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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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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박은옥과 함께 찍은 사진.

1. 개요2. 생애 및 디스코그래피
2.1. 출생 및 성장기2.2. 데뷔 - 시인의 마을2.3. 고난과 방황의 시기2.4. 복귀, 그리고 개안(開眼)의 시작2.5. 새 노래를 들고 광야로2.6. 아, 대한민국... 그리고 검열과의 전쟁2.7. 회한과 희망의 공존2.8. 침묵, 그리고 실향2.9. 시인의 귀환2.10. 2016년 11월 민중총궐기
3. 총평4. 여담5. 주요 곡 목록

1. 개요[편집]

노래하는 시인

대한민국의 원로 가수이자 사회 운동가, 싱어송라이터.


생년월일 : 1954년 10월 10일
출생 : 경기도 평택시[1] 팽성읍
데뷔 : 1978년
종교 : 불교(법명 : 한수)

한국의 피트 시거[2]

모든 것을 떠나 과거 이름만을 먹고살지 않고 지속적으로 신보를 내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는 국보급 포크 뮤지션이다. 우리한테 정태춘과 같은 '레알' 음악가가 있다는 것은 실로 행운이요, 축복이다.
임진모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ㅡ《시인의 마을》

'뮤지션 그리고 투사' 정태춘

대한민국가수이자, 시인. 우리 나라의 가요계를 논할 때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원로 가수 중 하나이다.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가요계의 거물. 이문세, 조용필 등의 올드 가수들과 더불어 지금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가수 중 하나이자, 사전심의 폐지운동을 주도하여 승리를 이끌어낸[3], 한국 가요계에서 음악의 사회참여적 측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인물. 또한 음악적 측면에서도 예전의 뭇 가수들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한국적인 멋이 듬뿍 들어간 노래와 서정적인 가사가 일품인 노래를 통해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었다. 지금도 정태춘을 '정태춘 선생님’, '정태춘 옹'이라고 높여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하나만으로 주변으로부터 얼마나 존경을 받는 인물인지 지레 짐작할 수 있다.

배우자로 박은옥 씨가 있다. 이쪽도 가수이자 사회 운동가이다.

2. 생애 및 디스코그래피[편집]

2.1. 출생 및 성장기[편집]

1954년 3월, 경기도 평택에서 평범한 농사꾼의 5남 3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포털사이트의 인물정보를 포함한 각종 공식 프로필에는 1954년 10월 10일 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대 흔했던 늦은 출생신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출생하여 자랐던 평택의 도두리(棹頭里)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위치한 곳으로 실제로 그 마을 사람들이 왕래하는 시장은 충청남도 아산시[4] 둔포(屯浦)면에 위치한 장이었다고 한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성장기를 모두 이 곳에서 보냈으므로, 이 성장기의 환경은 이후 그의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5]

평범한 시골의 가정이었지만, 악기를 접하고 취미로 삼을 수 있을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아주 빈농의 가정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생활에서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로, 미군부대를 다니던 큰 매형이 가지고 온 기타 때문이었다고 한다. 무료한 농촌 생활이니만큰 그와 그의 셋째 형은 틈만 나면 이 기타를 붙잡고 놀았는데, 얼마나 가지고 놀았으면 한 번 들은 노래의 멜로디를 기타로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 상태로 긴 시간 동안 많은 빈도로 악기를 가지고 놀아본 이들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코드나 주법의 체계적인 방법은 모르지만, 어찌어찌하면 이러한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다라는 걸 체득하는 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이걸 가지고 천재적인 재능을 어렸을 때부터 지녔느니 하는 건 오버일 수도 있다. 심지어 모차르트마저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그 아버지의 강요로 인한 피나는 연습 끝에 체화된 음악적 능력에 기반한 음악가라고 할 수도 있다.

여하튼 이 기타로 인해 음악에 높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평택중학교 때 바이올린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악기와 본인의 궁합이 우 좋았던 것으로 보여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바이올린을 계속 하며 음대에 진학할 꿈을 가지게 된다. 판단할 요소가 많진 않지만, 당시 정태춘의 모습은 소박한 시골에서 바이올린을 사랑하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내성적인 소년이 맞이한 첫번째 시련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그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연주할 수 있었던 학교의 현악반이 밴드부로 통합된 것이었다. 당연히 밴드부에서 현악기의 존재는 유명무실한 것으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자 했던 그가 느꼈던 절망감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이후의 진로가 통채로 날아가버린 암담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앞날이 불투명한 시골 청소년들의 루트인 무리지어 몰려 다니기, 흡연, 외박 등이었다. 비록 내성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희망 학생에서 시골의 불량 잉여로 전락해 버린 그였지만, 이 시기에도 버스에 낀 성에를 갖고 시를 지어 보일 만큼 감수성 하나만큼은 다른 잉여들과 다른 점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대학진학은 실패. 하지만 앞서 언급되었듯이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은 아니었고,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을 타의에 의해 좌절당해 방황하는 것을 보기 안스러웠는지 집안에서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30만원 가량의 바이올린까지 사서 그를 셋째 형이 있는 서울로 그를 보내어 을지로 3가에 있었던 서울음대에 레슨까지 받게 하며 재수생활을 하게 한다.
하지만 당시 그의 정신적, 심리적 상황은 외모에 대한 자학적인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잘 알지도 모르면서 헤르만 헤세쇼펜하우어를 탐독하고 죽음에 대해 항상 생각하면서 자신이 직접 제조한 독약을 항상 품에 품고 다니는 등 뒤늦게 찾아온 중2병(...)에 쩔어 있는 상태였다. 그는 입시 직전이던 1972년 10월 소위 10월 유신이 발표되지 마자 재수생활을 때려치고 귀향하는데, 이는 딱히 확고한 정치적, 사회적 신념에 찬 결의였다기 보다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염세적 자세가 임계점을 넘나들던 가운데 발생한 사회적 이슈가 발화점이 된 것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물심양면으로 신경써서 보냈던 어린 자식이 무작정 짐싸들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에서 반겨줄 리가 만무한 상황에서 그는 몇 번씩이나 무작정 집을 나가 전국을 방황하거나 목욕탕의 화부[6]로 일을 하는 등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는 고행을 한다. 다만, 이러한 경험은 당시에는 별다른 목적이 없는 그저 방황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시기에 그에게 축적된 감수성, 혹은 내재적인 사고들은 그의 음악적 세계에 중요한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보여진다.[7]

그러던 도중 그는 입대를 하게 되고, 군생활 가운데 그의 초기작들을 작곡하게 된다. 어찌보면 외적인 방황이 제한된 군생활이 그에게는 오히려 내재된 정서를 정리하여 음악으로 표출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제대한 1978년 6월, 그는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음악평론가 최경식[8]의 소개로 서라벌 레코드와 인연을 맺어 군생활 동안 정리한 곡들을 처음으로 음반으로 만들어 발표하게 된다.

2.2. 데뷔 - 시인의 마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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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1집, 시인의 마을


1집 타이틀 곡 '시인의 마을'

당시 여전히 대중문화 전체를 포크가 지배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발표된 그의 첫번 째 음반은 꽤나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그에게 나름대로 여유를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보면 뭔가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당대의 포크송들이 대부분 미국의 번안곡들을 포함하여 서양 중심적인 형태를 보인 것에 비해 정태춘의 음악은 기타를 베이스로 하는 포크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한국적인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가사에서 나타나는 미학적인 수준도 꽤나 대중들의 공감을 사는 것이어서 나름대로 싹수가 보이는 대중가수로 평가받았다.[9] 이 시기 같은 서라벌 레코드 소속 가수였던 박은옥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하게 되면서 적어도 외적으로는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1979년 MBC 신인가수상과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 부문상까지 수상하면서 '연예인'으로서도 성공을 거둔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 그의 향후 행보를 결정하게 되는 두 가지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 중 첫번째가 바로 한국공연윤리위원회가 시행한 음반사전심의제도[10]와의 만남이다. 그의 첫번째 음반의 대표곡인 '시인의 마을'을 포함하여 몇몇 곡들은 공윤에 의해 가사 변경을 권고(라고 쓰고 변경하지 않으면 음반 발매가 안되니 '명령'이라고 읽는다.)받게 되고 서라벌 레코드에 의해 가사를 수정하여 발표하게 되는데, 이제 갓 입봉한 신인 가수 입장에서 뭣도 모르니 시키는대로 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깊은 내면의 고민 끝에 만든 자신의 곡이 타인의 의지에 의해서, 그것도 합당하지도 않은 의견과 더불어 수정을 강요당하는 경험은 그에게 또다른 고민을 안겨준 듯 하다.

또한 이 시기의 그는 예나 지금이나 신인 연예인이 거칠 수 밖에 없는 방송국 출연을 통한 홍보에 나서게 되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지극히 고민을 가져다 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트레이닝복을 입고 '명랑운동회'에 나가 뛰고 구르고 실에 매달린 과자를 따먹거나 밀가루 범벅에 얼굴을 파묻고 찹쌀떡을 먹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러한 고민이 그저 내면의 고민으로 끝나지는 않는 법, 그는 방송국 관계자들로부터 신인 주제에 건방지고 뻣뻣한 놈으로 인식되었고 자연스럽게 기피 대상이 된다.

2.3. 고난과 방황의 시기[편집]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두 번째 음반을 준비하게 되는데, 첫 음반의 성공을 지켜본 서라벌 레코드는 그에게 선곡의 권한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대중적 성공에 있어서는 패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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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2집,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

정태춘의 2집은 음악적 수준 그 자체로는 실패작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대중적으로는 실패작이었다. '사망부가'나 '탁발승의 새벽노래' 등의 수록곡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정서적인 특색이 더욱 강조되고 깊이가 있는 것이었으나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더구나 방송국 관계자들에게는 뻣뻣하고 싸가지 없으며 어딘가 불순한 놈으로 인식된 상황에서 음반의 성공은 요원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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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3집, 우네

2집의 실패에 이어 3집의 결과는 더욱 비참했고 시장에 음반이 제대로 깔리지도 못하게 된다. 3집의 노래들 역시 정태춘 특유의 정서는 더욱 강조되었고, 반주 중 상당수를 국악으로 하는 등 실험적인 요소도 많았던 음반이다. 하지만, 결과는 대 실패. 연이은 음반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는 경제적으로도 꽤나 궁지에 몰리게 된다. 저작권에 따른 수입 체계나 음반 유통의 정확한 통계에 따른 인세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 대중음악인들의 수입 체계는 꽤나 허술해서, 레코드사에서 계약금조로 주는 돈에다가 월급조로 주어지는 생활비가 일종의 음반과 공연에 대한 정산이었던 셈인데, 이 시기 이러한 생활비 지급이 중단된다. 음반사의 경영난이라는 핑계가 따라왔지만 그야말로 핑계일 뿐, 누가 봐도 저조한 흥행에 대한 당연한 댓가였다.

1980년대 초반의 이 시기는 그의 음악활동 기간 중 가장 방황이 심했던 시기였다. 연이은 음반의 실패로 인한 경제적 곤궁함, 결혼을 하고 자녀까지 낳아 기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연예인'이 아닌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등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이 때 손을 내민 것은 당시 메이저 레코드사 중 하나였던 지구레코드. 지구레코드가 제시한 조건은 4년 전속 계약으로 800만원이었다.

2.4. 복귀, 그리고 개안(開眼)의 시작[편집]


이 계약으로 인해 1984년 4번째 음반인 '떠나가는 배'가 발매된다. 이 때부터 그의 음반은 정태춘이 아니라 '정태춘, 박은옥'의 부부 듀엣의 이름으로 발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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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떠나가는 배


타이틀 곡 '떠나가는 배'

이 4번째 음반은 나름대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다. 비록 방송 출연 등의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곤궁한 이전 시절의 경제적 고난은 겪지 않았어도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정확한 판매량 측정에 따른 인세 개념은 없었던 시기였지만 음반사로부터 계약금 외의 수입이 발생하여 가계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1985년 연이어 발매된 '북한강에서' 역시 나름대로의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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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북한강에서


타이틀 곡 '북한강에서'

비록 대중음악인으로서,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회생했지만 그가 가졌던 고민과 의문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그의 내면에 남아있었다. 그는 이러한 고민과 의문을 풀어나가는 방향으로 전국적인 공연을 시작한다.

그의 전국 공연은 현재와 같은 소위 '콘서트'의 형태는 아니었다. 그는 대규모 공연 스탭과 물량을 동원할 수준의 가수는 아니었고, 1985년 1월 부산 카톨릭회관에서 시작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이어진 그의 공연은 대부분 소극장 내지 대학의 강당 수준에서 벌어지는 공연이었다. 다만, 이는 어떠한 지향점을 가졌던 것이라기 보다는 그저 현실적인 형편에 의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소규모의 공연은 그에게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다 준다. 사실 그는 상당히 애매한 수준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의문과 고민을 가지고 젊은 시절의 방황에 가까운 형태로 공연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러한 소규모의 공연장에서 대중과 가깝게 접촉하면서 이전과 대비하여 비교적 체계적인 형태의 '개안(開眼)'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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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발췌곡집

1987년, 그동안의 노래들을 정리한 발췌곡집 음반을 낸 후 1988년 연이어 6집 음반이라고 할 수 있는 '무진 새노래'를 발표한다.

2.5. 새 노래를 들고 광야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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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무진 새 노래


10번 트랙 '얘기2'

'무진 새 노래'에 실린 노래들은 공연을 통해서 실연된 노래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단순히 전통적 음악기법과 처연한 정서 중심이었던 기존 노래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더 진지하고 구체적인 메시지들을 담고 있었다. 당연히 공윤과의 갈등은 더욱 깊어질 수 밖에 없었고 그는 이를 통해 무언가 구체적인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사실, 이 음반은 당시 공윤의 기준으로는 발매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절이어서 가사 수정 명령에 그쳤다고 봐야 한다.[11]

그는 1988년 겨울, 청계피복노조 주최의 작은 집회에 참가하여 노래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집회와 대학가의 초대 손님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88년 12월부터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라는 공연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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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는 단편적인 노래가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주제를 가진 노래극 형태의 공연이었고, 당시 제도권 대중음악계에서는 시도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당대 사회적인 시류, 특히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들의 정서와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인생과 음악생활을 통해 지속적으로 견지해 온 그의 음악적 특성은 당시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재발견의 노력, 혹은 서구, 특히 미국 중심의 대중문화에 대한 반발적인 정서와 적절하게 들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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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국의 모든 대학에는 소위 '제국주의 문화'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운동권과 연계된 탈춤, 풍물 동아리, 전통문화연구 동아리 등이 존재했었고 이들이 대학을 다니는 20대 초중반의 청년문화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국을 돌며 벌어지는 정태춘의 공연은 입소문을 타고 온 대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만, 정태춘의 입장에서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그들에 의해 자신이 눈을 뜨게 되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음반을 발표하고 방송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대중을 만났던 그에게 젊은 대중들과 만나면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세상의 이야기, 탁치니 억하고 죽은 이에 대한 이야기와 공연장 밖에서 날마다 휘날리는 매캐한 최루탄 냄새의 구체적인 이유 등을 듣게 되는 기회였던 셈이다. 1989년 4월까지 이어진 이 공연을 통해 그는 비로소 그의 음악적 지향점의 기초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불법음반의 제작을 통해 공윤과의 본격적인 대결에 나선다.

2.6. 아, 대한민국... 그리고 검열과의 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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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태춘, 아, 대한민국...

1990년 발매(?)된 '아, 대한민국...'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제작되어 배포된다. 단, 당대의 법률 체계를 거부한 음반이므로 공식적인 유통 경로를 거쳐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공연장과 대학가를 중심으로 판매되었다.[13][14] 당시 정부와 여당은 기존의 '음반에 관한 법률'을 폐지하고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을 새로 상정하여 1991년 2월 8일 국회 본회의를 거쳐 발효시킨다. 정태춘은 1991년 1월 29일 구성된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개악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이 사전검열 제도와의 전면전에 돌입한다.

'아, 대한민국...' 음반의 가장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음악에 대한 사전검열이라는 제도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저항을 시작한 최초의 음반이라는 점이다.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한 사전검열제도는 당시 음악을 하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수 대중에게도 그냥 쓸데없는 제도에 불과했다. 물론 사회를 획일화된 정서와 문화로 줄세우기를 원하는 보수적인 이들도 여전히 존재했지만, 예술에 특정한 잣대를 들이대어 획일화시키는 작업은 적어도 9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었다.

또한 이 음반은 한국 음악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이 음반은 당시 대중가요계와 민중가요계, 즉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소위 '운동권 가요'를 제작하고 배포하는 이들에게 동시에 충공깽을 선사했다. 이 음반의 노래들은 정태춘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인 정서를 기반으로 하되, 담겨진 메시지는 강렬했다. 어떤 이에게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통쾌한 메시지였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천재적인 풍자시로 추앙되었다. 당시까지 대중가요계에 형식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소속되어 있던 음악가 중에서 이정도 수준으로 저항적인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제시한 이는 전무후무했다. 또한 민중가요의 측면에서는 예술적 수준의 격을 몇 차원 넘어서는 노래들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시 민중가요계의 메이저였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나 '꽂다지' 등의 이들도 민중가요 자체가 가지는 한계, 즉 메시지의 전달성을 강조함에 따라 희생되는 예술적 수준의 저하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거나 그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즉,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려지고 유통되던 노래들은 집회를 위한, 혹은 운동권에 참여하는 이들의 정신적 고취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메시지 전달과 대중의 인식 개선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노래들이 대개 그렇듯이 예술성의 수준은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가사는 지나치게 직설적이었고 일반 대중이 향유하는 언어와 동떨어진 그들만의 어휘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그 가사에 붙여지는 멜로디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저항하는 대상이 선호하는 군가나 행진곡 풍이 많았다. 심지어 어떤 민중가요들은 그 의미에 맞지 않게 일본 군가들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요나누키 음계'를 기반으로 한 것들도 존재했던 지경이었다. 어찌보면 그 창작자들 중 상당수가 음악을 전공한 프로페셔널 음악가가 아니라 조금 높은 수준의 관심 및 재능을 가진 대학생들 내지는 젊은이들이었을 뿐이니 당연한 결과이긴 하지만, 그런 가운데 등장한 정태춘의 노래들은 음악적 수준에서도 메시지의 질적 수준에서도 넘사벽의 수준이었던 것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특히, 그가 음악 활동을 통해 일관적으로 견지해 온 전통적 요소들은 형이상학적 수준의 이념적 지향, 혹은 이상적 지향에 따라 도입했던 어설픈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에 기반하여 체화된 것이었기에 고작 대학 생활 동안 탈춤 몇 번 추고 풍물 공연 몇 번 하고 졸업한 뒤 대부분 일반 직장인이 되어 다시는 그러한 문화와 접할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대학생 창작가들의 창작물과는 격이 달랐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물론 이 음반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도 존재한다. 그 비판들은 대부분 그와 그의 음악이 가지는 대중가요와 민중가요의 경계선, 혹은 여집합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음반은 다수 대중이 선호하는 것과는 멀어져 선동적 메시지들을 담은 또다른 운동권 가요에 불과하다는 대중가요 측면에서의 비판과 그 비판의 내용과는 역설적이게도 메시지가 직접적이지 못하고 정서에 호소하는 지나치게 감성적인 곡들이 많다는 점, 다시말해 운동권 집회에 적절하지 못하다는 민중가요 측면에서의 비판이 동시에 존재했다. 전자의 경우에는 당대의 격렬했던 정치, 사회적 흐름과 전혀 관계없는 듯이 아무런 책임감도 의무감도 느끼지 못하고 사랑타령이나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후자의 경우에는 그들이 저항했던 대상들과 방향만 다를 뿐 똑같이 획일화된 사고와 태도를 가졌다는 점에서 비판의 정당성이 상당히 결여된다라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이 음반이 당시 법률로 불법으로 규정된 채 발매됨으로써 그의 디스코그래피는 다소 난해해지기 시작한다. 1996년 정식발매시 이 음반은 '정태춘 5'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발매하였는데, 이 5라는 숫자가 참으로 애매모호한 순서였다. 발췌곡집 등의 컴필레이션 성격의 음반을 제외한 정규음반으로 따지면 이 음반은 7집이 되는 것이 맞다.[15] 하지만 앞서 발매된 6장의 앨범 중 박은옥과 함께 한 음반을 제외한 순수 정태춘 홀로의 음반을 따진다면 이 음반은 4번째 음반이 된다. 따라서 이 음반에 왜 '5'라는 숫자가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근거가 애매모호하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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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92 장마, 종로에서


타이틀곡 '92 장마, 종로에서', 대구MBC 텔레콘서트 '자유'에서

1993년 발매된 '92 장마, 종로에서' 역시 중요한 의미들을 가진다. 우선 예술적 관점에서 이 음반은 정태춘이 그동안 쌓아오던 정서와 메시지들이 한 마디로 '익을대로 익은' 결과물이었다. 당시 시대상황도 상황이었으나 이전의 '아, 대한민국...'의 경우 다소 투박하고 거친 면이 많았는데, 이 앨범에 와서는 조금 더 정제되고 절제된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다소 독특한 것은 그동안 지향해오던 전통적인 분위기, 혹은 농촌에 기반한 정서가 많이 누그러진 반면, 도시적인 분위기가 더욱 가미되었다는 것이다. 앨범 재킷 또한 종로를 배경으로 촬영되었고 전통 악기의 사용의 빈도 역시 줄어들었다.

이 앨범을 관통하는 전반적인 정서는 '회한'의 성격이 강했는데, 이는 이 앨범의 내용들이 당시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1991년 연쇄 분신 파동 이후 한국 사회는 한차례의 가두 투쟁이 실패로 끝났고,[17] 사람들은 그저 한차례 몸살을 앓은것 마냥 민주화의 과정을 과거의 것으로 치부하게 된다. 이는 고스란히 사회의 보수화로 이어진다. 1993년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은 야권, 혹은 민주화 세력의 한 축이었던 김영삼이 전격적으로 노태우, 김종필과 3당 합당을 거친 후 대통령 후보가 되어 김대중과 대결한 제 14대 대선에서 승리한 상황으로, 80년대 중반부터 민주화를 열망하며 정권교체를 희망하던 이들에게 엄청난 상실감을 주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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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풍경, 박재동, 1992년 12월 19일 한겨례 그림판

당시 상황을 만평으로 잘 요약해 주는 것이 대선 직후 박재동 화백이 한계레 신문에 기고한 위의 만평인데, 당시 운동권, 혹은 진보진영의 이들이 느꼈던 상실감을 잘 표현해주고 있고, 정태춘의 앨범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으며, 운동권은 점차 지리멸렬해져갔다. 80년대 중후반과 90년대 초반을 거쳐 저항하던 학생들은 이미 대부분 사회인이 되어 바빠지기 시작했고, 소위 '민중문화계'의 핵심인사들도 뿔뿔이 흩어지던 시대였다. 정태춘을 위시한 많은 이들에게 이 시기는 패배의 시기였고 절망의 시기였으며, 반성의 차원을 넘어 회환을 느끼는 시기였다.


6번 트랙 '사람들'

이 앨범에 수록된 '사람들'이라는 곡의 가사에서 이러한 정서가 잘 드러나 있으며, 타이틀 곡이라고 할 수 있는 '92 장마, 종로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희망을 얘기하고 있지만 회환의 정서가 주를 차지하고 있다.

이 앨범 역시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부하고 배포된다. 이 시기의 공윤에 의한 사전검열제와의 투쟁은 더더욱 본격적이 되는데, 단순히 심의를 거치지 않은 음반의 배포 및 판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연장과 집회를 통해 해당 내용을 홍보하고 사인 판매를 진행했으며, 관객들의 지지 서명까지 받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그는 1993년 11월 1일 문화체육부에 의해 서울지검에 고발당했으며 1994년 1월 25일에는 서울지방 검찰청에 의해 불구속 기소된다. 또 1993년 11월 5일에 방영한 KBS1 <노영심의 작은음악회>에서 정태춘과 박은옥 특집 에피소드를 기획하던 PD인 박해선 씨가 KBS에 의해 경고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정태춘의 기소는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한 사전검열에 대해 전 문화계가 집중하는 계기가 되는데, 기소된 바로 다음날인 1994년 1월 26일 민예총은 즉각 기소에 대해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많은 문화계 인사들이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변호사로는 천정배 변호사가 선임되어 재판이 진행된다. 1994년 3월 22일 시작된 1차 공판을 거쳐 1994년 4월 19일의 2차 공판에서는 해당 법률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이 있게 된다. 이 위헌심판제청은 1994년 5월 10일 있었던 3차 공판에서 위헌제청 결정 판결이 남에 따라 헌법재판소에 따른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에 대한 위헌 판단이 진행된다. 그러나 1995년 3월에 법무부는 정태춘의 위헌제청에 대해 "예술표현의 자유도 공공복리를 위해 제한할 수 있으며[18] 현행 사전심의제도와 공윤은 검열제도나 검열기구가 아니므로 정태춘의 위헌제청을 기각하여야 한다."고 요청했고, 문화체육부와 서울지방검찰청도 이와 비슷한 의견을 냈다.

1년이 넘게 진행된 이 위헌 심판은 1996년 10월 31일,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 일치로 위헌(94헌가6)으로 판정되어 해당 법률은 즉각 효력을 상실했고, 1996년 12월 31일 서울지법이 정태춘의 기소에 대해 선고유예를 판결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된다. 실질적으로 그가 5년이 넘게 투쟁해 온 결과인 사전검열제의 위헌 판결에 따른 폐지는 한국의 대중문화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담 내지는 해프닝에 불과한 일이지만, 이 위헌 판결의 주인공이 정태춘이 아니라 서태지로 잘못 알려진 일도 있었다. 위헌 판결 이전인 1995년, 공윤은 발매 예정이었던 서태지의 4집 수록곡인 '시대유감'의 가사에 대해 수정 권고를 했고, 이에 대해 서태지는 가사를 전면 삭제하고 연주곡으로 수록함으로써 공윤의 권고에 대해 다소 소극적인 저항을 한다. 이 내용에 대해 당시의 서태지 팬덤들은 자신들이 추종하는 가수가 부당한 권력과 투쟁한다는 것으로 과대하게 해석했고, 대중적 유명세에 따라 다수 언론에 해당 관련 기사들이 노출되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전검열제가 폐지되었으니 팬덤들 및 일반 대중들에게는 사전검열제의 주인공이 서태지로 여겨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소수이긴 하지만 정태춘의 팬덤들에게는 그저 소극적인 저항에 그친 행위일 뿐이고, 애초에 공윤에 심의를 진행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작은 반항을 한 이에게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기념비가 돌아간다는 점에서 심히 저항감을 가질만도 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태지 또한 사전검열제에 제한적인 형태이나마 저항의 표시를 함으로써 당시 한창이던 위헌 심판에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로 보인다.

<시대유감> 가사 삭제 외에도 저항의 표시가 또 하나 있었는데 4집 앨범 수록곡 <필승> 가사는 원래 공윤에 제출했던 가사와 다르다. 사전심의제 시절에는 앨범 발매 전에 공윤에 가사를 제출했는데, 공윤 제출본에는 없었던 빌어먹을이란 말이 앨범에 갑자기 추가되었던 것이다. 기사 이 때문에 공윤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4집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냈다. 그러나 이게 오히려 서태지 팬들을 자극해 사전심의폐지 운동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른 세계에서 활동하던 서태지와 정태춘이 진보 언론에서 같이 다뤄지게 된 것이다.

당시 이 위헌심판의 주인공인 정태춘 본인이 서태지의 대중적 위상에 따른 역할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볼 때, 이 해프닝은 그저 팬덤들에 의해 발생한 해프닝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1996년에 사전심의가 폐지된 이후로 공윤은 '등급분류'라는 이름으로 또다른 검열제를 만들어 표현의 자유를 제한했으나, 이후 2006년에 음비게법이 폐지되고 '음반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음반에 대한 유해성 여부는 청소년보호법에 따라 현재 청소년보호위원회가 맡고 있다.

2.7. 회한과 희망의 공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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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정동진/건너간다


6번 트랙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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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타이틀곡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1998년 2월에 발매된 '건너간다'와 2002년 11월에 발매된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19]는 이전 앨범인 '92 장마, 종로에서'가 가지는 정서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회한과 공존하는 희망'의 정서는 이전의 것과는 다소 다른 것이어서 단순히 민주화, 혹은 진보 세력의 패배에 의한 상실감과 그에 대한 극복이 아니라 당시 시대의 변화상에 따른 '회한과 희망'의 정서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중후반의 한국사회는 또다른 의미에서 파란만장한 시기여서, 전두환노태우가 사형선고를 받았고 김일성이 사망했으며, 연세대 사태로 인해 대학 운동권이 그야말로 박살난 가운데 이미 대학생들은 취업을 통해 기존 기득권층에 편입되기만을 희망하는 존재들로 전락했다.[20] X세대라는 그 누구도 모를 용어로 정의되는 이들과 오렌지족들이 생겨났고 소비가 미덕인 시대로 급격하게 전환되는 가운데, 양극화의 극단적인 부작용으로 지존파가 등장하고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그리고 이러한 다이내믹한 변화들은 IMF 사태로 귀결되어 한바탕 쓰나미가 지나간 듯 한국 사회 전체를 휩쓸었다.

그러므로 그의 노래들에 나타나는 회한들은 더더욱 깊게 침잠되었다. '92 장마, 종로에서'에 수록된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에 나오듯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 차량기지 마저 지나쳐 희망의 시대로 나아가고자 했던 그의 정서는 '건너간다'에 이르러서는 '다음 정거장은 어디'인지도 모르고 '이 버스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무표정하고 지친 이들을 싣고 '환멸의 90년대를 지나가'는 것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그 뒤에 오는 희망의 정서 또한 여전하여 그는 여전히 정동진에 떠오르는 '쌍무지개'와 '어둠 걷혀 깨는 새벽길 모퉁이를 돌아'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 차를 타고' 가는 것을 노래한다.

하지만, 그는 이 앨범을 끝으로 10년간 침묵하게 된다.

2.8. 침묵, 그리고 실향[편집]

정태춘은 제16대 대선을 1년여 앞둔 2001년 12월 발족한 '노문모(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의 창립멤버로 참여하며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지만, 선거를 앞두고 탈퇴했고 고민 끝에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다. 그는 노문모가 노무현이라는 후보 개인에 대한 지지만이 아니라, 그를 지원하고 견인할 어떤 세대의 세력화를 이루어내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문건으로 제출했고 토론도 했지만 많은 공감을 얻지 못했고 결국 그곳을 탈퇴했다.

김대중 정권 즈음 부터 그는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사적 변화에 맞서는 거대 담론이 필요하다는 현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90년대 이후 진보운동에서는 오히려 시민의 일상, 지역의 문제 같이 미시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편향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권력은 국가에서 시민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지만 그는 '권력은 국가에서 자본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민주화가 신자유주의 자본화로 이어지는 상황에 대한 그의 정확한 현실 인식은 함께하던 사람들에게서 거의 공감을 얻지 못했고, 결국 2002년 이후 일체 음악 작업과 사회 활동을 중단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21]

그는 경기도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 소위 '대추리 사태'에 적극 참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평택의 대추리 및 도두리 지역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이자 정신적, 음악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고, 당시 평택 일대의 다수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금전으로 치환될 수 없는 무언가였다. 하지만 정부와 국회는 미군과의 협상 및 국회 비준을 일사천리로 진행했고, 주민들 다수의 동의도 없이 토지를 강제수용했으며 2006년 초가 되지 파종한 논밭을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갈아 엎는 등의 행정집행을 강행했다. 2006년 5월 4일 새벽 4시 경찰 1만3천여명에 용역 직원 및 군병력까지 투입된 대추분교 철거 작전은 무자비하게 집행되었고 수백명의 부상자까지 속출시키는 그야말로 '사태'가 되었다. 정태춘은 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고 그 역시 다른 주민들과 함께 극렬히 저항했으나 결국 경찰에 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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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노무현의 사망 후 각종 추모 집회의 공연과 마지막 추모 문화제인 '잘 가오, 그대'의 총연출을 맡아 이미 사자(死者)가 되어버린 이와 화해를 하고, 2009년 30주년 기념 공연 등을 하긴 했지만, 새로운 앨범은 더이상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2.9. 시인의 귀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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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1번 트랙 '서울역 이씨'

2012년 1월, 근 10년의 침묵을 깨고 그의 새 앨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가 발매되었다. 새로운 앨범을 내지 않으려는 그를 돌아세운 건 다름아닌 아내이자 음악 파트너인 박은옥. 그녀의 말에 따르면 만난 이후 거의 싸우는 일이 없었던 이 부부는 이 앨범의 제작을 설득하고 거부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싸워댔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돌아세운 건 세상에 무언가 의미를 던지는 것만이 아니라 시야를 좀 좁혀서 그저 담담하게 노래를 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는 박은옥의 설득이었다.[22]

이전 앨범에서 10년이나 세월이 지났지만, 발표된 그의 곡들은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이미 환갑을 바라보는 그의 메시지는 이전과 비교해서 많이 유연해지기는 했지만, 음악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욱 더 날카롭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전에 비해 전반적인 사운드가 보다 차가워진 느낌을 주면서 그가 오랫동안 간직했던 전통적인 정서가 단순히 한국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제 3세계 음악까지 끌어안는 모습도 보여준다. 시작곡인 '서울역 이씨'에서는 여전히 낮은 인간 군상들에 대한 처연한 정서가 오히려 더욱 직설적으로 표현되고 있고, 신곡 중 마지막 곡인 '날자 오리배'에서는 암울한 현실을 박차고 날아올라 이상 세계를 향하는 모습이 표현되며, 마지막 곡이자 이 부부가 스스로에게 헌정하는 트랙인 '92 장마, 종로에서'는 이제는 환갑을 바라보는 부부가 다시 부르는 희망가라고 할 수 있다.

2.10. 2016년 11월 민중총궐기[편집]

2016년 11월 민중총궐기에서 오랜만에 공개석상에서 노래를 불렀다.

3. 총평[편집]

한국의 대중음악사와 사회운동사적으로 꽤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예술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정태춘을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우선 서구음악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현재까지도 서구음악 중심인 대중음악계에서 한국의 고유한 정서를 내포한 음악적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대중음악가 중 한 명이라는 점이다. 물론 국악이나 사물놀이 등의 요소를 차용하여 활용한 사례는 무수히 많으며 굳이 정태춘이라는 음악가 혼자서 그러한 위계를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태춘의 경우 그의 음악에 축적된 전통적인 요소와 정서가 교육과 훈련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출생과 성장, 인생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또한 그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뛰어든 여러 사회적 장면들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크로스오버의 음악과는 차별되는 점이 있다.
또한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당대의 사람들의 정서와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라는 면에서 그의 음악은 당대의 사람들과 사회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소통을 통해 만들어지고 향유된 것으로 음악사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의 음악이 끌어안은 정서는 언제나 주류가 아닌 소수 약자들의, 혹은 공공선을 지향하는 이들의 것이었고, 이와 유사한 것이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잘 찾아볼 수 없다는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포크라는 장르가 단순히 통기타 반주로 행해지는 어쿠스틱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상과 소통하는 장르라는 점에서 그는 김민기한대수로 시작된 이래 이미 고인이 된 김광석과 더불어 한국 포크계열의 정당한 상속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안치환이나 류금신, 권진원처럼 민중가요의 영역에서 입지를 굳혀 기존가요로 진출을 시도한 예는 더러 있지만 촉망받는 기성 가요계의 신인이었다가 노래하는 투사로의 방향전환은 정태춘이 유일하다.

음악사적인 맥락에서 떼어놓고 보더라도 정태춘은 최고 수준의 가수 중 한 명으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극도로 정제된 시적인 가사를 읊조리듯이, 푸념하듯이, 혹은 담담하게 소화하는 그의 가창력은 감수성을 담아낸다는 측면에서는 거의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4. 여담[편집]

  • 불교 신자로, 그의 곡들에서는 간간이 불교 용어들을 찾아볼 수 있다. 도솔천, 억겁, 중생, 해탈 등의 여러 불교 용어가 들어가 있다.

  • 슬하에 딸인 '정새난슬'이 있다. 일러스트레이터 작가로 YB밴드[23]의 앨범 재킷 등을 디자인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24] 2013년 4월 인디밴드 '럭스'[25]의 멤버인 '원종희'와 결혼했다가 2015년 이혼.

  • 공연 때 가사를 의외로 많이 틀린다.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한 곡의 가사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긴 곡이 많고(아, 대한민국이나 92년 장마 종로에서 수록된 대부분의 곡이 3절 혹은 4절까지 있으며 한 절의 분량도 상당하다.) 반복되는 부분도 적어 외우기가 무지 힘들다, 그래서 의외로 공연
    때 보면대를 앞에 두고 공연하는 경우도 많았다. 시적 산문이라고 불러야 될 정도로 기나길면서도 어색하지 않고 한국어의 맛을 자연스럽게 살리고 있는 가사들을 구사하는 아티스트인만큼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한 여름 밤' 같은 서정적인 곡만을 거론하더라도 불필요하거나 어색한 어휘가 하나도 없는 아름다운 한글 가사로 멜로디와 어울리며 정서를 표현하는 심오한 경지를 엿볼 수 있다(!).

5. 주요 곡 목록[편집]












* 2016년 11월 민중총궐기에서 92년 장마, 종로에서


[1] 당시는 평택군.[2] 미국의 전설적인 포크 뮤지션.[3] 사전심의 문제가 널리 주목받게 된 것은 서태지시대유감이 언론을 타면서 주의를 환기시킨 점이 있지만, 그 이전의 서슬퍼런 군부독재 시기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사전심의 문제를 비판하고 폐지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이는 바로 정태춘이다. 참고로 87년 민주화 이전까지는 수많은 뮤지션들이 검열의 칼 아래 금지곡 판정을 받고 음반을 내지 못하는 일이 잦았으나, 정태춘은 그에 정면으로 맞섰다.[4] 당시는 아산군.[5] 자작한 노래들 중 초기작들의 가사 내용과 이후 설명될 평택 미군부대 이전 반대 활동의 개인적 이유라고 할 수 있다.[6] 당시 대중목욕탕은 기름보일러나 가스보일러가 아니라 장작으로 불을 떼서 물을 데우는 방식으로, 목욕탕 화부는 증기기관차의 화부와 동일한 일을 하는 당시에도 3D중의 3D 업종이었다고 한다.[7] 1988년 발표된 '무진 새노래'에 실린 '얘기2'의 가사에 이 당시 그가 느꼈던 것들이 나름대로 잘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8]기독교방송 프로듀서이자 평론가로서 가수 최양숙의 친오빠이다. 정태춘 외에도 김민기이정선의 데뷔음반 제작에 도움을 주었다.[9] 이 시기는 트윈폴리오를 위시한 세시봉 일원들의 미국적 포크에 대한 열광의 시기를 지나 한대수라는 전무후무의 독특한 가수에 의해 대중의 수용도가 꽤나 넓어져 있던 시기인 것도 긍정적 요인이었다.[10] 음반에 관한 법률 제9조 및 10조.[11] 실제로 10번 트랙 '얘기2'를 들어보면 가사가 생략된 구절이 나온다. 3절 가사를 들어보면 '영웅이 부르는 노래와'라는 구절이 있는데 원곡의 가사는 '영웅이 부르는 압제의 노래와'이다. 자세히 들어보면 뭔가 그 부분이 생략되어 어색함을 알 수 있고, '압제의'라는 가사를 넣어보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초기 발매본에서는 '압제의'라는 가사를 생략하지 않은 채 발매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판 이후 제작판부터는 그 가사가 사라졌다. 결국 초판본 무진 새노래 앨범은 무지하게 희귀한 음반이 되어 버렸다.[12] 이 앨범 재킷은 당시 발매되었던 재킷의 형태가 아니다. 이 앨범 재킷은 1996년과 2003년에 재발매된 CD의 재킷이며 실제 앨범의 재킷은 이 이미지의 가운데에 있는 테이프 케이스 형태였다. 당시에는 아직 CD가 보편화되지 않았고, 불법으로 제작되는 앨범이제작사를 섭외하여 LP로 제작되기는 당연히 불가능하므로 당시 이 앨범의 대부분은 테이프 형태로 판매되었다.[13] 당시에는 대학마다 존재하는 소위 서점에서 운동권 계열 음반(정확히 말하면 복제 테이프)을 흔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14] 사실 한국의 음반 생산 체계가 지나치게 권위주의적 국가 통제 하에 있어서 그렇지 소련하고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바로 십수년전 영미권에서 인디라 불리는 생산방식과 다를바 없었다. 당시 인디밴드들도 자체 레이블을 만들어서 자체적으로 생산한 음반을 공연장과 소규모 레코드점에서 팔았다.[15] 실제로 포털사이트 등 여러 곳에서는 이 음반이 7집으로 규정되어 있다.[16]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4를 빼고 계산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17] 이 부분은 '92년 장마, 종로에서'에서 "다시는 시청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로 묘사된다.[18] 헌법 제37조 2항도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대한 유보를 언급하고 있다.[19] 이 앨범 재킷은 또다시 그의 팬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만드는데, '건너간다' 앨범의 재킷에는 7이라는 숫자가, 그 다음 앨범인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앨범의 재킷에는 '열 번째 앨범'이라는 문구가 떡하니 박혀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그의 앨범 순서를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카운트하는지 다시 한 번 혼돈에 빠트리게 만든 것이 사실이다.[20] 이 당시 그는 대학가 축제에 초청받아 축제에 참여한 대학생들의 모습을 본 뒤 공연을 보러온 대학생들을 향해 쓴소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계급화로 나뉘어 상위 계급이 기득권을 차지하는 인도에서 발생하여 수많은 사상자들을 만든 대형 열차사고의 주인공이 다름아닌 국가공무원 선발에서 하위 계급의 쿼터를 늘인 것에 분노한 브라만 계급 대학생들이었다는 것을 사례로 자주 들면서 당대의 대학생은 더이상 상아탑의 고귀한 지성인이 아니라 그저 기득권에 어떻게 하면 잘 편입될 수 있나만을 신경쓰는 찌질한 존재들로 전락했다라고 분노하는 모습이 당시 대학 축제에 초청받은 그의 모습이었다. 당연히 그는 이 시기 이후 대학 축제에 초청을 받아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21] 한겨레 인터뷰[22] 박은옥 :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 고독을 노래하고 싶다. 정태춘: 그 아픔과 슬픔, 고독의 원인을 노래하고 싶다[23] YB밴드의 당시 소속사는 '다음기획'으로 아버지인 정태춘과 같은 소속사였다.[24] 2003년 인터뷰에 따르면 에미넴을 좋아한다고 한다.[25] 카우치 사건의 그 럭스 맞다.[26] 정태춘의 데뷔작이기도 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가져다 준 노래인 동시에 그가 처음으로 검열의 가위질을 경험했던 노래이기도 하다. '우뚝 걸린 깃발 펄럭이며'는 '푸른 하늘 구름 흘러가며'로, '텅 빈 가슴'은 '부푼 가슴'으로, '벗들의 말발굽 소리'는 '자연의 생명의 소리''고독'과 '방황'은 '자연' '생명' 등으로 난도질되어 고쳐졌다.[27] 3집 '우네'에 실린 곡으로 불교적 색채가 강해 불교 음악으로 알려져 있으나 끝없이 방황하는 자신의 정서를 속세와 해탈 사이에서 고뇌하는 탁발승에 비유한 노래이다.[28] 4집 '떠나가는 배'의 수록곡이자 타이틀 곡으로 한동안 침체에 빠졌던 정태춘을 인지도에서나 경제적으로나 회생시킨 곡이라고 할 수 있다.[29] 역시 4집의 수록곡으로 남녀간의 애틋한 애정을 표현한 곡이어서 타이틀곡인 '떠나가는 배'보다 오히려 대중적인 사랑을 더 받은 곡들이다.[30] 5집의 수록곡들로 정태춘이 사회적 메시지를 노래에 담기 전 그의 내면적 정서를 순수하게 담은 마지막 노래들이라고 볼 수 있다. '떠나가는 배'의 연장선에 있는 곡들이며 어딘가로 떠나는 이의 처연한 정서, 죽음에 의한 이별과 떠남 등의 정서들을 느낄 수 있다.[31] 6집 '무진 새 노래'의 수록곡들로 부당한 현실로 어지러운 세상에 무기력하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이가를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정서를 잘 담고 있는 곡들이다.[32] 역시 '무진 새 노래'에 담겨진 곡으로 전통 북을 사용하여 한 때 대학가 풍물패들에 의해 자주 공연되었던 곡이기도 하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 대학에서 풍물을 경험했던 이들이라면 정태춘의 노래인지도 모르고 그저 구전 전통민요쯤으로 알고 불렀던 이들도 상당수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33] '아, 대한민국...' 앨범의 타이틀곡이자 대표곡으로 당시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난하며 절망하는 가사로 채워진 노래이다.[34] '아, 대한민국...' 앨범의 수록곡으로, 1990년 3월9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한 연립주택 지하방에서 일어난 화재로 인해 두 어린아이가 숨진 혜영 용철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이 사건은 영세민 맞벌이 부부가 아직 어린 남매가 바깥에 나갔다가 위험해질까봐 밥상을 차려둔 채 바깥에서 문을 걸어잠그고 출근했고, 방 안에서 두 남매가 불장난을 하다가 화재가 발생하여 빠져나오지 못하고 숨진 비극적인 사건으로 당시 도시노동자 가정의 심각하게 열악한 실태들이 드러나면서 전국적으로 크게 이슈가 되었다. 본 노래 역시 당시 상황을 어린 남매들의 시선으로 묘사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태춘이 직접 한 인트로의 나레이션은 당시 이 사건을 보도한 한겨레 신문기사를 낭독한 것이다.[35] '92 장마, 종로에서' 앨범의 3번 트랙. 입시의 압박에 의해 자살을 선택하는 학생들을 묘사한 노래이다. 가사에서는 직접적으로 입시경쟁에 시달리는 학생이 묘사되지 않는데, 이는 이 가사가 자살을 선택한 학생이 남긴 유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선택으로 자녀를 잃은 어머니가 이 유서를 정태춘, 박은옥 부부에게 보냈고 이 두 부부는 이 유서를 기반으로 이 노래를 만들었다. 정태춘은 전교조가 설립된 이후로 지속적으로 전교조의 활동에 동참했으며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그의 활동 중 상당수가 전교조 활동과 연관이 있다.[36] '92 장마, 종로에서' 앨범의 4번 트랙. 이 사회를 지하와 지상을 오가는 전철에 비유한 곡이다. 앨범이름이 종로에서니 아주 적절한 비유이다 정태춘의 노래에는 열차나 버스 등의 대중교통수단이 자주 등장하는데, 열차나 버스 등의 다수가 탑승하는 교통수단은 설국열차의 사례에서도 보이듯 굳이 정태춘 뿐만이 아니라 근대화 이후 전세계적으로 사회의 축소판으로 자주 활용되는 소재이기도 하다. 이 노래에서 그는 삶에 고단하여 지친 이들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열차 안의 '창백한 불및 아래 겹겹이 서로 몸부대끼며' 나아가는 곳이 결국에는 그 열차의 '다른 칸'에 불과하다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이 열차 전체가 모두를 데리고 '찬란한 햇빛 세상으로' 나아가는 희망을 노래한다.[37] '92 장마, 종로에서' 앨범의 6번 트랙. 80년대와 9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그와 연관된 이들의 이름과 함께 그 사람들의 근황과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묘사된 노래이다. 떠나가거나, 대기업 직원이 되거나, 여전하거나, 감옥에 가거나 하는 사람들이 담담하게 묘사된다.[38] '92 장마, 종로에서' 앨범의 7번 트랙. LA를 방문한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노래이다. 그는 해방 후 수십년 간 이상향으로 여겨지던 미국을 실제로 목격하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도로 바로 옆에서 원유가 샘솟는 곳에서 노숙자들과 실업자들이 동냥 그릇으로 동전을 구걸하고 사람들이 줄을 지어 수퍼마켓 옆의 공용 수도에서 식수를 받는 장면, 거리에 티끌 먼지 하나 없는 로데오 거리의 쇼윈도, 백인의 나라로 알고 찾아온 미국에서 잘 볼 수 없는 백인들, 밤거리에 울려 퍼지는 총성 등이 담담하게 묘사된다.[39] '92 장마, 종로에서' 앨범의 8번 트랙. 곽재구 시인의 '유곡나루'에 곡을 붙이고 후술된 마지막 부분은 정태춘 본인이 덧붙인 것이다. 6만엔의 비용으로 섬진강변의 은어잡이와 호텔에서의 매매춘으로 이어지는 3박 4일 간의 일본 관광객들의 여행에 대해 묘사한 노래이다. 풍자성이 매우 강한 노래이고, 마지막의 원래 가사는 '좇돼 부렀네'였으나 녹음 과정에서 '나나나나나'로 처리하였다. 어차피 심의를 거부한 '불법 음반'이었으니 해당 가사의 사용에는 별 무리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비속어의 사용이 노래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오히려 희석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 녹음에서는 제외하였다고 한다. 이 노래가 라이브로 불려질 경우에는 해당 가사를 실제로 부르는 경우도 꽤나 많이 목격되었다.[40] '92 장마, 종로에서' 앨범의 마지막 트랙이자 타이틀곡으로, 80년대와 90년대 초반의 뜨거웠던 열기,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허망한 현실과 패배에 대한 묘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희망을 찾는 그의 정서를 대표적으로 나타내주는 곡이다.[41] '건너간다' 앨범의 1번 트랙으로, 부부가 함께 찾은 정동진에서 보게 된 쌍무지개를 주제로 한 노래이다. 쌍무지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어떠한 희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공을 들인 편곡이 발견되는 노래이고 단순한 기타 반주만이 아니라 제 3세계 악기까지 포함한 다양한 악기로 조밀하게 편곡된 곡이어서 가사 내용과는 별개로 곡 자체의 구성이 다채롭다.[42] '건너간다' 앨범의 6번 트랙. 90년대가 저물면서 느끼는 상실감과 환멸을 담담하게 표현한 노래이다.[43]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앨범의 5번 트랙. 아마도 영등포 쯤에서 출발한 김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리어카를 끄는 할머니, 여의도 LG 현관 앞의 직원들, 테헤란로의 시위대, 문정동 로데오의 어린 연인들, 잠실 롯데월드에서 자이로드롭을 타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새로운 시대로, 21세기로 가는 길이 어디이며, 여길 나가는 길이 어디인지를 묻는 내용이다. 다소 코믹한 구성으로 가볍게 들을 수 있는 노래이지만, 희망의 시대라고 하던 21세기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희망의 시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이들에 대한 묘사여서 내용이 가볍지만은 않다.[44]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앨범의 마지막 트랙이자 타이틀곡. '92 장마, 종로에서'와 유사한 맥락의 노래이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다시 새벽길을 걸어 첫 차를 기다리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노래이다.[45]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앨범의 1번 트랙. 겨울날 차가운 계단에서 '예약도 티켓도 없이' '바코드도 없는 몸뚱이를 거기에다 두고' '고속전철을 타고 천국으로 떠나'가는 서울역의 노숙자를 묘사한 노래이다.[46]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앨범의 8번 트랙. 경주 보문호에서 사람들을 태우고 이륙하여 영종도 상공을 , 단둥 철교 상공을 지나 바이칼 호수와 에게 해(海), 탕카니카와 티티카카 호수에 이르는 여행을 묘사한다. 냉혹한 현실을 벗어나 이상적인 세계를 향해 날아가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