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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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의 승상

신규 책봉

제갈량

시호 하사

촉서 「제갈량전(諸葛亮傳)」

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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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무향후(武鄕侯), 충무후(忠武侯)

성씨

제갈(諸葛)

량(亮)

공명(孔明)

생몰기간

181년 ~ 234년[1]

재임기간

221년 ~ 234년(승상)[2]

王佐奇才儒者氣象 伊呂之間管樂之上
왕좌기재 유자기상[3]이여지간 관악지상


왕을 보좌한 기이한 재주가 있고 유학자의 기상이 있으니,
이윤강태공에 비길만하고 관중악의보다 낫도다.


1. 개요2. 정사
2.1. 유비를 따르기 전까지2.2. 촉한승상이 되기까지2.3. 촉한의 국력을 강화시키다
2.3.1. 관제의 정비와 인재 선발2.3.2. 국내 반란의 진압과 통치력 확보2.3.3. 생산력의 회복과 발전2.3.4. 총평
2.4. 남만 정벌2.5. 제갈량의 북벌2.6. 죽음2.7. 묘소
3. 연의4. 인간 관계
4.1. 가족 관계4.2. 친인척 관계4.3. 교우 관계
5. 주요 정책6. 발명&이용품7. 설전
7.1. vs 오나라7.2. vs 위나라
8. 사상9. 평가10. 관련 논란
10.1. 군사적 재능에 대해10.2. 권신 제갈량, 제갈량의 권위에 대해10.3. 인사정책
11. 기타12. 제갈량에 대한 관련일화들13. 미디어 믹스1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촉한을 얻었고, 을 얻었으며, 를 얻었다.


세설신어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유비관우, 장비에게.


제갈량(181-234)은 중국 후한 말에 태어난, 촉한의 초대 승상, 전략가이자 명재상이다. 는 공명(孔明), 시호는 무향후(武鄕侯), 충무후(忠武侯). 지혜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그의 이름은 보통명사화 되어 불린다. 보통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 있으면 그 인물의 성을 앞에 붙여서 X갈량[4], 또는 이름만 따서 제갈X로 부르는 식.

정사 삼국지에 의하면 진수의 평으로 상국(相國)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고 되어 있다. 계한보신찬에는 제갈량이 선제(유비)의 유명을 받아 재상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제갈량은 이미 유비 생전에 승상이었으므로 상국은 이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상국은 최고 재상인 승상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왕보다 높고 황태자와 같은 급이며 황제 바로 밑인 엄청난 벼슬이다. 워낙 엄청나다 보니 제갈량 이전에는 전한소하, 조참, 여산, 후한동탁만이 이 지위에 올랐다. 다만, 여산은 여씨 일족의 후광으로 얻었고, 동탁은 황제를 협박하여 얻은 것이라서 진정성 있는 상국은 사실상 소하, 조참, 제갈량 세 명뿐이다. 더불어, 제갈량 사후에는 촉한에서 상국은 물론이고 승상도 영구 결석이 되면서, 멸망 때까지 승상이 된 자는 아무도 없다.[5]

책사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제갈량의 키가 당시 평균이나 평균보다 작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제갈량의 신장은 8척(한대 척으로 따지면 189.6cm)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한 척이 23.7cm으로 당시로서(물론 지금도) 큰 편이었다. 그러나 이는 중국사람들의 허풍을 좋아하는 습성으로 인해 모두 다 믿을 것은 아니고, 적어도 그 당시의 평균 키보다는 컸었다는 것은 확실한 듯 하다.[6]

또한 제갈량의 외모가 매우 뛰어났다고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진수는 제갈량전에서 "제갈량은 어려서 빼어난 재주와 영웅의 그릇이었고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훌륭하여 그 당시 사람들이 뛰어난 인물로 여겼습니다.(亮少有逸群之才,英霸之器,身长八尺,容貌甚伟,时人异焉.)"라고 서술한 바가 있다. 주유, 손책 등과는 달리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엄연히 삼국지의 공식미남 중 하나.[7]

관우의 트레이드 마크가 수염, 청룡언월도, 적토마, 춘추좌씨전이라면 제갈량의 트레이드 마크는 학창의, 윤건, 백우선, 사륜거. 이런 이미지는 이미 동진 시기부터 있었던 듯하다. 동진시기의 지인소설인 어림에는 사마의가 제갈량과 위수에 대치하면서 사람을 보내 제갈량을 살펴봤는데 제갈량은 흰 수레를 타고 갈건을 쓰고 학우선을 든 채 삼군을 지휘하여 중군이 그에 따르니 사마의가 감탄하여 '가히 명사라 이를만 하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제갈량의 이런 이미지가 연의보다 이른 시점에 완성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를 수식하는 많은 단어들이나 묘사가 있지만 후출사표의 표현인 '국궁진력 사이후이(鞠躬盡力 死而後已)'와 삼국지연의의 대사인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 그의 삶을 압축하는 말들이라 할 수 있다.

2. 정사[편집]

2.1. 유비를 따르기 전까지[편집]

그의 원래 고향은 서주에 있는 낭야라는 곳인데 동오서성도 이곳 출신이다. 조조서주대학살 즈음에 형주로 이사를 해서 서주대학살 때문에 해를 입은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존재.[8] 사서에 따르면 한 사예교위 제갈풍의 후예다. 부친은 제갈규로 한나라 말 연주 태산군 군승을 지냈는데 제갈량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이에 숙부인 제갈현이 제갈량 형제들을 수습하여 키웠는데 그런데 제갈현이 예장태수로 부임하게 되어 같이 따라갔지만 제갈현이 예장에서 부득이하게 쫓겨나 유표에게 의탁하게 되자 형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에 제갈량은 형주의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갈고 닦았다. 한편 형인 제갈근은 제갈현을 따르지 않고 양주로 이주하여 양주를 다스리던 손씨 가문의 신하가 되었다.

제갈현이 죽고 청년이 된 제갈량은 몸소 밭이랑에서 농사지었으며, 양보음(梁父吟)[9][10]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좋아했다. 제갈량은 신장 8척에 매우 빼어난 외모를 지니고 기재를 가져 영웅의 그릇이었다고 한다. 늘 자신을 제나라의 재상 관중과, 연나라의 악의에 비교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11] 오직 친한 벗으로 지내던 기주 박릉군 출신의 최주평, 예주 영천군 출신의 서서(자 원직)들만이 참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했다.

젊은 시절 공부한 방법이 당시로선 특이한 편이었다. 당시 선비들은 글자 하나하나를 정독해가며 세세한 구절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한 반면에 제갈량은 책 전체의 내용을 파악하는데 더 신경썼다고 하는데, 이 구절을 보고만 특이하다는 논조로 해석하기 보다는 앞날을 길게 내다보고 장구한 계책을 준비하는 제갈량의 거시적 안목에 대한 칭찬의 논조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구절은 거시적 안목보다는 책을 읽는 자세의 차이를 설명해주는 구절이라는 의견이 있다. 즉 훈고학적으로, 책상물림 학자처럼 책을 읽는게 아니라 (평시엔 이런 학자적 엄밀성이 더 중요시되겠지만) 당시 난세에 맞는 바로바로 세상을 위해 쓸 수 있는 실천적 안목, 경세가적 자세가 중요하며 제갈량은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음을 강조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책을 구절 하나하나 엄밀히 읽지않고 큰 맥락으로 책 전체를 이해하는 것을 거시적 안목이라 볼수는 없으며 거시적 안목이란 말은 이때 쓰이는 용어가 아니고 책읽는 방법의 차이 지식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일뿐이라는 것.

하여간 나관중도 제갈량의 이런 학문적 태도가 인상깊었는지 연의에서 동오의 명사들과의 설전에서도 나는 경전 한자 한자마다 따지는 치졸한 사람 아니다 는 식의 언급을 집어 넣는다.

2.2. 촉한승상이 되기까지[편집]

양양기에 따르면 수경선생 사마휘는 유비를 만난 자리에서 유비가 그에게 현 정세에 대해 질문하자 "이를 아는 건 시무를 아는 준걸 뿐이며 와룡(=복룡)과 봉추인 제갈량과 방통이 바로 그들이다."라고 대답하며 은근히 제갈량과 방통을 높인다.

207년 유표의 객장으로 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고 있었던 유비는 사관을 요청한 서서를 만나보고 중하게 기용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서서가 제갈량을 와룡이라며 추천한 것을 듣게 되었다. 유비는 서서에게 제갈량을 데리고 와 달라고 요청했지만 서서는 유비 본인이 스스로 몸을 낮추어 만나야만 한다고 간언했다. 이에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를 세번 방문하여 마침내 제갈량을 만나 한실부흥의 계책을 듣고 등용하니 이를 후세에 삼고초려라고 한다. 정사에서는 그냥 세번만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묘사하면 소설로서는 재미가 없으므로 연의에선 이 삼고초려 에피소드가 각색된다. 어쨌든 추처낭중의 꼴로 제갈량은 유비와 인연을 맺게 되고, 정식으로 등용되어 유비의 든든한 심복 중 하나가 된다

유비와 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깊어져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원컨대, 제군들은 이에 관해 다시 말하지 말라.”라고 다독이자 불평을 멈췄다. 이것이 고사성어 수어지교의 유래다. 비록 불평을 멈췄다고는 하나 불만은 그대로 내재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 유비와 관우·장비의 사이는 일반적인 군신관계를 넘어선 것이었고 이러한 끈끈한 커넥션에 아무런 실적 없이 쑥 밀고 들어온 제갈량에 대한 관·장의 감정은 한바탕 웃음으로 날려버릴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고 보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인지 제갈량이 이들을 교류할 때 조심했다는 흔적이 보이는데 마초가 어떤 사람인지 묻는 관우의 서신에 '마초는 관공만 못하다'라고 답신을 한다던지 황충을 사방장군으로 삼을 때 마초, 장비는 공을 봤지만 관우는 보지 못했으니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언하기도 한다. 장비는 본디 사대부를 공경했으므로 제갈량의 뛰어난 책략을 보면서 제갈량에 대한 불만은 금방 풀렸을 것으로 보이지만 관우는 성정이 그렇지 않았으므로 제갈량이 특별히 신경 썼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단 관우의 경우 제갈량의 서신을 받자 아이처럼 매우 좋아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서신을 보여주며 기뻐한 걸로 보아 제갈량을 내심 인정했던 걸로 보인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아들뻘되는 사람이 칭찬한다고 기뻐할 정도로 관우가 줏대없는 인물도 아닐터이다.

유표는 채부인의 말을 받아들여 작은 아들인 유종을 사랑하고 유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유기는 제갈량에게 겨우겨우 졸라서 계책을 듣게 되었다. 제갈량의 계책은 안에 있지 말고 밖에 있는게 안전하다는 것이었고 때마침 황조가 죽자 유기는 밖으로 나가 강하 태수가 되었다.

이때 갑자기 유표가 죽고,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했다. 당황한 유비는 번성에서 이 일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피난했는데 제갈량도 동행하였다. 이때 서서도 함께 뒤따랐는데 조조가 추격해 격파하고 서서의 모친을 붙잡으니 서서가 어쩔수 없이 유비에게 작별을 고하고 조조에게로 떠났다. 이후 유비가 강하태수 유기가 머무는 하구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손권과 동맹할 것을 주장하였고 마침 손권도 유비와 동맹할 목적으로 유비에게 노숙을 보냈으므로 제갈량은 노숙과 함게 동오로 떠나 같이 손권을 설득하였다. 결국 유비와 손권은 동맹을 맺어 조조와 싸우길 결의하였다. 이후 유비는 손권과 동맹하여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크게 무찔렀다. 유비는 이때 형남 4군을 취했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를 거두어 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채우게 했다.

이후 유비가 익주에 들어서자 유비가 떠난 형주를 관우와 함께 다스리면서 후방을 지켰고, 손부인유선을 데리고 동오로 떠나는 것을 막았다. 유비가 가맹관에서 유장을 공격하니, 유비가 익주를 공략할 때 장비, 조운과 더불어 형주에서 원군을 이끌고 와 동쪽에서부터 익주 땅을 평정해 나갔다. 제갈량은 장비, 조운 등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들을 나누어 평정하고, 유비와 함께 성도를 포위했다. 성도가 평정되자 유비는 제갈량을 군사장군으로 삼고 자신의 벼슬인 좌장군부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이후 유비가 밖으로 출병하면 제갈량은 늘 성도를 진수하며 식량과 병사를 대었다. 이후 제갈량의 제안으로 유비는 황제에 오르며 제갈량은 승상에 임명된다. 이때 당시부터 녹상서사도 겸했는데, 즉, 제갈량이 내외조를 모두 장악한 형태가 된다. 유선 대에 이렇게 되는 것은 유선의 나이가 어리고, 유비의 유훈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이해할 만하나, 건국 군주의 시대에 이렇게 한 것은 자칫하면 건국과 동시에 권신이 나타나고 황제의 위치가 위태로워지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한 행보로 볼 수 있다. 즉위 석 달만에 친정한 것으로 보아, 온전히 전시를 상정한 행보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릉대전 이후 유비는 병이 깊어지자 성도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다. 제갈량에게 말하니, “그대의 재능이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만 하면 보좌하시고, 그가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감히 신하로서의 헌신을 다하고 충정의 절에 힘쓸 것이니, 죽기로 계속할 것입니다.” 유비는 또 유선에게 말했다, “너는 승상과 함께 일을 처리하고 승상을 이 아비처럼 섬겨라.” 또한 마속을 중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남긴다.

2.3. 촉한의 국력을 강화시키다[편집]

이릉대전의 대패가 촉한에 안긴 손실과 상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쟁이 종결된 직후 위나라의 황제 조비는 유비가 없는 촉한을 사실상 없는 나라로 치부하며 동쪽의 손권에게로 공세를 집중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결코 이상할 것 없는 시각이었다. 국방 체계의 붕괴와 건국 황제 유비의 사망, 그리고 대규모 반란 세력의 거병.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생 국가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거친 시련이 아닐 수 없다. 지도력이 검증되지 않은 후계자 유선이 황제 지위를 계승한 223년, 사태를 수습할 모든 책무는 승상 제갈량의 어깨 위에 놓이게 되었다.

2.3.1. 관제의 정비와 인재 선발[편집]

제갈량이 가장 먼저 손을 댄 작업은 인재들을 선발하여 요직에 채용하는 것이었다. 이릉대전을 전후로 하여 다수의 장수와 참모들이 사망하거나 자리를 비운 탓에 유능한 관료들을 충원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릉에서 살아 돌아온 오반, 진식, 상총, 요화 등을 기용하고 비시진밀처럼 불상사에 휘말려 물러났던 인재들을 복귀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면면들이 제갈량의 보좌관으로 발탁되었다. 그외 제갈량은 223년부터 225년까지 수많은 재야의 인재들을 촉한 조정에 초빙하기 위해 몸소 그들을 초청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영릉군 출신의 선비 장완은 본래 벼슬길이 순탄치 못했다. 광도현(廣都縣)​의 장으로 일할 때 일부 업무를 태만히 하고 술에 취해 지내다가 유비의 감찰에 걸려 쫓겨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잠재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고 있었는지 제갈량은 유비에게 변호를 아끼지 않았고, 이제 자신이 국정을 총괄하는 위치에 서게 되자 특별히 장완을 불러 동조연(東曺椽)​에 임명하고 다시 참군(參軍)으로 삼았다. 장완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이 있고 또 형주가 손권에게 넘어갈 당시 항복한 반준(潘濬)​의 사촌지간이라는 점도 감안하여 요직에 오르는 것을 사양했지만, 제갈량이 적극적으로 권유한 끝에 그의 최측근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끝내는 그의 정치적 후계자의 지위에 어울리는 걸출한 정치가로 성장했다.

장완 외에도 비의, 동윤, 등지, 마충 등 뛰어난 인재들이 합류하면서 조정은 조금씩이나마 활기를 되찾았다. 당시 제갈량이 인재의 천거를 승상부 관리들의 최우선 책무로 여겼음은 다음의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나라에 충성하면서도 이익을 도모하는 것에는 사람을 추천하는 것보다 더 큰일이 없다. 사람을 추천하는 데는 각기 그가 숭상하는 자를 추천하려 애쓰는데, 지금 요연姚掾​(→승상부연丞相府掾​ 요주姚伷)이 추천하는 사람들에는 강(剛)한 사람과 유(柔)한 사람이 함께 있어 문무 관리들을 널리 채용할 수 있으니, 박학하고 우아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바라건대 여러 연​(掾)​들은 각기 이를 본받고 희망에 부응하라.


또한 제갈량은 새로운 인재들을 선발하는 것 못잖게 기존의 인재들을 분발시키는 것 또한 중요한 일로 여겼다. 그는 자신의 젊을 적 친구 서서와 유비 생전에 온갖 노고를 다한 동화를 모범으로 삼아 자신에게 간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을 것을 공언했으니, 실질적으로 행정의 통수를 맡고 있는 입장으로서 언로가 막히거나 본인의 독주가 조정에 악영향을 끼치게 될 수도 있음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이 과정에서 제갈량의 선발 기준과는 영 동떨어진 위연이나 양의 등 '능력은 있으되 인격은 수준 이하인' 인물들이 버젓이 승상부의 문무 최고직을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는 제갈량 개인의 기준에 따라 유비 생전부터 요직에 있던 인재들을 내치는 것이 정치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음을 고려할 필요도 있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제갈량 자신이 그들의 단점보다는 장점에 주목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다음은 제갈량의 저술인 <논제자論諸子>의 내용이다.

노자는 양생에는 뛰어났으나 위험과 재난에 대처하지 못했다. 상앙은 법치에 능했으나 백성을 교화하지는 못했다. 소진과 장의는 언변이 뛰어났으나 쌍방이 동맹을 맺도록 하지는 못했다. 백기는 성을 치고 점령하는 것에 능했으나 대중을 너그럽게 포섭하지는 못했다. 오자서는 적을 막는 계책을 꾸미는 것에 뛰어났지만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는 못했다. 미생은 신용을 지켰으나 변화에 부응할 줄은 몰랐다. 왕가는 성군을 받들어 모시는데는 능했으나 어리석은 황제를 위해 처사할 줄은 몰랐다. 허자는 명망 있는 인사들의 우열을 평가하는데는 능했으나 인재를 양성하지는 못했다.


본문만 놓고 보면 마치 옛 사람들의 단점과 실패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나, 문제는 그 다음 구절이다.

여기에 사람들의 좋은 점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제갈량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단점보다도 오히려 장점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장완, 비의, 동윤, 강유처럼 능력에 있어서나 인격에 있어서나 모두 훌륭한 인재들을 더 중시하고자 했겠지만, 사람이 어느 면에서나 완벽하기를 바라기란 무리인 만큼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사람이라 해도 가능한 한 중용하고자 했다. 물론 마속이나 이엄처럼 만회를 요구할 수 없을 만큼 큰 실책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말이다. 덧붙이자면, 제갈량은 그 자신도 완벽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2.3.2. 국내 반란의 진압과 통치력 확보[편집]

밑에서도 나오지만 제갈량이 남중의 재정비 작업에 착수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현지인과 외지인의 충돌을 무마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는 이에 대해 우선 중앙군의 주둔을 최소 규모로 줄인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아무래도 남중의 인력과 생산력을 촉한 재정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반란 진압의 최우선 목표였던 만큼 통치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런 만큼 제갈량은 남중을 통치할 행정 관료의 인선에 상당한 고심을 기울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실적을 세운 사람은 마충장억 두 사람이다.

이들은 현지의 소요와 분란을 단호하게 제압하면서도 일반 민중에 대해서는 평균 이상의 선정을 펼침으로써 그들의 민심을 휘어잡았다. 마충이 죽자 남중 사람들은 그의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고, 장억이 부임지를 떠나 중앙으로 소환되자 그의 수레바퀴를 붙잡고 울며 말리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또한 마충처럼 사후에 사당이 세워지고 제사를 받기도 했다. 이후 몇 차례 반란이 일어났으나 규모도 소규모에 최소한 옹개 등이 거병하기 이전보다는 훨씬 협력적이었으며 반란의 횟수와 규모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들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당시 촉한에는 외지 관료들을 선발한 것 외에도 현지 출신 인재들을 중앙의 요직에 임명한 사례도 존재한다. 반란의 수령 맹획은 본래 사형 내지는 그에 준하는 처벌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었으나, 한족과 이족을 가리지 않고 인망이 깊다는 점을 인정받아 촉한의 관료로 등용되었으며 나중에는 어사중승의 요직까지 진출하게 됐다. 그 외에도 맹염, 찬습 등 다른 현지의 인재들도 등용되어 촉한의 문무 일선에서 활약했다.

제갈량이 남중 지역에 보인 통치술은 매우 유연하면서도 합리적인 것으로써, 그의 사후에도 이족들이 촉한 정권에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했다는 점에서 효과를 엿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마충과 장억 외에도 제갈량 또한 이족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사후 그에게 제사를 올리는 부족도 다수 존재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제갈량을 숭상하는 풍조는 오늘날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

2.3.3. 생산력의 회복과 발전[편집]

어떤 의미에서는 제갈량의 정치적 업적을 평가하는 가장 직접적인 요소가 되는 부분일 것이다.

익주 파촉 지역은 험난하고 협소한 지세로 인해 별 특색 없는 벽지로 인식되기 쉽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지만, 실상 그 안에서 쏟아지는 곡물과 광물, 소금 및 비단 등 물자와 특산품의 생산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나라와 그 뒤를 이은 또 하나의 통일왕조 한(漢)나라는 모두 파촉의 생산력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으며, 이는 촉한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물론 황건적의 준동과 호족 세력의 발호, 유장의 실정 등 여러 요소가 겹치면서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면서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 그는 경제 방면에서 매유 유능한 관료인 유파, 왕련 등을 발탁해 현지 사정을 돌보게 했으며 20여년간 혼란했던 익주의 정치상황을 안정화시켰다. 제갈량 또한 왕련을 중용하고 그의 보좌에 큰 힘을 얻었다. 물론 왕련의 조력 외에도 제갈량 자신이 따로 구상하고 입안한 경제 정책도 다수 존재한다.

제갈량이 가장 중시한 정책 분야는 단연 농업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익주에는 아직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의 잔재가 남아있었고, 제갈량은 이를 적극 활용했다. 진나라 시대에 세워진 대규모 수리 시설인 도강언(都江堰)​을 보수했고, 한나라 재상 소하가 설치한 산하언(山河堰)​ 또한 개축했으며 이를 전담할 부서까지 따로 설치했다. 그 외 한나라 시대에 설치된 대소 제방들이 모두 제갈량의 손을 거쳐 수리되었는데, 이는 당연히 곡물 생산량의 폭발적인 증가로 되돌아왔다. 이에 관해 <화양국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물이 가물어도 사람들이 굶주림을 알지 못하고, 흉년이 들지 않으니 천하가 이를 하늘의 곳간이라 일컬었다.​


농업 외에도 광업과 잠업 또한 발전의 대상이었다. 특히 익주의 특산품인 촉금(蜀錦)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상등품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는 촉한의 동맹국인 오나라는 물론 적국 위나라에서조차 값을 쳐 주는 상품이었다고 한다. 촉한의 외교관들에 관한 기록을 보면 으레 촉금이 예물로 사용되곤 했으니 그 명성을 짐작할 만하다. 제갈량은 금관(錦官)이라는 전문 관청을 설치해 비단 산업을 국가 규모로 확장했으며, 방직 기술의 발전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흥미롭게도, 비단의 유통이 활기를 보이면서 사치 풍조가 성행하는 부작용을 막는 데까지 제갈량의 손이 닿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제갈량의 처첩은 일국 최고 중신의 가족임에도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아무리 제갈량이라도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신하들의 경제 생활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았겠지만, 승상이 모범을 보이는데 아무렴 그 부하들이 노골적으로 축재에 손을 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정책은 염업, 즉 소금에 관한 정책이다. 촉한이 바다에 면하지 않은 탓에 소금을 자체 생산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고대에는 해염(海鹽)보다도 오히려 내륙에서 생산되는 암염(巖鹽)과 염정(鹽井)의 비중이 더 컸다. 특히 촉한은 염정을 통해 소금을 대량으로 생산했으며, 제갈량은 이러한 이점을 놓치지 않았다.

촉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갈량은 염부(鹽府)라는 전담 부서를 통해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관리했다. 유비가 왕련을 통해 신설하고 운영한 이 부서는 제갈량의 대에도 활발하게 운영됐으며 제갈량이 특히 중시한 기관이기도 했다. 제갈량은 화정(火井)이라 불린 천연가스를 통해 염정에서 소금을 추출하는 방법에 착안, 분출관의 구경을 조절하고 적절한 화력을 확인하는 등 구체적인 방법을 연구함으로써 소금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서진 시기 <촉도부蜀都賦​>에서는 집집마다 염정을 갖추고 있다 노래했으며, 진나라 사람 이흥은 제갈량의 네 가지 개발 업적을 들 때 염정을 거론했다.

2.3.4. 총평[편집]

제갈량의 정책은 전체적으로 경제 산업의 회복과 발전을 주요 과제로 삼는 동시에, 그 이익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도록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남중 반란의 진압을 통해 점령지의 행정 시스템을 복구하고 현지인과의 마찰을 최소화한 점 역시 큰 틀에서 보면 군사적 이익 이상의 정치적 이익 획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이로운 것은, 이 모든 국가 재건 작업에 제갈량이 소요한 기간이 최대로 잡아도 5년 미만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릉대전에서 대피해를 입은 유비가 제갈량에게 탁고를 맡기고 사망한 시기가 223년 4월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뒤인 228년 봄, 제갈량은 이미 대군을 지휘하여 위나라에 대한 공세에 나서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정책이 이미 현실적인 효과를 입증하고 이릉대전의 피해를 상당 부분 만회했다는 반증이며, 이후에도 촉한의 경제 그래프는 지속적으로 상승세를 보였다. 일례로 위나라의 장군 등애가 세력이 다한 촉한을 멸망시킨 263년에만 해도 소금과 철의 생산에 종사한 인원이 4만여 명에 달했다는 정황이 포착되는데, 제갈량 치하의 염철 사업은 그보다 더욱 활발했을 것이며 최소한 뒤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종합하자면, 제갈량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어떻게 경제를 활성화하고 그 이익을 공정하게 활용할 수 있느냐에 시선을 두고 있었으며 해당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책은 구체적이면서도 큰 실효성을 갖추고 있었다. 본인의 기량을 과신하는 대신 유능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했다는 장점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요소일 터이다. 제갈량의 지휘 아래 촉한은 불과 5년이 걸리지 않아 강건한 정치 기반을 마련했으니, 이러한 성과를 달성하고 또 계속 유지한 그의 업적을 관중소하에 비유한 진수의 평론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닌 듯싶다.

2.4. 남만 정벌[편집]

파일:남중정벌.jpg
제갈량의 남중정벌도

촉한의 정사(政事)는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제갈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남중(南中)의 여러 군(郡)이 아울러 반란을 일으켰는데, 당시 월수의 수족 고정과 익주의 대호족 옹개, 맹획등이 남중 사람들을 거짓말로 선동하여 모반을 일으켰다. 이에 월수군을 다스릴 수 없어 월수태수 공록을 안정현에서 근무케 했다. 제갈량이 보낸 촉군 사람 종사 상기가 군 주부를 잡아 심문을 하자 가뜩이나 불손한 태도를 보인 장가태수 주포가 상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니 제갈량은 이제 막 대상(大喪)을 당했으므로 곧바로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고, 또한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맹을 성사시켰다.

건흥 3년인 225년 봄에 제갈량은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한다. 안상으로부터 수로로 월수로 들어갔으며 마충을 장가로 이회는 익주로 보내고 건위태수 왕사를 익주태수로 삼았다. 고정은 모우로부터 정책, 비수에 이르기까지 망루를 많이 세워두었는데 제갈량은 고정의 군대가 모이길 기다려 그들이 모이자 한꺼번에 토벌하여 비수에 이르렀다. 제갈량은 고정을 참하고 마충은 장가군을 격파하고 이회는 남중의 이족을 격파했다. 한편 고정의 부곡이 옹개를 살해하자 맹획이 이어받았다. 5월에 제갈량은 노수를 건너 익주를 정벌하고 맹획을 일곱번 잡아 일곱번 놓아주었고 그를 복종시켰다.

가을에 마침내 4군을 평정해 익주군을 건녕군으로 고쳐 이회를 태수로 하고 안한장군과 교주자사를 더하고 치미현으로 치소를 옮겼다.[12] 또 건녕, 월수를 나누어 운남[13]을 설치하고 여개를 태수로 삼고 건녕, 장가를 나누어 흥고군을 설치했고 마충을 장가태수로 삼았다. 남중의 경졸(강병), 청강 만여 가를 촉으로 옮겨 5부로 삼아 당할자가 없는 정예로 육성하고 이를 비군(飛軍)이라고 이름했다. 연약한 자들은 현지 호족의 부곡으로 삼고 오부도위를 설치하였으며 이를 오자(五子)라 하여 남쪽 사람들이 이를 사성오자라 했다. 이민족들이 대호족과 부호를 따르지 않았는데 금과 비단을 내어 이들의 부곡으로 삼도록 권하고 부곡을 많이 얻은 이들은 관직을 세습시켜 주었다. 이에 이민족들이 재화를 탐하여 촉한에 점점 복속하였고 이족과 한족이 어우러져 부곡을 이루었다.

제갈량은 남중의 준걸 건녕의 찬습, 주제의 맹염맹획을 거두어 관속으로 삼았다. 찬습은 관직이 영군에 이르렀고 맹염은 보한장군, 맹획은 어사중승에 이르렀다. 남중의 금, 은, 단, 칠, 밭가는 소, 전마가 군국의 비용으로 생산되어 촉한을 부유하게 했으며 도독은 항상 신중한 이들을 기용하였다. 이 공으로 제갈량은 부월, 호분 60인, 고취(취주악대) 1부, 곡개(曲蓋, 대가 굽은 일산) 하나, 우보(羽葆, 새깃으로 장식된 일산)을 하사받았다.

남만왕 맹획과 관련되어 내려오는 유명한 칠종칠금의 고사만 보더라도 이민족에게 강경책과 회유책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굴복시키고, 이 후 교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정사 배송지 주(한진춘추)에도 이름이 기록된 맹획은 정3품 어사중승으로 이는 감찰직 중 가장 높은 자리이며, 맹획의 일가붙이 쯤으로 추정되는 맹염은 호보감(금군 보병사령관,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경호실 차장 격)이 되어 5차 북벌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당시 삼국 중에서도 제갈량의 이민족 정책은 가장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받는다. 제갈량은 인사를 배치할 때 지방 관리는 익주파를 기용했는데, 비슷하게 남중 일대에도 관리는 이회, 맹획과 같이 그 지역에 영향력 있는 사람을 기용해서 불만을 최소한으로 줄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중의 경우, 완전한 이민족이라고 보긴 어렵다. 애시당초 이 일대는 전-후한시대부터 제국의 화폐를 조달하는 광산이 위치해 있었고, 철과 소금, 비단 산업으로 중원의 부자들조차 버로우할 만큼 갑부들이 창궐했던 곳이다. 한 말엽에 무정부 상태가 몇십 년 이어지면서 엉망이 된 거지, 무슨 연의 묘사처럼 미개척 밀림지대에 우가우가 이민족들이 뛰노는 이런 곳은 아니었다는 것. 당장 이민족이라고 말 나오는 남쪽 인물들은 고정과 유주 정도다. 제갈량 본인도 당시 기준으로는 깨어있는 사람에 해당되며(물론 기본적으로 당시 사람의 사고방식을 지금 기준으로 판단할 순 없는 일이다.), 남만의 이민족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는 마속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남정 이후에도 반란은 일어났는데, 제갈량은 남정에서 다시 반촉 운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한 게 아니라 대규모의 반촉 무력시위를 억제하는 게 목적이라고 보여진다. 이릉대전에서 패배하고 유비가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대규모의 무력 항쟁이 있었다. 그리고 제갈량의 기대대로 그가 살아있는 동안 대규모의 반촉 움직임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갈량이 남중이 평정되자 모든 곳에 현지 군장들을 임용하고 군사를 물렸을 때,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지금 나는 군사를 남기지 않아 운량할 필요를 없애고, 기강을 대략적으로만 정해 이인과 한인들이 대체로 편안케 하려 하오'라고 말했는데 제갈량은 복종시키거나 회유한 이민족들의 마음을 얻고 촉한의 행정력, 영향력을 넓혀 이를 통해 남만의 풍부한 물자를 얻어 촉한과 남만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정책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제갈량 이후 시대에는 마충, 장억, 곽익 등의 인물들이 이런 기조를 이어받아 남만지방을 경영하였다. 이들은 이민족들에게 사후 비까지 세워지는 등 인심을 얻었으며 반란의 규모도 유비 사후 건흥 연간에 있었던 대규모 반란과는 달리 현지 사령관이 진압할 수 있는 수준 정도가 되었다. 제갈량 스스로가 남만정벌 이후 출사표에서 '지금 남쪽을 정벌하여 인마와 무기, 갑옷의 풍족'을 언급하고 있으니 제갈량의 남만 정벌은 여러 모로 촉한에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고 할 수 있다.

2.5. 제갈량의 북벌[편집]

제갈량은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에 나선다. 북벌의 동기에 대해서는 그냥 '위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라고 출사표 등에 나오는데 제갈량의 전략/전술이나 진태전의 구절을 볼 때 사실은 옹주/양주를 점령하여 촉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 제갈량의 목표였다는 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의 북벌추풍오장원 문서 참고.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왕경이 도주해버린 후라 성을 굳게 지킬 수 없으므로, 강유가 만일 양주로 가는 길을 끊어 사군의 백성과 만족을 겸병하여 관농의 요충지를 점거한다면 왕경의 군사를 전멸시키고, 농우를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응당 대군이 사방으로 모이는 것을 기다린 후에 강유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장군 사마문왕이 말했다. "옛날 제갈량은 항상 이런 뜻을 품고 있었지만, 끝까지 실현시킬 수 없었소. 이처럼 큰 사업과 계책은 강유에게 맡길만한 일이 아니오."


어림에 따르면 제갈무후(제갈량)가 사마선왕(사마의)과 위수 가에서 장차 싸웠는데, 선왕은 융복(戎服)을 입고 일에 임하며, 사람을 보내 무후(제갈량)를 살피게 하였다. 과연 무후는 흰 수레를 타고, 갈건(葛巾)을 쓰며, 백우선(白羽扇)을 쥐고 삼군(三軍)을 지휘하니, 중군(眾軍)이 모두 그에 따라 나아가고 멈추고 하였다. 선왕(사마의)이 듣고 감탄하여 말했다.

가히 명사라 이를만 하도다!

2.6. 죽음[편집]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사망한다. 다음 당초에 유선에게 올린 유언이다.

성도에 뽕나무 8백 그루가 있고 메마른 땅 열다섯 경(頃)이 있으니 자제들이 입고 먹기에는 스스로 넉넉합니다. 신이 밖에서 임무를 받들 때는 따로 조달할 것 없이 제 한 몸의 먹고 입는 것은 모두 관부에 의지했으므로 따로 생활의 방도를 차리게 하여 적은 양을 보태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죽었을 때 안으로 여분의 비단이나 밖으로 남은 재산이 있어 폐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죽은 뒤에 보니 그 말과 같이 가진 재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제갈량의 유해가 성도로 돌아오자 황제 유선은 나라 전체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크게 애도하면서 장례식을 준비했다. 유선은 조칙을 내려 "생각건대 그대의 천성은 문무를 겸비하고 밝은 지혜를 갖췄으며, 독실하고 성실하여 탁고의 유조를 받아 몸소 짐을 보필하니, 끊어진 것을 잇고 쇠미한 자를 흥하게 하며 난세를 평정할 뜻이 있었다. 이에 육사(六師)를 정돈해 정벌하지 않은 해가 없었고, 신무(神武)를 혁혁하게 빛내어 위엄을 천하에 떨쳐 계한(季漢,촉한)에 큰 공을 세웠으니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의 큰 공훈과 나란하도다. 어찌 하늘이 보살피지 않아 대사가 거의 이루어지려는 찰나에 병을 만나 죽게 되었는가! 짐은 상심하고 서러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무릇 덕을 존중해 공의 순서를 세우고 행적을 기록해 시호를 명하니, 이로써 장래에 빛나게 하고 책에 기재하여 쇠하지 않게 하려 한다.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라고 슬퍼한 후에 그에게 승상(丞相) 무향후(武鄕侯)[14]의 인수와 충무후(忠武侯)의 시호를 내렸다.

이후 촉한은 곧장 조정의 재편에 들어갔다. 생전에 제갈량이 미리 예고했던 대로 장완이 중요한 업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상서령(尙書令)에 도호(都護),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승진한 장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대장군(大將軍)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승진하며 촉한의 전체적인 군사와 정사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 외에 좌장군 오의가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승진하여 한중의 수비를 맡았고, 사마의의 추격을 무사히 저지했던 강유는 우감군(右監軍) 보한장군(輔漢將軍)이 되어 군부의 요직에 올랐다. 또한 비의는 후군사(後軍師)의 직책을 맡았으나 얼마 후 대장군 녹상서사로 올라간 장완을 대신하여 상서령에 임명되었다.

제갈량이 엄격한 통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원망한 백성들은 없었으며 오히려 제갈량이 사망했을 때는 백성들이 사당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유선이 듣질 않자 길거리에서 제사를 올리고 융이(즉, 주변 부족들)마저 들판에서 제사를 올려 결국 한중 면양에 제갈량의 사당을 짓게 했다는 구절이 양양기에 기록되어있다. 이 사당은 후일 위나라의 종회가 촉한의 한중을 공격했을때도 참배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남만에도 제갈량을 기린 장소가 많으며 심지어 제갈량이 물을 떴다는 우물도 존재한다.

한편 죄를 지어 유백갔던 이엄은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제 자신이 속죄할 기회는 영영 사라졌다고 탄식하다 병에 걸려 죽었다. 마찬가지로 시종 거만한 언행을 일삼다 파직당해 쫓겨났던 요립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더 이상 복직될 길은 없게 됐다고 슬퍼했다.

한진춘추, 양양기의 저자 습착치는 이런 제갈량의 죽음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옛날 관중(管仲)은 백씨(伯氏)가 가진 병지(騈地)의 식읍 300호를 빼앗았으나, 죽을 때까지도 원망하는 말이 있지 않았으므로 이는 성인께서도 어려운 일이라 여겼다. 제갈량은 요립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고, 이엄(=이평)은 죽게 되었으니 어찌 단지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은 것에 그치겠는가?

무릇 물이란 지극히 평평한 것이므로 사악한 사람조차도 그곳에서 모범을 찾고, 거울이란 아주 밝게 비추는 것이므로 추한 사람도 화내기를 잊는다. 물과 거울이 사물을 끝까지 다 드러내지만 그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에 사사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물과 거울에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비방을 면제받는 것이니, 하물며 대인과 군자가 즐겁게 살려는 마음을 품고 긍휼히 여겨 용서하는 덕을 보이며, 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곳에만 사용하고, 형벌도 그들이 스스로 범하였던 죄에만 주어지고, 작위를 줄 때 사사로움을 품지 않으며, 주살하였다고 해도 노여움에서 한 것이 아니니, 천하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2.7. 묘소[편집]

제갈량의 무덤은 오래 전 유비가 조조의 장수 하후연을 참살하고 대승을 거두었던 정군산에 있게 되었다. 이는 생전 제갈량이 미리 유언을 남겨 정해진 것이라고 한다. 덧붙여 그는 무덤의 크기를 관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만 만들고, 자신의 시신은 평복으로 염하되 따로 부장품을 넣지 말라고 당부했다.

오늘날에도 혹자들은 정군산 밑에 그가 묻인 무후묘가 따로 있음에도, 정군산 전체를 제갈량의 무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17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남아 있어 전체적으로 작고 아담한 분위기다. 이곳 안내원은 "무후묘가 1700년이 넘도록 훼손되지 않은 것은 다른 무덤과는 달리 매장품이 없어 도굴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곳에는 수령 1700년된 측백나무로 무후묘를 지키고 있는데 묘지 안에는 여기저기에 오래된 측백나무가 자리를 잡고 서 있다. 제갈량이 54세에 죽어 당시 54그루를 심었는데, 그 중 22그루가 아직도 살아 무덤을 지키고 있다. 이 나무들은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중국인들에게는 귀한 국보로 여겨지고 있다.

제갈량의 무덤에는 봉분 옆에 황과수(黃果樹)라는 이름을 가진 큰 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제갈량의 아내인 황부인을 상징한다. 거의 전쟁터에 살다시피한 제갈량과 황부인은 전생에서 부부의 정을 깊이 나눌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하여 그녀가 살아 못다 한 부부의 정을 다하기 위해 죽어서 남편의 무덤 옆에 나무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내려져 온다. 이곳 사람들은 곤경에 빠지거나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지혜의 화신'으로 불리는 제갈량의 묘를 찾아 방법을 강구한다고 한다.

인근 면현 무후사는 중국 전국 각지에 위치한 2000개가 넘는 제갈량 사당 중 유일하게 촉한 당대에 황제(유선)가 조서를 내려 만든 사당이다. 그런 의미로 ‘천하제일무후사’라고도 불린다. 무후사는 성도에 있는 것이 가장 크고 화려하지만, 면현의 무후사는 그보다 50여년 먼저 지어졌다. 현존하는 무후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당은 대문(大門), 이문(二門), 악루(樂樓), 사정(祠亭), 대전(大殿) 등으로 이뤄져 있다. 대전(大殿) 안에는 제갈량의 앉은 상이 안치돼 있고, 좌상의 양측에는 관우의 아들 관흥(關興)과 장비의 아들 장포(張苞)의 입상이 있다. 관흥과 장포의 동상은 무후묘에도 있는 것인데, 이곳에 있는 동상들의 손에 든 칼과 창이 더 크다. 집 밖에서 제갈량을 수호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무후사에도 수령 1700년 된 측백나무가 제갈량이 만든 팔진도의 원리에 따라 64그루가 심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16그루만이 살아 무후사를 지키고 있다. 사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청나라 옹정제가 내린 '한승상제갈무향충무후사(漢丞相諸葛武鄕忠武侯祠)'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아래 '충심이 하늘을 찌르다'라는 의미의 청 가경제의 ‘충관운소(忠貫雲宵)'라는 편액이 있다.

3. 연의[편집]

정사에는 엄정한 정치가의 면모가 주로 부각되지만 연의에서는 천재 군략가의 면모가 주로 부각된다. 정사의 제갈량이 원칙에 충실한 청렴한 정치가라면 연의의 제갈량은 남보다 우월한 두뇌로 상대를 농락하는 천재형. 다만 그 때문에 야전 사령관으로 나가서 계략을 사용해 승리를 이끄는 모습에만 편중되어 제갈량의 매우 뛰어났던 정치수완 등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연의에서 제갈량 북벌 이야기는 많지만 제갈량이 내정에 힘쓴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면서 연의의 탓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연의도 제갈량의 뛰어난 내정능력에 대해서 서술한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삼국지를 논하는 이들이 연의조차 읽지 않고 무조건 연의 탓 얘기를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다음은 유비 승하 이후 공명이 승상으로서 촉한을 통치할 때의 모습을 묘사한 연의의 한 구절이다.

한편, 제갈 승상이 성도에 머물며, 큰 일 작은 일 가리지 않고, 모두 몸소 공무를 처리하고 결단한다. 양천(동천과 서천, 측 한중과 파촉) 백성들이 기쁘게 태평성대를 즐기니,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고,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다. 다행히 여러 해 잇달아 크게 풍년이 들어, 늙은이나 어린이나 모두 배를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며, 나라에서 노역을 시켜도, 서로 앞다퉈 부지런히 일한다. 이리하여, 군수물자, 무기, 여러가지 쓸 것들이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다. 쌀은 곳간에 가득하고, 재물은 곳집에 들어찬다.


삼국지연의 87회 - '남쪽의 도적을 정벌하러 승상이 크게 군사를 일으키고, 천자의 군대에 항거하던 오랑캐 왕이 처음으로 잡히다.' 中


어쨌거나 연의에선 이릉대전의 줄초상 이후 후반을 책임지는 스타 캐릭터다. 사마의는 당시에는 위나라의 장군 중 하나일 뿐인데다 안그래도 조비에게 의심받아 혼자 활약하지도 못하고 크게 이곳 저곳에 개입하기 힘든 데 비해, 제갈량은 승상이라는 위치 때문에 엮일 이벤트가 상당히 많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독 제갈량만 심하게 띄워지는 건 후반부를 책임져야 할 주인공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과 관련된 일들은 현재까지도 굉장히 자주 쓰여지는 것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 삼고초려읍참마속이다.

삼고초려는 유비가 제갈량을 설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인데, 제갈량은 유비의 정성에 감동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읍참마속원칙을 위하여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버린다는 뜻이다. 북벌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격전지였던 가정에서 마속이 부장이었던 왕평의 말을 무시하고 산 봉우리 정상에 진채를 세웠다가 대패하여 촉군이 또다시 북벌을 포기하게 된다. 후에 제갈량이 군율을 위해 마속을 참하였다. 이것이 바로 읍참마속의 유래다. 과거에 유비가 제갈량에게 마속을 중하게 쓰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기도 하였다.

연의의 후반부의 주인공은 사마의제갈량이다. 정사에서는 사마의의 우주방어로 인해 재미없는 부분을 제갈량과 사마의의 두뇌 싸움대결로 꾸며 놓았다. 사마의제갈량에게 대부분의 작전 대결에서 패하지만 이후로는 계속 우주방어.

제갈량은 장기전으로 끌고가던 사마의를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호로곡에 농사를 짓는 것처럼 위장한다. 이후 계속해서 호로곡에서의 무력한 모습을 보여준 후, 사마의가 호로곡을 점령하러 올 것을 예측한 공명은 호로곡에 화약을 설치한다. 이후 자신에게 불만을 품는 위연을 미끼로, 사마의를 호로곡에 유인하는 데 성공, 바로 바위를 굴려 골짜기의 입구를 막아버리고 화약을 작동시켜 사마의는 공명의 함정에 걸려든다. 그리고 사마의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빠져나갈 방도가 없어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자포자기하지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화약들이 다 터지지 못하고, 결국 사마의는 무사히 호로곡에서 벗어나게 된다. 실제로 사마의가 아주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공명은 처음에는 드디어 사마의를 잡은 줄 알고 기뻐했으나, 골짜기 위로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침울해하더니, 결국 사마의가 탈출했다는 보고를 듣고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되,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라는 말을 한다. 공명 입장에서는 무심하기 그지 없는 하늘이었을듯.

호로곡 패배 이후 사마의는 정말 진채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공명은 사신을 시켜 여자 옷이나 장신구 등을 사마의에게 보내 도발하지만, 사마의는 참아내고 사신과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사마의가 공명은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사신은 "잠을 적게 자고 식사를 잘 하지 않으시며 작은 형벌까지도 직접 살피신다" 정직하게 말해주고, 이를 들은 사마의먹는 것은 적은데 그렇게 과로해가지고 오래 살겠느냐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식소사번. 결국 머지않아 그의 예측대로 제갈량은 위독해진다.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자 어느날, 강유10일동안 촛불이 꺼지지 않고, 하늘에 기도하면 천명을 늘일 수 있는 주술이 있는데 써보는게 어떻습니까라고 제안해 제갈량은 10일 동안 기도 의식에 들어간다. 그러나 9일째, 우연히 밤 하늘을 보고있던 사마의가 제갈량의 별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야습을 하게 된다. 위연이 적의 기습에 강유의 제지를 뿌리치고 제갈량의 침소에 들어가다 촛불을 떨어뜨려 제갈량의 생명 연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제갈량은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하늘을 보면서 너르고 너른 하늘아, 너에게도 끝간 데가 있더냐?라는 슬픈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제갈량은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들을 모아만든 책을 강유에게 물려주고, 자신이 죽은 후에 후계자로 장완비의를 지명하며, 위연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제압할 계책까지 알려준 후, 숨을 거둔다.

제갈량이 죽자, 제갈량의 장성이 떨어치고 이를 보고 제갈량의 사망을 눈치챈 사마의는 바로 추격해오지만, 제갈량이 미리 만들어놓은 목상을 세우고 강유가 공세로 나오자 사마의는 공명이 주술을 써서 별을 떨궈 자기를 나오게 한 줄 알고 그대로 도주, 몇 십리 동안 겁먹은 채로 도망간다.
여기서 나온 말이 사공명주생중달,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도망치게 하다'이다.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마의는 탄식하고 다시 추격해보지만 이미 촉군은 멀리 퇴각한 상태. 이후 사마의는 돌아오며 제갈량의 진채를 보며 "공명은 참으로 기재였다!"라는 말을 한다.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죽자 유선이 제갈량의 관 위에 엎드려 '하늘이 나를 멸망케 하려 한다.'며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문열 삼국지에도 차용된다. 제갈량이 있었던 기간은 11년, 사후 유선의 통치기간은 29년으로 훨씬 더 길어서 제갈량의 죽음이 촉한의 멸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것보단 제갈량 사후 제갈량의 후계자들이 워낙 일을 잘해줬고 유비가 생전 준비해준 한중방어선 대로 낙곡대전등의 대승을 거두어 촉한이 30여년간 버틸수 있었던 것이다, 후일 다른 나라의 대신들이 촉한이 멸망할때 유비의 다스림이 있어서 더 버틸줄 알았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이 두 사람이 쌓아놓은 기반으로 촉한이 버텼다고 당시에도 보았다 할 수 있다.

4. 인간 관계[편집]

4.1. 가족 관계[편집]

  • 황부인: 제갈량의 부인이자 양양의 명사인 황승언의 딸. 머리는 누렇고 얼굴은 검어 갸루 외모는 그리 볼품 없으나 총기와 재주는 탁월했다고 한다. 이 결혼을 통해 제갈량은 양양의 상류 귀족층에 진입하였다. 황승언은 황부인의 외모를 폄하하면서도 그 재기만큼은 제갈량에게 어울릴 것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딸에 대한 자랑이기도 하지만 공명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 제갈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제갈량의 친형. 제갈량보다 7살이 많다. 제갈 형제의 숙부인 제갈현이 제갈량과 제갈균, 그리고 제갈량의 큰 누이와 작은 누이를 데리고 남하할 당시, 고향의 전원과 묘지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기에 관례를 치를 나이가 된 제갈근이 계모를 모시고 영도에 남아 이들은 13여 년 동안 생이별을 하게 된다. 젊어서 낙양에서 유학했으며 결국 자신도 전란을 피해 계모를 모시고 강동으로 들어가 노숙의 인맥에 편입되어 손권의 막하에 들게 된다. 겸허하고 고아한 인품의 소유자로 장소와 함께 군주 손권의 불 같은 성격을 제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군사, 외교적으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으며 오나라의 신하로써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할 만큼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갔다.[15] 동생인 제갈량과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한번 만났고 이산가족 상봉, 근이 오의 중신, 량이 촉한의 승상이 되어서도 만났는데 사적인 얘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혈연이 혈연인지라 손권에 의해서 대촉 외교에 많이 애용되었다.[16] 그 형에 그 동생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케이스. 두 명 다 충신 중의 충신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제갈균: 제갈량 삼형제의 막내. 형이 유비에게 출사한 뒤 유비를 따랐으며, 장수교위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형인 제갈량을 위해 약혼을 했다 하는데 정치적인 정략 결혼을 한 모양이다. 부인은 임씨로, 둘 사이에서 망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제갈망의 후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제갈량의 큰누이: 괴월, 괴량 등으로 유명한 양양의 명문가인 괴씨 가문의 자제 괴기와 결혼. 제갈량이 융중에서 밭을 갈며 공부를 할 당시 경제적 부분 등 이방인인 그가 양양에 정착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제갈량의 작은누이: 양양의 명문귀족이자 명성 높은 선비인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결혼.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양양에 정착하고 공부하는데 있어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 제갈첨: 제갈량과 황부인 사이에서 난 장남.[17] 촉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상서부사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263년 면죽에서 위나라 장군 등애에게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 제갈상: 제갈첨의 장남으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다.

  • 제갈경: 제갈첨의 차남으로 촉 멸망 때는 나이가 어려서 아버지, 형과 달리 참전하지 않았다. 촉이 멸망한 뒤 하동으로 이주했으며 서진 아래에서 강주 자사를 지냈다.

  • 제갈교: 제갈근의 차남. 제갈량의 양자로 들어가 부마도위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제갈반은 익무장군을 역임했다. 제갈첨이 태어난 다음 해에 요절했지만 아들 제갈반을 남겼다.

  • 제갈반: 제갈교의 아들. 제갈량에게 있어선 양손자에 해당되는데, 제갈근의 장남인 제갈각과 그 가족이 오나라에서 죽임을 당해 제갈근의 대가 끊겼다. 훗날 손침이 주살되고 제갈각이 복권되자 오나라로 돌아가 제갈근의 후사를 이었다.

  • 제갈각: 제갈근의 장남인 관계로 제갈량에게는 조카. 제갈근 사후 손준과 더불어 오나라의 실세가 되었지만 오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게 했고, 전횡을 일삼은 것을 계기로 살해당하고 만다. 이 때문에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제갈씨 능력자 3인방(제갈량, 제갈근, 제갈각) 중 혼자만 매력이 유난히 낮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둘 다 90대를 호가하는 매력이지만 제갈각 혼자만 50~60대의 매력이다. 매력 이외의 능력은 작은아버지와 거의 흡사할 정도의 귀재.

  • 제갈과: 가상인물. 설화에서 제갈량의 딸로 등장한다. 신선술을 좋아하였으며, 선과를 얻고싶어하여 이름을 과로 바꾸었다. 성도에는 현재 유성모선사승연갈녀지사라는 사당이 있으며 여기에 모셔져 있는데, 물론 제갈량에게 딸이 있다는 역사적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 제갈규: 제갈근, 제갈량, 제갈균의 친부. 자는 근공. 제갈풍의 자손이나 몇 대 자손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중국 학계에서는 제갈풍과 제갈규 사이의 공백기를 따져 약 7-8대손 정도로 추정하는 모양. 태산군의 군증을 역임했으며 부인 장씨 사이에서 3남과 2녀를 출산. 순서대로 장남 제갈근, 장녀, 차녀, 차남 제갈량, 막내 제갈균이 태어난 모양. 제갈량이 3, 4세 때 장씨가 사망하자 후처를 들였고 제갈량이 8세 전후가 되었을 때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제갈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 제갈현: 제갈규의 동생. 제갈규 사망 후 제갈규의 가족을 수습했으며, 조조로 인해 전란이 서주까지 미치자 제갈량, 제갈균, 그리고 두 명의 질녀를 데리고 남하한다. 이때 원술의 요청으로 예장 태수를 역임. 예장은 양주 자사 관할로 원술에게는 권한이 없었으며 조정의 비준도 받지 않은 모양으로, 자칭 황제 원술은 한실을 무시하고 있었고 또한 군벌로써 세력을 확장하려하고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이후 조정에서 예장 태수 주호가 파견되자 순순히 물러나고[18] 형주목 유표를 찾아가 정착한다. 이후 제갈현의 두 질녀가 양양의 명문귀족인 괴씨 가문과 방씨 가문에 시집을 간 것으로 볼 때, 유표가 제갈현을 후하게 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제갈량이 17세가 되었을 때 병으로 사망한다.

4.2. 친인척 관계[편집]

  • 황승언: 제갈량의 장인. 양양의 명문귀족이며 채풍[19]의 장녀와 결혼하였다. 유표가 채풍의 차녀를 후처로 들였기에 황승언은 유표와 처형제가 되는 셈. 고로 제갈량은 유표와 장인에 해당되는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 제갈량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제갈량에게 자신의 딸을 추천했으며, 이로써 제갈량은 양양의 명문귀족인 유씨, 채씨, 황씨, 괴씨와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

  • 방덕공: 양양의 이름 높은 선비. 제갈량의 작은 누이가 그의 며느리가 되기에 제갈량과는 친인척 관계가 된다. 벼슬길에 한 번도 나서지 않았으나, 유표는 그가 벼슬길에 나서 자신을 도와주기를 원해 찾아가곤 했었다. 유표가 그에게 물었다, "그대가 벼슬에 나아가질 않으니 후손에게 무얼 남겨줄 수 있겠소?" 방덕공이 답하기를, "벼슬에 나아가질 않으니 후손에게 안전을 물려줄 수 있지요." 유표는 그저 탄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마휘보다 10살이 많아 사마휘가 형으로 모셨으며, 제갈량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를 자주 지도했다. 와룡이라는 별호는 방덕공의 입에서부터 퍼진 것이라 한다.

  • 방통: 자는 사원. 방덕공이 별칭으로 붙여준 봉추로도 유명하다. 양양의 명문귀족인 방씨 가문의 자제로 방덕공의 조카. 제갈량의 작은 누이가 방덕공의 며느리이기 때문에 방통과는 또 친인척에 해당된다. 사마휘 방덕공 부손 등 인사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이들 모두에게 극찬을 받으며 우여곡절 끝에 유비의 참모로 합류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유비가 익주에 입성하기 위하여 출전할 때 일군을 이끌다 전사하였다.

  • 방산민: 양양의 명문귀족인 방씨 가문의 자제. 제갈량의 작은 누이와 결혼하였다.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황문이부랑에 올랐으나 요절. 그와 제갈량의 작은 누이의 아들로 추정되는 환이 진나라에서 태수직을 얻었다.

  • 제갈탄: 제갈근, 제갈량의 먼 친척. 같은 사예교위 제갈풍의 후손으로 고향도 같다.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진동대장군이라는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후에 수춘성을 근거로 기병했다가 사마 가문에 주살당한다. 때문에 당대의 사람들은 제갈량, 제갈근, 제갈탄을 빗대어 촉나라는 (제갈량)을 얻었고 오나라는 (제갈근)을 얻었으나, 위나라는 (제갈탄)를 얻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면 알 수 있듯이 진동대장군에 오를 만큼의 인재였으며 당대 선비들에게 흠모를 받기도 한 인재인지라 용과 범은 아니었어도 준걸은 분명 준걸이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의 인재가 "개" 취급을 받았을 정도로 제갈량과 제갈근이 대단했다는 말도 된다. 먼치킨 제갈가문. [20]

  • 괴기: 양양의 명문귀족인 괴씨 가문의 자제. 제갈량의 큰누이와 결혼하였으며 평판이 좋은 인물이었다. 상기했다시피 위나라에서 방릉 태수를 지냈으나, 맹달이 방릉을 공격했을 때 살해당했다. 괴씨 가문의 자제인 그가 자형이라는 것만으로도 제갈량이 양양에 입지를 얻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며, 제갈량과도 교우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유표: 형주의 주목. 한실의 먼 친척으로 유비와도 친척에 해당된다.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이 유표와 매형처남 사이이기 때문에 또한 친인척에 해당된다. 결국 유비는 자기의 머나먼 인척을 책사로 들인 것이정도로 멀면 그냥 남이잖아

  • 채모: 유표의 신하로 형주의 2인자. 채모의 누나들이 둘째 누나는 유표, 큰 누나는 황승언의 부인이다. 즉, 제갈량에게 채모는 처외삼촌인 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표의 후계자 문제 때문에 채모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4.3. 교우 관계[편집]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하면서 득을 본 것 중에 하나가 제갈량의 인적 네트워크란 시각도 있다. 그전까지 유비는 그를 보좌해 줄 인재들이 그리 많지 못했지만 제갈량을 등용함으로서 제갈량이 알고 지낸 형주의 인사들을 추천받거나 하여 상당 수의 인재들을 얻을 수 있었다.

북벌 때 옛 친구인 서서석도가 위에서 하급 벼슬아치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에는 선비가 너무 많구나. 어찌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쓰인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서서는 어사중승(정3품, 감사원장 격)까지 올라갔고 석도는 전농교위, 역시 동문수학한 사이인 맹건은 양주자사(도지사 급)를 거쳐 정동장군까지 해먹었다. 결코 낮은 직책이 아니다. 게다가 촉에는 구품관인법이 없었기 때문에 제갈량이 위나라의 시스템을 잘 이해 못한 점도 감안해야 한다. 특히 조비 때에는 주로 호족 등의 배경있는 인물들이 윗자리에 올랐는데 아무래도 그들보다 능력이 낫다고 보기 어려운 왕충 같은 인물들도 고위직에 앉은 걸 보면 더욱 그렇다.

  • 사마휘: 수경이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 인물평이 실로 정확했으며, 방덕공과 형님아우하는 사이였다. 제갈량의 스승으로써 그를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능을 높이 사 여남에 사는 풍구라는 이를 스승으로 모셔와 제갈량을 지도했다. 후에 제갈량을 유비에게 천거하였다.

  • 최주평: 박릉 출신.[21] 아버지는 한 영제 때 사도, 태위 벼슬을 지낸 최열로 동취(銅臭)라는 고사를 남긴 사람이다. 부패 관료인 아버지와는 달리 건실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이 출사하기 전 스스로를 관중악의에 비유했을 때 다른 이들은 수긍하지 않았으나 최주평과 서서만은 그 재주를 인정하고 변호해 주었다. 또한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단점을 수시로 지적해줬는데 제갈량은 이 일을 들어 훗날 신료들에게 자신의 단점을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말 것을 권했다.

  • 서서: 자는 원직. 본명은 복. 양양에 모여있던 인재들 중의 한 명으로서, 그 재능을 인정받아 유비의 밑에서 벼슬을 하나 어머니가 조조군에 사로잡혀 위로 귀순한다. 제갈량과는 형주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교우를 맺게 되었다. 제갈량이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교할 때 진지하게 그 말을 인정했던 몇 안 되는 사람으로서 제갈량과는 유별나게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보다 먼저 유비를 섬기던 중, 조조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그대로 출세했다.

  • 석도: 자 광원. 제갈량과 형주에서 함께 유학을 했던 인물. 제갈량과 우의가 상당히 깊었다. 조조가 형주로 남하할때 임관해 군수, 전농교위 등의 관직을 거친다.

  • 맹건: 자 공위. 역시 제갈량과 형주에서 함께 유학했던 인물. 향수병을 이기지 못해 고향에 돌아가 조조 밑에서 벼슬살이 했다. 친구들 중에선 가장 먼저 출사한 인물. 이때 제갈량은 "중국에는 사대부가 많은데 왜 하필 고향에서 노니려 하시오." 하며 몹시 안타까워 했다. 제갈량이 기산에서 사마의와 대치할때 사마의의 편지에 답하면서 자신의 안부를 맹건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한 걸로 보아 둘의 우정은 그때까지도 변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마량: 양양의 명문귀족인 마씨 가문의 아들. 백미(흰 눈썹을 가진 기재)라는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제갈량보다 나이가 어려 제갈량을 존형이라 불렀다. 제갈량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친분이 깊었던 인물로 그를 따라 촉에서 벼슬을 하나 이릉대전 때 사망.

  • 마속: 마량의 동생. 제갈량이 남정북벌을 준비하는 동안 자주 군략을 의논했던 상대. 마량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제갈량이 더더욱 총애했던 것으로 보이나 결국 제1차 북벌 때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제갈량은 울면서 마속을 베었다.(읍참마속)

  • 장완: 제갈량의 후임자. 일찍이 근무태만 혐의로 유비가 죽이려 했으나 그 능력을 알아본 제갈량에 의해 목숨을 건지고 위의 사례와 역관계 제갈량 시대에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북벌기간 동안 촉군의 후방을 지원했고 제갈량의 뒤를 이어 사실상의 제1인자로 촉한의 국정을 책임졌다.

  • 조운: 제갈량과 뜻이 잘 맞아 사실상의 교우.[22] 조운이 죽자 가장 슬퍼한 이 역시 제갈량이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두사람이 각각 문과 무에서 정점을 찍고 있다. 제갈량의 인간관계에 속하는 모든 이들 중 최강자. 실제로도 제갈량은 조운에게 많이 의지했는데, 그 이유 역시 조운의 노련한 무력과 풍부한 실전 경험 때문이었다. 덕분에 제갈량이 여자가 된 창작물(삼국전투기, 여자 제갈량 등)에선 조운이 남편이다… 황부인은?

  • 강유: 제갈량이 북벌 중에 발굴한 젊은 인재. 기성 출신으로 일찍부터 정현의 학문(훈고학)을 익히며 한실 부흥에 뜻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차 북벌 당시 촉한에 귀순했고 그 재능을 알아본 제갈량이 중앙에 그를 추천하여 군사 경험을 쌓게했다. 이후 촉한의 핵심 지휘관으로 성장했으며 장완과 비의 사후 현상유지에 급급한 유선 때문에 망국 루트를 타는 촉한의 마지막 보루가 된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평생동안 병법을 연구하여 만들어낸 심서를 강유에게 물려준다. 그걸 바탕으로 북벌을 계승하였으나, 제갈량만한 기반이 없는데다(위나라 출신의 항장이니까) 정치력이 모자라(싸우는 것 말고는 염두에 두지 않은 듯. 그게 아니라도 내부에서 힘을 갉아먹는 사람이 넘쳐났다.) 스승의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으며, 촉을 점령한 위군 상대로 반간계를 쓰다가 실수로 패사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최후는 연의에서는 자결이지만 정사에서는 마지막까지 분투하다가 죽었다.

  • 엄준: 손권이 황제가 되자 위위로 임명되어 촉한에 사자로 갔는데, 제갈량이 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의 그의 장면을 알고 있다면 참 눈물이 나는 장면. 호구 왔능가?

5. 주요 정책[편집]

  • 법 제도 정비: 촉과의 제정, 촉과는 어떤 내용을 갖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지만, 제갈량 사후 상파라는 말단 관리의 일화를 보면, 군 단위의 횡령 사건을 2년에 걸쳐 수사했고, 무죄가 드러나자 관련 인물들을 방면하고 승진시켰다고 한다. 의심만 받아도 목이 날아가던 위나 오에 비하면 체계적인 재판수사가 이루어졌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 비단 산업 육성: 촉의 비단은 이미 한대부터 유명했는데 제갈량은 여기에 최신 직조기술을 도입하고, 비단을 물에 세척해 빛을 선명하게 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색과 무늬가 있는 비단을 유명하게 하였음은 물론, 아예 대단위 직조공업단지를 조성해서 비단 산업을 국가사업으로 육성한다. 이 덕분에 삼국시대 들어 그 명성이 더욱 높아져 거의 유일한 경쟁 대상이던 중원의 양읍이 순견 산업으로 전환해버릴 정도였다. 촉 멸망 당시에도 국고에 무려 80만 필이 있을 정도. 위의 조비조예도 촉의 비단을 애용했다고 하는데, 조예는 일본국 여왕 비미호가 조공하자, 그 답례로 촉의 비단을 내렸다고 한다. 후의 일이지만 당 왕조 대에 이르면 1년에 10만 필에 달하는 비단을 조정에 진상할 정도. 진상품이 이 정도면 교역량은 말할 것도 없다. 고우영의 중국만유기와 고우영 십팔사략에 의하면 성도(청두)사람들은 지금도 비단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서 청두에 있는 실크로드 표지판에 장안(시안)에서 7시방향으로 청두까지 실크로드를 연장해서 그려놓았다고. "비단이 없는 실크로드가 말이 되냐?"가 그 이유.

  • 도강언 정비: 도강언은 이 때도 넘사벽급의 수리시설이었지만, 제갈량은 1천 2백명의 수리공정 전담부대를 조직해서 2교대제로 도강언의 상태를 점검하게 하고, 9리에 달하는 제방을 구축해서 도강언의 기능을 강화한다. 초주 같은 사람조차 '익주에는 다른 동네에서 일어나는 가뭄 같은 건 있을 수 없고, 천하가 우리를 하늘의 곳간이라 한다.'고 말할 정도.

  • 군사 제도: 팔진을 정립했다. 이릉대전 때의 묘사[23]를 보고 이문열은 이걸 깠지만. 사실 팔진은 무슨 트랩 같은 게 아니라 군의 포진법이다. 팔진을 훈련했다는 건 후대의 원앙진 이나 서양의 팔랑스, 테르시오같은 당대 기준으로 최적화된 전투 진형이다. 실제로 제갈량이 정립한 군사 제도는 매우 우수해서 사마소가 촉나라를 멸망시킨 뒤 가장 먼저 제갈량의 군사제도를 배워오게 했다고 하며, 과장은 있겠지만 한참 뒤인 송대에 이르기까지 제갈량이 개량한 팔진법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당태종 이세민도 신하들과 군사를 논하며 제갈량의 이름을 거론했다고 한다.

  • 소금 산업: 촉의 소금은 지하에 흐르는 염수를 끓여 소금을 정제하는 방식으로 얻었는데, 순도가 높고 알갱이가 커서 고가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제갈량은 남부 일대에서 일종의 비법처럼 전해지던 천연가스(화정)를 사용하는 방법을 개량해서 소금의 순도를 한층 높였다.

  • 무기 개량: 촉에는 철광 또한 풍부했는데, 제갈량은 철광 개발을 독려하고 그 무렵 개발되던 백련강(두드려서 잡다한 성분을 제거하는 방법)과 쉬화법 등의 최신 제련기술을 도입, 갑옷-투구와 무기류를 개량했다. 촉의 전설적인 대장장이 포원이 만든 칼은 쇠구슬을 가득 채운 대나무를 일격에 절단했고, 촉의 투구는 25석 쇠뇌의 일격을 버텨냈다고. 또한 쇠가시를 많이 만들어서 주요 통로에 뿌려 일종의 지뢰처럼 사용했는데, 사마의는 제갈량 사후 그를 추격할 때 병사들에게 밑에 나무를 덧댄 신을 신겨 이를 막으려 했다고 한다.

  • 화폐제도 재건: 광무제가 도입한 오수전은 동탁의 난정으로 악화가 되는데, 촉은 일단 유파의 화폐 발행으로 전시통화를 운용했고, 제갈량은 남중 정벌 후 남중의 구리광산에서 얻은 구리로 일정한 품질의 통화를 발행해 오수전 체제를 재건했다. 크기와 가치가 일정하고 공급도 안정적이어서 형주와 서북 일대에서도 신용되는 통화였다. 한말 동탁 이후로 예전 화폐는 가치를 잃었었다. 그리고 오나라도 화폐를 발행했었지만… 화폐를 발행하는 것과 그 화폐가 생명력을 얻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오나라도 촉이 발행한 화폐를 썼다.


제갈량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촉한이 조위나 손오에 비해서 인구와 자원수그리고 군주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북벌을 여러차례 지속적으로 감행할 정도로 국가체계가 매우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

6. 발명&이용품[편집]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제갈량은 교묘한 구상에 능하여 여러 기계를 만들었는데 이 때문인지 전승에 의하면 여러 가지를 발명하거나 이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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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대라면 모를까, 옛날에 만들어진 어떤 물건이나 개념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물론 여기엔 제갈량이 실제로 만든 물건들도 있지만 대충 유명한 인물에게 끼워 맞추기 마련이라 픽션인 부분도 많다보면 된다. 다르게 보면 이런 물건들을 발명했다고 여겨질 정도로 사람들이 제갈량의 지성을 높게 보았다고도 볼 수 있다.

  • (槍) - 이전에도 (矛)나 (戟)이 있었지만, 창은 제갈량의 발명이라고 전해진다.[24]

  • 신도(神刀) - 촉 지방의 포원을 비롯한 뛰어난 대장장이들을 모아 노력한 끝에 대단히 뛰어난 강도와 날카로움을 지닌 신도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일화로는 대나무 안에 쇠구슬을 넣고 칼로 내리쳤는데 일격에 안에 있는 쇠구슬은 가루가 되어버리고 내리친 곳 반대편까지 말끔하게 베어졌다는듯.

  • 비수(匕首) - 예문유취(藝文類聚)의 제갈고사(諸葛故事) 에서 이르길, 성도(成都)에서 비수(匕首) 5백 개를 만들어, 기사(騎士)들에게 공급했다.

  • 원융(元戎) - 정사에서는 "연노(連弩)를 개량해 이를 원융(元戎)이라 했다. 쇠로 화살을 만들고 화살 길이는 8촌이었고, 한번 노(弩)를 쏘면 10개의 화살이 함께 발사되었다"라고 기록되었다. 연의에서는 '연노'라 불리는 연속 발사가 가능한 특수한 노(弩). 촉군이 북벌을 할 때, 비장의 무기로 사용했다. 유명한 장합이 원융에 맞아 죽었다(…). 남송(南宋)의 학자 왕응린(王應麟)이 원융노를 들어 평한 바 있는데, "서촉의 노弩는 그 이름도 무척 많았는데, 크기로는 연노만한 것이 없었다. 십시(十矢)를 군아(群雅)라 불렀으며, 시(矢)를 비창(飛槍) 또는 통칭 최산노(摧山弩, 산을 무너뜨리는 쇠뇌)라 불렀는데, 바로 공명(孔明)이 만든 원융이다."하였다. 게임에서 이거 하나면 개꿀 빤다

  • 명광개(明光鎧) - 이후의 갑옷인 명광개와 유사한 것을 제갈량이 발명하여 촉군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에 발전하여 명광개가 되어 중국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 수전(手箭) - 용수철이 설치된 통 안에 화살을 넣고, 용수철의 탄력을 이용하여 작은 화살을 쏘아보내는 호신무기. 무당파의 문헌에 의하면 제갈량의 비전서(…)에서 구조를 알았다고 한다.

  • 목우유마(木牛流馬) - 연의 등의 민간전승에서는 로봇(…)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역사고증적으로는 아마도 산악의 험한 도로로 물자를 쉽게 운반하기 위한 특별한 구조를 가진 외바퀴 수레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정사에도 이를 제갈량이 고안한 것으로 나온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목우유마 수레 설을 따른다.

  • 풍등-중국에는 얇은 종으로 만든 뒤 안에 작은 촛불 등을 넣어 하늘로 띄우는 소형 열기구인 풍등(風灯, 천등(天灯)이라고도 한다.)이 있는데, 이를 제갈량이 만들었다고 해서(혹은 제갈량의 모자와 비슷하다고) 공명등(孔明灯)이라고도 부른다.

  • 만두(饅頭) - 제갈량이 남만 정벌을 갔을때, 강이 갑자기 거칠어저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제물로 사람의 머리를 바쳐야 강을 건널수 있다는 전설을 알자 사람의 머리를 대신하기 위해 밀가루로 머리 형상을 빗어 만들어 제사를 지낸 것이 만두의 유래라는 이야기가 있다. 송대 사물기원(事物紀原)에서 민간의 설화를 채록했으나 정작 여기서도 만두의 여러 기원을 소개하며 제갈량이 만들었다는 이야기에는 회의적. 그러나 서진의 속석(束晳, 261? ~ 300?)이라는 사람이 지은 병부(餠賦)에 라는 책에 이미 만두(曼頭)란 이름이 비로소 나타나는데, "만두는 무후 제갈공명에서 비롯된다"고 적었던 것을 보아 제갈량이 만두를 만들었다는 설은 이미 그의 시대 이후에 성행했던거 같다.

  • 화석연료 - 진나라 초에 쓰여진 당시의 백과사전 격인 서적인 박물지에 의하면 제갈량은 촉 지방에서 땅속에서 불길이 솟아나오는 화정(火井)이라는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불을 꺼내어 암염(巖鹽)을 정제하는데 사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현대에는 지표의 화석연료를 꺼내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축융은 중국 신화의 불의 신이다. 그리고 촉 지방은 천연가스가 나온다. 고대 중국인들이 그 불을 보고 축융이 사는 땅이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불은 제갈량으로 인해 소금 생산과 화폐 발행의 수단으로 이용된다.(당시 소금은 귀했다. 특히 내륙지방에서는) 양나라 사람 유소(劉昭)는 화정과 소금 생산의 관계에 관해 화정의 불을 통해 끓인 염정의 물에서는 1곡斛에 4~5두斗의 소금을 얻을 수 있는 반면, 일반적인 불로는 그만큼 소금을 얻을 수 없다 하였다. 제갈량은 화정이 사용되는 방식을 검토한 뒤 천연가스의 배출구를 좁게 하여 화력을 강하게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실제 화정에 적용했다. 흩어지지 않고 집중된 가스는 당연히 지속적이고 강한 화력을 얻어내는 결과를 낳았다. 화정의 개발과 보수가 성공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촉한은 품질 좋은 소금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유통할 수 있었다.

  • 수박 - 옛 촉 지방에서 재배되는 수박은 크고 당도가 높은데, 제갈량이 품종개량 했다는 말이 내려온다.

  • 전병 - 남은 밀가루와 고기를 이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

  • 보이차 - 의 한 종류로, 제갈량이 남만 원정 당시 풍토병에 괴로워하던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발명(?)했다고 한다. 제갈량이 남니산이라는 곳에 올라가 지팡이를 꽂았더니 거기서 차나무가 솟았다고(…) 그 후 운남은 보이차 명산지가 되었고 지역주민들은 승상님 하악하악하면서 남니산의 이름을 공명산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물론 이는 과장으로, 이미 기원전부터 사천지역과 운남지역은 차가 생산되고 있었다.

  • 백우선(白羽扇) - 제갈량의 심볼이기도 한 깃털부채. 전설에 따르면 제갈량은 수백 살 먹은 영험한 새 대붕응자조(大鵬鷹子鳥)를 멸종잡아 그 깃털로 백우선을 만들었고, 이 부채는 과거 300년, 미래 300년을 보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한다.

  • 팔진도 - 발명품보다는 전략에 좀 더 가깝지만 연의에서는 이것 덕분에 유비가 백제성으로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고, 육손은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황승언이 구해줄 때까지 헤매고 다녔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팔각형 모양의 방진으로 해석하고 있다. 진나라 사람 이흥(李興)은 "그대의 팔진(八陳)을 미루어보면 손자와 오자 때에도 없던 것이고, 목우(木牛)의 기이함은 쉽게 본뜰 수 없도다. 신노(神弩)의 공은 또한 기묘하구나! 천정(千井)을 가지런히 쌓으니 또한 얼마나 훌륭한가!"라고 평가했다.

문이과, 요식업, 예체능 통달 그냥 신이라 하지

7. 설전[편집]

제갈량은 삼국지연의 한정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설전에서 항상 이긴다. 참고로 그 설전에서 진 사람들 대부분은 오나라 출신이다(…).

7.1. vs 오나라[편집]

84부작 삼국지 당국강 버전 제갈량의 설전

삼국 육의 버전 제갈량의 설전 한국어 더빙판


가장 격렬했던 설전은 역시 적벽대전을 앞두고 오나라에 가서 손권과 동맹을 맺으려다 오나라의 신하들과 주전론/항복론을 얘기하는 장면.[25] 여기에 대해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vs 장소
    장소: 당신은 스스로를 관중악의에 비유했다. 그런데 당신을 얻기 전에 유비는 그나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할거하다가 당신이 휘하에 들어간 이후로 유비는 연패하여 한 구석에 처박히더니 이제 우리한테 손을 빌린다. 관중과 악의가 주군을 그렇게 섬겼나?
    공명: 우리 주군(유비)은 여남에서 조조에게 패배한 이후, 작고 궁핍한 신야에 병사는 천 명도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망파 화계, 백하 수계로 하후돈과 조인을 패퇴시켰다. 또한 유종이 조조에게 갑자기 항복했을 때에도 동족의 기업을 차마 빼앗지 못했고 당양에서 수만 명의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모두 데리고 피난을 갔다. 자고로 적은 수가 많은 병력을 당하지 못하고, 승패는 병가에 있어서 자주 있는 일이다. 한고제도 항우에게 연이어 패배하였지만 해하 전투 한 번에 전세를 바꾸지 않았던가?

  • vs 우번
    우번: 조조의 군대가 백만이라는데, 대책은?
    공명: 그 대부분이 항복한 원소와 유표의 부하들이다. 즉 조조 자신도 못 믿는 병졸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흡수된 유표군을 제외하면 전부 북방 출신이다. 이렇 듯 제하고, 제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두려워 할 것 없다.
    우번: 그렇게 자신 있는 사람이 신야를 넘겨주고, 당양에서 대패를 하는가?
    공명: 우리의 숫적 열세가 심해서 패했을 뿐이고 지금 하구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다. 장강의 천험과 싸울 군대가 있으면서도 항복을 생각하며, 나라를 팔아먹을 생각부터 하는 당신이 어찌 우리의 심정을 알겠는가?

  • vs 보즐(혹은 보질)
    보즐: 그대는 소진장의를 본받아 세객이 되어 우리 오나라를 달래러 왔는가?[26]
    공명: 소진과 장의는 언변만 좋은 게 아니라 실제로 그것으로 여러 성을 탈환했다. 당신네들은 싸움도 안 하고 숨으려면서 어떻게 소진과 장의를 비웃는 거냐.

  • vs 설종
    설종: 조조를 어떤 사람으로 보는가?
    공명: 한실의 역적이다.
    설종: 조조는 이미 한나라의 삼분의 이를 차지했다. 이것은 조조가 한나라를 배반한 게 아니라 하늘의 순리가 그를 따라가는 것이다. 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공명: 조조는 할아버지 때부터 한실의 은혜를 입었다. 그러고도 난세를 틈타 세상을 훔치는 게 순리라면, 그대도 주군이 쇠퇴한다면 조조처럼 주군을 얕잡아 볼 것인가? 부모도 주군도 없는 패륜의 논리이니 더 이상 입 열지 마라.

  • vs 육적
    육적: 조조는 현재 한의 승상이고 그 조상으로는 한의 건국공신이었던 조참, 하후영이 있다. 반면 유비는 스스로 황손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도 않고 기껏해야 돗자리나 짜던 촌부였다. 어찌 상대가 되나?
    공명: 지금의 천자께서 우리 주공을 만났을때 여러 기록을 대조하여 황손임을 확인했고, 천자뿐만 아니라 온 천하가 우리 주공을 황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나라 고조께서는 정장이라는 말단 벼슬을 지냈을 뿐이지만 결국엔 항우를 이기고 한나라를 세우셨다. 그럴진대 출신이나 지금의 관직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vs 엄준
    엄준: 당신이 지금까지 한 얘기는 궤변에 불과하니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다. 어떤 학문을 배우셨는가?
    공명: 학문이 뭐가 중요한가? 선비도 쓸모있는 선비가 있고 쓸모없는 선비가 있으니, 쓸모없는 선비는 고작 문장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인다. 난 그렇게 책이나 읽고 허송세월하진 않았다. 날씨를 배웠지

  • vs 정병
    정병: 그대는 뻗대기만 할 뿐 배운 바가 없는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 그대를 욕할 것 같다.
    공명: 배운 선비라고 해도 쓸모없다. 양웅은 대학자였지만 왕망을 도왔다가 급기야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데 어찌 학문만을 배운다고 쓸모가 있겠나?


여기에 장온과 낙통이 나서서 힐난하려고 하다가 보다못한 황개가 난입해서 "적을 물리칠 생각은 하지 않고 입씨름만 하겠는가"고 꾸짖어서 종결된다. 솔직히 이 한 마디가 더 설득력 있다

이러한 사실을 삼국지 시리즈를 이용해 연출한 장면이 컬트적인 인지도를 갖고 있다.

그런데 저 사람들 대부분이 서주에 살던 토박이라는 점이 인상깊다. 서주의 풍습은 입심 대결

서주 출신

  • 장소 (팽성)

  • 장굉 (광릉)

  • 보질 (임회)

  • 엄준 (팽성)

  • 제갈근 (낭야)

기타

  • 정병 (여남)

  • 설종 (패군)

  • 우번 (회계)[27]


정사에선 위의 설전이 나오지 않지만 손권을 설득하는 장면은 나온다. 다음은 그 문답.

"해내(海內)에 대란이 일자 장군께서는 군사를 일으켜 강동을 점거해 차지하고 유예주(劉豫州-예주목 유비)께서는 또한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거두어 조조와 천하를 다투었습니다. 지금 조조는 큰 어려움을 제거하고 대략 평정을 끝냈습니다. 마침내 형주까지 격파하여 위세를 사해(四海)에 떨쳐 영웅들이 용병할 곳이 없으니 이 때문에 예주께서 도피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역량을 헤아려 대처하셔야 합니다. 만약 오(吳), 월(越)의 군사로 중국(中國)과 능히 맞설 수 있다면 (중국과) 일찍 관계를 끊느니만 못합니다. 만약 능히 당해낼 수 없다면 어찌 무장해제하고 북면(北面)하여 조조를 섬기지 않습니까! 지금 장군께서는 겉으로는 복종의 명목을 내세우며 내심으로는 망설이십니다. 일이 급한데 결단하지 못하니 머지않아 화(禍)가 닥칠 것입니다!"

손권이 말했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유예주는 어찌 끝내 조조를 섬기지 않는 것이오?"

제갈량이 말했다, “전횡(田橫)은 제나라의 장사(壯士)이나 오히려 의(義)를 지키며 모욕을 당하지 않았습니다.[28] 하물며 유예주께서는 횡실의 후예로,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덮어 뭇 선비들이 앙모하는 것이 마치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듯 하는 분이니, 만약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곧 하늘의 뜻일 뿐, 어찌 남의 아래에 들어가겠습니까!”

손권이 발끈하며 말했다,

"나는 오(吳) 땅 전부와 10만 군사를 들어 남에게 제어당할 순 없소. 내 계책은 이미 정해졌소! 유예주가 아니면 조조를 당해낼 수 없소. 그러나 예주가 이제 막 패한 직후니 이 어려움에 어찌 대처해야 하겠소?"

제갈량이 말했다,


“예주의 군이 비록 장판에서 패했으나 지금 돌아온 병사와 관우의 수군(水軍)이 정병 만 명이고, 유기가 합한 강하의 전사 또한 최소한 만 명입니다. 조조의 군사는 멀리 와서 피폐해졌고, 제가 듣기로 예를 추격해 경기병로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왔다 하니, 이는 이른바 '강한 화살이 끝에 이르러서는 노나라의 명주 천도 뚫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29] 이 때문에 병법에서 이를 꺼려 '필히 상장군을 꺾이게 하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북방 사람들은 물싸움에 익숙지 않고 또한 조조에 귀부한 형주민은 병력에 핍박당한 것이지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장군께서 실로 맹장(猛將)에 명해 수만 군사를 이끌며 예주와 협력하여 힘을 모으면 필히 조조 군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조조군 이 격파되면 틀림없이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형(荊), 오(吳)의 세력이 강해져 솥발의 형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패의 계기는 금일에 달려 있습니다.”

손권이 크게 기뻐하며 주유(周瑜), 정보(程普), 노숙(魯肅) 등 수군 3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에게로 나아가 힘을 합해 조공에 맞서게 했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7.2. vs 위나라[편집]

84부작 삼국지 당국강 버전 제갈량vs왕랑의 설전

삼국 육의 버전 제갈량vs왕랑의 설전한국어 더빙판


제갈량의 북벌 당시에는 조진의 참모격으로 따라온 왕랑과 설전을 벌였는데, 설전으로 왕랑을 죽여버리는 실로 괴랄한 모습을 보여준다.

  • vs 왕랑
    왕랑: 와룡이라 불리는 선생께서 어찌 하늘의 뜻을 모르고 전쟁하러 나오셨나?
    공명: 난 한나라의 승상으로서 역적을 토벌하러 왔는데 어찌 하늘의 뜻을 모른다는 말인가?
    왕랑: 우리 무황제께서는 원소 등과 같은 버러지들을 쳐서 나라를 평안하게 만들고, 문황제께서는 망해가는 한나라의 제위를 물려받아서 신위를 떨치셨다. 게다가 오나라도 우리에게 숙이고 들어오려는 판국이니, 항복하는 수밖에 없지 않냐!
    공명: 어찌 그런 썩은 말만 하는가? 이제 잘 들어보아라. 조조와 조비가 세운 공이 많다 한들 조조는 한실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조비는 제위를 찬탈하는 역적질을 저질렀다. 왕 사도, 그대는 효렴[30]에 뽑혀서 한나라를 섬겼는데 위나라의 벼슬을 받더니 조비의 역적질을 돕지 않았나. (여기서부터 김홍신 평역판 원문 그대로) 이 머리 허연 하찮은 것아, 늙은 수염의 도적이여! 그러고서 죽은 뒤에 어찌 한나라의 스물 네 황제를 뵙겠는가. 늙은 도적은 썩 물러가고 역적이나 불러내서 나와 승부를 가리게 하라.


촉 진영은 찬탄을 금치 못하는 반면, 위 진영은 침묵만이 가득했고, 당사자인 왕랑은 울분을 참지 못하다 그대로 사망했다.

이에 대해서 김홍신은 자신의 평역판에서는 "본래 설전의 주제는 '어느 쪽이 한나라의 정통 후계자인가'인데, 이렇게 되면 위나라에는 위나라의 주장이, 촉나라엔 촉나라의 논거가 있어서 장군하면 멍군하는 의미없는 싸움이 되었다. 이에 공명은 이념의 싸움을 피하고 뭇 사람의 정서에 호소한 것이었다."라고 설명한다. 당시 설전을 보고 있던 관중들은 대부분 일반 병사들이었으므로 어려운 한실의 정통성 얘기를 꺼내기보다는 모욕감을 줘서 분사하게 한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조조도 유비도 죽은지 한참 지났기 때문에 위군 쪽에서 이 문제로 난리가 날 일도 아니었고, 정작 왕랑은 편히 살다 죽었다.

이것 역시 연의에 한정된 이야기이나, 정사의 주석 제갈량집에 비슷한 일화가 있다. 화흠, 왕랑, 진군 등등의 위나라 대신들과 명사들이 제갈량에게 촉나라는 거짓 황제놀음은 그만두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위나라에 항복을 하라는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그에 제갈량은 답장은 보내지 않고 정의(正議)라는 반론의 글을 써, 역사의 사례를 열거하여 항복, 그런 거는 촉나라한테는 있을 수 없고, 되려 약으로 강을 제압해 통일을 하겠다고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주석 제갈량집에 남은 정의(正議)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옛날 항우는 인덕에 의거하여 일어나지 않았던 까닭에 비록 중원을 차지하고 제왕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죽임을 당하여 후세의 영원한 경계가 되었다. 위나라가 이를 거울로 삼지 않고 그 전철을 밟고 있으니, 만약 그 자신은 화를 면한다 하더라도 자손들에게는타일러주어야 할 것이다. 헌데 몇몇 선생들(=위나라의 대신들)이 기애(耆艾=5~60대)의 나이임에도 적의 의사를 받들어 내게 서한을 보내왔으니, 이것은 마치 진숭과 장송이 왕망의 공적을 칭송하고서도 큰 재화가 박두하자 죄를 모면할 요행을 바라는 것과 같지 않은가!

세조(=광무제 유수)께서는 한나라 제업을 중흥시킬 때 불과 수천 명의 여위고 쇠약한 병사들을 분발시켜 곤양의 들에서 왕망의 강대한 40만 대군을 물리치셨다. 정도(正道)에 의거하여 사악한 자들을 토벌하는 것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다. 조맹덕(=조조)은 간교한 수단으로 병력을 얻어 수십만의 군사를 출동시켜 양평에 이르러 장합을 구하려 했으나, 힘이 다하게 되자 후회하면서 겨우 자기 한 몸으로 도망쳐 정예선봉을 욕되게 했고, 마침내 한중을 잃고서야 황제의 자리를 함부로 얻을 수 없음을 깊이 깨닫고 급급히 돌아오다가 허창에 이르기도 전에 통한으로 병이 나 죽고 말았다. 조자환(=조비)은 황음무도하여 그 뒤를 이어 황위를 찬탈했다. 설사 몇몇 선생들이 소진과 장의의 허황되고 기만적인 유세를 찬양하고 죄악이 하늘에 사무치는 환두의 언사를 들고 나와 당제를 헐뜯고 하우와 후직을 비웃어 흩어지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문채를 헛되이 쓰고 필묵을 허비할 따름이다! 이런 것은 대인과 군자들이 할 바가 못 되는 것이다.

「 군계 」에서는 "만 사람이 죽음을 결심한다면 천하를 종횡할 수 있다" 고 하였다. 옛날 헌원은 수만의 군사를 정비하여 사방을 제압하고 천하를 안정시켰는데, 하물며 우리(=촉한)는 수십만 군사로써 정도에 의거하여 죄 있는 자들을 물리치려 하거늘, 이를 감히 막아낼 수 있겠는가!"

--연의보다 정사에서 더 초전박살로 때리고 있다.

조식과도 서신을 통하여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곳 참고.

8. 사상[편집]

제갈량의 사상에 대해서 유가라든가 법가라든가 하는 등의 다양한 평론이 현대에 많이 있는데, 제갈량이 제자백가를 논한 글은 제갈량집의 집본에 남아있어서 제자백가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다만 이는 제갈량 본인이 제자백가를 보는 관점이고, 현대인이 제갈량의 사상을 평가하는 관점은 이와 다를 수 있다.

는 양생에는 뛰어났으나 위험과 재난에 대처하지 못했다. 상앙은 법치에 능했으나 백성을 교화하지 못했다. 소진장의는 말재간이 뛰어났으나 쌍방이 동맹을 맺도록 하지 못했다. 백기는 성을 치고 점령하는데는 능했으나 대중을 너그럽게 포섭하지 못했다. 오자서는 적을 막는 계책을 꾸미는데는 뛰어났지만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 못했다. 미생은 신용을 지켰으나 변화에 부응할 줄 몰랐다. 왕가는 성군을 받들어 모시는데는 능했으나 어리석은 황제를 위해 처사할 줄은 몰랐다. 허자는 명망 있는 인사들의 우열을 평가하는데는 능했으나 인재를 양성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사람들의 좋은 점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9. 평가[편집]

승상의 사당이 어딘지 찾으니
금관성 밖의 잣나무 숲이라네.
계단에 드리운 풀은 봄기운이 완연하고
나뭇잎 사이로는 꾀꼬리 울음 울리네.
세 번 찾아준 은혜천하삼분의 계책을 내고
를 정성껏 섬긴 늙은 신하의 마음이여.
출사하여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가니
후세의 영웅들은 옷깃을 적시네.


두보의 촉상(蜀相)

뭇 영웅 벌떼처럼 일어나 세상 일 어지러운데
온갖 경륜 품고서 초가집에 누웠었네.
나라 위한 의리는 삼고초려로 높아졌고,
출사표의 위대한 계책은 칠종칠금으로 남아 있다오.
목우와 유마 누가 능히 알았겠으랴.
백우선과 윤건은 제갈 승상만 이용했다오.
일월처럼 밝은 무후의 충성심은 천고에 빛나는데,
고개 들어보니 위나라, 진나라의 옛터만 남았구나.


이제현의 제갈공명의 사당을 돌아보며


충심과 뛰어난 능력으로 이상적인 신하의 대명사로서 항상 인기인이였으며 그로인해 이미 오래전부터 제갈량에 대한 평가는 매우 높았다. 물론 제갈량에 대한 비판 역시 없진 않았으나 고금의 쟁쟁한 인사들이 높게 평가하고 있다.

군사를 잘 통솔할 수 없을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통솔했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이를 다스렸다. 정치가 편안하지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편안케 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풍족하게 했다.


청나라 철학자 왕부지(王夫之)

제갈량은 촉에 웅거했으되, 그의 큰 뜻은 장안까지 덮었구나.
물고기와 물이 세번 만나 합치니 사해(四海)에 풍운이 이는구나!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예법 규칙을 나타냈으며, 관직을 간략하게 하고 권부의 제도를 느슨하게 하였으며 성실한 마음을 열고 공정한 정치를 실행했다.[31] 충의를 다하고 시대에 이익을 준 자에게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범하고 태만한 자에게는 비록 가벼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에게는 무서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석방했으며, 진실을 말하지 않고 말을 교묘하게 꾸미는 자에게는 비록 가벼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선행을 하면 작은 일이라도 상을 주지 않은 적이 없으며, 사악한 행동을 하면 섬세한 것이라도 처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각종 사무에 정통하였고, 사물은 그 근원을 이해하였으며, 사람의 말에 근거하여 그의 행위를 관찰하고 허위로 가득한 사람과는 함께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촉나라 경내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아꼈으며, 형법과 정치가 비록 엄격하였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마음을 공평하게 쓰고 상주고 벌주는 것을 분명하게 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걸출한 인재로서 관중[32], 소하[33]와 비교할만하다 할 수 있다.항상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견했으니 절반은 성공한셈


진수, 정사 삼국지 中

만약 중화(中華)를 거닐며 그 뛰어난 재주을 펼쳤다면, 중화에 선비가 많다고 하여 어찌 가리고 막혔겠는가! 위나라에 몸을 맡겨 그 기량과 재능을 펼쳤다면 실로 진장문(진군)이나 사마중달(사마의)도 능히 서로 대등하게 겨루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 나머지 무리들이겠는가!


배송지, 제갈량전 中, 최주평에게 제갈량이 위나라엔 뛰어난 선비가 많으니 가지말라고 말한 부분에 주석을 달며

천하의 기재로다!


사마의, 제갈량전 中

조씨와 천하를 다투지 못하고, 형주를 버리고 물러나 파촉에 들어가서 유장을 유탈하고 손씨와 거짓으로 맺어 험한 땅에 몰려, 근처의 이족에게 참람하게 고하였다. 이에 책략을 내려 조타와 짝을 이루었으니, 관소(관중과 소하)의 아필이란 말은 또한 지나치지 않았는가.


북위의 재상 최호, 『 위서 』 모수지전 中

제갈량이 비록 영웅과 패자의 재능(英霸之能)을 갖췄으나, 주인(유선)이 중흥(中興)의 그릇이 아니였고, 변변찮은 촉(蜀)으로 이이 폐기된 천명을 따라 강한 위를 북탄하고자 하였으며, 상국(上國, 위)과 필적하였으니, 또한 어렵지 아니하였던가.


화양국지 저자 상거, 동윤을 제외한 촉한사영과 강유의 평가 中

(전략) 제갈공명은 제왕을 보좌할 만한 재주로 한실(漢室)의 적통(嫡統)을 보좌하여 한(漢)나라의 적을 토벌할 것을 맹세하고 한실을 회복하기를 기약했으나, 구구하게 한쪽 구석에 머물러 있다가 뜻을 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중략) 제갈량은 신야(莘野)에서 농사짓던 이윤(伊尹)에게 은연중 부합하고, 한 번 조이고 한 번 푸는 것을 법도가 있게 하는 것은 위천(渭川)에서 낚시질하던 강태공(姜太公)과 거의 같았습니다. 게다가 뛰어난 웅지를 분주히 펼쳐 한 세상을 좌우하면서 나라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다가 죽고 난 뒤에야 그쳤으니, 공명(孔明)의 소양(所養)이 어떻습니까.(중략) 더구나 공명이 대업(大業)의 단서를 열지 못한 것은 천명인지라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가령 하늘이 그에게 좀 더 오래 살게만 해줬더라면 한실을 흥복(興復)시키고 한실의 대업을 열었으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하략)


기대승, '옛 사람들의 은현(隱見, 숨었다 나타났다 함)과 지업(志業, 지망하는 사업(事業))의 서로 다른 점을 들어보라'에 대한 답안을 적은 책문(策問)[34]

당태종: 위징과 제갈량 중 누가 더 훌륭하다 보오?
잠문본: 제갈량의 재주는 재상과 장수를 겸하니 위징이 견줄 수 있는바가 아닙니다.
당태종: 위징이 인의를 이행해 짐을 보필하여 요순에 이르도록 하고자 했으니 비록 제갈량이라고 할 지라도 대등하지 못할 것이오.


당태종 이세민과 잠문본의 대화, 신당서

제갈량은 촉나라를 10년간 다스리면서 사면하는 일이 없었으나 촉나라는 잘 다스려졌소. 양무제는 해마다 여러 차례 대사면을 단행하였지만, 결국 나라는 멸망했소. 작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큰 덕을 상하게 하오.

제갈량은 옛날의 뛰어난 재상으로 본받을만 하오, 나도 역대 제왕을 본 받으려 하고 있소, 그대들도 옛 재상들을 본 받으시오.


당태종 이세민, 정관정요

"옛날 제갈량은 작은 나라의 승상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말하기를 '내 마음은 저울과 같다. 특정한 사람을 위해 제멋대로 경중을 조작할 수 없다'고 했다. 하물며 내가 지금 큰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야 더 할 말이 있겠는가!"


당태종 이세민, 중서령 방현령이 인사의 공평을 묻는 질문에 대해

환온(桓溫)이 촉(蜀)을 정벌하였는데 제갈무후가 (생존하였을) 때 소사(小史)를 지낸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어 나이가 1백여 세였다. 환온이 묻기를 "제갈승상은 지금의 누구와 더불어 비교 할 만한가?" 하니 자신과 비교할 만하다 여겨 마음으로 자못 자긍(自矜)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제갈공께서 계실 때에는 또한 남다름을 깨닫지 못하였사온데, 공께서 돌아가신 후부터는 그분과 비교할 만한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하였다.


제갈충무기

이윤과 여상(태공망)에 백중하고 천하가 그 지휘에 따른다면 소하나 조참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나라 시인 두보

"그분의 훌륭함 논해 보자면 이윤여상에 버금가네."


명나라의 재상 방효유가 지은 제갈무후찬(諸葛武侯贊)에서

"상을 주되 먼 사람을 빠뜨리지 않고 벌을 주되 가까운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았다"


《자치통감》에 나오는데, 제갈량의 관속인 승상 장사 장예가 늘 제갈량을 칭송하던 말이다.

과거 관중(管仲)은 백씨(伯氏)의 변읍(騈邑) 3백 호를 몰수했지만, 백씨는 평생 동안 원한의 말을 하지 않았다. 성인이라도 이렇게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제갈량은 죽음으로써 요립에게 눈물을 흘리게 했고, 이평을 죽게 했다. 어찌 원망의 말을 하지 않은 것뿐이겠는가!

무릇 물은 완전히 평평하므로 기우는 자는 그것을 모범으로 하고, 거울은 밝게 비춰주므로 추하게 생긴 자라도 노여워하지 않는다. 물과 거울이 사물의 본질을 그대로 나타내도 원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에는 사심이 없기 때문이다. 물과 거울에 사심이 없어 비방을 면하는데, 하물며 대인 군자가 생명을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 있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덕을 펴며,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만 법을 수행하며, 자신이 지은 죄에 형벌을 가하고, 사심에 따르지 않고 봉록과 작위를 주고, 노여워하지 않으면서 처벌한다면, 천하에서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제갈량은 이것에 따라 형벌을 쓸 수 있었고, 진한 이래 이러한 자는 없었다.


습착치

파촉에서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통치를 연모하고 그리워했다. 사후, 묘의 건립을 요구하는 소리가 곳곳에 울려 특별히 의논하여 면양에 세워졌다.


습착치, 양양기 中

무후(공명)가 죽은지 거의 500년이 된다고 하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양한(梁漢, 촉)의 백성들은 그 공적을 노래하며, 사당에 모시는 자가 있다. 그 백성들에게 사랑받음이 이 같이 오래였다.


손초, 각무후비음(刻武侯碑陰) 中

제갈공명의 학문은 그 궁극에 이른 경지를 고찰할 수 없지만 행동으로 드러난 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계로의 용맹과 염구의 재예와 자공의 변설, 중궁의 천자가 될 만한 덕을 참으로 이미 겸했다. 지금 공자의 사당(문묘)에 배향 되는 사람 중 산동의 얼치기 학자나 문사나 일삼는 소인은 모두 들어갔는데도 제갈공명의 경우에는 거론하는 이가 있는 것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서포 김만중

진 효공(秦孝公)이 병이 들어 상군(商君, 상앙)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는데 상군이 받지 않았다. 효공의 마음가짐이야말로 공의(公義)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다만 한스러운 것은 인물이 상앙밖에는 없었던 점이었다. 한(漢) 나라 소열황제(昭烈皇帝, 유비)가 제갈공명(諸葛孔明)에게 전해주려 한 것도 대체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러고 보면 두 임금이 자립할 수 있었던 것은 요행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 신흠, 상촌집.

이로 인해서 당시의 평론이 장준[35]의 충의는 대략 한(漢)나라 제갈량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제갈량은 자기가 생존해 있는 동안 위연(魏延), 양의(楊儀)로 하여금 이의를 품지 못하게 하였으나, 장준은 오개(呉玠)로 인해 곡단(曲端)을 주살하였으며, 제갈량은 법효직(法孝直)을 포용하였으나, 장준은 이강(李綱), 조정(趙鼎)을 포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방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제갈량에게 미치지 못한 점이다.


송사(宋史)》 361권 〈장준전(張浚傳)〉

위엄으로 국가를 고요하게 하고, 지모로 이웃을 움직이고, 북을 들고 군을 내면, 삼군의 용기가 넘치고, 군을 국경에 두면, 천 리에 티끌이 없으며, 내외의 재주를 겸한 이를 말하자면, 오직 공명(孔明)과 경략(景略, 왕맹) 뿐이었다. 그러므로 최호는 "왕맹은 부견의 관중이고, 유유는 사마덕종의 조만(曹瞞, 조조)이다.”라고 일렀고, 손성은 "공명은 소국을 훌륭하게 보필했으니, 자산의 부류다."라고 일렀다. 이 말이 적당하도다.


당나라 주경칙(朱敬則)의 수고조론(隋高祖論) 중

(전략)
이지(伊摯-이윤)는 세 번 초빙함에 갈옷을 벗고 중니(中尼-공자)는 부름을 받자 옷을 걷었고, 관중(管仲)은 명을 받자 표변(豹變)하고, 공우(貢禹)는 감격(感激)하여 회장(回莊)했다. 남다른 서생(徐生-서서)이 보배를 들추어내어 깊이 감추어둔 와룡을 풀어 놓으니, 유씨(劉氏)가 기울어져 뒤집힐 때 가상하게도 그대가 주행(周行)했도다.

무릇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이 있으면 목숨을 다하는 어진 이가 있는 법, 이에 우리 한나라를 셋으로 나눠 우리 변방에 걸터앉고, 우리에 맞서 북면하고 우리 위나라 지경으로 말달렸다. 영명하구나. 그대여! 홀로 천령(天靈)을 품으니 어찌 신(神)의 지(祗)고(豈神之祗)(?) 어찌 사람의 정(精)이겠는가? 생각 깊고 덕이 맑음이여! 다른 세상에 있어 꿈에서 만날 뿐 같은 세상에 있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그대의 팔진(八陳)을 미루어보면 손자, 오자 때도 없던 것이고, 목우(木牛)의 기이함은 쉽게 본뜰 수 없고, 신노(神弩)의 공은 또한 미묘하구나! 천정(千井)을 가지런히 쌓으니 또한 얼마나 비요(祕要)한가! 옛날 전, 요(주문왕을 보좌한 태전泰顚과 굉요閎夭)가 명성이 있어 뒤쫓을 자 없다 하나 그 누가 그대의 뛰어나고 기묘한 주획(籌畫)만 하겠는가. 장문(臧文)이 죽고 말로써 칭찬받았으나 또한 그대와 같이 언행을 아울러 밝히지 못했다. 이오(夷吾-관이오 즉 관중)가 반점(反坫- 술잔을 되돌림)하고 악의가 끝내 절의를 지키지 못했으니 어찌 그대의 명철(明哲)과 수충(守沖)에 비견되겠는가. 임종하여 맡길 때 사양함은 허유(許由-요임금의 선양을 거부한 인물)보다 낫고, 정무를 맡아 일에 임함에 백성들의 말이 떠돌지 않았다.

형벌은 정나라보다 공정하고 교화는 노나라보다 아름다우니, 촉민들이 수치를 알게 되고 하수, 위수가 안거했도다. 고요(皋陶-순임금의 신하)가 아니면 이윤에 비견되니 어찌 관중, 안영에 그치겠는가. 강개하고 탄식할 뿐이로다! 옛적 그대가 은거했던 이 집을 생각하면, 어질고 지혜로운 거처했던 곳으로 규곽(規廓)이 없구나. (중략)

그대의 공훈을 생각하면 풍속을 고쳐 후세에 이르렀고, 남아있는 전범을 읊고 노래하면 게으르고 나약한 이를 장려한다. 멀고도 멀어 그 법규가 높으니, 무릇 그대와 같은 자는 가히 헤아리기 어렵다. (후략)


남장군 유홍(劉弘)이 융중(隆中)에 도착해 제갈량의 옛 집을 살펴보고 위가 둥근 비석을 세워 공덕을 현창하고, 태부연(太傅掾) 건위(犍爲) 사람 이흥(李興)에 명해 글을 짓게 하다. [36]

"공명(孔明)은 거의 예악(禮樂)을 일으킬 수 있었다."


명도 선생 정호(程顥,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37]

"제갈공명이 죽지 않았다면 예악을 부흥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孔明無死 禮樂可興)


남송(南宋) 진량(陳亮, 1143~1194)[38]의 〈제갈공명론(諸葛孔明論)〉

제갈량이 이르기를,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에 이바지하되 죽은 뒤에 그친다.’고 하였으니[39], 인신(人臣)이 된 자는 오직 제갈량과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강희제

촉한의 선주(先主)는 한나라의 후손으로, 공명 같은 왕좌지재를 만나 군사를 출동하여 역적을 토벌하되 삼대[40]처럼 군사를 동원함에 있어 도(道)가 있어 거의 한나라 왕실을 회복할 듯 하였다. 비록 하늘이 돌보지 않아 선주가 죽고 무후도 죽어 비록 공업은 끝을 맺지 못하였으나, 그 성취한 바는 참으로 컸었다.


정도전

제갈공명은 남양 땅에서 용처럼 누웠다가, 선주의 삼고를 기다린 후에 일어났으니, 이는 곧 이윤(伊尹)이 밭이랑에서 갑자기 깨달은 것과 같다. 두 차례의 출사표는 의론이 정대하여 이훈(伊訓)·열명(說命)과 함께 참고하여 볼 것이다. 그러므로 나아가고 처하는 큰 절개와 충성·대의가 삼대(三代) 이후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그 성심을 열어 공도(公道)를 편 것은 실로 재상의 법이 될 만하였다. 비록 운수가 옮겨가 몸이 죽어서 공업을 이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렇다고 어찌 이것 때문에 저것을 버리겠는가.


권근

불 꺼질 듯 한나라 지킬 수 없었는데
위기에 직면하여 명 받들어 자기 한 몸 잊었네
사람을 논함에 꼭 성패를 따질 것이 아니노라
천고에 아직도 팔진도가 전해지고 있으니


신숙주

君臣知遇動昭融 군신의 지우에 소융이 움직였으나
其柰劉家運已窮 유가의 운수가 다했음을 어이하리요
兩表忠誠照千古 두 표문의 충성이 천고에 비추나니
莫將成敗少英雄 성패를 가지고 영웅을 폄하하지 말라


이산해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음악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이 귀와 눈에서 떠나지 않았고, 한(漢)나라 소열(昭烈)은 군중(軍中)에 분주하여 넓적다리 살이 말안장 위에서 닳았으니, 만약 어질고 재주 있는 신하가 보좌하지 않았더라면, 환공은 어진 임금이 될 수 없었을 것이요, 소열이 조그마한 땅도 소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환공은 관중을 등용하고 소열은 제갈량을 등용하였기 때문에 제후를 규합(糾合)하여 천하를 한 번 바로잡는 공(功)을 이루기도 하였고, 한중과 서천을 점유하여 한나라의 국운을 연장시키기도 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관중이 성현(聖賢)의 도를 알지 못하였고, 공명(孔明)은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 같은 법가(法家)의 폐습을 벗어나지 못하여 공렬(功烈)이 여기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어진 이에게 맡겨 패도를 행한 자이다.


율곡 이이 동호문답(東湖問答) 중

이윤이 유신(有莘)의 들에 있을 때에 몸소 밭 갈고 도를 즐거워하여 당세에 뜻이 없는 것 같았고, 성탕이 재차 초빙하러 올 때까지도 뜻이 확고했었는데, 매우 간절하게 청하고 그 정성이 더욱 드러난 뒤에야 마음을 확 돌려 부르는 데 응하였습니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고 덕이 합쳐져서 하늘까지 감동시켰습니다. 수대에 걸쳐 재상을 역임하고 임금을 추방하기까지 하였으나 혐의를 받지 않았고, 진실한 덕을 끝까지 다하고 벼슬을 그만두게 되어서도 오히려 간절하게 훈계하여,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습니다.

제갈량은 융중(隆中) 땅에 있을 때는 무릎을 안고[抱膝] 길게 휘파람을 불면서 우주에 눈을 높이 두고 생을 마칠 생각이었으므로, 소열제가 두 번째 찾아가도 오히려 은둔(隱遁)할 생각이 견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여 세 번이나 찾아가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뒤에야 마음을 돌리고 몸을 바쳤습니다. 계책이 서로 부합하자 재능을 다하고 정성을 극진히 함으로써 나라가 회복하기를 기약하였습니다. 어린 임금을 도우면서부터는 정책이 자기에게서 나왔는데 누구도 이간하는 말이 없었고, 강대한 위나라도 겁을 내었으며, 거의 예악(禮樂)의 교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두 사람은 비록 도에는 정조(精粗)의 차이가 있고 덕에는 대소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임금을 믿어 충성을 다한 것은 한가지이니 후세사람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어찌 두 사람의 현명한 것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실은 임금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건대, 탕왕이 이윤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마침내 으뜸가는 성인을 찾아 그와 함께 온 힘을 다했다.” 하였으니, 지극히 감복한 것입니다. 소열제가 제갈량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하였으니, 그가 매우 즐거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신이 이렇게 서로 마음이 맞으니 두 사람이 어찌 독실하게 서로 돕지 않았겠습니까.


율곡 이이, 성학집요

제갈무후와 선공(宣公) 육지(陸贄)[41]는 자신이 태평성대를 잘 이룰 만한 위치에 있었으나 필경에는 뜻을 품은 채 펴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그것을 천(天)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시에 만약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촉(蜀) 나라와 당(唐) 나라가 존재했을지 의문이니, 오직 이러하기 때문에 끝내 인사를 버리고 천수만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유성룡

恢復思諸葛 중원을 회복하던 제갈량이 생각나고
長驅郭子儀 위기를 막아내던 곽자의가 그립구나


이순신

진린: 내 지난번 천문을 보니 대장별이 떨어지던데, 공이 이를 모르지 않을것인즉, 어찌 무후의 기도법을 쓰지 않는 것이오?
이순신: 내 충성이 무후만 못하고, 내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내 재주가 무후만 못하여 세 가지 다 무후만 못하매 무후의 기도법을 쓴다고 해도 하늘이 능히 들어주시겠소?


이충무공전서 中, 진린과의 대화에서

그러나 와룡을 위해서는 언젠가 한번 변무(辨誣)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문로(門路)와 연원(淵源)은 비록 우리 유학의 정통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백세를 두고 사표가 될 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상에서 그를 논하는 이들이 허다히 근본은 버리고 지말(枝末)만 따지고 정상적인 것은 소홀히 봐 버리고 괴이한 것만 믿는 통에, 그의 정대광명한 사업이 결국 풍운이나 일으키고 팔진도나 쳤던 일에 가리워져 버리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통한스러운 일입니까. 그의 계자서(戒子書) 한 편과 출사표(出師表) 두 편만 보더라도 그의 심학(心學)의 올바름과 조수(操守)의 신밀(愼密)함, 그리고 충직한 절의와 식견의 고상함이 과연 어떠합니까. 노재(魯齋)는 공명의 초려 장소(草廬長嘯)를 칭찬했는데, 담박(澹泊)과 영정(寧靜)의 교훈[42]은 빠뜨려 버리고 도리어 이것만을 취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안정복

사이의 얽히고 설킨 험준한 길, 그 길을 통해 제갈량은 때때로 많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강적에 대항했다. 그 빛남이 마치 새벽녘의 샛별과 같으니, 오직 제갈량만이 촉을 밝게 비추었구나.


북송 왕안석(王安石)

공명은 파촉에서 일어나 하나의 주(州)를 차지하고 라는 엄청난 대국과 겨루었는데 군사와 백성들이라곤 위나라의 1/9밖에 되지 않았다. 공명은 농업과 군사 일, 그리고 형법 등을 잘 정비했기 때문에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파죽지세로 기산까지 쳐 들어가 황하와 낙수의 물로 말의 목을 축일 뜻을 품을 수 있었다. 중달은 10배나 되는 땅과 거기 있는 수많은 군졸을 기반으로 견고한 성지와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자기 자신의 보전에만 급급할 뿐 적을 깨뜨리지 못하고 제갈량이 제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 두었다.


오나라 장엄(張儼), 묵기 술좌편(黙記 述佐篇) 中

어떤 이가 제갈량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원자가 말하였다.

장비, 관우유비와 함께 일어나 조아 복심의 신하로 모두 무인이었고, 뒤늦게 제갈량을 얻어 이로써 좌상(보좌하는 재상)으로 삼았소. 이에 뭇 신하들이 기뻐하고 탄복했는데, 유비는 족히 믿을만하고 제갈량은 족히 중시할 만했기 때문이오.

그러다 6척의 고아를 맡아 한 나라의 정무를 총괄하고, 범용한 군주를 섬기며 전권했으나 예를 잃지 않았고, 군주의 사무를 대행했으나 국인들이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즉 군신 백성들이 마음으로 흔쾌히 봉대했음을 알 수 있소.

법을 행함이 엄격한데도 국인들이 기쁘게 복종하고 백성을 부려 그 힘을 다하게 해도 아랫사람들이 원망하지 않았소. 그 군사들이 출입할 때는 빈객처럼 하니 행군할 때 도적질하지 않고, 꼴과 땔나무를 베는 자들은 사냥하지 않으니 마치 중국에 있는 듯 했소. 그가 용병함에는 산처럼 머물며 바람처럼 진퇴하고 군사가 출동하면 천하가 진동하니 인심이 근심하지 않았소.

제갈량이 죽은 뒤 지금까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국인들이 노래하며 그리워하여 마치 주나라 사람들이 소공을 그리워하는 듯 하오. 공자가 이르길 '웅은 가히 임금노릇할 만하다'고 헀으니 제갈량에도 이러한 점이 있었소.

또 물었다.

제갈량이 처음 농우로 출병했을 때 남안, 천수, 안정의 세 군 사람들이 배반하여 제갈량에 호응했습니다. 만약 제갈량이 급히 진격했다면 이 세 군은 중국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나 제갈량은 천천히 행군하며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관병이 농에 올라 3군을 회복하고, 제갈량은 척촌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이 기회를 잃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촉병이 가볍고 날랜 군사로 좋은 장수가 적었고 제갈량이 처음 출병했을 때는 중국의 강약을 알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의심을 품고 모험하지 않았던 것이오. 게다가 대거 모인 자들이 가까운 공을 탐하지 않아 진격하지 않았소.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가 의심했다는 것을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처음 나와 천천히 움직이고 둔영을 중복하고 그 뒤 항복한 뒤에도 진병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소. 제갈량은 용맹하고 싸움에 능헀으나 세 군이 배반해도 속히 이에 응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의심했다는 징표요.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가 용맹하고 싸움에 능했다는 것은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이 가정에 있고 전군(前軍)이 대파되었을 때 제갈량의 둔영이 수리 떨어져 있엇으나 구원하지 않았소. 관병과 서로 접전했으나 또한 천천히 행보하니 이는 그가 용맹했다는 것이오. 제갈량이 행군(=용병)할 때 안정하고 견중했는데, 안정하면 쉽게 움직일 수 있고 견중하면 가히 진퇴할 수 있소. 제갈량의 법령이 밝고 상벌에 신의가 있어 사졸들이 명을 받으면 험지에 뛰어들면서 몸을 돌보지 않으니, 이는 그가 싸움에 능헀다는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제갈량이 수만 군사를 이끌며 일으키고 세운 것이 수십만의 공력과 같으니 기이한 점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영루, 우물과 부엌, 축간, 울타리, 장새를 세워 이를 법도로 삼고, 한 달을 행군해도 떠날 때는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해놓으니 노고와 비용이 들며 꾸미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어떻습니까?[43]

원자가 말했다. '촉인들이 경박하니 이때문에 견고히 하며 부린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랬다는 걸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실질로 다스리고 명의에 의하지 않았으며 뜻이 크고 원대해 가까운 공을 급히 취하는 것을 구하진 않았소.'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관부, 차사, 교량, 도로를 짓기 좋아했으나 이는 급무(급한 업무)가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소국에 현명한 인재가 적으니 이 때문에 그 존엄을 높이고자 함이오.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 경작지가 개간되고 창고는 충실해지고 기계는 날카로워지고 축적된 곡식이 넉넉해졌으나 조회는 화려하지 않고 도로 위에 술취한 사람이 없었소. 무릇 본이 세워지면 말이 다스려지고, 여력이 남은 후에야 작은 일에 미치는 것이니, 이는 그 공을 권하려 했기 때문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대가 제갈량을 논하는 데는 증험이 있습니다. 제갈량의 재주로 보면 그 공이 적다고 하는데 이는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지본(근본을 중시)하는 자로 응변은 그의 장점이 아니니 이 때문에 감히 그 단점을 쓰지 않는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그를 칭찬하는 건 왜입니까?'

원자가 말했다.

본래 현자란 심원한 것이니 어찌 완비함을 기준으로 책망하겠소? 무릇 능히 단점을 알고 쓰지 않는다면 이는 현자의 위대함이오. 단점을 알면 즉 장점도 아는 것이오. 무릇 전식(원래 생각)이라도 더불어 말해보고 맞지 않으면 제갈량은 쓰지 않았으니 이로써 내가 (현자로 칭하기에) 가하다고 한 것이오.


원자

진수가 제갈량을 논하며, "재주가 군을 다스리는 게 장점이었고, 기묘한 계책은 단점이었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이 장수의 지략보다 뛰어났습니다."라고 일렀는데, 이는 슬퍼서 나온 말이 아니다. 용병하며 기책을 내는데 능숙함은, 의당 위무제(魏武帝)만 못하다. 그러나 더불어 대적한 바는, 원소 이외에는, 모두 큰 모략이 없었고, 또한 모두 깊고 단단한 뿌리가 없었으나, 위(魏)와 같은 경우는 힘써 싸우지 않으면 이길 수 없었다. 위연의 다른 길을 통해 모두 모이는 모략은, 취하지 않음이 아까워할 만하다. 그러나 포야(褒斜), 자오(子午)는, 나오기는 쉬워도 이어지기는 어려워, 함양(咸陽) 이서가 만약 평정될 수 있어도, 위가 대군을 일으켜 이를 다투고, 농우의 여러 군이 그 뒤에 기대면, 촉이 과연 이를 지킬 수 있겠는가? 이가 제갈량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자 한 이유인가?

제갈량전의 주에서 인용한 장엄(張儼)의 묵기(默記)에서 제갈량과 사마의의 우열을 논하길 : "공명은 보졸 수만을 이끌고, 기산祁山으로 멀리 달리며, 흔쾌히 하(河), 낙(洛)에서 말에게 물을 먹일 뜻이 있었다. 중달은 10배의 땅에 근거하나, 견고한 성에 근거해, 정예를 가지고, 자신을 보전하는데 힘쓸 뿐이었다. 만약 이 사람이 죽지 않고, 그의 의지를 이루었다면, 승부의 형세는 이미 결정됐을 것이다." 이는 헛소리가 아니다.

주에서 또한 한진춘추(漢晉春秋)를 인용해 말하길 : 가허, 위평이 자주 싸우길 청하며 이르길 : "공께서 촉을 호랑이와 같이 두려워하시니, 천하의 비웃음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선왕(宣王)이 이를 괴로워했다. 상표하여 거듭 싸우길 청했다. 위위 신비(辛毗)에게 절(節)을 가지고 이를 억제하게 했다. 강유가 제갈량에게 이르길 : “신좌치(辛佐治)가 절을 가지고 이르러서, 적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이르길 : "그는 본래 싸울 뜻이 없었으니, 거듭 싸우길 청한 것은, 그의 무리에게 용감함을 보이려던 것일 뿐이다. 장수가 군에 있으면, 임금의 명도 받지 않는 바가 있는데, 만약 우리를 제압할 수 있다면, 어찌 천 리를 가서 싸우길 청했겠는가?" 위지 명제기(明帝紀)에서 이 해에 조서로 선왕에게 다만 보루를 단단하게 하고 수비하여 그들의 예봉을 꺾으라고 시킨 것을 특별히 적었으니, 승조(承祚)에게 진실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제갈량이 손권을 논하며 그의 지력이 가지런하지 못하기에, 강(江)에 한정하여 스스로 보호한 것이라고 이르나, 제갈량은 중원을 밟고 돌아다니며, 상국(上國)에 맞먹을 수 있어서, 용병하며 그치지 않고, 자주 그의 무력을 과시했으니, 그의 재주는 진실로 때를 어기지 않았다.


여사면(呂思勉, 중국의 근대 사학자), 진한사(秦漢史)

한 나라의 정치를 섭행하고 범상한 임금을 섬기면서 권병(權柄)을 오로지하였으나 예를 잃지 않았고, 임금의 일을 행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다. 법을 행함이 근엄하여 나라 사람들이 마음으로 기뻐하여 복종하였고 백성들의 힘을 쓰되 그들의 힘을 다하게 하였으나 아래에서 원망하지 않았다. 군사를 출동하여 적국에 갔을 때도 규율이 엄하여 행인이나 죄없는 사람들을 해치지 않기를 본국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용병(用兵)함에 있어서는 중지하면 산처럼 중엄했고 진퇴할 때는 풍우(風雨)와 같았으므로, 천하가 진동해도 인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갈량이 죽은 지가 지금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나라 사람들이 주(周) 나라 사람들이 소공(召公)을 그리듯 노래하며 사모하고 있다. 법령(法令)이 엄명하고 상벌(賞罰)이 미더웠으므로 사졸들이 명령에 복종하여 위험(危險)한 데에 달려가도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수만의 군대를 거느리고도 수십 만의 군대가 이룩한 공(功)을 세웠다. 가는 곳마다 영루(營壘)를 설치할 때는 우물, 부엌, 울타리, 장색(障塞)을 모두 법대로 만들었으므로 한 달 간 있다가 떠날 때도 처음과 같았다. 게다가 촉(蜀) 사람들은 용맹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부릴 수 있었다. 실(實)을 힘쓰고 명(名)을 힘쓰지 않았고, 뜻이 크고 바라는 것이 위대하여 관부(官府), 차사(次舍), 교량(橋梁), 도로(道路)를 잘 수리했으며, 소국(小國)은 어진 인재가 적기 때문에 존엄(尊嚴)하게 하고자 했다. 농지(農地)를 개간하고 창고를 가득채웠으며, 기계를 편리하게 수리하고 저축을 넉넉하게 했다. 따라서 조회(朝會)는 검소하게 하고 도로에는 술취한 사람이 없었다. 이와 같이 근본이 확립되었으므로 끝이 잘 다스려졌으며 여력이 있은 뒤에 작은 일에 미쳤으니 이것이 바로 그의 공을 권장하게 되는 이유이다. 제갈량은 근본을 준행한 사람이었으므로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술책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감히 자신의 단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인데, 어찌 한몸에 구비하기를 요구할 수가 있겠는가?

난국(亂國)을 다스리는 데는 준엄한 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원자(袁子)의 의논이 공명의 뜻과 멀지 않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바가 조리 정연하여 규도(規度)가 어제 일처럼 완연하다. 그러나 ‘임기 응변하는 것은 공명의 장기가 아니었다.’ 한 것은 대체로 진수의 여론(餘論)을 주워모은 것으로 공명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44]


조선 이덕무, 청장관장서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만으로 교제를 하면 먼 훗날까지 가기가 어렵다. 선비가 서로를 아는 것은, 온화한 날씨라고 해서 더 꽃을 피우지도 않고 추운 날씨라고 해서 잎이 떨어지지도 않아 사시장철 시들지 않고 험난함을 겪을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것과 같다." 하였다.
삼국(三國) 중에서, 위(魏)나라는 찬시(篡弑)한 일이 있었고 오(吳)나라는 폐립(廢立)한 일이 있었던 것은, 모두 드센 신하에게 제재를 받았기 때문이다. 촉한(蜀漢)은 망하기 전에 용렬한 임금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으나 나라에 내우(內憂)가 없었으니, 소열제(昭烈帝)와 무후(武侯)의 규모가 원대했던 것이다.


조선 이유원, 임하필기 中

나는 매양 진수의 삿됨과 고루함을 한스럽게 여긴다. 그는 무후(武侯)의 경략(經略)의 차제와 사전에 조짐을 알아 환란을 미연에 방지한 것,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을 등용한 것과 군대를 부리고 통제하던 요점은 모두 덮어두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다른 전기(傳記)와 배송지의 주(注)에 뒤섞여 나타난 사실이 있어서 주워모았는데, 감히 말을 수식함으로써 사실을 잊게 하지는 않았다.


남송의 성리학자, 장식[45]

손권이 제갈 무후를 칭찬하기를, '진실함은 음양을 감동시키고 정성은 천지를 감동시켰다.' 하였고, 사마의는 그의 군영과 보루를 살펴보고 감탄하기를, '천하의 기재(奇才)이다.' 하였으며, 종회는 촉 땅에 들어가 그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갔다. 무후가 적국에게 존경받고 신뢰받은 것이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자신의 나라에서이겠는가. 무후가 죽자 요립(廖立)이 눈물을 흘리고 이평(李平)이 슬퍼하다 죽은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남만의 풍속에 북쪽 문을 모두 낮게 만들어 나갈 때에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하니, 이것은 무후가 가르친 것이다. 항상 북쪽에 머리 숙여 복종하게 한 것인데 이것을 오랠수록 더 잘 준수하여 감히 고치지 않았으니, 그의 신성한 위엄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다. 그의 신이(神異)한 자취가 남만과 촉 지방에 많이 남아 있는데 시간이 오래될수록 더욱 신이하니, 어복포(魚腹浦)에 돌로 쌓아놓은 팔진도(八陣圖)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아 마치 귀신의 돌봐 줌이 있는 듯하다. 그 외에 사만세(史萬歲)가 그의 기공비(紀功碑)를 넘어뜨린 것[46]과 조빈(曹彬)이 그의 비석에 절한 것[47], 숙친왕(肅親王)이 비지(祕誌)를 얻은 것 등은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옛사람 중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었는가.

제갈공명이 죽자 촉(蜀)이 망했다. 허나 위(魏)의 멸망도 제갈공명의 죽음에서 연유하였으니, 이는 왜인가? 제갈공명이 죽지 않았다면 사마중달은 온 힘을 다해 서쪽을 막느라 관서 지방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했을 것인데, 어느 겨를에 정권을 찬탈해 나라를 도둑질했겠는가. 설령 국권을 빼앗을 만한 힘이 있었다 하더라도 제갈공명의 공격이 두려워 감히 그러지 못했을 텐데 하물며 촉을 도모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촉이 망하자 사마씨의 세력이 더욱 강해져서 위가 결국 진(晉)에 선양(禪讓)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미 촉과 위가 병합되었는데 오(吳)가 어찌 독존할 수 있었겠는가. 오에서 제갈각(諸葛恪)을 쓴 것이나 위에서 제갈탄(諸葛誕)을 쓴 것은 모두 제갈공명 때문이었다. 제갈공명이 있었던들 손준(孫峻)이 어찌 감히 제갈각을 처참하게 죽이고 사마소(司馬昭)가 어찌 감히 제갈탄을 해쳤겠는가. 그러므로 제갈공명의 죽음에 삼국(三國)의 운명이 달려 있었을 뿐 아니라 제갈씨 가문의 운명도 달려 있었으니, 이 점에 있어서는 이윤(伊尹)과 여상(呂尙, 강태공)도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조선 성대중, 청성잡기



결론적으로는 북벌을 성공하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었으나, 과거나 현재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위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러모로 최후의 승리자라고 평가를 받고 있는 사마의를 모르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나, 그의 주군 유비와 함께 제갈량만큼은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도 웬만해서는 알정도. 그만큼 삼국지 내에서도 후반기를 책임지는 스타이면서도 여러 매력적인 부분들이 부각되어 인기인이다. 사실 제갈량 사후에는 제대로 집필이 되지 않은 삼국지 관련 작품도 많고 기억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은편. [48]

이렇게 후세에까지 전 세계적으로 평가되고 연구가 되고 있는 만큼, 큰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삼국지 내에서 장기적으로 따질때는 사마의가 최후의 승리자일지도 모르겠지만, 후대에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임팩트는 그의 능력이든, 만들어진 허구던 간에 그를 따라올자를 찾기 힘들다. 현대에 와서는 여러모로 그의 주군 유비와 같이 긍정, 부정 의견이 많이 갈리는 쪽으로도 재평가를 받고있는 인물이기는 하나, 유비 사후의 기둥이었던 인물이니만큼 충분히 한 나라를 이끌만한 위인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그의 대단함은 제갈량의 등장 후 유비가 어떤 위치가 되었는지, 그리고 제갈량 사후 촉한이 어떻게 되었는지만 봐도 알 수 있다.

관련 서적 가운데는 제갈량과 한니발을 비교한 서적도 있다. 군재나 성품에 대한 비교 같은 게 아니라, 작은 세력으로서 큰 세력과 단신으로 맞섰다는 의미에서 집필된 것, 그 책의 부제이자 두 사람을 평가한 한줄평이 인상적인데 바로 국가의 크기가 아니라 인물의 크기로 싸운 사람들이다.

10. 관련 논란[편집]

정사 삼국지가 한국에 보급된 이래 많은 삼국지의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제갈량도 예외는 아니다.

또한 제갈량이 받은 무향후는 현후인가, 향후인가도 논쟁거리 중 하나다. 이향후 마초와 서향후 장비에게서도 나타나는 논쟁.

10.1. 군사적 재능에 대해[편집]

특히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제갈량에게 군의 통솔과 전쟁 준비에는 능했으나 기책이 부족하여 이기지 못했다라는 평을 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진무제에게 올린 표문에서는 '이 때문에 용병을 멈추지 않고 여러 차례 그의 무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재능은 군대를 통치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기책은 (그보다) 떨어졌으며, 백성들을 다스리는 재간이 장군으로서의 재략보다 뛰어났습니다.'라고 했고 제갈량 전 말미에서는 '해마다 군사를 움직여 나갔으나 끝내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의 장략은 다스리는 재주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 같다.'고 했다.[49]

예를 들어 정사를 보면 연의에서 제갈량의 최초의 전공인 박망파 전투도 실은 제갈량이 관여한 바 없으며[50] 화용도 매복은 아예 창조된 내용이며 또한 한중전 때 거의 모든 계책에 관여하고 유비는 응응 하며 고개만 끄덕인 것이 아닌 제갈량이 후방에 머물며 군량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었다. 따라서 제갈량의 북벌에서 그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논란은 상당히 좋은 떡밥 중 하나다.

정사의 저자 진수가 제갈량의 약점으로 임기응변에 능하지 못하다고 했는데, 이는 부대를 운용하는 전술적 능력은 뛰어났으나, 변칙을 쓰는 것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손자병법 병세편에 전쟁을 하는 자는 정병으로 맞서서 기병으로 이긴다. 기책을 잘 운용하는 자는 천지처럼 작전이 궁색해지지 않고 강물처럼 고갈되지 않는다.[51]라는 구절이 있듯, 중국에서는 정석과 기책의 조합을 병법의 극의로 보았다. 군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부분은 훌륭했으나 강력해진 군대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면모가 떨어진다는 것. 다만 가뜩이나 부족했고 이릉대전 이후 더욱 줄어든 촉의 국력을 고려히면, 먼치킨인 위를 상대로 먼 구석에서 기책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형주라도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도와주려던 맹달도 죽어버렸다 그래서 이문열 판에서는 위연이 '제가 기병을 끌고 샛길로 나가 적을 치겠다'고 하자, 제갈량이 '사실상 이게 전부인 우리 전력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갈량의 '군사적 무능력'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그가 '임기응변', 즉, 모략에 능숙하지 못했다는 점을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거시적 계획을 수립하는 전략이나 각개 부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 전술의 측면에서는 당대에 이미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장 제갈량전의 평가만 해도 "진영이 잘 정돈되고 상벌이 분명하고 호령이 엄숙하다." 되어 있고 진양추(晉陽秋)에 "제갈량은 군사를 교묘하게 통솔하였고, 군령도 엄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설신어에는 "제갈량이 위수(渭水) 변경에 진을 치자 관중(關中)이 발칵 뒤집혔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제갈량이 임기응변의 책략에 능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양한 반론이 있다. 일단 당대 제갈량을 가까이서 본 사람들은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한 듯 하다. 특히 적장이던 사마의가 공명 사후 그가 죽은 오장원(의 곽씨오)의 진지를 둘러보고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 원자에는 제갈량의 군대가 무장과 무기를 최고상태로 유지했으며 군대에서 쓰이는 물건들 모두 멋있고 정교하게 꾸몄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부대관리를 잘했고 군대에서 쓰이는 물건들을 통해 부대의 사기진작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제갈량은 연의에서 보여준것과 같은 화공계나 반간계 같은것은 정사에서 잘 쓰지 않았지만 부대 기동을 통한 기만이나 기습, 복병을 이용한 매복전술을 상당히 잘 사용하였다. 1차북벌, 3차북벌은 기습이었고 1,5차 북벌에서도 위나라의 허를 짜르는 기만전술을 사용하였다. 분명 부대운영과 정공법에도 능한 인물이었으나 이런 전략적인 면을 보건대 책략를 쓰는것에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 당시 위나라 제일의 전략가인 사마의가 4차 북벌 시 노성 전투에서 패한 이후 촉군에 대한 전략을 견벽거수(見辟擧守: 벽을 맞대고 수비만 함)로 수정했다는 점을 보면 제갈량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사실 제갈량은 유인책과 기만책으로 자신이 먼저 선공을 걸고 상대가 그 전투에 마지못해 응하는 상황을 만들면 거기서 승리를 거두는데 능했다. 즉, 자신이 원하는 전장을 만들고 거기에서의 승리와 대전략이 뛰어났다는 뜻이다. 또 전장에서 퇴각할때는 질서 정연하고 오히려 추격한 대상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4차북벌에서 명장 장합을 전사시킨것이 대표적인 일례다.[52]

사실, 진수의 평을 정확한 해석에 기반하여 다시 읽는다면 제갈량이 "군사적으로 재능이 없다"라든지 "군략이 약했다"는 것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정치가로서 출중하였으나 장군의 재능은 그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했다"는 뉘앙스가 강함을 알 수 있다. 정치가로서는 초일류이지만 장군으로서는 이치에 맞는 전략을 짜고 특히 질서정연하게 운영할 수는 있었으나 (예를 들어) 백기한신과 같은 급수의 초일류 장군은 되지 못했다는 정도. 보통 중국에서 군사적 재능에 대한 찬사를 할 때 '기책', '책략'등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평에 있어서 '임기응변이 부족했다'는 표현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특히,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명장"으로 거론되는 인물 중 원톱이 (한고조에 대한 반란혐의로 숙청당한 이래 공공연히 거론된 것은 아니지만) 한신인데, 당대 사람의 인식에서 한신은 그야말로 "기책의 달인" 급수가 되니 뭐…

10.2. 권신 제갈량, 제갈량의 권위에 대해[편집]

제갈량은 권력욕이 많은 인물이라고 평가도 있다. 우선 소설 삼국지 속 제갈량은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 '불타는 적벽' 화용도 이야기에서 작가 설명에서도 제갈량이 권력욕심이 있다고 주장하였고, 김경한 작가가 쓴 평설 인물 삼국지에서도 제갈량이 관우와 유봉을 죽게 놔둘 정도로 소극적이며 유비 사후 제갈량이 권력은 이미 2대 황제인 후주인 유선보다 높다고 하였다. 하지만, 화용도의 전개는 삼국지연의에 나온 픽션이고, 유봉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사실과 부합하지만 관우를 죽게 내버려뒀다는 것은 고우영 삼국지에서 나온 픽션이다. 따라서 이것은 '픽션의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정작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확실히" 권력욕을 가졌다는 기록이 제대로 없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제갈량이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이엄의 실각을 자행했다고 하는데, 이엄은 촉한 대부분의 대신들의 탄핵연명장을 올리고, 이것을 통해 실각하게 된 거라서, 제갈량이 권력욕 때문에 이엄을 실각시켰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서진의 시조인 사마염이 제갈량 같은 인재를 갈망했을 정도고, 당시 사마염이 제갈량을 높이 평가했던 점을 보면, 당대에는 권신의 이미지가 그다지 짙지는 않은 듯하다. 동진의 재상 사안 역시 어린황제를 잘 보필하여 끝까지 충심을 다한 인물로 제갈무후, 즉 제갈량을 평했다.

또 유비가 관, 장이 죽고 나서 유비가 제갈량에 내린 벼슬을 보면 놀라울 점이 많다. 황제가 된 뒤, 승상, 녹상서사, 가절에 임명하고 장비가 죽은 뒤에는 사례교위까지 겸임하고 유언으로는 상국의 지위를 내리기까지 한다. 권력을 장악한 신하는 예로부터 많았지만 창업자가 이로록 신하에게 권력을 몰아준 적은 드물다. 그리고 그 후대에도 그것을 인정한 경우는 더 드물고, 그 권력을 받은 자가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고 함부로 쓰지 않은 경우는 더더욱 없다. 확실히 유비,유선 - 제갈량의 관계는 단순한 군주와 신하와의 관계는 아니었다. 유비가 죽으면서 했다는 유언도 단순히 제갈량을 시험하려 했던 것도 아니라 유선이 부족할 경우 황제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는 명분 or 이렇게 많은 권한을 받은 제갈량이 반란으로 몰릴 위험을 제거해 놓았다는 관측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제갈량 역시 충심을 다해서 유선을 보필했다.

유선이 제갈량 사후에 촉나라 백성들과 신하들이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을 짓다고 건의를 했는데 유선은 당장 짓지는 않고 몇 년뒤에 사당을 지었다. 이를 근거로 유선은 제갈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일부러 사당 건설을 몇년간 질질 끌었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있기는 하지만, 제갈량 사후 그를 욕하는 이막을 유선이 화를 내며 처단한 바도 있으니[53] 제갈량과 유선이 대립했다고 하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54] 이런 점을 벌때, 일각에서는 유선이 제갈량을 좋아했지만, 사당이 지어져서 제갈량이 신격화되는 행위를 싫어하지 않았냐는 의견들이 있다.

제갈량은 유비가 유장을 뒤통수치게 만들고[55], 유비와 함께 멀쩡히 살아있던 헌제에게 시호를 올려 죽은 사람으로 만들았다는 점에서 도덕적 비판이 존재한다.[56] 유비가 칭제하게 한 행위가 한의 충신이라는 이미지를 가지던 유비를 기회주의자라는 이미지로 바뀌게 만들었다는 논란이 존재하나, 유비가 끝까지 거절하지 않고 결국에는 황제에 즉위했다는 행위, 아니 스스로 한중왕을 자칭한 그 시점부터 유비는 이미 칭제할 마음이 있어다는 얘기니 제갈량을 욕할수는 없다. 그리고 유비가 한의 충신이라는 이미지는 연의에서나 있는 내용이지, 정사에서는 유비가 서주를 먹은 시점부터 유비를 기회주의자로 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에서, 제갈량이 유비의 이미지를 먹칠했다고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제갈량은 유비 칭제의 총대를 맨거지, 앞서서 유비가 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연의나 정사를 보면 다른 이들이 칭제를 계속 주장했고, 제갈량이 총대를 맸었다고 나와있다.

10.3. 인사정책[편집]

제갈량의 인사정책은 어땠는가에 대해 그의 주군 유비와의 비교를 통한 논쟁도 있으나 위에서 제갈량 본인이 언급했듯이 사람들에게는 각자 다른 장점과 단점이 있으나 바로 여기에 사람들의 좋은점을 쓰는 방식이 있다고 하였다. 즉 제갈량은 사람을 씀에 있어 신상필벌을 명확하게 하였으나 비록 단점이 있더라도 장점이 있는 관리의 장점을 아껴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장완이 일을 태만히 해 유비의 노여움을 사 처벌당할뻔 했을때 제갈량이 "장완은 국가의 그릇이지, 백리를 다스릴 인재가 아닙니다. 그의 정무 처리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겉모습을 장식하는 것을 우선시하지 않습니다. 원컨대 주공께서는 다시 살펴 주십시오."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어떤 사람이 장점을 가지고 있으면 단점이 있더라도 그 재주를 살려 아껴서 쓰려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비록 법정과 의견은 다른 편이었으나 그의 사람대함에 있어 야박한 태도를 감싸주고 그의 지모와 법술을 존중하였고 위연과 양의의 갈등에서도 그 두명의 재주가 아까워 어떻게든 둘을 화해시키려고 했던 점만 봐도 그러하였다. 또 재상의 지위에 올라서도 손수 인재들을 찾아다니며 덕망과 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관리로 기용했다는 점에서 인재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가 칭찬하고 아낀 인재들인 장완, 비의, 동윤, 강유 등이 제갈량 사후 촉한을 지탱한 인재라는 점에서 그의 인재 씀이 돋보인다.[57] 그러나 유비도 걱정한 마속 같은 실패 사례도 있으며 이렇게 최대한 다독이다가 결국엔 북벌에 차질을 빚게 만든 이엄의 예, 결국 그 성격을 고치지 못하고 제갈량 사후 반목하여 서로 파멸한 위연과 양의의 사례도 있듯, 그의 이런 인재관에도 분명히 장단점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11. 기타[편집]

역대제왕묘 배향자 중 한명이다.

시호가 충무여서인지 한국에선 이순신을 제갈량에 비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선비들부터 그러하였는데 선조실록에는 노량 해전을 두고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는 표현도 있다. 다만 위를 정벌하기 위해 수차례 북벌을 벌여 쳐들어갔던 제갈량을 조선을 침략해 들어온 왜군을 수차례 막아낸 이순신과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제갈량의 북벌이 예방전쟁이었다는 시각을 대입한다면 싱크로가 맞는 편.

살아 생전 활발히 집필 활동을 했다고 알려졌으며, 그의 병법을 수집해 274년에 진수가 편찬한 《병법 24편》, 혹은 《제갈량집》이라 불리는 저서도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대부분이 소실되어 현재 전하고 있는 것은 명문으로 칭송받은 전후 출사표[58], 제갈량의 저서로 알려져 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하여 진위 여부에 논란이 많은 장원, 병법 24편에 속하거나 혹은 그 외의 병법이라고도 여겨지지만 장원과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저술했는지에 대한 진위가 불분명한 《편의십육책》, 그리고 태평어람등에 남은 일부 문집과 그가 지인들과 나누었던 편지 정도이다.

후출사표에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라는 말이 나오는데[59][60], 사실 후출사표가 위작이라는 설도 있긴 하지만(이 문제에 대해서는 출사표 참고) 제갈량 본인이 이 말대로 살다간 사람인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 이 말대로 촉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 말에 걸맞는 말년을 보냈고, 그 행보를 보면 여러모로 그의 죽음의 원인이 과로사 혹은 과로로 인한 병사라는 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승상이란 사람이 이러니 아랫 사람들도 지나치게 일을 많이해 촉나라의 관리들은 과로사의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농담조로 제갈량이 누군가를 일처리 좋다고 칭찬하면 이른 죽음을 맞이한다라고 할 정도.

제갈량 인생에 가장 큰 암운을 드리운 것은 암군인 유선[61], 라이벌인 사마의도 아닌 손권. 일단은 동맹관계였지만 손권의 뒷치기를 늘 염두에 두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북벌을 계획하였기에 늘 고생이었다.

흔히들 초주가 제갈량에게 많이 딴지를 건 네거티브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제갈량의 북벌을 반대하지도 않았고, 제갈량이 죽었을 시에는 오히려 가장 먼저 달려간 인물이기도 하다. 삼국지연의의 피해자 참고.

현대에 와서는 주군인 유비보다 더 인기인. 성도의 사당들을 가봐도 유비의 사당보단 제갈량의 사당에 사람들이 더 바글바글하다. 쓰촨에서 지진이 났을 때도 "승상님이 다 해주실 거야"라며 무후묘에 피난 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소오강호에서는 당시 사천성 사람들이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천 년이 넘도록 머리에 흰 띠를 둘렀기에 다른 지방 사람들과 구분이 되었다고 나와 있다.

한국의 제갈씨는 신라 때 들어왔으며 고려 현종때 후손 형제가 각각 제씨와 갈씨로 성씨를 하사받아 제씨와 갈씨로 갈라섰다가 구한말에 일부가 다시 제갈씨로 합쳐졌다. 그리고 2002년 법원 판결에 의해 제씨와 갈씨가 제갈씨로 합해졌다. 실제 복성 소송을 한 이유는 갈정웅 한국 M&A협회 회장 집안의 개인소송 때문으로 이 이후 이 사람은 제갈정웅이 되었다. 흔히 제씨 갈씨 두 성씨가 제갈씨로 복성을 한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성이유를 갈갈이 패밀리 때문으로 오해하고 인터넷에 퍼뜨리는데 복성은 구한말 복성 운동으로 시행되던 것으로 구한말 이후 제씨, 갈씨, 제갈씨 3성이 존재하였고 이후 제씨, 갈씨는 복성을 하고자 하면서 개인소를 제기하여 복성이 된 것이다.

원나라 때의 연극에서의 제갈량은 자신의 야망(나라가 다시 의로운 이의 통치를 받는 것)을 위해 유비를 따르고[62] 분노와 뿌듯함을 표현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이었지만 명나라때의 연극에서는 이상주의자적인 면이 더 강조되었다.

후촉의 왕소원(王昭遠)이라는 인물은 스스로 제갈량으로 자칭했는데, 병서를 좋아하고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모략이 부족했다. 송나라 군대가 후촉을 멸망시키려 할때 싸웠으나 패배하여 울면서 탄식하다 눈이 붉어진 채로 잡혀버렸다. 사람들은 즙 눈물을 흘리는 제갈량이라며 비웃었다고.

청나라 옹정제의 시절, 옹정제는 권신인 융과다를 숙청하기 위해 온갖 죄목을 가져다 붙혔는데, 게중에는 스스로를 제갈량에 비유한 오만함.이라는 항목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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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이 사진의 왼쪽의 여성이 제갈량의 63대손 제갈재기(諸葛梓岐)[63]이다. 1979년에 출생했고. 남편은 홍콩의 이름난 재벌 2세이다. 조상님을 닮아서인지 제갈재기도 173cm로 장신이다. 캐나다 출신 화교로 홍콩에서 모델로 활동했다. 남편이 금수저 끝판왕인 재벌 2세답게 결혼식에 무려 11억원 정도를 들여 초호화 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이름 '량()'은 한자문화권에서 이름에 자주 쓰이는 글자 중 하나로 당대부터 이미 널리 쓰였다. 동시대 사람으로는 사마의의 3남인 사마량과 손오의 2대 황제 손량. 지금도 한자문화권에서 종종 쓰이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나라는 의외로 일본. '료'라고 읽히며 남자 이름이 외자로 료라면 십중팔구는 涼、亮、良 정도 중 하나. 복성이나 세글자 이상의 성도 심심찮게 있어 외자 이름이 어색하지 않은 문화적 배경과 삼국지의 인기가 한몫한다.

12. 제갈량에 대한 관련일화들[편집]

  • 가련은(1671~1759)은 18세기에 활약했던 함흥(咸興)의 기녀로, 시문, 노래, 검무, 거문고와 바둑, 쌍륙 등에 두루 능한 팔방미인이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재기(才妓)라고 칭했으나, 자기 자신은 여협(女俠)으로 자부하였다. 84세 때에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를 외우면서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 소녀풍은 서쪽에서 부는, 비를 몰고 오는 바람이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청하(淸河)에 있을 때 큰 가뭄이 들었다. 사람들이 언제쯤 비가 올 것인가 묻자 공명은 "오늘 밤에 큰비가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녁이 되어도 구름 기운이 전혀 없자 모든 사람들이 공명을 바보라고 생각했으나 공명이 말하기를 "나무 위에 이미 소녀풍이 불고 나무 사이에 음조(陰鳥)들이 바람에 나부끼듯이 지저귀며 날개를 마구 치니, 그 효과가 이를 것이다." 하였는데, 잠시 뒤에 큰비가 쏟아졌다.[64]

  • 평안도 영유군에 있던 삼충사는 중국 촉한(蜀漢)의 재상 제갈량(諸葛亮), 남송(南宋) 초기의 무장(武將) 악비(岳飛), 남송 말기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603년(선조 36)에 세워 제갈량의 위패를 모셨으며, 1668년(현종 9)에 '와룡(臥龍)'이라 사액하였고, 1695년(숙종 21)에 악비를 배향하였으며, 1750년(영조 26)에 문천상을 배향하면서 ‘삼충사’로 고쳐서 사액하였다. 삼충사는 국가에 대한 충절을 장려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녀 역대 왕들에 의해 건립, 보호되어 왔다. 때문에 1871년(고종 8)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 사우 철폐 때도 그 훼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 경기도 화성시 용백사는 1666년(현종7)에 세워졌는데, 송나라의 명신 호안국(胡安國)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순국한 윤계(尹棨)도 함께 향사하였다.[65]

  • 태평어람에 따르면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으로 하여금 말릉(秣陵) 즉 건업(建業)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용과 범이 서려 있는 것과 같은 기운이 뻗쳐 나와 제왕의 터전임을 알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사실 이 일화는 강표전에 유비가 손권에게 말릉을 도읍으로 삼으라 권하자 손권이 이를 따라 도읍을 옮기고 건업으로 삼았다는 말과 같다.[66] 또 태평어람에 실린 오록에 따르면 석두성(石頭城)은 삼국 시대 오(吳)나라 수도 건업(建業)에 있던 성으로, 제갈량(諸葛亮)이 이곳 지세의 험준함을 보고 손권(孫權)에게 건의하여 석두성을 쌓게 하고 수도로 삼게 하였다. 제갈량은 주변의 종산(鍾山)과 석두산(石頭山)을 각각 용과 범에 비유하여 “종산은 용이 서린 듯, 석두산은 범이 웅크린 듯하니 이곳은 제왕의 거처이다.(鍾山龍蟠 石頭虎踞 此帝王之宅)라고 하였다.[67]

  • 《음부경》은 황제(黃帝)가 지었다 하는 병서(兵書)이다. 《수서 경적지(隋書 經籍志)》의 병가류(兵家類)에 "《태공음부금록(太公陰符鈐錄)》 1권과 《주서음부(周書陰符)》 9권이 있으며, 태공(太公), 범려(范蠡), 귀곡자(鬼谷子),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 이전(李筌) 등 6가(家)의 주가 있는 것이 《태공음부》다." 하였다. 경문(經文)이 384언으로 된 한 권의 책이다. 이전이 여산노모(驪山老母)에게서 전수받았다고 하였으나 이전의 위작(僞作)으로 짐작된다.[68]

  • 진수가 찬술한 《삼국지(三國志)》에 제갈량집 목록 24편을 수록하면서 전체가 10만 4112자라고 했다. 목록을 보면 열한 번째에 〈귀화(貴和)〉라는 제목이 있는데, 이 말은 《논어(論語)》에, "예(禮)의 쓰임은 온화(和)한 것이 귀함이 된다."에서 따온 것으로, 주자(朱子)는 화(和)를 "조용하여 급박하지 않다."로 풀이하였다.

  • 잔도 철산(棧道鐵山) 몹시 험준한 요해지(要害地)를 이르는 말로 모두 중국의 파촉(巴蜀) 지방을 이르는데, 잔도(棧道)는 산로(山路)가 험준하여 나무 가교(架橋)를 만들어 통행하는 것이고, 철산(鐵山)은 지금의 사천성 정연현(四川省 井硏縣) 동북에 위치한 철(鐵)의 산지로 제갈량이 이곳에서 병기(兵器)를 만들었다 한다.[69]

  • 《사천통지(四川通志)》〈고비부(古碑附)〉에 "장맹양이 그의 아버지를 따라 촉(蜀)으로 들어가 〈검각명(劍閣銘)〉을 지었다. 익주 자사(益州刺史) 장민(張敏)이 보고 천자에게 보고하여 비석에 새겨 검각(劍閣)에다 세웠다."라고 하였다. 검문(劍門)은 검각인데, 잔교(棧橋)의 이름이다. 지금 사천성(四川省) 검각현(劍閣縣) 동북쪽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 사이에 있는데, 제갈량이 설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천협(川陜) 사이의 주요한 통로로서 군사적 요충지이다.[70]

  • 일성록에 따르면 정조 19년 10월 21일에 치른 상재생(上齋生)에 대한 제술(製述)에서 "내 마음은 저울과 같다.(吾心如稱)"를 부제(賦題)로 삼아 시험을 보였다. 이는 제갈량이 촉(蜀)을 다스리면서, "내 마음은 저울과 같아서 남을 위하여 경중(輕重)을 조작할 수 없다.(吾心如稱 不能爲人作輕重)"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홍재전서(弘齋全書)》 권 44에 실린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 의하면 정조는 이 구절이 마음에 들어 크게 써서 벽에 걸어 두고 보곤 하였다고 한다.

  • 제갈량(諸葛亮)이 우장군(右將軍)이 되어 승상(丞相)의 일을 행할 때에 군사를 일으켜서 적을 공격하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제갈량이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군사의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뒤에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나의 잘못을 열심히 공격하기만 하면, 일이 성공할 수 있고 적은 죽을 수 있으며, 공을 세우는 것은 발돋움하고서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71]

  • 제갈량이 주필역(籌筆驛)에서 출사표(出師表)를 지었다는 고사가 있다. 사천성(四川省) 광원현(廣元縣) 북쪽에 있는데,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일찍이 여기에서 출사(出師)의 계획을 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에 "상중(喪中)에는 부인이 실내에서 복머리를 한다." 하였고, 《촉지(蜀志)》에는 "건흥(建興) 12년 8월에 제갈공명이 54세로 전쟁터에서 죽자, 촉 나라 부인들이 애도하는 뜻으로 상중에 하던 복머리를 하였다."고 하였다. 제갈량(諸葛亮)이 죽자 촉나라 부녀들이 슬퍼하면서 상례 때 하는 북상투를 했다. 이는아무렇게나 막 끌어 올려 짠 상투. 함부로 끌어 올려 뭉쳐 놓은 여자의 머리를 뜻한다.

  • 조선 전기에 중국에서 수입했던《제갈충무록(諸葛忠武錄)》라는 책이 있다.《충무록》과 관련 내용은《중종실록》 36년 8월 27일자 기사에 나온다. 당시《제갈무후전(諸葛武侯傳)》은 이미 경상도에서 간행하였다고 한다.

  • 제갈량이 남양(南陽)에 은거하면서 남들과 서로 왕래하지 않고 지내던 시기에 유독 서서(徐庶)와 방덕공(龐德公)과는 사이좋게 지냈으며, 특히 방덕공을 매우 존중하여 혼자 찾아가서 침상에 절을 하곤 하였다. 제갈량은 그를 매우 존경하여 스승으로 예우했고, 자주 인사하러 왔고, 방문할 때면 침상 아래에서 공경히 절하였고, 방덕공은 제지하지 않고 태연히 절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72]

  • 타전로(打箭鑪)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남정(南征)할 적에 여기에서 대장간을 설치하여 화살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서강성(西康省) 경계의 강정현(康正縣)이 그곳이다.

  • 《풍우부(風雨賦)》는 천문(天文)의 변화를 통해 일기(日氣)를 예상하고 점치는 방법을 실은 책자로, 주(周)나라 강자아(姜子牙)가 짓고, 한(漢)나라 제갈량(諸葛亮)이 편집하였으며, 명(明)나라 요종도(饒宗道)가 주해하였다. 1795년(정조19) 천문에 관한 서적들을 편집하여 《협길통의(協吉通義)》를 간행하였는데, 이 책에 《풍우부》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73]

  • 송(宋)나라 유학자 호안국(胡安國, 1074~1138)은 제갈량의 가산이 뽕나무 수백그루였다는 일화를 높게 평가하여 "이러한 사람은 진실로 대장부라 할 수 있다.(如此輩人 眞可謂大丈夫矣)"라고 하였다.[74]

  • 사혜련(謝惠連)의 〈설부(雪賦)〉에 겨울의 추위를 노래하기를 "화정에는 불길이 꺼지고 온천에는 얼음이 얼었으며, 불담에는 물이 끓어오르지 않고 뜨거운 염풍이 불지 않으니, 북쪽으로 난 방문 틈을 잘 바르고 나양에서는 처음으로 비단옷을 걸친다.(火井滅 溫泉冰 沸潭無涌 炎風不興 北必墐扉 裸壤垂繒)" 하였다. 화정은 촉(蜀) 땅 임공현(臨邛縣) 서남쪽에 있는 우물인데, 제갈량이 처음 발견했으며 불길이 올라왔다고 한다. 나양은 나라 이름으로 이 나라 사람들은 옷을 입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13. 미디어 믹스[편집]

14. 관련 문서[편집]

[1]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 유협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같은 해에 죽었다.[2] 익주의 국정을 본격적으로 총괄해 맡게 된 시기는 214년.[3] 주희가 쓴 근사록(近思錄) 관성현편(觀聖賢篇)에 등장하는 표현[4]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성을 붙일때는 X량 이라고 해야 한다. 제갈량은 성이 제갈(諸葛)씨이고, 이름이 '량(亮)' 이기 때문. 그러나 X량이라고 하면 어색하기도 하고, 글자수도 맞지 않기에 X갈량이라고 표현하는 듯.[5] 다만 제갈량 같은 경우에는 유비가 상국의 지위를 내렸다는 부분 이외에는 기록에서 거의 승상으로 불리기 때문에, 군주의 신뢰를 얻었다는 일종의 명예직일 가능성도 있다.[6] 당시의 말들이 당시 사람들의 체격에 맞았다면, 정말로 키가 커서 수레를 타고 다녔을 수도 있다. 말의 체격이 작으면 덩치 큰 사람이 타기 힘들뿐더러, 말도 탄 사람의 덩치 때문에 잘 가지 못한다.[7] 여담으로, 재미있게도 위, 촉, 오 각각을 대표하는 모사들인 순욱, 제갈량, 주유 모두 정사에 기록된 미남이다.[8] 삼국지 공명전 등에서는 이런 견해를 따르고 있다. 단, 공명전의 장면처럼 부모가 죽은 것도, 제갈량의 혈육 가운데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다.[9] 〈양보음(梁甫吟)〉은 초(楚)나라 지방의 악부곡(樂府曲) 이름으로, 〈양보음(梁父吟)〉이라고도 한다. 양보(梁甫)는 즉 양보(梁父)로 태산(泰山) 아래에 있는 작은 산 이름인데, 사람이 죽으면 이 산에 매장하였기 때문에 장가(葬歌)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 제갈량(諸葛亮)과 이백(李白)이 지은 두 가지의 〈양보음〉이 전해지는데, 제갈량은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재상 안영(晏嬰)이 공손첩(公孫捷), 진개강(陳開疆), 고야자(顧冶子) 세 명의 용사(勇士)에게 복숭아 두 개를 가지고 서로 다투게 하여 끝내 모두 자살하게 만들었던 안타까운 일을 서술하였고, 이백은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과 역생(酈生)을 거론하며 지사(志士)가 포부를 실현하지 못하는 비분강개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무릎을 끌어안고 불렀다 하여 포슬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고사(高士)의 울울한 심회가 담겨 있다고 한다.[10] 학자마다 이 노래를 부른 의미를 달리 해석하는데 학경은 '아마도 한(漢)말 명사들이 종종 타인으로 인해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환관과 적신(賊臣)의 금고(禁锢) 때문에, 죄다 그들의 절조가 땅에 버려졌다가, 한이 마침내 망한 까닭에, 은거하며 일어나지 못함을 슬퍼한 것이다.'이라고 했고 노필은 '그냥 제갈량이 심심해서 부른거 같은데?' 라는 의견을 냈다(...).[11] 흥미로운 점은, 영웅기에서 여포도 고사를 인용하여 다른 사람을 설득할 때 악의와 관중을 언급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제갈량이 비교한 것은 능력이고 여포가 비교한 것은 처지였다는 것.[12] 교주자사직은 229년에 오나라가 교주를 확실히 장악하자 폐지한다.[13] 오늘날 운남성의 어원이 된다.[14] 흔히 제갈량을 두고 서책에 제갈무후(諸葛武侯)라고 쓰여 있는게 이 시호 때문이다.[15] 최종 직위는 대장군이다. 그리고 제갈근이 죽었을 때, 손권이 정말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16] 혹자는 제갈근에 대해 '(대촉 외교 한정) 오의 최후의 카드'라고 할 정도다.[17] 유일한 친자식으로 제갈량이 40대 후반에 접어들어서 얻은 아들이다. 제갈량이 제갈근에게 보낸 편지 중 '(제갈)첨도 이제 8세, 영리하고 귀여운 녀석이지만 너무 조숙해서 큰 인물이 되지 못할까 염려된다'는 구절을 남긴 것을 보면 매우 영특했던 모양. 제갈량에게 팔불출의 끼가… [18] 다만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와 헌제춘추에서는 주호와 제갈현이 싸웠다고 기술되어 있다.[19] 채모의 아버지[20] 고대 중국에서 '개'는 한국에서의 의미와 달리 충성스러운 동물의 이미지를 갖는다. 사자성어인 '견마지로(犬馬之勞)'에 나오듯 충성스러운 수고를 의미하기도 한다. 비슷한 예로 몽골 건국기의 '사준사구(四駿四狗)'처럼 뛰어난 신하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 여기서는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뛰어난 신하 정도의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용과 호랑이에 비하면 못하지만 충성스럽고 뛰어난 신하라는 의미.[21] 박릉 최씨는 남북조, 수당시기 태원 왕씨 등과 함께 산동귀족의 대표가문이다.[22]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키려 했을 때 이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반대하기도 했다.[23] 안개 속에 돌무더기가 놓여 있고, 발을 잘못 들이면 헤매게 된다. 그리고 제갈량의 장인이 (자기 사위의 군주를 몰아세우던) 적장을 풀어준다.[24] 모(矛)가 문명 초기부터 존재했던 상형자인 반면 창(槍)은 이후에 만들어진 형성자이기 때문에 외래어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가만보면 창 자에는 창의 형상이나 뾰족한 끝날을 나타내는 글자가 없다. 저 글자에 부수가 붙기 전의 것은 무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창고(倉)를 일컫는 글자.[25] 다만 어이없는 것이, 실제로 얘기된 내용은 주전/항복보다는 공명의 인간상에 대해 깠는데 역관광을 당하는 게 대부분이다(…).[26] 종횡가 문서 참고. 춘추전국시대의 국가들이 고작 두 사람의 말빨에 넘어가서 전쟁을 벌였다고 생각하여 그 점을 비꼰 것.[27] 본래 회계태수 왕랑의 신하였다가 동오의 덕왕 엄백호 건으로 인해 도망쳤다가 손권의 부하가 되었다.[28] 한신, 관영이 제나라를 격파하고 제왕 전광(田廣)을 사로잡자 숙부인 전횡(田橫)이 제왕에 올랐는데 그 후 고제가 천하를 통일하자 5백 여 무리를 이끌고 바다로 달아났는데, 후환이 될 것을 우려한 한고제가 투항을 권유하며 위협하자, 이에 응해 경사로 오던 도중 "나는 처음에 한왕(漢王-한고제)과 함께 같은 왕이었는데 이제 한왕은 천자가 되고 나는 도망친 포로 신세가 되어 북면하여 그를 섬겨야 하니 치욕을 감당키 어렵다"하여 자결한 고사를 뜻한다.[29] 여기서 널리 퍼진 고사가 바로 강노지말.[30]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아가는 것.[31] 여기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개성포공이다.[32] 문서 참조, 제 환공을 춘추오패의 첫 타자로 올린 인물[33] 문서 참조, 한고조 유방 밑에서 승상을 역임, 한고조가 항우를 패배시킨 후에는 어느 주연에서 신하들이 개국의 공을 묻자 천하통일에 한신 한신: 폐하(…), 장량보다도 공이 크다고 한 인물. 공명은 결국 천하통일엔 실패하지만…[34] 조선시대 고급공무원 선발 시험인 과거 대과의 마지막 관문으로, 최종합격자 33명의 등수를 정하는 시험에서 쓰는 답안.[35] 남송 증흥 4장 중 한명이다.[36]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의하면, 이흥(李興)은 이밀(李密)의 아들로 다른 이름은 안(安)이다.[37] 《근사록(近思錄)》 권14 〈관성현(觀聖賢)〉에 나온다. 당시 제갈량의 정사가 도에 가까워 성왕(聖王)의 정사처럼 예악을 일으키는 데 거의 가까웠다고 높이 평가한 것이다. 또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왕자(王者)를 보좌할 마음은 있었으나 그가 행한 도리는 미진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한실을 부흥시키려고 했던 일은 옳은 일이었다. 공명은 유자의 기상이 있었고 공명은 예악(禮樂)을 거의 일으킬 수 있었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왕통(王通)이나 주희(朱熹)도 이와 비슷한 평론을 하였다.[38] 남송 무주(婺州) 영강(永康) 사람. 자는 동보(同甫)고, 학자들은 용천선생(龍川先生)이라 불렀다. 재주와 기상이 뛰어났고, 군사에 대해 논하기를 즐겼다. 성리(性理)에 대해 공리공담하는 것을 반대하고 실사실공(實事實功)을 강조했으며, 영가학파(永嘉學派)에 상응하는 영강학파(永康學派)를 창립했다. 주희(朱熹)와 가까웠지만 학문적으로는 왕도(王道), 패도(覇道) 및 의리(義利)에 대해 대립하는 관점으로 비판했고, 실제의 효용을 중시했다. 저서에 용천문집(龍川文集)과 용천사(龍川詞) 등이 있다.[39] 鞠躬盡膵 死而後已를 말한다[40] 三代: 하(夏)·은(殷)·주(周)[41] 당나라의 명신, 754년 ~ 805년[42]소학 가언小學 嘉言》에 이르길 제갈량이 제갈첨에게 남긴 말로 "담박이 아니면 뜻을 밝힐 수 없고, 영정(寧靜)이 아니면 멀리 이를 수 없다."라고 일렀다.[43] 다시 말해 너무 지나치게 진지를 차린다는 말[44] 원준의 글을 보고 이덕무가 이를 인용하여 평가한 글이다.[45] 자는 경부(敬夫), 혹은 흠부(欽夫), 낙재(樂齋)이며, 호는 남헌(南軒)이고, 시호는 선(宣)이다. 나라를 지키고 군사를 중시하는 치국의 원칙을 비롯하여 경세치용 등을 강조했고, 많은 제자를 양성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장식은 학교가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으며 학문의 현실적인 의의를 중시했다.[46] 수(隋)나라 행군총관(行軍摠管) 사만세(史萬歲)가 남녕(南寧) 만이(蠻夷) 찬완(爨翫)의 반란을 평정하던 도중에 제갈량(諸葛亮)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을 보았는데, 그 뒷면에 “만세 뒤에 나보다 나은 자가 여기를 지나갈 것이다.〔萬歲後 勝我者過此〕”라고 새겨 있었다. 이에 사만세가 좌우로 하여금 그 비석을 쓰러뜨리고 진격하게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북사 권 73 사만세 열전》[47] 이것 역시 제갈량의 예지력과 신통력에 관련된 일화일 듯하나, 《송사(宋史)》 권258 조빈열전(曹彬列傳)에는 그가 촉(蜀) 지방으로 출정한 사실만 기록되어 있고 이에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48] 사실상 삼국지가 끝날때까지의 시간은 제갈량 사후부터도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리고 꽤 여러가지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49] 진수가 제갈량을 이렇게 비판적으로 평해놓고는 사마의를 욕보인 것으로 여길까봐 사마염에게 계속 용서를 구한 점을 보아 사마의의 공적을 드높이기 위해 제갈량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50] 이전전에 의하면 박망파 전투는 203년에 발생한 여양 전투 직후에 발생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니 삼고초려로부터 무려 5년 전의 일이다.[51] 凡戰者, 以正合, 以奇勝. 故善出奇者, 無窮如天地, 不竭如江河[52] 퇴각작전이야말로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그 이유는, 우선 퇴각이 결행될 경우 사기라는 측면에서 아군의 사기는 낮고 적군의 사기는 높으며, 더 큰 문제는 어떠한 전과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병력을 최대한 온존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기세가 오른 적군의 추격은 그야말로 덤. 제갈량은 이 부분에서 휘하장수 왕평과 조운의 질서정연한 수습과 퇴각, 추격대인 왕쌍 참살, 장합 참살, 후위를 맡긴 강유의 지휘 등 퇴각작전에 있어서 오히려 적을 기세에서 압살하거나 오히려 추격군을 박살내는 질서정연한 퇴각작전에 능했다. 그것이 제갈량의 군재에 있어서 플러스 요인인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 셈이다.[53] 그냥 처단이 아니라 사형을 시켜버렸는데 이게 왜 놀라운 거냐면 유선은 능력은 몰라도 인품은 유순하고 선량한 편이라 사람 죽이는 걸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화를 내며 죽여버릴 정도니(…) 원래 순한 사람이 화났을때가 더 무섭다는데 도대체 얼마나 화를 냈을까[54] 무엇보다도 제갈량은 유선의 친어머니인 감부인을 소열황후로 높이고 유비와 같이 모셔야 한다고 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유선의 입장에선 이런걸 싫어할 이유가 없었을터이다.[55] 그러나 이 상황은 유장의 부하들이던 장송, 법정, 맹달 등이 먼저 와서 유비에게 익주를 갖다 바치는 상황이었다. 중요한건 이들 중에서는 유장을 익주목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이들이 존재한다는거다. 또 진수가 '유장이 영웅이 아니라 땅 뺏긴거지. 자연스러운 이치여'하고 평한걸 보면 의외로 당대 사람들 사이에선 도덕적 흠집이 아니었을수도 있다. 실제로 당대에 유비도 이걸로 이미지 손해보고 그런건 별로 없다.유장이 오죽 정치를 못 했나보다. 하긴 명색이 후한 최대의 주 익주를 진수하고 있으면서 고작 한중군 하나 차지하고 있던 장로한테 쩔쩔매다 유비군을 불러들일 정도였으니(...)[56] 그런데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는 유언비어는 꽤 퍼져 나간 듯 하다. 오나라 쪽에서도 헌제를 죽은 사람 취급하는 기록이 있을 정도. 헌제 존재감 안습 그러니까 알면서도 죽은 사람 취급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는 풍문 자체는 유비 세력에게는 아주 좋은 명분이 될 수 있었다.[57] 엄밀히 말하면 그는 인성과 능력을 고려해 관료의 성격이나 능력에 따라 알맞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려고 노력했다 할 수 있다. 당장 출사표에서 '곽유지비의, 시랑 동윤 등은 모두 선량하고 진실하오며 뜻과 생각이 고르고 순박하여 선황제께서 발탁하시어 폐하께 남기셨사오니, 아둔한 신이 생각하건대 궁중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그들에게 물어보신 이후에 시행하시면 필히 허술한 곳을 보완하는 데 크게 이로울 것이옵니다. 장군 상총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치우침이 없으며 군사에 밝으니 쓰시도록 하십시오'라고 했던 것처럼 아직 미숙한 군주 주위에 능력과 인성이 되는 인사들을 배치해 보좌를 담당케 했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 특히 동윤 같은 경우엔 내부기강을 잡는데 있어서 탁월한 인재 선정이었다.[58] 다만 후출사표는 다른 사람이 쓴 위작이란 설이 있다.[59] 온 마음의 정성 몸이 부숴질 때까지 노력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정성을 다하겠다는 뜻. 정사 삼국지자치통감에는 국궁진력(鞠躬盡力)이라 표기되어 있다.[60] 이 말은 뒷날 강희제저우언라이도 좌우명으로 삼았던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61] 제갈량 생전에는 철저하게 제갈량의 말을 따랐다.[62] 정확히는 유비가 황제가 돼서 3년밖에 못산다는 걸 알고(과거 연극의 제갈량은 도사로도 표현되었다) 망설이지만, 유비의 아들이 있다는걸 알고 따라나서기로 한다. 근데 그 놈이 자기 발목 잡을 줄은 몰랐겠지 [63] 원래 이름은 제갈일소(諸葛一蘇). [64] 《初學記》[65]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9권 경기(京畿)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66] 《太平御覽 卷156 註》[67] 《太平御覽 卷156 吳錄》[68] 《新唐書 卷59 藝文志》[69] 《한서(漢書)》 권40 장량 열전(張良列傳), 《독사방흥기요(讀史方興紀要)》[70] 《元和郡縣志 劍閣道》[71] 《諸葛忠武書 卷8 法檢》[72] 《資治通鑑》,《漢丞相諸葛忠武侯傳》[73] 《奎章閣韓國本圖書解題 子部 天文, 算法類 天文》,《日省錄 正祖 19年 3月 16日》[74] 《小學 嘉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