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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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존 케리.jpg

이름

존 케리 (John Kerry)

본명

존 포브스 케리 (John Forbes Kerry)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png

출생

1943년 12월 11일, 콜로라도 주 오로라

소속

민주당

신장

193cm

종교

가톨릭

경력

해군대위 (1966~1978)
매사추세츠 부지사 (1983~1985)
연방 상원 의원 (1985~2013)
소기업 위원회 의장 (2007~2009)
외교 위원회 의장 (2009~2013)
국무장관 (2013~2017)

1. 소개2. 가족 관계

1. 소개[편집]

John Forbes Kerry
미국의 전 국무장관

(존 F. 케네디(JFK)와 이니셜을 맞추려고 대선 직전에 미들네임을 개명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Forbes가 원래 미들네임 맞다고 한다. 미들네임은 외가의 성씨에서 따온 것.)

미국의 정치인. 2004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패했던 인물.

1943년 12월 11일 생.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태어났다. 매사추세츠 주에 기반을 둔 부유한 집안 출신인데, 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 군복무 중이라 덴버에서 태어났다. 친가쪽은 가톨릭 집안이고, 외가쪽은 보스턴의 명문가인 보스턴 브라민으로 분류되는 포브스 집안으로 개신교 집안이었다. 존 케리는 친가 집안의 신앙을 따라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자랐다. 친가 집안은 아일랜드계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은 그의 친조부모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출신의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성씨도 아일랜드의 지명에서 따온 케리로 바꾸고 미국으로 이민와서 아일랜드계로 행세하며 보스턴 지역사회에서 부를 쌓았다. 존 케리는 이런 것도 모르고 자신이 아일랜드계인줄 알았는데, 이 사실이 그가 대선에 출마하기 전에야 언론에 의해 폭로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존 케리가 잘못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1]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매사추세츠의 명문가 출신에 가톨릭 신자, 거기에다가 JFK라는 이니셜까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비교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젊은 시절에 케네디 대통령과도 직접 알고 지내던 사이로, 케네디 대통령이 고향 매사추세츠로 여름 휴가를 보내러 왔을때 같이 요트를 타기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막내동생 테드 케네디와도 평생 인연을 이어갔고, 테드 케네디와는 20년 넘게 매사추세츠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6년 예일대를 졸업한 뒤 해군장교에 지원하였으며, 베트남전에 참전해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음에도 불구, 각종 전투에 참가해 은성무공훈장 등 다수의 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이 메달에 대해서는 미국 내에서 논쟁이 있다. 존 케리가 실제로 메달을 따기까지의 과정 이 링크에 따르면, 존 캐리는 1968년 11월 17일에 베트남에 도착하였다. 이후 고속선(swift boats)에 자원하여 배속된 모양이다. 고속선들은 돌아다니며 보통 민간인, 어부, 그리고 농부들을 괴롭히거나 종종 죽이곤 했다. 주로 농노들을 위협하여 항복시키는 이 작전에서 케리는 대단히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12월 2일, 케리는 수로 중 하나에서 자신의 첫 정찰업무를 맡는다. 자정쯤 선원들이 삼판(베트남 전통식 배. 어선) 하나를 발견했다. 케리는 섬광탄을 터트린 후 팀원들에게 보트의 기관총 2정과 M16 라이플로 사격을 명했다. 케리는 어부들이 "가젤처럼 도망갔다(running away like gazelles)"라고 묘사했다. 그 과정에서 아마 아군의 총알 파편에 의해 매우 작은 부상을 팔에 입었고, 이 긁힌 상처를 통해 명예전장훈장(퍼플하트)를 받는다!!!! 그나마도 아군이 응사했다거나 심지어 케리가 전장에 있었다는 것 조차 증거가 없다는 의혹이 있다. 하지만, 미국의 훈장수여는 엄격한 절차하에 행해질 것이기에 어쨌거나 전장에서 다친 것 자체는 사실이라면 메달은 절차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이 의혹은 케리 자신이 쓴 기록에서, 훈장이 수여된 9일 후인 1968년 12월 11일의 글에 그가 "우리는 아직 총을 맞지 않았기 때문에...(because we hadn’t been shot at yet...)" 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career_of_John_Kerry 1969년 2월 20일 보 더 강에서 두번째 퍼플하트 훈장을 추가한다. 이곳의 기록에 따르면 고속선들은 지원 헬기와 함께 갈 예정이었으나, 올라가던중 헬기가 공격을 받고 재급유를 위해 귀환하여 몇 시간 동안 참전이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케리의 기록에 따르면 더 늦어지기 전에 지원없이 빠져나가기로 하였다. 배들이 Cua Lon 강에 접근하던중 케리의 보트가 RPG탄에 맞고 왼쪽 다리에 박혔으며,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물론 부상중에도 의무는 계속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두번째 명예전장훈장 을 받는다!!

그리고 겨우 8일 후인 28일에 무려 '"은성훈장"'을 받는다! 공식적 수여 기록에는 그가 이 작전에서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성공적 작전을 수행하여 받았다고 기록한다. 하지만http://www.counterpunch.org/2013/07/26/what-john-kerry-really-did-in-vietnam I 존 케리가 실제로 메달을 따기까지의 과정http://wspaper.org/article/1582 I 알렉산더 콕번의 글 번역. 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케리는 보기 드물게 호전적인 살인자였다. 그는 전투 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미국 귀환 후의 정치적 출세를 위해 명예전상(戰傷)훈장을 받으려고 3개월 동안 미쳐 날뛰었다. 케리는 스스로 베트남 남쪽 끝에 있는 안 토이로 갔다...주간 임무에서는 코브라 헬기들이 [고속선] 보트들을 지원했다. 네이팜탄과 고엽제로 황폐해진 강둑과 앙상해진 숲을 향해 코브라 헬기들은 기총소사를 해댔다... 주민들이 통행금지 제재를 받지 않는 낮이었다. 케리의 보트가 운하를 따라 올라가고 있었고 코브라 헬기가 그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삼판선 한 척과 맞닥뜨렸고 그 배에는 여러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헬기가 삼판 바로 위에서 맴돌다가 이내 기관총을 발사하기 시작했고 탄환이 바닥날 때까지 사격을 계속해 배에 탄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배를 침몰시켰다. 케리가 자신의 일기장에 남긴 후회의 말은 죽은 사람을 애도한 것이 아니라 탄환을 모두 소모한 헬기 조종사의 어리석음을 개탄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조종사는 “재무장을 위해 탄환을 남겨두라는 요청을 받았는데도 [탄환을 다 소모해 버려], 엄호가 필수적인 지역에서 우리가 45분 넘게 엄호를 받지 못한 채 작전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1968년 크리스마스 전날에 케리는 순시선을 이끌고 캄보디아 국경을 따라 운하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당시는 크리스마스 휴전이 막 발효된 때였다. 따라서 그 순시선이 거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 자체가 당연히 의문의 대상이다. 그들은 삼판 두 척을 발견하고 뒤를 쫓아 작은 어촌으로 들어갔다. 케리는 기관총 사수 제임스 와서(Wasser)에게 탄막(彈幕)을 열어 두라고 명령했다. 그 뒤의 사태 전개를 뉘우치는 기록이 나중에 나왔지만, 그 당사자는 케리가 아니었다. 와서는 물소를 끌고가던 노인 한 명을 자신이 살해한 것을 묘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노인의 얼굴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는 여느 때처럼 일을 하고 있었을 뿐, 어느 누구도 해치지 않았다.” 그런 일 따위는 케리에게 아무 문제거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부상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었을지라도(부상 때문에 그가 전투에서 벗어난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긴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영웅적 행위를 자랑하며 훈장을 신청했을 것이다. 그 영웅적 행위가 기록된 훈장 덕분에 그는 베트남에서 빠져나왔다." 또, 시간상 번역을 완료하지 못했지만, 그가 순찰 중 기습을 당하자 일부러 규정을 위반해가며 보트를 해안가에 접안시키고 사격했는데 이는 적을 처리했다는 증거를 확실히 남기기 위해서였다는 의견이 있다. 나아가 동료 중 한 명은 응사를 받은 적이 거의 다 죽어갈 때여서 내버려 두었는데 케리가 잽싸게 해안가로 달려가 마지막 finish를 수행했다는 증언을 했다고도 나와있다. 보기에 따라 적을 빨리 고통없이 보내주려는 자비이거나, 혹은 자신의 킬 수를 확실히 기록하기 위한 방법일지도. 아무튼 출세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출세하고 싶은 덕자들은 눈에 보이는 증거나 자격증부터 빨리빨리 챙기도록 하자

누군가가 차후 아까의 링크 http://www.counterpunch.org/2013/07/26/what-john-kerry-really-did-in-vietnam I 존 케리가 실제로 메달을 따기까지의 과정를 더 정확히 번역하여 진실을 남겨주기를 바란다. 결론적으로 많은 의혹자들에 의하면, 존 케리는 애시당초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으나, 막상 참전 이후에 우리가 생각하는 공적이 아닌 다른 규정상의 공적을 통해 은성 훈장을 비롯, 훈장들을 쓸어 담았고 (어찌보면 난 규정대로 했고 너희가 뭐라건 난 전쟁영웅이거든요? 랄까).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미국 역사상 16인의 전쟁영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조지 워싱턴, 율리시즈 그랜트, 로버트 리, 조지 패튼, 아이젠하워, 맥아더, 그리고 자랑스러운 한국계 김영옥 장군 등등이 들어가 있으며 조지 A. 쿠스터는 . 2차대전의 영웅 니미츠 제독도 포함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존 케리= 워싱턴, 그랜트, 패튼, 아이젠하워, 맥아더급이라는 말....

하긴 병크 삽질의 대명사 조지 쿠스터가 있는 걸 보면...

메달 몇 개가 뭐 그리 중요하냐 하겠지만, 그의 추후 경력에 결정적 역할을 한 듯 하다. 전쟁영웅이면서도 반전을 웅변하는 대영웅의 이미지는 그를 성공과 부의 길로 이끌어 준 듯 하다. 재산만 몇 천억이라고 하니. 이후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이후 미 해군대위로 전역후, 반전주의운동에 뛰어들어, 1971년 미 의회 청문회에서 베트남전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유명세를 탔다. 이 청문회에서 토마스 페인이 책에 조국을 지키는 '섬머 솔져'라고 칭한 것에 빗대어 음지에서 일하는 군인을 윈터 솔저라고 말해 윈터 솔저란 말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전쟁 영웅이 반전 운동을 웅변하니 그야말로 인기가 폭발한 셈. 이 여세를 몰아 1972년 민주당에 들어가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할 계획을 가지기도 했지만, 예비선거에서 떨어졌다. 그 후 다시 학업에 뛰어들어 보스턴 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1983년 마이클 듀카키스 주지사 밑에서 부지사로 재직했다.[2]

1984년 매사추세츠 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1985년 1월, 부지사직을 사퇴하고 연방 상원의원에 취임했다. 이후 그는 2013년 국무장관에 임명될 때까지 상원의원직을 유지하게 된다.

케리는 이란-콘트라 사건 청문회를 주도하는 등, 각종 외교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하여 유명한 상원의원이 되었고, 차츰 잠재적인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마침내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 정책을 비난했으나, 범생이 같으면서도 말을 바꾸거나 우유부단한 이미지가 강하게 남으면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 그의 개인사도 공화당 진영의 비난 대상에 올랐다. 젊을 때 결혼했던 아내와 이혼한 후, 하인즈 케첩으로 유명한 하인즈 가문의 후계자와 결혼했던 미망인재혼한 것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더군다나, 그 하인즈 가문의 후계자는 생전에 케리와 함께 의정생활을 하던 공화당 상원의원의원이었다. 아무튼 재혼한 아내가 전 남편의 재산을 상속받아, 케리 역시 하인즈 케첩과 굉장히 밀접한 사람으로 알려졌고, 일부 공화당 지지자들은 하인즈 케첩을 사먹으면 그 돈이 고스란히 케리의 정치자금으로 들어갈 것이라 주장하며 불매 운동을 했다. 친조부모가 원래 유대계였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으로도 네거티브 전략으로 활용됐다.

  • 덤으로 그 자신이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이혼을 하고, 동성결혼낙태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가톨릭계에서도 그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고, 심지어 대죄를 짓고 있는 그에 대해 영성체도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을 정도였다.


한때 케리의 우세가 점쳐지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에다가 부시 진영의 네거티브 전략까지 먹혀들여 결국 부시 대통령의 재선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케네디 이후 두 번째로 가톨릭 신자인 미국 대통령이 탄생한다는 예측도 맞지 않게 됐다. 상당한 접전이었던 선거였는데, 특히 오하이오 주의 석패가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2% 정도의 표차로 부시가 앞섰는데, 여기서 만약 케리가 앞섰다면 케리가 당선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고 한다.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후로도 계속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며, 외교분야에서 활동했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고, 버락 오바마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3] 2008년에 다시 상원 선거에 당선되어 계속 상원의원 직을 유지하다 2012년 버락 오바마가 재선된 후 힐러리 클린턴의 후임 국무장관으로 지명되었다. 상원 인준을 받아, 2013년 2월 1일, 상원의원직을 내놓고 국무장관으로 취임했다.[4]

그의 친동생 캐머런 케리가 잠시 상무부 장관대행을 겸직하여, 친형제가 함께 미국 장관직을 맡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14년 7월 가자지구 분쟁에서 여전히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으나,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가 너무 심하다고 이스라엘도 좀 무력을 자중하라는 그동안 보이던 의견과 달리 약간 중립적인 의견도 보이고 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그만 휴전하라고 제의까지 했지만 그 이스라엘이 2014년 7월 가자지구 분쟁 항목만 봐도 알겠지만 배째라를 시전 중. 현재 오바마 정권 내에서 미러관계에 한하여 러시아에 우호적인 거의 유일한 각료라고 할 수 있다.

#2020년 미국 대선에서 대권 재도전 의사를 밝혔다.

현재 나이가 만 74세로 고령의 나이가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최고령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 보다 2살 연상인데, 그래도 트럼프는 첫 임기의 절반 가량을 채운 시점에서 72세이고 존 케리는 당선된다고 쳐도 첫 임기를 여는 시점에서 무려 만 77세(!!)다. 재선은 커녕 첫 임기를 건강하게 마칠 수 있을지나 모르는 나이이다.[5]

2. 가족 관계[편집]

  • 故프레데릭 A. 케리 (조부)

    • 에릭 케리 (백부)

    • 밀드레드 케리 (고모)

    • 故리처드 존 케리 (父)

      • 마가렛 케리 (누나)

      • 다이애나 케리 (여동생)

      • 카메론 포브스 케리 (남동생)

  • 故로즈마리 이사벨 포브스 (母)

  • 故아이다 로우 (조모)

  • 故줄리아 스팀슨 토른 (전처)

    • 알렉산드라 포브스 케리 (장녀)

    • 바네사 브래드포드 케리 (차녀)

  • 브라이언 발라 나헤드 (차사위)

    • 알렉산더 케리 나헤드 (외손자)

    • 리비아 포브스 케리 나헤드 (외손녀)

  • 테레사 하인즈 (2처)

  • 헨리 존 하인즈 4세

  • 앙드레 하인즈

  • 크리스토퍼 드레이크 하인즈

[1] 존 케리의 부친부터 태어나서 가톨릭 세례를 받고 유소년기때 미사때 복사서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았으니 몰랐을만 하다.[2] 듀카키스는 1988년 대선에 출마하여 아버지 부시에게 패한다. 본인이 모신 주지사는 아빠 부시한테 낙선하고 본인은 아들 부시한테 당하고[3] 사실 케리는 오바마가 중앙 정계 화려하게 데뷔하고 결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데 주춧돌을 놓아주었다. 케리가 2004년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최종 지명된 후 본인의 지지 기조 연설자로 그를 지명하였고 이 때 오바마는 대단한 연설문 실력과 웅변으로 중앙 정계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는 오바마가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 초선 의원으로서 워싱턴 중앙 정치로의 정식 데뷔 및 2008년 대선에서 승리하는데 기반이 된다.[4] 어떻게 보면 자신을 대통령까지 이끌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사실 대통령 첫 당선 때에도 국무장관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오바마가 힐러리를 장관으로 발탁하면서 그는 상원 외교위원장으로 선회한다. 전임자는 바이든 당시 부통령 당선인.[5] 정치를 포기하고 무병장수에 집중한다면 100살 넘게 건강히 살아도 이상하지 않지만 미국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막중한 스트레스와 격무에 시달리는 자리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