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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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존 레논
JOHN LENNO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94년

John Lennon
MBE

파일:John Lennon (1940~80).jpg

이름

John Winston Ono Lennon[2]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png

출생

1940년 10월 9일,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

사망

1980년 12월 8일, 미국 뉴욕 주 맨해튼

신체

179cm, O형

학력

리버풀 칼리지 오브 아트 중퇴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png

이름

존 레논
JOHN LENNON

분야

음악

입성날짜

1988년 9월 30일

위치

1752 Vine Street


1. 소개2. 생애
2.1. I was the Walrus : 유년부터 비틀즈 전성기까지2.2. But Now, I'm John : 비틀즈가 흩어진 뒤 솔로 활동
2.2.1. 오노 요코와의 만남2.2.2. 비틀즈가 무너지다2.2.3. 솔로 활동
2.3. The Dream is Over : 세상을 떠나다2.4. Strawberry Fields Forever : 죽음 이후의 존 레논
3. 비판과 논란
3.1. 여성혐오자? 페미니스트?3.2. 양성애자?
4. 기타(Guitar)5. 여담6. 음반

1. 소개[편집]

자기 자신을 노래한 사나이, "Music"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천재이자 라이벌 폴 매카트니와 함께 전 세계 대중음악의 위대한 아이콘

비틀즈의 영혼(Soul)이자 정신적 지주

영국의 록밴드 비틀즈의 멤버이자 싱어송라이터.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존 레넌'이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존 레논으로 표기하는 것이 보통이다. 국내에서는 비틀즈 시절의 곡들도 유명하지만, '존 레논의 곡'으로써는 Imagine과 같은 솔로가수 시절 발표한 곡들이 더 많이 알려진 편이다. 가령 비틀즈 시절 발표한 "All You Need Is Love"가 국내에서 유명하지만 대부분 러브 액츄얼리 OST로 알고 있다거나(...).

부인 2명과 낳은 아들 2명이 있는데 한명은 신시아 레논[3]사이에서 낳은 줄리안 레논[4] 그리고 오노 요코와 결혼하여 낳은 션 레논이 있다.[5]

2. 생애[편집]

2.1. I was the Walrus : 유년부터 비틀즈 전성기까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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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비틀즈 시절의 존 레논[6]


존 레논의 어린 시절은 불우한 편이었다. 선원이었던 아버지 프레디 레논[7]은 집을 나갔고, 어머니 줄리아 레논 역시 다른 남자와 동거하게 되었다. 결국 줄리아의 언니인 미미, 메어리 부부 밑에서 자랐다. 6살때 아버지가 돌아와 몇 주간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지며, 어머니와는 청소년기에 관계를 회복했다. 존은 근처 고아원이었던 스트로베리 필즈(Strawberry Fields)[8]에서 자주 놀았으며, 이때 Walrus(바다코끼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Glass Onion에서는 폴이래매

15살 때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을 듣고 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학교 근처에 살던 어머니의 집을 오가며 밴조를 배워 음악에 관한 흥미를 가지게 된 존은 16살 때 보호자인 미미 이모를 졸라 17파운드짜리 기타를 구입하고 맨날 같이 학교를 뒤집어놓던 친구들과 함께 비틀즈의 전신이 되는 밴드 "쿼리멘(The Querrymen)"을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한다.[9] 밴드 결성 직후, 퀴리맨의 멤버 아이반 본의 소개로 폴 매카트니와 만나게 되고 폴이 밴드에 합류한다.[10] 얼마 후, 밴드에 공석이 생기자. 폴의 소개로 조지 해리슨을 만났고, 조지가 밴드에 합류한다.

그러나 존 레논이 17살 때, 어머니 줄리아 레논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존 레논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역시 유방암으로 어머니를 잃었던 폴과의 우정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음악에 더욱 몰입하게 된 존은 폴에게서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존은 어머니에게 배운 밴조코드로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존 레논은 특히 어머니와 관련된 곡을 자주 썼으며, 첫째 아들 이름도 줄리안 레논으로 지었다. 1960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합류하고 밴드 명을 "실버 비틀즈"로 변경하고 활동하다가 후에 피트 베스트가 들어오자 밴드명을 "비틀즈"로 결정한다. 이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밴드에서 개인적인 사정[11]으로 탈퇴하게 되고, 피트 베스트는 나머지 멤버의 불만 때문에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즈(Rory Storm and Hurricanes)'의 드러머 링고 스타로 교체되게 된다. Please Please Me 녹음 때까지만 해도 링고 스타의 자리는 불안 불안했으나, 결국 링고 스타로 확정된 채 본격적으로 비틀즈가 출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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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폴 매카트니, 오른쪽이 존 레논


비틀즈 활동 초기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와 함께 거의 대부분의 곡을 썼으며, 이 둘의 협력은 레논-매카트니라고 칭해진다.[12] 그러나 'Rubber Soul'에서부터 존 레논의 자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In My Life'[13], 'Nowhere Man' 등이 바로 그런 곡.

사실 'Rubber Soul' 녹음 전부터 존 레논은 비틀즈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고 말았다. 존 레논은 "비틀즈는 예수보다 유명하다(popular)"라고 발언했는데, 이 때문에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는 비틀즈 상품을 모아놓고 불태우는 등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 때문에 비틀즈는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를 하기도 했다.[14] 이러한 해프닝과 밥 딜런과의 접촉 등 다양한 사건들은 그들로 하여금 기존 음악성을 탈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비틀즈가 아이돌 그룹에서 역사상 가장 실험적인 밴드 중 하나로 변모하는 터닝 포인트가 된다. 음악적 전환과 함께 비틀즈의 활동 스타일 자체에도 큰 변화가 생기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일체 콘서트를 중단해버린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의 마지막 콘서트인 'Rooftop Concert'의 영상은 남겨졌지만.

존 레논의 실험적인 작곡의 예로는 싱글 음반 'Paperback Writter/Rain'에서 처음 등장한 백마스킹[15]을 생각해낸 것과, Revolver에서 사이키델릭한 곡들을 작곡한 것 등이 있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서부터는 폴 매카트니가 밴드의 주도권을 잡게 되는데, 이때부터 레논-매카트니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둘이 큰 대립 구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 당시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곡을 합쳐 만든 'A Day in the Life'[16]는 비틀즈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명곡 중 하나이며, 폴 매카트니는 존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에게 'Hey Jude'라는 곡을 써주기도 했다. 'Yellow Submarine'에서는 녹음 중간 존 레논이 장난으로 개 짖는 소리를 냈다가 폴 매카트니와 함께 그것을 바탕으로 곡을 작곡한 'Hey Bulldog'이 수록되어 있다.

'Magical Mystery Tour'에서 존 레논은 'Strawberry Fields Forever'[17], 'I Am the Walrus'[18]라는 곡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더욱 확고히 해간다.

2.2. But Now, I'm John : 비틀즈가 흩어진 뒤 솔로 활동[편집]

2.2.1. 오노 요코와의 만남[편집]

비틀즈로 데뷔하기 직전인 1962년, 존은 리버플 미술 대학 시절부터 사귀던 신시아 파웰[19]과의 사이에서 아들인 줄리안 레논이 태어나자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기획사로부터 신시아와의 결혼 사실을 숨기라는 요구를 받은데다가(실제로 신시아의 존재는 미국 진출 이후에야 밝혀졌다.), 비틀즈가 대성공을 거두자 인기에 취해서 신시아와 줄리안을 냉대하기 시작했다.

1966년, 비틀즈가 투어를 중단하고 휴식기를 갖게 되자 존은 미국에서 일본인 전위 예술가 오노 요코의 전시회를 관람한 것을 계기로 요코에게 푹 빠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화이트' 앨범을 작업하던 도중인 1968년 신시아와 이혼하고 요코와 재혼한다.

요코는 흔히 예술 좀 할 줄 아는 존의 배우자 정도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 그 정도가 아니다. 오노 요코는 (물론 존의 유명세를 등에 업은 부분도 적잖다만) 앤디 워홀, 백남준 등의 현대예술가들과 폭넓은 교류를 이어갔으며, 아방가르드 예술가로도 높게 평가받았다. 위키백과의 'Yoko Ono' 문서 참고.# 근데 온통 영어로 쓰여있다는 게 함정

요코가 존에게 끼친 영향? 말로 다 할 수 없다! 요코는 존을 아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대학에서 신시아가 다른 남자와 얘기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신시아의 뺨을 때릴 정도로 꼴마초였던 존은 요코를 만난 뒤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전위 예술을 자신의 음악에 접목시켰다. 존은 요코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난 늘 예술가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을 꿈꾸어 왔다. 나와 예술적 상승을 공유할 수 있는 여자 말이다. 요코는 바로 그런 여자였다.


일부 팬들은 훗날 요코가 비틀즈 해체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여겨 '마녀', '일본 잡귀'(…)라며 맹렬히 비난하게 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존의 아내로써 부적합하다는 팬들의 지나친 오지랖. 물론 요코 역시 비틀즈 해체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틀즈 해체의 직접적인 요인은 결국 멤버들 간의 음악적 이견과 개인적 불화였고 요코는 굳이 따지자면 거기에 양념 역할을 한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녀를 비틀즈 해체의 원흉으로 몰고가는 것은 그다지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다.

2.2.2. 비틀즈가 무너지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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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해체 직전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20]


폴은 존이 오노 요코와의 사랑에만 치중하고 비틀즈를 뒷전시한다고 느꼈고, 존이 스튜디오(!)에까지 요코를 데리고 오자 이러한 내부의 분열은 극에 달했다. 물론 충분히 빡친 폴 역시 자신의 동거녀 린다를 스튜디오에 데려오는 식으로 그와 경쟁(…)했다. 폴 매카트니 항목 참고. 물론 이 갈등의 과정에서 존의 자의식은 더욱 강해져만 갔다.

화이트 앨범에서, 그는 인도 여행('Dear Prudence', 'The Continuing Story of Bungalow Bill')[21]에서 보고 느낀 것들과 극심했던 우울중('I'm So Tired') 등, 무척 개인적인 일들을 노래한다. 폴과 조지 역시 마찬가지였고 비틀즈 해체의 기미는 이때부터 분명 존재했다. 각종 소음을 집대성한, 전위예술적이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Revolution 9' 역시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으며 존의 곡이다.

Let It BeAbbey Road는 이미 멤버들이 해체를 체념한 상태에서 작업한 앨범들이다. 따라서 불화가 곡들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존에게는 여러모로 폴과의 음악적 이견차를 실감한 시간이었다. 존은 훗날 비틀즈 후반부에 두드러진 폴의 약진과 성과를 부정했고, 폴이 주도한 애비로드 메들리와 Let It Be 등 대부분의 McCartney 주도작들을 폄훼했다. 초기 레논-매카트니 체제의 득세를 생각해보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결국 비틀즈 해체 직후, 이들은 서로를 디스해대며 싸워댔고, 그 결과물들은 존의 Imagine 앨범과 폴의 Ram 앨범에 잘 나타나있다. 물론 존과 폴이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하고 싸워댄 것은 아니었고, 대인배 링고 스타의 중재로 그만두긴 했다.

비틀즈를 둘러싼 법정 공방이 끝나고, 존이 아들 션을 얻게 되면서 가정주부 생활을 하게 될 무렵에 어느 정도 관계를 회복했다고 한다. 이미 1974년 경에는 스튜디오에서 믹 재거, 스티비 원더 등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으며[22] 가끔씩 안부 전화도 하고, 폴이 지나가다가 존의 집에 들러 같이 연주도 했었다.

물론 과거의 영혼의 콤비였던 시절 만큼은 아니고 다소 서먹서먹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적어도 비틀즈 해체 직후 서로를 향해 증오에 가득찬 디스를 하던 시절보다는 훨씬 나아진 관계였다.[23] 오히려 존과 말년에 사이가 안 좋아진 것은 자서전 문제로 관계가 소원해진 조지 해리슨 쪽이었다.

70년대 후반 저술한 전기에서 조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서술하는 부분에 존을 누락시켜 버렸고 존은 이걸 무척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심지어 존이 살해되기 직전까지 화해조차 하지 못했다. 말년의 조지의 인터뷰를 보면 (폴도 그랬지만) 존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은 듯 하다. 존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조지는 힌두교에 더욱 깊게 몰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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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그렇게 60년대 후반쯤부터 존은 전위 예술가인 오노 요코의 영향을 받아 갖가지 기행을 한다. 요코와 함께 며칠 동안 검열삭제로 침대 안에 틀어박혀 있는다든가[24], 솔로 음반 자켓에 검열삭제로 사진을 찍는다든가. 앞 뒷면 전부. (…)
[25]

2.2.3. 솔로 활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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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 시절의 존 레논[26]

비틀즈 해체 직후 폴이 왕성한 솔로 활동을 한 것과 달리 존은 우울증에 빠져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어렸을 때의 애정 결핍과 여러가지 심적인 문제들에 대해 직면하면서 그의 내면 세계는 부쩍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것들을 통해 만든 앨범이 바로 플라스틱 오노 밴드(Plastic Ono Band). 덧붙이자면 이 시점 이후로 자신이 만들고 키워온 비틀즈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 앨범의 수록곡인 'God'의 가사에서도 "I don't belive in Beatles"라 외친다. 그 외에도 히틀러, 케네디, 예수, 만트라, 성서, 마술 등등을 믿지 않는다며 절규한다

이외에도 비틀즈 해체 시기를 전후하여 존은 요코와 함께 베트남전 반전 평화 운동을 시작하여, 미국 내의 반전 분위기를 북돋았다. 다큐멘터리 존 레논 컨피덴셜(원제 The US vs John Lennon)에서 이 시기의 존을 자세히 묘사했다.

비틀즈 해체되고 나서 존은 'Plastic Ono Band', 'Imagine' 등의 음반을 냈다. 이때 그의 사상은 한 단어로 된 세 곡('God', 'Love', 'Imagine')으로 대표되는데, 대체적으로 반전 평화주의자(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 Imagine 중), 무신론자(God is a concept by which we measure our pain - God 중), 무정부주의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트남전에 반대해 MBE 훈장을 반납하기도 했다. 실제 무정부주의 사상에 심취해 요코와 함께 만우절인 1973년 4월 1일 이상향을 뜻하는 'utopia(유토피아)'에서 본 따 'Nutopia(뉴토피아)'라는 가상 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참고.

그러다 베트남전이 종결된 1975년부터 존은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5년간 가정 주부로 살았다. 이는 어린 시절 불우했던 가정 환경에서의 경험이 아내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말년에 존이 보인 가정적인 모습은 어디까지나 션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줄리안에게는 죽을 때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런 줄리안을 가엾게 여긴 폴은 비틀즈 시절부터 줄리안을 돌봐주었고 줄리안도 폴을 더 따랐다고 한다. 비틀즈의 대표적인 히트곡 중 하나인 'Hey Jude'도 가정의 붕괴로 큰 혼란을 겪고 있을 줄리안에게 폴이 힘내라고 써준 곡이다.

2.3. The Dream is Over : 세상을 떠나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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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기의 존 레논.[27] 그러나 그의 중년은 너무나도 짧았다.


1980년 12월 8일 월요일, 'Double Fantasy'를 제작하고 활동을 시작하려던 찰나, 존은 뉴욕에 있는 자택 앞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정신병자에게 총을 맞았다. 녹음 스튜디오에서 요코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마크 채프먼이 쏜 38구경 리볼버에 벌집이 되었다고 한다.

마크 채프먼이 존을 죽인 이유를 놓고 비틀즈와 존을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존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결국 자신이 진짜 존 레논이며 저기 있는 존 레논은 가짜라는 망상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설이 힘을 얻었었다.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 후에 마크 채프먼은 가석방 심의위원회에서 "관심을 끌려고 그랬습니다. 존 레논의 명성을 조금 훔쳐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라고 진술했다. 그리고 그는 성공했다. 그게 비록 악명이지만, 영원히 남겨질 것은 틀림 없으니까.

그러나 마크 채프먼의 자택에서 발견된 비틀즈의 앨범은 그의 아내가 구입한 것으로, 채프먼이 비틀즈, 특히 존의 광적인 팬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적당하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이 사건으로 마크 채프먼은 현재 30년 넘게 교도소에 갇혀 있다. 2년마다 가석방 신청을 내고 있다는데, 2014년 8월 22일 그의 여덟 번째 가석방 신청이 거부되었다고 한다. 거부된 이유는 유가족과 고인을 사랑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

사실 석방돼도 마크 채프먼 입장에선 불안한 것이, 여전히 존의 몇몇 팬들이 마크 채프먼을 죽여 존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의 출소일 만을 기다리며 이를 갈고 있다는 카더라가 있어서… 뭐 카더라라기엔 당연한 사실이지만.

여담으로 마크 채프먼은 존에게 총을 쏘기 직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에게도 끈질기게 사인을 요구했다고 한다. 사인을 거의 해주지 않는 스티븐 킹도 그 끈질김에 질려 결국 사인을 해줬다는데, 만일 킹이 사인을 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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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이 마크 채프먼에게 싸인을 해주고 있다. 이 사진이 찍히고 5시간 후 존은 살해당했다.

마크 채프먼이 쏜 총에 맞은 존은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당신 존 레논이죠?"("Are you John Lennon?")이라는 질문에 "네..."("Yes...")라고 대답했고, 결국 이게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20세기 최고의 싱어송라이터라 칭송받던 사람의 최후치곤 무언가 안타깝고 허무한 죽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폴 매카트니와 함께 음모론의 단골 손님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폴 매카트니 사망설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비틀즈 관련 음모론이 FBI가 마크 채프먼을 이용해 그를 죽였다는 암살 사주설이다. FBI도 이런 썰을 의식하고 있는지 지금도 존의 파일을 비공개로 지정해놓고 있다.

사실 이런 음모론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은 존과 요코가 반전 운동을 벌이다 영국의 보수 언론에 쫓겨 미국으로 왔는데, 미국에 와서도 반전 운동을 계속해 당시 미국 정부나 보수 언론들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Some Time In New York City" 앨범을 낼 때 레논은 닉슨 = 마오쩌둥이라고 까기도 했다. 그래도 좌우 가리지 않고 골고루 까며 모두까기 인형을 시전하셨다.

2.4. Strawberry Fields Forever : 죽음 이후의 존 레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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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죽은 날." - 타임지 [28]


비틀즈에서의 큰 비중, 독특하고 확고한 사상, 극적인 삶과 죽음 때문인지, 존은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도 폴과 함께 가장 유명하다. 요즘 세대야 지금도 활동하는 폴을 더 잘 알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도 존은 많은 음악 팬들에게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신적인 존재다. 그러나 막상 우리나라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곡은 All You Need Is Love, Across The Universe 같은 것만 빼면 사실상 전부 폴이 만든 노래다. 이는 딱히 우리나라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심지어는 이매진이 비틀즈 노래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

생전에는 대중적인 곡을 주로 작사, 작곡해서 대중들에게 넓은 사랑을 받았던 폴과는 달리, 존은 비록 전성기 시절 히트곡의 인기는 폴에게 밀렸지만 세상을 떠난 뒤 수많은 대중, 매니아들과 평론가들에게 재평가를 받으며 진가를 인정받았다.

단, 여기서 명심할 것은 폴의 곡이 그 대중성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으나 음악적 스펙트럼을 폭넓게 지닌 훌륭한 곡이라는 사실이다. 존의 곡이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으니 음악적인 곡/매카트니의 곡이 대중에게 사랑을 받으니 조야한 곡이라는 이분화된 편견은 버리자. 자세한 건 폴 매카트니 항목의 '음악적 성향' 참조.

3. 비판과 논란[편집]

3.1. 여성혐오자? 페미니스트?[편집]

시간이 흐른 후, 존 레논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방향의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존의 이러한 행동들은 자신과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 및 질투심에서 비롯된 소유욕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존이 폴을 밴드에 받아들인 것도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취향이면서도 기타 연주를 자신보다 잘 하기 때문이었고 신시아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중산층 출신에 자신과는 다른 얌전한 무리들과 어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부각되는 부분은 레논의 여성 관계인데, 전처 신시아에 대한 무관심과 학대, 그리고 오노 요코에 대한 다소 광적인 집착 등이 새삼 다시 알려지면서 반전운동과 평화사상을 전파하던 그가 사생활은 그야말로 개차반인 상반된 면모를 보였다며 의외로 실망스런 인간이었다는 악평이 나오고 있다. 1960-70년대만 해도 여성에 대한 폭력행사를 상당부분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영국, 미국 등지에서도 만연했기 때문에, 당시엔 별로 이슈화가 되지 않던 것이 오늘날 재조명받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페미니즘 매체에서 존 레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상당히 많이 이어지게 된다. 오해가 섞여있을 지언정 존 레논의 과거의 꼴마초적 성향[29]이 많이 담긴 노래등을 비롯해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성향을 지적하기도 한다. 레논은 비틀즈 초기 시절에 무대 위에서 중증 장애인 흉내를 내어 비하 논란을 일으킨 흑역사가 있다. 동영상 링크 참고로 이 공연 전에 본인 뜻과 관계없이 강제적으로 비틀즈를 보러 온 장애인들과 만남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존 레논은 오노 요코를 만난 뒤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일전에 있었던 자신의 찌질함과 여성혐오적 성향, 그러한 음악을 냈던 일을 후회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평화지향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음악적 성향을 띄게 되었다. 실제로 Plastic Ono Band 이후부터 오노 요코의 영향이 커지며 페미니즘적 가치와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대한 노래와 함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노래도 많이 내었다. 하지만, 오노 요코가 밝히지 않아 이전엔 알려지지 않았던 어두운 부분, 예를 들어 레논의 폭행과 살해 위협[30], 바람둥이 기질[31], 아동 폭력 등은 역시 이런 개심 후에도 없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레논이 "지혜로운 구루(guru)[32] 행세를 하길 즐겼지만 사실은 골빈 무식쟁이였다"든지 "음악적으로 매카트니는 물론이고 조지 해리슨에게도 밀리는 무능력자였다"는 식으로 상당히 과장된 비판을 쏟아내는 이들도 있다. 물론 요절 후 성역의 위치에 오른 뮤지션에 대한 숨겨진 면모를 밝히려는 시도는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러한 부정적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 레논이 여전히 위대한 뮤지션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자신의 그러한 '찌질함'조차 솔직하게 드러내며 음악으로 풀어냈던 데에 있다. 특히 솔로 1집과 2집에 해당하는 Plastic Ono BandImagine에는 자신의 불우했던 과거와 그리 건강하지 못한 내면을 거리낌없이 독백하며 '비틀즈의 아이돌'에서 '고독한 뮤지션'으로 이미지를 완전히 탈바꿈하였다. 또한 그의 어두웠던 면모도 그가 '잃어버린 주말'을 종식하고 아들 '션 레논'이 태어난 이후 한 가정의 아버지로 거듭나면서 차차 개선되었다. 사실 그도 줄리안 에게 좋은 아버지가 될려고 노력 한것같다 존레논의 또다른 명곡인 하늘위의 루시와 화이트앨범
의 마지막 수록곡인 굿나잇은 첫뻔째 아들인 줄리안을 위해 쓴곡이다 그리고 행사나 이런데 줄리안을 데려가는등 노력을 햇고
이혼후에는 줄리안과 만날때 마다 항상 음악을 가르쳐주었다 줄리안이 가수가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줄리안 역시 인터뷰에서
난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난 그를 여전히 사랑합니다 라고 햇다

3.2. 양성애자?[편집]

1963년 동성애 성향이 있던 비틀즈의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존 레논이 함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낸 후 그가 게이라는 소문이 돌았었다.[33] 폴 매카트니는 존의 게이설에 대해 "난 존과 단둘이 한 방을 쓴 적이 여러번 있지만, 그는 내게 아무 짓도 하려하지 않았다." 라며 소문을 부인했다. 그런데 2015년 오노 요코가 인터뷰에서 밝히길, 엡스타인과의 게이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가 양성애적 성향이 있긴 했으며, 존과 이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했었는데 우리 모두 양성애 성향이 조금이나마 있을 수 있으나, 사회적 시선때문에 숨기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존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매력적인 남자를 만난다면 거부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했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 그가 완전한 양성애자라고 보기는 힘들다.

4. 기타(Guitar)[편집]

존 레논은 시기 별로 자주 사용하는 기타가 있다. 존 레논이 사용한 악기들 중 대부분 사람들이 알 만한 악기를 열거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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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kenbacker 1958 325
Rickenbacker 1963 325

비틀즈 초기에 사용한 일렉트릭 기타. 함부르크 시절 구매해서 65년까지 무대에서 사용한 기타이다. 리켄베커 325는 다른 전기기타와 다르게 넥과 스케일이 짧다. 이런 특징은 리듬 기타인 존 레논에게 코드를 빨리 변환할 수 있어 용이한 기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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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켄베커에서 트리뷰트 모델을 만든 적이 있다. 픽가드에 싸인이 있으며 리미티드로 출시.

http://www.gibson.com/Images/Products/AcousticGuitars/Round-Shoulder-Dreadnaught/Gibson/70th-Anniversary-John-Lennon-J-160E/Gallery-Images/RSJLMSNH1-Finish-Sho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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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딩하고 남은 기타줄에 담배를 끼고 튜닝하는 존레넌
개쎅시해!
Gibson J-160E

깁슨의 엔도서로 조지와 함께 받은 기타. 분실된 기타가 최근에 경매에 붙여졌다. 깁슨과 에피폰에서 시그네춰가 나왔으며 특징은 픽업으로 P90 픽업이 달린 것. 일렉기타 픽업이 달린 탓에 볼륨 노브와 톤 노브가 있다. 70주년 기념 모델도 출시. 위 기타는 70주년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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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phone 1965 Casino
Revolution Casino.

비틀즈 중기, 후기, 솔로활동까지 애용된 기타. 처음 에피폰 카지노를 쓴 것은 스튜디오 녹음용으로 구매한 폴 매카트니이다. 이것을 보고 조지와 함께 샀으며 조지는 다른 기타도 사용했지만 존은 Imagine 녹음까지 사용한다. 처음엔 빈티지 선버스트에 픽가드가 달렸으나 1966년부터 픽가드를 제거하고 네츄럴 색상으로 리피니쉬한다. 어떻게 저걸 만들었냐면, 존은 1966년 인도수련중 어떤 사람에게 '악기의 도색을 벗겨내면 좋은 소리가 난다' 라고 들어서 1968년에 직접 사포로 바디 도색만 벗겨냈다. 한때 에피폰에서 존 레논 시그니처 기타를 한정 판매했었다. 소리가 일반 카지노보다 날카로운 것이 특징. 메이드 인 제펜, USA, 차이나 3개로 나뉘며 차이나 빼곤 거의 구할 수 없다. 현재 일반버전은 3가지로 나뉘며 차이나에서 만드는 카지노와 일본에서 만드는 5ply 1965 Elitist 메이플 바디 카지노 그리고 3ply의 메이플 바디로 만드는 제펜 Elitist 1955 빈티지 아웃핏 등이 있다. (중간 중간 발매한 리미티드 버전은 제외 , 빈티지 아웃풋은 현재 일본 내수용이며
직구로 구매하여야 되고 현재 생산이 중단된 상태로 보인다. )
시그너처를 총 3번 발매하였다. USA , Japen(내수용) , China.
물론 돈은 줄리안에겐 떙푼 only 요노아줌마가 다 가져가신다. 기부하신다고 하시는데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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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bson Les Paul Jr.

뉴욕 공연에서 들고 나온적이 있으며, 특이점은 넥 픽업이 찰리 크리스천 모델이라는 것. 브릿지는 일반 P90이다. 깁슨 커스텀 샵에서 한정판매 되었다.

5.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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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레논은 살아생전 미 육군 제2보병사단부대마크와 미 육군 Sergeant[34] 계급장, 임진강 정찰대(Imjin Scout) 마크 등이 박음질된 OG-107[35] 상의를 입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1960년대에 있었던 존 레논과의 인터뷰에서 밝히길, 해당 셔츠는 몇년 전 독일의 한 공항에서 레인코트를 입고 기다리다가 만난 미 육군 하사가 존 레논을 알아보고 이런 옷을 좋아한다면 주겠다고 하여 나중에 소포로 보내 준 것이다.[36][37] 군알못이라 부대마크 읽을 줄 모르던 존 레논은 이것이 베트남전 참전용사의 것이라고 믿고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군복을 입은 이유가 베트남전 시기에 퍼져있던 반전의 메세지라는 분석도 있다. 당연히 이 부대는 한국에 주둔한 주한미군 소속이라 베트남에 간 적은 없다. 다만, 한반도의 현 상황을 생각하면 반전 메세지를 전하는 데엔 부족함이 없는 부대이긴 하다. 오늘날 이 레논의 무대 의상대로 세팅된 OG-107, 혹은 디자인이 거의 같아 대용품으로 쓰이는 OG-507[38] 셔츠는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국내에도 어째서인지 전투복 상의인데 야전상의라는 이름으로 판매 중.

  • 리암 갤러거가 존 레논의 유명한 다. 2000년대 초반에는 안경과 머리스타일을 레논과 판박이로 맞추는 '코스프레(...)'를 하기도. 사실 리암의 거친 행동도 존 레논과 상당히 닮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얘에 비하면 존은 양반. 아들 이름도 레논으로 지었다. 그럼 레논 갤러거? ㅎㄷㄷ

  • 스티브 잡스도 존 레논의 팬. 실제로 아이팟터치 1세대의 32기가 모델 발표였던 1월 이후 출시된 아이팟터치 제품군의 표지에는 존 레논의 Imagine이 재생되고 있으며 존 레논의 앨범아트가 붙어있다. 또한 "내 비즈니스 모델은 비틀즈다"는 등의 평소 발언과 그의 전기 내용에 비추어 볼 때, 팬임이 확실하다.

  • 엘튼 존과 돈독한 사이를 지내기도 했다. 션 레논의 대부가 바로 엘튼 존. 자세한 내용은 엘튼 존/관련 인물 문서의 비틀즈 문단 참고.

  • 존의 두 아들들도 가수로 데뷔하여 뮤직비디오(샘 페킨파 감독)까지 찍었으나, 결국 자기 아버지보다는 못했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 이후로 자기 아버지만한 가수도 없었다. 정확히는 전처 신시아의 아들인 줄리언 레논과 오노 요코의 아들 숀 레논이 있는데, 둘 다 가수로 데뷔했고. 앨범 판매량은 플래티넘 따낸 줄리언의 압승 다만 평론가들의 평은 숀의 음반이 더 좋고 숀 레논은 사업도 잘 되고 있기에 앨범은 취미로 내는 수준.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해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던 줄리언이지만 의외로 이복 동생인 숀하고는 2007년 숀의 투어에도 게스트로 참여할 정도로 사이가 괜찮았다. 하지만 줄리언이 요코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자 숀이 일방적으로 줄리안과의 연락을 끊었다고 한다. 찌질하긴 줄리언과 숀은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제로, 무려 13살 터울이라고. 후에 비디오 게임 GTA5를 통해서 수록된 줄리언 레논의 곡 "Too Late for Goodbyes"가 다시 주목받기도 하였다.

  • 존 레논은 숫자 9를 매우 좋아했으며 또한 특별하게 여겼는데, 실제로도 존 레논과 숀 레논의 생일은 10월 9일, 비틀즈가 처음으로 공연한 날도 2월 9일인 등 그의 삶 중 중요한 날들은 9라는 숫자와 연관되어있다. 심지어 존 레논이 죽은 날인 12월 8일은 그의 고향 리버풀 시간으로 따지면 12월 9일이였다. 흠좀무.이건 좀 어거지 아닌가 괜찮아, 다른것도 다 리버풀 시간으로 따진거니까 Revolution 9, One After 909, #9 Dream 등 노래에 9를 넣기도 하였다. 또 9번째로 만들어진, 일련번호 9가 새겨진 화이트 앨범을 특별히 자신이 소유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리마스터된 비틀즈 앨범의 발매일도 2009년 9월 9일이였다.

  • 그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영화 <존 레논 비긴즈 : 노웨어 보이>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다. 존 레논 역은 에런 존슨이 담당했다.

  • 오노 요코로 인해 백남준과도 나름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요코와 슈아 아베와 함께 넷이서 같이 나온 사진이 있다.

  • 한국의 가수 한대수와 만난적이 있다. 한대수가 1978년 뉴욕의 한 식당에 들렀다가 우연히 존을 보았고, 그가 존에게 훌륭한 음악을 들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 구글에서는 2010년 그의 탄생 70년을 기념해 특별히 로고를 만들었는데, 한글날과 겹치는 탓에 한국에서는 짧은 시간밖에 볼 수 없었다. 영상

  • 평소 자신의 얇은 목소리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남자답지 못하다며 싫어해서 비틀즈 시절에는 대부분의 곡에 더블트랙으로 보컬을 녹음했다. 대표적인 트랙이 A Hard Day's Night 스테레오 판에 수록된 'If I Fell'

  • 뉴욕 센트럴파크에 있는 그의 묘지를 포함해 세계 각지에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물이 들어서있다. 이중 매우 특이한 곳에 있는 기념물이 있는데 바로 쿠바 아바나에 있는 레논 공원. 2000년에는 레논 사망 20주기를 맞아 등신대의 레논 동상도 세워졌는데, 제막식에는 한때 비틀즈를 '이기적인 소비주의의 상징'이라고 강하게 비난한 적이 있던 피델 카스트로도 참석했다. 여담으로 이 동상의 안경을 누군가 훔쳐가는 일이 하도 잦아서 자원봉사자들이 안경을 보관한다고 한다.

  • 존 레논의 치아를 낙찰받은 캐나다의 한 치과의사가 2013년에 치아에서 DNA를 추출하여 존을 복제인간으로 부활시키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물론 팬들의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현재 어떻게 되었는지 추가바람.

위대한 음악가이지만 사생활을 보면 말종인데 자신의 어린시절이 불행했는데도 그불행을 자신의 자식에게 똑같이 주었다 조강지처인
신시아와 아들인 줄리안을 버리고 오노요코에게 간것 얼마나 줄리안이 안됐는지 폴이 줄리안을 달래기위해 헤이 쥬드라는 곡을 쓸정도

6. 음반[편집]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2] 원래는 존 윈스턴 레논이였지만 오노 요코와 결혼한 뒤 개명했다. 윈스턴 처칠에서 따온 중간 이름인데, 존은 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개명하면서 이를 없애려 했으나 기각되어 결국 빼지 못했다.[3] 최근까지 노엘 찰스와 결혼하여 살다가 2013년 3월 11일 사망.[4]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똑같이 생겼다.[5] 수염을 기르면 비슷한데 어머니 쪽을 많이 닮았다.[6] 국내에서는 안경 쓴 이미지가 많이 굳어졌지만, 이 시기의 존 레논은 상당히 미남이다.[7] 존 레논은 좋게 볼 수 없는 사람. 존의 유년시절 그를 떠난 것도 모자라, 훗날 비틀즈의 인기에 힘입어 어느 소녀팬과 결혼(!)한다.[8] 노래제목인 Strawberry Fields Forever가 여기에서 나온것이다.[9] 대학밴드 급이라고 볼 수 있다. 고등학교 이름이 "쿼리 뱅크(Quarry Bank)"였기 때문에 이름을 쿼리+멘(Men)으로 지었다.[10] 이 당시 존은 폴이 기타를 왼손잡이로 잡는 걸 보고 "기타도 똑바로 못 드는 놈이 뭘 하겠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인상적이었고, 특히 폴이 자작곡을 만드는 것과 기타를 조율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11] 본래 미술학도였던 자신의 정체성과 독일인 애인과의 문제 등이 겹쳤다. 비틀즈 항목 참고.[12] 존 레논은 폴의 멜로디 매이킹 실력을 폴 매카트니는 존의 노랫말을 쓰는 실력을 높이샀다고 한다.[13] In My Life의 경우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곡인데, 존의 생전 그의 곡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폴 매카트니가 자신의 곡이라며 주장하고 나온 것. 사실 폴은 존이 죽기 전에도 자신이 작곡한 곡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비틀즈 시절 그들이 쓴 모든 곡들은(심지어 Yesterday처럼 온전히 개인의 창작물인 경우에도) Lennon-McCartney로 표기되어 진위 여부를 가리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일단 작사가는 존이라는 것이 중론. 일부 팬들은 메인 보컬이 존이라는 것과 특유의 서정적인 스타일 등을 근거로 들며 존의 곡임을 주장하지만, 일각에서는 폴이 괜히 거짓말까지 해가며 200곡들 중 한 곡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야했겠냐며 반론한다. 어떤 이들은 아예 작곡가가 누구인지를 크게 신경쓰지 않기도 하고. http://cafe.naver.com/thebeatlemania/76433 같이 읽어보면 좋을 포스팅.[14] 근데 어째 사과 내용도 예수쟁이들을 비꼬는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비틀즈/예수 발언 참조.[15] 이 백마스킹에 근거해 "비틀즈 노래를 거꾸로 들으면 악마숭배적 메시지가 관측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백마스킹이 화제가 된 또다른 노래로는 Revolution #9가 있다.[16]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각자가 쓴 미완성 곡을 하나로 연결해서 만든 노래다. 이와 반대로 두 사람이 같은 앨범 안에서 같은 주제로 다른 두 곡을 쓴 경우로, 존의 Strawberry Fiels Forever와 폴의 Penny Lane이 있다.[17] 이 곡과 폴 매카트니의 'Penny Lane'은 사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보다도 먼저 발표된 싱글이다. 자세한 내용은 Magical Mystery Tour 참조.[18] 이 곡 이후 존 레논은 'Walrus'라는 가사를 곡에 자주 사용하는데, 이유없이 등장하는 경우도 많지만 주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경우도 잦다. 'Glass Onion'에서는 'The Walrus Was Paul'이라면서 폴을 까기도 했다. (해당 구절의 내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착한 등장인물로 나온다고 알고 있던 Walrus가 사실 악당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폴은 착해 보이지만 사실은 악당이다'라는 의미. 곡 자체도 폴을 까기 위해 만든 곡이다. 폴이 평소에 자신의 노랫말을 짓는 실력을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존 레논이 "폴이 만든 가사는 '유리 양파'라는 단어처럼 뭔가 그냥 있어보이는 단어를 붙여놓았을뿐 사실 아무런 의미없는 가사일 뿐이다." 라면서 폴을 디스하는 내용) 음모론자들은 이를 폴이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로 들이밀기도 한다. 왜냐하면 저 가사를 직역하면 "(사실) 왈루스는 폴이었지"라는 뜻인데, 왈루스는 위에서 적은 존의 별명(해마)이기도 하지만, 그리스어로 시체라는 뜻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어에 walrus 라는 단어는 없으므로 이는 루머로 추정된다. 일단 폴 매카트니 사망설 자체가 아무 근거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19] 2015년 4월,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20] 둘이 마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해 보는 것이 사진의 감상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존: '답답한 놈...' 폴: '한심한 놈...'[21] 비틀즈 항목 참고. 사실 존의 인생사와 우여곡절 자체를 비틀즈와 구분지어 생각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22] 이 녹음을 담은 부틀렉이 존재한다. 제목은 "A Toot and a Snore in 74"로 위키피디아에도 항목이 개설되어 있다. 레코딩의 질 보다는 역사성으로 인해 높게 평가받는 부틀렉이다.[23] 이후에 밝혀진 일화에 따르면 폴의 음반이 나올 때마다 꼭 찾아 들었다던가, 오노 요코가 폴에게 '존은 당신을 정말 좋아했어요'라고 말한 부분들을 살펴보면 한참 싸우는 와중에도 폴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24] 일명 베드인 사건. 반전 시위의 일환이었다.[25] CSK_8690_0092.jpg으로 검색시 나온다. 이 글은 모두가 볼수 있는 글이므로 따로 표시하지 않는다. [26] 사실 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심한 근시를 갖고 있었으며, 다만 안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1966년 무렵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27] 그 옆은 아내 오노 요코[28] 돈 맥린의 "아메리칸 파이"에 등장하는 가사인 "the day the music died"(음악이 죽은 날)에서 따온 표현. 실제로는 1959년 2월 3일, 즉 비행기 추락으로 버디 홀리, 리치 발렌스, 빅 바퍼가 한꺼번에 객사한 날을 가리킨다.[29] 이는 비틀즈의 음악 판도를 완전히 바꿔버린 혁명적인 앨범이라 평가받는 Rubber Soul 앨범에서 특히 두드러진다.[30] 레논은 오노가 자신을 떠날까봐 매우 두려워하며, 자신을 버릴 경우 살해하겠다고 종종 협박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서인 메이 팡의 말을 잘못 듣고서 목을 조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사건도 있었다. 심지어 러버 소울 수록곡인 "Run for Your Life(죽기 싫으면 도망가라)"라는 곡에 "다른 남자랑 있는 걸 보느니 차라리 죽이겠다(I'd rather see you dead little girl, than see you with another man)"는 가사가 나오는데, 이 곡이 앨범에는 폴 매카트니 명의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레논의 곡이었기 때문에 이 곡이 레논의 극심한 질투심을 보여준다는 주장까지도 나오고 있다.[31] 신시아와 결혼 후 비틀즈가 유명해지자 다른 여성들과 바람을 피웠고 세간에 잉꼬부부로 여겨지는 오노 요코와 결혼 후에도 그 버릇은 지속되어서 레논의 '잃어버린 주말' 시절도 레논이 계속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것에 화가 난 오노 요코가 집을 나간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32] 인도 말로 사상적 스승 등을 지칭[33] 아얘 이 소문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까지 있을 정도.#[34] 국군 공식 번역 및 계급 대치에 따르면 육군 병장이지만, 실제 역할 및 지위를 고려하면 육군 하사에 더 가깝다.[35] 1950년대부터 베트남 전쟁 종전 직후까지 사용된, 미군이 채택한 전군 공용 민무늬 작업복.[36] 파일:external/www.feelnumb.com/Sergeant-Peter-James-Reinhardt-Korean-DMZ-John-Lennon_army-jacket-history.jpg 이 사람이 해당 OG-107의 원 주인 Peter James Reinhardt다.[37] 파일:external/www.feelnumb.com/john-lennon-reinhardt-us-army-jacket-history-story.jpg 해당 사진의 좌측 인물은 촬영을 위해 해당 상의를 대신 입은 Peter의 형제 Andrew다.[38] 베트남 전쟁 종전 직후부터 80년대까지 쓰인, OG-107의 후신인 미군 최후의 민무늬 작업복. 이후 채택된 것이 그 유명한 위장무늬 전투복인 BDU다. OG-107은 폐지된 지 오래된데다 베트남 전쟁 때 소모된 게 많고 재현자들 위주로 많이 사갔기 때문에 가격도 비싸고 순면 재질이라 합성섬유가 들어간 507보다 광택이 덜하고 후줄근해 보여서(대신 흡습성과 속건성, 방염성은 107이 더 높다.), 대용품으로 507이 많이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