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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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창당 과정
2.1. 원내 자유당의 창당 배경2.2. 원외 자유당의 창당 배경2.3. 두 개의 자유당2.4. 족청계 숙청
3. 악행비판
3.1. 수복지구 과세3.2. 연계자금 사건
3.2.1.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 경축금'
4. 자유당의 인물, 정치인
4.1. 자유당 출신 주요 정치인
5. 역대 선거결과6. 주요 참조 항목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집권 정당이자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시조

1951년 이승만이 창당하여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때까지 9년 동안 한국에서 집권하였던 제1공화국여당. 다만 자유당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절대로 자유주의적인 정당이 아니었다. 물론 한국 정당사에서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이 한둘은 아니었다만. 다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당이 50년대 한국 정당 중에 가장 보수우파적인 정당이었느냐면 그렇지는 않다. 당시의 민주당(계열 정당들)도 자유당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위치였을 뿐 이념적으로는 자유당과 별 차이 없는 보수우파 정당이었기 때문. 심지어 지지 계층 성향으로 본다면 민주당(계열 정당)이 자유당 보다 더 오른쪽이었다. 다만 여기에서 한국민주당이 현대의 민주당계 정당과 같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인 것이, 한국민주당이 민주당계 정당의 시초라고는 하지만, 이는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그렇게 이어진다는 것이고, 사실상 현 민주당계의 전신으로는 1987년에 창당한 평화민주당, 1990년대 창당한 민주당이나 새정치국민회의를 많이 꼽는다. 공식적으로는 더불어민주당이 2015년 '민주당 60년'을 기념하면서 1955년 신익희등이 창당한 민주당을 현재 민주당의 시작으로 삼은 바 있다. 거기에 더불어민주당이나 민주평화당의 정치 성향은 좌파에서 중도우파를 이루는 반면에, 한국민주당은 자유당과 다를 바 없는 극우반공 성향의 정당이었다.

2. 창당 과정[편집]

사건 순서

자유당의 창당 과정[2][3]

1

무소속구락부(1950년)

대한국민당(1949년)

대한청년단

국민회

2

민정동지회

국민구락부

대한청년단 내 족청계

3

공화구락부

신정동지회

4

1951년 12월 23일 원내 자유당 창당

1951년 12월 23일 원외 자유당 창당

5

잔류파

합동파(삼우장파)

6

원외 자유당

7

(와해)

8

1953년 5월 30일 자유당으로 재편


1950년 말부터 1951년 초반에 걸쳐 발생한 거창 양민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등을 통해 제1공화국의 무능과 무책임이 드러난 결과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하고, 후임으로 야당인 민주국민당김성수가 국회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대통령 선출권한이 국회에 있었기 때문에 임기가 끝나는 1952년을 앞두고 재집권에 불안을 느낀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기 시작했으며, 그를 위한 신당 창당이 필요해졌다.

2.1. 원내 자유당의 창당 배경[편집]

공화민정회는 1950년 11월 무소속구락부가 명칭을 바꾼 공화구락부가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선출한 직후인 1951년 5월 신정동지회와 통합한 거대 원내단체였다. 국회의원은 공화구락부가 39명, 신정동지회가 69명으로 신정동지회 측이 훨씬 많았지만,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약점이 많아[4] 신당 작업은 오위영 등 공화구락부계가 주도했다. 오위영 등이 신당을 만들려고 한 것은 전쟁 직후부터였다. 의원들은 이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서울을 뺏기고 자신만 몰래 피신한 데 대해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왜 내가 책임이 있느냐고 역정을 냈다. 의원들은 국무위원들한테도 책임을 물었다. 그러면서 의원들은 개별적으로 항의하는 것보다 정당을 조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위영 등의 신당은 1950년부터 모색되었고, 1951년 5월 공화민정회가 발족하면서 신당준비위원 등을 선출했지만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신정동지회계의 내부 사정이 복잡했고, 이승만 지지자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위영 등은 신당 작업을 벌이면서 초대 주미대사를 지냈고 미국이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장면 국무총리(2대)를 차기 대통령으로 옹립하기 위한 활동도 벌였다. 이처럼 원내 자유당은 이승만과는 거리가 먼 정당으로 시작했다.

2.2. 원외 자유당의 창당 배경[편집]

1951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광복절기념사를 통해 농민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새 정당을 만들 의사를 밝혔다. 이후 8월 25일 이승만은 신당 조직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그는 신당은 대부분이 노동자·농민 등 근로대중으로 조직되어야 하고, 민간단체인 경우 개인 자격으로 가입하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등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원외에서의 정당 조직은 국무총리·국방장관이었다가 1951년 초 주중대사로 나가 있던 이범석이 8월 말 귀국함으로써 속도가 빨라졌다. 그는 당시에 해체되었으나 여전히 막강한 조직력을 과시하고 있는 조선민족청년단(족청)계의 지도자였다.[5]

이승만의 세계관, 정치관에서는 민주국민당을 필두로 하는 한국민주당계 의원들이 지주, 자본가 등 부유계층을 대표하는 정당이었으며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절대다수 노동인구를 대표하여 이들 계급정당에게서 보호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래서 이승만 친위였던 '원외 자유당'의 본디 이름은 자유당도 보수당도 아닌 통일노농당이었다. 당시에도 이 이름은 좀 많이 쇼크(...)였는지 원외신당과 원내신당의 합당협상을 결렬시킨 시비거리중 하나였다.

2.3. 두 개의 자유당[편집]

1951년 8월 이승만의 광복절 기념사가 나오자 공화민정회 측과 국민회·대한국민당·대한청년단 등 이승만계가 자리를 같이했다. 공화민정회 측이 이 모임에 나간 것은 대통령 기념사 이후 신정동지회계가 동요한 것이 한 요인이었다. 원외 측과 공화민정회 측의 회동은 9월 말 다시 있었으나 신당 조직을 위한 양측의 회합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원외 측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공화민정회 측은 이승만의 1인 정당에 반대했다. 원외 측은 대통령중심제와 대통령직선제를 주장했는데, 공화민정회 측은 내각책임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1951년 11월 말경 공화민정회 소속 70여 명의 국회의원은 공화당·자유당·민주사회당 등 세 개의 명칭을 갖고 투표에 부쳤다. 자유당이 41표로 가장 많아 자유당으로 당명을 정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12월 10일경 통일노농당이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원외 측의 의견을 받아들여 당명을 자유당으로 하기로 했다. 이들은 원내 측에서 당명을 자유당으로 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2월 14일 원내 측이 공보처로 정당 등록을 하러 갔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12월 17일 발기인대회를 가진 원외 측은 다음 날 이승만을 대표자로 한 자유당 등록서류를 공보처에 접수시켰다.

1951년 12월 23일 두 개의 자유당이 탄생했다. 이날 오전 국회의사당에는 90여 의원이 참석해 자유당 결당대회를 가졌다. 당수 격인 중앙위원회 의장은 공석이었고,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오위영이었다. 원내자유당 주류는 장면을 지지했다. 오후에는 원외 측에서 발당대회를 가져 당수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부당수에 이범석을 선임했다. 초기 원외자유당 의원은 양우정 등 두세 명뿐이었다.

2.4. 족청계 숙청[편집]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이범석이 아닌 이승만보다도 나이 많은 노인이었던 함태영을 부통령 후보로 올렸다. 이는 사실상 이승만에게 이범석을 후계자로 지목할 생각이 없다는 뜻. 이범석은 이에 반발하여 부통령 선거에 독자출마하게 된다. 이범석은 자신이 부통령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무총리 장택상은 비밀리에 자유당 당원들에게 이범석 대신 함태영을 지지하라고 했고 미리 손을 써두었다. 이범석은 부통령에서 낙선했고 장택상이 배후 공작을 벌인걸 확인, 이에 분노한 이범석은 선거에 경찰이 관여했다며 장택상을 고소하였지만, 이는 흐지부지된다.[6]

이승만은 자유당의 당수·부당수제도를 폐지하고 총재제로 할 것, 중앙위원제로 할 것 등을 지시했다. 이승만은 당수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총재가 되었으며, 부당수제도가 폐지됨으로써 이범석은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 이승만은 6월 5일 이범석을 반 강제로 여비도 조금밖에 주지 않은 채 외유를 떠나게 했다. 다음 거세 대상은 남로당원이었던 특별징계위원회 위원장 신형식이었다. 그는 연설장에서의 실언이 문제가 되어 구속되었다. 족청계에 대한 결정적 타격은 양우정의 구속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이승만의 충실한 이데올로그로 활동했고, (원외)자유당을 만드는 데 공로자였던 양우정은 후로이 사건을 터뜨려 장택상을 실각시킨 『연합신문』 편집국장 정국은이 간첩 혐의로 8월 말 구속됨으로써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에는 특무대장 김창룡이 팔을 걷고 나섰다. 10월 17일 족청계였으나 이미 돌아선 백두진 국무총리의 이름으로 제출된 양우정 의원 구속동의안이 압도적 표차로 가결됨으로써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이범석의 정치생명은 끝장이 났다.

3. 악행비판[편집]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들이 첫번째로 벌인 것은 야당(민주국민당, 원내 자유당[7]) 국회의원의 버스를 끌고간 다음에 협박을 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찬성하게 한 것이다. 바로 "발췌 개헌". 직선제로 한 이유는 당시엔 직선제가 부정선거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인기도 자유당보다 높았고, 실제로 발췌 개헌 직후에 열린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별다른 경쟁자가 없이 무난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다음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조봉암, 신익희[8]와 힘겹게 싸워서 온갖 부정부패를 통하여 승리하고 조봉암은 사법살인으로 보내버린다.

내부에서는 부정부패가 심해서 사방에서 구린내가 진동했다. 자유당의 부정부패가 심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승만 자신이 월급을 적게 줬던 것이 한몫했다는 말이 있다. 이승만은 공직자들은 나라에 대가를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닌 volunteer하는 정신으로 일해야 한다고 공직자들의 월급을 엄청나게 적게 잡아 공무원 월급이 통근전차요금도 안될정도였다. 그야말로 쥐꼬리만한 수준의 봉급을 주었고, 그래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공무원과 군인들이 미군이 준 원조물자나 군수물자들을 팔아버리는 일이 빈번했고 한번은 백선엽이 이승만을 찾아가서 장교들 월급이 너무 박해서 장교들이 보급받은 c레이션을 팔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군인들의 월급을 올려달라고 청하자 이승만은 그렇게 올려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면서 공무원 의식 개조를 위해서는 월급을 올릴 수 없다고 선을 그었는데 그 결과는 시망. 애초에 조선 왕조에서도 이런 식으로 박봉 줬다가 부정부패가 판을 쳤다. 조선 왕조를 그렇게 혐오했던 이승만이었지만 결국 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

끝내는 이승만의 종신 출마를 위한 개헌을 시도했는데 의석수가 2/3에서 한 명 모자라 사사오입 개헌이란 사상초유의 병크를 터트렸다. 그러나 정작 사사오입 개헌으로 3선 출마를 하게 된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위에 기술한 대로 신익희, 조봉암과 힘겨운 승부를 벌였으며, 부통령 선거에서는 아예 당 후보로 나선 이기붕이 낙선하고 야당 후보 장면이 당선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통령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9] 3.15 부정선거지지도 90%를 이뤄냈다.[10] 결국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4.19 혁명이 일어났고, 결국에는 이승만하야하고, 이기붕이 아내인 박마리아와 함께 아들인 이강석에게 살해됨으로써 결국 자유당 정권은 망했어요...

자유당의 악행이 너무나도 심했던지, 당시에는 힘 센 아이가 애를 때려놓고는 "왜 때리냐?"고 물으면 "난 자유당이다!"라고 하곤 했다고 한다.[11]

당시 자유당의 멸망에 대해 유행처럼 떠돌았던 문구는 다음과 같다.

자유당은 두 가지 (癌)으로 죽었는데, 하나는 프란체스카 암이요, 또 하나는 박마리아 암이었고[12]

최인규[13]는 강심제 주사를 놓다가 바늘부터 부러진 격이다.


이문열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시대 배경이 바로 이 시대이며, 내용 자체도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다. 물론 그 하나를 비판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만은 아니지만.

다만 자유당 자체는 4.19 혁명 이후에도 존속이 되었었다. 물론 사실상 정치판에서는 없어지다시피 했지만. 공식적으로 없어진 것은 5.16 군사정변 직후 기존 정치단체들의 강제 해체 과정에서이고, 장택상에 의해 재건한 자유당의 후신이 1970년까지 남아있기도 했다. 하지만 4.19 혁명 직후의 총선에서 당연히 참패함과 동시에 이후 재건을 하는데 완전 실패하고, 장택상의 탈당으로 유명무실해지고, 1970년에 신민당에게 흡수되어 해산되었다. 그리고 5.16 군사정변 직후에 대대적으로 탄압받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4.19 혁명이 당 해체의 기점이다.

위와 같은 병크와 흑역사 때문에 국내의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은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자유당'이란 공식 명칭과 약칭을 쓰지 못하고, 다른 단어와 자유라는 단어를 붙이고, 자유가 아닌 약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실제로 당명에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정당들을 살펴보면, 민주자유당의 약칭은 민자당, 자유선진당의 약칭은 선진당, 현재 제1 야당인 자유한국당의 약칭은 '한국당'이지만 자유한국당에 반감이 큰 민주·진보계열 인사들과 그 지지자들은 자유한국당을 지칭할 때 예전 자유당처럼 대통령과 정당이 병크와 흑역사를 저질러서 망했다는 조롱과 멸시의 의미를 담아 일부러 자유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3.1. 수복지구 과세[편집]

6.25 한국전쟁 이후 과거 북한 땅이 었지면 휴전이후 남한 땅이 된 강원도 양구, 화천 등 의 새로 수복한 지구인 수복지구에 가난한 시민을 대상으로 군대 사령관을 시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으니 세금내야 된다는 명목으로 법에도 없는 세금을 받아 [14] 자유당에서 사용했다. [15]

3.2. 연계자금 사건[편집]

1958년 5·2총선을 약 2주일 앞둔 4월 20일부터 산업은행에서 기간산업 육성자금 명목으로 특혜자금 40억환을 12개 기업체에 부정대출 했다는 것이다. 대출목표를 80억환으로 책정한 이 특혜자금의 재원은 산업은행에서 차후 금융채권을 발행해 마련키로 하고 우선 산업은행 지불보증으로 시중은행이 먼저 대출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연계자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50년대 후반 당시 산업은행자유당 정권의 친여권 기업에 대한 권력형 부정대출의 주된 창구였다. 당시 산업은행은 지금의 명동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다.

산업은행 자금은 이른바 정치자금의 루트로 알려져 많은 국민들로부터 의혹을 사고 있었는데 특히 이 연계자금의 대출대상기업체 중에는 부실 섬유기업체들이 들어있어 야당과 언론의 비난이 더욱 거셌다. 이들 기업체는 실제로 1∼2년 내에 파산했다. 야당인 민주당은 7월 15일 새로 구성한 제4대 국회에서 산업은행 연계자금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려 했으나 여당인 자유당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런 부실·불법대출로 인해, 1958년 말 산업은행의 대출연체액은 총 대출 1000억환 중 500억환 이상이었다. 산업은행은 이미 전과가 있었다. 1954년의 금융계 부정사건과 제1회 산업부흥국채사건, 1956년의 지불보증사건 등이다. 지불보증사건은 폭설피해 복구자금으로 5억9600만환,석탄공사 8억환,대한중공업 5억6000만환, 조선전업에 15억환, 주택영단에 3억4000만환을 각각 국회동의 없이 불법 지불보증한 것이 문제가 되어, 총재가 재발방지를 서약했다. 어찌 산업은행뿐이겠는가? 당시 정치재벌의 손아귀에 장악된 시중은행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3.2.1.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 경축금'[편집]

자유당정권 하에서 가장 황당한 은행대출은, 아마도 1955년 실행된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 경축금 대출일 것이다. 그 해 봄 국무원 사무국에서는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 탄신경축중앙위원회를 창설하고 위원장에 이기붕을 추대했다.

위원회에서는 이승만의 팔순을 축하하는 경축금 3억환을 상납하기 위해, 전국극장연합회를 조직하고, 극장 입장객으로부터 10~20환씩 더 거둬 그 돈을 조성하기로 했다. 입장권이 200환 미만이면 10환, 200환 이상이면 20환을 더 걷는다는 것이니, 관객들의 호주머니를 강제로 턴 돈으로 자신들이 이승만에게 잘 보이겠다는 심보였다.

1955년 3월 26일에는 당시 상황을 기록한 ‘대한뉴스’에 따르면 "당일 아침부터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경무대에서 ‘80회 탄신’을 축하하러 온 방문객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외교사절로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내한한 미국의 밴플리트 장군을 비롯해 필리핀 공사 테일러 우드, 콜터 장군, 김홍일 주 자유중국 대사, 왕동원 자유중국 대사 등이 잇따라 예방했다.

이어 국내 3부 요인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찾아와 ‘80회 탄신’을 축하했다. 접견을 마친 이 대통령 부부는 승용차 편으로 서울운동장으로 출발했다. 이 곳에서는 대대적인 경축행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시민과 학생 수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숙명여고와 배재고 남녀 학생들이 고전무용과 매스게임을 벌이며 잔치 분위기를 띄웠다.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에 맞춰 ‘80’이란 숫자를 연출했고, 그 주변에 ‘만수무강’이란 글자를 만들었다. 군인들까지 대거 동원됐다. 서울운동장 하늘에는 전투기 여러 대가 공중 분열식을 벌였다. 오후에는 세종로에서 육군과 공군, 해병대 장병들이 생일을 축하하는 대규모 시가행진을 벌였다. 여기에는 국군의 날처럼 탱크부대까지 동원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지방에서는 탄신 경축 기념식수와 경축 경노잔치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시내에는 ‘탄신’을 축하하는 꽃마차까지 다녔다. 여성 궁사들을 동원해 기념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경축금을 전달하려면 당장 현금이 필요했고, 관객들에게 돈을 거두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한다. 그래서 4대 시중은행에서 먼저 대출을 받아 충당키로 한 것이었다. 위원회 이기붕 위원장을 채무자로 하고, 극장연합회 간부 임화수(이승만이 총애하던 정치깡패)를 비롯한 4명을 보증인으로 내세워, 4개 은행이 공동으로 3억환의 대출을 실행했다. 이 3억환은 이승만의 동상건립기금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그 후 1959년 4월까지는 전국의 극장에서 거둔 돈으로 원리금을 갚아나갔으나, 4월 혁명이 터지자, 원리금 상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채무자인 이기붕은 혁명 직후 자결했다. 따라서 4개 은행은 1960년 11월 24일 현재 652만5944환의 부실채권을 안게 됐다.

이에 은행들은 연체대출금 상환을 전국의 각 극장에 요청했으나, 채무자도 아닌 극장들이 이를 갚을 리 만무했다. 할 수 없이 은행들은 임화수 등 4명의 보증인에게 대출금상환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물론 승소했다. 그러나 임화수와 백운성 등 보증인들에게는 압류할 만한 변변한 재산이 없어, 연체대출금은 대부분 끝내 회수하지 못했다.

4. 자유당의 인물, 정치인[편집]

4.1. 자유당 출신 주요 정치인[16][17][편집]

자유당 출신 정치인

소속기간

이름

당 직위

비고

?

김영삼

자료 없음.

자유당 3대 국회의원
민주당(1955년) 5대 국회의원
민정당 6대 국회의원
신민당(1967년) 7.8.9.10대 국회의원
통일민주당 13대 국회의원
민주자유당 14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 14대 국회의원직 사퇴
14대 대한민국 대통령
신한국당 명예총재

?

이승만

내용없음

1대~3대 대통령

?

이기붕

내용없음

내용없음

?

강성태

중앙당 상무위원장

조선총독부 근무[18]
일제강점기의 관료.
자유당 소속 제4대 국회의원

?

유석형

자유당 마산시당 조직부장/
자유당 마산시당 감찰부장/
자유당 마산시당 고문

대한청년단 단장
국민회(한민회) 초대 조직부장
서북청년단, 독립촉성 청년단 등을 개편하여 대한청년단 결성.
1957년 국민회(國民會) 지부장

자료없음.

김종신

자유당 마산시당 위원장/
자유당 마산시당 기획위원

보도연맹 사업부장/국민회(國民會) 간부/민보단 고문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참여

조선독립촉진마산협의회 부의장

자유당 창당에 적극 참여/초대 자유당 마산시당 위원장

마산시의원/마산시장/제3대 국회의원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1963년 자유민주당[19] 지구당 위원장

민주공화당(1963년) 중앙상임위원/신문사 사장/방송사 사장

자료없음.

문삼찬

자유당 마산시단장 부위원장/
자유당 마산시당 기획위원

보도연맹 사업부장/국민회(國民會) 간부

김종신의 국민회(國民會) 사업부장직을 넘겨 받음

1948년 민족청년단 경남지부 마산시단장

마산의 대흥주조장(大興酒造場) 양조업자/백광소주 사장

1956년 자유당 마산시단장 부위원장

1955년 2월 결성된 마산문화인협의회(문협)의 2대 의장/3대 회장

1957년 마산체육회장

1960년 3.15 부정선거 시기 김종신과 같이 자유당 마산시당 기획위원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1963년 민우당(民友黨) 경남 제1지구당 위원장

최종적으로 민주공화당(1963년)에 합류

5. 역대 선거결과[편집]

6. 주요 참조 항목[편집]

7. 관련 문서[편집]

[1] 다만 정식약칭은 '한국당'이며 언론에서도 '자유당'이아닌 '한국당'이 주로 쓰인다.[2] [네이버 지식백과] 자유당 [自由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3] [네이버 지식백과] 명의를 도용한 최초의 여당, 자유당 (이승만과 제1공화국, 2007. 8. 13., 역사비평사)[4] 당시 신정동지회는 국민방위군 지도부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람들이 많아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은 상태였다.[5] 많은 자료에서 자유당은 국민회·대한부인회·대한청년단·대한노동조합총연맹·대한농민조합총연맹 등 ‘5대 사회단체’를 기간으로 해서 만들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신당 조직 과정을 자세히 보면 각 단체에서 결의해 대표를 파견한 일도 없었고, 각 단체의 대표가 참가한 것도 아니었다. 5개 단체는 자유당 창당의 기간단체가 아니었다. 이승만이 담화에서 말한 대로 개인적으로 참여했으나 각각의 단체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단체에서 나왔다는 의미의 대표라고 기록되기도 했다.[6] 이범석과 족청계는 나중에 장택상이 일제강점기 때 경기도지사를 지낸 일본인과 부산에서 만난걸 족청 부하들을 통해 입수하여 장택상을 친일파로 몰아 국무총리직에서 해임시켰다.[7] 이후 원내 자유당은 신정동지회 출신 국회의원들의 합동파(삼우장파), 공화구락부 출신 국회의원들의 잔류파로 분열되어 따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다. 이후 삼우장파는 원외 자유당에 입당하고, 잔류파는 완전히 와해되어 뿔뿔히 흩어진다.[8] 신익희는 유세 중 호남선을 타고 가다 뇌일혈로 급서했다.[9] 이승만의 경우엔 야당 후보인 조병옥이 급사하면서 사실상 자동 당선이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이미 팔순이 넘은 고령이었고, 건강상태도 그닥이었다. 때문에 이승만이 설사 당선된다 하더라도 임기를 다 채울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가 많았다. 이때문에 자유당에서도 유사시 대통력직을 승계할 부통령 선거에 총력전으로 나섰다.[10] 대구에서 개표가 시작되자마자 자유당에서조차 기겁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통령 지지율이 99%에 육박한 곳도 있었다고.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유권자 수보다 이승만, 이기붕의 표가 많았다고 한다. 결국 이승만은 70%, 이기붕은 그보다 조금 낮은 수치로 수정되어 발표되었다.[11] from 노무현 前 대통령 회고록 <성공과 좌절>[12] 두 사람은 각각 이승만과 이기붕의 부인이다.[13] 내무부 장관으로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했다[14] 당시 수복지구에는 과세를 못하게 법으로 되어있었다.[15] 당시 세금을 착취한 사령관은 수복지역의 군단장이었던 장도영이 었다.[16] (PDF)마산지역 토호세력의 뿌리 - Tistory(유석형, 김종신, 문삼찬 자료)[17] (민간인학살)학살과 지역사회의 지배구조-학살 거쳐 정치권력 장(유석형, 김종신, 문삼찬 자료)[18] 강성태 (1903년)[19]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7880&cid=46626&categoryId=46626[20] 당시에는 정당공천제가 완전히 확립되지 않아 이런 촌극이 가능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승만이 민 후보는 이들이 아닌 무소속 함태영 후보였다.