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대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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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019년 4월 3일

(현재 시행 불가능)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국회에서 추가적인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신한국당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

무소속

139석

79석

50석

15석

16석

제15대 국회의원


1. 개요2. 과정
2.1. 김대중의 정계 복귀2.2. 선거구 획정 논란
3. 선거결과
3.1. 분석3.2. "철새의 계절"
3.2.1. 1차 집단 이동 - 신한국당의 과반 채우기와 크리스마스 날치기3.2.2. 2차 집단 이동 - 국민회의-자민련의 역(逆) "의원 빼가기"3.2.3. 3차 집단 이동 - 다시 고향(한나라당)으로
4. 트리비아
4.1. 사전예측조사의 실패4.2. 정치 1번지 종로4.3. 김진명 대 맹형규4.4. 뉴스 앵커들의 정계 진출4.5. 만화계의 정치 진출 시도

1. 개요[편집]

1996년 4월 11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이다. 투표율은 지난 총선에 비해 8%나 줄어든 63.9%였다. 의원 정수는 299명으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와 같았다. 그러나 지역구 의석이 16석 늘어 253석으로, 전국구 의석이 16석 줄어 46석으로 감소했다.[1]
출마 정당은 여당신한국당야당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

지금과는 달리 1인 1표제였으며 전국구 의석은 지역구에서 각 정당이 득표한 수의 합산으로 결정했다. 13~14대 총선에서 전국구를 지역구에서 얻은 의석 수에 따라 배분하던 규정이 바뀐 것이다. 비슷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소수 정당에 조금은 유리한 쪽으로 개정된 것이다.[2] 문제는 소수 정당의 희망인 전국구 의석을 대폭 줄였다는 것

  • 각 당의 목표 의석

    • 신한국당 - 원내 제1당 수성

    • 새정치국민회의 - 100석 이상 확보

    • 자유민주연합 - 50석 이상 확보

    • 통합민주당 - 원내교섭단체 구성 의석(20석 이상) 확보

2. 과정[편집]

2.1. 김대중의 정계 복귀[편집]

1992년 14대 대선 낙선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에 있던 김대중 아태재단(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이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로 실력을 과시한 뒤, 그해 말 정계복귀를 선언한다.

하지만 그가 속했던 민주당 내부에서 그의 복귀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자 아예 당을 나와 새정치국민회의(약칭 국민회의)를 창당했고, 이때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통합민주당 의원 중 2/3 정도가 국민회의로 넘어가게 된다. 이로써 야권은 크게 개편&분열되는데, 국민회의의 대선을 노린 안정, 보수적 행보에 통합민주당은 진보, 시민사회계 인사를 영입하며 경쟁을 벌이게 된다.

2.2. 선거구 획정 논란[편집]

선거 1년 전인 1995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시행됨에 따라 선거구도 이에 따라 조정되어야 했으나 여야는 이를 16대 총선부터 반영하기로 하고 15대 총선은 14대 총선 당시의 지역구를 조금 손보는 선에서 치르기로 합의했고, 그에 따라 지역구는 260석, 전국구는 39석으로 조정되었다. 그런데 최대 인구 선거구인 부산 해운대구-기장군(36만 4천)과 최소 인구 선거구인 전남 장흥군(6만 1천)의 인구 편차가 무려 6:1이었고 이에 대한 표의 등가성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다. 또한 충북에서는 제천시와 제천군이 통합되면서 기존의 제천군-단양군 선거구가 제천시-단양군 선거구로 재편됨에 따라 남은 1석에 대한 보상으로 단일 선거구로 묶였던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구에서 옥천군이 분리되고 보은군-영동군 선거구로 개편되자 이에 대한 게리멘더링 논란이 일어났다.[3] 결국 헌법재판소에서는 1995년 12월 27일 선거구 인구 상한선과 하한선의 비율을 4:1 이내로 조정할 것을 판시했다. 그러자 여당인 신한국당은 인구 하한선을 7만에서 해운대-기장 선거구 인구의 1/4인 9만 1천으로 상향하기로 방침을 제시했는데, 이럴 경우 국민회의의 텃밭인 호남권에서 대대적인 의석 감소가 불가피하였기에 국민회의는 인구 하한선을 7만으로 유지하고 상한선을 30만에서 28만으로 낮추는 방안을 제시했고 자민련은 인구 하한선을 분구 기준선인 30만의 4분의 1인 7만 5천으로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선거구 하한선이 어떻게 조정되느냐에 따라 유불리가 달라지는 만큼 여야간의 기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이를 보다 못한 헌법재판소에서는 상한선 280,736 이상, 하한선 70,184 이상이라는 구체적인 숫자까지 예시하기까지 했다.[4] 결국 여야 협상 끝에 1996년 1월 24일 여당은 상한선을 30만, 하한선을 7만 5천으로 하자는 야당안을 수용하고, 야당은 통합시 선거구에 대한 일시적 특례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합의하였고,[5] 그에 따라 지역구는 260석에서 253석으로, 전국구는 39석에서 46석으로 조정되었다. 그에 따라,

  • 부산 강서구는 북구의 일부 지역과 통합하여 단일 선거구(북-강서 을)를 이룬다.

  • 강원 태백시와 정선군은 단일 선거구로 통합된다.

  • 충북 옥천군은 보은군-영동군 선거구와 통합된다.

  • 충남 금산군은 논산군 선거구와 통합된다.

  • 전남 신안군은 목포시의 일부 지역과 통합하여 단일 선거구(목포-신안 을)를 이룬다.

  • 전남 영암군과 장흥군은 단일 선거구로 통합된다.

  • 전남 화순군과 보성군은 단일 선거구로 통합된다.

  • 경북 예천군은 문경시 선거구와 통합된다.

  • 경북 울진군은 봉화군-영양군 선거구와 통합된다.

  • 경남 거창군과 합천군은 단일 선거구로 통합된다.

  • 통합 전에는 각각 인구 상한선을 넘겼으나 통합 후에는 분구 기준선인 인구 30 만에 미달하는 통합시의 경우 15대 총선에 한해 갑, 을로 분구한다.

3. 선거결과[편집]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신한국당

국민회의

자민련

통합민주당

무소속[6], 기타

서울 (47)

27

18

0

1

1

경기 (38)

18

10

5

3

2

인천 (11)

9

2

0

0

0

강원 (13)

9

0

2

2

0

대전 (7)

0

0

7

0

0

충북 (8)

2

0

5

0

1

충남 (13)

1

0

12

0

0

광주 (6)

0

6

0

0

0

전북 (14)

1

13

0

0

0

전남 (17)

0

17

0

0

0

부산 (21)

21

0

0

0

0

경남 (23)

17

0

0

2

4

대구 (13)

2

0

8

0

3

경북 (19)

11

0

2

1

5

제주 (3)

3

0

0

0

0

지역구 (253)

121

66

41

9

16

전국구[7](46)

18

13

9

6

0[8]

(지역구)득표수[9]

6,783,730

4,971,961

3,178,474

2,207,695

2,511,213

(지역구)득표율

34.5%

25.3%

16.2%

11.2%

12.8%

총합 (299)

139

79

50

15

16


3.1. 분석[편집]

개헌저지선인 100석 확보는 물론 제1당 등극까지도 노리고 있었던 새정치국민회의는 기대에 영 못미치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서울에서 고작 18석을 확보하는 데 그치면서 여당인 신한국당(27석)에 밀린 것이 가장 큰 원인. 특히 정대철, 조세형, 김덕규, 한광옥, 김병오, 장석화, 박실, 이원형 등 서울에 지역구를 두고 있던 중진급 정치인들이 대거 낙선한 것은 뼈아팠다. 이는 야권분열로 수도권 30여개 지역구에 통합민주당 후보가 출마하면서 민주당계 지지층의 표가 분산된 결과라는 분석이 많았다. 다만 통합민주당이 선전한 지역에서는 국민회의-민주당간의 1-2위 다툼이 벌어져 대부분 국민회의 후보가 당선된 반면,[10] 통합민주당의 지지율이 낮은 지역에서는 국민회의 후보도 꽤 큰 폭으로 졌으므로, 결과적으로 통합민주당이 중도 성향의 무당층이나 신한국당 지지층을 잠식하는 제3당 효과를 어느정도 냈다는 분석이 훗날 나오기도 했다.#

국민회의는 비례대표(전국구)에서도 불과 1%포인트 가량의 득표율 미달로 13번까지만 당선되면서 14번이었던 김대중 총재가 낙선하고 말았다. 하지만 김대중 총재는 이러한 선거결과를 놓고 유례없는 자화자찬에 들어갔다.

“이번 선거에서 왜 모든 언론은 국민회의가 패배했다고 보도하지요? 패배가 아니라 약진이란 표현을 쓰라고 언론에 요구하세요. 65석이 79석이 됐고 전국 58개 지역에서 3000표 차 이내의 초접전을 벌였는데 이게 민심이 아직 국민회의를 안 떠났다는 의미가 아니고 뭡니까. (중략) 신한국당이 170석에서 139석으로 준 것이 이긴 것이냐, 국민회의가 65석에서 79석이 된 게 진 것이냐, 뭐가 패배고 승리냐, 이걸 기조로 당 기자실에서 성명을 발표해주세요.”#

물론 이는 선거 전체로 볼땐 허세가 섞여있는 억지성 발언이었지만, 정신승리할 핑계는 되어 결과적으로 위기에 빠진 지지층을 추스르는데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한편, 김종필민주자유당에서 쫓겨나다시피 하면서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은 충청권을 싹쓸이하고 박준규, 김복동, 박철언 등 反YS 민정계 인사들이 출마한 대구광역시에서도 선전한데다 경기도에서도 구도심 또는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당선자를 추가하면서 50석으로 대약진했다. 이는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YS가 이끌던 통일민주당을 제외하면 제3당으로는 최대 의석을 확보한 것이었다.[11]

통합민주당울산시, 안동시 등 영남권에서 3석을 얻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서울에서 이부영만이 당선되고 부산에서는 이기택 대표를 비롯한 전원이 낙선한 결과, 의석 수가 30석에서 15석으로 반토막나면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고 군소정당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선자 3명이[12] 신한국당으로 이적하고, 이기택계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계열이 분열하면서 사실상 분당 상태에 이르게 된다.

여당인 신한국당은 모래시계 검사로 떴던 홍준표, 민중당 출신의 운동권 인사였던 이재오, 김문수 등 정치 신인들을 수도권에 대거 공천하고 야권 분열의 어부지리를 얻으면서 당초 예상보다 선전한 139석을 확보했으나, 대승을 예측하던 출구조사 땜시 김치국 마시다 도리어 맥이 빠졌다 YS정부의 전두환, 노태우 구속 역풍 등이 겹치며 대구에선 자민련에 밀리고, 경북/경남에서는 1당은 되었으나 포항 북구에 옥중출마한 허화평, 전두환 정권 시절 민정수석을 지낸 밀양시김용갑 등 무소속 후보들에게 일부 의석을 내주면서 원내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는 훗날 신한국당의 후신인 한나라당박근혜를 정계에 컴백시키는 등 전반적으로 보수화되는데 한 원인이 된다.

선거 직후 결과는 여당 139석, 야권 144석, 무소속 16석(12석은 영남 지역 무소속)의 절묘한 의석 배분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만 끝났다면 이 총선은 그다지 회자되지 않았을 것이다.

3.2. "철새의 계절"[편집]

이 선거 이후 몇 년간 한국 정치판은 굵직굵직한 정계개편이 많았고[13] 이에 따른 의원들의 당적 변경도 흔했는데, 사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는 나름의 속사정이 있었다. 당시에는 이념보다는 지역[14] 및 인물(보스)[15] 변수가 정당을 가르는 주된 기준이였는데, 이러다보니 이념이 많이 상반되는 인물들도 한 정당에 잡탕처럼 섞여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과장 좀 보태서 '보스 말이 곧 이념(...)'처럼 떠받들어지던 시대였으니...참고로 이러한 기조는 김대중 정권기까지 이어진다.

환경이 이러니 정치인들도 당적을 바꾸는 데에 심리적인 제약이 덜한 게 어찌보면 당연했다. 특히 중도파 입장에서는 이 당이나 저 당이나 하는거 보면 오십보백보인데 본인이 정말로 당에 충성심이 있지 않는 이상 굳이 귀찮게 야당 생활을 할 이유가 없었다.[16] 하지만 물론 이는 의원들의 사정이었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3.2.1. 1차 집단 이동 - 신한국당의 과반 채우기와 크리스마스 날치기[편집]

선거 직후 신한국당은 통합민주당[17], 자유민주연합[18], 무소속 의원을 대거 영입,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며 1996년 연말의 노동법/안기부법 크리스마스 직권상정 정국을 예고했다. 이러한 '의원 빼가기'로 신한국당은 157석까지 의석이 늘어났으며,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총 의석은 125석으로 줄어들었다(국민회의 79 + 자민련 46).

게다가 대선을 코앞에 둔 1997년 11월엔 DJP연합이 이뤄지고 신한국당에 박근혜 당시 정수장학회 이사장이 영입되자, TK 자민련 의원 9명 중 3명인 이의익 의원(대구 북구갑)과 안택수 의원(대구 북 을), 박종근 의원(대구 달서 갑)이 자민련에서 신한국당으로 JP 통수를 날리며 당적을 바꿨다. 심지어 안택수 의원은 당시 자민련 현직 대변인이었다.(...)[19]

그리고 DJP연합에 대항하기 위하여 당시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통합민주당 조순의 주도로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과 통합민주당의 전격 합당하여 165석의 거대 여당 한나라당이 탄생한다. 한나라당은 대선 후보 이회창, 총재 조순 체제로 15대 대선을 치뤘으나 패배하여 야당이 된다.

3.2.2. 2차 집단 이동 - 국민회의-자민련의 역(逆) "의원 빼가기"[편집]

그런데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제1야당인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제2야당 자민련의 지지를 받아 일명 DJP연합으로 당선되면서, 다시 신 '여소야대' 현상이 일어난다.[20] 헌데 첫 야당 신세를 겪게 된 한나라당은 빡쳤는지 김종필 국무총리 인준안을 부결시키는 등 잦은 정국 파행을 일으키며 연립 여당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에 빡친 연립 여당측은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전후해 역 '의원 빼가기' 러쉬를 시작한다. 바야흐로 철새전성시대

이때 여당의 의원 빼가기에 항의하던 한나라당 하순봉 원내총무를 향한 자민련 구천서 원내총무의 발언이 압권이었는데, "우리는 아직 원금도 못 받았다." 흠좀무 이게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닌 것이, 김종필은 DJP연합이 깨진 이후인 제16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도 한나라당 이회창을 지지하지 않고 아예 중립을 선언해버릴 정도였으니 그 빡침의 정도를 알만했다.[21]

1998년 4월 민정계 김종호, 박세직 의원을 시작으로 오장섭[22], 훗날 최단명 총리가 되는 이완구, 이의익[23] 의원이 자민련에 들어가더니, 4월 29일엔 서정화, 이성호, 김인영, 이강희, 서한샘 의원이 새정치국민회의로 이적했다. 이어서 5월에 김명섭, 정영훈(새정치국민회의 행), 이택석(자유민주연합 행) 의원이, 8월에는 홍문종(새정치국민회의 행) 의원이 당적을 옮겼다(국민회의 87석, 자민련 48석. 한나라 과반 붕괴).

8월 28일에는 피닉제이인제국민신당까지 국민회의와 합당하면서 7석이 추가되었고, 국민신당 소속이었던 김학원 의원은 자민련에 입당했다. 이어 9월 초에는 노승우(자유민주연합 행), 김충일(새정치국민회의 행), 차수명 의원(자유민주연합 행)이 한나라당을 탈당했으며, 최종적으로 9월 8일 한나라당의 유용태, 김길환, 박종우, 송훈석 4명이 이동하면서 연립 여당은 국민회의 101석(개헌 저지선 확보), 자민련 52석으로 합계 153석의 안정 과반 의석을 확보했고, 한나라당은 140석으로 의석이 줄었다.[24]

3.2.3. 3차 집단 이동 - 다시 고향(한나라당)으로[편집]

이후 '철새' 의원들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시민들에게 찍혀(...) 이른바 낙선운동의 영향으로 상당수가 낙선의 운명을 맞았다. 그리고 낙선운동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상당수 정치인들은, 2001년 통일부 장관 파동으로 DJP연합이 깨지자 살 길을 찾아 헤매다, 차기 대선 레이스에서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우세해보이자 다시 원래 있던 정당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실상은 개털 다만 송훈석 전 의원처럼 그대로 눌러앉아버린 케이스도 있긴 했다.

참고로 한나라당에 복당한 이들 중에는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원유철, 새누리당 사무총장을 지낸 홍문종 등 2010년대인 지금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정치인들도 있다.

4. 트리비아[편집]

4.1. 사전예측조사의 실패[편집]


역대급 출구조사로 불리는 문화방송의 출구조사 방송.[25] 신한국당 175석을 예상했지만 결과는...

총선 출구조사 안습 전설의 첫 막을 올렸다.(...)[26] KBS, MBC, SBS 방송3사가 전년도 실시한 지방선거 투표자 조사결과가 제법 정확하게 나오자 정치권에선 투표자조사를 용인하도록 법을 바꾸었고, 방송사간의 지나친 경쟁을 피한다는 취지(일단 말은 그렇다. 물론 현실하고 거리가 멀었지만..)를 살려 공동 투표자 조사를 시행했다. 그리고 이 투표자 조사결과를 저녁 6시 정각에 발표했다.[27] 이 투표자 조사에선 신한국당이 압도적으로 과반 확보(175석)하는 것으로 나왔고, 당연히 국민회의와 민주당 지지자들은 엄청난 멘붕을 겪게 되고 신한국당 지지자들이나 당원들은 환호성을 질렀겠지만...[28]

정작 개표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완전히 망했어요. 방송사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엄청난 초대형 사고나 마찬가지인 셈으로 최종 개표결과는 신한국당 139석으로 예측의석보다 무려 36석이나 적게 나왔고 국민회의는 8석(투표자조사:71석), 자민련은 16석(투표자조사:34석), 민주당은 4석(투표자조사:11석), 무소속이 8석(투표자조사:8석)이나 많이 나왔다. 덕분에 밤새도록 방송 3사에 항의전화가 빗발쳤고 그 후폭풍으로 인해 다음날 방송 3사는 사과방송을 해야 했다. 덧붙여 외신에서도 비웃음거리로 소개되는 등 굴욕을 당해야 했다.(...) 때문에 과거 대략 맞은 1995년 지방선거 때의 예측조사를 생각하고, 이번에도 방송사들의 예측조사 결과만 보고 나서 일찍 잠에 들었다가 다음날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투표자 조사를 시행한 여론조사 기관들의 신뢰도도 추락해 광고조사의 신뢰성이 떨어졌다. 이는 1997년 한국갤럽에서 제15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맞추고 나서야 해소된다. 하지만 총선 출구조사는 여전히 안습이었던게 함정 여하튼 당시 신한국당 당원들은 개표가 시작되기 전에 너무 결과가 압도적으로 나왔던 탓에 선거운동 기간 동안 나온 예측치에 비해 잘 나온 수치임에도 개표 중이나 개표가 끝나고 나서는 기분이 영 찝찝했다는 반응이 많았다.(...)[29] 어쨌든 민주당이나 국민회의 당원들 입장에서 보면 출구조사 결과가 너무 절망적으로 나왔던 탓에 그나마 개표 중이나 개표가 끝난 뒤에 멘붕을 덜 겪기는 했다.

15대 총선에서 투표자조사와 실제 당선자가 바뀐 지역은 아래와 같다. (앞쪽이 투표자조사 1위, 뒤쪽은 실제 당선자) 총 39개 지역.

4.2. 정치 1번지 종로[편집]

파일:ENv0QGY.png
국내 선거 사상 손꼽힐만한 죽음의 조

이명박, 이종찬, 노무현 그리고 김을동 후보 등이 출마했던 '정치 1번지' 서울 종로구의 경우 민주당계 지지층의 표분열 양상이 벌어져, 당시 신한국당의 이명박 후보가 지역구 초선[30]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2년 뒤 이명박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받던 중에 자진 사퇴하여 보궐선거를 치르게 되었고, 이 자리는 국민회의로 나온 노무현 후보가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덕분에 역대 대통령을 3명이나 배출한 국회의원 선거구가 된다[31] 국회의장도 배출했다[32]

4.3. 김진명 대 맹형규[편집]

당시 국민회의에선 서울특별시 송파구 을 선거구에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큰 인기를 끈 김진명 작가를[33] 공천한 바 있다. 상대는 역시 초선에 도전하는 SBS 앵커 출신 맹형규. 결과는 맹형규 후보가 39.8% 득표로 당선. 김진명은 다행히 33.2%를 득표하며 낙선했다.[34]

4.4. 뉴스 앵커들의 정계 진출[편집]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서 맹형규SBS 8 뉴스 앵커와 박성범, 이윤성KBS 뉴스 9 앵커를 이미지 쇄신차원에서 영입하였고, 이에 뒤질세라 국민회의에서도 정동영MBC 뉴스데스크 앵커를 영입하였다. 이들은 전부 전국구가 아닌 지역구로 출마했는데 아무래도 대중적 인지도가 있었기에 기존에 지역기반으로 활동하던 정치인들을 누르고 전원 당선되는 기염을 토해낸다. 이전부터 정계활동을 하던 하순봉 전 뉴스데스크 앵커까지 포함하면 5전 5승이고 변웅전까지 합하면 6전 6승인 셈. 하지만 훗날엔 아나운서 출신들도 많이들 낙선한다는게 함정

4.5. 만화계의 정치 진출 시도[편집]

더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로는 <병영일기>, <말주비> 등의 만화를 낸 시사만화가 박호성 화백이 있었는데, 박 화백은 무소속 신분으로 서초을에 출마했으나 결국 낙선했다. 이와 관련해 만화평론가 손상익은 만화문화의 대중성 검증과 이의 정치세력화를 시도한 사례로 만화가가 국회의원에 도전함에 따라 만화문화의 영향이 정치권에까지 퍼진 '대중문화 시대'의 조짐을 실감케 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12년 뒤에 선배인 이홍우 화백도 18대 총선 공천에 나가려다 탈락했다.

[1] 역대 총선 중 전국국(비례대표) 의석이 가장 적었던 선거로, 두 번째는 가장 최근 총선인 20대 총선의 47석이었다.[2] 의석 수가 기준일 경우 소수 정당은 소선거구에서 의석을 따내지 못하는(즉 1위를 하지 못하는) 이상 단 한 석도 얻지 못하지만, 득표 수의 합산이 기준이 되면 지역구(소선거구)에서 패해도 얼마나 많은 득표를 올렸는지에 따라 전국구 결과에 반영될 수 있다.[3] 옥천군은 보은군과 영동군 사이에 위치하는데 옥천군이 분리되면 보은군과 영동군은 서로 떨어진 월경지가 된다.[4] 전체 인구를 지역구 의석 수로 나눈 수인 175,460에서 ± 60% 이내.[5] 대표적으로 경북 안동시의 경우 과거 안동시, 안동군으로 분리되어 있던 시절에는 각각 11만, 8만으로 둘 다 인구 하한선 7만을 넘겼으나 통합 이후 인구 19만으로 분구 상한선인 30만에 미달되었다. 원칙대로라면 1석을 배정받아야 했으나 여야 합의로 15대 총선에 한해 2석을 배정받았다.[6] 군소정당의 후보는 모두 낙선하며, 따라서 당선자 전원이 무소속이다.[7] 무소속을 제외한 지역구 득표율에 비례하여 나눠갖는 방식.[8] 1인 2표제가 시행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사표(死票)로 분류되었다.[9] 군소정당 후보까지 총합은 19,653,073표이다.[10] 통합민주당 이부영 후보가 당선된 서울 강동갑 제외.[11] 다만 통일민주당은 의석이 아닌 득표율로는 당시 제2당이었다. 참고로 이 선거 이후 제3당이 가장 약진한 사례는 이로부터 20년 후인 2016년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38석을 얻은 것이었다.[12] 이규택(경기 여주), 황규선(경기 이천), 최욱철(강원 강릉을).[13] 김영삼 정권을 거쳐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 초기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정계 개편이 잦았다.[14] 물론 지금도 각 정당별로 지역 기반이 있긴 하지만, 이 시기는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지역주의가 강하게 작용하던 때였다.[15] 신한국당, 국민회의, 자민련의 보스가 각각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16] 당시 당적 변경을 한 의원들 중 대부분은 야당에서 여당으로 당적을 바꾼 케이스이다.[17] 이규택(경기도 여주군), 황규선(경기 이천시), 최욱철(강원도 강릉시을).[18] 최각규 강원도 지사, 유종수(류종수, 춘천시을), 황학수(강릉시 갑) 등 강원도 지역 정치인을 죄다 끌어들였다.[19] 그는 당적을 바꾸기 직전까지만 해도 자민련 대변인으로 이회창 후보 아들들의 병역기피의혹을 선두에 서서 문제제기 했었는데, 신한국당으로 이적한 이후엔 이회창 후보를 "참신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라고 추켜세운다.(...)[20] DJ 당선 직후 새정치국민회의 이석현 의원의 '한국/남조선 병기 명함' 파동이 일어났는데, 이에 이 의원이 책임을 지고 자진 탈당하면서 의석이 더 줄어들었다.[21] 헌데 재미있는 점은 훗날 그 이회창이 세운 자유선진당이 몰락한 자민련을 대신해 충청계 지역정당의 바통을 이어받는다는 것. 하지만 결국 자유선진당도 세에 밀려 2012년 새누리당과 합당한다.[22] 이회창의 선영이 있는 충남 예산군이 지역구였다. 총선에서는 자민련 조종석 후보에게 개발살났으나, 선거법위반으로 치러진 재선거에서 이회창의 지원으로 몰표를 받아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자민련에 입당해 원내총무와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내는데, DJP연합 해체 이후 다시 한나라당 복당을 시도했으나 그때의 통수를 잊지 못한(...) 이회창에게 거부당하고 그대로 정계에서 아웃된다.[23] 상술되어있듯 원래는 자민련 공천으로 대구에서 당선되었으나, DJP 연합이 이뤄지자 신한국당으로 날아갔다가, 기대했던 대구시장 후보 공천을 받지 못하자 다시 자민련으로 복당(...)해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10%대 득표율로 한나라당 문희갑 후보에게 개발살 났고, 이후 정계를 떠난다. 철새의 최후[24] 이 명단에는 국민회의 1석, 자민련 2석의 명단이 빠져있다.[25] 첫 화면에 나오는 엄기영신경민이 그 후 서로 다른 당에서 정치를 했다는 것도 알면 나름 흥미로운 포인트.[26] 정확하게는 4년 후인 16대 총선부터 출구조사가 시작되었고, 이 때는 출구조사가 아닌 전화조사 방식으로 예측한 것이였다. 물론 출구조사도 총선 예측은 안습했지만.[27] 이 와중에 MBC가 상당수 지역구에서 불법(지금은 불법이 아니지만 당시엔 투표소에서 500m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출구조사를 하는건 불법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출구조사를 벌이다가 타 방송사에 의해 무산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이 출구조사 결과는 선거 당일엔 발표되지 않았고, 선거 다음날 MBC 뉴스 프로그램에서 자사가 벌인 출구조사가 정확하다고 홍보할때 공개되었다. 그리고 투표자 조사결과가 틀리고 출구조사 결과가 상당히 정확한걸로 나오자 출구조사 거리 규정 완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동안 설득력을 얻었다. 그러나 정작 16대 총선에선 망했어요.(...)[28] 참고로 당선자 예측발표 했을땐 오차범위(+-4.3%) 따윈 쌩까고 조금이라도 앞서면 그냥 당선예상! 이런 식으로 발표했다. 물론 오차범위를 감안해도 신한국당 130~189석, 국민회의 54~82석, 자민련 25~37석, 민주당 11~14석, 무소속 4~10석으로 너무 범위가 넓기 때문에 사실상 당선자 예측이라는 의미가 없다시피한 조사이긴 했다. (특히 자민련과 민주당, 무소속의 경우 예상 의석을 맞추지 못했다.) 그리고 전국구 득표율에서도 국민회의-자민련-민주당의 경우 오차범위 내에서 맞쳤으나 신한국당의 경우 실제 득표율(34.8%)보다 예측조사(43.5%)가 훨씬 더 나왔다.(...)[29] 여담으로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당원들과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당원들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선거에서 이겼긴 했는데, 출구조사보단 결과가 못나왔기 때문.[30] 전국구 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그것까지 합치면 재선의원이었다.[31] 윤보선,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32] 정세균 전 국회의장.[33] 1958년생으로 당시 만 38세였다.[34] 지역구에 모교인 보성고등학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