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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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 불가능)

✝ 2016년 1월 1일자로 국민투표법 14조 1항 전체 내용 위헌결정 및 무효화, 투표인명부 작성 불가능으로 현재 시행 불가

1. 개요2. 배경3. 과정
3.1. 야권후보 단일화
3.1.1. 단일화에 대한 기대3.1.2. 단일화 합의의 무산3.1.3. 고려대학교 시국토론회3.1.4. 평화민주당의 창당과 4자 필승론
3.2. 지역감정의 악화3.3. 지지도의 변동3.4. KAL기 폭파 사건
4. 결과
4.1. 지역별 결과4.2. 대선 격전지역
5. 결과 분석
5.1. IF: 만약 단일화를 했었다면, 누가 이겼을까?
5.1.1. 단일화 후보가 이겼을 것이다5.1.2. 노태우가 이겼을 것이다
6. 논란
6.1. 컴퓨터 여론 조작설6.2. 부재자 투표 조작 논란
7. 여파8.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한국의 제13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1987년 12월 16일에 실시되어 민주정의당노태우 후보가 2위 김영삼 후보를 득표율 8.6%p, 194만5,157표 차로 꺾고 당선되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이후 16년 만에 치뤄진 직선제 대통령 선거였다.

민주화 진영 입장에선 그야말로 "죽 쒀서 개 준" 선거.(...) 그리고 이로 인해 영호남 갈등은 더 깊게 패여만 갔고, 특히 PK와 호남 사이의 갈등이 확연히 심해진 계기가 되었다.[1]

2. 배경[편집]

신군부는 노태우를 차기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재차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하기에는 6월 항쟁 등 국민적 저항이 거셌다. 그들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특별선언인 6.29 선언을 하여 헌법을 바꾼다. 국민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 29일 확정·공포된 헌법에는 대통령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라는 규정이 세워진다. 이는 이후의 대통령 선거에 그대로 이어진다.

3. 과정[편집]

3.1. 야권후보 단일화[편집]

3.1.1. 단일화에 대한 기대[편집]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관심을 모은 후보는 민주정의당노태우, 그리고 야당의 이른바 3김으로 통일민주당김영삼, 평화민주당김대중,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인사들은 통일민주당을 창당, 결집하고 김영삼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김대중은 일찍이 차기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내었고, 1987년 7월 10일의 기자회견에서도 "나는 대통령이 되는 데 관심 없다. 현재로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고 발언하였으나, 바로 다음 날인 7월 11일 인터뷰에서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하면 불출마 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발언하면서 불출마 선언을 하룻밤 만에 뒤집게 된다. 이로써 김영삼과 김대중은 야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두고 격돌을 예고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같이 이끌어 온 김영삼과 김대중에 다수의 유권자들은 단일화를 기대했다. 마침 두 사람은 경쟁하다시피 양보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김대중은 1986년 “나는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김영삼도 “사면·복권이 이루어진다면 김대중 씨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하겠다”고 했다. 대부분의 국민은 두 사람의 선의와 양식을 믿었다. 단일화는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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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중과 김영삼 간의 사이는 매우 좋았다. 김영삼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화끈하게 밀어준 적이 있었고, 김대중은 그 이후 신민당 총재선거에서 김영삼을 전폭적으로 밀어준 적이 있었다. 5공 시절에는 둘이 함께 민주화투쟁의 양대산맥으로 자리매김하였다.[2] 약 16년에 걸쳐 김대중과 김영삼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던 셈이다.[3]

3.1.2. 단일화 합의의 무산[편집]

그런데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갔다. 1987년 5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만 해도 손을 맞잡고 훈훈한 모습을 보여준 그들이었건만, 점점 그들 사이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실 위에서는 계속 양김의 훈훈한 모습만을 서술해놨지만, 물밑에선 오래전부터 신경전이 치열했다. 일단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박빙의 승부 끝에 패배 이후로 김대중과 동교동계는 군사정권의 노골적인 탄압을 받고 있었다. 김대중은 유신 이후로 일본망명, 국내납치, 체포, 사형선고, 미국망명 식으로 계속 떠돌면서 세력이 많이 약화돼 있는 상태였다. 반면에 김영삼은 유신체제에서도 계속 야당 국회의원과 총재로 활동했고[4], 5공화국 들어서도 가택연금과 정치활동규제에 묶이긴 했지만, 측근들을 내세워서 상도동계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5]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1985년 신한민주당,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은 모두 김영삼계가 주도하고 살아남은 김대중계 일부 인사가 가담하는 형식이었다. 당연히 통일민주당 내에서 지역 지구당 위원장(그러니까 국회의원 후보)와 당직 인선은 대체로 김영삼계 위주였다. 김대중계는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6월항쟁 이후 다가오는 대선과 총선에 대비해서 미조직 지구당을 창당하고, 지역조직을 정비해야 한다는 김대중의 제안을 김영삼이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서 회피하면서 불만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6]

6월항쟁 직후 양김후보 단일화 문제가 불거지자, 어차피 둘 다 양보하지 않을 테니 경선을 하라는 제안도 나왔다. 하지만 이미 주요 지구당과 당직을 김영삼계가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당내 경선은 결과가 뻔할 것이라는 주장과 또 당내경선을 하게 되면 분명 정권의 돈을 앞세운 정치공작으로 당이 엉망진창될 것이라는 지적에 경선제안은 묻히게 된다.[7]

이제 남은 것은 양김 간의 자발적인 합의인데, 이게 쉽지가 않았다. 물밑 협상은 지지부진 했고, 위에서 언급된 당내 조직책(국회의원 후보) 선정 문제까지 얽히면서 점점 양 세력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덩달아서 민주화운동세력도 분열하기 시작했다. 후보단일화(약칭 후단), 비판적지지(약칭 비지) 그리고 독자후보추대(약칭 독후)로 나뉘었는데 후보단일화는 군부와 보수세력에서 거부감이 적은 김영삼으로 후보단일화하자는 사람들이었고, 비판적 지지는 김대중의 선명성, 진보성에 주목해서 우리와 비교적 생각이 가까운 김대중을 밀자는 주장이었다.[8] 특히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쪽에서는 소수의 독자후보파를 제외하면 다수가 비판적 지지, 즉 김대중 쪽이였다.[9] 독자후보추대는 더 이상 보수야당에 끌려다니지 말고 진보 후보를 세워서 스스로 정치세력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민중후보 백기완 후보 추대로 결집했다.[10]

기다리다 지친 재야에서는 비교적 중립적인 인사들이 중심이 돼서 ‘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까지 만들어 두 사람의 합의를 촉구했고, 동교동과 상도동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 끝에 마침내 단일화 일보 직전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그 합의는 성사 직전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추진위원회 대표의 한 사람이던 장을병[11] 전 민주당 대표의 술회는 이렇다.

“재야도 두 사람을 놓고 선호가 갈렸고, 김대중 씨 쪽이 더 목숨 걸고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문제는 당선가능성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독재정권이 덧씌운 멍에이지만 김대중 씨는 사상적으로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일반 국민 중에도 적지 않다는 점이 지적됐다. 그래서 이번만은 김대중 씨가 양보를 하라는 쪽으로 계속 설득했고, 마침내 김대중 씨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김영삼 씨가 대선 후보를, 김대중 씨가 당권을 맡는다는 합의[12]가 이뤄져 기자회견만 앞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영삼 씨가 딴소리를 하고 나왔다. 1971년 선거 때 대선 후보는 김대중, 당권은 유진산이라는 식으로 분리하다 보니 당과 선대위 사이에 손발이 맞지 않더라. 그러니까 후보도 당권[13]도 자신이 전부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14] 김대중 씨가 승복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더러 발가벗고 무조건 항복하라는 거냐?’ 그렇게 단일화는 성사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관련기사 링크


사실 김대중이 오랜 미국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김영삼은 국내에서 민주화 운동을 사실상 이끌었기 때문에, 야권에서는 김대중에게 양보를 권유하는 세력도 상당했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양보를 권유했다. 김 추기경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될 경우 군부가 용인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정변이 일어날 우려를 했다"는 내용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15][16] 그러나 김대중은 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야권 원로들이 김영삼에게 양보를 강제하는 것을 '감정적으로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3.1.3. 고려대학교 시국토론회[편집]

어쨌든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언젠가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에 합의할 것이라 믿고 있었고,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참석한 10월 27일 고려대학교 시국토론회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국민은 이 자리에서 역사적인 단일화 발표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진행된 토론회에 나타난 두 사람의 분위기는 자못 싸늘했다. 이날 토론회의 주인공인 두 사람은 단상에 나란히 앉아 있었으면서도 서로 외면한 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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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 등 여러 연사의 연설이 끝난 뒤 마침내 김영삼이 연단에 올랐는데, 그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청중 사이에서 "우~" 하는 야유 소리가 나왔던 것이다.[17] "(대선 후보를) 사퇴하라! 사퇴! 사퇴! 사퇴!" 이런 외침도 터졌다. 김영삼을 지지하는 청중이 항의하려 했지만, 야유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그 기세에 압도되고 말았다. 결국 김영삼은 정치인생 30여 년에 처음 겪는 굴욕감에 떨며 고려대학교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반면 김대중이 연설대에 올랐을 때, 고려대학교 민주광장은 마치 그의 개인 유세장처럼 바뀌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연호하는 사람들 앞에서 김대중은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뒤이어 그의 지지자들에게 목말이 태워진 채 고려대학교 앞 안암로를 행진하기까지 했다. 이때 김대중은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라고 외쳤으며, 결국 다음날, 김대중은 자신을 따르는 정치인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전격 탈당한다고 선언한다.[18][19]

3.1.4. 평화민주당의 창당과 4자 필승론[편집]

당직과 지역조직 인선에서 상도동계한테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던 동교동계는 자신들의 보스 김대중과 함께 일제히 탈당하였다.[20] 김대중은 자기를 따라나선 정치인들과 함께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출마함으로써 야권은 분열된 채 선거를 맞았다.

이렇듯 양김이 분열하여 동시에 출마선언을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후보단일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야권에서 박찬종이 삭발농성을 하고 이철, 홍사덕, 조순형 등 일명 7인의 서명파는 김영삼과 김대중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끝까지 후보단일화를 촉구하였으며,[21] 김대중이 상술한 재야쪽의 중재안을 다시 들고나와 김영삼측에 자신이 당권을 갖는 것을 조건으로 한 후보단일화를 제안하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당시 김대중의 참모들 가운데서는 조윤형처럼 김영삼에게 대권과 당권 모두 양보해버리자는 의견을 개진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설 중엔 김대중이 대선출마 포기조건으로 차기 총선에서 자신에게 국회의원 공천권의 20%[22]만이라도 보장해달라고 김영삼에게 최후의 제안을 하였으나 김영삼이 그것마저 거절했다는 말도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23][24][25]

이로 인해 동교동계 정치인들의 감정이 격앙되었을 때, 정신승리를 위해 한화갑 등이 YS와의 결별을 주장하면서 들고 나온 것이 이른바 4자 필승론이었다. 참고로 당시 국내 유권자 수는 25,127,158명(2510만)이었다. 이를 지역별 유권자 수와 후보별 우세 지역을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지역

유권자 수

비고

서울

6,332,346명

경기

3,270,127명

부산

2,233,092명

김영삼 우세

경남

2,122,061명

김영삼 우세

경북

1,782,461명

노태우 우세

충남

1,708,727명

김종필 우세

전남

1,580,881명

김대중 우세

전북

1,241,878명

김대중 우세

대구

1,236,326명

노태우 우세

강원

1,018,999명

인천

955,271명

충북

854,232명

김종필 우세

광주

520,488명

김대중 우세

제주

270,629명


후보들에게 우세한 지역에서의 유권자 수를 더한 것과, 서울-경기-강원-인천-제주의 유권자 수를 더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도출된다.

후보

유권자 수

김영삼

4,315,553명

김대중

3,343,247명

노태우

3,018,787명

김종필

2,562,959명


각 후보들의 연고지가 아닌 서울-경기-강원-인천-제주의 유권자수가 11,847,372명.

선거에 후보들의 연고 지역 유권자들만이 투표하는 것이 아니다. 즉, 특정 후보의 우세가 점쳐지지 않는 11,847,372명의 유권자들도 표를 행사하게 된다. 이에 김대중 후보는 자신의 연고지인 호남을 시작으로, 유권자 수는 많지만 각 후보들과는 연고가 없는 서울-경기권을 공략하는 선거 전략을 세운다.

즉, 노태우 후보와 김영삼 후보는 서로 인구가 많은 영남에서 대결하며 표가 갈리게 하고, 김종필 후보는 이미 한물 간 사람 취급 받던터라 당선권에선 멀다고 보고 인구가 적은 충청 지역만 압도한다면...김대중 자신은 연고지인 호남 지역을 기반으로, 인구가 많은 수도권(서울/경기권)에서 승부를 점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 사람이 모두 나와도 결국 노태우가 김대중이 이기는 선거', 4자 필승론이었다.

허나 결론적으로 이 4자 필승론은 처참히 빗나간다. 후술된 선거결과를 보면 알겠지만 실제 선거 판세는 4강이 격돌하기보다는 김종필이 한참 처지는 3강 1약의 구도로 치뤄졌다. 김종필은 연고지인 충남에서만 승리했을 뿐, 자신하던 충북 지역도 막상 결과는 노태우, 김영삼에게 그것도 큰 격차로 패해 3위에 그치는 수모를 당한다. 그리고 노태우는 지역색이 옅은 스윙스테이트격인 인천, 경기, 제주에서 1위를 차지하고, 불리할 것으로 예상되던 충북과 비교적 보수 성향이 우세하던 강원도도 가져가며 표를 끌어모은다. 그리고 유권자수가 많은 서울, 부산, 경남, 충남 등에서도 고르게 2위를 하며 상당한 표를 차지해 2위와 격차를 꽤 벌린다.

물론 기존의 한국 선거들이 으레 그랬듯 당시 대선도 금권, 관권선거가 횡행하긴 했다. 안기부를 통한 뒷공작이나 불법정치자금을 이용한 조직동원도 있었고, 군인 등의 부재자투표를 조작하는 추태도 있었다. 다만 과거에 비해서는 그 정도가 많이 낮아졌긴 했는데, 이미 한번 군부에 저항해본 시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져서 전체적인 선거 부정 강도가 많이 줄어든 것. 당시 야권쪽 일부 인사들 설에 의하면 이때 선거 부정에 대해 어느정도 불만은 표시하면서도 예전에 당했던 말도 안되는 부정 행위들보단 그래도 그나마 사정이 나은 선거였다고 한다. 물론 후술된 투표 조작 논란 항목을 보면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넘어가자 어쨌든 결론적으로 야권이 선거에 패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결국 정확한 인구통계학적 데이터로 여론의 동향을 읽는 데이터분석기술이 약해서였고, 이는 이후 김영삼을 비롯한 야권 인사들이 여론조사 분석에 공을 들이는 계기가 된다. 반면, 당시 집권여당이던 노태우 측은 이 점에서 훨씬 유리했고, 데이터에 근거한 비교적 정확한 판단을 근거로 선거에서 승리하게 된다.

3.2. 지역감정의 악화[편집]

전술한 것처럼, 선거구도가 이렇게 정해지면서 각 후보가 자신의 지역을 기반해서 결집하는 구도로 선거양상이 흘러갔다. 가령 노태우 후보는 전북 전주에서 유세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7년 전인 1980년 5.18 광주시민 학살의 원흉인 신군부의 일원이었던 노태우 후보에 대한 전북 주민들의 반감으로 유세 현장에서 폭력 시위가 발생했고, 결국 유세가 중단되었다. 이 시위는 MBC 9시 뉴스에서 방영되었다.

이후 김대중이 광주에서 80만 인파를, 김영삼이 부산에서 100만 인파를 동원하자, 각 후보의 연고지역별로 유권자들이 뭉치는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노태우는 경상북도대구광역시(TK)의 지지와 함께 다른 지역(여권 성향이 강한 경기도, 강원도와 충북, 서부경남)의 유권자들을 모았고, 김영삼은 부산광역시경상남도(PK)를 중심으로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그리고 김대중은 전라도, 김종필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더 막장이었던 것은 당시 정보기관과 공영방송들이 지역감정을 더 부추기는 식으로 선거판을 몰고 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영삼이 부산에서 "우리는 깨끗이 하여 어제의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자"라고 유세를 했는데, 이 발언을 앞뒤 자르고 9시 뉴스 첫 번째 방송화면으로 내보내 호남인들을 격분시키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3.3. 지지도의 변동[편집]

당시 빅3 후보들은 여의도 광장에 100만 인파를 운집시키며 세력을 과시했다. 이렇게 각 후보들이 경쟁하듯 대규모 옥외집회를 열었던 것은 그때의 대통령 선거에서 여론조사가 언론에 공표되지 않았던 데도 원인이 있다.

다만 한국갤럽 등이 조사를 했고, 실제 선거결과와도 비슷하게 나타났으므로 여당(민주정의당)과 전두환 정권은 여론의 향방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민정당 측에서 자체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해서 결과를 보고받고 있었다. 반대로 당시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경우에는 이미 12대 총선에서 안기부가 실시했던 여론조사가 빚나갔던 경험이 있던데다가[26] 민주화 직후라서 표본선정을 어떻게 해야하느냐의 문제도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신뢰도가 의심가던 상황이었던데다가 오랜기간 동안 발이 묶여있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역량도 부족했는데 이 때문에 구체적인 데이터가 부족한 상태에서 선거운동을 치렀고, 여기서 대선의 향방이 여기서 갈라졌다고 보면된다.

원래 지지는 김대중이 좀 더 높았으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의 영입으로 부동표가 몰리면서 김영삼이 노태우를 제치고 40%의 지지율로 1위에 올라섰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를 들어 워싱턴 포스트타임(주간지) 등은 미국 국무부 관계자의 말을 빌려 "김영삼이 앞서고 있다"라고 보도하는 등, 당시 판세를 보면 김영삼이 1위, 노태우와 김대중 후보가 2위 자리를 다투었고, 김종필이 4위, 신정일이 꼴찌였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의 보도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김영삼이 대선 직전까지 노태우와의 격차를 크게 좁히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27][28]

한편, 노태우 후보 진영에서 경쟁 후보 진영을 분석한 내용이 노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일부 공개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영삼 후보 진영 - 야당에서 내건 캐치프레이즈를 분석해 보니 그들의 가장 큰 무기는 군정종식(軍政終熄)이었다. 이 구호는 식자(識者)들에게 특히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김영삼 씨는 시종일관 이 구호를 외쳐 댔다. 이것이 내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처음에는 신선하게 느껴지던 이 구호가 시간이 흐를수록 유권자들에게 식상함을 자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똑같은 구호로 일관하지 않고 단계별로 다양하게 발전시켰더라면 내게는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대응 방안을 궁리한 끝에 "군정종식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군정을 종식시키는 징검다리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로 했다.[29]

김대중 후보 진영 - 김대중 씨는 대중(大衆)을 휘어잡고 바람을 일으키는 선동(煽動)의 명수였다. 당대의 1인자라 할 만했다. 만일 6.29 선언이 없었다면 그의 이런 강점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6.29 선언이 그의 강점의 핵(核)을 제거했다. 외부로부터 압력을 받을수록 그 위력은 더욱 폭발적인 효과를 거두게 마련인데 압력이 전혀 없는 상황으로 바뀌어 폭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김종필 후보 진영 -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향수를 갖고 있는 보수층을 겨냥했다. 여권 표를 분산시킬 염려가 없지 않았으나 나는 그가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80년 초에 "유신과 관련해서 책임이 없다."고 회피했던 처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30][31]


하지만 이런 치열한 선거 국면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북풍이 몰아닥치면서 선거판도는 변하기 시작한다.

3.4. KAL기 폭파 사건[편집]

선거가 유례없이 치열한 지역대결의 장이 되어가던 무렵, 선거를 약 2주 앞둔 1987년 11월 29일 북한에 의해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발생한다. 선거 막판 때마침 터져준 북한의 잔혹한 테러에 수많은 국민들이 경악하였고, 오랜 기간 독재정권 치하에서 반강제로 학습된 안정논리와 색깔론이 다시금 고개를 쳐든다. 때문에 대중들 사이엔 김대중이나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야당 출신 인사로서의 한계 때문에 군부를 제대로 지휘할 수 없어 북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확산되었다.

특히 김대중 후보에 대해서는 1970년대 일본에 망명해 있던 시절에 조총련을 통해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루머가 워낙 파다했기 때문에, 김대중 후보와 북한 간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고 철썩같이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영삼 후보도 본인은 몰라도[32] 김대중 후보와 같은 당 소속이었으니(...) 결국 대통령이 되면 김대중에게 이용당하여 북한에 좋은 일 하는 것 아니냔 시선도 있었다. 나중에는 김대중 후보가 북한을 시켜서 KAL기 테러를 일으켰다는 어이없는 루머까지 돌기 시작하면서, 대선 분위기는 안보를 강조하던 여당의 노태우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되어갔다. 이로 인해서 김종필이 표손해를 많이 봤고 김영삼도 TK지역의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는 등 영향을 받았다고.

4. 결과[편집]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기호

후보명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선여부

1

노태우

민주정의당

8,282,738

36.6%

1

당선

2

김영삼

통일민주당

6,337,581

28.0%

2

3

김대중

평화민주당

6,113,375

27.0%

3

4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1,823,067

8.1%

4

5

홍숙자[33]

사회민주당

-

-

등록무효[34]

6

김선적[35]

일체민주당

-

-

사퇴

7

신정일

한주의통일한국당

46,650

0.2%

5

낙선

8

백기완

무소속

-

-

사퇴[36]

선거인수

25,127,158

투표수

23,066,419

무효표수

463,008

투표율

89.2%

4.1. 지역별 결과[편집]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지역

민주정의당
노태우

통일민주당
김영삼

평화민주당
김대중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전국

8,282,738
(36.6%)

6,337,581
(28.0%)

6,113,375
(27.0%)

1,823,067
(8.1%)

서울

1,682,824
(30.0%)

1,637,347
(29.1%)

1,833,010
(32.6%)

460,988
(8.2%)

부산

640,622
(32.1%)

1,117,011
(56.0%)

182,409
(9.1%)

51,663
(2.6%)

대구

800,363
(70.7%)

274,880
(24.3%)

29,831
(2.6%)

23,230
(2.1%)

인천

326,186
(39.4%)

248,604
(30.0%)

176,611
(21.3%)

76,333
(9.2%)

광주

22,943
(4.8%)

2,471
(0.5%)

449,554
(94.4%)

1,111
(0.2%)

경기

1,204,235
(41.4%)

800,274
(27.5%)

647,934
(22.3%)

247,259
(8.5%)

강원

546,569
(59.3%)

240,585
(26.1%)

81,478
(8.8%)

49,954
(5.4%)

충남

402,491
(26.2%)

246,527
(16.1%)

190,772
(12.4%)

691,214
(45.0%)

충북

355,222
(46.9%)

213,851
(28.2%)

83,132
(11.0%)

102,456
(13.5%)

전남

119,229
(8.2%)

16,826
(1.2%)

1,317,990
(90.3%)

4,831
(0.3%)

전북

160,760
(14.1%)

17,130
(1.5%)

948,955
(83.5%)

8,629
(0.8%)

경남

792,757
(41.2%)

987,042
(51.3%)

86,804
(4.5%)

51,242
(2.7%)

경북

1,108,035
(66.4%)

470,189
(28.2%)

39,756
(2.4%)

43,227
(2.6%)

제주

120,502
(49.8%)

64,844
(26.8%)

45,139
(18.6%)

10,930
(4.5%)

4.2. 대선 격전지역[편집]

야권 분열 탓에 전국 각지에서 양김 후보는 노태우 후보에게 각개격파 당했다. 다만 영남을 연고로 한 후보가 두 명이 있었기에 영남 그 중에서도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다소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전국 시, 군, 구 단위에서 1, 2위 후보 간 표 차가 1,000표 미만이었던 곳은 다음과 같다.


이상 5곳에 불과하고 그 중 4곳은 영남 지방인 경상남도이다. 그만큼 야권 분열 때문에 승부가 매우 싱겁게 끝나버렸기 때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5. 결과 분석[편집]

파일:KakaoTalk_20170503_204708932.png
당선 확정 시간이 투표 다음날인 12월 17일 오후 3시 3분, 개표 91.6% 이뤄진 상황이었다.

파일:attachment/uploadfile/13election.jpg
결국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북한의 테러는 분단국가에서 철통 같은 안보가 중요하다는 일명 안정심리와 색깔론을 점화시켰고, 이것이 노태우 당선은 군사정권의 연장이라는 비판을 일정 부분 희석시키면서 유권자들이 선거를 바라보는 구도 자체를 상당부분 바꾸어 버렸다. 막판 노태우의 반등에 북한이 힘을 보탠 셈이다(...). 이때 당선자 득표율이 36.6%이었는데 이는 직접선거로 선출한 대통령 중 가장 낮은 지지율이다.[38] 다시 말해서, 야권의 분열로 인해 국민의 40% 미만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된 셈.[39] 뒤집어보면 북의 테러로 여객기가 폭발하고 수백 명이 사망하는 초유의 북풍이 터졌는데도 집권당 후보의 지지율이 40%에도 못 미쳤다는 건 민정당과 5공화국 정권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웃픈 점은 그나마 13대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얻은 성적표가 5~6공화국 하에서 치러진 모든 전국 단위 선거를 통틀어서 민정당이 얻은 득표 중 가장 좋았다는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직접적인 통제하에서 치러졌던 11대 총선과 12대 총선에서 민정당이 얻었던 득표율이 각각 35.6%와 35.2%였으며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이 얻은 득표율은 34.0%였다. 더군다나 당시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부재자 투표에서 부정선거가 횡행하던 시절인지라 실질적으로 군인표를 빼면 1/3 수준이거나 1/3을 겨우 넘는 수준인 셈이다.

1985년 12대 총선 때의 득표율과 비교해보았을때 호남에서 민정당의 득표율이 전국 평균 수준에서 각각 한자릿수대와 10%대로 20-30% 가량 빠졌고, 민정당이 총선 당시 전국 최대 득표율 56%를 올린 충북에서도 11% 가량 득표가 빠졌으며 충남에서도 마찬가지로 13% 가량 득표율이 빠졌지만, 수도권에서 안보심리가 작용하여 예상보다 득표를 많이 가져간데다가[40] 서울과 TK 이외 지역에서 구 국민당의 표를 상당수 흡수하였으며, 거기에 더해 12대 총선에서 민정당 득표율이 44%로 과반을 넘기지 못한 경북이나[41] 12대 총선에서 신민당이 민정당에게 근소하게 우세했던 대구에서도[42] 양김 분열에 대한 실망과 지역감정 등이 겹쳐져 6.29 선언 직후의 재야의 예측을 완전히 뒤엎고 기어이 각각 66%와 70%를 넘는 득표를 거두는 압승을 거둠으로써 판세를 확정시켰다. 즉, 판세를 전반적으로 보았을때 호남표와 충청표가 여권에서 대거 이탈하여 야권을 지지했지만, TK표의 극적인 결집과 강원도, 경기도, 인천, 경남 등지에서 국민당 표의 부분적인 흡수가 이뤄지며, 이를 통해 호남표와 충청표의 대규모 이탈을 효과적으로 상쇄했다. 그래서 김종필이 표 손해를 많이 본측이라고 할수있다.

결국 김대중 후보를 탈당과 독자출마로 몰고 간 일명 4자 필승론도 결과적으로는 완벽하게 빗나갔다. KAL기 테러 참사 직후였던지라 보수 계층 표가 결집하여 상당수 지역에서 노태우 후보가 앞설 수 있었다. 노태우 후보는 대구, 경북 이외에도 경기, 인천, 강원, 충북, 제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경기도에서 무려 1,204,235표(41.44%)를 득표하여 타 후보들에 비해 우세한 결과를 낳았고, 김영삼 후보의 연고지인 경남에서도 792,757표(41.17%)를 득표하는 선전을 했다. 참고로 노태우 후보는 TK 지역에서 68.1%를 득표했으나, 나머지 TK표는 반대로 김영삼 후보가 제법 가져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호남에서 90% 가까운 득표를 한 김대중 후보만큼 한 지역권내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진 않았다. 한편 노태우 후보는 충청북도에서도 김종필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는데, 김종필 후보는 충남에서만 691,214표(45.03%)로 압승을 거뒀을 뿐 충청북도에서는 김영삼 후보에게도 밀리는 수모를 당한다. 실제로 부산이 주요 지지기반이던 김영삼과 대구가 지지기반이던 노태우는 서로 각자의 도시에서 50~60% 정도의 표밖에 못얻었다. 김영삼이 PK에서 70~80% 정도로 압도적인 지지를 얻을 것이라 예측했던 김대중측의 생각이 빗나간 셈. 대구에서도 김영삼이 47만표(25%) 가까운 득표를 해서 표를 잠식했지만 YS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도 노태우가 무려 80만표(32%)의 득표율을 올려 쌤쌤 상쇄되어버렸다.(...) 특히 대구에서 예상을 깨고 노태우 후보에게 몰표가 나온 것은 당대에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12대 총선 당시 신한민주당이 29.7%로 득표율 1당을 차지한데 반해서 민정당은 겨우 28.3%를 획득하는데 그쳤던데다가 신민당과 민한당의 득표율을 합치면 48.2%로 전국 평균과 비슷했고 민정당과 국민당의 득표율을 합쳐도 43.9%로 밀릴 정도로 야권 성향이 대구에 어느정도 있었는데 지역감정의 발호와 양김의 분열 앞에서 야권 성향이 쏵 사라지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호남맹주 김대중 후보가 승부를 걸었던 수도권의 경우, 최대 승부처답게 예상이 어려웠으나 결과적으로 경기도인천을 노태우 후보가 차지했다. 서울의 경우 세 후보 각각 1~2%P 차이의 혼전을 벌였으나 김대중 후보가 성북구, 종로구, 관악구 등 대부분의 지역에서 승리를 거뒀으며 김영삼 후보의 경우 강남구(현재의 강남구, 서초구), 강동구(현재의 강동구, 송파구), 과천시 등 주로 아파트 밀집지역과 중산층 이상 주거 지역 등에서 1위를 차지한다.[43] 노태우 후보는 경기도 및 수도권 교외 지역 대부분에서 1위를 차지한다. 성남시, 안양시, 광명시, 부천시, 과천시 등 서울 인근 지역에서는 35%이상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으나 파주, 포천, 김포, 연천, 가평, 양평, 여주, 이천 등 경기 북부와 동부에서는 50%가 넘는 득표를 했다.

위의 지역별 득표율을 보면 한 가지 주요한 특징이 발견된다. 부산, 경남과 광주, 호남 지역에서 김영삼(호남), 김대중(영남)[44]의 득표율이 노태우보다 낮았다. 특히 호남 지역의 경우 김영삼의 득표율이 5공화국의 후계자인 노태우보다 낮았다는 사실은, 김영삼과 김대중 지지자의 골이 돌이길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지역 맹주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반영하고 있었다. 87년 대선을 기점으로 한국 정치사는 지역맹주간의 권력투쟁으로 요약되며, 다음년도 88년 총선과 3당 합당을 거치면서 더욱 격화된다. 3당 합당을 통해 영, 호남 지역구도가 완성되었지만 본격화된 시기는 87년 대선으로 이 때부터 정치인은 지역구 당선과 대통령 선거 승리를 위해 지역감정을2 선거전략의 제1순위로 올려놓기 시작했다.

한국갤럽 직업, 소득, 연령별 대선 지지율 조사에 따르면 당시 노태우 후보는 50대 이상 유권자와 농·어민, 불교신자, 주부, 중졸 이하 계층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고,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는 20~30대, 개신교천주교 신자, 고졸대졸 이상, 직업별로는 전문직 및 화이트 칼라 계층이 주요 지지층이었다고 한다. 당시부터 존재하던 세대 갈등 좀 더 세부적으로 보면 대학생은 김대중을, 중산층 및 전문직 계층은 김영삼 후보를 더 많이 지지했다고 한다.

5.1. IF: 만약 단일화를 했었다면, 누가 이겼을까?[편집]

사실 양김은 민주화를 위해 투쟁을 했고, 양김의 지지층 모두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 있었지만, 그 두 명의 지지층은 서로 이질적이었다. 김영삼의 주요 지지층은 원래 PK 지역에 살고 있던 토박이들과 해당 지역 출신들이 다수 포함된 수도권 지역의 중산층이 많았던 반면, 김대중을 주로 지지하는 사람들은 호남 지역 주민들과 수도권, PK 등에 이주해 있던 호남 출신 노동자, 서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영삼의 지지층은 박정희-전두환의 TK정권이 조장한 지역감정에 휘둘렸지만, 부마민주항쟁 같은 TK정권의 박해로 인하여 오히려 박정희-전두환에 대한 반감도 많이 가졌다. 그래서 박정희-전두환에 대한 반감정서는 김대중의 지지층과 공유를 했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없으니 아래 내용은 당시 국민 정서와 판세를 이해하는 내용 정도로만 받아들이자.

5.1.1. 단일화 후보가 이겼을 것이다[편집]

양김이 단일화를 했었다면 단일화 후보가 이겼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부산경남과 호남의 득표율을 동시에 흡수해 민주인사 후보가 승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사실 단일화로 인해, 단일화 후보가 다른 후보의 지지층을 흡수하는 사례는 많았다. 예로 들자면 영호남 지역감정이 생기기 시작한 7대 대선도 김영삼과 단일화를 못했다면 경상도 남부, 즉 부산경남에서 30% 후반의 득표율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김영삼의 사실상 활동 지역이였던 부산광역시에서 40%의 득표율로 선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15대 대선16대 대선 때도 호남-충청연합인 DJP연합과 울산을 대표하는 정몽준과 부산, 경남을 대표하는 노무현의 단일화로 김대중, 노무현이 다른 후보의 지지층을 흡수하기도 했다.[45]

그렇기 때문에 양김이 단일화를 했다면 "혹시 김영삼(김대중)이 당선되면, 우리지역에도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독재자보다는 낫다"라는 심정으로 단일화 후보에게 투표를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긴 하다. 실제 1985년 12대 총선을 보면 양김이 사실상 합동으로 선거운동을 했고, 그 결과 대구에서도 신민당이 민정당에 1.4% 가량 앞서는 결과가 나왔기에 설득력은 제법 있는 가설이다. 다만 이를 두고 지금의 지역감정과 연관짓는 것은 좀 무리가 있는 것이 당시 지역감정과 이후 정계 개편이 이뤄지며 구도가 바뀌고 인터넷이 대중화되는 등 사회도 많이 개방화된 지금의 지역감정은 서로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한다.[46]

5.1.2. 노태우가 이겼을 것이다[편집]

국민들이 군부독재와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감을 가지곤 있었지만 당시 순항하던 세계 경제 정세와 맞물려 이뤄진, 마이카 시대로 대변되는 저물가 고성장[47] 시대를 이뤄낸 당시 집권여당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48] 노태우 후보가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비교적 고른 지지를 얻으면서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 또 PK의 경우 실제 투표에서 김대중보다 노태우가 훨씬 많은 득표를 했는데 이는 PK 역시 군부독재 시절 TK만큼은 못해도 제법 많은 경제적 혜택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PK 유권자들 중 일부에선 영남을 강조하며 "호남 사람이 대통령 되는 것은 절대로 안 돼"라는 지역주의 정서 역시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김대중 후보로 야권이 단일화했으면 부울경과 그 지역 출신들이 많은 지역에선 그동안 자신들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던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게 표를 줄 가능성도 있었고, 그러면 단일화 후보의 득표율은 양김의 단순 합산 비율인 55%까지는 안 나올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이다.[49] 반대로 호남에서는 당시 영남에 대한 비토가 심했는데, 왜냐하면 당시 호남은 TK정권이라고 불린 박정희-전두환 정부의 개발 정책에서도 소외되어있었을 뿐더러 무려 7년 전엔 끔찍한 학살을 겪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고로 PK의 김영삼에 대해서도 "그래봤자 같은 영남 아냐?"란 어느 정도의 비토는 있었고, 김영삼으로 단일화 했다고 해도 호남 유권자와 노동자들 표 일부는 떨어져 나갔을 확률이 있다. 다만 호남 유권자가 YS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DJ라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군부 핵심인 노태우에게 표를 주었을 가능성은 낮아보이므로, YS로 단일화 됐을 경우엔 아무래도 노태우가 당선될 가능성은 많이 떨어졌을 것이다.

6. 논란[편집]

6.1. 컴퓨터 여론 조작설[편집]

선거가 끝난 후 사람들은 결과에 어안이 벙벙했다. 여론조사가 발표되지 않았을 뿐더러, 이전 선거와 판이하게 다른 결과, 즉 각 후보들이 자기 지역에서 이토록 강력한 지지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호남에서 김대중 몰표가 그랬다. 이에 김영삼, 김대중 후보는 선거 후 광고를 내면서 "적당한 수치로 여론조작을 해서 발표했다"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앨빈 토플러의 저서 "미래 쇼크"에서도 정보시대의 특성을 다루는 한 사례로 이 사건을 언급했을 정도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냥 헛소문이었다. 이후로도 14대 대선16대 대선 등에서 컴퓨터 여론조작설이 나왔지만 모두 정확한 근거는 없었다. 14대 대선에서 컴퓨터 조작설과 검증을 내세운 정주영 후보 측의 공조 요청에 김대중이 실소한 것도 이때 이미 한 번 당해봤기 때문. 하지만 공교롭게도 5개월 후에 제주 MBC에서 선거방송 리허설을 하다가 그 장면이 송출되는 방송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이 설이 잠시나마 설득력을 얻어 민정당이 제주도에서 전패하기도 했다.

한편, 김영삼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학적인 여론조사와 선거전략의 필요성을 절감, 미래의 소통령 차남 김현철에게 이 임무를 맡긴다. 그리고 김현철 산하의 여론조사팀은 1995년 당시 여당이던 민주자유당이 창립한 여의도연구소의 바탕이 된다.

6.2. 부재자 투표 조작 논란[편집]

구로구청에서 투표가 진행 중이던 투표일 오전 11시에 구로구 선관위가 의문의 투표함을 몰래 빼돌리다가 발각되었고, 이어서 의문의 투표함과 투표용지, 인주 등이 연달아 발견되었다. 결국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과 학생들이 구로구청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고, 정부는 백골단 등의 용역, 최루탄을 동원하면서 진압, 1,034명을 연행하고 208명을 구속했다.# 참고로 이 당시 구속된 시민들 중 일부는 2001년에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다만 이 시점에서 이 투표함이 부정투표의 결과물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었으므로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인한 피해를 인정받은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후 선관위가 문제의 투표함을 되찾았으나 이미 대선 결과에서 노태우 후보와 김영삼 후보의 표차가 200만 표 가까이나 났기 때문에 당락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하여 이 투표함은 개표되지 않았다. 이 투표함은 개표되지 못하고 있었다가 2016년에 와서야 개표되었다. 개표 결과는 유효표 4243표 중 노태우가 73.8%인 3133표를 득표했고, 김대중 575표, 김영삼 404표, 김종필 130표, 신정일 1표 순.# 참고로 구로구 을 선거구에서 노태우 후보가 득표한 비율은 28%였다.

또한 적어도 1992년 총선 때까지 군 부재자 투표에 부정이 있었다이지문 중위의 폭로가 나왔던 걸 봐서는 당시 전국단위 선거를 치렀을 때 군인을 대상으로 한 부재자 투표에서 광범위한 부정이 저질러졌다는 걸 유추할 수가 있다. 해당 시기, 즉 쌍팔년도 군대에서 군생활을 한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암만 끝물이라고 해도 군사정권의 영향력은 여전히 미쳤을 테니 감히 야당 후보를 찍을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한다. 결론은 어쨌든 부정은 부정이라는 것이다

7. 여파[편집]

노태우 득표율이 낮다고 까이긴 했지만, 사실 김종필 후보의 경우 당 이름 신민주공화당에서 볼 수 있듯 말 그대로 민주공화당의 계승을 표방하고 있었기에 비슷한 성향의 노태우와 김종필의 표를 합치면 44.7%의 표 비율이 나타나긴 한다. 그러나 이는 양김 후보의 55%에 비해 훨씬 적은 것이다. 게다가 상술했듯 조작설까지 나도는 판국이니 그럼에도 양김이 졌다는건 당시 군부와 일부 보수세력이 김종필 대신 노태우로 사실상 단일화해 표를 몰아준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찌됐든 12대 총선에 비해서도 보-혁 간의 격차가 훨씬 벌어진건 부정할 수 없었기에 이에 조바심을 느낀 노태우는 1990년 3당합당을 시도하고, 이후 남은 범민주 세력이 이때의 득표율을 넘는건 2002년 16대 대선으로 12년이 더 필요했다.

13대 대선과 뒤이어 치뤄진 13대 총선은 "TK vs PK vs 충청 vs 호남"의 지역구도를 확연히 드러내어 당시 그나마 주춤하던 지역감정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1990년 3당합당은 호남권의 소외를 이어지게 한다.[50] 또한, 양김의 분열로 인해 기존 민주권이 분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6월 항쟁의 주도 세력들이 진보보수로 갈라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물론 양김의 분열이 당시 기준 직접적으로 보수-진보를 가르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기는 좀 어려운 것이, 진보측 (특히 경제적 진보주의자) 입장에선 양김 모두 자유주의 중도우파 정도 스탠스였지 대놓고 사민주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김영삼이 '의회민주주의'을 내세우고, 평민당의 김대중은 '재야 세력'을 끌어안으면서 조금씩 정치적 색깔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한편, 이런 구도는 이른바 '보스 정치'로 알려진 스타 정치인 위주의 정치가 성행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독재 세력을 청산하고 민주 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국민의 열망이 야권에 의해 스스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좌절감과 충격을 안긴 역대 최악의 선거로 꼽히기도 한다.[51] 때문에 양김은 눈앞의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국가의 미래를 망쳤다는 혹평에서 평생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불어 김대중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자기가 말한 연설문의 내용을 그대로 실천했다는(...) 까임도 받았다.[52] 그리고 늦게서야 그나마 정신을 차린 김대중김영삼"그때 나라도 양보했어야 했다"며 이 일을 후회하는 언급을 여러번 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

그렇지만 당선된 노태우 후보도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선 당시 나타난 노태우의 낮은 득표율은 13대 총선에서도 이어져 여소야대로 역대 세 번째의 여당 최소 의석(125석)을 확보하게 되며[53], 여소야대 국회에서 호남 지역구 압승으로 부활한 김대중과 만만치 않은 의석을 얻은 김영삼은 김종필과 공조하며 6공을 몰아붙이면서 어느정도 관계가 회복된다. 이때문에 노태우 정권은 부족한 정통성과 낮은 지지 속에 고생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돌파하고자 1990년 3당 합당이란 빅 정계개편안을 구상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고도 임기 말년엔 낮은 정권 지지율 속에 당 총재직 반납과 탈당이란 수모를 당하게 되고이런거 보면 경제가 순항해도 정권 지지율이랑은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걸 알 수 있다, 이후 YS정권에선 알다시피 전두환과 함께 구속된다.(...) 안습

이 선거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는 단일화에 실패했고, 이때 어그러진 사이는 2009년 YS가 DJ 병문안을 가면서 화해의 메시지를 전할 때까지 쉽게 복원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향후 전망이었는데, 87년에는 운좋게 김종필이 나와 4자 구도가 되었지만, 선거 결과 3강 1약 구도가 확인된 이상 JP를 제외하면 향후 대선에서도 대선후보가 1여 2야(YS, DJ) 구도일 경우 YS나 DJ가 당선될 가능성은 솔직히 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전망은 결국 1990년 노태우의 3당합당 제의에 YS가 응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YS는 3당합당을 통한 집권에 성공해 하나회 세력을 축출하는 등 성과도 냈지만, 정권 말기 인기가 떨어지며 구 세력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PK라는 지역 기반만 보수정당에 홀라당 내주는 결과도 냈다. 그리고 몇 년 후 DJ 역시 DJP연합을 만들어 당시 YS에게 팽당한 김종필과 박태준을 끌어안고, 용서와 화합이란 명분 아래 전직 대통령들의 사면 건의를 하는 등 군부 세력과 일정부분 손을 잡게 된다. 만약 1987년 단일화가 되었고 반공 이미지가 강했던 YS가 당선됐다면 군부 세력과 피를 섞지 않고 정권교체가 되어 좀 더 청산에 명분이 있었을 것이고, 이를 발판으로 92년 대선에는 DJ가 당선됐을 지도 모른다는 점에선 아쉬운 대목이다.[54]

참고로 이때의 야권단일화 실패가 저 멀리 칠레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1988년 국민투표 직후에 피노체트의 힘이 급속히 약화되고 칠레가 민주화의 길로 접어들무렵, 칠레 야권이 해외 각국의 선거과정을 연구하던 과정에서 한국의 단일화 실패로 인해 군사정권이 정권연장을 했던 사례에 주목했던 것이었다. 물론 단일후보를 선출하는데 있어서 마찰이 없던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1989년 대통령 선거에서 단일후보를 내는데 성공을 거두면서, 여권후보를 더블 스코어에 가까운 차이로 정권을 차지했으며 20년간 안정적으로 집권할수있었다.

8. 관련 항목[편집]

[1] 이미 1971년 7대 대선부터 지역구도는 어느 정도 있었지만, 도시가 많았던 부산경남 지역에서는 그래도 지역구도가 덜 심했다.[2] 김대중이 유신체제, 신군부 등으로부터 수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옥고를 치르면서 살아남은 재야의 투사였다면, 김영삼은 야당의 당수로서 제도적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민주 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외국의 사례로 비유하자면 김대중은 넬슨 만델라(남아공 아프리카 민족회의), 김영삼은 레흐 바웬사(폴란드 자유노조)에 해당하는 역할을 했던 셈.[3] 이들의 협력관계는 이 대선 이후 깨졌고, 3당 합당 이후 반목이 최고조로 커졌다가, 2010년대가 되어서야 진정이 되고, 마침내 제19대 대통령 선거때는 둘의 아들이 동시에 더불어민주당에서 활동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4] 물론 군사정권의 저열한 정치공작 때문에 김영삼도 야당 내에서 사꾸라들과 싸우느라 힘겨웠고, 정치공작이 더이상 통하지 않자 박정희 정권은 아예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하는 폭압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여기서 더 나가 박정희는 김영삼을 체포 후 감금할 것을 지시했는데, 작전실행 4일 전에 김재규한테 살해당하면서 없던 일이 돼버렸다.[5] 대표적으로 최형우가 회장을 맡고 상도동계 인사들이 관리하던 민주산악회가 있었다. 김영삼은 가택연금에서 풀린 뒤에는 민주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매주 전국의 명산을 올랐다.[6] 당시 통일민주당은 전국조직이 완전하게 갖춰진 상태가 아니었다. 특히 충청, 강원 지역의 경우 국회의원 선거구에 지역사무소는커녕 당원 한 명도 없는 곳도 있을 지경이었다. 오랜 기간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야당 조직이 무너진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런 상태에서 선거를 치룰 수는 없기 때문에 김대중은 시급히 39곳의 지구당을 창당해야 한다고 제안한 것이다. 물론 이곳들의 지역책임자로는 자신과 가까운 인사들을 대다수 추천했다. 즉 자기 쪽 지분도 인정해달라는 의미인 것이다.[7] 이 경선안을 계속 주장한 게 홍사덕이다.[8] 당시의 김대중은 확고한 한미동맹 관계와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만 빼면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세력에 많이 가까웠다. 국가보안법 완전폐지, 노동3권 완전보장, 공무원/교사 노조 허용, 국제노동기구(ILO) 가입을 내걸고 있었다.[9]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게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킨다.[10] 하지만 독자후보추대파들도 민주화를 위해선 단일화가 필요하다는 쪽이였고, 실제 백기완 후보는 선거운동 도중에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면서 사퇴하였다.[11] 본래 성균관대 정치학 교수 출신으로 이후 국회의원, 성균관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2009년 타계.[12] 구체적으로 대통령 후보는 김영삼, 당총재와 국회의원 공천권의 70%는 김대중이 갖는다는 안이었다. 당내 지분을 '김영삼3:김대중7'로 나누는 것으로 일견 김영삼이 일방적으로 불리해 보이지만, 대선에서 승리하면 김영삼이 막강한 대권을 쥐는 것이므로 사실상 동등하다는 게 재야 쪽 논리였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특히 제왕적 대통령이란 평가까지 나오는 게 한국 대통령이므로 당시엔 나름대로 균형을 맞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13] 여기서 당권이란 건 결국 국회의원 공천권이다.[14] 대선국면이 본격화되면서 상도동계 일각에서는 대권과 당권의 분리는 선거유세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들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권은 소장파의 김대중에게, 당권은 대여온건파의 유진산에게로 분리되면서 일사분란한 선거운동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래서 패배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 제7대 대선은 군사정권의 막대한 금권, 관권, 부정선거로 패배한 것이란게 정치권과 야당 지지자들의 중론이다. 지금도 대권/당권 분리 때문에 패했다고 보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15] 이보다 앞선 서울의 봄 시절, 훗날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에게 체포되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조차도 "다른 후보는 모르겠지만 김대중 후보는 사상이 불순한 자다. 김대중 후보가 대선에서 당선된다면 군부는 좌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지경이었다. 신군부 반란군에게 체포된, 정치군인과는 거리가 먼 그조차도 당시 그런 인식을 가졌을 지경이니... 그래서인지, 정승화는 13대 대선에서 김영삼의 편을 들어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영입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의 유일한 정당인 활동이었다.[16] 소위 군부 김대중 비토론은 당대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군사정권의 호남차별과 색깔론 공세가 이런 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김영삼은 과거에 모친이 북한 공비에게 살해당했고, 그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기에 군부도 감히 빨갱이 이미지를 씌울 수가 없었다. 후에 한겨레가 YS에 대해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워낙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이라 묻혀버렸다.[17] 지금이야 김대중과 김영삼 모두 특정 정파의 보스 정도로 여겨지기 일쑤지만, 1987년 당시까지만 해도 양김은 민주화의 거목으로 존경받는 정치지도자, 선구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둘 중 한쪽을 지지하는 사람도 다른 쪽을 감히 나쁘게 말하지는 않았다. 이후 한국의 대표적인 우파논객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된 조갑제 같은 이도 군사독재시대에는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다고 회상할 정도.[18] 일설에는 김대중의 출마를 당시 정권이 이면에서 부추겼다는 주장도 있다. 지지자들을 위장해서 수많은 지지편지와 선거자금을 보내고, 김대중이 유리하다는 정보를 계속 흘려서 독자출마로 유도했다는 것이다.[19] 6·29선언의 전말을 김성익에게 얘기할 때에도 전두환은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김대중을 풀어 출마하도록 하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렇게까지 확신을 했고 꼭 김대중과 김영삼, 이 두 사람이 갈라져서 따로따로 후보로 나와야 한다고 봤다. - 서중석교수(프레시안 기고문).[20] 이때 동교동계에서 분열은 패배라면서 유일하게 따라가지 않고 통일민주당에 잔류한게 김상현(1935) 의원이다. 김상현은 김대중의 미국 망명 기간 중에 국내에서 그를 대리해서 민추협 의장권한대행을 맡을 정도의 최측근이었으나, 이때 결별하면서 감정의 앙금이 쌓이게 된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2000년 총선을 앞두고 김상현이 세대교체라는 명분으로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다들 김대중 대통령의 의중으로 해석하였다. 이떄 김상현은 "내가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국회에 들어간다"라고 호언장담하면서 민주국민당(2000년)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21] 이들 7인의 서명파는 다음해인 1988년 13대 총선에 전부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박찬종만 당선되고 나머지는 모두 낙선하였다. 이후에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22] 당시 국회의원 지역구 분포를 봤을 때 20%면 호남지역과 서울 몇 자리 정도에 해당한다. 즉 자신을 따르는 동교동계 인사들의 자리를 보장하라는 것이다.[23] 옛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이 당내 대선후보경선에서 패할 때 김대중에게 아무런 지분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대중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영삼에 비해 세력도 훨씬 딸리면서 자꾸 지분 달라며 김영삼에게 지저분하게 흥정을 요구해대니 김영삼 입장에서는 짜증이 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전 버전에 누가 적었는데 이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1971년 7대 대선 당시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였지만, 당 총재는 아니었다. 즉, 국회의원 공천권은 없었다는 이야기. 오히려 유진산 총재와 김영삼, 고흥문 등의 범주류(속칭 진산계)가 당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미 자신들이 당을 장악하고 있는데 뭘 또 요구를 하냐는 것. 그리고 7대 대선 직후에 치뤄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야당인 신민당의 국회의원 공천은 당 총재였던 유진산이 직접 했으며, 이 과정에서 진산 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반면, 1987년 김영삼은 내가 대통령도 하고 (국회의원 공천권을 가진) 당 총재도 해야겠다는 식으로 나온 것 아니냐는 것이다.[24] 그리고 7대 대선 당시 양김의 후보 단일화 국면을 13대 대선의 경우와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도 적절치 못한 것이, 69~71년의 양김은 40대 기수론에 힘입어 등장한 젊은 신진 정치인으로써 "젖비린내 나는 정치 소년" 이라는 평가까지 받는 소장파 정치인이었다. 즉, 동교동계/상도동계라 불리는 독자적인 정치세력과 청년 및 학생층/중산층 및 전문직 계층이라는 지지기반을 가진 노련한 정치인이 된 13대 대선 당시와는 전혀 다른 처지였던 것. 김대중에게도 자신이 책임지고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정치적 기반이 있는 상태에서 그에 해당하는 지분 요구를 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니고, 옳은 일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게다가 '김대중의 세력이 김영삼보다 훨씬 딸렸다'는 서술 역시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당장 독자 출마한 두 후보의 특표율은 28%와 27%로 고작 1% 차이에 불과했다. 즉,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인 양보를 요구하기에는 두 사람의 정치적 세력이 사실상 동등했다는 것. 짜증날 만 하다고 말한다면 동등한 두 세력간의 연대에 대해 논의하면서 상대에게 사실상 대가 없이 자기 지분을 포기하라고 요구한 김영삼에 대해 김대중 역시 짜증이 났을 수도 있을 것이며, 두 사람이 아직 한국 정치계를 양분하는 거물 정치가로 자리잡기 이전인 7대 대선 당시의 양보를 근거로 13대 대선에는 왜 같은 수준의 양보를 하지 못했느냐고 말하는 것은... 조금 조악하게 비유하자면, 젊은 시절 상대의 사업을 도와준 적이 있다고 해서 나중에 이를 근거로 크게 성장한 상대의 사업체를 통채로 내 달라고 하는 억지처럼 느껴질수도 있다는 것.[25] 한편, 1971년 선거 당시 당내 비주류였던 김대중이 경선에서 이기기 위해 유진산계에서 김영삼 다음이었던 이철승에게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당권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설도 있다. (허나 결국 김대중은 대선에서 졌고, 오늘내일하던 유진산도 살았고, 김영삼은 여전히 강력했기에, 주화입마한 이철승은 결국 차지철과 꽁냥꽁냥한다.) 이 설이 맞다면 어쩌면 김대중은 이 때를 생각하고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 자신에게 당권을 달라 한 것일지도 모른다.[26] 당초에는 신민당이 10석에서 많아봐야 30석 정도의 결과가 나왔는데 실제 선거결과는 신민당이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 주요대도시 지역에서 민정당을 앞섰고, 전체적인 득표율에서도 부재자투표 부정이라는 악재에도 민정당에 고작 6% 뒤쳐지는 선전을 보였다.[27] 김영삼 후보는 당시 이 보도를 믿고 있었으므로 최후까지 후보 단일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28] 실제 부정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김영삼은 여론조사가 선거 전략 수립에 미치는 영향을 통감하고 다음 대선에서는 선거 캠프 내에 동숭동팀이라는 자체 여론조사 팀을 꾸리게 된다. 이를 기획한 사람이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29] 사실 노태우 후보 진영에서는 YS가 정승화 前 육군 참모총장을 영입하여 12.12 군사반란을 언급하며 여권을 공격했던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노태우가 훗날 "이 일(정승화의 입당)이 선거 초반에 일어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일 막바지에 나타났다면 고전(苦戰)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고 회고하기도 했으며, 김영삼 후보 진영에서는 정승화 前 참모총장 영입 직후의 분위기가 유지됐다면 무조건 이기는 선거였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30]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내각제를 꿈꾸던 (혹은 박정희 다음 대권을 노리던) 김종필이 유신에 별 호감을 못 느꼈던 건 맞는다. 거기에 80년대 전두환 정권 시기 박정희 정권 지우기와 맞물려(정권 선명성 부각을 위해 유신정권을 철저한 부패정권으로 낙인찍었고, 이로 인해 박정희 추도식도 못열게 할 정도였다. 독재자의 적은 독재자), 구시대 정치인으로 몰리던 김종필이 어느 정도 자구책으로 유신을 부정한 측면도 있다.[31] 고로 노태우 입장에서 바꾸어 말하면 이 점을 부각시킬 의도였다는 말로도 해석 가능하다. 참고로 노태우 본인도 원랜 대통령제보다 의원 내각제를 선호했으나, 6월 항쟁 당시 유신체제 등 간선제에 질려있던 국민들의 뜻을 수용해 대통령 직선제를 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32] 김영삼은 어머니가 북한 공비에게 피살당했기에, 군사정권들도 김대중에게는 빨갱이 이미지을 씌웠어도 김영삼에게는 대놓고 사상이 불순하다며 몰아세울 수가 없었다.[33] 한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으로 아들이 전인범 예비역 중장. 또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이기도 하다.[34] 얼마 남지 않고 관제 야당으로 전락한 혁신주의 사민주의 세력의 후보다. 김영삼 지지를 주장하며 사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홍숙자 후보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사퇴를 통보하기 전에, 사회민주당 측에서 홍숙자 후보의 당적을 박탈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통보하였다. 자신을 공천한 사회민주당과 협의하지 않고 후보 개인이 독단적으로 김영삼 지지를 선언했기 때문.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사퇴'가 아닌 정당 공천으로 출마한 후보가 당적을 이탈한 데 따른 '등록무효'이다. [35]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지도자이다. 해양수산부장관을 역임한 국회의원 김선길의 친형.[36] 양김이 분열되자 "재야 후보"로 출마했으나 군부 독재 종식을 내세우며 사퇴, 이후 14대 대선에서도 다시 출마했다.[37] 단 이곳의 2위는 김대중 후보여서 김대중 후보와의 표차이다.[38] 2위가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의 40.3%.[39] 훗날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가 회고록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노태우 후보 당선 확정 이후 노태우의 부인 김옥숙을 만났는데 그녀가 싸늘하게 "민정당이 얼마나 인기가 없던지 하마터면 떨어질 뻔 했다"고 말해 놀랐다고 한다. 사실 이때부터 두 집안은 사이가 썩 좋진 않았는데, 이를 이순자는 '애증관계'라고 표현했다.[40] 일례로 12대 총선 당시 서울에서 민정당의 득표율이 27%에 그쳤는데 노태우 후보는 30%를 얻었다.[41] 국민당과 합치면 61%에 달하기는 했다.[42] 당시 대구 총선에서 민정당은 28%의 득표율을 올려서 약 30%의 득표율을 올린 신민당에 근소하게 뒤졌다.[43] 이러한 지역들은 3당 합당 후 민자당 - 신한국당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보수 계열 강세지역이 되었다.[44] 영호남 지역감정이 매우 극심한 시절이어서 대구와 경상북도에서는 김대중 득표율이 김종필 득표율보다 낮았으며 그 다음 14대 대선에서는 전국 4위 득표율을 기록한 박찬종보다도 표가 덜 나왔다.[45] 김대중김종필의 지역기반인 충청도, 노무현정몽준의 지역기반인 울산광역시.[46] 실제 2017년 19대 대선에선 YS 아들 김현철과 DJ 아들 김홍걸이 같이 문재인 캠프 선거운동을 하는 등 동서 화합의 포지션을 취하자 부산, 울산과 호남에서 문재인이 모두 우세를 취하긴 했지만, 톡 깨놓고 말해서 이는 상징성 측면이 크고 (실제 이들의 선거 활동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사실은 20대 총선 결과만 봐도 알 수 있듯 이들과 상관없이 문재인은 양쪽 지역에서 제법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거 구도가 애초 유리했고, PK 출신이자 당내 주류인 문재인이 기반은 또 호남에 둔 정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대권후보가 된 것이기 때문에 이 당시 양김과는 케이스가 좀 많이 다르다. 오히려 이는 양김이 못이룬 동서화합을 이후 그들의 후배들인 노무현, 문재인, 김부겸, 김영춘 등이 꾸준히 노력해서 일군 결과의 일부라고 보는게 더 타당할 것이다.[47] 유신정권 시절은 석유파동, 부가세 시행 등과 맞물려 물가상승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더 높은 고물가 시대였다. 반면 전두환 집권기는 83년 이후부터 물가가 잡히면서 일명 3저 시대를 맞게 된다. 유가는 이란-이라크 전쟁이었고 나머지 두 개는 미국발.[48] 참고로 훗날 전두환은 당시 본인이 경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니 경제 문제는 죄다 전문가들에게 맡겼다면서 미담처럼 회고하기도 했다. [49] 물론 이에 대해선 애초 단일화에 실패한 양김에 대한 실망감에 이탈한 지지층이 있기 때문에 단일화 했으면 오히려 단순 합산보다 더 올랐을 것이란 반론도 있긴 하다. 역사에 IF란 없지만.[50] 다만, 충청의 경우 3당합당 당시에는 보수에 좀 더 표를 주는 지역이었으나, 훗날 김종필이 김대중과 DJP연합을 하며 DJ측에 편입되자 반대로 김대중의 당선에 큰 기여를 하기도 한다. 15대 대선 당시 경북+경남의 이회창 vs 전라+충청의 김대중 구도가 난 것도 이 영향이었다. 그리고 지역정당이 붕괴된 2천년대 이후부턴 본격적인 캐스팅 보트 지역으로 거듭나게 된다. 참고로 13대 대선 이후 영호남 구도가 거의 처음으로 깨지게 된 대선은 2017년 19대 대선이다.[51] 극단적으로는 10월 유신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선출보다도 더 나쁘게 보는 사람도 있다. 말 그대로 다된 밥에 재를 뿌린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52]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저도 권력욕에 휩싸였다는 여러 많은 사람들과 똑같이 되지 말라고 장담할 순 없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권력이라는 것이 진짜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53] 국회의원 수가 200명 이상이 된 헌정 이후부터 여당이 최소 의석이 된 사례를 보자면 1등은 16대 총선, 2등은 20대 총선이다. 하지만 사실 13대 총선의 경우 전국구(비례대표) 1당이 득표율과 상관없이 무조건 절반의 의석을 가져간다는 이상한 룰 때문에 가능했던 의석수라 득표율대로 의석수를 배분하면 사실상 꼴찌다.(...) 게다가 16대 총선의 경우에는 민주당-자민련 연립 정부를 구성하던 시기라 사실상 여권 성향 의석은 더 많았다고 봐야 한다.[54] 번외긴 하지만, 남북회담을 앞두고 1994년 급사한 김일성이나 IMF 당시 차관을 거부한 일본과의 외교관계 등을 생각하면 80년대 후반 YS-90년대 초반 DJ가 집권했을시 통일이나 IMF 문제에서도 뭔가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긴 하다. 물론 역사에 IF란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