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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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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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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 불가능)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중 "그 관할 구역 안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투표권자 및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 제2조에 따른 재외국민으로서 같은 법 제6조에 따른 국내거소신고가 되어 있는 투표권자" 부분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2015년 12월 31일까지 입법자가 개정할 때 까지 적용하는 전제였으나 개정하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


1. 개요2. 배경 -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3. 선거과정4. 결과5. 분석
5.1. 민주당계 정당의 표분산5.2. 한나라당 & 새천년민주당은 왜 탄핵을 했는가?5.3. 엇갈린 운명 :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
6. 국회의원 목록7. 트리비아
7.1. 사실상 마지막 대규모 낙선 운동 선거7.2. 출구조사와 결과가 다르게 나온 지역구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SBS 선거방송 광고. 저 당시는 탄핵 정국이었기 때문에 선거방송 광고에 대해서는 특히 중립성에 만전을 기울였다.

1. 개요[편집]

민주화 이후 선거에 의한 집권여당 첫 과반의석 획득
열린우리당 최고의 순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2004년 4월 15일[1]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60.6%였다.

2. 배경 -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편집]

노무현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 탈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한나라당불법 대선 자금 수수, 그리고 결정적으로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소추안 처리까지 치러지면서 선거의 쟁점이 되고 만다.

과거 지역구 투표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정하던 방식을 없애고 지역구 투표와 비례대표 투표를 분리한 1인 2표제를 최초로 도입했다.

3. 선거과정[편집]

열린우리당은 정동영이 당의장에 선출되면서 새천년민주당의 지지율을 따라잡았고,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근소한 차이지만 한나라당도 제치고 1위가 되는 등 최소한 총선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는 거둘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거기다 잘하면 제1당도 차지할지 모른다는 희망섞인 전망이 나오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새천년민주당은 아직 입당도 안한 대통령의 친 열린우리당 발언을[2] 가지고 선거법과 선거 공정 위반으로 탄핵을 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고 한나라당이 이에 동조하면서 선거 약 한달 전 그 유명한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하지만 정작 3월 가결된 탄핵 과정을 보면 소수의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다수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이 밀어내고 힘의 논리로 탄핵결의안을 처리하는 그야말로 다수의 횡포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론이 "그래, 니들도 힘의 다수결 논리에 한 번 똑같이 당해봐라 이 개객기들아!!!" 라고 외치며 격렬한 분노를 터뜨리게 돼 17대 총선 선거판 자체가 말 그대로 탄핵 선거의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들어가게 되었다. 특히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는 걸 막기 위해 격렬하게 몸싸움까지 벌여가며 저지했지만 끝내 숫자 싸움에서 밀리며 끌려나가며[3] 탄핵소추안 통과를 막지 못했고 열린우리당 의원 전원이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국민들을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하는 영상이 나가자 더욱 열린우리당을 향한 동정 여론이 강해졌다.

그리고 이런 거국적인 비판 여론에 힘입어 열린우리당의 지지도가 더 치솟으면서 과반수가 확실시되는 상황이 되고 만다.[4] 여기에 마지막에 개헌을 노리고 합류한 자민련은 가장 강력한 벼락을 맞았다. TV토론회에서 당시 민주노동당 소속 노회찬 후보가 자민련 측 참석 패널의 공격을 받자 "가만히 좀 계십시오. 지금 자민련 상대할 시간 없습니다. 자민련은 어차피 선거 끝나면 없어질 당 아닙니까"라고 데꿀멍시켰을 정도.안습[5]

그러나 이후 한나라당이 당시 박근혜 대표를 앞세운 천막당사 선거운동을 펼치며 뒷심을 발휘하기 시작했고,[6][7] 여기에 정동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의 노인들은 투표하지 말라는 뉘앙스의 노인 폄하 발언이 구설수에 오르면서[8] 선거판이 막판 갈수록 요동친다. 이 여파로 정동영은 책임을 지고 선대 위원장직과 비례대표 후보에서 사퇴했는데, 어쨌든 이 노인폄하 발언이 탄핵 역풍을 다소 잠잠해지게 만들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당시 한나라당이 이 발언 덕분에 본의아니게 어부지리를 취하긴 했다. 정확히 8년후 벌어진 김용민 막말사태와도 비견된다 선거기간엔 입조심이 상책

4. 결과[편집]

파일:South_Korean_Legislative_Election_2004.svg.png
파일:South_Korean_Legislative_Election_2004_districts.svg.png

제17대국회의원 선거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자유민주연합

민주노동당

국민통합21

기타

합계

서울

16

0

32

0

0

0

0

48

인천

3

0

9

0

0

0

0

12

경기

14

0

35

0

0

0

0

49

강원

6

0

2

0

0

0

0

8

대전

0

0

6

0

0

0

0

6

충남

1

0

5

4

0

0

0

10

충북

0

0

8

0

0

0

0

8

광주

0

0

7

0

0

0

0

7

전남

0

5

7

0

0

0

1

13

전북

0

0

11

0

0

0

0

11

부산

17

0

1

0

0

0

0

18

대구

12

0

0

0

0

0

0

12

울산

3

0

1

0

1

1

0

6

경남

14

0

2

0

1

0

0

17

경북

14

0

0

0

0

0

1

15

제주

0

0

3

0

0

0

0

3

지역구

100

5

129

4

2

1

2

243

비례

21

4

23

0

8

0

56

총합

121

9

152

4

10

1

2

299

비례대표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인

한나라당

7,613,660

35.8%

21

새천년민주당

1,510,178

7.1%

4

열린우리당

8,145,814

38.3%

23

자유민주연합

600,462

2.8%

0

국민통합21

119,746

0.6%

0

가자희망2080

31,501

0.15%

0

민주공화당

24,360

0.11%

0

구국총연합

9,330

0.04%

0

기독당

228,837

1.08%

0

노년권익보호당

37,084

0.17%

0

녹색사민당

103,845

0.49%

0

민주노동당

2,774,061

13.0%

8

민주화합당

39,785

0.19%

0

사회당

47,311

0.22%

0

총합

21,285,984

100.0%

56

5. 분석[편집]


KBS 출구조사 영상. 역시 총선 출구조사답게(?) 오차 범위내에서 가까스로 맞히긴 했다만 들쭉날쭉하다. 화질이 구려도 이해하자 SBS 출구조사 영상 당시 KBS는 SBS와 공동 출구조사를 진행했는데, SBS는 같은 조사를 가지고도 오차 범위를 다르게 잡아, KBS와 달리 빗나가고 말았다.

MBC 출구조사 영상. 실제 의석과 달리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결과만 빗나갔다.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확보하면서 당초 출구조사보단 좀 못한 턱걸이 과반확보를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당계 정당 최초로 선거에서 집권당으로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다. 선거 초반 탄핵 역풍을 타고 최대 200석 이상 차지할 것이라는 예상에 비해선 결과가 다소 신승이었는데, 상술했듯 선거 몇일전 터진 정동영 전 의장의 노인폄하발언으로 노인층이 이탈한 점이 컸다는 분석들이 많았다.[9]

그럼에도 선거 당일 출구조사에서도 170석대는 확보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기에[10] 152석을 확보한건 기쁘면서도 약간 아쉽기도 한 결과였다. 비례대표 선거 결과에서도 보이듯 민주당계 정당표가 열린우리당/새천년민주당/민주노동당으로 뿔뿔이 갈린 탓도 한 몫 한듯.

한나라당은 박근혜조차 80~100석 정도만 차지해도 좋겠다고 말할 지경이었던 당초 예상보단 선전했다는 평. 121석으로 개헌저지선은 지켜냈다. 세부적으론 호서호남, 제주 지방에서 참패하며 털렸지만, 기존 텃밭이던 영남권을 사수하는데 성공했고[11], 수도권[12]과 강원도 지역에서도 생각보다 선전했다.

새천년민주당자민련은 말그대로 폭망했다.(...)[13] 지지기반인 전남과 충남[14]에서 지역구 5석, 4석을 힘겹게 확보하긴 했지만, 비례대표 득표율에선 민주노동당한테조차 밀리며 원내 교섭단체도 못 만들 정도로 과거에 비해 처참한 군소정당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특히 자민련의 비례대표 1번[15]이었던 김종필은 자민련이 득표 3%에 미달해 낙선하고 이 충격으로 길고 길었던 정치생명을 끝내고 정계에서 은퇴한다.[16] 그리고 그 빈자리는 공교롭게도 민주노동당 비례 8번인 노회찬 의원이 차지했다.

민주노동당은 지역구에선 울산과 경남 1석씩을 얻으며 총 2석을 확보하는데 그쳤지만, 비례대표에서 무려 13%의 정당 지지율을 얻으며 8석을 챙겨 총 10석으로 원내3당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 외 정몽준 의원의 국민통합21이 울산 동구에서 1석을 얻지만 당은 얼마 안가 사라진다. 참고로 울산 동구는 현대중공업 및 그 협력사에서 근무하는 근로자와 가족들이 인구의 절반을 넘는 특이한 곳으로 정몽준이 유리할 수밖에 없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한국노총계의 녹색사민당도 출마한 선거였지만 1% 득표에도 못미치는 쓴 맛을 맛보았다. 그와중에 가까스로 1% 넘긴 기독당

5.1. 민주당계 정당의 표분산[편집]

사실 간과하기 쉬워서 그렇지 열린우리당의 예상 밖 부진(?)엔 민주당계 정당표가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으로 갈렸고, 게다가 민주노동당이 새로운 정치를 이끌 진보측 대안정당으로 일어난 점이 컸다. 실제 꽤 많은 민주당계 정당 후보들이 낙선했는데, 특히 서울이 심했다. 한나라당이 서울에서 16석씩이나 건진건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표분산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당시 민주당계 정당 및 진보정당의 표 분산으로 다른 후보가 당선된 선거구는 다음과 같다.

  • 우리당 + 민주당 (+20, 한나라 -18, 자민련 -1, 무소속 -1)

    • 서울 (10) : 종로, 중, 용산, 동대문 을, 은평 을, 서대문 을, 영등포 갑, 영등포 을, 송파 을, 강동 갑

    • 경기 (5) : 광명 을, 고양 일산 을, 이천/여주, 김포, 광주

    • 강원 (2) : 속초/고성/양양, 철원/화천/양구/인제

    • 충남 (1) : 당진(자민련)

    • 전남 (1) : 나주/화순(무소속)

    • 경남 (1) : 양산

  • 우리당 + 민주노동당 (한나라 -9)

    • 인천 (2) : 연수, 남동 갑

    • 강원 (2) : 춘천, 원주

    • 부산 (1) : 영도

    • 경남 (2) : 창원 갑, 거제

    • 울산 (2) : 중, 남 을

  • 우리당 + 민주당 + 민주노동당 (한나라 -2)

    • 인천 (1) : 서/강화 을

    • 경기 (1) : 의왕/과천


이를 모두 반영하면 한나라당은 무려 29석을 손해 봐서 100석에도 미달하고, 자민련은 4석에서 3석으로 줄어든다. 물론 단일화가 된다고 해서 그 표가 모두 단일화 후보로 간다는 보장은 없지만 일단 득표수로 보아선 분산 효과가 엄청났다는 것. 열린우리당의 단독과반 승리에 묻혀서 그렇지 이때 한나라당이 얻은 어부지리는 엄청났다. 탄핵 사태를 불러온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된다"가 결과론적으론 어느정도 맞아떨어진 것이다.

특히 서울의 경우 열린우리당+민주당 후보의 표를 합칠 경우 한나라당은 겨우 6개 선거구에서밖에 못이겼는데, 그 6개 중에서도 원희룡의 양천을 제외하면 다 강남3구 지역이니 전멸을 당한거나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3석을 건졌던 인천도 우리당, 민주당, 민노당까지 합칠 경우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전멸이다. 또한 강원도에서는 무려 8석 중에 6석을 가져가서, 여기서도 제1당이 되었을 것이다.

무려 40석을 차지하는 부산경남권에서 열린우리당은 고작 3석밖에 못 얻었다. 그러나 반한나라 연대가 이루어졌다면 6석을 더 얻어서 9석으로 20대 총선과 버금가는 의석을 만들고, 낙동강 벨트는 더 빨리 형성되었을 것이다. 특히 이중에서 의창구(창원시 갑), 울산광역시 중구, 남구 을, 영도구는 3당합당 이후 비민정계 정당이 한번도 못 이긴 곳[17]였다. 이렇게 결과가 뒤집힌 지역은 노동계 지지세가 강한 지역으로, 단일화가 이루어졌다면 실제 선거에선 지역구 의석을 2석 획득한 민주노동당에게도 큰 이익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김정길후보도 국회 생활을 16년만에 했을 것이다.

게다가 단순히 의석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승부가 갈린 선거구의 당선자들이 하나같이 네임드들이라는 것도 충격이 될 수 있었다. 이재오(서울 은평 을), 정두언(서울 서대문 을), 홍준표(서울 동대문 을), 황우여(인천 연수), 김기춘(경남 거제), 김형오(부산 영도), 안상수(경기 의왕/과천), 전재희(경기 광명 을) 같은 경우 이 선거에서 줄줄이 낙선할 뻔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남경필이나 원희룡, 김문수는 너끈히 과반 득표를 하고, 자민련의 이인제도 안정적으로 당선되는 등 지역구를 잘 관리한 덕을 본 의원들도 일부 있었다.

더구나 저런 상황에서 표가 뭉쳐올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이 저렇게 표를 많이 얻은 것은 양당에 대한 비판과 참신함을 인정 받아서 였으며, 열린우리당 역시 호남 이미지를 탈색하며 보수표를 상당 부분 얻어온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당시엔 민주당계와 노동 진보세력은 하나로 뭉뚱그리는 게 불가능했다. 여당 열린우리당 역시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원하여 한나라당을 막아낸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던 시기였다.

5.2. 한나라당 & 새천년민주당은 왜 탄핵을 했는가?[편집]

지지층 결집을 위해 감행한 정치적 승부수가 오히려 자충수가 되었다. 사실 탄핵안 통과 당일까지만 해도,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 지도부는 탄핵의 정당성을 강조함은 물론이요, 탄핵으로 인해 지지층이 오히려 더 결집할 것이라 생각했다. 대통령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만이 (특히 대통령을 당선시킨 새천년민주당에서) 심했을 뿐더러, 이런 국회의 강한 반감을 가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향후 여론의 지지와 지지층의 결집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18] 그렇기에 선거를 고작 한 달 앞두고 탄핵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그러나 대착각이었다. 대통령 탄핵안은 모든 이슈를 묻어버리고 17대 총선을 탄핵심판 선거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지지층 결집은커녕, 지지층이 붕괴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특히 지지층 붕괴는 열린우리당과 지역기반(호남 및 수도권) 및 지지세대(20~40대)를 공유하고 있던 새천년민주당에 치명타였다. 한나라당은 그래도 영남이라는 굳건한 지역기반덕에 새천년민주당만큼의 괴멸은 피했다.

결과론적이지만, 선거전략으로서의 탄핵은 치명적인 실수였던 셈. 탄핵이 지나치게 정략적이고 선거 목적이라는 것은 일반 국민들이 보기에도 분명했다. 대통령의 선거중립 위반이 탄핵의 주된 사유였고, 이는 헌법재판소에서도 위법사항이 맞다고 인정은 했지만, 아직 입당도 안한 대통령이 사실상 자당 지지해달라는 말 한마디했다고 바로 탄핵으로 가는 것을 국민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제 막 임기 2년차를 시작한 대통령을 끌어내리려고 탄핵까지 하고, 여기에 탄핵안 통과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의장석 점거 농성을 하다가 야당의원과 국회 경위들에게 하나둘 끌려나가며 절규하는 모습은 대중의 동정심 + 야당연합에 대한 분노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5.3. 엇갈린 운명 :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편집]

똑같이 탄핵을 주도했지만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의 운명은 너무나 판이했다. 한나라당은 121석으로 제1야당의 위치를 굳건히 하며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기사회생한 반면, 새천년민주당은 민주노동당한테까지 밀리며 아예 존재감조차 희미한 의석 9석의 제3야당, 군소정당으로 몰락했다. 이러한 상반된 결과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영남, 장년층 기반의 한나라당과 호남, 청년층 기반의 새천년민주당

두 당의 운명을 결정지은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탄핵 후 3월 말엽까지는 한나라당도 영남, 장년층이라는 지지층이 개발살나긴 마찬가지였으나 본격적으로 총선정국으로 전환되면서 정동영의 노인 폄하 발언으로 인해 지지층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나라당이 처음 탄핵안을 통과시키면서 기대한 지지층의 대대적 결집과는 거리가 안드로메다만큼은 있었지만(...) 의석수 50~60석 내외의 정당으로 몰락할 뻔한 상황에 비하면 감지덕지였다.

때문에 열린우리당에게 절반이나 뺏길 우려까지 나오던 TK 의석을 무소속에게 1석 내준 걸 제외하면 모두 사수해냈고, PK에서도 부산 1석, 경남 3석, 울산 3석만을 다른 정당에게 내주며 선전했다. 부산의 1석은 무소속 박종웅 후보 덕분에 한나라당 표가 분산된 탓이 컸고,[19] 경남의 3석 중 2석은 김해로 노 대통령의 고향 버프를 꽤 받았다.[20] 남은 1석은 창원의 성산구였는데, 이 지역은 출마한 후보가 민노당 권영길 후보로 지난 대선 때 꽤 화제를 모으며 전국구 네임드가 된 덕이 컸다. 울산의 3석 중에서도 1석은 88년 이래 지역구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정몽준 후보였으니 울산에서 잃은 의석은 실제로는 2석에 불과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정동영의 막말 파문 이후 영남과 강남3구 등 보수강세지역의 장노년층 표가 대대적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의 강세지역에 속하는 통영시-고성군, 밀양시-창녕군, 의령군-함안군-합천군에서도 열린우리당 후보가 40%를 얻었다는 걸 생각하면, 영남권에서도 겨우 겨우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지만[21], 소선거구제의 특성과 영남(68석), 특히 부산경남의 의석수(41석)를 생각해 보면, 사실상 기사회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대로 새천년민주당은 최대 지지기반인 호남을 송두리채 빼앗겼다. 전북과 광주에서는 단 1석도 건지지 못했고 전남 13석 중에서도 5석(그것도 다 농어촌지역구)에 그치는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 영남을 지켜 기본적인 의석을 바탕에 깔았던 한나라당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그리고 호남 외 지역구에서는 단 1석도 못 얻었다. 탄핵 역풍으로 인해 비호남 지역의 민주당계 지지자들이 대부분 등을 돌려버린 것이다.

호남 다음가는 민주당의 전략지역인 서울의 결과만 봐도 처참했다.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한 대부분의 후보들이 선거비 반액 보전의 기준인 10%에도 못미치는 한 자리수 득표에 그쳤다. 지역 구청장까지 역임한 용산 선거구 성장현 후보가 8%대 득표에 그쳤을 정도다. 그나마 예전부터 지역구 관리를 열심히 했거나 이름이 높았던 몇몇 후보들이 선전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추미애[22](광진 을, 30.08%) 말고는 30%대 득표자도 없으며, 20%대로 기준을 낮춰도 함승희(노원 갑, 26.72%), 김민석(영등포 갑, 20.88%), 김성순(송파 병, 25.14%) 3명이 전부였다.

2. 박근혜로 대동단결 한나라당, 옥새파동 분열의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의 경우 그래도 비교적 조기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물론 6차 전당대회는 탄핵과 별개로 최병렬 대표의 사퇴로 인해 3월 18일에 치뤄지기로 예고되어 있었지만, 탄핵으로 인해 이 전당대회는 그야말로 당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순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전당대회는 5일 뒤로 연기되어 23일에 치뤄졌는데, 여기서 한나라당은 당 원내총무로서 탄핵에 앞장섰던 홍사덕 말고 지도부에 참여하지 않았던 박근혜를 당 대표에 취임시킨다.

이 선택은 사실상 국민들에게 탄핵에 대한 사과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 체제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천막당사, 반성하는 CF 등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를 기반으로 총선에서 단일대오를 구축할 수 있었다.

반면, 새천년민주당은 탄핵 이전부터 지속된 당내 갈등이 계속되어 막장으로 가고 있었다.(...) 신당파가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으로 떨어져 나간 상황에서도, 민주당은 동교동 중심의 구주류와 추미애 중심의 개혁파가 계속해서 부딪치고 있었다. 탄핵 이후 이 갈등은 더더욱 심각해져서 당 대표 조순형의 공천장과, 선거대책위원장 추미애의 공천장이 같이 선관위에 제출(...)되는 개막장의 극치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개혁파에 속한 당직자가 몰래 당 직인을 빼돌려서 추미애측에 건네줘 이뤄진 사건(...)으로 구주류는 기겁하여 허겁지겁 새로운 직인을 만들고 직인변경신청서를 선관위에 제출해 기존 직인과, 이 직인이 찍힌 추미애측의 공천장을 무력화시켰다. 2016년 김무성의 옥새런과 비교해봐도 결코 뒤지지 않는 다이내믹한 전개.[23]

이런 상황에서 당 대표 조순형은 느닷없이 지역감정을 타파하겠다며 대구에 출마해버린다.(...) 당을 선거대책위원장인 추미애에게 맡기고 자기는 사실상 도망간 셈.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선거를 치를 수 있을 턱이...덕분에 추미애는 당을 살리겠답시고 선거운동 기간 동안 광주에서 사죄의 3보1배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당시엔 차라리 그 시간에 본인 선거구에서 유세를 했으면 본인은 살지 않았을까...라는 말도 있었다. 여담으로 이때 기억이 악몽인지 추미애 의원은 노 대통령 탄핵안에 찬성한게 자신의 정치 인생 중 가장 후회되는 일이었다고 훗날 회고하기도 했다.

6. 국회의원 목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17대 국회의원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트리비아[편집]

총선이 끝나고 약 1달 후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에 대한 심판을 내리게 되는데 노 대통령의 일부 발언이 위법한 것은 인정되지만 탄핵될 정도의 사유는 아니라고 판단하며 탄핵 기각 판결을 내렸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무소속 당선자가 가장 적었던 선거였다. 경북, 전남 각각 1명으로 총 2명 뿐이었는데 흥미롭게도 이때 무소속 신국환, 최인기 의원은 서울법대 동문(신 의원이 3년 선배)이자 고시(행시 4회) 동기라는 인연도 있었다. 이후 국민통합21정몽준 의원이 당선 뒤 당을 해체했고, 이로서 무소속 당선자는 3명이 되었다. 참고로 경북 문경시/예천군의 무소속 당선자 신국환 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과거 자유민주연합으로 지역에서 3번(총선 2회, 재보궐 1회) 출마했던 경력이 있었는데, 자유민주연합이 공중분해되면서 2005년 10월 창당된 국민중심당 공동대표가 되었다가 2007년 탈당, 중도개혁통합신당(대통합민주신당의 전신)에 합류 후 정계를 은퇴했다.

열린우리당 안티진영에선 이후 이 당시 탄핵역풍의 영향으로 대거 당선된 열린우리당 초선의원을 탄돌이라며 낮추어 부르기도 했다.

전라남도 지역은 당시 열린우리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그야말로 진검승부를 벌인 선거판이었다. 결과는 5:7로 열린우리당 승. 여담으로 목포에서는 열린우리당이 호남의 대표 정치인인 김대중과 동명이인인 김대중 전 목포시의회 의장을 공천했으나 낙선했다. DJ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새천년민주당은 자신들의 보스격인 DJ에게 지지를 바랬지만 DJ는 중립을 지키며 사실상 새천년민주당을 외면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열린우리당 지지를 보이는듯한 모션을 취했다. 대북송금특검 논란으로 참여정부와 사이가 어정쩡해 있던 상황에서 측근들을 외면하는 대신 화합을 도모한 셈. 실제 사망 직전까지 했던 얘기도 절대 당내에서 (영호남) 분열하지 말고 단합하라는 메시지였고. 하지만 이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다시 합당하고 DJ가 서거한 이후 당내 갈등이 곪아가다가 20대 총선 목전에 안철수와 호남계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민주당계 정당은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으로 갈라서게 된다.

7.1. 사실상 마지막 대규모 낙선 운동 선거[편집]

선거법 개정으로 낙선 운동이 허가되면서 16대 총선부터 시작된 낙천, 낙선 운동은 이번 선거에도 꾸준히 지속되었다. 2004년 총선시민연대는 2월 5일 1차 낙천, 낙선 운동을 발표하였다. 1차 기준에 따르면 총 66명이 낙천, 낙선 대상자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탄핵 정국이 되면서 탄핵 참여자들은 모두(!) 낙선 대상자가 되어버린다. 그야말로 시민단체가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 한쪽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준 것이기 때문에 일부 논란을 빚기도 했다.물론 탄핵 자체가 엄청난 병크이긴 했지만 특히 새천년민주당의 김상현 의원 같은 경우엔 본인이 직접 시민단체에 방문하여 선거법 위반으로 자신을 구태 정치인으로 몰아간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을 정도.

이러한 낙선 운동은 열린우리당의 승리로 인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후 도리어 시민단체들이 여당 정책에 각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사실 이게 올바른 거지만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광범위한 낙천, 낙선 운동은 좀처럼 보기 힘들어지게 된다.

7.2. 출구조사와 결과가 다르게 나온 지역구[편집]


17대 총선 당시 출구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 결과

방송사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국민통합21

무소속

KBS - SBS

172[24]

101[25]

11[26]

9[27]

3[28]

1석[29]

2석[30]

MBC

155~171

101~115

9~12

7~11

3~6

2~4[31]


17대 총선에서 KBS-SBS 출구조사와 실제 당선자가 바뀐 지역은 아래와 같다. (앞쪽이 출구조사 1위, 뒤쪽은 실제 당선자) 총 19개 지역. 굵은 글씨는 출구조사에서 경합으로 표시되지 않았는데도 결과가 뒤집힌 지역. 참고로 17대 총선 당시 단독 출구조사를 실시했던 MBC는 경합지역 1, 2위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172석에서 152석으로 줄었으며 1석 자민련을 제외한 19석은 모두 한나라당이 가져갔다.

[1] 참고로 선거일 당일이 으레 선거가 치러지는 수요일이 아니라 목요일인데, 이는 당해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어 선거일이 국회의원 임기만료일전 50일 이후 첫번째 목요일에서 수요일로 개정되었기 때문. 이전의 총선들은 하나같이 목요일이었다.[2]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된다'고 말했다.[3] 참고로 이때 유시민 의원은 사지가 잡혀 끌려나갔을 정도였다. 이해찬 의원도 양팔을 붙잡히며 끌려나갔다.[4] 손석희 항목에서 "알면서 왜 하셨습니까?" 일화가 흥미롭다. 다만 정확한 발언은 "그렇다면 안하면 되지 않습니까?"였다. 항목 참조.[5] 여담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이때부터 노회찬 의원이 각종 토론 프로에 나오며 촌철살인과 함께 일명 대중을 웃기는 유머러스한 컨셉의 토론으로 인기를 끌게 되고 이후 대중적인 인지도의 진보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게 된다.[6] 이때 1당 독재를 막아달라는 의미로 노란색과 파란색이 균형을 이루는 일명 시소 TV광고가 나오기도 했고, 아예 대놓고 잘못했으니 봐달라고 사정하는(...) 일명 회초리 광고도 유명했다. 심지어 당 내부에선 김정일과 박근혜가 만나는 남북정상회담삘의 광고까지 고려했다니(실제로 2002년에 16대 대선을 앞두고 개인적으로 만났다) 당시의 급박함을 알 수 있다.[7] 근데 재미있는 사실은 차떼기 항목에도 나오지만 이 천막당사도 일종의 정치쇼라고 볼 수 있는게, 당시 한나라당은 천막당사를 차린 구 중소기업전시관 터 자리를 50일 빌리고 전체 임대료로 4200만원을 주었는데, 당시 열린우리당의 여의도 당사 건물의 임대료가 월 2500만원이었다. 즉, 계산해보면 열린우리당은 하루 임대료가 83만 3천원 정도지만 한나라당은 84만원으로 더 비싼 셈. 물론 저 돈은 국민의 세금이었다.(...)[8] 이때 부산 서구에 출마했던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 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선거운동을 도저히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선발대로 나간 선거운동원들이 민심이 난리가 나 말도 못 붙이게 생겼다고 다급하게 전했지만 그래도 설마하는 마음에 연설을 시작했는데, 날아오는 배추와 욕설, 물세례까지 받고는 중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개별적으로 명함을 돌리고 있으니 "난 60대야!"라면서 면전에서 명함을 찢어버리는 사람, "아비도 모르는 XX새끼!"라면서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고, 젊은이들은 젊은이대로 자기 부모를 화나게 했다며 지지할 수 없다고 외면했다. 결국 시장 바닥에 아내와 같이 무릎을 꿇고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하고 빌어야 했다. 결국 그는 낙선하고 그 뒤 정계를 은퇴했다.(출처: <너무 다른, 너무 같은 두 남자 이야기>)[9] 다만 노인 폄하 발언은 한나라당 고정표들이 남에게 이야기 할 명분일 뿐, 노인 발언이 없었어도 한나라당 고정투표층은 한나라당 찍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래도 날려먹은 표가 아예 없진 않아보인다.[10] 물론 1996년 총선과 2000년 총선 출구조사와는 다르게 범위를 넒게 표시하기는 했다. 하지만 범위가 너무 넓어 의미가 없는 KBS 조사(142-188석)를 뺀 나머지 조사는 여전히 빗나갔다는게 함정.(...) MBC 조사는 155-171석, SBS 조사는 157-182석으로 나왔다.[11] 부산 사하구 을, 경남 김해갑/을, 창원시 을(성산구), 울산 북구,울주군을 빼고 다 싹쓸이 했다. [12] 송파구 병을 제외한 강남 3구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13] 심지어 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되는 추미애마저도 이 선거에서 낙선했을 정도였다.[14] 원래부터 충북은 자민련이 큰 재미를 못봤다.[15] 이 시점에서 비례대표 남녀 비율은 50%만 채우면 되었다. 그래서 자민련은 상위순번 대부분을 남성으로, 하위순번 대부분을 여성으로 채워서 50 대 50을 맞췄다. 그래서 선거법이 다시 개정되어서 '비례대표의 홀수번호를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되어 있다.[16] 참고로 이때 김종필이 9선을 했는데, 이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최다선이다. 요번만 넘겼으면 10선으로 YS를 넘을 수 있었는데[17] 특히 영도구에서는 김정길 후보가 김형오 후보에게 단 3%밖에 안 밀렸는데, 이것은 당시 영도구에서 치른 총선 중 역대 최저 득표율차였다.[18] 당시 국민 여론은 탄핵 반대가 60~70% 수준이었다.[19] 이렇게 당선된게 이후 이 지역구(사하구)에서 다선을 하는 조경태 의원이다.[20] 당시 김해는 경남의 정당비례득표에서 유일하게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을 앞선 곳이었다.[21] 대구,경북 권에서는 30%를 넘는 곳이 고령-성주-칠곡, 구미시 을, 영주시, 포항시 남구밖에 없었던 반면, 부경권은 마산시 갑(합포구)나, 진해구, 울산광역시 동구를 제외하면, 열린우리당 혹은 민주노동당 후보가 기본으로 30% 넘게 받았다.[22] 출생은 대구시 내당1동에서 했다.[23] 참고로 김무성의 옥새런 이후에 치른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완패했다. 물론 영남권에서는 마찬가지로 새누리당의 우세였지만, 대구에서 2석을 빼앗기고, 부울경에서는 무려 10석(...)을 빼앗기는 대참사를 맛보고, 이후 19대 대선때는 부산, 울산, 동부경남에서 완전히 참패했다, 반면 문재인으로 대동단결한 더불어민주당은 1위 정당이 되었고, 박근혜(...) 탄핵 풍에 힘입어 마침내 대경권+경남을 제외한 전지역에서 승리함으로써 여당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여당의 대표가 하필 또 추미애(...).[24] KBS : 142~188 / SBS : 157~182 [25] KBS : 87~129 / SBS : 92~114[26] KBS : 11~11 / SBS : 9~12[27] KBS : 7~9 / SBS : 7~13[28] KBS : 3~4 / SBS : 2~7[29] 1석이 확실이었으며 SBS는 기타/무소속으로 분류했다.[30] 1~4[31] 국민통합21을 기타/무소속으로 포함[32] 김두관 의원(前경상남도지사)의 동생이다. 당시 총선에서 두 형제가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은 고향이자 남해군수를 지낸 남해군·하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당시 한나라당의 현역의원 박희태 후보에게 패배하였다.)[33] 최종 개표 결과 9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었다. 1988년 소선거구제 부활 이후 치뤄진 총선에서 역대 두번째로 1, 2위 표차가 적었던 지역구. 1위는 16대 총선 경기 광주의 3표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