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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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희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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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주연상

제11회
(1990년)

제12회
(1991년)

제13회
(1992년)

원미경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장미희
(사의 찬미)

강수연
(경마장 가는 길)


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파일:daejongawards.png

여우주연상

제21회
(1983년)

제22회
(1983년)

제23회
(1984년)

김보연
(꼬방동네 사람들)

장미희
(적도의 꽃)

이미숙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제29회
(1991년)

제30회
(1992년)

제31회
(1993년)

원미경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장미희
(사의 찬미)

심혜진
(결혼 이야기)


파일:백상예술대상_로고.png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이혜영
(1989)

장미희
(1990)

이혜숙
(1991)

파일:백상예술대상_로고.png TV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김민자[1]
(1980)

김영란
장미희
(1981)

황정아
김영애
(1982)


TBC 연기대상 최우수 여자연기상[2]

홍세미
(1977)

장미희
(1978)

정윤희
유지인
(1979)[3]

파일:201607132345520810.jpg

본명

장미정(張美貞) → 장미희(張美姬)

출생

1958년 1월 27일[4](60세)

신체

167cm, 49kg

혈액형

B형[5]

가족

1남 2녀 중 셋째

학력

정확히 알려진 바 없음[6]

데뷔

1976년 영화 '성춘향전'


1. 소개2. 활동
2.1. 데뷔 전2.2. 1970년대2.3. 1980년대2.4. 1990년대2.5. 2000년대 이후
3. 사건사고
3.1. 스캔들
3.1.1. 전두환 전 대통령3.1.2. 신기수경남기업 사장3.1.3. 배창호 영화감독
3.2. 학력 위조
4. 트리비아5. 출연작
5.1. 드라마5.2. 영화5.3. 광고5.4. 방송

1. 소개[편집]

파일:장미희 이쁜사진.jpg
파일:장미희4.jpg
대한민국배우.

2세대 트로이카이자 70~80년대 최고의 영화 흥행 여배우.

정윤희, 유지인과 더불어 197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8] 미혼.

2. 활동[편집]

2.1. 데뷔 전[편집]

1958년 1월 27일 아버지 장경근, 어머니 최숙자 사이에서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9] 유년시절, 아버지가 집을 나가 홀어머니 슬하에서 컸다고 한다.[10] 어릴 때에는 장미정(張美貞)이라고 불렸다. 어린 시절애는 선머슴애였다고 한다. 그래서 축구 등의 운동을 좋아해 축구공으로 남자애의 발목을 맞혀 넘어뜨렸다고 한다.

1972년에는 예술대회에 출전하여 춘향전으로 금상을 받았다고 한다. 원래 장미희는 초등학교 교사가 장래희망이었으나, 그녀의 언니가 장미희를 강제로 출전시켜서 받은 것이라고 한다.

2.2. 1970년대[편집]

1975년 TBC(동양방송) 특채탤런트로 뽑혔다. 이듬해인 1976년, 박태원 감독의 신인배우 공채 모집에서 276:1의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 '춘향' 역에 발탁되면서 영화에 데뷔하였다.[11]

파일:겨울여자 장면.png
이듬해 1977년, 겨울여자가 5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다.[12] 이 기록은 당시 해방 이후 역대 최다 관객 동원수였으며, 이 기록은 1990년에 상영한 장군의 아들로 깨지게 된다. 뒤이어 속 별들의 고향, 순악질 여사 등이 흥행하게 되면서 유지인, 정윤희와 함께 문희, 남정임, 윤정희의 뒤를 잇는 여배우 신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다.

드라마에서도 정윤희와 함께 출연한 청실홍실[13], 비바람 찬이슬, 찔레꽃 등이 성공하며 77년 미녀배우 순위에 정윤희의 뒤를 이어 2위의 자리에 올랐다.[14] 그러나 아무래도 외모 면에서는 정윤희와 유지인이 더 예뻤기 때문에 이들이 영화에서도 성공을 거두게 된 이후로는 이들에게 약간 주춤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도 탑3안에는 들었다.

2.3. 1980년대[편집]

파일:장태희.jpg
1980년 종합소득세 신고 납부액에서 8,850만 원을 신고하고 세금 1,700만 원을 납부했는데, 이는 1979년 여배우 중 최고 수입이었다. 당시에 트로이카의 일원이었던 정윤희가 1,430만원을 신고하고 세금 400만 원을 납부한 것보다 액수가 훨씬 컸다.[15]

드라마 <아롱이 다롱이> 주연이 장미희로 낙점되었지만, 김수현 PD와의 갈등으로 촬영 하루 전에 장미희가 촬영을 취소해 김형자로 주연이 바뀌었다고 한다.

1981년에는 취팔권 쌍팔권에 출연하여 쿵후액션연기를 보여줬다. 4월 27일부터 9시에 만납시다의 MC로 출연하였으나 시청자의 반응이 영 별로라[16] 9월 19일부터 김보연이 진행자를 맡았다. 장미희는 방송에 하차하면서 "영화와 드라마에 전념하겠다"고 한다. 11월 21일에 어머니 최숙희가 올해를 끝으로 은퇴한다는 장미희의 은퇴설을 일축했다.

그러나 1982년 신군부 집권 시기에 출연금지 연예인 목록에 오르면서, 1984년까지 제대로 된 드라마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이의 여파였는지 몰라도, 1982년에 여배우 수입 순위에서 정윤희유지인에 밀린 3위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17] 단순히 방송금지 조치만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 연기공부를 위해 1982년, 1983년 2번이나 미국 유학을 갔는데, 이도 장미희의 공백기를 심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런 공백기 때문에 정부의 외압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며, 소문의 정점은 후술할 X양 사건(...).

그 대신 영화활동에 전념했는데, 주로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애인 등의 멜로물에 출연을 하였다. 이러한 영화는 대박까지는 아니고 중박의 성적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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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배창호 감독과의 만남으로 그녀의 영화인생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배창호가 감독을 맡은 안성기와 함께 주연을 맡은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이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적도의 꽃의 흥행 성공으로 대종상 수상을 거두게 된다.

특히 깊고 푸른 밤은 이전의 처녀 혹은 아가씨의 모습에서 벗어나 원숙미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색다른 충격을 주었다. 당시에는 애마부인으로 대표되는 에로물이 범람해 영화가 전체적으로 야해지다 보니 깊고 푸른 밤이나 적도의 꽃에서 정사장면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깊고 푸른 밤의 성공은 장미희의 이미지 변신이 완벽하게 성공했음을 알렸고, 다른 트로이카의 일원인 유지인과 정윤희와는 달리 이후의 방송 활동에도 탄력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황진이에 출연하였지만, 장미희의 누드를 기대했던 관람객의 기대에 못 미쳐서 흥행에 실패[18]하였으나, 89년에 이덕화와 짝을 맞춘 불의 나라가 흥행성공을 거두었다.

2.4. 1990년대[편집]

1990년대에도 사의 찬미 등의 영화로 인기를 유지해 갔다. 애니깽 사태로 유명한 애니깽에도 출연했지만 영화는 폭망했다(...). 이 때에는 드라마 육남매로 더 알려졌다. 똑사새요

배우 활동과 더불어 교육계로 진출하려는 뜻으로 명지전문대학에서 교수 활동을 시작하였다.

2.5. 2000년대 이후[편집]

이전과는 달리 나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화보다는 드라마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주로 우아한 사모님풍의 배역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학력 위조 파동의 여파로 한동안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주로 사모님이나 귀부인 역할을 맡고 있다.

3. 사건사고[편집]

3.1. 스캔들[편집]

3.1.1. 전두환 전 대통령[편집]

X양 사건

장미희의 스캔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스캔들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전두환이 장미희를 아껴 내연녀로 삼았다. 이에 질투한 이순자가 드라마 을 촬영하고 있던 장미희를 납치해 자궁적출수술을 받게 했다는 내용이다.[19] 자궁적출수술 후, 알몸 상태로 5일 동안 남자가 있는 감방에 넣었다고 한다.

이 스캔들이 떠오른 때가 1980년대 초반대였는데, 이전에 활발한 활동을 보냈던 것과 달리 활동이 뜸했던 것이 소문을 키우는 데에 기여를 했다. 게다가 잦은 미국 유학도 이러한 스캔들이 퍼지는 데에 기여했다.

이 스캔들이 얼마나 당시에 파장이 컸던지, 이를 영화화한 서울무지개가 1989년에 상영되어 큰 흥행을 이끌었던 적이 있다.

일단 장미희 본인은 부정하고 있지만, 노인들 중에서는 이 사건으로 장미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3.1.2. 신기수경남기업 사장[편집]

1983년 당시 경남기업 사장과 약혼했던 적이 있었다. 이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밀회를 가진 사진도 남아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3.1.3. 배창호 영화감독[편집]

배창호가 장미희에게 공개구혼을 한 적이 있다. 배창호가 무명 시절 우연히 장미희의 친절함에 감동을 받았고, 이후 감독을 맡은 배창호가 오랜 기간 장미희와 짝을 맞추는 동안 배창호가 장미희에게 연정을 품은 것으로 보인다.

3.2. 학력 위조[편집]

장충여자고등학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미국 호손대학교를 졸업하였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동국대학교 청강생에 불과했던 것. 신정아 학력 위조가 드러남에 따라 같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본인은 "할말이 없다"며 대답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 구설수에 올랐다. 학력위조 문서를 참조할 것.

그러나 의외로 장미희의 학력위조 경력은 더 있다. 그녀가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협성여상에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이화여고 졸업에 건국대 의상학과로 자신을 포장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장미희 보고 여상 출신이라고 비아냥거린 적도 일부 있었다고.

4. 트리비아[편집]

배우 본인의 고고하고 우아한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20] 어떤 작품에 출연해도 배역 자체를 잡아먹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홀로 가정을 꾸려나가는 억척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이어야 할 드라마 '육남매'[21]에서도 이런 이미지가 약간이나마 나올 지경. 장미희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선 "연기 생활이 40년 가까이 되는데도 연기의 변화가 별로 없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근데 뭐든 다 어울린다는 게 함정 일단 미모로 올킬.

전성기 때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남성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대체로 장미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신인시절부터 센스가 탁월했으며 작품을 분석하는 능력이나 연기력도 좋은 건 물론이고 베드신처럼 어려운 연기에서도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 상대배우를 배려했다고 한다. 유일하게 장미희 험담을 한 게 신성일인데,[22] 이 배우의 인간 됨됨이나 주위평을 생각한다면...

젊은 시절부터 프로정신이 대단해서, 창문을 통해 옆 건물로 이동[23]하거나, 눈 위에서 경주용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 등 스턴트나 대역이 필요한 위험한 연기도 직접 다 해냈다고 한다. 장미희가 성공한 데에는 이런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력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정윤희가 외모로는 압도적으로 주목받았지만, 장미희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질 정도였다고. (정윤희와 장미희는 '청실홍실'이라는 드라마에서 라이벌 관계로 출연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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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드라마 '청실홍실' (1977)

평소에 패션에 관심이 많고 또 잘 입는 걸로 유명하다. 각종 명품 브랜드의 협찬 러브콜을 받는다고 하며, 최고의 명품 패션 하우스중 하나인 에르메스 마니아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에르메스에서 공식적으로 협찬을 허락한 유일한 배우라고 한다.

한창 남북화해 분위기가 있었던 1990년 즈음, 남북 간 연예인들끼리 만나던 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이때 북한의 유명 여배우 오미란과 만났다.


1992년 대종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남긴 "아름다운 밤이에요" 라는 수상 소감이 지금까지도 유명하다[24].

2011년에 김근태 전 의원이 사망하였을 때, 조문 인사를 한 적이 있다. 그를 추모하는 글을 쓰기도 했는데,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5. 출연작[편집]

5.1. 드라마[편집]

방영 연도

방송사

분류

제목

배역

1976년

TBC

금요무대

해녀 당실이

당실

1976년

TBC

주말연속극

결혼행진곡

-

1977년

TBC

금요드라마

찔레꽃

-

1977년

TBC

일일연속극

비바람 찬이슬

-

1977년

TBC

주간연속극

청실홍실

지선

1978년

TBC

주말연속극

시집갈때까지는

-

1978년

TBC

일일드라마

언약

-

1978년

TBC

납량특집드라마

천년호

천년묵은 여우

1978년

TBC

주간단막극

부부

갈매

1978년

TBC

개국14주년특집극

어머니의 강

-

1979년

TBC

주말연속극

사랑도 미움도

-

1979년

TBC

매일연속극

이조여인 오백년사 - 원앙별곡

-

1979년

TBC

개국15주년특집극

대춘향전

성춘향

1980년

TBC

납량특집드라마

형사 〈얼굴없는 미녀〉

귀신

1980년

TBC

일일연속극

달동네

양순

1981년

KBS

단막극

TV 문학관 - 배따라기

-

1981년

KBS

단막극

TV 문학관 - 을화

을화

1981년

KBS

주간연속극

-

1982년

KBS

단막극

TV 문학관 - 안개꽃

-

1987년

KBS

주말연속극

타인

오영주

1989년

KBS

대하드라마

역사는 흐른다

쌍순이

1998년

MBC

미니시리즈

육남매

육남매 엄마 최용순

2000년

MBC

주말연속극

엄마야 누나야

한영숙

2003년

SBS

일일연속극

흥부네 박터졌네

연지

2004년

MBC

미니시리즈

황태자의 첫사랑

차미희

2005년

SBS

주말극장

그 여름의 태풍

정미령

2008년

KBS 2TV

주말연속극

엄마가 뿔났다

고은아

2010년

SBS

주말특별기획

인생은 아름다워

조아라

2012년

SBS

미니시리즈

패션왕

조 마담

2013년

MBC

일일연속극

오자룡이 간다

장백로

2013년

JTBC

주말연속극

맏이

윤이실

2014년

JTBC

일일연속극

귀부인

홍선주

2014년

MBC

주말연속극

장미빛 연인들

고연화

2015년

KBS 2TV

수목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

장모란

2016년

JTBC

금토드라마

마담 앙트완

배미란

2017년

KBS 2TV

수목드라마

흑기사

장백희

2018년

KBS 2TV

주말연속극

같이 살래요

-

5.2. 영화[편집]

연도

제목

배역

관객 수

1976

성춘향전

성춘향 역

17,281명

1977

겨울여자

이화 역

585,775명

1978

갯마을

해순 역

138,856명

1978

속 별들의 고향

수경 역

327,736명

1979

순악질 여사

68,925명

1979

나팔수

해수 역

33,997명

1979

느미

느미 역

46,782명

1979

야시

해수 역

101,083명

1980

색깔있는 여자

윤시내 역

90,388명

1980

겨울 사랑

다혜 역

44,792명

1980

겨울에 내리는 봄비

11,535명

1980

그 여자 사람잡네

70,113명

1980

내가 버린 여자 2

윤정 역

36,713명

1980

바다로 간 여자

1980

불새

현주 역

87,209명

1981

김두한형 시라소니형

33,537명

1981

취팔권 광팔권

28,072명

1981

슬픈 계절에 만나요[25]

민설희 역

23,405명

1981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창녀 역

60,972명

1982

애인

영심 역

73,279명

1982

숲속의 바보

꽃분 역

23,332명

1983

적도의 꽃

선영 역

155,042명

1983

사랑 그리고 이별

윤희 역

1985

깊고 푸른 밤

제인 역

495,697명[26]

1986

황진이

황진이 역

89,193명

1988

성야

세원 역

18,872명

1989

불의 나라

정은하 역

117,789명

1991

사의 찬미

윤심덕 역

183,760명

1995

애니깽

국희 역

1997

아버지

영신 역

1998

시상식 장면

2003

보리울의 여름

원장 수녀 역

2008

비몽

의사 역


동시대 여배우들과 비교했을 때 영화 흥행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그녀의 라이벌이었던 2세대 트로이카는 물론이고, 80년대 트로이카들보다도 흥행력이 뛰어나다. 장미희가 등장한 것은 70년대 중후반부터인데, 70년대 전반까지 소급해도 그녀보다 흥행력이 좋은 여배우는 없다.

5.3. 광고[편집]

5.4. 방송[편집]

  • 1981년 4월 27일 ~ 9월 19일 9시에 만납시다 : MC 출연


[1] 배우 최불암의 부인 되신다.[2] 당시에는 대상이 따로 없었고 최우수남자·여자연기상이 최고의 상이었다[3] 다만 이 해에는 최고의 상으로 대상이 부활하여 강부자가 대상을 수상하였다.[4]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1957년 12월 8일로 나오는데 이는 음력 생일로, 양력으로 환산하면 58년 1월 27일이 맞는다.[5] 학력위조 사건 관련 기사에서 인터뷰할 때 본인이 "언론에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었다"면서 그 예로 혈액형을 들었다. 처음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혈액형은 AB형.[6] 남산초등학교-옥수여자중학교-협성여자실업고등학교. 이전까지는 장충여자고등학교-동국대학교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후에 학력위조로 밝혀졌다. # [7] 최근에는 정애리 대신 이보희가 3세대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대체되었지만 당대 인기도를 봤을 때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정애리는 드라마를 중심으로 활약하고 이보희는 영화를 중심으로 활약했는데, 80년대에는 드라마의 지명도가 영화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당연히 정애리의 인기는 이보희를 까마득히 앞섰으며, 남녀노소가 다 아는 여배우였지만 이보희는 영화관을 찾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지명도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도 이보희원미경, 이미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보던 전례가 있었으므로 이보희 항목에는 정애리 대신 이보희를 트로이카 표에다 넣었으니 이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보희를 참고 바람.[8] 동시대에 배우 이영옥도 활발하게 활동을 했지만, 세 여배우들에 비하자면 나이도 좀 있고 인지도도 그리 높지 않아서 트로이카에 포함되지는 않는 듯하다.[9] 부산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10] 가족관계에 하나 설이 있다. 장미희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첩이었다는 것.[11] 당시 남자주인공은 진짜진짜 시리즈로 유명세를 탄 이덕화였다.[12] 당시에는 유신정권 치하에 놓여 있어서 문화예술적인 제약이 심했는 데다가, TV드라마의 유행으로 영화계가 전반적으로 침체 상태에 있었다.[13] 정윤희와 라이벌 관계로 출연했다. 시청률은 70% 정도였다고.[14] 3위는 또 다른 트로이카의 일원인 유지인.[15] 수입이 높다고 해서 꼭 인기가 많다는 것은 아니었다. 정윤희의 영화 전성기는 1979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그 이전부터 인기를 끈 장미희보다 수입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후로는 정윤희가 수입에서 장미희를 능가한다.[16] 답답하고 부담스러운 데다가 엉뚱한 질문을 많이 했다고.[17] 1위가 유지인으로 1억 3,440만 원, 2위가 정윤희로 9,600만 원, 3위가 장미희로 7,200만 원이었다. 80년대 트로이카인 이미숙, 원미경은 각각 5위와 8위로, 각각 5,800만 원과 5,000만 원을 벌었다. 또 다른 80년대 트로이카인 정애리는 3,200만 원을 벌었고, 이보희는 당시 무명이었다.[18] 이미숙이 주연을 맡은 내시와 동시상영하였다. 결과는 152,558명의 관객을 모은 내시의 대승.[19] 모 여성 잡지의 표현에 따르자면, 구봉합수술을 했다고 한다.[20] 딱 봐도 귀부인을 연상케 하는 외모, 음색, 어조다.[21] 이때 장미희는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홀어머니 역을 맡았는데, 장미희 특유의 억양의 '똑(떡) 사세요~! 똑(떡)이요~!' 대사는 당시에 성대모사의 소재로 유행하기도 했다. 사실 이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톤으로, 인터뷰에서 언급하길, 귀하게 자란 마나님이 시장통에서 떡 장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음을 감안해 일부러 저렇게 연기를 했다고.[22] 포동포동한 얼굴의 앳된 장미희가 그다지 눈에 차지 않았는지 볼 때마다 ‘너 같은 아이가 어떻게 배우가 되었냐. 얼굴이 꼭 빈대떡 같다’ 라고 대놓고 말했다.[23] 1977년 영화 겨울여자에서 보여줬다.[24] 그리고 이 성대모사를 이경실이 자주 구사했었다.[25] 1980년대에 활동한 가수 백영규의 노래 '슬픈 계절에 만나요'에서 제목을 따왔고, 백영규가 주인공(남)으로 출연하였다.[26] 당해 최고 관객 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