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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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문의 내력과 계통 등을 정리한 책
1.1. 전 국민이 양반의 후손인 이유?1.2. 기존 양반들의 조작행태1.3. 역사적인 사료?
2. 확장된 의미
2.1. 나이/직급을 가리키는 말2.2. 도박 용어2.3. 시험 기출문제2.4. 특정 집단의 역사를 가리키는 속어
3. 영화

1. 가문의 내력과 계통 등을 정리한 책[편집]

보첩(譜牒)이라고도 한다. 한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알기 쉽게 부계 중심[1]으로 정리한 도표 형식의 책으로, 가문의 단합과 조상에 대한 공경이라는 유교적인 가족관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그 시초는 중국으로, 제왕연표(帝王年表)라는 황족의 혈통 계보 책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이 족보를 가지게 된 것은 한나라 때 현량과 제도를 통한 인재 선발에서 응시생의 가족 내력을 확인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한반도에 족보가 처음으로 건너온 것은 1562년(명종 17)의 문화유보(文化柳譜)라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안동 권씨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이다. 굳이 조선 시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의 문벌귀족들도 족보와 유사한 혈통 증명 체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시대 때 족보가 정착되고 이른바 "양반의 혈통 증명서"로서 역할을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한국인의 거의 전부가 소위 족보로서 "자신이 양반임을" 증명 가능하다. 조선 초 1%에 지나지 않던 "성을 가진" 양반만 100%로 늘어나고 97%의 평민들은 모두 죽었을까. 유럽 귀족의 이름을 받은 후손들도 기껏해야 1%에 지나지 않지만, 신라 김알지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양반이 4백만 명, 전체 인구의 1퍼센트나 된다. "양반임을 자처하는" 김, 이, 박, 정씨는 무려 대한민국의 인구에서 2191만 명이나 된다.자연선택설

이렇게 된 이유는 성씨는 양반들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일부 노비들까지 성씨를 지니고 있는 것이 문헌으로 확인된다. 반면 조선시대 내내 양반의 비율은 별로 증가하지 않아서, 1910년에도 '양반' 계층은 1.9%에 불과했다. 관직수가 한정되어 있고 3대 이내에 관직을 지내지 못하면 양반의 자격이 박탈되는 양반의 정의상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3대 이내에 관직을 지내지 못했더라도 양반의 후손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이론상으로는 계속 증가하는 것이 맞다. 관직은 모든 양인, 즉 양반 뿐만이 아니라 천인을 제외한 사농공상 모두에게 열려있는데다, 조선시대 내내 양인의 비율은 증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개 농민에 불과했던 전봉준도 엄연히 천안 전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며, 스스로 '상놈을 패를 찼다'라고 자조한 김구김자점의 방계 후손으로 그 선대를 상고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봉건적 유물을 없앤다는 핑계로 다 없애버리고 새로운 것도 제작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 조상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 한다.

현대 한국에 들어서는 대전에 있는 회상사라는 곳에서 현행 족보의 9할 가량을 전문적으로 만들어서 제작하고 있다. 여러 종중이나 정치가들의 선물도 많이 받아서 꽤 유명한 곳이다.

1.1. 전 국민이 양반의 후손인 이유?[편집]

유전적 다양성이 나타난 김, 이, 박씨의 하플로그룹. 다만 이 자료는 사실상 별개 성씨라고 봐야 하는 본관을 구분하지 않았다.

세간 인식이 성씨도 없던 노비들이 성을 갖게 돼서라고 하지만 조선시대 문헌을 살펴보면 노비들도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천하다는 의미로 성을 생략한 경우가 많다.

또한 성을 바꿨을 것이라는 설이 있지만 이수건 박사에 따르면 개성은 그 당시에도 엄청난 범죄로 인식되어 실현된 가능성이 적고 그 대신 본관을 고치는 개관은 동성동조라는 인식 덕분에 본관을 고치거나 짓는 일에는 개성만큼의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였기에 많이 자행되었다. 따라서 본관이 없거나 모르던 평민들이 각 성씨의 유력 본관과 파로 입적했다고 보아야 한다.

다음은 그 증거이다.

<인조 15년 무과 입격자 배출 상위 5개 성씨>

김(金) 1252 명 (22.7%) 2000년 현재 김씨 인구 21.6%
이(李) 793 명 (14.4%) 2000년 현재 이씨 인구 14.8%
박(朴) 462 명 (8.4%) 2000년 현재 박씨 인구 8.6%
최(崔) 336 명 (6.1%) 2000년 현재 최씨 인구 4.7%

정(鄭) 179 명 (3.3%) 2000년 현재 정씨 인구 4.4%


현대 성씨 비율과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평민들이 양반의 직위로 올라서는 경우도 있고, 가난한 조정이 재정을 확보하고자 공명첩을 발급한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극히 소수다.

가장 큰 이유는 조선후기의 신분질서의 해체와 자본주의의 성장.[2] 이에 따른 부농층의 등장, 민간 인쇄소의 증가가 그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는 양반 내에서도 계급이 분화되는데, 한양에 모여 살면서 관직을 독점하는 벌열 양반과 향촌 내에서 모여 살며 지방에서라도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어 살았던 양반 사족인 향반들, 그리고 권력도 경제력도 없이 도태된 잔반이 그것이다. 잔반들은 암울한 경제 사정을 타파하기 위해 부농층에 족보를 팔았고 부농층은 족보를 사고 다른 마을로 이사한 후 양반 행세를 하면 되었다. 아니면 아예 돈을 주고 양반집안에 양자로 들어가기도 했다.

"임금이 낮에 경연을 가졌다. 그때 사헌부집의 유수가 아뢰었다. ‘역관(譯官) 김경희가 자기 마음대로 활자를 만들어서 비치해 둔 다음, 다른 사람들의 족보를 많이 모아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시골에서 군역을 모면하려는 무리들을 꾀어다가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책장을 바꾸어 가짜 족보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형조에 명령하셔서 엄중 조사하여 무거운 벌을 주도록 하십시오.’ 그러자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 《영조실록》1764년 11월 12일

 
이런 식으로 족보는 대량 위조되어 농민들에게 뿌려졌다.

또한 양반이란 지위는 농민으로 하여금 가혹한 "군역"을 면제시켜 주는 아주 중요한 직책이었다. 조선 후기 양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세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게 되었고, 이에 따라 흥선대원군 시기에 이르러선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는 호포제가 법제화되었다.

이런 양반들의 증가현상은 당시 인구조사로도 확연히 드러난다. 조선 초기에는 지배계급인 양반이 가장 적고, 중인, 상민, 천민 순으로 숫자가 많아지는 피라미드 구조였는데, 이 시기에 상민은 줄어들고 양반은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일부 지역의 경우에는 오히려 양반이 상민보다 많은 역피라미드의 인구구조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철종 때 공노비 20만명을 해방시켜 상민을 늘렸으나, 그래도 이 추세를 막지는 못했다.

본래 있던 양반들은 위기감을 느끼며 족보를 확장하지 못하도록 상소도 올리고 신문고도 때리고 했지만 시대적인 흐름을 그들이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어정쩡한 타협으로 본래의 양반 족보 안에 "별보"라 하여 혈연관계가 증명되지 않은 사람들의 족보 등재를 묵인하기도 했다.

1900년초의 족보의 두께는 2000년에 이르기까지 3-4배나 증가했다.[3]

이를 보다 못한 구한말 지식인들은 그것을 강하게 비난했다. 자기 조상을 부정하는 패륜적인 행위를 비난했다. 증산교의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지금은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시대이니 혈통 줄을 바르게 하라.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꾸어서 계보를 위조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강일순의 말대로 하면 이 나라 국민들 상당수는 모두 죽어야한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 점이 오히려 호재로 작용한 걸 수도 있다. 일본의 부락민과 같은 성이나 출신 계급에 따른 차가 없는 것도 개나 소나 양반이라는 점도 영향이 있기 때문. 아직도 '우리 집은 양반 출신이야.'같은 권위의식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족보 매매는 현대 신분 차별 완화에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자신의 조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고 싶다면 족보에 기록된 조상의 DNA와 본인의 DNA 대조 검증을 통해 알아볼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조상의 묘를 열어야 하는데 조상의 묘가 파헤쳐지는 것을 해당 종가, 종친회와 문중에서 용납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어디까지나 족보상의 조상이 자신의 진짜 조상인지 아닌지를 알아낼 수 있을뿐, 가짜로 판명날 경우 자신의 진짜 조상이 누구인지 알아내는것은 불가능하다. 위조를 했던 조상이 무슨일을 했는지,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누구의 후손인지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사실상 거의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한들 단편적인 내용일뿐 구체적인 기록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1.2. 기존 양반들의 조작행태[편집]

재미있는 것은 기존의 양반층 내에서도 집안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과거의 유명한 인물에 집안의 족보를 연결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 《구당서》를 보면 당나라의 두정륜이라는 인물이 성남(城南) 두씨 집성촌에 찾아가서 자신의 이름을 그네 집안 족보에 넣어달라고 청탁했다가 거절당한 기록이 있고, 오대십국시대에는 곽숭도(郭崇韜)라는 자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곽자의의 후손이라며 아부하는 말에 솔깃해서 정말 후손인양 그 무덤에 찾아가 곡을 하고 오기까지 했다고. 현재 남아있는 조선 시대 족보의 서문에서는 이들 일화가 흔히 '족보 위조'의 반면교사적 예화로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로 아버지 김숙자의 행적을 정리하는 김에 자신의 족보까지 함께 추려서 《이존록》이라는 제목으로 엮어낸 김종직[4]은 자신이 속한 선산 김씨[5]의 시조로 여겨지던 김선궁(金宣弓)이라는 인물[6]에 대해 "계보가 너무 멀어서 (그 사람이 정말 내 조상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다!"면서 선궁 대신 고려 시대의 호장이었다는 흥술(興述)이라는 인물을 '비조(鼻祖) 1세'로 해서 족보를 기록했다.[7] 즉 집안에 내려오는 전승은 말 그대로 전설로서 인정해 주겠지만, 자신은 자신과 직접적으로 혈연이 있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인물(문헌으로 100% 실증 가능한 인물)부터 조상으로서 인정하겠다는 뜻.[8]

다만, 뼈대 있는 대명문가들의 종가에서 대대로 계승하는 진본 족보는 그 금전적 가치가 어마어마하니 절대 무시하지 말자.[9]

1.3. 역사적인 사료?[편집]

왕족의 집안의 경우엔 역사적인 기록들도 남아있다. 김해김씨 족보의 경우엔 금관가야의 묘호와 시호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청주 한씨 족보에도 기자조선의 역대 왕 41명과 마한의 역대 왕 9명의 시호와 이름(휘)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역사적인 사료로써는 사용되지 않는다.[10]

족보는 가문의 역사를 나타내기 때문에 후손 대에서 조상 숭배를 위해 조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또한 이러한 사료들은 다른 사서에서는 기록되지 않아 출처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신뢰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완전히 족보가 사료적 가치가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사학자들 가운데 족보를 역사 연구에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병도와 더불어 한국사 학계의 1세대 대표 학자로 꼽히는 고(故) 이기백 교수의 경우 생전에 신라 말기의 사병(私兵) 문제를 연구한 「신라사병고(新羅私兵考)」를 발표하면서 흥양 이씨 족보를 역사적 자료로 활용했고[11] 진주 소씨 족보를 통해 상대등 알천(閼川)을 새롭게 인식했다며[12] 족보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바 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35년 넘게 한국학을 개척ㆍ발전시킨 에드워드 와그너 박사(2001년 작고)도 한국학을 연구하면서 한국의 족보에 주목해, 족보에 나타난 문과 급제자를 통해 우수 혈통에 관한 연구를 하기도 했다.주간한국 기사

족보의 기록을 하나의 단서로 삼아 조상[13]의 무덤을 찾은 사례가 토요미스테리극장을 통해 소개된 일도 있다.관련내용 리뷰

2. 확장된 의미[편집]

2.1. 나이/직급을 가리키는 말[편집]

한국어는 상하관계를 설정해야 대화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14] 그때 족보 확인하다고 하곤 한다. 민증 깐단 말도 있고.

2.2. 도박 용어[편집]

화투, 플레잉 카드 등을 사용하는 도박에서, 점수가 성립되는 패를 정의해둔 리스트. 화투나 플레잉 카드 뿐만 아니라 슬롯머신 등에서도 이렇게 맞히면 대박 탈 수 있다는 식으로 활용된다. 마작의 역도 족보의 일종.

2.3. 시험 기출문제[편집]

시험 등에 있어 기출문제나 출제경향을 모아놓은 것. 대학생 시험의 필수요소. 대학에서 학점을 잘 받기 위해 실력뿐 아니라 주변 인맥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퀴즈 게임에서 출제되는 문제와 답을 모조리 모아 놓은 리스트를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기출문제를 대놓고 알려주거나 시험지를 들고 가게 해주는 과목은 족보의 개념이 없다. 어차피 교수님이 매번 문제를 바꾼다. 즉 원래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데 어쩌다 보니 유통된 족보가 가장 희소한 족보. 보통 학생들이 나중에 기억해낸 문제를 엮거나 어쩌다 보니 우연히 시험지가 유출되거나 해서 만들어진다. 물론 냈던 문제를 또 내는 교수에게 특히 유용하다.

학번제가 소멸하고 서울대에서 팩차기(…)가 사멸하는 것처럼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족보문화(…)도 사라져 가고 있다. 강의평가 제도가 생각보다 효과가 있어서 교수님들도 비교적 합리적인 방법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기 시작했고[15] 개인주의 성향으로 학과생활이 많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각보다 학교에 뿌리내리고 있는 교수가 많지 않다. 대부분 비정규직인 강사신분으로 학생을 가르치시는지라 1~2년하고 여기저기 옮겨다니시니 족보라는게 만들어질 틈이 없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희소성 때문에 족보의 가치는 급 상승. 족보가 만들어진 과목이 줄긴 했지만, 족보가 만들어진 과목은 거의 주요과목인데다 과생활을 잘 안하면 얻기도 힘들어져 일단 얻기만 하면 큰 도움은 된다. 몇몇 교수는 아예 족보를 공개하기도 하는데, 이 때의 기출문제는 해당 과목에서 중요한 내용이 된다. 교수가 생각할 때 이 과목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알아야 할 것을 담고 있으니 물어볼 만할 걸 또 묻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

교수가 이 문서를 보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하지만, 대안은 있다. 족보에 없는 함정 문제가 대표적인 예. 족보 자체를 부정행위로 간주하는 교수도 있다. 게다가 난이도가 안드로메다로 가는 과목이나 이슈가 자주 바뀌는 과목은 족보의 효용성이 오히려 떨어진다. 결정적으로 신생 과목은 아예 족보가 없는 게 태반. 그러므로 족보를 과신하지는 말자. 족보는 무엇보다도 참고서일 뿐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족보없이는 절대 풀 수 없는, 가르친 범위 외의 문제를 출제하는 교수들도 많다. 암만 강의평가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직접 말씀을 드려도 소용없다. 이런 경우 학과내에서의 선배와의 인맥이 성적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물론 그런 거 없는 훌륭한 교수님들도 많이 계시지만.

스누라이프, 고파스, 세연넷 등 학교 인터넷 커뮤니티에 학생들이 강의평과 함께 족보를 올려놓는 경우도 있다. 방송통신대는 아예 학교 당국에서 정식으로 공개.

고등학교에도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는데, 웬만한 보습학원에선 학교별로 비치중. 개성없는 고등학교 시험문제 현실상 사실 별 도움은 안되지만, 실제로 가끔 매년 문제를 그대로 내는 선생님이 있다(…). 보통 예체능계의 수능에 안나오는 과목의 경우에 그런 경우가 보고되고 있다.

참고로 혹시라도 미국 등의 서양권 국가에 유학을 가게 된다면 거기선 절대로 이런 거 갖고 있지 말자.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해도 대부분의 경우 최소한 학점에 불이익이 생기거나 더 나아가면 중징계를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미국 유학을 갔던 한국 학생의 목격담에 의하면, 학교 기숙사에서 가끔 불시에 일어나는 방 검사 및 소지품 검사에서 이런 걸 갖고 있던 한국 학생이 적발되었는데 그 과목에서 그의 학점이 0점 처리된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애초부터 기존에 출시된 시험문제지를 보유하는 것 자체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트릭이나 써서 점수를 얻으려는 행동'으로 보고 컨닝처럼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설령 기숙사 생활은 안 한다고 해도 친구들 앞에서 이런 거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 어떤 식으로든 안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주의. 하지만 많은 유럽 학교에서는 지금껏 냈던 시험문제와 답을 교수가 직접 데이터베이스에 올리는 경우도 많다.

족보를 보는 것은 부정 행위(cheating)인가? 위의 사례처럼 부정행위로 간주하여 제재를 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모든 기출을 공개하고 지식 함양을 위해 풀 것을 권장하는 교수도 많으며, 서양권에서도 이는 관점이 갈리는 이슈이다. 예를 들면 다음 링크글의 의견들을 보라.(영어 주의)
# # 학생이 기출 보는 게 왜 치팅이야?선생/교수란 인간들이 매년 똑같은 거 내면서 월급 날로 먹는게 치팅이지


의과대학 공부를 하는 경우 족보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여겨진다. 물론 족보를 보면서 공부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나 그 엄청난 양을 족보 없이 헤쳐나가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학교마다 족보의 계승 방식도 천차만별. 학생회의 주도로 족보를 제작해서 매 학년 올라갈때마다 제작비를 거둬 공동구매하는 곳도 있는 반면 동아리나 고등학교 동문 등의 소위 '라인'을 따라 아는 사람들끼리 몰래몰래 전수해주는 곳도 있다. 교수님들의 족보에 대한 반응도 천지 차이인데 일단 대체로 의대 출신 교수들은 다는 아니지만 족보의 존재를 잘 알고 있기도 하고 본인의 경험 상 족보 없이 공부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족보 이용을 딱히 문제 삼지 않으나 의대 출신이 아닌 교수들은 이런 방식을 굉장히 탐탁지 않게 여긴다. 어느 쪽이든 문제를 낼 때 학생들의 족보 사용을 고려해서 내기는 한다.[16] '공식적으로는' 교수 앞에서 족보를 보이거나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하지만 진짜로 족보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교수는 없다고 봐도 된다. 어떤 교수는 족보대로 문제가 나오는 이유는 문제 내기가 귀찮아서가 아니라 실제로 중요한 내용이 그 내용이기 때문이라고도 하는 등 오히려 학생들이 족보 내용만큼은 확실히 기억한다는 점을 이용하려는 경우도 있는 듯.

꼭 의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취업을 위해 국가시험을 치뤄야만하는 학과의 경우에는, 그 국가시험의 족보를 만드는 경우가 대다수다. 간호사나 의료기사 등 국가시험 합격이 곧 취업으로 이어지는 학과에서는, 학생 개인이든 학과 자체를 위해서라도 족보는 거의 필수적이다.[17]

의대, 간호대를 비롯한 의학계열 한정으로 족보라는 말 대신 야마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학교에 따라 다른 말을 쓰는데 지방 쪽으로 갈수록 야마라는 말이 널리 쓰이는 듯. 시간이 갈수록 야마라는 말은 점점 없어지는 추세이다. 교수들이 족보에 질색하는 모 학교의 경우 아예 족보를 부르는 은어를 매년 바꿔가며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예를 들자면 김치(기출)라거나 rc(역시 기출)라거나

고등학교 내신이나 수능도 족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립학교 내신의 경우 5년마다 교사가 바뀌긴 하나 웬만하면 전임자와 비슷하게 내려고 하니 중요하다. 수능은 출제경향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필수.

2.4. 특정 집단의 역사를 가리키는 속어[편집]

이런 경우는 보통은 특정 집단이 해체되거나 재구성, 합병되는 과정에서 어느 단체의 역사를 계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벌어지는 속어로 자주 사용된다. 보통 이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논쟁은 족보싸움이라고 부른다. 한국인의 정통성을 좋아하는 종특과 이왕이면 더 오래된 단체의 역사를 계승하자는 생각, 또는 특정 집단의 흑역사는 계승하지 않겠다는 생각, 기타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정말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진다.

대표적으로 자주 거론되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개족보 문서도 참조.

3. 영화[편집]

임권택 감독의 1978년작 영화. 자세한 것은 족보(영화) 참고.

[1] 대부분의 족보에는 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다. 심지어 어린 시절에는 족보에 올라와 있다가도 딸이 결혼해서 출가하자 족보에서 빠져버리는 경우도 있다! 아직 떡밥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한국의 '전통적인' 성차별 중 하나.[2] 하지만 조선정부의 재정은 줄어들었다.[3] 그리고 이후에는 디지털 파일(PDF, HWP,.DOC)이나 CD(DVD)-ROM같은 물리매체로 나온다.[4] 현재 선산 김씨 점필재공파의 파조(派祖)로 모셔지기도 한다.[5] 일선 김씨라고도 하는데 선산의 옛 지명이 일선이다.[6] 고려 초기 왕건이 후백제를 칠 때 종군해서 왕건에게 활을 하사받고 선산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하는 인물이다.[7] 비조라는 단어는 코 비를 쓰는데 인간이 태내에서 가장 먼저 생성되는 기관이 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8] 비슷한 경우가 중국에도 있는데 북송의 명장으로 알려진 적청의 경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잘 보이려고 적청이 당 측천무후 시대의 명신이었던 적인걸의 후손인 것처럼 꾸민 계보도를 가져와 보여줬더니 적청은 "개소리 집어쳐! 우리 집안은 평민이었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 이게 어디서 약을 팔어" 하면서 받지 않았다는 일화가 《몽계필담》에 남아 있다.[9] 효령대군파 종가가 가세가 기울자 1980년대에 한 방계 친척이 당시 돈으로 10억을 주고 족보를 사겠다고 제안했다. 그럼에도 종가에서는 절대 불가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 은마아파트 1채 값이 1,500~2천만 원 상당이었음을 고려하면 현재 가치로 수백억 원이나 되는 거액이다!!![10]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역사학자로 《동사강목》을 저술한 안정복 역시 청주 한씨 족보의 해당 기술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11] 조선 후기에 향리층들이 모여 지은 《연조귀감(椽曹龜鑑)》이라는 책에 인용된 향리들의 족보 가운데 《흥양이씨보(興陽李氏譜)》의 "신라 말기에 귀족의 후예들이 다투어 호무(豪武)를 써서 주(州)와 현(縣)을 제패하였다"라는 기술이 인용되어 있었는데, 이기백은 이 기록이 신라 말기 지방의 세력가 즉 호족이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으로 너무도 당시의 실정을 잘 드러내고 있는 기록이라고 평가했다.[12] 진주 소씨는 신라의 상대등 알천의 후손을 칭하는 집안으로, 이기백에 따르면 1979년에 진주 소씨 서울 종친회에서 사람이 찾아와 종친회보(宗親會報)에 알천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알천은 신라의 왕족이고 김씨이므로 소씨일 수가 없다는 생각에 적당히 거절하여 보냈는데, 나중에야 신라 말에 김해(金海)의 호족이었던 김율희(金律熙)가 소율희(蘇律熙)라고도 기록되기도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金은 음이 '김' · '금'이지만 그 뜻은 '쇠'이기 때문에 蘇라는 글자와 서로 통용되어 쓰일 수 있을 뿐 아니라, 8세기 원성왕과 왕위를 다투다 패한 왕족 김주원이 강릉으로 낙향한 것처럼 실제로 김춘추와의 왕위 계승을 두고 대립하기도 했던 알천이 김춘추에게 패한 뒤 지방인 진주로 낙향했을 가능성을 유추해내기에 이르렀다.[13] 무려 700년 전 고려 시대의 인물인 허유전(1243∼1323)이었다.[14] 요새는 이딴 거 안 따지고 계속 상호존대를 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이 쪽이 정상.[15] 적어도 교과서 5p까지 나가고 테니스나 치다가 가르치지도 않는 내용을 시험에 내지는 않는다.[16] 일부러 깔아주는 점수로 주기 위해 몇 문제는 그대로 내고 변별을 위해 몇 문제는 새로 내는 식으로. 즉 족보를 한 두번이라도 보면 유급은 안 한다[17] 특히 의료계의 면허시험(국가시험)은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인데다가, 일정 점수만 넘었다면 몇명이던 합격이 되므로 굳이 경쟁을 조장할 이유가 없으니 족보의 존재를 막을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서는 권장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