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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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창당 과정과 우익, 청년단체세력 흡수3. 악행비판4. 자유당의 인물, 정치인
4.1. 자유당 출신 주요 정치인4.2. 초기 원내 자유당, 원외 자유당 출신 정치인
4.2.1. 원내 자유당4.2.2. 원외 자유당: 조선민족청년단
5. 역대 선거결과6. 주요 참조 항목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51년 이승만이 창당하여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때까지 9년 동안 한국에서 집권하였던 제1공화국여당. 다만 자유당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절대로 자유주의적인 정당이 아니었다. 귀가 간지럽네 물론 한국 정당사에서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이 한둘은 아니었다만.

참고로 여당이 정부 수립 3년째, 그것도 전쟁 도중에야 생겨난 이유는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 선거에선 당선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제1대와 제2대 국회에서는 무소속 의원이 1/3이상을 차지했다.

2. 창당 과정과 우익, 청년단체세력 흡수[편집]

사건 순서

자유당의 통합과 창단, 창당 과정[1] [2]

1

대동청년단

청년조선총동맹

국민회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

서북청년회

20여개 군소단체 통합

조선민족청년단

국민회(國民會)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농민조합연맹

대한부인회

공화민정회(원내 이승만 지지기반)

.

2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창단

3

1949년 1월 20일 대한청년단조선민족청년단을 흡수함.

4

대한청년단

대한청년단, 자유당 내 이범석 족청계(조선민족청년단)

5

5개 사회단체 연합

6

1951년 12월 23일 이기붕 중심의 원내 자유당 창당

1951년 12월 17일 원외 자유당 창당(이범석 족청계)

7

1953년 9월 자유당: 이승만 족청파 제거에 대한 담화 발표

8

1954년 자유당

1954년 1월 이범석 족청계 완전 숙청, 해체(잔류세력 대한청년단에 흡수)


자유당은 친이승만적 성향을 가진 국회의 공화민정회, 의석이 없는 국민회, 조선민족청년단, 대한청년단,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농민조합연맹, 대한부인회등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신당이다. 이 때문에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이 존재하기도 하였다. 세력은... 의외로 원외가 더 셌다. 이범석 중심의 원외 자유당 세력(조선민족청년단: 족청)은 후에 이승만에 의해서 축출되었다.

이승만은 집권 초기 정당정치에 회의적이었고 1950년 총선에서도 무당적을 고수하였으나 51년 8월을 전후하여 창당의사를 밝혔다. 이후 물밑에서 창당협의가 이루어졌으나 의견차와 특히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문제로 동년 12월 국회내에서 신당을 추진하던 의원들이 이른바 '원내 자유당'을 창당하고, 국회 밖에서 족청을 위시로 하는 이승만 친위세력이 '원외 자유당'을 창당한다.

이승만의 세계관, 정치관에서는 민주국민당을 필두로 하는 한국민주당계 의원들이 지주, 자본가 등 부유계층을 대표하는 정당이었으며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절대다수 노동인구를 대표하여 이들 계급정당에게서 보호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래서 이승만 친위였던 '원외 자유당'의 본디 이름은 자유당도 보수당도 아닌 노농당이었다. 당시에도 이 이름은 좀 많이 쇼크(...)였는지 원외신당과 원내신당의 합당협상을 결렬시킨 시비거리중 하나였다. 즉 국회내의 자유당과 국회밖의 노농당 이렇게 양당이 추진되었는데, 정작 노농당 세력이 막판에 가서 자유당으로 간판을 바꿔달았고 그렇게 원외/원내 자유양당이 탄생하였다. 이 양당은 53년 4월에 가서야 비로소 정식으로 통합된다.

3. 악행비판[편집]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들이 첫번째로 벌인 것은 야당 국회의원의 버스를 끌고간 다음에 협박을 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찬성하게 한 것이다. 바로 "발췌 개헌". 직선제로 한 이유는 당시엔 직선제가 부정선거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인기도 자유당보다 높았고, 실제로 발췌 개헌 직후에 열린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별다른 경쟁자가 없이 무난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다음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조봉암, 신익희[3]와 힘겹게 싸워서 온갖 부정부패를 통하여 승리하고 조봉암은 사법살인으로 보내버린다.

내부에서는 부정부패가 심해서 사방에서 구린내가 진동하였으며[4], 끝내는 이승만의 종신 출마를 위한 개헌을 시도했는데 의석수가 2/3에서 한 명 모자라 사사오입 개헌이란 사상초유의 병크를 터트렸다. 그러나 정작 사사오입 개헌으로 3선 출마를 하게 된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위에 기술한 대로 신익희, 조봉암과 힘겨운 승부를 벌였으며, 부통령 선거에서는 아예 당 후보로 나선 이기붕이 낙선하고 야당 후보 장면이 당선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통령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5] 3.15 부정선거지지도 90%를 이뤄냈다.[6] 결국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4.19 혁명이 일어났고, 결국에는 이승만하야하고, 이기붕이 아내인 박마리아와 함께 아들인 이강석에게 살해됨으로써 결국 자유당 정권은 망했어요...

자유당의 악행이 너무나도 심했던지, 당시에는 힘 센 아이가 애를 때려놓고는 "왜 때리냐?"고 물으면 "난 자유당이다!"라고 하곤 했다고 한다.[7] 몰라 뭐야 이거 무서워

당시 자유당의 멸망에 대해 유행처럼 떠돌았던 문구는 다음과 같다.

자유당은 두 가지 (癌)으로 죽었는데, 하나는 프란체스카 암이요, 또 하나는 박마리아 암이었고[8]

최인규[9]는 강심제 주사를 놓다가 바늘부터 부러진 격이다.


이문열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시대 배경이 바로 이 시대이며, 내용 자체도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다. 물론 그 하나를 비판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만은 아니지만.

다만 자유당 자체는 4.19 혁명 이후에도 존속이 되었었다. 물론 사실상 정치판에서는 없어지다시피 했지만. 공식적으로 없어진 것은 5.16 군사정변 직후 기존 정치단체들의 강제 해체 과정에서이고, 장택상에 의해 재건한 자유당의 후신이 1970년까지 남아있기도 했다. 하지만 4.19 혁명 직후의 총선에서 당연히 참패함과 동시에 이후 재건을 하는데 완전 실패하고, 장택상의 탈당으로 유명무실해지고, 1970년에 신민당에게 흡수되어 해산되었다. 그리고 5.16 군사정변 직후에 대대적으로 탄압받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4.19 혁명이 당 해체의 기점이다.

위와 같은 병크와 흑역사 때문에 국내의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은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자유당'이란 공식 명칭과 약칭을 쓰지 못하고, 다른 단어와 자유라는 단어를 붙히고, 다른 단어를 붙힌 약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실제로 당명에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정당들을 살펴보면, 민주자유당의 약칭은 민자당, 자유선진당의 약칭은 선진당, 현재 제1 야당인 자유한국당의 약칭은 한국당이다. 자유한국당의 경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일으킨 정당이다 보니 민주·진보 지지자들로부터 약칭을 자유당이라 불리게 되자 발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자유한국당은 자유당 이후 최초로 임기 도중 대통령이 쫓겨난 여당이 되었다.

4. 자유당의 인물, 정치인[편집]

4.1. 자유당 출신 주요 정치인[10][11][편집]

자유당 출신 정치인

소속기간

이름

당 직위

비고

?

김영삼

자료 없음.

자유당 3대 국회의원
민주당(1955년) 5대 국회의원
민정당 6대 국회의원
신민당(1967년) 7.8.9.10대 국회의원
통일민주당 13대 국회의원
민주자유당 14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 14대 국회의원직 사퇴
14대 대통령
신한국당 명예총재

?

이승만

내용없음

1대~3대 대통령

?

이기붕

내용없음

내용없음

?

강성태

중앙당 상무위원장

조선총독부 근무[12]
일제강점기의 관료.
자유당 소속 제4대 국회의원

?

유석형

자유당 마산시당 조직부장/
자유당 마산시당 감찰부장/
자유당 마산시당 고문

대한청년단 단장
국민회(한민회) 초대 조직부장
서북청년단, 독립촉성 청년단 등을 개편하여 대한청년단 결성.
1957년 국민회(國民會) 지부장

자료없음.

김종신

자유당 마산시당 위원장/
자유당 마산시당 기획위원

보도연맹 사업부장/국민회(國民會) 간부/민보단 고문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참여

조선독립촉진마산협의회 부의장

자유당 창당에 적극 참여/초대 자유당 마산시당 위원장

마산시의원/마산시장/제3대 국회의원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1963년 자유민주당[13] 지구당 위원장

민주공화당(1963년) 중앙상임위원/신문사 사장/방송사 사장

자료없음.

문삼찬

자유당 마산시단장 부위원장/
자유당 마산시당 기획위원

보도연맹 사업부장/국민회(國民會) 간부

김종신의 국민회(國民會) 사업부장직을 넘겨 받음

1948년 민족청년단 경남지부 마산시단장

마산의 대흥주조장(大興酒造場) 양조업자/백광소주 사장

1956년 자유당 마산시단장 부위원장

1955년 2월 결성된 마산문화인협의회(문협)의 2대 의장/3대 회장

1957년 마산체육회장

1960년 3.15 부정선거 시기 김종신과 같이 자유당 마산시당 기획위원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1963년 민우당(民友黨) 경남 제1지구당 위원장

최종적으로 민주공화당(1963년)에 합류

4.2. 초기 원내 자유당, 원외 자유당 출신 정치인[편집]

4.2.1. 원내 자유당[편집]

설립자

이갑성(李甲成), 김동성(金東成), 이재학(李在鶴), 홍익표(洪翼杓), 이석기(李錫基), 이상철(李相喆), 오위영(吳緯泳)

당무국장

정현모(鄭顯模)

정무국장

양우정(梁又正)

사회국장

이활(李活)

총무국장

유화청(柳和靑)

감찰위원장

안호상(安浩相)

농민부장

최상석(崔尙錫)

선전부장

진승국(秦承國)

조직부장

원상남(元尙南)

외무부장

강석천(姜錫天)

노동부장

최용수(崔龍洙)

부국장

문봉제(文鳳濟)

4.2.2. 원외 자유당: 조선민족청년단[편집]

단장

이승만 추대

부단장

이범석 추대

5. 역대 선거결과[편집]

6. 주요 참조 항목[편집]

7. 관련 문서[편집]

[1] 자유당의 통합과 창단, 창당 과정-근거자료1[2] 자유당의 통합과 창단, 창당 과정-근거자료2 (자유당)[3] 신익희는 유세 중 호남선을 타고 가다 뇌일혈로 급서했다.[4] 여담으로 자유당의 부정부패가 심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승만 자신이 월급을 적게 줬던 것이 한몫했다는 말이 있다. 이승만은 공직자들은 나라에 대가를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닌 volunteer하는 정신으로 일해야 한다고 공직자들의 월급을 엄청나게 적게 잡아 (공무원 월급이 통근전차요금도 안될정도였다.) 그야만큼 쥐꼬리만한 수준의 봉급을 주었고, 그래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공무원과 군인들이 미군이 준 원조물자나 군수물자들을 팔아버리는 일이 빈번했고 한번은 백선엽이 이승만을 찾아가서 장교들 월급이 너무 박해서 장교들이 보급받은 c레이션을 팔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군인들의 월급을 올려달라고 청하자 이승만은 그렇게 올려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면서 공무원 의식 개조를 위해서는 월급을 올릴 수 없다고 선을 그었는데 그 결과는 시망. 애초에 조선 왕조에서도 이런 식으로 박봉 줬다가 부정부패가 판을 쳤다. 조선 왕조를 그렇게 혐오했던 이승만이었지만 결국 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5] 이승만의 경우엔 야당 후보인 조병옥이 급사하면서 사실상 자동 당선이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이미 팔순이 넘은 고령이었고, 건강상태도 그닥이었다. 때문에 이승만이 설사 당선된다 하더라도 임기를 다 채울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가 많았다. 이때문에 자유당에서도 유사시 대통력직을 승계할 부통령 선거에 총력전으로 나섰다.[6] 대구에서 개표가 시작되자마자 자유당에서조차 기겁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통령 지지율이 99%에 육박한 곳도 있었다고.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유권자 수보다 이승만, 이기붕의 표가 많았다고 한다. 결국 이승만은 70%, 이기붕은 그보다 조금 낮은 수치로 수정되어 발표되었다.[7] from 노무현 前 대통령 회고록 <성공과 좌절>[8] 두 사람은 각각 이승만과 이기붕의 부인이다.[9] 내무부 장관으로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했다[10] (PDF)마산지역 토호세력의 뿌리 - Tistory(유석형, 김종신, 문삼찬 자료)[11] (민간인학살)학살과 지역사회의 지배구조-학살 거쳐 정치권력 장(유석형, 김종신, 문삼찬 자료)[12] 강성태 (1903년)[13]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7880&cid=46626&categoryId=46626[14]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자연스럽게 투표결과도 무효화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