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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북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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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2등 일본인조차 안되는 재일 한국인3. 재일 한국인을 둘러싼 각국의 이해관계4. 이송 문제5. 대한민국의 저지 시도와 실패6. '북송'7. 이들이 받은 차별8. 트리비아

1. 개요[편집]

在日僑胞 北送. 1959년 12월 부터 1984년까지 일본에 있는 재일 조선인들을 일본 정부북한, 조총련 등이 협조하여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적이나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북한으로 보내는 사업을 총칭하여 말한다. 그래서 재일조선인 북송사업(在日朝鮮人北送事業)이라고 하기도 한다.

2. 2등 일본인조차 안되는 재일 한국인[편집]

재일교포제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인 1944년에 200만에 달했다. 그러다가 독립이 이뤄지면서 상당수가 한반도로 귀국하고 약 60만 명이 남게 된다. 이들은 일본의 전후 베이비붐에 따른 자연증가와 6.25 전쟁 당시에 일본으로 피난간 한반도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늘어난다.

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이 재일 조선인들은 말 그대로 골치덩어리였는데,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인이라는 국적도 상실했는데, 이들이 일본에 있긴 하기에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먹여 살리기는 해야한다. 그렇다고 막상 추방하려하니까 이젠 각국정부가 안 받는다.[1] 일본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

따라서 6.25 전쟁 시 미국의 창고역할을 하면서 벌던 돈으로 일본은 고속발전을 이루었지만, 재일교포들은 그들만의 마을을 이루면서 빈곤하게 살아갔다. 일본에게는 2등국민, 아니 그 이하였던 샘이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수하기는 싫었기에, 우회적으로 적십자를 이용해서 어느 정도 전쟁이 가라앉은 1950년대 중반부터 재일 한국인들을 데려 가라고 계속 압박을 넣었다.

3. 재일 한국인을 둘러싼 각국의 이해관계[편집]

사실 일본은 한국에 재일교포를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재일 한국인 대부분의 고향이 남한이며, 미국의 입김이있는 만큼 어떻게든 한국을 선택하는 것이 부담이 적었을 것이라 추측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한일 수교 협상에서 재일 한국인의 영주권을 인정하라는 조항 등으로 일방적인 일본의 추방을 거부한다는 뜻을 내비쳤고 모두가 알다시피 1965년에 가서야 한일협정으로 국교를 정상화했었으니 미수교 상태였던 일본이 한국에 재일 한국인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북한이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가? 라고 한다면 역시 의문이 제기된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도토리 키재기였던 만큼[2] 재일 한국인을 받을 여건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라 할 것이다. 또한 1950년대의 북한은 일당 독재체제가 아니었다. 남로당파, 연안파, 갑산파 등 여러 파벌이 서로를 견제하던 시절이라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게다가 일단 북한은 미국과는다른 공산주의국가라는 것이 큰 장애물이었다.

결국 일본으로서는 역사적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이들에게 국적을 주거나 아니면 최소한 난민 대우라도 해야 했겠지만, 북한에서 1950년대 후반 8월 종파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김일성이 야심차게 추진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기간시설망 확충은 대규모의 인력이 필요한 것이었고, 이는 북한의 현 상황과 맞지 않던 것이다. 하지만, 그 행동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8월 종파사건과 함께 깔끔하게 숙청되면서 김일성은 막대한 인력을 끌어올 방법을 고민한다. 8월 종파사건으로 중국과의 갈등이 빚어졌고, 이에 북한 내에 주둔하던 중국군들이 모두 철수한데다가, 마침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싶었던 상황도 있기 때문에[3], 일본 정부와 교섭을 시작, 일본과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에 협상을 급물살을 타게된다.

4. 이송 문제[편집]

하지만, 이런 북한과 일본 사이에는 두가지 큰 장벽이 있었다.

하나는 그 국가간의 입장차이였다. 일본은 미일동맹으로 묶여 있는 자유주의진영이었으나, 북한은 중국과 동맹으로 묶여 있던 공산주의진영 국가였다는 점이다. 이를 간과하고 무리하게 추진했다가는 다른 나라들이 이를 걸고 넘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적십자를 중간에 끼워넣기로 한다.

일본은 적십자 위원회를 움직이기 위해서, 특사를 파견하고, 끊임없는 요청을 하면서, 재일한국인들의 북송을 추진하기 위한 실사단을 유치 하는 등, 적십자에 대한 전방위적인 홍보를 도모하였다. 북한역시 연일 대대적인 홍보를 하면서 북송 추진을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결국 적십자 위원회는 재일한국인이 원하는 인도적 귀향에 대해서 적십자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침을 세우게 되었다.[4][5]

하지만, 이를 넘더라도 일본에게는 한가지 큰 산이 남아있었다. 다름아닌, 대한민국이었다.

5. 대한민국의 저지 시도와 실패[편집]

1959년 1월에 일본 외무장관인 후지야마 아이이치로가 이 사업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언급하자 마자 대한민국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와중에 그나마 있는 외교역량을 총 가동하면서 막기 위해 노력했다. 배까지 수배했던 일본의 북송을 1차적으로 저지한 것도 대한민국이었으며[6], 일본의 재일 한국인 북송을 준선전포고로 간주한다는 통보까지 보내는 등 한국은 이를 막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했다.

그러나 한일이 동시에 재일교포 북송 문제를 미국에 청했을 때 일본은 미일동맹의 연장 협의를 통해서 미국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등 전방위적인 지원에 나선 반면 한국은 할 수 있었던 것이 없었고, 결국 미국은 한국의 입장을 감안해 공식적으로는 지지를 표하지 않되 실질적으로는 북송에 대해서 묵인하는 스텐스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미국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노력을 헛되이 만들게 되었고, 결국 일본과 북한은 북송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6. '북송'[편집]

일본은 북송에 앞서서 재일한국인들이 거주하는 장소에 폭격수준의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방문해서, 의료지원이라던가, 생활수준 등을 홍보하고, 이를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몇몇 어용작가들이 북한에 가서 쓴 소설[7] 시장에 출판되고, 각종 홍보 삐라들이 마을을 뒤엎었다. 이러한 선전에 속은 많은 재일한국인들이 북송을 선택했다. 당장 한글을 모르는 재일한국인, 일본인들이 한글을 새로 배우는 열풍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부수적인 효과도 나타났다.

그리고 1959년 12월 14일에 처음으로 북송 선박이 출발하였다. 북한은 체제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북송 비용을 자신들이 부담하였으며 만경봉호[8]와 니가타항은 북송의 상징으로 유명해졌다. 1959년에 시작된 북송은 1984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북송으로 93,340명이 북한으로 건너갔는데, 이중 최소 6,839명이 한반도 계통과 혼인하였거나 한일 혼혈으로 태어나 일본 국적을 얻은 일본인이었다. 특히나 재일교포의 대다수는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제주도, 전라도, 경상도 출신이라서 북한에 연고가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7. 이들이 받은 차별[편집]

결과적으로 북송을 선택한 이들은 거의 대부분 일본에 남아있는 이들이나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귀국한 이들보다 못한 비참한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순혈주의로 악명이 자자하던 북한에서는 재일교포조차 제3계급, 그러니까 노예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북한에서 이들은 "째포", "'반쪽발이"'라는 비칭으로 불리며 북한 특유의 계급사회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 김정은의 어머니인 고용희가 이런 북송 출신이다. 고용희 같은 경우엔 재일 조선인이었지만 일본인과 결혼하여 낳은 일본계 한국인 혼혈 자녀들은 피가 더럽다며 더 심한 차별을 받는다고 한다. 일본으로 간 탈북자들은 대부분 이런 한일혼혈들이다. 250명 정도 된다고 통계를 내고 있다. 재일 탈북자 인터뷰. 재일교포 북송으로 북한으로 넘어간 일본계들을 일본에서는 예전에 중국에 머물던 히키아게샤처럼 받아들이는데 일본 정부 차원에서 별다른 지원책은 힘들다고 한다. 민단이 지원해주는 정도.이 외에도 배우자를 따라 북한으로 건너갔던 일본인들은 더 힘들었다. 명문대 출신의 일본인 남편이 아내를 위해 함께 북한으로 갔다가 굶주림과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북한 노동당원에게 노리개가 되어 몸을 받는 지경에까지 몰려 탈북을 시도하다 가족과 함께 사살당했다는 비참한 사례도 존재한다.

요덕 수용소에서 나와 월남하여 조선일보 기자가 된 강철환의 저서 "수용소의 노래" 에 의하면 재일교포 출신인 그의 가족은 어느날 아무 이유 모르게 요덕 수용소로 끌려간다.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모두 제주도 출신으로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넘어가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조총련 간부까지 역임했다. 그런데 전혀 일본 내에서 공산주의 활동이 없던 한덕수(韓徳銖)[9]라는 자가 갑자기 의장에 임명 되었고, 나중에 이자가 교민들을 일일히 설득하여 지상낙원에 가자고 한다. 이에 강철환의 할머니가 가족들을 설득하여 아들, 딸, 손주, 손녀 다 끌고 북한에 갔다가 어느날 밤 갑자기 요덕 수용소로 끌려간다. 그런데 왜 끌려간지 그 이유는 끝까지 아무도 모른다. 흠좀무한 것은 요덕 수용소에 이처럼 재일교포 출신들이 하도 많아서 한 구역에 몰려서 함께 살았고 일본인 부인들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재일교포 중 상당수가 이렇게 어느날 갑자기 이렇게 수용소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 물론 이들은 수용소 내에서도 "째포"라는 비칭으로 불렸으며 그제서야 다같이 잘먹고 잘살자는 공산주의 이론이 다 거짓말임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집안에서는 철저히 일본말만 사용하였고 마을 주민들끼리도 일본어를 썼다. 상당수의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은 김일성 초상화에 절을 하라는 지시에 극심한 거부감을 느꼈다고 한다.

8. 트리비아[편집]

북한 정부는 이들을 더끌어 오길 바랐다. 그래서 그들이 겪고 있는 고초를 주면서도 일본에 사람들이 더욱더 갈 수 있도록 종용하는데 힘썼다.[10] 그리고 일본은 북한이 북송하는 중간에 만난 연례적인 적십자 회의에서 북한에 있는 재일한국인들이 일본을 방문할 수 있도록 연락을 하자는 북한의 제의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행동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설령 북한이 일본이 거절할 걸 뻔히 알면서 빈말로 제안한 거라 할지라도 일본이 제의에 찬성을 하면 북한이 제안을 실행하지 않을 경우 북한만 나쁜 나라가 되어 일본이 명분을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일본은 북한의 제의를 거부하였다.

북송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심사가 있었다. 통례적인 심사였으나, 몇몇 재일한국인들은 그 중간에 걸러지거나, 아니면 현명히 자진해서 포기하였다. 걸러진 경우는 병결이 대부분이었지만 북한 입장에서도 민주주의 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을 끌고 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이 통례적인 심사 속에서 북한은 북송희망자들에게 북한 입장에서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 특히 재일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들 중에 그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두고 가길 종용했다. 이런 과정 속에 많은 사람들이 북송을 포기당했다. 생각해보면 행운아들.

어떤 재일한국인 출신 탈북자는 맨 처음 대한민국으로 오길 희망했고, 대한민국 관계자와 이야기를 했으나, 대한민국 관계자들이 했던 말은 "그 당시에는 북한이 남한보다 살기 좋았으니, 북송하신 것 아닙니까?"였다고 한다. 한국정부가 해당 문제를 대일외교협상 카드로 사용한 과거 상황을 무시한 발언이며 게다가 북송 당시 9살이었고 부모 손에 이끌려 갔던 사람한테 이딴 소리를 한 거다. 그 나이에 그런 계산이 돌아가서 북한에 간다는 것이 말이 되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결국 이 사람은 일본이 받아주었다.

테사 모리스 스즈키 교수[11]가 이를 파헤쳤으며, 특히 그녀가 발간한 '북한행 엑서더스'에 이러한 사실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KBS 파노라마에서 북송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도 있다.

한국 정부는 재일교포 북송 사업을 막기 위해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연히 일본에 대한 테러 미수 사건이었기에 한국 정부는 오리발을 내밀었으나, 2009년 당시 공작 활동 중 사망했던 공작원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면서 사실상 인정해 버렸다. 그리고 재일교포 북송의 실상을 가지고 한국 정부에서는 어린이들에 대한 반공교육의 일환으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과 함께 쏠쏠하게 써먹었다. 여하튼 일본에 대한 테러 미수 사건으로 민단과 한국은 일본에서 이미지가 나빠졌고 조총련이 기세를 얻게 된다. 게다가 북송은 북송대로 바라만 보아야 하는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으로 북한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겨우 뒤집어진다.

[1] 사실 6.25 전쟁 때문에 바쁘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라도 나라가 너무 가난해서 그들을 받을 만한 처지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교정상화조차 되지 않았다.[2] 엄밀히 따지면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긴 했지만, 그래봤자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갔었다는 것은 똑같다.[3] 남한은 못 받아주는 상황이지만, 북한은 받아줄 수 있다는 식의 대대적인 선전부터 시작해서 일본이라는 메이저 국가와의 연락 구축도 가능하다는 두 가지 계산이 가능하다.[4] 사실 이 실사단의 방문과 맞춰서 재일한국인 몇십명이 일본 적십자위원회 밖에서 농성을 하였던 것이 컸다. 그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배삯도 줄테니 우리를 북한에 데려다 줘!"라는 것이었고, 이런 저런 조사를 하던 조사단의 입장에서도 이는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5] 다만, 농성하던 사람들의 주장이 "진짜 이들이 북한으로 가길 원했느냐?"하는 점에 대해서는 조금씩 의견이 엇갈린다. 이들이 어용단체인지, 실제로 가고 싶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당시 남한보다 북한이 조금 더 잘살았다는 점, 그리고 일본 정부가 재일한국인이 일본을 떠나도록,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합리적으로도 북한에 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6] 위에서 언급한 농성자들이 배를 수배해서 북한으로 갈려고 할 때, 선박회사를 압박해서 배 자체를 못가도록 하였다.[7] 위에서 불쏘시개 겸 소설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북한의 실상에 대해 제대로 된 내용이 하나도 없었고, 무슨 유토피아인 마냥 적어놓았던 것.[8] 참고로 만경봉호에는 재일교포뿐만 아니라 북한 공작원도 타고 숨어들어왔다. 이후 북한 공작원의 활동 의혹이 생기자 일본은 만경봉호의 입항 검색을 강화했다[9] 1973년 일본에서 일어난 '두 아이 납치 사건에 관여된 자이며 '조총련계의 왕'이라고 불렸던 자이다.[10] 심지어 일주일에 1,000명 옮기는 것을 1,500명으로 늘리도록 일본을 압박하기까지 했다.[11] 영국 출신에 호주로 국적을 옮기고 일본인 배우자를 둔 교수이다. 전공은 일본 사회・경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