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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1세

최근 수정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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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제임스 6세(스코틀랜드)/제임스 1세(잉글랜드)
(James VI of Scotland & I of England)

부친

헨리 스튜어트

모후

메리 스튜어트

생몰년

1566년 6월 19일 ~ 1625년 3월 27일 (만 58세)

재위기간
(스코틀랜드국왕)

1567년 7월 24일 ~ 1625년 3월 27일(57년 246일)

재위기간
(잉글랜드의 국왕)

1603년 3월 24일 ~ 1625년 3월 27일(22년 3일)

대관식

1567년 7월 29일(스코틀랜드)
1603년 7월 25일(잉글랜드)

장례식

1625년 5월 7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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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한살배기 왕3. 꿔다놓은 보릿자루 임금님4. 기타

1. 개요[편집]

영국의 국왕. 최초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를 통치하게 된 영국의 국왕으로, 스스로를 "그레이트 브리튼의 왕"으로 칭했다. 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는 '제임스 6세', 잉글랜드 국왕으로서는 '제임스 1세'라고 불리는데, 대체로 후자 쪽이 유명하다.[1]

제임스 1세의 치세에는 의회의 입김이 늘어났고, 제임스 1세 자신조차 전국에 성공회를 강요하는 등 여러 마찰을 빚었다. 때문에, 암살당하지 않았느냐는 의혹도 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 시절과 달리 대외 전쟁에 시달리며 국고가 파탄나는 일만은 피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는 그럭저럭 사랑받았다. 또한 처음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 왕국을 다스리면서도 아무쪼록 본인의 치세에는 큰 혼란없이 나라를 유지하였다는 치적도 있다. 전반적으로 이전에만 하더라도 엘라자베스 1세의 후광에 짓눌려 암군의 평가를 받았으나 최근에 와서 나름 무난하게 나라를 다스린, 뛰어난 명군은 아니지만 암군이라고는 할 수 없는 재평가를 받고 있다. 기본적으로 잉글랜드만 다스렸던 엘리자베스와 달리, 스코틀랜드의 군주 까지 겸임해야 했기 때문에 통치의 난이도도 훠어얼씬 높았던 제임스 입장에서 엘리자베스와 직접 비교하는 건 굉장히 억울한 평가일 것이다. 실제로 잉글랜드 중심의 보편적인 영국사에서 스코틀랜드가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던 비중과 그 역사가 제대로 조명 받게 된건 역사학계 내에서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그 이전 까지만 하더라도 잉글랜드 왕이 되기 이전 스코틀랜드에서의 시절은 그냥 악세사리 취급하다가[2] 최근에 와서야 제대로 스코틀랜드 역사와 그 안에서 제임스의 비중이 재부각 되었으며, 그 내부를 뜯어 보면 이러나 저러나 정복왕 윌리엄 이후 전통적으로 왕권이 강력했던 잉글랜드와 달리 스코틀랜드는 군주노릇 해먹기 더럽게 어려웠던 곳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평가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

2. 한살배기 왕[편집]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로, 스코틀랜드 내부의 복잡한 사정에 의해 어머니 메리 스튜어트가 남편 살해와 유부남과 간통으로 스코틀랜드에서폐위되었다가 지지자들을 모아 전투를 치룬끝에 다시 패배하여 잉글랜드로 도망간 탓에 1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위에서 말한대로 어머니가 도망갔기에 갓난아기인데도 왕이 되었고, 아버지는 그보다 더 전에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4명의 섭정이 통치를 했다. 그러나 이내 섭정들간의 다툼으로 일부 섭정이 살해당했으며, 청소년기에 고리 백작의 저택을 방문하면서 백작과 그 아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생겨서 민심이 나빠졌다. 그래도 스코틀랜드인들에게서는 모처럼 평온을 가져왔기 때문에 좋은 왕이라고 평판을 들었지만...

나중에 엘리자베스 1세[3]가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했을 때, 제임스 1세의 어머니 메리 스튜어트는 출산 한달 후에 애를 내팽겨치고 놀러갔고, 그 이후로 몇번 재회했으나 재혼 후 새남편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이 자신의 혈통을 왕으로 삼는데 방해가 될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는데 어머니가 협조했기 때문에 당연히 모정같은건 전혀 없었다.

어머니가 재판장에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대사를 통해 어머니의 목숨만은 살려줄것을 요청하기는 했으나, 메리 스튜어트는 계속 복위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데다 종교가 달라서 정치적 입장도 전혀 달랐고 엘리자베스 1세의 추정상속자인 자신이 잉글랜드 왕위를 얻는데 방해요소가 되기에 구명에 적극적이지도 않고,[4] 어머니가 처형당한 후에 이를 빌미삼아 잉글랜드와의 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버지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처형당했을 때 기뻐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이야기의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제임스 6세의[5] 권력과 지지 기반은 바로 전 시대 자기 어머니를 필두로 한 친프랑스파 가톨릭 귀족들과의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끝에 스코틀랜드의 지배계급으로 자리잡은 로우랜드의 칼뱅파 귀족들과 하이랜드의 클랜들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처형을 방조하는게 사실 당연했다.[6]

3. 꿔다놓은 보릿자루 임금님[편집]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없이 사망하여 튜더 왕조가 단절되었다. 이에 튜더 왕조의 유일한 후손이었던 제임스 6세는 36세의 나이로 잉글랜드의 왕관까지 쓰게 되어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를 개창하게 된다. 그의 어머니 메리 스튜어트는 헨리 7세의 딸 마거릿의 손녀였고 엘리자베스 1세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상속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운좋게 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 연합 왕국 국왕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의 호평과는 달리, 잉글랜드에서는 말더듬이수전증 등의 신체적 허약함 등으로 까였다. 제임스 1세는 청교도와 가톨릭 교도를 동시에 견제하여, 성공회만을 강요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개신교파의 거두였대며? 연합왕국 왕이 되어보니까 내가 교회 수장까지 해먹는게 더 좋은 것 같아 이에 크게 실망한 카톨릭 교도들은 왕을 암살하기 위해 상원의회 지하에 대량의 흑색화약을 매설하여 폭파시킨다는 계획을 실행일보직전까지 갔지만 밀고로 실패하여 가이 포크스 같은 실행범과 배후세력이 줄줄히 처형당했다. 이걸 제임스 1세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병크라고만 할 수 없는 어느 정도의 군왕적인 비전이라 할 수 있는게, 제임스 1세는 애초에 급진 개신교 성향이며 주교-사제-평신도로 이루어지는 체계적인 교회조직 자체를 가톨릭의 유산이자 악마의 씨앗으로 취급한 급진 개신교 성향의 잉글랜드 청교도와 스코틀랜드 칼뱅교, 헨리 8세-에드워드6세-엘리자베스 치세의 탄압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꿋꿋히 버티고 있는 가톨릭이 산재해있는 영국의 복잡한 종교적인 상황과 그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있는 영국 국교회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여러 발언과 집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7]

제임스 1세는 이 상황을 타개하고 안정적이고 외부세력에게 휘둘리지 않는[8] 독립적인 국가적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국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했고, 이 개혁의 방향이 곧 지금 현대 국교회의 모습, 즉 신학적으로는 개신교의 것을 따르되 가톨릭같은 교회조직은 유지하는 것이었다. 킹 제임스 성경의 발간만 하더라도 이러한 정치적인 맥락이 뚜렷이 있었으며, 제임스 1세의 치세만 하더라도 이게 그렇게 큰 반발을 사지 않았다. 스튜어트 왕가의 종교적 삽질이 의회와 귀족들의 분노를 사게 되는 건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가 똑같은 국교회 개혁안을 여유없이 이리저리 휘둘러 되는 것이었는데, 이를 뒤집어 말하면 똑같은 일을 추진하면서도 제임스 1세는 나름의 정치적인 수완과 리더쉽, 소통력이 있어서 큰 반발없이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여 왕권=신의 대리인 이란 썰을 내세워 자신을 법과 의회보다 높은 존재로 여겼으므로 법이 왕과 의회보다 우월하다는 귀족들의 주장과 대립했다. 위의 국교회 개혁 의지 또한 15세기 말 이사벨라 여왕페르난도 2세 아래 이루었던 스페인의 가톨릭 교회 개혁이나 그 당시 프랑스에서 앙리 4세가 진행 중이었던 '국가 권력에 대한 종교의 종속화'를 영국에서도 재현하겠다는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때문에 의회는 온갖 파란을 일으켰으며, 제임스 1세가 재위한 22년 동안 4번밖에 열리지 않았다. 또한, 의회가 열렸어도 형편이 곤란해지면 일방적으로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건 나중에, 찰스 1세가 참수당한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생각해보면 사실 그래도 왕권이라도 강하니까 의회를 신나게 해산시킬 수 있었던 것이고, 제임스 1세는 어느정도 부족한 면이 있었다쳐도, 찰스 1세도 세간의 까임과 달리 과거의 왕들에 비해 더 못나지도 않은 왕이었다. 의회도 말이 의회지 귀족들의 모임이었기에[9], 단순히 이 시기의 왕을 "독재자"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도리어 엘리자베스 1세때는 조용했던 의회가 어디서 꿔다놓은 왕물태우도 아니고 물제임스이 나타나자 마구 왕권에 간섭하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제임스 1세가 특별히 명군도 아니었지만, 세간의 인식처럼 심각하게 암군이거나 무능한 왕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정도였다면 스코틀랜드 왕도 못해먹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역사 항목에 나와 있지만 정복왕 윌리엄 시절 부터 강력한 중앙 집권을 추구했던 잉글랜드 왕실과 달리 스코틀랜드의 경우제임스 6세가 200년 만에 처음으로 왕관이나 나라를 전쟁과 내란에 상실하지 않고, 전투에서 전사하지도 않고 자기 침대에서 곱게 죽은 왕이다. 제임스 본인의 치세에도 1596년 장로회 소속 청교도 매파의 기습적인 봉기로 수도의 통제권을 상실하고 일시적으로 인근의 린린스고(Linlithgow)로 피신해야 할 만큼 잉글랜드에서 왕 해먹는게 커피라면 스코틀랜드에서 해먹는건 TOP라 해도 좋은 만큼 다스리기 힘든 곳이었는데 제임스는 당시 장로회 엘리트들과 근본적인 사상과 국정 방향은 충돌하면서도 적어도 본인의 치세 중에는 큰 문제 없이 다스릴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머리도 좋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 부터 워낙 권력 다툼 사이 고생을 하면서 자라 로우랜드의 개신교 성직자, 하이랜드의 거대 클랜, 왕실 직할 도시 자치정부 모두 골고루 연줄이 있어서 한 세력이 왕권에 도전하며 개기면 다른 세력을 불러와 찍어 누른 다음, 그 뒤에도 지나치게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고 적당히 봐주는 식으로 단호하면서도 유연한 통치, 즉 밀당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이게 본인은 어린 시절부터 고생하며 쌓은 역량과 인맥으로 그나마 안정적으로 나라를 굴린 건 좋은데, 그 아들은 스코틀랜드 입장에서 보면 아예 전왕 메리 스튜어트급으로 말만 스코틀랜드 출신이지 실질적인 성장, 가치관, 성향 모두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국정을 말아 먹고 결국 1638년 언약도 혁명으로 스코틀랜드에서 권력을 상실하고, 또 이걸 찍어 누르겠다고 대립하던 잉글랜드 의회와 또 싸움질 해 아예 청교도 혁명 까지 쌍으로 번져 본인 모가지까지 잃어 먹었다.

뒤집어 말하면 제임스 치세의 치명적인 결함을 굳이 하나 꼽자면 이런 본인의 능력으로만 유지 할 수 있었던 첨예한 판도를 다스릴 교육도, 준비도 똑바로 안 시킨 후계 문제라 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이전부터 적대해오던 스페인과 유대를 맺는 정책을 취했고, 그랬기에 30년 전쟁중 사위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로부터 원조요청을 받고도 에스파냐 때문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이 당시 갈수록 친네덜란드 성향의 급진적으로 변하던 청교도 세력의 불만을 샀다[10]. 하지만 의용병들이 팔츠 선제후를 도와서 참전한 것을 막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외교적 협상으로 사위의 권리를 지키려고 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말기 벌리 경, 월싱햄, 레스터 백작의 비호로 성장하여 이 당시 하원을 석권하고 있었던 급진 청교도 세력은 이러한 제임스 1세의 온건책에 격분하였는데,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치룬 대 스페인 전쟁으로 인하여 전쟁 자체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재정이 파탄나고 백성들이 엘리자베스 1세를 원망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 유럽 대륙에 본격적으로 힘을 쓸 만한 열강이라 하기에는 국력이 부족했던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현대의 평가로는 옳은 선택이라고 보는 시각이 주류이다.[11]

4. 기타[편집]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아메리카에 도착한 것도 제임스 1세의 치세 중 일어났던 일이었다. 물론 엘리자베스 1세 때 이미 버지니아에 식민지가 만들어졌지만, 제임스타운은 나름대로는 의미는 있는 셈이다. 사실 제임스 1세는 그다지 심하게 종교탄압을 할 생각은 없었고 청교도들에게 엄포만 놓았을 뿐이었지만, 청교도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는 설도 있다.(…)

또한 제임스 1세는 전 국민에게 성서를 보급할 생각으로 영어판인 킹 제임스 성경을 편찬할 것을 명하였는데, 그 때문에 굴욕을 맛보기도 하였다.[12] 여하간 아이디어 자체는 뛰어났고, 또한 이때 편찬된 킹 제임스 성경은 큰 성공을 거두어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또 사랑받고 있다. 제임스 1세가 아무 생각없이 나라를 다스린게 아니라 나름대로의 국정과 영국이 굴러가는 미래의 방향에 대한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글로브(지구) 극장을 "국왕 극단"으로 임명하며 팍팍 밀어줬고, 사실상 세익스피어 4대 비극(햄릿, 맥베스, 오셀로, 리어왕)은 이 시대의 산물이다. 특히 맥베스에는 스튜어트 왕가에 대한 사심이 팍팍팍 들어있다. 근데 왜 엘리자베스 때는 희극이고 이 시대는 비극인거냐 사실 비극이 쓰여진 데에는 셰익스피어 자신의 가족사 탓도 있다.

잉글랜드로 옮겨서 통치했으나 자신이 본래 왕위에 올랐던 스코틀랜드를 결코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여러차례 스코틀랜드를 방문하였고, 실제로 에딘버러의 홀리루드 궁전에서 스코틀랜드 대신들과 자연스럽게 격의없이 대화를 하며 "사람의 본성이란 연어와 같이 고향에 자꾸 돌아오게 되더라"라는 식으로 농담을 하며, 스코틀랜드의 대신들이 왜 잉글랜드에만 박혀서 스코틀랜드에는 자주 안 오시냐라고 섭섭함을 표하니 "나도 마음만 같으면 북적거리고 시끄러운 잉글랜드 일 다 때려치우고 고향에 돌아와 너그들이랑 옛날 처럼 하하호호 하면서 살고 싶다"라고 대답하며 이들의 원성을 달랬다. 심지어 장로교 매파들과 싸울 때도 한 에딘버러 서점 주인이 "(성공회 식으로) 예법과 교리를 변경 시키시면 안된다" 하면서 시시건건 딴죽 걸며 곱게 본인이 도입한 전례법에 따라 예배 보는 걸 거부하니[13] 왕이 직접 청문회에 불러서 "야이 튀르크 놈들이나 유대인보다도 악질인 새끼들아! 네놈 에딘버러 시민놈들 처개기는 것도 질려서 못해먹겠다! 악마한테 몸도 영혼다 뜯겨 먹히고 지옥에서 썩을 새끼들아, 니놈하고 니 꼴통 장로교회 새끼들 모두 똥방귀나 처먹아라!(...)" 라고 욕짓거리를 거하게 퍼부으니, 그 소리를 들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역시 잉글랜드에 내려가셨어도 마음은 우리나라의 임금님이시다! 이래야 폐하 답지!" 라며 오히려 더 호응한 기록도 있다[14]. 행정적인 기록을 봐도 몸은 비록 잉글랜드로 가 있지만 대리 자문회(Privy Council)을 통해 지속적으로 스코틀랜드에 관심을 가지는 것 뿐만 아니라 정책 결정을 비롯한 통치도 비록 서면으로지만 적극적으로 했고, 현지 상황도 전화도 이메일도 없었던 당시 시대적 한계를 고려하면 비교적 주도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듯이 제임스 1세는 근본적인 국정의 방향은 동시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의 파워 엘리트와는 충돌해도 그걸 충분히 무마할 개인적 매력과 소통력이 충분했기에 그럭저럭 재위기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그 아들 찰스 1세는 철학만 물려받았지 매력과 능력, 수완, 연줄은 하나도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다가 일을 망쳐도 크게 망쳤다. 실제로 청교도 혁명의 직접적인 발단도 국교회 강요에 의해 스코틀랜드에서 터진 반란이었는데, 이 반란 또한 찰스 1세 본인도 뿌리는 스코틀랜드였던 주제에 재위한지 9년이나 지나서야 스코틀랜드를 처음 방문했고, 또 왕이라는 작자가 이제야 와서 한다는 말이 스코틀랜드가 얼마나 촌동네인지 불평불만만 하며 주변에는 잉글랜드 출신 측근들만 끌고 다니는 등 종교문제를 떠나 인간적으로 스코틀랜드인들을 시작부터 단단히 빡치게 만들어서 자초했던 면이 크다(...). 찰스는 당장 즉위 하자마자 스코틀랜드에 대해서는 하나도 관심을 안 가지다가 처음으로 한 개입이란게, 당시 영국 전체로 봐도 가장 막강한 귀족 가문 중 하나였던 클랜 캠벨이 좀 마음에 안든다고 같이 하이랜드를 양분하며 아일랜드에서도 영향력이 강했고, 무엇보다 카톨릭이었던 클랜 맥도널드 더러 "야 캠밸가 저 놈들 마음에 안드니 니들이 아일랜드에서 사병 좀 끌고 와 조질래?" 하며 전혀 알지도 못하던 정치판에 개입한 것이었다.[15] 역사적으로 스코틀랜드 왕실의 권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 지대였던 하이랜드에서 그나마 왕실의 앞잡이를 자처하며 세력을 키우다가 거하게 통수 맞은 캠밸가는 그래서 장로교 매파의 언약도 혁명이 터지자 마자 가문의 종자, 분가, 휘하 소가문 다 끌고 언약파에 가맹하여 왕권을 뒤엎어 주는 걸로 회답했다(...). 어린 몸으로 스코틀랜드의 치열한 권력 투쟁 사이에 자라며 현지 사정에 훤했던 제임스라면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였다. 실제로 제임스 1세는 사적으로는 고소공포증, 독살공포증, 도검공포증, 등 온갖 미신적 두려움에 둘러싸여[16] 편집증적인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심리적 공포증을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신하들과 소통을 하고, 친구들을 많이 만들며, 심지어 일반 대중과도 잦은 행차와 행사를 통해 친근함을 과시하려고 했던 나름 인간적인 매력이 풍부했던 왕이었고, 당장 위의 욕지거리 에피소드 만으로도 친근함은 확실히 인증된 듯그는 이런 성품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다. 즉위 초기 부터 일단 이념적, 종교적 차이를 넘어 인간적인 레벨에서 항상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란 평가를 받으며 가신들과 측근들을 냉담하게 대하고, '자기 사람'을 별로 만들지 못했던 아들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1604년에 세계 최초로 금연 정책을 실현했고 담배에 대해 폐에 위험한 천한 관습이자 추잡한 유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담배는 당시 한창 개척 원주민 추방 이 진행중이던 버지니아 식민지의 유일한 수입원이었기에 식민지의 담배 경작을 막지는 못했다.

최초의 경마장 '뉴마켓'을 열었다.

일본에도 막부 2대 쇼군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일본식 갑옷 2개를 선물 받기도 했다. 이 중 하나는 런던 탑에 보관되어 있다.#

성정체성에대한 논란이 있는 왕중 하나이다. 영어 위키피디아에서 보면 나오듯이# 재임 중 젊고 잘 생긴 남성들을 곁에 두었다라는 말이 있으며, 그가 아낀 미남자 중 한 명은 조지 빌리어스란 인물로, 제임스는 그에게 버킹엄 공작의 작위를 하사한다.[17] 그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왕의 침소를 관리하는 것이었다고...버킹엄에 대한 그의 집착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공식 무도회에서 자기 부인과 춤추는 버킹엄을 보고 질투심이 폭발, '우리 조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By God, George, I love you dearly!)'라고 외쳤다고...그 외 서머셋 백작 로버트 카나 레녹스 공작 에스메 스튜어트와의 염문설도 있었다. 에스메 스튜어트 같은 경우 워낙 어릴때 만났고 애초에 명가여서 스캔들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로버트 카의 경우 버킹엄 공작과 더불어 그리 대단치 않는 가문 출신이 워낙 벼락출세해서 세간에 뒷말이 무성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역사속 인물의 성정체성 논란은 말그대로 죽은인간이 되살아나... 커밍아웃하지 않는이상 역사속 사료를 보고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역사학자 마다 말이달라 이성애자다 동성애자다 하기 어렵다. 그 예로 역사학자들이 제임스1세가 만든 Basilicon doron에 동성애를 죄악으로 명시하기도 했고, 자기 여편내와 7명....이나 되는 애를 낳았다고 하니...심지어 심지어 버킹엄공작과 나눈 말들중 현대어로는 연애적으로 표현된다는 표현이 17세기 영국에서는 non-sexual 표현으로 표현되기도 했다고 한다. 말그대로 결론을 내릴수 없는 주제

[1] 이 때문에 위키백과에서는 본래 지금 나무위키처럼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라 되어 있었으나(나무위키와 달리 '제임스 1세'라 불리며 항목도 있는 왕이 많은 탓), 이에 대해 토론칸에서 1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문제가 제기되다 세 번의 이동 토론과 무수한 싸움 끝에 '제임스 6세 겸 1세'로 문서가 이동되었다.[2] 사실 본 항목에서도 잉글랜드 왕 해먹기 전에 30년 가까이 스코틀랜드의 왕으로서 이루었던 치적이나 경력은 아예 서술이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이 있는 나무위키 편집자들의 기여를 기다릴 뿐이다[3] 정확히는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를 처형시키는 것에 주저하자 측근들이 여왕에게 알리지도 않고 처형을 시킨 것이었다. 이후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엘리자베스 1세는 격노하며 처형을 집행한 측근들의 직위를 박탈했지만 나중엔 다시 복권시켜줬다고 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메리 스튜어트 문서 참조).[4]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에서 이미 폐위된데다가, 가톨릭 교도에 반역까지 저질러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가톨릭 교도 왕위 승계가 법적으로 제한된것은 아니지만 엘리자베스 치세에 이미 국교회(성공회) 우위가 두드러져서 가톨릭은 정치적으로 소수파였다.[5] 제임스 1세라는 칭호는 잉글랜드 왕관을 받은 다음에 붙는다.[6] 이 시절만 하더라도 제임스 6세는 스코틀랜드 내 정치/종교 투쟁에서 적극적인 급진 개신교파의 거두 중 하나였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개인적인 감정이 눌려 휘둘린게 아니라 제임스 6세는 처음부터 단단한 매파의 거두였다. 두고두고 분란의 씨앗이 되는 제임스 6세의 종교정책은 훗날 잉글랜드의 국왕까지 겸하게 되면서 본인의 종교관이 젊은 시절의 혈기어린 급진 칼뱅파에서 나이도 먹고 사람도 둥글둥글해 지면서 좀 더 포용적이고 너그러운 국교회 중심으로 바뀌게 되면서 형성된 것이다.[7] 바실리콘 도론(1599), 흡연 반론(1604), 그리고 무엇보다 킹 제임스 성경 등의 본인이 직접 쓰거나, 저술을 지시한 저작들을 생각하면 제임스 1세는 중세와 근세의 군주들 중에서도 굉장히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행정 실무에 빠삭하고, 지적으로 충만한 문필가 왕에 가까웠다. 이 전에 튜더 왕조의 잉글랜드의 군주들은 종교 문제에 관하여 본인들은 정치적인 판단만 내리고 실질적인 교리적, 학문적 종교 개혁은 토마스 크렌머, 리처드 후커 등 왕실의 비호를 받는 신학자, 지식인들이 주도한 반면 제임스의 경우는 본인이 스코틀랜드의 칼뱅파 교육을 받아 실제로 시시콜콜해 보이는 신학적 논쟁 또한 주도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이 와중에서 그가 청교도와 카톨릭 사이 아르미누스의 사상에 기반한 포괄적인 고교회 국교회 강화를 추진한 건 단순한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인 문맥 만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다.[8] 즉 유럽 대륙의 여러 국가들처럼 가톨릭 세력의 수장인 스페인의 꼬붕이 되어 버리거나 왕이고 뭐고 없이 설치고 다녔던 칼뱅파가 깽판칠 돗자리가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9] 당대엔 상원은 물론이고 하원 투표권조차도 지주정도는 되어야 가질수있는 말 그대로 특권으로. 서민층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건 훨씬 뒤의 일인 19세기의 일이며 이것도 한꺼번에 주어진게 아니다.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시기는 더 늦어서 1차 세계대전 종전시기가 되어서야 보상격으로 투표권이 주어져쓰며 여기서도 20대 여성들은 투표권에서 소외되었다가 1928년에 가서야 투표권이 주어졌다.[10] 라고는 하는데...팔츠 선제후가 가뜩이나 어수선한 신성 로마 제국의 내정에서 "정당한 군주"인 페르디난트 2세를 몰아낸 보헤미아인들의 추대로 보헤미아 왕위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있는 팔츠 선제후의 친인척 모두가 왕위 즉위를 반대했다.[11]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당시의 기록이 대부분 지식인이든 정치인이든 사회의 엘리트들이 남긴 글이고, 다시 말하지만 이 시절 잉글랜드의 지식인과 엘리트들은 급진 개신교의 영향을 짙게 받았던 점을 기억하자. 대부분의 백성들이 문맹이었던 이 시절 그나마 국왕에 대한 진정한 의미로서 대중적인 지지도를 보여주는 즉위와 붕어 당시 백성들의 반응, 유행했던 민요 등은 제임스 1세에게 되려 호의적이었던 편이다. 제임스 1세가 죽었을 때 런던의 시민들은 좋은 왕이 죽었다며 크게 슬퍼했다.[12] 킹 제임스 성경 항목 참조.[13] 왕이 무슨 서점 주인이랑 이러고 있으면 웃긴거 같지만, 인쇄술이 발명 된지 100년 조금 넘었던 이 시절 서점 주인, 그것도 에딘버러 같은 한 나라의 수도 시내 서점 주인이라면 그 일대 지식인 사회의 거두 중 하나란 소리다. 현대적 관점에서 동네 가게 아저씨랑 국왕이랑 목소리 높이며 싸운거(...) 수준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이 영향력을 현대로 비유하면 못해도 대형 출판사 경영인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14] 스코틀랜드 왕실 자문회 기록 (Register of Privy Council)에 나온 원문은 "Ye are worse than Turks and Jews! I can never get an order of this people of Edinburgh . . . The devil rive their souls and bodies all in collapse and cast them into hell . . . Farts on you and the session of your kirk both." 1619년, 즉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고 난 뒤에 있었던 일이다[15] 동군연합이었다 한들 이 시기 기본적으로 브리튼은 지정학적인 명칭일 뿐이고, 제도적, 감정적, 문화적, 사법적, 모든 측면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분명한 외국이었다. 그나마 개신교 중심 문필가, 지식인 몇몇이 "야 두 나라 이제 종교도 비슷한데 통합하면 국력도 커지니 좀 짱일듯" 수준으로 구상이나 하는 정도였고, 당연히 대부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기득권은 허접한 동군연합으로도 서로 권력이 약해 질 까봐 문자 그대로 동군연합 이상의 제도적 통합 시도를 맹렬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내부에서도 에딘버러-글래스고-애버딘 삼각지 안에서 스코트어를 쓰던 로우랜드 지방을 떠나 하이랜드로 들어가면 아예 언어도 게일어를 쓰고, 형식적으로만 왕실에게 충성하지 실질적인 통치는 반유목, 목축 중심의 클랜들이 다스리던 외국이나 마찬가지였던 지방이었다[16] 저런 위험하고 폭력적인 환상들이 스코틀랜드의 왕위 투쟁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멕베스의 줄거리가 체제에 대한 비난이든, 옹호이든 제임스 1세의 치세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둔 작품이라는 건 이미 비평계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해석이다.[17] 삼총사의 바로 그 버킹엄 공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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