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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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초임)

초대 저우언라이

2대 화궈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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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2살의 청년기.

1920년 23살의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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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27살. 황푸군관학교에서.

1930년대 옌안 게릴라 시절. 풍성한 수염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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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49살의 중년기. 양조위

1954년 57살의 장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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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78살의 노년기. 사망하기 1년 전.

우리는 누에가 마지막 한 오라기의 실까지 토해내듯, 인민을 위해 공헌해야 한다.[1]

60여 년의 공직 생활에서 저우언라이보다도 더 강렬한 인상을 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 헨리 키신저


1. 개요2. 생애3. 대인4. 한국과의 관계5. 개인사6. 참고문헌7. 관련문서

1. 개요[편집]

周恩来 (Zhōu Ēnlái, 주은래[2] / 1898년 3월 5일 ~ 1976년 1월 8일)

20세기 중국의 정치가, 군인, 외교관. 40여년 동안 마오쩌둥을 보좌하고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발생한 중국의 혼란을 수습하며 중국 공산당의 2인자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오랫동안 무결점의 성인군자로서 높은 추앙을 받았고, 지금도 중국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지만 지금은 마오쩌둥의 곁을 지키며 한 정치적 악행들이 발굴되고 있어 학계에서는 평가가 예전보다 떨어지고 있다.

2. 생애[편집]

저우언라이/생애 문서 참조.

3. 대인[편집]

현대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 하나로 저우언라이가 꼽힌다. 오래 전에 사망하였음에도 흔히들 "저우 총리"라 부를 정도. 그는 청렴하여 평생 개인통장 하나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성격도 원만하고 관계를 조정하는 데 뛰어나서 동료들이 저지른 실책들을 훈훈하게 마무리하는 미담들이 많이 들려온다. 심지어는 상대방 측인 장제스의 여자 문제를 훈훈하게 마무리해주거나 전 왕조의 유산인 자금성을 지켜주기도 했다.

그의 청렴성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파키스탄 탁구 국가대표팀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국빈대접 차원에서 저우언라이가 자신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저우언라이가 무언가 걱정하는 듯 보이자 파키스탄 국가대표팀 선수가 저우언라이에게 "뭔가 문제라도 있으시냐"고 물었는데 저우언라이가 대답하길, "우리 집에 식기가 부족해서 말입니다. 이웃들에게 좀 빌려달라고 얘기해 뒀었는데, 늦어져서 걱정입니다." 즉 중국 총리의 사저에 기껏해야 수십 명 정도를 대접하는 데 필요한 식기조차 없었던 것.[3]

정치가로서는 평생 마오쩌둥과 함께 한 일생일대의 동지였다. 위에도 나왔지만 저우언라이는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을 초기에 모두 반대했고, 이후에도 계속 이런 정책적 과오들을 자신의 권한 내에서 또는 마오쩌둥이 노여워 하지 않는 안에서 최대한 완화시키려고 했다. 마오쩌둥의 카리스마가 화려한 언변과 날카로운 필력에 원천을 둔 것이었다면, 저우언라이는 조용하면서도 유연하고 포용력 있는 성품으로 좀처럼 적을 만들지 않는 카리스마를 가졌다. 내전 당시에도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 양 쪽으로부터 폭넓은 존경을 받았으며, 아직까지도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현대 중국 지도자 가운데 한 명. 심지어는 명재상의 대명사인 소하제갈량[4][5] 비교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이런저런 잘못들을 갖고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지만, 저우언라이를 비판하는 사람은 없다. 일각에서는 사당에 신의 한 명으로 모실 정도라고 하니 그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마오의 급진적인 잘못을 마오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권한으로 최대한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다만 그 당시 문혁의 피해가 너무 크다 보니 생사를 함께한 혁명동지들이 숙청당하는데도 총리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지켜만 봤던 그를 일부에선 방관자였다고 비판하기도 하며 이것이 저우언라이의 몇 안되는 비판점이다. 게다가 마오는 꼭 동지를 출당하거나 혹은 벌을 내릴 때 저우언라이를 통해 발표하도록 하여 책임을 떠밀었고, 저우언라이는 본의 아니게 이런 숙청 명령서에 가장 많이 사인을 하게 되었다. 류사오치의 경우도 출당발표를 저우언라이가 했을 정도. 허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면 그 역시 숙청의 굴레에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가 없었으면 홍위병중국의 모든 문화재를 박살내고 자금성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루는 황하가 범람해 현장에 긴급방문했는데 일하던 인부들이 총리의 지시가 어떻게 떨어질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때 저우가 한 말은 "여러분, 아무쪼록 의견을 내주세요." 인부들이 깜짝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우리들은 주 총리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고 판에 박힌 인사를 하자 총리는 "우리는 모두 일가친척입니다. 환영할 필요는 없습니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문제는 '다리를 어떻게 하는가'입니다. 모두 다리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므로 경험도 풍부합니다. 나는 모두의 의견에 따라하고 싶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의 평상시 인품이 어떠한지 보여주는 대목. 실제로 이런 점은 덩샤오핑이 상당 부분 본받기도 했다.

대외적으론 대인의 면모를 많이 보였다. 중국 공산당이 보통 구 청나라 황족들에게 매우 비판적이고 적대적이었던데 반해 저우언라이는 그들에게 호의적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동정적이었다. 특히 청 황조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남동생인 애신각라 부걸과 그의 일본인 아내 사가 히로가 같이 중국에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였고, 그들의 장녀 혜생의 편지를 받고 사가 히로를 중국으로 초청한 사람 또한 저우언라이 총리였다. 중국과 일본은 적대국이었기 때문에 편지를 읽고도 그냥 무시하는 것이 오히려 상식적인 일이었지만, 그는 관대하게도 한 소녀의 편지를 읽고 청을 들어준 것이다. 옛 순친왕부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고 최고의 대우를 해준 것도, 문화대혁명 때 부걸의 집이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 고초를 겪자 경비병을 파견하여 그들을 지켜준 것도 모두 저우언라이 총리였다. 정말 대인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심지어는 일제 전범들에게도 인도주의적 관용을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아버지였던 천두슈는 1930년대 공산당을 탈당했고, 정통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불구대천 원쑤였던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했다가, 나중엔 아예 공산주의를 버렸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국공합작때 국민정부가 옮겨온 충칭에 머물 당시, 당시 국민당 감방에서 출소했던 천두슈가 병석에 눕자 병문안했고, 거금을 치료비로 건내기도 했다. (천두슈는 거절했다고) . 당시에도 천두슈가 옌안에 있던 마오쩌둥에게 "트로츠키파 배신자이자 잘못된 지도로 당을 구렁텅이로 이끈 무능력자"취급을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천두슈에 대한 대접은 상당히 대인배적인 것이었다.

1957년 전국인민대표회의 민족위원회가 주최한 민족공작좌담회에선 "우리는 대민족주의-특히 대한족주의-와 지방민족주의에 모두 반대한다. 반드시 민족 구역의 자치를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 민족의 역사발전과 경제발전, 혁명발전에 가장 부합하는 정책이다. 각 민족들은 완벽한 평등을 누리고 그 어떤 차별을 받아서도 안 된다."라고 말하며 배타적 민족주의와 편협한 대국 쇼비니즘을 질타하기도 했다. 지금 중국이 하는 짓거리를 본다면 저우언라이가 저승에서 땅을 칠 것이다.(...) 내몽골 인민혁명당 숙청 사건 때는 내몽골 자치구 정부주석을 맡고 있던 우란후를 지켜주기도 하였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을 성사시킨 헨리 키신저는 2012년 출간된 책에서 "나 자신이 살아오며 저우언라이만큼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인물은 없었다"고 그를 극찬했다. 닉슨 역시 자신이 방중했을 때 저우가 "내가 암에 걸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니, 내가 살아있을 때 빨리 미중 수교를 성사했으면 한다"는 말을 건네는 걸 보며 감동받았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인기가 많다. 황장엽의 회상에 따르면 소련과 중공이 북한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정작 원조의 양은 소련이 중공을 앞섰지만, 브레즈네프가 "이만큼 도움을 많이 해줬지 않느냐"라며 생색내고 툴툴거렸던 반면 저우언라이는 겸손하게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조중변계조약 때 북한에 양보를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종합해보면 웃음거리가 아닌, 말 그대로의 '대륙인'의 기상이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비판도 존재한다. 이례적으로, 달라이 라마는 "차라리 마오는 투박한 시골 사람 같은 면이 있는데, 저우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적을 만들지 않는 것뿐이며 실상은 부드러운 위선자"라고 비판한 바 있다. 영미권에서 야유조로 부르는 Chew and Lie라는 별명도 이와 같은 뜻이라 보면 될 것이다.

4. 한국과의 관계[편집]

장제스마오쩌둥, 쑨원이 그렇듯이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1919년 3.1 운동을 지켜보면서 조선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난카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연극을 공연했으며, 황푸군관학교에 재직하면서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친해졌고, 많은 조선인 제자를 두었다.

저우언라이의 대인적 풍모는 한국사에 대한 언급에서도 잘 드러난다. 발해-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던 중국사회과학원에 그러지 말라고 경고를 했으며, 그것에 대해 북한 파견단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요즘 중국인들의 병적인 국수주의를 보면 여러 모로 대조적이다. 이 문제를 다룬 신문기사# 또한 1962년 북한측이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기 위해 만주 지역에서 발굴조사를 한다고 했을 때 이를 허락하기도 했다.

발해 - 고구려사 이외에도, 6.25 초반 김일성이 승승장구하며 우쭐해있을 때 미국이 개입할 것을 예상하고 김일성에게 이를 경고했다. 그러나 근자감에 쩔어있던 김일성은 이를 듣지 않는다. 저우언라이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미리 중공군 26만을 국경에 배치시키고, 한반도 정찰을 명령해 베이징에서 있었던 전략회의에서 "더글라스 맥아더가 상륙한다면 군산이나 원산이 아닌 인천에 상륙할 가능성이 높다"고 정확히 예측한다. 군사전략적 안목까지 갖췄었다는 소리. 저우언라이 본인도 대장정, 중일전쟁, 국공내전에 참여했으며 강서 소비에트 시절, 국민당의 공세에 맞서 홍군의 총지도부를 운용해본 경험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저우언라이는 9.18 수복 이후 유엔군과 한국군이 계속 북진하자 미국에 여러 번 경고했다. "이 전쟁은 내전이므로 남조선군이 홀로 북진하는 것은 무방하나(즉 중국이 개입하지 않겠다), 미군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도발로 간주하겠고, 이후 모든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여러 번 경고했다. 결국 당시 중국의 참전 의사를 경시한 UN군이 그대로 북진하자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이란 미명하에 참전을 개시하게 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출병에 앞서 저우언라이는 마오와는 달리 한반도 출병에 반대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국가를 재건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출병하면 많은 자원이 그 쪽으로 전용되어 재건이 늦어지고,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꼭 이긴다는 보장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북한이 망하더라도 외교를 통해 미국의 중국 진공은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요지. 그러나 마오쩌둥과 펑더화이의 강경론이 득세했고, 결국 중공군 참전으로 이어진다. 결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속과 김씨왕조의 성립이지만 중국 입장에서야 베이징 코 앞에다 완충지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휴전협정을 먼저 제기하였다.

또한 정주영현대자동차의 은인(?)이기도 하다. 1974년 최종 타결된 중국-일본 간 무역협정에서 "남조선이나 타이완과 거래하는 일본기업의 중국 진출을 불허한다"는 내용이 들어간 4가지 원칙(저우 4원칙)을 강력하게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이 때문에 도요타와 합작관계가 끊긴 신진자동차가 도산하면서 현대자동차가 그 반사이익을 누린 것. 현대자동차는 미쓰비시와 합작하려 했으나, 미쓰비시가 이 원칙 때문에 현대와 합작을 포기했다. 지금 와서는 합작을 애걸하던 현대자동차가 미쓰비시보다 커졌으니, 격세지감.

잘 알려지지 않지만,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확장하는 조중변계조약에서 많은 양보(?)를 하여 백두산 전체가 아닌 반만 가져갔다. 함경도까지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중국의 관점에선 넘겨주었다고 해도 어색한 표현은 아니다. 자세한 건 백두산 항목 참조. 그래서 중국에서 한동안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홍위병도 이를 들어 저우언라이를 비난했다.

또한 '깐수 사건'으로 유명한 정수일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 본래 중국 조선족 출신인 정수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실망해서 북한으로 귀화하는 것을 결심하였다. 이 때 정수일은 그냥 망명하는 게 아니라 저우언라이에게 직접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정수일과 같은 인재가 중국을 떠나겠다고 하자 대단히 아쉬워하면서 "좋은 여성을 소개해 줄테니 중국에 남아 달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정수일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고 귀화를 직접 허락해주었다고. 이 때 저우언라이가 신원 보증을 해 줘서 정수일은 북한에서도 숙청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5. 개인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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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덩잉차오.

여성편력이 복잡한 마오쩌둥에 비하면, 저우언라이는 훈훈한 인물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부터 동지이자 아내인 덩잉차오(邓颖超, 등영초. 1904.02.04~1992년.11.07)와 백년해로하여 가정적으로도 모범적인 면모를 보여줬다. 나이 차는 6살. 여자 문제로 시끄러운 중국 지도층들 중에서 드문 순정파였다.[6] 물론 이것에는 아내 덩잉차오의 능력도 한 몫 했다. 한 번은 저우언라이가 다른 귀부인들과 함께 있을 때가 있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쳐 저우언라이를 작살냈다고 한다.(...) 이후 비슷한 상황에서 이런 구타 행위가 두어 차례 있으니, 다음부터는 여자들이 저우언라이 근처에 갈 생각도 안 했다고.(...)

덩잉차오 역시 중국 공산당 창당시기부터 활동한 주요 인사로서 여성운동을 지도하며 주요 요직을 역임했다. 내전 이후 여권 신장과 특히 전족 폐지에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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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8월 8일 함께

이들은 대장정을 함께 완주해낸 부부이기도 하다.

덩잉차오 여사는 투쟁 기간 동안 건강을 해쳐 불임이 되었다. 출산 중 충격으로 인해 사산하고 자신은 불임이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자식을 얻지 못했으나, 조카나 다른 아이들을 대단히 사랑했다고 한다. 특히 내전 과정에서 희생된 혁명열사의 유자녀들을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키웠다고 한다. 오랜 국공내전 기간 동안 공산당은 희생된 간부들의 유자녀를 최대한 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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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함께

상하이에서 공산당원 부모가 체포, 처형된 후 거지생활을 하던 아이들을 구출하고 수천리 바깥 공산당 점령지구로 탈출시킨 사례도 있다. 덩잉차오를 중심으로 한 여성 간부들이 이런 고아들을 돌보았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과 그 후손들은 훗날 공산당 체제의 버팀목이 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3세대 지도부의 핵심이던 국무원 총리 리펑(이붕)이다. 근데 리펑은 저우언라이와 마찬가지로 2인자이긴 한데, 존경받는 양아버지와는 달리 중국에서 욕을 바가지로 먹는 인물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사람이 천안문 사태 당시 계엄령을 선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책 결정은 덩샤오핑이나 장쩌민, 양상쿤과 같은 원로들이 했지만 실제 수행은 이 사람이 했다. 당연히 '인민에게 총부리를 든 자' 등과 같은 욕을 들으며 엄청난 비난을 들었고 지지율도 바닥쳤지만 장쩌민의 비호로 총리직에는 남아 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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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8월 함께

사진에서 보면 항상 붙어다니고 있고, 서로에게 쓴 편지를 보면 낯간지러울 정도이다.
"오, 당신의 입술이 그립소. 그대에게 뜨거운 키스를!"[7]

6. 참고문헌[편집]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북스.

  • Zhou Enlai The Last Perfect Revolutionary, Gao Wenqian[8], Peter Rand, Lawrence R. Sullivan, PublicAffairs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러빈, 민음사.

  •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마오의 대기근,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권, 개혁과 개방, 조영남, 민음사.

  • 장칭 평전, 로스 테릴, 교양인.

  • 코민테른과 대장정, 오토 브라운, 일월서각.

  • 중국 혁명사, 서진영, 한울 아카데미.

7. 관련문서[편집]

7.1. 인물[편집]

7.1.1. 중국 공산당[편집]

7.1.2. 중국 국민당[편집]

7.1.3. 외국[편집]

7.2. 사건[편집]

[1] 저우언라이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자주 했던 말이라고 한다.[2]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중국 인명(人名)이 다 그렇듯 '주은래'와 '저우언라이' 두 호칭 모두가 흔히 쓰인다.[3] 이 일화는 저우언라이가 총리로 재임하던 당시 파키스탄의 관료였던 사람이 증언이다.[4]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제갈량을 전략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의 가장 큰 재능은 내정을 총괄하는 정치력이다. 만년 떠돌이 세력이었던 유비군이 형주와 촉에 정착하고 한중을 손에 넣어 중원을 노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제갈량의 정치력이 있었다. 실제로 유비가 죽기 전까지 제갈량은 전선에 나간 적이 없고 유비군의 내정을 담당했었다. 조조군의 순욱같은 포지션이었던 것.[5] 재밌게도 저우는 제갈량의 후출사표에 나온 '국궁진췌 사이후이'를 좌우명으로 삼았다.[6] 마오쩌둥은 말할 것도 없고, 장쩌민 같은 경우는 자기가 눈에 둔 유부녀 가수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으로 삼았다고 한다. 보시라이는 관계 맺은 여자만 100여명에 달한다는 루머성 기사까지 보도됐을 정도이다.[7] 실제 편지 내용이다.[8] 중국 공산당 중앙 문서고를 관리하던 역사가로, 저우언라이 관련 기밀자료들을 가지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가오원첸의 저우언라이 평전은 그런 기밀문서들을 바탕으로 나온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