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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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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에도 막부 말기의 정한론
2.1. 하야시 슌사이2.2. 하야시 시헤이 & 혼다 도시아키2.3. 사토 노부히로2.4. 요시다 쇼인2.5. 하시모토 사나이2.6. 이타쿠라 카츠키요2.7. 가쓰 가이슈
3. 메이지 유신 이후의 정한론
3.1. 사다 하쿠보3.2. 우에노 가기노리3.3. 이타가키 다이스케3.4. 후쿠자와 유키치3.5. 기도 다카요시
4. 평가


파일:external/www.chosun.com/200411080461_00.jpg

1. 개요[편집]

지금 천하의 정세는 각국이 분쟁하고 대소 강약이 서로 병탄하여, 갑(甲)이 일어나면 을(乙)이 쓰러져 성쇠(盛衰)가 엇갈리고 있다. 이때를 당하여 우리 일본은 동양의 바다 가운데 고립되어 2500여 년 간의 국풍(國風)에 익숙하여 아직 5대주 내부의 정세를 알지 못한다. 또 국력이 쇠잔하고 군비가 공허하고 인심이 게으르고 약하여 황국(皇國) 독립의 기개가 없다. 이를 알면서 고식적으로 세월을 보낸다면 몇 년을 지나지 못해 죽어 넘어지고 뒤집혀 망해 다른 나라에 예속될 것은 분명하다. 지금 이를 떨치고 일어나 우리나라로 하여금 각국과 같이 달려 천하에 독립시키고자 한다면 오직 전투하고 공격하고 정벌하여 해외로 건너가 먼저 구주 각국 사이에 종횡무진 활동하고 위력을 비교하여 이로써 마침내 천하만국 사이에 나란히 서는 길 밖에 없다. 지금 영국⋅프랑스⋅프러시아⋅러시아와 같은 각국은 서로 맞서 아직 힘을 중국⋅조선⋅만주에 미칠 여가가 없다. 이때에 우리 일본은 마땅히 그 틈을 타 중국⋅조선⋅만주로 건너가 이를 빼앗아 가져 이로써 구주 각국에 침입하는 기초를 세워야 한다.

- 『서남기전』제1책 상권1, 부록 제1장, 기리노 도시아키의 정한론에 관한


단어 그대로 한반도를 정벌하여 일본의 국력을 배양하자는 주장. 좁게는 메이지 6년의 정변 일련 과정을 뜻하며 넓게는 에도 막부 이래 일본에서 나타난 조선멸시사상과 막말유신초의 무력으로 조선 정벌하는 주장을 뜻한다.[1]

참고로 현대어에서 정벌(征伐), 정복(征服),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단어에서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이미지가 있지만, 일본어에서는 '바른 것(正)을 행(行)한다'는 뜻으로, 멀게는 일본서기에서 부터 에도 시대까지 반드시 무력을 동원하는 뜻은 아니다.

한반도로의 군사적 진출은 일본 역사 내내 꾸준히 논의되었지만[2] 진지하고 구체적인 과제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에도 막부 중기에서부터, 메이지 유신에 접어든 19세기부터이다. 이때부터 소위 정한론이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한반도의 개혁과 보호라는 미명아래 한국 침략의 발판으로 삼은 주장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은 아래에 후술할 조선의 통상요구 거부가 정한론과 메이지 6년의 정변이 발생된 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는 에도 시대 말기부터 성립된 오래된 이야기며, 더 나아가면 임진왜란에 이를 정도로 뿌리가 깊은 이야기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

2. 에도 막부 말기의 정한론[편집]

2.1. 하야시 슌사이[편집]

막부 말기, 일본의 국력 배양을 위하여 한반도를 점령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당시 하야시 슌사이(林春斎)는 한반도는 "일본의 신화에서 나오는 신인 스사노오노미코토가 경력한 곳으로 이 신이 삼한의 조상"이라고 주장하였다.

2.2. 하야시 시헤이 & 혼다 도시아키[편집]

1785년 삼국통람도설을 저술한 하야시 시헤이(林子平)와 혼다 도시아키(本多利明)는 그 책에서 한반도와 류큐왕국이 일본의 국가 방위에 깊은 관계가 있다 주장하며, 국방의 강화와 팽창주의 정책만이 국가 이익을 위한 길이라 주장하였다.

2.3. 사토 노부히로[편집]

19세기에 들어 국방논의가 더욱 활발해지면서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가 제시한 청나라 침공 구상 가운데, 대총과 화전을 내세워 함경, 강원, 경상, 충청 지역으로 공격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2.4. 요시다 쇼인[편집]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1854년 유수록을 통해 양이들이 일본을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베리아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해야 한다 주장하며, 조선에 대해서 과거 한반도는 일본의 속국[3]이었기 때문에 이를 다시 정복하여 복속시키는 게 옳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서양과의 불평등 조약을 잘 지켜 일단 그들의 신임을 얻어 서둘러 근대화를 하고, 불평등조약으로 입은 손해는 조선과 중국을 쳐서 보충하면 된다는 주장도 했다. 다만 전면적인 식민지화 등의 주장까지 하지는 않았고, 제압하여 인질과 조공을 바치게 하자는 식이었다.

2.5. 하시모토 사나이[편집]

1857년 일본도 서양의 국가동맹체를 모방하여, 한반도와 중국을 병합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우선 한반도와 만주의 병합을 촉구하였다.

2.6. 이타쿠라 카츠키요[편집]

막부 고관이었던 이타쿠라 카츠키요는 사츠마, 초슈세력의 반발에 따른 일본내 체제위기를 막기 위해 중국 태평천국의 난을 틈타, 중국과 한반도의 공격을 제안하였다.

2.7. 가쓰 가이슈[편집]

후일 사쓰마와 조슈를 도와 메이지 유신에 협력하게 된 가쓰 가이슈 역시 유럽인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선 한반도를 설득한 뒤, 응하지 않으면 정복해야 한다 주장했다.

원래 가이슈는 일본을 중심으로 조선, 청나라가 연대해야 한다는 아시아 연대론자였다. 하지만 해군 건설을 지원해주던 아네가코지 긴토모가 암살당하자 해군 건설에 대한 지원을 받기 위해 정한론을 주장한다. 이후 청일전쟁과 조선합병에 반대하였으며 을미사변 때 무츠 무네미츠에[4] 항의하는 서신을 보내 을미사변의 배후가 일본조정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가쓰 가이슈는 청일전쟁에 반대하거나 일본의 가속화되는 침략야욕을 탐탁치 않게 봤기 때문에 정한론 주장은 스폰을 얻어내기 위한 발언이라고 추정된다. 물론 가쓰가 아주 선량하기에 정한론을 반대한 건 아니다. 허나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는 중국-한국-일본의 삼각 경제 블록을 구성하는 것이 더 좋다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무력을 통한 정벌에는 의외였다고 볼 수 있다.

3. 메이지 유신 이후의 정한론[편집]

1868년 국서 거부 사건(서계 거부 사건)이 일어난 후 다시 이 이야기가 나온다. 이후 두 나라 모두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계속 결렬되다가 1875년에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다.

3.1. 사다 하쿠보[편집]

외무성의 관료로 1870년 조선에 외교사절로 파견되었다가 천황 운운의 기존과 다른 모습, 기선을 타고 온 것, 양복을 입고 단발을 한 것이 거슬린 조선에게 문전박대당하자 화난 채로 돌아와서 온 내각에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로비를 하고 다녔다.

3.2. 우에노 가기노리[편집]

1870년과 1873년에 잇달아 국서 접수가 거부되고 일본 사절이 문전박대당하자 무력으로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3. 이타가키 다이스케[편집]

명색이 일본의 민권 운동에 앞장선 사람이지만 1870년에는 열렬한 정한론자였다. 두루뭉술하게 조선관 단교 내진 무력으로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정도의 얘기가 오가던 일본 내에서 처음으로 대대급 병력으로 부산을 점령하고 조선을 개항시키자는 과격하면서도 자세한 주장을 일삼아 사이고 다카모리가 그를 뜯어말려야 했다.

3.4. 후쿠자와 유키치[편집]

정한론의 대표주자들 중 한 명이라는 주장이 있다. 문서를 참고하라.[5]

3.5. 기도 다카요시[편집]

1868년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뒤, 정부 고위직에 오른 기도는 메이지 신정부가 조선에 보낸 수교 요청이 거부당하자 '사절을 보내 그들의 무례를 묻고 그들이 만약 불복한다면 그 죄를 따져 한반도를 공격하여 세력을 신장하여야 한다'라는 주장을 하며 1870년 6월, 내각에 사절단 파견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측근이자 정한을 실행할 오무라 마스지로가 암살당하자 이 주장은 흐지부지되었다.

덧붙여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의 대표로 많이 인식되고 있으나, 실제 사이고가 정한론자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는 기도 다카요시 또한 마찬가지다. 오히려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서 단신으로 조선을 방문하려던 사이고를 가로막은 게 기도 다카요시다.

나무위키의 기도 다카요시 문서에서는 1871년에는 서양 여러 나라를 순방, 내치(內治)의 긴급성을 통감하여 정한론(征韓論)에 반대. 입헌정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다만 초창기에는 스승인 요시다 쇼인의 영향을 받아 정한론을 주장하였다고 설명된다. 정한론자 문서의 내용과 정반대되는 내용.
NHK 대하드라마 야에의 벚꽃에서는 정한론 주창자로 사가의 에토 신페이, 도사의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들고, (일단은) 반대파로 사쓰마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토모미(공가), 그리고 조슈 번을 든다. 그리고 그 중간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중재역으로 있었다고 나온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당장은 외교 활동을 유지하고 단기, 급진 형태의 정한론을 반대[6]했을 뿐 결국 다른 유신 인사와 마찬가지로 정한론 자체에는 찬성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4. 평가[편집]

이렇게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정한론이 여러 국가 요인에서 계속하여 주장되고 이를 실천하려고 한 것은 막부 말기에는 서양 세력이 침공하기 전에 일본을 키우겠다는 이야기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당시 일본은 서구의 불평등조약으로 반식민지의 위기에 있었으며 조선과 청나라 등 아시아 국가들과 평등한 외교관계를 만드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운요호 사건은 조선이 철저하게 서구식 외교관계를 거부하자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일본 내부사정 때문이다. 따라서 한마디로 말해 내 사정이 급하니 너네 집에 도둑질하러 간다는 것이다. 즉 당대 제국주의를 충실하게 실천한 것.

물론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붙인 사유는 왕정복고 후, 메이지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받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조선 정부가 자신들과 수교를 거부한 데 대한 분노가 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덴노가 권력을 되찾은 뒤 보내온 외교문서에 덴노라고 찍혀 있었는데 당시 조선은 역대 막부의 장군들을 일본 국왕으로 보고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공식 서한이 이전 형식과 다르게 불손하다는 사유로 메이지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다.

그러나 이건 틀리는 주장이다. 일본 내부에서 정변이 일어나건 말건 이웃나라인 조선과는 아무 상관없으며, 조선이 일본과 통상관계를 맺고 안 맺고는 조선이 결정하는 것이다. 정변이 일어나 외교 형식 등이 바뀌었다면 이를 알리고 우린 이러이러하게 바꾸고 싶은데 동의하냐고 묻는 등 합의를 하는 것은 근대식 조약에도 적용되는 외교 관례인데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무작정 우리가 바꾼 걸 받아들이라고만 하였다. 게다가 조선과 통상관계가 없다고 절박한 상황에 몰렸다는 것은 뒤집어서 생각하면 통상관계를 수립하자마자 조선을 침탈하겠다란 이야기니 애초에 일본은 평등한 관계에 입각하여 평등한 통상관계를 맺으려 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입각하여 불평등한 통상관계를 맺으려고 한 것이다. 즉 제국주의를 충실하게 실천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정한론은 그 시기와 방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일본의 주요 요인들이 모두 동감한 주장이었으며, 이 이론의 실천을 위해 억지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서 조선을 강제 개항한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다. 이로서 조선은 멸망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셈이 되고, 일본은 청일전쟁러일전쟁으로 조선에 관심을 가진 청나라와 러시아를 물리친 후, 경술국치를 일으켜서 기어이 조선을 강제로 식민지로 만들고 만다.

이 같은 침략 논리는 점점 확대돼서 다음 타겟이 중국으로 변경되었으며, 이는 만주사변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결국 이런 침략으로 인해 미국과 마찰이 생기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대실책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일본 제국은 모든 것을 잃고 패망하게 된다. 뿌린 대로 거둔 것이다.

그러므로 정한론은 내 사정이 어려우면 남을 공격해서 강도짓을 하겠다는 것을 적당히 둘러서 표현한 것에 불과한 이론이며, 동시에 침략의 연속으로 인해 결국 임자를 만나서 붕괴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시초라고 보면 된다. 물론 태평양 전쟁의 주원인은 그나마 이성이 있던 기존의 인사들이 군부 쿠데타로 몰락한 뒤 막가는 군부 세력이 주도한 게 크다.

메이지 6년에 일어난 정변에서 정한론은 겉으로 내세운 주장일 뿐 실은 조슈 번 출신과 비 조슈 번 출신들이 벌인 권력 다툼이라는 시각도 있다. 때문에 평소 스승인 요시다 쇼인의 제자로서 정한론을 주장한 기도가 정한에 반대하고, 정한론에 부정적이었던 사이고가 정한에 찬성하는 괴이한 사태가 일어난 것... 결국 메이지 6년에 일어난 정변에서 조슈 번 출신들이 승리를 거두었고 그들은 위에 설명했듯이 정한론에 따라 조선을 침략하였다.

[1] 사실 정한론의 정(征)자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치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여 일본 측 시각이 반영되고 있다고 해서 이를 침한론(侵韓論)으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2] 진구 황후를 제외한다면 최초의 기록은 쇼토쿠 태자 시기부터이고 쇼토쿠 태자도 부정한다면 8세기 중반부터다.[3] 물론 이 주장은 틀리지만 당시 일본은 내부적으로 한반도를 자신들의 속국이자 조공국이라고 선전하고-조선 통신사도 일본 내부적으로는 조공사절로 선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대등한 국가로 대우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주장의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4] 여담으로 무츠는 가쓰의 제자다.[5] 단 이 사람은 초기에는 일본이 한반도를 정복하는 것보다는 한반도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개화·개혁의 물결이 스스로 생기어 일본처럼 근대국가가 되는 것에 관심을 두었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이 틀어지자 정한론으로 갈아타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은 후쿠자와 유키치와 김옥균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진다. 일본 측에서는 친구이자 제자인 김옥균이 끔찍하게 죽은 것에 분노와 실망을 했다...고는 하지만 갑신정변 당시 일본이 보인 태도를 봐서는 영 못 미더운 견해다. 그나마 외국에서 욕 안먹는 몇 안되는 일본 위인이었는데 정한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실드치느라 일본인들이 꾸며낸 역사일 가능성이 높다.[6] 이런 방식으로 장기적이고 계획적인 조선 침략을 주장, 시행한 대표 인사가 이토 히로부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