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의 축복을 빌며 항해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는 지금껏 인류가 승선한 가장 불확실하고, 가장 위험한, 그리고 가장 위대한 모험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8. 한국에 대한 시각[편집]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케네디 행정부는 4.19 혁명으로 들어선 장면내각이 위기 대처 능력이 없으며 조만간 민중의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또 이런 노력이 실패해 장면 정부가 무너지면 최악의 군사정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케네디의 동의 하에 미국이 특사와 보좌관을 한국에 보내 경제권과 인사권을 장악하고, 총리 장면 뒤에서 한국을 개혁해야 한다는 막후통치를 검토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무산되었다.참조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후에 이를 보고 받은 케네디는 “절망적 상황”(a hopeless situation)이라며 좌절감을 드러냈었다.참조[52] 또한 아예 한국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고 한국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몰락하도록 내버려둘 것을 신중히 고려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북한은 눈에 띄는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 데 비해 남한이 뒤처지고 있어 케네디는 할 수 없이 한국에 계속 원조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외 1962년에 동아시아에서 오랜 기간 생활한 소설가 펄 벅을 만난 케네디는 아시아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고는 펄 벅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내 생각에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해야 할 것 같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오. 우리는 빠져 나오고 대신에 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통제하게 해야 할 것 같소"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벅은 “그건 마치 우리 미국이 예전처럼 영국 지배로 돌아가라는 소리와 같습니다?”라고 비아냥거리며 충고해주자 그도 농담이라는 투로 물러났다.참조 [53]

9. 트리비아[편집]

미 역사상 최초의 해군 출신 대통령으로, 그 뒤를 이어 취임한 4명의 대통령이 모두 해군 출신이라는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한 분 건너 뛰면 한 분 더 있다.

또한 역대 대통령중에 유일한 카톨릭 신도이기도 하다. WASP의 조건중 하나가 개신교이고, 지금까지도 개신교가 아닌 대통령이 없을 정도인데, 이것 때문에 안그래도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라 받은 차별에 카톨릭 신도라는 점까지 겹쳐 정적들의 공격을 받았다. 심지어 미국을 교황에게 넘기려 한다는 개소리까지 들었다고.

젊고 매력적인 대통령이었기 때문인지, 그는 당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도 많은 동경을 받았다. 백악관에도 대통령에게 보내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편지가 유난히 많이 쌓였을 정도였다. 케네디 역시 가능한 직접 이들의 편지에 답장을 써 주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를 만난 세계적 유명인사가 두 명 있다.

파일:external/img.khan.co.kr/20090314.01100115000006.01M.jpg
케네디와 악수하는 이 소년은 훗날 미국의 마흔 두 번째 대통령이 되었고, 여성편력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파일:external/www.donga.com/200610040067.jpg
저 원 안에 있는 소년이 바로 반기문UN 사무총장.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미국 대통령들 중 최고의 위트 가이로 뽑히는 인물. TV를 적극 활용하여 이미지를 잘 만들었지만 본인의 입담도 훌륭해서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프랑스에 갔을 때 프랑스 언론들은 케네디보다 그의 부인인 재클린에게 더 집중하여 취재를 벌였는데, 이를 본 케네디는 "저를 제대로 소개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저는 재클린 케네디 여사를 프랑스로 모시고 온 남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트루먼과의 논쟁 후에 트루먼에게 한 말도 유명. 자세한 건 해리 S 트루먼 항목 참고.

에이브러햄 링컨과 여러 면에서 많이 연관된 적이 있다. 링컨과 케네디의 공통점 항목 참조. 다만 이 항목에서 보듯이 케네디는 태어날 때부터 인생에서 성공가도를 누려왔지만 링컨은 전혀 그랬지 못했기에 그냥 이런 정도의 공통점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알면 된다.

오늘날 케네디는 자유주의자의 상징이지만, 생전에 그는 자유주의는 유약하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놀랍게도 그는 리처드 닉슨과 한때 베프였다. 닉슨만큼 케네디도 보수적이었다는 것. 허나 한때 죽이 잘맞던 두 사람은 대권 때문에 틀어졌다고 한다.

닉슨은 갖가지 방식으로 정적을 공격했다. 국세청을 동원해 정적들의 약점을 잡고 도감청을 했는데 닉슨은 케네디도 했는데...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건 일정 부분 사실이라고 한다.(...) 케네디는 극우단체를 후원하는 부유층들을 압박하려고 국세청에 세무조사를 시행하도록 지시, 극우단체의 돈줄을 끊어버렸다. 또한 철강업체들의 담합을 막기 위해 철강업체들 주요 임원들의 자산에 대한 세무조사로 철강업체들의 담합을 좌절시켰다고 한다. 또한 여러 경로로 정적들에 대한 도감청과 대화의 비밀 녹음도 했다고 한다. 닉슨: 내가 나쁜건 다 케네디 탓이야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후버의 감시를 몰래 알려준 것도 케네디였다고 한다. 킹목사가 백악관을 방문했을때 단 둘이서 백악관 정원을 산책하면서 알려줬다고 한다.

항상 입에 시가를 물고 있을 정도로 상당한 시가 애호가였으며 쿠바와 교역을 끊는 문서에 서명하기 직전에 H. 우프만사의 시가 1,200개비를 마지막으로 주문했다고 한다. 이것과 관련되어서 나온 이야기 중에 “케네디는 쿠바산 시가만을 사랑했지만 체 게바라는 쿠바까지 사랑했다.”라고 비유한 말도 있었다. 케네디가 선호했던 시가는 2002년대에 단종된 H. 우프만사의 머신메이드 시가인 쁘띠 우프만이였다.

10.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파일:external/cache.reelz.com/78152.jpg
미국 TV 미니시리즈 <케네디 가(家)>(The Kennedys)에서 그레그 키니어가 케네디 역으로 출연했다. 대체적으로 역사상의 모습을 잘 묘사했지만, 스캔들과 잔병치레에 시달리는 어두운 모습들도 등장한다. 본 드라마는 그동안 케네디 가를 두고 떠돌던 스캔들, 루머의 상당수를 기정 사실로 묘사하였고,[54] 때문에 방영을 전후로 케네디 가와 케네디 행정부 시절의 전직 관료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잠깐 등장. 검프는 대학 미식축구 선수로 출전하여 혁혁한(?) 역할을 한 후에 올 아메리칸 팀에 엔트리가 올라가 백악관에 초청되어 케네디를 만난다. 그런데 만찬장에서 닥터페퍼[55] 15병이나 마셔버리는 바람에 케네디와 악수를 할 때 케네디가 "축하하네. 올 아메리칸 팀에 들어간 소감이 어떤가?"라고 묻자, 검프는 오줌이 마려워서 "쌀 것 같아요(I got to pee)"라고 말해버린다. 케네디는 웃으면서 "이 친구가 오줌이 마려운가 보군."이라고 주위에 말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검프는 "그 젊고 멋진 대통령은 차 안에 있을 때 누군가에게 저격당해 죽었다"고 암살 사실을 언급하며 그 동생 역시 호텔 부엌에서 총 맞아 죽었다(1968년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을 말한다.)며 "역시 형제는 힘든가 봐요"라고 회상한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시나리오에서는 주인공에게 암살 임무를 주며 특유의 연설하는 어투로 명대사를 뽑아내신다. 그런데 블랙 옵스의 세계관에서는 바로 그 주인공이 케네디를 암살했다. **

좀비 모드에서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한다. 오프닝에서부터 포스를 뿜어내더니 좀비 한 마리를 죽일 때마다 명언 한 마디씩 외치는 게 장관이다. 음침해야 하는 좀비모드가 이 사람 덕분에 유쾌해졌다. 근데 대사들을 다 들어보면 반 이상이 피델 카스트로를 까는 내용이다.

마이클 셰이본의 대체역사소설 유대인 경찰연합에서는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고 재클린과 이혼한 뒤 메릴린 먼로와 재혼했다고 언급된다.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 시즌 1의 49번째 에피소드 Profile in Silver에서는 케네디가의 후손 한 사람이 과거로 시간여행을 해서 암살을 막았으나. 그 결과로 3차 세계대전의 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다시 과거로 가서 자신이 케네디 자리에 있음으로서 암살을 성공시키고 진짜 케네디는 미래로 보내버리는 결말.[56]
보려면 여기로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두 명의 조지'에서는 영국령 북미연방[57]을 독립시키려는 아일랜드계 백인우월주의자 단체의 수장으로 나온다. 초반에 기념물인 두 명의 조지 그림을 훔치고 북미연방의 사업가 정직한 리처드 닉슨을 암살한 범인.

같은 작가의 월드 워 시리즈에서는 얼 워런에게 대선에서 처발린다.

영국 대체역사소설 부활의 날에서는 쿠바 위기 당시 강경책으로 핵전쟁을 일으켜서 미국을 말아먹은 대통령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실제 역사대로 온건파였고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독단적인 핵전쟁 결정 후 막료들이 전멸하자 역사가 왜곡되었다는 비밀이 있다.

심슨 가족에서는 에이브 심슨이 제2차 세계대전 때 PT-109라는 함정에서 케네디와 같이 근무했는데,[58] 케네디가 "Ich bin ein Berliner"를 말하자 심슨이 케네디를 나치라고 하면서 동료 수병들과 함께 케네디를 구타한다.하극상[59]

스티븐 킹의 11/22/63에서는 주인공 커플의 활약으로 암살을 모면하지만 이후 인권 운동에서의 미온적 대처와 극우세력과의 준내전및 자연재해[60]로 인해 미국을 말아먹는 초석을 세운 대통령으로 기억된다. 퇴임 후 80년대에 사망했다고. 스티븐 킹은 이 소설 후기에서 자료를 조사해 보니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설이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라는 결론이 났다고 언급하고 있다.

어새신 크리드 시리즈 세계관에서는 에덴의 조각을 통해 국민들에게 민주적인 투표를 할 수 있게 하려다가 성전기사단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암살당했다는 설정이다. 리 하비 오즈월드(미끼역), 린든 B. 존슨, 심지어는 평범한 시민이었다가 우연히 케네디 암살장면을 찍은 위의 에이브러햄 자프루더(진짜 암살범.(!!!) 브라더 후드의 퍼즐에선 "Z"라고 명명됨.) 전부 성전기사단의 일원. 오즈월드나 존슨은 그렇다고 쳐도 마지막의 평범한 시민 자프루더에 대한 설정은 고인 드립 쩝니다

브라이언 싱어의 시리즈 영화 엑스맨 2에서 오프닝 부분 백악관에 잠입한 나이트 크롤러가 백악관의 보디가드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위에 있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공식 초상화가 비춰진다. 케네디가 암살당한 사실을 아는 관객들은 나이트 크롤러가(본인의 의도가 아닌 세뇌당했지만) 대통령의 암살을 기도할 인물이라는 복선을 보여주는 약간의 영화적인 장치. 또한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선 뮤턴트(!!!)였음이 밝혀졌다. 그를 암살하려는 세력이 있음을 눈치챈 에릭이 동족인 그를 구하려다 실패하고 오히려 암살범 누명을 뒤집어쓰고 펜타곤 비밀감옥에 10년간 갇히게 되었다. 케네디의 능력을 묻는 질문에 각본가는 아마도 자신의 말을 남들이 따르게 하거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능력이였을 거라고 말했다.

이터널시티 세계관에서 흑막이나 다름없는 외계인(게스트)의 존재를 발표하려다가 암살당한 걸로 짤막하게 언급된다.

영화 '버틀러:대통령의 집사'에서는 제임스 마스던이 해당 역할로 출연했다. 몸이 약해서 아무도 몰래 거실 바닥에 누워 있다가 버틀러와 대화를 하기도.

보드게임 1960: 대통령 만들기를 통해 역사를 재현해볼 수도 있다. 케네디의 대선 승리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TV 토론회와 각종 이벤트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게임. 물론 닉슨이 이겨서 역사가 바뀔 수도 있다

게임 배틀스테이션 미드웨이의 미국 캠페인 2번째 미션인 필리핀 방어전에서 주인공인 헨리 워커의 작전 파트너로 등장한다, 당연히 그가 정장으로 근무했던 'PT-109'를 타고 나오며 일본군의 병력 수송선 하나를 격침시키고 해안 방어를 하기위해 본진으로 귀환한다.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워커의 불평을 들으며 대화를 내눈다. 게임내내 데미지를 한 대도 받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적 판정을 가진 듯 하다.

리부트 이후로 대체역사물 게임이 된 울펜슈타인 시리즈에서는 그를 오마쥬 한 프롭스트 와이어트 3세라는 케릭터가 있다. 출생지나 집안배경을 보면 노린 케릭터이다.

11. 둘러보기[편집]

[ 펼치기 · 접기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임스 먼로

존 퀸시 애덤스

앤드루 잭슨

마틴 밴 뷰런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윌리엄 해리슨

존 타일러

제임스 포크

재커리 테일러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밀러드 필모어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

에이브러햄 링컨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앤드루 존슨

율리시스 S. 그랜트

러더퍼드 B. 헤이스

제임스 가필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체스터 A. 아서

그로버 클리블랜드

벤저민 해리슨

그로버 클리블랜드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우드로 윌슨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제45대

도널드 트럼프

※ 22.24대 미합중국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한차례 건너뛰고 연임한 사례의 대통령이다.

1961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Time Man of the Year 1961

파일:attachment/time_1961.jpg

미국과학자
1960

존 F.케네디
1961

요한 23세
1962

[1] 중간 이름인 피츠제럴드(Fitzgerald)는 당시 보스턴의 시장이었던 존 F. 피츠제럴드의 딸이자 존 F. 케네디의 어머니인 로즈 케네디(역시 아일랜드계다.)의 혼전 성씨(婚前 姓氏, maiden name)다. 실제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어머니의 혼전 성씨가 중간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의외로 흔하다. 대표적인 예로 조지 H. W. 부시, 로널드 레이건, 리처드 닉슨, 린든 B. 존슨,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우드로 윌슨 등이다.[2] 건강 문제로 휴학을 했지만 나중에 자퇴했다.[3] 처음에는 다시 프린스턴에 들어가려 했는데 진학 문제로 인해 하버드로 재입학했다. 프린스턴은 현재까지 편입을 받아준 이력이 없다. 그렇게 프린스턴은 대통령 졸업자를 한명 잃고..[4] https://en.wikipedia.org/wiki/Heights_of_presidents_and_presidential_candidates_of_the_United_States[5] 당시 만 43세 6개월. 최연소 대통령은 부통령에서 대통령을 승계한 당시 만 42세 11개월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이다. 3위는 빌 클린턴. 4등은 버락 후세인 오바마.[6] 여담으로 미국에서 암살 당한 대통령은 모두 넷인데, 링컨, 가필드, 매킨리, 그리고 케네디이다. 가장 젊었던 게 케네디였던 것도 물론.[7] 현대 공화당에서의 비슷한 포지션은 로널드 레이건[8]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가 1888년생이고 트루먼은 1884년, 아이젠하워는 1890년생이다.[9] 1910년대에 태어난 대통령은 케네디(1917), 닉슨(1913), 포드(1913), 레이건(1911)인데 그가 제일 어리다! 약 30년 후에 대통령을 했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1924)와도 7살밖에 차이 안 난다.[10] 케네디를 알려면 아버지인 이분을 알아야 할 정도로 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1] 그는 세계 대공황때 적절한 주식투자와 밀조주 사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가에서 작전(주가조작)의 원조격인 인물이며, 한때는 영화체인 M&A로 할리우드를 좌지우지하기도 했다.[12] 케네디의 자녀들은 보스턴 시내 어디 상점이든 외상으로 물건 구입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 집안을 모르는 시민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케네디가의 비서가 잔금을 늘 치렀다고 한다.[13] 초트고등학교에서의 존의 성적은 중하위권이었다.[14] 고등학교에서 정말 많은 여자들과 사귀었는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잘 생긴것은 아닌데 여자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 보면 내 성격이 잘 먹히는 것 같다. 껄껄' 이랬다고.[15] 본인은 프린스턴 대학교에 간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차갑게 "형이 두려워서 그러는 거냐"라고 반응했다고 한다.[16] 케네디 가족이 아일랜드계였기에 영국에 반감을 가진것도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을거다.[17] 이 때문에 한 번 육군 장교를 지원했다 떨어졌다.[18] 일례로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모기가 잭의 피를 빤다면 잭이 감염되는 것이 아니라 모기가 감염될 것이다'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걸어다니는 종합 병원..[19] 최종 계급은 소령[20] 후부키급 구축함 15번함[21] 그럼 구축함 아마기리도 못 피하고 박았으니 똑같이 한심한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구축함 등 호위함들이 잠수함이나 어뢰정 등 (당시 기준으로)쪽배들을 고속으로 들이받아 격침시키는 전술은 교범에도 나와 있는 정규 전술이다. 아마기리의 견시는 PT-109를 제때 발견했고, 아마기리의 함장은 PT-109를 함포로 해치우기엔 거리가 가까워 충돌로 해치우기로 하고 돌진했다. 다만, 아마기리는 PT-109를 격침시킨 후 좀 당황했다고 하는데, 어뢰정이 그 거리에서 구축함을 피하지 못할 가능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마기리도 일단 시도는 하되, PT-109가 자신들을 회피하면서 도주해 버릴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22] 생존 승조원들을 무사히 수습해 이후 사망자를 내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것.[23] 아프로디테 계획 참조.[24] 만 35세 이상이니 1925년 11월 20일 생인 로버트 케네디는 1960년엔 아슬아슬하게 걸린다.[25] 여비서를 집에 데려다주다가 차가 강에 빠졌는데, 자기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여비서가 그대로 익사하고 만다. 사실 여비서의 사망보다도 사건 발생 10시간 지나도록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은게 크게 문제시됐다. 세계 초강대국의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양반의 사고 후 상황 판단이 엉망이었으니... 이 사건도 여러가지 음모론과 루머가 상당히 많긴 하다.[26] 50개 주를 다 방문하겠다는, 당시로서는 무리한 계획을 시행하다가 기진맥진한 닉슨의 컨디션 + 망한 메이크업 탓도 컸다.[27] 승패를 가린 최소 격차 지역구는 하와이(3), 일리노이(23), 미주리(11), 뉴저지(16), 미네소타(11) 등의 중부권 주였다. 이들 지역구에서 0.6~1.6%의 격차만 뒤집어졌어도 승자는 닉슨이었다. 단 2%의 격차에도 텍사스(존슨의 고향)를 수성한 것도 이득이었다.[28] 하지만 이렇게 FDR 이후로 독자 출마나 팀킬도 서슴지 않던 남부는 기어이 70, 80년대의 공화당 천하를 지나면서 공화당의 텃밭으로 변하게 된다. 사실 노예제 문제로 남북전쟁을 일으켰던 극보수 성향의 남부 민주당 후예들이 뉴딜정책 이후 노동자-흑인(소수인종) 연합을 기반으로 한 민주당에 잔류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긴 했다.그리고선 당시의 적이었던(링컨의 기반) 공화당으로 갈아타기 모두 알다시피 케네디는 첫 임기에 암살되었고, 그렇게 미국 선거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이 되었다.[29] 유명한 리틀록 사건이 아이젠하워 때 있었던 일이다.[30] 결국 이 때문에 대통령은 자신의 친족을 공직에 앉혀서는 안된다는 법안이 후에 통과되었다. 20세기 민주당 대통령의 전통인가[31] 임기 초반 케네디가 보여준 피그만 침공의 병크, 빈회담에서의 유약한 모습을 바탕으로 흐루시쵸프가 미사일 배치를 강행했다[32] 그런데 정작 로버트 케네디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매파였음에도, 자기가 비둘기파라고 주장했다가 이 녹음 기록으로 정체가 들통났다. 당시 상황이 이런 식이었다.[33] 지금도 공화당은 스스로를 Party of Lincoln이라고 부르며 전국적인 후원의 밤 행사 이름도 "Lincoln Day"이다. 그런 것들이 흑인한테 막말하는 트럼프를 대통령으로...[34] 일례로 카톨릭을 믿던 아일랜드계는 대부분 민주당을 지지했다. 특히 케네디 가문이 속해있던 보스턴의 아일랜드계 사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민주당이었다.[35] 사실 케네디도 격렬하게 반발하는 남부 민주당의 보수파들을 달래러 텍사스를 방문했다가 암살당한 것이다.[36] 단 이것은 철저하게 대외적인 이미지였다. 실제 케네디는 부인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후술된 가족과 개인사 참조.[37] 사실 뉴욕에는 더 크고 아름다운 링컨 센터가 있다.[38] 2014년 12월 대한항공 086편 이륙지연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39] 전임 대통령들 가운데도 대중들 앞에서 중절모를 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언론 매체를 위한 부분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1950년대까지 미국 정치인들에게 중절모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케네디의 대선 라이벌인 리처드 닉슨도 당시에는 중절모를 썼다.[40] 덧붙이자면 재클린은 나중에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했다.[41] 케네디의 아버지 조지프의 이중생활 영향을 받아 이런 성생활이 생겼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 때 영화 제작자인 조지프는 할리우드의 여배우들과 염문을 일으키곤 하였다.[42] 이 여성편력 문제는 케네디가 형제들한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둘 다 역시 성공하여 민주당 대선 경선까지 도전하지만 로버트의 경우는 거의 확실시된 상황에서 암살되고, 막내 에드워드 케네디는 의문의 여비서 익사사고(차파퀴딕 스캔들)로 대통령의 꿈을 접어야 했다.[43] 속칭 fiddle과 faddle[44] 가톨릭 교도로서 병자성사 받는다는 건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수명이 45세를 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런 그가 만 46세에 암살로 죽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45] 지금은 그저 좀 심하게 아프면 받을 수 있는 게 병자성사지만, 저 시기 병자성사는 종부성사라는 이름으로 불려 그야말로 죽기 전에 받는 의식이었다.[46] 닉슨은 전직, 존슨은 현직 부통령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다.[47] 이 영상에 등장하는 5명의 대통령 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임기의 시작 또는 끝이 순탄치 않았다. 트루먼과 존슨은 전임 대통령급서로 인해 대통령직을 승계한 사례이며, 케네디는 첫 임기를 끝마치기도 전에 암살당했고 닉슨은 재선까지는 성공했으나 2번째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그나마 예외였던 한 명조차 예전 직장 문제인종갈등으로 인해 여러모로 골치를 앓았다.[48] 이 폭풍간지의 취임 연설로 후대의 대통령 연설문 작가들이 고통받고 있다.[49] 앞문장의 경우 한국에서는 국가주의의 표본으로서 많이 인용된다. 헌데 정작 국가주의 항목에서 보듯 이 문장은 국가주의를 의도한 게 아니다. And so(그래서)는 앞에 이야기 하는 부분을 종합할 때 쓰는 것이므로, 문맥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이 문장의 앞 내용은 '우리 세대는 최악의 위기 속에서 자유를 지킬 역할을 부여받았고, 우리는 그것을 책임지고 수행해야 한다.'는 내용이고, 이 문장의 뒷 내용은 '여러분들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만큼 우리 정부에게도 요구하라. 우리 정부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내용이다. 즉, "미국 국민, 정부, 전세계인들 모두 실천하여 자유를 지키자"는 내용.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헌법을 전제로 실천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국민(주인)들을 국가가 얼마든지 뒷바라지 해주겠다는 내용을 국가주의라고 이해하면 일종의 악마의 편집이라 볼 수 있다. 연설문 전문(한국어 번역)애당초 이 양반은 국가주의와 거리가 먼 리버럴이다. 정작 한국에서는 자주 국가주의의 표본으로 왜곡되어 인용되는 게 유머[50]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는 뜻으로 말하려면 부정관사 ein을 빼고 말해야 하고, Berliner는 젤리가 든 도넛의 한 종류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ein을 넣고 말하면서 실제 뜻은 '나는 베를리너 도넛입니다'가 되므로 독일어 어법상 틀렸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부정관사 ein은 직업이나 거주지를 말할 때에는 생략하지만, 이 연설에서 케네디는 실제로 베를린 출신이 아님에도 베를린과의 강한 유대를 드러내기 위하여 이 말을 하였다. 이러한 의미로 문장을 구성하면 Ich bin ein Berliner은 문법적으로 옳을 뿐더러, 케네디의 취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문맥상 "나 역시 한 명의 자유인인 서베를린 시민입니다"라는 의미이므로. 연설문을 보좌진도 볼 텐데 대통령이 '나 도넛이요'라고 선언하는 꼴을 볼 리도 없고 영어로 치면, I am (also) one of Berlin citizens라고 말한 셈.[51]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백악관에 방문했을 때 한 얘기. 그리고 이 학생들 중엔 반기문도 있었는데, 그는 UN 사무총장이 된 후 이 얘기를 전하는 기고문을 쓰기도 했다.[52] 5.16 쿠데타 당시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이 쿠데타군 진압을 시도했으나 장면 총리와 연락이 되지 않아서 포기한 사실이 있다.[53] 이 일화는 피터 콘이 저술한 펄 벅 평전에서도 나온다.[54] 예컨대 케네디의 복잡한 여성관계(마릴린 몬로도 등장한다!), 부모인 조셉 1세와 로즈 여사의 불화, 심지어는 케네디와 재클린 부부 사이의 불편한 모습까지 나올 정도. 다만 케네디의 암살은 별다른 음모론 없이 오스왈드의 범행으로 묘사.[55] 국내 자막에는 콜라라고 번역되어있다, 영화 개봉 당시만 해도 국내에 닥터페퍼가 알려저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맛 차이도 뭐[56] 마지막 부분 대사 등을 보면 우리가 흔히 아는 케네디 암살 미스터리는 사실 이런 바꿔치기 때문에 벌어진 음모라는 설정이다.[57] 소설의 배경이 미국 독립전쟁이 조지 워싱턴과 조지왕의 화해로 끝나서 미국이 영연방에 통합된 후 200년이 지난 1980년대이다.[58] 실제로 케네디는 2차 대전 때 PT-109에서 지휘관으로 근무했다.[59] 엄밀히 말해 케네디가 실제로 저 대사를 말할 때는 2차 세계대전 시기가 아닌 냉전 시기였으므로, "내가 바로 (2차대전 당시) 미국의 적국 나치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 사람"이라고 당당히 말하면 2차대전 미군 입장에서는 맞아도 싸긴 하다.[60] 사실 이 자연재해는 주인공이 시간 여행을 했고 과거를 바꾸는 바람에 벌어진 인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